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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엘리사벳
!Elisavbet
엘리사벳 Elisabeth(인)||인명 엘리사벳은 히브리어 엘르아잘(499)의 음역이며, '하나님은 맹세하다'를 의미한다.||엘리사벳은 제사장 사가랴(KJV, ASV, Zacharias)의 아내이며 세례(침례) 요한의 어머니이다(눅 1:5-눅 1:66).|그녀의 남편처럼 엘리사벳은 아론의 자손이었으며, 실제로 그녀는 아론의 아내와 같은 이름을 가졌다(출 6:23).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며, 모든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순종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흠없이 행한다고 묘사되었다. 그녀의 불임은 한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 자녀를 위한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전할 때까지 그들에게 커다란 시련이었다. 사가랴에게 나타난 그 천사는 그들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위한 그들의 기도가 응답될 것이며, 그들의 아들은 메시야 앞에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할 자가 될 것임을 말해 주었다. 이 이야기는 구약의 사라와 한나의 기도에 대한 유사한 응답을 상기시킨다.|엘리사벳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여자 친척" 또는 친족으로 불리워지지만(눅 1:36), 그 용어는 의미가 너무 광범위하여 엄밀한 친척 관계를 나타내지 않는다. 마리아가 그녀를 방문하였을 때, 그 아기는 엘리사벳의 태 중에서 뛰놀았고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그녀가 얼마나 크게 축복받았는지를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주의 어머니가 방문하는 영예를 주신 것에 대한 놀라움을 마리아에게 나타내었다. 고대 라틴어 사본과 초대 교부 이레니우스와 오리겐의 저서에 마리아의 찬양은 본래 마리아보다는 엘리사벳이 지었다는 얼마간의 원문상의 증거가 있다.(S. Barabas)|관련성구.|·눅 1:5; 눅 1:7,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7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눅 1:13,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 1:24,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눅 1: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눅 1:40; 눅 1:41,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 1: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엘리사
!Elissai'o"
엘리사 Elisha(인)||#1. 구약성경.||엘리사이오스는 히브리어 엘리샤의 음역이며, '나의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를 의미한다.||엘리사는 잇사갈 지파 사밧의 아들이며(왕상 19:19-21), 아벨므흐라성의 출신이다. 그는 B.C. 9세기 북왕국 이스라엘의 유명한 선지자이며, 아합 통치 후기 시대부터(왕상 19:15-17) 요아스의 통치 때까지(왕하 13:14-21), 약 B.C. 850-800년간 활동했다.|그는 엘리야의 제자이자 동료이자 후계자이다(왕상 19:16 이하; 왕하 1-13장). 엘리사는 기적의 선지자로 유명하다.||#2. 신약성경의 용법.||엘리사는 신약성경에서 눅 4:27에 한번 나온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갈아 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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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둘 말다, 말아치우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헬릿소(Homer 이래)는 '둘둘 말다(감다), 감아올리다, 말아치우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헬릿소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히 1:12에서 '말아치우다'를 의미한다: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하늘들은 '옷처럼 (둘둘) 말아 치울 것이다.||(b) 계 6:14에서 하늘이 책처럼 '(둘둘) 말아져' 떠나가는 것을 묘사한다: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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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종기.||#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헬코스(Homer 이래)는||(a) '상처, 곪은 상처'(Homer),|(b) '헌데, 종기'(Thu., Theophr., Polyb.)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헬코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눅 16:21에서 나사로의 '헌데'에 대해 사용되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b) 계 16:2에서 '헌데나 종기'를 의미한다: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이 재앙은 애굽에 내린 여섯 째 재앙과 같다(출 9:10). 전체 구절은 이 종기가 '지긋지긋한 악성 종기'(Phillips)임을 암시한다.