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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프튀로
ptuvrw
두려워 하다, 놀라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프튀로의 어원은 불확실하며, '두려워(하게) 하다, 놀라다'(Hippocr., Plat., Diod., Plut.)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프튀로는 신약성경에서 빌 1:28에 한번 나온다: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여기서 이 동사는 '놀라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대적자들의 협박에 놀라지 않는 것을 표현한다(참조: NRSV).|(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프튀스마
ptuvsma
침 spittl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프튀스마(Hippocr. 이래; Polyb.)는 프튀오($4429: 침뱉다)에서 유래했으며, '침' spittle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프튀스마는 신약성경에서 요 9:6에 한번 나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프튓소
ptuvssw
접다, (둘둘) 말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프튓소(Homer 이래)는 기본 동사이며, '함께 포개다, 접다, 둘둘 말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프튓소는 신약성경에서 눅 4:20에 한번 두루마리 책을 '말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프튀오
ptuvw
침뱉다 spi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프튀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침뱉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프튀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침을 뱉다'를 의미한다.||(a) 요 9:6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자를 고치실 때 사용되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막 8:23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b) 막 7:33에서 예수님께서 귀먹은 자를 고치실 때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주검
ptw'ma
떨어짐, 시체.||#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프토마(Aeschyl. 이래)는 핍토($4098: 떨어지다, 넘어지다)에서 유래했으며,||(a) '떨어짐, 넘어짐, 무너짐, 붕괴, 함락',|(b) 비유적으로 '불행, 재난, 패배, 파멸',|(c) 생명체가 떨어진 것, 즉 '시체', 특히 난폭하게 죽임을 당한 것,|(d) 파피루스에서는 '뜻밖의 습득물'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프토마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오며, 마태복음(2회), 마가복음(2회), 요한계시록(3회)에만 사용되었으며, 모두 '죽은 몸, 시체'를 의미한다.||(a) 마 14:12(병행구 막 6:29),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b) 마 24: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c) 막 15: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는지라".||(d) 계 11:8; 계 11:9, "8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참조: W. Bauder; W. Michaelis).
무너짐
ptw'si"
무너짐, 멸망.||#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프토시스(Pla. 이래)는 핍토($4098: 떨어지다, 넘어지다)에서 유래했으며, '넘어짐, 타락, 붕괴, 함락, 파멸'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프토시스는 70인역본에서 나무의 '쓰러짐'(겔 31:13), 싸움에서 '죽음'(나 3:3), '패배, 재앙, 멸망'을 의미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프토시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각각 1회 사용되었다.||(a) 마 7:27에서 집의 '무너짐'을 표현한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b) 눅 2:34에 '멸망', 즉 그리스도를 걸림돌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표현한다: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참조: W. Michaelis; W. Bauder).
가난
ptwceiva
거지 신세, 가난, 궁핍.||이 명사는 프토코스($4434:가난한, 비천한, 거지같은)에서 유래했으며, `거지 신세, 구걸하기, 빈곤, 궁핍'을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3회 나온다. 고후 8:2에 "가난", 고후 8:9에 "가난함", 계 2:9에 "궁핍"으로 번역되었다.*
가난하게 되다
ptwceuvw
구걸하다, 빈곤하다.||이 동사는 프토코스($4434:가난한, 비천한, 거지같은)에서 유랬으며, `구걸하다, 빈곤하다, 거지의 삶을 살다'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고후 8:9에만 나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빈궁한
ptwcov"
