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didavskalo"
교사 teacher||#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명사 디다스칼로스(Homer 이래)는 디다스코($1321: 가르치다)로부터 유래한 작위명사(nomen agentis)로서, '교사, 가정교사'라는 의미로 헬라어 문헌에서 널리 사용되었다(예: Homer,Hymnus ad Mercurium 554이하; Aesch., pv llO 이하; plato, Prt. 326 c; Epictetus, Enciridion l7).|이 단어는 초등학교 교사로부터 시작해서 가정교사, 철학자, 그리고 공연을 위해 시가를 연습시켜야 하는 합창단 지휘자를 칭할 때 사용되었다. 시인은 그의 활동이 합창하는 시(詩)든 비극이든 자신에 대해 디다스칼로스라고 불렀다.|이 단어는 처음부터 합리적이고 전문적인 요소가 강하였다. 여기에 기술의 가르침과 소질 계발도 특별히 포함된다. 이 단어는 지식이나 기술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일에 정식으로 종사하는 모든 사람을 두루 지칭한다. 보기로 필로는 이 단어를 율법을 전해준 모세와 나병에 관해 가르치는 제사장 뿐만 아니라(Gig.54)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도(Rer.Div. Her. 1O2 등등) '교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두 경우에 그는 지식을 전달해 주는 사람을 교사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윤리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사람을 교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b) 디다스칼로스의 특성이 그 용법에 끼친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교사의 활동이 특정한 분야에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디다스칼로스라는 단어는 자주 그가 가르치고 있는 내용에 따라 더욱 엄밀하게 정의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왜 소크라테스가 이 단어를 거부하고, 에픽테투스가 이 단어를 받아들이고, 70인 역본이 대부분의 경우에 이 단어를 기피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플라톤의 변증(Apologia, 33ab)에서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진술들이 구속력 있는 체계로 만들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디다스칼로스로 불리우기를 거부하는 것 같다. 그는 지적인 것을 경멸하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을 이것을 초월하여 도덕적 행동에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는 또한 이런 일을 모든 사람을 위해 행하려고 하였으며 따라서 학파 형성을 거부하였다.|- 반대로 에픽테투스는 디다스칼로스로 일컬어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학계의 교사로서 자기의 추종자들이 완전해지도록 돕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완성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선생이라고 실제로 자처하였다(Dissertationes 1. 9. 12).||#2. 70인역본의 용법.||7O인역본에서 디다스칼로스는 단지 2회 나온다. 에 6:1에서 이 단어의 의미는 '읽는 자'(reader)이고, 넓은 의미에서 아마도 내시들의 교육을 맡은 시신(slave)을 의미할 것이다.|그렇지만 마카베오이서 l:10에서 이 단어는 이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다. 여기에서 마카베오 공동체는 대제사장 가문들 중의 한 가문에 속하고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의 수령인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에게 글을 쓰고 있는데, 그를 프톨레미 필로메터 왕(King Ptolemy Philometor)의 디다스칼로스라고 불렀다. 그 칭호는 그 왕이 수여한 것이 아니고 아리스토불루스가 그 왕에게 모세오경 주석을 헌정한 일에서 그것을 해석하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이 부여한 것이다. 아리스토불루스는 그 왕에게 율법을 해석하였기 때문에 왕의 디다스칼로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여기에서 디다스칼로스가 율법 교사를 의미하는 용법은 이제까지 우리가 논의해 왔던 이 단어의 여러가지 의미와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용법은 일반 헬라어 용법이나 필로의 용법(디다스칼로스를 지식을 전달해 주는 사람 또는 가정교사로 의미하는 것)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및 히브리어 동사 라마드에 기초하고 있다. 이 라마드는 '배우다, 가르치다'를 뜻하며, 그 목적으로 '실천하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70인역본에 이 단어가 드물게 사용된 이유는, 히브리어 성서의 번역자가 헬라적 칭호인 디다스칼로스는 율법 교사를 가리키는 용어로서는 적당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만이 아닌 것같다. 디다스칼로스에 상당하는 히브리어 모레(1475)도 역시 드물게 사용된데다가 그나마 단 한번 잠 5:13에서 분사 디다스코(가르치는)로 번역되었다. 그밖의 다른 구절에서 이 히브리어 단어는 플라논테스(유혹자, 사 30:20에서 2회), 플라사스(조각가, 합 2:l8), 브로마다(음식, 욜 2:23) 따위의 다른 단어로 번역되었다. 구약성경에 이질적인 것은 '교사' (teacher)라는 단어가 아니라 그 개념이다. 