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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흔들리지 말며
ajmetakivnhto"
움직이지 않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아메타키네토스(Pla., Dionys. 등)는 부정 접두사 %107와 메타키네오($3334: 떠나다, 이동하다)에서 유래했으며,||(a) '그 장소로부터 이동하지 않는, 움직이지 않는'을 의미한다.|(b) 비유적으로, '굳게 지속하는'이란 의미를 가진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아메타키네토스는 신약성경에서 고전 15:58에서 한번 나오며, '움직이지 않는'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바울은 부활로 인하여 우리가 행하는 그 무엇도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결과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기를 주저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늘의 시각을 계속 지닐 수 있다면 우리는 종종 우리의 노력에서 비롯된 선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궁극적인 승리를 얻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바로 지금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미침에 틀림없다. 외견상 성과 없음으로 인한 낙담이 당신이 일하는 것을 막도록 하지 말라. 기회 있을 때마다 선을 행하라 그러면 당신의 행함은 영원한 결과를 얻게 됨을 알게 된다.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ajmetamevlhto"
후회할 것 없는, 후회 없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아메타멜레토스는 부정접두사 아(%107)와 메타멜로마이($3338: 후회하다, 회개하다)에서 유래했으며,||(a) '후회할 것 없는, 후회하지 않는'(Pla., Tim., Polyb. 등),|(b) '돌이킬 수 없는, 취소할 수 없는, 폐지할 수 없는'(Epist. Claud. 등)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아메타멜레토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롬 11:29에서 하나님이 결코 '후회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언급이며, 따라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바울은 하나님께서 그가 부르시고 선택하신 백성을 저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며, 그들에게 그의 거룩한 복을 부어주셨다는 것을 믿는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변하지 않으시는 본성에 놓여 있다: 그는 그가 하신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부어 주신 것과 같은 은사는 주신 분의 특징을 지닌다. 그는 나중에 후회하실 일을 결코 행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의 유대인들에 대한 자비로운 감정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W. Sanday).|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의 불순종과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실 것이다.||(b) 고후 7:10에서 인간이 결코 후회하지 않는 어떤 것에 관한 언급이며, 따라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회개는 구원에 이르기 때문에 후회가 없다. 참회가 근심을 일으킨다고 해서 후회할 것 없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F. Laubach).
회개치 아니한
ajmetanovhto"
회개하지 않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아메타노에토스는 부정접두사 아(%107)와 메타노에오($3340: 마음을 바꾸다, 회개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마음의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개심을 허용 않는), 회개하지 않는, 참회하지 않는'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아메타노에토스는 신약성경에서 롬 2:5에 한번 나오며, '회개하지 아니한'을 의미한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분량 밖의
a[metro"
분량 밖의, 한량 없는 without measure.||#1. 일반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아메트로스는 %107(부정 접두사)와 메트론($3358: 분량)에서 유래했으며, '분량 밖의, 측량할 수 없는, 같은 표준으로 잴 수 없는, 터무니 없는, 중용을 잃은, 도를 넘은(지나친)'을 의미한다.|70인역본에는 사용되지 않았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아메트로스는 신약성경에서 고린도후서에서 2회 나온다.|고후 10:13에서, 아메트로스는 '도를 지나친' 자랑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사도인 그로서는 "분량 밖의", 즉 '측량할 수 없는 것들'(타 아메트라)에 관하여 자랑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의 반대자들은 자기 자신들로 측정의 표준을 삼는다. 스스로를 표준으로 삼아 스스로가 스스로를 측정하고 비교한다. 그들이 100퍼센트 표준이다. 그래서 이 표준으로 그들 자신들을 측정할 때는 항상 100퍼센트라고 생각할 만큼 자신들을 100퍼센트 적격자로 여긴다.|이러한 사람들은 "분량 밖의", 즉 측량할 수 없는 터무니 없는 것에 관하여 자랑한다(참조: R.C.H.Lenski).||고후 10:15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 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 바울은 남의 수고를 가지고 자랑하는 그런 '분량 밖의 것들, 즉 도를 넘어선 터무니 없는 것들'로 자랑하지 않는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작물을 수확하려고 손을 내밀면서 동시에 뻔뻔스럽게도 땀과 수고를 희생하여 그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놓은 자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자들'(calvin)에 관한 언급이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유형처럼 그들의 오류를 펴나갈 새로운 지역을 개척해 나가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일에 침입하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간다(G.Carver).|(참조: J.H.Thayer; C.Brown; K.Peissner).
