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해설 238 페이지 > 기독정보닷컴

홈 > 성경 > 원어해설
원어해설
지혜 있게
nounecw'"
지혜롭게, 사려깊게.||#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누네코스(Aristot.)는 누스($3563: 마음, 이해, 이성)와 에코($2192: 가지다, 쥐다, 소유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지혜롭게, 신중하게, 사려깊게'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누네코스는 신약성경에서 막 12:34에 한번 나온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누네코스가 의미하는 바는 마음이나 이성을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여기서 '지혜롭게, 사려깊게'를 의미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A. T. Robertson).
깨달은 마음
nou'"
마음, 이해(력), 이성, 사고||#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누스(Homer. 이래)는 노오스(%840: 마음)에서 유래했으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a) 원래 이 단어는 하나의 대상에 대한 '내적인 감각'을 의미하였다.|(b) 그후 이 단어는 '기질, 이해력, 통찰력, 이성, 마음'을 의미하였다. 감정 및 의지와 더불어 이해력은 생각하는 능력으로서, 사람의 내적 능력에 속한다(예: Parmenides, 16, 2).|(c) 누스는 또한 마음의 반성으로 결정되는 도덕적 태도와 성질을 의미하기도 한다.|(d) 또한 이 단어는 '결심, 의향, 의지'를 의미한다.||헬라 철학과 종교에서 누스는 세계와 존재를 이해하는 사고 기관으로서의 '이성' reason 혹은 '마음' mind을 의미하게 된다. 초기 헬라 철학에서 이해력은 모든 것을 인지하고 명령하고 통제한다고 한다(예: Anaxagoras, Fragment 12).|플라톤(Plato)에게서 누스는 사고의 전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의 세부분 중 가장 높은 부분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누스는 로기스티콘(순수한 사고를 지배하는 원리)이라고 불리운다(Phaedr. 247c). 이와 같이 진실되고 신성한 이성은 인간과 우주 곧 대우주와 마찬가지로 소우주를 다스린다(Tim. 30a b, 46c 이하). 이성은 진리를 깨닫게 한다(Rep. 6, 490b). 필로마데스(Philomathes)에 의하여 온(존재)과 더불어 생겨난 이성과 진리는 지식에 이르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그의 이성에서이다.|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이해력을 영혼의 능력 위에 두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스 데오레티코스(이론적인 이성)와 누스 프라크티고스(실천 이성)를 구별하였다(An., Eth. Nic). 이 이성은 불멸의 거룩한 것이다. 누스는 인간의 마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신의 구현이다(Eth. Nic).|이와 같이 누스와 신을 연결시키는 것은 또한 스토아 학파의 특성이기도 하다. 에픽테투스(Epictetus)에 따르면, 이성은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한다.|헤르메스에서 누스는 이성의 눈인데, 이 눈을 통해서만이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누스는 영혼 속으로 들어가 영혼을 인도하여 지식에 이르도록 한다. 대체로 이와 같은 것은 전형적인 영지주의적, 혼합종교적 구원교리이며, 누스에 대한 헬라 개념은 이 교리에 기여하게 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누스는 70인역본에서 약 32회 나온다. 헬라어 문헌에서 누스가 중추적 역할을 한 것에 비추어보면 생각보다 드물게 사용되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누스는 '마음, 내적 본질'을 뜻하는 히브리어 레브와 레밥의 역어로 6회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이 본문이 어떤 헬라화의 과정을 겪었다는 것을 보여준다.(출 7:23; 사 10:7b, 등); 그러나 이것은 또한 누스가 어떤 점에서는 의지와 더욱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스의 다른 표현들로는 '명심하다'(마카베오이서 15:8), '어떤 것에 주의를 기울이다'(에스드라상 9:41)가 있으며; 그리고 문구로는 '이해하는 마음'(마카베오사서 1:35; 2:16), '순수한 마음'(베냐민의 언약 3:8), '순진한 마음'(지혜서 4:12), 혹은 요세푸스의 작품에 나오는 '건강한 마음'(Ant. 8:28) 등이다.|그러나 동시에 레브를 번역하는데 누스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또한 사색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며, 때로는 실제적인 결심을 하게 하는 목적을 지닌 거의 철학적 숙고까지 포함하는 것이다(사 10:7; 사 41:22).|누스가 루아흐의 역어로 사용된 것은 예외적인 일이다(사 40:13; 삿 8:14). 그러나 누스가 오젠(귀 ear)의 역어로 사용된 것은 우스(귀 ear)를 사용해야 할 것을 서기관의 실수로 누스를 사용한데서 기인하는 것 같다(욥 33:16; 욥 12:11).||#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누스는 신약성경에서 2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마음, 기질, 성벽'. 이러한 의미에서 누스는 자연인이나 그리스도인의 내적 성향이나 도덕적 태도를 표현하지만, 오로지 형식적인 표현에서만 사용된다. 롬 1:28에서 아도키모스 누스("상실한 마음")는 하나님의 형사적 심판 아래 있는 이방인들에 대해 사용된다. 