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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교사
didavskalo"
교사 teacher||#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명사 디다스칼로스(Homer 이래)는 디다스코($1321: 가르치다)로부터 유래한 작위명사(nomen agentis)로서, '교사, 가정교사'라는 의미로 헬라어 문헌에서 널리 사용되었다(예: Homer,Hymnus ad Mercurium 554이하; Aesch., pv llO 이하; plato, Prt. 326 c; Epictetus, Enciridion l7).|이 단어는 초등학교 교사로부터 시작해서 가정교사, 철학자, 그리고 공연을 위해 시가를 연습시켜야 하는 합창단 지휘자를 칭할 때 사용되었다. 시인은 그의 활동이 합창하는 시(詩)든 비극이든 자신에 대해 디다스칼로스라고 불렀다.|이 단어는 처음부터 합리적이고 전문적인 요소가 강하였다. 여기에 기술의 가르침과 소질 계발도 특별히 포함된다. 이 단어는 지식이나 기술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일에 정식으로 종사하는 모든 사람을 두루 지칭한다. 보기로 필로는 이 단어를 율법을 전해준 모세와 나병에 관해 가르치는 제사장 뿐만 아니라(Gig.54)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도(Rer.Div. Her. 1O2 등등) '교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두 경우에 그는 지식을 전달해 주는 사람을 교사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윤리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사람을 교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b) 디다스칼로스의 특성이 그 용법에 끼친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교사의 활동이 특정한 분야에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디다스칼로스라는 단어는 자주 그가 가르치고 있는 내용에 따라 더욱 엄밀하게 정의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왜 소크라테스가 이 단어를 거부하고, 에픽테투스가 이 단어를 받아들이고, 70인 역본이 대부분의 경우에 이 단어를 기피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플라톤의 변증(Apologia, 33ab)에서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진술들이 구속력 있는 체계로 만들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디다스칼로스로 불리우기를 거부하는 것 같다. 그는 지적인 것을 경멸하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을 이것을 초월하여 도덕적 행동에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는 또한 이런 일을 모든 사람을 위해 행하려고 하였으며 따라서 학파 형성을 거부하였다.|- 반대로 에픽테투스는 디다스칼로스로 일컬어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학계의 교사로서 자기의 추종자들이 완전해지도록 돕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완성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선생이라고 실제로 자처하였다(Dissertationes 1. 9. 12).||#2. 70인역본의 용법.||7O인역본에서 디다스칼로스는 단지 2회 나온다. 에 6:1에서 이 단어의 의미는 '읽는 자'(reader)이고, 넓은 의미에서 아마도 내시들의 교육을 맡은 시신(slave)을 의미할 것이다.|그렇지만 마카베오이서 l:10에서 이 단어는 이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다. 여기에서 마카베오 공동체는 대제사장 가문들 중의 한 가문에 속하고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의 수령인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에게 글을 쓰고 있는데, 그를 프톨레미 필로메터 왕(King Ptolemy Philometor)의 디다스칼로스라고 불렀다. 그 칭호는 그 왕이 수여한 것이 아니고 아리스토불루스가 그 왕에게 모세오경 주석을 헌정한 일에서 그것을 해석하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이 부여한 것이다. 아리스토불루스는 그 왕에게 율법을 해석하였기 때문에 왕의 디다스칼로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여기에서 디다스칼로스가 율법 교사를 의미하는 용법은 이제까지 우리가 논의해 왔던 이 단어의 여러가지 의미와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용법은 일반 헬라어 용법이나 필로의 용법(디다스칼로스를 지식을 전달해 주는 사람 또는 가정교사로 의미하는 것)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및 히브리어 동사 라마드에 기초하고 있다. 이 라마드는 '배우다, 가르치다'를 뜻하며, 그 목적으로 '실천하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70인역본에 이 단어가 드물게 사용된 이유는, 히브리어 성서의 번역자가 헬라적 칭호인 디다스칼로스는 율법 교사를 가리키는 용어로서는 적당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만이 아닌 것같다. 디다스칼로스에 상당하는 히브리어 모레(1475)도 역시 드물게 사용된데다가 그나마 단 한번 잠 5:13에서 분사 디다스코(가르치는)로 번역되었다. 그밖의 다른 구절에서 이 히브리어 단어는 플라논테스(유혹자, 사 30:20에서 2회), 플라사스(조각가, 합 2:l8), 브로마다(음식, 욜 2:23) 따위의 다른 단어로 번역되었다. 구약성경에 이질적인 것은 '교사' (teacher)라는 단어가 아니라 그 개념이다. 그 까닭은 구약성경이 지식의 전달보다는 율법에의 복종을 더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리스도가 지상에 계실 때 유대교에서 랍(rab) 또는 랍비(rabbi)는 토라를 해설하며 율법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을 과업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제자들(탈미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제자들은 스승의 성경 해석과 판단을 공부하며 스승을 존경하고 그에게 복종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제자들은 보통 자기 선생을 랍비(나의 선생님)라고 불렀으며 접미어가 붙은 이 어형이 바로 주후 1세기에 오직 공식적으로 임명된 율법 교사를 가리키는 용어로서만 사용되었다(참조: K. H. Rengstorf; K. Wegenast).||#3. 신약성경의 용법.||1. 디다스칼로스의 용법.|(a) 명사 디다스칼로스는 신약성경에서 58회 나온다. 그 중 48회는 복음서에서 나온다(요 8:4을 계산하지 않는 경우).|① 복음서에서 이 단어는 예수님에 대해 41회 사용되었는데, 그 중 29회에서 예수님을 직접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되엇다.|② 그리고 7회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되었다. 눅 3:12에서 백성들이 요단 강변에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는 세례(침례) 요한을 "선생"이라고 부른다.|요 3:10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부르신다. 눅 2:46에서는 "선생들 중에 앉으사"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는 소년 예수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끝으로 마 10:24 이하와 눅 6:40에는 마데테스(제자)와 디다스칼로스의 관계에 관한 기본적인 선언이 언급되어 있다.|③ 복음서의 용례와 그밖의 모든 용례에서 그 용법은 서로 일치한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초기 기독 공동체에서 주도적인 집단인 디다스칼로이에 관한 언급들이다(행 13:1; 고전 12:28 이하; 엡 4:11; 참조: 약 3:1).|딤전 2:7; 딤후 1:11에서 기자는 자신을 디다스칼로스 에드논 혹은 단순히 디다스칼로스라고 부른다.|다른 세 구절들에서 이 단어는 본문으로부터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롬 2:20; 딤후 4:3; 히 5:12).||(b) 신약성경에서 디다스칼로스의 용법을 통해 드러나는 첫째 요점은 예수님이 디다스칼레로 지칭될 때 이 용어가 퀴리오스($2962)와는 달리 어떤 위엄의 속성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디다스칼로스가 요한에게(눅 3;12), 혹은 성전에 앉아 있는 디다스칼로이에게(눅 2:46), 혹은 심지어 거짓 교사들의 무리에게(딤후 4:3) 적용된 것은 디다스칼로스가 예수님에 대해 사용되었을 때조차도 분명한 한 사실만을 나타낸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누가가 이 단어를 사용하여 한편으로 요한을 지칭하고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을 지칭할 때 누가가 다른 의미에서 사용한다고 결코 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임은 복음서에서 디다스칼로스가 사용된 구절들로부터 아주 쉽게 알 수 있으며, 이 단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된 구절들로부터 가장 잘 알 수 있다.|예수님 자신(마 10:24 이하와 병행구)이 마데테스(제자)와 디다스칼로스(선생)를 대조하신다. 전자는 그의 목적과 한계 양자 모두를 후자와의 비교를 통하여 배워야 한다. 이것으로 예수님께서 랍비의 생도와 그 스승과의 관계를 묘사하며, 자기와 자기의 추종자 사이에 실재하는 관계에 적용한다. 요 3:10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부르셨을 때 문맥은 특별한 철학적 능력을 염두에 두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준다. 사람들이 율법과 선지자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뜻에 대한 탁월한 해석자로서 그를 존경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그를 예우하시는 것이다.|눅 3:12에서 세리들이 세례(침례) 요한의 회개의 외침에 마음이 움직여 세례(침례)를 받고자 할 때 요한에게 이렇게 묻는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그 호칭과 질문 양자 모두 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요한의 지식에 근거하여 요한이 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가장 모호한 언급은 눅 2:46의 다디스칼로이이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그러나 여기서 디다스칼로이도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볼 때 율법에 대해 제기되는 질문들에 답하는 일을 하는 서기관들이라고 추론할 수도 있다.|이와 같이 디다스칼로스가 예수님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된 복음서의 네 다섯 구절에서는 용법의 일관성을 가진다. 이 단어는 그 의미의 내용이 림메드(가르치는)에서 파생한 70인역본과 신약성경의 디다스케인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환언하면 디다스칼로스는 '토라로부터 하나님의 길을 지시하는 자'이다. 이것은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첫째, 우리는 예수님이 디다스칼로스로 묘사될 때 동일한 용법이 어디까지 적용하는지 고찰해야 하고, 그러므로 예수님과 관련하여 이 용어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다른 본문들이 복음서에서와 같은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지를 고찰해야 한다.||2. 디다스칼로스로서의 예수님.|(a) 예수님이 디다스칼레라는 호칭으로 불리웠다는 것은 그가 유대인의 디다스칼로이의 모습과 외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복음서에 나타난 디다스코($1321)의 용법에서 이미 우리는 예수님이 기본적으로 그의 가르침의 형태와 내용 두 면에서 서기관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다. 단순히 때때로 가르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디다스칼로스가 되는 것은 디다스칼로스 주변에 모이는 제자들이 있다는 특징을 요구한다.|예수님과 요한의 경우에(요 1:35 이하)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말에 감동을 받아서 스스로를 생도와 제자들의 위치에 두었다는 사실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 디다스칼로스로서의 결정적인 조건이 외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들에게 디다스칼로스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으며, 그들을 디다스칼레라고 불렀으며, 그들을 백성들의 교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디다스칼레라는 호칭이 실제로 이러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요 1:38에서 입증된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이 구절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랍비로 부르는데, 이 형태의 호칭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디다스칼레로 번역하였다(참조: 랍부니, 요 20:16).|예수님은 또한 마 26:25, 막 9:5, 막 11:21, 요 4:31, 요 9:2, 요 11:8에서 그의 제자들에 의해, 요 3:2에서 니고데모에 의해, 요 1:49에서 요한의 제자들에 의해, 요 6:25에서 열광적인 군중에 의해, 마 26:49, 막 14:45에서 체포 당하실 때 유다에 의해 랍비로 불리운다. 