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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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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figh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곤(Homer 이래)는 아고($71: 몰다, 인도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a) `모임' gathering,|(b) `집회 장소', 예를 들어 신들이 모이는 올림푸스(Olympus), 또는 배들이 모이는 항구.|(c) `경쟁 장소나 경기장, 우승이나 상을 위한 경쟁, 운동 경기에서 싸움' 까지를 포함한다.|(d) 전쟁, 정치, 법정에서 `고소, 논쟁' 등을 의미한다(A.Ringwald).||이 단어는 삶을 위하여, 노력과 자기 부인으로 도덕적 투쟁을 하는 것에 대하여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필로는 생존 경쟁()에 대하여 말한다. 생은 우리의 미래의 운명을 결정할 성과(outcome)을 위한 필사적 투쟁이다(4Esdras).|(참조: E.Struffer).||#2. 70인역본의 용법||아곤은 70인역본에서 15회 나오며, 사 7:13()를 제외하고 히브리어 상당어 없이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사 7:13에서 `하나님과 싸움'을 나타내며, 외경에서 이 단어는 마카베오사서7:11에서 `하나님의 싸움'을 나타내고, 마카베오이서 4:18에서 두로의 경기들을 나타내고, 지혜서 4:2에서는 도덕적 노력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밖에 주로 군사적 싸움을 나타내고 있다.||#3. 신약성경의 용법||아곤은 신약성경에서 6회, 바울서신과 히브리서에만 나타난다.||(a) 아곤은 경기자나 전사의 `경쟁, 싸움'을 의미한다. 히 12:1이하에서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최고의 저항 및 노력을 나타낸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모든 장애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그 앞에 놓여진 완전한 목표에 이르도록 최대한 노력을 하자고 권고하는 것이다.|아곤은 이와 같은 믿음과 거룩과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망을 방해하는 위험, 괴로움, 장애물과의 어떤 투쟁을 나타낸다.|빌 1: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살전 2: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후 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b) 골 2:1에서 아곤은 강한 우려를 포함하는 `내적 투쟁'을 나타낸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참조: J.H.Thayer; A.Ringwald ).
힘쓰고 애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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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agony, 걱정 anxiety.||#1. 고전 헬라어 문헌 및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아고니아(Pinder 이래)는 아곤($73)에서 유래했으며, 때때로 투쟁(conflict )을 의미할지라도 본래 `내적 긴장이나 걱정, 근심을 의미한다. 가장 엄밀히 말하면 이 단어는 절박한 결단이나 재난을 직면하여 '힘의 최고의 집중`을 가리킨다(마카베오이서 15:19; 3:14이하). 70인역본에서 마카베오이서에서 3회 사용되었다.||#2. 신약성경의 용법||아고니아는 신약성경에서|눅 22:44에 한번 나온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여기서 외경 마카베오에 나타난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운명이 달려 있는 다가오는 결전(決戰)을 직면하여 승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것은 히 5:7의 윌라베이아()와 비교되지 않으나 눅 12:49이하의 주님의 말씀과 비교가 되는 것이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침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J.H.Thayer; E.Struffer ).
다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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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다, 다투다 figh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고니조마이(Eur., Hdt. 이래)는 아곤($73)에서 유래했으며, `투쟁, 경쟁, 논쟁, 법적 소송을 수행하다'를 의미하며, 문자적,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아고니조마이는 70인역본에서 8회 나오며, 단 6:15에서 숨 발(마음에 두다, 결정, 결심하다)과 셰달(열심히 노력하다, 분투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아고니조마이는 외경에서 `진리를 위하여 싸우는 것'(집회서 4:28), 적군과 싸우는 것(마카베오이서 8:16; 13:14; 15:27)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아고니조마이는 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아고니조마이는 `경쟁에 돌입하다, 운동경기에서 경쟁하다'를 의미한다. 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분투는, 절제(고전 9:25), 즉 일시적인 목적의 폐기(고전 9:27)를 요구한다. 이것은 고행 생활이 아니라 강건한 훈련이다(딤후 4:5). 이것은 세상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순위를 옳게 정하는 것이다.||(b) 아고니조마이는 `싸우다, 다투다', 적과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c) 비유적으로 아고니조마이는 (복음에 적대하는) 어려움 및 위험과 `다투다, 투쟁하다'를 의미한다.|골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후 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d) 아고니조마이는 `분투적으로 열심히 힘쓰다, 노력하다', 어떤 것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을 나타낸다.|눅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골 4: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참조: J.H.Thayer; Walter Bauer; E.Struffer ).
