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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로이푸
loipou'
이제부터, 마지막으로||로이푸는 로이포스($3062)의 속격 단수이며,|(a) '이제부터, 미래에'(Hdt., Aristoph.),|(b) '마지막으로'를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로이포스는 갈 6:17에 한번 나오며, '이제부터'를 의미한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누가
Louka'"
누가 Luke(인)||루카스는 '빛나다'를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 그 이름이 3회 언급된 바울의 동료이자 의사이다(골 4:14; 몬 1:24; 딤후 4:11).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동일인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행 13:1).|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며, 그의 생애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간접적으로 제공해 준다.|누가는 드로아에서 바울의 두번째 전도 여행에 바울과 동행했음이 확실하며, 여기서 기사가 처음으로 1인칭 복수로 변한다(행 16:11). 혹자는 바울에게 도움을 호소한 마게도냐인이 의사 누가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최초의 유럽 전도 여행을 촉구한 사람이었다(행 16:9 이하). 누가가 헬라의 여러 도시들에 정통한 것은 아카이아를 알고 있었던 자였기 때문이었다(행 16:12 이하; 행 17:16; 행 17:19; 행 17:21; 행 18:8). 누가는 빌립보에서 세번째 전도 여행시 바울과 다시 만나(행 20:5) 예루살렘으로 함께 갔다.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옥에 갇혀있던 2년 동안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집필할 자료를 모을 기회를 가졌다. 어떤 학자들은 누가가 이 때 그의 복음서의 초안을 기록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가는 사도 바울과 함께 로마로 항해했다. 누가의 이방인적 배경은 바울의 동료에 관한 목록에 암시되어 있다(골 10-14장). 누가를 사복음서 중 하나의 저자로 믿는고로, 그를 복음 전도자라고 부른다. 누가는 여행을 많이 다닌 헬라인이었으며(어떤 학자들은 누가를 유대인으로 생각한다), 항해 기술에 정통해 있었다(행 27장). 그는 잘 훈련된 정신력과 뛰어난 문학 능력과 우수한 수사학적 기술을 소유한 자였다(눅 1:1-3). 그는 유대 세계와 이방 세계 사이에 놓인 문학적 가교의 역할을 하였다. 누가는 그의 문학적 역작을 로마인들과 헬라인들-그의 후원자였던 헬라인 데오빌로-에게 보냈다(눅 1:3; 행 1:1). 바울과 누가의 관계는 그리스도교 동료라는 점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고통 당한 바울에게(고후 12:7; 갈 4:13-15) 이 "사랑 받는 의원"(골 4:14)의 일에도 기초하였다. 누가가 상세하게 기록하는 바와 같이 의사 누가가 생명과 사람의 실재에 접근한 방식은 바울의 생애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준다.|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에 관하여 누가복음에만 한정되어 있는 기사는 의사로서의 직업에 기인할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개인적 신상의 일을 누가에게 털어놓았을 것으로 생각된다(눅 2:19). 누가복음에서 의사의 특색을 보여주는 증거 가운데 "중한 열병"(눅 4:38, 참조: 마 8:14; 막 1:30); 다시 살아난 야이로의 딸이 그녀가 살아난 직후에 "먹을 것"을 먹을 수 있음(눅 8:55, 참조: 마 25장; 막 5:42);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그 첫번 도움의 일화(눅 10:25-37) 등의 기록이 있다. "낫게 하매"(행 28:8)와 "고침을 받고"(행 28:9, A.S.V.와 R.S.V) 같은 언급은 기도를 통한 회복과 누가가 행한 그 날의 의학적 처방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의사 누가는 멜리데인에게 행한 일을 영광스럽게 여긴 자들 가운데 자기 자신을 포함시킨다(행 28:10). 누가는 우주적인 그리스도에게 바쳐야만 했던 모든 것을 여러가지 봉사로 그의 동료들에게 헌신한 친절하고 복음적인 문학적 재능을 지닌 1세기 의사였다.|(참조: HBD; Walter Bauer; J. H. Thayer).
