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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담대히 강론하다
parjrJhsiavzomai
터놓고 말하다, 공공연하게 말하다, 담대히 말하다.||#1. 일반 헬라어 용법||동사 팔레시아조마이는 팔레시아($3954)에서 유래했으며, '공공연하게 말하다, 담대하게 말하다'를 의미하며, 또한 '확신을 가지다'를 의미하기도 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팔레시아조마이는 70인역본에서 6회 나타난다. 시 94:1에서 하나님에 대해 사용되는 팔레시아조마이는 히브리어 야파(비추다)의 히필형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히브리어 동사는 하나님의 현현(theophany)과 연관되어 사용되었다.(참조: 신 33:2; 시 50:2; 시 80:2; 욥 10:3,22; H.Schlrer). 시 94편에서 하나님께서는 복수자로 나타나셔서 불경한 자들의 사악함을 갚으시라는 요청을 받으신다. 하나님의 이러한 현현(참조: 시 11:6, 70인역본)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연관성은 잠 1:20 이하에 나타난다.|욥 22:26에서 팔레시아조마이는 아녹(즐거워하다)의 힛파엘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시 12:5에서 팔레시아조마이는 '공공연하게(혹은 솔직히) 말하다'는 의미로, 잠 20:9에서 팔레시아조마이는 '담대히 말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팔레시아조마이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타난다.||(a) 사도행전에서 팔레시아조마이는 예수님의 팔레시아와 상응하여 사도들이나 제자들의 솔직하고 권위적인 증거에 대해 사용되었다.||(b) 행 9:27; 행 9:28; 행 14:3 등에서 팔레시아조마이는 거의 '선포하다', 즉 '공공연하게 말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 대상이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백성이든, 통치자들이든 상관하지 않는다.||(c)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이러한 팔레시아를 주시고, 사도들의 말을 기사와 표적으로 뒷받침하신 것이다(행 14:3). 아볼로의 실례에서 보는 것과 같이, 적대적인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공개적이고 유창한 연설을 하는 것을 뜻하는 팔레시아조마이는 은사인 것이다(행 18:25-행 18:26).||(d) 엡 6:20에서 팔레시아조마이는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말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살전 2:2에서도 팔레시아조마이는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라는 문구는 '우리 하나님 안에서 용기(곧 담대함)을 얻었다'고 번역할 수 있다(RSV).|(참조: Walter Baure; J.H.Thayer; H.-C.Hahn; H.Schlier; J.H.Thayer).
각색
pa'"
모든 all, 온갖, 각각의 모든 every.||파스는 호머 이래로 나오며, 히브리어 콜(모든)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다음의 의미를 가진다.||#1. 형용사로,||(a) 관사 없는 명사와 함께,|① '온갖, 모든' all, every, 마 3:10; 눅 4:37; 요 2:10 등.|② '어떤 것이든지 모든' any and every, '온갖 종류의' of every kind, 마 4:23; 마 9:35; 엡 1:3 등.|③ '전체의, 온' whole, 마 2:3; 롬 11:26; 행 2:36 등.||(b) 관사를 가진 명사들과 함께,|'(그) 모든' all, '(그) 전체' the whole, 마 8:32; 마 13:2; 롬 3:19; 골 1:6 등.||#2. 실명사 없이,||(a) 남성과 여성, 각각의 모든 자, 어떤 자든지 다.||(b) 중성으로는 '모든 것' everything, '그 어떤 것이든지 다'(anything) whatsoever, 고전 10:25; 엡 5:13; 요일 5:4; 복수로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3. 부정어와 함께,||'모든 자가 ~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 요 3:15 이하; 요 6:39; 요 12:46; 고전 1:29.|(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유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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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passover.||파스카는 히브리어 페사흐에 해당하는 아람어 파스하의 헬라어의 음역이다. 70인역본에서도 파스카($3957)를 사용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넘어가다'를 의미한다.||(a) '유월절 희생 제사[제물]', 애굽으로부터의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기념하여 이것을 드리는 것이 관습이었다.||(b) 또는 '유월절 어린 양', 즉 이스라엘 족속의 조상들이 애굽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멸망의 천사가 그 피를 보고 그들의 거처를 넘어가도록, 어린 양을 잡아 먹고 집 문설주에 그 피를 바르라고 하나님이 명하신 그 날을 기념하여, 이스라엘 족속이 관습적으로 니산월(유대력의 첫 달) 제 14일에 잡아서 먹었던 어린 양을(출 12이하; 민 9장; 신 16장) 가리킨다. 막 14:12; 눅 22:7, (출 12:21).|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가 죽임 당한 유월절 어린 양에 비유된다, 고전 5:7; "유월절 잡수실 것을", 마 26:17; 막 14:12, 막 14:14; 눅 22:11, 눅 22:15; 요 18:28(대하 30:17 이하).||(c) '유월절 만찬': "유월절을 예비하다", 마 26:19; 막 14:16; 눅 22:8, 눅 22:13; "유월절을 지키다", 유월절 식사를 거행하다, 마 26:18.||(d) '유월절 축제, 유월절', 니산월 14일부터 20일까지 계속된다: 마 26:2; 막 14:1; 눅 2:41; 눅 22:1; 요 2:13, 요 2:23; 요 6:4; 요 11:55; 요 12:1; 요 13:1; 요 18:39; 요 19:14; 행 12:4.|"유월절을 정하였으니", '그가 유월절을 제정하였다'(모세에 대해), 히 11:28, 유월절이 거행된다, 마 26:2.|(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고난을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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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당하다 suffer, 견디다 endure.||#1. 고전 헬라어 문헌||(a) 파스코는 호머 때부터 사용되었으며,|① 기본 의미는 선이든 악이든 간에 내 자신 밖에서 와서 나에게 영향을 주는 '어떤 것을 경험한다'를 뜻한다.|② 파스코는 원래 '해를 입다(당하다)'를 의미하였으나(Homer) 후에 '당하는 어떤 것을 경험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③ 따라서 '∼에 영향을 받다'(to be affected by)라는 의미도 함축한다. 