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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바알
Baval
바알 Baal.||명사 바알은 히브리어 바알(주인, 소유)의 음역이며, 셈족들(페니키아인, 가나안인, 바빌로니아인, 앗시리아인)과 때때로 이스라엘인들이 최고의 거룩한 신으로 숭배하던 신의 이름이다. 이 신은 태양으로 상징되었다.||신약성경에서 바알은 롬 11:4에 한번 나온다: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바벨론
Babulwvn
바벨론 Babylon(지)||#1. 고대의 기록 및 구약성경.||(a) 바뷜론은 히브리어 바벨(**)에서 유래했으며, 바벨론어 바빌리(bab-ili), 복수형 바빌라니(bab-ilani)의 번역이다. 이 바벨론어는 더 이전의 수메르어 명칭 카딩길라(ka-dingir-ra: '신의 문')를 번역한 것이다.|이 명칭이 후 바빌로니아어로 '밥 일리'(Bab-ili)라고 번역되어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 같으며, 창 11:9의(언어를) "혼잡케 하셨다"를 뜻하는 발랄(balal)의 어원이 바로 이 '밥 일리'에 근거한 용어이다.|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이 바벨론은 신학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시로 언급되고 있다. 바벨론은 B.C. 2,100년 경에는 간혹 B.C. 7세기 경에는 매우 자주 틴 티르키(tin-tir ki: 나무들의 생명), 에-키(e-ki: 운하의 장소)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렘 25:26; 렘 51:41의 세샤크는 바벨의 암호형의 철자의 번역으로 해석하지만 옛 이름 쉐쉬키(ses-ki)의 희귀한 출현일지도 모른다(참조: NBD; ISBE).||(b) 바벨론은 시날(Shinar, 창 10:10) 땅의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위치한 도시이며, 이 도시의 유적지는 현재 이라크의 바그다드의 남쪽 80㎞, 힐라(Hillah)의 북쪽 8㎞ 지점에 위치해 있다(890헥타아르).||창 10:10에 의하면 니므롯이 이 도시를 자신의 수도로 건설했다. 창 11:1-9에서 패역한 인간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반항하여 그 유명한 바벨탑을 이곳에 세우기 시작했지만 하나님이 막으심으로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수메르인들의 기록에도(B.C. 2,250경), 아카드의 사르곤왕에 의해 파괴된 이 도시의 신전을 니므롯이 복구하였다고 나타난다. 이 도시는 우르 제 3왕조 때에(B.C. 2,150-2,050년경),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들에게 점령당했다. 그 후에 이 도시는 바벨론 제 1왕조의 수도가 되었다.|바벨론 제 1왕조의 함무라비 왕은(B.C. 1,750년경) 이 도시를 복구시키고 그 영향력을 크게 확장시켰다. 함무라비는 그 곳을 근동의 문화 중심지로 만드는 책임을 지고 노력했으며, 이것은 헬라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마르둑(Marduk)을 바벨론의 도시 신(神)으로 만든 것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약 1,300여 신들의 수메르-아카드 만신전(pantheon)의 우두머리 신으로 만든 데서 기인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종교적 전통을 하나의 체계 속에 편입시켜 버렸다. 함무라비는 바벨론을 세계적인 세력으로 만들었으며,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사르곤(Sargon)과 나람신(Naramsin)이라는 아카드 왕들을 세계적인 권력의 계승자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바벨론은 그리스와는 관계없이 과학적인 지식을 발전시켰으며, 이에 관한 주요한 발달은 신화, 철학, 의학, 수학(1세기 경의)과 천문학 방면에서 이루어졌다(참조: 단 1:4, 17).||B.C. 1,600년경 이 도시는 헷 족속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그 후에는 카시트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이 도시는 계속하여 앗수르와 엘람의 침범을 당하였고, B.C. 1,124년경에 느부갓네살 1세에 의해 재건되었다.||B.C. 689년 신 앗수르의 산헤림 왕에 의해 정복당했다. B.C. 698년에 신 앗수르 제국이 멸망하자 갈대아인 나보폴랏살이 이 도시를 되찾아 B.C. 626년에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이 도시를 복구하려는 그의 역사는 그의 후계자들, 특히 바벨론왕 느브갓네살 2세(왕하 24:1)에 계승되었다. 느부갓네살 2세는 그가 건설한 큰 도시 바벨론을 자랑으로 여겼다(단 4:30). 유다와 전쟁 후 승리한 바벨론 군대가 유대인 포로들을 끌고간 곳이 이 바벨론이었다. 포로들 중에는 여호야김이 있었으며, 그의 포로는 바벨론의 폐허지에서 발견된 비문에 의해 확인되었다. 눈먼 시드기야 왕과 함께 가져간 예루살렘 성전에서 취한 약탈품(왕하 25:7-13)은 이 도시의 중요 신전, 아마도 마르둑 신의 신전에 저장되었다(대하 36:7). 이 도시는 후에 아멜 마르둑(에윌 모르닥)이 통치했으며, 다니엘이 마지막 갈대아 통치자 벨사살을 섬긴 곳이다.||B.C. 539년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들어와 벨사살 왕을 죽이고 이 도시를 접수했다(단 5:30). 그 후 B.C. 478년 크세르크세스(참조: 스 4:6의 아하수에로)는 이 도시를 침공하여 파괴해 버렸다. 그 후 알렉산더 대제가 이 도시를 크게 재건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일이 진전되기 전에 사망했다.|그의 후계자 셀류쿠스 1세 니카터(Seleucusl Nicator)가 바벨론 대신 티그리스 강변에 새 수도인 셀류키아(Seleucia)를 건설함으로써 바벨론 도시는 몰락하여 폐허가 되어 갔다.||이사야(사 14:1-23; 사 21:1-10; 사 46:1-2; 사 47:1-5)와 예레미야(렘 50-51장)에서 예언한대로 바벨론은 멸망하여 폐허가 되었다.||바벨론 왕은 유다와 그 연합국의 징벌을 위한 여호와의 도구였다(렘 25:9; 렘 27:6 이하). 겔 30:24 이하에서 바벨론 왕은 여호와께서 그의 목적을 이루시는 여호와의 검이다.|슥 5:11에서 악의 덩어리를 나타내는, 에바 속에 던져진 여인(8절)은 그녀를 위하여 전이 세워질 시날(바벨론) 땅으로 옮겨진다. 에바에 갇힌 여인은 온갖 개별적인 죄의 뿌리가 되는 힘인 악, 곧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나타낸다.|이 모든 것은 거짓된 종교, 즉 참된 하나님과 그의 계시된 말씀을 거스리는 패역 위에 세워진 문화와 문명의 주요한 발달 중심지이자 제국적 압제의 요람이며 하나님의 백성의 대적, 간단히 말해서 악의 축도(화신)인 시날 곧 바벨론의 사악성을 지적해주는 것이다. 