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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육신에 속하여
sarkikov"
육신의 방식으로, 육의 영역에 속한, 육(체)의.||#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사르키코스(Aristot. 이래)는 사르크스($4561)에서 유래했으며, `사르크스(육)에 속한, 육신의 방식으로, 육의 영역에 속한, 육적인 육(체)의'를 의미한다.|사르키코스는 70인역본에 나오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사르키코스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a) 롬 15:27에서 사르키코스는 중립적인 의미에서 육적인 것들, 곧 외적인 것들을 가리킨다: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전9:11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b) 고전 3:3에서 사르키코스는 `육의 영역에 속한'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후 10:4에서도 사르키코스는 마찬가지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신적 권능과 구별되는 육적인 권능을 의미한다.|고후 1:12에서 사르키코스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벧전 2:11에서도 사르키코스는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여기서 영혼과 육의 욕정 사이의 갈등에 관한 요구를 보여준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 Schweizer).
육의
savrkino"
살로 된, 육의.||#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사르기노스(Arstph., Plat., Aristot. 등)는 사르크스($4561)에서 유래했으며,||(a) `살로된, 육(肉)의, 육적인'을 의미하며,|(b) 가상적인 것과 구별되는 `실제적인'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c) 또한 `부패하기 쉬운'이란 어감을 지닌다.||#2. 70인역본의 용법||사르키노스는 70인역본에서 5회 나오며, 히브리어 바살의 역어로 사용되어 `육의' 즉 감각할 수 있는(겔 11:19; 겔 36:26), `육신의'(대하 32:8)이란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사르키노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바울서신과 히브리서에만 나온다.||(a) 고후 3:3에서 사르키노스는 `육의' 심비를 묘사한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여기서 육의 심비는 외적인 법률적 완성과 구별되는 내적 본질을 가리킨다.||(b) 그러나 히 7:16에서 `육의 계명'을 묘사한다: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여기서 이 용어는 지상적인 영역을 가리킨다.||(c) 롬 7:14에서 바울은 사르키노스를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상태를 묘사한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d) 고전 3:1에서 사르키노스는 `육적'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이 말은 `그들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에 있어서 여전히 육적이어서 참으로 신령한 사람과 같이 만사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다'는 의미를 나타낸다(Lenski). 또 다른 학자는 육신적이란 말은 인간으로서는 해결할 방도가 없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다 높은 성령의 법에 순복되어져야 하며, 또한 그 법에 의해서 부요하게 되고 향상되어져야 할 하나의 상태라고 해석하였다(Robertso; Plummer).|(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 Schweizer).
골육
savrx
살, 육체 flesh.||#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사르크스(Homer 이래)는 인간이나 동물의 '살'을 의미하며, 더욱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물고기나 작은 동물, 또는 과일의 '살'(과육)을 의미한다.|몸(소마)은 뼈, 피, 근육, 살, 피부(Plato, Phaedr., 98c. d)로 구성되어 있거나, 머리, 살, 뻐(Symp., 207d)로 구성되어 있다.|사르크스는 몸 전체, 특히 젊든 늙었든 죽었든 간에 육체적인 몸이라는 의미까지 확장되었다. 그래서 복수 사르케스는 시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덧없음은 사르크스의 특별한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다. 활력(프쉬케: 영혼)과 욕망(뒤모스)이 사라질 때, 살과 뼈는 소멸하고 만다(Od., 11, 219-222). 신이 인간과 동물과 다른 점은 사르크스를 가지고 있지 않은, 누스($3563: 마음, 정신)와 에피스테메(%1064: 통찰력)와 로고스($3056: 말, 이성)라는 점이다(Epict., Diss., 118, 2).||#2. 70인역본의 용법.||사르크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00회 나오며 대부분 히브리어 바살(육, 살, 인간, 혈육, 남자의 성기)의 역사로 사용되었다. 사르크스는 소의 고기(창 41:2), 식용 고기(시 78:27), 인간의 '살'(미 3:2 이하), 육체(사 40:6; 사 40:8; 잠 5:11), 골육(창 29:14), 혈육(사 66:23; 창 6:17 이하; 창 9:11 등), 양피로 된 살(창 17:11 이하; 렘 12:3), 몸(겔 23:20; 겔 44:7; 겔 44:9) 등을 표현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사르크스는 신약성경에서 147회 나오며, 그 중 바울 서신에 91회 사용되었다. 사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공관복음서에서의 사르크스.|구약성경에서 인용한 막 10:8; 병행구 눅 3:6과 막 13:20과 병행구를 제외하면 오직 3회 나온다.|(1)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여기에서 "혈육"은 제한성(limitation)을 지닌 인간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반대어이다. "혈육"은 인간의 도덕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을 가리킨다.|"혈육"은 인간의 부분들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적, 종교적, 신비적 능력을 포함한다. 그 반대는 하나님이시다.||(2) 막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여기서 사르크스("육신")는 프뉴마("마음")와 대조 및 반대이다. 그러나 이 "육신"의 반대는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3) 눅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여기서 "살과 뼈"는 지상 인간의 실체를 의미한다. 여기서 대조는 육체적 세계와 비육체적 세계의 대조이다. "살과 뼈"는 비육체적 영에 대조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재적 육체임을 가리킨다.||(b) 사도행전에서의 사르크스|구약성경에서 인용한 행 2:17과 행 2:26을 제외하면 행 2:31에 오직 한번 언급되었는데, 행 2:26의 인용구로부터 예수님의 사르크스의 썩지 않음을 언급한다. 그러나 행 2:27의 프쉬케($5590)는 여기서 다시 언급되지 않고 그 대신 "그"를 나타내는 3인칭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이원론을 피한다.||(c) 바울 서신에서의 사르크스.|(1) 사르크스는 몸(Body)을 의미한다.|① 사르크스는 고후 12:7에서 육체에 가시라는 표현에서와 같이 단순히 몸의 근육 부분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바울은 "살과 뼈"라는 표현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② 사르크스는 인간의 전체적인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고전 15:39). 따라서 여기서 사르크스는 몸의 근육 부분을 가리키지 않는다.|③ 갈 4:13에서 아스데네이아 테스 사르크스는 육체의 약함, 곧 병인 것 같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갈 4:14에서 사르크스 무는 바울의 병든 몸을 가리킨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④ 그렇지만 롬 6:19에서 동일한 표현은 인식의 약함을 나타낸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⑤ 고후 7:5에 따르면 사르크스에는 내적 근심도 포함된다. 여기서 외적 고생이 일차적일지라도 그러하다.|⑥ 고전 7:28에서도 유사하게 사르크스는 육적 고난과 영적 고난에 노출되어 있는 전 인간(全人間)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⑦ 고후 7:1에 더 나은 "영과 육"이라는 문구는 인간의 더 나은 부분과 더 못한 부분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둘 다 불결이나 오염에 위협을 받고 있으며 둘 다 정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⑧ 고후 4:11에서 "죽을 육체"는 바울의 지상적 존재를 의미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⑨ 고후 10:3; 갈 2:20; 빌 1:22; 빌 1:24에서 사르크스도 지상 생활을 의미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지 아니하는 가능성을 가진다. 우리는 믿음으로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생활이다.||(2) 사르크스는 지상적 영역을 의미한다.|① 롬 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 1:3-4에서 바울은 사르크스의 영역을 하늘이나 프뉴마의 영역과 대조시키고 있다. 이 사르크스의 영역은 여기서 하나님께 적대적이고 죄 많은 것이 아니라 단지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세대의 자연적 연속이며, 이 영역 안에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메시야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성결의 영(롬 1:4)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됨을 천명하고 있다.|② 롬 11:14에서 단수는 지상적 민족적 이스라엘의 전체를 의미한다: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기서 사르크스는 세속적 관계를 의미하며, 인간의 영역을 의미하며,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구원을 위한 결정적인 영역이 아니다. 롬 4:1; 롬 9:5; 롬 9:8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갈 4:23; 갈 4:29에서 "약속으로 말미암아"라는 문구는 "육체를 따라"와 병행되지 않는다: "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그래서 롬 9:8에서 속격은 자녀가 속하는 영역을 가리킨다.