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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초막
skhnhv
천막 tent, 장막 tabernacle, 처소 dwelling.||#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스케네(Aeschyl., Soph., Thuc. 이래)는 시장의 노점, 천막 설비, 극장의 무대, 수레 덮개, 배의 갑판 위의 선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언제나 '천막'을 의미한다.|후에는 '거처나 숙박소'라는 일반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이 단어에는 무상함, 덧없음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 그래서 데모크리투스는 '세상은 천막이며, 인생은 지나가버리는 것이다. 사람은 와서 보고, 그리고 떠나간다'라고 말했다(Piels, Ⅱ, 165, 7).||#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스케네는 70인역본에서 약 43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오헬(천막, 장막, 처소, 성막)의 역어로, 그 다음으로 미쉬칸(거처, 장막, 거주지)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천막, 장막, 회막, 거처'라는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스케네는 신약성경에서 20회 나오며, 그 중에 히브리서에 10회 나온다.||(a) ① 스케네는 행 7:43과 행 15:16의 구약성경 인용문에서 사용되었다. 누가는 행 7:42 이하에서 암 5:25-27의 70인역본을 따르므로 행 7:43에서 텐 스케넨 투 몰록("몰록의 장막")을 언급한다. 암 5:26[70인역본]에서처럼 행 7:43에서 스케네도 회막(tabernacle)과 같은 제의적 장막이다: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참조: 행 7:44).|행 15:16은 암 9:11 이하(70인역본)를 인용하여 다윗의 무너진 스케네를 언급한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누가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회복은 아모스가 약속하였고 지금 성취되고 있는 다윗의 스케네의 회복이다. 이 예언의 첫 부분이 유대 기독교인들에게서 성취되었다고 한다면(행 15:16), 두번째 부분도 성취되고 있으며(행 15:17) 따라서 이방인 선교가 정당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② 이 두 인용문 외에도 스케네가 특히 회막(tabernacle)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언제나 구약성경이 고려된다. 행 7:42 이하를 뒤따라 행 7:44은 광야 시기의 "증거의 장막"에 대해 말하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셨다고 언급한다.|행 7:45에서는 조상들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가나안으로 회막을 가지고 들어갔다고 덧붙인다: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참조: 행 7:46의 스케노마).||③ 계 11:19에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계 15:5에서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으로 묘사된다.||(b) ① 히브리서는 스케네 투 마르튀리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스케네에 대해서 말하며, 참된(알레디네, 히 8:2) 혹은 하늘의(참조: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히 8:1) 스케네와 지상의 스케네를 구별한다. 히 8:2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하늘의 스케네에 대해 말한다: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다". 여기서 야곱의 장막(민 24:5)에 대해 사용된, 민 24:6[70인역본]의 문구는 복수형에서 단수형으로 바뀌며, 하늘의 성소를 가리킨다. 기자는 호 퀴리오스에 우크 안드로포스("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를 부가하여 단지 "참 장막"을 세운 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한다. 역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확실히 세우도록 명령하셨으되 자기 자신을 그것을 세운자로 간주하지 않으시는, 지상의 회막에 대해 말한다. 이는 바로 모세이다. 그는 "장막을 지어야"만 했다(히 8:5). 따라서 회막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이다(참조: 히 9:24의 "손으로 만든 성소"). 그러나 하늘의 스케네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이다(히 9:11). 그것은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것을 의미한다. 동일 구절에서 그것은 같은 의미에서 "더 크고 온전한" 것으로 불리운다.||② 하늘의 스케네와 지상의 스케네의 관계에 관하여, 우리는 히 8:5의 출 25:40의 인용으로부터 회막이 하늘의 스케네의 형태를 따라 만들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말씀에서는 하늘의 원형이 독자적 중요성은 지니지 않은 채 단지 지상의 모형의 모델 역할만 하는 반면에 히브리서에서는 하늘의 스케네가 그 자체의 존재 이유(raison d'etre)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늘의 스케네가 회막의 투포스($5179)로서 회막보다 먼저 있었다는 사실은 하늘의 스케네가 모든 시대 이전에 아주 오래전 실로 선재했다는 증거로 히브리서에서 이용된다.|사실 하늘의 스케네는 히브리서에서 아이오니오스($166: 영원한, 영속하는) 혹은 아이오니아(복수)로 불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아레디네($228의 여성)로 불리는데, 근본적으로 이것은 하늘의 스케네가 성격상 영원하다는 것을 오로지 의미할 수 있다. 하늘의 스케네의 영원성은 유대교 병행구들에서보다 히브리서에서 보다 강력하게 부각된다. 유대교에서는 회막이 하늘의 스케네에 완전히 일치하나, 히브리서에서는 회막이 원형의 "그림자 모형"에 불과하다.||③ 히 9:1에서 장막(tabernacle)은 하기온 코스미콘("세상에 속한 성소") 즉 지상의 성소로 묘사된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히 9:21에서 레 8:10 이하, 15에 기초하여 장막의 성화에 관해 간략히 기술한다. 히 9:2 이하에서는 장막의 내부 설비에 대해 기술하며 성소와 지성소는 각기 프로테("첫째")와 듀테라("둘째", 히 9:7) 스케네로 구별된다. 여기서 프로테/ 듀테라는 공간적 언급이며, 따라서 프로테는 신약성경에서 여기서만 발견되는 드문 의미, 즉 전면의(front)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성소와 지성소를 첫 장막과 둘째 장막 혹은 전면의 스케네와 후면의 스케네로 구별하는 것은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입증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부적절하다고 거의 말할 수도 없고, 또한 히 8:5과 히 9:21에서 기자가 하나의 장막을 개개의 스케네로 언급한다는 억측을 내릴 수도 없다.|히 9:8에서도 프로테 스케네("첫째 장막")는 장막의 전면 부분이다. 