|계 16:11에서도 이 단어는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헌데를 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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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기가 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헬코오(trag. 이래)는 헬코스($1668: 상처, 헌데, 종기)에서 유래했으며,||(a) '상처를 입히다',|(b) '궤양을 생기게 하다, 종기가 생기게 하다', 수동태로 '종기(궤양)가 생기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헬코오는 신약성경에서 눅 16:20에 한번 나온다: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헬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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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당기다 draw, 강제하다 compel.||#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헬퀴오/ 헬코의 기본적인 의미는 '끌어 당기다, 잡아 당기다', 또는 사람의 경우에 '강제하다'를 의미한다.||이 단어는 마술에 의해 어떤 장소로 '끌어 당기는' 것이나(Theocr.) 귀신들이 짐승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porphyr.)에 대해, 또한 의지의 내적 영향력에 대해(Plato)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a) 동사 헬퀴오/ 헬코는 70인역본에서 주로 35회 나오며, 히브리어 마샤크(4900: 끌다, 끌어내다, 행진하다, 즐겁게 하다 등, 신 21:3; 삿 5:14; 느 9:30; 시 10:9; 전 2:3; 아 1:4; 렘 31:3; 렘 38:13), 샬라프(8025: 꺼내다, 뽑다, 빼어버리다, 삿 20:2; 삿 20:15; 삿 20:17; 삿 20:25; 삿 20:35; 삿 20:46), 느가드(5047: 흐르다, 흘러나오다, 단 7:10)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b) 근대의 셈 계통의 문화에서 magdub의 개념을 주목해야 한다(magnum와 다름). magdub(gadab: 끌어당기다에서 유래)는 저항할 수 없고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하나님께로 이끌리는 자이며, 반면 magnum은 귀신이 들린 사람이다. 전자는 거룩하며,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으며 그의 은혜로 충만하다. 후자는 마귀의 거주지, 또는 그의 동료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들은 일반적으로 동의어로 사용된다. 사람이 갑자기 초자연적이고 불가항력적으로 하나님께 부름 받을 때 그는 종종 사고의 균형을 잃는다(구약 병행구절, 삼상 10:5; 19:19 이하; 왕하 9:11; 렘 29:26; 호 9:7; 참조: 막 3:21).||(b) 구약성경에서 헬코는 강력한 충동에 대하여 사용된다. 아 1:4의 모호한 표현, 힐퀴산 세(%310)는 어쨌든 사랑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이 단어는 마카베오사서 14:13; 15:11에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 사용된다. 우리는 렘 31:3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이끄심 drawing"을 발견한다. 그 원문은 인내에 더해 더 언급한다. 70인역본은 구원을 위해 끌어내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생각하고 있지 않고(렘 38:13; 삼하 22:17), 사랑으로 자신에게 이끄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이러한 용법은 요한에 의해 독특하게 발전된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헬퀴오/ 헬코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이 단어는 문자적 의미로,|① 요 18:10에서 시몬이 칼을 '뽑는 것'을 나타낸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② 요 21:6; 요 21:11에서 어망을 '끌어 당기는 것'을 나타낸다: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그물을 들 수 없더라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③ 행 16:19에서 바울과 실라가 관원들 앞에 '끌려간 것'을 나타낸다: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④ 행 21:30에서 바울이 성전 밖으로 '끌려나간 것'을 나타낸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⑤ 약 2:6에서 부자가 상대를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을 나타낸다: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b)이 단어는 중요한 두 구절, 즉 요 6:44과 요 12:32에서 나타나며, 구약의 용법에 가깝다. 여기에는 힘이나 마술에 관한 개념은 없다. 이 용어는 비유적으로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의 초자연적인 힘을 표현해 주는데, 이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나(요 12:32) 그 사랑 없이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께 올 수 없다(요 6:44). 외견상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진술은 은혜의 선택성과 은혜의 보편성 둘 다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강제는 자동적인 것이 아니다.|(참조: A. Oepke).