그러므로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는 추가 단어들을 통하여 표현해야 했다. 예를 들어 카코스 파스케인(악한 상황에 있다, Homer), 유 파스케인(좋은 상황에 있다, Sophocles). 그러나 파스코 자체가 부정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에 '좋은'과 같이 그 반대 상황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을 때 외에는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게 되었다. 따라서 '영향을 받다'는 개념은 고난의 의미로 바꾸어졌다. 호머는 '죽다'를 뜻하는 말로도 사용했다.||(b) 파스코는 상당히 오래된 법정 용법으로, '형벌을 당하다, 벌을 받다'를 의미하며, 벌이나 중형을 나타낸다.||(c) 대부분의 경우에, 파스코는 '당하다, 겪다, 경험하다'라는 의미에서, 불행, 치명적 타격들, 사람들이나 신들의 냉대를 당하거나 겪는 것을 의미한다. 병이 든 경우에, 그 의미는 병든 것보다 병으로 고생하는 것, 병으로부터 고통을 겪는 것을 의미한다. 그 강조를 언제나 고통스런 느낌보다 재앙에 대한 경험에 두는 것이다. 파스코가 감정을 나타낼 때 고통보다는 분위기에 더 관련된다. 따라서 '당하다, 겪다'보다는 '∼기분이다, ∼에 영향(혹은 감동)을 받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 어군은 고통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이것에 대해서 많은 답변이 시도되었다.||(d) 스토아 철학자들은 고난의 개념을 보편적이며 우주론적인 의미로 확대시켰다. 그들에 의하면 비신적 존재의 생명은 모두 고난을 받는다. 즉 외부적 영향과 정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서들은 참된 지식과 덕의 실행을 방해하므로 정욕(파데)은 '평정함 dispassionateness'(아파데이아)의 이상이 이루어질수 있게 하기 위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e) 신비주의 문헌에는 창조된 모든 것을 고난의 대상이며 하늘의 영역에 속한 가장 숭고한 존재들은 알려지지 않은 최후의 존재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신비론자와 만나는데 필요한 조건은 자아가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방은 이성에 있어서는 무아경(ecstacy)의 순간에 발생한다. 그러나 죽음 후에만 영원히 향유될 것이다(Corp. Herm.1,l5; l.l22).||#2. 70인역본의 용법||파스코는 70인역본에서 21회 나오며, 3회 상당하는 히브리어를 번역한다. 파스코는 겔 16:5; 슥 11:5에서 하말(동정심을 갖다)의 역어로, 암 6:6에서 할라의 니팔(괴롭힘을 받다, 상함을 입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이 동사는 외경에서 더 많이 나타나는데 이스라엘의 적들이 받는 고통이든지, 이스라엘의 고난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후자는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연단을 위한 것이라면, 전자는 심판이다.|마카베오이서와 마카베오사서에서 파스코는 고통을 당하는 순교를 나타내는 전문용어가 아니며, 심지어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마카베오이서 7:18, 32에서는 백성들의 고통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일 뿐이며, 마카베오사서 14:9에서의 의미는 '스스로 경험하다, 겪다'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에 파스코는 '(순교자로서) 고난을 당하다' = '죽다'라는 의미로 발전하였다.||#3. 신약성경의 용법||파스코는 신약성경에서 42회 사용되었으며, 구약성경의 인용문들이나 요한의 기록에서 요한계시록에는 한번 나올 뿐이다. 일반 서신들 중에는 베드로전서에만 나온다. 바울은 이 동사를 드물게 사용한다. 그러나 공관복음서. 사도행전, 히브리서에는 매우 자주 나온다.||1. 일반적인 의미. 파스코와 그의 파생어들이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몇 개의 구절들이 있다. 곧 갈 3:4; 눅 13:2; 행 28:5에서는 '경험하다'는 의미로 일률적으로 번역될 수 있다.|마 27:19에서 빌라도의 아내의 말에 나타난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여기서 우리가 파스코를 '형벌을 받는다'는 의미를 취한다면, 빌라도의 아내는 아마도 그녀가 그녀의 남편이 무죄한 자에게 행한 악행에 대하여 벌을 받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꿈에 번민과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고 할 수도 있다.|막 5:26에서 혈루증에 걸린 여인에 대하여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아마도 오로지 아프고 귀찮은 처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겪어야 하는 잡다한 치료 방법과 잘못된 치료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의미는 그녀가 이미 많은 의사들에게 많은 치료를 받았다는 것이다|고전 12:26의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는 구절에서 파스코는 '해를 입는다, 불리하게 영향을 받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대조를 이루는 독사제타이(영광을 얻으면)가 밝혀 준다.||2. 그리스도의 고난.|(a) 파스코는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수난에 관련하여 두 가지 용법을 가지고 있다.|① 첫째로 파스코는 독립적으로(부정사로) 사용되어 분명히 '죽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이 명백하게 언급되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고난은 다른 사항들, 예를 들어 부활(눅 24:46; 행 3:18; 행 17:3), 영광에 들어가심(눅 24:26) 또는 스스로 살아계심을 나타내심(행 1:3)과 함께 나오는 구절들에서 특히 독립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구절들에서 예수님의 고난은 히브리서와 베드로전서에서와 같이 죽음 그자체이다.|② 둘째로 파스코는 사용되는 구절들에서(막 8:3; 마 16:21; 눅 9:22; 막 9:12; 마 17:12; 눅 17:25), 강조점이 보다 수동적인 것이다(예: 마 17:12) . 여기서 폴라 파데인(많은 고난을 받는 것)이 주요 개념은 아니다(막 8:31; 눅 9:22). 이 문구의 목적은 아마 현재 벌어지는 사건에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보이려는 것이다. 임박한 그리스도의 고난이 처음으로 언급되는 곳에서 폴라 파데인(많은 고난을 받고)은 대제사장에게 재판 받기에 앞서 겪는 고난들을 언급할 뿐이며 그의 죽음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눅 17:25에서 처음의 두 가지 요소들의 사용은 "고난과 버림을 받으심이" 하나의 고정된 구절임을 암시한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운명은 폴라 파데인(많은 고난을 받는 것)이며,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포도키마스데나이(버린바 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태는 폴다 파데인의 범위를 신중하게 확대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죽으심까지 적용시키고 포함시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살아나야 하신다"(마 16:21).