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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돌려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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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리다, 변화시키다, 마음을 바꾸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메타발로(Homer 이래)는 메타($3326)와 발로($906: 던지다)에서 유래했으며,||(a) 어떤 것으로 '돌리다, 방향을 바꾸다, 변화시키다', 중간태로 '자신을 변화시키다',|(b) 비유적으로 '마음을 바꾸다'(Thu., Pla., X. 등)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메타발로는 70인역본에서 약 3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하파크(변화시키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나일강을 피로 '변하게 하는 것'(출 7:17; 출 7:20), 머리카락이 희게 '변하는 것'(레 13:3이하), 이스라엘이 대적 앞에서 '돌아서는 것'(수 7:8),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사 60:5)을 나타낸다. 수 8:21에서 슈브(돌아가다)를 번역하여 '돌이키는 것'을 나타내며, 마카베오사서 6:8에서 '마음을 바꾸는 것'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메타발로는 신약성경에서 행 28:6에 한번 나오며, '마음을 바꾸다'를 의미한다: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어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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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메타고(X., Polyb., Diod.)는 메타($3326)와 아고($71: 인도하다, 데려오다, 끌어오다, 가져오다)에서 유래했으며, '옮기다, 인도하다, 이끌어 가다, 지도하다, 방향을 짓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메타고는 신약성경에서 야고보서에만 2회 나온다.||(a) 약 3:3에서 메타고는 말의 재갈에 대해 '이끌리거나 인도하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b) 약 3:4에서 메타고는 배의 키에 대하여 '운전하는 것'을 나타낸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메타디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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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다, 나누어 주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메타디도미(Theogn., Hdt. 이래)는 메타($3326)와 디도미($1325: 주다)에서 유래했으며,||(a) '(~의 일부)를 주다, 나누어 주다', 아무와 함께 '나누다',|(b) 분사로 '나누어 주는 자'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메타디도미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메타디도미는 '나누어 준다'는 의미에서 '구제하는 것'을 나타낸다.|① 눅 3:11,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것이니라 하고".|② 엡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③ 롬 12:8에서 '나누어 주는 자(구제하는 자)'를 의미한다: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b) 메타디도미는 롬 1:11에서 은사를 '나누어 주는 것'을 나타낸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c) 메타디도미는 살전 2:8에서 목숨을 '주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번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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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김, 변경||#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메타데시스는 메타티데미($3346: 옮기다, 바꾸다, 변화시키다)에서 유래했으며,||(a) '장소의 변경이나 옮김'(Epic., Diod.),|(b) '변형, 변경'(Ps.- Aristot.), '마음의 변화'(Polyb.)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메타데시스는 70인역본에서 외경 마카베오이서 11:24에 한번 나오며, 생활 양식의 '변화'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메타데시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히브리서에만 사용되었다.||(a) 히 11:5에서 에녹의 '옮김'을 나타낸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b) 히 7:12에서 율법의 '변경'을 나타낸다: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c) 히 12:27에서 진동하는 창조물의 '변동'을 나타낸다: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Maurer, TDNT).
메타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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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기다, 이동하다, 출발하다, 떠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메타이로(Demosth., Dit. 등)는 메타($3326)와 아이로($142: 들어 올리다, 집어 올리다)에서 유래했으며, '들어 올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다'는 의미에서 '옮기다, 이동하다'(Eur., Theophr.)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메타이로는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에만 2회 나오며, '떠나다, 떠나가다, 출발하다'를 의미한다.||(a) 마 13:53,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b) 마 19: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메타칼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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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환하다, 부르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메타칼레오(Homer 이래)는 메타($3326)와 칼레오($2564: 부르다)에서 유래했으며,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불러내다, 소환하다'를 의미하며, 중간태로 '자신에게로 부르다, 자신에게로 부르러 보내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메타갈레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사도행전에만 사용되었으며, '자신에게로 부르다'를 의미한다.