|고전 10:18에서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은 지상적 민족이다.|③ 고전 1:26에서 육신에 따른 지혜는 이 세상의 인간의 범주에 따른 지혜를 의미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포함한다. 교회에는 이런 부류의 지혜자들이 있지만 많지는 않다.|④ 고전 1:24-26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사르크스의 지혜와 대조되며(참조: 고후 1:12), 고후 10:4에서 하나님의 힘은 사르크스의 무기와 대조된다.|⑤ 몬 1:16에서 사르크스와 퀴리오스가 결합된다. 오네시모는 빌레몬과 보다 중요한 그리스도교적 관계를 가질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도 가지고 있다.||(3) 살과 피, 모든 육체.|① 갈 1:16에서 "혈육"은 마 16:17에서처럼 인간 그 자체, 곧 신학적 통찰력, 종교적 경험, 교회의 전통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계시자이신 하나님의 반대어이다.|② 고전 15:50에서 이 문구의 요지는 우리의 부분들 중에서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없는 부분과 받을 수 있는 부분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 그 자체가 변화되지 않고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쉽게 부패할 뿐만 아니라 쉽게 유혹에 빠진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갈 5:19 이하에서 육체의 일에 관해 언급하며, 이와 같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③ "모든 육체"라는 표현은 시 142:2에서 인용한 롬 3:20; 갈 2:16과 고전 1:29에 나온다. 이 세 구절에서 "모든 육체"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며,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없는 인류를 의미한다.||(4) 사르크스를 신뢰의 대상으로 삼는 것.|① 롬 2:28에서 바울은 몸의 지체의 할례를 마음의 할례와 대조시키고 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여기서 사르크스는 사람들이 사르크스를 보고 그것에 대해 자랑할 수 있기 때문에 부정적인 면을 지닌다(참조: 롬 2:23; 롬 2:27; 롬 2:29).|② 갈 6:13에서 거짓 교사들이 자랑하는 "너희 육체"는 할례의 육체이다. 갈 6:12에서 엔 사르크스는 '사람 앞에' 즉 '세속적 고려(considerations)에서'를 의미할 수 있다.|그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교회 안에서 기독교인의 할례를 받음으로써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갈 6:13).그러나 무할례자들과 마찬가지로 할례자들도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③ 빌 3:3; 빌 3:4에서 사르크스는 매우 중요하며, 첫째로 이스라엘의 자연적 혈통을 의미하지만 바리새주의, 율법, 법적 의를 위한 열심도 의미하며 그래서 특별히 인간의 지적 종교적 역할을 의미한다.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으나, 그것들을 신뢰하는 것이 잘못이다. 따라서 여기서 사르크스의 정반대는 크리스토스 이에수스(그리스도 예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 난 의의 계시는 다른 모든 것을 제미아("해")로 만든다(빌 3:7-9). 그것들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삶의 기초로서 신뢰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 이 새로운 신뢰조차도 하나님의 행동이다. 육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대신 육을 믿을 때만 나쁜 것이다.||(5) 죄의 주체로서 사르크스.|① 사르크스는 성령이 행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일하는 능력이 아니다(빌 3:3; 롬 8:13 이하; 갈 4:23; 갈 5:18 이하). 사르크스는 성령의 역사에 관한 기사의 배경이 아닌 곳에서 행위의 주체로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성령은 사르크스가 있거나 없이도 지배적인 주체로 가끔 나타난다. 사르크스에 의지하거나 그것을 믿는 것은 죄짓는 것이다. 성령의 경우에 힘의 효능은 규범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이 사르크스의 경우에는 역으로 규범의 사르크스는 힘의 사르크스가 된다. 이렇게 해서 사르크스의 일이 있게 된다(갈 5:16; 갈 5:19; 롬 13:14).|② 그렇지만 율법 준수는 그 자체 사르크스의 표현이다(갈 3:3; 갈 4:8 이하).|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성령의 새롭게 하며 변화시키는 임재를 그들의 삶 속에서 경험했다. 어떻게 그들이 이제 율법의 행위에서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육체로 마친다(갈 3:3)는 것은 할례를 암시한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할례를 그리스도인 됨의 불가결한 절정('완성')으로 시행했던 것이다.|갈 4:8 이하에 의하면 유대의 율법 교사의 요구를 따르는 것은 이방의 미신으로 회귀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유대 절기의 규정들은 갈 4:9-10에서 이방의 점성 미신의 행불행 사상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었다.|③ 바울에게 있어서 사르크스는 인간적이며 지상적이며, 그것은 법적 의(righteousness)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사르크스를 신뢰하여, 그것에 의해 안녕과 명성을 얻도록 유혹하는 이상 사르크스는 성령의 역사에 반대되는 성격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갈 5:13; 갈 5:17). 따라서 사르크스에 예속은 운명이 아니라 죄이다. 육에 맞춰 사는 삶은 육을 섬기는 것이며, 육적인 사고를 지닌다. 사르크스의 반대어는 아들의 형상을 취하시어 죄많은 육의 형태로, 즉 완전한 인간으로 오시어 육체 속에 있는 죄를 정죄하신 하나님이시다.|④ 롬 7:18; 롬 7:25에서 사르크스와 누스($3563)의 분열이 암시되어 있는 것 같으나 이 묘사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해야 하는 것이 날카롭게 대립되는 그리스도인 이전의 생활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누스는 일시적이나 완전히 사르크스를 다스리거나 제지할 수 있는 힘이 없다. 반대로 중요한 관찰자이다. 신자가 아는 것은 분열을 회고하는 것이다. 이 말의 요점은 단순히 그리스도인 이전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에게 반대되는 행위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바울은 처음에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원하지만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실제적인 죄, 즉 자신의 의를 세우는 죄를 범하는 바리새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인간의 정당한 욕망도 즉시 자신의 육적 행위로 빠져든다. 따라서 순결한 의지의 순간들과 나쁜 행위의 순간들 사이를 구별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이러한 육체의 행위는 심사숙고한 후에야 비로소 사르크스를 반대하는 의지와 구별될 수 있다.||(6) 사르크스의 정복.|롬 7:5; 롬 8:8 이하; 갈 5:24에 보면 신자들은 벌써 사르크스에 살지 않는다. 신자는 사르크스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 메시지는 바울의 새롭고 전형적인 메시지이다. 그들은 금욕주의 등으로 육체적 존재라는 사실을 피하지 않는다(참조: 갈 2:19-20).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삶으로 들어간다(갈 2:20). 육의 일들은 비논리적이며 재위임을 필요로 한다. 삶은 단일한 행동들로 쪼개어지지 않는다. 삶은 하나의 결정, 즉 사르크스냐 프뉴마냐 라는 질문에 의한 하나의 에르곤(일, 행위)이다. 신자들은 더 이상 사르크스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스도에 의존한다. 이것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믿음의 생활을 실행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7) 동사와 함께 사용된 카타 사르카타("육체대로", 육체를 따라).|① 고후 10:2 이하에서 언급하는 것은 특히 분명하다. 엔 사르키 페리파테인("육체에 있어 행하다")은 아주 단순하게 '한 사람의 육체로, 지상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바울에게도 적용된다. 단 한가지 잘못된 것은 사르크스에 대한 생각의 방향(orientation), 즉 더 이상 중립적으로 사르크스로 살지 않고 그 규범(norm)으로 생각하는 삶이다: 육체를 따라 행하거나 싸우는 것. 바울이 이것으로써 나타내는 바는 고후 11:18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삶은 "육체를 따라 자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보이는 것과 사람들과 관계하는 것 만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 반대는 "주를 따라" 말하는 것이며(고후 11:17), 그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께서 용납하시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유사하게 고후 1:17에서 "육체를 좇아 경영하는 것"은 인간과 지상의 상황만을 주목하고 하나님의 뜻에는 주의하지 않는 계획이다.|② 동일한 것이 훨씬 더 논란이 되는 구절인 고후 5:16에 적용된다. 카타 사르카는 명사 크리스토스가 아니라 동사 기노스케인과 어울린다. 본문에서 바울은 "외모로"(엔 프로소포), 즉 표면적으로 보이는 자질과 아무라도 주장할 수 있는 자질을 자랑하는 자들에 대하여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고후 5:12). 바울 자신은 이제 이런 식으로 아무도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고후 5:16은 이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보여준다. 기노스케인 카타 사르카는 인간의 기준으로, 즉 다른 사람 가운데 한 명의 인물로 간주되는 역사상의 예수님에 대해 알려진 것으로써 예수님을 판단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나타낸다.|③ 마지막으로 갈 4:23; 갈 4:29에서 게난 카타 사르카는 약속과는 관련이 없고 다만 인간적인 기능만으로 발생한 자손(세대)이다. 만약 이것이 바울에게 두 개의 디아데카이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바울의 사상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르크스를 따르는 삶이냐 주님과 그의 약속과 성령을 따르는 삶이냐 하는 결정은 분명히 단지 순간의 단 한번의 결정인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의 기초라는 것이다. 