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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맛보다
geuvomai
맛보다, …에 참가하다, 즐기다, 경험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규오마이는 문자적 의미로, '맛보다 taste'(Plat. Resp.,Ⅷ), '즐기다 enjoy, 먹다 eat'(Hippocr. Epid.,Ⅲ)를 의미한다.||(b) 규오마이는 비유적 의미로, '감지하다, 알아채다, 자신의 경험으로 알다(배우다), 내적 인식이나 자각에 이르다'(Hdt., Pind. Pyth., Soph. Ant등)를 의미한다.|또한 이 단어는 셈어에서 '죽음을 맛보다, 다가올 세상을 얼마간 맛보다'(BB., 15)는 의미로도 나타난다.||#2. 70인역본의 용법||규오/ 규오마이는 70인역본에서 17회 나오며 대부분 히브리어 타암 '맛보다, 감지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서 규오/ 규오마이는 문자적,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비유적 의미로는 경험 요소를 표현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신약성경에는 중간태 규오마이로만 나오며 15회 사용되었다.||⒜ 규오마이의 문자적 의미. '맛보다'는 의미는 마 27:34; 요 2:9에 나타나고, '즐기다, 먹다'는 의미로 나오는 행 10:10; 행 20:11; 행 23:14에서 나타나는데 유대인의 음모자들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맹세했다.|눅 14:24에서도 규오마이는 '즐긴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여기에서 예수님은, 비유에 나오는 주인을 통하여 자신의 말씀을 하신다. 그는 세상사에 대한 관심 때문에 메시야적 잔치에의 초대에 불응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거부당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맛보다'라는 문자적 의미는 하나님의 왕국에의 참여를 상징하고 있다.|골 2:21에서도 문자적 의미 그대로 사용되었다. 골로새 교회는 "유대교 전통에서 유래하였으나 혼합주의의 모진 시련을 받아 변질되어 '우주의 자연 요소'에 대한 숭배에 예속되어버린 용어로 사용된 "철학"(골 2:8)에 미혹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예배를 지금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천사들의 권세가 우주의 질서와 별들의 운행을 담당하고 있는 까닭에, 그것들의 거룩한 절기와 시간은 준수되어야 하며, 금기 목록에 편찬되어 있는 각종 규례들은 지켜져야 한다고 하였다(E.Lohse, Colossians and Philemon). 삶의 여러가지 영역들을 마귀의 권세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으로 구별하여 놓음으로써, 골로새 교회의 이 당파는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이기셨다는 사실을 사실상 의문에 붙이고 있었다.|이 '혼합주의 교사들의 순결에 대한 규례들'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것은 초등학문 곧 자연 요소에 대한 예배와 관련된 금기(taboos)이다. 이러한 규례는 음식에 관한 어떤 규정을 포함하고 있으며, 사도에 의하면 그러한 것들은 기독교인들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사들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벌써 세상의 규례들의 의무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J.Behm).|그러므로 바울은 골 2:20-골 2:23에서 그들을 반대하여 변증하고 있는 것이다.||⒝ 규오마이의 비유적 의미. 벧전 2:3에서 규오마이는 주님과 관련하여 나온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리라". 이 말씀은 시 34:8에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의 자유 번역인 듯하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사귈 때 그러한 좋고 유익한 맛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질 때만이 느낄 수 있는 감미(甘味)로운 감정을 말한다. 이 그리스도의 감미로움을 경험한 사람은 그의 다함이 없는 은총의 샘에서 더 깊이 더 많이 마시려는 충동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맛은 욕구를 돋운다.|히 6:4이하에 나오는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라는 말씀에도 시 34:8이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자가 특히 죄의 용서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 구원의 은혜, 성령 또는 그리스도 자신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마샬(I.H.Marshall)은, 뒤에 성령에 관한 언급이 있는 것에 비추어 성령을 언급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는 의심스럽다고 생각하고, 여기에서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구원이라는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그는 여기서 말하고 있는 '맛보다'는 주장은 칼빈이 생각한 것처럼 그저 조금만 살짝 '맛보라'는 의미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맛보는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맛을 경험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러한 명령을 듣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미 장래의 시대, 앞으로 올 세계의 어떤 것을 경험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경험 속에서 신자들이 그 세계를 미리 맛본 것이라면,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이미"와 "아직 아님" 사이의 독특한 긴장을 표현하고 있는 한 예가 될 것이다(E.Tiedtke).|규오마이는 예수님께서 그의 변모의 사건과 관련된 약속에 나타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28; 병행구, 막 9:1; 눅 9:27). 여기서 '죽음을 맛보다'는 의미에서 실제로 죽은 것을 의미한다.|히 2:9에서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구원의 행위로 간주한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았다".|여기서 그는 죽음의 쓰디 쓴 맛을 끝까지 경험하셨다는 의미에서, 죽음을 맛보셨다. 그는 철저하게 죽음을 맛보고 철저하게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가 죄인으로 정죄됨은 사람에게 육체적인 죽음을 면제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이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처형됨으로 그가 정죄 받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영원히 멸망시키는 죽음의 권세가 무너졌기 때문이다(참조: 히 2:14이하).|마찬가지로 요 8:51에도 다음과 같은 약속의 말씀이 나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참조: E. Tiedtke; J. Behm; J. H. Thayer)
밭 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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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짓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게오르게오(Hyperid., X., Pla. 이래)는 게오르고스($1092: 농부)에서 유래했으며, '농사를 짓다', '땅을 갈다'(Plat. Theag.)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게오르게오는 70인역본에서 3회 나오며, '농사를 짓는 것'을 나타낸다(대상 27:26; 마카베오일서 14:8).||#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게오르게오는 신약성경에서 히 6:7에 한번 나오며 분사가 사용되어 '농사를 짓거나 경작하는 자'를 나타낸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게오르기온
gewvrgion