|비록 헬라어 번역본이 사 53:4,11에서 파스코를 사용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이 구절들이 신약성경의 구절들의 배후에 놓여 있어서 '담당하거나 견디다'는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이사야 3장은 분명히 대속적 고난 및 죽음이라는 개념을 나타내며, 그렇다면 예수님은 파데인(고난)의 대리적 주체이며, 그의 폴라 파데인(많은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임무 수행을 위한 순종적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리고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수난이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인 필연성에 기인한 것이며(마 16:21; 눅 17:25; 눅 24:26; 행 17:3),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것(막 9:l2; 눅 24:26; 행 3:18)이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예수님이 당한 고난의 유일성은 파도()라는 용어를 선지자들의 박해(마 5:12)나, 세례(침례) 요한의 경우(막 9:12)나, 자기 제자들의 고난(막 8:34 이하)에는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고난에만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b) 히브리서와 베드로전서에서 파데인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대분의 용법과 같이 '죽는 것'을 의미한다.|① 히브리서는 파데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타내는데, 그 의미는 '죽는 것'이다. 히 13:12에서 기자는 구약의 속죄제와 같이(레 16:2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예수님의 죽음을 분명히 말한다. 히 2:18에서는 히 2:9의 언명으로 보아 이 사실이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5:7에서는 물론 겟세마네 동산을 말한 것이지만, 히 5:8은 여기서 더나아가 골고다에까지 말하는 것이다(참조: 빌 2:8; 롬 5:19). 히 9:26에서도 문맥상("단번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브리서는 결코 '우리를 위하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나 이런 뜻을 포함하고 있다. 히브리서의 파데인은 죽음(히 2:9; 히 2:14,등), 피(히 9:12; 히 9:14), 그리고 십자가(히 12:2)와 관련되어 있다.|② 베드로전서도 히브리서에서와 마찬가지의 의미를 나타낸다. 벧전 2:21; 벧전 2:23에서 예수님의 파스데인은 그의 죽음이다: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4:1에서도 십자가에 달리심은 핵심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베드로전서는 이 죽음이 '죄를 인하여'(벧전 3:18), '우리를 위하여'(벧전 2:21)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이 서신은 죽음의 유일회적 성격(벧전 3:18), 죽음과 부활의 관계(참조: 벧전 3:21 이하; 벧전 3:18과 벧전 4:1의 사이), 고난과 영광의 연결(벧전 1:11)을 강조하며,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파스데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파스데인의 본보기로서의 성격을 크게 강조한다(벧전 2:21).||3. 그리스도인들의 고난.|(a) 사도행전. 신약성경 기자들은 예수님 자신과는 다르게 파데인을 신자들이 받는 고난을 표현하는 데도 사용하고 있다. 행 9:16에서는 행 9:15에서 말하는 임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것이라면 일반적인 의미의 고난을 뜻하며, 그 임무가 이방인들 "앞에서" 전하는 것이라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고난을 뜻한다. 오직 고난받는 것이 '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행 9:16에서 "받아야 할" 것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파데인은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사도를 선택된 그릇으로 확인해주는 것등이다(참조: 고후 11:23 이하).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은 적극적인 성격을 말해 준다.||(b) 바울의 서신. 바울은 보통 파스케인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독자들에 관련시켜 사용한다. 딤후 2:12에 보면 그는 자기의 고귀한 직분을 수행하는 중에 고난을 당하지만, 그러나 이 고난은 자신의 사역을 증진시킨다(딤후 1:8; 딤후 2:3).|살전 2:14에서만 바울은 수동태를 사용한다. 빌 1:29은 빌 1:30의 관점에서 보면 능동적 소리를 울린다: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안에서 듣는 바니라". 여기서 파스케인은 "그(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파스케인일 경우에는 전체 공동체체의 특권이다. 이것은 물론 구속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대상을 그리스도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마데마타(고난)는 그리스도의 마데마타(고난)로 간주되며(고후 1:5 이하), 또한 종말론적인 목적을 가진다(참조: 살후 1:5과 롬 8:17에서의 영광과의 연결).||(c) 베드르전서.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의 파스케인의 모범적인 성격을 더욱 강조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파스케인의 경우에는 '죽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통치자들이나 법정에서 부당하게 받는 형벌들과, 혹시 피난, 위협, 모욕, 차별대우,등을 포괄한다(참조: 벧전 4:16). 이 예들의 요점은 파스케인의 부당성에 있다.|벧전 3:14에서 부당성은 의무 이행에도 불구하고 처벌당할 뿐만 아니라, 바른 일을 하는데도 처벌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만일 의무를 다하는데도 처벌을 받는다면, 여기에 사상은 옳은 일을 행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는 사상이다. 고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반드시 참여하지는 않지만, 그의 자취를 따라가고 있으며(벧전 2:21), 또한 종말론적 지향을 나타낸다(벧전1:6-벧전 1:7; 벧전 5:1O). 