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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징계함
paideuthv"
교사, 훈련시키는 자||이 명사는 파이듀오($3811)에서 유래했으며, `교사, 교육자, 훈련시키는 자'를 의미한다. 히 12:9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파이듀테스를 아버지라는 말과 대조시켜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또한 롬 2:20에서도 발견되는데, 여기에서 자신은 율법의 빛속에 있지 않으면서 스스로 율법 교사라고 자처하는 유대인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다.
징계를 받다
paideuvw
훈련시키다, 교육하다, 징벌하다, 교정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이 동사의 기본적인 어근은 파이스($3816:아이 Child) 이다. 따라서 파이듀오는 문자적으로 `어린 아이와 함께 있다'(동사형 어미 %892는 상태를 나타낸다)라는 뜻이고, 여기에서부터 '양육하다'(bring up), '교육하다'(educate), 가르치다'(instruct), '습관을 들이다'(accustom)라는 의미가 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70 인역본에서 파이듀오는 모두 84회 나오는데, 해당 히브리어를 가진 52회 중에서 대부분 야사르(징벌하다, 훈계하다, 교정하다; 대개 피엘형이 사용됨)의 역어로 사용되었다(41회).||#3. 신약성경의 용법.||파이듀오는 신약성경에서 `훈련시키다, 교육하다, 가르치다, 훈계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13회 나오며, 누가의 기록에 4회(눅2, 행2), 바울서신에 5회, 히브리서에 5회, 요한계시록에 1회 사용되었다.||(a) 사도행전에서 파이듀오는 `훈련시키다, 교육하다, 가르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두 구절들은 신학적으로는 중요하지 않지만 헬레니즘 시대의 용례를 분명하게 증거해 준다. 행7:22은 모세가 애굽인들의 모든 지혜 가운데서 양육받았다고 언급한다. 이것은 위대한 인물들에 관한 유사한 전기적 소개들과 일치한다.|행22:3에서 바울은 그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성장하였으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으로 교육받았다고 언급한다.||(b) 눅 3:16; 눅 3:22에서 파이듀오는 '육체적 징계(discipline)', 즉 `채찍질하다, 매질하여 벌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이 단어가 수난 설화의 많은 부분에서 그러하듯이, 구약성서의 예언(사53:5)을 암시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매질'을 의미하는 일반 헬라어의 용법을 채택한 것에 불과한지를 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G.Bertram, TDNT V 621).||(c) 파이듀오=훈련시키다(train)와 파라듀오=훈계(징계)하다(discipline) 사이에는 폭넓은 의미가 있다.|① 파이듀오는 `(영적) 교정과 지도'라는 의미로 나타난다. 딤후 2:25에서 영적인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어리석은 논쟁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 하에서 회개와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교육적인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말미암아, 연약함 때문에 잘못을 범하는 자들을 교정하고자 한다.|딛 2:12-13에서는 훈련 또는 교육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관한 내용이 훨씬 더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모든 것은 십자가의 말씀에 합류된다. 이 목적은 구원이다(딛 2:11).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이 구원을 위해서 불신앙을 물리치도록 우리에게 요청하며, 그리스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북돋아 주심으로서 우리를 양육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은총 안에서 교정과 지도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불경건과 세상 정욕을 버리고 "근심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에 이르는 것이다. 사람은 은혜로 의롭게 되며, 은혜로 성화된다는 것이다.|② 파라듀오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형벌의 형태에서 징계(discipline)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에 의한 교육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가르침과 그에 따른 사랑의 손길은 고난 속에서 경험되기 마련이라는 관념(예:유딧8:25-27; 마카베오이서6:12-17)과 함께 유대교에서 더욱 결정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러한 관념은 구약성경에도 암시되어 있다(예:신8:5; 신 11:2; 삼하 7:14 이하). 징계를, 최후의 심판에서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으로 보는 이와 같은 견해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몇 개의 중요한 구절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졌다(참조: 0.Michel).|- 히12:5 이하에는 잠언 3:11 이하에서 인용한 인용문이 나온다. 주의 징계는 그의 사랑의 징표요, 따라서 그것으로 인해 용기를 잃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교육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교육 방법은 인간의 자녀 교육 방법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인간의 자녀 교육 방법은 하나님의 인간 교육 방범을 강하게 반영해 주지 못한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즉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계속 보존케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마음을 돌이켜 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징벌을 하신다. 사람은 이 징계에 저항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며, 하나님의 부성애를 의심한다(히 12:6).