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닭
o[rni"
새, 수탉, 암탉.||#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오르니스는||(a) '새'(Homer 이래),|(b) 특히 '수탉, 암탉'(Aeschyl., Xen.)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오르니스는 70인역본에서 왕상 4:23에만 나오며 살찐 '새들'을 묘사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오르니스는 신약성경에서2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온다.|마23:37이하는 복음서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말씀들 중의 하나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병행구, 눅13:34이하).|한글개역과 같이 영역 성경들에서 오르니스를 보통 '암탉'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새'를 의미하는 말이다.|이 비유적 표현은 시84(83):3을 연상시킨다.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새들과 그 새끼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보금자리를 얻었다고 말하면서 이를 인간의 진정한 행복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말씀(마23:37이하.)은, 시57:1(시56:2; 참조: SB Ⅰ 943)과 시91:4에 기록된 날개에 대한 언급도 연상시킨다.|마태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공적으로 대결하신 내용 중 그 클라이맥스(climax)에 위치시키고 있다(참조: 마21:23; 마22:23; 마24:1).|특히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일련의 논쟁을 벌인 후, 구중 앞에서 그들에 대해 평하고 있다(참조: 마23:1).|즉, 과거는 물론 예수님 당시에도, 종교 지도자들은 빛과 안식처를 가르쳐 주는 자로서의 역할을 하기는커녕 백성들을 오도(誤導)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박해하는 데에 앞장서 왔던 것이다.|그러므로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발언이 수차에 걸친 그의 예루살렘 방문을 의미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백성들을 위한 참된 피난처이어야 할 성전을 중심으로 유대교의 초점이 된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염려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그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진정한 피난처이며, 따라서 백성들의 안식처로서 성전과 여호와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지금까지 살펴 본 이 말씀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적용될 수가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맥락에서는 보다 폭넓게 적용됨을 시사해 준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그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으나, 실상 아벨로부터 스가랴에 이르기까지 의인들의 피가 그들에게로 돌아가리라는 정죄의 말씀 바로 뒤에 나오기 때문이다(마23:29-마23:36; 참조: 눅11:45-눅11:52). 37절의1인칭 단수를 34절의1인칭 단수와 동일시할 수도 있다. 마23:34의 병행구인 눅11:49에서는, 사람들이 죽인 그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보내는 자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지혜는 예수님과 동일시될 수가 있다.|(참조: 고전1:24; 골2:3).|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통하여,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예수님의 갈망은, 단지 긴 역사에 걸쳐 하나님의 동일한 갈망은, 단지 긴 역사에 걸쳐 하나님의 동일한 갈망의 클라이맥스에 지나지 않는다. 마태복음과 동시에 누가복음의 말씀은 기회의 날이 이미 완전히 지나가 버렸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스라엘의 집의 황폐를 가져오는 심판은 이제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예수님의 메시야적 귀환이 환영받게 될 때, 이 환영이 예수님의 정당성을 입증할 것이다(마23:39; 눅13:35; 참조: 시118:26; SB Ⅰ, 849f., 876).|(참조: J. H. Thayer; C. Br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