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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남은 자
katavleimma
남은 자 remnan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카탈레임마(Galen)는 카탈레이포($2641)에서 유래했으며, '나머지, 남은 자'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카탈레임마는 70인역본에서 21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쉬에리트(7611: 나머지, 남은 것, 후손; 창 45:7; 삼하 14:7; 왕하 19:31), 쉬아르(7605: 나머지, 남은 자, 남은 것)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후손, 씨, 남은 자' 등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카탈레임마는 신약성경에서 롬 9:27에 한번 나온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의 대다수는 심판에 처해지는데 반해 오직 일부분만 거룩한 '남은 자'로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유대인의 기독교인들의 모습에서 본다는 것을 다룬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떨어뜨려 두다
kataleivpw
남겨두다 leave, 뒤에 남기다 leave behind.||동사 카탈레이포(Homer 이래)는 카타($2596)와 레이포($3007: 남겨두다, 두고가다, 떠나다)에서 유래했으며, '남겨두다, 뒤에 남기다'를 의미한다.||#1. 인격에 대하여.||(a) 어떤 곳을 떠날 때, 어떤 사람을 '두고 가다, 버리고 가다'(Diod.; 창 2:24).|① 마 19:5,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② 막 10: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③ 엡 5: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④ 마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⑤ 마 21:17, "그들을 떠나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⑥ 행 18:19,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⑦ 딛 1: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⑧ 행 24:27,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⑨ 행 25:14에서 감옥에 '두고 가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⑩ '남아 있다'(Xen.), 요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b) 죽어서 '남겨 놓다(두다)'(Homer)(신 28:54).|① 막 12: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② 눅 20: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c) '남겨두다, 보존하다, 남아있다'(집회서 24:33).|롬 11: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왕상 19:18).|(d) '도움 없이 (버려) 두다'(Bl -D.; Rob.).|눅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2. 비인격적 대상에 대하여,||(a) '버려두다',|① 눅 15: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② 눅 5: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b) 떠나갈 때 어떤 장소를 '떠나다, 출발하다'(Dio Chrys.).|① 마 4: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② 히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③ 벧후 2:15,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c) '제쳐 소홀히 하다'(Ps. -X., Cyneg.; 신 29:24).|행 6:2,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d) '버리다' abandon, '포기하다' give up(Apollon. Rhod.).|① 눅 5: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② 막 14: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e) 그 자리에 그대로 '두다',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행 21:3).||(f) '남아 있다'(Alex.),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 4:1).|(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돌로 치다
kataliqavzw
돌로 치다, 돌로 쳐 죽이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카탈리다조(기독교 문헌)는 카타($2596)와 리다조($3034: 돌을 던지다)에서 유래했으며, '돌로 치다, 돌로 쳐 죽이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카탈리다조는 신약성경에서 눅 20:6에 한번 '돌로 쳐 죽이다'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화목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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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 화해, 회복.||#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카탈라게는 카탈랏소($2644: 바꾸다, 화해시키다)에서 유래했다.||(a) '교환' exchange, 환전자들이 직무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동등한 값어치를 '교환하는 것'을 나타낸다(Aristot.).||(b) '어떤 차이의 조정, 화해, 은총의 회복'(Aeschyl., Demosth.), 일반적으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적의나 불만의 표출 이후에 사람들 사이에 본래의 화합의 '회복'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카탈라케는 70인역본에서 2회 나오며, 히브리어 상당어 없이, 사 9:4에서 남은 자의 '회복', 마카베오이서 5:20에서 하나님과 '화해'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카탈라게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바울 서신에만 사용되었으며, 항상 하나님의 의향 또는 섭리를 나타낸다.||고후 5:18; 고후 5:19에서 바울은 그의 말씀과 일을 화목하게 하는 직책과 말씀으로 부름으로써 자신의 말씀과 일의 중요성을 표시한다. 그것은 사람 앞에 다시 그들을 택하셔서 자신과의 친교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가져온다(참조: 고후 5:20). 그것을 향하여 그들 자신을 열고, 그들 안에 그것의 목적을 이루는 이 행위를 허락하는 자들은 화목을 얻었다(롬 5:11).||롬 11:15에서 카탈라게 코스무("세상의 화목")는 헤 아포볼레 아우톤("저희를 버리는 것"; 유대인에 대해)처럼 과거에 속할 뿐만 아니라 여전히 계속되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이다.|(참조: F. Buchsel; H. Vorlander).
