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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형체로
swmatikov"
몸의, 육체의||#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소마티코스(Aristot.)는 소마($4983: 몸, 신체)에서 유래했으며, '몸의, 육체의' of the body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소마티코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누가복음과 디모데전서에만 사용되었다.||(a) 눅 3: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b) 딤전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육체로
swmatikw'"
육체적으로, 신체적으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소마티코스(Plut., Mor.)는 형용사 소마티코스($4984: 몸의, 신체의)에서 유래했으며, '육체적으로, 신체적으로'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소마티코스는 신약성경에서 골 2:9에 한번 나온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소바더
Swvpatro"
소바더 Sopater (인)||소파트로스/ 소바더라는 명칭은 행 20:4에 한번 나오며, 아마도 롬 16:21에 동일한 사람이 소피파트로스/ 소시바더로 등장하는 것 같다. 소바더는 아마도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시 바울의 동역자였던 베뢰아의 소바더일 것이다.|→ 4989(소시바더: 4989)를 보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쌓아 놓다
swreuvw
쌓아 올리다 heap up||#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소류오(Aristot. 이래)는 소로스($4673: 쌓아올린 더미)에서 유래했으며, '쌓다, 함께 쌓다, 쌓아 올리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소류오는 70인역본에서 2회 나오며, 잠 25:22에서 하타(2846: 쌓아 올리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유딧 15:11에도 나온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소류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로마서와 디모데후서에만 사용되었다.||(a) 롬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여기서 바울은 잠 25:21-22을 인용한다. 이 문맥은 이 말씀이 사람에 의해 적대감이 소멸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b) 딤후 3:6,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여기서 소류오는 '어떤 것으로 가득 차 넘치다'라는 전이된 의미로 사용되었다. 거짓 선생들은 죄를 많이 지고 모든 종류의 욕심에 이끌리는 여자들을 유혹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F. Lang).
소스데네
Swsqevnh"
소스데네 Sosthenes||소스데네스/소스데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온다(행 18:17; 고전 1:1). 그는 바울이 고린도에 체재할 때의 그 곳 회당장이다. 그는 아마도 그리스보의 개종 후에 그리스보의 후임이었을 것이다(행 18:8). 갈리오가 바울의 기독교 설교에 분개한 성난 유대인들의 고소를 조사하기를 거절하였을 때(행 18:12-행 18:16), 그 성난 군중들은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때렸다.|이 소스데네는 고전 1:1에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게 보내는 인사말에 언급된 소스데네와 같은 사람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갈리오 앞에서의 폭력 사건 후에 어느 때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칠십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참조: HBD; Walter Bauer; J. H. Thayer).
소시바더
Swsivpatro"
소시바더 Sosipater (인)||소시파트로스/ 소시바더는 신약성경에서 롬 16:21에 한번 나오며, 소파트로스/ 소바더($4986)와 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로마서의 추신에 저자의 친척―동포―으로 그 이름이 적혀있는 사람이다(롬 16:21). 그는 그 메시지를 받는 자들에게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R.S.V. 롬 1:7)라는 인사말을 동봉한다. 그는 아마도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시 바울의 동료였던 베뢰아의 소바더일 것이다(행 20:4).