여기서 히브리서는 지성소와 구별되는 특별한 성소의 존재에서 한 가지 증거를 발견한다. 즉 지상에 세워진 장막 바로 그 자체는 참 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 계시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첫 장막의 파라볼레($3850: 곁에 놓기, 비교)의 중요성이 놓여 있다(히 9:9).||④ 히 9:11에서 하늘의 성소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것 같아 보인다. 확실한 것은 히 8:2과 히 9:8에서 단일 개념이 하늘의 성소 전체 즉 타 하기아를 포괄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히 9:11에서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께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성소에 들어가셨다(에이셀덴 에이스 타 하기아)는 것과 그가 그의 죽음으로 그렇게 하셨다("오직 자기의 피로", 히 9:12)는 것이다.|더 큰 장막은 교부들의 생각과 달리(참조: 또한 히 10:20) 거의 그리스도의 몸과 인성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우 타우테스 테스 크티세오스)은 이 경우에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더 큰 장막이 하나님의 참된 처소인 타 하기아와 구별되는 하늘의 영역(참조: 히 4:14의 우라노이)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하늘의 성소도 역시 장막과 비교할 때 더 크고 더 완전하나 참된 성소, 지성소와 여전히 구별되는 전면의 부분이 있음을 의미한다. 히브리서에는 하나님이 이 성소 혹은 지성소에 임재하시는 사상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것 같고 확실히 분명하게 진술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히 8:1은 하나님의 보좌가 알레디네 스케네("참된 장막") 안에 직접적으로 존재함을 암시하지 않는다(히 8:2, 그러나 참조: 히 9:24). 히브리서에서 하늘의 성소는 하나님의 스케네로 불리우지 않는다(참조: 계 21:3).||⑤ 히브리서 기자가 8장 이하에서 선행하는 해설에 대해 히 13:10에서 테 스케네 라트류온테스("장막에서 섬기는 자들")를 사용하고 오이 토 뒤시아스테리오 파레드류온테스("제단을 모시는 이들", 참조: 고전 9:13) 등등을 선호하지 않았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그는 분명히 구약성경의 제의의 제사장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참조: 히 8:5; 히 9:9; 히 10:2의 라트류에인). 그러나 히 8:5; 히 9:2 이하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독자들에게 회막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면 제사장들이 스케네를 섬긴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⑥ 스케네는 히 11:9에서도 나온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여기서 아브라함이 "장막에 거하였다"고 한다. 비록 파로이케오("우거하여")가 진술의 주요 동기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장막에 거함이 아브라함의 외방의 신분을 생생하게 증거한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복수형 스케나이는 아브라함이 항상 진행 중에 있었으며 그와 그의 후손들이 계속하여 새로운 장소에 장막을 세워야만 했음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창 12:8; 창 13:12; 참조: 창 26:25; 창 33:19; 창 35:21). 확실한 도성에 사는 것(히 11:10)은 장막에 거하는 이생(this life)과 대조된다. 장막은 신자들이 나그네요 순례자라는 표시이다.||(c) 요한계시록의 기자는 계 15:5에서 하늘의 "장막의 성전"에 대해 말하고, 계 13:6에서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훼방의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장막"을 훼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스케네는 계 15:5에 언급된 긴 형태의 축약형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계 15:5의 표현은 계 11:19의 나오스 투 데우("하나님의 성전")와 계 13:6의 스케네가 합성된 것이다. 계 13:6을 고찰할 때, 계 7:15에서 이미 하나님에 대하여, 하늘의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셔서 순교자들의 섬김을 받으시는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라"고 언급한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반면에 스케노오("거하시리라")는 계 21:3의 상응하는 진술에서 나오스("백성")가 아니라 스케네와 결합되며, 계 7:15에서는 나오스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계시록에서 나오스와 스케네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다른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참조: 계 15:5), 계 11:19에서는 언약궤와 성전이 연관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관련 구절들의 내용으로 보아 여기서 스케노오는 "지속적으로 거하다"를 의미함이 틀림없으며, 스케네 역시 지속적인 체제를 암시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분명히 계 13:6에서 단어의 선택을 결정한다. 만약 여기서 토 오노마 아우투 카이 텐 스케넨 아우투("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에 투스 엔 투 우라노 스케눈타스("하늘에 거하는 자들")가 첨가되어 있다면 계 12:12의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에 근거하여 계 13:6의 동격에서도 역시 하늘에 있는 완성된 자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격도 하늘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오노마("이름")와 스케네와 관련되기도 한다.||(d) 눅 16:9에서 예수님은 불의한 재물을 친구를 사귀는 데 사용하라고 권하는데, 그렇게 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그 사람이 죽거나 세계의 종말이 임할 때를 가리킨다) 하나님(또는 그의 천사나 혹은 그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들)이 그를 "영원한 처소"(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는 "영원한 초막"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히 아니다)로 영접할 것이라고 말한다. 변화산상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과 두명의 천상의 방문객 모세와 엘리야에게 스케나이 셋을 짓자고 제안한다(눅 9:33 및 그 병행구). 여기에서 그가 영구히 보존하고 싶어하였던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목격한 그의 경험이다.