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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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anger, 분개 indignation, 진노 wrath.||#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오르게(Hesiod 이래)는 오르가오(%1048: 득의양양하다, 뽐내다, 흥분하다)와 동족어이다. 오르게는||(a) 본래 '자연스런 충동, 기분, 기질, 천성, 성벽'을 의미한다(참조: Hdt., Ⅵ, 128).||(b) 비극 작가들의 작품에서(Aesch.; Soph.), 오르게의 용법은 점차 '강한 내적 열정을 나타내는 가장 인상적인 표현'을 의미하는데로 한정되었다(H. Kleinknecht; TDNT Ⅴ384). 따라서 뒤모스($2372)는 "끓어오르는 진노를, 오르게($3709)는 일시에 쏟아져 나오는 진노를" 의미한다(H. Cremer, 참조: TDNT V 409, 383). 분노의 목적은 복수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데모스데네스(Dem.)의 작품(Orationes, 24, 118)에서 오르게는 특별히 재판관에게 어울리는 태도로 나온다. 이 말은 긍정적인 면에서 의에 대해 봉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나머지의 경우에 분노는 주로 인간이 버리려고 노력해야 하는 성격상의 결함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억제되지 않은 격정의 표출인 분노는 이성 Reason(그노메: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결정) 및 로고스(말)와 반대되며 현명한 사람의 모습과 모순된다. 분노는 아메카논 카콘(amechanon kakon: 제어할 수 없는 악)이다. 인간의 그 결과에 대해 보상할 수 없다(Eur., Medea 446f.). 분노는 "반드시 다른 카카(kaka: 악 evils)에 이르게 된다"(참조: H. Kleinknecht, TDNT 384).||#2. 70인역본의 용법.||오르게는 70인역본에서 약 450여회 나오며, 19개의 히브리 단어 및 파생어들, 그 중에 주로 아프(분노, 격노, 210회), 헤마(열기, 독, 격노, 분노)를 번역했고, 주로 사람이나 하나님의 '분노, 분개'에 대하여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오르게는 신약성경에서 3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는 명사 오르게의 구절이 아님)||(a) 신약성경에서 오르게는 인간의 감정 중 하나인 '격노, 분노'를 가리킨다. 이런 의미로 오르게는 뒤모스($2372)와 병행한다. 이 용어의 신약성경에서의 용법을 알려주는 핵심 구절은 약 1:19; 약 1:20이다: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의롭지 않는 분노 가운데 행한다.|계 11:18에 따르면 이방들의 분노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용의 분노와 동일하다고 한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참조: 계 12:17).|이 근본적인 신학적 경향은 바울서신의 윤리적 판단에서도 발견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를 인정하면서 복수를 자제할 것에 대해 말하는 한편(롬 12:19), 분노를 보다 열등한 인간의 특질로, 대개 혀의 죄로 간주한다(골 3:8; 엡 4:31). 우리는 특별히 이 죄를 경계해야만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노를 격발시켜서는 안된다(참조: 엡 6:4: "노엽게 하지 말고").|이렇게 할 때만이 예배 드리기에 순수한 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참조: 딛 1:7). 이곳과 후대의 문헌에서(예: Ign. Phld. 1:2; 8:1)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인간의 분노에 대해 경고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의미에서 이루어진다: "분노는 하나님 앞에서 중대한 의에 기여하지 않는다"(Stahlin 442).||(b) 오르게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을 다루는 구절들에 나타난다(막 3:5). 예수님은 사단(☆마 4:10; 마 16:23)과 귀신들(☆막 1:25; 막 9:25; 눅 4:41)을 향하여 진노를 보이신다. 예수님은 악마 같은 사람들을 향하여 진노하신다(☆요 8:44; 참조: 마 23:33). 예수님은 모든 형태의 불신앙(☆요 11:33)과 이해력의 결핍(☆요 11:38)에 분노하신다. 예수님의 가득찬 분노(예수님을 가장 깊이 슬프게 한 것)는 바리새인을 향한 것이다(막 3:5).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의 회개의 부족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혹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러한 분노가 분명하게 언급된다(☆눅 14:21; 마 18:34). 이런 본문들에서 예수님의 분노는 종말론적인 심판의 진노에 한층 더 가까이 접근한다: 그는 회개하지 않는 도성(☆마 11:20-24)과 성전의 상인들(☆마 21:12-13)을 심판하신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의 골짜기로 던지신다(참조: 마 13:42; 마 25:41; 마 22:7).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즙틀을 밟는다고 선포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계 19:15). 