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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로마 사람
@Remai'o"
로마인 Roma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로마이오스(Polyb. 이래)는 로메($4516: 로마)에서 유래했으며, '로마인' Roman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로마이오스는 신약성경에서 12회 나오며, 요 11:48을 제외하면 모두 사도행전에 사용되었다.||(a) 행 11: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b) 행 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c) 행 16: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d) 행 16:37,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e) 행 16:38, "아전들이 이 말로 상관들에게 고하니 저희가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f) 행 22:25,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g) 행 22:26,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가로되 어찌하려 하느뇨 이는 로마 사람이라 하니".|(h) 행 22:27,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가로되 그러하다".|(i) 행 22:29, "신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줄 알고 또는 그 결박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하니라".|(j) 행 23:27,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줄 들어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k) 행 25: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어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l) 행 28:17,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 준바 되었으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로마말로
@Rwmai>stiv
로마어로||부사 로마이스티(Diosc., Epict.)는 로마이오스($4514: 로마의, 로마인)에서 유래했으며, '로마어로, 라틴어로'를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로마이스티는 요 19:20에 한번 나온다: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로마
@Rwvmh
로마 Rome(지)||로메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수도이자 고대 세계의 머리이다.|신약성경에서 로메는 8회 나온다(행 18:2; 행 19:21; 행 23:11; 행 28:14; 행 28:16; 롬 1:7; 롬 1:15; 딤후 1:17).|(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평안함을 원하노라
rJwvnnumi
강하게 하다, 강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론뉘미(Eur., Thu. 이래)는,||(a) '강하게 만들다, 강화하다'를 의미하며, 완료 수동으로, '강하다, 번창하다, 영(형통)하다',|(b) 따라서 2인칭 (단수) 명령형은 편지를 끝맺을 때의 통상적 관용이며, 안녕! farewell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론뉘미는 신약성경에서 행 15:29에 한번 나온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사박다니
sabacqaniv
당신은 나를 버렸다.||사박다니는 셰박타니('내버려두다'라는 아람어 쉬바크에서 유래)의 음역이며 '당신이 나를 버렸다'를 의미한다.|사박다니는 신약성경에서 2회, 마 27:46(병행구 막 15:34)에 나온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만군
sabawvq
큰 군대 Sabaoth.||#1. 70인역본의 용법.||사바오드는 히브리어 체바오트('군대'를 뜻하는 차바의 복수)의 음역이며, '대군, 큰 군대'를 뜻한다. 사바오드는 70인역본에서 75회 나오며, 히브리어 체바오트의 역어로 사용되었다.||#2. 신약성경의 용법.||사바오트는 신약성경에서 2회, 로마서와 야고보서에 각각 1회 사용되었다.||(a) 롬 9: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b) 약 5:4,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안식할 때
sabbatismov"
안식일, 휴식(안식).||명사 삽바티스모스는 삽바티조(안식일을 지키다)에서 유래했으며, '안식일, 휴식'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삽바티스모스는 신약성경에서 히 4:9에 한번 나온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믿음을 버린 사람들은 불신앙 때문에 카타파우시스(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카타파우시스에-원수와 노동에서부터의 안식-대한 약속은 여전히 성취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존재하는 이 안식일 휴식(삽바티스모스)은 하늘의 축복인 완전한 안식일 것이다. 순례 공동체는 완전한 안식을 향하여 나아가며 완전한 안식이란 그 자체의 수고를 중단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권고적인 논평에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런 예비되고 약속된 쉼을 불순종으로 인하여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한다.|(참조: Walter Bauer; E.Lohse).