화목 되다
katallavssw
바꾸다, 화해시키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카탈랏소는 카타($2596)와 알랏소($236: 변하다, 변경하다, 바꾸다)에서 유래했다. 변화의 개념이 두드러지는 이 단어는,||(a) '바꾸다, 변화하다' change.|(b) '교환하다' exchange(Plat., Hdt.).|(c) '화해시키다' reconcile(Aristot.).|(d) '스스로 화해하다' reconcile(Xenoph.).||카탈랏소는 일반적으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적의나 불만의 표출 이후에 사람들 사이에 '본래의 화합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였다(Xen., Eur., Aristot.).|카탈랏소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하더라도(Soph. Al.), 헬라와 헬라니즘의 이방 종교의 화해 의식에서 본질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대한 사상은 헬라 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2. 70인역본의 용법.||(a) 동사 카탈랏소는 70인역본에서 4회 나오며, 렘 48:39에서 하타(2865: 넘어 뜨리다, 부숴뜨리다")를 번역하여, '파괴하다'는 의미를 나타내며, 마카베오이서에서는 '화해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1:5; 7:33; 8:29).||(b) 유대주의에서는 기도와 고백과 회개와 같은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은총으로 바뀐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화해된다'고 말하지만(마카베오이서 1:5; 7:33) 이러한 용례는 매우 드물다.|카탈랏소는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달래다, 스스로 화해시키다, 화해하다, 화해시키다'를 의미하는 랍비 용어에 상당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카탈랏소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바울 서신에만 사용되었다.||(a) 남편과 아내.|헬라어 결혼 기록에서 카탈랏세스다이(부정사)는 그들의 '화해 reconciliation'(P. Oxy.)를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고전 7:11에서처럼 카탈라게나이(%223)는 여기에서 그의 남편과 헤어진 아내 쪽에서의 행동이며 단지 그녀에게 일어난 어떤 일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 5:24과 BGU, 846, 10에서 디알라게나이(%224)가 단지 사이가 멀어진 자들에게 일어난 어떤 일뿐만 아니라 그들에 의해 행해진 어떤 일인 것과 같다. 고전 7:11에서 아내가 다소간에 악의를 가지고 남편을 떠났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b) 하나님과 인간|① 신약성경에서 바울만이 이 단어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사용하는데 카탈랏소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용되고 카탈라게나이(%223)는 인간에 대해서만 사용된다.|하나님께서는 고후 5:18에서 우리 또는 세상을 자기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다. 그는 화해나 화목하게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 또는 세상과 화목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 롬 5:10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되거나 고후 5:20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은 화해에 대하여 같은 조건이 아니다. 화해는 쌍방이 똑같이 그들이 적이었던 곳에서 친구가 된다는 의미에서 상호적이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주권은 모든 면에서 유지된다.|카탈랏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태의 전환 또는 회복이며 동시에 인간 자신의 상태의 전환 또는 회복이다.|고후 5:18에서 이 단어는 인간을 위하여 가능한 가장 포괄적인 회복의 기초로서 소개된다. 즉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 이전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은 새 것이 되었다.|롬 5:10에서도 역시 이 단어는 날카로운 변화를 나타낸다. 우리는 더 이상 '연약한 자, 경건치 않은 자'(롬 5:6), '죄인들'(롬 5:8)이 아니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다(롬 5:5). 인간의 기질이나 그의 하나님과의 법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전체 상태의 변화가 일어난다. 다른 한편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마음의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지지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은혜로운 뜻은 구약성경에서 오래 전에 계시되었기 때문이다.||②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되었다(롬 5:10). 그가 우리를 위하여 정죄 당하셨을 때, 우리는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고후 5:21). 이 정도로 화해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과 병행한다(참조: 롬 5:9에 대하여 롬 5:10). 