벧전 4:1에서는 세례(침례)를 통한 거듭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참조: 벧전 3:21).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신 것과 같이 세례(침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그치고,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만 살아 가는 것이다(롬 6:11). 이것은 세례(침례)를 나타내기 위해 전용된 유일한 용례이며, 이것은 파데인을 '죽다'는 의미로만 사용할 때와 로마서 6장의 교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에 대해 다음 구성도 참고하기 바랍니다.||*【그리스도의 백성의 고난. (a) 고난과 교제: 고난의 사상은 코이노니아($2842: 친교)에 대한 신약성경의 개념과 분리 될 수 없다.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무장한 사람은 육체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벧전 4:1; 참조: 고후 11:23 이하).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는 것(벧전 4:16)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여(벧전 4:13; 빌3:10)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쉼파스코멘, 롬 8:17)을 의미한다. 진실로 이것이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 간에 존재하는 신비한 연합이므로 기독교인들의 고난은 하나로 또한 같은 몸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고후 1:5). 여러 교회들이 공통적인 고난의 끈으로 묶음으로써 연합되며(살전 2:14; 벧전 5:9). 또한 같은 원리가 개교회에도 적용된다.|만일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단순한 동정심뿐만 아니라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연민(쉼파스코)을 나타내려면 믿음에 있어서 참된 일치가 요구되는 것이다(고전 12:26; 히 10:34). 고난의 교제에 대한 더 중요한 예는 사도와 지역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고난의 교제(고후 1:6 이하), 또는 개별 제자와 사도 사이에 존재하는 고난의 교제이다(딤후 1:8; 딤후 2:21).|가장 큰 본은 예수 그리스도시니(벧전 2:21),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의 증인'으로서 사도 자신을 위한 일 뿐만 아니라(벧전 5:1; 참조: Ignatrus, 롬 6:3) 사도를 따르는 자들이나(딤후 3:l0 이하) 또는 자신을 본받으라는 부름을 받은 자들에게까지 본이 되신다(고전 11:1). 선지자들이 부당한 고난(카코파데이아, 약 5:1O; 광야의 세대에 의하여 보여진 악한 본과 대조, 광야의 세대는 악을 즐겼다, 고전 11:6)을 견디는 선한 본이 되었던 것과 똑같이 이제 사도들은 선한 본을 보인다. 그들의 고난은 그들의 사역의 일부분이었고, 교회의 참된 종들을 확인하는데에 기여하였다(참조: 고후 11:23 이하). 사도 바울의 "교회를 위한 고난"(골 1:24)은 성격상으로 구속의 고난이 아니라 선교의 고난이다.|그러나 모든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과의 교제는 아니다. 이 범주 안에 있는 고난에 부응하면, 사도와 교회는 자신들의 직분을 위한, 또 기독교인으로서의 소명을 위한 고난을 받아야 한다. 곧 그들은 기독교인들로서(벧전 4:16) 애매히(벧전 2:19) 고난을 받아야 했다. 마치 악을 행한 자나 살인자로(벧전 4:15; 눅 23:32 이하), 즉 당연하게(눅 23:4) 고난을 받아야 할 자로서 간주되지는 않을지라도 악을 행한 자와 같이(벧전 2:12) 고난을 받았다(카코파데오, 딤후 2:9).|이러한 의미에서 참된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고난(벧전 4:19),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고난(행 9:16; 빌 1:29), "복음을 위한" 고난(딤후 1:8), "하나님을 생각하는" 고난(벧전 2:19), "의를 위한" 고난(벧전 3:14),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소망 중에 기다리는 고난(살후 1:15)으로 칭해진다.||(b) 고난의 종말론적 측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위대한 종결, 즉 완전히 이름에 대한 수단이 되는 것(히 2:10)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백성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벧전 5:9).|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는 본질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영원한 영광"의 소망과 비교할 때 기독교인이 현재 받는 고난의 시기는 "잠간"에 불과하다(벧전 5:10). 롬 8:18에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들은 미래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고난까지도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 가게 하신 이"(벧전 5:1O)께서 주시는 귀한 은사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빌 1:29; 벧전 2:19).|요한복음도 그리스도의 모든 지상 생애를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본다. 곧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영광스러운 생애이므로 어떠한 파스코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일한 방법으로 바울은 빌 3:10에서 자신의 새생명의 목적을 (첫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다음에는) 주님의 고난에 참예함을 체험적으로 알게되는 것으로 말한다.|신약성경에서는 고난과 인내(살후 1:4 이하; 히 10:32) 뿐만 아니라 고난과 영광(롬 8:17; 벧전 5:1; 벧전 5:10)까지도 거듭 거듭 동일하게 언급된다. 바울은 고린도인들과 자기와의 교제 관계를 고난과 위로의 관계로 생각한다(고후 1:7). 실로 바울은 종말론적 영광으로 전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난의 개념을 일시적인 의미로 받아들였고 모든 피조물을 망라하는데까지 확대하였다(롬 8:18 이하). 곧 인간 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까지 영광스러운 목표(텔로스)에 이르는 구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고난의 종결을 기다리지 않고 고난의 목표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고통이 가득차고 죽을 운명으로 지워진 생명에 단순하게 위로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 굴욕과 모욕, 그리고 사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반격인 것이다'(J.Moltmann, TheoIogy of Hope, l967 21)】|(참조: W.Michaelis; J.H.Thayer; B.Gartner).