그 까닭은 구약성경이 지식의 전달보다는 율법에의 복종을 더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리스도가 지상에 계실 때 유대교에서 랍(rab) 또는 랍비(rabbi)는 토라를 해설하며 율법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을 과업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제자들(탈미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제자들은 스승의 성경 해석과 판단을 공부하며 스승을 존경하고 그에게 복종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제자들은 보통 자기 선생을 랍비(나의 선생님)라고 불렀으며 접미어가 붙은 이 어형이 바로 주후 1세기에 오직 공식적으로 임명된 율법 교사를 가리키는 용어로서만 사용되었다(참조: K. H. Rengstorf; K. Wegenast).||#3. 신약성경의 용법.||1. 디다스칼로스의 용법.|(a) 명사 디다스칼로스는 신약성경에서 58회 나온다. 그 중 48회는 복음서에서 나온다(요 8:4을 계산하지 않는 경우).|① 복음서에서 이 단어는 예수님에 대해 41회 사용되었는데, 그 중 29회에서 예수님을 직접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되엇다.|② 그리고 7회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되었다. 눅 3:12에서 백성들이 요단 강변에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는 세례(침례) 요한을 "선생"이라고 부른다.|요 3:10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부르신다. 눅 2:46에서는 "선생들 중에 앉으사"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는 소년 예수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끝으로 마 10:24 이하와 눅 6:40에는 마데테스(제자)와 디다스칼로스의 관계에 관한 기본적인 선언이 언급되어 있다.|③ 복음서의 용례와 그밖의 모든 용례에서 그 용법은 서로 일치한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초기 기독 공동체에서 주도적인 집단인 디다스칼로이에 관한 언급들이다(행 13:1; 고전 12:28 이하; 엡 4:11; 참조: 약 3:1).|딤전 2:7; 딤후 1:11에서 기자는 자신을 디다스칼로스 에드논 혹은 단순히 디다스칼로스라고 부른다.|다른 세 구절들에서 이 단어는 본문으로부터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롬 2:20; 딤후 4:3; 히 5:12).||(b) 신약성경에서 디다스칼로스의 용법을 통해 드러나는 첫째 요점은 예수님이 디다스칼레로 지칭될 때 이 용어가 퀴리오스($2962)와는 달리 어떤 위엄의 속성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디다스칼로스가 요한에게(눅 3;12), 혹은 성전에 앉아 있는 디다스칼로이에게(눅 2:46), 혹은 심지어 거짓 교사들의 무리에게(딤후 4:3) 적용된 것은 디다스칼로스가 예수님에 대해 사용되었을 때조차도 분명한 한 사실만을 나타낸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누가가 이 단어를 사용하여 한편으로 요한을 지칭하고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을 지칭할 때 누가가 다른 의미에서 사용한다고 결코 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임은 복음서에서 디다스칼로스가 사용된 구절들로부터 아주 쉽게 알 수 있으며, 이 단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된 구절들로부터 가장 잘 알 수 있다.|예수님 자신(마 10:24 이하와 병행구)이 마데테스(제자)와 디다스칼로스(선생)를 대조하신다. 전자는 그의 목적과 한계 양자 모두를 후자와의 비교를 통하여 배워야 한다. 이것으로 예수님께서 랍비의 생도와 그 스승과의 관계를 묘사하며, 자기와 자기의 추종자 사이에 실재하는 관계에 적용한다. 요 3:10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부르셨을 때 문맥은 특별한 철학적 능력을 염두에 두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준다. 사람들이 율법과 선지자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뜻에 대한 탁월한 해석자로서 그를 존경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그를 예우하시는 것이다.|눅 3:12에서 세리들이 세례(침례) 요한의 회개의 외침에 마음이 움직여 세례(침례)를 받고자 할 때 요한에게 이렇게 묻는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그 호칭과 질문 양자 모두 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요한의 지식에 근거하여 요한이 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가장 모호한 언급은 눅 2:46의 다디스칼로이이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그러나 여기서 디다스칼로이도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볼 때 율법에 대해 제기되는 질문들에 답하는 일을 하는 서기관들이라고 추론할 수도 있다.|이와 같이 디다스칼로스가 예수님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된 복음서의 네 다섯 구절에서는 용법의 일관성을 가진다. 이 단어는 그 의미의 내용이 림메드(가르치는)에서 파생한 70인역본과 신약성경의 디다스케인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환언하면 디다스칼로스는 '토라로부터 하나님의 길을 지시하는 자'이다. 