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paidivon
어린 아이 very young child, 유아 infan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파이디온(Hdt. 이래)은 파이스($3816)의 지소사로서 7세까지의 '어린 아이, 갓난 아이'를 의미하며, '어린 노예'(남, 여)를 의미하기도 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파이디온은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옐레드(소년 boy, 35회), 나아르(소년, 젊은이, 종, 27회), 벤(아들, 19회), 타프(아이, 7회)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일반 세속 헬라어 문헌에서와 마찬가지로 '갓난 아이'(창 17:12; 창 21:7), '어린 아이'(창 21:14), '소년'(창 22:5), 그리고 '사환'(창 22:5), 종 등 나이 어린 자들의 봉사 능력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파이디온은 신약성경에서 5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① 파이디온은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에 나오는 아이들에 대해 사용되었다(마 14:21; 마 15:38). 배불리 먹은 사람들의 수는 여자와 어린 아이를 제외한 것이다. 파이디온은 갓난 아이 및 어린 아이였던 예수님에 대해 사용되었다(마 2:8, 마 2:9, 마 2:11, 마 2:13, 마 2:14, 마 2:20, 마 2:21; 마 14:21; 눅 2:17; 눅 2:27).|② 마가는 파이디온만을 사용하며, 브레포스나 파이스를 사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막 5:39(막 9:24; 막 7:28; 막 9:24) 등이다.|③ 누가복음에서 동일한 아이들을 묘사하면서 눅 18:15에서는 브레포스를, 눅 18:16에서는 파이디온을 사용한다(병행구 마 19:13; 막 10:13). 여기서 누가는 아마 특히 '갓난 아이들'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하지만 파이디온 역시 갓난 아이들을 나타낸다. 눅 11:7의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에서 나오는 아이들은 갓난 아이이다.|파이디온은 갓난 아이였던 세례(침례) 요한에 대하여 사용되었다(눅 1:59; 눅 1:66; 눅 1:76; 눅 1:80).|눅 7:32에서 파이디온은 시장의 아이들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들은 6, 7세의 어린 소년들을 묘사한 것이다.|④ 요 4:49에서 신하의 '아이'에 대하여 파이디온을 사용한다. 이 동일한 아이에 대하여 요 4:50은 휘오스(아들), 요 4:51에서 파이스를 사용한다.|요한은 요 16:2에서 신생아에 대해서 사용한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고전 14:20에서 바울은 아이같이 되지 말라고 경고한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이처럼 여기에서는 아이에 대한 묘사가 부정적으로 사용된다(막 10:15과 대조적임).|히브리서에서 파이디온은 3회 사용되었다(히 2:13, 히 2:14; 히 11:23).||(b) 파이디온은 신약성경의 세 그룹의 구절들에서 왕국과 관련이 된다.|① 막 10:13; 막 10:14; 막 10:15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신 것을 언급한다: 13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병행구, 마 19:13, 마 19:14; 눅 18:16, 눅 18:17[15절 참조]).|제자들이 어른들로 하여금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오지 못하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피로하심에 대한 그들의 염려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마 어린 아이들은 책임성 있는 언행을 하기에 너무 어리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들은 13세의 바르 미츠와(Bar Mitzwah)가 되는 연령에 속해 있지 않았을 것이며 율법의 멍에를 스스로 멜 수 없었을 것이다(참조: J.Bowman, The Gospel of Mark: The New Christian Jewish passover Haggadah).|마가는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참조: 막 10:16; 마 19:15)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이런 자"라는 용어는 문자적으로 '이 어린 아이들과 그 외 어린 아이들을 암시하거나 또는 문자적 의미의 어린 아이가 아닌 어린 아이의 특성을 소유하고 있는 이런 자들'을 암시할 것이다(D.E.Nineham, Sanint Mark).|막 10:15은 두번째 해석이 적절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이 경우, 예수님의 선언은 제자들의 피상적인 이해를 뒤집고 있다. 인간이 책임성있는 언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성숙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는 그 역(逆)이 진실이라는 의미가 담긴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이들에게 속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어떤 주관적 특질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객관적 무력함에 있다(C.E.B. Cranfield,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rk). 이 말씀은 요한복음 3장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거듭남을 대비시키는 가운데 니고데모와 나누었던 대화와 병행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라는 예수님의 범주적 말씀은 그들이 교회의 완벽한 구성원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가입을 위한 성례를 받기에 합당한 자라는 것이다.|② 마 18:4에서 어린 아이를 예를 들어 천국에서 큰 자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병행 기사인 막 9:36, 막 9:37(참조: 막 9:33-막 9:37)과 눅 9:46이하는 이 말씀을 담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이는 이 말씀이 ① 항목에서 살펴본 구절들에서 끌어낸 한 쌍의 이중 구절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거기의 사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처럼 받아들이는 것이고 여기에서는 어린 아이처럼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관해 말하며 결국 자신을 "이 어린 아이와 같이" 낮추어야 한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이 어린 아이 같이 낮춘다는 것에서 먼저는 우리를 들어가게 하는 것이요, 다음은 돌이키는 행위의 당연한 계속으로써, 우리가 들어간 후에 우리를 천국에서 점점 크게 만드는, 이 점점 자라는 마음의 겸손이다.|이 낮추는(타이노시스) 것은 소유권을 주장하지 아니하며, 권리를 주장하지 아니하며, 강요하지도 않으며, 주의 뜻과 말씀 아래 깊이 겸손히 허리를 굽히며, 주께 완전히 복종하며 이것으로 행복하며 만족한다.|예수님의 품 속의 어린 아이는 그를 쳐다 보았고, 그를 의지하였고, 그의 하신 일에 만족했다. 이것이 어린 아이의 겸손이요, 공손이었다. 이 아이는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았고, 아무런 공로도 내세우지 않았고, 어떤 업적도 자랑하지 않았다. 이것이 아이의 자연 상태였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큰 자의 영적 상태의 실례를 드시기 위해 이 아이의 예를 드셨다.||(c) 막 9:37에서 "이런 어린 아이"와 예수님과 관계를 설명한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눅 18:17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어린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신의 권리로 가질 수 있는 역할과 동시에 이에 준하여 행해야 할 교회의 책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복음서에서 끊임없이 표현되고 있는 한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의 사람들 내에 임재해 계신다(그러나 숨어 계신다)는 사실이다. 이 말씀은 임명된 그리스도의 증인들(참조: 마 10:40; 눅 10:16; 요 13:20), 어린이들(본 구절에서), 가난한 자들(마 25:35-마 25:45; 참조: 막 9:41), 기도하는 자들과 예배하는 자들(마 18:20; 참조: 요 15:4이하)에 적용되어 있다. 이 구절들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들을 학대하는 자들(아마 그들의 행위의 의미를 깨닫지도 못하는 자들일 것임)은 무서운 책임을 지게 된다는 유추적 결과도 내포되어 있다.|(참조: Walter Bauer; C.Br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