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해설 4 페이지 > 기독정보닷컴

더러운 이를 탐하는
aijscrokerdhv"
부정한 이득을 좋아하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아이스크로케르데스(Eur., Hdt. 이래)는 아이스크로스($150)와 케르도스($2771)에서 유래했으며, '부정한(혹은 더러운) 이득을 좋아하는, 돈을 탐하는'을 의미한다.|70인역본에서 나타나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아이스크로케르데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목회 서신에만 나온다.|딤전 3: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딤전 3:8,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 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딛 1: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파라이네오
parainevw
권고하다, 충고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파라이네오(Hdt. 이래)는 파라($3844)와 아이네오($134: 찬양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권고하다, 훈계하다, 충고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파라이네오는 70인역본에서 외경에 4회 나오며, 고전 헬라어 용법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마카베오이서 7:25, 26; 마카베오삼서 5:17; 7:12).||#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파라이네오는 신약성경에서 사도행전에 2회, 바울이 선원을 '권한 것'을 나타낸다.||(a) 행 27: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b) 행 27: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니골라
Nikovlao"
백성의 지배자, 니골라.||니골라는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도록 선출된 일곱명 중의 한 사람으로(행 6:5) 안디옥에서 개종한 자, 개종자들의 참고자료에 따르면 그는 유대교로 개종했다가 마침내 기독교에 개종한 본래는 이방인이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실시한 구제품 분배를 위하여 선택된 일곱 사람들 중의 다른 이들과 같이 그의 이름이 헬라이즘인 것을 보아서 여타의 사람들도 역시 개종자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이 모두 이방인들인데 "개종자"란 이름이 니골라에게만 적용된 것을 보아서 그만이 유대교를 거쳐 기독교에 들어온 것으로 보여진다. 여타의 여섯명은 직접 이교도에서 들어왔거나 최소한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물론 초대교회에 있어서 할례와 그 중요성에 대한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안에서의 유대교적 실천의 중요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본 결과, 일곱명을 모두 개종자이거나 헬라 이름을 사용한 유대인들이었을 것으로 자주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니골라는 교회 교부들에 의해서 니골라당으로 알려진 이단 종파의 창시자라고 생각되어 왔다(계 2:6, 15). 이레니우스(Irenaeus)는 니골라당을 낳게한 그의 가르침은 오해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므로 니골라를 변호했다. 이레니우스에 의하면 니골라는 "육체는 학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육체가 계속적으로 제어받도록 노력해야 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니골라당은 그의 가르침에서 육체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고 육체는 중요하지 않고, 주의를 돌릴 대상이 아니라고 곡해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그들을 부끄러움이 없는 불륜으로 이끌었다. 이런 교훈을 바탕으로 니골라의 추종자들은 모두 악을 행하였다.|(참조: C. J. Hermer).
지혜
sofiva
지혜 wisdom||#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소피아(Homer. 이래)는 '지혜'를 의미하며, 매우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지식에 관해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 단어가 뜻하는 미묘한 의미의 차이는 각각의 특수한 경우마다 문맥에서 찾아야 한다. 이 단어 및 단어군은 유별난 능력과 지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초기에는 실제적인 영역까지도 포함했으나(목수의 소피아, Homer. I1), 후기에는 이론상의 지식에 중점을 두고 있다. 후기의 소피아는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고 습득할 수도 있는 지식으로 간주되었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이론과 실제가 일치한다: "지혜는 깨닫게 된 지식이다"라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의 행동은 소피아이다. 그 행동에 있어서 지혜로운 자 그 자신은 스토아 철학의 필요 불가결한 주체이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소피아는 70인역본에서 약 26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호크마(지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출 28:3; 신 4:6; 삼하 14:20; 왕상 2:6; 왕상 5:9이하; 욥 4:21; 욥 11:6; 시 37:30; 잠 1:2, 잠 1:7; 전 1:13, 전 1:16; 전 1:18; 렘 8:9). 이 단어는 또한 다음에 나오는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된다: 그리고 비나(이해, 잠 2:3; 잠 3:5); 테부나(이해, 왕상 3:1; 참조: 왕상 5:9 [왕상 4:29]; 잠 18:2); 다아트(지식, 잠 1:7, 잠 1:29); 무사르(징벌, 단련, 훈계, 징계, 권함, 훈계, 잠 8:33); 마하셰베트(사상, 착상, 출 35:33); 세켈(통찰력, 사려분별, 대상 22:12)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소피아는 신약성경에서 5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전통적 용법.|복음서에서 이 단어의 용법은 일반적으로 구약성경 및 유대개념과 연관되어 있으며,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로 간주된다.|눅 2:40에서 예수님의 지혜가 '자라다'라는 말씀은 구약성경의 용례를 반영하고 있다(참조: 삼상 2:26). 이것은 율법의 지식과 경건한 삶의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눅 2:52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막 6:2에는 목수 아들의 지혜에 대한 나사렛 주민들의 놀라움이 묘사되어 있다(참조: 마 13:54). 사도행전에서 스데반도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과 지혜를 소유한 자로서 묘사되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의 증거에 대한 반론을 펼 수 없었던 것이다(행 6:3, 행 6:10). 구약성경의 전례가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다(행 7:10; 참조: 창 39:2이하, 창 39:21; 창 41:40-46; 시 105:21). 다가올 마지막 날 핍박 당할 때 변명할 말을 위해 지혜를 주시리라는 약속(눅 21:15)도 역시 동일한 용어로 공식화되었다.||(b) 유대인의 것과 같은 개념이 나타난다.