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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엘렝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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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확신, 책망.||#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엘렝코스는 엘렝코($1651)에서 유래했으며,||(a) '증거' proof, 설득하고 논증하는 '증거의 수단, 설득력 있음, 논파',|(b) '조사, 계산'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엘렝코스는 70인역본에서 31회 나오며, 히브리어 야카흐(3198: 결정하다, 판단이나 판결하다, 논증하다, 책망하다), 토케하(8433a; 견책, 반박, 비난 등), 토카하트(8433b: 의논, 논증, 비난, 책망)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변론, 견책이나 책망' 등을 나타낸다(욥 13:6; 시 73:14; 잠 15:10; 욥 6:26; 욥 16:21 등).||#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엘렝코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딤후 3:16에서 엘렝코스는 죄인들에 대한 질책(책망)을 의미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b) 히 11:1에서 엘렝코스는 '증거' proof나 '확신' persuasion이지만 주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이 용어의 일반적인 용법은 "보여지지 않은 것들"("보지 못하는 것들")이 주격적 속격이 아니라 목적격적 속격임을 시사해준다. 엘렝코스는 바라는 것이 의지하는 근거로 나온다. 믿음이 확신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일을 한다. 히브리서 전체의 요지가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 말씀, 그리고 약속에 의거한다는 것이라는 사실로 보아 그렇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하나님이 부여해주신 확신이며 따라서 바라는 것에 대한 보증이다.|(참조: F. Buchsel; Walter Bauer; J. H. Thayer).
가책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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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내다, 폭로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엘렝코(Homer 이래)는||(a) '조롱하다, 비웃다, 모욕을 주다',|(b) '창피주다',|(c) '비난하다',|(d) '폭로하다, 저항하다',|(e) '해석하다, 상술하다',|(f) '조사하다'를 의미하게 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엘렝코는 70인역본에서 약 7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야카흐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엘렝코는 70인역본에서 '꾸짖다(책망하다), 처벌하다, 정죄하다' 혹은 '유죄를 선언하다, 시험하다, 훈계하다' 등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엘렝코는 신약성경에서 17회 나오며, 용법이 한정되어 있다. 사람 대격과 함께 이 단어는 개인적으로든(마 18:15) 회중적으로든(딤전 5:20)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주고 그들에게 회개하도록 권고하다'를 의미한다. 성령이 이 일을 하며(요 16:8) 또한 그리스도도 지금(계 3:19) 그리고 재림 때에(유 1:15) 이 일을 한다. 어느 누구도 이 일을 예수님에게 할 수 없다(요 8:46). 죄인들은 선지적 소명(눅 3:19), 하나님의 교훈(히 12:5), 혹은 율법(약 2:9)에 직면할 때, 이러한 폭로를 경험한다. 페리(~을 인하여)는 잘못을 나타내는데 사용되며(눅 3:19), 보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호티($3754)도 더불어 사용되기도 한다(요 16:9 이하). 폭로나 정죄 뿐만 아니라 교정이나 징계를 암시하기도 한다.|엘렝코로 나타내어진 죄에 대한 투쟁은 구약성경과 유대교에 기초한다. 레 19:17은 징계(책선)를 요구한다. 랍비들에게 있어 질책은 사랑의 절대 필요한 요소이다. 잠 3:12; 욥 5:17 등은 하나님을 징계로 교육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히 12:5).|(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F. Buchsel).
가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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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엾은, 불쌍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엘레에이노스(Homer 이래; Diod.)는 엘레오스($1656)에서 유래했으며, 동정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상태를 표현하는데 사용되며, 따라서 '가련한, 가엾은, 비참한, 불쌍한'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엘레에이노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고전 헬라어 용법과 같이 사용되었다.||(a)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여기서 바울은 육체의 부활은 이미 지나갔다고 주장하는 고린도 교회의 종파에 반박하여 미래에 썩지 않을 육체로 부활할 것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선포했으며, 이 소망을 이 세상만으로 한정하는 사람들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한다.||(b)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이 구절에서는 고전 15:19처럼 라오디게아 교회에 그 교회가 이 세상의 부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가련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일깨우며 또한 그 교회를, 그리스도의 판단 아래 놓고 있다. 오직 그의 판단만이 타당한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H. Esser).