가난한, 빈곤한, 구걸하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프토코스(Homer 이래)는 프톳소(%1054: 두려워하여 '움츠려들다, 쭈그리다, 웅크리다')에서 유래했으며, 따라서 프토코스는||(a) 본래 '쭈그리고 움츠려드는 사람의'란 의미였다. 자주 비참한 가운데 헤멘다는 개념을 포함한다. 이 의미에서||(b) 이 단어는 '거지 신세로 전락한, 구걸하는, 자선을 구하는, 거지처럼 가난한, 가난한, 천한'이란 의미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 형용사는 거지(beggar)를 뜻하는 명사로 더 많이 사용된다.|프토코스는 거지가 될 만큼 가난하여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자신의 재산으로 살 수가 없어 손수 일하여 벌어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페네스($3993)와는 다르다.||(c) 이 단어는 일반 세속 헬라어에서 '빈약한, 적합하지 않은, 부족한, 무력한, 무엇을 양보하는'이라는 비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거직들은 대개 일하려 하지 않고 타인의 것을 얻어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재산을 상실하여 큰 불행에서 방황하는 거지처럼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 후자는 동정을 받기도 했지만 일반적인 거지는 멸시를 받았다.|거지는 적은 선물을 받았으나 구제하는 것은 종교적인 입장에서도 결코 미덕으로 여기지 않았다. 때때로 호머는 나그네와 거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며(Od., 6, 207), 신들이 비천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했으나 가난한 자가 특별한 신의 보호 아래 있다는 관념은 헬라 세계에서는 전혀 생소한 것이다. 헬라 세계에서 가난한 자를 위한 구호 체제가 없었다. 자선은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유익하게 하는 봉사이다.|초기 헬라의 사고에서는 가난이 종교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난하다는 것이 인간에게, 신 앞에 특별히 설 수 있게 한다든지, 신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적인 곤경에서 가난한 자는 신의 도움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후기 헬라 철학에서는 몇몇 학자들에 의하여 가난이 덕을 위한 알맞은 전제 조건으로 간주되었다. 삶의 최고의 목표는 가난을 포함하여, 모든 물질적인 상태에 있어서 절제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프토코스는 70인역본에서 다섯 개의 히브리어 역어로 약 100회 나온다.||(a) 아니(억압 받는, 가난한, 비천한, 낮은; 예: 레 19:10; 삼하 22:28; 욥 29:12; 시 10:9; 시 12:5; 사 3:14 이하)는 37회 사용된다. 이 단어는 억압 받는 가난한 자와 관련되어 있다. 억압하는 자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곳에서는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입장에서의 가난한 자들, 즉 토지가 없는 자들과 동의어가 된다. 이와 같은 가난은 상속권 박탈과 불법적인 손해에 의한 것이지, 그 사람 자신의 잘못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은 이 단어가 재산이 아니라 폭력과 대조되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여호와, 이스라엘의 심판자께서 이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시며, 가난한 자들은 오직 이 사실을 신뢰하며, 이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이다.||(b) 달(낮은, 연약한, 가난한, 얇은)은 22회 사용되며, 특히 암2:7; 암 4:1; 암 5:11; 암 8:4; 암 8:6와 시 72:13; 시 82:3; 시 113:1과 잠 19:4; 잠 19:17; 잠 28:3; 잠 28:8; 잠 28:15에 나온다. 달은 신체적으로 '약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후기로 오면서 사회 계급의 가장 낮은 지위, 즉 가난하고 궁핍하며 하찮은 소작농민에 대하여 사용되었다.||(c) 라쉬(결핍한, 가난한)는 11회 사용된다. 이 단어는 순수하게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의미에서 '가난한, 궁한, 결핍한'을 뜻한다. 이 단어는 지혜 문학에서 선호하는 말이다. 잠언에서는 특별히 부유함과 대조되는 말로 사용되었다(예: 잠 13:8; 잠 14:20; 잠 17:5; 잠 19:7; 잠 19:22; 잠 22:2; 잠 22:7; 잠 28:6; 잠 28:27).||(d) 에브욘(결핍한, 궁한, 가난한)은 11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프토코스의 관례적인 의미에 가장 가까운 단어로서, 의연금을 구하고자 애쓰는 사람, 거지를 의미한다. 그 다음에는 일반적으로 매우 가난하고 집이 없는 자에 대한 말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영적 빈곤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나 웨 에브욘(가난과 궁핍)이라는 연결구는 기도하는 자의 태도를 암시하는 말이다(7회, 시 35:10; 시 86:1).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이며,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탄원하러 나오는 자이다.|프토코스로 번역된 히브리어들을 살펴보면, 70인역본에서 나오는 프토코스가 그 단어의 의미를, 특히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종교적인 면으로 확대시켰음을 확인케 된다. 특히 프토코스는 70인역본에서 에브욘의 의미를 따라서 주로|① 단순히 물질적 의미에서 '가난한 자',|② 아무 힘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억압을 당하는 사람, 그래서 사회적으로 보호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③ 하나님 앞에 영적 상태로서 영적 빈곤이나 고통 중에서 오직 하나님만 확신하고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존해 있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참조: C. Brown).||#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프토코스는 신약성경에서 34회 나오며, 대개 복음서에 나온다(24회).||(a) 복음서의 프토코스.|1) 프토코스는 문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① 막 10:21에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는 부자에게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말씀하셨다(병행구 눅 18:22). 병행구 마 19:21에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라는 조건을 붙여 언급하신다.|② 막 12:41 이하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적은 연보가 부자의 많은 연보보다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쌔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이 과부는 그가 가진 전부 또는 마지막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의 삶의 보장을 믿음으로 기대한다.