아멘
ajmhvn
아멘, 진실로, 그러하도다||동사적 형용사 아멘은 히브리어 아멘의 음역인데, 이 히브리어 단어는 아만에서 유래하였다. 아만은 칼형으로 '확증하다, 지지하다, 뒷받침하다'를 뜻하고, 니팔형으로, '확립되다, 신실하다, 확실하다, 믿을만하다'를 뜻하며, 히필형으로, '확고하다고 알다, 믿다, 확신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따라서 아멘의 의미는 '확실한, 확고한, 신실한, 진실한'이다. 부사로는 '확실히, 진실로'를 의미하며, 문장의 종결 부분에서는 '그러하다, 그러할지어다, 그것이 이루어 질지어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의 반복 용법은 최상급의 의미를 가진다(예: 진실로 진실로 = 가장 확실하게).||#1.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용법||(a) 아멘은 구약에서 개인 및 공동체와 관련하여 사용하였다. 신자는 '아멘'에 참예함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아들이고 저주를 확증하고 송영에 찬동한다. 모든 경우에 확실하고 구속력이 있는 것이라는 인정이 암시되어 있다|① 첫째로, 그 성취가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는 일들의 수납을 확증하는 것이다. 왕상 1:36에서 브나냐는 솔로몬의 즉위식을 지시한 다윗의 말에 아멘으로 응답한다. 이 경우 왕의 명령을 이행할 것을 약속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도록 요청하고, 또한 이를 위한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기를 요청하는 것이다.|렘 28:6에서 예레미야는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귀환시킬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에 아멘으로 응답한다. 외경 유딧 13:20에서 백성들은 유딧을 축복하는 도성의 지도자 우찌야의 말에 아멘으로 응답한다. 이상의 실례에서 아멘으로 응답함으로 응답자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도움으로 성취되기를 바라는 강한 소망을 나타낸다.|② 둘째로, 하나님의 위협이나 저주의 적용을 확증하는 것이다. 민 5:22에서 간음의 혐의를 받은 여인은 제사장의 저주에 관한 말에 두번 아멘으로 응답한다. 말하자면, 자신이 죄를 지었다면 그와 같은 저주가 임해도 좋다고 하는 것이다.|렘 11:5에서 예레미야는 언약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자들에게 저주를 내리리라는 하나님의 위협적인 말씀에 아멘으로 동의한다. 신 27:15-26에서 백성들은 레위 사람이 열거하는 율법 위반자들에게 한 저주에 대하여 아멘으로 확증하였으며, 느 5:13에서도 마찬가지로 백성들은 느예미야의 입에서 나오는 저주의 위협하에서 아멘으로 자기네의 약속을 확증한다. 이러한 아멘은 만일 자신이 죄를 범하면 자신에게 저주가 내리기를 요청하는 것이다.|③ 셋째로, 송영에 응답하여 하나님에 대한 찬양에 찬동한다. 대표자나 찬양대가 하나님을 송축하거나 그러한 기도를 할 때 백성들, 곧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하였다(느 8:6; 대상 16:36). 시편의 처음 4권의 끝부분(41:13[14]; 72:19; 89:52[53]; 106:48)에 나오는 찬미는 모두 아멘이 첨가된 송영으로 끝나는데 백성의 응답의 표시이다. 언급된 내용은 아멘을 통하여 확실하고 타당하고 구속력 있는 것으로 확증된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도 (참으로)그러하다는 고백과 더불어 그렇게 되어지기를 바라는 강한 소원을 나타낸다.|④ 네째로, 아멘은 하나님의 명칭이나 속성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사 65:l6에서 '아멘의 하나님'(한글개역: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칭해진다. 또는 하나님 자신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확증의 증인이기 때문에 아멘의 하나님으로 칭해진다고 볼 수 있다.||(b) 구약시대에 아멘이 화자(혹은 기자)가 자기 자신의 말을 확증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은 오직 한번 뿐인데, 주전 7세기 말엽에 메짜드 카샤비야후가 쓴 한 문서에 나온다. 여기서 그는 '아멘, 내게는 잘못이 없습니다'라고 한다.||(c) 랍비들의 자료에서 '아멘'은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확증이라고 강조하는 대답으로만 발견될 뿐이다. 요제 차니나(R. Jose b. chanina, AD. 270년경)는 아멘에는 서약, 말의 수용, 그리고 말에 대한 확증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였다.