긍휼을 베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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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히 여기다, 자비를 베풀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엘레에오(Homer 이래)는 엘레오스($1656: ~을 불쌍히 여김, 동정)에서 유래했으며, '불쌍히 여기다, 가엾게 생각하다, 동정하다, 자비를 베풀다, 자비를 보이다, 자비롭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엘레에오는 신약성경에서 2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공관복음서에서 엘레에오는 마 5:7; 마 18:33; 눅 10:37; 눅 16:24을 제외하면 주로 사건 진술들에서 볼 수 있다.||(a) 엘레에오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에 하나님의 자비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나사렛 예수의 인격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증명하는 자유하게 함, 그리고 치유의 사역과 함께 일어났다. 병든 사람 또는 귀신 들린 사람의 친척들(마 15:22; 마 17:15)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 병행구절 마 9:27; 마 15:22; 마 17:15; 눅 17:13)라는 도움의 부르짖음에 예수님은 응하셔서 그들을 치유해 주셨다. 어떤 경우에는(막 5:19) 예수님은 귀신들렸다가 예수님에게 고침을 받은 한 사람에게 어떻게 주님(여기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임)이 그에게 자비를 베푸셨는가 하는 것을 친속들에게 말하라고 명령했다.||(b) 인간이 인간에게 베푸는 자비는 엘레에오로 표현되는데 마태복음(마 5:7; 마 18:33)의 가르침 부분에서 오직 2회, 누가복음(눅 16:24) 고유의 자료에 1회 나온다. 그러나 각각의 경우 그 동기는 명백히 하나님의 자비이다. 마 5:7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지며, 이 구절의 동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수동태로 쓰였다. 용서해 주지 않는 종의 비유(마 18:23-35)에서 불쌍히 여기라고 요구하는 것(마 18:33)은 그 종의 주인이 그를 한없이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다(마 18:35; 마 18:27). 살아 생전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 부자가 고통 중에서 자비를 뜻하는 동일한 말로써, 승귀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아브라함을 부른다(눅 16:24). 이러한 단어가 본 기사를 제외하고 하나님을 부르는 경우 외에는 사용되지 않는다.||(c) 바울은 자기 자신이 사도가 될 수 있도록 긍휼히 여김을 받았던 자(엘레에덴; 딤전 1:13; 딤전 1:16)로서,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로 여김 받기를 희망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대대적으로 거부했다는 관점에서 바울은 값없이 주는 하나님의 자비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로마서에서 명백하게 하려고 했다(롬 9:15; 롬 9:16; 롬 9:18; 15절은 출 33:19의 인용문구이다). 지금은 이방인을 위한(롬 11:30), 그 다음에는 유대인을 위한(롬 11:31), 따라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롬 11:32)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에 근거한다. 성령에 의한 믿음과 중생으로써 소생한, 이들의 구원은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긍휼히 여기심에 근거한 것이다(참조: 엡 2:4-9; 딛 3:5). 따라서 그들이 경험했던(고후 4:1; 참조: 롬 12:1) 긍휼을 즐거운 마음으로(롬 12:8) 남에게 베풀 것을 권고 받고 있으므로 긍휼히 여김을 제자라고 알려질 수 있는 표시 중의 하나가 된다.|하나님의 긍휼은 치유를 가져오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에바브라의 경우이다(빌 2:27).||(d) 벧전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긍휼이 이방인들에게까지 확산되었음을 언급한다.||(e) 유다는 그들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마지막 심판 때에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을 기대하라고 말한 후에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식별력을 가지고 긍휼히 여기라고 그의 편지를 읽는 이들에게 권하고 있다(유 1:21-23).|(참조: H. -H. Esser; R. Bultmann)
구제함
ejlehmosuvnh