시날 땅에 건설된 바벨론의 명성은 바벨론의 벽에 관한 예레미야의 언급(렘 51:12, 58)을 포함하여 모르닥과 (혹은) 벨을 이 도시의 신으로 공경하던 바벨론의 종교 제도에 관한 성경의 자료들(사 13장; 미 4:10)에 나타나 있다. 이 두 신은 성경에 나타나 있다(렘 50:2).||#2. 신약성경.||바뷜론은 신약성경에서 1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마 1:11 이하; 마 1:17 이하(예수님의 족보)에서 이스라엘 역사의 두 번째 국면은 포로기로 종결된다. 예견의 시대-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에 이르는 14세대-가 지나간 후에 그 이거와 모든 약속의 성취가 되리라고 예상되었다. 족보의 구성에서 이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시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기여한다.||(b) 행 7:43에서 바벨론의 언급은 구약성경에서 취한 것이다: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벨론의 유수는 예레미야와 에스겔에서와 같이 가나안의 정복 이후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형벌로 나타난다.||(c) 벧전 5: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그녀(%216)가 너희에게 문안하고...'이다.|베드로는 교회를 '그녀'로 표현한다. 여기서 바벨론은 그 당시 유대인의 적대적 대상을 배경으로하여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바벨론은 로마를 암암리에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한번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은 이제 세상에서 포로 신세로 살게 될 것이다. 이런 사실은 초기의 모든 주석들과 로마에서 베드로의 사역에 관한 전승에 의해 뒷받침된다. 만일 이런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베드로와 교회가 바벨론에게 행한 예언들을 로마에 적용시켰으며, 따라서 로마의 멸망을 예상했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d)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은 마지막 때의 불경건한 세력을 의미한다.|① 계 14: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② 계 16: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③ 계 17: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④ 계 18: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⑤ 계 18:10,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⑥ 계 18:21,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K. G. Kuhn; H. Seebass).
바드모스
baqmov"
계단, 지위 degre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바드모스(Soph.)는 바이노(%227: 걷다, 가다)에서 유래했으며,||(a) '문지방, 계단',|(b) '계급, 지위'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바드모스는 70인역본에서 약 7회 나오며, 삼상 5:5에서 밋탄(4670: 문지방)을 번역하여, 그 의미를, 왕하 20:9이하에서 마알라(4609: 계단, 층계, 걸음)을 번역하여 해 그림자의 '단계, 도'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바드모스는 신약성경에서 딤전 3:13에 한 번 나온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깊은 것
bavqo"
깊음 depth.||#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바도스(Aeschy., Hdt. 이래로)는 언어학상 '계곡 바닥', '갈라진 틈'을 뜻하는 벳사(bessa, 도릭어 bassa)와 관련이 있다.||(a) 바도스는 '외적 깊이'라는 의미로, 지층의 깊이, 치수(길이나 간격 등)로서 깊이를 의미하고, 여기서 공간적 '깊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땅, 바다, 물질적 영역, 우주 공간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밑없는'(문자적으로 '깊이를 잴 수 없는')을 뜻하는 아뷧소스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아래쪽으로 뿐만 아니라 수평선이나 위쪽으로의 간격을 표현한다.||(b) 바도스는 '깊음'이나 '깊이'라는 비유적 의미로,|① 어떤 대상이나 인간의 자질(지혜, 이해력, 영혼)의 완전함, 강조, 충실, 위대함.|② 측량할 수 없음, 불가해, 숨음을 의미한다.|③ 헬라주의와 영지주의는 신이나 하나님의 심오함을 깊음으로 말하는 비유적 의미를 취하였다. 이 마지막 표현은 하나님을 원래 '당신(Thou)이나 그(He)'로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 살아계신 자, 자기 계시하는 자로가 아니라 정적이며 불가사의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2. 70인역본의 용법||바도스는 70인역본에서 약 3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마아막킴(깊이, 깊음), 메출라(깊음, 깊은 곳), 타흐티('낮은, 아래의', 비유적으로 '구덩이, 음부, 지하세계')의 역어로 사용되었다.|따라서 바도스는 문자적으로 바다의 깊음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출 15:5; 느 9:11; 슥 10:11).|바도스는 비유적 의미로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바도스는 죄의식과 죄로 괴로워하는 사람의 내적 필요와(시 130[129]:1) 절박한 환경에서의 외적 필요(시 69:2,14[68:3, 15])를 뜻한다.|바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최고 간격의 분리(바다의 깊음, 욘 2:4; 미 7:19)를 표현하는데 이런 구절에서 보면 문자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 사이의 경계가 유동적인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바도스는 하계(under world)를 의미한다(겔 26:20; 31:14,18; 32:18이하, 24). 여기에서 또한 바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를 표현한다. 