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
sunevdrion
의회 council, 공회, 산헤드린 sanhedri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쉬네드리온(Hdt. 이래)은 쉰($4862: 함께, ~와 함께)와 헤드라(%1045: 자리)에서 유래했으며,||(a) 첫째로 '함께 앉은 자들의 자리'를 의미하며,||(b) 그 다음에 그들의 '회기' session, '회의, 의회' council, '통치 기구' governing body를 의미한다.|쉬네드리온은 로마의 세나투스(Senatus: 원로원회)의 역어로 (Polyb.), 공적 기관들(법정, 의회 등), '집회의 장소'에 대해 사용되었다.||#2. 70인역본 및 유대 헬레니즘 문헌.||(a) 명사 쉬네드리온은 70인역본에서 12회 나오며, 히브리어 소드(회의, 의논, 조언, 모임, 집회, 잠 11:13; 잠 15:22; 렘 15:17), 마트(사람, 시 26:4), 딘(심판, 잠 22:10), 카할(모임, 집회, 회중, 잠 26:26)의 역어로 되었다. 따라서 70인역본에서 쉬네드리온은 '통치 기구'로서의 유대인의 어떤 쉬네드리온(공회)도 나타내지 않는다.||(b) 필로에서 쉬네드리온은 문자적 의미와 그리고 '마음이나 영혼의 쉬는 장소'라는 전이된 의미로 사용되었다.|요세푸스에서 쉬네드리온은 '회합, 의회, 통치 기구', 그리고 특히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의 '최고의회'를 의미했다.||#3. 유대교의 쉬네드리온(산헤드린).||(a)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역사. 포로기 후에 유대 사회는 제사자들과 장로들이 지배했다. 제사장 신분의 귀족들과 여러 지파의 우두머리들은 예루살렘에 원로회의를 구성했는데, 그 회의의 의장은 대제사장이었다. 이 예루살렘의 의회는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Ⅲ세의 칙령에 처음으로 게루시아(%1046: 원로회의)라고 언급되었다(Jos. Ant., 12, 142). 분명히 이 통치 기구가 그보다 더 일찍이 예루살렘에 있었다고 본다.|이 의회는 하스몬 왕가가 왕직과 대제사장직을 접수했을 때 그 권한을 박탈당했으며, BC 76-67년에 여왕 알렉산드라 치하에서 바리새파 서기관들이 그 권한을 부여 받았다.|쉬네드리온이라는 용어가 예루살렘 의회에 대해 최초로 사용된 것은 이스라엘이 로마 황제 가비니우스(Gabinus, BC. 57-55) 통치 아래 있을 때였는데, 황제 가비니우스는 팔레스타인을 5개의 쉬네드리아(%1047)로 나누었다(Jos. Ant., 14, 19; Bell., 1, 170). 그 후 가이사의 통치 시대에 예루살렘 회의는 다시 이스라엘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고, 이 때 쉬네드리온은 특별히 예루살렘 의회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심지어 이 용어를 히브리어 아랍 형태의 산헤드린으로 대체했던 유대인 자신들까지 쉬네드리온이라고 불렀다.||(b)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구성. 산헤드린은 71명의 의원, 즉 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중 지도급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의장은 대제사장이었다. 원래 사두개파 제사장계 귀족들이 세력을 잡고 있었으나 알렉산드라 여왕의 시대에 이르러 그 의원 자격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포함된 것이다.||(c)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권한. 예루살렘 산헤드린은 최고의 유대인 의회로서 유대인들의 모든 세속적 일들과 종교적 일들을 관할했다. 산헤드린의 이런 권한은 헤롯이 예루살렘 산헤드린과 전혀 협의하지 않고 갈릴리에서 형 집행을 명령했을 때 해명을 하도록 그를 소환한데서도 볼 수 있다. 헤롯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제사장의 자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산헤드린에서 의장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산헤드린을 자신의 지지자들로 구성하고 회의를 열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제사장직이나 최고회의 따위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왕의 재판을 실시하였다(Ant., 14, 167; 15, 273 이하 등). 산헤드린의 권한은 법률상의 권한은 남았으나 사실상 법 집행은 통치자 홀로 행사하였다(참조: 막 6:17-29; 행 12:2).|주후 6세기 이후 유대를 다스릴 로마 총독이 임명되고 유대인 통치자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산헤드린의 업무 영역은 유대에 국한되었으며, 통치 권력은 주로 총독에게 부여되었다. 예루살렘보다 오히려 가이사랴에 주로 소재하였던 총독(procurator)은 산헤드린으로 하여금 원주민과 관련된 사안들을 처리하도록 허용하였다. 그러나 로마 시대에 산헤드린의 권력의 범위가 어느 정도였으며, 총독은 스스로 어떤 권리를 보유하였을까? 분명히 산헤드린은 제의 공동체에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결정할 수 있었으며, 토라를 어기 범죄들을(사형을 제외하고) 처벌할 수 있었다. 심지어 성전 벽을 넘어 신성한 경내에 들어간 이교도를-심지어 로마인까지도- 죽음에 처하는 벌을 가할 권리도 허용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특권을 부여 받았다고 해서 총독의 통치 아래서 유대 법정이 중범죄에 대해 선고하고 집행하는 권한을 유지했다고 추론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요 18:31과 모순된다. 본문에 따르면 사형 선고는 총독이 내릴 수 있었고 유대인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었다.|그럼에도 불고하고 몇몇 형 집행이 주후 60~70년에 유대 법정의 지휘로 이루어졌다.||① 간음을 행한 한 제사장의 딸이 불태워 죽임을 당했다(Aanh., 7, 2). 