이방인들은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다(엡 4:17). 잘못된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자는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골 2:18), "마음이 부패하여 진다"(딤전 6:5, 참조: 딤후 3:8). "저희 마음과 양심"은 더럽다(딛 1:15). 그리스도인들은 누스를, 즉 그 생각과 뜻의 내적 방향과 도덕적 의식의 성향을 끊임없이 새롭게 해야 한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엡 4;23). 그리스도인들의 회중은 그 구성원들이 같은 마음으로 굳게 할 때 단합된다(고전 1:10, 여기서 누스와 그노에는 동의어이다).||(b) '실천적 이성'. 누스는 뜻과 행동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도덕적 의식이다. 그것은 순전히 인간의 기능으로서, 사람에게 이러한 기능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책임을 암시한다. 롬 7장의 "나"는 "속 사람"(롬 7:22)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매여있음을 깨닫는다. 마음(누스)은 그것을 하나님의 법(노모스)으로 선언하며(롬 7:23), 그 도덕적 의식의 견지에서 "나"는 하나님의 법의 기준에 따라 행동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c) '이해'. 이 의미에서 누스는 지적인 기관으로, 상태든 행동이든 지식의 능력(지력)이다. 눅 24:45에서 그것은 구약성경을 깨닫는 이해력을 의미하고 계 13:18에서는 묵시적 비밀을 간파하는 통찰력을 뜻한다. 계 17:9에서 신적인 지혜에 의해 조명되는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다. 빌 4:7에서 기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불안에 지배받는 인간의 사고를 초월하는 해방의 능력이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누스는 특별히 방언으로 말하는 자들이 황홀경에서 발하는 모호한 말들 배후에 놓여있는 프뉴마와 대조되는 이해력이다. 누스는 그 자체로 그의 지각을 소유하고 있는 자의 한 가지 기능이다. 그것은 이해하기 쉬운 말로 분명한 생각을 전달하는 이해력이며, 이때 영적 황홀경 상태 가운데서의 그의 활동은 잠시 정지된다(고전 14:14이하, 고전 14:19).|살후 2:2의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 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에서 누스는 언제나 냉정한 예지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확고한 판단력을 가리킨다.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파루시아에 대한 과장된 사상들을 직면할 때 용의주도함이나 사려 깊음이다.||(d) '생각, 판단, 결심'. 바울은 강한 자와 연약한 자 사이의 논쟁에서 롬 14:5에서 한가지 규칙을 제시한다. 즉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이다(참조: 집회서 5:10). 롬 11:34에 나오는 이사야서 구절의 인용문,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에서 누스는 분명히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가리킨다. 바울은 롬 9-11장에서 제기되는 문제의 해결을 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뜻에서 발견한다. 동일한 문구가 고전 2:16 상반절에서 사 40:13로부터 인용된다. 여기서 또한 문맥(고전 2:7이하)은 지금은 명백히 나타난 감취었던 구원 계획을 지적한다. 고전 2:16 하반절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 하나님의 영, 성령, 고전 2:11, 고전 2;14)을 가졌느니라"에서 이 용어가 겪는 의미의 뚜렷한 변화는 언어 유희를 보여주는데 앞의 (a)의 의미, 즉 "마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바울이 헬라 신비주의의 방식에 따라 누스와 프뉴마를 동일시한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참조: J. Behm; Walter Bauer; J. H. Thayer).
눔바
Numfa'"
눔바 Nympha(인)||눔바는 신약성경에서 골 4:15에 한번 나온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눔바는 바울이 안부를 물은 골로새의 한 그리스도인이며, 그 곳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집에서 집회를 가졌다.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언급하고 있으나 어형은 여성형(뉨파스)이다. 그에 관하여는 더 이상 알려진 바가 없다.|(참조: PEB).
며느리
nuvmfh
신부 bride.||#1. 일반 헬라어 문헌||명사 뉨프헤는 미케네 헬라어에서 이미 찾아볼 수 있으며, 라틴어 누루스(nurus)와 관련이 있다. 이 단어는 '신부, 약혼녀'를 의미하며, 처녀나 젊은 여자, 젊은 아내에 똑 같이 적용될 수 있다. 뉨프헤는 또한 서열이 낮은 여신(여신)을 뜻하는데 사용된 단어이기도 하다.|헬라사회, 특히 영지주의 제도에서 신랑, 신부의 상징은 소테르($4990:구주, 구원자)와 인간과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히에로스 가모스(신성한 결혼)라는 개념으로 수용되어졌다. 이것은 결국 종교적인 에로티시즘으로 발전하였으며, 종교적 에로티스트들은 오늘날까지도 개인의 영혼과 신의 신비적인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약혼과 결혼의 비유를 즐겨 사용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뉨프헤는 70인역본에서 약 87회 나오며, 주로 칼라(신부, 며느리)의 역어로 사용되었고, 베툴라(동정녀, 처녀)의 역어로는 단 2회(욜 1:8; 렘 2:32)사용되었다. 