|지혜가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부른다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지혜를 인격체로 이해하는 전통이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9, 병행구절, 눅 7: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라는 문장 배후에 놓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예수님(그의 증거자인 요한도)은 구원을 가져다 주는 "지혜"의 입으로 이해된다. "이 세대"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도입한다면(이것이 눅 11:49에서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으로 소개되는 반면 병행구인 마 23:24이하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해된다) 예수님은 땅에 오신 지혜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세대"를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하여 땅 끝에서 온 남방의 여왕과 대면시켰는데 여기에 함축된 책망이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라는 언명에서 확실시 된다(마 12:42, 병행구절 눅 11:31; 참조: 왕상 10:1-10; 대하 9:1-12). 사람들이 경멸하는 하늘의 지혜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이 점을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님 안에서 이 지혜는 최종적으로 출현하였으며 소피아 기독론에 대한 거론은 일리가 있는 것 같다.||(c) 바울서신.|① 롬 11:33이하에서 바울은 지혜 용어와 지혜 개념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찬양한다. 이제 하나님의 지혜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야만 한다는 점이 다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다(참조: 롬 10:4, 롬 10:9-10).||②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고린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단순한 지혜의 말로 생각하지 않는다(참조: 고전 1:17; 고전 2:1; 고전 2:4). 그것은 십자가의 말씀이다(고전 1:18 이하). 동시에 바울은 그의 비판자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이 말씀을 참된 지혜라고 묘사한다. 고린도인들에게 지혜는 분명히 이 시대에 속하지 않은 구원의 축복이며 이전에는 감추어졌으나 지금 우리의 종말론적 영화(glorification)를 위해 계시된 것이다. 계시를 받아들인 자들은 낮아졌다가 높임을 받으신 주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알기 때문에, 영적이며 지혜롭게 되고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을 알며, 새로운 시대가 완성될 때 심판 받지 않는다. 바울은 십자가를 무시하는 어리석음을 세상의 지혜라고 부름으로써 평가절하한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지혜로운' 십자가의 어리석음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고전 1:25). 그리스도께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시며, 마찬가지로 믿는 자들도 그들 자신의 지혜는 없으며, 오직 어리석은 자가 되어 그리스도에게서만 능력과 지혜를 구할 때에 지혜롭다.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들을 자신께로 부르심으로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것들을 무효로 하시기 위해 지혜롭지 않은 것들을 택하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자신을 우리의 지혜가 되게 하셨으므로 자랑할 여지가 없다. 십자가는 헬라인들과 서기관들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하나님을 알도록 세상에게 그의 지혜를 줄지라도 세상은 자신의 지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전 1:21).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전도의 어리석음, 즉 그 메시지에 일치하는 선포의 형태를 통해서이다(고전 2:1). 이러한 원칙에서 바울은 오직 십자가에서의 하나님의 시작에 기초해서, 그리고 종말과 관계 있는 믿는 자들이 세상과 확고하게 거리를 둠으로 고린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하는 것을 지지한다. 물론 많은 해석자들은 세상의 지혜를 헬라 철학에 속하는 것으로 보며, 따라서 바울은 여기에서 특정한 영지주의의 형태와 그것과 관계된 카리스마적 언설에 대해서가 아니라 고린도의 교육받은 계층에 호소하는 철학적이며 수사적인 복음에 대한 관념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d) 골로새서와 에베소서|골 1:9과 엡 1:8에서 하나님의 뜻과 가치있는 행위를 포함하는 기독교적 지식의 성장을 소피아로 부른다. 이 지혜는 은혜를 얻는다(엡 1:7). 이 지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종말론적 축복에 대한 지식을 포함한다(엡 1:17-18). 이 지혜는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한 지식인데, 그리스도께는 모든 지혜의 보물들이 감추어져 있다(골 1:26-27). 이 지혜는 인간의 교훈인 영지주의적 교사들의 거짓 소피아(참조: 골 2:8)와 반대되는 것이다. 엡 3:10에서 문맥은 하나님의 각종 지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그리스도께 들어감으로 성취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숨겨졌다가 나중에 다시 높아지는 지혜의 개념은 공식화된다.||(e) 요한계시록|계 5:12의 죽임당한 어린 양은 종말론적 선물로 지혜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참조:7:12). 계 13:18과 계 17:9의 지혜는 비밀스러운 지식이다. 특별한 지식이 짐승의 수를 세고 계 17:1 이하의 환상을 해석하기 위해 요구된다. 오직 고백하는 자들만이 그 의미와 그 날에 일어나는 일의 결과를 이해할 수 있다.||(f) 야고보서|야고보서에서 지혜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발걸음이다(참조: 약 3:13, 약 3:17-18). 이 지혜는 다툼과 무질서가 아닌 평화로 인도한다. 이 점에서 지혜는 적대자들이 추구하거나 가르치는 지혜와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다. 이 지혜는 이론적인 것이 않고 실제적이고 도덕적인 결과로 그 자체를 나타낸다.||(g) 베드로후서|벧후 3:15은 바울이 "그 받은 지혜대로" 썼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 말씀은 지혜를 사도의 가르침과 동등시하고 있다.|(참조: V. Wilckens).
가증히 여기다
bdeluvssw
가증히 여기다, 몹시 싫어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브델륏소(Hippocr., Aristoph. 이래)는 브데오(%889: 조용히 방귀 뀌다, 고약한 냄새가 나다)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혐오를 야기시키다'를 의미하며, 종종 부적절하고 파렴치한 태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중간태 수동태 브델륏소마이는 대격과 '혐오하다, 몹시 싫어하다, 몹시 비난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브델륏소는 70인역본에서 약 50회 나온다. 주로 히브리어 타압을 번역하여 '몹시 싫어하다'(욥 9:31; 19:19; 30:10; 시 107:18), '가증스럽다'(왕상 21:26; 시 14:1; 시 53:1), 가증스럽게 행하다'(욥 15:16; 사 14:19)를, 샤카츠를 번역하여 '가증히 여기다'(레 11:11; 레 11:13), '가증하게 하다'(레 11:43; 레 20:25)를, 쉭쿠츠를 번역하여 '우상'(호 9:10)을, 토에바를 번역하여 '가증한' 풍습(레 18:30), 악을 '미워하는' 것(잠 8:7), '가증한' 기도(잠 28:9)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브델륏소는 신약성경에서 2회, 로마서와 요한계시록에 각각 한번 나타난다.|롬 2:22에서 브델륏소는 우상숭배에 대해 언급한다: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여기에서 "흉악한 자들"로 번역된 브델륏소는 특별히 한 죄목으로 정의할 수 없으며, 일반적인 것을 나타내며, 모든 종류의 죄목을 다 적용시킬 수 있다. 특별히 어떤 개념을 적용시키기는 곤란하나 아마도 이방 종교들로 더럽혀진 자들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참조: 계 17:4; 계 17:5)(Leon Morris).|(참조: Walter Bauer; W. Foerster).