루기오
Louvkio"
루기오 Lucius(인)||루키오스/ 루기오는 구레네 출신이며,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이자 교사였다.|신약성경에서 루기오는 2회, 사도행전과 로마서에 나온다.|행 13:1의 루기오는 롬 16:21에 언급된 루기오와 동일인일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씻음
loutrovn
목욕, 목욕하는 장소.||#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루트론(Homer 이래)은 루오($3068: 목욕하다, 씻다)에서 유래했으며,||(a) '목욕, 목욕하기',|(b) '목욕하는 장소, 목욕하는 집(탕), 목욕물'을 의미한다.|헬라인들은 바다, 강, 수영장에서 목욕을 하였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루트론은 70인역본에서 2회 나오며, 아 4:2; 아 6:6에서 히브리어 라흐차(씻기, 목욕)를 번역하여 '목욕장'을 나타내며, 집회서 34:25에서는 손을 '씻는 것'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루트론은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에베소서와 디도서에만 사용되었다. 이 두 경우에 루트론은 씻는 장소보다 씻는 행위를 의미한다.||(a) 엡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여기서 루트론은 혼인의 준비 작업으로 신부가 행하는 예식적 목욕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리스도의 신부에게 있어서 이 목욕에 대응하는 것은 세례(침례)로, 여기에서 몸(Body)의 지체들은 "말씀의 물로 씻겨" 정화된다. 이 의식의 법규에는 복음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것은 이 때에 주어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으로(참조: 롬 10:9) 표현되는 것이다.||(b)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여기서 세례(침례)를 "중생의 씻음(루트론)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정의한다. 갱신을 초래하는 것이 씻음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씻음은 성령께서 오순절에 제자들의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드셨고(참조: 행 2:33), 마지막 때에 새 창조를 이루실 것과(참조: 마 19:28) 똑같이, 개인 안에서 창조적으로 역사하시는 기회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G. R. Beasley-Murray).
해방하다
louvw
씻다 wash, 목욕하다 bath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루오(Homer. 이래)는 기본동사이며,||(a) '씻다, 목욕하다'를 의미한다. 헬라인들은 바다, 강, 수영장에서 목욕을 하였다.||(b) 목욕은 정결의 목적보다는 오히려 몸을 관리하고 강하게 하기 위한 것이 기정화된 특징이었다. 로마인들은 헬라인들의 관습을 받아들이고, 난방 시설을 갖추어 목욕을 사치스럽게 하였다. 목욕에는 온수욕과 냉수욕을 연속적으로 하고 여러 가지 기름을 바르는 것도 포함된다.||(c) 원시 시대에는 출산과 죽음 같은 과정은 귀신의 활동이나 물질적인 미아스마($3393: 더러움, 독기)를 통한 부정을 포함한다고 생각되었다. 부정을 탄 자들은 자신 및 다른 사람에게 위험이 되고 따라서 정화가 필요했다. 처음에 이런 개념은 순전히 신체적인 것이었으나, 도덕적인 견해들이 또한 발전하였다. 제의적인 정화는 이집트, 그리스 등의 종교 생활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정화는 출산, 결혼, 정신이상, 살인, 죽음, 제사 참여, 개인적 봉헌에서 중요했다. 신들도 정화가 필요하였다; 우상을 씻는 일을 참조하고, 태양이 바다를 지나가는 것은 정화하고 생기를 주는 목욕이라는 이집트의 사상을 참조하라. 후에는 외적인 정화보다 도덕적 순결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곧 도덕주의화(moralization)의 오류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2.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루오는 70인역본에서 약 43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하라츠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단 한번 히브리어 샤하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시 6:6).|루오는 몸을 돌보는 것을 일차적으로 나타내지만, 의식적 정화도 역시 이 단어의 중요한 개념이었다(레 11:40; 신 23:12, 등). 그러나 구약성경에서는 도덕적 요소의 인식으로 인하여, 예를 들면, 고의적 살인과 같은 것을 위한 정화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선지자들은 죄는 쉽게 씻어버릴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따라서 도덕적 과오를 씻는 정화 의식에는 상징적 의미가 부여된다. 진정한 씻음은 회개로 말미암는다(사 1:16). 그 씻음은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구원 행동이다(사 4:4; 시 51:7). 이 구원 행동은 인간의 회개를 초월하기 때문에 그것을 포함한다(참조: 사 43:25). 선지자들은 그러한 까닭에 도덕적 요구는 주장하지만 도덕주의화(moralization)를 피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루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루오는 비종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행 9:37(반 종교적?)과 행 16:33에서 그렇게 사용되었다.||(b) 루오는 벧후 2:22에서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이 속담(잠 26:11)의 요점은 거짓 교사들이 세례(침례) 후에 도로 죄에 빠져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초래했다는 것이다(참조: 히 14:9이하; 요일 5:16).