처녀는 열 두 살, 청년은 열 다섯살에 결혼할 수 있었다, 그들의 개인적인 선택도 배우자 선택에 부분적인 역할을 했겠지만 양가 가족 사이에 맺어진 협약이 절대 필요한 것이었다. 히브리어 칼라에 두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70인역본 기자들은 뉨프헤를 '자부(子婦)'를 뜻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다(참조: 창11:31; 창 38:11; 룻 1:6). 이 단어가 베툴라의 역어로 사용된 경우에는 처녀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렘 2:32에 "신부가 어찌 고운 옷을 잊겠는가"와 욜 2:16에 "신부가 골방에서 나오게 하고"라는 언급이 나타낸다.|뉨프헤는 며느리 혹은 신부를 포함하는 성적인 부정에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인간 관계에 대한 피조된 질서의 신성함을 깨뜨리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레18:15 등). 유다와 다말이 서로 속여서 근친 상간의 관계,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였다: "누구든지 그 자부와 동침하거든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하였음이라"(레 20:1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그 죄를 다스리시어 근친 상간의 관계에서 태어난 자손인 베레스가 이스라엘 왕족 계열에 속하게 되었다(창 38).|뉨프헤는 룻기에서 한 가정의 과부 며느리의 재혼과 관련하여 나오는데, 하나님의 섭리가 그러한 관계를 통하여 역사할 때 그러한 관계는 단지 공적인 것 이상의 어떤 것이 된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예: 룻 4:15).|아가서(아 4:8-5:1)에서 사랑하는 자를 신부(와 누이)라고 언급한다. 그 문맥에서 요지는 그녀가 남편만을 위해 보존된 잠근 동산이라는 것같다. 결혼 약속에 관한 극단의 기쁨은 예레미야서와 이사야서에서 다루어진다. 예레미야는 세번이나 심판으로 인하여 결혼과 같은 축제의 광경은 사라지리라고 언급한다(렘 7:34; 렘 16:9; 렘 25:10). 그러나 그러한 언급은 최종적인 판결과 같은 말이 아니다. 그 선지자는 그와 같은 즐거움이 회복되는 날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렘 33:11).|이러한 기쁨은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비유적으로 적용되었으며, 특히 영원한 왕이시며 시온에 건립될 평화의 왕국의 설립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회중들이 기쁘게 드리는 예배에 적용되었다(시 45; 사 60:1 이하). 이러한 상징은 여호와의 신부라는 이스라엘의 명칭에 부응한다. 이사야는 구원 받는 이스라엘을, 그분의 오심을 예비함에 있어서 공의의 보석과 옷으로 치장하고 그 분께만 화답하는 하나님의 선택된 신부로 본다(사 49:18; 사 62:5; 참조: 렘 2:2). 그날에 하나님께서는 신부를 맞을 신랑으로서 이스라엘을 기뻐하시리라고 이사야는 말한다(사 62:5). 이러한 비유적 표현이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의 모습에 대한 모형을 제공한다는 것은 명백하다(계 21:2).|후기의 유대교는 이러한 비유적인 용법을 계속 사용했다. 아가서는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의 비유로 해석되었기 때문에 정경으로 인정 받았다. 기대된 구원은 결혼으로서, 즉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궁국적이고 완전한 결합으로서 묘사되었다(SBI 5l7).(참조: W.Gunther; J.N.Oswalt).||#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뉨프헤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오며, '며느리, 신부'라는 의미로 나타난다. 마 l0:35과 눅 12:53에서 뉨프헤는 유대적인 어법과 마찬가지로 '자부'를 뜻한다.||(a) 구약성경에서처럼 결혼 시간은 기쁨의 시간이며, 특히 기쁨을 기대하는 시간이다. 신약성경에서 이런 사상은 종말론적 이미지의 일부가 된다. 요 3:29에서 신부를 취하는 신랑과 그의 친구의 관계를 묘사하는데 나온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예수님과 세례(침례) 요한의 관계는 신랑의 "친구"의 관계로 묘사되어 있다. 그 친구의 역할이 신랑의 들러리인 것이다. 맨 처음에 종말의 시대가 예수와 더불어 시작되지만, "친구"가 그를 위해 길을 준비했으며, 결혼식이 거행되는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와 왕국의 도래를 보는 것은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b) 뉨프헤는 계 18:23에서 바벨론(세상에 대한 상징)의 멸망을 묘사하는데 나온다: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신랑과 신부의 소리는 우선적으로 결혼식을 가리킨다. 그 소리는 인간이 신뢰하면서 바라보는 미래를 가리킨다. 이 예언은 렘 25:10을 생각나게 한다: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쳐지게 하리니".(Heinrich Kraft).||(c) 종말을 묘사하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들에서 우리는 교회-신부가 천국의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천국의 신랑은 하나님의 어린양(Lamb)이란 명칭으로 불리어진다(계 19:7; 계 19:9). 교회는 그리스도를 그의 주로 맞이하기 위해 기뻐하며 스스로 단장한다(계 21:2; 계 21:9 이하). 교회는 천국의 예루살렘, 즉 종말론적 교회로서 신부와 같은 기다림으로 그녀의 존재의 궁극적인 성취를 기대하며, "주 예수여 오시 옵소서"라고 외친다(계 22:17; 계 22:20).|(참조: W.Gunther). → $3566 뉨피오스(신랑).