안식일
savbbaton
'안식일', 유대 달력에 있어서 안식과 여호와를 예배하는 날로 지정된 한 주간의 일곱째 날.||#1. 삽바톤의 기원||헬라어 삽바톤은 히브리어 샵바트를 음역한 것이다. 이 히브리어의 기원은 불명확하다. 어원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샤바트(그치다, 끝내다, 쉬다)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설명은 창 2장에 암시되어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함으로 일곱째날에 안식하시니라(와이스닐트).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복을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 하셨음 이더라(샤바트).|구약의 안식일 준수의 기원을 바빌로니아, 가나안 겐 족속에서 끌어내고자 한 시도는 실패하였다.||#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a) 삽바톤은 70인역본에서 약 120회 나온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안식일 준수의 기원은 먼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도 모세 이전,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살던 시대, 혹은 그보다 이전 시대일 것이다.|출 16:25-출 16:26에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이 주어지기 전에 그들이 안식일을 준수하였음을 보여준다.||(b) 안식일은 인간의 안식과 예배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에 대하여 명령하셨다(출 20:8-11). 그 명령의 적극적인 면은 백성이 그것을 거룩히 지키는 것, 즉 거룩한 목적을 위해 구별한 것으로, 주님에게 헌신하는 날로 표한 것이며, 그 명령의 소극적인 면은 그들이 그날에 일하지 않은 것, 즉 안식의 날로서 그 은혜스러운 취지를 나타내었다.|안식일 준수에 관하여 다소 다른 두 형태가 있다.|① 첫째로 출 20:11-출 20:18의 십계명에서 안식일 준수는 창조(의 완성)와 관계되어 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베푸신 은혜는 인간의 예배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② 둘째로 신 5:12 - 신 5:15의 십계명에서 안식일 준수는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구속 행위와 연결되었다. 그 날과 예배 행위는 속박에서 구원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하시는 행동에서 하신 은혜는 예배의 동인이었다.|이와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안식일이다. 그리스도교의 안식일은 이레 중 첫째날, 곧 우리가 즐겨 부르는 주일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시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하시듯이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해 주신 것이다. 바로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주일이다. 우리는 이 주일에 안식하며 하나님의 그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예배드리는 것이다.|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 사업과 구속 사업 등 그의 선한 손길을 기념하는 날로서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안식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알아서 예배하고, 축복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③ 또한 안식일은 레 23:1 - 레 23:3에 보면 여호와의 절기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절기들은 기념일, 즉 이스라엘이 자기 민족 위에 내리신 하나님의 선한 손길에 대한 여러 측면들을 명상하는 시간을 갖기 위하여 정한 날이었다. 특히 그들이 이 절기를 지키는데 포함되어 있는 것은, "성회", 즉 예배를 위한 공식적인 행동이다.|안식일은 개인이나 공동체에 있어서 공식적인 예배의 날일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그 날을 즐거이 지키는 기회였다.||(c) 안식일에는 특별한 제물을 드렸으며(민 8:9; 레 23장), 여호와 앞에 진설병을 진설하였다(레 24:8). 안식일일지라도, 예배 의식과 할례 의식은 거행되었다(레 12:3; 참조: 요 7:22).||(d) 안식일은 언약의 한 표징이다. 안식일은 구약시대에서 할례의 표징과 같은 부류에 속한 것이다. 출 31:13, 출 31:17과 겔 20:12이하 절에서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표징이며 이방인과 구별하는 표징으로 주어진 것이다.||(e) 안식일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성을 지닌다. 가장 바쁜 시기인 밭 가는 시기와 추수기에까지 일을 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출 34:21)과 안식일을 범했을 때 사형에 처하는 것은(민 15:32: 출 31:14) 이스라엘 생활에 있어서 이 명령에 포함된 지대한 중요성을 나타내어 준다.||(f) 그러나 안식일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즐거운 날로 여호와의 성일로 여겨서 잘 지켜야 한다. 안식일을 잘 지키면 특별한 축복을 받는다(사 58:13이하; 사 56:2).