결례를 행하다
aJgnivzw
순결하게 하다 purify.||#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하그니조는 하그노스($53)에서 유래되었으며, 소포클레스(Sophocles)의 작품에서 처음으로 발견되며, 속죄 의식으로, '정결(순결)케 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하그니조는 70인역본에서 약 30회 나오며, 주로 카다쉬 '깨끗하게 하다, 순결하다, 거룩하다' , 그 다음으로 하타의 역어로 사용되었다.|하그니조는 제사를 드리기에 적합한지를 재는 척도를 나타내며 따라서 '제의적으로 적합한 상태로 하다'를 의미한다. 하기오스가 항상 거룩한 것의 힘과 권능에 대한 사상을 포함하고 있는 반면에, 하그니조는 항상 부적합한 것의 제거를 표현하고 있으며(출 19:10, 의복의 세탁, 민6:3, 금주), 특히 죄나 더러움으로부터 자신을 정화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히브리어 하타의 힛파엘형, 민 8:21; 민 19:12)(참조: Hauck, H.baltensweiler).||#3. 신약성경의 용법||하그니조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오며 '의식적 정결'이라는 그 본래의 의미로 사용되었다.||(a) 요 11:55에서 유월절 이전에 유대인들의 제의적 정결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b) 그 다음에 하그니조는 바울이 구약 율법을 지키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기독교에서 바울에게 요구한 제의적 정결(정결의식)에 대하여 사용되었다(행 21:24-행 21:26; 행 24:18).||(c) 하그니조는 약 4:8; 벧전 1:22; 요일 3:3에서 '도덕적 정결'의 뜻으로 나온다.|(참조: J.H.Thayer; H.Baltensweiler; Hauck).
그룹
ceroubivm
그룹들 cherubim||#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복수형 케루빔은 세속 헬라어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이 단어가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를 음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복수 어미를 가지고 있다(케루베임, 케루베인, 게루빈).||#2. 70인역본의 용법||70인역본에서 단수형 게룹은 18회, 복수형들은 약 75회 나타난다.||(a) 이 단어는 부분적으로는 사람, 부분적으로는 동물로 표시되는 천사와 같은 존재의 다양한 표상에 관한 지칭이다. 이 단어는 보통 '그룹들'(cherubim)이라는 복수형으로 사용된다.|이 단어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아카드어의 동족어 동사는 '축복하다, 찬양하다, 경배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CAD). 그룹의 특성 중에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숭배인데, 아마 이러한 기원이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그룹들은 때대로 스랍 또는 불타는 것(사 6:2-사 6:6)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날개달린 천국의 전달자이다. 그룹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받들어 지키고 있다(시 80:1; 시 99:1; 사 37:16). 그들의 신속하게 날음은 바람에 비유된다(삼하 22;11; 시 8:10).|그룹은 잃어버린 낙원 동산을 지키는 천사로서 처음 언급된다. 그들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고 있었다(창 3:24). 다음으로, 그룹들은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덮고 있는 순금으로 된 날개 달린 모습으로 나타난다(출 25:20).|또한 이들은 성막의 가장 안쪽에 있는 휘장과 지성소를 분리시키는 휘장을 장식하여(출 26:1, 출 26:13, 출 26:31),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천군 천사들을 상징하였다(삼상 4;4; 삼하 6:2; 왕상 19:15; 대상 13:6). 여기에서 그들이 얼굴, 사람 모양, 날개를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는 그들의 모습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있다.|출 25:22에서 하나님이 두 그룹(mibbin) 사이의(밉빈[mibbin]) 속죄단 위(메알[me'al])에서 사람과 말씀하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민 7:89).|솔로몬의 성전에서 그룹은 장식을 위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솔로몬 성전의 강조점은 날개를 성소의 넓이만큼 펼친 그룹의 크기에 있었다(왕상 6:23-왕상 6:29; 왕상 7:29; 대하 3:10-대하 3:13).|예언자들 중에서 에스겔만이 이 단어를 언급한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던 황금 그룹들은 버림을 당하였고 여호와께서는 그의 원하는 바를 수행하는 살아있는 그룹 가운데 나타나시게 되었으니 이는 그의 보좌의 위치를 성전으로부터 옮긴 것이다(겔 10장; 참조: 겔 1:5이하). 에스겔서에서 그룹은 또한 하나님의 임재를 호위하고 있다(겔 28:14-겔 28:16 RSV).||(b) 후기 유대교는 에스겔서의 병거 보좌를 상당히 명상하였으나 이 명상은 랍비들에 의해 훼방을 당했으며, 병거가 나오는 에스겔서의 장들을 예배시에 사용하는 것은 미쉬나(Mishnah)에서 금지당했다. 그리고 유대교에서는 그룹들을 하나님의 보좌에 둘러선 천군들로 간주하였고, 랍비들은 그룹들은 외형상 소년들과 같은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필로는 그 이름이 지식과 통찰에 관련된 것이라고 하고, 요세푸스는 날개달린 생물이라고 언급한다. 마법의 파피루스에서는 마법의 효과를 얻으려고 애쓰는 가운데 이 이름을 사용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케루빔은 신약성경에서 히 9:5에 한번 나타난다: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영광의 그룹들"이라는 문구는 지성소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요한계시록은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룹과 스랍을 암시하는(계 4:6-계 4:8) 특유한 표현으로 보좌 위에 앉으신 이를 예배하는 생물들을 묘사한다. 그룹들은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있든지 지상에 있든지 간에 특별히 하나님의 보좌와 관계가 있다. 이들은 보좌를 호위하며 보좌하여 서 있으며 또한 자신들이 예배하는 만군의 여호와의 신속한 전달자로서 활동한다.|할데만(I.M.Haldeman)은 언약궤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하는데 그 까닭은 속죄소($2435)가 특별히 우리 주를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심"(롬 3:25)을 받으셨다는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화목의 수단 혹은 화목의 장소를 의미하는 같은 말, $2435을 발견한다. 화목의 장소는 십자가요, 그 방법은 그리스도의 피였으므로 그 단어의 두 가지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 집중된다. "영광의 그룹들"(하나님의 임재)이 "속죄소"를 덮었으므로(5절), 그 속죄소는 언약궤를 덮어 완전하게 하였다(그것은 꽉 짜여져 정확하게 맞은 언약궤의 뚜껑이었다). 그러므로 거룩한 심령은 속죄소 아래에서만 그 완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속죄소"는 "영광의 그룹들"을 이루고 있는 구조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과 심령의 연합을 뜻하며 거룩한 날개의 그늘 밑으로 심령을 인도하는 것을 뜻한다. 이 연합은 속죄소와의 완전한 연합을 말하는 것이므로 심령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그늘은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일치됨과 동시에 완전히 예속됨으로 오는 것이다(R.S.Taylor).|(참조: J.G.Balawh; E.Lohse).