||(c) 요 13:10에서 세례(침례)가 언급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발을 씻기는 기사는 예수님에 의하여 깨끗케 되는 것과 섬기는 사랑의 모범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몸 전체를 씻는 것과 일부분을 씻는 것의 차이점을 고려해볼 때 전자(렐루메노스[%830], 한글개역, "목욕한")는 아마도 세례(침례)에 의해 깨끗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며 후자(투스 포다스 닙하스다이, 한글개역, "발 …씻을")는 깨끗케 된 것을 매일 매일의 용서에 의해 새롭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깨끗케 하는 것과 섬김의 관계는 용서를 베푸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제자들로 하여금 사랑의 봉사를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의 근원이라는 것이다.||(d) 히 10:22에서 외적인 씻음이 내적인 정화와 관련된다. 기독교인들은 "마음에 뿌림을 받아(란티조)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다(루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말미암는 내적 씻음과 세례(침례)에 의한 외적 씻음을 대조 시키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만일 겔 36:25와 쿰란 문서들에서처럼 뿌림과 씻음이 모두 씻는 물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정결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는, 정결케 하는 세례(침례)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인 것처럼, 세례(침례)시에 유효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희생이라는 견지에서 표현된 롬 6:1이하의 교리이다.||(e) 계 1:5의 어떤 사본들에는 뤼산티(%832,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그에게") 대신 루산티(%831, "우리 죄에서 우리를 씻으신 그에게")가 나온다. 이것은 헬라어에서 이 두 단어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생겨난 기록상의 과실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아마도 계 7:14(비록 이곳에서는 플뤼노로 나오지만)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A. Oepke는 루산디가 정확한 표기라면 이것은 세례(침례)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진정한 신약성경의 사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뤼 뤼산티(해방하다)가 더 나은 표기임이 입증되었다고 말한다.|(참조: A. Oepke; G. R. Beasley).
룻다
Luvdda
룻다 Lydda(지)||륏다는 '장식'을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 이 지명은 사도행전에만 3회 나온다(행 9:32; 행 9:35; 행 9:38).|륏다/ 룻다는 비옥한 사론 평야에 있는 한 마을이다. 하이파(Haifa)에서 남쪽으로 약 70마일, 욥바(Joppa)에서 남동쪽으로 약 11마일(행 9:38)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구약성경에서 대상 8:12, 스 2:33, 느 7:37에 언급되어 있다. 성경 연구가들이 이 마을에 관심을 가지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베드로가 이곳에서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쳤기 때문이다(행 9:32-35). 이 사람의 치유는 "룻다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회심케 하였다.|전승에 의하면 룻다는 성 죠지의 순교지이다. 그는 A.D. 303년 경에 이곳에 장사되어 십자군들에게 숭앙 받았으며, 영국의 수호 성인으로 인정되었으며, 또 시리아 기독교국 전체의 수호자로 인정되었다. 성 죠지는 사악한 용과 싸워 퇴치한 의의 상징이었다. 12세기 십자군이 세운 룻다의 성 죠지 교회는 현재 남아있는 유적물로 상상된다. 룻다는 이스라엘의 중요 항구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BD).
루디아
Ludiva
루디아 Lydia(인)||뤼디아는 '생산'을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 그 이름은 사도행전에만 2회 나온다(행 16:14; 행 16:40).|뤼디아/ 루디아는 로마 제국의 아시아 속주(현재의 아나톨리아 터키)에 있는 페르가눔의 남동부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인 한 여인이다. 행 16:14에 따르면 그녀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였다. 바울이 마게도냐의 빌립보성을 방문하였을 때 그녀는 자주색 물감을 들인 직물을 팔거나 직물의 색깔을 내는데 사용된 연체 동물에서 추출한 자주색 분비액을 파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부유한 루디아는 전 가족과 함께 회개하고 세례(침례)를 받았다. 이들은 유럽에서 최초로 기독교를 믿은 자들로 기록되었다. 그녀의 타고난 친절성은 온화한 겸손과 함께 즉시로 드러났다. 그녀의 "간곡한" 설득 때문에 바울은 초대를 수락하였다(행 16:15). 바울과 실라는 점을 하여 주인에게 큰 이득을 가져다 준 젊은 여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치유한 일로 인해(행 16:16) 옥에 갇혔다가 기적적으로 풀려난 후에 루디아의 집을 다시 방문하였다(행 16:40). 그녀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그와 함께 수고함으로 빌 4:3에 언급된 여자 조력자들 가운데 하나로 속하게 되었을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BD).