구원하는 자
swthvr
구주 saviour, 구원자 deliverer, 보존자 preserver.||#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명사 소텔은 소조($4982)로부터 형성되었으며, 따라서 소조와 소테리아의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다. 이 단어는 거의 독점적으로 신들과 사람들에게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의인화된 강에 적용되는 경우처럼(Hdt., 8, 138, 1) 예외가 있다.|소텔의 행위의 대상에 대해서는 동사 소조, 명사 소테리아와 명백한 차이가 있다. '상품을 보존하는' 것과 같은 어떤 소텔도 거의 없다. 소텔의 사역(使役)의 비인격적 대상 중에는 선박들(선원들과 함께), 또한 족장의 가정, 도시, 집, 조국, 세계 질서 등 인간 존재와 불과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이다. 그러므로 대체로 소텔은 인간의 영역에 국한되어 있다. 구원받는 자는 일시적이라할지라도 구원자에게 의존되어 있다.||(b) 인간을 통치, 간섭하고, 인간이 의지하는 신들은 구원자들이다. 신들은 인간의 생명을 위험들로부터 구원한다. 소텔을 사용하는 가장 오래된 본문에서 그리스의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인간들의 구원자로 지칭되었다(Hymni Homerici, Ad Neptunum, 22, 5). 이 단어는 여신인 레다(Leda, Hymni Homerici Ad Castores, 33, 6이하)와 수많은 신들에게 사용되었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제우스에게 사용되었으며(Pindar, ol, 5, 17, Plato, Rep. 9, 583b), 이시스(Isis)와 세라피스(Serapis)도 종종 구원자로 칭해졌다. 또한 헬라-로마 시대에는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도 병든 자들의 구주로 간주되었다(Clem. Alex., Protrepticus 2, 26, 8).||(c) 사람들도 구원자들로 불리워졌다.|① 조력자, 생명을 구해준 자, 의사는 구원자이다. 인간 구원자들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보호해 준 자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해준 자들, 병든 사람을 고쳐준 자들이다.|② 철학자들도 다른 사람을 도와 주거나 자유롭게 해주었을 때 구원자들이다. 따라서 소텔은 철학자들에게, 특히 에피쿠루스(Epicurus)에 대해 사용되었다(Polystratus, Herc. 346, p.80, 5).|③ 정치인들과 통치자들은 첫째로 그들의 특정한 활동에 관하여, 둘째로 그들의 신격화와 관련하여 구원자들로 불리워진 것이다. 마케도니아의 필립(Philip)은 데쌀리(Thessaly)의 거민들에 의해 친구요, 은인이요 구원자로 환호를 받았다(Dem., Orationes 18, 43).|로마 세계에 있어서 이 용어는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여전히 특정한 행위와 관련되어 있었으며, 반드시 신격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데 폼페이와 그의 부하의 경우에서처럼 최후의 책임이 있는 자의 부하들에 대해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④ 헬라니즘의 통치자 숭배에 있어서 소텔이라는 칭호는 왕들에 대한 공적 칭호의 일부가 되었고 신적인 명예가 그들에게 부여되었다. 소텔과 데오스 소텔(theos soter)은 프톨레메이오스(Ptlemaic) 왕조와 셀레우코스(Seleucid) 왕조의 왕들을 일컫는 공식, 명칭의 하나가 되었고, 소조(구원하는 일)는 통치자의 특별한 직무이다. 이 명칭은 이집트에서 통치자가 신의 아들이라는 관념과 관련되어 있다. 이집트에서 이 명칭은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에 역시 정부 관리들에게 붙여졌던 것이다.|⑤ 황제 숭배에서 소텔은 가장 강력하게 표현되었다. 소텔 테스 오이쿠메네스(인간 세계의 구원자)라는 말은 맨 처음에 시이저에게 사용되었다(IG 12, 5, 1, 557). 그러나 소텔은 로마 통치자들의 공식 명칭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비문들에는 하드리안(Hadrian)을 특정한 도시의 소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세주"라는 명칭은 보편화되었다. 황제가 주화에 자신이 소텔로 새겨지는 것을 허용하는 일은 드물었다.|⑥ 황금 시대에 관해서 말하자면, 은혜를 베푸는 자로서의 황제에 대한 개념은 또한 자신의 자비로운 통치로 시작된 평화와 질서와 번영의 황금 시대의 개념과 연결되었다. 곧 주전 1세기의 아우구스투스 통치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아시아 지역에 유포된 일반 칙령의 복사판인 것처럼 보이는 할리카르나쑤스(Halicarnassus)의 칙령은 다음과 같이 선포되었다. "영원하고 불멸적인 우주의 특성인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품에 있어서, 우리에게 시이저 아우구스투스를 주심으로써, 이미 주어진 엄청난 은혜에 가장 큰 선한 것을 덧붙여 주신 것이다. 그는 우리 시대의 행복한 생활에 있어서 그 자신의 나라의 아버지시요 데아 로마요 아버지 제우스 온 인류의 구주(soter)이시며 그의 섭리는 모든 사람의 기도를 성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능가하시기까지 하셨도다­왜냐하면 땅과 바다에 평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니라. 현재의 기쁨이 극치에 이르고 풍성하도다. 사람들은 경기와 헌물과 제사와 찬양의 [즐거움]이 흘러 넘침으로 충만되었도다…"(E.Barker, ed.,). 이와 유사하게, 프리네 비문(Priene), (대약. 주전 9년)에는 아우구스투스가 "우리를 위한 구주"로 칭송되어 있다. 비록 황제가 완전히 이 세속적 의미에서의 구원자이기는 하지만 그는 신이나 신적 섭리에 의해 이 직분을 부여받은 것이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소텔은 70인역본에서 35회 나오며, 히브리어 야샤(구원하다), 예샤(구원, 구출), 예수아(구원)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소텔은 특히 여호와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사 45:15에서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말한다.|외경들에서 소텔이란 호칭은 하나님께만 사용되었다(지혜서 16:17; 집회서 51:1; 마카베오일서 4:30; 마카베오삼서 6:29, 32; 7:16). 쿰란 문서에는 헬라어 소텔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 없다. 요세푸스는 이 단어를 예를 들어 요나단과 같은 인간 구원자에 대해서만 사용했다(Ant. 6, 240). 