함께 역사하다
sunergevw
함께 일하다, 협력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쉬네르게오(Eur. 이래)는 쉬네르고스($4904: 동역자, 동료 일군)에서 유래했으며, '함께 일하다, 협력하다, 원조하다, 촉진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쉬네르게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막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여기서 쉬네르게오는 속격으로 사용되어 '~와 함께 일하시는 주님'을 나타낸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의 메시지를 표적들을 통하여 확증해 주심으로서, 그들과 함께 일하시는 것이다.||(b)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구절의 내용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최고의 선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아무런 해도 입을 수 없다는 낙관적인 철학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할 경우, 이 구절은 하나님과 인간 협력에 관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문맥을 살펴보면 그 문맥의 주된 주제는 하나님의 선택으로서, 인간의 모든 사랑은 바로 그것에 앞선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반영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참된 주체자는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는 부름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일에 있어서 그들이 선을 이루도록 그들을 도와 주시거나 모든 일들을 그들에게 유익하게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다.||(c) 고전 16:16, "이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여기에서 쉬네르게오는 이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것을 나타내는데, 바울의 조력자들은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바울의 화해의 선교 사역에 동참하였다. 이로써 그들은 사 43:24에 언급되어 있는 바와 같이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사역에 동참하였으며, 바로 이에 입각하여 그들은 교회의 주인들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기쁨의 조력자들로서 믿음의 공동체에게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요구할 수 있었다.||(d) 고후 6:1에서 분사적 표현 하나님과 '함께 일할 자'를 언급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여기서 범주는 사회학적인 것이 아니다. 바울은 단지 그의 동료들을 존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중요시하는 것은 오히려 신학적인 진술이다. 바울과 그 동역자들은 동일한 섬김 가운데 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돕는 자들"이요 "사환들"이다(참조: 고전 3:9).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들"이다. 고전 3:9의 쉬네르고이("동역자들")는 고전 3:5의 디아코노이("사역자들")에 상당한다. 살전 3:2도 이러한 관계에서 언급되어야 한다. 이 구절에서 많은 사본에는 디아코노스가 쉬네르고스의 동의어로 나오는데, 이 때문에 본문을 잘못 해석하거나 속격 헤몬이 바울 사도의 조수(assistant)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e)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논란이 되는 말씀은 바울의 진술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반박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기자는 아브라함을 실례로 들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에 대해 논증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창 15:6을 인용하면서 믿음이 행위와 함께 일한다는 결론을 내린다(약 2:24 이하). 믿음도 우선 행함으로 알 수 있고 보여지며, 따라서 행함 안에서 믿음이 성취되는 것이다.|(참조: Bertram; H. -C. Hahn).
에베네도
!Epaivneto"
에베네도 Epoenetus||에파이네토스는 '찬양받는'을 의미하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에베네도'로 음역했다.||에파이네토스는 신약성경에서 롬 16:5에 한번 나온다: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베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에베네도는 바울로부터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로서 애정 깊은 인사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다.|"나의 사랑하는"이란 말은 바울의 에베네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나타낸다. "아시아의 처음 익은 열매"라는 말은 아시아 지방에서 그리스도에게로의 첫 개종자로서 특별히 구별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TR의 "아가야의"라는 읽기는 증거가 불충분하다. 이 읽기는 아마 고전 16:15에서 온 것같다. 이런 원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연히 교회에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했다. 에베네도가 지도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바울이 브리스가(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다음에 바로 그를 언급하고 있는데서 암시된다.|에베네도가 바울이 직접 개종시킨 사람이라는 언급은 없다. 그는 바울이 에베소로 돌아오기 전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개종시켰을지도 모른다(행 18:27).|에베네도에 대한 이와 같은 언급은 로마서 16장이 에베소인을 수신인으로 하고 있다는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20번 이상이나 에베소인에 대한 언급이 없이 쓰여진 다른 곳으로 인해 이 주장의 신빙성이 약화된다.|(참조: H. E. HIEBERT)