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거부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한다. 그렇지만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행동이 경험되는 것은 바로 이 징계 속에서 이다. 고난이나 징계는 아버지가 책임있는 사랑 안에서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비추어 보면, 징계나 고난은 하나님의 아들됨의 보증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과 용서에 대한 보증이다. 여기서 기독교인을 영적 투쟁을 위하여 강하게 하는 훈련만은 아니다. 아버지가 주는 징계나 고난의 경험은 기독교인을 그리스도 곁에 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경험은 그에게 그가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사람의 자녀는 기르는 일에 있어서조차, 참된 아들의 지위가 아버지가 그를 교육하고 '징벌하는'데서 드러나기 마련이라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기르는 일에 있어서는 얼마나 더 하겠는가?|육신의 아버지는 궁극적인 통찰력 없이 자녀를 징계하기 때문에 실수할 수도 있으나, 주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거룩함에 참예케 한다는 궁극적인 목적을 갖고 그렇게 하신다(히 12:10). 이 징계의 목적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이며(히 12:11),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교육 행위,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교육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스토아주의자들도 이와 유사한 말을 하였지만, 그들의 궁극적인 교육목적은 인간의 자기 완성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그의 징계라는 생각은 바울서신에서도 성만찬에 대한 권면과 관련하여 나타난다(고전 11:32).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병을 얻게 되고 죽음을 당하게 된다. 여기에서 징계는 하나님의 심판과 중복된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이 징계의 성질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 징계의 댓가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서 구제받으며, 따라서 저주로부터 구원받는다(32절). 그리고 계 3:19도 보라.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사명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얻은 체험을 통하여,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기초로 하여 이해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후 6:9).|그렇지만, 징계를 통한 교육이라는 신약성경의 교육관은 헬라의 교육관(즉 어떤 이상을 지향하는) 뿐만 아니라, 징계의 결과로 온 고통에 속죄의 능력을 부여하는 랍비들의 가르침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에 의한 징계는, 신자로 하여금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사용될 수 밖에 없는 실제적 방편이다.|- 딤전1:20에는 사단에게 넘겨져 그에게 벌을 받게된 사람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에서 행하여졌던 징계의 행위(아마도 파문이었을 것이다)를 볼수 있는데, 이 징벌 속에서 사단은,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시키는 자들을 질병과 사망으로 괴롭히는 하나님의 저주의 화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렇지만 심지어 이런 징벌도 죄인을 완전히 파멸로 이끌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제정신을 회복하여 회개하도록 하려는 것이다(20b절).|(참조: G.Schneider; G.Bertram ; D.Furst).
어릴때 부터
paidiovqen
어린아이 때부터||부사 파이디오덴(Xen. Cyr.)은 파이디온($3813: 어린 아이)에서 유래한 부사이며, '어렸을 적부터', '어린이 때로부터'를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막 9:21에 한번 나온다: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얘들아
paidivon
어린 아이 very young child, 유아 infan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파이디온(Hdt. 이래)은 파이스($3816)의 지소사로서 7세까지의 '어린 아이, 갓난 아이'를 의미하며, '어린 노예'(남, 여)를 의미하기도 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파이디온은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옐레드(소년 boy, 35회), 나아르(소년, 젊은이, 종, 27회), 벤(아들, 19회), 타프(아이, 7회)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일반 세속 헬라어 문헌에서와 마찬가지로 '갓난 아이'(창 17:12; 창 21:7), '어린 아이'(창 21:14), '소년'(창 22:5), 그리고 '사환'(창 22:5), 종 등 나이 어린 자들의 봉사 능력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파이디온은 신약성경에서 5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① 파이디온은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에 나오는 아이들에 대해 사용되었다(마 14:21; 마 15:38). 배불리 먹은 사람들의 수는 여자와 어린 아이를 제외한 것이다. 파이디온은 갓난 아이 및 어린 아이였던 예수님에 대해 사용되었다(마 2:8, 마 2:9, 마 2:11, 마 2:13, 마 2:14, 마 2:20, 마 2:21; 마 14:21; 눅 2:17; 눅 2:27).|② 마가는 파이디온만을 사용하며, 브레포스나 파이스를 사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막 5:39(막 9:24; 막 7:28; 막 9:24) 등이다.|③ 누가복음에서 동일한 아이들을 묘사하면서 눅 18:15에서는 브레포스를, 눅 18:16에서는 파이디온을 사용한다(병행구 마 19:13; 막 10:13). 여기서 누가는 아마 특히 '갓난 아이들'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하지만 파이디온 역시 갓난 아이들을 나타낸다. 눅 11:7의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에서 나오는 아이들은 갓난 아이이다.