쿰란의 문서는 하나님의 신비의 심원함(깊음)을 말한다(IQS 11:19; IQM 10:11).||#3. 신약성경의 용법||바도스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오며, 문자적 의미와 비유 및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a) 바도스는 문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 13:5; 병행구, 막 4:5에서 흙의 '깊음'을 묘사한다. 눅 5:4에서는 바다의 '깊음'을 표현한다.||(b) 고후 8:2에서 바도스는 가난의 '깊음'을 묘사한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극심한 가난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c) 바도스는 하나님이나 세상에 관련하여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① 롬 11:33에서 바도스는 하나님의 부요의 '깊음'을 나타낸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의 부요의 깊음, 곧 지혜와 지식의 깊음은 인간의 판단과는 달리,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본성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신비한 방법과 판단력으로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이시다.|② 고전 2:10에서 하나님의 행사의 바도스(깊음)는 세상의 원리로부터 숨겨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사는 오직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③ 롬 8:39에서 바도스는 뒤나미스(힘, 세력)와 같은 한 크티시스($2937: 창조의 행위나 창조물)이다. 바도스는 분명히 인류를 압박하는 어떤 유의 세력을 묘사한다. 점성학에서 바도스는 별이 나타나는 수평선 아래 있는 하늘의 일부를 뜻한다. 아마도 여기서는 별들에서 발산하는 힘을 뜻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신학적으로 명백한 사실은 깊음의(별들의)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힘을 당하지 못한다는 것이 오늘까지도 크게 신임받는 설명이다.|④ 엡 3:19에서 바도스는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라는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천적 클레시스($2821: 부름)나 클레로노미아($2817: 상속물, 기업)을 의미한다. 이 상속은 포괄적이다.|⑤ 계 2:24에서 사탄의 깊은 것은 부도덕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깊은 것과 대조된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그것이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구원의 능력을 더욱 효과적으로 증명하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불경건한 것에 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깊음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은 이러한 세력의 억제를 뜻하지 아니하고 굴복하여 결국 구원을 상실함을 뜻한다.|(참조: H. Schlier; J. Bunck).
바뒤노
baquvnw
(아래로) 깊게 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바뒤노(Homer 이래)는 바뒤스($901: 깊은)에서 유래했으며, '깊게하다, 깊게 내려 가게 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바뒤노는 70인역본에서 3회 나오며, 아마크(깊다, 깊게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다(시 92:6; 렘 49:8; 49:30).||#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바뒤노는 신약성경에서 눅 6:48에 한번 나온다: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여기에서 에스캅센 카이 에바뒤넨("깊이 파고")는 '깊이 파고'라는 뜻이 아니라 그 일의 계속을 표현한다. 따라서 그것은 '파서 아래로 깊게 하다'를 의미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깊은
baquv"
깊은 deep.||#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바뒤스(Homer 이래로)는 '깊은'을 의미하며, 기본어이다.||#2. 70인역본의 용법||바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아모크(깊다, 심오하다)와 파생어들(깊이, 깊은, 깊음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바뒤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문자적 의미와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a) 요 4:11에서 바뒤스는 우물의 '깊은' 것을 묘사한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b) 눅 24:1에서 바뒤스는 '새벽'을 묘사한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c) 행 20:9에서 바뒤스는 깊이 조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참조: J.H.Thayer).
바이온
bai?on
(종려나무) 가지.||#1. 고전 헬라어 및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바이온은 애굽어 바이(bai)에서 유래했으며, '종려나무' 가지를 의미한다.|70인역본에서 마카베오일서 13:51에 한번 '종려나무 가지'라는 의미로 나온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바이온은 신약성경에서 요 12:13에 한번 나오며 종려나무의 '가지'에 대하여 사용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발람
balaavm