경작, 경작된 밭.||#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게오르기온(Philo Mech., Strabo., Dionys. 등)은 게오르고스($1092: 농부)에서 유래했으며, '경작, 경작된 땅, 밭'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게오르기온을 신약성경에서 고전 3:9에 한번 나오며, '경작'이나 '밭'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따라서 게오르기온은 하나님의 밭으로서 기독교인 회중을 의미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경작하는 것으로 기독교 회중을 의미할 수도 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농부
gewrgov"
포도나무 재배자||#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게오르고스는 게($1093: 땅)와 에르고(%10: 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땅을 경작하는 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a) '농부'(Hdt., Aristoph.).|(b) '포도원을 가꾸는 사람'(Pal., Theaet.)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게오르고스는 신약성경에서 19회 나오며, 악한 포도원 일꾼들의 비유에 가정된 상황은 그 시대의 경제적, 법률적 관계를 반영한다(이를 테면 외국인 소유의 토지를 소작인에게 임대하는 것 같은 것; 참조. Billerbeck 1869-75). 복음서의 비유에 나오는 포도원의 일꾼들은 유대인들이다. 그 비유에서 문제는 그 일꾼들이 단지 유대의 지도자들만을 말하는 것인가(참조: 막 12:12; 눅 20:19) 아니면 이스라엘 전부를 뜻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참조: 마 21:43). 후자의 의미는 사 5:1-7과 보다 밀접하게 관련된다(참조: 70인역본 사 5:1 이하를 의도적으로 언급한 막 12:1의 병행구). 이 구절에서는 포도원 자체가 아니라 포도원의 일꾼들(소작농들)이 이스라엘 전체를 나타낸다.||요 15:1의 포도나무에 대한 설교에서 하나님은 포도나무 재배자로 묘사된다. 참 포도나무로서 예수님의 존재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 또 오직 예수님만이 계시자로서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하신다. 딤후 2:6의 농부의 은유는 군인과 운동 선수의 은유(참조: 고전 9:7; 고전 9:25)와 함께 재림 문맥에 나타난다. 약 5:7은 재림의 지연을 예상하여 믿는 자들이 인내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추수를 기다리는 농부의 은유를 사용한다.

gh'
땅 earth, 세상 world.||#1. 고전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게(Homer 이래로)는 '지구, 세상'을 가리키며; '물'과 대조되는 육지를 가리키며, 또한 지구의 한 부분, 육지의 한 부분, 개간 가능한 토양을 가진 들을 의미한다. 단일 국가에 의해서 지배되는 지역이라는 의미의 '영토'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고대 그리이스 신화에 의하면 게와 우라노스(하늘, sky)는 가장 오래된 신들 중에 포함된 것들이었다. 이 신들은 호머(Homer)의 서사시에 나오는 신들처럼 상상되어진 것이 아니었다. 게는 여성으로서 몸의 반은 지면으로부터 솟아나와 있었다. 씨와 비를 흡수하는 그녀는 모든 생명이 나오는 근원적인 모태이었다(R. Morgenthaler).||#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게는 70인역본에 2,000회 이상 나오며, 25개의 어군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는데, 대부분 히브리어 에레츠(지구, 대지, 땅, 도시(국가))를 번역한다. 70인역본에서나 신약에서는 이 단어에 신성(divinity)을 뜻하는 개념이 드러나지 않는다. 땅은 그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하나에 불과했다.(참조: 창 1:1 이하).||#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게는 신약성경에서 248회 사용되었으며, 특히 복음서와 사도행전, 계시록에 자주 나타난다.||(a) 인간의 거처로서의 땅.|① 지리적인 의미의 '땅', 예를 들면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땅(마 9:26; 막 15:33; 행 7:3; 행 7:4; 팔레스틴); 이름이 붙여진 땅: 유다의 땅(마 2:6), 이스라엘의 땅(마 2:20), 미디안과 애굽의 땅(행 7:29, 36) 등과 같은 표현들이 있다.|② 약속의 땅: 행 7:3; 히 11:9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을 나타낸다. 마 5:5에서 종말적 의미로 나타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③ 거주지 곧 사람이 사는 땅. 땅에 사는 자들을 묘사한다(계 3:10; 계 14:6; 눅 21:35; 행 3:25; 마 24:30; 계 1:7; 계 18:3; 행 22:22).|④ 역사의 무대로서 땅. 과거(계 16:18), 예수의 사역(막 2:10; 마 10:34; 요 17:4), 종말론적 역사(눅 18:8; 21:23 및 요한계시록의 많은 구절들) 등과 같은 역사와 무대로서의 땅을 의미한다.||(b) 이 세상의 일부로서의 땅. 신약성경에서는 우주를 나타내는 말로서 '천지'라는 옛 어구가 흔히 사용된다.|① 하늘과 땅은 사라질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마 5:18; 마 24:35). 그러나 그같이 사라지므로써 그것들은 "새 하늘과 새 땅"(계 21:1; 벧후 3:13)을 예비하게 될 것이다. 하늘과 땅이 사라진다는 것은 현재의 죄악에 찬 세계 질서가 사라짐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겪음으로써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구원은 물리적인 영역의 가장 먼 구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② '바다'가 세 번째 구성 요소이므로 땅은 마른 땅을 의미한다(참조: 행 4:24; 히 11:29; 계 8:7 이하).|③ 또 다른 삼중 구조에서 땅은 하늘과 땅 아래 있는 것(지하세계) 사이에 온다(계 5:3). 그러나 일관된 우주론이 없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종말론적 우주 개념도 완전히 신학적인 개념에 부수하는 것이다.|④ 마 12:42에서 '외국으로부터'를 뜻하는 '땅 끝에서', 행 1:8에서 '모든 곳에'를 뜻하는 '땅 끝까지', 계 20:8에서 '땅의 사방', 막 13:27에서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즉 이 세상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와 같은 표현들은 흥미롭다.|⑤ 계 12:16에서는 땅의 의인화를 엿볼 수 있다.||(c)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땅. 땅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행 4:24 등),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에 피조물로서 참예한다. 땅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시작과 끝이 있다. 그리고 땅은 하나님의 소유이다(고전 10:26). 하나님은 하늘의 주이실 뿐아니라 땅의 주이시다(마 11:25). 비록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 이유는 어떤 것이 땅과 하늘 두 곳 모두에서 유효할 것이며(참조: 마 16:19; 18:18-19) 땅의 것들은 하늘의 것들의 모형(히 8:5)이다. 하지만 땅은 하늘에 비교하면 불완전하고(막 9:3), 일시적인 것(마 6:19), 죄(막 2:10; 계17:5)와 사망(고전 15:47)의 장소이다.|그리스도는 땅에 속하지 않는다(요 3:31; 고전 15:47). 그는 위로부터 내려와서 다시 올리우심 받는다(참조: 엡 4:9). 그러나 구속자 신화들과 달리 신약성경은 성육신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하늘과 땅 사이에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구별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 모두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차이점은 이 땅이 죄의 무대라는 사실이다. 인자는 죄를 사하시려 이 땅에 오신다(막 2:10). 그리고 신자들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이고(히 11:13), "땅에서 구속함을 얻"으며(계 14:3), "땅엣 것을 생각지 말"고 "땅에 있는 지체"를 억제하라(골 3:2, 5)고 권면받는 이유는 타락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 있는 것에 자신들의 마음을 두어야만 한다(골3:2). 또한 그들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만 한다.|(참조: R. Morgenthaler; H. sasse; Walter Bauer).