|파이디온은 갓난 아이였던 세례(침례) 요한에 대하여 사용되었다(눅 1:59; 눅 1:66; 눅 1:76; 눅 1:80).|눅 7:32에서 파이디온은 시장의 아이들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들은 6, 7세의 어린 소년들을 묘사한 것이다.|④ 요 4:49에서 신하의 '아이'에 대하여 파이디온을 사용한다. 이 동일한 아이에 대하여 요 4:50은 휘오스(아들), 요 4:51에서 파이스를 사용한다.|요한은 요 16:2에서 신생아에 대해서 사용한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고전 14:20에서 바울은 아이같이 되지 말라고 경고한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이처럼 여기에서는 아이에 대한 묘사가 부정적으로 사용된다(막 10:15과 대조적임).|히브리서에서 파이디온은 3회 사용되었다(히 2:13, 히 2:14; 히 11:23).||(b) 파이디온은 신약성경의 세 그룹의 구절들에서 왕국과 관련이 된다.|① 막 10:13; 막 10:14; 막 10:15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신 것을 언급한다: 13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병행구, 마 19:13, 마 19:14; 눅 18:16, 눅 18:17[15절 참조]).|제자들이 어른들로 하여금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오지 못하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피로하심에 대한 그들의 염려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마 어린 아이들은 책임성 있는 언행을 하기에 너무 어리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들은 13세의 바르 미츠와(Bar Mitzwah)가 되는 연령에 속해 있지 않았을 것이며 율법의 멍에를 스스로 멜 수 없었을 것이다(참조: J.Bowman, The Gospel of Mark: The New Christian Jewish passover Haggadah).|마가는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참조: 막 10:16; 마 19:15)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이런 자"라는 용어는 문자적으로 '이 어린 아이들과 그 외 어린 아이들을 암시하거나 또는 문자적 의미의 어린 아이가 아닌 어린 아이의 특성을 소유하고 있는 이런 자들'을 암시할 것이다(D.E.Nineham, Sanint Mark).|막 10:15은 두번째 해석이 적절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이 경우, 예수님의 선언은 제자들의 피상적인 이해를 뒤집고 있다. 인간이 책임성있는 언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성숙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는 그 역(逆)이 진실이라는 의미가 담긴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이들에게 속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어떤 주관적 특질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객관적 무력함에 있다(C.E.B. Cranfield,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rk). 이 말씀은 요한복음 3장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거듭남을 대비시키는 가운데 니고데모와 나누었던 대화와 병행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라는 예수님의 범주적 말씀은 그들이 교회의 완벽한 구성원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가입을 위한 성례를 받기에 합당한 자라는 것이다.|② 마 18:4에서 어린 아이를 예를 들어 천국에서 큰 자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병행 기사인 막 9:36, 막 9:37(참조: 막 9:33-막 9:37)과 눅 9:46이하는 이 말씀을 담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이는 이 말씀이 ① 항목에서 살펴본 구절들에서 끌어낸 한 쌍의 이중 구절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거기의 사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처럼 받아들이는 것이고 여기에서는 어린 아이처럼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관해 말하며 결국 자신을 "이 어린 아이와 같이" 낮추어야 한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이 어린 아이 같이 낮춘다는 것에서 먼저는 우리를 들어가게 하는 것이요, 다음은 돌이키는 행위의 당연한 계속으로써, 우리가 들어간 후에 우리를 천국에서 점점 크게 만드는, 이 점점 자라는 마음의 겸손이다.|이 낮추는(타이노시스) 것은 소유권을 주장하지 아니하며, 권리를 주장하지 아니하며, 강요하지도 않으며, 주의 뜻과 말씀 아래 깊이 겸손히 허리를 굽히며, 주께 완전히 복종하며 이것으로 행복하며 만족한다.|예수님의 품 속의 어린 아이는 그를 쳐다 보았고, 그를 의지하였고, 그의 하신 일에 만족했다. 이것이 어린 아이의 겸손이요, 공손이었다. 이 아이는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았고, 아무런 공로도 내세우지 않았고, 어떤 업적도 자랑하지 않았다. 이것이 아이의 자연 상태였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큰 자의 영적 상태의 실례를 드시기 위해 이 아이의 예를 드셨다.||(c) 막 9:37에서 "이런 어린 아이"와 예수님과 관계를 설명한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눅 18:17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어린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신의 권리로 가질 수 있는 역할과 동시에 이에 준하여 행해야 할 교회의 책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복음서에서 끊임없이 표현되고 있는 한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의 사람들 내에 임재해 계신다(그러나 숨어 계신다)는 사실이다. 이 말씀은 임명된 그리스도의 증인들(참조: 마 10:40; 눅 10:16; 요 13:20), 어린이들(본 구절에서), 가난한 자들(마 25:35-마 25:45; 참조: 막 9:41), 기도하는 자들과 예배하는 자들(마 18:20; 참조: 요 15:4이하)에 적용되어 있다. 이 구절들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들을 학대하는 자들(아마 그들의 행위의 의미를 깨닫지도 못하는 자들일 것임)은 무서운 책임을 지게 된다는 유추적 결과도 내포되어 있다.|(참조: Walter Bauer; C.Brown).