브루기아
Frugiva
브루기아 Phrygia (지)||프뤼기아/브루기아는 서부 소아시아의 지금은 아나톨리안 터키(Anatolian Turkey)의 땅인 지역. 브루기아의 경계는 초기에 여러 가지로 변경되기는 했으나 서부 소아시아 내륙의 대부분을 포함하며 흑해에까지 이른다. B.C. 133년에 브루기아는 로마를 가로질러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실리시아(Cilicia)와 협력하였다. 폼페이(Pompey)는 B.C. 67년에 악명높은 브루기아 해적들을 쫓아내었다. 바울시대에 브루기아는 로마의 행정적 식민지였다(A.D. 25-50). 안디옥과 이고니온을 포함하는 그 프리지아 지역은 때때로 "브루기아 갈라디아"라고 불리운다. 브루기아의 주민들은 주로 아시아 사람이다. 고대 시대에 인도-유럽어를 말하는 아리아인들(Aryans)이 트라키아(Thrace)로부터 왔다―브루기아인들은 호머의 트로이 전쟁(Trojan War)에 대한 기록에서 테살리(Thessaly)에서 온 헬라인 이주자들에 대항하여 싸운 트로이인들과 관계가 있다. 브루기아인들은 강력한 민족, 아마도 헷 족속(Hittites)에 대항하는 그들을 도우러 돌아온 프리암(Priam)왕을 도왔다고 한다; 헷(Hittite) 문화는 B.C. 1000년 이후에 브루기아인들의 압박 아래 쇠퇴한다.|브루기아는 "로얄 로드"( Royal Road)를 비롯하여 주요 도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도로들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이 지역을 통하여 여행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어떤 간선 도로는 루커스 계곡을 이고니온(Iconium)으로 통하게 하고 타우루스(Taurus)산맥을 가로질러 시리아(Syria)에까지 이른다―에게해에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주요한 통상로이다. 이 길은 고지대인 브루기아의 철, 구리, 수은, 진사, 대리석과 밀레도, 버가몬, 라오디게아와 골로새의 의복 직조를 위하여 양모를 공급하는 커다란 양 떼에 접근할 수 있게 하였다. 브루기아인들의 직물과 그 스타일은, 특히 앞챙이 있는 헐렁한 브루기아의 모자는 가까운 동방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브루기아는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 조달된 말(horses)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바울은 브루기아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전도 여행을 했다||(1) 첫 번째 전도 여행. 이 때 그와 바나바는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부터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고 있었다(행 13:14-행 13:24).||(2) 두 번째 전도 여행. 이 여행에서 그와 실라와 디모데는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드로아로 갔다(행 16:6).||(3) 세 번째 전도 여행에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녔으며(행 18:23), 그곳에서 에베소로 갔다(행 19:1).||신약성경에 지명된 브루기아의 다섯 도시는 이고니온, 라오디게아, 골로새, 히에라볼리와 비시디아 안디옥이다. 브루기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에 있었다(행 2:10).그 지역의 복음 전도는 일찍 시작되었고 광범위했기 때문에,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브루기아에서 한 일들은 열매를 맺었다.|많은 2세기의 기독교 비문들이 발견된다; 어떤 권위자들은 그 민족이 A.D. 300년 경까지 기독교도가 되었다고 믿는다. 아마도 그 추잡한 퀴벨레(Cybele: 브루기아의 대지의 여신), 아시아의 "대지 어머니"(Earth-Mother) 숭배에 대해 새로운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싸우는 영을 자극하여 개종자들을 얻게 되었다.|(참조: ISBE).
시돈
Sidwvn
시돈 Sidon(지)||시돈은 히브리어 치돈의 음역이며, 어원은 추트('사냥하다', 아람어에서는 '낚시질 하다')이다. 따라서 본래 이 이름은 이 곳에 물고기가 풍부한데서 연유했다. 시돈은 뵈니게의 매우 오래된 도시이며, 두로(Tyre) 북쪽으로 20마일 떨어져 있고 베이루트(고대의 베리두)에서 남쪽으로 역시 20마일 가량 떨어져 있다. 시돈은 바다에 면하고 있으며, 상업은 시돈 주민의 특성을 결정지었다. 시돈의 뒤에는(동쪽) 높은 레바논 산맥이 둘려 있다.|요세푸스에 의하면 노아의 손자 가나안이 건설했다고 한다. 이것은 시돈의 오랜 역사를 생생하게 증거해주는 것이다(창 10:15; 대상 1:13). 시돈은 B.C. 1400-1375년의 텔 아마르나 서신에서 언급된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시대에 땅을 분배할 때 "큰 시돈"은 스불론과 아셀 지파 접경에 있었다(수 19:28). 시돈은 B.C. 2,000년경에 가장 번영을 누렸다. 시돈 상인들과 선원들이 이사야(사 23:2)와 에스겔(겔 27:8)에 의해 언급된다.||이스라엘의 성전 건축자 솔로몬은 시돈 사람처럼 벌목을 잘하는 자가 없다고 생각하였다(왕상 5:6). 그는 시돈의 제의에 영향을 받았다(왕상11:5-7).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성전 재건에 쓸 목재를 시돈 사람에게서 가져왔다(스 3:7). 시돈 사람들의 광신적인 바알과 아스다롯 숭배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많은 배교를 하게 하였는데, 시돈 왕 엣 바알의 딸 이세벨이 이스라엘 왕 아합과 결혼함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렀다(왕상 16:31-33; 왕상 18:18 이하; 왕상 18:25-28; 왕상 18:40).||그리스 역사가 스트라보(B.C. 63년)는 시돈인들이 천문학, 철학, 예술에서 숙달했다고 한다. 뵈니게인들의 후손인 오늘날의 레바논인들은 이에 대해 강조하여 경의를 표한다.||시돈은 선지자들에 의해 언급된다. 이사야는 시돈 거민이 휴식을 취하러 구브로로 피하지만 허사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 23:12). 예레미야는 시돈 땅이 느부갓네살에게 예속될 것이라 하였다(사 27:3-6). 에스겔은 시돈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찌르는 가시"였다고 비난하였다(겔 28:21-24). 요엘은 시돈에게 예루살렘을 노략하고 그 거민을 종으로 판 죄과를 물었다(욜 3:4-6).||시돈의 길고 험악했던 역사를 되돌아보자. 시돈은 살만에셀에게 점령 당한 적이 있으며(B.C. 725년), 산헤드립의 침략을 받았고, 에살핫돈(Esar-haddon)에게 지배받았다. 