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 되다
katallavssw
바꾸다, 화해시키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카탈랏소는 카타($2596)와 알랏소($236: 변하다, 변경하다, 바꾸다)에서 유래했다. 변화의 개념이 두드러지는 이 단어는,||(a) '바꾸다, 변화하다' change.|(b) '교환하다' exchange(Plat., Hdt.).|(c) '화해시키다' reconcile(Aristot.).|(d) '스스로 화해하다' reconcile(Xenoph.).||카탈랏소는 일반적으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적의나 불만의 표출 이후에 사람들 사이에 '본래의 화합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였다(Xen., Eur., Aristot.).|카탈랏소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하더라도(Soph. Al.), 헬라와 헬라니즘의 이방 종교의 화해 의식에서 본질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대한 사상은 헬라 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2. 70인역본의 용법.||(a) 동사 카탈랏소는 70인역본에서 4회 나오며, 렘 48:39에서 하타(2865: 넘어 뜨리다, 부숴뜨리다")를 번역하여, '파괴하다'는 의미를 나타내며, 마카베오이서에서는 '화해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1:5; 7:33; 8:29).||(b) 유대주의에서는 기도와 고백과 회개와 같은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은총으로 바뀐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화해된다'고 말하지만(마카베오이서 1:5; 7:33) 이러한 용례는 매우 드물다.|카탈랏소는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달래다, 스스로 화해시키다, 화해하다, 화해시키다'를 의미하는 랍비 용어에 상당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카탈랏소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바울 서신에만 사용되었다.||(a) 남편과 아내.|헬라어 결혼 기록에서 카탈랏세스다이(부정사)는 그들의 '화해 reconciliation'(P. Oxy.)를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고전 7:11에서처럼 카탈라게나이(%223)는 여기에서 그의 남편과 헤어진 아내 쪽에서의 행동이며 단지 그녀에게 일어난 어떤 일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 5:24과 BGU, 846, 10에서 디알라게나이(%224)가 단지 사이가 멀어진 자들에게 일어난 어떤 일뿐만 아니라 그들에 의해 행해진 어떤 일인 것과 같다. 고전 7:11에서 아내가 다소간에 악의를 가지고 남편을 떠났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b) 하나님과 인간|① 신약성경에서 바울만이 이 단어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사용하는데 카탈랏소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용되고 카탈라게나이(%223)는 인간에 대해서만 사용된다.|하나님께서는 고후 5:18에서 우리 또는 세상을 자기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다. 그는 화해나 화목하게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 또는 세상과 화목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 롬 5:10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되거나 고후 5:20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은 화해에 대하여 같은 조건이 아니다. 화해는 쌍방이 똑같이 그들이 적이었던 곳에서 친구가 된다는 의미에서 상호적이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주권은 모든 면에서 유지된다.|카탈랏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태의 전환 또는 회복이며 동시에 인간 자신의 상태의 전환 또는 회복이다.|고후 5:18에서 이 단어는 인간을 위하여 가능한 가장 포괄적인 회복의 기초로서 소개된다. 즉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 이전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은 새 것이 되었다.|롬 5:10에서도 역시 이 단어는 날카로운 변화를 나타낸다. 우리는 더 이상 '연약한 자, 경건치 않은 자'(롬 5:6), '죄인들'(롬 5:8)이 아니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다(롬 5:5). 인간의 기질이나 그의 하나님과의 법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전체 상태의 변화가 일어난다. 다른 한편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마음의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지지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은혜로운 뜻은 구약성경에서 오래 전에 계시되었기 때문이다.||②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되었다(롬 5:10). 그가 우리를 위하여 정죄 당하셨을 때, 우리는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고후 5:21). 이 정도로 화해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과 병행한다(참조: 롬 5:9에 대하여 롬 5:10). 이것이 바울의 칭의에 대한 견해에서 매우 중요한 로기제스다이(%225; 롬 4:3; 롬 4:4; 롬 4:5; 롬 4:6; 롬 4:8; 롬 4:9; 롬 4:10; 롬 4:11; 롬 4:23; 롬 4:24)가 고후 5:19에 다시 나타나는 이유이다: "저희의 죄를 저희에 [돌리지] 아니하시고". 