불쌍히 여김, 자비, 자선, 구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엘레에모쉬네(Clallim., Jeremias)는 엘레오스($1656: 자비, 불쌍히 여김, 동정)에서 유래했으며,||(a) '자비, 연민, 불쌍히 여김, 동정, 자선, 구제',|(b)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기부'나 그들에게 주는 '선물, 의연금'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70인역본에서는 하나님이 엘레에모쉬네로 심판하시고 이것을 의로운 자, 죄가 없는 사람, 압제받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신다고 언급한다(신 6:25; 시 24:4; 시 103:6). 이 단어에는 단순히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행동이 전제되어 있다. 이 헬라어 단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는 인정많은 행동이란 의미를 지니며 따라서 더 좁은 의미에서 자선을 가리켜 사용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약성서에서의 엘레에모쉬네의 의미이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엘레에모쉬네는 신약성경에서 1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엘레에모쉬네는 '구제, 자선'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마태복음은 구제할 때 공공의 칭찬이나 인정을 얻으려고 구제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비난만을 기록하고 있지만(마 6:1-4) 누가복음에는 명확한 가르침 즉, 정결 예식 대신에 구제할 것을 말하며(눅 11:41; 바리새인들과의 변론에서), 제자들과 교회를 향한 하나의 규범으로서 자기의 소유를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줄 것(눅 12:33)을 진술하고 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다비다(행 9:36)와 고넬료(행 10:2)는 이들의 구제 때문에 발탁되었으며 특별한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다비다는 아마 헬라파 유대 여인(이 여인의 이름은 도르가 또는 가젤이라고 설명하고 있음)이었을 것이며 욥바에 살고 있었다. 그 여인은 병들어 죽었지만(행 9:37) 베드로를 통해서 다시 살아났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있는 이달리야 군대의 백부장이었으며, "그가 경건하여 ...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제함을 받으시며(행 10:4; 행 10:31) 그에게 성령을 주심(행 10:44 이하)으로써 그를 영광스럽게 하셨다. 그래서 그는 교회에 가입된 최초의 이방인이었다(행 10:47). 이 사건도 또한 욥바에서 발생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벨릭스(Felix) 앞에서 한 바울의 변론에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로 가는 마지막 여행의 목적으로 자기 백성들을 위해 구제할 것을 가지고 왔었다고 말했다(행 24:17). 셈어의 표현인 "구제를 행하다"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자기의 활동적 책임을 강조했다. 행 3:1-8에서는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침으로써 자비를 구걸하는 시대, 그리고 불완전하게 자비를 베푸는 시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져다 준 완전한 자비에 의하여 막을 내렸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었다(행 3:6).|(참조: H. -H. Esser; R. Bultmann).
긍휼히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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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운, 동정적인.||#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엘레에몬(Homer 이래)은 엘레에오($1653: 불쌍히 여기다, 자비나 동정을 베풀다)에서 유래했으며, '동정심이 있는, 자비로운'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엘레에몬은 70인역본에서 약 30회 나오며, 히브리어 한눈(2587: 호의적인, 자비로움)의 역어로 '자비로운'이나 '은혜로운'(출 22:26; 대하 30:9; 느 9:17; 시 111:4)을, 헤셋(2617a: 선함, 친절, 경건, 긍휼)의 역어로 '인자한'(잠 11:17; 잠 20:6)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엘레에몬은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고전 헬라어 용법과 같이 사용되었다.||(a) 히 2:17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그의 '자비스러운' 성격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b)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구절에서 그 동기는 명백히 하나님의 자비이며, 긍휼히 여기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이 구절에서 동사는 수동태가 사용되어 그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간접적으로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n).