그는 많은 시돈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앗수르가 멸망했을 때 바벨론의 침공을 받았고, 페르시아에게 점령 당하여 그 통치 기간 동안에- 다섯번째 페르시아 통치 관구의 시돈 속주로서- 시돈의 부는 뵈니게의 모든 다른 지역의 부를 능가하였다. 페르시아의 크세륵세스와 그리스의 해전에 시돈의 함대와 선원들이 참가하였으며, 알렉산더 대제(B.C. 330년)에 의해 페르시아의 속박에서 풀려났다.||그리고 로마 지배 하에서 시돈은 헤롯이 다스리는 동안 명성을 누렸다. 그러나 행 12:20은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리스도께서 가장 북쪽 지방을 여행하실 때 "두로와 시돈 지경"을 방문하셨으며(막 7:24; 막 7:31), 그 악함을 간접적으로 언급하셨다(마 11:21 이하). 그러나 예수님은 갈릴리의 성읍들을 책망하시면서, 고라신과 벳새다를 두로와 시돈에 비교시키며, 두로와 시돈이 고라신과 벳새다보다 더 빨리 응답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1:21; 마 11:22; 눅 10:13; 눅 10:14). 두로와 시돈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왔다(눅 6:17).||바울이 죄수로 로마로 가던 길에 시돈에서 그의 동료를 만나도록 허락받았다(행 27:3). 시돈에서 초기 기독교 선교 노력의 결과 이곳은 니케아 공회에 참석한 자들 가운데 하나인 데오도루스 감독의 자리가 되었다(A.D. 325). 유럽으로부터 온 그리스도교 십자군들이 A.D. 1110에서 회교도들에게 최후로 빼앗기게 된 1291년까지 오랜 기간 시돈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중해에 면해 있는 아름다운 성 요한의 십자군 교회는 오늘날 시돈에서 가장 큰 사원이다.||인간 모양의 석관들- 인간의 두상 형태로 조각된 뚜껑이 있는 돌관- 이 시돈에서 남쪽으로 3/4마일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이집트와 그리스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시돈 근처에서 발견된 두개골은 두개의 건강한 치아에 황금망 고리로 가공 의치를 고정시킨 고대 치과 의술의 실례를 제공해준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BD).
돌아보아 주다
ejpiblevpw
바라보다, 생각하다, 유념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에피블레포(Soph., Pla. 이래)는 에피($1909)와 블레포($991: 보다)에서 유래했으며,||(a) '관찰하다, 바라보다, 응시하다, 들여다보다',|(b) '고찰하다, 생각하다, ~에 마음쓰다, 유념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에피블레포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눅 1:48에서 에피블레포는 하나님에 대해 '유념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 계집 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참조: 왕상 1:11).||(b) 눅 9:38에서 에피블레포는 동정하여 '생각하는 것', 곧 '불쌍히 여기는 것'을 나타낸다.||(c) 약 2:3에서 에피블레포는 존중하여 '바라보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kevra"
뿔 hor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케라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a) 동물의 '뿔'(Homer 이래),|(b) 모양 뿔 같은 '모서리, 끝, 정점'(Apollon., Rhod.),|(c) 비유적으로 '용기'나 '완고'를 의미한다.|(d) 그리고 고대 종교에서 뿔은 신의 '힘'이나 인간의 '힘'을 상징하였다. 예를 들어 앗시리아의 군주들과 바벨론의 제사장들은 대개 신들을 단장했던 것과 비슷한 두개의 뿔이 달린 관을 썼다. 알렉산더 대제는 뿔 달린 관을 쓴 자로 알려졌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케라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10회 나오며, 거의 모두 히브리어 케렌(7161: 뿔)의 역어로 사용되었다.||(a) 70인역본에서 케라스는 '짐승의 뿔'을 의미하며(신 33:17), 특히 묵시 문헌과 후기 유대 문헌에서 이런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단 7:7; 단 8:3; 에디오피아 에녹서 90:9 등).||(b) 제의 문맥에서 케라스는 뿔과 같은 모퉁이나 돌출부를 가리킨다(출 27:2; 레 4:7; 시 118:27).||(c) 상징적으로 케라스는 하나님과 사람의 능력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시드기야의 예언 행위에서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하며(왕상 22:11), 여호와께서 "구원의 뿔(케라스 소테리아스 무)"로 지칭될 때(시 18:2=삼하 22:3),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며 적의 공격에서 그것을 지켜주는 힘이 있는 분으로 생각된다. 케라스는 자주 인간의 육체적 힘과 우월성을 나타낸다(미 4:13). 그러나 또한 일반적으로 행복을 나타내기도 한다(삼상 2:1). 뿔을 높이거나 파괴한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흔히 나타나는 비유인데, 이러한 행위는 우리의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권이다(시 75:4-5).||(e) 후기 유대교에서 양의 뿔이 자란다는 것은 양의 힘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메시야는 크고 검은 뿔을 가지고 있는 흰 수소에 비유되기도 한다. 제단의 뿔(출 27:2)은 뿔 모양의 제단의 모서리를 가리킨다(참조: 계 9:13).||#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케라스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누가복음에서 1회를 제외하면 모두 요한계시록에만 사용되었다.||(a) 눅 1: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여기서 하나님은 그의 메시야를 통해 도우시고 복주실 그의 능력을 발휘하시는 역사의 주님이시다. 이 사가랴의 찬양에서 "구원의 뿔"이란 시 18:2에서 인용한 것으로 그 의미는 "구원의 능력"이다. 동사 '들어 올리다'(에게이렌)는 삼상 2:10에 나오는 '높이다'(휩소세이)와 유사하다. 즉 역사 속에서 활약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구원을 가져오신다. 누가는 시 132:17로 소급되는 "그 종 다윗의 집에"라는 말을 첨가하여 메시야를 '구원의 뿔'로 명시한다. 사가랴는 여기서 하나님을 역사 가운데서 자기의 능력을 증거하시고, 메시야를 보내심으로서 인류를 위하여 구원을 가져오는 능력을 일으키신 분으로 찬양한다.