헬라
@Ellav"
헬라, 그리스 Greece.||#1. 고대와 구약 시대.||(a) 헬라스 호머(Hom. Il. 2. 684)에 데사리(Tessaly)에 있는 프디오티스(Phthiotis) 지역의 명칭인 헬라스는 6세기 이후 점차적으로 데사리(Thessaly), 에피루스(Epirus), 펠로폰네수스(Peloponnesus)와 에게해의 섬들이 있는 아시아 미노(Ionia)의 해안을 포함하는 전 그리스의 명칭이 된다. 마카베오일서 1:1에 따르면 헬라스는 알렉산더의 제국과 동일하다. 마카베오일서 1:10에서(다른 곳에서도)는 셀류키드를 ""의 통치자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마카베오일서 8:9에서는 헬라스가 아기야(Achaean) 연맹이라는 보다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고린도가 멸망당한 때인 146 B.C.).||(b) 헬라스는 70인역본에서 사 66:19; 겔 27:13에서 히브리어 야완의 역어로 사용되었다.||#2. 신약성경의 용법.||헬라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20:2에 한번 나온다: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여기에서 이 명칭은 방언으로서 신약성경(10회)의 다른 곳에서 사용된 용어인 보통 지방의 명칭인 아기야 대신 사용된다. 아기야는 그리스의 중앙과 남부를 포함한다. B.C. 146년에 로마는 결국 아기야를 패배시키고 한동안 마게도냐 총독의 지배 아래 두었다. B.C. 27년 그곳은 고린도의 총독이 주재하는 독립된 지방(상원의)이 되었다.|(참조: J. Wanke).
헬라(인)
$Ellhn
헬라 사람 Greek.||#1. 헬라 세계 및 구약에서 헬렌.||(a) 이 단어는 B.C. 약 700년부터 헬렌은 공통 관습, 언어, 학문, 문화, 종교, 국민 신분에 의한 희랍 종족, 도시와 국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 단어는 발바로스($915: 야만인들)의 반대어로 발전하였다. 헬라어, 헬라 종족, 그리고 헬라 문화는 사실상 절대화되었는데, 제의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파이데이아($3809: 교육)에 근거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때로 헬라 문화를 가진 헬라인만을 가리키는 용어로 국한시킬 수도 있고 때로는 헬라어와 헬라 문화를 받아들인 야만인들에게 확대 적용시킬 수도 있다.||(b) 비 헬라인들의 헬라화 과정은 마게도냐의 헬라 제국 설립 이전에 시작했다. 필립(Philip)과 알렉산더(Alexander)의 정복의 첫 효과는 마게도냐의 합병과 그 배후지로 유입되는 것이었다. 헬라 문화는 아시아와 이집트, 특히 도시로 퍼져 나갔다. 이집트에서 이 용어는 지배 계층만을 가리키는 경향이 있었지만, 새로운 도시들이 많이 생겨난 아시아에서는 비 헬라계 본토인들이 헬라 문화를 더 널리 받아들이고 혼합 결혼을 함으로써 더 급속히 헬라화되어 갔다. 헬라 문화는 시실리와 남부 이탈리아를 경유하여 서쪽으로 이동하였으며, 그 후 로마로 이동하였다. 로마는 헬라 왕국들을 점령함으로써 헬라화의 과정을 계속하였다. 헬라화의 과정이 얼마나 멀리까지 진행되었는지는 예를 들어 애굽에 있던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성경의 70인역본(헬라어 성경)을 주전 3세기에 그들을 위해 만들어야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조상들이 사용하던 히브리어(아람어)를 이해하거나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훨씬 더 영향을 받았다. 많은 헬라 문필업이 헬라어만을 구사할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이방인들 사이에 유대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발달하였다.||(c) 유대인들은 셀류키드 왕가 통치자들에 의해 추진되던 헬라화의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헬라어로 예배드리고 율법을 읽었다. 마카베오일서는 헬라 정신과 헬라인의 생활 태도가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에게 얼마나 깊이 침투해왔는지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심지어 기본적인 종교적 교의를 잃어버릴 위험도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조상들의 신앙을 버리고 율법에서 돌아서려고 하였다.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B.C. 163)에 의해 행해진 이와 같은 격심하고 꼴사나운 헬라화 시도는 율법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반감을 자극시켜 마침내 마카베오운동이 발발했다(참조: 마카베오이서 6:1 이하). 그렇지만 마카베오가 사람들 자신도 비교적 쉽게 헬라화되었다. 율법을 신봉하던 경건한 유대인 계층도 이렇게 헬라의 사상과 가르침과 신화(전통의 관념, 영혼불멸, 그리고 내세에 대한 신화를 포함한)로 빠져들게 되었다. 탈무드(Talmud)나 미드라쉬(Midrash)에 나오는 수많은 헬라 외래어들은 심지어 유대교의 영역에서 조차 헬라의 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던 반발이 주후 2세기 초에 나타나서, 그때에는 헬라어를 배우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금지도, 바로 뒤이어 헬라의 "지혜"를 배우는 것에 대한 금지도 약화되었다(Sot. 9:14; 참조: Sot. 496). 주후 9세기의 유대 카라잇(Karaite) 종파도 헬라 철학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다. 유대인들에게 오로지 성경만을 연구하도록 요구했다는 점에서, 이 종파는 탈무드나 다른 일련의 문서에 미친 헬라의 영향을 거부하고 있었다.|유대인들은 헬라인들의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그들의 제의는 거부하였다. 