||(e) 변모 기사에서도 히브리서에서도 하나님이 스케네에 거하심에 관하여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계 21:3에서 우리는 이 사상을 보게 된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여기서 구약성경의 예언, 특히 슥 2:14 이하; 슥 8:3, 8; 겔 37:27의 영향이 뚜렷이 보인다. 개개 표현의 상호의존에도 불구하고 이 구약성경 구절들도 요한계시록의 구절도 그 때에 인간들이 장막에 거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중앙에 하나님의 장막이 있는 거대한 하늘의 진영에 대한 개념은 없다. 계 21:3은 독자에게 계 15:5 보다는 오히려 계 13:6과 특히 계 7:15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영속적인 임재를 나타내는 생생한 은유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계 7:15의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와 계 21:3의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를 비교하고, 아울러 선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및 그 다음의 "저희와 함께"(단지 "저희"로 읽어서는 아니된다면)를 비교하면, 하나님과 새 세상에 속한 모습을 지닌 사람 사이의 더 가까운 관계에 강한 강조점이 주어진다. 여기서도 역시 세키나 개념과의 일치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약성경의 병행구절들이 암시하고 계 21:2이 확증하듯이 스케네 데우("하나님의 장막") 배후에 놓인 사상은 새 예루살렘 혹은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이다(계 21:1).|요 1:14의 스게눈("거하매")에서 발견되는 기독론적 언급은 계 21:3의 약속을 결여하고 있다. 그 대신에 그것은 미래 종말론적 구원을 지향하며, 이 전망은 신약성경에서 스케네의 역사(history)의 절정(climax)으로 간주하는 것도 당연하다.|(참조: W. michaelis; M. J. Harris).
초막절
skhnophgiva
초막절 Feast of Booths.||#1. 고전 및 구약성경.||명사 스케노페기아는 '장막을 세우는 것'이나 '새의 깃듦'을 의미한다.|스케노페기아는 70인역본에서 9회 나오는데 언제나 초막절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초막절은 유대인의 삼대 절기 중에 하나이며, 모든 수확과 포도 수확을 수장한 후에 지키며, 티스리(Tisri)월(즉 대략 10월) 15일부터 시작하여 7일 동안 지킨다. 그러니까 초막절은 대속죄일(7월 10일) 후 5일이 지나 시작한다.|초막절은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조상이 애굽을 떠난 후 아라비아 광야를 통과하는 도중에 천막에 거한 시절(레 23:43)에 대한 기억을 지속시키기 위해서였고, 또 부분적으로는 추수와 포도 수확을 끝마침에 대한 축제와 기쁨의 절기로 지켰다(신 16:13). 축제를 거행하면서 유대인들은 관습적으로 잎이 우거진 나무 가지들로 오두막들을 지었는데-지붕 위에나 집 뜰에 또는 거리와 광장에(느 8:15; 느 8:16) 지었으며 또 관습적으로 그 오두막을 온갖 종류의 꽃과 과실로 장식하고 하였던 바(레 23:40)-이 오두막 아래서 절기의 기간 내내 그들은 잔치를 베풀고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초막절은 "수장절"로도 불리운다(출 23:16).||이 절기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나그네 생활을 회상하는 것이다. 저들이 초막에 거하는 것은|① 번영의 한 가운데서라도 그들의 불행한 날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②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여 주심을 기억하는 것이다-불기둥과 구름 기둥.|③ 땅의 소산물에 대한 기쁨을 그 따뜻한 감사의 감정으로 받는다는 것이다.|④ 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였으나 나그네 생활은 계속한다는 것 등을 가르치는 것이다.||#2. 신약성경.||명사 스케노페기아는 신약성경에서 요 7:2에 한번 나온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동격으로 사용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서 스케노페기아는 완전한 명칭으로 사용되었으며, 초막절을 의미한다.|요 7:3이하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여행이 이 명절 이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요 7:14이하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초막절 기간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는 말하기가 어렵다. 초막절의 진행과정과 풍습에 관한 기사가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전 방문은 명절의 중간에 있었다(요 7: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는 7일 혹은 8일간의 절기의 4번째 날을 뜻한다.|요 7:37에 때를 지시하는 또 다른 기록이 나온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비록 명절의 7일째나 8일째의 마지막 날이 "큰 날"로 정해져 있지는 않았지만, 여기서는 7일째의 날을 가리킴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이날은 오프닝 데이(opening day)와 함께 이 명절의 절정이었으며, 특별히 성대한 행사로 기념되었다. 8일째는 하나의 특별한 명절로 간주되었다. 물을 뿌리는 일은 절기의 7일 동안만 행해졌고 8일째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요 7:37이하는 분명 이 관습을 암시하는 것이다.|이 7일째 날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요 8:12의 "세상 혹은 생명의 빛"이라는 표현은, 요 9:5; 요 11:9; 요 12:35, 요 12:40과 같은 초막절과 관계가 없는 병행구에도 불구하고, 이 명절에 대한 또 다른 암시가 있음을 시사해 준다. 어둠이 내릴 무렵부터 아침까지 성전에서 굉장한 조명을 비추었을 것이다. 따라서 요 8:12(참조: 단순히 팔린으로 연결됨)을 똑같이 7일째 날에 말씀하신 것이라고 추측할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비록 요 7:37이하; 요 8:12과 초막절 사이에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요 7:37 이하보다 요 8:12에서 관련성이 보다 약해짐), 사실상 유대인의 절기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우연한 암시 이상의 것을 요 7장과 요 8장에서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러나 요한은 배타적으로 이런 류의 독자들을 위하여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초막절과의 연관성이 그에게 중요하거나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초막절을 생각해 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에 그는 훨씬 더 분명하게 나타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초막절이 특별한 신학적 중요성을 가지지 않으며, 요한에게 단순히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의 배경일 뿐이라는 인상을 강화 시켜준다.|(참조: Michaelis; Walter Bauer; J. H. Thayer).