긍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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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히 여김, 동정, 자비.||#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엘레오스(Homer 이래)는 '자비, 불쌍히 여김, 동정'을 의미한다. 헬라어에서 엘레오스는 하나의 파도스($3806), 곧 다른 사람들이 부당하게 당하는 고통에 의해 생겨나고 자비 뿐만 아니라 두려움의 요소를 포함하는 감정이다. 이것은 귀족들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감정이며 재판을 행하는데에 하나의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스토아 학자들은 이 감정을 현자들에게 합당하지 않은 건전치 못한 것으로 간주했는데 이는 스토아 학자들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들은 도덕적 관계가 파도스($3806)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엘레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400회 나오며, 주로 헤세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a) 이 단어는 상호 관계, 예를 들면 친척들 간에, 주인과 손님 간에, 주인과 종 간에, 언약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태도를 나타낸다. 이것은 성벽(disposition)이라기 보다는 행동이며, 신뢰를 근거로 하고 충성을 적절한 태도로 삼는다. 따라서 예를 들어 통치자와 신하 사이에 의무의 요소는 본질적인 것이다. 우월한 자의 편에서, 헤세드에는 또한 은혜도 포함된다. 이것은 특히 하나님의 편에서 그렇다. 하나님은 임의로 자신을 자기 백성과 묶으셨으며, 따라서 의인은 그들 자신이 자비를 보일 때 하나님의 헤세드에 의존하게 된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비록 우리가 요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기대할 수는 있으며 또한 약속된 신실하고 자비로운 사랑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불충실하기 때문에, 이 사랑은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구원을 가져올 용서하는 은혜의 형태를 취하며, 따라서 헤세드는 종말론적인 용어가 된다. 라하밈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동정보다는 사랑의 행위나 표현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 단어는 본래 육체적인 의미를 지녔으며 사랑의 관심을 나타내었다.||(b) 후기 유대교에서 헤세드는 사랑의 행동에 대해 사용되었지만 이 단어는 특히 하나님의 자비를 가리키는데, 종종 그 자비의 신실성에 강조점을 두며, 또한 진노와 구별되는 자비를 언급한다. 하나님의 엘레오스는 이스라엘이나 그를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엘레오스는 계시되고, 기대되고, 소망되고, 탄원되는 그의 은총의 행동이다. 구원 시대는 엘레오스의 시대이다. 필로는 율법이 엘레오스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엘레오스를 하나님의 능한 행사들 중의 세번째 것으로 간주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구주이시다. 그렇지만 필로에게 있어 자비는 행동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감정이며,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엘레오스는 신약성경에서 2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엘레오스는 종종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태도에 대해 사용되었다. 마 9:13; 마 23:23에서 이 단어는 상호 관계에 있어서의 친절을 나타낸다. 70인역본의 "자비를 베풀다"라는 표현이 눅 10:37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동들에 대해 사용된다.|약 2:13에서 자비에 대한 요구는 우리의 자비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다(참조: 마 18:33). 유대교와 비교해 볼 때, 신약성경에서의 새로운 특징은 하나님의 자비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려진다는 것이다. 약 3:17에서 엘레오스는 비록 동정을 포함하지만 일반적인 자애(lovingkindness)를 포괄한다. 이 자비는 또한 일시적인 안녕 뿐만 아니라 영원한 안녕에 대한 관심을 의미할 수도 있다(참조: 유 1:22).||(b)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엘레오스는 종종 그의 은혜로운 신실성을 가리킨다(눅 1:58; 엡 2:4; 벧전 1:3; 롬 11:30). 바울은 의미심장하게 하나님의 엘레오스를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시킨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종말론적 행동이다(딛 3:5). 롬 9:22-23에서, 하나님의 엘레오스에 반대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이다. 롬 9:15 이하; 롬 15:8-9에서는 종말론적인 의식이 또한 고찰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은 이제 하나님의 자비에 사로잡힌 바된다. 심판 때에 자비가 요구된다는 사실은 딤후 1:18; 유 1:21(참조: 마 5:7)에 표현되어 있다. 갈 6:16과 같이 인사말에서 엘레오스는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만 언급할 뿐이다. 딤후 1:16에 의하면 바울에게 보여졌다고 하는 자비에서 볼 수 있듯이, 일반적인 것일 수도 있고 개별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항상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언급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참조: H. -H. Essen; R. Bultmann).