바다라
Pavtara
바다라 patara(지)||바다라는 고대 리시아(Lycia)의 연안 도시이다. 행 21:1에 따르면 바울은 이 곳에서 페니키아(Phoenicia, 한글개역성경: 베니게)로 가는 배를 탔다. 그곳의 훌륭한 항구로 인해 많은 해안의 상선들이 바다라에서 정박하였기 때문에, 바다라는 내륙의 도시로 들어가는 중요하고 부유한 항구 도시가 되었다. 그 곳에서는 일찍이 B.C. 440년에 자율적인 주화가 주조되었다; B.C. 3세기와 4세기 동안에는 그 화폐의 주조가 중단되었지만, 바다라가 리시아 연맹에 가입한 B.C. 168년 다시 주조가 시작되었다. 애굽왕 톨레미 필라델푸스(Ptolemy Philadelphus)는 그 도시를 확장시키고 그의 아내를 기념하여 그 도시의 이름을 아르시노에(Arsinoe)로 바꾸었다.|그 도시는 상업의 중심지로서 뿐만 아니라 특히 일년 중 오직 겨울철 여섯달 동안만 말해진다고하는 유명한 아폴로의 신탁으로 유명하다. 폐허들 가운데서 아직도 바닥에 있는 좌석으로 인도하는 나선식 계단이 있는 깊은 구덩이를 볼 수 있다; 그 구덩이가 신탁의 장소라고 생각된다.|초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바다라는 단지 작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곳은 동쪽의 선원들의 수호 성인인 니콜라스(Nicholas) 감독의 출생지였다. 비록 바다라에서 태어났지만, 니콜라스는 근처의 리시아의 한 도시인 무라(Myra)의 감독이고 성자였으며 그 곳에 매장되었다고 한다.|게레미스(Gelemish)는 그 유적의 현대의 명칭이다. 고대 도시의 성벽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으며 사원과 성채와 다른 공공 건물들의 기초가 보인다. 그 옛터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비문이 새겨진 개선문이다: '바다라는 리시아 국가의 수도이다.' 그 도시의 성벽 밖에서 많은 석관들(sarcophagi)을 보게 되지만, 그러나 항구는 오래 전에 모래로 메워져서 쓸모없는 습지로 변했다. 또 하나의 주목할 것은 두 개의 컵이 더해진 4는 미슈나(Mishna : Pecachim x.1)에 따르면 애굽으로부터의 이스라엘의 해방에 대해 출 6:6, 출 6:7에 사용된 4개의 단어를 상징한다. 애굽에서의 유월절 때처럼 서둘러 먹는 대신에 그것은 이스라엘의 자유의 표시로 이러한 식사 때에 기대거나 기대어 눕는 것이 관습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ISBE).
쳐 죽이다
patavssw
때리다, 치다 strike·hi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파탓소(Homer 이래로)는 '시끄럽게 노크하다, 때리다, 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파탓소는 70인역본에서 400회 이상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나타(때리다, 치다, 살해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파탓소는 '치다, 때리다'는 의미와 하나님의 교육적, 사법적, 형벌적 '치심'과 애굽의 재앙, 하나님에 의한 멸망을 묘사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파탓소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행 7:24(출 12:12 인용)에서 파탓소는 '쳐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이니라]".||(b) 마 26:31; 막 14:27(슥 13:7; 사 53:3이하)에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목자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치심을 당했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감당하셨다. 여기서도 죽음을 함축한다.||(c) 마 26:51과 눅 22:49; 눅 22:50에서 예수님이 체포당할 때, 익명의 제자가 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 떨어뜨렸다.||(d) 행12장에서 파탓소는 두 번 주의 천사가 친 것을 묘사한다. 행 12:7에서 천사가 감옥에 있는 베드로를 쳐 깨운 것이다. 행12:23에서 천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헤롯 왕을 쳐서 죽인 것이다.||(e) 계 11:6에서 파탓소는 재앙으로 '치는 것'을 묘사한다: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f) 계 19:15에서 파탓소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그것으로 열방을 치실 것이다. 이 표현은 사 11:2에서 유래한 것이다.|(참조: E.M.Embry; See Semann).
밟다
patevw
걷다, 밟다 tread, 짓밟다 to tread o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파테오와 그 합성어들은 헬라어에서 발걸음을 의미한다. 파테오(Pindar 전에는 사용되지 않음)는||(a) 자동사로는 '가다, 걷다, 행하다'를 의미하며,|(b) 타동사로는 '(어떤 것)을 밟다, ~에 발을 놓다, 짓밟다, 유린하다'을 의미한다.|(c) 비유적 의미로는 종종 '멸시하여 대하다, 학대하다, 약탈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파테오는 70인역본에서 8개의 히브리어의 역어로, 17회 나온다. 신11:24에서 땅을 차지하기 위해 밟는 것, 삿9:27에서 포도주를 짓밟는 것(느13:15; 사16:10), 욥22:15; 길이나 땅을 밟고 지나가는 것(사42:16), 애1:15에서 유다가 유린을 당하는 것, 사42:5에서 사람들이 땅위에 행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파테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는데, 심판과 능력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능력의 경우는 눅10:19에서 뱀과 전갈을 밟을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은 칠십인에 대해, 그리고 심판의 경우는 눅21:24; 계11:2에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짓밟고 약탈하는 침략군과 이방인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계14:20; 계19:15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포도주를 짓밟는 것에 비유한다.*

pathvr
