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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맑은
diafanhv"
투명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디아파네스(Aristoph., Hippoocr. 이래)는 디아파이노(%254: 통하여 보이다)에서 유래했으며, '투명한, 명료한'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디아파네스는 신약성경에서 계 21:21에 한번 나오며, '투명한'을 의미한다: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보다 귀하다
diafevrw
~을 통하여 나르다, 퍼지다, 유포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디아페로는 디아($1223)와 페로($5342)에서 유래했으며,||(a) '전달하다, ~을 통하여 나르다'(Thuc.), 뉴스를 '퍼뜨리다, 유포하다'(Eur.),||(b) 배를 앞 뒤로 '몰아가다'(Philo.),||(c) '자신을 구별하다'(Eur., Thuc.), '뛰어나다, 돌출하다, 더 크다'(Thuc., Pla.), '더 적다, 뒤지다'(Xenoph.), 유사하게 비인칭에서 '차별하다, 상이점이 있다, 중대(요)하다'(Hippocr.)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디아페로는 70인역본에서 약 20회 나오며, 히브리어 셰나(8133)의 역어로 사용되어 '다르다'(단 7:3; 단 7:23 이하; 단 7:28)를 의미한다. 그리고 해당하는 히브리어 없이 디아페로는 '전달하다'(IES, 5:53), '가져가다'(삼상 17:39), 소문이 '퍼지다'(마카베오이서 4:39), '나누어지다, 멀리하다'(지혜서 18:2), '널리 퍼지다'(지혜서 18:10), '자신을 구별하다'(잠 20:2; 잠 27:14), '돌출하다, 현저하다'(에 3:13; 마카베오이서 15:13), '분리되다, 사이가 멀어지다'(마카베오이서 3:4)를 의미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디아페로는 신약성경에서 1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디아페로는 막 11:16에서 '~를 통하여 나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전의 바깥뜰에서 예수님의 사역에서 예수께서는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셨다.||(b) 디아페로는 행 13:49에서 '퍼지다, 유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소아시아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첫번째 전도 여행에서 설교의 성공은(참조: 행 13:14-행 13:43) 이방인의 회심에 의해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참조: 행 13:48) "주의 말씀"이 회심자들 가운데서 보다 큰 유익을 낳았으며 "그 지방에 '두루 펴졌다'"(행 13:49)는 사실로써도 나타난다.||(c) 디아페로는 자동사로 별빛에 대한 단순한 비교에서 '다르다'는 의미를 지닌다: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d)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 단어는 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적하는 데에 사용된다.|① 마 6:26(병행구 눅 12:24),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찮은 새들도 하나님께서 돌보심으로부터, 필요한 것을 "아시는" "천부"되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에 있어서 피조물 가운데 우월의 순위로부터 그러한 결론이 도출된다(마 6:32 하반절; 병행구 눅 12:30 하반절).|② 보다 적은 것에서 보다 큰 것을 이끌어 내는 이러한 결론은 마 10:31(병행구 눅 12:7)에서도 마찬가지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제자들(마태복음에서는 파송받는 열 둘)을 "많은 참새 '보다 귀하다'"고 했을 때, 이 말은 두려움 없는 신앙 고백의 권고를 표현한다. 우스우리만큼 적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참새 한 마리까지라도 하나님께서 "잊지" 아니하실진대 하물며 예수님의 제자들을, 특히 세상의 삶의 위험 속에 처해 있는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시랴.|③ 마 12:12(참조: 막 3:1-막 3:6)에서 이와 유사하게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생명은 양 한 마리를 포함하여, 재산 '보다 귀하다'고 단언하시고, 안식일에 병고치는 일을 허용하신다.||(e) 디아페로는 갈 4:1에서 '더 크다'나 '~와 다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바울은 믿는 자들의 신분을, 약속의 성취 이전에 아들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아들들" 및 "상속자들"(유업을 이을 자)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묘사한다. 그는 "아직 나이가 차지 않은 상속자", "종 '보다' 낫지(JB: '다르지') 아니한"이라는 비유를 사용하는데, 이 비유는 법률 영역에서 끌어온 것이다.||(f) 디아페로는 갈 2:6에서 '상이점이 있다, 중대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이 괄호 안의 구절에서 바울은 그의 대적자들과의 논쟁에서 그의 사도적 사역의 독립성의 근거를 제시한다. 여기서 그는 예루살렘의 유명한 자들(호이 도쿤테스)과 관련하여, 단지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에 관하여 사도 회의에서 결정한 바를 알리기 원했을 뿐이다(참조: 갈 2:3; 갈 2:7-갈 2:9). 이 도쿤테스("유명한 이들")에게 호소하기를 꾀하는 어떤 더 이상의 문제에 대한 논의도 내게는 '중대하지' 않다, 내게 '상관이 없다' 내게는 '중대하지' 않다는 의미를 함축한다는 견지에서 바울은 차단했다.||(g) 빌 1:10에서 타 디아펠론타(분사)는 절대적으로 차이를 나타내는 것,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나타낸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이 단어는 롬 2:18에서 유대인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바울의 변론에서 나온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저들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한 지식에 근거하여 타 디아페론타, 즉 '탁월한 것'(롬 2:18, "지극히 선한 것")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타 디아페론타를 인식하는 능력은 복음에 기초하고(참조: 빌 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중재하는(빌 1:8)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날까지"(참조: 빌 1:10), 실제적 종말론적 확증으로서 사도에 의해 강조되는 것이다(참조: 빌 1:10a).|(참조: L. Oberlinner; K. Weiss).