후에 헬라 문화가 우상 숭배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이유로, 헬라 문화에 대해서도 반발이 생겨난 것이다.|70인역본은 때때로 헬라스 등과 함께 헬렌을 사용하는데, 일반적으로 헬라인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 용어가 나타내는 헬라 영역은 종교적인 것이어서 이 용어는 이방인에 가까운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대제사장 야손은 헬라인이라 일컬어졌는데, 그 이유는 그가 유대 관습을 버리고 헬라 관습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언어, 문화, 종교가 독특하게 복합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헬레니즘은 가장 위험스런 형태의 이교 사상이었다.||#2. 신약성경의 용법.||헬렌은 신약성경에서 26회 나오며, 사도행전에 10회, 바울 서신에 13회 사용되었으며, 공관복음에는 사용되지 않았다.||(a) 요한복음의 헬렌.|① 요 7: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터인가". "헬라인들 중에서"라는 말은 지리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헬라인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헬라 세계로 들어가시려 하는가? 라는 의미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헬라인 중에 흩어사는 자들 즉 헬라인들 가운데서 생활하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이런 원리에서부터 그들을 가르치려 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수님은 헬라인들을 가르치시지 않았고 또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다.|② 요 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여기서 헬레네스는 헬라어를 말하는 개종자를 가리키지 이방인들이 이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싶어 한다고 해서 그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필수 조건으로 하는 이방 선교에 대한 기대를 불러 일으킨다. 맨처음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자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 기독교인이었다(참조: 행 11:20).||(b) 사도행전의 헬렌.|① 바울과 그 동료들은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유대인들이 메시지를 거부할 때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향했다.|·행 14:1; 행 17:4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과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행 18:4에서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파했다.|·행 19:10에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파했다.|② 행 16:1에서 디모데의 부친은 헬라인이었다. 유대인과 헬라인은 어디서든지 함께 살았으며, 그 결과 혼합 결혼이 생겨났다. 이처럼 혼합 결혼한 부모들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디모데가 있다.|③ 행 21:28에서 바울은 헬라인을 성전으로 끌어들여 성전을 더럽혔다는 비난을 받았다: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④ 헬렌은 때때로 개종자(proselyte)를 의미하기도 한다.|·행 14: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행 17: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 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행 14:1; 행 14:2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것 같지만, 행 17:4 등은 헬라인들이 대부분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며 따라서 헬라인과 이방인의 구별은 주로 문화적인 것이었음을 시사해 준다.||(c) 바울 서신의 헬렌.|바울은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로마서, 그리고 골로새서에서 헬라인들에 대해 언급하는데, 언제나 유대인과 관련시키며, 또한 야만인들과도 관련시키고 있다. 헬라인들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민족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바울의 문구들은 민족적인 의미를 지닌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우월감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모든 사람들, 특히 헬라어와 헬라 문화를 통하여 하나가 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헬라인들의 특징적인 것은 지혜이지만, 이것은 그들의 인간적인 지혜가 하나님의 복음의 지혜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장애물이 된다(참조: 고전 1:8 이하).