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되다
oijkodomevw
짓다, 세우다, 다시 세우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오이코도메오(Hdt. 이래)는 오이코도모스(건축자)에서 유래했으며,||(a) '짓다, 건축하다',|(b) '설립하다, 세우다',|(c) '재건하다, 다시 세우다, 복구(원)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오이코도메오는 70인역본에서 약 500 여회 나오며, 거의 히브리어 바나(1124: 세우다, 짓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오이코도메오는 대부분의 경우 '건물의 세움'이라는 문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특히 예레미야서에서 나타나는 오이코도메오의 비유적 용법은 흥미롭다. 여기서 '심다'와 '짓다'는 의미가 서로 어울려 있으며, 이 두 동사 '심다'와 '짓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며 하나님의 심판 때 "파괴하"여 "뽑는" 것(렘 1:10; 렘 24:6)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이스라엘을 재건하실 분은 하나님 자신이다(렘 31:4; 렘 33:7). 하나님은 선지자들이 입에 그의말씀을 두어서 그의 사역을 행하신다(렘 1:9 이하). 하나님은 만백성들을 이스라엘 백성과 교제하게 하시며 따라서 "그들이 세움을 입"는다(렘 12:14 이하). 구약성경에서 오이코도메오의 이러한 용법은 바울의 용법에 특히 영향을 주었다. 더 나아가 구약성경의 이러한 의미는 신약성경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상을 낳았다(사 66:1).||#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오이코도메오는 신약성경에서 4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오이코도메오는 다양한 목적어들과 함께 문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① 눅 6:48에서는 집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② 막 12:1에서는 탑을 건축하는 것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③ 눅 11:47에서는 무덤을 쌓는 것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화 있을찐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b) 짓는것(건축하는 것)은 본래 묵시 문학적이며 메시야적인 개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또는 재림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하늘의 성전을 건축하게 될 것이다. 마 16:18에서 계시의 말씀은 베드로와 관계되어 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서와 같이 막 14:58에서 오이코도메오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행위, 하나님에 의한 새로운 권한 부여를 의미한다. 메시야는 미래의 성전과 새 공동체를 건설할 것이다. 이 언급은 부활의 때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재림의 때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행 2:1 이하에 비추어 볼 때 부활의 때에 대한 언급인 것처럼 보인다. 마 16:18에 사용된 미래 시제는 종말론적인 능력을 행사하실 것을 지시해 주지만 영적인 능력 행사의 요소도 들어 있다. 막 14:58(행 7:47; 행 7:49)에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에 대한 언급이 있다. 물론 행 9:31(이 구절들은 암 9:11과 렘 12:15 이하에서 인용)의 메시야적인 오이코도메오는 교회론적인 개념이기도 한다. 위의 성구들에서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공동체는 목적물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 건물은 그 자체로서 영적이고 종말론적인 것이다.||(c) 오이코도메오는 사도의 임무에 관해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사도의 행동을 나타낸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 바울의 진정한 사역은 세우는 일이다. 그렇지만 남이 닦아 놓은 터 위에 세우지 않았다는 것은 바울의 큰 자랑이었다.||(d) 오이코도메오는 공동체의 영적 책무에 대해 사용되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성령께서 공동체를 세우신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계발하는 것은 카리스마적이고 영적인 행동이다. 살전 5:11에서 개인과 전체가 갖는 관계, 개인들간의 상호 관계, 그리고 이러한 관계의 카리스마적인 성격에 주목하게 된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것 같이 하라". 개인적으로 덕을 함양하는 것(쌓는 것, 건축하는 것)은 다른 공동체의 일원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전달해 준다(참조: 고전 14:3).|덕을 세우는 것은 개인적인 것임과 동시에 공동체적인 것이다. 몇몇 성구를 살펴보면,|고전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고전 10: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고린도 교회의 몇몇 사람이 보여 준 것처럼 지식만으로는 덕을 세우지 못한다.|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을 먹는 것이 죄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다른 사람을 세우기보다는 넘어지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랑은 항상 덕을 세운다.||고전 14:4에 보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라고 했다. 방언을 말함으로 자신의 덕을 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예언은 직접적으로 공동체의 덕을 세우지만 방언은 그렇지 못하다. 예언은 이방인 신자들이나 불신자들에게도 덕을 세운다. 물론 예언은 그리스도와 성령과 신앙이라는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e) 갈 2:18에서 바울은 건물을 세우는 것과 허는 것을 대조해서 말하고 있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벽은 허물어졌다. 그러나 베드로의 처사는 이 벽을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율법을 지키는 일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그가 그 전에 헐었던 구조물을 다시 쌓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언급은 분명히 안디옥에서 베드로의 행위이나, 바울은 은혜스럽게 그것을 일인칭으로 한다. 그렇게 율법으로 돌아옴으로 그 자신은 범법자가 될 것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실제적인 범죄를 위하여 명백한 용어를 쓴다(참조: 롬 2:25; 롬 2:27). 사람이 그 자신을 범죄자로 드러내는 것은 그것을 단순히 하나님의 결정이라고 하지 아니한 중대한 의의가 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O. Mich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