||(a) 행 7:14,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b) 행 10: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하시기로".||(c) 행 20: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d) 행 24: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흔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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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다, 옮기다, 변경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메타키네오(Hdt. 이래)는 메타($3326)와 키네오($2795: 움직이다, 이동하다)에서 유래했으며,||(a) 매우 일반적 의미로 '움직이다, 옮기다, 바꾸어 놓다'(Hdt.)|(b) 비유적 의미로, '변경하다'(Aristot.)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메타키네오는 70인역본에서 6회 나오며, 지계표를 '옮기는 것'(신 19:14), 적들을 '패주시키는 것'(신 32:30), 작은 산들을 '옮기는 것'(사 54:10)을 표현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메타키네오는 신약성경에서 골 1:23에 한번 나온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여기에서 메타키네오는 ~에서 '물러나다'를 의미한다. 그가 붙잡은 소망, 그가 의존하고 있는 소망으로부터 이동하는 것, 곧 물러나는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참예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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몫을 취하다, 참예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메탈람바노(Pind., Hdt. 이래)는 메타($3326)와 람바노($2983: 취하다, 받다)에서 유래했으며,||(a) '몫을 취하거나 받다, 받다',|(b) '기회를 가지다, 때를 얻다'(Ployb.; Diod.),|(c) '참여하다',|(d) '나중에 취하다', 여기서 '변경하다, 바꾸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메탈람바노는 70인역본에서 7회 나오며, 제사에 참예하는 것(지혜서 18:9), 즉위식에 참석하는 것(마카베오이서 4:21) 등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메탈람바노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오며, 사도행전에 3회, 디모데후서에 1회, 히브리서에 2회 사용되었다.||(a) 메탈람바노는 딤후 2:6에서 '아무개에게 생긴 몫을 받다(그가 수확한 열매를)' 라는 의미를 지닌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b) 메탈람바노는 '(자양분을) 취하다'(이용 가능하거나 일상적인 음식을 통하여)라는 의미를 지닌다.|①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② 행 27:33, "날이 새어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c) 메탈람바노는 히 6:7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선한 것에 대해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땅이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으나 열매를 내지 못하면 나중에 버림을 당하듯이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받았은즉 두번 회개의 기회은 없다. 히브리서는 여기서 마 13:3 이하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를 발전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목적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과하신 훈련에 필요한 일로 분투하지 않을 수 없다.||(d) 행 24:25의 카이론 데 메탈람바노는 일반적으로 '내가 관심이 있으면"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데, 그럴듯하지만 너무 무미건조하다. 훨씬 더 그럴듯한 의미는 "내가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즉 "내가 시방은 달갑지 않으나 호의적으로 변할 때"이다(한글개역에는 "틈이 있으면"으로 번역됨).||(e) 메탈람바노는 히 12:10에서는 70인역본의 용법을 따라 '참예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참조: G. Belling; Walter Bauer; J. H. Thayer).
메탈렙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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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함, 참여, 받아들임.||#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메탈렙시스(Pla. 이래; Dit., Poxy.)는 메탈람바노($3335)에서 유래했으며, '취함, 참여, 받아들임'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메탈렙시스는 신약성경에서 딤전 4:3에 한번 나온다: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음식에 관한 비기독교인의 규율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금한다. 문맥은 이 음식들이 하나님에게 적대적이거나 사람에게 위험스런 세력의 힘 아래에 놓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여 기자는 모든 음식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뜻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악한 세력의 힘에서 자유로운 자로서 확신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참예할 것을 강조한다.|(참조: G. Delling).