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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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Adam.||#1. 구약성경의 용법||아담은 아다마(흙, 토지, 땅)와 연관을 가지며, 이 두 단어는 아돔(붉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어원적 유사성을 가진다. 아담은 아돔과 연관이 있으므로, 아마도 인간의 본래 피부색인 붉은 색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고, 또한 아다마, 곧 붉은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이 명사는 '아담'(첫사람)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또한 '인류 혹은 총칭적인 인간, 특정한 사람들의 집단으로서의 '사람들', 또는 '어떤 이'(부정대명사)라는 의미를 지닌다. 70인역본에서는 '아담'이라고 음역하지 않고, 안드로포스(사람)라고 번역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아담은 신약성경에서 9회 나오며, 최초의 인간, 인류의 조상, 그리고 메시야에 대해 사용되었다.||(a) 유 1:14에서 에녹은 최초의 사람인 아담의 칠 세 손으로 언급한다: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b) 눅 3:38에서 아담은 예수님의 족보의 맨 나중에 하나님의 아들로 나온다: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마태는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시키는데 관심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였고, 누가는 그리스도의 계보를 아담까지, 그리고 그 이상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렇게 소급시킨 계보는 유례가 없으며 저자의 달관을 보여준다. 그것은 첫째로 전 인류의 기원이 하나님이신 것을 밝혀주는 것이며, 둘째로 예수님을 단지 예속된 유대 민족의 메시야로만 소개하지 않고 세계의 구주로 소개하는 것이다.||(c) 딤전 2:13이하에서 아담과 하와를 근거로 한 남녀의 위치 및 관계를 논한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d) 바울 신학에서 아담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세 가지 언급 중에,|① 첫째 것이 고전 15:22의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는 것이다.|바울은 만일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사망에 이르는 범죄적 공동 책임이 있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에 이르는 상호 일치가 있으리라는 것을 통찰했던 것이다.|② 둘째로 고전 15:45이하에서 부활 문제를 다룬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본문에는 두 사람의 위대한 대표자 곧 첫사람 아담과 둘째, 곧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의 성품상의 근본적 차이점이 부각되어 있다. 첫 사람인 아담은 흙으로 지음 받은 자로서 물리적인 혈육의 창조물이어서 썩어 없어질 존재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 아담과 근본적으로 인종상의 연대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아담의 이와 같은 성품을 부여 받는데 참여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된다.|그러나 둘째 아담 그리스도는 이와 완전히 대조적으로 하늘에 속한 자로서 불멸의 영적 존재이며, 또한 생명을 주는 살려주는 영이시다. 그에게 속한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에 속한 성품에 완전히 참여하게 되며, 또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부여 받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닮은 새로운 영적 생명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다(참조: 빌 3:21; 요일 3:2). 이 세상에서 아담의 형상에 속한 것과 같이 장차 부활할 때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속하게 될 것을 바울은 확신했던 것이다.|③ 세째로 롬 5:14에서 아담은 또한 오실 자, 다가올 시대, 하나님 나라의 표상이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앞에서 살펴본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참조: 고전 15:22; 롬 5:14이하)라는 구절은 죄를 통해 진정한 삶을 잃은 인간이 아담에 의해 대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사신 자는 그가 죽은 자의 일반적인 부활을 대표하기 때문에(고전 15:20), 새로운 삶의 대행자이다. 유대인의 생각에는 이것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 즉 죄의 용서와 연관되어 있다(참조: 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롬 4:25,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근거, 곧 범죄 성향에서 자유할 가능성을 낳는다. 다시 사신 자는 그가 하나님의 심판 언도의 유효함을 인정하여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도록 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인간성의 시초가 된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만 그의 신뢰를 맡겼으며, 그에게서 선한 것만을 기대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는 하나님의 선에 대한 불신이었던 인간의 근본적인 죄, 즉 아담의 죄를 사했다(창 3장).|(참조: Pictorial Encyclopedia of the Bible; H.Seebass).
값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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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없이.||#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아다파노스(Aristoph)는 부정접두사 %107와 다파네($1160: 비용, 값)에서 유래했으며, '비용 없이, 값없이'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아다파노스는 신약성경에서 고전 9:18에 한번 나온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여기서 아다파노스는 '값없이', '무보수로 금전 부담을 주지 않고'를 뜻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앗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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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디 Addi||앗디는 눅 3:28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조상 중의 한사람이다: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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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 여자 형제 sister.||명사 아델페는 아델포스($80)의 여성형이며, '자매, 여자 형제'를 의미한다.|→$80 아델포스를 보라.