이것은 롬 8:4; 롬 8:12 이하에서도 나타나는데, 여기서 새로운 삶은 페리파테인 혹은 젠 카타 사르카의 포기로 묘사된다. 관용문구 타 테스 사르코스 프호로네인이 롬 8:5에서 사용될 때 이것은 그 의미가 지상의 차원에서 삶의 의식적인 영적 방향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개인적 결정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은 모든 삶의 기본적인 방향에서 야기한다. 생각은 에이나이 카타 사르카를 벗어나 발전한다.||(8) 골로새서에서 사르크스.|① 사르크스는 외부의 눈에 보이는 육체에 대해 중립적으로 사용된다(골 2:1; 골 2:5).|② 골 3:22에서 명사와 함께 쓰인 카타 사르카("육신의")는 인간 관계의 영역을 나타낸다.|난해한 골 1:24에서 이 단어는 고통을 당할 때의 사도의 육체적 존재를 가리킨다. 고후 4:11에서처럼 여기서 말하는 바는 바울이 육신으로는 당할 수 밖에 없는 고난을 통하여 복음을 당당하게 증거하고, 따라서 구원의 역사를 이룬다는 것이다(참조: 고후 5:19 이하).|③ 골 2:23에서 사르크스는 의미가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을 나타낸다.|④ 골 2:13에서 동격이 되는 사람은 유대인이라기보다 이방인이다. 그의 죄는 할례를 의지하는 것이라기보다 방탕함에서 드러난다(골 3:5). 그러므로 우선 매우 단순하게, 육체에 있어서 유대인과 구별되는 이방인에 대해 사용되는 아르코뷔스티아 테스 사르코스는 골 2:11의 할례를 아직 경험하지 않은 자들을 나타내는 용어가 된다. 따라서 사르크스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본성을 묘사하긴 하지만 헬라 용법에서 유래하는 특별한 뉘앙스를 지닌다.|⑤ 한 가지 새로운 표현은 소마 테스 사르크스이다. 골 1:22에서 이 표현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육체에 대해 사용되며, 그러므로 사르크스는 단순히 물리적인 육체이다. 그러나 골 2:18에서는 누스 테스 사르크스("육체의 마음")라고 언급되어 있으며, 골 2:11은 믿음에 이른 사람은 그리스도의 할례로 "육적 몸"을 벗어 버려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골 2:13과 동일한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 바울의 용법이 반영되긴 하나 수정되며, 그밖의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다.||(9) 에베소서의 사르크스.|① 사르크스의 용법은 에베소서에서 훨씬 더 단순하다. 엡 5:31에서 우리는 고전 6:16에서와 동일한 인용을 본다. 이리하여 엡 5:29에서는 아내를 사르크스(=소마, 엡 5:28)로 묘사한다.|② 엡 5:32에 전제되어 있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이러한 개념의 사용은 독특한 것이다. 엡 2:14은 지상의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육체를 언급한다.|③ 엡 2:11에서 육체의 할례에 관한 일반적인 진술의 영향은 단지 언어학상으로 그러할 뿐이다. 왜냐하면 페리토메("할례")는 에드네("이방인")에 상당하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엔 사르키("육체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이 임시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종교가 속하는 지상의 인간 세상 안에서만 효력을 가지지만, 예수님의 공동체의 일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할례자에 대한 언급 역시 없다. 동일한 것이 레고메노("칭하는")를 부가함으로써 표현된다. 만일 우리가 엡 2:2에서 엡 2:3에 병행하는 개념을 주목한다면, 어떻게 사르크스가 점차적으로 개인의 귀신적(demonic) 특성을 취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방인 중에서 이 세상의 시대나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유대인들 중에서 사르크스였다. 사람을 사르크스와 디아노이아이(마음)로 구분하는 것은 놀랍다. 그러나 디아노이아(민 15:39[70인역본])는 사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썩어질 것이라는 사실에서 구약성경의 영향이 보인다.|④ 엡 6:12은 독특하다. 실질적으로 본문은 비육체적인 영의 영역을 육신의 영역으로부터 구별하는 후기 유대교 사상과 부합한다.||(10) 목회서신의 사르크스.|목회서신에서 사르크스는 딤전 3:16에 한번 나온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이 구절은 롬 8:3; 골 1:22; 엡 2:14을 반영하는 한편 그리스도께서 즉 지상의 영역에 육신으로 나타나심이 구원 사건 자체라고 언급함으로써 그밖의 다른 모든 구절들과 매우 다르다. 본문의 전제로서 천체에 대한 헬라의 개념을 고려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존재로서, 그가 인간 세상으로 들어오심이 이미 하나의 기적인 것으로 고려된다. 특징적으로 이 개념은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d) 히브리서의 사르크스|히브리서에서 사르크스는 요일 4:2에서처럼 예수님의 지상의 존재를 의미한다.|(1) 히 5:7에서 "그의 육체의 날"(한글개역, "그는 육체에 계실 때", 히 5:7)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하늘의 존재로 간주되며, 그의 지상의 삶은 단지 잠시동안이었음을 보여준다.||(2) 비슷하게 히 2:14에서 "혈육"(하이마 카이 사르크스)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외양으로 취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유대인의 전통은 이 개념이 지적 기능을 포함하는 인간의 본성 전체를 포괄하는 정도까지 해당한다.|그러나 유대의 표현에서 배제되지 않는 "실제상의" 특성이 지금 훨씬 더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여기서 하늘의 존재가 혈과 육을 취했다고 언급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사망에 예속하고, 따라서 구속을 필요로 하는 그는 천사들과 구별된다(참조: 히 2:16).||(3) 관련된 구절 히 12:9에서 "우리 육체의 아버지"는 "영의 아버지"와 구별된다. 이것은 영은 인간의 혼이라는 인류학적 이원론과 상관이 없다. 이 말씀은 오히려 히브리서에 매우 독특하게 존재하는 두 개의 영역 사고의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영의 아버지는 위의 세계가 복종하는 전능자이시고, 반면에 육의 영역에 속하는 아버지들은 지상의 아버지들이다.||(4) 히 9:10에서 "육체의 예법"은 거의 언제나 육체와 관련된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된다. 이것은 히 9:13 이하에 의해 지지된다.||(5) 히 9:13 이하에서 육체의 정결은 쉬네이데시스("양심")의 정결과 대조된다. 여기서 정결은 분명히 제의적 정결을 말한다. 초대 기독교에서 한 역할을 하는(마 9:13; 마 12:7), 호 6:6; 삼상 15:22의 선지자의 말이 여기서도 영향력을 끼친다. 그러나 이 외적 정결은 또한 일반적인 지상의 영역의 한 표시이다. 양심의 정결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의 성직자에게서만 발견된다. 그 성전은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것이다(히 9:11). 그렇다면 우리는 히 9:10에서 "육체"는 "지상의 영역의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지를 질문할 수 있다. 어쨌든 그 외적 측면은 인간 자신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내적 측면과 대조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에게 판단 받을 때의 인간과 대조된다. 그러므로 유일한 하늘의 대제사장은 이 내적 정결을 소유하신다.||(6) 히 10:20에서 예수님의 사르크스는 그가 그 가운데로 새롭고 산 길을 만들어 놓으신 휘장이라고 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님의 사르크스는 십자가형인가? 그러나 소마가 이 의미에서 사르크스 대신 사용된다는 사실은 별개로 하고, 우리는 디아($1223)를 우선은 장소적으로, 그 다음으로는 구격으로 취하여, 휘장을 하나의 방해물이라기보다 오히려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르크스를 예수님의 인성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취한다면 마지막 두 주장이 그대로 적절할 것이다. 그렇다면 희생제사에서 피를 바치려면, 혹은 예수님께서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됨을 얻으려면 휘장이 찢겨져야 했듯이 예수님의 육체가 파괴되어야 했다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르크스는 하늘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만나는 장소이지만, 하늘의 세계가 그렇게 감추이고 따라서 예수님의 사르크스가 하늘에 접근할 길을 감추기도 하고 열기도 하는가?|또한 그럴듯한 해석은 하늘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사르크스를 지나서(혹은 의해서) 신자를 인도하되, 이러한 방법으로 신자는 그것을 통하여 하늘의 대제사장에게로 간다. 이 하늘의 대제사장은 지상적인 모든 것의 저편에서 하나님과 함께 신자를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시는 것이다.||(7) 이 모든 구절들에서 사르크스는 하나님의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지상의 영역을 나타낸다. 그러나 죄의 사상은 결코 연관되어 있지 않다. 새 언약에 대하여 제의적 율법이 그러하듯이 하늘의 영역에 대해 지상의 영역은 부적절하고 일시적인 영역이며, 사망의 위협을 받으나 하나님에 대항하여 결코 반역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이 단어의 역사(history)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바울 이상으로 발전하며, 롬 1:3 이하와 요한에서 가장 분명한 표현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e) 공동 서신의 사르크스.|(1) 약 5:3에서 너의 "살"(사르카스)이라는 복수가 사용된 것은 살점(살의 조각)과 같은 육체의 살부분을 의미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참조: 계 17:16; 계 19:18; 계 19:21). 녹은 화농균처럼 악처럼 먹어 들어간다(A. T. Robertson).||(2) 베드로전서에서 사르크스의 용법은 거의 다 이미 언급된 것의 범주 내에 속한다.|① 벧전 1:24에서 파사 사르크스("모든 육체")라는 표현은 사 40:6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육체 곧 인간의 힘은 풀과 꽃처럼 덧없는 것이다.|② 벧전 3:18과 벧전 4:6은 두 영역의 사상을 포함한다. 