신랑
numfivo"
신랑 bridegroom.||#1. 일반 헬라어의 용법||뉨피오스는 뉨프헤($3565: 신부)에서 유래했으며, '신랑, 약혼자, 젊은 남편'을 의미한다. 헬라사회, 특히 영지주의 제도에서 신랑, 신부의 상징은 소테르($4990:구주, 구원자)와 인간과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히에로스 가모스(신성한 결혼)라는 개념으로 수용되어졌다. 이것은 결국 종교적인 에로티시즘으로 발전하였으며, 종교적 에로티스트들은 오늘날까지도 개인의 영혼과 신의 신비적인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약혼과 결혼의 비유를 즐겨 사용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뉨피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40회 나오며, 하탄(신랑, 사위)의 역어로 사용되었고, 거의 뉨페와 함께 나타난다. 청년은 열 다섯 살에, 처녀는 열 두 살에 결혼할 수 있었다, 그들의 개인적인 선택도 배우자 선택에 부분적인 역할을 했겠지만 양가 가족 사이에 맺어진 협약이 절대 필요한 것이었다.|결혼 약속에 관한 극단의 기쁨은 예레미야서와 이사야서에서 다루어진다. 예레미야는 세번이나 심판으로 인하여 결혼과 같은 축제의 광경은 사라지리라고 언급한다(렘 7:34; 16:9; 25:10). 그러나 그러한 언급은 최종적인 판결과 같은 말이 아니다. 그 선지자는 그와 같은 즐거움이 회복되는 날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렘 33:11).|이러한 기쁨은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비유적으로 적용되었으며, 특히 영원한 왕이시며 시온에 건립될 평화의 왕국의 설립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회중들이 기쁘게 드리는 예배에 적용되었다(시 45; 사 60:1 이하; 사 61:10 이하). 이러한 상징은 여호와의 신부라는 이스라엘의 명칭에 부응한다. 이사야는 구원 받는 이스라엘을, 그분의 오심을 예비함에 있어서 공의의 보석과 옷으로 치장하고 그 분께만 화답하는 하나님의 선택된 신부로 본다(사 49:18; 사 62:5; 참조: 렘 2:2). 그날에 하나님께서는 신부를 맞을 신랑으로서 이스라엘을 기뻐하시리라고 이사야는 말한다(사 62:5). 이러한 비유적 표현이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의 모습에 대한 모형을 제공한다는 것은 명백하다(계 21:2).|후기의 유대교는 이러한 비유적인 용법을 계속 사용했다. 아가서는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의 비유로 해석되었기 때문에 정경으로 인정 받았다. 기대된 구원은 결혼으로서, 즉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궁국적이고 완전한 결합으로서 묘사되었다(SBI 5l7).(참조: W.Gunther; J.N.Oswalt).||#3. 신약성경의 용법||뉨피오스는 신약성경에서 16회 나오며, '신랑'이라는 의미로 나타난다. 구약성경에서처럼 결혼 시간은 기쁨의 시간이며, 특히 기쁨을 기대하는 시간이다. 신약성경에서 이런 사상은 종말론적 이미지의 일부가 된다.||(a) 마 9:15과 병행구 막 2:19이하; 눅 5:35에서 예수님은 그가 임재하고 있을 동안 금식하는 것을 거부하신다. 메시야의 임재의 시간은 혼인식 및 그 잔치에 비교되었다(사 62:5). 그것은 예수님과 더불어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함축하고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음으로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예수님과 함께 즐기는 기간이지 금식할 때가 아닌 것이다.||(b) 마 25:1 - 마 25:13에서 열 처녀 비유는 깨어서 신랑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필요를 강조하는 심판의 비유이다. 이 시대의 종말이 예기치 못할 때에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메시야는 신랑이며, 그의 도래가 지연되고 있다는 의미가 이 비유에는 내포되어 있다.||(c) 요 3:29에서 신부를 취하는 신랑과 그의 친구의 관계를 묘사하는데 나온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예수님과 세례(침례) 요한의 관계는 신랑의 "친구"의 관계로 묘사되어 있다. 그 친구의 역할이 신랑의 들러리인 것이다. 맨 처음에 종말의 시대가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되지만, "친구"가 그를 위해 길을 준비했으며, 결혼식이 거행되는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와 왕국의 도래를 보는 것은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d) 고후 11:2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상징이 예수님과 교회에 적용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교회 공동체는 신부이고 사도들은 신랑의 들러리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을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하는 자로 자신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파르테노스는 처녀, 즉 신부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마치 하와가 그러했듯이 순수한 헌신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한다(고후 11:3).||(e) 계 18:23에서 바벨론(세상에 대한 상징)의 멸망을 묘사하는데 나온다: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신랑과 신부의 소리는 우선적으로 결혼식을 가리킨다. 그 소리는 인간이 신뢰하면서 바라보는 미래를 가리킨다. 이 예언은 렘 25:10을 생각나게 한다: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쳐지게 하리니".(Heinrich Kraft).||(f) 종말을 묘사하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들에서 우리는 교회-신부가 천국의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천국의 신랑은 하나님의 어린양(Lamb)이란 명칭으로 불리어진다(계 19:7;계 19:9). 교회는 그리스도를 그의 주로 맞이하기 위해 기뻐하며 스스로 단장한다(계 21:2; 계 21:9 이하). 교회는 천국의 예루살렘, 즉 종말론적 교회로서 신부와 같은 기다림으로 그녀의 존재의 궁극적인 성취를 기대하며, "주 예수여 오시 옵소서"라고 외친다(계 22:17; 계 22:20).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과 여호와 하나님을 상징하는 신부와 신랑의 비교가 신약성경에서는 교회와 예수님께 적용된다.|(참조: W.Gunther; J.N.Oswalt; J.Jeremias).|→ $3565 뉨페(신부).
혼인 집
numfwvn
결혼식장 wedding hall, 신부의 방 bride chamber.||명사 뉨폰은 뉨페($3565:신부)에서 유래했으며, '신방, 신부방'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온다. 휘오이 투 뉨프호노스는 문자적으로 '신방의 어린이들'을 의미하며, 신랑의 친척들과 친구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결혼 축하 예식을 치르는데 없어서는 안될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병행구, 막 2:19; 눅 5:34).