메탈랏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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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다, 교환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메탈랏소(Hdt. 이래)는 메타($3326)와 알랏소($236: 변경하다, 바꾸다)에서 유래했으며, '변경하다' alter, '바꾸다' change, '교환하다' exchange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메탈랏소는 신약성경에서 로마서에만 2회 나온다.|·롬 1:25에서 하나님의 진리, 즉 그의 계시(참조: 롬 1:18 이하)를 거짓, 즉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두는 우상 숭배로 바꾸었다고 언급한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6에서 이로 인하여 자연스런 관계가 비자연스런 관계로 바뀌기에 이른다. 이런 성적 타락은 종교적인 타락의 결과이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F. Buchsel).
뉘우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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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바꾸다, 후회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메타멜로마이(Thu. 이래)는 메타($3326)와 멜레이($3199)에서 유래했으며,||(a) '마음을 바꾸다' change one's heart(일반적으로나 죄에 관해서),|(b) '후회하다, 회개하다' regret, repent를 의미한다.||「동의어 비교: 메타멜로마이($3338), 메타노에오($3340).|전자는 단순히 '감정적' 변화를, 후자는 '선택'의 변화를 표현하며, 전자는 '특정한 것들'과 후자는 '전생이'와 관련을 가지고, 전자는 비록 양심의 가책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후회' 이외의 여하한 것도 의미하지 않지만 후자는 '회개'로 알려진 도덕적 목적의 역전을 의미한다는 취지에서 이 두 단어간에 매우 빈번하게 차이점이 규정되지만, 그러나 이 차이점들은 용법상 거의 유지되지 않는 것 같다.|그렇지만 메타노에오가 도덕적 행위와 결과를 표현하는 보다 완벽하고 보다 고상한 용어라는 점을, 이 단어의 어원 뿐만 아니라 이 단어의 용례의 보다 높은 빈도, 이 단어가 자주 명령형으로 사용된다는 사실(메타멜로마이는 결코 명령형으로 사용되지 않음), 그리고 아포($575)와 에크($1537)와 함께 쓰이는 이 단어의 구문이 지적해 준다(참조: 행 20:21).」||#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메타멜로(마이)는 70인역본에서 약 14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나함(애석해하다, 후회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인간의 순수한 '후회'(출 13:17), 하나님의 '후회'(삼상 15:35)나 '뉘우침'(대상 21:15), '긍휼히 여기심'(시 106:46) 등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메타멜로마이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마태복음에 3회, 고린도후서에 2회, 히브리서에 1회 사용되었다.||(a) 마 21:29; 마 21:32, "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2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참조: 마 21:28-32).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것을 요구했다. 한 아들은 간다고 대답했으나 가지 않았다. 다른 아들은 거절하였으나 자신의 대답을 후회하고 포도원으로 갔다. 이 비유에서 메타멜로마이는 '자신의 결정을 바꾸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적용했다. 그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켰으며, 이와 같이 세례(침례) 요한의 메시지를 믿고 회개하였던 세리와 창녀들도 아버지께로 돌이켰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그들의 불순종을 계속하였다.||(b) 마 27:3에서 메타멜로마이는 '후회하다, 뉘우치다'를 의미한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룟 유다의 사건은 메타멜로마이와 메타노에오($3340)가 신약성경에서 동일한 의미를 공유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유다는 예수님이 부당하게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배신 행위를 후회했으나, 참된 회개의 길은 찾지 못했다.||(c) 고후 7:8에서도 메타멜로마이는 '후회하다'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참조: 고후 7:8-10). 여기서도 구별되는 점이 나타난다. 바울은 그가 고린도인들에게 격렬한 서신을 띄운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편지를 받아보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근심이 그들을 참 회개(메타노이아[$3341])와 하나님에게로의 내적 돌이킴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회개는 결코 후회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우리에게 구원만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d) 히 7:21(시 110:4 인용; 마음을 바꾸다),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맹세는 예수님의 제사장적 지위가 구약의 지위보다 우월함을 보증하고, 하나님의 변치 않는 신실함을 표현하는데 기여한다. 이러한 신실함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사와 부르심은 돌이킬 수 없는(아메타멜레토스) 것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인식이 가능하다(참조: 롬 11:29). 하나님은 인간 마음의 불순종과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실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Michel; F. Laubach).
변형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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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형상으로 바꾸다(변하다, 변형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메타몰포오(Diod.)는 메타($3326)와 몰포오($3445: 형성하다, 형태를 이루다)에서 유래했으며,||(a) '고쳐 만들다, 개조하다, 다른 모양으로 바꾸다, 다른 형태 또는 다른 형상으로 바꾸다(변하다, 변형하다)',||(b)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하다, 다른 것이 되다'를 의미한다.||(c) 비교 종교에서 일반적으로 공통된 종교의 신앙은 신들이 다른 형태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묵시 문학과 신비주의에서 인간은 초현재적 형태로 변한다. 유대교에서는 그러한 변화가 종말론적 구원의 선물이다. 밀의 종교에서 그것은 몸으로부터의 해방과 신격화의 개념을 포함한다. 