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게 하다
caivrw
기뻐하다 be glad, 즐거워 하다 rejoic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카이로(Homer이래로)는 '기뻐하다, 즐거워 하다'를 의미하며,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기뻐하는 것을 나타낸다. 현재 명령법은 인사말로 자주 나타난다. 즉 카이레(단수)와 카이레테(복수)는 "안녕하십니까?" "안녕히" Hail!라는 인사말로 사용되었다. 카이레는 무엇보다 신들에게 대한 인사말로 사용되었다. 서신의 서두에서 부정사 형태인 카이레인이 가끔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동사 레게이가 보충되어야 한다(참조: Funk § 480). 즉 "…문안을 [드리다]"([…says] greetings!). 똑같은 관용 어구가 축배를 들 때도 사용되며(즉, "건강을 빌면서!" good health!) 헤어질 때도 사용된다(즉 "안녕히 계십시오[가십시오]!" Farewell!).||#2. 70인역본의 용법||카이로는 70인역본에서 약 80여회 나오며, 주로 '기뻐하다, 기쁘다'를 뜻하는 길, 사마흐, 시스와 '기쁨, 즐거움'을 뜻하는 사메아흐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그러한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카이로는 신약성경에 74회 나오며, 이 동사와 명사 카라($5479)는 특히,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완성 및 그리스도 안에 존재함과 그리스도 안의 소망을 언급한 곳에 현저히 나타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선포인 신약성경 메시지 전체가 기쁨의 메시지(→복음 Gospel)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a) 카이로는 인사말로 사용되었다. 부정사 카이레인을 써서 인사한 경우는 행 15:23; 행 23:26; 약 1:1의 편지의 서두에서만 나타난다. 요이 1:10에서 신자들은 이단에 속한 자들에게 카이레인을 하지 말라고 한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여기서 수신자들은 이단 교리를 전하는 자들의 악한 행위에 완전히 연루되지 않도록, 그들을 영접하지도 인사하지도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마 28:9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친숙한 일상적 인사말 카이레테를 사용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있다: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마 26:49에서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께 인사했다: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안녕과 행복을 소원하는 그 인사의 이면에는 무서운 음모를 감추고 있다.|마 27:29에서는 예수님께 대하여 유대인의 왕(이스라엘)이라고 조롱적 인사를 던지고 있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 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그들이 이렇게 인사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고 그 말을 하였으나, 주님이 당연히 받으셔야 할 인사였으니만큼, 그 속에는 하나의 반어적(反語的)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눅 1:28에서 마리아는 카이레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잇따른 메시지에 놀랐다.||(b)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은 기쁨을 가져왔다. 카이로는 잃어 버린 것을 찾았을 때(눅 15:5이하; 마 18:13), 자기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알았을 때(눅 10:20), 구세주의 선구자가 났을 때(눅 1:14), 그의 탄생의 별을 보았을 때(마 2:10),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눅 13:17; 눅 19:6), 기뻐하는 것을 표현한다.|눅 19:37이하(참조: 눅 18:43)에서 예수님께서 입성할 때의 사람들의 분위기는 예수님의 승천 후에 제자들의 분위기처럼 기쁨의 분위기였다: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마 5:12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핍박을 받을 때도 기뻐해야 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예수님이 하나의 공격의 대상이 되고, 그를 뒤따르는 자들의 길이 고난과 핍박에 이르게 된다 할지라도, 기쁨에 찬 구원의 확신은 상실되지 않아야 한다(눅 6:23).|눅 22:5에서 유다가 당국자들과 예수님을 넘겨 주기로 합의했을 때 그들이 기뻐했다: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눅 23:8에서 수난의 때에 헤롯이 예수님을 만나보고 기뻐했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c)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불가항력적, 전세계적 확장에 대한 기쁨이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먼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과 핍박을 받음에 대한 사도 Apostle들의 기쁨이 있다(행 5:41; 마 5:11이하). 박해가 복음의 승리적 진행을 정지시킬 수 없다. 이방인을 끌어 모은데 대한 기쁨도 있다(행 11:23; 행 13:48; 행 15:3).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고, 그들이 세례(침례)를 받았을 때, 거기에 해당된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였다(행 8:8, 행 8:39; 행 15:31).||(d) 요한의 기록에서 중요한 것은 충만한 기쁨이다. 요 3;29에서 세례(침례) 요한은, "신랑" 즉 약속된 하늘의 진리의 계시자로 인하여 지금 기쁨이 충만해 있다(참조: 마 9:14이하, 병행구, 막 2:18이하; 눅 5:33이하). 종말론적 시간은 이미 도래하였다. 요 4:35 전후 문맥을 보면 이 때는 계속적인 파종과 수확기가 병존하는 시기이고(요 4:35이하),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역을 이미 성취하고 계신다(요 4:34). 요 8:56에 보면,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아브라함도, 수확이 시작되는 이 때를 보며 즐거워 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여기에서 카이로는 기다리는 기쁨이고 아갈라오마이는 성취된 기쁨이다.