이것이 바울의 칭의에 대한 견해에서 매우 중요한 로기제스다이(%225; 롬 4:3; 롬 4:4; 롬 4:5; 롬 4:6; 롬 4:8; 롬 4:9; 롬 4:10; 롬 4:11; 롬 4:23; 롬 4:24)가 고후 5:19에 다시 나타나는 이유이다: "저희의 죄를 저희에 [돌리지] 아니하시고". 이제 화해 안에서 단순한 죄와의 관계의 제거 이상의 것이 일어난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예수님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간청하는 사자들을 보내셨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아들의 너무나 큰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그리고 인간에게 간청한다는 것은 너무나 굴욕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를 통하여 우리들은 우리의 삶의 전체 상태가 새로워진다.|고후 5:14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 우리는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산다(고후 5:15). 우리는 우리가 모든 다른 사람들처럼 죽었으며, 이제 새로운 피조물들이라고 생각한다. 화해에 의해 우리의 죄많은 이기심이 극복되고 하나님과의 친교가 일어나며, 그 친교 속에서 우리의 죄많은 이기심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으로 대체된다. 이것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양심에 계시되고 반대자들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될 수 있는 현존하는 사실들이다(고후 5:11-15). 그것들은 양심으로부터 떼어내어 심리학적인 면에서 주장될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이 양심을 말하고, 이것을 그의 자기 옹호의 근거(고후 5:11, 고후 5:12)로 삼았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실들의 인식은 단순히 실제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사랑으로 이끌리지 않는 대상에게 대한 단순한 믿음의 전달 이상이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설사 새로운 사실이 근본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일어나고, 그리고 인간 자신은 죄인이며 세속적이기를 그치지 않는다 해도 인간은 하나님의 활동의 변화의 단순한 대상물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문을 받는 자이며, 그래서 사랑에 눈뜨는 자이다.||이것은 특히 롬 5:5에 명백하다. 우리(화목된 자들)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현존하고 활동하는 실재가 되었지만, 이전에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서 단지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았다. 이것은 여전히 육체 속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성령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옛 것과 새 것이, 그 자신의 마음과 성령이 모두 인간 속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미 그는 전체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새롭게 되었고, 그는 성령 안에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된다(롬 8:4).||종종 인간이 화해에서 능동적인가 또는 수동적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참된 대답은 그들이 능동적이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하는 행위을 전하는 디아코니아 테스 카탈라케스("화목케하는 직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을 능동적이게 하시며, 그들에게 그들 자신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권리와 능력을 모두 주신다. 카텔라게멘("화목되었은")과 카탈레겐테스("화목된 자로서")가 의심할 여지없이 중간태가 아니고 수동태를 취한다. 이것은 롬 5:9의 수동태 디카이오덴테스("의롭다함을 얻었은즉")와의 일치를 위해, 또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 말하는 문맥에 의해서도 요구된다. 우리는 화해를 받아들였으나 공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간청하심으로 받아들인 것이다(고후 5:20). 인간의 활동은 그로하여금 어떤 선물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로 보다 더 나은 어떤 표현 방식을 상상할 수 없다.|바울이 화해의 말씀을 요구(request)하라고 말한 사실은 인간을 화해에 있어서 단지 수동적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는 어떤 가능성의 여지를 전혀 주지 않는다. 화해에 있어서 인간도 역시 인격이다. 어떤 화해가 적어도 그를 위한 것일 수 있는 이유는 오직 그가 한 인격이며, 따라서 능동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후 5:20의 카탈라게테("화목하라")와 고전 7:11의 카탈라게토("화합") 간의 유사함도 역시 화해에 있어서 인간의 어떤 단순한 수동성을 부정한다. 만약 그녀가 그것에 관하여 전적으로 수동적이라면, 그 아내에게 화해를 요구할 수 없다. 설사 그녀가 화해를 시도하지 않을지라도 그녀는 적어도 남편의 시도에 동의해야만 한다. 만약 그녀가 전적으로 수동적이었다면 새로운 친교는 있을 수 없고 따라서 그녀 자신과 남편 사이에 화해도 있을 수 없다.||③ 바울은 항상 화해에 대해서 개인적 고백의 형식으로 말한다.|즉 "우리가" 화목되었다(롬 5:9; 롬 5:10; 고후 5:18)고 표현한다. 