늙어서
gh'ra"
노년 old ag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게라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노년' old age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게라스는 신약성경에서 눅 1:36에 한번 나오며, '노년'을 의미한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늙어서"에 해당하는 엔 게레이 아우테스는 문자적으로 '그의 노년에'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늙다
ghravskw
늙어가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게라스코(Homer 이래)는 게라스($1094: 노년)에서 유래했으며, '늙어가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늙어가는 것과 나이 탓으로 쇠하는 것을 나타낸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게라스코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요 21:18에서 게라스코는 '늙는다'는 의미로 시몬 베드로에 대해 사용되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b) 히 8:13에서 게라스코는 제도가 나이 탓으로 쇠퇴하는 것을 나타낸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여기서 팔라이우메노스와 함께 사용되었는데, 팔라이우메노스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반면에 게라스코는 노년에 흔히 있는 힘이 약해지고 쇠약해지는 것을 아울러 암시한다. 이렇게 쇠해지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거하다
givnomai
생겨나다, 일어나다, 되다, 만들어지다, 행해지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기노마이(이오니아의 산문 문학과 일반 헬라 문헌에서 Aristot. 이래로 나타남)는 '존재하게 되다, 생겨나다, 생산되다, 일어나다, ~이 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기노마이는 신약성경에서 67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기노마이는 ① '태어나다' be born(갈 4:4), ② '자라다, 맺다' grow(열매에 대해, 마 21:19),|③ '일어나다' arise, '생기다' happen, '이다' be,(여러가지 사건들에 대해, 마 8:26; 행 6:1; 행 12:18), ④ '만들어지다' to be made, '행해지다, 지은바 되다' be done(요 1:3; 마 11:21), ⑤ '어떤 것이 되다' to become something(막 1:17), ⑥ '오다' come(갈 3:14) 등 여러가지 의미 및 뉘앙스를 나타낸다.||(b) 기노마이는 에이나이($1511: ~이다, 있다 to be)를 대신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마 10:16; 막 4:22). 소유격을 수반하여 이 단어는 '기원'이나 '회원의 자격'을 나타낸다(눅 20:14; 벧후 1:20; 참조: Funk §162(7)). 사람에 대하여 여격을 수반하는 경우 이 단어는 '소속'을 나타낸다(롬 11:5).|(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Guhrt).
동침하다
ginwvskw
알다 know, 이해하다 understand.||#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기노스코(Homer 이래)는 기본 어근 그노(%1021)에서 형성된 단어이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a)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상황을 감각으로, 특히 시각으로 '알아차리다, 지각하다, 인식하다'를 의미한다. 호머(Homer, Od.)애서 보는 것과 기노스코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경험의 세계에서 그렇게 인지되었던 것을 마음 속에 지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된다.|따라서 이 단어는 또한 '경험하다, 배우다, 알게 되다'를 의미한다. 즉 경험된 것이 그것을 경험한 사람에게 알려진다.||(b) 이 단어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그 유사한 것이나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 있는 어떤 현상에 대한 경험이나 인지가 이런 일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Homer, Il).||(c) 이 단어는 '인격적으로 알다'(Heracl., Frag.), '이해하다'(Homer, Od.), '알다'(친밀함이 인격적 지식을 가져온다). '~와 알고 지내다, ~와 친하다, 숙달되다, 노련하다'(Plato, Rep.)를 의미한다.||(d) 이 단어는 '결정하다, 판단하다'(Democr. Fr., Demosth).||(e) 형사 법원이나 민사 법원의 판결은 주어진 사실의 비중에 의거하여 내려지기 때문에 이 판결들은 기노스코의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재판을 받다, 판결을 받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f) 이 단어는 "아는 사이나 친밀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육체적으로) '알다', 즉 '~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다'라는 헬라 용법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아마도 이 용법의 배후에는 헬라어 아닌 다른 언어에서 차용한 단어의 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의 어근이 라틴어 기그네레([아이를] 낳다)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왔다(참조: H. Leisgang, Die Gnosis).||(g) 이 단어는 '확인하다, 입증하다, 확증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철학적 지식의 목적은 보는 것인데 이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이 세상의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영원하고도 실질적인 것을 보는 것이다. 이 확인은 원래 관찰로 말미암는다.|이러한 맥락에서 기노스코는 '통찰력을 얻다, 알아차리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통찰력의 대상은 궁극적으로 종교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Herach., Frag. 5).(참조: E. D. Schmitz; Bultmann).||#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기노스코는 70인역본에서 약 800회 이상 나오며, 히브리어 야다(알다)와 그 어형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라아(보다), 하자(보다), 샤마(듣다) 등 13개 단어의 역어로도 사용되었다. 헬라의 일반적인 태도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에서도 지식은 감각을 통해서 획득된다. 이미 알려진 것은 감각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 자체는 그렇게 알려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 것(듣다)과 보는 것(보다)에 관한 동사가 아는 것에 관한 동사와 병행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예: 출 16:6 이하; 신 33:9; 삼상 14:38; 사 41:20). 이것으로 우리는 70인역본이 라아(삿 2:7)와 하자(사 26:11)와 샤마(느 4:15)의 역어로 기노스코를 사용한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헬라와 히브리 사상에서 아는 것에 관한 개념들은 대체로 일치하며 이 두 경우에 감각을 통하여 얻는 경험이 기본적인 것이다.||(a) 70인역본에서 야다/ 기노스코는 '알아채다, 인지하다, 경험하다, 관찰하다'를 의미한다(예: 창 3:7; 창 41:31; 삿 16:20; 전 8:5; 사 47:8; 호 5:3).||(b) 야다/ 기노스코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창 3:5; 창 3:22)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이다. 좋고 흉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삼상 19:36). 어린 아이는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지 못하며(욘 4:11) 또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한다(사 7:15). 후자의 구절의 문맥과 사 8:4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언명은 이 언급이, 어린 아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좋고 흉한 것, 좌우와 같은 것에 대해 관찰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된다.||(c) 야다/ 기노스코는 '배워서 알다' know by learning라는 의미를 지닌다(잠 30:3).