마술은 신학적 형태로의 변화를 약속하며, 마법사들은 신적 형태와의 결합을 통하여 신과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메타몰포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마 17:2; 마 9:2; 롬 12:2; 고후 3:18에 사용되었다.||(a) 예수님의 변형 기사는 인지 가능한 변화의 실례를 제공한다(막 9:2=마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지상적 형태에서 천상적 형태로 변형한 이 기적은 옷의 광채로 나타나는데(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얼굴의 광채도 언급함), 헬라적 의미의 변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종말론적 사상을 문맥이 시사한다. 새 세대(참조: 고전 15:51 이하)에 의인에게 약속된 일이 이미 이 세상에서 예수님에게 -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유일한 소명을 가진 자로서의 예수님에게 일어났다. 그의 가장 친밀한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인간적 외모가 일순간에 변모된 세계에서의 천상적 존재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것은 종말론적 실재에 대한 예견이자 보증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로서 궁극적 구원의 소망을 명백히 보여주신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한 길의 목적이 위대한 성취자의 영광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막 8:38 이하 및 병행구).||(b) 바울에게 있어서 변형의 개념은, 그 개념이 나타나는 두 구절들(고후 3:18; 롬 12:2)에서 이 시대에 사는 동안에 이미 발생하거나 발생하기 시작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보이는 가시적인 과정을 가리킨다.|고후 3:18에서 바울 사도는 유대인의 태도(고후 3:13 이하: 영광을 가리우는 수건)와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대조함으로 새 디아데케(언약)의 우월성에 대한 그의 논증을 결론 짓는다. 더 나은 새 언약의 선물과 표시는 성령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 그리스도의 하늘의 영광을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보는 영광을 소유하신 자의 형상(image)으로 지속적이고 점진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 변화를 가져다 주시는 이는 바로 성령에 의해 현재하시고 활동하시는 주님 자신이시다.|분명히 바울은 보는 것에 의해 변형하고, 하나님의 보여진 형상(image)으로 변형하며, 의인에게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으로서의 변형이라는 관점에서 헬라 신비주의의 사상을 형식상으로 따르지만 실질적으로는 헬라 신비주의 경건 사상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다.|사람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변화할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가능하다. 반복적인 의식 행위에 의해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신비적인 신격화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의 모습으로의 변화는(참조: 롬 8:29)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의 하나님을 닮은 그 모습을 다시 얻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특징 짓는 성경적 거리를 유지한다. 입문자는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경험 같은 배타적 권리를 가지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변형의 기적에 참예한다.|무엇보다도, 바울이 의미하는 변형은 자율적이거나 내재적이거나 신비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지상의 삶 가운데서 초월적인 구원의 종말론적 실재가 결정적으로 역사하는 과정이다. 바울은 종말론적 방식을 따라 세상 끝날에 있을 신자들의 육체적 변형에 대한 소망을 선언한다(고전 15:44 이하; 고전 15:51 이하; 빌 3:21). 그러나 또한 새 시대(aeon)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왔음을 분명히 한다. 종말론적 아파르케($536: 첫 열매)요 알라본($728: 보증)인 성령을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하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 자신이 그 안에 계시는(고후 3:17이하) 프뉴마의 존재 덕분에 변형이 이미 시작되고 단지 내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부로부터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데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독사에 참여하게 함으로 말이암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긴장이 "이미"와 "아직" 사이에 존재한다: 아프 독세스 에이스 독산("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롬 12:2에서 변형의 개념은 직설법에서 명령법으로 바뀌며, 두 세대(aeon)에 대한 날카로운 가르침의 견지에서 이해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즉 "너희 자신을 이 세대에 순응시키지 말고 의식(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형되어라".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이 세대에 속해 있지 않고 다가오는 세대에 속해 있다(참조: 갈 1:4). 그러므로 그들은 행실에 있어서 이 세대에 속하는 삶의 형태를 따라서는 안되며 다가오는 세대에 속하는 매우 다른 삶의 형태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이런 삶의 형태를 제시할 수 없다. 프뉴마에 의해 그들의 생각과 의지가 새로와짐으로 변화된다. 회개하라고 요청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반영하는 이 역설적이 메타몰포오는 지금 이루어지고 있으며 장차 이루어져야 할 변화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책임을 고려하고 있다. 그 요지는 의무로서의 성령 안에서 새로운 도덕적 삶이다.|(참조: J. Behm).
회개하다
metanoevw