그러나 필로는 하나님을 자기 백성의 구원자이시며 민족과 우주의 유지자이시요, 고난과의 투쟁에서 영혼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보았다. 랍비 문서들에 단 한 번 나오는 실례는 별도로 하고, 메시야는 구원자로 칭해지지 않았다. 그밖에 하나님과 메시야는 고엘(구속자)이라는 단어로 묘사된다. '구속자'나 '구원자'가 신약성경 시대에 통용되던 메시야에 대한 호칭이었다는 증거는 없다"(W.Foerster; J.Schneider; C.Brown).||#3. 신약성경의 용법.||소텔은 신약성경에서 '구원자, 주주'를 의미하며, 24회 사용 중 16회는 그리스도에게 사용되고, 8회는 하나님께 사용되었다.||(a) 눅 2:11에서 소텔은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천사가 그것을 목자들에게 고지에 나타난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곳의 소텔(soter)은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민족 지도자와 하나님께 붙인 명칭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E.E.Ellis).|눅 2:14에 의하면 예수님은 구주로서 평화를 주시는 자이시다. 이것은 사람들이 아우구스투스를 평화를 가져온 소텔로 찬양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참된 전달자이신 소텔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예수는 구주로서 낮은 세상에 그의 보좌를 세우고 어두운 세력을 멸하며 인간을 모든 위험과 필요와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재난과 파멸에서 보호하시고 땅위에 평화를 가져온 자이다. 헬라어 성경에는 구주란 말에 관사가 없으니 이는 그 이름이 여기서 고유 명사로 쓰인 까닭이며, 오직 그 만이 구주심을 나타낸다.|눅 1:47의 마리아의 찬가에서 소텔은 하나님에게 사용되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합 3:18에서 이런 표현을 볼 수 있다. "하나님 내 구주"는 마리아가 하나님을 자기 구주로 인정하는 신앙을 표현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죄있는 비천한 자임을 인식하고 구주의 필요를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의 구주시며, 특별히 자기의 구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외부적인 원수에서 구원이요, 또한 내부적인 죄에서 구원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으로 확실히 되었는데 마리아에게 허락한 메시야를 통하여 성취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영광스런 구원 계획의 도구로 비천한 촌 처녀인 자기를 택하여 메시야의 모친이 되는 큰 영예를 주신 특별한 은총에 감격하고, 그런고로 자기가 받은 영광의 찬사와 오고 오는 세대에 모든 사람이 자기를 "복이 있다" 칭할 모든 찬사까지 함께 모아 그것을 모든 영광과 감사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 하나님께 돌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함은"이라고 찬송했습니다. 마리아의 구주에 대한 찬양과 그 기쁨은 영혼의 가장 조용하고 고상하고 신성한 성전에서 흘러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영광을 깨달을 때 더욱 자신이 값 없고 보잘 것 없는 것을 느꼈으며, 그 영광이 자기에게 어떻게 귀한 것임을 깨달을 때 참된 주의 계집종으로서 복종할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b) 요한의 기록에서 소텔은 2회, 요한복음에서 1회, 요한일서에서 1회 나온다. 요 4:42에서 소텔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는 사마리아인들의 고백에 나온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사마리아 여인)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이 고백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각성시킬 때 사용하신 말과 대조된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의 예배의 헛됨에 관심을 집중시키시고 이 구원은 유대교와 결부되어 있으며 유대교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요 4:42에는 구원의 우주적인 국면이 나타나 있다.|요한복음에는 그 외의 역설이 암시되어 있으니 곧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구원을 보고 응답하였음에 반하여,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이 두 구절이 그리스도는 유대들의 구원자 뿐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원자도 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요일 4:14에서 요한은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한다"고 천명하였다.||(c) 유대인들에게 행한 원시 교회의 선포(사도행전)에서 소텔은 2회 나온다.|행 5:31에서 소텔은 이스라엘을 위한 구주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임금과 구주"는 70인역 사사기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원수들에게서 구원하기 위해 세우신 자들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의도된 역할을 예시해준다.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정치적 해방을 소원한 반면, 그리스도는 죄사함을 내용으로 하는 영적 구원을 주시려 오셨다는 것이다.|행 13:23에서도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이 두 구절에서 설교는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를 분명하게 구별짓는다. 동시에 이 설교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도구로 택함받아 하나님의 임명을 받고 임명되고 권능을 받으신 분으로서의 예수님의 유일회성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엄밀히 말해서, 바로 이 점이 교회와 유대인들 간의 충돌점이었다.||(d) 교회에 보내는 바울 서신들에 소텔은 오직 두번 나온다. 빌 3:20에서 소텔은 독자들에게 현생의 시련들 가운데 있는 그들의 종말론적 실존과 기대를 상기시키는 말씀에 나온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엡 5:21-엡 5:33에서 소텔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상징으로 나오는 결혼 관계 내에서의 상호 사랑과 존경에 대한 권면에 나온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 5:23). 