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qhsaurov"
보물상자, 금고, 곳간, 창고, 보물.||#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데사우로스(Hes., Hdt. 이래)는 어원이 불확실하며,||(a) '저장되거나 보관된 것, 보물',|(b) '저장소, 창고, 곳간, 보물창고, 보물상자'를 의미한다.|매우 초기 시대부터 신전들은 보물창고들로 건축되어 그 곳에 헌물과 세금으로 받은 헌물과 돈이 저장되었다.|만다교(Mandaean) 영지주의 문헌은 영혼이 생겨나서 구원을 경험한 후 되돌아가는 생명과 빛의 보고와 보화라는 개념에 대하여 사용하였다.|(참조: W.Foerster, Gnosis: A Selection of Gnostic Texts, Ⅱ).||#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데사우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9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호찰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문자적, 비유적 의미로 '보물, 재물, 창고, 곳간, 보고'를 나타낸다.|유대교에서 자선과 같은 선행들은 하나님 앞에 쌓여지는 보물, 장차올 세상에 보상으로 쌓아둔 보화인 반면에 그 이자는 이 세상에서도 향유되는 것이다(참조: 토빗 4:8이하; 에스드라하 6:5이하; 7:77). "이스라엘이 율법 성취와 선행의 형태로 모은 모든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위해 모은 것이다"(신 1:1; 참조: F.Hauck, TDNT). 때때로 랍비들은 서기관이 묘사하는 보화와 영생의 보고, 즉 죽은 자들의 영혼을 저장해 두는 곳, 또는 그 영혼들을 "묶은" 묶음에 대해 말한다(참조: 삼상 15:29; F.Hauck).||#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데사우로스는 신약성경에서 18회 나오며, 그 중 공관복음에 15회 사용되었다.||(a) 마 2:11에서 데사우로스는 '보물 상자'를 의미한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b) 마 13:52에서 데사우로스는 '보관 창고'나 '보고'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이 곳간의 내용물은 단순히 가르침 그 자체가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근거로서 가르침이다.||(c) 마 13:44에서 데사우로스는 (문자적으로) '보물(화)'을 의미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여기에서 천국은 보화와 비교된다. 예레미아스(J.Jeremias)는 천국이 주는 기쁨과 그것의 요구에 관심을 둔다: '이 기쁜 소식의 결과는 압도적인 것이다. 이것은 기쁨으로 심령을 충만케 한다. 또한 하나님의 공동체의 완성을 삶의 전 목표로 삼고 가장 진실한 자기 희생을 산출한다'.|랍비 교훈에 의하면, 만일 일군이 일을 하는 중에 보화를 캐내었다면 그것은 주인에게 속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비유에 나오는 사람은 그가 그 밭의 실제적인 소유자가 되기까지 사실상 그 보화를 캐내지 않았다. 그 사람이 그 밭을 사기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들였다고 말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 보화를 거저 얻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더구나 그는 그 보화를 얻기 위해 법이 허용해 주는 어떠한 일이라도 할 용의가 있었다.||(d) 마 12:35에서 데사우로스는 '보고' 또는 '보화'를 의미한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병행구, 눅 6:45).|여기에서 마음은 데사우로스와 병행한다. "쌓은 선"이란 말은 '선한 곳간이나 선한 보화'를 의미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요점은 선함이 선한 마음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곧 이 말은 선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악을 도모하는 위선자에 대한 경고를 나타낸다. 마태복음에서 이 예화는 성령을 거스리는 불경에 대한 경고 뒤에 나오며, 요나의 표적과 니느웨의 사람들에 대한 말씀의 앞에 나온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예화가 평지 설교 말씀들에 포함되어 있다.||(e) 마 6:19; 마 6:20; 마 6:21에서 '보물(화)'를 의미한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그 병행구, 눅 12:33, 눅 12:34에서는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라고 되어 있다.|'마태복음의 대귀법과 동의어 반복은 히브리식이며 아마도 원래의 말씀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는 재물과 의복 등을 미련스러울 정도로 많이, 곧 사용하기에는 너무 많은 양을 저장해 두었던 동양인들의 참된 모습을 제공해준다'(A.H.McNeile, St.Matthew).||(f) 마 19:21에서 보화에 대한 가르침은 더욱 나아가 부유한 청년 관원의 이야기에 나타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병행구, 막 10:21; 눅 18:22).||(g) ① 고후 4:7에서 데사우로스는 기독론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의 보배를, 그것을 받는 자의 육체적 존재와 비교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보배는 앞절에서 이미 빛의 창조를 상기시키는 방법으로 정의되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참조: 창 1:3; 시 112:4).|이 보배는 이렇게 계시된다. 그러나 동시에 감취어져 있다는 의미도 있다. 이 보배는 그것을 담고 있는 그릇에 의해 감취어지며 또한 내적 실재와 모순되는 신자의 생활의 외적 상황들에 의하여서도 감취어진다.|② 골 2:3에서도 보화를 기독론적으로 말한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고후 4장에 나오는 바와 같이, 이 보화는 계시 및 지식과 연결된다(참조: 골 2:2). 그러나 감추인 것은 세속적인 눈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으로서, 그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그 안에 거하신다(참조: 골 1:15; 골 1:19).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데, 바로 그 하나님 안에 신자들의 생명이 감추어져 있다(참조: 골 3:3). 골 2:3에 나오는 모습은 숨겨진 보물의 모습으로서 여기에는 이것을 찾는 일에 모든 것을 걸라고 수색자를 유도하는 암시가 있다. 곧 이 구절은 지혜와 지식의 보물이 발견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만을 탐색하라고 하는 요구를 암시하고 있다. "유대 묵시는 바른 지식으로의 권유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기 위하여 종종 감추인 보화에 대하여 말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해 선택된 자들에게 할당하신 은사가 신비로 가장하여 나타나기 때문이다"(E.Lohes, Colossians and Philemon, Hermeneia ).||(h) 히 11:26의 정확한 의미는 상당한 논의의 주제가 되어 왔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이것은 마치 모세가 빌 3:7에 기록된 바울의 경험에 필적할만한 그리스도 경험, 곧 그리스도를 애굽의 보화보다 더 좋게 여기게 한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나 환상을 가진 것으로 일반적으로 기독론적으로 해석한다.|그러나 모세가 애굽의 보화보다 오히려 낫게 여겼던 것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이었다. 왜냐하면 모세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었기 때문이다(참조: 히 11:27). 따라서 이 구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모세가 백성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대목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바로에게 이 점, 곧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는 것을 상기시켰다(출 4:22). 또한 모세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운명과 동일시하였다. 이 해석은 구약 역사에서 이끌어낸 히브리서 11장에 나와 있는 믿음에 관한 다른 모든 실례들과 화합하는 훨씬 더 우수한 해석이다. 이유는 이 실례들 중의 하나도 독특한 기독론적 해석을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구약성경 및 유대적 배경과 관련된다. 이스라엘의 백성의 운명이었던 훼방, 능욕, 또는 오명은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운명인 훼방을 예상하는 것이다. 똑같이 믿음의 행위는 물질을 얻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약속들에 비추어 고난을 택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이처럼 한가지는 다른 것의 유형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투 크리스투(tou Christou)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한 언급으로 해석한다면, 이것은 일종의 속기법으로서, 그 안에서 유형과 원형이 연합한다.|(참조: Walter Bauer; F.Hauck; J.Eichler; C.Br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