마음을 바꾸다, 회개하다, 회심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메타노에오(Antipho 이래)는 메타($3326)와 노에오($3539: 지각하다, 인지하다, 생각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a) 메타노에오는 '후에' 또는 '나중에 알아 차리다'(때때로 '너무 늦게'라는 의미를 포함한다)(Epicharmus), '후에나 뒤에 동의하다'(BGU.).||(b) 그 다음에 메타노에오는 '마음(mind)을 바꾸다, 다른 견해를 채택하거나 받아들이다, 감정을 바꾸다'(Plut.), '결의나 의사를 바꾸다'(Diod.), '다른 의견에 이르다, 의견을 바꾸다'(Antiphon)를 의미한다.||(c) (b)의 의미에서 만일 이전 견해가 어리석었거나 부적당하거나 악하였다는 인정에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면 '유감으로 생각하다, 후회하다' regret, '양심의 가책을 느끼다' feel remorse, '한탄하다'(Xenoph.)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d) 고전 헬라어에서 메타노에오 어군은 신약성경에서 이 어군의 용법처럼 정확한 의미로 사용되는 단계로까지는 발달되지 못하였다. 비록 그 의미에 회심에 속하는 몇몇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는 할지라도, 헬라 사회는 인간의 전 삶의 철저한 변화나 회심, 돌아옴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회심의 개념이 헬라 사상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며, 그것의 기원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메타노에오는 70인역본에서 약 22회 나오며, 하나님에 관해서든지(참조: 삼상 15:29; 렘 18:8; 욜 2:13-15; 암 7:3, 6), 인간에 관해서든지(렘 8:6; 렘 13:19) 간에 히브리어 니함의 니팔형을 번역하는데 사용되었다. 히브리어 니함의 니팔형은 '어떤 일에 대해 죄송하게 여기다, 유감이다, 뉘우치다'를 의미한다.|돌아감(옴)의 사상은 특히 선지자들이 설교하였고, 히브리어 동사 슈브이며, 헬라어로는 에피스트레포($1994)로 번역되고 있다(암 4:6; 호 5:4; 호 6:1). 돌이키라는 예언적 요구에는 백성과 하나님, 그리고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반드시 인격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놓여 있다. 죄와 배교는 이러한 인격적 관계를 방해하고 파괴한다. 돌이킴은 전인으로서의 그 인간에게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악을 외면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쿰란 공동체는 모든 악으로부터 돌아설 것과 모세의 율법으로 모두 돌아갈 것을 성원들에게 요구함으로써 회개의 촉구를 계속하였다. 따라서 그 공동체의 성원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이스라엘의 회심자들로 칭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약을 회심의 언약이라고 불렀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메타노에오는 신약성경에서 34회 나오며, 요한계시록에 12회, 공관복음에 16회, 사도행전에 5회, 그리고 바울 서신에서는 고린도후서에 1회만 나온다.|신약성경은 70인역본의 용법을 따르지 않고(70인역본은 슈브를 에피스트레포로 번역했다) 돌아오다(회전하다)를 의미하는 슈브의 뜻을 표현하기 위하여 메타노에오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상의 변화는 구약성경의 다른 헬라어 번역본들과 헬레니즘 유대주의 속에서 이미 보여지고 있었다. 단어 선택의 변화, 즉 에피스트레포 대신 메타노에오를 선택한 것은 신약성경이 슈브의 구약적 용법 속에 내포되어 있는 구체적이며, 물리적 개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이나 사상, 의지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회개하다, 회심하다'라는 관념(이와 마찬가지로 회개와 개종이라는 관념도)이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신약성경에는 돌아온다는 전인에 의한 결단이 강조되어 있다. 우리가 단순히 겉모양의 변모나 지적인 관념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언어학적 이해: 대중적인 헬라 의미의 메타노에오는 눅 17:3에서 형제에 대한 잘못에 대한 후회를 나타낸다. 고후 7:9; 고후 7:10에서 메타노이아는 후회(양심의 가책)를 나타낸다.|다른 곳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의미는 '마음을 바꾸다, 마음의 변화' 또는 '회심하다, 개종하다', '회심, 개종'이다. 그러나 그 용어는 세속적 헬라어와는 유사성이 없기 때문에, 구약과 유대교의 개종의 개념의 경향을 따라 종교적 도덕적 의미를 지닌다.||메타노에오와 메타노이아는 '회개, 회심'에 대해 사용되었다.||(a) 세례(침례) 요한.|회심은 세례(침례)요한의 메시지에서 기본적인 특징이었다(마 1:4과 병행구절; 마 3:2, 마 3:8과 병행구절, 마 3:11, 참조, 행 13:24; 행 19:4; 눅 1:16).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가 임박하였고 그의 심판이 바로 가까이에 있다; 그러므로 시간의 마지막 기간에 인간의 유일한 과제, 메타노이아가 있다. 요한이 진전시킨 것은 회심으로의, 불경건하고 죄많은 과거와의 단절로의, 하나님께로 돌아섬으로의 부름인데, 이는 역사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부르심은 어떤 선지자의 입에 의한 것보다 더 절대적인데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종말론적 계시의 절박함 아래에 서있기 때문이다.|요한이 그의 표어로 삼은 그 용어는 같은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것은 죄를 내던져 버리고 계명을 완수하려는 그들의 지치지 않는 다방면의 노력의 요약이다.|그러나 그 표어는 그 말에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회심은 단호하다. 그것은 진심이어야 하며 외관상으로만이어서는 아니된다. 그것은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이며, 단지 이름난 죄인들(눅 3:12 이하)이나 이방인들(눅 3:14)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회심은 그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요구된다(막 3:7 이하). 그것은 안으로부터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 변화는 회심에 상당하는 생활(마 3:8; 참조: 마 3:10),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사랑과 의의 삶으로(눅 3:10-눅 3:14) 증명되어야 한다.|회심에 대한 설교와 함께 요한은 죄의 용서(마 1:4 병행구절)와 회심(마 3:11) 모두를 가져오는 정화의 성례인 회심의 침례(막 1:4 병행구절; 행 13:24; 행 19:4)를 연결한다. 그 의미하는 바는 오는 세계를 위한 인간 본성의 완전한 변화는 침례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침례)라는 종말론적 성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오는 구원 속에 한 자리를 얻은 회심한 공동체를 형성하신다.