엄밀한 의미에서 몸의 구주는 '자기 몸인 교회의 구속자요 보호자이신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리스도는 구원자이시다. 왜냐하면 구원이 완성될 때 자기 앞에 순결하게 세우시기 위하여 자신의 교회를 사랑하사 사망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셨고 물과 말씀으로 씻어 교회를 정케 하셨기 때문이다(25절 이하).||(e) 목회 서신들에서 소텔(soter)은 다른 어떤 신약성경의 문서들에서 보다 비교적 더 자주 나오며 6회는 하나님에 대해, 4회는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었다.|① 목회 서신들에서 구세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진술은 하나님, 보편성과 특별성을 나타낸다.|딤전 4:10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 특별히 믿는 자의 구주로 나온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딛 1:3에 의하면, 이 구원은 전도로 실시되었다: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이는 구원의 메시지가 만만에게 전파되어 그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구주"란 말은 피상적이나마 만인구원설을 시사해준다. 바렛트(Barrett)는 딤전 4:10에서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생명의 구원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생명을 보존하시며, 악인과 선인에게 해를 비추고 동일한 비를 내리신다. 이러한 뜻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주'시다. 이렇게 보고 마지막 구절인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란 말을 읽으면 그 뜻이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일반 은혜는 누구나 받는다. 그러나 오직 깨어서 그리스도께 전적인 순종과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의 은혜를 받는다(참조: J.G.Goul).|딛 2:10에서 소텔은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떼어 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기독교인들은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돋보이게 하는 생활을 영위하여야 한다. 그러나 다음 구절(딛 2:11)에서 이미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 능력에서 계시되었고 교회 구성원들, 곧 종들의 새 생활에로 나타내어진다고 선언하였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모든 사람을 포용하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 계획들을 실현시키는데 관심을 기울이신다. 디모데전서의 서문에서(딛 1:1)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동일한 방법으로 구주로 칭함을 받으신다.|② 구주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구설들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 아주 포괄적 묘사를 한다.|딤후 1:10에서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세우신 사람들을 구원하실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의 첫번 나타나심을 통해 세상에 나타내셨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딛 3:4에 의하면 구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타났으며(딛 3:4) 그것은 특히 헬라의 통치자들을 찬양할 때 사용되었던 특성들이었으나 이곳에서는 하나님께로 양도되었다. 딤후 1:10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는 그의 죽음을 폐지하심과 불멸의 →생명(Life)을 빛으로 가져오심으로 이룩되었다.|영원 전에 정해진 하나님의 자유로운 목적과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그분의 은총을 통해서­따라서 우리의 공적을 기초로 하지 않는다­신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다. 정화와 중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긍휼하심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셨다. 성령(영→Spirit)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풍성히 임하게 되었다(딛 3:5이하).|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로서 신자들은 구원의 완성과(딛 3:7), 소망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으니 이것은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통하여 받게 될 것이다(딛 2:13).||(f) 베드로후서에서는 소텔이 일반적으로 퀴리오스(주)라는 칭호와 결부되어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비교적 자주 그 벧후 1:1이하에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벧후 1:11에서 베드로는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권면한다.|벧후 2:20에서 소텔은 정욕에 얽매이는 것에 대한 경고와 관련되어 나온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벧후 3:2에는 "진실한 마음"을 일깨우도록 하라는 말씀이 있다.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이곳에서 기독교는 새 율법이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참조: 벧후 2:21). 이 서신은 다시 지식이라는 주제를 사용하고 있는 기도로 끝나는데, 이 지식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의 계명에 대한 지식도 포함되어 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아멘"(벧후 3:18).|이와 유사하게 유 1:25도 다음과 같이 끝난다.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찌어다 아멘."|(참조: W. Foerster; J. Schneider; C. Brown)