하지만 디다스칼레가 교사를 가리켜 모호하지 않게 사용되는 반면에 랍비는 어떤 지위가 높거나 고귀한 인물에게 적용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 용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된다.||복음서는 매번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가 랍비의 생도들과 교사들(masters)의 관계에 일치하며 군중들이 예수님을 교사들에게 상응하는 존경으로 대했음을 분명히 한다. 제자들을 마데타이(히, 탈미딤)로 묘사하고 아콜루데오($190: 따르다)를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애착(attachment)에 대해 사용한 것은 후기 유대교의 어법을 따른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그를 섬기는 방식은 당시의 관습과 일치한다. 생도는 랍비의 신발을 가져오고(T. Neg. 8, 2), 필요할 때 그를 도우며(bJeb., 42b), 그 앞에서 길을 준비하고(bket., 63a), 그의 나귀를 몬다(T. Chag., 2.1). 더 후기의 언급에서는(bkeb., 96a; R. Joshua b. Levi, c. 250A.D.) 신발을 벗기는 것 외에도 종이 주인에게 행하는 모든 일들을 생도가 그의 주인인 교사에게 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이 가운데 발을 씻기는 것도 포함되는지는 특별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제자들이 서로에게 행해야 할 일들 가운데 포함된다고 하셨으며, 위대한 랍비들이 유사한 경우를 당했을 때와 같이(예: 12:30에 대한 S. Dt., 38) 그들로부터 동일한 종류의 반대에 부딪혔을 때(요 13:8) 친히 본을 보여 주었다(요 13:1 이하).|예수님의 제자들은 배를 젓는 일을 하였으며(막 4:35 이하 및 병행구), 또 무리를 먹일 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막 5:37 이하 및 병행구; 막 8:6과 병행구). 그들은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당나귀를 얻어왔으며(막 11:1 이하) 유월절을 위해 준비하였는데(마 26:17 이하), 이 일에는 종종 노예들에게 맡겨진 어린양을 잡는 일도 포함되었다(참조: Pes., 8, 2). 이 모든 것은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위치가 진실로 당시의 디다스칼로스, 생도들 가운데서 랍비의 위치와 같았음을 보여준다.||예수님을 이와 같이 대접한 것은 비단 제자들 뿐만이 아니라 군중들도 이런 식으로 그를 영예롭게 하였다.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에 백성들은 교사를 심지어 부모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 둔다. 교사는 자기 아버지보다 앞에 설 뿐만 아니라(BM, 2, 11), 만약 교사가 아버지라면 아들 앞에 선다(bQid., 33b). 아키바(Akiba)가 유명한 사람이 되어 학교에서 왔을 때 장인과 아내가 그의 발에 존경의 입맞춤을 하였다고 한다(bket, 63a). 또 이스마엘(R. Ishmael)의 어머니는(d. c. 135) 그의 아들이 회합을 마치고 와서 그녀가 사용한 물을 마시고자 했을 때 아들의 발을 씻기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는 제 5 계명에 근거하여 이것을 금했으나, 그의 어머니는 이것을 금하는 것은 사실상의 위반으로, 이 행위에서 자기 아들을 통하여 그녀 자신이 영화롭게 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jPea, 15c, 41 이하).|베드로의 장모가 고침 받은 후 예수님께 행한 봉사(마 8:15)와, 물질로 예수님을 섬기고 따른 여자들(눅 8:3; 참조: 마 27:55와 병행구)이나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 마르다(눅 10:40)가 예수님께 행한 봉사는 위와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이것은 식탁에서 섬기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으나, 그것이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사실이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영예롭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언급되며 위대한 랍비들의 경우에서 유사한 예를 발견할 수 있다.|이러한 노선에 따라 디다스칼로스이신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예수님 당시의 관습에 일치하며,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에게 적용된 디다스칼로스는 후기 유대교의 랍비와 명백히 연관된다.|요세푸스는 디다스칼로스를 초보 교사에 대해 사용하지만, 또한 율법을 연구하는, 즉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을 연구하도록 이끌고 그것으로부터 행동의 규칙을 취하는 자들에게도 이 용어를 사용한다. Vit., 274에서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의 사자들은 그들이 단순히 그의 동료 시민들이지만 그의 디다스칼로이라고 자랑한다.||(b) 예수님에게 적용된 호칭 디다스칼로스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예수님께서 어떤 의미에서도 디다스칼로스, 랍비로서의 새로운 비범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백성들의 귀와 눈을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과 그 구속력있는 능력을 향해 열게 했을 때 취하신 방법은 평범한 방법이었다.|예수님은 또한 인정을 받으셨다. 심지어 서기관 무리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참되시며($227)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지적해 내셨다는 인정을 받았다(마 22:16과 병행구; 참조: 막 12:32; 요 3:2). 만약 교사로서의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어떤 반대가 있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가르침의 집단으로부터 규정된 교수 과정 내지는 인정된 권위를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요 7:15; 마 13:35과 병행구).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는 그의 죽음을 초래한 갈등을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힐렐과 샴마이 같은 학파를 세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평범한 토론 방식을 통하여 서기관들과 함께 그의 차이점에 대해 토의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노선에 따라 그의 견해를 확립하려 시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어떤 걸림돌을 제공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럭저럭 견디어 인정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을 취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위임하신 대의(cause)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예수님은 힐렐과 샴마이의 견해와 맞지 않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인간의 대의(cause)로 삼았다.|예수님은 논의할 수도 없었고 논의하려 하지도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시고 그에 대해 듣고 그를 만난 모든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감동을 준 절대성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분리될 수 없었다. 이 주장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것은 디다스칼로스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전통적인 형식과 선포를 넘어서서 새로이 직접적으로 다루는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의 노선을 다시 취한 그 점에서 일어난다. 그렇지만 그는 선지자 이상이신 분이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시의 보수적인 종교와 인간 중심적인 도덕률에 반대하여, 선지자들의 아마르 예호와(여호와의 말씀), 네움 예호와(여호와의 말씀)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내가 오직 너희에게 말한다"(에고 데 레고 휘민)고 하시며, 이것은 일개 대변자로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하나이신 그의 뜻의 책임있는 담지자로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음을 청중들에게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노모스($3441: 율법)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처음으로 친히 성취하시는 자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밝히시고 또 그것을 초월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제공하기까지 하신다(마 5:17; 마 5:20). 왜냐하면 그는 아들(The Son)이시기 때문이며, 요한의 말대로 그의 가르침은 그람마테이스와 기타의 가르침과 다르기 때문이다. 형태와 내용상 유사한 것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까지 있었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다.||(c) 따라서 디다스칼로스가 예수님에 대해 사용될 때, 그의 인격으로 인해 다른 곳에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로운 가치를 부여 받게 된다. 우리는 감히 이 단어가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인상지운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새로운 모세는 율법을 국가적 한계로부터 해방시키고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예수님의 권위와 위엄 양자 모두를 나타내준다. 이리하여 우리는 공관복음에서 최후의 만찬을 위해 필요한 방을 구할 때 디다스칼로스가 누구인지 지적해주는 자세한 지칭 없이 호 디다스칼로스 레게이라는 문구로 충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마 26:18과 병행구). 또 예수님의 죽음 이후 디다스칼로스라는 명칭을 제자들이 전유하지 못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도들과 같이 성경 연구를 직업으로 한 그러한 유대교 집단의 새 지도자가 랍비/ 디다스칼로스로 불리우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이상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이 용어는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도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나중에 폴리캅이 종교적인 의미로 디다스칼로스를 사용했다면(Mart. Pol., 12, 2; 16, 2; 19:1), 그의 시대의 교사들과 첫 시대의 교사들 사이에 분명한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후자에게는 마 23:8의 완전한 규칙이 적용된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그것은 단순히 예수님과 나란히 혹은 예수님 아래 어떤 종교적 권위도 인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말씀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 만이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께로부터 알려지게 되었을 때 "모세의 제자"라는 것 조차도 잘못이다(요 9:28). 예수님은 완전한 디다스칼로스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모세가 그 안에서 자신이 성취되었다고 보는 그 분이시다(요 5:45 이하). 따라서 구원을 찾는 인간에게 유일한 가능성은 디다스칼로스이신 예수님에게 귀기울이는 것이요 그의 마데테스가 되는 것이다.||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선포에서 이 칭호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말씀(어록)의 집합체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독교 메시지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과 조화를 이룬다. 단지 기독교의 지성화의 발전과 더불어 비로소 다시금 디다스칼로스인 예수님이 언급된다. 그러나 이제 이 용어는 처음의 제자들에게 지녔던 랍비라는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고 철학적인 학파의 창설자라는 의미에서 사용된다. 비록 여전히 절대성에 대한 주장의 개념은 포함되어 있을지라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후기 사도 교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예컨대 Barn. 2, 6에서 예수님은 카이노스 노모스를 가져오셨다고 하며, 2Cl. 3.1에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의 중보자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디다스칼로스라는 용어는 Ign. Eph. 15, 1에서만 발견된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께 적용되는 것이라면 그는 변증가들에서만이 디다스칼로스의 자리를 부여받는다(참조: Just. Apol., I, 4, 7; 12, 9; 13, 3 등).|||3.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디다스칼로이||우리가 사도행전(행 13:1)과 서신들에서(고전 12:28 이하; 엡 4:11; 참조: 약 3:1) 그리스도인 디다스칼로이를 읽을 때 이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 초기 그리스도교 및 후기 유대교 용법을 벗어나거나 헬라 세계로부터 조명을 구할 필요가 없다.