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찬
dei'pnon
정식, 중요한 식사, 만찬.||#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데이프논(Homer. 이래)은||(a) 일반적으로 '주식, 정식, 만찬, 중요한 식사, 잔치, 연회'를 의미한다.||(b) 헬라 종교에서 데이프논은 '제의 식사' cultic meal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여기에 참석한 참여자는 자신이 트라페자 투 데우(신의 식탁; 참조: 고전 10:21, 트라페자 다이모니온: "귀신의 상")에 앉아 있다고 믿었고 또한 이 식사를 통해 그는 신과의 친교 관계에 들어간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동료 또는 공유자, 코이노노스(참조: 고전 10:20)가 되는 것이다. 주후 2세기의 옥시린쿠스(Oxyrhynchus) 파피루스에는 "카이레몬(Chairemon)은 당신이 주 사라피스(퀴리우 사라피도스)의 식탁에서 먹도록(데이프네사이) 초대합니다"라는 초청문이 실려있다(P. Oxy. 1, 110). 이 곳에서 사라피스(Sarapis)는 접대하는 주인으로 나타나며 이 제의 식사의 참여자들은 그의 식탁 동료들을 나타낸다.|요세푸스(Josephus)는 로마의 이시스(Isis) 신전에 있는 아누비스(Anubis)의 데이프논(deipnon)으로의 초청에 대해 말한다(Ant. 18, 3, 4). "기초를 이루는 사상은 콤무니오(communio)의 사상인데, 곧 신과 함께 먹는 자들의 결합에 대한 사상이다"(J. Behm, TDNT).||(c) 고대의 종교적인 식사에서, 먹고 마심은 대개 정식의 식사였다. 곧 공적이나 서적 친교의 행동들은 신성한 행위와 연결되었던 것이다(RGG3 Ⅳ 605). 친족들과 씨족들과 종교적인 친교는 신과 그들의 결합을 나타내는 공동 식사를 통해 신의 능력을 할당 받았다. 식사에 관한 신성한 특성의 기원은 마술적 개념들과 연결되는 것이니, 이에 의하면 신은 물질적인 사물들에 구현되는 것이라고 한다(정령 신앙; 식인 풍습에도 이와 유사한 개념들이 발견됨, 참조: RGG3 Ⅲ 1116). 신이 모든 식물에 담겨 있다는 생각(Demeter - Kore)은 신이 생명을 주는 능력을 소유하였다는 관념으로 이어졌다. 이 생명을 주는 능력은 음식을 나누는 자들에게 직접 부여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먹고 마시는 것 이상으로 인간과 인간을, 또한 인간과 신을 결합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참조: E. O. James; F. Bammel)||#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데이프논은 70인역본에서 7회 나오며, 다니엘서에만 히브리어 파트박(진미, 단 1:8, 단 1:13, 단 1:15, 단 1:16)과 레헴(떡, 단 5:1)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단어는 70인역본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못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데이프논은 신약성경에서 1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데이프논은 '만찬', 특히 '대개 저녁에 먹는 정식'을 의미한다(눅 14:17, 눅 14:24; 요 13:2, 요 13:4; 요 21:20; 복수형: 마 23:6; 막 12:39; 눅 20:46).||(b) 데이프논은 하늘나라의 구원을 상징하는 메시야의 잔치에 대해 사용되었다(계 19:9, 계 19:17).||(c) 데이프논은 일반적으로 '저녁에 먹는 음식'을 의미한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이는 시장하고 어떤이는 취함이라"(고전 11:21).||(d) 데이프논은 '주의 만찬'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고전 11:20). 여기서만 "주의 만찬"(퀴리아콘 데이프논)이란 표현이 나온다. 의미에 있어서 주의 만찬은 "주의 상"(트라페자 퀴리우)이라는 어구와 밀접하게 관련된다(고전 10:21). 이 두 구절은 모두 주(Lord)라는 용어가 주의 만찬의 전통과 주의 만찬이라는 용어에서 확고하게 확립되었음을 나타낸다(참조: 고전 10:22; 고전 11:27, 고전 11:31이하). 주의 만찬에 관한 제도는 네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었다(막 14:22-25; 마 26:26-29; 눅 22:15-20; 고전 11:23-25). 많은 학자들은 이 제도에 대한 본문이 이렇게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기자 자신들이 속해있던 각각의 공동체로부터 그 의식에 관한 자료를 위임 받아 묘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참조: J. Jeremias).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러한 제도에 대한 말씀은 기도식문의 부류에 속한 것이며, "각 형태의 배후에는 기념하는 회중을 위한 의도가 있다"(G. Bornkamm).|(참조: J. Behm; B. Klapp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