루가오니아
Lukaoniva
루가오니아 Lycaonia(지)||뤼카오니아는 '양의 가슴'을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 이 지명은 행 14:6에만 사용되었다.|뤼카오니아/ 루가오니아는 소아시아에 있는 한 지방의 이름이며, 시대에 따라 그 지역의 경계가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갑바도기아, 브루기아, 비시디아, 길리기아, 이사우리아로 경계를 이루고 있다. 타우루스 산맥의 이 높은 고원은 주전 35년경 갈라디아에 합병되었다가 주전 25년 경 갈라디아 왕국과 함게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 루가오니아에서 바울은 더베와 루스드라를 방문하였다(행 14:6; 행 14:11). 루가오니아인들은 거친 국경 민족이었다. 이것은 바울을 대한 그들의 행동에서 부분적으로 알 수 있다(행 13:50; 행 14:19).|(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BD).
루가오니아 방언
Lukaonistiv
루가오니아의 언어로||부사 뤼카오니스티는 뤼카오니조(%733: 루가오니아의 언어를 사용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루가오니아의 언어로'를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행 14:11에 한번 나온다: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루기아
Lukiva
루기아 Lycia(지)||뤼키아는 '매우 덥다'를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 이 지명은 행 27:5에만 나온다.|뤼키아/ 루기아는 소아시아 남서쪽의 한 지방이며 오늘날은 로도스섬(Rhodes: 행 21:1, 로도)의 동쪽 반도에 있는, 지중해를 접하고 있는 아나톨리아 터키(Anatolian Turkey)의 한 지역이다. 루기아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거의 맞은 편에 위치하며, 고대에 이집트의 항구가 그 곳의 항구 도시 바다라(Patara)를 통해 알렉산드리아와 무역하였다. 그곳의 숲이 우거진 산지와 비옥한 크산두스 골짜기(Xanthus Valley)는 바다라(Patara)와 같은 많은 도시들을 육성했던 부를 생산했으며, 그 곳으로부터 바울은 페니키아로(행 21:1), 무라(Myra)로 항해하였으며, 무라의 분주한 항구에서 그는 아달리야(Italy)로 향하는 알렉산드리아 배에 승선하였다(행 27:5 이하). 루기아는 일찍이 크레데섬(Crete)으로 이주한 블레셋 사람들(Philistines)의 최초의 본거지였으며, 이후에 지중해를 따라 팔레스타인(Palestine) 서남쪽의 평지로 옮겨갔다.|히브리인들이 옛 유대의 구릉 지대에 정착하고 있었던 시기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이주민들인 이들 루기아의 블레셋인들은 가나안의 성읍들을 지배하고, 그 연안과 세펠라(Shephelah Great)를 지배하고 있었다. 루기아는 페르시아인들 또는 알렉산더 대왕, 그리고 셀류시드의 감독하에 있다가 후에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고 나중에는 아마도 클라우디우스(Claudius)에 의해 자치령이 되었다. 그곳의 부유한 시민들은 남아있는 극장들의 옛터와 다른 여러 도시의 건축물들이 입증하는 바와 같이 헬라 문화의 중심 세력으로 발전하였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BD).