그는 고후 5:19-고후 5:20에서만 세상과의 화해에 대해 언급하는데 여기에서도 세상은 "우리"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넓은 가능한 범위에서 정확히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우리와 세상은 본질적으로 같다. 왜냐하면 화해를 제쳐놓는다면, 우리도 역시 단지 약하고 죄 많고 불경건하며, 화해는 무제한적으로 모두를 위해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화해가 진행하는 과정 속에 있다고 생각되는 한, 그것은 세상에 대한 화해이다. 이것이 바울이 고후 5:19-고후 5:20에서 화해에 대해 이해한 방식이다. 그는 그의 직무를 디아코니아 테스 카탈라게스("화목하게 하는 직책")로서 거의 생각할 수 없었고 그의 메시지의 내용도 "너희들은 화목되라"가 아니기 때문에, 만일 그가 화해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안에서 완결된다는 것을 믿었다면, 그런 점에서 뒤 따르는 것은 더 이상 그것의 어떤 부분도 형성하지 않는다. 디아코니아 테스 카탈라게스("화목하게 하는 직책")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세상은 아직 그 모든 구성원들이 로고스 테스 카탈라게스("화목하게 하는 말씀")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화해 자체를 완결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명백히 화해의 기초가 되는 것,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의문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의 직무는 세상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회복을 이루는 그의 사역을 통한 계속되는 화해의 실행이다. "우리의" 화해는 완결되었고 바울은 그것에 대해 부정과거로 말할 수 있다(롬 5:9, 롬 5:10[롬 5:11]; 고후 5:18).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화해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고후 5:19의 "~안에서 ... 화목케 하시며"(엔 카탈랏손)이라는 문구는 종결된 사역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고후 5:19-고후 5:20에서는 이 일이 완결될 때와 장소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바울이 세상을 화해의 대상으로 생각했다는 사실로부터, 그에게 있어서 화해는 오직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죄의 관계를 제거하는 데에만 있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되는 것은 전체로서의 세상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바울이 명백하게 화해의 직책과 인간의 자기 화해라고 부르는 것이 화해의 아무 부분도 구성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바울은 세상이 화목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의 화해는 유대인들의 아포볼레(버림)처럼 완성되지 않는다. 둘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시작되었고, 둘 다 성취의 과정 중에 있다. 바울이 의미하는 화목된 세상은 오직 하나님의 목적과 건설로 존재하는 것의 완성을 예상할 때에만 예상할 수 있다.||④ 화해에 앞서 일어나는 적대적 상태는 고후 5장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롬 5장에 암시적으로 언급될 뿐이다. 그러나 롬 5:10의 에크드로이(원수들)를 일방적으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적의에만 한정된다고 이해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비록 하나님의 인내 역시 분명히 나타나고 활동하지만, 롬 1:18-롬 1:32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현존하는 명백한 사실로서 아주 분명히 말하였기 때문이다(롬 2:2, 롬 2:5; 롬 3:26). 참으로 롬 11:28에서 디 휘마스("너희를 인하여")와 병치된 아가페토이("사랑을 입은 자들")는 우리에게 에크드로이("원수들")가 수동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 즉 "하나님의 진노 아래 서있는"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은 결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마간의 조화와 신뢰의 결핍을 인간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만일 그런 부류의 어떤 것이 아마도 고후 5:10의 고전 7:11과의 유사성으로부터 추론되었다면, 이것은 단지 부차적일 뿐이다. 롬 8:7에서 하나님에 대한 적대의 가장 중요한 표현은 불순종인데, 이 불순종은 고후 5:15에서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라고 불리운다. 화해 이전의 인간의 상태의 본질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는 자기 본위(롬 8:7c)와 그 결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롬 8:8) 진노와 심판 아래 있음으로 인한 혼란이다.|화해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일어나는 것인데 이 예수님의 죽으심은 분명히 단지 우리를 유리하게 하는 어떤 것도 아니고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도 아니다(롬 5:8). 그것은 우리를 대신하는 그리스도의 대속이다(고후 5:20, 고후 5:14 이하).