발람 Balaam(인)||#1. 구약성경.||발라암은 '탐식자, 백성을 파멸시키는 자'를 의미한다.|발라암은 70인역본에서 발암의 음역이며, 한글 개역은 '발람'으로 음역했다.|발라암, 곧 발암은 메소보다미아의 브돌의 태생이며, 브올의 아들이다(신 23:4; 민 22:5). 그는 술사이며(수 13:22), 벧후 2:15; 벧후 2:16에서는 '선지자'라고 했다. 그는 미디안 사람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민 31:1; 민 31:8; 수 13:22).||(a) 구약성경에서 발람은 한 설명인 민 22장에서 24장에 축복의 도구로 제시한다(수 24:9-수 24:10; 미 6:5; 신 23:5-신 23:6; 느 13:2). 모압의 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그에게 요구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 백성을 축복한다. 이 이야기의 중점은 그 백성에 대한 축복에 있다. 발람은 단지 하나님의 뜻의 도구일 뿐이다. 개인적인 공적이나 개인적인 죄에 대한 질문은 발생하지 않는다.||다른 설명인 민 31:16에서는 유혹과 그 결과인 부도덕과 배교의 도구로 제시한다. 발람의 충고에 따라 미디안 여인들은(또는 민 25:1의 모압 여자들) 이스라엘 사람들을 음행하도록 유혹하여 여호와를 배반하고 바알 브올에게로 향하게 했다. 이 일 때문에 발람은 미디안에 대한 복수의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다(민 31:8; 수 13:22).||(b) 후기 유대교는 발람에 대한 이야기의 핵심을 민 31:16에서 찾았으며, 이것에 비추어 보다 이전의 기사(민 22장-24장)를 해석하였다. 이스라엘을 음행하고 배교하도록 유혹한 발람(S.Nu.)은 "범죄자"(Tanch. B.)이다. 그는 민 24:2에 의하면 시기심이 강하고 악의적이며, 민 22:13에 의하면 거만하며, 민 22:18에 의하면 탐욕스럽다(Tanch. B.). 발람이 길에서 그를 막은 천사에게 말한 것은 그를 완전히 나쁜 자임을 나타내는 위선과 허위이다(Tanch. B.). 그는 특별히 장래의 세상에서 아무 몫이 없는 자들 가운데 포함된다(Sanh., 10, 2). 필로는 그를 정확히 같은 입장에서 묘사한다(Vit. Mos., I, 264-300; Migr. Abr., 113-115). 반면 요세푸스는 그를 평가할 때에 보다 더 자제한다(Ant., 4, 100-158). 그는 발람의 꾀에 관해서까지도 비난하지 않는다(민 31:16). 그는 모든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빨리 지나간다. 요세푸스는 그를 가능한 가장 밝은 면에서 설명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음에 틀림없다.||#3. 신약성경의 용법.||후기 유대교의 발람에 대한 평가(예를 들면 필로와 랍비들의 평가)는 기독교에서도 받아들인다. 발람은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는데 베드로후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에 각각 한번 사용되었다.||벧후 2:15; 유 1:11; 계 2:14에서 발람은 그들의 과실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혼란시키는 방탕한 그노시스주의자들의 구약의 모델이다. 참으로 유사한 점이 계 2:14에서 지적된다.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권고로 타락시킨 것처럼 그노시스주의자들이라고 불리우는 계시록의 니골라당은 우상 숭배(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의 고기를 먹는 것)와 음행을 가르침으로 교회들을 유혹한다.|보다 덜 핵심적인 다른 유사점이 유 1:11에서 언급된다(벧후 2:15에서도). 즉 발람처럼 그노시스주의자들은 탐욕 때문에, 이익을 얻기 위해 파괴적인 활동을 계속한다.|벧후 2:16은 민 22:22-민 22:23에 기록된 이야기가 발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다는 증거임을 간파하면서 발람과 같은 이단자들이 같은 모양으로 대적하고 있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발람에 대한 논쟁에서 무서운 실례가 유행어와 일반적인 비유가 되었다. 그 비유는 상세히 다룰 필요가 없었다. 유 1:11에서처럼 간결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K. G. Kuhn).
발락
balavk
발락 Balac(인)||#1. 구약성경.||발락은 히브리어 바락('공허한, 헛된', 능동적 의미로 '공허하게 만드는 자, 약탈자, 파괴자')을 번역한 것이다.|민 22-24장에 의하면 발락은 십볼의 아들이며 모압왕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진행하여 모압 평지에 진쳤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기 위해 발람을 매수하여 저주하여 그들의 진로를 방해하려 했다. 그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른 세 곳에 제단을 쌓았지만 실패하고 말았다.|발락은 히브리 역사를 통하여 여호와의 뜻을 훼방하려는 어리석은 자의 표본으로 기억되었다(수 24:9; 삿 11:25).||#2. 신약성경.||발락은 신약성경에서 계 2:14에 한번 나온다: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한 일이 막힌 후에, 모압왕 발락에게 만일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을 경배하도록 설득한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호를 박탈당할 것이라고 권고한 사람이었다(민 31:16). 바알을 섬기도록 한 이 사건은 오는 세대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이것이 영적 타락에 대한 하나의 속담이 되었다. 여기에 언급된 "이스라엘 백성 앞에 올무를 놓게"한 발락에게 준 발람의 교훈을 상기시킨다. 그 올무는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하는 것이었다(Leon Morris).|(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NBD, ISBE).
발란티온
balavntion
지갑, 돈주머니 purs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발란티온(Pseudo-Simonides 이래로)은 돈을 넣는데 사용되는 '돈주머니'나 '지갑'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발란티온은 70인역본에서 5회 나온다. 발란티온은 잠 1:14, 욥 14:17, 토비트 1:14; 8:2; 집회서 18:33에서 동전을 넣는 지갑이나 주머니를 가리킨다.||#3. 신약성경의 용법||발란티온은 신약성경에서 4회, 모두 누가복음에서만 나온다(눅 10:4; 눅 12:33; 눅 22:35-눅 22:36).|눅 10:4(참조: 마 10:9; 막 6:8)의 요지는 여행하기 위해 돈을 휴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동전을 허리에 묶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반해, 누가복음은 특별한 지갑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요 12:33에도 나오는 것처럼, 정착된 삶의 안정을 포기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죽음으로 상황은 바뀐다(눅 22:35-눅 22:36).|(참조: Walter Bauer; K.H.Rengstorf; G.T.D.Angel).