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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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brother.||#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델포스(Homer 이래)는 연합을 뜻하는 아(%107)와 '자궁'을 뜻하는 델프휘스에서 유래한 합성어이며, 따라서 '같은 태에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본래 육체적 형제를 의미하며, 반면에 아델페($79)는 문자 그대로 '자매'를 의미했다. 이 말의 남성 복수형은 한 가족의 모든 자녀를 포함한다. 그리하여 이 단어는 육체적 형제와 가까운 친척을 의미하게 되고, 비유적으로 동료, 친구, 동포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서신에서는 한 단체의 동료 직원이나 회원에도 적용되었다. 종교적 의미로는 신자나 초신자들에 대하여 사용되었다.||#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아델포스는 약 850회 이상 나오며, 히브리어 아흐에 해당하며, 헬라어 문헌에서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종교적 의미에서는 차이가 있다. '형제'는 한 조상에서 나온 "이스라엘 자손"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신 3:18; 24:7; 레 25:46).|호세아는 '아들'과 '형제'라는 용어로 그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묘사하는데 사용하고 있다(호 1:10-2:3). 여기에서 우리는 형제가 육적인 관계에서 영적 관계로 이르게 되는 변형을 보게 된다. 이 말은 단지 종교적 의미로만 사용할 경우에는 육적인 친척 관계에 관한 개념이 사라지고 만다.|신 15:1 이하는 불쌍한 형제들을 사랑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서 형제와 이웃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시 22:22에서 형제들은 이스라엘 회중과 동일시되어 있다. 레 19:17이하의 사랑에 대한 계명에서 형제와 이웃은 상호 교체하여 사용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은 자연적 상태나 특성보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구속의 기적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연관되어 창조와 출생의 언어가 사용된 곳에서조차 그 뜻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이미 존재한 백성에 대한 역사적 선택과 구속의 행동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어(사 63:16; 64:8)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신 것이다.|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형제들'이다. 이것은 동료 신자들을 '형제'라고 하는 신약성경 용법의 배경으로 볼 수 있다.||#3. 유대 문헌의 용법.||구약성경의 용법은 후기 유대인의 문헌 속에서 약간 나타난다. 형제나 이웃에 대한 사랑은 쿰란 문서에서 항상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은 참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는 쿰란 공동체의 구성원에 대해서만 적용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증오했다.|랍비들은 형제와 이웃을 구별했다. 민족적·종교적 공동체는 구약성경에서처럼 더 이상 하나로 고려되지 않았다. 형제는 자신들의 나라에 살면서도 백성들에게 속하지 않은 이방인들과 대조되는 자들로, 유대교를 신봉하는 자들을 가리켰다. 완전한 개종자는 물론 형제였다. 이웃과 대조되는 것으로 이스라엘인이 아닌 주민이 있었다(참조: SBI 276).||#4. 신약성경의 용법||아델포스는 신약성경에서 문자 그대로 '형제' a brother를 의미하며, 아델페는 '자매' a sister를 의미한다.|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혈연적 형제 관계와 영적 형제 관계에 대하여 사용되었다.||(a) 혈연적 형제에 대하여는 마 1:2에 족장 유다의 형제, 행 7:13에 요셉의 형제, 눅 3:11과 막 6:17에 헤롯의 형제 등이 나타난다. 제자들 중에 시몬과 안드레, 막 1:16과 병행구절 요 1:41이하; 마 10:2),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막 1:19과 병행구절; 막 3:17과 병행구절; 막 5:37; 막 10:35과 병행구절; 마 17:1; 행 12:2)도 이러한 의미의 혈연 관계이다.|마리아와 마르다 자매(눅 10:39이하; 요 11:1이하)는 오라비(아델포스) 나사로가 있었다(요 11:2이하). 롬 16:15에 네레오와 그의 자매가 등장한다. 행 23:16에 이름은 언급하지 않으나 바울의 누이의 아들이 등장한다.|예수님 탄생 이전이나 이후에도 마리아가 처녀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주장은 신약에서 언급된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이 단순히 가까운 친족이었다는 의미로 일찍부터 받아들여졌다.|그러나 그렇게 해석할 수 없다. 오늘날에 이르러 희랍 정교회(the Orthodox churches)는 예수님의 형제 자매를 조혼에 의한 요셉의 자녀들로 이해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의 해석은 그들이 예수님의 사촌이었다는 점을 입증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니케아 교회(Nicene Church)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 가지만, 터툴리안(Tertullian)은 여전히 그들이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예수님 보다 후에 태어난 자녀들이라고 말하고 있다(참고: H. von Soden/ TDNT, J. B. Bauer, EBTI).