방금
nu'n
지금 now.||#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뉜(Homer 이래)은 '지금, 이제, 현 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의 직전이나 직후의 시간, 즉 '방금, 곧'을 의미하기도 한다.|때로 뉜은 시간적 의미 뿐 아니라 보다 물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문제가 지금 처해 있는 현재의 상황과 상응하는 의미이다(예: Hom. Od. 1,166). 종종 뉜은 '현재의'를 의미하는 형용사로 사용되거나 다른 단어와 결합하여 '지금의 존재, 현재의 시간, 현재의 사건'이란 의미를 나타낸다.||#2. 70인역본의 용법||부사 뉜은 70인역본에서 매우 많이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앗타 어군을 번역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뉜은 신약성경에서 약 140회 나오며, 주로 바울 서신과 히브리서에 나타난다. 뉜은 부사이지만 신약성경에서 명사와 형용사로도 사용되었다.||1. 시간에 대해|(a) 뉜은 지금 존재하거나 행해진다고 하는 일에 대해, 현재의 시간이「과거의」시간과 대립되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된다(요 4:18; 요 9:21; 행 16:37; 행 23:21; 롬 13:11; 살후 2:6; 고후 7:9; 고후 13:2; 빌 1:30; 빌 2:12; 빌 3:18; 골 1:24 등). 뉜은 사물들의 이전의 상황과 대립되는 다소 광범위한 현재 시간을 의미하는 예가 빈번하다(눅 16:25; 행 7:4; 갈 1:23; 갈 3:3).|특히 어떤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의 시간에 대해 사용되었다(롬 5:9, 롬 5:11; 롬 6:19, 롬 6:21; 롬 8:1; 갈 2:20; 갈 4:29; 벧전 2:10, 벧전 2:25).|또는 과거의 시대와 대립되는, 인간이 복음이 축복을 받은 이후의 시대에 대해 사용되었다. '우리의 때, 우리 시대에'(행 7:52; 롬 16:26; 고후 6:2; 엡 3:5, 엡 3:10; 딤후 1:10; 벧전 1:12; 벧전 3:21).||(b) 뉜은「미래의」시간과 대립되는 경우에 사용된다(요 12:27; 요 13:36; 요 16:22; 롬 11:31; 고전 16:21; "이제와 세세에", 유 1:25;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의 이 현 시대를,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의 시대와 구별할 때 사용되었다(눅 6:21, 눅 6:25; 엡 2:2; 히 2:8; 벧후 3:18; 요일 2:28; 막 10:30).||(c) 때때로 뉜이 이 현재형과 함께 '이윽고 곧, 당장' 일어날 일에 사용되었다(눅 2:29; 요 12:31; 요 16:5; 요 17:13; 행 26:17).|뉜은 과거형과 함께 '이제 방금' 행해진 일에 대해 사용되었으며(마 26:65; 요 21:10), 또는 '매우 최근에', '바로 지금', 과장법에 의해, '바로 얼마 전에' 행해진 일에 대해 사용되었다(요 11:8).|뉜은 미래 시제와 함께,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되는, 그러한 미래의 일들에(요 12:31), 또는 '당장'(instantly) 이루어질 일들에(행 13:11), 또는 '이윽고 곧'(soon) 이루어질 일들에 사용되었다(행 20:22).||(d) 뉜은 명령법과 함께 종종 어떤 것을 행하기에 적절하거나 알맞은 시간을 표시해 준다(마 27:42이하; 막 15:32; 요 2:8). 따라서 본 단어는 ("들으라"), 자! 들으시오! Come now에서 권면을 지적해 주는 구실을 한다(약 4:13; 약 5:1).||(e) 뉜은 다른 불변사들과 함께, 이로써 시간상의 대비가 더욱 정확하게 표시된다: '지금조차도, 지금도'(요 11:22; 빌 1:20), '그리고 지금'(요 17:5; 행 7:34; 행 20:25; 행 22:16), '그러나 지금조차도'(요 11:22), '그러나 지금'(요 16:5; 요 17:13; 히 2:8), '지금 이미'(요일 4:3), '그러므로 이제'(행 10:33; 행 15:10; 행 16:36; 행 23:15).||(f) 뉜이 관사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① 관사의 독립 중성 대격과 함께, '현재에 관하여', '현재에', '지금'(행 4:29; 행 17:30; 행 20:32; 행 27:22), '지금 있는 것들', '현재의 일들'(유딧 9:5), 독립 대격,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하여', '목하의 사건에 관하여'와 같은 뜻(행 5:38).|② 호, 헤, 토 뉜, '현재', 실명사들과 결합되어 사용된다: 예컨대 '호 뉜 아이온' "이 세대"(딤전 6:17; 딤후 4:10; 딛 2:12), 이 때, 현시대(롬 3:26; 롬 8:18; 롬 11:5), '헤 뉜 예루살렘' "지금 있는 예루살렘"(갈 4:25); '호이 뉜 우라노이' "이제 하늘"(벧후 3:7); '무 테스 프로스 휘마스 뉜'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행 22:1).|③ '토 뉜', 전치사들과 함께 사용된다: '아포 투 뉜' "이제 후로는", '이 시간 이후'(눅 1:48; 눅 5:10; 눅 12:52; 눅 22:69; 행 18:6; 고후 5:16), '아크리 투 뉜' "이제까지"(롬 8:22; 빌 1:5), '에오스 투 뉜' "지금까지"(마 24:21; 막 13:19).||2. 뉜은 "결론" 또는 "결과"를 표현한다: '지금의 상황대로', '현재의 상태처럼', '이러한 상황 하에서', '현재 상태에서', '이런 것들이 그러한 이상', '현재 그대로'(눅 11:39), '카이 뉜' 요일 2:28; 요이 1:5; '카이 뉜 듀로' 행 7:34. '뉜 데' '그러나 지금', '하지만 지금', '그러나 사실은(있는 그대로)'(고전 7:14; 약 4:16), 직설법 과거를 수반한 조건문 뒤에서(눅 19:42; 요 8:40; 요 9:41; 요 15:22, 요 15:24; 요 18:36; 고전 12:20).|(참조: J.H.Thayer; Walter Bauer; H.C.Hahn).