||(d) 이 분사는 사냥(창 25:27), 학문(사 29:11-13), 애곡(암 5:16),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에 능함을 묘사하는 어구에 나온다.||(e) 야다/ 기노스코는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한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29:5; 출 1:8; 삼하 3:25). 푸알 분사형은 '친척'(왕하 10:11 등)과 '아는 사람'(욥 19:14; 룻 2:1 등)을 지칭한다.||(f) 야다/ 기노스코는 '관계하다, 관심을 가지다'(시 1:6; 시 37:18; 시 119:79), '~와 관계를 맺고 싶다'(예: 신 33:9). 신학적인 문맥에서 자주 이 단어가 적절한 지식을 얻지 못해서 결국 관심의 결여를 초래하고 마는 것에 대한 문제로 나온다(예: 렘 8:7; 시 95:10).||(g) 야다/ 기노스코는 '성적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고 하는 유명한 완곡 어법과 그 병행구들(창 4:1; 창 19:8; 민 31:17; 민 31:35; 삿 11:39; 삿 21:11; 왕상 1:4; 삼상 1:19)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남색(창 19:5; 삿 19:22)이나 강간(삿 19:25)과 같은 성적 도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h) 야다/ 기노스코는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대면하여 모세를 아신다(출 33:17; 신 34:10).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렘 1:5) 어떤 민족을(암 3:2) 아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정하시거나 선택하신다(참조: 민 16:5 70인역본). 선택으로 이해되는 이 지식은 은혜롭고 자애로운 것이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한다.||(i) 야다/ 기노스코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 외에도, 다른 신들을 아는 것이든(신 13:3; 신 13:7; 신 13:14) 여호와를 아는 것이든(삼상 2:12; 삼상 3:7) 간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렘 10:25) 선지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렘 4:22). 애굽의 재앙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애굽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다(출 10:2 등). 그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사 60:16) 그들을 파멸시키시고(겔 6:7) 회복시키실 것이다. 특히 선지자 에스겔은 위협할 때,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어구를 사용한다(겔 6:7; 겔 6:10; 겔 6:13; 겔 6:14; 겔 7:4; 겔 7:9;겔 7:27 등).||(j) 요약하면 희랍인들이 초연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사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반해, 구약성경은 지식을 끊임없이 인격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이 언급들을 존재론적 추론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의 선포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역사적 과거와 약속된 미래 즉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 지상의 영역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찾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배와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를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참조: E. D. Schmitz; Bultmann).||#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기노스코는 신약성경에서 22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기노스코의 용법은 헬라의 용법과 구약성경의 용법과 매우 유사하다.||(a) '느끼다, 간파하다'(막 5:29; 눅 8:46),||(b) '주목하다, 알아 차리다'(막 8:17; 막 12:12; 마 26:10; 고후 2:4; 요 5:42; 요 8:27),||(c) '인정하다, 인지하다' recognize(눅 7:39; 마 12:15; 마 22:18; 갈 3:7; 약 2:20; 요 4:1; 요 5:6; 요 6:15),||(d) '듣다, (들어서)알다'(막 5:43; 막 15:45; 눅 9:11; 행 17:13; 행 17:19; 빌 1:12; 빌 2:19; 요 11:57; 요 12:9; 마 10:26과 병행구; 행 9:24; 빌 4:5).||(e) '확증하다, 확실히 하다, 확인하다' confirm(막 6:38; 막 13:28 이하; 눅 1:18; 고전 4:19; 고후 13:6; 요 4:53; 요 7:51).||(f) ① 알아채고 있다(의식)라는 의미에서 '알다' know(마 24:50와 병행구; 눅 2:43; 눅 16:4; 히 10:34; 계 3:3; 요 2:24 이하; 요 7:27; 요일 3:20).|② 또한 익히 앎이나 아는 사이라는 의미에서 '알다'(마 25:24; 눅 12:47 이하; 눅 16:15; 행 1:7; 롬 2:18; 롬 7:1; 고전 5:16; 요 1:48; 요 7:49).|③ 그리고 이해라는 의미에서 '알다'(눅 18:34; 행 8:30; 고전 14:9; 요 3:10).||(g) '구별하다, 분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고전 14: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h) '~하는 방법을 알다' know how to.|마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i) 경험을 통하여 '알다, 깨닫다' find out(요 13:58; 요 15:18; 요 19:4; 요일 2:3; 요일 2:5).||(j) '~와 관계를 맺다'|① 마 1:25; 눅 1:34에서 성적인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② 마 7:23에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와 전혀 관계를 맺지 않았다'라는 의미이다.|③ 고후 5:21에서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가 죄에 대해 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이란 선언이 범죄 행위와 반어법을 나타내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④ 롬 7:7에서도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는 문구는 '율법이 없었다면 인간인 나는 죄와 본질적인 관계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의역할 수 있다.|⑤ 고후 5:16에서 '~와 관계가 있다, ~와 관계를 맺다, 개인적으로 알다'를 나타낸다. 이 구절의 의미는 많은 논쟁의 주제가 된다. 상반절에는 오이다멘("우리가 아노니")이 나오며, 하반절에는 기노스코가 에그노카멘("우리가 알았노니")과 기노스코멘("우리가 아노니")의 형태로 나온다.||(k) 고전 5:11-21에서 바울은 자기를 개인적으로 공격하며 사도직을 공격하는 적대자들과의 논쟁에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바울에게는 사도라고 확증할만한 눈에 보이는 영적인 특성, 예를 들면 무아지경의 현상들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고전 5:13). 그들은 그를 자기 자신만을 칭찬하는 '허풍선이'라고 비난했던 것 같다. 바울은 고전 5:11("우리가 ... 사람을 권하노니")과 고전 5:12("우리가 ...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에서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바울의 변호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그래서 상상된, 눈에 보이는 영적인 특성을 가진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 언급도 부분적으로 들어있다(고전 5:14 이하).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본 성령과 능력의 분명한 증거에 따라서 지금부터-모든 가치의 전도, 즉 시대의 전환점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건 이후로-"우리가 ...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못하노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고전 5:14). 