|① 기도나 송영에 대해 아멘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다.|② 탄원, 축복이나 저주에 대해 아멘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그것에 속박시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가 들은 어떤 송영에 대해서도 아멘이라고 말해야 한다. 즉, 유대인은 다른 유대인이 주를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멘으로 응답해야 한다. 아멘을 말하는 사람은 그에 따라 하나님의 상급을 풍성히 받을 것이다. 성전 예배의 경우와 달리 회당 예배에서 회중은 예배 인도자가 선언한 송영에, 그리고 아론의 세가지 축복기도(민 6:24이하)에 '아멘'으로 화답하였다.||(d) 어떤 사람이 쿰란 공동체에 가입할 때,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영광송을 부르고 하나님의 편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축복한데 반해, 레위인들은 베리알의 편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을 저주하였다. 이 언약 공동체에 가입하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러한 여러가지 송영 축복과 저주에 대하여 두번 아멘으로 화답하였다(참조: 신 27:15-26).||#2. 신약성경의 용법||신약성경에서 아멘은 대략 126회 발견된다(마태복음에 31회, 마가복음에 13회, 누가복음에 6회, 요한복음에 50회, 바울서신에 l4회, 요한계시록에 8회).||(a) 말씀을 시작할 때에는 '확실히, 진실로'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엄숙하게'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복음서에서 아멘은 예수님의 입에서만 나오는데, 주로 "진실로(아멘)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문구로 나온다(막 3:28; 눅 4:24). 이 단어의 반복용법 (아멘, 아멘)은 요한에 의해 요한복음에서만(25회) 사용되었으며, 최상급의 의미를 가진다. -가장 확실하게(요 1:51; 요3:3). 예수님은 아멘으로 말씀을 시작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을 확실하고 신빙성 있는 것으로 만드셨다. 그는 그 말씀들을 지지하시고 자신과 청중들을 그 말씀으로 구속하셨다. 이 말씀들은 그의 위엄과 권위의 표현이다.||(b) 문장의 종결부분, 곧 기도나 송영의 끝부분에서 언급된 것을 강화하고 확증하기 위하여 나타난다. 구약성서의 용법을 따라 역시 참으로 그러하다는 고백과 더불어 그렇게 되어지기를 바라는 강한 소망을 나타낸다. 이러한 경우에 아멘은 '그러하도다, 그러할지어다, 그것이 이루어질지어다'(혹은 이러한 요청이 함축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롬 1:25; 요 9:5; 요 11:36; 요 16:27; 갈 1:5; 엡 3:21; 빌 4:20; 딤전 1:17; 히 13:21; 벧전 4:11; 계 1:6등).||(c) 아멘은 회당에서 기독교 회중에게로 전해진 관례로, 성경을 읽거나 봉독한 자가 하나님께 엄숙한 기도를 드릴 때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아멘"이라고 화답하며, 따라서 언급된 것의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고전 14:16; 참조: 민 5:22; 신 27:15이하; 느 5:13; 느 8:6).|고후 1:20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고 보증되었다고 보고 우리가 아멘으로 그것을 확증하며 또한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고 한다.|계 22:20에서 교회는 '진실로'라는 말씀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하여 그 약속을 확증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승락에 대한 교회의 응답이라는 의미에서 고후 1:20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d) 계 3:14에서 예수님 자신을 아멘이라고 부르고 그를 실질적으로 아멘의 역어인 "참된 증인"(참조: 시 89:37,38) 이라고 단정 지을 때 이 구절은 사 65:16을 채택한 것이다. 참된 증인이신 그리스도 자신은 자기 안에서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약속. 곧 하나님의 승락에 대한 그의 응답에서 "아멘"으로 불리워질 수 있다.|- 아멘 -.|(Walter Bauer; J.H.Thayer; H.Bietenhard).