계집아이
paidivskh
소녀, 여종.||#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파이디스케(Hdt. 이래)는 파이스($3816: 아이, 소년, 젊은이)의 지소사이며,||(a) '어린 소녀, 처녀, 소녀'(Xen.),|(b) '하녀, 여종, 어린 여종'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파이디스케는 신약성경에서 13회 나온다. 각 경우에 파이디스케는 노예이든지 또는 하인이든지 간에 예속된 상태에 있는 젊은 여자를 말한다.||(a) 마 26:69에서 베드로를 예수님과 함께한 자라고 말한 대제사장의 여종을 나타낸다(병행구 막 14:66; 막 14:69; 눅 22:56; 요 18:17).|(b) 눅 12:45에서 파이데스와 파이디스카이, "남자와 여자종들"을 나타낸다.|(c) 행 12:13에서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있는 "로데라 하는 계집 종".|(d) 행 16:16에서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나타낸다.|(e) 갈 4:22; 갈 4:23; 갈 4:30(두번); 갈 4:31에서 하갈을 파이디스케(여종)라고 한다.|바울은 그의 시대의 노예법대로 노예의 자손 역시 노예라고 생각한다. 파이디스케는 그러므로 여기에서 여자 노예이다. G. Kittel, TDNT Ⅰ, 55f; K. Cramer, BHH 623; F. Mussner, Gal(HTKNT) 319ff.|(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뛰논다
paivzw
놀다, 춤추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파이조(Homer 이래)는 파이스($3816: 아이, 소년, 젊은이)에서 유래했으며,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다, 놀다' play, '춤추다' dance, '농담하다' jest, '비웃다, 조롱하다' mock를 의미한다.|이 단어군과 관련하여 배는 바람의 노리개이며, 인간들 역시 운명이나 신들이 장난감으로 여긴다. 이 단어에는 비웃음의 의미가 암시되어 있으며, 경솔하거나 무모한 생각이 암시되어 있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파이조는 70인역본에서 약 2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사하크(7832: 웃다, 조소하다, 놀리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춤이나 놀이, 또는 농담 등을 나타낸다(렘 31:4; 슥 8:5; 삿 16:25; 창 21:9; 사 3:16 등).||#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파이조는 신약성경에서 고전 10:7에 한번 나온다: "저희 중에 어떤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출 32:6을 인용함). 여기서 파이조는 제의적 춤의 형태의 우상 숭배와 이와 관련된 방탕함을 나타낸다.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방인 축제들은 유사한 우상 숭배의 유혹을 제공해 준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G. Bertram).