||(a) 약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이 구절에서 만일 이 서신이 초기의 것이거나 랍비 유대교의 범주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 상황은 가장 분명하다. 그 경우 이 단어는 분명히 율법의 올바른 이행을 가능케하는 율법 해석자를 나타낼 것이다. 문제는 그 가정(assumptions)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서신에서 헬라 용법을 제안할 만한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야고보서의 소피아는 이론적인 것이라기보다 실질적인 것이며, 따라서 분명 헬라적 성격을 가진다기보다 랍비적이기 때문이다.|히 5:12에는 이미 "교사"가 된지 오래이지만 아직도 믿음의 초보를 배울 필요가 있는 기독교인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딤후 4:3에서 이 단어는 이단자들에게 풍자적으로 적용된 듯하다.||(b) 고전 12:28에서 디다스칼로이는 공동체 내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은 자들의 목록에서 아포스톨로이(사도들)와 프로페타이(선지자들)를 뒤이어 세번째의 카리스마적 직책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직책을 맡은 사람들의 과업은 기독교 신앙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주고 구약성경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일이다(참조: K. Wegenast).|엡 4:11의 유사한 목록에서는 아포스톨로이, 프로페타이와 유앙겔리스타이 뒤에 나오며, 포이메네스(문자적으로 '목자들')와 함께 분류된다.|행 13:1에서 그들("교사들")은 프로페타이("선지자들")와 함께 언급된다.|이 사람들은 모두 유대교 출신이며, 따라서 율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선지자는 신적으로 영감을 받은 메시지의 성경적 선포자로 더욱 영적인 자들을 가리킨다(참조: 고전 14:29 이하; 행 11:28). 디다스칼로이는 그들의 보다 더 분명한 해석으로 회중을 가르치고 교화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서신들의 디다스케인에서 역시 그러하듯이 동일한 유대교 및 초기 기독교 용법이 적용된다.|엡 4:11에서 공통 관사가 디다스칼로이와 포이메네스를 동일한 것으로 분명히 가리킨다면 이것은 격의 성격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포이멘은 공동체의 생활에 책임을 지는 자들이며, 따라서 가장 넓은 의미에서 디다스케인은 그의 직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우리는 고전 12:28 이하와 엡 4:11의 목록에는 계급의 서열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디다스칼로스의 활동은 아포스톨로스와 프로페테스의 활동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망과 양식을 세우기 위한 토대를 놓을 때에 필요하다. 최초의 공동체의 디다스칼로스는 이와 같이 후기 유대교의 하캄(현명한) 혹은 소포스(지혜로운, 현명한)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의 일은 공동체 영역 내에 놓여 있다. 따라서 엡 4:11에서 아포스톨로이와 최초의 세대 전체가 교회의 삶으로부터 사라지기 시작할 때에 포이메네스와 디다스칼로이가 선교의 책임을 새로이 맡은 유앙겔리스타이 뒤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기본적으로 상황은 최초의 복음서에서와 아주 흡사하다. 여기서 예수님은 믿음을 일깨우는 유앙겔리스테스로 처음으로 나타나고(마 4:12 이하, 마 4:23 이하) 그 다음으로 비로소 디다스칼로스로 나타난다(마 5:1 이하). 그것은 초대 교회, 그리고 특히 바울의 통찰력의 표시이다. 교화의 문제에서 그들은 이 점에서 예수님의 본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일단 고전 12장과 엡 4장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딤전 2:7과 딤후 1:11은 분명히 이해된다. 케뤽스("전파하는 자")가 유앙겔리스테스(복음 전도자)를 대신하고, 디다스칼로스로 아포스톨로스의 이중 역할을 묘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선교에 대한 높은 감각을 보며, 또한 똑같이 바울의 전형적인 사역에 대한 강한 인식을 본다.|한 면에서 다스림에 대한 랍비적 주장이나 다른 면에서 지식에 대한 헬라의 주장에 대해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기자가 딤후 2:7에서 자신을 "이방인의 스승"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그의 사역의 범위를 보여주기 위함이다.||(c) 초기 교회의 용법은 사람들과 관련된 초기 기독교의 용법과 뚜렷이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Did의 본문 구절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디다스칼로스가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이집트 교회에서의 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에게 디다스칼로스는 고전 12:28 이하의 교사와 매우 다르다. 교회는 지금 알렉산드리아의 지혜의 침범을 받고 있으며, 이 때문에 필로에서와 같이 이 지혜를 표현하고 가르치는 자로 디다스칼로스를 사용할 것을 채택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최초의 기독교 교사의 활동의 연속이 아니라 헬라 제도를 기독교화된 형태로 교회 속에 도입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선상에서 초기 변증가들과 교사들의 임무는 기독교를 조리있게 소개하고 변호하는 것이었다. 이 교사들 중에서 행한 기독교의 지성화와 신앙은 예수님과 바울 및 초기 교사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을 위해 전력을 하여 반대한 바로 그것을 재소개한 것이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불행한 일이다.|(참조: K. H. R. Rengstore; K. Wegenast).
사타나스
Satana'"
사탄 Satan, 대적자 adversary.||#1. 구약성경의 용법.||명사 사타나스는 히브리어 사탄(7854)의 음역이며, '악한 상대, 적, 대항자, 대적자, 사단'을 의미한다. 70인역본에는 사타나스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으며, 사탄($4566)만 3회 나온다(왕상 11:14; 왕상 11:25; 왕상 11:23).|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사탄(7854)을 디아볼로스(고발자, 참소자, 비방자)로 번역했다. 여기서 정관사가 붙어서 '그 사탄'이다. 이것은 그가 천상과 지상에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하나님의 대적이기 때문이다.|사탄은 원래 '아침의 아들 계명성(참조: 사 14:12), 기름부음을 받은 덮은(하나님의 보좌를 보호하는) 그룹(참조: 겔 28:13-18)'으로 불리워진, 하나님의 천사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과 필적하고자한 교만으로 말미암아 정죄되었고(딤전 3:4; 사 14:12-15) 사탄이 되었다.|사탄은 아담의 타락 배후에서 유혹한 자이다(창 3:1 이하; 창 3:15; 롬 16:20). 사탄의 타락이 이 유혹과 동시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짙다(참조: 창 1:31에 보면 피조물의 완전성이 아직 손상되지 않았다). 사탄의 타락의 때가 언제이든 그 때 이래 그는 그의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여 왔다(요일 3:8).|그러나 그의 지위 상실에도 불구하고 사탄 곧 마귀는 여전히 계속하여 지상에 실력을 행사하고 핫사탄(고소자, 욥 1:9; 욥 2:4; 슥 3:1)로서, 또는 '한 영'으로서(왕상 22:19-22) 신전 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하여 비평가들은 핫사탄의 개념을 '기소 대리인, 검찰관'의 역할에 제한시켰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구약성경 전체의 증언은 하나님을 향한 사탄의 변함없는 적대 행위와 인간을 향한 적의를 분명히 보여준다(욥 1:11; 욥 2:3-5).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죽음 및 부활, 승천과 더불어 하늘로부터 추방 당했으며, 더 이상 형제들을 참소할 수 없게 되었다(요 12:31; 계 12:10). 그러나 그는 여전히「지상」의 '공중에 권세 잡은 자'로서 역사한다(엡 2:2).|사탄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원수이다. 사탄은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방해하고, 또 방해하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제한 당하며, 단지 허락받은 일만 행할 수 있다(눅 22:31; 눅 22:32; 딤전 1:19; 딤전 1:20; 딤후 2:23-26). 이 사탄은 유혹하여 넘어뜨릴 사람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니며(벧전 5:8; 벧전 5:9),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미워하도록 한다. 그는 거짓말과 속임수를 써서 그러한 일을 한다(참조: 창 3:1-6). 신앙심 깊고 크게 복받은 의인 욥은 사탄이 찾던 바로 그 목표물이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탄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도 역시 미워한다. 사탄은 그의 죄로 인하여 최후 심판을 받고 불못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계 20:10).||#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사타나스는 신약성경에서 3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1. 고소자와 그의 타락.||신약성경에서 사단에 관한 기록의 특징은 사단이 하늘로부터 타락한 동기에 대한 특별한 용법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사단이 하나님 앞에 고소자로 나선다는 친숙한 구약성경의 개념을 그대로 따르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새롭다. 눅 22:31의 상항은 욥기의 서두의 상황과 유사하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제자들을 청구하였다. 까부르는 목적은 각 제자들의 마지못해 하는 마음을 드러내어 사단이 그들을 고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고소는 예수님의 개입으로 반대에 부딪힌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교에서 천사들, 특히 미가엘의 역할을 스스로 담당하신다. 계 12:7-12는 이와 관련이 있는데, 여기서 미가엘은 큰 뱀 사단과 싸운다. 이곳에서 언급하는 것은 사단이 하늘에서 최종적으로 떨어져 이제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지 못한다는 것이다(계 12:10). 이 하늘에서 사단의 떨어짐과 그 시점, 즉 예수님의 오심과의 결합(계 12:5)은 신약성경을 유대교로부터 분리시킨다. 눅 10:18에서 이 결합을 찾아볼 수 있다(누가복음에만 독특하게 나타남):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여기서 에데오룬("보았노라")은 확실히 선재시에 본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최후 심판에서 있을 사건을 미리 보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하늘에서 사단이 떨어지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고소할 가능성의 종말을 나타낸다. 그러나 문맥은 일반적인 사단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할지라도 고소하는 능력의 전체적인 중지와 함께 또한 예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사단의 해하는 능력 또한 상실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에데오룬이 가리키는 구체적인 시점에 대해 알 수가 없다. 만일 눅 22:31이하에서 사단이 아직도 하나님께 참소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면 이것은 눅 10:18에 대하여 지금까지 이해한 내용과 상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명은 유일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는 서신들과 혹자들이 그의 저작으로 간주하지 않는 다른 서신들 어느 곳에서도 이 고소자가 떨어졌다는 이미지를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그러나 블레데세타이 카토는 의심할 여지없이 부차적이긴 하지만 요 12:31을 고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난 자리는 심판의 자리, 즉 하늘일 수 있다. 요 16:11의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에서 그에 대한 심판은 그렇게 분명치 않으므로 이 세상이 심판을 확신하지 않는다. 마귀의 떨어짐이나 그에 대한 심판에 관하여 말하는 이 모든 구절들에서 '이미'는 '아직'과 결합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사단에 관한 신약성경말씀의 특징적인 면이다. 우주창조 이전 루시퍼의 타락의 신화적인 개념은 시간 속에서 사단의 타락의 사상과 접합될 수 없으며, 쿰란의 기본원리, 하나님이 창조하신 두 영들에 관한 교리 또한 포기된다. 유다서는 그 문헌적 출처를 알 수 없는, 마귀에 관한 한 설화를 이용한다.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신약성경이 사단의 최초의 타락과 그 관련 동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을 완전히 별도로 하고도 요한의 기록도 이에 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요일 3:8에서 엔 아르케 디아볼로스 헤마르텐이 아니라 아프 아르케스 하마르타네이이다. 