이제 화해 안에서 단순한 죄와의 관계의 제거 이상의 것이 일어난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예수님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간청하는 사자들을 보내셨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아들의 너무나 큰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그리고 인간에게 간청한다는 것은 너무나 굴욕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를 통하여 우리들은 우리의 삶의 전체 상태가 새로워진다.|고후 5:14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 우리는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산다(고후 5:15). 우리는 우리가 모든 다른 사람들처럼 죽었으며, 이제 새로운 피조물들이라고 생각한다. 화해에 의해 우리의 죄많은 이기심이 극복되고 하나님과의 친교가 일어나며, 그 친교 속에서 우리의 죄많은 이기심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으로 대체된다. 이것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양심에 계시되고 반대자들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될 수 있는 현존하는 사실들이다(고후 5:11-15). 그것들은 양심으로부터 떼어내어 심리학적인 면에서 주장될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이 양심을 말하고, 이것을 그의 자기 옹호의 근거(고후 5:11, 고후 5:12)로 삼았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실들의 인식은 단순히 실제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사랑으로 이끌리지 않는 대상에게 대한 단순한 믿음의 전달 이상이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설사 새로운 사실이 근본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일어나고, 그리고 인간 자신은 죄인이며 세속적이기를 그치지 않는다 해도 인간은 하나님의 활동의 변화의 단순한 대상물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문을 받는 자이며, 그래서 사랑에 눈뜨는 자이다.||이것은 특히 롬 5:5에 명백하다. 우리(화목된 자들)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현존하고 활동하는 실재가 되었지만, 이전에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서 단지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았다. 이것은 여전히 육체 속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성령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옛 것과 새 것이, 그 자신의 마음과 성령이 모두 인간 속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미 그는 전체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새롭게 되었고, 그는 성령 안에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된다(롬 8:4).||종종 인간이 화해에서 능동적인가 또는 수동적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참된 대답은 그들이 능동적이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하는 행위을 전하는 디아코니아 테스 카탈라케스("화목케하는 직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을 능동적이게 하시며, 그들에게 그들 자신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권리와 능력을 모두 주신다. 카텔라게멘("화목되었은")과 카탈레겐테스("화목된 자로서")가 의심할 여지없이 중간태가 아니고 수동태를 취한다. 이것은 롬 5:9의 수동태 디카이오덴테스("의롭다함을 얻었은즉")와의 일치를 위해, 또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 말하는 문맥에 의해서도 요구된다. 우리는 화해를 받아들였으나 공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간청하심으로 받아들인 것이다(고후 5:20). 인간의 활동은 그로하여금 어떤 선물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로 보다 더 나은 어떤 표현 방식을 상상할 수 없다.|바울이 화해의 말씀을 요구(request)하라고 말한 사실은 인간을 화해에 있어서 단지 수동적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는 어떤 가능성의 여지를 전혀 주지 않는다. 화해에 있어서 인간도 역시 인격이다. 어떤 화해가 적어도 그를 위한 것일 수 있는 이유는 오직 그가 한 인격이며, 따라서 능동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후 5:20의 카탈라게테("화목하라")와 고전 7:11의 카탈라게토("화합") 간의 유사함도 역시 화해에 있어서 인간의 어떤 단순한 수동성을 부정한다. 만약 그녀가 그것에 관하여 전적으로 수동적이라면, 그 아내에게 화해를 요구할 수 없다. 설사 그녀가 화해를 시도하지 않을지라도 그녀는 적어도 남편의 시도에 동의해야만 한다. 만약 그녀가 전적으로 수동적이었다면 새로운 친교는 있을 수 없고 따라서 그녀 자신과 남편 사이에 화해도 있을 수 없다.||③ 바울은 항상 화해에 대해서 개인적 고백의 형식으로 말한다.|즉 "우리가" 화목되었다(롬 5:9; 롬 5:10; 고후 5:18)고 표현한다. 그는 고후 5:19-고후 5:20에서만 세상과의 화해에 대해 언급하는데 여기에서도 세상은 "우리"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넓은 가능한 범위에서 정확히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우리와 세상은 본질적으로 같다. 왜냐하면 화해를 제쳐놓는다면, 우리도 역시 단지 약하고 죄 많고 불경건하며, 화해는 무제한적으로 모두를 위해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화해가 진행하는 과정 속에 있다고 생각되는 한, 그것은 세상에 대한 화해이다. 이것이 바울이 고후 5:19-고후 5:20에서 화해에 대해 이해한 방식이다. 그는 그의 직무를 디아코니아 테스 카탈라게스("화목하게 하는 직책")로서 거의 생각할 수 없었고 그의 메시지의 내용도 "너희들은 화목되라"가 아니기 때문에, 만일 그가 화해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안에서 완결된다는 것을 믿었다면, 그런 점에서 뒤 따르는 것은 더 이상 그것의 어떤 부분도 형성하지 않는다. 