꽂다
bavllw
던지다 throw.||#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발로는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a) 타동사로, '던지다' throw, '추진하다' propel(Hom. od., Theocr., P.Oxy.), '내던지다, 버리다'(Aristoph.), '자신을 내던지다'(Jos. Bell.).||(b) '내려 놓다' lay down, '부어 넣다' pour in(Epict. Diss.), '마음에 어떤 사상을 간직하다'(Hom. od.).||(c) 자동사로, '어떤 곳에 가져오다, 몸을 맡기다, ~에 의지하다, 잠에 빠지다'(Eur. Cyc.)를 의미한다(참조: F. Hauck).||#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발로는 70인역본에서 약 65회 나오며, 20개의 히브리어 단어 및 어군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씨를 뿌리는 것'(시 126:6), '제비를 뽑는 것'(시 22:18; 대상 25:8), 돌을 '던지는 것'(집회서 22:20; 27:25) 등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발로는 신약성경에서 약 122회 나온다.||1. 발로는 신약성경에서|대개의 헬라어의 경우처럼, 매우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a) 발로는 기본적인 의미, '던지다' throw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마 3:10; 병행구 마 6:30; 병행구 요 8:59).|① 마 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②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③ 요 8: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b) 발로가 현재형일 때, 특히 사람이 목적어로 사용될 때, 종종 폭력적인 사건을 묘사한다. 예를 들면,|① 마 5: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② 마 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③ 막 9: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④ 막 9: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c) 발로의 기본적인 의미에 특별한 뉘앙스가 더해질 수 있다. 그래서 발로는 다음과 같이 공식화 되어 나타난다.|① 무엇인가를 동물들에게 던지다(막 7:27 병행구절 마 7:6).|② 그물이나 낚시를 던지다(마 4:18; 마 13:47; 마 17:27; 요 21:6).|③ 과일을 떨어지게 하다(계 6:13).|④ 누군가를 '병상'에 두는 것(계 2:22)을 의미하기 위해 능동태를 사용하는 것은 사람이 침상에 앓아 누워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완료 수동태를 사용하는 것(마 8:6; 마 8:14; 마 9:2; 눅 16:20; 참조, 막 7:30)과 관련된다.||(d) 발로의 다른 기본적 의미들은,|① 씨를 땅에 '뿌리다'(막 4:26).|② 티끌을 공중에 '날리다'(행 22:23).|③ 입에서 물을 '토하다'(계 12:15 이하)이다.|④ 명령과 관련하여, '버리다'를 의미한다(마 5:29 이하; 마 18:8 이하).|⑤ 소금과 관련하여 '버리다'를 의미한다(마 5:13; 마 13:48; 눅 14:35; 요 15:6).|⑥ 요일 4:18에서 후자는 '몰아내다, 쫓아버리다'를 의미한다.||(e) 종종 발로는 단순히 '가져오다, 데려오다' bring(마 10:34; 요 5:7) 또는 '두다, 놓다' lay(막 7:33; 요 20:25; 요 20:27; 약 3:3; 계 2:24; 계 4:10)를 의미한다.||여기에는 개개의 뉘앙스의 차이가 존재한다.|① 연보 궤에 돈을 '넣다', 등(막 12:41 이하. 병행구절; 마 27:6; 요 12:6).|② 취리하는 자들에게 돈을 '맡기다'(마 25:27).|③ 포도주를 가죽 부대에 '채우다'(막 2:22).|④ 대야에 물을 붓다(요 13:5).|⑤ 몸에 향유를 붓다(마 26:12).|⑥ 검을 칼집에 꽂다(요 18:11).|⑦ 채소밭에 씨를 뿌리다(눅 13:19).|⑧ 생각을 제안하다(요 13:2).|⑨ 죄를 범할 기회를 주다(계 2:14) 등.||(f) 공관 복음서에서의 발로의 사용들 중에서 마 10:34과 눅 12:49에서 두 번의 엘돈(%359)을 말씀하신 것은 특히 흥미롭다.|① 마 10:34(참조 눅 12:51)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오셨다. 원래의 의미는 아마도 예수님의 오심으로 아직 메시야적 평화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에 앞서 일어나야만 하는 종말의 고통의 때가 도래하였다는 것일 것이다(참조, Jeremias, Theology). 마태는 예수님의 일하심으로 인해 야기되는 사람들 간의 분열에 대한 말씀을 사용한다(마 10:35 이하; 눅 12:51이하도 마찬가지이다).|눅 12:49의 말씀은 눅 12:50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의미도 많이 논란된다. 마 10:34에서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땅에 불을 던지러 왔노니"란 말씀도 종말의 고통의 선포일 수 있다(참조: Jeremias, Parables). 누가 자신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땅에 던지실" 심판의 불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참조, 눅 3:17; 눅 17:24; 눅 17:29 이하). 눅 17:24이하와 유사한 그 이중의 말씀은 따라서 장래 심판 때의 예수님의 역할(눅 12:49)과 심판에 앞서 있어야만 하는 그의 수난(눅 12:50) 사이의 내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눅 12:49에서 누가가 그리스도의 선포로 인하여 야기된 마음의 분열(눅 12:51)이나 눅 3:16의 성취로 행 2:1이하의 성령의 부으심을 마음에 두었을 가능성은 적다.||② 강제로 던진다는 표현으로서 발로는 심판의 말씀에서 되풀이하여 나타난다. 요 15:6에서처럼 마 3:10와 병행구절 눅 3:9의 세례(침례) 요한의 설교 속의 "불을 던지는 것"은 원래 단순히 심판 때의 멸망의 상징이다(참조: 렘 22:7).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마 3:10=마 7:19의 "불"은 실제의 종말의 지옥불을 묘사한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유죄 판결 아래 떨어진 자들이 '게헨나'(막 9:45; 막 9:47; 마 5:29; 마 18:9; 참조, 눅 12:5), "영원한 불"(마 18:8), "풀무 불"(마 13:42; 마 13:50), 또는 "불못"(계 20:15)으로 던져진다고 말할 때 이러한 의미가 있다. 마태복음(마 25:41을 보라)과 요한계시록(계 19:20; 계 20:10; 계 20:14)에 의하면 같은 형벌이 사탄과 모든 불경건한 세력들에게 주어진다. 그 기본적인 사상과 용법은 유대의 계시 신앙에서 왔다(참조, 1 Enoch 10:6; 54:5 이하; 90:24 이하; 91:9; 98:3; T. Jud. 25:3).||(g) 요한계시록에서는 발로를 종말의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던지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계 12:4; 계 14:19; 계 18:21; 계 20:3과 특히 종말의 역병(계 8:5; 계 8:7이하)의 발생, 사탄의 몰락(계 12:9 이하; 계 12:13)과 심판의 수확(계 14:16; 계 14:19).|(참조: F. Hauck; O. Hofius)