|요 16:20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죽음을 자기의 제자들이 기뻐해야 한다고 설명하신다. 왜냐하면 죽음은 승리요 발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슬픔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부활이 그 슬픔을 기쁨으로 어떻게 바꾸게 될 것인지를 보여준다. 요 14:27이하에서 기쁨을 평화와 연결시키는 것은 기쁨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만들어 낸다.|요 11:15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때 거기 있지 않은 것을 기뻐하셨다. 그 이유를 설명하신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요이 1:4; 요삼 1:3에서 사도 요한은 믿음의 형제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기뻐했다.|계 11:10에서 카이로는 악한 즐거움을 나타낸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계 19:7에서 성도들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의 때가 되었기 때문에 즐거워 한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e) 바울 서신들은 기독교인의 기쁨은 슬픔과 고통과 근심 가운데서만이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 의미를 증거하고 있다. 진실로 이와 같은 사실은 이 기쁨의 능력을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① 이러한 기쁨의 원천은 단순한 지상적, 인간적 기쁨 너머에 있다. 그것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이며, 따라서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계속하여 기쁨의 존재를 상기시켜 주고, 그 기쁨을 표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빌 3:1; 빌 4:4; 빌 4:10; 롬 12:12; 고후 6:10).|빌 1:15이하; 빌 1:18에서 바울은 동기에 상관하지 않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였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바울은 놀라운 비이기적 자세를 유지했다. 그는 어떤 자들이 그들 자신의 명성을 얻기 위해 전파하고 있는 것을 알았으나 이 전도자들의 동기에 상관없이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을 기뻐하였다. 믿음과 그것의 결과적 기쁨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에, 좋지 못한 동기에 의해 그리스도가 전파된 때 조차도, 바울은 확신과 기쁨을 지닐 수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운 사역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이다(빌 1:15-18).|②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기쁨을 들립시스(고통, 고난, 박해, 환난)와 직접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바울이 편지를 기록할 때, 들립시스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고후 2:4), 엔 퀴리오, 즉 "주 안에" 있는 기쁨인(빌 3:1) 자기의 기쁨을 모두가 함께 나눠 갖도록 하기 위해(고후 2:3) 썼다고 하였다. 고린도인들의 삶은 수동적 자포자기 상태 또는 사망을 낳는 세상 근심(고후 7:9이하)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결한 믿음의 기쁨에 의해 지배를 받아야 했다. 바울은 그들을 이전에 엄히 책망했었으나, 그의 권면이 결국 유익한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다시 안심하게 되었다(고후 7:13).|③ 바울은 빌립보서를 쓸 때 감옥에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자기의 재판의 결과를 알 수 없었고, 분명히 외로움을 느끼었을 것이다(빌 2:20이하). 그리고 충성스런 복음 전파도 위기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빌 1:15이하; 빌 2:21). 또 다시 들립시스가 있었으며(골 1:24), 이것이 근심의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계속적인 기쁨의 근거 역시 있었다. 즉 그것은 빌립보인들이 복음에 참여함으로 인한 감사(빌 1:5)와 그리스도가 계속 전파됨으로 인한 기쁨이었다(빌 1:18). 그리스도와 복음에 의해 속박을 당한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자기와 함께 기뻐하라고(빌 2;17이하), 또 염려를 버리라고(빌 4:6), 나아가서는 성령의 교제 안에서 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비록 바울에게 근심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있고, 그가 곧 죽게 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그의 몸에서 존귀하게 되는 한(빌 1:20), 그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이처럼 빌립보서의 기쁨은 계속적이고 "도전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쓰는" 기쁨이다(K.Barth).(참조: 빌 2:17; 빌 4:4).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은 그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지칠 줄 모르는 기도를 통해 생성된다(빌 4:6; 참조: 살전 5:16; 골 1:11). 그것은 복음의 세계적 확산에서(살전 3:9; 골 2:5), 그리고 복음을 전한 교회들의 왕성한 성장에게 그 힘을 얻는다(빌 4:10; 참조: 살전 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주 안에서의 기쁨이다(빌 4:4).|④ 벧전 4:13에서 카이로는 고난과 영광에 관련되어 나타난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그리고 롬 12:15에서 관용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타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게 해 준다. 다른 한편 고전 7:30; 고후 6:10에서 카이로는 우리에게, 현재의 기쁨과 슬픔은 이 생(生)에만 속할 뿐이며 우리의 궁극적 몫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참조: H.Conzelmann; E.Beyreuther; G.Finkenra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