||롬 1:16에 의하면 비록 그들이 피조물로부터 하나님을 알았다하더라도, 그들은 우상 숭배와 사악함 가운데로 빠져들어 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그들은 심판 아래 있으며 구원 메시지를 들어야 할 사람들 중에 포함되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고전 10:32에서 그들은 도덕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도덕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참조: 롬 2:12 이하) 그들의 도덕적 판단을 고려해야 한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그러나 롬 2:9; 롬 2:10에 의하면 그들 또한 그들이 저지른 그릇된 행위 때문에 위협 아래 있게 된다.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의 어떤 구별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아낌없이 주심으로, 복음 안에서 사라진다.|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나 부름받았다면, 양자 모두에게 하나님의 권능이요 지혜가 된다.|그러므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은 하나의 새로운 단일체, 즉 공동체로 연합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갈 3:27-갈 3:28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자 그의 영을 지닌 자들로서 평등하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다.|갈 3:29에서 헬라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받아들여진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골 3:9 이하에서 새로운 인간 안에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헬라인의 사도로서 바울은 그들을 위한 복음의 함축적인 의미를 발전시켰다. 이는 그가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 전파로 무수히 많은 헬라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였고, 그들에게 율법의 멍에를 씌우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신자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그들이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동일한 몸에 속한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바울에게 있어서 헬라인이란 이방인을 의미한다.||골 3:11에서 헬라인과 야만인을 구별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고 고전 1:22에서 지혜를 헬라인의 특징으로 언급할 때에도 분명히 나타나듯이, 그는 헬라인과 이방인을 동일하게 취급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헬라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구원사 안으로 받아들여진 사람들의 집단으로서의 이방인에는 헬라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비록 헬라인들이 여전히 구별된 집단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이방인 가운데 포함되며 이방인을 대표한다. 비록 이방인이 여전히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용어이긴 하지만, 기독교가 헬라의 토양 위에 확고하게 확립되자(그리고 민족적인 구분이 이렇게해서 제거되자), 헬라인과 이방인은 완전히 동일한 말이 되었다.|(참조: H. Windisch; H. Bietenhard).
헬레니코스
@Ellhnikov"
헬라어 Greek.||헬레니코스(Aeschyl., Hdt. 이래)는 헬렌($1672: 헬라 사람)에서 유래했으며, '헬라어, 헬라의'를 의미한다.||헬라니코스는 신약성경에서 요한계시록에서만 한번 사용되었다.|계 9:11,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여기서 무저갱의 사자의 이름은 엔테 헬레니케(글롯세[glosse]를 공급하다), 즉 '헬라어로' 아볼루온($623)이다. 헬레니스티는 '헬라어로'라는 뜻을 지닌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헬라인
@Ellhniv"
헬라 여자 Greek woman.||헬레니스는 헬렌($1672: 헬라 사람)의 여성형이며, '헬라 여자'를 의미하며, 유대인이 아닌 '이방 여인'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헬레니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마가복음과 사도행전에만 사용되었다.||(a) 막 7: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헬레니스는 수로보니게 여인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지만, 두번 묘사함으로써 말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절대적으로 분명하지는 않다. 아마도 헬라어를 사용했을 이 여인은 자기의 신앙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도움을 받은 이방인이었을 것이다(레인[W. L. Lane]은 '그녀가 두로의 뵈니게 공화국에 살고 있던 헬라화된 시민 계층의 한 사람으로써 태생과 문화에서 이방인이었으며, 뵈니게가 행정적으로 수리아 지방에 속해 있으며 북 아프리카에 있던 카르타고를 중심지로 한 리보뵈니게와 구별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수로보니게인이라고 칭해졌다'고 주장한다[The Gospel of mark, NLC 1974, 260]).|(b) 행 17: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Bietenhard).