이 사건은 아마도 아그립바 Ⅰ세의 짧은 통치기 동안에 있었는데(A.D. 41-44), 이 시기에 유대인은 독립 정부를 회복했었었다.||② 야고보의 죽음(행 12:2)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시기에 있었다.||③ 베스도(Porcius Festus)가 죽고 후임자가 아직 지명되지 않았을 때 대제사장 안나스가 기회를 포착하여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 산헤드린에 의한 유죄 판결을 내려 그를 돌로 쳐서 죽게 하였다(Jos. Ant., 20, 200). 이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후에 안나스는 문책을 받고 직위를 박탈 당했다.||④ 행 7:54-8:2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스테반의 순교는 분명 정상적인 절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난 폭도들에게 희생된 것이었다. 만일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사형(Lynch Law)을 중지하거나 자주적인 보호를 허락하지 아니했다면 그들의 허용은 결코 법적 절차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검의 권세는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그들의 것이었다고 끊임없이 주장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로마 총독들의 지배를 받는 전체 기간 동안 그것의 자유로운 사용이 좌절되었다. 탈무드 전승이 유대인들이 성전 파괴 전 40년 동안 생사 권세가 박탈 당했다고 말할 때 이 상황을 회상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우수리 없는 수 40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분명히 유대에서 로마 총독 정치의 시작을 가리킨다. 주후 66년 가을, 유대인의 반란이 시작되어 이 총독 정치가 무력에 의해 종식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유대 법정이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할 수 있었다. 열심당원들이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공포 통치 동안에 이 권리를 무시무시하게 사용하였다. 그러나 로마 총독들이 유대를 다스리는 기간 내내 헤롯의 통치 아래 실시된 바와 같이, 산헤드린은 사형을 가할 권리는 박탈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요 18:31에서 유대인들이 총독 빌라도에게 한 말은 당시의 법률적 상황과 일치한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이 없나이다".||(d) 예루살렘 밖의 유대인 산헤드린.|거룩한 도성 밖에서는 위대한 산헤드린의 형태를 따라 소규모의 공회가 세워졌다. 이것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에서 자치적으로 재판권을 행사하도록 로마 당국이 허락한 것이었다(Mak. 1, 10). 이러한 소(小) 산헤드린 제도는 토라에 기록된 명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쉬나에는 성인 남자 120인 이상이 거주하는 마을에는 23명의 회원으로 이루어진 산헤드린이 존재하도록 규정되어 있다(Sanh., 1, 6). 쉬네드리온이라는 용어는 이들 소규모의 공회를 입증하는 것이다. 사형에 처할만한 범죄의 경우에 23인 모두가 판결을 승인해야 한다고 미쉬나는 규정한다. 이 공회들에 관해서는 비록 검(무력)의 권리는 로마 당국에 의해서만 행사되었다 하더라도 사법권은 그들에게 속한다는 주장을 유대인들이 고수하였다. 그러나 유대인의 관점에 따르면 사형은 가능한한 드물게 부과해야만 한다. 7년 동안에 단 한번 사형을 판결한 한 산헤드린이 "파괴적인" 의회로 간주되었다(Mak. 1, 10).|공회는 한 주일에 2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열렸다(ket., 1.1). 어떠한 상황에서도 안식일이나 절기에 회의를 소집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Sanh., 4, 1; Beza[Yom tob]. 5, 2). 에세네파도 역시 자체적인 사법권을 행사하였으며, 율법을 범한 죄에 대해 중형을 선고하고 심지어 모세를 모독한 죄에 대해서는 사형을 부과하기까지 하였다(Jos. Bell., 2, 145). 각 계급의 100인 이상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형이 선고되었다.||#4. 신약성경에서 쉬네드리온.||(a) 복음서에서 쉬네드리온.|(1)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타난 쉬네드리온.|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핍박을 예상해야 한다고 미리 경고하신다: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마 10:17 병행구 막 13:9). 여기서 공회(산헤드린)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앞에 소환될 유대인의 지방 법정이다. 그들은 저희 회당에서 매질 당하는 형을 선고 받을 것이다. 이것은 아직 제자들의 유대 공동체와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끊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여전히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에서 유대 당국에 예속되어 있다.||② 마 5:21 이하에서 옛 사람들에게는 살인하면 사형의 형벌을 받는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악한 말을 하면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하신다: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가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마 5:21 이하). 