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당하다
peiravzw
시련하다, 시험하다, 유혹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페이라조(Homer 이래)는 페이라($3984: 시험, 시련, 실험)에서 유래했다.||(a) 이 단어는 '어떤 일이 될 수 있는지 어떤지를 해보다' try, '시도하다, 기도하다' attempt를 의미한다.|(b) 이 단어는 노력이 요구되는 점에서 '노력하다, 분투하다, 떠맡다, 책임지다'를 의미한다.|(c) 이 단어는 '어떤 사람을 시험하다, 유혹하다' tempt, '시험하다, 검사하다' test, '조사, 연구하다' look into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페이라조는 70인역본에서 약60회 나오며, 히브리어 나사(5254: 시험하다, 시도하다, 꾀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a) 페이라조는 70인역본에서 '어떤 것(일)을 하려고 노력하다'(신4:34; 28:56; 삿6:39; 삼상 17:39; '~을 시험(검사)하다, 어떤 것(일)을 해보다'(전2:1; 7:23; 단1:12), 증명하기 위해 시험하다(왕상 10:1; 대하9:1; 지혜서2:17)라는 의미를 나타낸다.||(b) 구약성경, 특히 신명기와 신명기의 사상을 반영하는 기록들에서 '유혹한다'거나 '시험한다'라는 사상은 종교적인 개념이 되었다. 불신앙, 오만, 불순종, 백성들 사이에서의 불평은 여호와에 대한 하나의 도전으로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이다. 반대로, 여호와가 자기 백성들을 시험하시기도 한다. 게르하르트손은 구약성경에서 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의 아들을 시험하는 것에 관하여 언급할 경우, 그의 아들이 언약에 대하여 진실한가를 알아보기 위해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 전형적인 예로는 아브라함에 대한 시험이며, 이 시험은 언약의 약속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한 것이다(창22장). 출16:4에서는 여호와가 백성들을 위하여 하늘에서 비오듯이 떡을 내려보내기로 결정했는데 백성들은 매일 매일 필요한 양만큼만 거두어야 하며 그 이유는 "그들이 나의 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다"(출20:20)라고 한다.|게르하르트손(Gerhardsson)은 하나님은 그가 택한 사람이 진실한가 아니한가를 '알기 위하여 시험하신다'라는 것을 이러한 시험과 관련하여 인정했다(신8:2). 예를 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라고 말한다. 신13:1-5에서는 거짓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혹하기 위하여 이적을 행할 가능성을 인정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이적이 실제로 일어났는가를 의문시함으로써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받은 계명들에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부합하느냐에 의해 그들은 시험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 여호와는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시험'하신다(신13:3). 사사기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신다는 내용이 나온다(삿2:22; 삿3:1; 삿3:4이하). 대하 32:31에는 여호와께서 "그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하나님의 언약의 아들인 왕 히스기야를 시험하셨다는 내용이 나온다.|다른 한편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시험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동 방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났으며, 시78:40 이하에 그런 일이 묘사되어 있다: "저희가 광야에서 그를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번인고 저희가 돌이켜 하나님을 재삼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격동하였도다"(민14:22; 시106:14; 사7:12)에도 이런 의미로 나타난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페이라조는 신약성경에서 3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어간 페이라(%685)의 기본 의미는 영어의 test(시험하다)와try(시험해보다)에 상당한다. 