엘류데리아
ejleuqeriva
자유 freedom.||#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엘류데리아(Pin., Hdt. 이래)는 엘류데로스($1658: 자유로운, 자주적인)에서 유래했으며,'자유' freedom, liberty, '독립' independence을 의미한다.|슈라더(O. Schrader)는 이 단어를 인도 게르만어족의 leudh-(국민에게 소속된, 그러므로, 종속되지 않은)에서 파생되었다고 추론한다. 이 단어는 라틴어 liber(자유로운)와 연결이 되며, 슈라더는 이 단어를 옛 고지 독일어 liut, 그리고 현대 독일어 Leute(사람들)와 연결시켰다(Reallexikon der indogermanischen Altertumskunde, Ⅱ, 그러나 참조: Liddell-Scott, 532). 어떤 사람이 국민에 속하는 한, 그는 노예나 외국인이 아닌 자유 시민인 것이다. 그러므로 엘류데리아는 다른 사람(것)에서 독립한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와 '독립'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용법은 원래 노예의 신분과 반대가 된다는 개념에서 발생하였다.(참조: J. Blunck, DNTT).|자유에는 개인적인 자유, 정치 및 국가적 자유가 있다.자유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내야 하며, 이것은 독립을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엘류데리아는 국가의 자치권을 뜻하는 일반적인 말이 될 수 있다.|신비 종교에서 종교 의식을 통하여 입교자는 희망 없는 새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신의 운명의 일부분에 참예하게 된다고 하였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엘류데리아는 70인역본에서 7회 나오며, 레 19:20에서만 히브리어 후프샤(2668: 자유, 해방)의 역어로 노예에 관해 사용되었다. 그리고 엘류데리아는 집회서 7:25에서 '자유로운' 종에 대해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엘류데리아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엘류데리아는 구원과 무관한 일들을 행하거나 행하지 않은 자유에 대해 사용되었다: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고전 10:29).||(b) 엘류데리아는 율법의 속박(에 대하여 세워진)에서부터의 자유에 대해 사용되었다.|① 갈 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②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③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④ 벧전 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c) 엘류데리아는 마음의 눈을 멀게 하여 그리스도의 위엄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유대인의 잘못에서 자유함을 나타낸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d) 약 1:15과 약 2:12에서 "자유의 율법"에 대해 언급하는데 여기서 엘류데리아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새로운 생활 방식을 의미한다. 이것은 썩은 타락된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우리가 영혼의 자유로운 충동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요구하는 바를 행하는 자유이다.||(e) 엘류데리아는 세상의 덧없는 속박과 고통에서 자유를 나타낸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f) 엘류데리아는 자유분방, 즉 방종, 하고 싶은대로 행할 자유에 대해 사용되었다: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벧후 2:19).|(참조: J. Blunck; Walter Bauer; J. H. Thayer).
면하는
ejleuvqero"
자유로운, 속박 받지 않는, 면제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엘류데로스(Homer 이래)는 형용사와 실명사로 사용되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a) 이 단어는 '자유로운, 자주적인, 속박 받지 않는, 자유민 태생의'를 의미하며, 또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 자유를 사용하는 마음 가짐'을 의미한다.||(b) 이 단어는 '고상한, 자신을 제어하는, 아량있는, 관대한' 등의 좋은 의미로, 또한 '무모한, 방종적인' 등의 나쁜 의미를 나타낸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엘류데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7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하프쉬(2670: 자유로운, 면제된, 출 21:2; 출 21:5; 출 21:26; 출 21:27; 신 15:12; 출 15:13; 출 15:18)의 역어로 종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호르(2715: 고귀한, 고결, 귀족, 왕상 21:8; 왕상 21:11; 전 10:17)의 역어로, '귀인, 귀족'을, 레네페쉬(신 21:14)의 역어로 '마음대로'를, 사르(8269: 수령, 우두머리, 통치자, 방백, 렘 29:2)의 역어로 '방백'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엘류데로스는 신약성경에서 2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엘류데로스는 '자유민으로 태어난, 노예가 아닌 자'를 나타낸다. 요 8:33; 고전 7:2; 고전 12:13; 갈 3:28; 엡 6:8; 골 3:11; 계 6:15; 계 13:16; 계 19:18; 여성형, 갈 4:22-30 이하.||(b) 엘류데로스는 '노예이기를 그치는 자의, 자유케 된, 해방된'을 나타낸다: 고전 7:21.||(c) 엘류데로스는 '자유로운, 면제된, 얽매이지 않은'을 나타낸다.|① 고전 9:1에서 '구속받지 않는, 자유자'를 나타낸다. 고전 9:19에서도 마찬가지다.|② 롬 7:3에서 법에서 '자유로운' 것을 나타낸다. 법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이제 법이 정하는 의무 아래 놓여 있지 않다. 따라서 이전에 그를 속박한 사람이나 사물이 금지했던 것을 이제는 행할 수 있다. 고전 7:39에서도 마찬가지다.|③ 마 17:26에서 세금을 '면제 받은' 것을 나타낸다: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d) 윤리적 의미로.|① 갈 4:26에서 모세 율법의 멍에에서 '자유로운' 것을 나타낸다. 벧전 2:16에서도 마찬가지다.|② 요 8:36에서 죄의 속박에서 '자유로운'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③ 롬 6:20에서 의에 대하여 '자유하는 것'을 나타낸다. "의에 대하여 자유하는 것'은 의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행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죄에 종노릇 하는 것이다.|(참조: J. Blunck; Walter Bauer; J. H. Thayer).