여기서 쉬네드리온은 단수이므로 거룩한 성의 최고 법정을 가리킨다. 고대의 법률적 문체로 힘차게 표현된 이 진술은 성난 말은 산헤드린에 의해 유죄 선고를 받는 살인 행위에 맞먹을 만큼 나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2)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앞에서의 예수님.|예루살렘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눈에 띄지 않게 체포할 적절한 기회를 잡는대로 빨리 그를 잡아서 죽이기로 결의하였다(막 14:1 이하와 병행구; 참조: 막 11:18과 병행구).|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이 남긴 충격 때문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소집하였다고 한다(요 11:47). 이 모임에서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하기를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모든 사람이 망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다(요 11:50). 오늘날 이 기사는 요한복음에만 독특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위해 모였다는 사실을 전하는 공관복음의 기록과 조화를 이룬다.|마가와 마태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체포 당하신 후 대제사장 앞에 끌려 왔으며, 그는 유월절 늦은 저녁에 서둘러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막 14:53 병행구 마 26:57).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막 14:55 병행구 마 26:59). 예수님에 대해 거짓 증거한 자들이 그들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돕지 못하자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결정적인 질문을 던졌다: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막 14:61및 병행구). 예수님께서 확신을 가지고 대답하시고, 또 단 7:13과 시 110:1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대답을 강조하시자 대제사장은 산헤드린 회원이 이 명백한 블라스페미아($988: 중상, 비방)에 대하여 판결을 내릴 것을 요구하였다: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막 14:64 병행구 마 26:66). 예수님에 대한 핍박의 결국에 산헤드린은 만장일치로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공관복음에서 이 기사에 관하여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산헤드린 앞에서 예수님의 심리에서 할라카(Halachah)의 몇 가지 규칙이 파기되었다는 것이다.|① 중대한 심리는 오로지 주간에만 열어야 하는데(Sanh., 4. 1) 여기서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재판하기 위해 밤에 모였다.|② 법적 소송 절차는 안식일이나 절기에 행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나 산헤드린 앞에서 예수님의 심리는 유월절 전야에 있었다.|③ Sanh., 4. 1은 재판 당일에는 절대로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없고 다음 날에 언도하도록 규정하나, 여기서 산헤드린은 예수님에게 즉석에서 사형을 언도하였다.|④ Sanh., 7. 5에 따르면 마땅히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신성모독은 하나님의 이름을 발설하는 것이지만, 여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⑤ 재판은 산헤드린의 정규 집회장이 아닌 대제사장의 집에서 열렸다. 그밖의 다른 자료들은 산헤드린의 모임이 대제사장의 집에서 열린다고 말하지 않으므로 복음서 기자가 기술한 이 소송 사건은 이 점에서 유대인 법률 관습에서 벗어난다.|그러나 우리가 또한 주의해야 할 것은 후에 미쉬나를 편찬한 바리새파 랍비 할라카가 주후 70년 이전 시기의 산헤드린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의 산헤드린은 여전히 사두개인의 법률적 이해에 따라 행했다. 바리새인들은 어쨌든 부당한 유죄 판결이 행해지지 않도록 법규에 대해 항상 관대한 해석을 표명했다. 바리새파의 견해가 미쉬나의 법률 조항을 지배했으나 이것이 예수님 당시에 통용되었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유일한 한 가지 사실은 안식일과 절기에 법률 행위의 엄격한 금지가 단지 랍비 할라카에 귀속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정확하게 집행된 보다 옛 할라카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 사법적 절차는 안식일, 절기, 그리고 그러한 날들의 예비일에 엄격히 금지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산헤드린 앞에서 예수님의 심리에 관한 공관복음의 기사는 법률이 요구하는 규율과 아주 모순되는 것 같다.|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기사에 대한 평가는 예수님께서 돌로 죽임 당하지 않고 십자가형을 당하셨다는 사실, 다른 말로 그는 로마 법률에 따라 재판 받았다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시작해야 한다. 빌라도는 한 유대인에 대한 선고를 승인하지 않았으며, 시행하도록 허락하지도 않았다. 유대인들의 불평에 근거하여 그가 직접 예수님에게 형을 선고하고 집행하였다. 