|복음서는 예수님에게 수 명의 형제 자매가 있었으며, 그들은 그의 선교적 사명을 인식하지 못했으나(막 3:31-막 3:35; 요 7:5), 후에 가서야 이해하게 되었다(참고: 행 1:14; 고전 9:5)고 지적한다. 갈 1:19(참고: 고전 9:5)에 따르면, 야고보는 주의 형제로 사도들의 구성원이다. 또한 혈연적 형제에 관한 언급은 부활시에 결혼 관계에 대한 사두개인들의 질문(막 12:19이하), 탕자의 비유(눅 15:27; 눅 15:3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 16:28), 상속 분쟁의 이야기(눅 12:13), 예수님을 위하여 형제나 자매를 버리는 것에 관한 말씀(막 10:29이하; 눅 14:26), 형제가 형제를 배반하는 것에 관한 말씀(막 13:12이하), 손님 초청에 대한 말씀(눅 14:12)에서 나타난다.||(b) 신약성경에서 아델포스의 신학적 용법은 "형제"를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형제가 이스라엘 동포를 의미하는데 사용된 것을 신약도 그대로 채택하고 있다.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의 새 백성들이다(고후 6:16이하; 벧전 2:9이하; 히 8:8-히 8:12; 참고 롬 9장-11장). 따라서 형제라는 용어는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되었다. 사도 회의의 결정은 그 용어를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명백히 적용하였다(행 15:23).|신약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용어 보다도 훨씬 더 평범한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전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그의 아들 딸이 된다(참조: 롬 8:14; 고후 6:18; 갈 3:26). 그들은 그의 자녀로 불리우고 있다(롬 8:16이하; 요 1:12이하). 하나님의 자녀는 그의 가족이다(갈 6:10; 엡 2:19).(W. Guncher, DNTT). 따라서 모든 기독교인은 한분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한 형제들이다. 이 모든 것이 믿음 안에 있는 형제를 나타내는 칭호로서의 아델포스의 용법을 알기 쉽게 이해시키고 있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자 장자이며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기독교인들의 형제들 중 맏아들이시며(롬 8:29), "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 자"(골 1:15; 참조: 골 1:18)이며, "죽은 자들에게서 먼저 나신 분'(계 1:5)이시다.|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을 낮춤으로써 신자들의 형제가 되셨다(히 2:11이하).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자신의 형제라고 말할 수 있다(막 3:33이하, 병행구 등). 그러나 형제라는 예수님의 이러한 명칭은 오직 그의 비하가 강조되는 구절 속에서만 나타난다(참조: 히 2:17). 비록 그가 형제라고 불리울지라도, 그는 항상 우리의 주님이시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을 의미하는 둘로스($1401)라고 불렀으며, 아델포이를 '함께 된 종'이라는 의미의 쉰둘로스($4889)라고 칭하고 있다(골 1:7; 골 4:7).||(c) 롬 8:29은 형제들이라는 이 새로운 신분은 오로지 그 형제들의 맏아들, 즉 그들 모두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가 우리의 형제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들 사이에서 형제들인 것이다. 이러한 형제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원칙은 아가페(사랑; 참조: 특히 요일)이다. 바울이 기독교인들은 아델포이(복수)라고 말할 때, 그는 아가페토이(사랑받는)를 덧붙이기를 좋아했다(고전 15:58; 빌 4:1). 믿음의 형제에 대한 아델포이의 용법은 실로 타종교에 있어서도 보편적인 현상이다. 형제 관계에 관한 특별한 기독교적 이해는 아가페와의 결합에 의해 표현된다. 영적 공동체는 하나님의 사랑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것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실재를 창조한다.|형제를 위하는데 요구되는 사랑은 순교자의 죽음을 따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을 기꺼이 나누어 가지는 것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고 있다(요일 3:16; 참조: 요 15:13과 고전 8:11).||(d) 사도행전에서의 언어학적 용법은 이러한 신학적 색채를 반드시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명백히 유대의 관습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도의 설교가 유대교 회당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형제들이라고 하는 청취자들은 동료 유대인들이다(참조: 행 13:26). 우리는 바울이 이방 청중들에게 말할 때에는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행 17:22). 서신의 서론에서 이러한 유대적 관습은 기독교 공동체에 적용되었다. 바울은 고전 10:18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토우 데오우[갈 6:16])에 반대되는 육에 따라 사는 이스라엘(카타 사르카)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항상 그의 동료 이스라엘인들을 육을 따르는 형제들, 즉 아델포이 카타 사르카로 언급한다. 고백은 했으나 계명 특히 그의 형제들에 대한 그의 대우에 있어서 사랑하라는 계명을 준수하지 않는 기독교인은 아직까지도 어둠에서 행하고 있다(요일 2:9). 