타뉜
tanu'n
이제, 지금.||$3588과 $3568을 보라.|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이제, 지금'이라고 번역되었다.|행 4: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행 5: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행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7: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뉘니
nuniv
지금 now.||#1. 고전 헬라어 및 70인역본의 용법||부사 뉘니(Hdt.)는 뉜($3568)의 강세형이며, 아티카어에서 '지금, 바로 이 순간에를 의미하며, 단지 시간에만 사용되며, 거의 언제나 현재형과 함께 쓰이고 미래형과는 매우 드물게 사용되었다(참조: Lob. ad Phryn. p.19). 70인역본에서도 많이 나타난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뉘니는 신약성경에서 18회, 바울 서신과 히브리서에만 나온다. 그리고 뉘니는 여기에서 단순한 뉜과 어떤 점에서도 다르지 않다.||(a) 뉘니는 시간에 대해 사용되었다. 현재형과 함께(욥 30:9), 행 24:13; 롬 15:23; 고전 13:13; 고후 8:11, 고후 8:22; 몬 1:9, 몬 1:11; 계속성을 가리키는 완료형과 함께(롬 3:21, 혹자들은 이를 2에 포함시킨다), 과거형과 함께(롬 6:22; 롬 7:6; 엡 2:13; 골 1:22; 롬 11:30), 미래형과 함께(행 22:1).||(b) 뉘니는 결말을 진술할 때 사용되었다: '그러나 사정[상황, 상태]이 이러한 이상'('현상 그대로', '있는 그대로': 고전 5:11, '그러나 지금'[히 9:26], 롬 7:17; 고전 12:18; 고전 15:20; 히 8:6).|(참조: J.H.Thayer; Walter Bauer).

nuvx
밤 nigh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뉙스(Homer이래)는 기본어이며,||(a) '밤, 어두움, 흑암',|(b) 비유적으로, '맹목, 불명료, 무력함, 해악, 죽음'을 의미한다.|신화에서 뉙스는 밤의 여신으로서 특히 복수의 여신들 퓨리스(Furies)의 어머니로 나타난다. 뉙스는 또한 마술을 위한 시간이며, 마술을 좋아하는 달의 여신이다.|그러나 밤은 또한 계시의 때이며, 특히 의식이 경험의 세계로부터 풀려나기 때문에 꿈을 통한 계시의 때이다. 밤은 휴식과 회복의 때이다.(참조: G.Delling).||#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뉙스는 70인역본에서 약 300회 나오며, 거의가 라일(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뉙스는 70인역본에서 때로는 단순히 시간을 나타내며(창 7:4; 욘 1:17 등). 또한 공포의 시간(시 91:5; 솔로몬의 지혜서 17:14이하), 술취함(창 19:33)과 도적들(렘 49:9), 잘못된 행음(삿 19:25), 살인(느 6:10)과 교령술의(삼상 28:8) 시간이다. 특히 밤에 사람은 근심에 빠지기 쉬우며, 악한 자의 공격을 받기 쉽다(욥 7:3; 시 6:7).그러나 뉙스는 또한 하나님의 시간으로 그 때 하나님은 불기둥으로 길을 비춰주시며(출 13:21), 꿈(창 20:3)과 환상(단 7:2; 슥 1:8)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한편 마지막 날 구원이 성취되는 그 때에 다시는 밤이 없을 것이다(슥 14:7).||#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뉙스는 신약성경에서 61회 나오며, 문자적, 또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a) 문자적 의미. 뉙스는 신약성경에서 주로 시간을 나타낸다. 밤 4경에 예수님께서는 물 위로 걸으셨다(막 14:25).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방문하였다(요 3:2).|뉙스는 도망(행 9:25), 배신(요 13:30), 부인(마 26:34)하는 시간이다.|뉙스는 밤을 형식적으로 가리키는데서도 사용된다(예: 마 4:2; 마 12:40).|특별히 사도행전에서 뉙스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활동의 시간으로 사용된다. 천사들이 자기들의 임무를 수행하고(눅 2:8이하; 행 5:19; 행 12:6이하; 행 27:23),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시며(행 16:9; 행 18:9; 행 23:11), 꿈에 저를 지시하신 것(참조: 마 2:12, 마 2:22)은 밤이다. 밤에 피난이나 여행을 했다(마 2:14).||(b) 비유적으로 뉙스는 스코티아($4653: 어두움)를 의미할 수 있으며, 프호스($5457: 빛)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로부터 소원된 상황을 묘사한다(요 11:10; 요 9:4). 유사한 의미로 바울은 뉙스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밝아 올 구원의 때와 관계된 헤메라(날, 낮)와 대조시키고 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살전 5:5 - 살전 5:7).|같은 방법으로 롬 13:12에서 뉙스와 헤메라를 대조시킴으로써 옛 시대(지나가게 될)와 새 시대(바야흐로 도래하고 있는)의 대조적인 것을 설명하고 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그리스도를 붙잡고 있는 자는 더 이상 밤의 저주에 있지 않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 그는 이제 잠자는 자나 혹은 술에 취해있는 자가 아니라(살전 5:7), 깨어있는 자다(살전 5:5이하). "밤에 도적같이" 임할 마지막 날에 수반될 어두움 뒤에는(눅 17:34; 계 8:12), 하늘의 예루살렘은 그러한 자를 받아들일 것이며 밤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계 21:25).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계 22:5).|(참조: H.C.Hahn; Walter Bauer; J.H.Thayer; G.Delling).