세례
baptivzw
세례(침례)를 베풀다 baptiz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밥티조는 밥토($911: 잠그다, 물들이다)의 강의형으로||(a) '담그다'||(b) (사람을 물에 빠뜨리거나 배를 침몰 시킴으로) '멸망시키다'를 뜻한다.|밥티조가 일반 헬라어에서 간혹 의식적인 목욕에 사용된 증거가 있으나 밥티조가 그렇게 사용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는 전혀 없다(아마도 이 동사가 소멸 또는 멸망시킨다는 개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헬레니즘에 있어서 의식적인 목욕은 엘류시스 제의(Eleusinian cults), 애굽의 종교, 이시스(Isis) 예배, 신비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의식의 기초가 되는 관념은 씻고 깨끗케 하는 것이다. 물을 비롯한 여러 액체들이 신 앞에서 불결을 씻어 버리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다른 관념은 물은 생명을 주므로, 나일강 같은 물에 상징적으로 빠짐으로 생명이 소생(부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에 빠짐으로 물에 빠진 자는 신과 연결되고, 그리하여 신성을 부여 받는다. 그러나 정화의 사상은 강하지만, 제의적이며, 도덕적이었기 때문에, 예를 들면 플라톤, 필로, 요세푸스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밥티조 자체가 제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2. 70인역본의 용법.||(a) 동사 밥티조는 70인 역본에서 4회만 나오는데 사 21:4에서 은유적으로 멸망에 대하여 사용되지만, 왕하 5:14에서는 중간태로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서 7번 목욕한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경우는 멸망에 대한 암시가 전혀 없고 정화에 대한 의미가 있다. 그래서 후기에 이 단어를 의식적인 정화인 목욕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유딧 12:7에는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 - "사흘 동안 여자는 진영에 머물면서 밤마다 진영에 있는 샘물에 몸을 담갔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반대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유대 문헌과 기독교 문헌에서 밥티조는 (물에) 담그다, 가라 앉히다를 의미하며, 침례(세례)를 나타내는 전문용어가 되었다. 은유적으로 구름과 바다에서의 이스라엘의 세례(침례)(고전 10:2), 예수님의 죽으심을 침례(세례)로 보는 사상(눅 12:50), 특히 바울이 침례(세례)를 그리스도와 더불어 매장되고 부활하는 것으로 묘사한 표현은 이 견해와 일치한다.||(b) 쿰란 종파의 신자들은 정화를 위해 실제로 물에 들어갔다.||(c) 기독교 시대의 초기에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은 할례와 종교 의식적인 목욕, 즉 개종자 침례(세례)를 받고 희생제사를 드렸다. 헬라 문헌은 이러한 언급들에서 밥토를 사용하고 밥티조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교로부터 결정적인 전환은 할례로 말미암으며, 목욕은 새롭게 유대인이 된 사람이 자신의 첫번째 예배 행위, 즉 희생 제사를 행할 자격을 얻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말들에서 이교로부터 유대교로 개종이 죽음으로부터 새 생명으로의 진입으로 간주되고, 또한 이것이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한 사람의 새 생명에 대한 기독교 교리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추론하는 것이 합당하다면 유대교에서 이 개념은 단지 이차적으로 개종자 침례(세례)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과 또한 죽음과 부활이라는 견지에서 침례(세례)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가 그 성질상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장차 올 시대"를 개막하신 메시야에 관계된 침례(세례)로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의 침례(세례)는 메시야의 구속적 행위와 회심자의 메시야와의 관계를 강조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밥티조는 신약성경에서 7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밥티조는 침례(세례)를 나타내는 전문 용어로 사용되었다. 요한의 침례(세례), 예수님의 침례(세례), 기독교의 침례(세례)에 대하여 사용되었다.||(b) 요한의 침례(세례).|① 이 침례(세례)는 메시야의 출현을 준비하는 또는, 그리스도의 길을 여는 강력한 메시야적 각성 운동이다.|② 이 침례(세례)는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침례(세례)이다(막 1:4). 이러한 의미에서 이 침례(세례)는 유대인의 하나님께로 "돌아감"(회개, 곧 회심)을 표하는 것이며, 그를 참회하는 백성에 참가시켜 그에게 용서와 정화를 보증해 주는 것이다.|③ 이 침례(세례)는 메시야의 침례(세례)를 받을 준비를 하는 침례(세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침례(세례)는 메시야께서 시행하실 성령과 불의 침례(세례)를(막 1:4) 예상하고 기대하는 것으로, 그에게 천국의 한 자리를 보증하여 주는 것이다.|사 4:2-5과 말 3:1-6은 이러한 메시야적 침례(세례)가 하나님의 백성을 정련하여 천국에 적합하게 하나 이에 참여하지 못하는 악한 자들을 소멸하는 우주적 심판의 상징임을 시사한다.|④ 이 침례(세례)는 신적 기원을 가진다. 예수님은 두 가지 점에서 요한의 탁월성을 지적하고, 침례(세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 신적 기원을 입증해 주셨다(마 21:23-24; 눅 7:25-30).|⑤ 사람들은 죄를 자백하고 침례(세례)를 받았다(막 1:5; 마 3:6).||(c) 예수님의 수침(수세)|기독교의 침례(세례)는 예수님의 구속적 행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수님이 요한의 침례(세례)에 복종하신 것은(막 1:9) 죄악된 인간들과의 예수님의 연대성을 증명하신 것이며 또한 실행하신 것이다.|① 예수님의 침례(세례)는 그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헌신과 복종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신적 제도 및 의식을 승인하고 하나님의 모든 의로운 교훈을 따르려는 그의 준비(혹은 결심)를 보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신 모든 것은 예수님이 인간과 그 죄악된 세상과 운명을 같이 하셨기 때문에 행하셔야 하는 것이다.|② 예수님의 침례(세례)는 그가 메시야로서 하나님께 헌신과 복종을 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의 행위의 중요한 의미는 Levertoff가 말 한대로 "침례(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은 자기 운명을 받는 것이다. 