어린양의 진노(계 6:16)는 하나님의 원수를 향한 높임 받으신 주님의 진노이다.||(c) 신약성경에서 오르게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표현하는데(롬 3:5 이하), 부분적으로 전통적인 형식(롬 2:8, 뒤모스와 함께 나옴)과 오래된 개념(롬 2:5: "진노의 날")을 사용한다. 이 선포가 행해지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건짐 받는다(살전 1:10; 롬 5:9).|세례(침례) 요한은 벌써 진노에서 구원 받기 위한 메타노이아(회개)를 선포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이하, 병행구 눅 3:7 이하).|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오르게는 거룩한 도성의 멸망에 관한 메시지에서 나타난다(눅 21:23).|요한계시록의 몇몇 용례는 이것을 한층 확대하여 하나님의 다가오는 진노에 대하여(계 11:18; 계 19:15),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잔에 대하여(계 14:8-10; 계 16:19), 진노의 큰 날에 대하여(계 6:17), 어린양의 진노의 날에 대하여(계 6:16) 말한다. 요한의 신학은 이와 같은 종말론적 진노가 지금 여기 존재함을 강조한다(비록 단 한번이긴 하지만, 요 3:36).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된다. 불신자들은 이미 죽은 자의 영역에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이 배후에 놓여 있는 것은 개개인이 인자의 증거를 받으라는 요구이다(참조: 요 3:31-36).|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의 진노는 마지막 심판에서 확인될 것이다(롬 2:5; 롬 2:8; 롬 3:5; 롬 5:9 롬 9:22; 살전 1:10; 살전 5:9). 바울을 따르는 자들도 이 사상을 유지했다(골 3:6; 엡 5:6; 엡 2:3).|그러나 로마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현재 활동하심에 대해, 복음의 구원하고 심판하는 기능에 대해서도(롬 1:17 이하) 분명하게 말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양자 모두에게, 즉 전 인류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오르게의 신학에서 바울은 이중적인 입장을 취한다: 한편으로 그는 종말론적 진노의 미래의 성격을 받아들이고 "공로에 따른"(롬 2:5 이하)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디카오쉬네($1343: 의, 옳음)의 계시와 대조되는, 진노의 현재의 계시에 대해 말한다. 복음 안에서 믿음 외에는 오르게만이 있을 뿐이다(참조: 롬 3:9 이하; 롬 3:23). 하나님의 진노와 의의 이중적 계시(롬 4:15; 롬 13:4 이하; 살전 2:16)는 동일한 방식으로나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진노와 의 양자 모두에 대한 선포가 아니다. 오히려 이미 나타나고 있는 진노로부터 구원인 의에 대한 선포이다(Conzelmann 1932). 그러므로 바울에게 결정적인 문제는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거나 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믿음의 설교를 도우는 진노의 설교')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다: 마찬가지로 신학적(문자적 의미에서의) 기초와 기독론적 전제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에서 어떤 인간론보다 선행한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바울의 개념에서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바울의 개념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및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이 이해의 열쇠이다. 동일한 복음 안에서 동일한 사람이 진노와 구원을 만난다. 이것은 진노는 죄인에게만 효력을 미치고 구원은 의인에게만 미치는 그런 식이 아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롬 3:23),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진노의 제거는 모두에게 적용한다(롬 3:24).|로마서에 따르면 복음은 하나님의 진노를 단순한 종말론적 위협 이상의 보다 중요한 다른 무엇으로 선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재의 진노로 인간과 대면할 때, 인간에게 다음과 같이 소환한다: 너는 세례(침례)와 고백을 통하여(참조: 롬 3:9 이하) 구원 받으라(참조: 롬 3:21-26). 그러므로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의 진노는 신적인 속성이 아니라, 사람들이 게리그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분과 만날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인정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인류는 지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진노에서 구원 받는다(롬 5:9; 참조: 롬 10:4).|히 3:11과 히 4:3은 시 95:11을 인용한다("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W. Pes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