헬라파(인)
@Ellhnisthv"
헬라주의자 Hellenist||헬레니스테스는 헬레니조(헬라어를 말하다, 헬라인으로 살다)에서 유래했으며, '헬라주의자'를 의미한다.|헬레니스테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사도행전에 사용되었다.|① 행 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② 행 9: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③ 행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이 단어는 새로운 단어인 것 같다. 이 단어는 헬라어에서도 헬라적 유대 문헌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 의미는 논쟁이 된다.||(a) 지배적인 견해는 행 6:1의 헬레니스타이는 헤브라이오이(%346), 즉 아람어와 순전히 유대 문화를 사용하는 믿는 유대인과 구별되는 헬라어를(그리고 아마도 헬라 문화를) 사용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인데, 후자는 예루살렘으로 이주한 디아폴라 톤 헬레논의 유대인들이며, 전자는 그 출생지가 예루살렘인 토착 유대인들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공동체는 말과 문화가 다른 두 그룹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었다. 헬레니스타이는 또한 율법에 대해 보다 덜 엄격한 견해를 가졌으며, 더 이상 엄격하게 유대의 의식을 따라 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도 가능하다.||헬레니스테스는 헬레니조(%345)에서 파생되었다. 만일 헬레니조가 '헬라어를 말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헬라인으로서 살다'를 의미한다면, 헬레니스테스는 헬라어뿐만 아니라 헬라적 또는 비유대적 생활 방식도 포함한다. 이것은 아마도 예루살렘에 사는 헬레니스트 헬라주의자에게 잘 맞는 말일 것이다. 물론 바울이 행 9:29에서 함께 변론하고 그를 죽이려고 한 헬레니스타이는 흩어져 있는 광신적인 정통파 유대인들이었다. 헬라파 스데반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의 유대인들(아마도 개종하지 않은 사울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사이의 비슷한 논쟁을 비교하여 참조하라. 스데반과 논쟁한 그들은 모두 믿지 않는 헬레니스타이로 묘사되었을 것이다(행 6:9).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행 21:27에서 그의 체포를 야기한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인 헬레니스테스였다.||(b) 두 번째 견해는 헬레니스타이가 헬라인들이라는 것이다. 제시되는 가장 오래된 예는 행 11:20에서 헬레나스 대신에 쓰여진 헬레니스타이이다(반의어, 11:19의 유다이오이스). 얼마 후 기자들은 이교도 헬라인들을 크리스티아노이와 대조하여 헬레니스타이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헬레니스타이는 분명히 헬레네스의 동의어이다; 그것은 '헬라어를 사용하다, 헬라인으로 살다, 헬라인이다'라는 의미로 헬라인들에 대해 사용될 때의 헬레니제인에 해당하며, '헬라인 혈통의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이 해석을 위하여는 행 6:1에서 다음 사항들이 지적된다.|① 한편으로는 헬레니스타이가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을 의미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헤브라이오이가 히브리어를 말하는 유대인일 이유가 없다. 헤브라이오이는 우선 순수한 혈통의 유대인들이다. 그래서 유베비우스(Eusebius)는 필로(Philo)를 Hist. Eccl., II, 4에서 헤브라이오스라고 부르고, 헬라어를 말하는 트리포(Trypho)를 IV, 18, 6에서 톤 톤 토테 헤브라이온 에피세모타톤라고 부른다. 왜 단순한 언어의 차이가 과부들을 돌봄에 있어서 오해와 장애를 일으키게 되었는가도 역시 의문시될 수 있을 것이다.|② 사도행전은 종종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들을 언급하지만(행 18:2의 아굴라; 행 18:24의 아볼로 등), 결코 그들에 대해 헬레니스테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③ 행 6:5에서 비록 그들이 헬라인 혈통의 사람들일 것이라는 가정이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헬라어 이름의 일곱 명이 선택된다. 개종자(안디옥의 니골라)에 대한 언급은 헬라인 혈통의 신자들이 적어도 헬레니스타이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c) 다른 한편은, 예루살렘 공동체가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었다는 결론은 고넬료에 대한 이야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행 10장 이하, 특히 행 11:17 이하). 그것은 Cadbury와 논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사도행전 2장에 따르면 사도들의 회개의 메시지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설교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이 종족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예상하게 된다(참조: 행 2:8 이하, 39).|또 하나의 이론(異論)은 행 9:29은 확실히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이방인들과 논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해석을 위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그러나 행 11:20에서 헬레니스테스는 더 어렵고 더 좋은 읽기라고 인정되었고 여기에서 틀림없이 헬라인이나 이방인들을 의미하므로 행 9:29은 예감으로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마지막 장애물은 행 6:1인데, 여기에서 Cadbury는 어떤 설득력있는 대답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일반적인 해석도 오랜 해석의 전통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와 같이 그다지 확실하고 자명하지는 않다고 지적된다. 헬레니스타이가 율법을 따라 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초기 그리스도교 무리의 이름이었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참조: H. Windisch; Walter Bauer; J. H. Thayer).