|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키는 한 그것은 여호와께 대한 충성심을 확증하는 것이며 여호와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을 모독하는 자는 재앙으로 위협하였다(겔 20;13). 바벨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의 혼란된 상태에서 안식일이 느헤미야의 개혁 내용에 강력하게 강조되어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느 10:32; 느 13:15 - 느 15:22).|요약해서 말하자면 안식일에 대한 구약성경의 태도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법으로 간주했지만 특별히 구속받은 백성인 이스라엘과 관련된 하나님의 법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소극적으로는 일을 쉼으로써 안식일을 지킨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여호와의 절기(잔치), 즉 개인적으로나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집중하는 기회로 지킨 것이다. 안식일의 분위기는 즐거운 축제의 분위기일 수 있었으며,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안식일을 진지하게 지켜야만 했다.||#3. 신약성경의 용법||삽바톤은 신약성경에서 6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신약성경에 나타난 안식일 관습은 유대 문헌에서 밝혀진 관습과 일치한다. 예수님의 시체는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예비일에 십자가에서 내려 매장되었다(막 15:42 - 막 15:47; 요 19:42). 안식일에는 밀이삭을 따는 것이 금지되었으며(막 2:23 - 막 2:24와 병행구), 죽음의 위험에 처해있지 않은 사람들은 도움이나 치료를 받을 수 없으며(막 3:1; 눅 13:14; 눅 14:3이하; 요 7:23; 요 9:14), 각종 물건을 운반해도 안된다(요 5:9이하).|안식일에는 여행이 제한되었다.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은 안식일에 여행하기에 합법적인 거리며, 탈무드에 의하면 2천 규빗, 또는 보이다(행 1:12).|안식일에 제사장의 일(막 12:4-막 12:5)과 할례(요 7:22-요 7:23)는 허용되었다.|안식일은 휴식의 날이며(눅 23:56), 손님들이 초대되었다(눅 11:1).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경을 읽었으며(행 13:15, 행 13:27), 예배가 드려졌고(눅 4:16이하), 해설을 하였다(행 13:14-행 13:15, 행 13:42이하; 행 16:13).||(b) 복음서들. 사복음서들에 언급된 예수님과 유대인의 충돌은 안식일에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해 준다. 안식일 문제는 한번(안식일에 곡식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안식일에 병고치는 문제이다.|①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곡식 이삭을 따서 먹는 사건(마 12:1-마 12:8; 막 2:23-막 2:26; 눅 6:1-눅 6:5). 바리새인들에 의하면 이러한 것은 율법을 어기는 행동이다. 마태복음의 기록에는 그 이유가 제자들이 배가 고팠다라고 되어 있다. 마가복음에는 이것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 답은 그것을 가정하고 있는 듯 하다. 예수님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의 경우에서와 같이(삼상 21:1-삼상 21:6; 참조: 삼하 8:17; 신 23:25)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의식(儀式)적인 율법, 즉 이 경우에 있어서는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예외로 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참조: 출 23:12; 신 5:4).|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며 안식일을 적용할 때와 초월해야 할 때를 결정하신다(막 2:28). 마 12:1이하에는 희생 제사가 안식일 법에 우선한다는 점, 그리고 성전보다 더 큰이가 예수님 안에 있으며, 그의 자비, 사랑의 법(호 6:6)으로 훨씬 더 절박한 명령이 부과된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② 안식일에 예수님이 손마른 사람을 고친 사건(마 12:9 - 마 12:14; 막 3:1 - 막 3:6; 눅 6:6 - 눅 6:11). 이 경우에서는 그를 고쳐주기 전에 예수님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율법적인가를 유대 지도자들에게 물었다.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은 토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율법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 구원, 사람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 율법의 배후에 있는 중대한 목적이므로 병을 고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 예수님은 손마른 사람을 치유해줌으로서 자기의 주권을 나타내셨다.|③ 안식일에 예수님이 귀신들려 몸이 굽은 여인을 고친 사건(눅 13:10 - 눅 13:17). 예수님은 회당에 있었던 그 여자를 고쳐주셨다. 이것은 회당장의 분노를 유발시켰다. 