사내아이
paiv"
아이, 나이 어린 자, 아들, 종.||#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파이스(Homer 이래)는||(a) 아들로서의 아이를 의미하며, 그러나 혈통과 관련하여 딸을 의미하기도 한다(Homer). 연령의 관점에서는 '유아'나 '젊은이'(참조: Hippocrates, De Hebdomadibus 5)와 구별되는 나이에서의 어린이(Homer), 즉 7-14세의 소년이나 소녀를 의미한다.||(b) 사회적으로는 '종, 노예'를 의미한다(Aesch, Cho).||#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파이스는 70인역본에서 약 500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에베드(노예, 종, 부하)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나아르(젊은이, 잠 1;4)와 벤(아들, 잠 4:1)도 번역하여 일반 헬라어 용법과 비슷한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파이스는 신약성경에서 24회,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만 사용되었다.||(a) 파이스는 '아이, 소년, 소녀'를 나타낸다.|① 마 2:16에서 파이스는 '어린 아이'를 나타낸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요 4:51에서도 역시 어린 아이를 의미한다.|② 눅 2:43에서 파이스는 열 두살의 소년 예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마 17:18; 눅 9:42; 행 20:12에서도 '소년'을 의미한다.|③ 눅 8:51, 눅 8:54에서는 소녀에 대하여 사용되었다.||(b) 파이스는 '종, 노예'를 나타낸다. 마 8:6, 마 8:8, 마 8:13; 눅 7:7에서 파이스는 백부장의 종(하인)을 의미한다. 눅 12:45; 눅 15:26에서 노예나 노비를 의미한다.||(c) 파이스는 마 14:2에서 왕의 시종 또는 '신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d) ① 파이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마 12:18; 행 3:13; 행 3:26; 행 4:27; 행 4:30).|② 파이스는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에 대해 사용되었다(눅 1:54).|③ 파이스는 하나님의 종 다윗에 대해 사용되었다(눅 1:69; 행 4:25).|(참조: Walter Bauer; C.Brown).
쏘다
paivw
때리다, 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파이오(Aeschyl., Hdt. 이래)는,||(a) 주먹으로 사람을 '치다, 때리다',|(b) 무기로 '상처를 입히다', 침으로 '쏘다'를 의미한다.|(c) 비유적으로 '신의 징벌'에 대하여 사용되었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파이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파이오는 주먹으로 '치다'를 의미한다: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마 26:68; 병행구, 눅 22:64).||(b) 파이오는 검으로 '치다'를 의미한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요 18:10; 병행구, 막 14:47).||(c) 파이오는 침으로 '쏘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계 9:5).|(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파카티아네
Pakatianhv
파카티아나||파카티아네는 브루기아 파카티아나를 가리킨다. 브루기아는 주후 4세기에 살루타리스와 브루기아 파카티아나로 나뉘어졌다(딤전 6:22TR).

pavlai
이전에, 옛적에 formerly, earlier.||#1. 고전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팔라이(Homer 이래로)는 '이른, 이른 시기에, 전에, 오래 전에, 옛적에, ~하지 오래, 오랫동안'을 의미한다. 원래의 의미는 '먼' 또는 '멀리 떨어진'이며, 현재와 대조되는 이전 시대 즉 과거에 그 초점있다(참조: H. Haarbeck; H. Seesemann).||#2. 70인역본의 용법||부사 팔라이는 70인역본에서 8회 나오며, '오래전에'(사 37:26), 옛적에, 이전에(사 48:5,7; 지혜서 11:14), 옛날의(지혜서 12:3)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팔라이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마11:21(병행구, 눅10:13)에서 팔라이는 `오래 전에'를 의미한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유1:4에서도 같은 의미로 나타낸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b) 히1:1에서 팔라이는 `옛적에'를 의미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c) 벧후1:9에서 팔라이는 상당히 `이전에'를 의미한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d) 막15:44에서 팔라이는 `~한지 오래'라는 의미를 가진다. 방금 지나간 시간에 관해서 말한다: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 묻고".|(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구약
palaiov"
늙은, 오래된 old||#1. 고전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팔라이오스(Homer 이래로)는 팔라이($3819: 옛적에, 이전에)에서 유래했으며, `오래된, 낡은, 구식의, 고대의, 옛날의'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a) 긍정적으로는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하였고 따라서 훌륭하다는 것이며,|(b) 부정적으로는 폐물이 되고 또는 낡아 헤어지고 따라서 무가치하고 쓸 수 없다는 뜻이다(참조: Soph., Oedipus Rex 290 등).||#2. 