|메타노이아는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인간의 과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침례)를 통해 회심을 수여하시고, 거기에 인간은 그것이 그에게 주어지게 하라, "이 시대가 지속되는 동안 그 자신의 존재의 신적 기초로서 그것을 유지하고 인증하라"는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소환받는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유대교를 초월하고 구약의 예언적 경건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력을 새롭게 하여 새로운 종말론적 확신을 갖게 한다는 회심의 개념을 발견한다.||(b) 예수 그리스도.|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공관 복음서의 기자들에 따르면 메타노에이테(2인, 복수, 현재, 명령)는 바실레이아(나라, 왕국)의 메시지가 지시하는 바와 확고하게 결합되어 있는 명령이다(막 1:15; 마 4:17).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세례(침례)의 부름을 반복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회심을 그 분 자신의 인격 속에서 종말론적 바실레이아의 현존하는 실체로부터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기본적인 요구로 삼으심으로 그것을 수정하시고 초월하신다.|회심에로의 부르심은 그가 보내심을 받은 목적이다(눅 5:32). 예수님의 회심에 대한 설교는 이전의 그런 설교 중 어떤 강력한 설교보다도 훨씬 능가한다(마 12:39 이하. 병행구절: 요나).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도 역시 회심에로의 부르심이다(마 11:20 이하. 병행구절 참조: 5:8).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메타노이아는 예수님께서 보이신 구원의 방법이다. 그것은 취하여야할 방법이지 이론적으로 묘사된 방법이 아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회심의 선포, 특히 유대교의 개종 신앙을 초월하신다(참조, 눅 16:30 이하). 바실레이아의 도래를 생각할 때, 테슈바(8666: 돌아옴)를 표현하는 전통적인 유대교의 방식, 즉 예를 들면 뉘우침의 감정, 비통의 몸짓, 참회의 행위 또는 고행(참조, 마 11:21 병행구절) 등은 아무 가치가 없다.|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는 인간 편에서의 최후의 무조건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그것은 근본적인 회심, 본성의 변화, 죄악으로부터의 완전한 돌아섬, 절대적인 복종으로 단호하게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요구한다(막 1:15; 마 4:17; 마 18:3). 회심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떨어진다(마 11:20 이하, 병행구절; 눅 13:3, 눅 13:5; 눅 19:40 이하; 눅 23:28 이하).|이 회심은 단호하다. 되돌아 가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지금 선택한 길을 따라 신뢰할 만한 태도로 전진할 뿐이다. 그것은 전체 인간에 영향을 미친다. 첫 번째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개인의 삶에, 그 다음은 필연적으로 항상 그의 행위에, 모든 상황에서 그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마 12:33 이하, 병행구절; 마 23:26; 막 7:15 병행구절).|예수님의 모든 선포는, 그것의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절대적인 요구(산상 수훈, 제자직에 대한 말씀)와 함께 메타노이아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을 때 조차도 메타노이아의 선포이다. 그것은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라는,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모든 것, 즉 단지 노골적인 악뿐만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완전히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돌아서라는 선포이다(마 5:29 이하, 마 5:44; 마 6:19 이하; 마 7:13 이하, 병행구절; 마 10:32-39 병행구절; 막 3:31 이하, 병행구절; 눅 14:33, 참조, 막 10:21 병행구절 등).|종말론적 광신, 혹은 도덕주의, 혹은 결의론(casuistry) 등과 같은 종류와 달리, 회심의 요구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에서 단 하나의 유일한 명령이다.|그것은 모두에게 차별없이 설교되며 구원이 있는 유일한 길을 가리키기 위해 보여주기 위해 가차없이 엄격하게 제시된다.|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항복과 헌신을 요구한다: 그 하나님은 죄인인 나에게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눅 18:13).|그것은 의인보다는 죄인들을 찾으시는 하나님께로의 회심이다(눅 15:7, 눅 15:10, 참조, 눅 15:17 이하; 눅 5:32; 눅 13:3; 눅 13:5).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의 치명적인 갈등 속에서 그의 회심으로의 부르심의 본질을 나타내 보이신다.|예수님의 설교 속에서 믿음은 회심으로부터 자라나는 것인데(막 1:15), 그것은 그가 요구하는 두 번째 것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 메타노이아의 실제적인 면의 성장이다.|예수님께서 이해하시는 회심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다. 그것은 종말론적 심판의 위협에 직면한 옛 본성과의 단절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에 의하여 요구되는 인간의 전체 발걸음을 포함한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새로운 인격적 관계, 즉 피스티온(믿음)의 관계를 세움으로 달성된다. '회심하다' to convert, '회심되다' to be converted는 하나님의 왕국의 서광(曙光)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그러나 이 절대적인 요구는 인간 자신의 공로로 충족시킬 수 없다. 마 18:3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본보기로 들어 예수님에게 있어서 '회심하다, 다른 사람이 되다'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신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 아이이다'라는 것(파이디온)은 작다는 것,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것을 잘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회심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작아지며(참조, 마 18:4),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서 일하시도록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은 단순히 그로부터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이 자신에게 줄 수 없는 것을 주신다(참조, 막 10:27 병행구절). 