회당장은 일할 6일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대답은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예수님이 했던 행동은 그들이 동물들에게는 허용했을지도 모르는 그런 자비의 행동이었다. 이것은 또한 사탄의 일을 파괴하는 것이기도 했다. 안식의 날에 대한 원칙에 관하여 질문 했을 것이라는 암시는 없지만 단지 그 날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 질문 했을 것이라는 암시는 있다.|④ 안식일에 예수님이 고창병을 고친 사건과 관련된 문제(눅 14:1-눅 14:6). 이 경우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를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함으로써 예수님이 다시 논쟁을 벌인 경우이다. 이번에는 그들이 대답하지 못했다. 이것은 율법(노미쿠스)에 정통했던 그들에게 던진 질문으로서 특별히 중요한 사건이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쳐 주고난 후 병자를 고치는 것은 사실상 우물에 빠진 짐승 한 마리를 건져주는 것과 꼭 같은 자비의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그 전문가들이 대답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에 저촉되지 않았음을 그들이 인정했다는 것을 암시한다.|⑤ 안식일에 예수님이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한 사람을 고치신 사건과 관련된 문제(요 5:1 - 요 5:9, 요 5:16, 요 5:17; 요 7:22). 이 치유 사건으로 인해 논쟁이 이어진다. 치유된 자가 침상을 가지고 가는 것은 금지 규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이런 일을 행한다고 비난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안식일에도 일하셨음을 지적하면서, 아버지께 권세를 받은 자신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일하신다고 대답하셨다. 달리 말하자면 그가 계속해서 병을 고치는 것은 아버지가 항상 하고 있었던 일인 것이다. 그 후에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는데 이는 그가 안식일을 어겼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기 때문이다.|따라서 결정적인 논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초월적 권세를 지닌 분으로 인정을 받느냐에 있다. 이 논쟁은 요 7:19이하에서도 계속된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할례를 행한 것을 논의에 넣으신다. 또 다시 궁극적 논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의 하나님으로서의 권세를 나타내준다(요 7:16-요 7:17). 인간의 필요에 응하여 이 권세는 안식일에도 발휘 행사한다.|그리고 다시 요 7:17에서 "이제까지"(헤오스 아르티)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안식일 계명이 유효했던 동안 내내 사실상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음을 시사한다. 달리 말하자면 안식일 계명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아르기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그리스도가 병든 자를 고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었다.|⑥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고친 사건과 관련된 문제(요 9:1이하).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침으로만 아니라 흙에 침을 뱉아 반죽함으로서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를 죄인으로 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사역을 반대 입장에서 본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요 9:5).따라서 그와 만나는 사람은 누구가 진짜 눈먼 자이고, 누가 진짜 볼 수 있는 자인지에 대해 결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볼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는 자에게, 이와 같이 시력을 주시는데서 하나님의 역사는 분명하게 나타난다.|⑦ 눅 4:16에서 안식일에 예수님은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참석하여 성경을 읽으셨다. 이 표현이 나타내는 자연 그대로의 의미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드리는 통상적인 유대 예배 관습에 따랐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의 어린 시절의 양식이었을 것이다(눅 2:22, 눅 2:41).|⑧ 마 24:20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신다.|이것은 그를 따르는 자들이 안식일을 계속 지킬 것이라고 그리스도가 예견했음을 의미한 것이라고 할 필요는 없으며, 단순히 안식일에 위급한 경우를 만났을 때는 예루살렘 부근에 필요한 것을 사러 가거나 도움을 청하러 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안식일을 지킬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유대인들까지도 생각하신 것이다.|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짐승도 부리지도 않으며, 여행도 이천 규빗 이내로 제한했었다. 