헬라말
@Ellhnistiv
헬라어로 in Greek||#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헬레니스티(X., An.)는 헬레니조(%778: 헬라화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헬라어로' in Greek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헬레니스티는 신약성경에서 2회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에만 사용되었다.||(a) 요 19:20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쓰인 제목은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b) 행 21:37에서 바울을 군중들로부터 구출해 낸 관리는 바울이 헬라어를 이해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더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 가로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bietenhard).
회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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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에 넣다, 계정에 달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엘로게오는 엔($1722)과 로고스($3056: 계산)에서 유래했으며, (아무의) '계정에 달다, 계산에 넣다, 전가하다, ~탓으로 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엘로게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로마서와 빌레몬서에만 사용되었다.||(a) 엘로게오는 몬 1:18,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여기서 상업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도망자 오네시모로 인해 입게 된 어떤 손해이든지 바울 사도에게 청구하라는 뜻이 된다.||(b) 롬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에 의한 인간의 죄에 대한 '엘로게스다이'(분사)는 율법의 계시와 함께 제시된다고 여겨진다. 하나님의 율법이 아담을 마주하고 있었으며, 모세의 시대로부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가진다. 그러므로 아담에게서, 그리고 모세의 시대로부터 죄가 하나님의 명령(엔돌레)과 관련하여 생겨나고 그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역이다. 율법은 그러나 그것을 위반하는 자들을 죽음의 저주 아래 둔다(갈 3:10). 아담과 모세 사이의 시대에는 인류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사람들이 범죄하였을 때, 그들은 아담의 범죄와 같이 그렇게 하지 아니했다(롬 5:14; 참조, 4:15). 즉 아담의 타락에 의해 이루어진 전체적인 상태에 의하여 그렇게 한 것이지 하나님에 대한 의식적인 악의에서 또는 주어진 율법에 대한 반항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죽은 죽음은 따라서 아담 안에 놓인 포괄적인 숙명이지 형벌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죄를 벌하시지만(롬 2:12 이하) 죽음으로서는 아니다. 그러나 롬 5:12 이하에서는 사망이 죄에 대한 형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롬 5:13에서 "죄가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노라"를 읽을 때, '계산에 넣는 것'(엘로게이스타이)이 율법과 연결되며, 죄를 계산에 넣는 것의 결과는 사망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율법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는 곳에서 죄는 다르게 평가된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전체적인 상태에 관계됨이 아니다. 그것은 거룩하게 선언된 뜻에 대한 위반이다. 그러므로 죄는 매우 다른 결과를 지닌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의, 뜻과 생명의 친교로부터의 제외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단순한 숙명이 아니다; 아담과 이스라엘의 율법의 위반자의 경우(갈 3:10; 롬 3:19)에서처럼, 그것은 형벌이다. 바울은 그래서 율법의 계시의 요구 아래 있는 인간의 죄된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엘로게이스타이로 묘사한다. 중요한 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인간의 죄는 '계산에 들어가는' taken into account 또는 '값이 매겨지는' charged 것이므로 인간은 뜻과 창조의 거룩한 친교로부터 제외된다. 바울은 아담과 모세 사이의 기간에 관하여는 이것을 부인하지만 모세 이후의 시대에 대해서는 보다 더 결정적으로 이것을 확언한다.|(참조: H. Preisker)
엘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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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마담 Elmdam(인)||인명 엘마담은 누가복음의 족보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조상이다: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눅 3:38).