이것은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첫째, 우리는 예수님이 디다스칼로스로 묘사될 때 동일한 용법이 어디까지 적용하는지 고찰해야 하고, 그러므로 예수님과 관련하여 이 용어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다른 본문들이 복음서에서와 같은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지를 고찰해야 한다.||2. 디다스칼로스로서의 예수님.|(a) 예수님이 디다스칼레라는 호칭으로 불리웠다는 것은 그가 유대인의 디다스칼로이의 모습과 외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복음서에 나타난 디다스코($1321)의 용법에서 이미 우리는 예수님이 기본적으로 그의 가르침의 형태와 내용 두 면에서 서기관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다. 단순히 때때로 가르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디다스칼로스가 되는 것은 디다스칼로스 주변에 모이는 제자들이 있다는 특징을 요구한다.|예수님과 요한의 경우에(요 1:35 이하)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말에 감동을 받아서 스스로를 생도와 제자들의 위치에 두었다는 사실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 디다스칼로스로서의 결정적인 조건이 외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들에게 디다스칼로스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으며, 그들을 디다스칼레라고 불렀으며, 그들을 백성들의 교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디다스칼레라는 호칭이 실제로 이러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요 1:38에서 입증된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이 구절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랍비로 부르는데, 이 형태의 호칭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디다스칼레로 번역하였다(참조: 랍부니, 요 20:16).|예수님은 또한 마 26:25, 막 9:5, 막 11:21, 요 4:31, 요 9:2, 요 11:8에서 그의 제자들에 의해, 요 3:2에서 니고데모에 의해, 요 1:49에서 요한의 제자들에 의해, 요 6:25에서 열광적인 군중에 의해, 마 26:49, 막 14:45에서 체포 당하실 때 유다에 의해 랍비로 불리운다. 하지만 디다스칼레가 교사를 가리켜 모호하지 않게 사용되는 반면에 랍비는 어떤 지위가 높거나 고귀한 인물에게 적용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 용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된다.||복음서는 매번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가 랍비의 생도들과 교사들(masters)의 관계에 일치하며 군중들이 예수님을 교사들에게 상응하는 존경으로 대했음을 분명히 한다. 제자들을 마데타이(히, 탈미딤)로 묘사하고 아콜루데오($190: 따르다)를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애착(attachment)에 대해 사용한 것은 후기 유대교의 어법을 따른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그를 섬기는 방식은 당시의 관습과 일치한다. 생도는 랍비의 신발을 가져오고(T. Neg. 8, 2), 필요할 때 그를 도우며(bJeb., 42b), 그 앞에서 길을 준비하고(bket., 63a), 그의 나귀를 몬다(T. Chag., 2.1). 더 후기의 언급에서는(bkeb., 96a; R. Joshua b. Levi, c. 250A.D.) 신발을 벗기는 것 외에도 종이 주인에게 행하는 모든 일들을 생도가 그의 주인인 교사에게 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이 가운데 발을 씻기는 것도 포함되는지는 특별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제자들이 서로에게 행해야 할 일들 가운데 포함된다고 하셨으며, 위대한 랍비들이 유사한 경우를 당했을 때와 같이(예: 12:30에 대한 S. Dt., 38) 그들로부터 동일한 종류의 반대에 부딪혔을 때(요 13:8) 친히 본을 보여 주었다(요 13:1 이하).|예수님의 제자들은 배를 젓는 일을 하였으며(막 4:35 이하 및 병행구), 또 무리를 먹일 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막 5:37 이하 및 병행구; 막 8:6과 병행구). 그들은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당나귀를 얻어왔으며(막 11:1 이하) 유월절을 위해 준비하였는데(마 26:17 이하), 이 일에는 종종 노예들에게 맡겨진 어린양을 잡는 일도 포함되었다(참조: Pes., 8, 2). 이 모든 것은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위치가 진실로 당시의 디다스칼로스, 생도들 가운데서 랍비의 위치와 같았음을 보여준다.||예수님을 이와 같이 대접한 것은 비단 제자들 뿐만이 아니라 군중들도 이런 식으로 그를 영예롭게 하였다.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에 백성들은 교사를 심지어 부모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 둔다. 교사는 자기 아버지보다 앞에 설 뿐만 아니라(BM, 2, 11), 만약 교사가 아버지라면 아들 앞에 선다(bQid., 33b). 아키바(Akiba)가 유명한 사람이 되어 학교에서 왔을 때 장인과 아내가 그의 발에 존경의 입맞춤을 하였다고 한다(bket, 63a). 또 이스마엘(R. Ishmael)의 어머니는(d. c. 135) 그의 아들이 회합을 마치고 와서 그녀가 사용한 물을 마시고자 했을 때 아들의 발을 씻기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는 제 5 계명에 근거하여 이것을 금했으나, 그의 어머니는 이것을 금하는 것은 사실상의 위반으로, 이 행위에서 자기 아들을 통하여 그녀 자신이 영화롭게 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jPea, 15c, 41 이하).