장막을 만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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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 제조업자||#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스케노포이오스는 스케네($4633: 천막)와 포이에오($4160: 만들다)에서 유래했으며, '천막을 만드는 사람, 천막 제조업자'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스케노포이오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18:3에 한번 나온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여기에서 아굴라와 바울이 직업으로 스케노포이오이, 즉 천막 만드는 사람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본래 이 단어는 '천막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는데, 후에는 '가죽을 다루는 기술자'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참조: 라틴어의 lectarius, 그리고 영어의 saddler의 용법과 비교). 바울이 팔려고 제조하였던 제품에는 천막(고대에는 흔히 가죽으로 만들었다) 뿐 아니라 각종 의복 장식품(아마 이것은 바울의 고향의 주된 수출품이었던 실리시언 모직, 즉 실리시움으로 직조하였을 것이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육체 노동에 의하여 바울은 자신이 그 당시에 목회하고 있었던 회중에게 의존하는 일을 피하였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M. J. Harris).
장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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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 천막.||#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스케노스(Hippocr., Pla. 등)는 스케네($4633: 천막)에서 유래했으며, '장막, 천막'을 의미하며, 비유적으로 '인간의 몸'(육체)에 대해 사용되었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스케노스는 신약성경에서 고린도후서에 2회 나온다.|①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② 고후 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여기에서 신자의 지상에서의 몸은 일시적으로 머무는 장막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그의 천상의 몸은 그의 영원한 집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되어 있다. 고후 5:1-7 전체에 걸쳐 이 스케노스라는 개념은 바울의 사고를 가장 잘 드러내는 위치에 혹은 그 부근에 자리잡고 있다. 바울의 사고에 있어서 스케노스는 썩을 몸을 입고 있는 상태의 덧없음과 절망적인 한계(고후 5:2; 고후 5:4; 고후 5:6) 그리고 그리스도의 직접적 임재(고후 5:6-8)라는 약속된 땅으로 가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순례를 암시한다. 여기에는 솔로몬의 지혜 9:15과 같이 육체를 무시하는 생각이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부활의 몸과 견주어 볼 때 썩을 몸은 인간의 영이나 성령을 담는 도구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바울은 고통스럽게 직시하였다.|(참조: M. J. Harris; Walter Bauer; J. H. Thayer).
장막을 치다
skhnovw
장막을 치다, 거주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스케노오(Xen., Pla.)는 '장막을 치다, 장막 속에 머무르다(살다), 살다, 거주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스케노오는 신약성경에서 요한의 기록에만 5회 나온다.||(a)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서언에서 그는 장막(에스케노센), 즉 하나님이 땅 위의 인간 속에 임재하시는 장소(참조: 출 25:8-9)로 표상되고 있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하나님의 거처가 있다.||(b) 계 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여기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는 장로들 중의 하나가 요한에게, 하나님께서는 대환난을 피해 나오는 사람들 위에 "장막을 치실" 것임을 알려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임재하심으로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전에서 그들과 함께 영원히 거주하실 것이라는 뜻이다.|계 21:3에 의하면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면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 때에는 하나님 자신이 몸소, 그의 언약의 백성들에게 무수히 되풀이하였던 여호와의,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라는 그 약속이 마침내 성취되는 모습을 목도할 그 백성들 한 가운데 영원히 계실 것이다(참조: 출 6:7; 레 26:12; 렘 32:38; 겔 37:27; 슥 8:8; 고후 6:12).||(c) 요한계시록의 다른 구절에서 동사 스케노오는 하늘에 영원히 거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용되었다.|① 계 12: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찐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 갔음이라 하더라".|② 계 13: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참조: M. H. Harris; Walter Bauer; J. H. Thayer).
스케노마
skhvnwma
천막, 장막.||#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스케노마(Eur., Xen., Plut.)는 스케노오($4637)에서 유래했으며, '천막, 장막'을 의미하며, 비유적으로 영혼의 거처로서의 인간의 신체에 사용되었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스케노마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사도행전(행 7:46)과 베드로후서(벧후 1:13; 벧후 1:14)에만 사용되었다.||(a) 벧후 1:13; 벧후 1:14,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여기에서 죽을 존재이며 육체를 입고 있는 인간은 장막(스케노마)에 거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또한 죽음은 그 장막을 벗어버리는 것과 같다(참조: 욥 4:21MT). 그러나 "벗는다"(아포데시스, 벧후 1:14)라는 생각은 장막이나 거한다는 것보다는 몸에 대해 잘 어울리는 까닭에 어떤 사람들은 이 두 구절에 나오는 스케노마를 "몸"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쪽을 택하기도 한다(RSV). 이 아포데시스는 지상의 생활을 떠나(벧후 1:15)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벧후 1:11)을 의미한다.||(b) 행 7: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스데반의 설교에서는 스케노마가 야곱의 집(또는 야곱의 하나님)을 위하여 건축하고자 하였던 집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하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M. J. Harris).