어머니 없는
ajmhvtwr
어머니가 없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아메토르(Pre -Socr. Hdt. 등)는 부정접두사 %107와 메테르($3384: 어머니)에서 유래했으며, '어머니가 없는'을 의미하며 헬라 문헌에서 다음과 같이 의미로 사용되었다.||(a) 어머니 없이 태어난 기원이 없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b) 어머니를 잃은,|(c) 천한 혹은 알려져 있지 않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d) 어머니 답지 않은, 어머니라고 칭함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e) 의미상 헬라인들에 의해 사용되지 않는 말, 어머니가 족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아메토르는 신약성경에서 히 7:3에서 한번 나온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어머니가 족보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더러움이 없는
ajmivanto"
더럽혀지지 않은 undefiled, 순수한 pur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아미안토스(Pind. 이래로)는 부정 접두사 %107와 미아이노($3392: 더럽히다)에서 유래했으며, '더럽혀지지 않은, 순결한, 깨끗한'을 의미한다. 처음에 육체적 순결을, 그 후에 특별히 제의적 순결에 대해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아미안토스는 70인역본에서 외경에서만 5회 사용되었으며, '육체적 순결, 제의적 정결'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아미안토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온다.||(a) 히 7:26에서 아미안토스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순결하심을 나타낸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b) 벧전 1:4에서 하늘로부터 받을 우리 기업의 깨끗함을 의미한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c) 히 13:4에서 혼인관계 내에서 성적인 관계의 순결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d) 약 1:27에서 실천적인 종교의 순결성을 의미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상기한 각 경우에 있어서 확언하는 바는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될 어떤 것이 없는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F. Hauck; J. I. Packer).
아미나답
!Aminadavb
아미나답 Aminadab.||#1. 구약성경.||아미나답은 히브리어 야미나다브(나의 백성은 고귀하다)에서 유래되었다.|아미나답은 유다 자손으로서(대상 7:10) 나손의 아버지이며(민 1:7), 아론의 아내 엘리세바의 아버지이며(출 6:23), 다윗 왕의 선조였다(룻 4:19).||#2. 신약성경.||아미나답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족보에 예수님의 조상 중 한 사람으로 나온다.|마 1: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눅 3:33,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요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모래
a[mmo"
모래 sand.||#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암모스(Pla., Xen. 이래)는 프삼모스(%306: 모래)에서 유래했으며,||(a) '모래'(sand)를 의미한다.|(b) 비유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암모스는 70인역본에서 약 30회 나오며, 대부분 히브리어 홀(모래, 창 22:17; 출 2:12; 삿 7:12 등), 그리고 2회 아파르(먼지, 마른 흙, 창 13:16; 창 28:14)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암모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모래'를 의미한다. 문맥에 따라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a) 롬 9:27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바다의 모래에 비유한다. 여기서 그것은 무수한 다수를 나타낸다.|히 11:12에서도 무수한 다수를 나타낸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계 20:8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b) 계 12:17에서 용이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싸우려고 바다의 모래 위에 서 있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어린양
ajmnov"
어린 양 lamb.||#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암노스(Soph., Aristoph.이래)는 간혹 발견되며, 프로바톤($4263: 양)과는 다른 어린양(lamb)을 의미한다.||「참고-프로바톤은 본래 네 발 달린 모든 짐승들, 특히 집에서 사육하는 짐승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였다가, 후대에 이르러 그 의미가 어린 양에 국한되었다. 암노스는 처음부터 어린양을 의미하며 특히 각종 제사 때 희생제물에 사용되는 경우에 일년된 '어린양'을 의미하였다. 비제사적 상황에서 도살용 동물로 사용되는 어린 양은 아렌($704)이라 불리웠다.」(참조: R.Tuente)||#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암노스는 70인역본에서 약 8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케베스(어린양)를 번역한다. 암노스는 레위기, 민수기, 에스겔에서 특별히 제의적 기록에 주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암노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언제나 예수님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고난당하는 흠없는 어린양으로 묘사한다.||(a) 요1:29; 요 1:36에서 세례(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였다. 유대교에서 구속자를 어린양으로 묘사한 것은 알려져 있으며, 그 두가지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첫째는 사 53:7(참조: 행 3:13; 행 4:27)에서 여호와의 종은 어린양에 비유된다는 사실과 둘째는 예수님은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따라서 유대 유월절 어린양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람어 탈랴에는 '어린 양' 및 '소년', '하인', '종'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있으며, 이런 의미가 양자 모두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 이리하여 세례(침례) 요한(요 1:29, 요 1:36)은 예수님을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바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속죄에 의해 죄를 완전히 말소해버린다(참조: J.Jeremias).|세례(침례) 요한은 "어린 양"을 '제물'로 말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분명해진다. 인간이 드리는 제물은 세상 죄를 담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세상 죄를 담당하는 한 제물을 친히 마련하신다.|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암노스로 묘사한 경우에 세 가지 다른 관점을 표현한다.|① 행 8:32에서는 그의 인내하는 고난을 강조한다: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② 벧전 1:19에서는 "흠 없고 점 없는"이라는 구절로 그의 희생의 무죄성과 완전성을 강조한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③ 요 1:29에서는 그의 죽음이 가지고 있는 속죄의 권능을 서술한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36에서도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하였다. 그가 세상 죄를 지신다 함은 말소하신다 함이다(J.Jeremias).|(참조: Walter Bauer; J.H.Thayer; J.Gess; J.Jeremias).