벧전 4:1 이하에서 사르키("육체의")는 단순히 땅 위에서 사는 삶의 시간을 나타낸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것은 이중 부가어 파데인(고난 받는 것)인데, 그 이유는 지상의 고난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선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나타나므로, 벧전 3:18과 비슷한 형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핍박 중에서 육체의 고난을 언급하는 것으로서 의도적으로 벧전 4:1a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역시 지상의 영역과 하늘의 영역의 대조가 나타난다.|③ 벧전 3:21에서 히브리서에서처럼 외적 측면으로서의 사르크스를 쉬네이데시스($4893: 양심)와 구별하는 용법을 발견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3) 유다서에서 사르크스는|① 유 1:7에서 "이상한 육체"(한글 "다른 색")와의 간음은 롯을 방문한 천사들에 대한 소돔인들의 음욕을 가리킨다. 따라서 사르크스는 인간과 천사들의 다른 "육체"이다. 이것은 성적 욕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성적 욕망은 그 자체로는 악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왜곡될 때만이 악한 것이다. 본문은 벧후 2:10에서 채택되지만 에테라("다른")는 빠져버리고 엔 에피뒤미아 미아스무("더러운 정욕")가 부가된다. 베드로후서는 육체적 정욕 자체를 죄악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리하여 육체에 대한 금욕적 멸시를 향한 결정적인 발판을 제공하게 된다.|헬레니즘적 캐치 워드(표어)인 에피뒤미아이 사르코스("육체의 정욕")는 유 1:16의 단순한 에피뒤미아("정욕")를 대신하여 벧후 2:18에서도 도입된다.||② 유 1:6과 유 1:26은 둘 다 매우 모호하다. 두 곳에서 모두 사르크스는 (비자연적인 성적?) 죄로 더럽혀진, 실제적인 외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나타낸다. 심지어 그가 입은 겉옷까지도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그 견해가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지적 중심이든 영적 중심이든 간에 이 더럽혀짐에 의해 영향 받지 않는다는 사상은 없다. 그러나 이 진술은 너무나 간략하여 어떠한 확실한 해석도 허락지 않는다.||(f) 요한의 기록에서 사르크스.|(1) 요한복음.|요한복음에서 사르크스의 용법은 바울의 용법과 매우 다르다. 사르크스가 요한복음에서 상대적으로 드물게 사용된 점에서도 나타난다(13회).|① 요 17:2에 나오는 파사 사르크스는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한가지 새로운 점은 천부께서 인자에게 모든 육을 다스릴 권세를 주신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② 요 8:15에서 예수님은 대적자들에게 비난하여 "너희는 육체(덴 사르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고 하였다. 사르카에 관사가 있으므로 이것을 단순히 바울의 용법을 따라 해석해서는 안된다. 요 8:14에 따르면 그러한 판단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의 무지(blindnes)의 표시이다. 동일한 대조가 요 7:27에도 언급되어 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는지를 그들이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앞에 다음과 같은 경고가 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요 7:24). 요 6:42을 보면 이 언급이 예수님께서 청중이 잘 아는 부모에게서 태어났음을 말해주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사르크스는 예수님의 인격에 관하여 외적으로 보이는 것과 특히 그의 혈통을 나타낸다. 이것은 하나의 잘못된 판단을 가리키지만, 함축성 있는 바울의 의미에서는 아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과 관련해서만이 잘못된 것이다. 혈통과 태생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옳은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에 관한한, 이러한 말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르크스는 지상의 것들을 판단할 때 아주 적절한 지상의 영역이지만, 다른 영역에서 오신 예수님을 판단하고자 할 때는 전혀 부적절한 것이다. 죄악된 것이라든가 죄로 유혹하는 것의 뉘앙스는 전혀 없다.|③ 요 3:6에 사르크스는 인류에 대해 말하며, 인류에서 태어난 모든 것이 사르크스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 단어는 그것이 사용된 대조적 병행구절로부터 그 내용을 획득한다. 사르크스 곁에 나란히 놓인 것은 프뉴마이다. 사르크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며 그러므로 그러한 지식을 전달할 수 없는 인간의 지상의 영역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는 그것이 죄 가운데 서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 15:22-24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비로소 우주(cosmos)는 죄가 된다고 분명히 선언한다. 물론 사르크스로서의 존재 상태에서 세상은 파멸로 예정된 상태에서 구원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찾지 못한다. 지상의 더 낮은 영역으로서 사르크스는 그 정도까지 그것 안에서 단순히 살아가는 자를 결정하며, 따라서 그것은 거의 하나의 능력의 특성을 취하는데, 특히 그것은 또한 임신과 출생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사르크스를 통해서가 아니라 불신앙을 통해서만이 그 죄악된 특성을 얻으며, 죄로 가득하게 된다.|그것은 불신앙을 결정한 후에는 결코 사르크스로 불리지 않는다.|요 1:13에서 사르크스는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과 구별되는 자연적 출생의 원리이다. 의지는 사르크스에 속하므로 사르크스는 하이마타보다는 아네르에 병행한다. 따라서 그것은 해부학상으로 특정한 몸의 일부분이 아니라 구원을 소유하지 않은, 하나님에게 맞서 서있는 자로서의 인간 전체를 포괄한다.|④ 요 1:14에서 사르크스 에게네토("육신이 되어")는 로고스가 지상의 죄를 친히 지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단순히 계시가 일어난 장소를 가리키는 지리학적 의미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계시가 인간의 형태를 취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 자기 계시는 옷과 같이 인간의 형태를 거저 입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형태와 동일하게 되어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 아버지의 독사(영광)를 볼 수 있게 하였으니, 그것도 기적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분명하게,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순종으로 그렇게 하였다. 따라서 성육신의 신학적 토대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비난하는 세상과의 우주적 투쟁에서 신앙이 신적 그노시스의 단순한 부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인격의 완전한 헌신을 포함하는 마르튀레인(증거)에 의해서만 창조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⑤ 요 6:63의 대조는 요 3:6의 대조일 수 있지만 요 6:51-58을 비추어 볼 때 요 8:15의 대조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요 6:63은 요 8:15의 비슷한 논쟁에서 말한 것과 정확히 똑같은 것을 말한다.|그렇다면 요 6:63은 다음을 의미한다.-예수님의 사르크스, 즉 예수님의 외적인 모습을 고려하는 자는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 자신이 천부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예수님의 전도만이 프뉴마(영)요 조에(생명)이다.|본 절은 성만찬에서 먹은 사르크스를 '불멸의 약'으로 잘못 이해하는 성례전주의자를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하이마("피")와 결합된 6겹의 사르크스는 성찬식과 관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자가 예수님의 사르크스를 먹을 때, 그것은 인자가 육체로 오심이 오직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육(즉 세상) 안에는 도움이 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동시에 신자는 이에 의해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 선물로 살아갈 것임을 고백한다.||(2) 요한 서신들.|① 요일 4:2; 요이 1:7에서 "육체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구분점이다. 예수님이 육으로 오신 것은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구별하는데 이용된다. 참 신앙을 가진 자는 예수님의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도 시인한다. 요한의 반대자들은 결코 계시자(Revealer)와 그들이 거절한 육신을 더 이상 연관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고백 여하에 따라 하나님의 영인지 아닌지를 시험할 수 있다(요일 4:2; 참조: 요이 1:7).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단순히 내면적이거나 심리학적인 실재가 결코 아니었다. 말씀과 행위는 하나가 되어 상호 해석해주며, 하나님은 육체적 결과까지도 포함한 행위로만 비싼 대가를 치르시면서 역사의 무대에 개입하셨다. 따라서, 요한 이외의 다른 신약 성경 기자들은 그리스도가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거나(벧전 4:1)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는 점을 강조한다(딤전 3:16; 참조: 눅 24:39; 롬 8:3; 엡 2:15; 히 5:7).|② 요일 2:16에서 "육신의 정욕"이라는 표현을 본다. 여기서 병행어구는 "안목의 정욕"이다. 여기서 세상을 믿지 말라는 경고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보다 강한 경고이며, 이 세상에는 육적 욕망이 포함되어 있다. 병행어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사르크스는 욕망을 자극하는 감각 기관으로 여겨진다.|(참조: E. Schweizer; A. C. Thiselton; H. Seebass).
사루크
Sarouvc
스룩 Serug(인)||#1. 구약성경.||사루크, 히브리어 셰록(히브리어 사릭과 같은 의미, 포도나무순)에서 유래했으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스룩"으로 표기했다.|스룩은 르우가 32세에 낳은 아들로서 셈족의 후손이다. 스룩은 나홀의 아버지이자 아브라함의 증조부였다(창 11:20, 23; 대상 1:26).||#2. 신약성경.||사루크 곧 스룩은 신약성경에서 한번 눅 3:35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예수님의 조상 중 한 사람으로 나온다: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PEB).