그늘
skiva
그늘 shade, 그림자 shadow, 그늘지게 함 overshadowing.||#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스키아(Homer로부터)는 같은 의미의 인도 유럽어에서 발전되었으며, '그는, 그림자'를 의미한다.|스키아는 고전 헬라어에서 고유의 의미 외에도 전이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한편으로 스키아는 어떤 물체, 예를 들어 나무나 바위나 사람에 의하여 생긴 그림자를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코토스(어두움)의 의미로 간주될 수 있어서 어둠의 영역을 가리킨다. 특별히 이 중 중요한 예는 스키아 다나투(죽음의 그림자)라는 표현이다. 여기서 스키아는 죽음의 개념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위협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결합된 뜻과는 달리 스키아는 인간 행위들의 헛됨, 그림자를 추구함과 일반적인 인생의 허무(예: Pindar, Pyth. 95f., 인간은 그림자의 꿈이다)를 나타내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때때로 스키아는 형상(image), 영상이란 말로 번역될 수 있다.|플라톤(Plato)에게서는 이 단어가, 거의 에이콘의 동의어로서, 에이콘과 나란히 사용되었는데, 이 에이콘은 스키아처럼, 진정하고 영원한 실재(realities)를 닮은 형상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참조: Rep.6, 510e; 7, 517d).|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는 인간이 보이는 세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결론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을 스키아로 설명한다(Leg. All. 3, 995).||#2. 70인역본의 용법||(a) 스키아는 70인역본에서 50여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첼(그림자, 그늘)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때때로 그 파생어 찰마윁(암흑, 흑암)의 역어로 사용되었는데, '죽음의 그림자'로 번역했다.||(b) 스키아는 70인역본에서 문자적 의미로 '그림자'(삿 9:36; 겔 17:23; 욘 4:5; 왕하 20:9; 사 25:5)에 대하여 사용되었다.||(c) 스키아는 하나님의 "손 그늘"(사 49:2), "전능자의 그늘"(시 91:1; 참조: 시 57:1; 시 17:8)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보호와 피난처라는 의미를 나타낸다.||(d) 스키아는 죽음과 관련하여 나오는데 이런 곳에서 스키아는 생명을 위협하는 어두움의 영역을 뜻한다. 그러므로 스키아의 비유적 용법은 인생의 덧없음과 무상함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헛 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기' 때문이다(시 114:4).||⒠ 외경 문서에서도 "그림자"라는 말은 인생의 허무함(참조: 지혜 2:5; 지혜 5:9)과 인간의 노력의 허무함(참조: 집회서 34:2, "꿈에다 마음을 쏟는 자는 마치 그림자를 잡는 …자와 같다")을 나타내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지혜 9:7, 구름; 바룩 5:8 식물). 그리고 이 말을 또한 (지상의) 제국과 관련시켜 사용할 수도 있다(참조: Bar.1:12).||#3. 신약성경의 용법||스키아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온다.||(a) 막 4:32에서 스키아는 문자적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겨자씨가 자라서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한 나무가 된다. 새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관목의 그림자는(참조: J.Jeremias, The Parables of Jesus) 이처럼 천연적으로 형성된 안전한 장소와 같은, 그러한 곳을 가리킨다.|큰 나무가 있고 그 가지에 새가 깃들이며 그 그늘에 짐승들이 쉰다는 이야기는 큰 제국들이 멸망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일어날 것에 대한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회상케한다. 앗수르라는 큰 백향목이 찍혔고 느부갓네살 이라는 강하고 좋은 나무도(겔 21:3-겔 21:13; 단 4:10-단 4;14) 잘리었지만 여호와의 나무는 무성하였다(겔 17:22-겔 17:24). (A.E.Sanner).||(b) 행 5:15에서 스키아는 거리에 메어나오는 환자에 대한 하나님의 치유 능력을 강조한다: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행 19:12에서도 이와 유사한 어떤 상황을 볼 수 있는데, 바울이 몸에 갖다 댄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병든 사람에게 얹었다. 이러한 것들은 참된 믿음의 증거였던가 아니면 미신적 행위의 증거였던가? 그 질문을 하는 것이 그것에 답하는 것보다 더 쉽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표명된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셨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들이 "다 나음을 얻었기" 때문이다(16절). 브루스(Bruce)는 '베드로의 그림자는 그의 주님의 옷자락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의 효험을 가진 치유 능력의 매개물이었다'라고 주석한다. 이 모든 경우에서 신적 지혜는 자주 영적 실재의 물질적 상징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한계에 적응하였다고 생각될 것이다(Ralph Earle).||(c) 마 4:16(사 9:1의 인용)에서 스키아는 구약성경에서처럼 어둠의 영역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눅 1:79의 세례(침례) 요한에 대한 말씀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죽음의 그늘은 우리가 빛 가운데 나오기 전에 살았던, 어둠의 영역을 언급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생리적으로 인간은 땅에서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 안에서 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존재는 죽음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층 더 나아가 죽음과 어둠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어두움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죽음의 그림자라는 표현은 … 메시야와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이방인들을 특징짓는 파멸의 영역을 나타낸다"(S.Schulz).||(d) 골로새서와 히브리서에서 스키아는 실체(實體)와 비실체(非實體) 간을 구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히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여기서 스키아는 휘포데이그마(형태, 복사; 개역: "모형")의 의미와 대등하며, 튀포스(본, 형상)와 히 10:1의 에이콘(형상; 개역, 참 형상)의 의미와 강력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대조를 기독론적으로 이해한다. 즉,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사역과 비교해 볼 때, 성전 안에서 행하는 모든 지상에서의 예배는 2차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모세의 율법은 그 유효성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은 "하늘의 것의 그림자"에 속하기 때문이다(히 10:1; 히 8:5).