|③ 막 14:7에서 예수님은 수난으로 다가가는 사건 중에서만 구제가 부차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막 14: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병행구 마 26:11; 요 12:8). 예수님과 함께 계시는 동안은 축제 기간이다(참조: 막 2:18-20). 이 때가 이제 마지막에 달했을 때 행한 여자의 행위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더하여 그녀의 행위는 일종의 예언자적 표징 행위의 성격을 갖는다. 예수님의 죽임을 당해서 무덤에 장사될 것이다. 그리고 이 여인은 이 죽은 사람에게 행하는 마지막 의식을 행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앞으로는 이것을 받으실 수 없다(참조: 막 16:1-6). 이 여인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음으로서 이 의식을 미리 행한다. 그런데 이 때에는 죽기로 예정된 자에게 사랑에서 나오는 엄청난 행위를 베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 문제였다(참조: E. Bammel).||2) 예수님은 축복의 말씀에서 가난한 자에 대해 말씀하셨다.|① 예수님은 첫번째 축복의 말씀에서 가난한 자에 대해 말씀하셨다.|-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마 5:3에서 예수님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눅 6:20에서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다.|누가복음의 말씀은 언뜻 보면 외적 지상적 빈곤 상태에 대한 찬사와 축복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런 물질적 가난이 미덕이고 복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아첨하고 부자들을 통렬히 매도하는 세속적 민중 선동자가 아니다. 외적인 가난이 만일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향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복이다. 그러나 종종 나타나는 듯이 가난이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든다면 그 가난은 복이 아니다. 그리고 가난이 그 가난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든다면 그것도 복이 아니다. 이런 일은 훨씬 빈번하다.|성경 어느 곳에서도 외적 가난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자연인들에 대해 말할 때 가난한 자는 부자보다 천국에 더 가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가난에 아무런 미덕이나 유익이 없다. 빈궁이 영성(靈性)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가난"은 외적 가난을 의미하지 않는다.|누가복음 6장 전체를 살펴보면 우리 주님은 "가난"이란 말을 세속심에 지배를 받지 않고 있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며 따라서 부귀에 의존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부귀에 의존하는 정신은 정죄받은 정신이다. 많은 부자들이 세속심에 사로잡혀 세상의 부귀를 탐내고 의지하는 것과 같이 많은 가난한 자들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단지 외적으로 가난한 자라 하여 "복되도다"라고 할 수 없다.|심령이 가난한 자는 심지가 약하거나 소심한 자, 다른 사람들보다 일반적으로 무능무지한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식하는 심령 곧 일부러 겸손하는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심령이 가난한 것, 이 영적 가난은 자신의 결핍, 연약, 공허,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 죄악 등을 분명히 알아서 자신을 겸손하게, 정당하게 평가하여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다.||② 마 11:5(병행구 눅 7:22),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여기서 예수님은 사 61:1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신다. 주님의 행위는 가난한 자에게, 즉 구원을 갈망하는 자에게 대한 복음의 선포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3) ① 누가는 사 61:1에서 따온 인용문을 하나의 예정표로서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기록하였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 4:18).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낭독한 글 가운데에 나온다.|② 누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주님 자신을 식사에 초대한 자에게 갚을 것이 전혀 없는 가난한 자들과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셨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눅 14:13). 그리고 그에게 그렇게 행한 것에 대하여 종말론적 보상을 약속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들은 큰 잔치에 들어갈 제일 첫번째 대리 손님들이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눅 14:21). 누가복음에서는 가난이라는 이 주요한 주제가 부자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과 연관이 되어 있다(참조: 눅 6:24).|③ 나사로(문자적 의미는 '하나님이 도우신다')가 하나님이 즐겨 맞으시는 가난한 자의 전형이다: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눅 16:20; 눅 16:22).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한 익명의 부자는 하나님에 의해 정죄 받는 자들의 전형이다(참조: 눅 12:13-21).|④ 눅 19:8에서 삭개오가 회개한 후에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었을 때, 은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은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에게 나타났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H. H. Esser).