바울은 고전 5:11에서 어떤 형제라고 "일컫는"(so-called) 자에 관해 언급한다(NEB). 그릇된 교훈을 퍼뜨리거나 그것을 인정하는 어떠한 자도 사악한 형제, 즉 프슈다델포스이다(갈 2:3; 고후 11:26). 이러한 자는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제외되며, 더 이상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형제들은 ⒝에서 말하는 기독교 신자들로서의 형제들이 아니다.||(e) 우리는 신약성경이 형제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동등하게 요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이 두 용어가 표현하는 요구가 우리에게 관계되는 한 같은 의미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은 단지 아델포스만을 사용한다.|그러나 우리는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 구별할 수 있다. 이웃(플레시온) 사랑을 요구하는 구절은 거의 모두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레 19:18에 근거를 둔다. 이것은 사랑이 육체적 혹은 영적 인척 관계, 즉 아델피아로 결합된 자의 집단을 초월하여 확장되어야만 한다는 가정 하에 있다. 거기에는 또한 아델포스가 그 용어에 직접적으로 포함되는 자들보다 더 넓은 의미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플레시온(이웃)의 용법은 좀 더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눅 10:29-눅 10:37)에 나오는 '누가 네 이웃이냐'에 관한 랍비와의 논쟁에서 예수님의 간증을 통한 간접 증명법을 본다. 어려움에 처해 있는 자는 누구든지 항상 우리의 이웃이다. 마 5:43-마 5:48)에서 사랑하라는 계명이 원수들을 포함하는데 까지 확장되어 있기 때문에, 아델포스에게 부과될 수 있는 어떤 제한도 완전하게 이해의 범위를 초월하고 있다. 인간적인 사랑의 범위는 하나님의 구원의 범위 만큼이나 광활한 것이며, 그 구원의 전망은 만물에 대한 새로운 창조물로서 인간에게 나타나며 우주적 차원에서 모든 만물을 포용하고 있다(참고: 마 28:18; 골 1:16이하; 골 3:11). 여기에서 이웃은 기독교인 형제일 수 있으나 모든 이웃이 기독교인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참조: W. Gunther, DNTT; von Soden, TDNT).
아델포테스
ajdelfovth"
형제애 brotherhood.||#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델포테스는 아델포스($80, 형제)에서 유래했으며,||(a) '형제 사이, 형제애'(Phyg.),|(b) '형제 관계'(Dio Chrys.),|(c) 헤르마스에서 '형제애적 성향'을 의미한다(Mandates 8, 10).||#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아델포테스는 70인역본 외경에만 7회 나오며, '형제애'(마카베오사서 9:23; 10:3, 115), '형제 관계'(마카베오일서 12:10, 17; 마카베오사서 13:27)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델포테스는 신약성경에서 베드로전서에서만 2회 나온다.|벧전 2:17에서 아델포테스는 형제애적 유대를 가지고 있는 '형제들', 곧 기독교 공동체를 가리킨다: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형제를]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신자의 집단을 향하여 특별한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 불신자와 올바른 관계는 행동에 대한 올바른 규범을 지키라고 요구한다(참조: 벧전 1:15; 벧전 2:12). 그러나 교회 내의 생활에는 규범보다도 더 많이 지켜야 할 올바른 태도와 생각에 관한 법들이 있다. 이러한 종류의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인들 상호 간에만 가능하다. 여기서 이 형제애를 명하고 있다(R. S. Nicholson).|벧전 5:9에서도 아델포테스는 같은 의미를 지닌다: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참조: Walter Bauer; H. V. Soden).
분명치 못한
a[dhlo"
나타나지 않은, 불분명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아델로스(Hes. 이래)는 부정 접두어 %107와 델로스($1212)에서 유래했으며,|(a) '보이지 않는, 나타나지 않는',|(b) '분명치 않은, 불확실', '희미한' 소망에 대하여(Plolyb.)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아델로스는 70인역본에서 5회 나오며, 시 51:8에서 투하(내부, 속부분)의 역어로 '중심'을 나타낸다. 나머지는 외경 마카베오서들에 나타난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아델로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누가복음과 고린도전서에 사용되었다.||(a) 눅 11:44에서 아델로스는 '보이지 않는', 곧 '평토장한' 무덤을 나타낸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b) 고전 14:8에서 아델로스는 '분명치 못한' 나팔 소리를 나타낸다: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참조: Walter Bauer; J.H.Thayer).
아델로테스
ajdhlovth"
불확실함.||#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델로테스(Protagoras 이래)는 아델로스($82: 불분명한)에서 유래했으며 '불확실함 uncertainty'을 의미한다.|이 단어는 70인역본에 나타나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델로테스는 신약성경에서 딤전 6:17에 '불확실함'이란 의미로 한 번 나온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참조: Walter Bauer; J.H.Thayer).