그는 침례(세례)에서 자신을 자기의 거룩한 사명에 헌신하여 그의 백성 및 인류와 일체로서 그들의 죄를 지며 또 침례(세례)에서 그들의 죄를 그에게서 씻어버리는 것이다".||(d) 기독교의 침례(세례).|① 기독교 침례(세례)는 매우 일찍부터 실행되었다(행 2:38이하). 이것은 요한의 제자들이 교회로 들어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명백히 마 28:18, 마 28:20에 대한 비판적인 반론과는 무관하게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에 기인한 것이다.|② 침례(세례)는 교회의 선교 시작부터 복음 선포를 수반한 것으로 보인다(행 2장). 기독교 침례(세례)에 대한 누가의 이해는 행 2:38에 나타난다. 이 침례(세례)는 회개의 침례(세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그리고 그의 이름을 사용하여 행해졌다. 그러므로 침례(세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행 22:16) 자신이 그 분께 속했음을 나타내었으니(참조: 약 2:7), 이는 그 이름이 그에게 붙여진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죄의 용서"와 성령의 은사를 얻고자 함이다. 이 표준으로부터 여러 가지의 변화된 것들이 나왔다는 사실은(특히 행 8:14이하; 행 10:44이하; 행 19:1이하) 변화 시기의 상황과 성령체험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것이다.|③ 바울의 침례(세례)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갈 3:27은 중요하다.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와 합하는" 것이다("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뜻을 나타내는 속기적 표현임). 침례(세례)는 신자를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관련시킨다(참조: 갈 3:26). 이 기본적인 견해로부터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침례(세례)에 다른 모습들이 나온다. "그리스도와 합하는"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는" 침례(세례)이다(롬 6:3이하). 곧 침례(세례)는 신자를 그리스도의 구속적 행위와 연결시킴으로 골고다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죽음이 되며, 그리고 침례(세례)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삶의 종말("죽음")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시작을 수반한다. 그리스도와 합하는 침례(세례)는 → 교회Church와 합하는 침례(세례)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갈 3:27이하; 고전 12:13). 그리스도와 합하는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의 침례(세례)이다("우리가 다 한 성령을 침례(세례)를 받아 …다 한 성령[에서 흘러 나오는 것]을 아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 왜냐하면 성령과 그리스도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롬 8:9이하; 고후 3:17). 그리스도와 합하는 침례(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시고 의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신 그 모범을 따르는 새 생명을 위한 것이다("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4; 그 밖에 골 3:3-13의 침례(세례)의 윤리 강령을 참조하라). 그리스도와 합하는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의 날에 계시될 나라에서의 삶을 위한 것이다(고후 1:22; 엡 1:13; 엡 4:30). 엡 1:13과 엡 4:30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침례(세례)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문서들에서 물 침례(세례)와 연관되어 나오는 성령의 침례(세례)를 언급하는 것이다(참조: 데클라[Thecla]가 죽게 되었을 때의 강력한 발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는 마지막 날을 위하여 자신을 침례(세례)주노라" 바울행전 3:34[Henn.-Schn., II, 262]).|이처럼 침례(세례)가 종말론과 관련됨으로써 교회는 죽은 자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신자가 죽은 자들을 위해 침례(세례)를 받는 관습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고전 15:29에는 이런 관습이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 관습은 바울의 선포와 거의 조화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바울은 자신의 논증의 한 부분으로 이 관습들을 인용하였으니 즉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침례(세례)를 받아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와 합하는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부수되는 것이다(고전 1:17). 사도 바울은 대체로 다른 사람들이 침례(세례)를 주도록 허용하였다(고전 1:14이하). 이것은 침례(세례)를 과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침례(세례)의 기능을 뚜렷하게 하는 것이다. 침례(세례)는 은혜의 복음의 구체화이며 은혜의 복음을 고백하는 가장 중요한 기회이니 곧 하나님과 회개하는 죄인 사이의 관계 회복의 정점인 것이다. 서신들에 나오는 많은 고백 선언문들은 침례(세례) 고백문으로 생겨난 것이며(예: 롬 10:9; 빌 2:6-11; 엡 4:4-6; 골 1:13-20) 또한 이러한 기초들로부터 후기의 기독교 신조들이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④ 이 사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침례(세례)에 대한 현대식의 고백적 경귀들, 곧 "선언적인"(declarative), "상징적인"(symbolic), "자기 효험적인"(self-operative)등은 불충분하다. 침례(세례)가 반드시 관련을 맺게 되는 하나님께로의 "전향"이 하나의 신-인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사도행전과 서신들에서 침례(세례)는 신-인 사건으로 나타난다. 이 두 가지 요소, 즉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는 모두 똑같이 중요시된다.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기 때문에(갈 3:27),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속적 행동 가운데서 인간을 위해 역사하시고 이 행동들에 의해 주시는 모든 것이 사도의 기록들에는 침례(세례)와 결합되고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서의(롬 6:1이하; 골 2;11이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죄의 용서와 죄 씻음(행 2:38; 행 22:10), 성령을 주심(행 2:38; 고전 12:13), 그리스도의 지체에 참여함(고전 12:13; 갈 3:27), 성령으로 인하여 새로워 짐(딛 3:5),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요 3:5)이 포함된다. 