||(b) 바울 서신의 프토코스|바울 서신은 다음 두 가지 측면을 뚜렷이 나타낸다. 한편으로 바울은 프토코스를 드물게 사용한다(4회). 바울이 그의 회중 내부의 사회적 갈등을 언급할 때는 다른 단어들을 사용한다(롬 12:7 이하; 고후 8:14; 갈 6:10).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의 제거를 칭송할 때(참조: 갈 3:27 이하)나 이것을 요구할 때(참조: 골 3:11), 부와 가난 사이의 차별을 언급하지 않는다.|한편으로 이 단어가 나타나는 4-5개의 본문들은 핵심 구절로서 특별히 다룰 필요가 있다.||① 갈 2:10과 롬 15:26은 실질적으로 관련이 있는데, 이 두 곳에서 연보의 수령자, 즉 바울이 힘써 장려하고, 다른 곳에서도 언급하는 모금의 수혜자들은 "가난한 자들" 혹은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로 불리운다. 바울은 사도 회의에서 내린 결정과 연관하여, 그가 맡은 임무 즉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것을 언급한다(갈 2:10).|이것은 성전세를 대신하는 기독교의 제도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비개종자들까지도 행한 자발적인 선물과 유사하다. 바울이 이것을 의무로서 요구한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행 24:16 이하에서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부금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일부 주어졌으며, 초대 교회에 광범위한 고난을 경감시키고자 계획된 것이었다.|롬 15:27에서 비록 하기오이(성도들)가 공동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여겨서는 안되지만 마찬가지로 하기오이가 프토코이(가난한 자들)에 적용되지도 않는다. 갈 2:10은 예루살렘에서 유래한 관용문구를 인용하고 있는 것 같다.||② 갈 4:9에서 바울은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을 언급하는데, 갈라디아인들이 다시금 이것에 희생될 위험이 있었다. 스토이케이온($4747: 원리, 초보)은 분명히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논쟁에서 사용된 용어이다. 아스데네 카이 프토카("약하고 천한")도 마찬가지이며, 이 문구는 이방 신들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나 그 신들의 능력이 약하고 그 활동이 비열하다고 묘사한다. 유대의 율법 교사의 요구를 따르는 것은 이방의 미신으로 회귀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유대 절기의 규정들은 갈 4:9-10에서 이방의 점성 미신의 행불행 사상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었다.||③ 고후 6:3 이하의 바울의 자기 변호 끝부분에서 사도의 삶과 사역의 본질을 묘사하는 7가지 역설 중 마지막의 바로 앞에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고후 6:10)라는 언급이 나온다. 바울은 사도들이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는 크게 부요하다는 것을 지적한다.||④ 끝으로 생각해보면 바울은 보통 프토코스를 이전 전승에서 혹은 실제의 상황에서 취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가난의 문제를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다루는 단계를 제시한다. 그 노선은 너무 종말론적인 것이 강해서 이 용어가 신학적 가치 전환의 주된 관심사나 주제가 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가난에 대한 신학적 가치 변동도 없다. 바울은 프토코스를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명칭으로서 사용하지 않았으며, 또한 프토케이아($4432: 가난)도 그리스도의 삶을 위한 비유적 용어도 아니다.||(c) 야고보서의 프토코스.|야고보서에서 프토코스는 약 2:2; 약 2:3; 약 2:5; 약 2:6에 나온다.|① 야고보는 부자들의 태도를 대중 앞에서, 교회 예배에서 강하게 공격한다.|-약 2: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약 2: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약 2: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②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동등하게 존중할 것을 요구하신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약 2:5).|야고보는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베푼 긍휼은 마지막 심판에서 심판의 기준이 된다(참조: 약 2:13; 마 25:31-45)는 입장을 근거로 하여 주장한다.||(d) 요한계시록의 프토코스.|① 계 2:9에서 서머나 교회의 영적 부요함이 교회의 물질적 빈곤과 대조되어 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② 계 3:17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가장된 영적 부요는 가난으로 밝혀진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③ 계 13:16에서는 모든 사회적 경제적 계급, 가난한 자나 부요한 자나 모두가 깊은 심연(abyss)에서 나온 짐승의 최면술에 어떻게 사로 잡히는가를 묘사한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C. Brown).|(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C. Brown; H. H. Esser; E. Bammel).
퓌그메
pugmhv
주먹 fis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퓌그메(Homer. 이래)는 퓍스(주먹)에서 유래했으며, '주먹으로 싸움, 싸움, 난투'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퓌그메는 70인역본에서 2회 나오며, 히브리어 엔로프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출 21:18; 사 58:4), 그 의미는 '주먹으로 치는 것', 곧 '주먹 싸움'을 의미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퓌그메는 신약성경에서 막 7:3에 한번 나온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부지런히 손을 씻지 않으면"이란 문구는 문자적으로 '손들을 서로 문질러(주먹 싸움처럼) 씻지 않으면'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손을 열심히 씻는 것을 나타낸다.|(참조: J.H.Thayer; K.L.Schmidt).