소망을 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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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다, 바라다 expect, 소망하다 hop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엘피조(Hdt. 이래)는 엘포(%34: 바라다, 기대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소망(희망)하다' hope, '기대하다' expect, '추측하다' suppose, '생각하다' think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엘피조는 70인역본에서 약 100회 이상 나오며, 15개의 히브리어를 번역하는데 주로 히브리어 바타흐(안전감을 느끼다, 의지하다), 하사(피난하다, 숨다), 야할(기다리다), 카와(근심스럽게 기다리다)를 번역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엘피조는 신약성경에서 2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소망에 대한 신약성경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구약성경의 소망의 개념에 영향을 받는다. 세속적인 소망을 가리킬 경우에만 이 어군은 (좋은) 기대를 의미한다: 눅 6:34; 눅 23:8; 눅 24:21; 행 24:26; 롬 15:24; 고전 16:7.|소망에 대한 구역성경의 개념의 신뢰의 요소는 고후 1:13; 고후 5:11; 고후 13:6에서 처럼 인간이 고려될 때 강하게 나타난다. 비록 소망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의존하지만 고전 13:7의 요지는 인간에 대한 신뢰이며 사랑의 산물이기도 하다.||(b) 소망이 하나님에 대한 것일 때, 그 소망은 기대, 신뢰 그리고 끈기있게 기다림을 포함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히 11:1에서 처럼, 믿음과 관련있다. 믿음은 우리의 소망에 "실상"을 부여해 주거나 또는 "바라는 것들에 대한 증거"이다.|롬 8:24 - 롬 8:25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게 존재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점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게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사르크스($4561)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소망의 기초가 될 수 없다는 구체적인 점도 지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랄 수 없는 것을 소망가운데 믿고 인내로 기다려야 한다. 즉 우리가 지배할 수 있는 것들을 더 이상 의지할 수 없고 신적인 미래를 의뢰해야 한다(참조: 롬 4:18).|소망은 기다림으로 단련 받는다. 곧 벧전 1:13에 나오는 "은혜를 온전히 바람"이라는 말씀 앞에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즉 무서운 공격에 대비하라는 것이다. 이 본문에는 미래에 대한 모든 계획들을 근본적으로 포기하고 우리의 제한된 지식을 겸손하게 인정하여 우리의 바라는 바들을 생명을 위하여 받은 전투의 명령들에 복종함이 포함되어 있다. 고전 15:19; 고후 1:10에서 소망은 확고한 확신의 요소를 지닌다. 구약성경의 소망 개념과의 주요 차이점은 구원 사역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따라서 소망 그 자체가 종말론적 축복이며,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확신을 가질 모든 이유가 있다는 점이다(고후 1:13; 참조: 고후 1:12). 소망은 구원 행동에 대한 믿음에 의존하며(롬 8:24 - 롬 8:25), 이 소망은 성령에 의해 지지된다(참조: 롬 8:26 - 롬 8:27).|딤전 4:10("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에서는 종말론적 미래에 대한 기다림의 요소가 지배적이지만, 마 12:21에서는 소망 그 자체가 종말론적 축복이다: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참조: 벧전 1:3)|(참조: Walter Bauer; R.Baltman; E.Hoffma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