|베드로의 장모가 고침 받은 후 예수님께 행한 봉사(마 8:15)와, 물질로 예수님을 섬기고 따른 여자들(눅 8:3; 참조: 마 27:55와 병행구)이나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 마르다(눅 10:40)가 예수님께 행한 봉사는 위와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이것은 식탁에서 섬기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으나, 그것이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사실이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영예롭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언급되며 위대한 랍비들의 경우에서 유사한 예를 발견할 수 있다.|이러한 노선에 따라 디다스칼로스이신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예수님 당시의 관습에 일치하며,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에게 적용된 디다스칼로스는 후기 유대교의 랍비와 명백히 연관된다.|요세푸스는 디다스칼로스를 초보 교사에 대해 사용하지만, 또한 율법을 연구하는, 즉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을 연구하도록 이끌고 그것으로부터 행동의 규칙을 취하는 자들에게도 이 용어를 사용한다. Vit., 274에서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의 사자들은 그들이 단순히 그의 동료 시민들이지만 그의 디다스칼로이라고 자랑한다.||(b) 예수님에게 적용된 호칭 디다스칼로스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예수님께서 어떤 의미에서도 디다스칼로스, 랍비로서의 새로운 비범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백성들의 귀와 눈을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과 그 구속력있는 능력을 향해 열게 했을 때 취하신 방법은 평범한 방법이었다.|예수님은 또한 인정을 받으셨다. 심지어 서기관 무리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참되시며($227)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지적해 내셨다는 인정을 받았다(마 22:16과 병행구; 참조: 막 12:32; 요 3:2). 만약 교사로서의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어떤 반대가 있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가르침의 집단으로부터 규정된 교수 과정 내지는 인정된 권위를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요 7:15; 마 13:35과 병행구).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는 그의 죽음을 초래한 갈등을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힐렐과 샴마이 같은 학파를 세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평범한 토론 방식을 통하여 서기관들과 함께 그의 차이점에 대해 토의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노선에 따라 그의 견해를 확립하려 시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어떤 걸림돌을 제공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럭저럭 견디어 인정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을 취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위임하신 대의(cause)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예수님은 힐렐과 샴마이의 견해와 맞지 않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인간의 대의(cause)로 삼았다.|예수님은 논의할 수도 없었고 논의하려 하지도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시고 그에 대해 듣고 그를 만난 모든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감동을 준 절대성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분리될 수 없었다. 이 주장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것은 디다스칼로스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전통적인 형식과 선포를 넘어서서 새로이 직접적으로 다루는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의 노선을 다시 취한 그 점에서 일어난다. 그렇지만 그는 선지자 이상이신 분이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시의 보수적인 종교와 인간 중심적인 도덕률에 반대하여, 선지자들의 아마르 예호와(여호와의 말씀), 네움 예호와(여호와의 말씀)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내가 오직 너희에게 말한다"(에고 데 레고 휘민)고 하시며, 이것은 일개 대변자로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하나이신 그의 뜻의 책임있는 담지자로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음을 청중들에게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노모스($3441: 율법)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처음으로 친히 성취하시는 자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밝히시고 또 그것을 초월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제공하기까지 하신다(마 5:17; 마 5:20). 