향방 없이
ajdhvlw"
불확실하게 uncertainly.||#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아델로스(Thu. 이래)는 아델로스($82: 불확실한)에서 유래했으며, '불확실하게'(ps. -Phoc. 25), '목적없이, 방향없이'(ps. -phoc. 28)를 의미한다.|이 단어는 70인역본에 나타나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아델로스는 신약성경에서 고전 9:26에 한 번 나온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여기서 아데로스는 어느 방향으로 정해야 할지 불확실함을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H.Thayer).
고민하다
ajdhmonevw
괴로워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데모네오(Hippocr. 이래)는 그 어원이 불분명하며, '괴로워하다, 고민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아데모네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앞의 의미로 사용되었다.||(a) 마 26:37에서 아데모네오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괴로워하신 것을 나타낸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병행구, 막 14:34).||(b) 빌 2:26에서 아데모네오는 에바브로디도가 괴로워한 것을 나타낸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에바브로디도는 병들어 죽게 될 정도로 중태였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이 그의 중병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을 생각하며, 괴로워하였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기를 바랬다(J.A.Knight).|(참조: Walter Bauer; J.H.Thayer).
하데스
a{/dh"
죽은 자의 거처, 음부.||#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하데스의 어원은 불확실하다. 이 단어는 부정 접두어 %107와 결합한 이데인(%319: 보다)에서 유래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의미했든지, 아니면 아이아네스(%320)와 연결되어 원래는 '우울한, 소름끼치는'을 의미했을 것이다.|하데스는(%321의 형태로) 호머(Homer)의 작품에서 지하 세계에 있는 신의 고유한 이름으로 등장하며, 반면에 여타의 헬라 문헌에서 이 단어는 어두운 삶을 영위하는 사자의 거처인 지하 세계를 의미한다(참조: Hesiod, Theog. 455; Homer, Od. 4, 834).|호머(Homer)에 의하면 음부, 곧 하데스는 지하 세계의 이름으로 죽은 영혼이 거하는 곳이고, 크로나스(chronas)와 레아(Rhea) 사이에서 태어난 지옥의 신 플루토(Pluto)가 거하는 곳이라고 한다. 하데스의 소유격 형태는 하이두(%322)인데 이것은 '하데스의'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신(神) 하데스에게 속하는 지하 세계라는 의미를 지닌다. 헬라의 신화에서는 이곳은 스틱스(Styx, 지옥의 강)강 건너에 위치해 있고 이곳의 문 어귀에서는 세명의 심판자가 영혼의 운명을 결정해 준다고 한다.(참조: Pictorial Encyclopedia of the Bible)|호머(Homer) 이후에 이 하데스는 무덤, 즉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직 점차적으로 헬라인들은 이 단어의 개념에 보수(Reward)의 개념과 형벌(Punishment)의 개념을 첨가시켰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하데스에서 보상을 받았으며, 사악한 자와 불신앙인들은 이곳에서 다양한 형벌을 받았다. 고전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Aides(이오니아어), Aidas(도리아어)로도 표기되었다(H. Bietenhard).||#2. 70인역본 및 랍비 유대 사상.||명사 하데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00회 나오며, 대부분의 경우 히브리어 셰올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히브리어 용어는 죽은 자가 죽은 후에 가서 거하는 곳을 나타낼 때 가장 흔히 쓰는 말이었다. KJV는 이 단어를 상당히 모호하게 "무덤"(31회), "지옥"(31회), "구덩이"(3회)로 번역하였고, ASV, RSV, NASB는 모두 "Sheol"(스올)로, 한글 개역은 "스올"(1회, 욘 2:2) 외에 모두 "음부"로 번역했다. 히브리인들은 주변의 이방인들의 경우와 같이 사자(死者)가 거하는 암울한 지하 세계의 실체로서의 그 장소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a) 구약성경의 하데스/ 스올에 대한 표현은 돌아오지 못할 어둡고 암울한 곳으로(욥 10:21, 22; 시 143:3), 적막한 곳으로(시 94:17; 시 115:17) 나타난다. 그곳 하데스/ 스올에 거하는 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욥 14:21; 전 9:5, 10). 중대한 것은 여호와는 사자들을 기억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은 여호와로부터 단절되어 역사(history)에서 그의 활동 밖에 있는 신학적인 진술이다(시 88:5, 11).|죽은 자들은 종교 의식과 그 영향력을 벗어나 있다. 