퓌돈
Puvqwn
피돈 the Python (아폴로가 죽인 뱀의 이름), 점치는 영.||#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명사 퓌돈(Strabo 에 따르면)은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뱀의 이름이다. 이 뱀은 포기스(Phocis)에 있는 파르나스산(parnassus) 기슭의 피도(Pytho) 지역에 살았는데, 델피(Delphi)의 신탁을 수호했다. 본래 델피의 신탁 지역인 듯하다. 그러나 히기누스는 퓌돈 뱀 자체가 신탁을 전해주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폴로(Apollo)가 퓌돈을 죽이고 대신 신탁을 전해주었다고 한다.||(b) 로마 제국시대부터 퓌돈은 점치는 영과, 또한 배속에 이러한 영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던 복화술사(腹話術師, ventriloquist)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많은 사람들이 이 복화술사를 통하여 신(神)이 말한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그는 점장이로 간주되었다. 퓌돈이 어떻게 복화술사(엥가스트리뮈도스)와 동일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것은 델피의 무녀(pythia)가 복화술사처럼 이상한 소리로 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2. 70인역본의 용법||퓌돈은 70인역본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70인역본은 히브리어 오브의 역어로 엥가스트리뮈도스(복화술사)를 사용했다. 삼상 28:8에 기초하여 요세푸스는 엥가스트리뮈도스를 죽은 사람의 영을 점으로 불러내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용했다. 그리고 불가타역은 후에 그 기초가 되는 히브리어에 대하여 신비적인(magus), 피돈(python), 피도니케스 스피리투스(퓌돈의 영)와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레 19:31; 삼하 28:3,9; 대하 33:6). 처음에는 70인역본만이 복화술을 죽은 사람의 영을 불러내는 일과 관련시키었다. 교부들은 복화술사가 실제로 이것을 말할 수 있었는가 묻는다.||#3. 신약성경의 용법||(a) 퓌돈은 신약성경에서 행 16:16에만 나타난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여기에 나오는 빌립보의 한 여종은 점하는 귀신(Python spirit)이 들렸는데, 여기에 나오는 프뉴마 퓌도나(pneuma pythona)란 두 단어는 동격 관계이다. 우리는 이 문구를 '한 영인 퓌돈'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퓌돈이라는 영', 또는 '퓌돈의 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아마도 여기서 중요한 점은 퓌돈이 소녀를 통하여 말하는 영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점장이 복화술사로서 그녀는 마귀 또는 귀신과 관계한다. 여종은 아마도 사로잡혀 있는 귀신에 의해 길러진 투시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와 같은 투시력은 델피 탁선소의 여승이 지니는 특징이었다. 선지자들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복화술사들이 사기꾼들이지만 이 여종에게 있어서 복화술은 어떤 점치는 능력과 관계되어 있다. 여종을 사로잡고 있는 영은, 마치 예수께서 지상의 사역 활동을 할 때에 여러 귀신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복음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 뿐만 아니라 바울도 이와 같은 출처로부터 고백된 증언을 그대로 수락하지 않고 그 귀신들을 내쫓았던 것이다.||(b) 초기 교회의 문헌들에서 퓌돈은 복화술사들에 대하여 사용되지 않고, 그 복화술사나 혹은 그 여자를 통하여 말하는 영을 대신하여 사용하였다. 제롬은 사 8:20에서 무당 귀신들로서 복화술사에 대한 정체를 폭로한다.|(참조: Walter Bauer; W.Foerster; C.Brown ).