이것이 얼마나 명백한 것인가를 나타내기 위해 바울은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알 수 있는 언명을 고전 5:16 하반절에 삽입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즉 그와 그렇게 관계하지 않고 오직 우리가 섬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만 관계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이시며, 그가 주님이시라는 것은 외면상으로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과 사도라고 하는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던 것 외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외적인 판단과 일반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준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새로운 피조물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외적 현상에 의한(엔 프로소포, 고전 5:12) 판단을 포함하여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도다"(고전 5:17). 이 논쟁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이 고후 5:16에서 그가 지상의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다는 것을 확증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역사적 예수님의 의미와 관계를 띠고 있지 않은 것이다.||(l) 기노스코는 '인정하다, 알아주다'를 의미한다.|① 고전 4:19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가 갈 때 교만한 자의 말이나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즉 중요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② 계 3:9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이방인?) 기독 교회에 와 보면 부활하신 이가 그들을 사랑하심을 인정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계 2:23). 이렇게 하심으로서 그는 유대인의 종말론적 소망을 뒤짚어 놓으셨다(참조: E. Lohmeyer).|③ 롬 7:1에서 "법을 아는", 롬 2:18; 행 22:14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와 같은 문구들은 단순히 이론적인 지식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되어 인간의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에 대한 인지를 암시한다.|④ 요 7:29에서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고 한 바리새인들의 말은 일반 백성들에 대한 잘 다듬어진 랍비 학자들의 비웃음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참조: SBⅡ 494-521). 이것은 일반 백성들이 실제로 율법을 알아 율법에 순종했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추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을 기록하면서 요한은 여기서 율법이 바로 그들 자신을 지적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비꼬는 것이다(참조: 요 7:42; 요 5:29 이하; 요 11:49 이하). 요 7:51에서는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고 반박하고 있다.|⑤ 롬 1:21에서 하나님을 알았던 자들의 생각이 허망하여졌다는 말은 헬라 사상의 견지에서 모순된 것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들의 허망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결과다(참조: 지혜서 13:1).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찬미와 감사를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부한 이교도들은 이 지식을 단순한 지적인 활동으로 격하시켰으며 그들이 지혜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상 어리석음일 뿐이었다(롬 1:22 이하). 이교도들이 분명히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들은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갈 4:9; 요 1:10; 고전 1:21; 갈 4:8).|⑥ 엡 5:5; 약 1:3; 약 5:20 등에서 지식에 관한 명령과 권유는 이 은사를 붙잡아 변화하는 생활 상황에서 이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라는 요구인 것이다.|⑦ 눅 10:11에서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인정해야 한다. 행 2:36에서 "이스라엘의 집"은 오순절 사건에 비추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마 24:43의 비유에 나오는 명령문도 참조하라.|⑧ 고후 8:9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즉 "부요하게 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을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하게"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실제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는 이것을 리쯔만(Lietzmann)이 해석한 것처럼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관대하심의 본이시다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H. Lietzmann, An die Korinther).||(m) 기노스코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시는 지식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딤후 2:19(민 16:5을 인용함),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고전 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갈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여기에서 하나님의 지식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똑같이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을 포함한다. 이 지식은 영원히 하나님의 피조물에게 유효한 것이며 죄와 불순종에 대한 승리이다. 롬 10:2은 이에 대한 일종의 상대 구절이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위한 유대인의 열심을 인정하긴 하지만 이것이 카타 에피그노신("[참된] 지식을 좋은 것")은 아니다(참조: Arndt, 291).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보다 깊이 통찰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결핍되어 있는 지식은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지식과 인지이다"(E. Gaugher, Der Brief an die Romer).||(n) 기노스코는 어떤 구절에서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① 마 13:11(참조: 막 4:11TR)은 오직 제자들에게만 허락된 "천국의 비밀"에 관한 감추어진 지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지식이 그들을 그 외의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는 비유의 권위 있는 해석가가 되게 했다.|롬 6:6에서는 신학적인 진리에 관한 지식, 예를 들면 세례에 관한 특별한 가르침에 대한 지식까지도 삶으로 나타내는 순종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지식의 명백한 목적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에 있는 것이다.( R. Bultmann; E. D. Schmitz).||※ 영지주의와 논쟁에서 나타난 용법 등.|신약성경 시대에는 자기들이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전 1:18-2:16; 고전 13:12 이하; 골 2:8; 딤전 4:7; 딤전 6:20).|신약성경 기자들은 자주 사도적 케뤼그마($2782: 선포, 전도)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순례 설교자들과 충돌하곤 했다. 디모데는 이른바 거짓된 지식(그노시스)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도록 명백히 경고받고 있다(참조: 딤전 6:20).|계 2:24에는 "사단의 깊은 것"을 배웠다고 주장했던 적대자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 기자는 풍자적이면서 올바른 비평적인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깊은 것"을 배웠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에 항변했던 것 같다(E. Lohmeyer).||(a) 바울 서신.