즉 어떤 종류의 시험을 가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 시험은 정신적 부담이나 걱정, 위험, 불확실성, 불신에 수반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긍정적으로 시험은 자질을 입증하는 하나의 테스트이고, 부정적으로는 실패로 유인하는 걸림돌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사람이 유일한 대상이므로, 믿음, 신실, 그리고 순종이 일반적으로 똑같이 한 역할을 한다.|페이라조의 의미의 범위는 보다 광범위하다.|① 진지한 의도로 시험하다,|② 다소 심각한 의도 없이 비판적으로 시험해 보다,|③ 위협하다, 부담시키다, 부추기다,|④ 잘못 이끌다, 유혹하다,|⑤ 도전하다, 의심하다, 불신하다,|⑥ ~을 정하다, 계획하다.|물론 그 어감들을 중복된다.|페이라스모스는 세속 헬라어에서는 드물며, 의미에 있어서 다양성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 단어는 대개 인간이나 다른 힘들(고난, 핍박, 유혹)에 의한 위협이나 부담을 가리키며, 따라서 분명히 인간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히3:8에서만 아마도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 페이라스모스(4회는 복수형)는 객관적으로 볼 때 사람을 옳은 길에서 떠나도록 위협하는 어떤 위험이다. 주관적으로 이 위협은 한편으로는 염려로 인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여 보호의 간구를 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입증하는 기회로서 하나의 자극이 된다.||(b) ①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세 가지 영역의 용법이 발견된다.|·예수님의 시험,|·예수님의 적대자들에 의한 질문(요8:6에서도),|· 제자들의 기도에서 탄원이다. 한가지 독특한 표현은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살전3:5에서만 발견되는 마4:3의 호 페이라존("시험하는 자")이다.|② 누가의 용법들은 보다 독자적이다. 눅4:13과 눅22:28에서는 예수님의 '시험'을 가리키고 눅8:13과 행20:19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시험을 강조한다.|대조적으로 페이라조는 예수님에게 한 질문에서는 두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는데, 한번(눅10:25)의 경우에는 모독의 개념이 강조되어 있는 것 같다. 행5:9과 행15:10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페이라조는 단순히 '준비하다, 원하다'를 의미하기도 한다(행9:26; 행16:7; 행24:6).|③ 요6:6에서는 현학적인 의미에서 '시험하다'이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④ 바울의 용법에서는 대개 %685에 부정적인 의미가 결부되어 있다. 즉 죄, 범법, 적대, 반대(고전7:5; 고전 10:6이하; 갈6:1; 살전3:5; 딤전6:9), 짐을 지움(고전 10:13), 걸림이 되는 것(갈4:14) 등이다. 고후 13:5에서만 다소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자신을 시험하고").|⑤ 히브리서에서는 이스라엘의 반역(히3:8이하)을 언급하고 고난 당할 때 순종하는 시험을 강조한다(히2:18; 히4:15; 히11:17).|⑥ 약1:12; 벧전1:6; 벧전4:12도 이러한 맥락에 적합한 구절이다. 즉, 시험은 무거운 짐이다. 이와 대조되는 것으로 약1:13 이하는 '죄로 잘못 인도하는 것'을 나타낸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⑦ 벧후2:9; 계2:10; 계3:10에서도 고난에 의해 믿음 앞에 놓인 시험을 언급하고 있다.|⑧ 계2:2에서는 비판적인 조사를 의미한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c)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반역으로 특징지워진다(고전 10:9; 히3:8이하; 또 마4:7병행구). 사람은 '도전적인 탐욕스런 소원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완전하신 능력을 의심함으로써'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H. -J. Kraus, Pss Ⅱ[영역본 1989] 78:18).