도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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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디아퓨고(Hdt. 이래; Dit., Syll. 등)은 디아($1223)와 퓨고($5343: 달아나다, 도망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빠져 달아나다, 도망하다, 도피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디아퓨고는 신약성경에서 행 27:42에 한번 '도망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널리 퍼지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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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디아페미조는 디아($1223)와 페메($5345: 말, 진술, 소문)에서 유래했으며, '널리 퍼뜨리다, 널리 퍼지다, 소문(또는 소식)을 내다(퍼뜨리다), 알리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디아페미조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마 9:31에서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퍼뜨리거나 알리는 것'을 나타낸다: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b) 막 1:45에서 '널리 퍼뜨리거나 퍼지게 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c) 마 28:15에서 수동태로 '널리 퍼지는 것'을 나타낸다: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깨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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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하다, 파멸시키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디아프데이로(Homer 이래)는 디아($1223)와 프데이로($5351)에서 유래했으며, '좌절시키다'(도우려는 시도들을), '(마음을) 바꾸다, 약하게 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디아프데이로는 70인역본에서 약 91회 나오며, 주로 샤하트(멸망시키다, 파괴시키다, 부패시키다)의 역어로(51회) 사용되었다. 디아포데이로는 부패하는 것(렘 13:7), 고갈시키는 것(삿 16:7), 멸하는 (자)(삼하 24:16), 황폐시키는 것(사 49:19), 비워두는 것(사 32:6) 등을 의미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디아프데이로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온다.|눅 12:33에서 좀이 옷을 상하게 하는 것을 나타낸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고후 4:16에서 겉사람은 죽은 과정을 체험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딤전 6:5에서 타락한 마음을 표현한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계 8:9에서 '파선'을 표현한다: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계 11:18에서 디아프데이로가 반복 사용되었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 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전자 디아프데이로는 인류를 타락시키는, 또는 유혹케하는 자들에 관련되고, 후자 디아프데이로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파괴나 멸망을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G.Harder; F.Merked ).
썩음
diafqorav
파멸 destruction , 썩음, 부패 corruptio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디아프도라(Aeschyl., Hdt. 이래)는 디아프데이로($1311)에서 유래했으며, '멸망, 살인'을 의미하며, 후에는 '부패, 무질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디아프도라는 70인역본에서 약27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샤하트(파멸이나 파괴시키다, 부패시키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디아프도라는 신약성경에서 6회, 사도행전에만 나온다. 행 2:27; 행 2:31; 행 13:34 이하에 있는 시 6편의 인용문 안에 있는 디아프도라는 '부패'라는 의미를 지닌다.|(참조: Walter Bauer; G.Harder ; F.Merked).
더 아름다운
diavforo"
다른, 탁월한, 우수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디아포로스(Hdt. 이래; POxy.)는 디아페로($1308)에서 유래했으며,||(a) '다른, 종류가 다양한' different, varying in kind(Hdt.) 등.|(b) '탁월한, 우수한, 훌륭한' excellent, surpassing([Diod.], Polyb., Plut. 등)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디아포로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디아포로스는 롬 12:6; 히 9:10에서 '서로 다른, 종유가 다양한'이란 의미를 나타낸다.||(b) 디아포로스는 히 1:4; 히 8:6에서 '탁월한, 우수한'이란 의미를 나타낸다.|(참조: J.H.Thayer).