아버지 father.||#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명사 파테르(Homer 이래)는 인도 유럽어에서 유래된 파테르(pater) 즉 아버지는 고전 헬라어에서 실제 아버지나(Homer) 가계의 족장(Josephus) 또는 일반적으로 조상들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한다(Homer).|이밖에도 비유적 의미로 이 단어는 '선구자, 창시자, 존경받는 사람, 노인, 선생'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지적이나 영적인 부권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b) 하나님은 아버지로, 즉 모든 존재의 창조자로 부르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① 고대 동방과 고대 그리스 로마의 종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아이를 낳는 원초적인 행동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연적, 육체적인 후예라는 신화적인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우가릿의 신 엘(El)은 '인류의 아버지'라고 불리웠고, 바벨로니아의 달의 신 신(Sin)은 '신과 인간의 아버지'로 불리웠다.|② 헬라의 제우스는(호머 시대부터) 모든 신적 존재와 모든 인간 존재의 아버지이며, 우주의 신이었다. 애굽에서 바로는 특별히 육체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졌다. 아버지란 이름은 무엇보다도 복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나타내지만, 동시에 그의 자비로운 사랑과 선과 돌봄을 표현하기도 한다. 인간의 역할에 대한 적절한 태도는 두가지 태도이다. 한편으로는 '그 자신의 무력함과 신에 대한 완전한 의존을 깨닫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신에 대한 어린애 같은 신뢰와 사랑의 태도'이다(G.Mensching, RGG3 Ⅵ1233).||(c) ① 플라톤은 만물의 근원이 아버지라는 사상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창조 신화에서 우주론적 형태의 아버지 개념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창조자시며, 아버지시다.|② 스토아 학파의 가르침에 의하면,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권위는 우주에 충만해 있다: 그는 그의 자식이며 그에 관련되어 있는 인간의 '창조주이며 아버지이며, 유지자'이다. 스토아 사상에는 제우스와 헬라의 성스러운 혼인 신화를 이용하여 세상을 신들이 낳은 것으로 그 기원을 생각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신의 아들로서의 자격을 부여하고 인간이 신의 로고스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단지 현명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단지 좋은 사람들만의 아버지라는 의미가 다소간 있는 것이다.|③ 고대의 신비교파에서는 초신자의 중생과 성화(聖化)가 신에 의해 태어나는 행동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신은 기도에서 "아버지"로 불리운다.|④ 영지주의자들도 역시 최고신을 아버지나 첫번째 아버지로 묘사한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는 모두 사라진다. 인간의 몸 안에 들어앉게 된 하나님으로부터 퍼져나오는 섬광은 첫번째 아버지에게는 바닷물에 대한 물 한방울과 같은 것이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파테르는 70인역본에서 거의 전적으로(1,180회)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종교적 의미로는 아주 드물게(15회) 사용되었다.||(a) 파테르의 일반적인 용법.|① 육체적인 부권은 창조주의 선물이며 명령이다(창 1:28).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로서(참조: 창 27), 아버지는 그의 가족과 집(참조: 수 24:15b)의 우두머리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존경받아야 할 권위자인 것이다(출 20:12; 출 21:15, 출 21:17; 잠 23:22). 그의 가족을 먹이고 보호하고 교육시키는 것이 그의 의무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는 가족의 제사장이며(출 12:3이하) 선생이다(출 12:26이하; 출 13:14이하; 신 6:7, 신 6:20이하; 신 32:7, 신 32:46; 사 38:19). 그는 그의 가족의 생활을 언약에 따르도록 하는 책임이 있었으며, 자식들이 종교적인 가르침을 받도록 해야 했다. 종들까지도 주인을 "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다(왕하 5:13).|② 파테르는 이스라엘의 초기 세대들에 대해 사용되었으며(시 22:4; 시 106:7), 그 이전 시대의 특출한 하나님의 사람들(집회서 44:1이하)과, 특히 하나님의 언약을 전하고 중보하던 자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은 그렇게 불리웠다(수 24:3; 대상 29:18).|③ 파테르는 제사장(삿 17:10; 삿 18:19)과 선지자(왕하 6:21; 왕하 13:14)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왕하 2:12에서 선지자의 제자가 그렇게 부를 때도 또한 영적인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란 칭호가 흔히 존경받는 서기관을 일컫던 랍비적 유대주의에서(SBⅠ 918f.)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는 토라의 선생과 학생 사이의 관계에 때로 적용되고 있다(SBⅢ304이하).||(b) 파테르의 종교적 용법|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아버지로 언급되어 있다. 지상 아버지와 비교를 제외하고는(시 103:13; 잠 3:12; 참조: 신 1:31; 신 8:5), 아버지라는 명칭은 하나님에 대하여 단지 15회 사용되었는데, 13회는 통칭으로, 2회는 기도로 나타난다.|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묘사한 것은 오직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신 32:6; 사 63:16; 2회; 사 64:8; 렘 31:9; 말 1:6; 말 2:10), 혹은 이스라엘왕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삼하 7:14과 병행구 대상 17:13; 대상 22:10; 대상 28:6; 시 89:26; 참조 시 2:7). 그 단어는 결코 다른 개인이나(시 68:5) 혹은 일반적인 인류와의 관계를 나타내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와 이스라엘의 이웃 나라들이 주장한 하나님의 부권에 관한 견해 사이의 차이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부권은 생물학적, 혹은 신화학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구원 신학적인 의미에서 이해된다는 말이다.|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은 자연적 상태나 특성보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구속의 기적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참조: 출 4:22; 신 14:1이하; 호 11:1이하).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연관되어 창조와 출생의 언어가 사용된 곳에서 조차 그 뜻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이미 존재한 백성에 대한 역사적 선택과 구속의 행동을 나타냅니다.|말하자면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다(사 63:16; 사 64:8). 