뉫소
nuvssw
찌르다 pierc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뉫소는 '찌르다' pierce, '찔러 꿰뚫다' pierce through'를 의미한다.|종종 호머의 글에서 이 단어는 아무개가 받은 심한 또는 치명적이기까지 하는 부상에 대해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뉫소는 70인역본에서 외경 집회서 22:29에서 '눈을 찌르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뉫소는 신약성경에서 요 19:34에 한번 나온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스트루(W. Stroud)는 예수님의 심장 근처인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피와 물이 섞여 나왔는데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미 심장 파열로 죽으셨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뉘스타조
nustavzw
꾸벅꾸벅 졸다, 지체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뉘스타조(Aristoph., Hippocr. 이래)는,||(a) 본래의 의미로 '꾸벅꾸벅 졸다, 잠을 못 이기다, 잠에 압박 당하다'(Hippocr., Aristoph., Xen.),||(b) 비유적 의미로, '게으르다, 태만(소홀)하다, 부주의하다'(Pla., Plut.)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뉘스타조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마태복음과 베드로후서에만 사용되었다.||(a) 마 25:5에서 '꾸벅꾸벅 졸다'를 의미한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b) 벧후 2: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에서 뉘스타조는 '자다'는 의미에서 '지체한다'를 의미한다. 저희 멸망은 지체하지 않을 것이다.
일주야
nucqhvmero"
하루 밤과 낮||#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뉘크데메로스(Petosiris., Herm.)는 뉙스($3571: 밤, 밤에)와 헤메라($2250: 날, 낮, 하루)에서 유래했으며, '하루 밤과 낮'을 의미하며, 24시간의 기간을 가리킨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뉘크데메로스는 신약성경에서 고후 11:25에 한번 나온다: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노아
Nw'e
노아 Noah.||#1. 구약성경.||(a) 노아는 히브리어로 노아흐이며, 누아흐(쉬다, 안식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도움과 구체적인 위안'이란 의미에서 '위안'에 의해 설명되었다(창 5:29)(C. F. Keil).|70인역본은 예나하메누(우리를 안위하리라)를 헬라어 디아나파우세이(안식하게 하다)로 대치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초기 랍비들의 주장대로 이 이름의 유래를 누아흐(안식)와 연관시켰기 때문일 것이다.||(b) 노아는 아담의 10대 후손이며(창 5:28 이하), 홍수 기사의 영웅이며(창 6:11-9:19),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탁월한 의인이다(창 6:9; 창 7:1; 겔 14:14; 창 14:20). 또한 그는 "포도 나무를 심고" 경작한 최초의 사람이다(창 9:20). 이 모든 것은 그가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라멕이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창 5:29)고 한 예언의 성취임이 분명하다. 그의 아내와 세 아들 및 세 며느리와 함께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가 건조한 방주를 타고 홍수에서 살아남았고 홍수 이후의 새 세계의 조상이 되었다.||(c) 노아는 라멕의 아들이며(창 5:28; 창 5:29), 셈, 함, 야벳의 아버지이다(창 5:32).|그는 패역한 시대에 살았으며, 그 시대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다(창 6:1-13).|그는 방주를 만들라는 명령을 받고 그대로 준행했으며(창 6:14-22), 120년 동안 심판을 경고하고 의를 전파했다(창 6:3; 참조: 벧후 2:5).|그는 하나님의 심판인 홍수가 났을 때 그의 가족과 짐승들과 함께 방주에 들어가 구원을 받았다(창 7:6-8).|노아는 홍수에서 구원을 받은 후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다(창 8:20).|하나님이 노아와 더불어 언약을 세워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 9:11; 창 1-19).|노아는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재배를 하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추태를 부렸다(창 9:20; 창 9:21).|노아는 이 사건과 관련한 아들들의 행위에 따라 그들에게 저주와 축복을 선언했다(창 9:22-27). 노아는 950세에 죽었다(창 9:29).||(d) 겔 14:14에서 하나님의 심판 때 노아는 자신의 의로서 자신만이 살아날 수 있다고 한다. 사 54:9 이하를 보면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하기 직전,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사랑이, "노아 때에" 인류와 맺은 그의 언약처럼 변치 않을 것이라고 보증하고 있다(비교, 창 9:8-17).||(e) 유대의 지혜 문학가들은 노아에게서 참 지혜의 한 예를 전한다. 벤 시라(Ben sira)는 그는 '완전하고 의로운 자로 알려졌기' 때문에, '홍수가 임했을 때 세상에 남겨진 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지혜서 저자는 세상이 홍수로 뒤덮였을 때, 지혜는 그 의미를 값 싼 목조 구조물속으로 몰아넣은 후에 세상을 다시 구원하셨다고 언급한다(지헤서 10:4). 