도피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렇게 짧은 거리를 도망쳐 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한편 도망하는 일이 이 나라가 안식일에 대한 하나의 가상된 신성모독 때문에 미친 듯 날뛰는 광식적 유대인들로 가득할 때 '안식일에'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c) 사도행전.|행 15:21에서 예루살렘 종교회의 법령에서 안식일에 관해 언급한다: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클라크(Adam Clarke)는 이 구절의 의미를 회심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출석해서 율법을 들을 수 있다는 것으로 시사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편지하는 것은 필요치 아니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기본적인 지시가 필요했다(R.Earle).|바울은 그의 전도 여행 때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할 기회를 얻었는데 이것이 그의 관습이었다(행 13:5, 행 13:14, 행 13:44; 행 14:1; 행 16:13; 행 17:2, 행 17:17; 행 18:4; 행 19:8).|한편 행 20:7에 보면, 바울은 드고아에서 7일 동안 머물면서도 주간의 첫날에 그리스도인들과 만난 것을 볼 수 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여기에서 삽바톤은 '주간'을 의미하며, 따라서 첫날은 '주일'이다.|고전 16:2에서도 삽바톤은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d) 서신들.|서신들 중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고전 16:2과 골 2:16에서만 삽바톤이 나타난다.|골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여기서 유대인의 율법(율법의 요구)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폐지되었으므로(골 2:14) 유대인의 음식에 관한 규칙이나 종교력(曆)이 그리스도인들을 구속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이러한 의식에 있다. 바울이 주장한대로 이러한 준수 사항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영적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e) 교회에서 안식일. 그리스도는 주간의 첫날(막 16:2; 마 28:1), 즉 그리스도교 예배의 날(행 20:7; 고전 16:2; 참조: 계 1:10)에 부활하셨다.||(f) 로르도르프(W.Rordorf)는 주후 321년에 콘스탄틴 법령이 공포되면서 기독교의 일요일을 휴식의 날, 즉 이상적인 안식일로 간주했다고 말하였다. 그 때까지는 그들이 첫 날을 안식의 날로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예배 드리는 날로 사용해 왔다는 것이다. 이교도 황제가 유대인의 안식일이 아닌 날, 이전에는 한번도 실행된 적이 없었던 안식의 날을 제정했다는 있을 법하지 않은 제안은 별 문제로 하고도 콘스탄틴 이전의 교부 문헌에 이런 견해에 대한 반증이 있다.|(참조: J.H.Thayer; W.Stott; E.Lohse).
사게네
saghvnh
큰 그물, 예인망.||#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사게네(Plut., Mor.)는 삿소(%603: 싣다, 채우다)에서 유래했으며, '큰 어망, 예인망'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사게네는 신약성경에서 마 13:47에 한 번 '큰 예인망'을 나타낸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사두개인
Saddoukai'o"
사두개인 Sadducee||삿두카이오스/ 사두개인은 '사두개파의 일원'이다. 사두개인들은 1세기 이전과 1세기 동안 팔레스타인 유대교 안에 있었던 한 종파를 가리킨다. 통례적으로 이 용어는 사독(히브리어 차도크, 70인역본 삿둑)이라는 고유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한다. 사독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으며 다윗왕과 다윗 가문에 특별한 충성심을 보여 주었다(삼하 15:24 이하; 왕상 1:32 이하). 따라서 이 제사장의 후손들(겔 40:46; 겔 43:19; 겔 44:15; 겔 48:11)과 그들의 모든 추종자들이 사두개인들로 불리운 듯하다.|사두개인들은 태생과 부와 공적 지위에 있어서 특출하였고 헤롯가와 로마인들의 호의를 싫어지 않았으며, 일반 백성을 미워하고, 바리새인들의 적대자들이었다. 전통을 거부하면서 구약의 권위를 믿음과 윤리와 관련된 문제에서만 인정했다. 그들은 몸의 부활을 부정하고(마 22:23; 막 12:18; 눅 20:27; 행 23:8) 영혼의 불멸과 미래의 보응은 물론, 천사들과 영들의 존재도 부인했다(행 23:8). 그들은 하나님의 예정 교리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유를 주장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세속주의자들이었다. 이러한 동기들이 사두개인들로 하여금 예수님과 유대교회에 반대하게 했다. 예수님의 설교와 행위는 그들에게 하나의 위협이 되었다. 세례(침례) 요한은 여기서, 예수님은 마 16:1-16에서 그들을 책망하였다. 사두개인들은 주후 약 70년경 로마에 의해 제 2 유대국가가 파괴되자 사두개인의 세력도 사라졌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Julius Scott).