총독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동안에는 산헤드린이 사형 선고를 감히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최고의 합법적 사법권은 총독에게만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막 15:55-65의 기사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적 증거와 기독교 고백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막 14:61)라는 대제사장의 질문은 유대인의 입술로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또 다른 문제는 왜 그 긍정적인 대답이 신성모독으로 여겨졌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 공동체가 회당과 대치해 있던 상황을 고려하면 쉽사리 이해된다. 사실 예수님이 메시야시다는 고백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신랄한 논쟁의 쟁점이었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대인에게 핍박 당한 이유였던 것이다. 산헤드린 앞에서 예수님에 대한 재판을 묘사함에 있어서, 공동체는 예수님의 처형에서 유대 당국의 역할을 강조하고 교회와 회당 사이의 차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넘어서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사건의 역사적 과정은 아마도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회원 중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양자 모두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었다는 점에서 일치된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체포하여 피고인의 진술을 간략히 들은 다음 정치적 반역자로 처형하도록 총독에게 넘겨주었다(막 15:1과 병행구). 이 경우에 유대 법정과 로마 통치자는 합세하여 나사렛 예수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누가의 기사는 마가의 기사보다 본질적으로 더 간결하다. 누가복음은 산헤드린의 심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단순히 예수님이 밤에 체포되었으며 산헤드린 모임이 이른 아침에 있었다고만 한다(눅 22:66). 예수님께서 그가 메시야이심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였을 때, 그의 진술 사실은 기록되었으나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다(눅 22:71). 누가의 기록에서 이러한 사건의 순서는 누가의 독특한 자료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가의 기사를 축약한 것이다.|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체포되신 후 우두머리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의 집으로 먼저 끌려 와서 그에게 심문을 받았다(요 18:12-23). 산헤드린 의원들이 이 심문에 참석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에게 산헤드린이 행한 심리나 선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결정적인 소송은 빌라도 앞에서였고, 그는 유대인들의 압력 때문에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하였다(요 18:28-19:16).||(b) 사도행전에서 쉬네드리온.|쉬네드리온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그 앞에서 답변을 해야만 하는 법정으로 언급된다. 만일 산헤드린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이 충분히 사실이라면 사도행전 기자가 다소 자유롭게 기사를 전개한 것 또한 사실이다. 사두개인들은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적인 예루살렘 행정의 일부인 반면(행 4:1; 행 5:17; 행 23:6) 바리새인들은 호의적으로 묘사된다(행 5:34-39; 행 22:30-23:10). 공판에 대한 계속적인 보고에 의하면 그 강도가 점점 강해진다.||① 베드로와 요한이 처음으로 산헤드린 앞에 서게 되었을 때(행 4:5-7) 그들은 엄중한 경고를 듣고 방면된다(행 4:5-22).|② 두 번째 재판에서는 가말리엘의 변호(행 5:34-39)로 단지 채찍질과 잠잠하라는 경고만 듣고 석방된다(행 5:17-42).|③ 그러나 그 다음의 스데판의 재판-여기서 성전에 관한 말이 한 역할을 한다(행 6:14, 참조: 막 14:58과 병행구)-은 일반적인 소요로 끝나고 피고인은 돌에 맞아 죽음을 당한다(행 6:8-8:1).|④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을 때 천부장은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에 관하여 더 많은 정보를 원했으며 산헤드린을 소집하였다(행 22:30). 바울은 대공회 앞에 서서(행 23:1) 신속하게 상황을 요약하고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 받노라"(행 23:6)라고 말함으로써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다툼을 일으켰다. 사두개인들이 바울을 반대하는 한편 바리새인들은 그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로마 관원에 의해 밖으로 인도되어 나왔다(행 23:10). 천부장은 바울을 산헤드린 앞에 다시 데려와서 죽이고자 원하는 유대인들의 계획된 공격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행 23:15; 행 23:20)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에게 편지와 함께 보내어(행 23:26-30) 총독으로 하여금 유대인에 의해 고발된 이 로마 시민에 대한 소송 건을 결정짓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바울은 산헤드린에게 스데반처럼 죽임을 당할 운명을 모면하였다.|(참조: Lohse; I. H. Marash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