||(b) 뿔의 상징은 요한계시록의 비유적 표현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계 13:11의 다른 짐승의 두 뿔은 단순히 어린양의 외형을 가졌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양의 옷을 입은 이리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단 8:3에서 수양의 두 뿔을 언급하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그 밖의 다른 곳에서 뿔의 이미지는 알레고리적으로 사용된다. 뿔의 이미지는 뿔이 달린 동물들과 유기적(organic) 관련성은 없지만 독립적인 상징적 의미(significance)를 지닌다.||계 5:6에서 어린양은 일곱개의 뿔을 가지고 있고, 계 12:3; 계 13:1; 계 17:3; 계 17:7; 계 17:12; 계 17:16의 용과 짐승은 열 개의 뿔을 가지고 있다. 일곱이라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와 뿔의 비유적 의미에 의하면, 어린양의 일곱 뿔은 하나님의 능력의 완전성을 나타낸다. 큰 용은 짐승과 마찬가지로 열 뿔을 가졌다. 짐승의 경우에 뿔들은 일곱개의 머리 앞에 언급되고, 그 뿔에 면류관을 썼으나, 용의 경우에는 머리에 면류관을 썼다. 이 작은 차이점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지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도 없다.||계 17:12 이하에서 계시록 자체가 말해주는 바는, 열 뿔은 장차 올 열 왕이며, 그들은 짐승과 함께 잠시동안 왕의 권세를 받을 것이며, 짐승에게 그들의 권세를 넘겨줄 것이며, 또 짐승과 함께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어린양과의 전쟁을 감행할 것이라는 것이다.||숫자 10에 있어서 계시록은 단 7:7을 따르고, 왕들과 관련하여서는 단 7:24과 단 8:20 이하를 따른다. 일찌기 랍비 문헌에서는 열 뿔 중 몇 개는 주후 3세기의 몇 몇 특정 왕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히브리 아라스 묵시록(Hebrew Elas Apoclaypse)에서도 마찬가지 견해를 취한다. 산리안 에스라 묵시록(Syrian Eza Apoclaypse)은 머리에 12개의 뿔과 꼬리에 9개의 뿔을 가진 용에 의거한 오마이야드(Omayyad) 통치를 가리킨다. Barn. 4.4 이하에서는 다시 다니엘의 열 뿔에 대한 예언을 암시하지만, 그 해석은 불확실하다. 만약 짐승이 역사상의 Nero redivivus와 관계가 있다면 계시록의 뿔들은 당시의 방백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가장 타당성 있는 것으로 페르시아의 총독들일 것이다. 그들은 네로가 돌아오는 것을 도왔으며, 보복으로 로마를 멸망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을 것이다.||그러나 또 다른 가능성은 일곱 머리와 함께 열 뿔을 시저 이후의 로마 황제의 두번째 목록으로 보는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비록 이것들이 짐승들로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마귀적 세력들로 본다. 페르시아 총독들이나 로마 황제의 두번째 목록의 견지에서 해석하는 것은 거의 분명히 잘못이다. 뿔의 진짜 역할은 바벨론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린양과의 전쟁에서 짐승의 손에 그들의 능력을 맡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페르시아 총독들의 역할은 무엇인가?|따라서 열 뿔의 의미는, 열 왕들로서 그들은 용과 짐승의 입에서 나온 영들에 의해 아마겟돈에서 그리스도와 대적하여 싸우도록 자극받은 온 세상의 임금들과 동일시된다는(계 16:14; 계 16:16)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계시록이 열 뿔에 대하여 말하는 바는, 마지막 때의 모든 통치자들과 그들에게 속한 자들은(참조: 계 19:17 이하) 그리스도와의 최후의 공개적 싸움에서 적그리스도의 모습은 전 인류의 힘을 그리스도에게 대적하도록 만들자인 사탄을 묘사하는 것이다. 다른 해석들은 사탄 역시 열 뿔의 이미지를 가진다는 사실을 결코 설명할 수 없다.|(참조: W. Foerster; Walter Bauer; J. H. Thayer; H. G. Link; J. Schattenmann).
분노하다
ojrgivzw
노하게 하다, 노하게 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오르기조(Soph., Eur., Thuc. 이래)는 오르게($3709)에서 유래했으며, 능동태에서 `노하게 하다, 격분시키다', 수동태에서 `노하게 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오르기조는 70인역본에서 약 8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하라(타다, 분노하다), 그리고 카차프(분노하다, 분개하다)를 번역하며, 주로 그런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오르기조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오며, 마태복음(3회), 누가복음(2회), 에베소서(1회), 요한계시록(2회)에만 사용되었다.||(a) 오르기조는 하나님의 분노를 나타낸다. 마 18:34; 마 22:7; 병행구, 눅 14:21.||(b) 오르기조는 사람의 분노에 대해 사용되었다. 눅 15:28에서 형의 아우에 대한 분노를 나타낸다: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이 형의 분노는 동정의 부족과 무정함을 나타내며, 아버지의 사랑과 대조된다. 즉 분노하는 형은 사랑하는 그리스도와 반대하여 서 있는 것이다.|계 11:18에서 이 사상은 발전한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 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하나님에 대한 이방인들의 분노는 순전히 어리석은 짓이며, 자기 정죄이다.|계 12:17에서 오르기조는 마귀의 전형적인 기질으로 묘사된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그리고 용이 분노하여 하늘의 여인을 박해하는 기사는 이 분노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증명한다.|마 5:22에서 오르기조는 인간의 악한 기질로 묘사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여기서 이러한 묘사는 오르기조가 한 사람을 타락시킨다는 것을 강조한다. 행동 뿐만 아니라 사상과 행동도 사람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둔다(W.Pesch). 라가(헬, 레가)는 `바보'라는 `성난 경멸의 표현'이다.|(참조: Walter Bauer; W. Pesch).