똑같은 아프 아르케스가 요 8:44에도 나온다. 이미 바울의 문헌에서 그랬듯이 계 12:9에서 에덴동산의 뱀이 사단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바울은 뱀/사단이 하와를 성적으로 유혹했다고 하는 유대교의 사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 8:44에서 마귀를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하였을 때 이것은 뱀과 마귀가 동일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후대의 랍비들은 사단을 죽음의 천사 혹은 악한 충동과 동일시 했는데,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이러한 면을 찾아볼 수 없다. 히 2:14은 뱀과 사단의 동일시에 가장 근접하지만 동일시 하지는 않는다. 바울과 요한계시록 둘 다 사망과 사단을 분명히 구별한다. 고전 15:26; 계 20:10, 계 20:14.|||2. 공관복음에서 사단에 관한 말씀들||어원학적 자료. 마가복음(막 1:13; 막 2:23, 막 2:26; 막 4:15; 막 8:33)과 눅 10:19을 제외하고(호 엑스드로스 "원수") 누가복음에 고유한 자료들(눅 10:18; 눅 13:16; 눅 22장)은 오로지 호 사타나스를 사용하며(막 3:23; 눅 22:3만이 관사가 없고, 마 4:10; 막 8:33 = 마 16:23에서는 호격임), 호 사타나스는 아람어 사타나에서 유래한다. 마 4:10을 제외하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호 사타나스는 오직 바알세불과 관련하여서만 나온다. 시험기사에서 마태복음(마 4:3의 호 페이라존과 마 4:10의 사타나는 제외)과 누가복음은 호 디아볼로스를 사용하며, 그 밖의 곳에서는 마 13:39; 마 25:41에서만 발견된다. 마태복음도 역시 호 엑스드로스와 호 ㅍ네로스를 아주 흔하게 사용한다. 막 4:15의 호 사타나스 대신에 마 13:19은 호 포네로스를, 눅 8:12은 호 디아볼로스를 사용한다.|공관복음 기자들에게 전수된 초기 기독교 전승에는 사단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지만, 신약성경에서 사단에 대한 견해를 더듬어 보고 기본적인 윤곽을 그려보기에는 충분하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신 것은 소극적인 행동 그 이상이다. 그것은 보다 더 강한 자임을 증명하는 승리이다. 시험기사를 전수해 준 자는 마귀를 예수님의 삶과 고난의 길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막으려 하고 그 손에 이 세상의 권세를 가진 하나의 의식적 의지로 간주했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서 사단은 우선적으로 "대적자"라는 의미에서의 총칭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다(막 8:33 병행구 마 16:23). 하지만 전승은 거의 대적자를 나타내는 용어일 때를 제외하고 아람어를 보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면 다른 모든 종류의 난제들이 제기된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견지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사단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사단은 인간적인 견지에서보다 사단의 견지에서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적인 것은 하나님에게 매우 적대적일 때 사단의 것이라 불리울 수 있으며,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길에 배치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의 시험에서 상황이 여기서 잠시 다시금 보여진다.|공관복음 기자들은 수난기사에서 오직 이 점에서, 그리고 눅 22:3(병행구 없음)의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에서 사단을 언급한다. 그런데 특히 겟세마네와 관련되지 않는다. 공관복음 기자들이 예수님의 삶과 수난을 사단과의 싸움으로 거의 묘사하지 않는다는 것, 혹은 그들이 사단을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개는 놀랄만하다. 어쨌든 예수님을 시험에 빠뜨리기 위해 주어진 질문들의 배후에 악한 자(the evil one)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기사가 예수님의 삶에 던지는 빛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삶과 고난 전체는 하나님께는 "예"이며, 따라서 당연히 시험하는 자에게는 "아니오"이다. 일찍이 공관복음 기자들은 사단과의 투쟁을 언급한다. 즉 바알세불이 언급된 막 3:22이하와 그 병행구에서이다. 초기 기독 공동체는 이 기사로써 온전하게 갖추어진 중요한 말씀을 전수해 준다. 귀신들에 관한 유대교의 널리 유포된 모호성 대신에 우리는 먼저 하나의 우두머리 사단 아래 있는 악의 나라의 모호하지 않은 단일성에 주목한다. 게다가 귀신들린 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지에 결단하도록 요청받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그들의 개인적인 삶에서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세력에서 해방된 자들이다. 그들은 특별한 종류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한데, 그들의 병은 악한 자(the evil one)의 권세의 소행이다. 귀신들렸다는 특징들을 가지지 않는 병도 역시 사단에게 기인할 수 있다(눅 13:16).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병이 당연히 사단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또 자연적인 질병과 사단에 의한 질병 사이에 대조적 혹은 분명한 구별이 시도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살인한 자"는 질병의 현상 배후에 몰래 숨어있다. 따라서 행 10:38의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는 예수님의 모든 치유 사건을 마귀의 축출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바알세불과 관련된 기사에서 세 번째 기본적인 진술은 강한 자와 더 강한 자에 관한 비유, 즉 막 3:27과 병행구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정당화하는 것이며, 예수님 자신의 삶 가운데 일어난 한 에피소드를 암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강한 자를 결박한 일은 예수님의 시험에서 일어났다고 여겨진다. 이 가정은 십자가와 부활이 시험 가운데 원래부터 존재했다고 인식할 때 올바르다. 이와 같이 분리할 수 없는 상호 관계에서 만이 우리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단의 무장 해제는 단지 능력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권리의 문제이다. 강한 자를 결박하는 것과 하늘에서 고소자가 떨어지는 것은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 막 3:27과 눅 10:17이하는 서로를 설명해 준다. 두 가지 더 중요한 진술들이 비유들의 해석에서 전해져 내려온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어떤 씨앗이 길가에 떨어지는 사실이 그 운명을 결정한다(막 4:4). 그 해석에서 길가에 떨어지는 것은 오로지 마태복음에서 마 13:19에서만 발견되는 메 쉬니엔토스(깨닫지 못하는 자)에 해당한다. 여기서 해석은 그 비유를 알레고리화하지 않는다. 복수형 "새들"은 마귀의 행위와 관련 있는 언급이며, 그러므로 또한 핍박과 관련한 악한자의 활동이나 부의 기만성을 생각할 수 있다. 사단의 소행은 막 4:15과 눅 8:12에서만 언급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이해범위를 넘어서는 초자연적 요소이다. 마태복음의 메 쉬니엔토스에서 인간의 이전의 범죄를, 사단의 일에서 그 결과를 찾는 것은 이 비유와 어울리지 않으며, 또 사단의 일에서 복음 전도자들의 전망을, 마 23:37에서 예수님 자신의 의미를 찾는 것도 이 비유와 어울리지 않는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을 숙명론적인 진술처럼 들리는 것들과 병행시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회피 되어서는 안된다. 만약 밀과 가라지 비유에서 공동체의 혼합된 상태가 마귀에게서 기인한다면(마 13:28, 마 13:29), 이것은 설명이 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심지어 더 큰 수수께끼이다. 공동체 속에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씨를 뿌릴 때 그는 준 기독교인들을 뿌리지 않았으나 악의 아들들이 공동체 속에 있다. 순수한 공동체의 이상에 대한 거부가 교회의 훈육의 요구에 의해 마태복음에서 나타난다. 분명히 둘은 함께 속하며 서로를 그릇된 이해에서 보호해 준다. 공관복음서에서 보존하고 있는 전승들은 충분히 발달된 사단론을 제시하지는 않으나 초기 공동체가 악한 자의 일에 관하여 간직하여 전수 할 만큼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간주한 것을 보여준다. 마귀의 존재, 기원이나 일을 설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QS 3:13- 4:26의 해결책도 채택되지 않는다. 여기 어떠한 노력으로도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악의 능력은 특정 대상을 향하여 행사하는 단일한 능력으로 간주된다. 이 대상은 모든 측면에서의 인간의 파멸이다. 특히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주권을 가져오시는 자이신 나사렛 예수와 벌이는 전쟁이 있다. 비록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았지만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의 길을 통하여 마귀가 헛되이 무너뜨리려 하나 예수님은 악한 자의 능력을 깨뜨리셨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쿰란 공동체의 선지적 의의 교사들과 다르다. 유대교의 사상 세계는 공관복음 기자들에게서 분명히 보여지며, 또한 근본적으로 초월된다.||3. 서신들에서 사단.||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를 포함하여 오래된 서신들에서 호 디아볼로스를 결코 사용하지 않고 대개 호 사타나스를 사용한다. 롬 16:20; 고전 5:5; 고전 7:5; 고후 2:11; 고후 11:14; 고후 12:7; 살전 2:18; 살후 2:9(관사없이 고후 12:7); 그 밖에 다음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호 페이라존, 살전 3:5; 호 포네로스, 살후 3:3; 벨리아르, 고후 6:15. 또한 호 사타나스는 딤전 1:20; 딤전 5:15에서, 호 디아볼로스는 엡 4:27; 엡 6:11, 딤전 3:6, 딤전 3:7; 딤후 2:26; 호 포네로스는 엡 6:16에서 나온다. 다른 용어들이 고후 4:4; 엡 2:2에서 사용된다. 사도행전에서는 행 5:3; 행 26:18에서 호 사타나스가, 행 10:38; 행 13:10에서 (호) 디아볼로스가 사용된다. 공동서신에서는 디아볼로스만이 나온다, 약 4:7; 히 2:14; 벧전 5:8; 유 1:9. 요한계시록에서는 요 2:9, 요 2:13, 요 2:24; 요 3:9; 요 20:7에 호 사타나스, 요 2:10; 요 12:12; 요 20:10에 호 디아볼로스가 사용된다. 요 12:9; 요 20:2에서는 강조되어 둘이 함께 나온다. 호 카테고르가 요 12:10에서 나오며, 비유적으로 쓰인 호 호피스와 호 드라콘도 발견된다.|신약성경의 서신들에서 마귀는 공동체에 대한 그의 공격과 관련하여 두드러지게 언급된다. 이 공격은 먼저 핍박 가운데서 발생한다. 계 2:10; 계 12:17; 계 13:7; 벧전 5:8; 계 2:9; 계 3:9이 유대교 공동체를 사단의 회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적극적인 적대 때문이다. 그러나 마귀는 특별히 시험으로 공동체를 공격한다. 살전 1-3장은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할까" 염려하여 기록된 것이다. 즉 공동체가 성에서 성으로 쫓겨 다닌 사도의 운명에 의해 의욕을 잃을까 염려해서였다. 고전 7:5에서 사단에게 시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아크라시아(절제 못함)이다. 바울은 고후 2:11에서 사단의 노에마타(궤계)를 언급한다. 여기서 사단은 속이려 하는 자이다. 엡 6:11에서는 마귀의 메도데이아이(궤계)에 대해 말한다. 딤전 3:7은 마귀의 올무를 언급하며 딤후 2:26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특히 자유주의적 사상에서 사단의 위험스럽고 그릇된 일을 본다. 자유주의 사상의 투사들은 그리스도의 사도인체 한다. 그리고 사단이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때 그 모습은 사단이 얼마나 위험스러운지를 보여준다, 고후 11:14. 초대 교인들에게 줄곧 존재했던 동일한 위험도 또한 사단과 관련된다, 계 16:20. 사단의 유혹하는 활동은 적그리스도의 활동에서 절정에 이른다, 살후 2:3-12; 계 13:17; 참조: 계 3:10.|시험은 어린양의 피로(계 12:11),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음으로(엡 6:11), 즉 믿음으로(엡 6:16), 혹은 자주 시험이 올 수 있는 상황을 피함으로써(고전 7:5; 딤전 3:6이하; 딤전 5:14이하; 참조: 엡 4:27; 롬 16:17) 물리친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롬 16:20)는 로마 교회에 한 바울의 요구이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실 것이나, 공동체를 통하여 그리하실 것이다.|사단은 또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공동체를 대적하려 시도한다. 사단은 바울이 데살로니가로 가고자 하는 꼭 필요한 여행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살전 2:18), 사단의 사자가 바울에게 타격을 가했다(고후 12:7).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나 동역자들의 모든 불행을 마귀와 연관시키지 않으며(빌 2:25-30), 또한 방해 받은 모든 여행을 사단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는다(롬 1:13 엘콜루덴). 