소제 되다
sarovw
쓸다, 청소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사로오(Artem., Apollon)는 사이로(%605: 쓸다)에서 유래했으며, '청소하다, 쓸다, 쓸어 깨끗하게 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사로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사이로는 눅 15:8에서 '쓸다'를 의미한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b) 사이로는 마 12:44에서 '청소하다'를 의미한다: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병행구 눅 11:25).|(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사라
SavrjrJa
사라 Sarah(인)||#1. 구약성경.||살라/ 사라는 히브리어 사라에서 유래했으며, '왕비, 여지배자'를 의미한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 누이로서(창 20:12) 아브라함의 아내가 되었으며, 이삭의 어머니이다(창 21:2; 창 21:3; 창 21:1-8).|본래 그의 이름은 사래였으나 사라로 변경되었다(창 12:5). 사라는 아브라함과 함께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갔고(창 11:31), 그 후 가나안으로 갔다(창 12:5). 사라는 아브라함과 함께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갔다가(창 12:10) 이방의 통치자 바로에게 빼앗길뻔 했으며(창 12:16-20; 창 20:1-17), 여종 하갈과의 갈등 및 적대를 겪었고, 비로소 이삭의 모친이 되었다.|이 과정을 거쳐 창 12:1-3의 약속은 점차 성취되어 갔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라는 아브라함과 함께 이스라엘을 만들어낸 반석으로 인정되었다(사 51:2).||#2. 신약성경.||사라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온다(롬 4:19; 롬 9:9; 히 11:11; 벧전 9:6).||(a) 사라는 바울의 논증에 두가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① 첫째로, 바울의 칭의 신학에서 사라의 불임은 아브라함을 의인한 믿음을 논증하는 문맥에 나온다(롬 4:19).|② 둘째로 이스마엘에 맞선 약속의 후사로서 이삭의 잉태는 하나님의 선택하는 목적에 자유하는 구원의 증거로 인용된다(롬 9:9; 참조: 갈 4:21-31의 논증).||(b) 히브리서와 베드로전서의 저자들은 사라를 믿음과(히 11:11) 순종의(벧전 3:9) 모범으로 다룬다. 히 11:11은 분명히 사라의 믿음을 보이지 않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불가능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믿음으로 확증한다.|벧전 3:6에서 사라의 남편에 대한 순종적인 태도는 기독교인 아내들이 따라야할 모범으로 제시된다. 사라를 이상적인 아내로 보는 경향이 후기 유대교에서 보기 드문 것은 아니었다.|(참조: P. J. Budd; TB).
사론
Savrwn
사론 Sharon(지)||#1. 구약성경.||사론은 히브리어 샤론의 음역이며, 히브리어 샤론은 '평야'를 의미한다.||(a) 사론은 팔레스틴의 해안평야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오늘날의 욥바 근처로부터 북쪽으로 하이파 바로 남쪽 갈멜산 지취까지 약 50마일 가량 펼쳐있다. 그 폭은 6마일에서 12마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동쪽으로는 사마리아 고지대 변두리까지 미친다. 사론 평야는 솔로몬의 통일 왕국의 분열 후 이스라엘 왕국에 속해 있었다. 사론의 비옥함은 성경 시대에 이름나 있었다. 아마도 수선화(학명 Narcissus tazetta) 혹은 가을 크로커스(학명 Colchicum autumnale)인 사론의 장미는 아가서(아 2:1)에 언급된다. 사론의 '탁월함'은 메시야적 소망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사 35:2, "사론의 아름다움"). 구약 시대에 참나무 숲이 사론의 북쪽 지역에 무성하였으나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나무가 없는 목초지로 변해버렸다. 넓은 계곡들이 내륙으로부터 사론까지 그 물을 인용할 만큼 접근해 있어서 물이 풍부했으며, 사실 고대에는 습지가 평야 곳곳에 많이 있었다. 곡식들을 수확한 후 사론에는 양 떼들이 풀을 뜯었다. 다윗 통치기에 사론 사람 시드래가 그곳에서 먹이는 왕의 가축 떼들을 돌보았다(대상 27:29). 봄에는 만발한 꽃들이 사론 평야를 카펫처럼 수놓았으며 정원같이 만들었다. 오늘날 사론 평야에는 많은 유대인 정착민들이 경영하는 광할한 감귤류 과수원과 농장이 있다.||(b) 성경에서 언급되는 사론 평야에 있는 마을로 욥바, 룻다, 돌, 가리사라, 안디바드리, 락곤(Rakkon)이 있다. 사론 평야의 위와 아래 해안 도로와 수마일에 이르는 모래 해변은 이집트, 아라비아,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중동의 각지로 왕래하는 대상들이 지나 다녔다. 종교적·문화적 영향력의 물결이 사론을 거쳐 팔레스틴의 각 지방으로 계속하여 흘러 들어갔다.||(c) 사론 평야는 팔레스틴에서 사람이 거주한 가장 오래된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 대학의 E.L. 수케닉은 1934년 Khudheirah 근처에서 동굴 매장지를 하나 발견했는데, W.F. 울브라이트는 그 연대를 가술리안 시대(Ghassulian), 즉 B.C. 4세기 상반 경으로 산정한다. 이 동굴에서 도기와 진흙 상자들(납골단지)이 함께 발견되었으며, 동굴 형태는 이랑이 진 지붕과 문이 달려 있고 (마치 습지대에서처럼) 말뚝 위에 세운 작은 집처럼 생겼다.||#2. 신약성경.||사론은 신약성경에서 행 9:35에 한번 나온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BD).
사단
Sata'n
사탄||사타나스($4567)를 보라.
사타나스
Satana'"
사탄 Satan, 대적자 adversary.||#1. 구약성경의 용법.||명사 사타나스는 히브리어 사탄(7854)의 음역이며, '악한 상대, 적, 대항자, 대적자, 사단'을 의미한다. 70인역본에는 사타나스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으며, 사탄($4566)만 3회 나온다(왕상 11:14; 왕상 11:25; 왕상 11:23).|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사탄(7854)을 디아볼로스(고발자, 참소자, 비방자)로 번역했다. 여기서 정관사가 붙어서 '그 사탄'이다. 이것은 그가 천상과 지상에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하나님의 대적이기 때문이다.|사탄은 원래 '아침의 아들 계명성(참조: 사 14:12), 기름부음을 받은 덮은(하나님의 보좌를 보호하는) 그룹(참조: 겔 28:13-18)'으로 불리워진, 하나님의 천사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과 필적하고자한 교만으로 말미암아 정죄되었고(딤전 3:4; 사 14:12-15) 사탄이 되었다.|사탄은 아담의 타락 배후에서 유혹한 자이다(창 3:1 이하; 창 3:15; 롬 16:20). 사탄의 타락이 이 유혹과 동시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짙다(참조: 창 1:31에 보면 피조물의 완전성이 아직 손상되지 않았다). 사탄의 타락의 때가 언제이든 그 때 이래 그는 그의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여 왔다(요일 3:8).|그러나 그의 지위 상실에도 불구하고 사탄 곧 마귀는 여전히 계속하여 지상에 실력을 행사하고 핫사탄(고소자, 욥 1:9; 욥 2:4; 슥 3:1)로서, 또는 '한 영'으로서(왕상 22:19-22) 신전 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하여 비평가들은 핫사탄의 개념을 '기소 대리인, 검찰관'의 역할에 제한시켰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구약성경 전체의 증언은 하나님을 향한 사탄의 변함없는 적대 행위와 인간을 향한 적의를 분명히 보여준다(욥 1:11; 욥 2:3-5).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죽음 및 부활, 승천과 더불어 하늘로부터 추방 당했으며, 더 이상 형제들을 참소할 수 없게 되었다(요 12:31; 계 12:10). 그러나 그는 여전히「지상」의 '공중에 권세 잡은 자'로서 역사한다(엡 2:2).|사탄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원수이다. 사탄은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방해하고, 또 방해하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제한 당하며, 단지 허락받은 일만 행할 수 있다(눅 22:31; 눅 22:32; 딤전 1:19; 딤전 1:20; 딤후 2:23-26). 이 사탄은 유혹하여 넘어뜨릴 사람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니며(벧전 5:8; 벧전 5:9),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미워하도록 한다. 그는 거짓말과 속임수를 써서 그러한 일을 한다(참조: 창 3:1-6). 신앙심 깊고 크게 복받은 의인 욥은 사탄이 찾던 바로 그 목표물이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탄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도 역시 미워한다. 사탄은 그의 죄로 인하여 최후 심판을 받고 불못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계 20:10).||#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사타나스는 신약성경에서 3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1. 고소자와 그의 타락.||신약성경에서 사단에 관한 기록의 특징은 사단이 하늘로부터 타락한 동기에 대한 특별한 용법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사단이 하나님 앞에 고소자로 나선다는 친숙한 구약성경의 개념을 그대로 따르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새롭다. 눅 22:31의 상항은 욥기의 서두의 상황과 유사하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제자들을 청구하였다. 까부르는 목적은 각 제자들의 마지못해 하는 마음을 드러내어 사단이 그들을 고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고소는 예수님의 개입으로 반대에 부딪힌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교에서 천사들, 특히 미가엘의 역할을 스스로 담당하신다. 계 12:7-12는 이와 관련이 있는데, 여기서 미가엘은 큰 뱀 사단과 싸운다. 이곳에서 언급하는 것은 사단이 하늘에서 최종적으로 떨어져 이제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지 못한다는 것이다(계 12:10). 이 하늘에서 사단의 떨어짐과 그 시점, 즉 예수님의 오심과의 결합(계 12:5)은 신약성경을 유대교로부터 분리시킨다. 눅 10:18에서 이 결합을 찾아볼 수 있다(누가복음에만 독특하게 나타남):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여기서 에데오룬("보았노라")은 확실히 선재시에 본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최후 심판에서 있을 사건을 미리 보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하늘에서 사단이 떨어지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고소할 가능성의 종말을 나타낸다. 그러나 문맥은 일반적인 사단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할지라도 고소하는 능력의 전체적인 중지와 함께 또한 예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사단의 해하는 능력 또한 상실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에데오룬이 가리키는 구체적인 시점에 대해 알 수가 없다. 