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
fivlo"
친구 friend.||#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필로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a) 형용사로 '사랑받는, 친애하는, 사랑하는, 친절한, 친구다운, 애정 깊은'(Homer).||(b) 실명사로 '친구' friend.|① 문자적 의미(Plut., Mor.),|② 특별한 의미(제우스의 필로스라는 표현 등, Hdt., Piod.).||(c) 여성형 필레(%1014), (여성) 친구(X., Mem.)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필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80회 나오며, 주로 레아(7453: 친구, 신 13:7; 욥 2:11; 잠 3:29; 잠 6:1; 잠 6:3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아헤브(157: 사랑하다, 분사, 친구, 에 5:10; 에 5:14; 에 6:13; 렘 20:4; 렘 20:6), 메레아(4828: 친구, 동료, 삿 14:20; 삿 15:2; 삿 15:6), 샬롬(친한, 친구, 렘 20:10), 알루프(441: 친한, 친구, 잠 16:28; 잠 17:9), 하바르(2269: 친구, 동무, 단 2:17; 단 2:18)의 역어로 사용되어, '친구, 동무'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필로스는 신약성경에서 2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누가의 기록에서 필로스(와 필레).|① 누가는 눅 7:34의 노래에서만을 제외하고 예수님을 결코 필로스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단어의 사용을 자제한다. 거의 항상 누가는 이 단어를 일상적인 세속 언어의 범주 내에서 사용한다. 단 세 번의 경우, 즉 눅 12:4; 눅 16:9; 행 27:3에서만이 특별한 신약성경 용법을 논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밖의 다른 대부분의 구절에서도 다소간의 신학적 의미를 지니는 것은 사실이다. 우선 필로스는 '친밀하거나 잘 아는 자'로서의 친구이다. 이 단어는 대개 복수형으로 나온다. 눅 14:12; 눅 15:6; 눅 15:29; 눅 21:16과 행 19:31에서 그렇다.|행 19:31에서 아시아 관원들은 바울이 잘 아는 사람들이다. 눅 7:34과 병행구의 친구(booncompanion)는 이 일반적인 용법의 특별한 형태이다. 눅 15:29도 참조하라.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오히려 '청년 시절의 친구'라는 의미가 있다.|누가는 이 단어를 '친밀한 사적 친구'(눅 11:5; 눅 11:8; 눅 23:12), '손님'(눅 11:6), 지도자 주위에 모이는 친구들 무리의 일원(눅 7:6; 행 10:24; 또한 행 16:39Cod. D)에 대해 사용하기도 한다. 신약성경에서 누가만이 필로스를 두 개의 연관성 깊은 용어들, 즉 슁게네스 및 게이톤과 결합시킨다. 이 두 단어는 종종 필로스와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행 10:24("일가와 가까운 친구들")과 눅 15:6("그 벗과 이웃")이 그 예이다. 또 눅 15:9의 필레를 참조하라: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눅 15:9). 게다가 누가는 문체상으로 네 부류의 무리를 기술하기를 즐겨하는데, 눅 14:12; 눅 12:16에서 그러한 무리에 필로스를 둔다.||② 눅 14:12의 규칙에서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고대의 관습에 공공연히 대조된다. 고대의 관습에서는 모든 것이 호혜주의의 원리에 기초하나, 예수님은 이것을 분명히 배척하신다: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눅 14:12b).|마 5:46 이하와 그 병행구들에 나오는 말씀들도 눅 14:12의 규칙에 정확히 일치한다. 몇몇 증거들은(%1015와 코이네 본문)는 마 5:47에서 아델푸스 대신에 필루스라고 읽는다. 대구법에 의하면 호이 필로이 휘몬은 아가폰테스 휘마스("너희를 사랑하는 자", 마 5:46)에 상응한다. 그리고 마 5:46에서 처음과 나중의 아가판이 서로 상응하듯이, 마 5:47에서 필론 에이나이와 아스파제스다이는 서로 상응한다. 여기서 문제시되며, 모든 시대의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꺼림칙하게 여겨온 우정과 사랑의 배타적 장벽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무너뜨리시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참조: 마 5:42-48과 병행구 및 눅 14:12-14과 함께 눅 14:21-23과 특히 눅 10:27-37).|눅 14:12에서도 우정(friendship)과 식탁 교제(fellowship)가 상호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눅 15:29에서 돌아온 탕자를 위하여 잔치를 연다는 소식을 맏형이 들었을 때 그는 즉시 친구들을 생각한다. 그가 비록 원했으나 한번도 친구들을 위하여 열지 못한 그 잔치는 친교와 화해를 뜻하는 아버지의 잔치의 세속적 대응물이다.|눅 15:6; 눅 15:9에서 잃어비린 양을 찾은 행운아가 벗들을 불러 모은 것도 역시 잔치를 열기 위해서이다. 눅 7:34과 병행구에서는 비록 나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동일한 문맥과 사상을 보여준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예수님이 악명 높은 죄인들과 함께 상에 앉는 사실이 그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의 특별한 근거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고, 또 그들에게 사랑을 받으신다. 눅 7:37-50에서 보면 죄인이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값비싼 향유를 바르고 입맞추는데, 이것은 감사를 나타내는 사랑의 표현이다. 우정과 식탁 친교의 밀접한 관계는 매우 일찍이 손대접에서 볼 수 있다.|이것은 눅 11:5-8에서 비유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필로스가 4회 나오며, 3회는 거의 '선한 이웃'이라는 의미로(눅 11:5; 눅 11:8), 한 번은 환대의 개념에 매우 근접하는 '손님'의 의미로(눅 11:6) 나온다. 환대의 두 관계는 신성한 임무를 수행한다. 