70인역본의 용법||팔라이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3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앗티크(고대의, 오래된), 야샨(오래된, 지난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단어는 70인역본에서 `오래된, 고대의, 지난해의, 낡은'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팔라이오스는 신약성경에 1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a) 공관복음에서 팔라이오스는 막2:21와 이하와 병행구, 마9:16이하; 눅5:36, 38; 눅5:39에서 옛 것과 새 것의 정대립하여 나타난다. 복음서 기자들은 금식 문제를 다룬 후에 보조화 및 병존 불가능성에 관한 예수님의 잠언적인 말씀을 추가한다.||이 예수님의 잠언적인 말씀은 예수님께서 옛 세상의 시대는 지나갔고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이를 사용하였다. 낡고 진부한 세상의 시대는 헌 옷(막2:21)과 묵은 포도주(막2:22)에 비교된다. 옷과 포도주는 세상 또는 구원의 시대를 나타내는 전통적 상징이었다. 공관복음서의 문맥에 있어서 본 구절은 새 것이 낡은 것을 배척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즉 구원의 새 시대는 금식이나 애곡과 같은 옛 관습에 삽입될 수 없는 새로운 삶의 태도를 요구한다. 옛 것은 새 것 안에서 성취되며(참고: 마5:17), 옛 사람은 정복된다.||이러한 문맥 속에 있는 눅5:39의 경구는 상당히 아이러니칼하다. 이갓은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들, 본문에서는 유대 전통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익숙한 옛 태도에 도저히 고쳐볼 수 없을 정도로 집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마13:52에서도 유사한 대조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서기관은 유대식의 특수한 방식으로 율법 교육을 받는 랍비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서기관은 포로기 이후의 유대교에서 단순히 성경을 필사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해석하는 권위있는 교사요 신학자였다(참조: D. Hill).||그러나 여기에서 서기관은 옛 것은 구약성경의 메시지와 그것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 곧 예수의 메시지와 인격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아는 청지기로 간주된다. 말하자면 성경에 정통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이것은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란 구체적 표현으로 분명해진다. 수동태 마데튜오 마이(제자된)는 여격으로 어떤 사람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의미하며 부정과거 분사는 천국 학교를 마치고 그 학교의 정신을 충분히 흡수하고 졸업한 자를 의미한다(B. -p.763). "천국의 제자"되는 것은 결국 천국을 선생으로 만든다. 천국이 그 왕을 중심애 있음을 알 때 이것이 이상할 것은 없다(참조: R. C. H. Lenski).||따라서 이 격언에서 명기해 두어야 할 사실은 문제의 "서기관"이 우선 율법적으로 교육받은 유대교의 서기관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천국에서 훈련받고 따라서 그의 창고에서 옛 것과 새 것을 내올 수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장로들의 유전"(마15;1-10; 막7:1-23)으로 가르침을 받고 인간의 전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마15:6; 참조:마23:1-39) 다른 서기관들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예수 자신과 마찬가지로, 천국에서 훈련받은 그 서기관은 율법과 예언으로부터 참 보화를 끌어낼 수 있다.||(b) 바울서신에서도 옛 것과 새 것의 대립은 예수님의 선언에서 같이 강조되어 있다. 참으로 바울은 그것으로 선과 악의 대립을 더 날카롭게 보여준다. 이것은 고전5:5-7에서 분명히 보여주는데 여기서 바울은 구약성경의 계명에 대해 언급한다(참조: 출12:19; 13:7; 신16:3f). 묵은 누룩은 하나도 남김없이 유월절 이전에 제거돼야 했던 것처럼, 옛 삶의 악과 부정직함, 곧 죄와 불순종의 묵은 누룩은 신실과 순종의 새로운 생명에 자리를 내주기 위하여 청소되어야 한다(고전5:6-8). 예수의 메시지와 사역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새로운 것을 가져오며 옛 것을 성취시킨다. 즉 옛 것의 힘을 빼앗는다. 율법적인 옛 삶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화해될 수 없다(롬7:6).||롬6:6에서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니 죄의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옛 것과 새 것은 서로 배타적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골3:9과 엡4:22에서도 동일한 대립을 말한다. 악들은 옛 사람을 표현하지만 새 사람의 표시는 하나님의 협상을 따라 새롭게되는 것이다.||고후3:14에서 율법의 옛 언약은 낡은 것이 되었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율법은 새로움을 가져다 주지 않으며, 따라서 율법의 계약은 낡은 것이다. 그 계약은 죽음을 가져오는 문자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을 하셨으므로, 율법의 옛 언약은 낡은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처음 것은 낡고 성취된 것으로서만 간주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옛 계약을 대신하는 의의 세 계약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옛 계약 역시 하나님의 계약이다. 참으로, 신약성경은 새 것의 관점에서, 그리고 새 것을 위해서만 옛 것을 언급한다고 할 수 있다.||(c) 팔라이오스는 요일2:7에서만 전혀 다른 의미로 한 번 사용된다. 서신의 저자는 독자들에게 새 계명이 아니라, 그들이 회심할 때부터 즉 "처음부터" 알고 있던 옛 계명에 대하여 말한다. 요일2:1-6의 문맥에서 "옛"은 초대교회의 전승을 가리키는 것이며 레위기19:18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H. Windish, Die Katholischen Briefe).|(참조: H. Seesemann; H. Haarbeck; Walter Bauer; J. H. Thayer).
