고난 받으심
pavqhma
고난 suffering. 고통 affliction, 불행 misfortune.||#1. 고전 헬라어 문헌||명사 파데마는 보다 덜 사용되기는 하지만, 파도스($3806)와 같이 파스코($3958)의 역사(歷史)의 과정을 밟아 왔다. 이 명사는 첫째로 어떤 사람에 닥치고 그 사람이 받아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명사는 대부분 malam partem에서 '불행, 고난'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명사는 마데마(배우는 것, 지식, 가르침)와 함께 배운 것과 다른 것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Xenoph.Cyr.,Ⅲ,1,17; Aristoph. Tes., 199 등). 이 명사는 또한 malam partem에서 주로 외부의 사건들로 야기된 육체적, 정신적 상태, 즉 '고난의 상태, 슬픈 심정, 슬픔' 등을 의미하며, 간혹 파도스의 동의어로 '감정'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70인역본에는 이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필로는 '질병'이란 뜻으로 사용했으며, 요세푸스도 마찬가지다. 요세푸스는 또한 우주의 '운행 과정' 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했다(Antiquities I.156).||#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파데마는 신약성경에서 16회 나오며, 히 2:9을 제외하고 언제나 복수로 사용되었다. '정욕, 충동'의 의미로는 드물게 나타나지만(갈 5:24; 롬 7:5), 주된 의미는 '고난'이다(롬 8:I8; 고후 1:5 - 고후 1:7; 빌 3:1O; 골 1:24; 딤후 5:11; 히 2:9 - 고후 2:10; 10:32; 벧전 1:11; 4:13; 5:1,9).||(a) 갈 5:24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라는 말은 골 3:5을 생각나게 한다. 이 단어는 성적 영역 뿐만 아니라 갈 5:19 - 갈 5:21에서 언급한 것들을 다 포괄한다. 본문은 기반을 살크스에 둔 모든 충동들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혔고, 따라서 죽어 없어진 것이다는 것을 단순히 강조하는 것이다.|롬 7:5 에서 파데마타는 기독교 이전 세대에 "육신에 있을 때"의 특징이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육에 속한 삶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일어나서 지체들 중에서 역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톤 하말티온("죄의")이란 말은 정욕의 성질을 묘사한다.||(b) 고후 1:5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고 말하고, 고후 1:6에서 독자들에게 같은 고난을 견디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들의 고난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고난은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이것은 은총이며(빌 1:29), 모든 사람에게 복(福)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빌 3:10 - 빌 3:11에서 그리스도의 파데마타는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이지만, 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열정적인 신비주의로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견디고 있는 실제적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연속이나, 모방 흑은 비유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길이 고난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참조:행 9:16; 행 14:22).|골 1:24에서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도의 고난 사이에 병행을 볼 수 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제자들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 없다는 것은 선하게 되어야 하는 부족한 것이 있다는 뜻이다. 고난은 가혹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롬 8:18은 고난이 장래의 영광과 비교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c) 히 2:9에서 죽음의 고난에 대해 언급한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같은 말의 반복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처음 언급을 강조하는 것이며, 단수형은 다나토스가 단수형인 것에 맞춘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복수형은 십자가에 달리신 전체 과정을 언급한다(히 2:10).|베드로전서에서 파데마타(파데인과 같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키는데, 벧전 1:11의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는 말에서 볼 수 있다. 벧전 5:1("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라")에서 저자가 자신을 증인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증거한다고 할 때에는 계속되는 말 "영광에 참여할 자"에서 보듯이 수난을 목격했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고난에 동참한다고 하는 견지에서 말하는 것이다.||* 초기 교회에서 익나티우스의 서머나인에게 보내는 서신 5.1은 파데마타를 그리스도의 수난을 나타내는데 사용했고, 클레멘트일서 2.l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내는 데 사용했으며, 아데나고라스의 탄원 28.4은 이 단어를 '운명'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참조: W.Michaelis; J.H.Thayer; B.Gart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