이것이 메타노이아의 본질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구속력있는 요구가 되기 위해 아직도 중단되지 않는다. 그것은 동일한 시간에 이 둘 모두이다; 이것은 다른 쪽에 대하여 한 쪽의 어떤 계산된 활동도 불가능하게 할 만큼 절대적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그의 공표와 함께 선포하시는 회심을 위한 부르심의 배후에는 그가 이 통치를 가져오시는 자로서 이루시는 변화(transformation)의 약속이 있다(참조, 마 11:28 이하). 만약 예수님께서 요한의 신적 임무로 인정하셨던 요한의 물세례(침례)(막 11:30 병행구절)가 구원의 성취를 기다리던 자들의 회심을 가져왔다면(마 3:11), 예수님께서 완전한 능력으로 베푸시는 성령의 세례(침례)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인간, 즉 회심한 인간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달해 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메타노이아에 관한 예수님의 메시지의 가차 없는 신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를 참회하는 행위의 고통이나 절망으로 몰아넣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을 위한 기쁜 복종을 불러 일으킨다. 이것은 메타노이아가 이제 더 이상 유대교에서처럼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기 때문이다.||(c) 초기의 기독교|① 일반적으로, 사도의 선포(kerygma)에서도 역시 회심은 기본적인 요구이다. 이미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동안에, 그의 위임으로, 그의 제자들은 회심을 위한 그의 부르심을 위임받았다(막 6:12). 그 후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회심을 전파하도록 지시받는다(눅 24:47). 사도행전에 의하면 제자들의 전도의 핵심은 메타노이아의 메시지이다(행 2:38; 행 3:19; 행 5:31; 행 8:22; 행 11:18; 행 17:30; 행 20:21; 행 26:20). 히 6:1은 초기 기독교의 교리의 기본적인 조항 가운데 메타노이아에 관한 교훈을 들고 있다. 회심하지 않는 것은 그릇된 완고함의 표시이다(계 2:21 이하; 계 9:20 이하; 계 16:9, 계 16:11). 요한복음에서 회심과 세례(침례)는 관련되어 있다(참조, 행 13:24; 행 19:4). 유사하게, 명백히 초기의 관례와 일치하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회심과 세례(침례)를 연결시킨다(행 2:38). 회심의 본질은 구약의 예언서들의 회심에 대한 설교로부터 익숙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악으로부터 멀리 돌아섬(행 8:22, 참조, 행 3:26; 히 6:1; 계 2:22; 계 9:20 이하; 계 16:11)과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섬이다(행 20:21; 행 26:20; 계 16:9, 참조, 벧전 2:25). 그것은 인간의 과제이며(행 2:38; 행 3:19; 행 8:22; 행 17:30; 행 26:20, 변화된 삶의 방식의 증거를 포함함),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다(행 5:31, 참조, 행 3:26; 행 11:18; 계 2:21). 그렇지만 그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는 역사적 계시에 근거를 둠으로 말미암아 신약성경의 특성을 부여 받았다(행 5:31). 그것은 또한 종말론적 사실주의(행 3:19 이하; 행 17:30)와 함께 그리고 전인류적인 표현으로 이해된다(행 11:18; 행 17:30; 행 20:21; 행 26:20, 참조, 눅 24:47; 벧후 3:9). 메타노이아가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참조, 행 11:15 이하와 행 10:45과 함께 행 11:18)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세례(침례)에 대한 요한의 약속을 성취하셨다는 가정 하에서만 설명된다. 예수님의 복음의 메시지에서처럼, 메타노이아와 피스티스는 결합되어 있을뿐 아니라 함께 전체를 이룬다.|요한계시록의 회심을 위한 긴급한 부르심(계 2:5, 계2:16; 계3:3, 계 3:19)은 임박한 종말의 예상에 기초한다. 이 부름은 그리스도교 교회들을 위협하고 그들을 반성하게 하여 죄와 연약으로부터 돌아서게 하고 그들의 이전 삶의 상태를 회복하게 한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회심하는 것은 단지 한 사람의 삶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철저하게 죄를 거절함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목표를 향하게 하는 것이다.|사도행전에서도 역시 회심의 목적은 궁극적인 구원이며(행 11:18), 특히 죄의 용서와 죄의 씻음이다(눅 24:47; 행 3:19, 참조, 행 8:22). 죄의 용서는 행 2:38에서 세례(침례)와 결부되고 행 10:43에서는 믿음과 결부된다. 그러나 종말론적 구원의 축복으로서 그것은 또한 행 5:31에서 메타노이아와 나란히 발견된다.||② 바울. 회심의 개념은 바울 서신들에도 나타난다. 롬 2:4에서 마지막 심판을 예상하는 인간의 회심(참조, 롬 2:3, 롬 2:5 이하)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인도하는 목적지이다; 딤후 2:25에는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함"이 하나님의 선물로 묘사된다. 고후 7:9 이하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메타노이아는 바울이 그들 속에 불러일으킨 근심의 결과이다. 그러나 바울은 메타노이아를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며(고후 7:9) 구원의 수단으로 이해한다(고후 7:10). 헬라적 표현이라기보다는 기독교적 표현으로, 그는 메타노니아를 "악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하는 생각과 뜻의 변화"로 생각한다. 바울이 회심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단어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그런 의미를 자신의 특유한 신학적 용어로 표현한다. 만약 예수님께 있어서 회심이 믿음을 포함한다면, 바울에게 있어서 메타노이아는 그의 구원의 교리에서 중심적인 개념인 피스티스(믿음)에 포함된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인간의 본성과 행위의 완전한 개조로서의 회심의 개념을 그 자신의 독특한 죽음과 생성을 나타내는 단어, 즉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의 다시 살아남, 새로운 창조, 새롭게 함 등으로 진술한다. 바울이 기독교의 경건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 이런 식으로 다시 고쳐 말한 것에 대한 다른 이유들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회개의 습관에 의해 평가 절하된 용어에 대한 혐오와 함께 우리는 바울 자신의 기독교적 경험의 명확한 주제를 고려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변화의 개념은 여전히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전체 신학의 기초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예수님께서 이해하신 것과 같은 회심에 대한 사상이다.