다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울 사도가 결코 어떤 합리적 방식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단의 방해를 상호 관련시키려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마찬가지로 사단의 방해도 그의 사역 가운데서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고전 5:5과 딤전 1:20에 언급된 사단의 일이다. 후기 유대교는 사단과 죽음의 천사를 동일시했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사단과 그의 무리가 사람에게 해를 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고 생각하였다.|후기 유대교에서는 멸망의 사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한다고 한다. 그러나 고전 5:5에서 사단 자신이 집행하는 판결은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후기 유대교에서는 이 대담한 사상을 감히 소유하지 못했다. 바울은 어둠의 시간이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존재했기 때문에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사단의 사자, 즉 육체의 가시는 바울이 스스로를 높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바울에게 "주어진" 것이다(고후 12:7).|공동체에 대항한 사단의 싸움이 아닌 공동체 밖에서의 사단의 일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공동체 밖의 세계에서 그는 공동체의 증인이 그것에 저항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확실한 경향을 취한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에게 주시는 임무는 이방인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행 26:18. 이교 신앙의 마술은 특별히 악한 자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참조: 행 13:10; "마귀의 자식이요").|마귀의 최종적인 멸망에 관한 유일한 직접적인 언급은 마 25:41과 계 20:10에 나온다. 당연히 바울에게 전제되어 있을 것이지만, 고전 15:24-26에서 바울이 모든 아르케와 엑수시아의 종말과 또한 사망의 종말에 대해 말하지만 사단 혹은 죄의 종말에 대해서는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4. 요한의 복음서와 요한 서신에서 이 세상의 왕.||요한의 기록에서는 네 가지 용어가 마귀를 나타낸다.||(a) 디아볼로스는 고유명칭이 아니고 특성을 지적해주는 참된 칭호다(7회);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은 서로 대립된다. 요일 3:10.||(b) 사타나스는 요 13:27에서 가룟유다에 관한 결정적인 언급에서 단 한번 나타난다: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c) 호 포네로스는 중성 토 포네론과 항상 확실하게 구별되지는 않으며, 요한복음에서는 요 17:15에서만 나오고, 요한일서에서 6회 나온다.||(d) 호 아르콘 투 코스무 투투("이 세상 임금")는 요 12:31; 요 14:30; 요 16:11에서 사단을 뜻하는 결정적인(final) 이름이다.|마귀에 관한 결정적인 요점은 요 8:44에 있다. 마귀와 인간의 관계는 아비와 자식의 관계와 같다(참조: 요일 3:10). 즉 마귀는 인간의 전 존재를 결정 짓는다. 이리하여 우리는 또한 요일 3:12에서 에크 티노스 에이나이(아비의 이미지 없이 사용됨)를 발견한다. 본질적으로 랍비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랍비들에게 인간의 의지는 인간의 종교적 관계를 고정한다. 이렇게 사단에 의해 인간 본성이 결정되는 특별한 형태가 요 6:7에 나온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이것은 막 8:33의 베드로에게 언급한 사단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또한 사단이 유다에게 들어갔다고 하는 요 13:27과 이와 병행되는 눅 22:3도 사단에 의해 인간 본성이 결정되는 것을 나타낸다. 이들 중 어느 말씀도 후기 유대교에서 유사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후기 유대교에서 마귀나 벨리알은 그들의 영들 가운데 하나일 뿐 인간에게 들어가지 않는다. 요 8:44에서는 마귀에 관하여 세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그가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는 말씀은 타락을 상기시켜준다. 그 다음에 이어 나오는 말씀, 즉 "진리에 서지 못하고"는 본문상으로는 전혀 확실하지 않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마귀와 관련하여서는 언제든지 진리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귀가 거짓말 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한다고 하는 세 번째 단언에 의해 명백해진다. 그 의미는 타락과 거짓말은 마귀 스스로의 소행이며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부차적인 점만이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상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마귀가 마귀가 되기 전에 무엇이었는지 질문하는 것을 금한다. 그것이 말하는 바는 마귀는 그가 마귀라는 사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고의적이든 비고의적이든 마귀의 존재와 본성과 기원에 관하여 쿰란을 포함하여 후기 유대교에 의해 표현된 사상은 여기서 거부된다.|요한의 기록들에서 특별한 측면은 존재적 진술들에 의해 그들 안에서 행해진 역할이다: 즉 하나님에게서 태어나거나 마귀에게서 태어나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거나 마귀의 자녀가 되는 것, 이런 이유에서 죄를 짓는 자는 에크 투 디아볼루이다(요일 3:8). 역으로 가인은 에크 투 포네루였기 때문에 그의 아우를 살해했다(요일 3:12).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며 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요일 5:18). 이것은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 나무와 그 열매에 관해 말씀하신 것과 정확히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직설법과 명령법을 상호 관련시키고 병치 시킴으로 동일한 요지를 전개한다. 요한이 네아니스코이(청년들)에게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라고 외칠 때(요일 2:13이하) 이것은 본질상 자명한 것이라는 의미에서나 엄격한 숙명론의 의미에서 의도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의 간구,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요한의 실제적인 말에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요 17:15).|(참조: Foerster).
관예
uJphrevth"
하인, 고용인 servant, 조수 helper, 보조자 assistan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명사 휘페레테스는 Aesch.에 처음 나오며, 처음에 신들의 사자인 헤르메스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휘페레테스는 이 문맥에서 제우스의 뜻을 행하는 자, 곧 자기 배후에 최고의 신 제우스의 능력과 권위를 지닌 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자기보다 높은 존재의 뜻을 받드는 자라는 의미가 되었다. 높은 존재의 뜻은 반드시 신의 뜻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 단어는 군대나 의료 분야, 상업, 법률 등의 분야에서 예를 들면 의사의 보조원 또는 사법적 판결 집행자들을 의미한다.|종교에서는 휘페레테스는 제사를 돕는 사람들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그리고 인간 관계에서는 휘페레테스라고 하면 친구를 위해서 무엇인가 안정되도록 이타적인 마음을 갖고 도와주는 사람을 의미한다. 복종을 하고 봉사한다는 것이 언제나 초점이다. 그러나 그가 맡은 기능이나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는 그의 편에서 상당한 권한을 가질 수 있다.|한편 휘페레테스는 둘로스(종, 노예)와 구별된다. 왜냐하면 휘페레테스는 자유인이며, 자기가 제공한 봉사의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휘페레테스는 디아코노스(종)나 데라폰(종)과는 달리 상급자가 해놓은 일을 배우며, 인격적인 권위나 가치에 대한 편견없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b) 전통적으로 이 어군은 에레테스(%3: 뱃사공)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왔기 때문에 '뱃사공, 조수'라고 설명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뱃사공에 두 종류의 계급이 없었으며, 또한 뱃사공들이 계급이 있다고 해도 어떤 사람이 휘페레테스가 되는 것은 노를 젓기 때문이 아니라 지시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휘페르테스는 다른 언어학적인 기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본래의 어근은 노젓는 것보다는 키를 잡고 조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두 명의 승무원을 태운 보트에서는 선장으로부터 지시를 받는 사람이 휘페레테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노예는 아니면서 자유인으로서 명령에 따라야만 되는 사람을 나타내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2. 70인역본 및 유대교의 용법||(a) 휘페레테스는 70인역본에서 4회 나오며, 잠 14:15에서 왕의 '신하'를, 집회서 6:4에서 주님의 나라를 맡은 '통치자(나 관리)'를, 사 32:5에서 '종'(servant)을 나타낸다.||(b) 자신을 일컬어 자기 가족을 위한 휘페레테스이며 디아코노스라고 할 때에 휘페레테스는 하나님을 돕는다는 의미에서 자기의 역할을 나타내며, 디아코노스는 자기가 가족에게 하는 봉사를 나타내는 것이다(On Joseph 241).|요세푸스에서 휘페레테스는 주로 누군가를 돕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모세, 레위 등은 하나님의 조수들이었다. 또한 휘페레테스는 왕의 신하들이나 공직자들, 또는 경비원들을 가리킨다. 야곱은 자기 어머니가 그에게 장자권을 얻게 하려고 음식을 준비할 때 자기 어머니를 도왔다. 둘로스는 휘페레테스처럼 행동하지만, 근본적으로 휘페레테스는 맡겨진 일을 하든지 거절하든지 자유롭게 할 수가 있다는 점이 다르다. 즉 그 행동의 기능적인 특색이 휘페레테스와 디아코노스를 구별하는 것이다.||#3. 신약성경의 용법||휘레페테스는 신약성경에서 20회 나오며, 고전 헬라어나 헬레니즘 헬라어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뜻을 보조적으로 수행하는 자'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a) 휘페레테스는 일반적으로 '어떤 권력자의 수행원이나 관리들'에 대해 사용되었다.|① 마 5:25에서 법정에서 죄수들의 형벌을 집행하는 관리를 의미한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휘페레테스는 종말론적인 심판을 집행하는 자이다.|② 요 18:36에서 휘페레테스는 나의 종들, 왕의 지휘하에 있는 군사들을 나타낸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여기서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싸움을 하는 휘페레타이(복수, 종들)를 가지고 계시지 않다는 것이 아니면, 싸움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에서 휘페레타이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친구일 뿐만 아니라 휘페레타이일 수 있었다. 친구로서 그들은 왕과 친밀하지만 휘페레타이로서는 그 왕의 목적을 이루도록 왕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③ 휘페레테스는 산헤드린의 종들이나 관리들을 의미한다(마 26:58; 막 14:54; 막 14:65; 요 7:32; 요 7:45이하; 요 18:3; 요 18:22; 행 19:6; 행 5:22; 행 5:26).||(b) 행 13:5에서 바나바와 바울은 자기들이 사도로서의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자기들의 뜻을 따라 주고 요구를 들어 줄 휘페레테스로 요한 마가를 데리고 있었다.||(c) 고전 4:1. 바울과 아볼로는 그리스도의 일군이다. 그들의 일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뜻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들이 종들이라는 사실(또는 청지기라는 사실)은 그들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이나 심지어 자기 비판까지도 막아 준다.||(d) 행 26:16.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군이자 증인이다. 뒤에 나오는 단어가 앞의 단어를 더 엄밀하게 정의한다. 강조점은 주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에 있다. 행 26:19에 있는 순종한다는 문구는 16절의 휘페레테스의 역할을 지배하고 있다.||(e) 눅 1: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여기에 나타난 말씀의 일꾼들이 누가복음 저자의 집필을 도와 준다. 여기서 일군들은 목격자들과 같은 것이 분명하다.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선전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용어는 또한 예수님의 설교와 기록된 역사 사이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한다.|(참조: J.H.Thayer; K.H.Rengstorf).