이웃이자 주인으로서 친구는 한 친구를 위하여 쓸모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관계는 적용, 즉 친구는 간청할 수 있고 또 친구는 간청 받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누가복음의 주기도(눅 11:1-13) 중에서 나오기 때문이다.||③ 기쁨은 우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친구는 즐거운 일에 초대된다(눅 15:6; 눅 15:9; 눅 15:29). 하지만 이와 반대되는 일, 즉 친구의 운명에 참여하는 것-특히 그것이 역경일 때-이 훨씬 더 중요하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눅 12:4). 우정은 봉사, 관심, 희생, 심지어 생명 그 자체까지도 바치는 희생을 의미한다. 눅 11:5-8에 나오는 간청하고 간청 받는 친구의 비유는 이것을 분명히 한다. 환대의 견지에서든 친절(neighbourliness)의 견지에서든 친구는 폐가 될 때에라도 친구로부터 도움을 기대할 수 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벗들은 분명 직무를 행하고 있다(눅 7:6). 반대로 백부장 고넬료는 그의 삶 가운데 최고의 경험이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그에게 왔을 때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이 함께 하기를 원했다(행 10:24).|누가의 주목할만한 기록에 따르면 바울의 친구인 에베소의 아시아 관원들은 아시아 지방의 이교 대제사장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친구의 생명을 구하고자 개입하였다(행 19:31).|이곳과 아마도 행 27:3에서만 바울의 친구에 대해 말하고 있다.|누가는 한 번, 행 9:25에서 바울의 마데타이를 언급하는데, 이들은 아마도 (젊은) 친구들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밖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이 제자들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 자신은 필로스나 마데테스 같은 용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아델포스나 테크논을 사용한다. 바울이 자기 주변애 모여든 큰 무리의 친구들 가운데 우두머리였다는 사실은 누가의 기록으로부터 유추된다.|행 27:3에서 바울의 친구들은 누가의 어법이 지적해 주는 바와 같이 바울을 대접한 시돈 사람들도, 바울이 시돈에 머무르는 동안 우호적으로 돌보아주었던 그의 개인적 친구들도 아니다. 오히려 이 친구들은 그리스도인들로서, 사도에게 관심을 가지고 보살핀 자들이다(예: 고후 11:9; 빌 4:10; 빌 4;16; 빌 4:18).|신자들을 가리킬 때 "친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누가의 기록에서 뿐 아니라 요한복음에도 나타난다(요 11:11; 요 15:13 이하). 친구라는 단어는 첫 제자들이 사용한 것 같은데 예수님의 친구이며, 피차간에 친구인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새로운 친구들이며, 하나님 가족의 일원들이기도 하다. 만약 그 단어의 기존 용법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그 단어는 행 2:44 이하에 묘사되어 있는 바와 같은 초대 교회의 생활을 표현하게 된다.||④ 누가복음에서는 우정의 다양한 긍정적 측면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측면도 발견된다. 누가복음에서 '메시야 화'에 관한 주제에서 부모와 자식과 형제의 사랑이 거꾸로 미움으로 바뀔 뿐만 아니라(참조: 막 13:12과 마 10:21) 친구가 원수로 변한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눅 21:16 이하). 이 역전의 주제는 그 자체로는 종말론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생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시의 이교 사상 뿐만 아니라 유대교에서도 친구의 신뢰할 수 없음에 대한 염려와 경고와 불평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⑤ 예수님은 눅 12:4에서 그의 제자들을 친구들(필로이)이라고 부르신다. 여기서 필로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가족에 대한 비유의 하나이다. 여기서의 친구 관계는 동등한 친구 관계가 아니라 스승과 학생 사이의 친분으로서,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장래 과업과 운명에 대해 가르치고 계신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의 장래의 일과 운명에 대해 알려주실 때 필로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시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눅 12:4 이하; 참조: 요 14:26).||⑥ 몇몇 비유와 비교에서 하나님이 사람들, 특히 제자들의 친구라는 사상이 암시된다. 비록 눅 11:5-8의 비유는 참된 친구라면 자기 친구의 요청에 잠시도 망설이지 않을진대 하물며 하나님은 얼마나 더 신속하게 응하시겠느냐로 결론을 맺지만 그 배경에는 하나님이 친구의 요청을 들어주시고 진정 요청 받기를 원하시는 가장 좋으신 친구라는 사상이 여전히 놓여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친구들이라는 상응하는 사상을 가진다.|동일한 개념이 눅 14:11의 비유에서도 암시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친구들을 높이시는 종말론적 연회의 주(Lord)요 호스트이시다(눅 14:10). 아마도 눅 16:9의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는 말씀에서도 하나님이 친구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서 삶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사랑(아가페)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리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친구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초대 공동체는 마 11:19과 병행구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비난에서 '죄인들을 위한 그의 사랑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죄인의 친구로 만드시는 그의 메시지를 표현하는 반포된 수수께끼'라는 통찰력이 감추어져 있음을 보았다.