보답
ajmoibhv
보답, 보상.||#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모이베(Homer 이래)는 아메이보마이(%307: 돌려주다)에서 유래했으며, '보수, 보답, 보상'을 뜻하며,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로 사용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모이베는 신약성경에서 딤전 5:4에만 한번 나오며, 좋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포도
a[mpelo"
포도나무 grapevin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암펠로스(Homer 이래)는 어원이 불분명하며, '포도나무'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암펠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65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게펜(덩굴, 포도나무)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포도나무'를 나타낸다.|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호 10:1; 렘 2:21; 겔 15:1 이하; 겔 15:20 이하; 겔 19:10 이하; 시 80:9 이하), 메시야(S. Bar., 36 이하), 지혜(집회서 24:17), 아내(시 128:3)의 은유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암펠로스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요 15:1; 요 15:4; 요 15:5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신다: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이는 제자들이 그와의 친교에 의존한다는 것과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전적 양육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인데 이는 문자 그대로의 포도나무와 구별되는 참 포도나무가 아니라, 비유적으로 포도나무로 일컬어지는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되는 참 포도나무이다(J. Behm).||(b) 마 26:29(병행구, 막 14:25; 눅 22:18)에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 최후만찬과 관련하여 나온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메시야가 베푸는 최후만찬에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란 말은 예수님이 문자적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이스만(성경 연구, p.109이하)은 B.C. 2,300년대의 파피루스에서 게네마(%920: 열매)가 포도라는 뜻으로 사용된 예를 보여준다. 여기에 사용된 언어를 볼 때 (성찬식에서) 순수한 포도액(즙)을 원하는 사람에게 의무적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할 필요는 없다(A. T. Bobertson).||(c) 약 3:12에서 야고보는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고 부정적 입장에서 묻는다. 여기서 모순된 행동은 부도덕한 만큼이나 자연법칙에 반하는 부자연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참조: A. F. Harper, James).||(d) ① 계 14:18에서 포도나무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포도송이"에 해당하는 표현 투스 보트뤼아스 테스 암펠루는 직역하면 '포도나무의 포도송이'이다.|②계 14:19에서 암펠로스는 문자적으로 포도나무이지만 '포도'를 지적한다. 천사는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틀에 던졌다"는 것은 사 63:2 이하를 회상시킨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C. Brown).