만일 눅 22:31이하에서 사단이 아직도 하나님께 참소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면 이것은 눅 10:18에 대하여 지금까지 이해한 내용과 상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명은 유일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는 서신들과 혹자들이 그의 저작으로 간주하지 않는 다른 서신들 어느 곳에서도 이 고소자가 떨어졌다는 이미지를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그러나 블레데세타이 카토는 의심할 여지없이 부차적이긴 하지만 요 12:31을 고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난 자리는 심판의 자리, 즉 하늘일 수 있다. 요 16:11의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에서 그에 대한 심판은 그렇게 분명치 않으므로 이 세상이 심판을 확신하지 않는다. 마귀의 떨어짐이나 그에 대한 심판에 관하여 말하는 이 모든 구절들에서 '이미'는 '아직'과 결합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사단에 관한 신약성경말씀의 특징적인 면이다. 우주창조 이전 루시퍼의 타락의 신화적인 개념은 시간 속에서 사단의 타락의 사상과 접합될 수 없으며, 쿰란의 기본원리, 하나님이 창조하신 두 영들에 관한 교리 또한 포기된다. 유다서는 그 문헌적 출처를 알 수 없는, 마귀에 관한 한 설화를 이용한다.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신약성경이 사단의 최초의 타락과 그 관련 동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을 완전히 별도로 하고도 요한의 기록도 이에 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요일 3:8에서 엔 아르케 디아볼로스 헤마르텐이 아니라 아프 아르케스 하마르타네이이다. 똑같은 아프 아르케스가 요 8:44에도 나온다. 이미 바울의 문헌에서 그랬듯이 계 12:9에서 에덴동산의 뱀이 사단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바울은 뱀/사단이 하와를 성적으로 유혹했다고 하는 유대교의 사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 8:44에서 마귀를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하였을 때 이것은 뱀과 마귀가 동일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후대의 랍비들은 사단을 죽음의 천사 혹은 악한 충동과 동일시 했는데,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이러한 면을 찾아볼 수 없다. 히 2:14은 뱀과 사단의 동일시에 가장 근접하지만 동일시 하지는 않는다. 바울과 요한계시록 둘 다 사망과 사단을 분명히 구별한다. 고전 15:26; 계 20:10, 계 20:14.|||2. 공관복음에서 사단에 관한 말씀들||어원학적 자료. 마가복음(막 1:13; 막 2:23, 막 2:26; 막 4:15; 막 8:33)과 눅 10:19을 제외하고(호 엑스드로스 "원수") 누가복음에 고유한 자료들(눅 10:18; 눅 13:16; 눅 22장)은 오로지 호 사타나스를 사용하며(막 3:23; 눅 22:3만이 관사가 없고, 마 4:10; 막 8:33 = 마 16:23에서는 호격임), 호 사타나스는 아람어 사타나에서 유래한다. 마 4:10을 제외하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호 사타나스는 오직 바알세불과 관련하여서만 나온다. 시험기사에서 마태복음(마 4:3의 호 페이라존과 마 4:10의 사타나는 제외)과 누가복음은 호 디아볼로스를 사용하며, 그 밖의 곳에서는 마 13:39; 마 25:41에서만 발견된다. 마태복음도 역시 호 엑스드로스와 호 ㅍ네로스를 아주 흔하게 사용한다. 막 4:15의 호 사타나스 대신에 마 13:19은 호 포네로스를, 눅 8:12은 호 디아볼로스를 사용한다.|공관복음 기자들에게 전수된 초기 기독교 전승에는 사단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지만, 신약성경에서 사단에 대한 견해를 더듬어 보고 기본적인 윤곽을 그려보기에는 충분하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신 것은 소극적인 행동 그 이상이다. 그것은 보다 더 강한 자임을 증명하는 승리이다. 시험기사를 전수해 준 자는 마귀를 예수님의 삶과 고난의 길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막으려 하고 그 손에 이 세상의 권세를 가진 하나의 의식적 의지로 간주했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서 사단은 우선적으로 "대적자"라는 의미에서의 총칭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다(막 8:33 병행구 마 16:23). 하지만 전승은 거의 대적자를 나타내는 용어일 때를 제외하고 아람어를 보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면 다른 모든 종류의 난제들이 제기된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견지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사단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사단은 인간적인 견지에서보다 사단의 견지에서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적인 것은 하나님에게 매우 적대적일 때 사단의 것이라 불리울 수 있으며,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길에 배치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의 시험에서 상황이 여기서 잠시 다시금 보여진다.|공관복음 기자들은 수난기사에서 오직 이 점에서, 그리고 눅 22:3(병행구 없음)의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에서 사단을 언급한다. 그런데 특히 겟세마네와 관련되지 않는다. 공관복음 기자들이 예수님의 삶과 수난을 사단과의 싸움으로 거의 묘사하지 않는다는 것, 혹은 그들이 사단을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개는 놀랄만하다. 어쨌든 예수님을 시험에 빠뜨리기 위해 주어진 질문들의 배후에 악한 자(the evil one)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기사가 예수님의 삶에 던지는 빛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삶과 고난 전체는 하나님께는 "예"이며, 따라서 당연히 시험하는 자에게는 "아니오"이다. 일찍이 공관복음 기자들은 사단과의 투쟁을 언급한다. 즉 바알세불이 언급된 막 3:22이하와 그 병행구에서이다. 초기 기독 공동체는 이 기사로써 온전하게 갖추어진 중요한 말씀을 전수해 준다. 귀신들에 관한 유대교의 널리 유포된 모호성 대신에 우리는 먼저 하나의 우두머리 사단 아래 있는 악의 나라의 모호하지 않은 단일성에 주목한다. 게다가 귀신들린 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지에 결단하도록 요청받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그들의 개인적인 삶에서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세력에서 해방된 자들이다. 그들은 특별한 종류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한데, 그들의 병은 악한 자(the evil one)의 권세의 소행이다. 귀신들렸다는 특징들을 가지지 않는 병도 역시 사단에게 기인할 수 있다(눅 13:16).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병이 당연히 사단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또 자연적인 질병과 사단에 의한 질병 사이에 대조적 혹은 분명한 구별이 시도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살인한 자"는 질병의 현상 배후에 몰래 숨어있다. 따라서 행 10:38의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는 예수님의 모든 치유 사건을 마귀의 축출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바알세불과 관련된 기사에서 세 번째 기본적인 진술은 강한 자와 더 강한 자에 관한 비유, 즉 막 3:27과 병행구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정당화하는 것이며, 예수님 자신의 삶 가운데 일어난 한 에피소드를 암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강한 자를 결박한 일은 예수님의 시험에서 일어났다고 여겨진다. 이 가정은 십자가와 부활이 시험 가운데 원래부터 존재했다고 인식할 때 올바르다. 이와 같이 분리할 수 없는 상호 관계에서 만이 우리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단의 무장 해제는 단지 능력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권리의 문제이다. 강한 자를 결박하는 것과 하늘에서 고소자가 떨어지는 것은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 막 3:27과 눅 10:17이하는 서로를 설명해 준다. 두 가지 더 중요한 진술들이 비유들의 해석에서 전해져 내려온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어떤 씨앗이 길가에 떨어지는 사실이 그 운명을 결정한다(막 4:4). 그 해석에서 길가에 떨어지는 것은 오로지 마태복음에서 마 13:19에서만 발견되는 메 쉬니엔토스(깨닫지 못하는 자)에 해당한다. 여기서 해석은 그 비유를 알레고리화하지 않는다. 복수형 "새들"은 마귀의 행위와 관련 있는 언급이며, 그러므로 또한 핍박과 관련한 악한자의 활동이나 부의 기만성을 생각할 수 있다. 사단의 소행은 막 4:15과 눅 8:12에서만 언급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이해범위를 넘어서는 초자연적 요소이다. 마태복음의 메 쉬니엔토스에서 인간의 이전의 범죄를, 사단의 일에서 그 결과를 찾는 것은 이 비유와 어울리지 않으며, 또 사단의 일에서 복음 전도자들의 전망을, 마 23:37에서 예수님 자신의 의미를 찾는 것도 이 비유와 어울리지 않는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을 숙명론적인 진술처럼 들리는 것들과 병행시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회피 되어서는 안된다. 만약 밀과 가라지 비유에서 공동체의 혼합된 상태가 마귀에게서 기인한다면(마 13:28, 마 13:29), 이것은 설명이 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심지어 더 큰 수수께끼이다. 공동체 속에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씨를 뿌릴 때 그는 준 기독교인들을 뿌리지 않았으나 악의 아들들이 공동체 속에 있다. 순수한 공동체의 이상에 대한 거부가 교회의 훈육의 요구에 의해 마태복음에서 나타난다. 분명히 둘은 함께 속하며 서로를 그릇된 이해에서 보호해 준다. 공관복음서에서 보존하고 있는 전승들은 충분히 발달된 사단론을 제시하지는 않으나 초기 공동체가 악한 자의 일에 관하여 간직하여 전수 할 만큼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간주한 것을 보여준다. 마귀의 존재, 기원이나 일을 설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QS 3:13- 4:26의 해결책도 채택되지 않는다. 여기 어떠한 노력으로도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악의 능력은 특정 대상을 향하여 행사하는 단일한 능력으로 간주된다. 이 대상은 모든 측면에서의 인간의 파멸이다. 특히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주권을 가져오시는 자이신 나사렛 예수와 벌이는 전쟁이 있다. 