사독
Sadwvk
사독 Zadok(인)||#1. 구약성경.||사독은 히브리어 차도크의 음역이며, 히브리어의 의미는 '바른, 의로운'이다. 아히마아스(삼하 18:19-23)와 여루사(왕하 15:32 이하)의 아버지이며,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으로 처음에 아비아달과 동등한 지위에 있었다(삼하 15:24-29; 삼하 15:35; 삼하 17:15; 삼하 19:11; 삼하 20:25). 압살롬이 반역하였을 때 두 제사장은 예루살렘에서 언약궤를 지켰으며(삼하 15:24-29; 삼하 15:35), 왕에게 호의적인 선전을 펴도록 다윗에게 명령받았다(삼하 19:11).|압살롬이 죽은 후 왕위를 둘러싼 다툼에서 아비아달은 아도니야와 연합했으며(왕상 1:7) 사독은 솔로몬을 지지했다(왕상 1:8).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을 때 사독이 충성스럽게 섬김으로(왕상 1:32-39; 왕상 1:45) 그는 대제사장이 되었다(왕상 2:35).||역대기 기자는 열왕기서의 역사적 기록에 기초하면서도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에게 호의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사독을 화려한 전쟁 용사로 묘사한다(대상 12:28). 엘르아살에서 시작되어 내려오는 사독의 족보(대상 6:4-15; 대상 50-52)는 사독의 후손이 아론의 후손 가운데서 더 연장자의 가지에 속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포로에서 귀환 후 사독의 "자손들"은 수적으로 우세했을 뿐만 아니라 성전에서 가장 상위 직분을 맡았다(대상 24:2 이하; 대상 27:17; 대상 29:22). 에스겔은 사독의 후손들을 유일한 합법적인 제사장들로 간주하였다(겔 40:46; 겔 43:19; 겔 44:15; 겔 48:11).||#2. 신약성경.||사독은 신약성경에서 한번 마 1:14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예수님의 조상 중 한 사람으로 나온다: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BD).
사이노
saivnw
꼬리를 흔들다, 동요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사이노(Homer 이래)는 기본 동사이며,||(a) '꼬리를 흔들다', 개에 대해(Homer 등),|(b) 비유적으로 '아첨하다, 알랑거리다, 비위를 맞추다'(Aeschyl., Pind., Soph. 등),|(c) 비유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다, 동요시키다, 교란하다, 괴롭히다, 어지럽히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사이노는 신약성경에서 살전 3:3에 한번 나온다: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여기서 사이노는 '동요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베옷
savkko"
거친 삼베나 베옷 sackcloth.||#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삭코스(Hdt., Aristoph. 이래)는 본래의 '마대, 자루' sack이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a) '모직천' hair-cloth, 즉 주로 염소털로(낙타털로도) 만든 거친 천을 의미했다. 이런 천으로 천막, 돛, 카페트 등이 만들어졌다.|(c) '마대, 자루' sack(Hdt., Aristoph.).|(c) '카페트' capet(Eus., Thdrt.).|(d) '체, 조리' strainer, sieve(P. Hamb.).|(e) '삼베옷'.|(f) 큰 '수염'(Aristoph.) 등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삭코스는 70인역본에서 약 60회 이상 나오며, 오직 히브리어 사크(마대, 자루, 삼베옷)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마대, 자루'(창 42:25, 27, 35; 수 9:4), '카페트'(에 4:3; 삼하 21:10)를 나타낸다. 그리고 삭코스는 '베옷'을 나타내는데, 개인적 애곡(창 37:34)이나 민족적인 애곡(삼하 3:31) 때에 굵은 베를 띠었다. 회개시에 굵은 베옷을 입었고(왕하 19:1; 왕상 20:31 이하), 개인적인 위기(시 30:11), 민족의 수난시(에 4:1-2), 임박한 종말론적 파괴의 때(욜 1:3; 암 8:10; 겔 7:18)에 입었다.|이 옷을 입는 것은 느 9:1 등에서 하나의 의식이었으며, 이 옷을 순전히 형식적으로만 사용하는 사람들은 선지자들의 심판을 받았다(사 58:5). 여기에는 종종 금식이 수반되었다(시 35:13).||#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삭코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a) 계 6:12에서 삭코스는 흑암의 일의 실례로 나타난다: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인간성의 한 특성인 난폭함과 단순함을 제쳐두고라도, 검은 색은 삭코스의 기본 특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해 따위의 종말론적 어두움은 삼베옷을 입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계 6:12에서 해가 어두워지는 것은 여섯째 인을 뗀 후 "진노의 큰 날"이 이를 때 동반되는 사건들 중의 하나이다. 