이리
luvko"
이리 wolf.||#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뤼코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이리'를 의미한다.|이리는 개과에 속하는 육식성 포유 동물 중에서는 가장 큰 동물이다. 이리는 홀로 또는 떼를 지어 사냥을 한다. 이리들은 용감성, 난폭성, 탐욕 등으로 유명하며, 흔히 먹을 수 있는 분량 이상의 것을 죽여 버리며 특히 양의 적이 된다(AEB).|고대 문헌에서 이리는 무서운 맹수로 자주 언급된다. 이리에 대한 주제들은 이리의 사나운 용감, 탐욕, 교활, 양의 두려움의 대상 및 적대 관계, 갑작스럽게 나타나 야기시키는 공포 등이며, 이런 것들이 상징과 속담으로 표현되어 있다.|이리는 신화와 미신에서 도망자의 상징이나 악마적 세력의 상징으로 나타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뤼코스는 70인역본에서 9회 나오며, 히브리어 제에브(이리; 7회)와 도브(곰; 1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이리는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잘 알려진 짐승이며, 주로 상징 및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창 49:27에는 베냐민을 물어 뜯는 이리로, 렘 5:6에는 유다의 적을 사막의 이리로, 또한 겔 22:7에는 유다의 방백들을 포악한 이리로 묘사한다.|합 1:8에서 이리가 밤에 약탈하는 모습이 나오며, 습 3:3에서 이리를 예루살렘의 재판장에 비유한다.|집회서 13:17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이리와 양은 적대 관계에 있다. 사 11:6과 사 65:25에서 이리가 양과 함께 누워 있는 것은 메시야 시대의 우주적 평화를 상징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뤼코스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사도행전에만 사용되었다.||(a) 마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여기에서 뤼코스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에서 그들의 성격을 묘사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해 있기도 하며, 그들은 주목할만한 외적 업적을 남길 수 있지만 그들의 목적은 이기적이며, 파괴적이다.||(b) 행 20: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를 만나고 떠나면서 교회는 밖에서 들어온 파괴자들, 곧 거짓 교사들 때문에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거짓 교사들은 교회의 한 복판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참조: 행 20:30; 요일 2:19; 요일 2:30). 위험은 장로들이 바울에게 배운 바와 같이 목회에 진력함으로 추방될 것이다(행 20:31).||(c) 마 10:16(병행구 눅 10:3),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여기서 뤼코스는 선교 현장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선교할 때 직면할 위험들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제자들의 권위와 그들이 당한 핍박 사이의 대조는 세상에 대한 그들의 종말론적 관계를 특징 지운다.||(d) 요 10: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여기서 이리는 삯군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교회 공동체가 피할 수 없는 위협 아래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목자의 모습이 관심의 초점이다. 목자의 모습은 삯군의 모습과 다르다. 삯군에게는 돈이 관심사이고, 양들과는 아무런 내적 관계도 없다. 여기에 초점은 삯군들과 달리 예수님은 그런 위험을 보시고 목숨을 걸고 양떼를 보호하시며 그리하여 위험을 막으신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위협에 직면할 때 양떼는 그들 자신이 참으로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G. Bornkamm).
잔멸하다
lumaivnomai
해치다, 파괴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뤼마이노마이(Aeschyl., Hdt. 이래)는 뤼메(%734: 손상, 파멸, 오만 무례)에서 유래했으며, 본래 '모욕적으로 대하다'라는 의미에서 그 후에 더욱 일반적으로 '손상하다, 해치다, 상하게 하다, 위태롭게 하다(예: 몸의 건강, 국가의 정체), 파괴하다(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유린하다(전쟁의 지역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뤼마이노마이는 70인역본에서 약 17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샤하트(멸망하다, 황폐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뤼마이노마이는 신약성경에서 행 8:3에 한번 나오며, 잔학하고 사나운 핍박자인 사울(바울)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여기서 뤼마이노마이는 교회를 '파멸시키는 것'을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근심하게 되다
lupevw
고통을 가하다 inflict pai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뤼페오(Hes. 이래)는 뤼페($3077)에서 유래했으며, '고통하게 하다, 고통을 가하다, 화나게 하다, 기분 상하게 하다, 슬프게 하다'를 의미한다.|중간태 뤼페오마이는 '고통을 느끼다' feel pain, '슬퍼하다' be sad를 의미한다.||이 어군의 단어들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 양자 모두를 가리킨다. 육체적인 고통은 특별히 굶주림, 갈증, 더위, 추위 또는 질병에 의한 고통을 말하고, 한편 정신적인 고통은 불행, 죽음, 괴로움, 모욕으로 인한 번민이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뤼페오는 70인역본에서 약 60회 나오며, 12개의 히브리 단어들을 번역하며, 육체적인 역경, 고생, 고통, 슬픔, 비탄, 공포, 불쾌, 분노, 걱정, 번민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뤼페오는 신약성경에서 2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① 뤼페오는 '슬프게하다, 고통을 주다, 마음 아프게 하다'를 의미한다(고후 2:2; 고후 2:5; 고후 7:8).|② 뤼페오는 수동태로 '슬퍼하다, 고통하다, 괴로워하다'를 나타낸다(마 14:9; 마 17:23; 마 18:31; 마 19:22; 마 26:22; 막 10:22; 막 14:19; 요 16:20; 요 21:17; 고후 2:4; 살전 4:13; 벧전 1:6).|③ 고후 7:9, 고후 7:11에서는 하나님께 합당한 슬픔, 곧 슬프게하고 슬퍼하는 것을 나타낸다.||(b) ① 뤼페오는 엡 4:30에서 '감정을 해치다, 모욕하다'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② 롬 14:15에서 뤼페오는 '고통을 느끼다, 마음을 상하다'를 나타낸다: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참조: Walter Bauer; R.Butmann; H.Haarbeck; H.G.Link).