비록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았지만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의 길을 통하여 마귀가 헛되이 무너뜨리려 하나 예수님은 악한 자의 능력을 깨뜨리셨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쿰란 공동체의 선지적 의의 교사들과 다르다. 유대교의 사상 세계는 공관복음 기자들에게서 분명히 보여지며, 또한 근본적으로 초월된다.||3. 서신들에서 사단.||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를 포함하여 오래된 서신들에서 호 디아볼로스를 결코 사용하지 않고 대개 호 사타나스를 사용한다. 롬 16:20; 고전 5:5; 고전 7:5; 고후 2:11; 고후 11:14; 고후 12:7; 살전 2:18; 살후 2:9(관사없이 고후 12:7); 그 밖에 다음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호 페이라존, 살전 3:5; 호 포네로스, 살후 3:3; 벨리아르, 고후 6:15. 또한 호 사타나스는 딤전 1:20; 딤전 5:15에서, 호 디아볼로스는 엡 4:27; 엡 6:11, 딤전 3:6, 딤전 3:7; 딤후 2:26; 호 포네로스는 엡 6:16에서 나온다. 다른 용어들이 고후 4:4; 엡 2:2에서 사용된다. 사도행전에서는 행 5:3; 행 26:18에서 호 사타나스가, 행 10:38; 행 13:10에서 (호) 디아볼로스가 사용된다. 공동서신에서는 디아볼로스만이 나온다, 약 4:7; 히 2:14; 벧전 5:8; 유 1:9. 요한계시록에서는 요 2:9, 요 2:13, 요 2:24; 요 3:9; 요 20:7에 호 사타나스, 요 2:10; 요 12:12; 요 20:10에 호 디아볼로스가 사용된다. 요 12:9; 요 20:2에서는 강조되어 둘이 함께 나온다. 호 카테고르가 요 12:10에서 나오며, 비유적으로 쓰인 호 호피스와 호 드라콘도 발견된다.|신약성경의 서신들에서 마귀는 공동체에 대한 그의 공격과 관련하여 두드러지게 언급된다. 이 공격은 먼저 핍박 가운데서 발생한다. 계 2:10; 계 12:17; 계 13:7; 벧전 5:8; 계 2:9; 계 3:9이 유대교 공동체를 사단의 회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적극적인 적대 때문이다. 그러나 마귀는 특별히 시험으로 공동체를 공격한다. 살전 1-3장은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할까" 염려하여 기록된 것이다. 즉 공동체가 성에서 성으로 쫓겨 다닌 사도의 운명에 의해 의욕을 잃을까 염려해서였다. 고전 7:5에서 사단에게 시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아크라시아(절제 못함)이다. 바울은 고후 2:11에서 사단의 노에마타(궤계)를 언급한다. 여기서 사단은 속이려 하는 자이다. 엡 6:11에서는 마귀의 메도데이아이(궤계)에 대해 말한다. 딤전 3:7은 마귀의 올무를 언급하며 딤후 2:26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특히 자유주의적 사상에서 사단의 위험스럽고 그릇된 일을 본다. 자유주의 사상의 투사들은 그리스도의 사도인체 한다. 그리고 사단이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때 그 모습은 사단이 얼마나 위험스러운지를 보여준다, 고후 11:14. 초대 교인들에게 줄곧 존재했던 동일한 위험도 또한 사단과 관련된다, 계 16:20. 사단의 유혹하는 활동은 적그리스도의 활동에서 절정에 이른다, 살후 2:3-12; 계 13:17; 참조: 계 3:10.|시험은 어린양의 피로(계 12:11),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음으로(엡 6:11), 즉 믿음으로(엡 6:16), 혹은 자주 시험이 올 수 있는 상황을 피함으로써(고전 7:5; 딤전 3:6이하; 딤전 5:14이하; 참조: 엡 4:27; 롬 16:17) 물리친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롬 16:20)는 로마 교회에 한 바울의 요구이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실 것이나, 공동체를 통하여 그리하실 것이다.|사단은 또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공동체를 대적하려 시도한다. 사단은 바울이 데살로니가로 가고자 하는 꼭 필요한 여행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살전 2:18), 사단의 사자가 바울에게 타격을 가했다(고후 12:7).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나 동역자들의 모든 불행을 마귀와 연관시키지 않으며(빌 2:25-30), 또한 방해 받은 모든 여행을 사단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는다(롬 1:13 엘콜루덴). 다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울 사도가 결코 어떤 합리적 방식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단의 방해를 상호 관련시키려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마찬가지로 사단의 방해도 그의 사역 가운데서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고전 5:5과 딤전 1:20에 언급된 사단의 일이다. 후기 유대교는 사단과 죽음의 천사를 동일시했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사단과 그의 무리가 사람에게 해를 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고 생각하였다.|후기 유대교에서는 멸망의 사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한다고 한다. 그러나 고전 5:5에서 사단 자신이 집행하는 판결은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후기 유대교에서는 이 대담한 사상을 감히 소유하지 못했다. 바울은 어둠의 시간이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존재했기 때문에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사단의 사자, 즉 육체의 가시는 바울이 스스로를 높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바울에게 "주어진" 것이다(고후 12:7).|공동체에 대항한 사단의 싸움이 아닌 공동체 밖에서의 사단의 일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공동체 밖의 세계에서 그는 공동체의 증인이 그것에 저항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확실한 경향을 취한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에게 주시는 임무는 이방인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행 26:18. 이교 신앙의 마술은 특별히 악한 자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참조: 행 13:10; "마귀의 자식이요").|마귀의 최종적인 멸망에 관한 유일한 직접적인 언급은 마 25:41과 계 20:10에 나온다. 당연히 바울에게 전제되어 있을 것이지만, 고전 15:24-26에서 바울이 모든 아르케와 엑수시아의 종말과 또한 사망의 종말에 대해 말하지만 사단 혹은 죄의 종말에 대해서는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4. 요한의 복음서와 요한 서신에서 이 세상의 왕.||요한의 기록에서는 네 가지 용어가 마귀를 나타낸다.||(a) 디아볼로스는 고유명칭이 아니고 특성을 지적해주는 참된 칭호다(7회);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은 서로 대립된다. 요일 3:10.||(b) 사타나스는 요 13:27에서 가룟유다에 관한 결정적인 언급에서 단 한번 나타난다: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c) 호 포네로스는 중성 토 포네론과 항상 확실하게 구별되지는 않으며, 요한복음에서는 요 17:15에서만 나오고, 요한일서에서 6회 나온다.||(d) 호 아르콘 투 코스무 투투("이 세상 임금")는 요 12:31; 요 14:30; 요 16:11에서 사단을 뜻하는 결정적인(final) 이름이다.|마귀에 관한 결정적인 요점은 요 8:44에 있다. 마귀와 인간의 관계는 아비와 자식의 관계와 같다(참조: 요일 3:10). 즉 마귀는 인간의 전 존재를 결정 짓는다. 이리하여 우리는 또한 요일 3:12에서 에크 티노스 에이나이(아비의 이미지 없이 사용됨)를 발견한다. 본질적으로 랍비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랍비들에게 인간의 의지는 인간의 종교적 관계를 고정한다. 이렇게 사단에 의해 인간 본성이 결정되는 특별한 형태가 요 6:7에 나온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이것은 막 8:33의 베드로에게 언급한 사단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또한 사단이 유다에게 들어갔다고 하는 요 13:27과 이와 병행되는 눅 22:3도 사단에 의해 인간 본성이 결정되는 것을 나타낸다. 이들 중 어느 말씀도 후기 유대교에서 유사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후기 유대교에서 마귀나 벨리알은 그들의 영들 가운데 하나일 뿐 인간에게 들어가지 않는다. 요 8:44에서는 마귀에 관하여 세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그가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는 말씀은 타락을 상기시켜준다. 그 다음에 이어 나오는 말씀, 즉 "진리에 서지 못하고"는 본문상으로는 전혀 확실하지 않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마귀와 관련하여서는 언제든지 진리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귀가 거짓말 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한다고 하는 세 번째 단언에 의해 명백해진다. 그 의미는 타락과 거짓말은 마귀 스스로의 소행이며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부차적인 점만이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상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마귀가 마귀가 되기 전에 무엇이었는지 질문하는 것을 금한다. 그것이 말하는 바는 마귀는 그가 마귀라는 사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고의적이든 비고의적이든 마귀의 존재와 본성과 기원에 관하여 쿰란을 포함하여 후기 유대교에 의해 표현된 사상은 여기서 거부된다.|요한의 기록들에서 특별한 측면은 존재적 진술들에 의해 그들 안에서 행해진 역할이다: 즉 하나님에게서 태어나거나 마귀에게서 태어나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거나 마귀의 자녀가 되는 것, 이런 이유에서 죄를 짓는 자는 에크 투 디아볼루이다(요일 3:8). 역으로 가인은 에크 투 포네루였기 때문에 그의 아우를 살해했다(요일 3:12).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며 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요일 5:18). 이것은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 나무와 그 열매에 관해 말씀하신 것과 정확히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직설법과 명령법을 상호 관련시키고 병치 시킴으로 동일한 요지를 전개한다. 요한이 네아니스코이(청년들)에게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라고 외칠 때(요일 2:13이하) 이것은 본질상 자명한 것이라는 의미에서나 엄격한 숙명론의 의미에서 의도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의 간구,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요한의 실제적인 말에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요 17:15).|(참조: Foerster).