|골 2:17에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의 월삭과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스키아] 일뿐 아니라 본체("몸": $4983)는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참된 실체를 가진 자로서(주의, 필로에서처럼, 소마[문자적 의미 "몸"]도 스키아와 대조적 의미로 쓰였다.), 이런 일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의식이 중단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종말론적 소망의 차원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보다 더 우선권을 갖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왜냐하면 본체는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실체, 곧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 앞에서 일찌기 어떤 종교적인 의례들일지라도 지상의 모든 것은 일시적일 수 밖에 없다. 세상의 것들은 그림자의 특성들 즉, 가변적(可變的)이고 어두운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반면에 빛들의 아버지인 하나님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644]도 없느니라"(약 1:17*) 즉, "별자리들 가운데서 알려진 바와 같은, 그러한 변화의 과정과 어둠의 과정들은 하나님께는 없다"(F.Hauck).|(참조: S.Schulz; H.C.Hahn).
뛰놀다
skirtavw
깡충 뛰다 leap.||#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스키르타오(Homer 이래)는 '깡충 뛰다, 도약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처음에는 망아지가 질주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짐승에 대해 비록 좋은 의미로 사용할지라도(예: 개가 뛰는 것, 어린양이 뛰는 것) 사람에 대해서는 침착하지 못하고 미숙한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스키르타오는 70인역본에서 7회 나오며, 욜 1:17에서 송아지의 침착치 못한 움직임을, 말 4:2에서 고삐 풀린 송아지가 껑충 뛰는 것, 시 114:4에서 수양처럼 산들이 뛰는 것, 창 25:22에서 자궁에서 쌍둥이가 서로 밀치는 것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스키르타오는 신약성경에서 누가복음에만 3회 나온다.||(a) 눅 6:23에서 기뻐서 뛰는 것을 나타낸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말 4:2에는 종말론적인 기쁨이 예시되어 있다.||(b) 눅 1:41; 눅 1:44에서도 기뻐서 뛰는 것을 나타낸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창 25:22에는 자궁에서 움직임이 예시되어 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G. Titzer).
마음이 완악한 것
sklhrokardiva
굳은 마음의, 완고함 hardness of heart.||#1.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스클레로카르디아는 일반 헬라어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70인역본에만 나온다.|70인역본에서 이 형용사는 3회 나오며, 히브리어 올람 레밥(마음의 표피)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신 10:16; 집회서 16:10; 렘 4:4), '마음의 완고함'을 나타낸다.||#2. 신약성경의 용법||스클레로카르디아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70인역본의 용법과 같이 마음의 완악함을 의미한다: 마 19:8,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막 10: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막 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이런 구절들에서 스클레로카르디아는 하나님의 구원하려는 의지에 대한 선포를 완고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을 나타낸다(참조: 롬 2:5). 마음의 완악함이란 하나님과 그의 제언과 요구, 그리고 동료 인간들에 대한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배타성을 말한다. 자연인은 냉혹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 하나님의 개입으로 그가 새롭게 순종적인 마음이 되기까지는 하나님과 이웃을 거스르게 된다(참조: 겔 36:26 이하).|(참조: J.H.Thayer; T.Behm; T.Sorg).
강퍅한
sklhrov"
굳은 hard, 거치른 rough.||#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스클레로스는 스켈로(마르게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헤시오드(Hesiod) 이래로 세속적 헬라어 문학 작품에서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마른', '굳은', '거치른', '굴복하지 않은'을 뜻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스클레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57회 나오며, 7개의 히브리어 파생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카샤(굳다, 엄격하다, 가혹하다)와 카셰(굳은, 어려운, 가혹한, 완악한, 잔인한)을 번역했다.||#3. 신약성경의 용법|스클레로스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온다.||(a) 스클레로스는 사물에 대하여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약 3:4에서 스클레로스는 거친 바람에 대해 사용되었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 6:60에서 스클레로스는 예수님의 "어려운" 말씀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유 1:15에서 스클레로스는 하나님을 거스려 한 말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여기서 스클레로스는 '반항적인'이란 의미를 함축한다. 본 절은 에녹서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들이 자기를 거스려한 모든 완악하고 반항적인 말로 인하여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b) 스클레스는 사람들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마 25:24에서 스클레로는 인정이 없는 '엄격한' 주인에 대해 사용되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행 26:14에서 "가시채를 뒷발질하거나 네게 고생이니라(스클레론 소이)라는 구절에서 스클레로스(skleros)는 독립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몇몇 고대 사본 및 번역본에는 행 9:4에서도 이 구절이 나온다.|그 장면은 완악한 황소가 모든 막대기에 뒷발질을 해댔지만 제 자신을 상하게 할 뿐인 그런 장면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의 반항적인 완악한 행위는 곧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참조: U. Becker; K. L. & M. A. Schmidt).