슬픔
luvph
슬픔 sorrow, 고통 pai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뤼페(Aeschyl., Hdt. 이래)는 '고통, 슬픔'을 의미한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뤼페가 신체적인 고통과 감정적인 고통을 나타내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뤼페는 70인역본에서 약 45회 나오며, 7개의 히브리 어군을 번역하며, 그 의미는 다양하여, 육체적인 역경, 수고, 고생, 고통, 슬픔, 걱정 및 번민 등의 의미를 망라한다.|잠 14:13에서 인간 생활에 기쁨과 고통이 뒤섞여 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주시지만(창 3:16-창 3:17) 마지막 시대에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사 35:10; 사 51:11). 고통은 단순한 형벌인 것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육 수단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고통 중에서 기쁨과의 확고한 관계를 깨닫는다(참조: 시 126:5).||#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뤼페는 신약성경에서 1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뤼페는 일반적으로 '슬픔, 고통(아픔)'에 대해 사용되었다(고후 7:10; 히 12:11; 벧전 2:19). 특별히 영혼의 슬픔, 예를 들면, 눅 22:45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의 슬픔, 요 16:6; 요 16:20; 요 16:22에서 예수님의 떠남과 관련된 슬픔, 롬 9:2에서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바울의 슬픔, 빌 2:27에서 에바브로디도가 죽을 지경에 있었을 때의 바울의 슬픔을 들 수 있다.||(b) 뤼페를 맛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고후 2:1이하). 마지막 날에 그것은 사라질 것이다(참조: 계 7:16 이하). 뤼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다. 회개와 갱신은 지속적인 믿음의 생활에 필수적인 경건한 뤼페를 포함한다(고후 7:9이하). 그 결과 일어나는 세상과의 불화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뤼페를 겪게 된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뤼페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 안에서 성장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회가 되는 것으로 여긴다.|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심으로 인하여 제자들은 뤼페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단지 마음의 슬픔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공격당하기 쉬운데서 비롯되는 뤼페(요 16:6-요 16:7, 요 16:20이하)이다. 그들이 만일 예수님께 속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고 한다면, 그들은 이 뤼페를 체험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뤼페는 그들의 기쁨의 원천이다(요 16:21-요 16:22). 예수님과의 헤어짐을 통해 그들은 예수님과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되고, 그 결과 세상에 대한 승리를 하게 된다(참조: 요 16:33).|벧전 2:19은 비슷한 사상을 발전시킨다. 부당한 고난으로 인한 고통에는, 만일 그리스도를 본받아(21절) 하나님께 헌신하고 세상과 구별되어 고통을 받아들인다면 풍성한 상급이 따를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H.Thayer; R.Bultmann).
루사니아
Lusaniva"
루사니아 Lysanias(인)||루사니아는 신약성경에서 눅 3:1에 한번 나온다. 그는 세례(침례) 요한의 사역 초기에 '아빌레네의 분봉왕'이었다. 요세푸스는 루사니아란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을 언급한다. 톨레미의 아들인 루사니아는 안토니(Anthony)가 그에게 준 왕의 칭호를 갖고 있었다(Dion Cassius).|그러나 요세푸스는 또한 누가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한 분봉왕에 대해 언급한다. 두 사람의 통치 영역은 동일하지 않았다. 수도가 갈기스에 있는 전자 루사니아는 아빌라(Abila)를 포함하는 상당히 넓은 지역을 통치했다.||1세기 것으로 알려져 있는 비문에도 이 사실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성전의 헌당을 언급하고 '분봉왕 루사니아의 자유민 님파이오스(Nymphaios)'에 의하여 '폐하(the Lords Imperial)의 구원을 위하여'라는 문구를 가지고 있다. '폐하'는 황제 디베료와 그의 모친 율리아를 가리킨다. 후자는 주후 29년에 죽었다. 그래서 이 비문의 시기는 주후 14년(또는 12년)과 29년 사이여야 한다. 누가는 착오하지 않고 있다. 그는 이 시대에 아주 가까이 살았고, 그의 모든 기록은 아주 정확하고(눅 1:3), 모든 점에 대하여 아주 철저히 알고 있었다.|그러므로 누가의 이에 대한 기록은 착오였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참조: PEB; R. C. H. Lens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