사망에서는 선포나 찬송이 없다(시 6:5; 시 88[87]:10-12; 사 38:18).|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권능은 사자의 영역에서도 끝나지 않는다(암 9:2; 시 139:8). 그때까지는 여호와께서 사자들의 처소에 관여하지 않으신다. "사자들의 거처는 여호와와 그의 피조물간의, 명확히 규정지을 수 없는 제 3영역으로 남아 있었다"(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오직 예외적으로 믿음(욥 14:13-22)이나 시인의 상상력(사 14:9이하; 겔 32:20이하)만이 죽은 자의 처소에 관여한다. 죽음 저편의 소망에 대한 암시는 간헐적으로 나올 뿐이다(욥 19:25-27; 시 49장; 시73:23이하).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부활의 소망이 나타나 있다(H. H. Rowley; H. Bietenhard).|성경의 하데스(음부)에 대한 표현 중 그 위치에 관한 것은 약간 모호하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이 음부가 사람이 사후에 가는 곳이긴 하나 아래로 내려가는 곳으로 언급된다. 이 음부가 무덤 자체와 얼마나 일치하는 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이 단어는 욥 26:6과 잠 15:11절과 잠 27:20의 세 곳에서 "아바돈"(멸망의 웅덩이)이란 단어와 함께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어 있다. 욥 26:5에는 이 하데스가 지하의 큰 물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음령들이 큰 물과 수족 밑에서 떠나니…". 또한 사 38:10에는 하데스의 문에 대한 언급이 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중년에 음부의 문에 들어 가고 여년을 빼앗기게 되리라"(참조: PEB).||(b) 랍비 유대 사상에서 페르시아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영혼 불멸성의 교리가 나타났으며, 이로 인하여 하데스(hades)의 개념이 바뀌어졌다. 이 교리가 최초로 출현한 곳은 에디오피아어 에녹서 22이다. 이 장은 눅 16:22이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참조: 에디오피아어 에녹서 51:1; 102:5; 103:7; 마카베오이서 6:24). 죽은 후에는 하데스(Hades)에서 보상과 형벌이 시작된다. 요세푸스(Josephus, Ant. 18, 14; 참조: War 2, 163; 3, 375; SB Ⅳ 1166, 1182ff.)에 따르면 이것은 바리새파와 에세네파(Essenes)의 입장이었으며 사두개인들의 입장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후대의 견해는 죽은 후 의인의 영혼들은 천국의 축복에 참예하며 반면에 불신앙인의 영혼은 하데스(Hades)에서 처벌을 받는다고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하데스(hades)는 모든 영혼의 휴식처로서의 그 역할을 상실했으며 불신앙들의 영혼 처벌 장소가 되었다(참조: 에디오피아어 에녹서 63:10; 솔로몬의 시편 14:6이하; 15:11; 헬라어 바룩서 4).|부활 교리의 영향을 받아 하데스(hades)는 영혼들의 영원한 휴식처로서의 그 역할을 잃어버렸으며, 부활 때까지의 영혼들의 예비적 일시적 휴식처가 되었다(참조: 에디오피아어 에녹서 51:1; Test. Ben. 10; 시빌 신탁 4:178-190; 에스드라하 5:45). 에스드라하 7:78-100은 영혼불멸 교리와 부활 교리 간의 절충을 시도한다. 즉, 이에 따르면 의로운 영혼들은 한동안 저승에서 부활 후 그들의 것이 될 축복을 미리 맛보며 즐거워 한다. 반면에 불신앙인들은 최종 심판 후에 그들을 기다리는 형벌을 미리 맛보고 있다. 이 절충적 견해가 유대교(Judaism)에 지배적인 것은 아니었다.(H. Bietenhard, DNTT).||(c) 하데스에 관한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구약의 신실한 성도들은 죽을 때 그와 같은 암울한 곳으로 갔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곧 주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 위하여 그에게로 갔었는가?는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전자의 견해가 팽배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함께 구약의 성도들을 천국으로 데려 가기 위해서 곧 바로 하데스로 내려 오셨다고 보았다.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이와 같은 하데스의 개념이 하나님께서 사후의 생활에 대해 더욱 더 많이 알려 주실 때까지(생명과 불멸의 영원성을 그 보혈로 가져오신 그리스도에 이르러선 그 계시가 절정에 이르렀다고 봄) 이방 민족들에게 흔한 것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사상적 개념이었던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두 가지 견해들은 모두 풀기 어려운 것들로서 남아있다.(참조: Pictorial Encyclopedi a of the Bible).