묵은 것
palaiovth"
고령 age, 시대에 뒤진 것, 진부한 것 obsoleteness.||#1. 고전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팔라이오테스(Eur., plat., Aeschin.)는 팔라이오스($3820, 오래된, 낡은)에서 유래했으며, `고령, 시대에 뒤진 것, 낡은 것, 진부한 것, 쓸모없이 된 것'을 의미한다. 70인역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팔라이오테는 신약성경에서 롬7:6에 한번 나온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여기에서 바울은 구원과 생명의 방도로서의 새 것과 옛 것이 양립할 수 없음을 강조하며,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혼을 비론(比論)으로 사용한다. "예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자유케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 수 있다. 법은 무기력하여 그밖의 다른 것을 할 수 없다. 이어서 바울은 이야기의 방향을 바꾼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롬7:4) 율법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신자는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고 율법에서 벗어났다"(롬7:6a). 그러나 만일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면, 우리는 자진하여 영으로 섬기게 된다. 이처럼 율법은 그것이 생명을 줄 수 없고 오로지 정죄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죽은 것이다(참조: 롬7:10이하). 생명은 율법과는 무관한 새로운 어떤 것으로서 도래하며, 율법의 조항을(그것이 먼저 왔다는 점에서) 낡은 것으로 만들고(그것이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폐지되었다는 점에서)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롬7:6을 롬8:5-11 및 고후3:6과 비교하라).|(참조: H. Haarbeck; H. Seesemann).
낡아지게 하다
palaiovw
낡아지다, 낡은 것으로 만들거나 취급하다.||#1. 고전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팔라이오오(Hippocr. 이래로)는 팔라이오스($3820: 오래된, 낡은, 구식의)에서 유래했으며, `늙게하다, 낡아지다, 낡은 것으로 만들거나 취급하다, 쓸모없어진 것으로 선언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팔라이오오는 70인역본에서 약 3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아테크를 번역하는데 이 히브리어는, 타동사로는 `(때가) 지나가게 하다', `소멸시키다'를 뜻하며(욥9:5), 자동사로는 `자나가다', `소멸하다', `썩다'(욥14:18), `늙다', `나이 먹다'(욥21:7)를 의미한다. 그 다음으로 발라(닳아헤어지다)를 번역한다(신8:4; 29:5; 수9:5, 13; 느9:21 등). 이 후자의 의미로 `팔라이오오'는 포로기 및 그 이후의 구약성경의 문헌들에서 사람의 생명과 일 그리고 하늘과 땅의 노화와 무상함을 은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시32:3; 사50:9; 욥13:28 등).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쇠미함과 썩음에 내어줌으로써 하나님은 인류의 죄와 타락을 심판하신다(사51:6; 시102〔101〕:26).||#3. 신약성경의 용법||팔라이오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누가복음에 1회 히브리서에 2회 사용되었다.||(a) 눅12:33에서 팔라이오오는 시간과 사용에 의해 낡아지는 사물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이런 생활 방식을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재화를 낡아져서 헤어지는 주머니에가 아니라 낡아 헤어지지 않는 천국 주머니에 넣어두는 것이 된다. 히1:11에서도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히 1:11; 히 1:12절을 칠 것)|사51:6에 "땅이 옷과 같이 해어지며(70인역본, 팔라이오오)"라는 표현과 유사하다.||(b) 히8:13에서 팔라이오오는 어떤 해묵은 낡은 것이 되어 바야흐로 철폐될 것으로 선언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본 절은 렘31:31-35의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을 언급한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을 하셨으므로, 율법의 옛 언약은 낡은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처음 것은 낡고 성취된 것으로서만 간주될 수 있을 뿐이다(고후3:14). 참으로, 신약성경은 새 것의 관점으로부터 그리고 새 것을 위해서만 옛 것을 언급한다고 할 수 있다.|(참조: H. Haarbeck; H. Seesemann)
씨름
pavlh
씨름 wrestling||#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팔레(Homer 이래)는 팔로(%373: 흔들리다)에서 유래했으며,||(a) '씨름' wrestling를 의미하며,|(b) 헬라 비극에서는 '갈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필로는 이 단어를 금욕주의의 '갈등'에 대해 사용했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팔레는 신약성경에서 엡 6:12에 한번 나온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씨름은 종말론적 특징을 지닌다. 그의 씨름은 이미 시작되었고 점점 격렬해지는 최종적인 대전투의 일부이다. 그의 대적자들은 마귀와 귀신들이며, 그의 상급은 심판에서 보존과 구원이 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Greeven).