||(b) 요한의 기록에서 필로스.|신약성경에서 요한만이 필로스를 특별한 "신랑의 친구", '최상의 사람'이라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한다(요 3:29). 이것은 세례(침례) 요한에 대한 은유로서 예수님과 요한의 친밀한 관계 및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사심없는 복종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이 최상의 사람의 임무는 가장 비이기적인 우정(친교)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많은 다른 분야에서처럼 요한은 친구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 누가와 놀랄만큼 유사하다. 우정과 기쁨의 밀접한 연관성은 신랑 친구의 모습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요 3:29).|우정(친교)와 식탁 교제 간의 연관성이 또한 베다니의 가정에서 분명히 나타난다(눅 10:38-42; 요 12:1-8). 누가는 결코 그 오라비와 누이들을 예수님의 필로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요한은 종종 그들과 예수님간의 친교의 밀접한 관계를 표현한다(요 11:3; 요 11:5; 요 11:11; 요 11:36). 여기서 동사 필레오(요 11:3와 요 11:36)를 사용함으로 개인적 친밀함을 보여주는 한편, 요 11:11의 "우리 친구 나사로"라는 표현은 제자 관계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요 11:11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친구들"이라고 불렀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의 친구로서의 그들의 지위는(요 15:13-16) 예수님의 선택의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예수님은 그의 둘로이(종들)를 필로이(친구들)의 상태로 높이셨으니, 이것은 퀴리오스(주님)의 자유로운 선택이 의한 것이었다. 구약성경에서 여호와께서 그의 친구들을 택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그의 친구들을 택하신다. 예수님의 엔텔레스다이(%1016)에 대한 그들의 순종은(요 15:14), 이것이 두 대등한 존재 사이의 우정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매우 뚜렷하게 밝혀준다. 그는 여전히 퀴리오스이시다. 그러나 그의 엔톨레($1785: 계명)는 그가 친히 완전하게 성취하시는 사랑(참조: 요 15:17)의 계명으로 정의된다(참조: 요 15:10).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그들의 동류로 만드신다. 이것이 바로 요 15;15 하반절의 요점이다: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다른 곳에서도 역시 제한 없이 자신을 함께 나누는 일은 진정한 우정의 표시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똑같이 행해야만 하며, 특히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가 된 사랑(참조: 요 15:10) 안에서 그리해야 한다(요 15:13, 참조: 요일 3:16).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는 말씀에서 아마도 요한은 우정에 관한 고대의 법칙을 성경적 언어로 표현하여, 그것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관계에 적용하고, 또한 제자들 상호간의 관계에 적용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정의 법칙은 요한이 단지 그리스도 자신에게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하는 대속에 관한 신약성경 사상에 기여한다(요일 3:1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바와 같이 친구(혹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요구는 이미 기본적으로 요 15:12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고한 사랑에 관한 이 말씀(요 15:13)은 예수님에게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적용된다. 이 친구에 관한 말씀은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우선은 구원론적인 의미이고 그 다음은 권고의 의미를 지닌다.|누가와 마찬가지로 요한은 필로이를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자기 칭호로 사용하는데 익숙하다.|요한삼서는 친구들의 서로간의 인사로 끝맺는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각 친구 명하에 문안하라"(요삼 1:15). 여기서 친구들, 즉 예수님에 대한 관계로 인해 친구가 된 동료 신자들간의 상호 위로를 권면한다.|요 19:12에서는 필로스(한글 개역, "충신")가 정치적 용어이다. 여기서 이 단어는 왕궁 직위와 연관되지만 이 비난은 빌라도와 황제 사이의 관계에 대한 판단을 표현하는 것이지, 빌라도가 그 직위를 외면한다는데 대한 것은 아니다.||(c) 야고보서에서 필로스.|약 4:4에서 세상과 친구되기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라고 언급된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2:23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이다: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 표현의 근거는 헬라나 이집트의 용법이 아니라 구약의 용법이다. 창 15:6과의 연관성은 "하나님의 친구"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과 연결시키며, "칭함을 받았다"는 수동태는 벗의 칭호를 주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암시한다.|(참조: C. Brown; G. Stahlin;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