선택하시고 구속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이 아버지로 묘사될 때, 그의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사랑(렘 31:9, 렘 31:20; 참조: 호 11:8)과 존경 및 순종에 관한 요구(신 32:5이하; 렘 3:4이하, 렘 3:19; 말 1:6)등 두 가지가 다 표현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됨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충실해야 할 특별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말 2:10). 만일 한 개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긴다면 그것은 그가 백성의 일원이라는 신분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것에 상응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인 것이다(시 68:5; 시 68:4-시 68:10의 문맥에서).|호격 "내 아버지"는 렘 3:4, 렘 3:19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여기에서 의미심장하게, 개인의 부르는 것이 아니고 선택된 백성의 기도로 사용된 것이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파테르는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인 의미로 157회, 종교적 의미로 245회 사용되었다.||1. 파테르의 일반 문자적 의미.|(a) 파테르는 아버지를 나타낸다: 마 2:22; 마 4:21이하; 마 8:21; 눅 1:17; 요 4:53; 행 7:14; 고전 5:1 등; "육체의 아버지"는 육체적 인간의 아버지들, 낳은 아버지를 가리킨다, 히 12:9.|엡 6:4에서 아버지는 적어도 할아버지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 명시된 가족의 규율은 아버지와 어머니께 순종하라는 계명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것들은 또한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인간적이고 영적인 책임을 가리키고 있다(엡 6:1-엡 6:4; 골 3:20이하). 그리고 복수형은 양친 모두를 가리킨다.||(b) 파테르는 '보다 먼 조상', 곧, '종족이나 부족의 시조, 한 민족의 조상, 선조'를 나타낸다. 아브라함(마 3:9; 눅 1:73; 눅 16:24; 요 8:39; 행 7:2; 롬 4:1Rec., 롬 4:17이하), 이삭(롬 9:10; 야곱, 요 4:12), 다윗(막 11:10; 눅 1:32).|복수, '선조들', '조상들'(마 23:30, 마 23:32; 눅 6:23, 눅 6:26; 눅 11:47이하; 요 4:20; 요 6:31; 행 3:13, 행 3:25; 고전 10:1).|'종족의 시조들'(요 7:22; 롬 9:5; 롬 11:28).||(c) '나이가 더 앞선 자', '연장자'와 같은 의미: 요일 2:13이하.||2. 파테르의 비유적 용법.|(a) 파테르는 어떤 것의 원조이며 그것을 후세에 전해 물리는 자: "할례자의 조상"(롬 4:12), 자기 자신과 동일한 정신에 의해 생기를 부여받은 어떤 동족이나 사회의 원조: 예컨대 "믿는 모든 자의 조상", 롬 4:11, 참조: 롬 4:12, 롬 4:16(마카베오일서 2:54) 자신의 정신을 타인들에게 주입시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자: 그리스도(요 8:38), 마귀의 자식들(요 8:41이하; 요 8:44)에 대해 사용되었다.||(b) 파테르는 아버지의 위치에 서서 아버지다운 방식으로 남을 보살피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를 나타낸다.||(c) 파테르는 하나의 명예로운 칭호로서(참조: Sophocles) 다음과 같은 인물들에게 적용되었다.|① '교사들', 즉 생도들이 받은 지식과 훈련의 출처가 그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마 23:9).|② '공회의 회원들', 남보다 뛰어난 지혜와 경험을 바탕으로 남들의 이해 관계를 보살피는 것이 그들의 특권이었다(행 7:2; 행 22:1).||3. 아버지로서 하나님.|(a) "빛들의 [아버지]", 별들의, 하늘 발광체들의 아버지, 이는 그가 그것들의 창조자, 유지자, 통치자이기 때문이다(약 1:17).||(b) '천사들이든 인간들이든, 모든 이성적, 지성적 존재들의 아버지', 왜냐하면 그가 그들의 창조자, 보존자, 수호자, 보호자이기 때문이다(엡 3:14이하). "영의 [아버지]", 영적 존재들의 아버지(히 12:9), 그리고 동일한 이유로,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마 6:4, 마 6:8, 마 6:15; 마 24:36; 눅 6:36; 눅 11:2; 눅 12:30, 눅 12:32; 요 4:21, 요 4:23; 약 3:9), "하늘에 계신 아버지"(마 5:16, 마 5:45, 마 5:48; 마 6:1, 마 6:9; 마 7:11, 마 7:21; 마 18:14; 막 11:25, 막 11:26; 눅 11:13), "천부", 하늘의 아버지(마 6:14, 마 6:26, 마 6:32; 마 15:13).||(c)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 즉 이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특별히 가깝고 친밀한 관계에로 높여졌으며 그를 이제는 더 이상 죄인들의 준엄한 심판자로서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과 화목한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존경한다. 신약성경의 서신들에 일반적인 이 개념은 롬 8:15; 갈 4:6에서 특별히 밝게 빛난다. 이 용어에 대한 요한의 용법에서는 이 용어가, 복음 안에서 역사하는 그의 성령의 권능에 의해 그들을 거룩한 생명에로 새로이 낳은 자라는 추가적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독립적으로(고후 6:18; 엡 2:18; 요일 2:1, 요일 2:14[요일 2:13], 요일 2:16; 요일 3:1), "하나님…곧 만유의 아버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엡 4:6), "자비의 아버지"(고후 1:3).||(d)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즉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과 친밀성의 가장 가까운 끈으로 자신과 결합시켰으며 자기의 목적들을 그에게 깊이 알리셨고, 사람들 가운데서 구원 계획을 설명하고 수행하도록 그를 지정하셨으며(요한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또한 그로하여금 자신의 신성을 공유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 인물에 의해 그와 같이 불린다.|① 예수님 자신에 의해(마 11:25-마 11:27; 눅 10:21이하; 요 5:20-요 5:23; 요 5:26, 요 5:36이하; 요 10:15; 요 10:30), "내 아버지"(마 11:27; 마 25:34; 마 26:53; 눅 10:22; 요 5:17; 요 8:19; 요 8:49; 요 10:18; 요 10:32;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자주; 계 2:28[계 2:27]; 계 3:5; 요 3:21 등).|② 사도들에 의해(롬 15:6; 고후 1:3; 고후 11:31; 엡 1:3; 엡 3:14Rec.; 골 1:3; 히 1:5; 벧전 1:3; 계 1:6).|(참조: Walter Bauer; J.H.Thayer; O.Hofius; G.Schrenk).