공관복음의 계시에서 이 사건은 인자의 파루시아 바로 앞에 일어난다고 하였다(막 13:24 이하).||(b) 마 11:2(=눅 10:13)에서 삭코스는 참회의 옷으로 나타난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삭코스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갈릴리의 성읍들에게 하신 그의 말씀에서 회개와 뉘우침의 표시를 가리킨다. 누가는 문자적으로는 거의 의미가 동일한 말씀에서 스포도("재")에 카데메노이("앉아")를 추가하였는데, 이는 분명히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때, 마태와 약간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태에게 삭코스는 옷이고, 재는 머리에 얹는 것이지만, 누가는 슬픔의 몸짓으로 앉아 있는 것을 나타내므로 삭코스는 참회의 멍석이고 스포도스는 회개자가 앉는 자리이다. 이 두 사상에 따르면 삭코스와 스포도스는 수치와 비통의 외적 표시이며, 따라서 내적 메타노이아(회개)의 외적 표시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러한 표시들이 자기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은 베옷과 같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회심(conversion)이다.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께서 아마도 마음에 두신 것은 요 3:4의 니느웨 사람들의 메타노이아에 대한 묘사일 것이다. 동일한 이미지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관련 어구에서 간략히 나타난다(마 12:41; 눅 11:32). 두 경우에 이방인들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과 대조된다.||(c) 계 11:3에서 삭코스는 선지자의 옷으로 나타난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갑자기 등장하는 "나의 두 증인"은 마치 앞에서 언급되기나 한 것처럼 선지자로 묘사되어 있다: "굵은 베옷을 입고 ... 예언하리라". 계 11:10에서 그들은 이제 분명하게 "두 선지자"라고 불리운다. 이 묘사는 일반적으로 모세(계 11:6 하반절)와 엘리야(계 11:5-6상반절)에 근거한다. 그들이 입은 삭코이는, 비록 왕하 1:8에서는 털옷이라기보다 가죽옷이긴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엘리야의 선지자로서의 옷을 암시한다. 이 구절은 선지자의 옷으로서의 삭코스의 중요한 실례이다. 애도나 참회의 의상을 묘사할 때 아마도 고풍스런 스타일의 의복이 채택된 것처럼, 따라서 여기서도 선지자의 임무와 그들의 "직업상의 의복"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가정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특히 계 11:3에서 증인의 삭코이는 심판을 전파하고 경고하는 그들의 임무를 암시하는 것 같다. 그것은 세례(침례) 요한이 입은 옷(막 1:6 병행구)이 그의 회개의 설교에 수반한 비유적 행동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참조: G. Stahlin).
살라
Salav
살라 Sala(인)||#1. 구약성경.||살라는 히브리어 셸라흐(던지는 무기)에서 유래했으며, 구약 인물 '살라'를 가리키며, '셀라'로도 표기되었다.|살라는 셈 계열인 아르박삿의 아들이며, 에벨의 아버지이다(창 10:24; 창 11:12-15).||#2. 신약성경.||살라는 신약성경에서 한번 눅 3:35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예수님의 한 조상으로 나온다: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스알디엘
Salaqihvl
스알디엘 Shealtiel(인)||#1. 구약성경.||살라디엘은 히브리어 셰알 티엘(하나님은 보호자이시다)의 헬라어 표기이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스알디엘로 표기했다.|스알디엘은 유다왕 여호야긴(또는 여고냐)의 장자(대상 3:17)이다. 그는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1차로 귀환한 이스라엘 자손의 지도자이자 바사왕 다리오 1세 치하의 유다 땅의 총독인 스룹바벨의 아버지이다(스 3:2; 느 12:1).||#2. 신약성경.||스알디엘은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예수님의 한 조상으로 나타난다.|·마 1: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눅 3:27,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P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