퓌크노스
puknov"
빈번한, 자주하는, 자주 발생하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퓌크노스(Homer 이래)는||(a) '밀도가 높은, 빽빽한, 밀집한',|(b) 횟수에 관해, '빈번한, 자주 하는', '자주 발생하는'(Aeschyl.)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퓌크노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횟수에 관해 사용되었다.||(a) 눅 5:33에서 '자주 하는' 금식에 대해 사용되었다: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b) 딤전 5:23에서 '자주 나는' 병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c) 행 24:26에서 비교급 부사로 사용되어 '더 자주'를 의미한다: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퓌크튜오
puktevw
권투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퓌크튜오는 퓌크테스(%687: 권투 선수)에서 유래했으며, '권투 선수이다, 권투하다'를 의미한다(Eur., Xen., Pla., Plut.).||#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퓌크튜오는 신약성경에서 고전 9:26에 한번 나온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성문
puvlh
대문 gate, 문 door.||#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퓔레(Homer 이래로)는 주로 복수 형태를 취하여 '성문'을 의미하지만, 비극에서는 집의 '대문'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입구' 또는 '통로'(예를 들면, 지리적 통로, 즉 해협)를 나타내는 일반적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음부(Hades)의 문은 죽은 자의 영역인 아래 세계를 나타내는 완곡어법으로 매우 흔하게 사용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퓔레는 70인역본에서 300회 이상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샤알(문 gate), 때때로 페타흐(문, 문간, 입구)를 번역한다. 따라서||(a) 성읍, 건물, 농장 또는 마을의 문,|(b) 성문 바로 안 쪽의 땅,|(c) 죽음(욥 38:17; 시 107), 음부(사 38:10), 하늘(창 28:17)의 문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퓔레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문자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a) 퓔레의 문자적 의미.|① 퓔레는 눅 7:12; 행 9:24; 행 16:13에서 '성문'을 의미한다. 히 13:12에서 예수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 당하셨다는 사실은(참조: 레 16:17) 그의 고난이 속죄 날의 참된 제물이 되었다는 것과, 그의 죽음으로 그는 진 밖에서 돌에 맞아 죽은 범법자들과 동일하게 취급되었다(참조: 레 24:14; 민 15:35)는 것을 강조한다.|이 사건은 유대교와의 분리를 강조한다. 제사장들은 그리스도교의 제단에서 아무 직분도 갖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속죄일에 속죄 제물이 성막 밖에서 불태워진 것과 같이, 새 계약의 속죄 제물로서 거룩한 성밖에서 죽는다. 성문 밖에서 처형은 범법자들의 동류로 취급받는 수치의 일부분이지만(레 24:14; 민 11:35), 이 사건은 죄를 위한 참된 제물의 핵심적 부분이기도 하다.|② 퓔레는 행 3:10에서 성전의 '문'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③ 퓔레는 행 12:10에서 감옥 '문'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b) 퓔레의 상징적 의미.|① 퓔레는 마 7:13이하; 눅 13:24에서 생명에 들어가기 위하여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좁은 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눅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② 퓔레는 마 16:18에서 음부의 문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표상은 지하세계가 도망자를 막고 침입자의 접근을 저지하는 견고한 문으로 잠겨 있다는 고대의 일반적 생각을 나타내 보인다. 기독교 이전의 유대의 용법에 있어서 그 표현은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pars pro toto) 용어로 사용되어 음부 즉 죽은 자의 영역, 심지어는 죽음 자체를 가리킨다(사 38:10; 지혜서 16;13; 마카베오삼서 5:51; 솔로몬의 시편 16:2).|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음부의 문이 반석을 공격하는 지하 세계의 불경한 권세를 의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음부는 악한 권세들이 인간을 공격하기 위하여 출몰할 수 있는 그들의 거처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유대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그 표상에 대한 가장 적절한 이해는 다음과 같다. 즉 죽음이 지금까지도 정복할 수 없는 권세이지만, 그것은 반석 혹은 좀 더 가능한 해석으로서 반석 위에 세워진 엑클레시아(교회)를 결코 지배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 표상이 확증해 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죽음은 교회를 세운 메시야를 이기지 못할 것이며, 또한 메시야 공동체의 구성원들도 정복하지 못할 것이다.|(참조: D. Hill; Jeremias).
대문
pulwvn
문 gate, 출입구 gateway, 입구, 현관 entranc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퓔론(Aristot., 이래로)은 퓔레($4439: 대문, 문)에서 유래했으며, 퓔론은 출입구 또는 수위실(누, 다락)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퓔론은 70인역본에서 약 3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샤알(문), 페타흐(문, 문간, 궐입구)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퓔론은 신약성경에서 1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a) 퓔론은 집의 문 또는 현관에 대해 사용되었다(마 26:71; 눅 16:20; 행 10:17; 행 12:13; 행 12:14).|(b) 퓔론은 성읍의 문(행14:13, 아마도 성전의 장중한 문인 듯함)과 특히 새 예루살렘의 문(계 21:12이하; 계 21:21; 계 21:25; 계 22:14)에 대해 사용되었다.|(참조: D. Hill;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