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나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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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다, 일어서다, 죽은 자를 일으키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에게이로(Homer 이래)는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a) 타동사로 '깨우다'(잠에서), 자동사 수동에서 '잠깨다, 일어나다',||(b) 타동사로 '자극하다, 일으키다, 각성시키다, 분발시키다', 자동사 수동에서 '각성하다, 분발하다',||(c) 타동사로 '일어서게 하다, 세우다', (건물 등을) '세우다, 일으켜 세우다', 자동사에서 '일어서다, 오르다',||(d) 타동사로 '죽은 자를 일으키다', 자동사 수동에서 '죽은 자로부터 되살아 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에게이로는 70인역본에서 약 80회 나오며, 히브리어 쿰(일어나다, 일어서다), 우르(깨우다), 아마드(일어서다) 등을 번역하여 바로가 깬 것(창 41:4; 창 41:7),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운 것(삿 2:16; 삿 2:18), 가브리엘이 깊이 잠든 다니엘을 일으켜 세운 것(단 8:18) 등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에게이로는 신약성경에서 144회 나오며, 주로 사복음서,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서에 사용되었다.||(a) (a)의 의미에서|① 타동사로, 막 4:38; 행 12:7.|② 자동사로, 마 1:24; 마 25:7; 막 4:27.|③ 비유적으로, 롬 13:11; 엡 5:14.||(b) (b)의 의미에서.|① 타동사로, 비인칭 목적어와 함께, 빌 1:17; 인칭 목적어와 함께, '역사 속에서 나타나거나 일으키다': 행 13:22(다윗); 행 13:23.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하다", 마 3:29과 병행구 눅 1:69.|② 자동사로, '일어나다' stir oneself, 막 13:8과 병행구절; '일어나다' rise up, 선지자에 대해: 마 11:11; 눅 7:16; 요 7:52; 마 24:11; 마 24:24; 막 13:22; 심판 때에 고소자에 대해: 마 12:42과 병행구절.||(c) (c)의 의미에서|① 타동사로, 요 2:19 이하; 인격 목적어와 함께, '일어나도록 도우다, 세우다', 마 12:11에서 동물; 행 10:26; 막 1:31; 막 9:27; 행 3:7에서 병자; 약 5:15에서 '건강하게 하다'를 암시한다(참조: Jos. Ant., 19, 294).|② 자동사로 '일어나 강해지다' 마 17:7; 행 9:8; '온전히 일어서다' 마 8:15; 마 9:6 이하; 막 2:12; 또한 속격, '일어나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다" 요 13:4; 마 8:26과 병행구절; 약화된 셈어적 의미에서, 행동의 개시를 표시한다. '시작하다': 출 5:8; 대상 10:12; 대상 22:19; 대하 21:9; 대하 22:10; 마 9:19; 요 11:29; 명령법에서 자주 나온다: "일어나 ... 데리고", 마 2:13; 마 2:20, 혹은 보다 직접적으로 막 14:42과 병행구; '일어나다', 요 14:31; 막 2:9; 막 2:11; 막 3:3; 눅 6:8; 요 5:8; 계 11:1.||(d) (d)의 의미에서 '죽은 자를 일으키다', 혹은 수동태 '일어나다,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다'는 개인의 부활과 관련하여, 긍정적으로 마 9:25; 마 10:8; 마 11:5과 병행구; 막 5:41과 병행구; 막 6:14과 병행구; 눅 7:14; 요 5:21; 요 12:1; 요 12:9; 요 12:17; 히 11:19에 사용되었다. 예수님의 인격과 결합할 때 이 부활은 메시야 시대 및 모든 죽은 자의 장래 부활의 표징이다. 마 27:52도 참조하라.|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하여 우리는 케뤼그마에 대한 그 중요성이 이미 예수님의 예언에서 암시됨을 본다(마 16:21; 눅 9:22; 마 17:9; 마 17:23; 마 20:19; 막 14:28과 병행구. 에게이레인은 마태가 사용하기를 즐겨하는 단어이다). 