고집
sklhrovth"
완고, 굳음 hardness.||#1. 고전 헬라어의 용법||스클레로테스는 스클레로스($4642)에서 유래했으며, '굳은'을 의미하며, 비유적으로 '완고, 완악'을 의미한다(Plat., Aristot., Theophr., Plut.).||#2. 70인역본의 용법||스클레로테스는 70인역본에서 4회 나타난다. 스클레로테스는 신 9:27에서 케쉬(완고함), 삼하 22:6에서 모케쉬(덫, 올가미), 사 28:27에서 하루츠(날카로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스클레로테스는 신약성경에서 롬 2:5에서 단 한번 나타나는데, 인간의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유대인들은 그들의 고집스럽고 돌이킬줄 모르는 마음 때문에 자기의 의를 내세우고 회개하지를 못하여 다가올 심판의 진노를 쌓아 가고 있다.|(참조: J. H. Thayer, U. Becker).
목이 곧은
sklhrotravchlo"
목이 곧은, 완고한, 고집센, 완강한.||#1. 일반 헬라어 용법||스클레로트라켈로스는 이솝(Aesop)의 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단어로서, 스클레로스($4642: 굳은, 거친)와 트라켈로스(목)의 합성어이며, 목이 뻣뻣한(굳은), '완고한', '고집센'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스클레로트라켈로스는 70인역본에서 9회 나오며, '목이 곧은'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스클레로트라켈로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7:51에서 단 한번 사용되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스데반은 그의 연설에서 유대인들을 가리켜 항상 성령을 거스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며, 그가 보낸 선지자들을 죽이곤 했던 그들의 조상들과 같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참조: J. H. Thayer; U. Becker).
강퍅케 되다
sklhruvnw
굳게하다 harden, 굳어지다 to be, become hard.||#1. 고전 헬라어 용법||동사 스클레뤼노는 본래 의학 용어였는데,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의 저작에서 최초로 발견된다. 이 동사는 능동태에서는 '굳게 하다'를, 수동태에서는 '굳어지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스클레뤼노는 70인역본에서 34회 나오며, 주로 카샤(굳다, 엄격하다, 가혹하다), 카셰(굳은, 가혹한, 완악한, 어려운, 잔인한), 하자크(강한, 굳은, 완고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스클레뤼노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온다. 스클레뤼노는 히 3:8; 히 3:15; 히 4:7에서 사람을 목적어로 하여 타동사로 사용된다: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히브리서에서 세 차례나 되풀이 되고 있는 이 호소는 시 95:8의 인용인데,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굳게 닫고 불복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사람들은 복종을 하든 마음을 강퍅하게하든 자유이다. 사람들이 마음을 굳게 닫고 불복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거절할 것이며, 또한 그들은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나라의 역사 속에 이러한 원칙의 슬픈 논증이 들어있음을 기억하고 있다(참조: R.S.Taylor).|히 3:13은 8절에서 했던 호소를 수동태로 고쳐서 되풀이 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롬 9:18의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라는 구절에서 스클레뤼노는 "하나님"을 주어로 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 말씀의 배후에는 틀림없이 바로의 강퍅함을 언급하고 있는 출 4:21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방치하여 두심으로써 그들을 심판하신다(롬 1:24, 롬 1:26, 롬 1:28을 참조).|행 19:9에서 스클레뤼노는 에베소의 유대인들은 언급하는 데에 사용되었으며,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회당에서 한 바울의 강론으로 인하여 마음이 "굳어져" 무리 앞에서 그의 가르침을 비방하였다고 한다.|(참조: U. Becker; K. L. Schmidt; M. A. Schmidt).