세상이 새롭게 됨
paliggenesiva
중생, 새롭게 됨 regeneratio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팔링게네시아(Plut.)는 팔린($3825: 다시)과 게네시스($1078: 기원, 출생)에서 유래했으며,||(a) '존재에로의 복귀' return to existence.|(b) '보다 높은 존재로의 재생' renewal to higher existense를 의미한다.|이 단어는 일상 용어에서 여러 종류의 회복, 재생을 나타낸다.||스토아 학파에서 이 단어는 우주적 배경에서 사용되는 개념이었다. 우주는 주기적으로 세계적인 큰 화재(에크퓌로시스)를 통해 소멸하였다가 그 후 재탄생(팔링게네시아)으로 새롭게 되었을 것이다(안티니우스 11, 1; Philo의 세계의 불멸성에 대하여. 89 이하). 그러나 우주는 이 재탄생을 통하여 새로운 상태의 존재 혹은 속성을 가지지 못했다. 즉 사라졌던 세계가 그 곳에 다시 나타난다. 플루타크(Plutarch)는 디오니수스(Dionysus)와 오시리스(Osiris)의 신화들을 묘사하는 데와, 또한 영혼들의 재탄생을 묘사하는 데에 개인적인 의미로(아나비오시스, 소생 reanimation의 동의어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De Ei apud Delphos 9; De Iside et Osiride 35; 참조: F. Buchsel). 팔링게네시아는 또한 새로운 우주 시대에서 개인들의 재탄생을 표현하는데에도 사용된다. 이 단어는 곧 우주적 사건 뿐만 아니라 인간 사건도 나타낸다. 비 종교들과 유사한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팔링게네시아는 70인역본에는 나오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팔링게네시아는 신약성경에서 2회, 마태복음과 디도서에만 사용되었다.||(a) 마 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여기서 팔링게네시아는 부활과 우주적 갱생을 가리킨다. 병행구 눅 22:28에는 팔링게네시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마태복음에서 이 단어는 세계의 갱생을 나타내는 종말론적 술어이다. 이 일은 인자가 심판자로서의 빛나는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때 일어날 것이다. "인자"라는 호칭과 심판에 대한 언급은 모두 중생을 말세와 연관시키고 있다(참조: 계 21:1-5). 스토아적인 언어와의 유사성은 단지 피상적일 뿐이다. 새 땅은 또 다른 질서에 속하는 것이며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스크니에윈드(Schniewind)는 달리 해석하고 있다. 즉 '우리가 말하는 모든 취지는 초대 교회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갱생이 여기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새 사람의 새로운 생활 방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Das Evangelium nach Matthaus, 독일신약주석).||(b)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여기서 팔링게네시아는 중생과 새 생명 모두를 의미한다. 이 말씀은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not by man) 인간 위에서 또한 인간 안에서(on man and in man) 수행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나타낸다. "우리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딛 3:4). 이와 일치하는 것으로 사람의 구원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일어난다. 이러한 묘사는 세례(침례)를 암시한다(참조: 엡 5:26). 세례(침례)에서 신자는 성령을 받는다(참조: 행 2:38). 씻음과 성령 받음은 본절에서 하나의 결합으로 나타난다. 중생은 물과 성령을 통해 생겨난다(참조: 요 3:5). 거듭난 사람은 그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의 안에서 자신이 미래 생활의 상속자와 참여자가 될 것이라는 소망 가운데 산다. 이 갱신에서 그의 이전 생활 방식과 상반되는 새로운 생활 방식이(요 3:3) 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중생은 도덕 생활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포함하기 때문이다.|(참조: F. Buchsel; J. Guh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