구원하시는 구원
swthriva
구원, 구출 salvation, deliverance, 보존 preservatio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명사 소테리아(호머 이래로)는 소테르($4990)에서 유래했으며, 일차적으로 '구원'(salvation)을 의미한다. 이 구원은 신이나 사람이 심각한 위험에서 힘으로 구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소테리아는 '안전하게 돌아옴'을 의미한다.||(b) 소테리아는 '지킨다'는 의미에서 '사면', '보호나 궁핍으로부터(사람들을) 지키는 것, 기억을 보존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c) 소테리아는 '유익을 준다'는 의미에서 '안녕, 복지, 평화, 부요, (곡식이나 열매의) 성장, 건강'을 의미한다.||(d)종교나 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 4982 소조.||#2. 70인역본의 용법||소테리아는 약 150회 나타나며, 6개의 히브리어의 파생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런 히브리어들은 '구원받다, 구출되다, 구원, 구출', '안녕, 평화, 도피, 평온한, 번영하는, 건전한 지식'의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소테리아는 신약성경에서 45회 나타나며, 개역 한글판은 모두 '구원', NASB는 구출(2회), 보전(1회), 구원(42회)이란 의미로 번역했다.||(a) 신약성경에서 소테리아는 육체적 위험으로부터 구출이라는 의미로 극히 드물게 사용되었다. 행 7:25에서 소테리아는 육체적 위험에서 구출을 나타낸다: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행 27:43에서 동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히 11:7에서 노아 구원은 노아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간주되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히 11:7). 이 구절들에서 문제의 구원은 육체적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수난 사화에는 하나님께서 그런 구원을 능가하는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b) 신약성경에서 소테리아는 신학적 의미로 사용되었다.|공관복음에서 소테리아는 눅 1:69; 눅 1:71; 눅 19:9에서만 나온다.|사가랴가 그의 아들인 세례(침례) 요한의 탄생 때에 읊은 시에는 이 아이가 전할 구원에 관한 세 가지 언급이 있다. 그러나 구약성경 사상 세계의 견지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눅 1:69에서 사가랴는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심"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한다. "짐승의 힘이 그 뿔에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구원의 강한 행동을 이루심에 있어서 '뿔'이신 것이다(참조: 시 18:2; Dt.33:17; 1QH 9:28이하). 하나님에 대한 고대의 호칭이 메시야께도 적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는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사자들"에게 이 명칭이 사용되었다. 이것이 이 구절에 나타나 있는 것 같다. 참조: 삿 6:11- 삿 6:23; 삿 13:21이하; 말 3:1(E.E.Ellis).|눅 1:71에서 이 구원은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되는 것으로 해석된다.|눅 1:77에서 이 아이는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았다(참조: 말 4:5; 막 1:4). 구약성경에서는 죄로부터의 정화가 대적으로부터 육체적 구원의 필수조건이었던 반면에, 이 시편은 빛과 평강의 필수 조건임을 시사한다(눅 1:78이하; 참조: 말 4:2; 사 9:2). 이 빛과 평강은 이제 이차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입장에서 이해되었다.|눅 19:9이하에서 부자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임한 것은 소테리아의 특별한 의미를 나타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9이하; 참조: 눅 5:1-눅 15:1-눅 15:23).|부자가 구원을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막 10:27).|구원은 완전히 인간의 가능성을 초월한다. 삭개오에 일어난 변화는 이것을 입증해 준다.||(c) 사도행전에서 소테리아는 6회 나오며, 2회는 육체적 위험으로부터 구칠이란 의미로 사용되었고, 이 항목에서 4회 사용되었다.|원시 교회의 선포에서 소테리아가 → 복음의 기초이며, 내용이며, 목표로서의 그리스도에게 사용됨으로써 그 단어들은 중요시되었다. 이 단어들은 예수님의 전도의 본질적 특징을 요약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분명하게 나탄 있다. 행 4:12에서 베드로는 모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라고 선언하였다. 헨첸(E.Heanchen)이 여기에서 "소테리아(soteri)는 '고침'과 '구원' 모두를 포함한다"고 말한다.|행 4:12에서 베드로는 기독교의 구원 메시지는 절대적이고 우주적 요구라고 주장하였다. 먼저 유대인에게 전달되었고(행 13:26) 다음으로는 이방인에게 전달되고(행 16:17) 그래서 땅끝까지 구원을 위한 것이다(행 13:4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d) 바울에게 있어서 소테리아(와 소조)는 분명히 의도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만으로 제한하여 사용되었다.|구원하는 은혜에 대한 메시지는 케리그마를 통해 인간들에게 전해졌다. 엡 1:13에서 복음은 구원을 가져온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멸망으로부터의 구원을 가져온다(롬 1:16; 참조: 고전 1:21). 엡 1:13에는 구원의 과정이 포괄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서신을 받은 신자들은 그들이 구원받기 이전에 복음을 들었다. 그들은 믿게 되었고 성령(→영 Spirit)으로 인치심을 받았다.|사도 바울은 고후 6:2에서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는 사 49:8의 말씀을 인용한다.|이사야의 말은 이 시대, 이 날을 "지금"이라고 아주 정확히 말한다. 