야만
bavrbaro"
말더듬는, 낯선말의, 야만인.||#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바르바로스(Aeschyl., Hdt. 이래)는||(a) 기본 의미는 '말더듬는, 더듬거리는',|(b) '낯선 말의',|(c) 그 다음에 '낯선 종족의',|(d) 그 이상의 의미로, '거친, 천연 그대로의, 난폭한, 미개한',|(e) '야만인들'(통치자와 철학자들에 대해 사용될 때 긍정적인 의미를 지님)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바르바로스는 70인역본에서 6회 나오며, 라아즈(3937: 불분명하거나 알아들을 수 없게 말하다)의 역어로 '방언 다른'(시 114:1), 바아르(1197: 잔인하다, 야만적이다)의 역어로 '짐승같은'(겔 21:36)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마카베오이서에서 이 단어는 '야만인'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2:21; 10:4).||#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바르바로스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고전 14:11에서 바울은 바르바로스를 '말더듬(거리)는'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b) 행 28:2에서 바르바로스는 '토착어를 말하는 자', 즉 헬라인이 아닌 사람들을 뜻한다: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행 28:4에서도 마찬가지다: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더니".||(c) 롬 1:14에서 바울은 그의 사도적 사명의 보편성을 묘사한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참조: 롬 1:5).|그는 헬라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야만인들에게도 설교해야 한다. 그는 로마인들도 헬라인들 가운데 포함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바울은 유대 세계가 아닌 모든 세계를 바르바로스로 나타낸다. 롬 1:16에는 다른 구별, "유대인과 헬라인"이 나온다. 따라서 우리는 마침내 세 무리, 즉 유대인, 헬라인, 그리고 야만인들로 구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d) 골 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여기에는 유대인과 헬라인, 성경적인 관점에서 할례당과 무할례당, 그리고 야만인들과 스구다인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이 경우에 바울은 유대인을 바르바로이(야만인들) 가운데 포함시키지는 않지만 복음을 통하여 모든 무리들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총체 속으로 끌어 들이고 있다(H. Windisch, Ⅰ, 546-53).|(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Windisch).
튀로스
Tuvro"
두로 Tyre (지)||튀로스는 아람어 투르(바퀴)에서 유래했으며, 지중해 연안에 있는 페니키아의 고대 중요한 항구도시이다.|이 도시는 히람 왕의 고국이며 다윗과 솔로몬의 무역 동맹국이었다; 그리고 두로는 건축가이자 숙련공이며 금속 세공사인 히람의 고국이기도 하다.|이 도시는 이사야에 의해 "고대에 건설된 희락의 성, ... 면류관을 씌우던 자요 그 상고들은 방백이요 그 무역자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사 23:7 이하)였다고 묘사된다.|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산물은 이 지방 특유의 연체 동물(뿔고둥)에서 만들어지는 두로의 자줏빛 염료이다. 분명히 페니키아 어미 도시 시돈에 의해 세워진(사 23:12; 창 10:15), 그 딸 항구―처음에는 본토에 건설되었으나 후에는 포위 공격을 막기 위해 근처의 섬에 건설됨―는 더 오래된 시돈보다 더 큰 지중해 무역의 강력한 중심지로 발전하였는데, 방탕하고, 이기적이며, 처세에 능한 바다의 중심이며, 이러한 이 도시에 하나님의 심판이 예언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자의 선언의 서문인 겔 27 장의 유명한 절수들에 잘 묘사되어 있다(겔 28:1-19; 참조: 암 1:9; 슥 9:2).|두로는 성경의 역사에서 수 19:29에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그 곳에서 두로는 아셀 지파의 경계에 놓여 있는 "견고한 성읍"으로 나타난다. 그곳이 이스라엘인들의 소유권 내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다윗과 솔로몬은 히람 왕과 친밀한 동맹 관계에 있었으며,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할 때 다른 히람을 고용하였다(왕상 9:10-14; 대하 2:3, 16). B.C. 922년 왕국의 분열 후의 관계는 결코 다시는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아모스로부터(암 1:9) 계속 선지자들의 대부분은 두로를 그곳의 물질주의와 노예 매매 때문에 통렬히 비난하였다(욜 3:5 이하). 두로의 힘은 결코 군사적인 특성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원양 어선과 선원들, 확실한 상업적 감각, 유망한 상업 지역에 대한 식민 정책, 높이 평가되는 상품들―염료들, 유리 제품, 금속 제품의 제조에 기초한다. 그곳의 부요 때문에 두로는 모든 정복자들이 높이 평가하여 탐내는 지역이었다.|B.C. 9세기에 두로는 앗시리아의 앗슈르나시팔(Assyrian Asshurnasipal)에게 공물을 바쳤지만 손상당하지는 않았다. 살만에셀 Ⅲ세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으나(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그와 자주 적이 되곤 하는 다메섹의 벤하닷을 포함하여), 나중에는 그에게도 공물을 바쳤다. 옛 두로(본토 대륙에 있는)는 살만에셀 V세에게 점령당했으나 섬에 있는 그 성읍은 일 이년 후 앗수르 왕이 사망할 때(B.C. 722)까지 정복당하지 않았다. 두로는 사르곤에게 평화적인 조건으로 굴복했다. 그리고 산헤립에 의한 일반적인 연안 도시의 약탈을 피했으나 시돈을 피괴한 에살핫돈의 군대에 의해 공격당했다. 그러나 그 앗수르의 대 정복자의 마지막 때에 애굽에 대한 정복으로 분주한 동안 저항을 계속 할 수 있었고 그 후 곧 그는 사망했다. 그 이후 한 세기 동안 두로는 번창했고, 그 때 느부갓네살이 섬 도시의 점령에 끝나지 않고 바벨론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한 12년 간의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아마도 두로에 대한 가장 유명한 포위 공격은 B.C. 332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공격이다. 알렉산더는 본토에서 섬까지 대략 1/2마일 폭의 방파제 혹은 둑길을 만들어 군사적인 문제점을 해결하였다. 떠내려오는 모래의 퇴적으로 넓어지긴 했지만 그 방파제는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두로는 결코 다시는 알렉산더의 제국의 뒤를 잇는 제국들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로는 몇세기 동안 이전의 번영의 일부를 향유했다.|나중에 로마의 최고의 적수가 된 카르타고(Carthage)는 B.C. 9세기에 두로의 식민지 개척자들에 의해 세워졌다.|멜가드(Melkarth)의 두로 제사장들은 그 도시에 은신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헬라의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가 그곳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을 때 그는 그 도시의 건설은 이 지도자들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헬라 신전이 남쪽 또는 그 도시의 애굽 사람들의 항구를 아름답게 하였다고 생각되는 것처럼, 그들의 신전 중 하나는 아마도 북쪽 또는 두로의 시돈 사람들의 항구에서 뛰어났다.|예수님께서는 두로 부근의 지역을 방문하셨고(막 7:24-막 7:31) 환영받으셨다(눅 10:13). 바울은 한때 두로에 상륙하여 칠일간 머물렀다. 그가 항해를 떠나려 할 때 그의 제자들이 배까지 전송하고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행 21:3-행 21:7).|두로는 초기 기독교 감독 관할의 영지가 되었다. 오리겐(Origen)은 3세기에 그곳에 매장되었다. 제롬(Jerome)은 4세기에 그 도시를 방문하여 그곳의 아름다움에 감명받은 내용을 기록했다. 십자군은 A.D. 638년에 그곳을 점령한 사라센에게서 두로를 빼앗았다. 건축가인 동시에 군인인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A.D. 1124년 아름다운 해안에 성 요한의 기사들의 교회를 세웠다(of the Knights of St. John). 그후 회교도들이 1291년 폭력적인 파괴로 두로를 다시 탈환하였다; 그 교회는 지금 자미 케빌(Jami-Kebir) 회교 사원이다.|(참조: HBD; Walter Bauer; J. H. Thayer).