자유케 하다
ejleuqerovw
자유롭게 하다, 해방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엘류데로오(Aeschyl., Hdt. 이래)는 엘류데로스($1658: 자유로운, 속박되지 않는)에서 유래했으며, '자유롭게 하다, 해방하다'를 의미한다.|이 단어는 노예에만 적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 단어는 자유로운 행동을 막는 어떤 속박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엘류데로오는 70인역본에서 3회 나오며, 잠 25:10에서 '자유롭게 한다', 마카베오이서 1:27에서 '해방시키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엘류데로오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갈 5:1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 여기서 이 말은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대리적으로 바친 생명의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참조: 갈 3:13; 갈 4:4).||(b) 요 8:32에서 진리를 아는 것이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요 8:26에 보면 자유를 낳는 진리는 살아있는 인격이며, 진리의 화신인 성자 예수 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J. H. Mayfield).||(c) 엘류데로오는 '해방하다'를 의미한다.|①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생명의 성령의 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 생명을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행사되는 법칙 및 권능을 가리킨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죄와 사망의 옛 법에서 자유하게 되었다.(A. T. Robertson).||②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자연도 자신이 받는 부당한 고난 중에서 미래에 있을 자신의 어떤 구원(곧 해방)을 기대하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데트).||③ 롬 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며(롬 6:22), 이것은 또한 자유의 종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온전한 자유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의 역설인 것이다.|(참조: J. Blunck; Walter Bauer; J. H. Thayer).
엘류시스
e[leusi"
옴, 도래 coming.||#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엘류시스는 엘코마이($2064)에서 유래했으며, '옴, 도래'를 의미하며, 드물게 나타난다.||#2. 신약성경의 용법.||엘류시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7:52에만 나오며, 선지자들이 선포한 '의인의 오심'에 대해 말한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여기에서 엘류시스는 '나타남'과 같은 의미를 가지며, 디카이오스(의인)는 유대교에서 세상의 메시야적 심판자의 직함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말을 세상을 심판하신 메시야 예수의 재림에 관한 진술로 취할 수 있다.
상아
ejlefavntino"
상아의 of ivory||#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엘레판티노스(Alcaeus 이래)는 엘레파스(%777: 상아)에서 유래했으며, '상아의' of ivory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엘레판티노스는 신약성경에서 계 18:12에 한번 나온다: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엘리아김
!Eliakeivm
엘리아김 Eliakim(인)||인명 엘리아케임은 히브리어 엘르야킴의 음역이며, '하나님이 세우셨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는 5명의 엘리아김이 있는데, 힐기야의 아들로서 히스기야의 궁내 대신(사 36:3; 왕하 18:37 등),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에 참여한 제사장(느 12:27, 41), 요시아왕의 아들 유다왕, 그리스도의 조상인 아비훗의 아들(마 1:13; 마 1:16), 그리스도의 또 다른 증인인 멜레아의 아들(눅 3:30; 눅 3:31),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마지막 두 사람이다.
엘리에서
!Elievzer
엘리에서 Eliezer(인)||인명 엘리에젤은 히브리어 엘리에젤의 음역이며, '나의 하나님은 도움이시다'를 의미한다.||엘리에젤은 신약성경에서 눅 3:29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한번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나온다: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엘리웃
!Eliouvd
엘리웃 Eliud(인)||인명 엘리우드는 '나의 하나님은 영광이시다'를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마 1:14; 마 1:15의 그리스도의 족보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조상이며, 그리스도 이전 5대 조상으로서 그는 아킴의 아들이며, 엘르아살의 아버지였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