우리가 이런 은혜의 때에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 접촉하지만 피상적이고 공허한 방법으로 그 은혜를 대한다면 얼마나 비극적인가? 개인의 생애에서 유사한 경험을 갖는다. 구원의 날이 온다. 하나님이 때를 주신다. 그 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라. 그 때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이 멸시하지 말라. 언제 그에게 마감될지 모른다. 항상 우리의 행복을 위해 기다리고 있지는 않다(R.C.H.Lenski).|고후 1:6에서 바울은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다면)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라고 말한다.|바울과 디모데가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다. 여기에서 구원은 고난에서 건짐을 받는 의미로 제한해서는 안된다. 소테리아의 본 의미는 죄와 사망과 저주에게 구원받는 것이다. 만일 지도자들이 안락한 생활을 한다면 신도들에 유익이 되겠는가?|빌 2:12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구원을 받은 자들은 그들의 미래의 구원 즉 두렵고 떨림으로 거룩한 생활을 함으로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살전 5:8에서 바울은 현재의 거룩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권면한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그리스도인의 믿음, 즉 그리스도를 능동적으로 믿고 의지함으로 산다. 그리스도인은 "소망으로 구원을 얻고"(롬 8:24), 보증으로 미래를 의지한다(참조: 롬 8:28, 롬 8:31-롬 8:32).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생애 중에 가장 치명적이고 상처 받기 쉬운 분야에서도 능히 보호함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뒤따르는 살전 5:9은 직역하면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노하심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이다. 트렌취는 노하심(오르게)는 단순하고 일시적인 감정의 동요라기 보다는 오히려 징벌의 목적과 연관된 영원하고 고정된 습성(Habit of mind)라고 한다. 이런 오르게는 하나님의 사랑의 필요보족(complement)이다. 이러한 노하심으로 우리는 더욱 성결해지는 것이다.|살후 2:13에서 구원의 두가지 측면을 제시한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참조: 살전 4:3-살전 4:4, 살전 4:7), 다른 하나는 "진리를 믿음으로 얻는 것"은 구원의 두 가지 측면이다. 구원을 주도하는 것과 그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한나님의 영역이다. 인간의 영역은 필요한 반응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책임을 압도하거나 백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도덕적인 관건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선택의 문제가 따르는 것이다(참조: A.E.Airhart).||(e) 목회서신에서 소테리아는 디모데후서에 2회 나온다. 딤후 2:10에서 바울은 자신의 고난은 택하신 자들을 위해 마땅히 당해야 할 일이니 곧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제 바울은 그전보다 훨씬 더 어려운 환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순종의 시험을 받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고난 속에서 어느 정도 주님의 구속적 고난을 볼 수 있었다. 바울의 철저한 헌신은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무엇인가 기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구원이 영원한 영광과 구분되어 있다.|딤후 3:14이하에는 성경에 대한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륵 할 수 있다고 언명되어 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참조: 요 5:39; 고후 3:14; 히 4:2).||(f) 공동서신에서 소테리아는 베드로서에 4회, 유다에 1회 나온다.|베드로전서에서 사도 베도로는 최후 구원을 표현하기 위하여 수많은 다른 어법들과 함께 소테리아를 사용한다.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는데, 이 구원은 이미 존재하나 오직 마지막 때에만 계시될 것이다(벧전 1:15).|기독교인들은 설교와 교육을 통하여 받는 신령한 음식으로 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난다"(벧전 2:2).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믿음의 목적지, 즉 휘몬 소테리아 프쉬콘("너희 영혼의 구원"), 곧 그들의 것인 영화에 이르게 된다(벧전 1:9). 이미 선지자들은 이에 대하여 숙고하였고 또한 예언하였다(벧전 1:10).|벧후 3:15에서 독자들은 재림이 지연되는 주요 이유인 하나님의 참으심을 그들의 최후 구원의 동기로 받아들이라고 권고받는다. 그들이 성화를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한에서만 궁극적 구원은 보장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종말론과 윤리학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유 1:3에서는 그 기반을 현재 여기에 두고 있는 심판 때의 구원이 다루어져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g) 히브리서에서 소테리아는 7회 나온다.|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는 소테리아의 개척자이시며 근원이시며 중개자이시다(히 2:10; 히 5:9). 초림에서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하나님의 미래적 구원 활동을 위한 기초를 구축하셨다. 재림시에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완성자로 나타나실 것이다(히 9:28). 모든 국민들에 있어서 구원은 사람과 함께 행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의 목표이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전달된 구원은 완전한 것이며 또한 영원토록 유효한 것이다(히 5:9). 히브리서에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그리스도의 선포 Proclamation로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참조: 히 1:1이하). 