프로바톤
provbaton
양 sheep.||#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프로바톤(Homer이래)는 프로바이노($4260: 앞에 가다)에서 유래했으며, 고전 헬라어에서는 드물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프로바톤은 헤엄치거나 기는 것들과 다른 네 발 달린 동물(짐승), 특히 길들이고 사육하는 가축, 말, 황소, 희생 동물을 나타낸다.|그리고 몸집이 작은 가축(특히 양)에 대하여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작은 가축은 다른 동물들보다 연약하면서도 앞서 간다. 이 단어는 복수로만 사용되었으나(양떼나 소떼), 후대에 이르러 특정하게 '양'을 의미하는 단수 용법이 생겼다.||(b) 프로바톤은 단순한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는 이 단어를 욕설의 용어로 은유적으로 사용한다(Nubes,1203). 그는 무엇이든 열등하거나 우둔한 것은(예: 얼간이) 양에 비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단어에는 누군가에 의해 안내를 받아야 하는 사람에 대한 은유로서 사용되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Epictetus, Dissertationes, 3, 22, 35).||(c) 프로바톤은 '물고기'(Oppianos Depiscatione등)에 대해 사용되었다(참조: H.Preisker; S.Schulz).||#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프로바톤은 70인역본에서 약 300회 나오며, 주로 촌(작은 가축, 양, 염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프로바톤은 구약성경에서 주로 유용하며 또한 떼지어 사는 동물인 양을 의미하며(창 30:38; 사 7:21; 암 7:15) 그리고 희생 제물로서의 양의 의미로는 매우 드물게 사용된다(레 1:2). 프로바톤(거의 항상 복수 프로바타)은 은유적으로 '백성'(삼하 24:17), 특히 '하나님의 백성'(시 74:1, 회중; 시 77:20; 시 78:52)에 대해 사용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요지는 양에게는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목자의 인도가 없으면 양떼는 흩어지며(겔 34:5, 겔 34:6) 양은 각기 제 길로 가며(사 53:6), 양들은 방랑하다가 광야의 위험의 희생이 되기도 하며(겔 34:5이하), 그러므로 그들은 목자에 의해 올바른 초장으로 인도되어야 한다(시 23장). 광야에서 지도자가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것이다(민 27:17). 개인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잃은 양 같이 유리"한다(시 119:176). 여호와께서는 그의 흩어진 양떼를 위하여 메시야 왕이나(렘 23:1이하; 겔 34:23) 모세(시 77:20; 사 63:11)와 같은 목자들을 지명하거나, 친히 자기 백성의 목자로서 행동하심으로 목자를 확보하여 주신다(시 78:52이하; 시 80:1; 사 40:11).|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양이라고 부름으로써 첫째로 자신들의 힘만 갖고는 자신들을 보호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으며, 둘째로 그들의 선한 목자이신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시 23장; 시 95:7; 시 100:3).||#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프로바톤은 신약성경에서 37회 나오며, 마태복음(11회)과 요한복음(17회)에 자주 나온다.||(a) 예수님께서는 비유에서 양을 들어 교훈하였다. 양은 목자의 돌보는 것 없이 홀로 내버려 두면 잃게 된다(눅 15:4). 따라서 양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사랑이요, 비이기적 보호이며(마 12:11; 눅 15:4) 이 기본적인 사실이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은유의 배경을 이룬다.|목자 없는 양은 고생하고 유리하며(마 9:36), 길을 잃고(벧전 2:25) 잃어버린 바 된다(마 10:6; 마 15:24).|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의 용례를 따라 자기 백성을 목자 없는 양떼로 비유하신 것은(막 6:34; 참조: 민 27:17; 왕상 22:17) 그들이 구원 받지 않으면 어떤 파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케 하신 것이다. 벧전 2:25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개종 이전에 그들이 양과 같이 길을 잃었으므로, 즉 희망없이 잃어버린 바 되었으며 거짓 목자들에게 이용당했음을 상기한다(참조: 겔 34: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심 받은(마 15:24) "양의 큰 목자"이시다(히 13:20).||⒝ 마 26:31에서 양은 예수님께서 모으신 제자들에게 적용된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병행구, 막 14:27). 이 인용 구절은 다음의 슥 13:7의 예언을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 적용하는데, 마소라 본문은 "목자를 치라, 그러면 양 떼(촌)가 흩어지리라"로 읽고 70인역본은 "목자를 치고 양들을(프로바타) 흩으라"라고 읽는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참 이스라엘이요, 예수님을 치실 이는 하나님이심을 적용하여 복음서에서 기독론적으로 해석된다. 스가랴서의 문맥은 이 구절이 목자에 대한 심판임을 시사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나님의 뜻을 행한 "양"은 대심판의 날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리할 때에 비로소 마침내 염소와 분리될 것이다(마 25:32이하).(참조: R.Tuente).|스가랴의 예언이 달리 어떻게 성취되었든 간에 예수님은 여기서 그의 예언을 그 자신의 죽음과 제자들에 대한 그 효과(결과)를 가리키기 위해 인용하셨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는 여호와께서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주심을 뜻한다. 그러면 제자들은 이 시련을 면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함정에 빠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본다. 즉 제자들이 심히 낭패 당한 나머지 그들이 예수를 버릴 것이며, 목자 없는 양 떼처럼, 사방으로 도망가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슬프고 무서운 일이 지금 일어나려고 하긴해도 예수님 자신이 이 일을 제자들에게 미리 사전에 알려주셨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가진다. 이 사전 경고는 이 흩어진 양떼를 다시 모을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R.C.H.Lenski).||(c) 요한복음에서 프로바톤은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즉 그의 백성을 뜻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 10:14). 양들은 그들의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를 따른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아시고, 그들을 부르시고, 이리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다(요 10:1-요 10:11).|마태복음에서는 목자와 양떼의 관계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왕의 관계인 반면에 요한복음에서 목자는 하나님을 계시하려고 하나님께로서 오신 아들이요 양떼는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교회이다. "한 양떼와 한 목자"가 있을 때(요 10:16; 참조: 요 17:20이하), 즉 마침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주님 밑에서 한 교회 안에서 모일 때 그 때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목적이 성취되는 때이다.||(d) 프로바톤은 매우 드물게 희생 동물에 대해 사용되었다(요 2:14; 행 8:32; 롬 8:36). 하지만 이 사상은 신약성경에서 주로 암노스와 아르니온으로 표현된다.|(참조: J.H.Thayer; Walter Bauer; J.G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