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항상 동시에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런 이유로 화해는 고후 5:21: "위로 저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와 고후 5:19: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모두에서 의롭다 하심을 포함한다. 사랑의 발화로서 그것은 용서로 죄를 제거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롬 5:9과 롬 5:10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과 "화목된 것"은 유사하다 해도 이것이 '화해'를 '의롭다함'으로 변형시킬 어떤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화해'에는 '의롭다함'에는 놓여 있지 않는 사랑의 발화가 속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믿음을 의롭다 하심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시켰지만, 그가 의롭다하심으로부터 사랑을 끌어내지 않은 것처럼 롬 5장이나 고후 5장에서 화해와 관련하여 의롭다하심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것과 일치한다.|(참조: F. Buchsel; Walter Bauer; J. H. Thayer).
남은(사람)
katavloipo"
남은, 나머지.||#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카탈로이포스(Pla. 이래)는 카타($2596)와 로이포스($3062: 나머지, 남은 [자])에서 유래했으며, '남은, 나머지'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카탈로이포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15:17에 한번 나온다: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암 9:12인용).|(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객실
katavluma
객실, 숙박 장소.||#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카탈뤼마(Polyb., Diod.)는 카탈뤼오($2647: 숙박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숙박 장소, 객실'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카탈뤼마는 70인역본에서 13회 나오며, 히브리어 말론(4411: 숙박소, 여관; 출 4:24), 나웨(5116a: 목자나 양떼의 거처, 집, 거주; 출 15:13; 렘 33:12), 미쉬칸(4908: 거주지, 거처, 가옥, 장막; 대상 17:5)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숙소, 처소, 거처, 성막'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카탈뤼마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온다.||(a) 막 14:14에서 '객실'을 가리킨다: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병행구, 눅 22:11).||(b) 눅 2:7에서 '숙박 장소' 또는 '여관'을 의미한다: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무너뜨려지다
kataluvw
파괴하다 destroy, 부수다 demolish, 폐지하다 abolish.||#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카탈뤼오는 카타($2596: 아래로, ~에 대하여)와 뤼오($3089)에서 유래했으며, 강의형으로 '내던지다, 무너뜨리다, 파괴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카탈뤼오는 70인역본에서 14개의 히브리어 상당어의 역어로 39회 사용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신학적인 의의는 없다. 카탈뤼오는 자주 룬과 린(묵다, 밤을 보내다)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역사적인 이야기 속에서 그렇게 의미한다(예: 창 19:21; 창 24:23; 민 22:8; 룻 4:14; 삼하 17:8). 카탈뤼오는 '헐다'(스 5:12; 왕하 25:10) 또는 '해체하다, 폐지하다'(마카베오이서 2:22)라는 의미로는 아주 드물게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카탈뤼오는 신약성경에서 17회 나타나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a) 카탈뤼오는 '파괴하다, 허물다, 분해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건물, 성전을 파괴하거나 허무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막 14:58; 막 15:29; 마 26:61; 마 27:40; 행 6:14; 막 13:2; 마 24:2; 눅 21:6).|은유적으로 고후 5:1에서 육체를 집으로 비유하면서 그것에 대해 카탈뤼오를 사용했다. 갈 2:18에서 카탈뤼오는 구원과 생명의 길에 대한 유대적 이해방식을 타파하는 것에 대해 롬 14:20에서 부정한 것을 먹는 일에 대하여 문제 삼음으로써 "하나님의 사업" 즉 교회를 무너지게 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b) 카탈뤼오는 '폐지하다, 무효화하다, 헛되게 하다, 취소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마 5:17에서 카탈뤼오는 율법에 대해 사용되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행 5:38이하에서 가말리엘이 만일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무너뜨릴 수 없다고 말한 교회에 대해 사용되었다.||(c) 카탈뤼오는 '머물다'(마구를 풀다), 또한 '쉬다, 유할 곳을 찾다'는 의미를 나타낸다(눅 9:12; 눅 19:7).