필로는 "노아가" 성경에 의인으로 기록된 첫 번째 사람이라고 주석을 달면서 그 이름의 의미로서 '안식'과 함께 '의로움'을 나란히 제시한다(Abr. 27). 그는 "노아가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자였기 때문에" 상을 받은 승리한 경주자라고 칭송하였다(참조: 창 6:9).||(f) 에디오피아어 에녹서에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노아의 묵시들에 관한 단편 기사들이 실려있다(6-11; 54:7-55:2, 60; 65:1-69:25, 106; 107). 이것들 가운데 대부분은 천사의 타락, 이에 따른 홍수 심판 및 그 다음에 오는 축복의 시대에 관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중의 하나(106:1-19)는 갓 태어난 노아를 신동(神童)으로 묘사한다. 이 기사에 의하면, 라멕은 그 아기가 강제로 침입해 온 천사의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아버지 므두셀라에게 상의하였고, 므두셀라는 자기 아버지 에녹과 상의하려고 "세상 끝"까지 갔다. 에녹은 노아가 참으로 라멕의 아들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시대에 '세상에 새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확증하였다. 근본적으로는 이와 동일한 이야기가 쿰란에서 출토된 창세기 외경(1Q Gen Apoc. 2)과 제 4동굴(Cave 4)에서 발굴된 단편들에도 나오는데, 한 단편에는 아기의 체중까지도 제시되어 있다(J. T. Milik, Ten Years of Discovery in the Wilderness of Judaea, 1959, SBT 26, 35). (참조: F. F. Bruce).||#2. 신약성경.||노아는 신약성경에서 8회 등장한다.||(a) 눅 3:36에서 노아는 예수님의 족보에 그의 조상으로 나온다: "눅 3:36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b) 마 24:37(병행구절 눅 17:26 이하) 이하에서 노아 때의 홍수가 소돔과 그 이웃 성읍들을 멸망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인자가 올 때 세계에 임할 심판의 한 모형으로 나타난다. 이 예를 들면서 주님은 그 때 주어진 경고도 절대 숨겨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특히 강조하려고 하신다(창 6:3). 아마 대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홍수의 경고를 일백년 이상 걸쳐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경고하고자 하시는 재난도 결코 갑작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참조: 벧전 3:20). 단지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참조: A. L. Williams).||(c) 히 11:7에서 노아의 믿음이 강조되어 있다. 그의 믿음의 특징은 하나님의 권고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였다는 것이다(참조: 창 6:22). 이렇게 하여 그는 "세상을 정죄하였고"(다시 말하면, 하나님 믿기를 거절한 사람들의 완악함을 드러내었으며) (훗날의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d) 벧전 3:19; 벧전 3:20에서 노아 때에 불순종 때문에 옥에 갇힌 영들에 대해 말한다: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바로 그 영들에게 그리스도는 전파, 곧 추정컨대 그들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그의 승리를 전파하셨다고 한다.||(e) 벧후 2:4; 벧후 2:5 이하에서 노아를 "그 일곱 식구"와 함께 보존한 것과 반역한 천사들을 마지막 심판 때까지(참조: 유 1:6) 지옥 어두운 구덩이에 가둔 것을 대조하고 있다. 노아의 여덟 식구를 제외하고는 당시의 온 세상이 모두 "경건치 아니"하였다. 경건한 자를 보존하시고 악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권세의 보증서이다. 노아는 이 구절에서 "의를 전파하는 자"로 불리운다.|한편 벧후 3:5-7에서는, "그 때 세상"의 물에 의한 멸망이 현재 세상이 불에 의해 멸망할 것을 보여주는 전조로 간주된다.|(참조: F. F. Bruce; Walter Bauer; J. H. Thayer).
게으른
nwqrov"
나태한, 둔한 sluggish||#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노드로스는 노도스($3541: 서자, 사생아)에서 유래했으며,||(a) '나태한, 게으른' sluggish|(b) '둔한, 우둔한' obtuse을 의미한다(Polyb., Aristot.).||#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노드로스는 신약성경에서 히브리서에만 2회 나온다.||(a) 히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여기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그가 원하는대로 기독교의 깊은 신학적 지식에로 그들을 이끌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받아들이는 그들의 내적인 이해력이 둔하고 무디기 때문이다. 그들은 듣는 것과 이해하는데 둔하게 되었다. 이것은 서신의 수령인이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생명력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장래 종말의 때에 대한 소망의 불완전한 확신에 기인하는 이 영적 고갈 상태는 그들을 둔한 자들(노드로이)로 만든다(히 6:12). 그러므로 그 말씀은 기독교적 생명의 참된 부분이 아닌 이중의 결핍을 표현한다: 기독교의 영적 지식(gnosis)에 대한 수용성의 부족과 소망에 대한 빛나는 기쁨 대신에 생기없고 지쳐버린 영혼이다. 기독교적 생명이 숨을 들이쉬는 것(듣는 것과 받아들임)과 숨을 내쉬는 것(미래의 확실성을 믿는 것) 모두에서 기진맥진한 상태를 보여줄 때,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의 독자들을 노드로이라고 부른다.|(참조: Preis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