|행5:9과 행15:10은 성령 혹은 하나님을 향한 그러한 도발을 언급한다: 인간은 기만이나 오해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참으심을 곡해한다.||(d) ① 히2:18과 히4:15이 공관복음 자료와 부합하는지는 불확실하다. 여기서 예수님의 시험은 모든 인간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재해, 특히 고난과 동일한 맥락에서 나타난다(참조: 히5:7; 히11:1이하). 페이라스모스는 불순종과 체념으로 잘못 인도된 자의 위협이다. 이와 같은 고난 당하신 분으로서 예수님은 마땅히 도움을 제공할 수 있으시다. 죄없으신 분으로 예수님은 페이라스모스가 "반드시 죄로 이끄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신다(H. Zimmermann, Das Bekenntnis der Hoffnung[1977] 173).|② 지상의 대적자들에 의한 시험은 원래의 독립적인 전승의 구성 요소가 되었다(막8:11 병행구; 막10:2병행구; 막12:15 병행구; 마22:35 병행구; 요8:6). 그것들은 비판적인 도발과 음모와 속임수를 포함하고 있다.|③ 막1:12 이하와 마4:1-11 병행구에 대한 전승 비평과 문학 비평은 이제 더 이상 명료하게 해결될 수는 없다(참조: 요6:15 이하; 떡의 기적). 공통되는 출발점은 육첵적 욕구(필요)라는 상황(광야)이고 그 다음으로 두 가지 다른 노선(즉 형태-구약성경과의 관계와 해석)을 따라 발전되어 왔다.|광야의 시험이 세례(침례)와 결합된 것은 반드시 매우 초기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어떠한 역사적인 핵심에 관한 문제로부터라도 완전히 떠나서 일차적으로 두가지 형태에서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때 그 해석을 결정짓는 것은 전승-역사적 관심의 변화이다. 모든 전승들은 에수님께서 시험받았다는 것-물론 대부분은 처음부터 일반적인 의미에서(마태와 누가는 각기 한번 이상)이긴 하지만-에 주목한다(마4:7병행구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시험도 포함되어 있다).|④ 막1:12 이하는 보다 더 긴 기사의 핵심(요약)이 아니다. 막1:13의 '페이라조메노스...'는 마가가 부가시킨 것이 아니며, 시험 기사라는 전제 하에서만이 온전히 설명될 수 있다(Mahnke). 배경에 놓인 역사적 요소는(Leder에도 불구하고) 낙원 및 아담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지적해 준다(엘리야 전승을 가리키지 않음; Mahnke, Jeremias, Pesch, Gnilka에서 자세히 설명함). 시험은 예수님을 종말론적 임무에 적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 편에서의 불순종과 불충성의 행동을 끌어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시험을 물리치심으로써 이기심으로 낙원을 되찾으신다.|막1:12 이하는 그 결말을 나중에 첨가시킨 불완전한 조각이 아니다. 사탄과의 승리의 투쟁이라는 주제는 확실히 마가에게 긴요한 것이 된다.|⑤ 마4:1-11과 눅4:1-13에서 병행되는 기사에서 세가지 시험 장면은 아마도 예수님의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삼중적 역할을 암시할 것이다. 형태와 내용에서 원래부터 기독론적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여러 차원의 전승들에서 그 단편 역시 특별히 젤로티즘(정치적 메시야)과 데이오스 아네르 기독론(기적에 대한 마술적 해석)에 맞서서 한계를 정하는데 타당성을 획득했다. 예수님의 유일성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이겨내신 예수님 자신의 행동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모범이 된다(참조: 세례[침례]와의 연관 및 이스라엘 예표론, 고전 10장).|⑥ 마태는 "우리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말하고, 누가는 마귀에 관하여 말한다"(Dupont 61). 마태에게 예수님은 "모든 의를 성취하시는"(마3:15) 분이며, 하나님께 복종하시는 분이고, 스스로를 도울 기회를 붙잡지 않으시는 분이다(마27:40). 그리고 동시에 스스로를 성경의 바른 해석자로 정당화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순종에 보답하신다(마4:11). 누가는 모든 것을 예루살렘을 향하여 배열한다. 눅4:13은 부차적으로 수난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마귀의 권세 있는 지위에 저항하시며(눅4:6; 참조: 눅4:14), 결과는 "최초의 전초전"이다(Dupont 67). 