구원은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전하여졌고 그들은 이 구원을 계속 전달한다. 또한 이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이적들과 성령의 은사들로 확증된다(히 2:3이하). →천사들 Angel도 하나니의 구원의 계시 가운데 섬기기 위하여 하나님께 임명을 받았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구원의 도구들이다(히 1:14).|히 6:9에서 "이보다 더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은 '구원에 속한 더 좋은 것들'을 의미한다.|히 11:7에 대해서는 3. 신약성경의 용법: ⒜에서 설명했다.||(h) 요한의 기록.|소테리아는 복음서 중에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말에서 단 한 번 나온다: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요한계시록에서 소테리아는 3회 발견되는데 모두 예배를 나타내는 예전적인 구절들에 나온다. 계 7:10에서 큰 무리는 구원을 하나님과 어린 양께 돌린다: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이 말은 계 12:10에서 용이 내어 쫓김을 당한 후에 다시 나온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났고". 계 19:1에서는 바벨론의 멸망 후에 나온다: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승전과 승리의 찬송들은 하나님의 모든 대적들이 정복 되고 난 후인 지금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만 속한다고 선포하고 있다.|(참조: W. Foerster; J. Schneider; C. Brown)
구원을 주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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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하는, 구출하는, 보존하는, 구원을 가져오는, 구원의 방편, 구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소테리오스는 소텔($4990)에서 유래했으며, '구원하는, 구출하는, 안전을 가져오는, ~로의 구출'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단어는 소조($4982)의 모든 용법에 따라, 그 구원하고 은혜를 끼치고 유익을 주고 보존시킨다는 의미에서 영웅, 햇빛, 물, 이성 등을 수식하는 말로 사용될 수 있다. 이 단어는 예를 들어 사람들, 국가에 안전을 가져오는 자(Soph. OC, 487codd.), 또한 제우스를 포함한(Soph. El. 28 1; Fragment 425) 신들에게(BGU 362, 5, 1[주전 3세기]) 사용되었다(Liddell-Scott, 1751).(참조: W.Foerster; J.Schneider; C.Brown).||#2. 70인역본의 용법||소테리오스는 70인역본에서 150여회 나오며, 야샤(구원하다, 구출하다)와 그 파생어들(구원, 구출), 샬롬(평화), 셸렘(화목제), 테슈아(구원)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소테리오스는 신약성경에서 5회 사용되었다.|눅 2:30에서 소테리오스는 시므온이 읊은 시에 나타난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 구원은 아이에 나타나 있는 메시야시다. 시므온은 목자들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무슨 표적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자기 팔에 안은 아기 예수가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많은 계획으로 준비하고 열렬히 기다린 "주의 구원"이라고 고백하고 증거했다.|이 메시야 구원에 대하여, 눅 3:6에서 사 40:5을 인용하고, 행 28:28에서 시 67:2을 인용하여 확증한다.|엡 6:17에서 소텔리오스는 "구원의 투구를 …가지라"는 말에 나타난다.|"구원의 투구"는 70인역본의 사 59:17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거기서 하나님은 전사로서 구원의 투구를 쓰고 그에게 속한 자들을 위한 구원자로 등장한다.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구원이 모든 인간 생활의 참된 가치를 지켜주는 최대의 보호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구원의 투구는 하나님의 구원의 대열에 나설 때 받게되는 보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투구를 구원으로 표현하는데, 살전 5:8에는 투구를 "구원의 소망"이라고 표현한다. 웨스트코트는 '구원의 확신은 인생의 모든 위험을 초월케 한다'고 간략히 논평했다(참조: W. H. Taylor; F. Foulkes).|딛 2:11에서 소테리오스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는" 말에 나온다.*
근신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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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한 마음을 가지다, 신중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소프로네오(trag., X., Pla. 이래)는 소프론($4998)에서 유래했으며, '건전한 마음을 가지다, 정신을 차리다, 합리적이다, 온건하다, 신중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소프로네오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막 5:15(병행구 눅 8:3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여기에서 귀신병의 치유의 증거는 그 귀신들린 사람이 바른 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b) 롬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여기서 그의 독자들에게 믿음의 분량에 따라 건전한 판단력을 가지고 그들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말할 때 그는 언어 유희를 하고 있는 것이다.||(c) 고후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여기서 영적 열광주의 자들의 행동과 소프로네오를 대조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건전한 헌신은 하나님 앞에서의 엑스타시와 일치한다.||(d) 딛 2:6,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여기서 소프로네오는 '신중하고 규율 있는' 생활을 표현한다.||(e)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여기서는 신앙 공동체에게 사물들의 임박한 종말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적 광란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와 같이 하는 것은 이 세상의 희생물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요구되는 절제는 신앙에 의해 유지되며, 기도와 사랑으로 나타난다(벧전 4:8). 따라서 여기서는 철학적 태도 이상의 것이 요구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S. Wibbing; V. Lack).