디아코니아 테스 카탈라게스("화목하게 하는 직책")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세상은 아직 그 모든 구성원들이 로고스 테스 카탈라게스("화목하게 하는 말씀")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화해 자체를 완결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명백히 화해의 기초가 되는 것,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의문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의 직무는 세상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회복을 이루는 그의 사역을 통한 계속되는 화해의 실행이다. "우리의" 화해는 완결되었고 바울은 그것에 대해 부정과거로 말할 수 있다(롬 5:9, 롬 5:10[롬 5:11]; 고후 5:18).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화해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고후 5:19의 "~안에서 ... 화목케 하시며"(엔 카탈랏손)이라는 문구는 종결된 사역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고후 5:19-고후 5:20에서는 이 일이 완결될 때와 장소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바울이 세상을 화해의 대상으로 생각했다는 사실로부터, 그에게 있어서 화해는 오직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죄의 관계를 제거하는 데에만 있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되는 것은 전체로서의 세상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바울이 명백하게 화해의 직책과 인간의 자기 화해라고 부르는 것이 화해의 아무 부분도 구성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바울은 세상이 화목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의 화해는 유대인들의 아포볼레(버림)처럼 완성되지 않는다. 둘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시작되었고, 둘 다 성취의 과정 중에 있다. 바울이 의미하는 화목된 세상은 오직 하나님의 목적과 건설로 존재하는 것의 완성을 예상할 때에만 예상할 수 있다.||④ 화해에 앞서 일어나는 적대적 상태는 고후 5장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롬 5장에 암시적으로 언급될 뿐이다. 그러나 롬 5:10의 에크드로이(원수들)를 일방적으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적의에만 한정된다고 이해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비록 하나님의 인내 역시 분명히 나타나고 활동하지만, 롬 1:18-롬 1:32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현존하는 명백한 사실로서 아주 분명히 말하였기 때문이다(롬 2:2, 롬 2:5; 롬 3:26). 참으로 롬 11:28에서 디 휘마스("너희를 인하여")와 병치된 아가페토이("사랑을 입은 자들")는 우리에게 에크드로이("원수들")가 수동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 즉 "하나님의 진노 아래 서있는"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은 결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마간의 조화와 신뢰의 결핍을 인간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만일 그런 부류의 어떤 것이 아마도 고후 5:10의 고전 7:11과의 유사성으로부터 추론되었다면, 이것은 단지 부차적일 뿐이다. 롬 8:7에서 하나님에 대한 적대의 가장 중요한 표현은 불순종인데, 이 불순종은 고후 5:15에서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라고 불리운다. 화해 이전의 인간의 상태의 본질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는 자기 본위(롬 8:7c)와 그 결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롬 8:8) 진노와 심판 아래 있음으로 인한 혼란이다.|화해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일어나는 것인데 이 예수님의 죽으심은 분명히 단지 우리를 유리하게 하는 어떤 것도 아니고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도 아니다(롬 5:8). 그것은 우리를 대신하는 그리스도의 대속이다(고후 5:20, 고후 5:14 이하).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항상 동시에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런 이유로 화해는 고후 5:21: "위로 저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와 고후 5:19: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모두에서 의롭다 하심을 포함한다. 사랑의 발화로서 그것은 용서로 죄를 제거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롬 5:9과 롬 5:10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과 "화목된 것"은 유사하다 해도 이것이 '화해'를 '의롭다함'으로 변형시킬 어떤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화해'에는 '의롭다함'에는 놓여 있지 않는 사랑의 발화가 속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믿음을 의롭다 하심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시켰지만, 그가 의롭다하심으로부터 사랑을 끌어내지 않은 것처럼 롬 5장이나 고후 5장에서 화해와 관련하여 의롭다하심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것과 일치한다.|(참조: F. Buchsel;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