예수님은 그의 대적이 도전하였을 때 물리치시는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으로서 선교의 전형이 되신다(Baumbach). 눅4:13은 아마도 수난의 때까지 지속되는 "사탄이 떠난 기간"을 가리키지는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눅22:28은 앞으로의 일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회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난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요, 그때 사탄이 다시 예수님을 맹렬하게 공격할 것이다.||(e) ① "만약 당신이 주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에이스 페이라스몬(시험 또는 시련)에 너의 영혼을 준비하라"(집회서2:1). 이와 동일한 맥락의 권고가 신약성경에서도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은 시험에 스스로를 준비해야 한다(짐으로서의 특히 고난으로서의 페이라스모스에: 벧전1:6; 벧전4:12; 약1:2; 약1:12; 히2:18; 히4:15; 히11:17; 보다 흔한 용어는 재난, 핍박 따위이다). 비록 시험은 즐거운 경험은 아니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가르치심의 수단으로 보고 긍정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참조: "고난 가운데서 기뻐함"이라는 주제(Nauck; 참조: N. Brox, 1Pet[EKKNT] 64n. 213), (세례와 관련된) 초신자에 대한 가르침과 인내하라는 말씀들(마10:22등).|② 또한 시험의 파괴적인 성격이 강조된다; 마귀는 자주 시험의 배후에 있는 존재로 지목되기도 한다(마6:13; 눅8:13; 고전7:5; 살전3:5). 이러한 이유로 페이라스모스로부터 혹은 페이라스모스에서 구원 받는다는 약속이 주어진다(고전 10:13; 벧후2:9; 계2:10; 계43:10).|③ 마6:13a병행구와 막14:38 병행구에 대한 해석은 난해하다. 주기도문에서 간구는 종말론적으로(큰 환난으로부터가 아니라 큰 환난 가운데서의 보호; 예: J. Jeremias, Abba[1966] 169 이하), 그리고 지혜의 관점에서(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지 않으신다; E. Schweizer, Matt[Eng. tr., 1975] 156) 해석된다.|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서는 예수님께서 종말론적 사탄의 시험을 만난 것인지 아니면 한 시험을 겪은 것이지(지혜의 의미에서: 예: Gnilke, op. cit. Ⅱ, 262) 의문이 제기된다. 문맥이 시사하는 바는 종말론적 투쟁의 상황이다(Kuhn, "페이라스모스"); 우리는 압제와 배신을 당할 때 견디어야만 한다. 마가와 마태에 의하면 페이라스모스는 육신의 약함으로 시작된다. 히나($2443)절은 께어서 기도하는 것의 목적을 나타낸다.|눅 22:40; 눅 22:46에서는 그렇지 않다(여기서는 기도의 내용이다; Kuhn "Jesus" 285).|④ 시험의 근원은 또한 사람 자신 안에, 특히 사람의 에피뒤미아에 자리해 있다(약 1:14; 유사하게 고전 10:6 이하; 딤전 6:9; 참조: 막 14:38). 이러한 견해는 분명히 "악한 충동"이라는 유대교 교리와 관련이 있으며 부수적으로 헬라적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⑤ 이와 같은 시험의 다양한 양상들은 일단의 문젯거리로 함께 인식되었으며, 특히 신정설(악의 존재를 신의 섭리라고 하는 주장)이 그러하다. 페이라스모스를 하나의 부담이나 사탄의 가해라고 강력히 이해하면 할수록 지혜의 의미에서나 하나님의 역할에서 시험을 설명하는 일은 점점 더 문젯거리가 된다. 이것은 야고보서 1장에서 가장 분명하다. 페이라스모스에서 기뻐하라는 전통적 주제(약 1:2; 약 1:12)는 하나님의 면책(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 약 1:13)과 개개인 자신의 책임(약 1:14)과 충돌한다. 이와 동일한 요소들이 고전 10장에도 나타난다: 바울은 악한 인간의 성향을 고발하면서 이러한 성향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을 시험하도록 유도한다고 말한다(고전 10:9; 참조: 히 3:8 이하). 그러나 고전 10:13에 따르면 페이라스모스는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시험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신다. 여기서 시험의 성격이 보다 잘 드러난다.|(참조: W. Popkes; W. Schmeider; C. Br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