오펠레이아
wjfevleia
유용, 유익||#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오펠레이아(Soph., Hdt. 이래)는 오펠레오($5623: 돕다, 도움이 되다)에서 유래했다. '유용함, 유익, 이익'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오펠레이아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온다.||(a) 롬 3: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b) 유 1: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높아지다
uJyovw
높이다 exalt, 올리다 rais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동사 휩소오(Hippocr. 이래로)는 성경 밖의 헬라어에서 후기에 드물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들어올리다, 높이 올리다, 높이다, 올리다'를 의미하며, 문자적 의미와 전이된 의미로 사용되었다(참조: G. Bertram).||(b) 높임이나 오름에 대해 바벨론의 창조 서사시에서 승리한 마르둑이 신들의 회합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자의 지위에 오르게 된 내용이 나온다.|애굽에서 신-왕의 대관식 예식 때에 사용되었던 왕 신화(주전 14세기)에서 바로왕 투트모세(Thut-mose) 3세가 태양신 레(Re)에 의해 스스로 빛의 영역에까지 높여져서 거기에서 즉위하여 신의 아들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 있다.(참조: ANET)|바벨론의 아다파(Adapa) 신화에서 아다파는 애써 하늘에 까지 도달했으나 그곳에서 생명의 양식을 얻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 계획은 신들의 인과응보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곧 이 신들은 인간을 그에게 지정된 한계 속으로 몰아넣었다.|에타나(Etana) 신화에서 에타나는 자기 신세를 입은 독수리를 따라 하늘에 있는 아쉬탈 보좌에 도달하려는 헛된 노력을 했다. 그의 목적은 죽음 없는 불멸을 성취하는 것이었다.|이 두 신화들에는 인간 자신의 노력을 통해 높아지려는 시도가 포함되어 있는데 반해, 바벨론 창조 신화와 애굽 왕 신화에서 높임은 신들의 일이다.|(참조: D. Muller).||#2. 70인역본의 용법||(a) 휩소오는 70인역본에서 약 150회 나오며, 16개의 히브리어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는데, 주로 룸과 그 파생어들(찬양, 칭찬, 높음, 거만함 등)을 번역하고 있다(94회). '높다, 높이다, 일어나다'를 의미한다.||(b) 따라서 휩소오는 '높이다'(시 18:46; 시 27:5,6; 출 15:2; 겔 28:2 등), '높다'(시 89:13;시 61:2), '넓게 펼치다'(사 14:26), '소리를 높이다'(사 37:23), '자라다'(겔 31:4,10), '양육하다, 기르다'(사 23:4), '아름답다'(사 4:2; 시 89:16), '높이다, 칭찬하다, 찬양하다'(시107:32; 118:28), '자랑하다, 건방진, 거만한'(시 37:20; 시 131:1,2; 겔 28:5)는 의미로 사용되었다.||(c) 휩소오는 주로 하나님께서 높이심을 받으시는 것, 하나님에 의해 높임을 받는 것, 무례하게, 거만하게 자기를 높이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휩소오는 신약성경에서 20회 나온다.||(a) 행 13:17의 바울의 연설문에서 휩소오는 '크게 만들다'를 의미한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b) 휩소오는 낮추는 것에 대조되어 나타난다. 예수님은 공관복음서에서 자기 낮춤과 자기 높임에 관하여 말씀하신다(마 23:12; 눅 18:14; 눅 14:11; 눅 1:52; 마 11:23; 눅 10:15). 이 말씀의 배후에는 구약성경의 유대적인 사상이 있다(겔 21:26). '하나님의 구약 계시에 따르면 인간편에서 모든 높아짐은 거부된다. 참으로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것이다'(Bertram 608).|이와 같은 맥락을 따르는 약 4:10과 벧전 5:6의 권고문에는 하나님(혹은 그의 손)께 복종하여 미래의 영광 때에 높임을 받으라고 기독교인들을 경고하는 내용이 있다. 약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휩소오는 고후 11:7에서 좀 다른 의미에서 낮춤과 함께 사용되었다:"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고린도 교인들의 높아짐은 그들이(값없이) 복음을 받는 한편 바울은 그의 무보수의 전도로 자신을 낮추었다는 사실로 되어 있다.||(c) 휩소오는 기독론에서 특별한 의미, 즉 예수님을 통치자의 지위로 높이는 승귀를 나타낸다(행 2:33; 행 5:31). 최초의 기독론적 언명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부활과 높임을 동시에 고찰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구절들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주로 임명 받으신 것이 높임으로 묘사된다(참조: 2:36). 이 구절들이 사도행전1장에 나오는 승천에 관한 누가 신학과는 다른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시사해주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보다 초기의 전통임에 틀림없다. 이 전통에 의하면, 부활절 사건은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건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주요 그리스도로 임명 받았기 때문이다. 곧 높여졌기 때문이다(행 2:36). 예수님의 높임은 기름부음을 받으심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의 완성이자 교회와 세계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주권의 시작이요 계속이자 예기된 성취를 뜻한다.||(d) 휩소오는 요한복음에서 5회 나오는데, 명백한 신학적 의미를 나타낸다. 이 5개 구절의 실례 모두에서 휩소오는 이중적 의미,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려 올리워진 것은 동시에 그의 (천국으로의) 승귀를 의미한다는 것을 나타낸다(요 3:14; 요 8:28; 요 12:32: 요 12:34).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그의 순종의 최종적인 귀결이자 목표라고 보는 요한의 견해에 기초하여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세상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목적이 십자가에 들어 올리어진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들어올림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그를 자기네의 심판자로 삼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들어올림'의 이중적인 의미는 명백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그를 들어 올렸다. 그렇지만 엄격히 말해서 그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는 인자로서 하늘의 영광으로 들어올려졌다. 그들이 예수님을 심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그들의 심판자가 된다(Bultmann). 반대로 신자들은 죽음에까지 이른 예수님의 순종 가운데에서 아버지와 그의 완전히 하나됨을 인식하고, 이렇게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이 아들로 영광을 받게 하고 되돌아옴이요 신자들을 위한 구속이 됨을 깨닫는다(요 12:32). 그러므로 십자가에 들어 올리워짐은 아버지의 영광 속으로의 높임의 시작이다. 높임에 대한 요한의 가르침은 공관복음서에 나와 있는 승천의 실제적인 묘사에 대해 요한이 제시한 것(counterpart)이다.|(참조: G. Bertram; D. Muller; G. Ludemann).
마게도냐 사람
Makedwvn
마게도냐 사람 Macedonia||마케돈은 '마게도냐 사람, 마게도냐의 거주민'을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마케돈이란 명칭은 5회 나오며, 사도행전에 3회, 고린도후서에 2회 사용되었다.||(a) 행 16:9에서 바울이 마게도냐에 관한 환상을 본 것을 언급한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b) 행 19:29에서 마게도냐의 제자들에 관해 언급한다: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 가는지라".|행 27:2에서도 마게도냐의 제자들에 관해 언급한다: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쌔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c) 고후 9:2에서 바울은 연보에 관해서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아가야(고린도)에서 일년전부터 준비했다고 자랑한 것을 언급하고, 고후 9:4에서 만일 디도와 두 형제를 바로 뒤따라서 몇 명의 마게도냐 교인들이 바울과 함께 간다면 고린도 교인들이 준비치 아니한 것을 그들이 볼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 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 교회에 대한 그들의 추정 또는 신뢰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대책이 필요함을 계속해서 말한다.|(참조: TB; F. G. Carver).
뉘우치다
metamevllomai
마음을 바꾸다, 후회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메타멜로마이(Thu. 이래)는 메타($3326)와 멜레이($3199)에서 유래했으며,||(a) '마음을 바꾸다' change one's heart(일반적으로나 죄에 관해서),|(b) '후회하다, 회개하다' regret, repent를 의미한다.||「동의어 비교: 메타멜로마이($3338), 메타노에오($3340).|전자는 단순히 '감정적' 변화를, 후자는 '선택'의 변화를 표현하며, 전자는 '특정한 것들'과 후자는 '전생이'와 관련을 가지고, 전자는 비록 양심의 가책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후회' 이외의 여하한 것도 의미하지 않지만 후자는 '회개'로 알려진 도덕적 목적의 역전을 의미한다는 취지에서 이 두 단어간에 매우 빈번하게 차이점이 규정되지만, 그러나 이 차이점들은 용법상 거의 유지되지 않는 것 같다.|그렇지만 메타노에오가 도덕적 행위와 결과를 표현하는 보다 완벽하고 보다 고상한 용어라는 점을, 이 단어의 어원 뿐만 아니라 이 단어의 용례의 보다 높은 빈도, 이 단어가 자주 명령형으로 사용된다는 사실(메타멜로마이는 결코 명령형으로 사용되지 않음), 그리고 아포($575)와 에크($1537)와 함께 쓰이는 이 단어의 구문이 지적해 준다(참조: 행 20:21).」||#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메타멜로(마이)는 70인역본에서 약 14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나함(애석해하다, 후회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인간의 순수한 '후회'(출 13:17), 하나님의 '후회'(삼상 15:35)나 '뉘우침'(대상 21:15), '긍휼히 여기심'(시 106:46) 등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메타멜로마이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마태복음에 3회, 고린도후서에 2회, 히브리서에 1회 사용되었다.||(a) 마 21:29; 마 21:32, "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2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참조: 마 21:28-32).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것을 요구했다. 한 아들은 간다고 대답했으나 가지 않았다. 다른 아들은 거절하였으나 자신의 대답을 후회하고 포도원으로 갔다. 이 비유에서 메타멜로마이는 '자신의 결정을 바꾸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적용했다. 그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켰으며, 이와 같이 세례(침례) 요한의 메시지를 믿고 회개하였던 세리와 창녀들도 아버지께로 돌이켰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그들의 불순종을 계속하였다.||(b) 마 27:3에서 메타멜로마이는 '후회하다, 뉘우치다'를 의미한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룟 유다의 사건은 메타멜로마이와 메타노에오($3340)가 신약성경에서 동일한 의미를 공유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유다는 예수님이 부당하게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배신 행위를 후회했으나, 참된 회개의 길은 찾지 못했다.||(c) 고후 7:8에서도 메타멜로마이는 '후회하다'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참조: 고후 7:8-10). 여기서도 구별되는 점이 나타난다. 바울은 그가 고린도인들에게 격렬한 서신을 띄운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편지를 받아보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근심이 그들을 참 회개(메타노이아[$3341])와 하나님에게로의 내적 돌이킴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회개는 결코 후회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우리에게 구원만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d) 히 7:21(시 110:4 인용; 마음을 바꾸다),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맹세는 예수님의 제사장적 지위가 구약의 지위보다 우월함을 보증하고, 하나님의 변치 않는 신실함을 표현하는데 기여한다. 이러한 신실함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사와 부르심은 돌이킬 수 없는(아메타멜레토스) 것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인식이 가능하다(참조: 롬 11:29). 하나님은 인간 마음의 불순종과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실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Michel; F. Laubach).
썩어지다
fqeivrw
파괴하다, 파멸하다, 부패시키다, 못쓰게 만들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동사 프데이로(Homer 이래로)는 '파괴시키다, 멸망시키다, 죽이다, 부패하다'를 의미한다.|(b) 또한 이 단어는 '도덕적으로 부패하다'(Aristotle), '법률의 지위를 떨어뜨리다'(Plato), '매수하다'(Dem.,), '여인을 농락하다'(Dem.,), '처녀를 더럽히다'(Lucian).|(c) 중간태나 수동태로 '멸망하다, 죽임을 당하다, 부패되다, 수척해지다'를 의미한다.|(d) 또는 경제적 파산을 나타내기도 한다.|(e) 저주로 사용될 때는 '저주받다, 마귀에게 가다',|(f) 좀 더 약하게는 '꺼져버리다'를 의미한다.|(g) 그 외에 우유같은 것을 '더럽힌다', 때때로 음식이나 동물의 '분실'을 나타내기도 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프데이로는 70인역본에서 약 23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샤하트(멸망[파괴]시키다, 부패시키다, 부패하다, 멸망하다)와, 다음으로 하발(파괴하다, 타락되게 행동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프데이로는 '부패되거나 타락되게 행동하다'(창 6:11; 호 9:9), '손상하다'(레 19:27), '쇠(약)하다'(신 34:7), '멸하다'(삼하 20:20), '황폐케하다'(사 24:3)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프데이로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오며, '부패하다, 멸망하다, 멸하다, 더럽히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a) 프데이로의 실제적 의미.|① 고전 3:17에서 프데이로는 '파괴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여기서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내적인 부패가 아니라 성전의 파괴이다. 건물로서 성전은 단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은 그 교회 가운데, 또는 개개인 신도의 심령에 거하신다(참조: 엡 2:20-22). 교회를 파괴하는 것은 정말 나쁜 죄이다. 가는 곳마다 마치 폭풍처럼 파멸을 뒤에 남기는 전도자들도 실제로 있다. 누구든지 부패한 실생활로 하나님의 교회를 타락, 부패시키거나 파괴하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패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성결은 그의 교회에서 반영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서 성별되어야 하며, 고린도 교회에 심하게 있었던 불화와 도덕적 방종으로부터 해방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더럽혀지고 파괴되어서는 안된다(참조: D.S.Metz; Robertson).|② 고후 7:2에서 프데이로는 '경제적으로 파산하다'를 함축한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해롭게하거나 또는 속여 빼앗는'이라는 표현은 '경제적으로 손해를 주거나 이를 취하는'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고전 3:17에서 프데이로도 이런 경제적 파산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b) 프데이로의 도덕적, 종교적 의미.|① 고후 11:3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노에마타)은 부패나 타락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는 고린도 교회에 미혹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그는 일찌기 하와가 뱀에게 "미혹된" 것과 똑같이 교회도 대적들이 일으킨 모반과 또한 그들이 뿌려놓은 혼란 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을 두려워하였다.|② 고전 15:33에서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 말은 아테네 시인 메난더(Menander, 주전 342-291)가 쓴 분실된 희극 다이스(Thais)에서 유래하여 잠언이 되었다. 이와 관련지어 볼 때, 바울은 인간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거짓 가르침과 배교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③ 엡 4:22에서 옛 사람은 그의 욕심에서, 또는 '욕심을 따라 타락되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④ 유 1:10에서 이단자들은 잡혀 죽기 위하여 태어난(참조: 벧후 2:12) "이성없는 짐승같은 자"들이다. 그들은 그들이 본능으로 아는 것으로 인하여 멸망할 것이다.|⑤ 계 19:2에서 프데이로는 도덕과 신앙에서 땅, 곧 인류를 유혹하고 타락(부패)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참조: 계 11:18이하에서 이런 타락시키는 자들을 볼 수 있다).|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음녀 바벨론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배교의 축도(epitome )이다. 환상적인 개선가에는 그녀가 "음행"으로 땅, 곧 인류를 유혹하고 타락시키었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심판을 받는다. 다른 말로 말해서 세상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가 분명해졌다.|(참조: Walter Bauer; G.Harder; F.Merkel ).