밧모
Pavtmo"
밧모 patmos(지)||남부 소아시아의 서쪽, 그리스 에게해(Greek Archipelago)의 스포라데스(Sporades)군도 중에 있는 50 평방 마일의 에게해(Aegean)의 섬이며, 고대 밀레토스(Miletus) 유적의 맞은 편에 위치한다.|이 섬은 성경에서 유일하게 계 1:9에서만 언급된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그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 인해, 아마도 A.D. 95년 도미디안(Domitian)의 통치 때에 그 곳으로 유배당한 것에 대해 말한다. 밧모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그의 환상의 무대이다. 배로 이 섬을 지나갈 때, 드문드문 자리잡고 있는 유배지였던, 반짝이는 하얀 바위들이 있는 작은 섬들을 광대한 에게해 일대에서 볼 수 있으며, 그 신비주의자의 환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게 된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계 21:1)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계 4:3);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계 4:2); "번개와 음성과 뇌성"(계 4:5);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계 4:6). 바다가 그의 일생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고 그는 "바다가 다시 있지 않을"때를 갈망하였다(계 21:1). 밧모는 성경의 사건들과 성경과 관련된 경험들을 해석하는데 도움를 주는 지리학적 배경의 훌륭한 예이다. 지금 성 요한의 수도원은 밧모섬의 남쪽의 반을 소유하고 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BD).
아비를 치는 자
patralwv/a"
부친 살해자 parricid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파트랄로아스(아티카어; Arstph., Plat., Dem.)는 '부친 살해자' a parricide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파트랄로아스는 신약성경에서 딤전 1:9에 한번 '부친 살해자'를 의미한다: "알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파트리아
patriav
가족 family, 씨족 cla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파트리아(Hdt. 이래)는 파테르($3962: 아버지)에서 유래했으며,||(a) '가족'이나 '가문'을 의미하며, 특별히 아버지의 가계나 형통에 대하여 사용되었다.|(b) 이 단어는 '가족(문), 족속이나 부족, 종족',|(c) '조국, 태어난 도시'나 '고향'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파트리아는 70인역본에서 약 16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아브(아버지, 조상, 가족)의 역어로, 그 다음으로 미쉬파하(가족, 씨족)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가문'(토빗 5:12), 족속(시 22:27; 대상 16:28) 등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파트리아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다음과 의미로 사용되었다.||(a) 눅 2:4에서 파트리아는 '가문'을 나타내지만, "집"이란 단어와 함께 '혈통이나 가계'를 의미한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b) 행 3:25에서 복수 파테라스는 '민족들'을 나타낸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c) 엡 3:15(참조: 엡 3:14)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되사 능력의 하나님으로서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말한다.|(참조: Walter Bauer; J.H.Thayer; G.Schrenk).
파트리아르케스
patriavrch"
한 부족의 시조, 조상.||#1. 헬라어 및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파트아르케스는 파트리아($3965: 혈통, 가족)와 아르코($757: 지배하다, 다스리다)에서 유래했으며, 헬레니즘 단어이다. 이 단어는 '족장' a patriarch, '한 부족[종족, 지파]의 시조' founder of a tribe, '조상' progenitor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파트리아르케스는 70인역본에서 7회 나오며, 히브리어 아브(1: 조상, 창시자, 지배자, 주인), 사르(8269: 수령, 우두머리, 장, 방백, 지배자)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족장, 방백, 관장' 등을 나타낸다(대상 24:31; 대상 27:22; 대하 19:8; 26:12).||#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파트리아르케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사도행전(3회)와 히브리서(1회)에만 사용되었다.||(a) 행 2:29에서 다윗에 대해 사용되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b) 행 7: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 두 조상을 낳으니". 여기서 이스라엘 지파들의 시조들인, 야곱의 열 두 아들에 대해 '시조'라는 의미를 나타낸다.||(c) 히 7: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여기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해 사용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조상의
patrikov"
아버지의, 조상의||#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파트리코스(Thuc., Xen., Plat.)는 파테르($3962: 아버지)에서 유래했으며, '아버지의, 조상의'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파트리코스는 신약성경에서 갈 1:14에 한번 나온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조상의 유전은 자기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오거나 받은 전통을 의미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고향
patriv"
조국, 고국, 고향, 본향.||#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파트리스(Homer 이래)는 파테르($3962: 아버지)에서 유래했으며, '조국, 본향'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파트리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6회 나오며, '가족, 자기 종족, 고국, 조국, 고토'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파트리스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파트리스는 '자기 자신의 나라'나 '고향'을 의미한다. 요 4:44에서 예수님의 고향 갈릴리에 대하여, 히 11:4에서 하늘 고향(자기 아버지의 나라)에 대하여 사용되었다.||(b) 파트리는 '고향, 자기가 태어난 곳이나 도시'를 나타낸다: 마 13:54; 마 13:57; 막 6:1; 막 6:4; 눅 4:23, 눅 4:24.|(참조: Walter Bauer; J.H.Thayer; G.Schrenk).
바드로바
Patrovba"
바드로바 Patrobas (인)||파트로바스는 파트로비오스(%867: $3962와 $979의 합성어)의 단축형이며 '아버지의 생명'(life)을 의미한다.|파트로바스는 신약성경에서 롬 16:14에 한번 나온다. 그는 로마의 기독교인 중 한 사람이며, 사도바울이 그에게 안부인사를 했다.|파트로바스에 대한 정보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이름은 노예의 이름으로 그와 함께 한 일단의 무리가 가정 집회를 가지므로 교회를 형성한 것 같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PE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