왜냐하면 그는 아들(The Son)이시기 때문이며, 요한의 말대로 그의 가르침은 그람마테이스와 기타의 가르침과 다르기 때문이다. 형태와 내용상 유사한 것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까지 있었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다.||(c) 따라서 디다스칼로스가 예수님에 대해 사용될 때, 그의 인격으로 인해 다른 곳에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로운 가치를 부여 받게 된다. 우리는 감히 이 단어가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인상지운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새로운 모세는 율법을 국가적 한계로부터 해방시키고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예수님의 권위와 위엄 양자 모두를 나타내준다. 이리하여 우리는 공관복음에서 최후의 만찬을 위해 필요한 방을 구할 때 디다스칼로스가 누구인지 지적해주는 자세한 지칭 없이 호 디다스칼로스 레게이라는 문구로 충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마 26:18과 병행구). 또 예수님의 죽음 이후 디다스칼로스라는 명칭을 제자들이 전유하지 못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도들과 같이 성경 연구를 직업으로 한 그러한 유대교 집단의 새 지도자가 랍비/ 디다스칼로스로 불리우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이상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이 용어는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도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나중에 폴리캅이 종교적인 의미로 디다스칼로스를 사용했다면(Mart. Pol., 12, 2; 16, 2; 19:1), 그의 시대의 교사들과 첫 시대의 교사들 사이에 분명한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후자에게는 마 23:8의 완전한 규칙이 적용된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그것은 단순히 예수님과 나란히 혹은 예수님 아래 어떤 종교적 권위도 인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말씀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 만이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께로부터 알려지게 되었을 때 "모세의 제자"라는 것 조차도 잘못이다(요 9:28). 예수님은 완전한 디다스칼로스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모세가 그 안에서 자신이 성취되었다고 보는 그 분이시다(요 5:45 이하). 따라서 구원을 찾는 인간에게 유일한 가능성은 디다스칼로스이신 예수님에게 귀기울이는 것이요 그의 마데테스가 되는 것이다.||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선포에서 이 칭호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말씀(어록)의 집합체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독교 메시지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과 조화를 이룬다. 단지 기독교의 지성화의 발전과 더불어 비로소 다시금 디다스칼로스인 예수님이 언급된다. 그러나 이제 이 용어는 처음의 제자들에게 지녔던 랍비라는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고 철학적인 학파의 창설자라는 의미에서 사용된다. 비록 여전히 절대성에 대한 주장의 개념은 포함되어 있을지라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후기 사도 교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예컨대 Barn. 2, 6에서 예수님은 카이노스 노모스를 가져오셨다고 하며, 2Cl. 3.1에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의 중보자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디다스칼로스라는 용어는 Ign. Eph. 15, 1에서만 발견된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께 적용되는 것이라면 그는 변증가들에서만이 디다스칼로스의 자리를 부여받는다(참조: Just. Apol., I, 4, 7; 12, 9; 13, 3 등).|||3.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디다스칼로이||우리가 사도행전(행 13:1)과 서신들에서(고전 12:28 이하; 엡 4:11; 참조: 약 3:1) 그리스도인 디다스칼로이를 읽을 때 이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 초기 그리스도교 및 후기 유대교 용법을 벗어나거나 헬라 세계로부터 조명을 구할 필요가 없다.||(a) 약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이 구절에서 만일 이 서신이 초기의 것이거나 랍비 유대교의 범주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 상황은 가장 분명하다. 그 경우 이 단어는 분명히 율법의 올바른 이행을 가능케하는 율법 해석자를 나타낼 것이다. 