과원지기
ajmpelourgov"
포도원 지기, 포도원 가꾸는 사람.||#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암펠루르고스(Aritoph., Hippocr. 이래)는 암펠로스($288: 포도나무)와 에르곤($2041: 일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포도원 지기, 포도원을 가꾸는 자' vinedresser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암펠루르고스는 70인역본에서 4회 나오며, 히브리어 코렘(포도원을 손질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포도원지기를 나타낸다(왕하 25:12; 대하 26:10; 사 61:5; 렘 52:16).||#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암펠루르고스는 신약성경에서 눅 13:7에 한번 나온다: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여기서 암펠루르고스는 '포도원지기'인데, 한글개역에는 '과원지기'로 번역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포도원
ajmpelwvn
포도원 vineyard.||#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암펠론(Theophr., Hist; PEleph, PHib)은 암펠로스($288: 포도나무)에서 유래했으며, '포도원'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암펠론은 70인역본에서 약 90회 나오며, 거의 케렘(3754: 포도원)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포도나무'(창 9:20), '포도원'(수 24:13; 사 1:8; 사 5:1이하)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암펠론은 신약성경에서 2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마 20:1-마 20:8 이하에서 포도원은 비유적 의미로 그 일꾼들과 관련하여 나온다. 이 비유에서 "집주인"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그의 "포도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 나타나는 지상(地上)의 가견적 교회를 가리킨다.|포도원 비유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표현이다. 여기서 요점은 품꾼들을 부리는 주인을 주제로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포도나 포도 추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언급하지 않았다. 주인은 위엄 있고 부유한 분이다. 그는 한 사람의 종(에피트로포스)을 거느리고 있고 많은 품꾼을 고용하여 포도원에서 일하게 한다. 이처럼 교회의 전체 사역은 그리스도에게 '인계되었고(에피트레페인을 주목하라), 포도원, 또는 교회의 시중은 이 일에 부름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수행한다(R. C. H. Lenski).|이 비유에서 각 품꾼은 그가 일한 시간에 상관없이 모두 한 데나리온씩을 받는다. 이 비유의 요점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보고 취급하신다는 것이다. 힐(D. Hill)은, 이 비유가, 바리새인들의 불만스러워하는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나중에 온 사람까지도 하나님의 나라에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가르치고 있다고 본다(참조: 눅 15:15). 이처럼 이 비유는 처음 된 자와 나중 된 자라는 주제의 설명이다. 마태복음의 문맥에서 보면, 이 비유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는 베드로의 물음(마 19:27)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다음에 나오고 있다. 예수님은 대답으로서 제자들이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며(마 19:28), 집과 친척을 버린 자들은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고 하는 약속을 제시한다. 이러한 문맥을 염두에 두면 이 비유는 앞에 나온 말씀의 보다 깊은 이해를 암시하는 동시에 제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얻으려 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께서 주시는대로 받도록 독려하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고 일하기로 하고 하루 종일 일을 한 제자들에게 한 말씀이 이를 입증한다(마 20:13-마 20:16).||(b) 마 21:28이하에서 '포도원'은 두 아들과 관련하여 나온다: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한 아들은 [포도원]에 가겠소이다 하고는 가지 아니하고, 또 한 아들은 가기 싫다고 해 놓고는 그 후에 뉘우치고 갔다." 이 두 아들을 통하여 우리 주님은 유대인들의 행위와 세리와 죄인들의 행위를 나타내고자 하셨다. 포도원에서 일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시기를 요구하는 사역을 지적한다.||(c) 마 21:33-마 21:46(병행구, 막 12:1-막 12:12; 눅 20:9-눅 20:19)에서 포도원은 비유적으로 악한 농부와 관련하여 나온다.|포도원은 지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특별히 유대 교회를 가리킨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공통적이다(참조: 마 20:1). 이 포도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수여하시고 그들에게 약속된 땅을 소유하도록 하셨을 때부터 세워졌다. 이 비유는 사 5:1-사 5:7에 기초하고 기독론적으로 적용한 것이다.|포도원의 소작인들, 곧 유대 민족은 실과를 받아오라고 주인, 곧 하나님이 보낸 종들을 죽였다. 그 종들은 세례(침례) 요한까지의 선지자들이다. 그 소작인들은 상속자 예수님까지 죽이면 그 포도원은 그들 차지가 되고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주인은 그 소작인들을 죽이고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 즉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갈아치울 것이다(마 21:41).||(d) 눅 13:6-눅 13:9에서 관심의 초점은 포도원 지기가 포도원에 심고 돌보는 무화과 나무에 관한 것이다. 이 무화과 나무는 3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포도원 지기는 1년만 더 기한을 달라고 간청한다. 1년을 더 잘 보살핀 후에 그때 가서 다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이 나무는 베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 사람들이 받게 될 심판에 관한 비유이다. 성경의 문맥에서 이 비유는 사람들에게 닥쳐올 온갖 재앙들을 기록한 앞의 구절을 설명하고 있다.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이 당분간 이러한 재앙을 면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볼 수는 없다. 눅 13:5에는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최후의 재앙은 주후 70년에 유대인 전쟁과 예루살렘 멸망으로 실현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C. Brown).
암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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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블리아 Amplias.||암플리아스는 신약성경에서 롬 16:8에 한번 나오며,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다. 바울은 그에 대하여 애정이 넘치는 말로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라고 불렀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