그것은 부활 기사에서 반영되며(막 16:6; 마 28:7; 눅 24:34; 요 21:4), 사도들의 설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행 3:15; 행 4:10; 행 5:30; 행 10:40; 행 13:30; 행 13:37; 롬 4:24 이하; 롬 6:4; 롬 6:9; 롬 7:4; 롬 8:11; 롬 8:34; 롬 10:9; 고전 6:14; 고전 15:4; 고전 15:12 등; 고후 4:14; 고후 5:15; 갈 1:1; 엡 1:20; 골 2:12; 살전 1:10; 딤후 2:8; 벧전 1:21).|하나님께서는 부활로써 십자가에 달린 그를 인정하셨으며, 그를 영화롭게 하셨고(사도행전, 또한 롬 7:4; 빌 2:9-11; 엡 1:20 이하). 그리하여 구속에 힘을 부여하신다(특히 롬 4장과 롬 8장; 고전 15장). 만일 헬레니즘과 다르게 신약성경이 아니스타나이($450)와 아니스타스다이보다 에게이레인과 에게이레스다이를 더 즐겨 사용한다면(그러나 물론 아나스타시스보다 에게르시스를 더 즐겨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그 용어들이 하나님의 행동의 구체적 성질을 더 잘 밝혀주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의 자기 부활의 개념은 요한의 신학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요 2:19; 요 2:21; 요 10:17; 요 10:18).||비록 바울이 텅빈 무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에타페, 고전 15:4; 에타페멘, 롬 6:4), 고전 6:13 이하; 고전 15:47; 고전 15:50; 빌 2:6; 빌 2:9에 따르면 그는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물질적 견지에서 생각하지 않고, 만물 가운데서 특히 교회에서 우주적 인격(인성)으로 높임 받으신 분의 소마 프뉴마티콘('신령한 몸')으로 생각한다(참조: 골 1:18 이하).||(e) 그리스도와 함께 신자들의 부활은 특히 바울에 의해 해결되지만, 그 주요한 내용에 있어서 그것은 초기 교회의 일반적 가르침의 일부분을 형성한다(롬 6:4-11; 갈 2:20; 골 2:12 이하; 엡 2:1; 엡 2:5; 고후 4:10 이하; 벧전 1:3). 당연히 이것은 의롭다함으로 얻은 생명과 구별되는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롬 5:18).|롬 6장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놓인 구원 역사의 새로운 상황을 묘사한다. 새 생명은-아직 감취어져 있으나-믿음의 실재(고후 4:7 이하; 고후 5:7; 골 3:3)이다. 그런데 이 생명은 그것을 심리학적으로 붙잡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참조: 롬 8:16; 롬 8:23; 갈 3:2; 갈 4:6; 고후 1:22), 마술적인 변화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식으로 믿음의 실재인 것이다. 즉 그것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며 하나님에 의해 설정된 것으로서, 완성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실재이다(롬 8:19 이하; 고후 4:16-18; 빌 3:11 이하). 이 사상은 비록 매우 사실주의적이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죽은 자의 부활이 이미 일어났음을 암시하지는 않는다(딤후 2:18은 이 견해를 이단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참조: 빌 3:10 이하; 롬 8:11 등).||(f) 죽은 자의 미래의 부활에 대해(막 12:26; 눅 20:37; 행 26:8; 고전 15:15-52; 고후 1:9; 고후 4:14; 참조: 사 26:19; 단 12:2). 신약성경에서 부활 생명의 정체에 대한 질문은 유대교에서보다 더 명료한 영적 대답을 얻는다.|막 12:23과 병행구에서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악의가 있으나 영성화하는 경향에 아직 영향받지 않은 랍비 신학에 부합한다. 예수님의 영적 개념(막 12:25과 병행구)은 반대로 아주 새롭다. 비록 예수님은 복된 자의 연회에 대해 언급하긴 하지만 그것을 서술하지는 않는다(막 14:25과 병행구; 마 8:11; 눅 13:29; 참조: 잔치에 대해 말하는 비유들). 바울은 특별히 성적 교섭 뿐만 아니라 먹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고전 6:13). 사르크스는 파괴되고 소마는 변화될 것이다(고전 15:42 이하; 고전 15:50 이하; 고전 15:40 이하에 대해 참조: 마 13:43).|(참조: A. Oepke;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