문제는 그 가정(assumptions)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서신에서 헬라 용법을 제안할 만한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야고보서의 소피아는 이론적인 것이라기보다 실질적인 것이며, 따라서 분명 헬라적 성격을 가진다기보다 랍비적이기 때문이다.|히 5:12에는 이미 "교사"가 된지 오래이지만 아직도 믿음의 초보를 배울 필요가 있는 기독교인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딤후 4:3에서 이 단어는 이단자들에게 풍자적으로 적용된 듯하다.||(b) 고전 12:28에서 디다스칼로이는 공동체 내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은 자들의 목록에서 아포스톨로이(사도들)와 프로페타이(선지자들)를 뒤이어 세번째의 카리스마적 직책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직책을 맡은 사람들의 과업은 기독교 신앙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주고 구약성경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일이다(참조: K. Wegenast).|엡 4:11의 유사한 목록에서는 아포스톨로이, 프로페타이와 유앙겔리스타이 뒤에 나오며, 포이메네스(문자적으로 '목자들')와 함께 분류된다.|행 13:1에서 그들("교사들")은 프로페타이("선지자들")와 함께 언급된다.|이 사람들은 모두 유대교 출신이며, 따라서 율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선지자는 신적으로 영감을 받은 메시지의 성경적 선포자로 더욱 영적인 자들을 가리킨다(참조: 고전 14:29 이하; 행 11:28). 디다스칼로이는 그들의 보다 더 분명한 해석으로 회중을 가르치고 교화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서신들의 디다스케인에서 역시 그러하듯이 동일한 유대교 및 초기 기독교 용법이 적용된다.|엡 4:11에서 공통 관사가 디다스칼로이와 포이메네스를 동일한 것으로 분명히 가리킨다면 이것은 격의 성격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포이멘은 공동체의 생활에 책임을 지는 자들이며, 따라서 가장 넓은 의미에서 디다스케인은 그의 직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우리는 고전 12:28 이하와 엡 4:11의 목록에는 계급의 서열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디다스칼로스의 활동은 아포스톨로스와 프로페테스의 활동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망과 양식을 세우기 위한 토대를 놓을 때에 필요하다. 최초의 공동체의 디다스칼로스는 이와 같이 후기 유대교의 하캄(현명한) 혹은 소포스(지혜로운, 현명한)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의 일은 공동체 영역 내에 놓여 있다. 따라서 엡 4:11에서 아포스톨로이와 최초의 세대 전체가 교회의 삶으로부터 사라지기 시작할 때에 포이메네스와 디다스칼로이가 선교의 책임을 새로이 맡은 유앙겔리스타이 뒤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기본적으로 상황은 최초의 복음서에서와 아주 흡사하다. 여기서 예수님은 믿음을 일깨우는 유앙겔리스테스로 처음으로 나타나고(마 4:12 이하, 마 4:23 이하) 그 다음으로 비로소 디다스칼로스로 나타난다(마 5:1 이하). 그것은 초대 교회, 그리고 특히 바울의 통찰력의 표시이다. 교화의 문제에서 그들은 이 점에서 예수님의 본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일단 고전 12장과 엡 4장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딤전 2:7과 딤후 1:11은 분명히 이해된다. 케뤽스("전파하는 자")가 유앙겔리스테스(복음 전도자)를 대신하고, 디다스칼로스로 아포스톨로스의 이중 역할을 묘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선교에 대한 높은 감각을 보며, 또한 똑같이 바울의 전형적인 사역에 대한 강한 인식을 본다.|한 면에서 다스림에 대한 랍비적 주장이나 다른 면에서 지식에 대한 헬라의 주장에 대해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기자가 딤후 2:7에서 자신을 "이방인의 스승"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그의 사역의 범위를 보여주기 위함이다.||(c) 초기 교회의 용법은 사람들과 관련된 초기 기독교의 용법과 뚜렷이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Did의 본문 구절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디다스칼로스가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이집트 교회에서의 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에게 디다스칼로스는 고전 12:28 이하의 교사와 매우 다르다. 교회는 지금 알렉산드리아의 지혜의 침범을 받고 있으며, 이 때문에 필로에서와 같이 이 지혜를 표현하고 가르치는 자로 디다스칼로스를 사용할 것을 채택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최초의 기독교 교사의 활동의 연속이 아니라 헬라 제도를 기독교화된 형태로 교회 속에 도입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선상에서 초기 변증가들과 교사들의 임무는 기독교를 조리있게 소개하고 변호하는 것이었다. 이 교사들 중에서 행한 기독교의 지성화와 신앙은 예수님과 바울 및 초기 교사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을 위해 전력을 하여 반대한 바로 그것을 재소개한 것이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불행한 일이다.|(참조: K. H. R. Rengstore; K. Wegena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