|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주장하는 지식은 이처럼 바울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이것은 고전 15:34과 비교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바울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아그노시안 ... 데우)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바울은 그가 지식으로 이해한 것을 설명하라는 강요를 받은 것이다. 그는 지식을 이미 알려져 있는 것으로서 오직 수동적으로만 표현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았다(갈 4: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이라는 어구를 첨가시킴으로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을 시정했다). 이미 알려져 있는 이러한 것은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이전의 어떤 능동적인 이해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상응하는 것이다(고전 8:3).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도 참된 지식은 오히려 종말론적 약속과 기대의 일부이다(고전 13:12). 바울은 육을 입고 지상에 오신 존재를 간단히 무시해 버림으로써, 하나님에 의해 알려진 것과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일치시키는 영지주의자들의 에스카톤(목적)에 대한 환상적 기대를 완전히 거부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를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을 전적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노스데나이(하나님에 의해 알려진 것)는 선택을 포함하고 있다(참조: G. Bornkamm). 제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서 전달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주신 영이다(참조: 고후 4:6). 에스카톤 이전에는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빌 3:10; 참조: 골 2:1 이하).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학적인 사색을 통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에 의해서 만나지게 될 때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주로 고백하게 될 때 알려진다(빌 3:8).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된다. 이러한 고백이 없는 곳에서 지식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고전 14:38).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 Love은 하나님에 의해 아시는 바가 되는 것이다(고전 8:3).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복종과, 죄의 주권으로부터의 해방(참조: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0, 참조: 롬 6:3)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는데 열심히 봉사하는 곳에서 구체화되는데, 한편으로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의 약속된 부활에 이르려한다(빌 3:10). 참된 지식은 하나님께서 사도의 증거를 통해 어느 곳에서나 나타내셨던 지식이다(고후 2:14). 이것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지식은 아니다. 지금 이 지식은 단편적일 뿐이지만(고전 13:12) 완성을 기대한다. 바울이 몬 1:6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지식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은 교만하여 이 지식에 대한 어떠한 것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내가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풍자적으로 요구했다(고전 14:37). 이 모든 점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의 논법이 본질적으로 구약성경적 지식 개념의 범위 안에 머물러 있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그는 이 개념을 종말론적으로 확대하여 완성시켰다.||(b) 요한의 기록.|지식이 예수님과 요한 자신의, 그리고 요 10:14 이하에서는 예수님(아들)과 하나님(아버지) 사이의 상호 내적인 친교를 나타낼 수도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영지주의적 배경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레미야스(J. Jeremias)는 불트만(R. Bultmann)이 그의 저서(The Gospel of John, 1971, 380 이하)에서 주장한 것처럼, 이것이 헬라의 신비주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셈족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식을 친교로 묘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알고 있는 자, 즉 지식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사자와 완전한 초월자로 알려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동등성에 의거한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영지주의적, 이원론적 대조는 세상이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진리의 영"(요 14:17)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언명에 의하여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미움을 받은 것은(요 15:18; 요 16:2)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제거할 수 없는 구별의 결과로 이해되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마찬가지로 계시의 목소리도 하나님이 아닌 마귀를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인식되어질 수 없다(참조: 요 8:42-43). 반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며, 영생과도 동일시되었다(요 17:3). 구원을 가지고 오는 이 지식은 외부로부터의 부르심, 즉 이해력, 말하자면 진리 되신 분을 아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도래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참조: 요 5:20).|지식에 관한 요한의 언어와 요한의 견해가 영지주의의 용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만약 우리가 기독교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자들과 이 메시지를 반대한 사람들이 이 메시지를 표현하는 형태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목적은 영지주의자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의 언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영지주의자와 직면하여 자기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그를 공박했다. 이것이 복음을 신화로 만들거나 요한을 영지주의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었으나(참조: 요 1:18), 하나님은 그의 보내심을 받은 자, 즉 그 아들에게서 알려지게 될 것이다(눅 10:22). 그는 육체가 되셨던 로고스(말씀)이시다(참조: 요 1:14; 요일 1:1-4).|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14:9; 요 12:45). 그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도 알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사람이 그를 이미 알았고 또한 보았기 때문이다(요 14:7). 따라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행해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 교제가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교제에 상당하기 때문이다(요 10:15). 이 두 가지 수준의 교제는 기노스코로 표현된다.||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람들 사이에 나누는 교제는 서로를 아는 지식에 의해서 효과적인 교제가 되지만, 이 교제가 영지주의에서와 같이 인간을 신격화시키거나 인간을 이 세상과 역사에서 완전히 제거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요한에게 있어서 지식은 한 분이신 하나님과 역사적인 통로를 통해서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그 형태를 취한다. 