||③ 요한. 요한은 부담되는 용어인 메타노에오와 메타노이아를 피하지만 그도 역시 바울에 못지 않게 그 문제 자체를 가지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도 역시 믿음은 회심을 포함한다. 세례(침례) 요한의 설교, 요한 복음에서의 예수님 자신의 설교, 그리고 요한일서에서의 요한 자신의 권고는 모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며, 따라서 그에게로의 회심을 요구한다. 그 이면에 악으로부터 돌아섬이 있음은 요한복음의 예수님과 요한일서의 기자가 빛과 어두움, 진리와 허위, 사랑과 미움, 생명과 죽음,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그어 놓은 선명한 선을 볼 때 자명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인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남이라는(요 3:3-요 3:8) 개념은 마 18:3의 사상의 다른 표현이며, 그것의 배후에는 공관복음서의 예수님의 메시지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똑같은 확신이 서있다.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회심의 사상의 내적인 연속성이 존재한다.||④ 히브리서에 나오는 둘째 번 메타노이아의 불가능성은 이것을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기독교적 신앙에 태만하게 되어 둔한 무관심에 빠지게 될 명백한 위험과 관련하여 고려할 때, 회심에 수반되는 완전한 변화의 중대함을 강조한다. 인간은 메타노이아를 자기 뜻대로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히 12:7 예를 들면), 참으로 배교자를 새롭게하는 메타노이아는 없다(히 6:4-히 6:6). 권고하는 문맥에 나타나는 둘째 번 회개의 불가능성에 대한 언급에 의해 제기되는 어려움은, 만약 우리가 결의론(決疑論)이나 유대교나 구약성경의 관습이 의미하는 의식적(ritual) 회개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해결될 수 없다.|신약성경의 회심에 대한 견해를 배경으로 하는, 기자의 생각과 염려는 이해할 만하다. 그의 삶에서 이 결정적인 변화를 한때 경험하고 새로운 창조가 되어 종말론적 구원이 계시된 무리에 들어간 사람은 그 때문에 영원한 성장을 시작한다. 만일 그가 이 성장을 멈춘다면,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완전한 자각과 의지를 가지고 범죄하며(히 10:26), 따라서 종말론적 심판을 받게 된다(히 6:8; 히 10:27 이하). 이 경우에는 다시 그를 회심하게 할 인간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특수한 경우에 대한 날카로운 목회적 경고의 형식에서 히브리서는 메타노이아가 총체적(totality)이며, 그것의 포기는 결과적으로 전체의 포기라는 확신을 표현한다.|(참조: Behm; Walter Bauer; J. H. Thayer).
회개
metavnoia
마음의 변화, 회개, 회심.||#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메타노이아(Thu., Polyb., Appian. 등)는 메타노에오($3340: 마음을 바꾸다, 회개하다, 회심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동사 메타노에오의 의미와 일치하여 '더 나중의 인식(앎), 차후의 교정(수정)'을 의미하며, 보편적 의미는, 동사 메타노에오의 (b), (c)의 의미와 일치한다. 이 단어는||(a) 첫째로 이 단어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하며, ① 감정, ② 의지, ③ 사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좀처럼 지적 기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b) 둘째로 이 단어는, '후회, 양심의 가책'을 의미하며, 이것은 소중히 여긴 사상, 뒤따르는 계획, 이행한 행위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메타노이아는 70인역본에서 5회 나오며, 해당 히브리어 없이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잠 14:15에서 '나중 생각'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외경에서는 '회개'(지혜서 11:23), 회개의 기회(지혜서 12:10, 19), 회개의 모범(집회서 44:16)에 대해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메타노이아는 신약성경에서 22회 나온다.|-->메타노에오($3340)의 신약성경의 용법에 메타노이아의 신약성경의 용법도 함께 취급되었다.
사이에(서)
metaxuv
~사이에, 그동안에, 뒤에, 후에||#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메탁쉬(Homer 이래)는 메타($3326: 가운데서, ~의 사이에, ~후에)와 크쉰(%286)에서 유래했으며,||(a) 부사로 사용되어,|① 공간에 대하여, '~사이에, ~의 가운데'(Homer), '사이에 놓여 있는 것'(Aeneas Tact. 1420; Dio chrys. 등).|② 시간에 대하여, '사이에'(Pla., Rep.), '그 동안에'(X., Symp.).|③ '후에, 뒤에, 그후 즉시, 그래서'(Plut., Mor.).||(b) 전치사와 함께 속격과 함께, '~사이에, ~의 중간(앙)에'를 의미하며,|① 공간에 대하여(Polyb. Aelian).|② 상호 관계, 차이에 대하여(PReinach), '~와 ~사이에서, ~사이를 구별하다' 등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부사 메탁쉬는 70인역본에서도 여러 차례 나타난다(창 31:50; 삿 5:27; 왕상 15:16; 지혜서 4:10; 16:19 등).||#3.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메탁쉬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메탁쉬는 부사로,|① 요 4:31에서 '그 사이에(그 동안에)'를 의미한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② 행 13:42에서 '뒤에(오는)', 곧 '다음에'를 의미한다: "저희가 나갈쌔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b) 메탁쉬는 불규칙적 전치사로,|① 마 18:15에서 너와 그와 '사이에'를 의미한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② 행 15:9에서 우리와 저희 '사이에'를 의미한다: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③ 롬 2:15에서 서로 '사이에(간에)'를 의미한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c) 메탁쉬는 지역적 의미를 가진다.|① 마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② 눅 11: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③ 눅 16: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④ 행 12: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