교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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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차리게 하다, 훈계(련)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소프로니조(Eur., Thu. 이래)는 소프론($4998: 건전한 마음의, 자제하는)에서 유래했으며,||(a) '어떤 사람을 정신 들게 하다, 정신을 차리게 하다'|(b) '어떤 사람에게 자기의 의무를 지키게 하다'|(c) '훈련하다, 훈계하다, 충고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소프로니조는 신약성경에서 딛 2:4에 한번 나온다: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근신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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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 절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소프로니스모스(Strabo, Plut.)는 소프로니조($4994: 남을 정신 들게 하다, 정신을 차리게 하다, 훈계하다, 충고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도덕적 교훈, 좋은 판단, 자아통제, 절제, 충고, 개선, 분별력, 신중'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소프로니스모스는 신약성경에서 딤후 1:7에 한번 나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여기서 소프로니스모스는 특히 '자아통제, 절제(심)'를 의미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근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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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하게, 신중하게||#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소프로노스(Aeschyl., Hdt. 이래)는 소프론($4998)에서 유래했으며, '건전한 정신(마음)으로, 합리적으로, 신중하게, 자제하며'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소프로노스는 70인역본에서 외경 지혜서 9:11에만 한번 나오며, '건전하게'를 의미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소프로노스는 신약성경에서 딛 2:12에 한번 나온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여기서 이 단어는 생활의 '건전함, 신중함'을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정신차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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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 자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소프로쉬네(Homer. 이래)는 소프론($4998)에서 유래했으며, '마음(정신)의 건전함, 온건, 합리적인 신중, 자제'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소프로쉬네는 70인역본에서 9회 나오며, '절제'(지혜서 8:7), '온건'(마카베오이서 4:37)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소프로쉬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사도행전과 디모데전서에만 사용되었다.||(a) 행 26:25,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여기서 알레데이아스 카이 소프로쉬네스는 '참되고 이성적인 말'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가 참되고 이성적인 말을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미친 것이라고 비난하는 베스도에 응수한다.||(b) 딤전 2: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여기서 소프로쉬네는 적당한 '억제, 자제' 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딤전 2:15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근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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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한 마음의, 절제하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소프론(Homer. 이래)은 소스(%717: 안전한, 좋은)와 프렌($5424: 횡경막, 마음, 정신, 생각)에서 유래했으며, '건전한 마음(정신)의, 절제하는, 사려 깊은, 신중한'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소프론은 신약성경에서 4회 목회서신에만 나오며, '절제나 자제하는' 즉 자기의 욕망과 충동을 억제하는 신중함을 나타낸다.||(a) 딤전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b) 딛 1: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c) 딛 2:2,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d) 딛 2:5,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