자기 아들을 보내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요 17:23; 참조: 요일 4:19 이하)과 세상에 대한(참조: 요 3:16)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아들은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척도에 따라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셨다(참조: 요 15:9; 요 17:26). 따라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지식은 역사의 영역 안에서 사랑으로 표현된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아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아버지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입증하셨듯이(요 14:31), 그를 아는 자도 하나님의 명령, 무엇보다도 자기 형제를 사랑하라는(요일 4:7 이하; 요일 2:7-11) 명령을 지킴으로서(요일 2:3 이하), 또한 죄를 짓지 아니함으로써(요일 3:6), 자기의 지식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노스코는 두 가지로 적용된다. 첫째로, 이 지식은 아들의 보내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을 의미하며(요 17:8; 요일 3:6), 둘째로는 선포된 메시지에 복종하는 것으로도 묘사되는 이 지식에 기초한 사랑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요일 4:6). 이러한 지식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 Life이 되었는데(요 17:3)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에서 유래된 역사 속에 있는 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요한의 개념은 영지주의의 개념과 고의적인 정반대적인 것으로 두드러진다.|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믿음과 지식을 똑같은 수준 위에 두는 것도 적어도 지식과 대조시켜 믿음을 낮게 평가한 영지주의에 대한 논박의 일부분이다. 요 17:3이 영생을 지식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지만 요 3:36은 믿음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베드로의 고백에 관한 요한의 견해에서(요 6:69) 우리는 믿음을 지식에 종속하는 제일 첫 단계로 보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으나, 요일 4:16에서는 이 순서가 "알고 믿었노니"로 되어 있다.|오직 자기 자신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는 영지주의의 자기 만족은 형제 사랑(요 13:35)과 단합(요 17:21 이하)에서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과는 반대된다. 더욱이 이 배후에 있는 궁극적인 목표는 아들이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세상이 믿게 되고 또한 이 계시가 온 세계에 알려지게 될 때에만 달성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주(창조)와 구원에 대한 영지주의의 이원론을 요한이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영지주의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이원론은 극복될 수 없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이원론은 우주적인 타락 이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견해에 따르면 우주는 완전히 그리고 치명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구원 받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참조: 요 1:1 이하; 요일 2:14).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 대한 증오로 표현되는 알지 못하는 것은 나타난 계시를 믿지 않는 결과이며(요 8:42 이하) 이것은 결과적으로 죄를 초래한다(참조: E. Kasemann). "만약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들이 참으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이 지식을 심화시키고 풍요롭게 하는데 관심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들으려고 할 뿐, 새로운 것을 들어 그들이 전에 알고 있던 모든 것과 그와 아울러 이런 지식의 상태 곧 자기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왜 들을 수 없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 영역에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것과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점에 대한 이해 부족을 나타내어 줄 뿐이다"(R. Bultmann). 지식과 믿음에로의 부름은 이렇게 세상을 위해서도 남아 있다. 아들을 보내심으로 나타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서 실재의 새로운 차원을 연 것이다.|요한의 어휘가 영지주의와 명백히 유사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의 주제는 영지주의의 신화적 사변보다는 구약성경의 전승에 나오는 지식의 개념과 훨씬 더 가깝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하다.|(참조: E. D. Schmitz).
새 술
gleu'ko"
달콤한 새 포도주.||#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글류코스(Aristot. 이래; Plut. 등)는 글뤼퀴스($1099: 단, 달콤한)에서 유래했으며, '포도액', '포도에서 짜낸 달콤한 즙, 달콤한 새 포도주'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글류코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2:13에 한번 나오며, '달콤한 새 포도주'를 의미한다: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글뤼퀴스
glukuv"
달콤한 swee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글뤼퀴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달콤한' sweet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글뤼퀴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약 3:11에서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을 낼 수 없는 것을 언급한다.|약 3:12에서 단물을 낼 수 없는 소금 샘을 언급한다.||(b) 계 10:9 이하에서 작은 책은 입에는 달고 배에서는 쓴 것이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방언
glw'ssa
혀, 방언 tongue, 언어 language , 말 speech.||#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글롯사(Homer 이래로)는||(a) 첫째 의미는 생리학적 의미로 '사람이나 짐승의 혀'(Homer, Od. 3, 332), 곧 미각과 언어 기관을 의미하였다.||(b) 비유적으로 발언 능력, 말, 또한 '언어, 지방 사투리'(Homer, Od. 헤로도투스)를 의미하며,||(c) 설명을 요하는 모호한 언어적 표현을 뜻하기도 하였다(Aristotle , Poet. 57).||#2. 70인역본의 용법||글롯사는 70인역본에서 글롯타(%25)의 형태로도 나타나며, 약 160회 중 약 100회의 실례에서 '혀, 언어'를 뜻하는 히브리어 라숀과 아람어 리샨을 번역하고 있다.|이 단어는 사람과 짐승의 신체 기관인 혀를 의미하며(출 4:10; 삿 7:5), 비유적으로는 '말하는 능력', '언어'를 의미한다(창 11:7). 구약성경의 시가서와 예언서들 그리고 집회서에서 혀는 특히 악인의 기관, 곧 거짓되고 악한 도구, 오만과 불경의 도구를 나타낸다(욥 15:5; 시 140[139]:4; 잠 6:17; 사 3:8; 렘 9:2; 렘 9:7), 혀의 죄악들은 채찍과 같고(욥 15:5) 칼과 활과 화살과 같고(시 57[56]:6), 또한 독사와 같아서(시 140[139]:4), 재난과 멸망의 원인이 되며 사람과 하나님과 또한 이웃과의 관계를 손상시킨다. 악으로부터 혀를 지키며(시34[33]:14), 혀로 의와 진리를 말하고(시 35[34]:28; 시 37[36]:36; 잠 15:4), 하나님을 찬송하라는(시 51[50]:16; 시 126[125]:2; 집회서 31:30) 권고가 그토록 절박한 것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기" 때문이다(잠 18:21).||#3. 신약성경의 용법||글롯사는 신약성경에서 50여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언어 기관인 혀. 혀는 사람의 내심의 자아를 드러낸다.