생각하여 보다
katamanqavnw
조사, 고찰하다, 숙고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카타만다노(Hdt. 이래)는 카타($2596)와 만다노($3129: 배우다)에서 유래했으며, '철저히 배우다' learn thoroughly, '조사(고찰, 시험)하다' examin, '숙고하다' consider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카타만다노는 70인역본에서 9회 나오며, 히브리어 샤아(7583: 눈여겨보다, 응시하다; 창 24:21), 라아(7200: 보다, 인지하다; 창 34:1; 레 14:36), 야바브(2980: 부르짖다, 외치다; 삿 5:28), 슈르(7789: 주목하다, 바라보다; 욥 35:4)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그런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카타만다노는 신약성경에서 마 6:28에 한번 나오며, '숙고하다'를 의미한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쳐서 증거하다
katamarturevw
~에 대항하여 금언하다, 적대적 증언을 한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카타마르튀레오(Lysias, Demosth. 이래)는 카타($2596)와 마르튀레오($3140: 증거하다, 증명하다, 증언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에 대항하여 증거하다, 적대적 증언을 하다, 아무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카타마르튀레오는 70인역본에서 8회 나오며, 히브리어 우드(5749b: 증언하다; 왕상 21:10; 왕상 21:13 등), 아나(6030a: 대답, 응답, 반응하다, 증거하다; 욥 15:6; 잠 25:18)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고소당한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도록 의도적으로 거짓 '증거하는 것'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카타마르튀레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적대적 증언을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a) 마 26:62(병행구, 막 14:60),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b) 막 15:4(병행구, 마 27:13),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로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카타메노
katamevnw
남아있다, 머무르다, 유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카타메노(Hdt., Aristoph. 이래)는 카타($2596)와 메노($3306: 머무르다, 남아 있다)에서 유래했으며, '남아 있다, 머무르다, 묵다, 유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카타메노는 신약성경에서 행 1:13에 한번 나오며, '머무르거나 유하다'를 의미한다: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홀로
katamovna"
홀로, 떨어져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카타모나스는 카타($2596)와 모노스($3441)의 합성어이며, '나누어서, 떨어져서, 홀로'를 의미한다. 모노스($3441)를 보라.||#2. 신약성경의 용법.||카타모나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막 4:10과 눅 9:18에만 나온다. 넷슬판에서는 분리되어 나타나고 TR에서는 합성어로 나타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저주
katanavqema
저주||카타나데마는 '저주'를 의미하며, 세속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계 22:3에 한번 '저주'라는 의미로 나온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저주하다
katanaqemativzw
저주하다.||동사 카타나데마티조(Justin, Dial.)는 카타나데마($2652: 저주)에서 유래했으며, '저주하다'를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마 26:74에 한번 나온다: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카타날리스코
katanalivskw
소멸하다, 소모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카타날리스코(X., Pla. 이래)는 카타($2596)와 아날리스코($355: 쓰다, 소비하다, 소멸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소모하다, 소멸시키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카타날리스코는 신약성경에서 히 12:29에 한번 나온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신 4:24; 신 9:3 인용).|(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