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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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함 fasting, 금식 fas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네스테이아는 네스티스($3523: 먹지 않는, 금식하는)에서 유래했으며, '먹지 못함, 굶음'을 의미한다(Aristot. Probl.).|그러나 일반적으로 네스테이아는 '금식'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가진다(Hdt., 4, 186).||#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네스테이아는 70인역본에서 30여회 나오며, 히브리어 촘(금식)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5322 네스튜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네스테이아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온다.||(a) 마 17:21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만 인간이 해방될 수 있는 어떤 악마적 노예 상태들이 있다: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RT와 Tr, A 편집본에 읽기).||(b) 눅 2:37에서 여선지자 안나는 성전에서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다: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c) 행 14:23에서 선교사들의 파송과 장로들의 임명 때에 금식과 기도를 아울러 행하였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d) 고후 6:5과 고후 11:27에 있는 두 가지 실례들에서 네스테이아는 사도의 '먹지 못함'을 나타내는데, 이것들은 모두 자서전적이다.|(참조: F.S.Rothenberg; J.Behm).
무익하다 (<유익하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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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하다, 유익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오펠레오(Xin., Mem.)는 오펠로스($3786: 유리, 이익, 도움)에서 유래했으며,||(a) '돕다, 조력하다',|(b) '유용하다, 유익하다, 도움이 되다, 이익이 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오펠레오는 신약성경에서 15회 나온다. 한글개역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a) '유익하게 하다', 마 15:15; 막 7:11.|(b) '유익하다', 마 16:26; 막 8:36; 눅 9:25; 롬 2:25; 고전 14:6.|(c) '효험이 ~', 마 27:24; 막 5:26.|(d) '무익하다'(3756과 함께), 요 6:63.|(e) '쓸데없다'(3762와 함께), 요 12:19.|(f) '유익이 ~', 고전 13:3; 갈 5:2.|(g) '유익 되다', 히 4:2.|(h) '유익을 얻다', 히 13:9.|(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구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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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의 진통을 겪다.||#1. 고전 헬라어 문헌||동사 오디노는 '산고의 진통을 겪다'를 의미한다. 고전 헬라어 저술가들은 오디노로 해산의 진통을 묘사하였고, 때로는 동물이 그 새끼를 분만할 때 겪는 진통을 묘사하기도 하였다. 이 용어는 어떤 심한 심신의 고통, 어려운 육체노동, 정서적 또는 정신적 긴장이나 불타는 듯한 욕구 불만에서 오는 갈망 등을 나타내는 말로 비유적으로 폭넓게 사용되었다. 파피루스에 이따금식 나오는 이 단어의 표현들은 일반적으로 상징적인 용법을 반영하고 있다.|호머는 이 단어를 비유적으로, 상처의 갑작스럽고 격렬한 고통에 대하여 사용하였다. 플라론은 이 단어를 지식의 산파로서 소크라테스의 사역과 관련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단어를 출산의 자연적 과정에 적용시켰다. 신화에서 운명의 여신들은 출산에 임하여 죽음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고통을 다스린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오디노는 70인역본에서 19회 나오며, 특히 이사야서(사 23:4; 사 45:10; 사 51:2 등)에서 출산의 고통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오디노는 '출산에서 몸부림치다'를 뜻하는 훌, 힐과, 또한 '잉태하다'(시 7:14), '산고하다'(아 8:5)를 뜻하는 강의형 동사 하발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그러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용어들은 모두 현저하게 문자적인 의미로 채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오디노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타난다.||(a) 오디노는 갈 4:27에서 사 54:1을 인용하고 있는데, 거기서 문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여기서 잉태치 못하는 여자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기적을 통하여 많은 자녀들, 즉 믿는 자들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b) 계12:2에서 고통 중에서 소리치는 임신한 여인의 표적이 하늘에서 보여진다: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우리는 성경전체를 통해 이스라엘이 해산의 고통을 겪는 여인으로 묘사된 것을 여러 번 볼 수 있다(사 66:7이하, 미 4:10; 5:3등). 특별히 이사야에서는 중대한 구절이 나온다: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구로하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의 앞에 이러하나이다. 우리가 잉태하고 고통하였을지라도 낳은 것은 바람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생산치 못하였나이다"(사 26:17,18). 옛 이스라엘은 진통을 겪었으나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했다. 그러나 미 4:10에서는 "왜 네가 그토록 크게 부르짖느냐?…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애써 구로하여 낳을지어다. 이제 너는 성읍을 나가서 들에 거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너의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고 예언했다. 이 미가의 구절에는 고통 이외에도 구원을 받기 위해 들판으로 도주하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옛 이스라엘은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이 일을 성취하셨다. "해산하게 되매", 즉 해산의 진통을 겪기 시작한 것은 이스라엘에 이제 곧 구세주가 탄생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옛 이스라엘과 참 이스라엘인 교회를 연결시키는 중대한 매듭이 된다. 즉 본문의 여인은 메시아를 낳게 될 이스라엘이 분명하지만 본 장의 후반절에서 이 여인은 신앙 때문에 핍박받는 교회를 가리킨다(Heinrich Kraft; C.L.Morris).||(c) 갈4:19에서는 교회의 구성원을 위한 바울의 고통스러운 수고에 의해서만 그들이 믿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산고의 고통과도 같은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참조: G.Bertram; R.K.Harrison).
동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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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심을 갖다, ~에 동정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동사 쉼파데오는 쉼파데스($4835)에서 유래했으며, '함께 고생하다, ∼와 같은 것을 겪다, 동정하다'를 의미한다. →$4835 쉼파데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쉼파데오는 70인역본에서 2회 외경에만 나온다. 마카베오사서 13:23을 제외하면 마카베오사서 5:25에서만 사용되었으며, 여기서 신적 율법 수여자는 "우리의 본질을 [동정한다]"고 하였다.||필로에 있어서 쉼파데오는「특별한 율법에 관하여」에서 단 한번 나타나는데, 엘레오스(자비)와 함께 나타난다. 요세푸스에 있어서 '동료의식을 가지다', '참여, 동정하다'를 의미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쉼파데오는 신약성경에서 히브리서에 단지 2회 나타난다.||(a) 히 4:15에서 쉼파데사이 타이스 이스데네이아이스("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는 선재하신 아들이 육신을 취하게한 동기를 언급하지만, 여기에서 의미는 성육신하신 주님의 행위를 지향하는 것, 곧 '동정하다'를 뜻하는 것도, '같은 것을 겪다, 함께 (고난을) 격다'를 뜻하는 것도 아니고, 유혹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결과로 벌어진 상황의 심각성을 층분히 알고 있는데서 비롯된 동료의식을 뜻한다.||(b) 히 10:34에서의 갇힌 자들에 대한 동정은 말과 행실로 보여준 실제적인 도움을 포함한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사도교부들 중에는 이그나티우스가 로마인에게 보내는 서신 6:4에서 쉼파데오('동료의식'이라는 의미로)를 사용해서 자신의 동기와 순교에 대한 촉구를 이해하여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참조: W.Michaelis; J.H.Thayer; B.Gartner).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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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sham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이스퀴네(Theognis, Aeschyl. 이래)는 아이스코스(%545: 수치, 창피)에서 유래했으며,||(a) '수치, 불명예'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수치감'이라는 의미로는 꽤 드물게 사용되었다. 이 단어가 때때로 부끄러워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강조되지만, 대부분 '불명예'(disgrace)를 의미한다. 그 중요한 언급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오는 치욕이다.||(b) 아이스퀴네는 겸손이라는 주관적인 의미를 가지로 있으며, 이것이 아이스크론($149: 추함 ugly, Aristoxenos, Fragment 42a)한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해되었다.||(c) 아이스퀴네는 '부끄러운 행위'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사람이 범하는 '부끄러운 행위'(Eur., Isocr.), 거품과 같이 그들의 '더러운 행위'를 토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Jd 13).||(d) 아이스퀴네는 신들에 관하여 언급하는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아이도스($127)와는 반대로, 본래 사회학적 개념이다. 즉, 수치는 사람을 사회의 조롱거리로 만드는 것인데, 사람은 부끄러워 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아이스퀴네는 70인역본에서 80여회 나오며, '수치'나 '부끄러움'을 뜻하는 히브리 단어들, 보쉬, 부샤 혹은 보셰트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1회). 아이스퀴네는 오로지 여덟가지 경우에서만 히브리어 에르와(외음부 pudenda)를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 외에는 나머지 5개의 히브리어(대부분 수치를 뜻하는 단어)의 역어와 해당 히브리어 없이 나타난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이스퀴네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아이스퀴네는 '수치를 당함 혹은 스스로 수치를 부과시킴'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유 1:2; 고후 4:2). 그리스도는 자신의 십자가상에서의 죽는 공공연한 '부끄러움' 조차도 개의치 않으신다(히 12:2).||(b) 빌 3:19과 계 3:18은 아이스퀴네를 성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n; H. G. 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