|막 7:35에서 혀는 마귀의 속박에 종속될 수도 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그러나 또한 눅 1:64에서와 같이 특별한 영향력에 의해 혀가 묶여지고 풀리어질 수 있다: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악한 자의 권세 하에서 죄의 외적 활동이 혀를 통해 수많은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내어진다(약 1:26; 벧전 3:10=시 34:13; 요일 3:18). 그러나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 능력을 증명하신다. 개인에게서도, 구속 받은 공동체에서도 성령님의 새롭게 하시는 권능은 혀로 알려지며 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찬송은 널리 퍼진다. 모든 혀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주적인 고백은(빌 2:11), 개인의 경건성에서 나온 발언이 아니라 교회와 세계 가운데 이미 시작된 새 시대의 표적이다(R. P. Martin ).||(b) 언어. 행 2:11에서 글롯사는 '언어'(한글개역 "방언"을 의미한다: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언어는 계 5:9; 계 7:9; 계 10:11 등에서 비유적으로 '민족'을 가리킨다.||(c) 방언(glossolalia).|① 오순절에 방언(tongue ) 또는 글롯솔랄리아(glossolalia)를 말하는 현상은 신약성경에서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로(행 2:16-행 2:21=욜 2:28-욜 2:32; 고전 14:21=사 28:11이하; 그러나 고전 14:21은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구원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표적으로 간주되었다.|바울이 방언하는 것에 대하여 언급한 바와 같이 방언은 성령의 선물(행 2:4)이며 놀라움을 야기시키고(행 2:7) 술취했다는 비난을 듣는다(행 2:13). 그러나 이 경우에 청중들은 각각 그들 자신의 방언으로 듣는다(행 2:8; 행 2:11). 청중들은 모두 유대인들이며(행 2:9) 혼란스럽게 지껄이는 인상이 있었음을 전해주고 있으므로 "각 난 곳 방언으로 들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다. 아마도 이 사건에는 시내산에서 율법이 70개 언어로 열방에게 주어졌다는 유대 전승이 반영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사건에 뒤이어 곧 바로 정돈된 베드로의 선포가 나온다(행 2:14이하).|② 고전 14:21에 인용되어 있는 사 28:11이하의 인용문은(엔 헤테로글롯소이스: 다른 방언하는 자로) 본래 외국어를 뜻하는 말이다. 바울은 이 말을 불신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글롯솔랄리아(glossolalia)에 적용하였다. 고린도 교회 회중들은 성령의 강권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열광적인 기도와 찬양과 감사를 드렸다(고전 14:14이하). 이러한 방언은 개인적인 기본 감정 집착의 발산이었으며, 인격적인 예배 형태와는 다른 것이었다(고전 14:2; 고전 14:28b). 이렇게 방언으로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회중을 교화시키고 강건케 하는데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였다(고전 14:5). 심지어 바울은 방언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하였다(고전 14:22). 사 28:11이하의 인용문에서는 다른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심판의 표적으로 간주되었다. 만일 해석하는 자 없이 모두가 방언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교회에 대한 심판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떻든지 간에 국외자들은 이들이 미쳤다고 결론을 내렸다(고전 14:23). 그러나 예언은 친절하게 죄를 납득시키고 회개와 참된 예배로 인도함으로써 역사할 수 있다(고전 14:24이하).|바울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고전 14:39이하); 실로 바울 자신이 방언을 자유 자재로 구사하였다(고전 14:18). 그러나 그는 그것을 시험하고 훈계하고 억제할 것을 강하게 권고하였다(고전 14:14이하). 회중들의 모임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통역함으로써 그것이 그들을 교화시키는데 기여할 때에만, 그 진가가 발휘될 수 있다(고전 14:26이하). 예언, 즉 성령의 영감을 받아 충만해진 복음의 선포는 글롯솔랄리아(glossolalia ) 보다 무조건적인 우월성을 지닌다(고전 14:19). 바울은 방언을 은사의 목록 맨 마지막에 열거하고 있다(고전 12:10). 바울은 어느 곳에서도 방언을 말하는 것(글롯솔랄리아[glossolalia])이 성령을 받아들였음을 입증해주는 필요 불가결한 증거라거나 또는 글롯솔랄리아(glossolalia)의 은사가 그 은사를 받은 자들을 기독교인의 생활의 보다 높은 수준으로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암시하지 않았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경건한 사람들의 높임이나 자기 주장에 기여해서는 안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만 기여해야 한다.|(참조: Walter Bauer; H.Haarbeck; J.Behm ).
돈 궤
glwssovkomon
상자 box, 궤 chest, 돈궤 moneybox.||#1. 일반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글롯소코몬(B.C. 2세기에서 A.D. 2세기까지 일반 헬라어에서 발견됨)은 글롯사($1100: 혀)와 코미조($2865: 가지고 가다, 운반하다)의 어간에서 유래한 방언의 한 형태이다. 원래는 악기의 혀를 넣어두는 상자를 가리켰으나 점차 의미가 확대되어 책이나 시체 등을 넣어두는 상자, 그리고 금고(money-box)(플루타르크와 파피루스)까지 의미하게 되었다. 그것은 또한 궤(삼하 6:11; 대하 24:8)를 가리키기도 한다.||#2. 70인역본의 용법||글롯소코몬은 70인역본에서 5회 나오며, 히브리어 아론(궤, 상자)을 번역하고 있으며, 삼하 6:11에서 여호와의 '궤', 대하 24:8이하에서 돈 '궤'에 대해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글롯소코몬은 신약성경에서 2회, 요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와 요 13: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에서 돈궤를 의미한다.|여기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생활비를 넣어두던 돈궤를 나타낸다. 위의 두 구절에서 유다가 이 돈궤를 보관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전자의 구절에서 유다가 그 돈을 도용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말한다.|(참조: G. T. D. Angel; Walter Bauer).
빨래하는 자
gnafeuv"
마전장이 fuller.||#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그나퓨스(Hdt. 이래)는 크납토(%423: 양털을 빗긴다)에서 유래했으며, '마전장이' a fuller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그나퓨스는 70인역본에서 3회 나오며, 모두 히브리어 카바스(씻다, 빨다, 닦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마전장이' fuller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왕하 18:17; 사 7:3; 사 36:2; 한글 개역: 세탁자).||#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그나퓨스는 신약성경에서 막 9:3에 한번 '마전장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아마도 마전장이의 일의 하나인 표백하는 일을 암시하는 것 같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DNT).
진실한
gnhvsio"
참된, 진정한, 진짜의.||#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그네시오스(Homer 이래)는 게노스($1085: 가족, 자식, 자손)에서 파송된 것이 아니라 겐네토스($1084: 출생된, 태어난)에서 유래했으며,||(a) '적자로 태어난'('양자로 삼는' 것이나 '서자의'와 구별하여 사용되었다).||(b) 비유적으로, '정식의, 진짜의'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그네시오스는 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빌 4:3에서 그네시오스는 '참된' 동역자에 대해 사용되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b) 딤전 1:2에서 디모데가 믿음에 의해 바울의 '진정한' 아들로 묘사된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딛 1:4에서 디도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c) 고후 8:8에서도 '진정한'이란 의미를 지닌다: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F. Buchs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