굽은
skoliov"
굽은, 구부러진, 비뚤어진, 부정직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스콜리오스(Homer 이래)는 인도-유럽어 스겔(sqel-)에서 유래했다.||(a) 이 단어는 '굽은, 구부러진'(특히 신체의 일부로 발꿈치, 허리 등, 벌레에 대해), '뒤틀린'(불구에 대해)을 의미하며, 이 의미에서 '구비치는, 뒤틀린, 경사진'을 의미하기도 한다.||(b) 이 단어는 전이된 의미로 '비뚤어진, 부정직한, 거짓의, 교활한, 간교한'을 의미한다.||(c) 이 단어는 '굽이치는' 강, '구불구불한' 길, 뱀의 움직임, 미로나 고수머리, 헝클어진 머리 카락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스콜리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2회 나오며, 10개 어군의 히브리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이 단어는 70인역본에서 문자적 의미와(사 27:1; 시 125:5; 사 40:3; 호 9:8), 전이전 의미로(잠 2:15; 28:18; 14:2; 10:8) 나온다.|70인역본에서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르고 곧은 길로 가지 않고 형벌을 받을만한 비비 꼬이고 비뚤어진 길로 가는 사람들의 본성을 나타낸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스콜리오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70인역본에서의 의미의 발전이 신약성경 용법 배후에 놓여 있다.||(a) 눅 3: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이 구절은 인용한 사 40:3-5에서 전이된 의미가 암시된다. 패역 및 구부러진 본성에서의 구원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동이며(행 2:40) 그리스도의 행동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막는 도덕적인 장애물은 제거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구자와 그의 설교의 임무이다. 그러나 로고스 자신이 세례(침례) 요한에게서 역사하신다는 초대 교회의 확신 의미에서 그러하다. 스콜리아('구부러진 것, 굽은 것')와 트라케이아('거친 것, 고르지 못한 것) 사이에 정확한 구별은 필요치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스콜리오스는 여전히 윤리적인 어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불경건과 불신앙에 기인하는 윤리적, 사회적 비행을 나타내며 메시야의 오심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 언급은 우주적이다. 모두가 구원, 즉 구세주를 볼 것이요, 따라서 스콜리아(파사 파랑크스...판 오로스: "모든 골짜기...모든 산")의 제거는 전 인류에게서 일어날 것이다.||(b) 행 2:40; 빌 2:15은 구약성경의 표현이 게네아 스콜리아("패역한 세대")를 채용한다. 패역에 대한 이 심판 아래에 예수님 주변의 유대교, 그 시대의 인류와 모든 시대와 장소의 인류들이 선다. 이 용어는 예수님 자신의 설교에 근거하며(막 9:19; 마 17:17; 눅 9:41), 그것은 유대인이나 인간 행동의 내적 모순을 견책한다. 행 2:13에서 조롱한다고 언급한 것에 의하면, 확실히 그 말, 패역한 세대는 유대인에게 적용된다.|빌 2:15에서도 역시 일차적으로는 유대인을 언급한다. 빌립보 교인들은 그들과 대조적으로,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정의 및 심판은 이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세상에 즉 전 인류에게 빛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 그들은 패역하므로 빛을 필요로 한다. 전도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구원받는다(참조: 갈 1:4). 따라서 정의 및 심판은 전 우주적인 효력을 가진다. 전 인류가 공의 및 심판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c) 벧전 2: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여기서 스콜리오스는 일반적으로 선하고 친절한 주인들과 비교되는 악한 주인을 나타내는 실질적인 윤리적 개념으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스도인 종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그들의 주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완고하고 굽은 주인들에게도 무조건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언급하는 것은 종들에 대한 여러 주인들의 개인적인 태도보다도 그리스도인 종들에 대한 비 그리스도인 주인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 같다. 스콜리오이는 그들 나름대로의 장애물을 놓고 금지를 제시한다. 이 경우에 스콜리오스는 일반적인 윤리적 의미를 지니지 않고 우상 숭배에 사로잡혀 있는 이교 주인들에 대해 사용되며,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이 금하는 일을 피할 것이다.|(참조: Bertram; Walter Bauer; J. H. Thayer).
스콜롭스
skovloy
가시 thor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스콜롭스(Homer이래)는 '뾰족한 것, 뾰족한 막대기', 특히 '말뚝, 가시(나무)'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이솝 우화에서 '가시나무'나 '지저깨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스콜롭스는 70인역본에서 4회 나오며, 민 33:55에서 가시(세크), 겔 28:24에서 찌르는 '가시'(실론), 호 2:8에서 '가시'(시르)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스콜롭스는 신약성경에서 고후 12:7에 한번 바울은 자신이 겪은 체험을 언급하고 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가시가 어떤 것이었나 하는 여러 가지 이론이 제기되어 왔다. 사탄의 가시는 미워하거나 탐내게 하는 유혹물이었다고 한다. 어떤 학자들은 광의적 의미로 신체적 존재 영역인 육체로 이해하며, 따라서 바울은 신체적 질병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바울은 그의 반대자들이나 그들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사탄(Satan)을 언급했을 것이다. 신체적 질병들은 이 단어의 구약성경의 용례에 함축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문맥은 연약함이나 고난을 암시한다(고후 12:9이하; 참조: 고후 11:23-고후 11:30). 이 단어의 표현이 신체질환을 가리킨다면 간질병과 모종의 안질이 신체 질환의 가능한 설명이다. 후자의 경우일 것으로 보는 일부 주석가들은, 바울이 "육체의 질병("육체의 연약")"을 언급한다면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전에는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고 상기시키고 있는 갈 4:13-갈 4:15을 들고 있다. 육체의 가시가 안질일 것이라는 이론은 바울 자신의 친필로 쓰여진 "큰 글자"에 대한 언급(갈 6:11)에 근거한다. 바울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진다는 언급(갈 6:17)은 복음 전파 과정에서 겪은 어떤 육체적 질병이나 고통을 지적하는 것일 수 있다. 의사인 누가가 바울을 수행한 것은 바울의 질병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바울이 그렇게도 많이 여행을 할 수 있었으며, 큰 고난을 견뎌낼 수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그가 양호한 건강 상태에 있었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고후 11-12장의 전체 문맥은 신체 장애와 고난을 이겨낸 승리를 찬양하는 것이다.|그 육체의 가시는 무엇인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비록 그 가시로 고통하고 그의 일이 방해를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가 교만하지 않도록 하고 그의 참된 힘을 그에게 나타내주기 위해 이 가시를 이용하신다.|(참조: Walter Bauer; J.H.Thayer; C.Brown; G.Dell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