이 가르침을 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사도의 기록들에서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들과 그의 구원의 은혜가 믿음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엡 3:17), 그의 죽음과 부활에의 참여(갈 2:20; 갈 5:24; 골 2:12), 용서와 깨끗게 하심(요일 1:9), 성령의 은사(갈 3:2, 갈 3:14),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됨(요 1:13), 하나님 나라에서의 생활(요 20:31)의 경우도 그러하다. 믿음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과 침례(세례)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행동을 이처럼 일치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믿음에 은총을 주신다는 것은 침례(세례)의 맥락에 속하는 것이며, 침례(세례)시의 하나님의 은사는 믿음과 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믿음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과 침례(세례)시의 하나님의 행동을 이처럼 일치시키는 것은 벧전 3:21의 침례(세례)에 대한 정의에 나타나 있다. 이곳에서 침례(세례)는 구속자와 복음에 근거하여 구속자를 고지하는 회개자를 위한 시험의 장소로 나타난다.|그러나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곧 사도행전은 침례(세례)시 하나님의 행동에 관한 모든 언명들은 구원과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교회에 성령을 맨 처음 보내시는 대목에서도 예증된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성령은 기독교의 침례(세례)(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침례(세례))를 받지 않았던 남녀들의 집단 위에 부어졌으며, 또한 우리는 그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다른 침례(세례)를 받았는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신자들(행 8:14이하), 고넬료와 그의 동료들(행 10:44이하), 그리고 에베소의 "제자들"(행 19:1이하)에 관한 기사들에서 침례(세례)와 성령에 대한 복잡한 현상들은 분명히 원시 교회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기사들은 삶이 교리의 공식화보다 더 복잡하며 하나님은 이 규범에서부터 변화된 모든 것들에 다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사도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는 모든 시대의 교회에 해당된다.|(참조: A. Oepke; G. R. Reasley-Murray; Walter Bauer; J. H. Thayer).
밥티스마
bavptisma
침례(세례) baptism.||명사 밥티스마는 밥티조($907)에서 유래했으며, '침수' immersion '침례' baptism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과 교회 문헌에 독특한 용어이며 신약성경에서 1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밥티스마는 어떤 사람이 극심하게 당하는 재난과 고난에 대하여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마 20:22이하; 막 10:38이하; 눅 12:50.||(b) 밥티스마는 요한의 세례(침례)에 대해 사용되었다. 요한은 메시야께서 실행하실 성령과 불의 세례(침례)(마 3:11)을 기대하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침례)"(막 1:4)를 시행하였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은 이 정결 의식을 통하여 영적 변화를 입게 되며, 그들의 과거의 죄를 사함 받고, 곧 세워질 메시야 왕국의 은혜를 누리기에 합당하게 된다: 마 3:7; 마 21:25; 막 11:30; 눅 7:29; 눅 20:4; 행 1:22; 행 10:37; 행 18:25; 행 19:3; "회개의 세례(침례)", 회개에의 구속, 막 1:4; 눅 3:3; 행 13:24; 행 19:4.||(c) 그리스도인의 세례(침례)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도들에 의하면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신성한 침례(세례)의식으로서,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은 이 의식을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에로 다시 태어나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친교에 들어오게 되며(참조: 고전 12:13) 영원한 구원의 참예자가 된다: 엡 4:5; 벧전 3:21;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롬 6:4.
씻는 것
baptismov"
물에 담금, 침수, 침례(세례).||명사 밥티스모스는 밥티조($907)에서 유래했으며, '물에 담금, 침수, 침례(세례)'를 의미한다.||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막 7:4, 막 7:8에서 이 단어는 유대인이 그릇을 물에 담가 씻는 의식을 나타낸다: "4 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b) 히 9:10에서 모세 율법에 규정된 사람들의 정결화를 의미한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c) 히 6:2의 "세례(침례)에 관한 교훈"이라는 말은 기독교의 세례(침례)와 다른 모든 종교적인 씻음들, 곧 독자들이 알고 있는 구약의 세정식들과, 유대와 이교의 모든 종류의 입회적인 목욕을 포함하는 모든 다른 종교적 씻음 사이를 대조 시키는 것으로 본다: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G. R. Beasley-Murray).
밥티스테스
baptisthv"
침례(세례)를 베푸는 자.||밥티스테스는 밥티조($907)에서 유래했으며, '침례(세례)를 베푸는 자'를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요한의 별명이다.|신약성경에서 밥티스테스는 공관복음에만 12회 나온다(마 3:1; 마 11:11, 마 11:12; 마 14:2,마 14:8; 마 16:14; 마 17:13; 막 6:24, 막 6:25; 막 8:28; 눅 7:20, 눅 7:28, 눅 7:33; 눅 9:19).|이 별명은 요한의 사역의 특징적 요소, 즉 회개의 세례(침례)에 대한 요구에 주의를 돌리게 하는 것이며, 또한 모든 구약적 결례와 유대교의 개종자 세례(침례)에서와 같이 스스로 세례(침례)를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타인들에게 세례(침례)를 주는 새로운 방법에 보다 더 많은 주의를 집중시킨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