|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판단은 선인, 곧 신자에게는 복을 주시고 악인 곧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벌을 내리신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삶의 진실한 의미는 하나님과 동행하여 사는데 있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구약의 성도는 하데스의 어느 장소에 속하느냐에 대한 마지막 판결로써 악인과 선인의 일반적인 운명이 결정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사상이 더 옳을 것 같다.|하데스의 구문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해 확실히 밝혀 졌다. 하데스에서 성도와 악인의 자리는 아브라함과 부자의 비유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다르다.||#3. 신약성경의 용법.||(a) 명사 하데스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마태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 요한계시록에서만 나온다. KJV는 하데스를 한 구절만("무덤 grave", 고전 15:55) 제외하고 '지옥 hell'으로 번역하고 영원한 멸망의 장소인 게헨나도 "지옥 hell"으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혼돈을 일으킨다. RSV는 한 구절("사망", 마 16:18)을 제외하고 모두 음역하여 "하데스 hades"로, NASB는 모두 "하데스 Hades", 한글 개역은 한 구절만("사망", 고전 15:55) 제외하고 모두 음부로 번역했다.||(b) ① 마 11:23과 병행구절 눅 10:15은 사 14:11, 13, 15을 인용하고, 행 2:27; 행 2:31에서는 시 16:10을 인용하며, 각 경우에 하데스는 70인역본에서처럼 히브리어 세올(곧 죽음의 영역)을 번역한 것이다.|② 보다 일반적인 개념인 아뷧소스(마 11:23과 병행구절 눅 10:15; 참조: 롬 10:6이하)에 관하여 정의하는 구절들은 형벌과 고통의 장소인 게엔나와 함께 쓰일 경우에서처럼 유동적이다(눅 16:23이하 참조. 마 18:9 병행구절 막 9:47이하).|③ 그런데 마 11:23과 병행구절 눅 10:15에서 하데스는 우라노스와 관련되어 단지 행 2:27; 행 2:31의 끔직하고 거대한 지옥을 표현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하여 이해되는 시 16:10에서는 단순히 죽음을 나타낸다.|④ 나머지는 모두 전승되어온 고대 유대 유전에 의해 형성되어 나타나는데 이 단어가 언제나 다나토스(죽음)과 연관되어 있는 요한계시록의 4곳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다(계: 1:18; 참조: 계 9:1; 계 20:1의 아뷧소스).|사망(다나토스) 즉 창백한 말을 탄 자는 음부를 동반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뒤에 앉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계 6:8).|의인화된 표현에서 흉포한 형상(참조. 고전 15:26; 고전 15:54-고전 15:56)으로 그려진 사망과 음부는 마지막 심판 때에 그들 자신이 불못(계 20:14)에 던지워지기 전에 그들의 죽은 자를 넘겨주어야 한다(계 20:13).|계 1:18에 언급된 음부의 열쇠는 마 16:18에 언급된 음부의 문에 속해 있다: 죽음의 영역은 천국의 도시처럼(참조: 계 21장)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이다. 예수님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음부는 고통스러운 곳이며(눅 16:23) 따라서 결국 "지옥"과 동일하다.||(c) 눅 16:23을 제외하고는 음부는 죽은 자들이 단지 한정된 기간 동안 머무르는 장소로 생각된다(행 2:27; 행 2:31과 특히 계 20:13이하). 그의 부활의 때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주시는 사망에 대한 승리(참조: 롬 6:9; 고전 15:21; 고전 15:26; 딤후 1:10 등)는 또한 음부에 대한 승리이다(행 2:27; 행 2:31; 계 20:13이하). 세례(침례)를 통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이 승리에 참여한다(참조: 롬 6:3-롬 6:11; 골 2:12-골 2:15; 골 3:1-골 3:4). 음부의 문(마 16:18)은 이미 천국 도시의 시민인 자를 위협하지 못한다(참조: 계 21:25-계 21:27; 계 22:14이하; 갈 4:26; 히 12:22-히 12:24)(O. Bocher).|(참조: J. Jeremias; H. Bietenhard; Walter Bauer).
편벽이 없는
ajdiavkrito"
불확실하지 않은, 치우치지 않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아디아크리토스는 부정접두사 %107와 디아크리노($1252)에서 유래했으며,|1) '구별할 수 없는, 분간할 수 없는'|2) '의심스러움이나 모호함이 없는, 불확실함이 없는'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아디아크리토스는 70인역본에서 잠 25:1에 한번, 히브리어 해당어 없이 나타나며, "솔로몬의 잠언"이란 문구를 '솔로몬의 확실한(의심스러움이 없는) 교훈'이라고 번역하고 있다.||#3. 신약성경의 용법.||아디아크리토스는 신약성경에서 한번 나타난다. 약 3:17에서 지혜 있는 자는 디아크리토스, 즉 확신하기 때문에, 그 행위가 모호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동요함이나 모순이 없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며(Arnolt, 16) 편벽이 없다.|(참조: B. Gartner. DN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