사톤
savton
건양 단위||사톤은 히브리어로 케아, 갈대어로 카타이며, 일종의 건량 단위이며 '한 모디우스 반'(a modius and a half), '한 펙반'을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사톤은 2회, 마 13:33과 병행구 눅 13:21에 사용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사울로스
Sau'lo"
사울 Saul(인)||사울로스/ 사울은 사도 바울의 유대 이름이다.|신약성경에서 사울로스/ 사울이란 이름은 15회 나온다(행 7:58; 행 8:1; 행 8:3; 행 9:1; 행 9:8; 행 9:11; 행 9:22; 행 9:24; 행 11:25; 행 11:30; 행 12:25; 행 13:1; 행 13:2; 행 13:7; 행 13:9).|(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꺼져가다
sbevnnumi
끄다 quench, 끄다, 진화하다 extinguish, 억누르다 quell.||#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스벤뉘미(Homer이래로)는 기본 의미로 '끄다'(quench)를 뜻한다.||(a) 문자적 의미로 스벤뉘미는 ① 대부분 불이나 불타는 것을 '끄다', 물건에 대해 수동태로, '꺼지다, 진화되다'.|② 액체에 대하여 '말리다, 빨아들이다',|③ 사람, 직물, 도시에 대하여, 오직 수동으로 '말라 죽다',|④ 요리하는 음식에 대하여, '김을 내다',|⑤ 가라앉히다, 제지하다, (바람이나 소리가) '자다, 약해지다'를 의미한다.||(b) 전이된 의미로 스벤뉘미는 감정, 영향력, 힘, 매력 등에 관한 여러가지 언급들과 함께, '달래다, 진정시키다, 조용하게 하다, 억누르다, 억제하다', 수동태로, '약해지다, 사라지다, 사멸하다'를 의미한다.||(c) 후기 헬라어로 쓰여진 파피루스 문서에서 스벤뉘미는 '씻어내다, 지우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참조: F. Lang; R. K. Harison; C. Brown)||#2. 70인역본의 용법||스벤뉘미는 70인역본에서 약 45회 나오며, 그 본래의 문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때때로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예를 들면 아가서에서는 사랑이 꺼짐을, 마카베오사서 3:17에서는 정열이 사그러짐을 표현하는 것 등이다.|스벤뉘미는 주로 히브리어 카바(끄다, 진화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삼하 14:7; 삼하 21:17; 왕하 14:7; 대하 29:6; 암 5:6; 사 1:31; 렘 4:4; 겔 21:3이하 등). 때로는 다아크(꺼지다, 진화되다)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욥 18:5이하; 욥 21:17; 잠 13:9; 잠 20:20; 사 43:17 등), 욥 30:8에서만 나가(몹시 괴롭힘을 당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스벤뉘미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문자적 의미와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마 12:20에서 스벤뉘미는 예수님의 자비와 동정심과 관련하여 나온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태는 사 42:3의 말씀을 예수님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알포드(Arford)는 '예수님께서 뉘우치는 마음을 꺾지 않으시며, 죄인의 마음에 있는 작은 회개의 불꽃도 끄지 않으신다'고 표현했다. 휘브레이(R. V. Whybray)는 사 42장의 문맥에서 이 구절의 본래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초기 예언자들이 했던 파괴적인 일과 이 구절이 대비됨을 주목하였다. 종의 일은 "상한 갈대를 최대의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고 가물가물 간신히 타고 있는 심지가 꺼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 즉 여호와의 우주적 통치가 임박했음을 선포함으로써 포로 생활 중에 다 사라지고 간신히 남아 있는 믿음과 소망을 키우는 일이 될 것이다"(Isaiah, New Century Bible).|마 25:8에서 스벤뉘미는 어리석은 처녀들의 등불이 꺼져가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막 9:48에서 스벤뉘미는 지옥불에 관해 사용되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이 징벌에 관한 묘사는 사 66:24로부터 인용한 것인데, 휘브레이는 이것을 영원한 형벌에 관한 초기의 표현으로 본다. 이 구절은 또한 집회서 7:17과 유딧 16:17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구절이 묘사하고 있는 배경은 왕정 때에 인신 제물이 봉헌되었던(왕하 23:10; 렘 7:31; 렘 32:35) 힌놈 골짜기의 모습에서 끌어온 것이다. 후에 이곳은 도시의 쓰레기를 버리는 곳으로 되었고, 달리는 장례 지낼 방법이 없는 부정한 시체들을 태우거나 그대로 방치해 썩히는 곳으로 사용되었다.(K. K. Harrison; C. Brown)|엡 6:16에서 스벤뉘미는 믿음의 방패로 악한 자의 화전을 끄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여기서 신자들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믿음 뒤에 은신하여, 인격을 불태우고 소모시키는 모든 악한 유혹을 물리치고 소멸할 수 있도록 하라는 권면을 듣는다. 여기에 나오는 방패(뒤레오스)는 로마인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었던 나무로 만들어진 스쿠툼(scutum)으로서 신체의 거의 전부를 방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방패를 싸고 있는 물에 적신 가죽 덮개는 불화살로 사용되는, 송진에 담그었던 쌍두전(雙頭箭)을 막고 불을 끄는 데 효과적이었다.|바울은 "악마의 궤계"가 그와 같은 화전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간 혀의 화살과 불결함과 이기심과 의심과 공포와 실망의 화살들은 그리스도인을 태우고 파괴시키기 위해 마귀에 의해서 계획된 것들이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만이 그러한 무기들을 소멸시키고 빗나가도록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이 언제 그리스도인을 향해 던져진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그것들을 소멸하고 피할 수 있다(F. Foulkes).|살전 5:19에서 스벤뉘미는 성령을 소멸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성령을 소멸치 말며"에 대하여, Phillips는 '절대로 불을 끄지 말며', NEB는 '영감을 억눌려 없애지 말며', Knox는 '성령의 행사를 말살하지 말며'라고 번역했다. 이 구절은 '성령의 은사(카리스마타)에 대한 현현의 억제를 의미한다'고 프레임(Frame)은 생각한다. 그 표현은 게으름, 부도덕 또는 다른 어떤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엡 4:30)과 같은 것이라고 모리스(Morris)는 생각한다. 데니(Denney)의 견해는 대략 교회 생활에 있어서 영적 열성에 대한 억압을 포함하여 보다 의미의 폭이 넓다. 적극적으로 보면, 본 주절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마음에 타오르는 성령의 불을 보존하라는 요청이다. 즉 신앙과 순종의 응답과 규칙적인 헌신의 통로를 계속적으로 개방하라는 명령인 것이다.(A. E. Airhart)|만약 성령에 의하여 은사를 받은 자들이 사회에서 그것을 행사할 수 없게 되거나 혹은 그들이 말하고 행하는 것이 무시된다면, 결국 성령의 불같은 힘과 빛은 꺼지고 교회는 존립할 수 없게 될 것이다(고전 14:26).|히 11:34에서 스벤뉘미는 불의 세력을 멸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믿음으로 "불의 세력을 멸한" 영웅에 관한 이 언급은 아마도 느부갓네살의 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한 댓가로 뜨거운 풀무에 던져져서도 살아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암시하는 듯하다(단 3장). 이 편재의 독자들 역시 가까운 장래에 불의 시련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F. F. Bruce, The Epistle to the Hebrews)|(참조: R. K. Harrison, C. Brwon)

sev
너를 you.||세는 2인칭 대명사 쉬($4771)의 대격 단수형이며, '너를'을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190여회 사용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네 몸
seautou'
너 자신의 yourself.||세아우투(Alcaeus 이래)는 2인칭 재귀 대명사이며, 속격, 여격, 대격으로만 사용된다. 신약성경에서는 남성으로만 나온다.||(a) 속격으로는 '너 자신의'(요 8:13; 요 18:34; 행 26:1; 딤후 4:11),|(b) 여격으로는 '너 자신에게'(요 17:5; 행 16:28; 롬 2:5; 딤전 4:16),|(c) 대격으로는 '너 자신을'(마 4:6; 막 12:31; 눅 4:23; 요 8:53; 롬 14:22; 갈 6:1; 딤전 4:7; 딤후 2:15; 약 2:8)을 의미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세바조마이
sebavzomai
종교적인 경외심을 보이다, 예배하다.||동사 세바조마이는 세보(%65)에서 유래했으며, '두려워하다, 경외하다, 예배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롬 1:25에서만 나오며,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