지키게 하다
diafulavssw
주의 깊게 지키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디아퓔랏소(Hdt. 이래)는 디아($1223)와 퓔랏소($5442: 망보다, 지키다, 파수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주의깊게 지키다, 주의깊게 파수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디아퓔랏소는 약 30회 나오며 특히 하나님의 섭리적 돌보심에 대해 사용되었다(창 28:15; 수 24:17; 시 90:3 등).||#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디아퓔랏소는 신약성경에서 눅 4:10에 한번 나오며, '주의깊게 지키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디아케이리조마이
diaceirivzomai
난폭하게 손을 대다, 죽이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디아케이리조마이(Andoc., Lysias 이래)는,||(a) '손으로 처리하다, 폭행을 가하다, 난폭하게 손을 대다, 죽이다, 살해하다',|(b) '관리하다, 지배하다, 다스리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디아케이리조마이는 신약성경에서 사도행전에만 2회 나온다.||(a) 행 5:30에서 너희가 '죽인' 예수님에 대해 사용되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b) 행 26:21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한 것'을 나타낸다: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255 (디아클류아조, 1315 b)|조소하다, 조롱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디아클류아조(Demosth. 등)는 디아($1223)와 클류아조($5512: 조롱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조소하다, 조롱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디아클류아조는 신약성경에서 행 2:13에 한번 나온다: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디아클류아조
diacleuavzw
조소하다, 조롱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디아클류아조(Demosth. 등)는 디아($1223)와 클류아조($5512: 조롱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조소하다, 조롱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디아클류아조는 신약성경에서 행 2:13에 한번 나온다: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디아코리조
diacwrivzw
떠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디아코리조(Aristoph. 이래; X., Pla.)는 디아($1223)와 코리조($5563: 분리하다, 나누다)에서 유래했으며,||(a) '완전히(철저히) 분리하다',|(b) 수동태 현재 '스스로 분리하다, 떠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디아코리조는 신약성경에서 눅 9:33에 한번 나오며 '떠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가르치기를 잘하는
didaktikov"
가르치기를 잘하는||#1.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이 형용사는 디닥토스($1318: 가르친)에서 유래했으며, `가르칠 수 있는, 가르치기를 잘 하는'를 의미한다. 신약성경 밖에서 이 단어는 오직 필로의 저술에만 나오며, 여기서 이 단어는 아브라함의 지식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2.신약성경의 용법.||신약성경에서 디닥티코스는 딤전 3:2과 딤후 2:24에만 이 의미로 나온다. 디닥티코스는 감독의 필요 조건들 중의 하나이다.*
가르친
didaktov"
가르친||#1.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디닥토스는는 디다스코($1321:가르치다)에서 유래했으며, Pindar 때부터 다음과 같은 3가지 의미로 나타난다.||(a) 가르친,|(b) 배운, 학식있는,|(c) 가르칠 수 있는.||#2.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디닥토스는는 요6:45(사54:13의 인용)에서 독립적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가르침".|고전2:13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디닥토스("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는 바울이 자기의 독특성을 그의 가르침의 근원과 관련시키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가르치는 것
didaskaliva
가르침,교훈,교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디다스칼리아는 디다스칼로스($1320:교사, 선생)에서 유래하였는데, 이 단어는 헬라적 의미에서 교사가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핀다르(Pindar) 이래로 `가르치는 행위'를 포함하여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단어는 또한 `가르쳐진 것' 즉 교설, 또는 `가르침을 받는 것' 즉 수업 따위의 수동적 의미로도 사용되었다(참조: E.Reisch, Pauly-Wissowa v 394f). 그리고 연극, 합창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필로는 종종 이 단어를 실물교수를 가리켜 사용하였다. 이 단어는 확실한 지적 성격을 지닌다.||#2. 70인역본의 용법.||이 단어는 70인역본에서 4회 나온다. 잠 2:17에서는 알라프(동료)의 역어로, 그리고 집회서 21:33; 39:8에 사용되었다. 이 3개 구절에서 디다스칼리아는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되는 `율법'을 의미한다. 사 29:13에서는 멜룸마다( 가르쳐진 것)의 역어로서 사용되었다. 70인역자들이 원문의 단수형을 복수형으로 바꾸어 번역한 이 구절에서 디다스칼리아는 절대성을 주장할 수 없는 `사람의 가르침들'을 의미한다. 이 사람의 가르침은 매우 중구남방이라는 점에서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과 구별되어야 한다.|70인역본에 디다스칼리아가 드물게 나오는 이유는 일반 헬라어에서 이 단어의 기본 의미가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지적 가르침을 뜻하는 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르침(교훈)을 오직 그 특유한 응답이 순종으로 되어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사실에 있다.||#3. 신약성경의 용법.||신약성서에서 디다스칼리아는 모두 21회 나오는데 그 중 l5회가 목회서신에서 나오고,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2회 나온다. 디다스칼리아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신약성경의 후기 문서에서이다.||(a) 사 29:13(70인역본)을 인용하고 있는 막 7:7; 마 l5:9에서 디다스칼리아스는 복수로 나오며,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가르침에 대하여 사용된 것이었다. 위의 이사야서 인용문은 골 2:22에서 유대화를 주창하는 가독교 영지주의자들의 교설을 표현하는데도 사용되었다(G.Bornkamm). 이와 유사하게 딤전 4:1에는 미혹과 오류의 영에 관한 내용만이 아니라 귀신(demons)의 가르침에 관한 내용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디다스칼로스의 복수가 사용된 것은 70인역본의 용법을 따라,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다른 가르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b) 엡 4:14에서 에베소서 기자는 기독교인들의 영적 분별력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모든 교훈[디다스칼이아스]의 풍조에 밀려 요동한다"라는 말로 묘사한다. 여기에서 요지는 가르침이라 주장하는, 즉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변덕스러운 풍조들에 대해 우리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리(교훈)는 개인적인 오류가 아니다.||(c) 신약성경에서 그 외에 디다스칼리아가 사용될 때는 언제나 단수형을 취한다. 롬 l2:7에서 이 단어는 `가르치는 직책'을 의미한다. 이런 가르침은 공동체에 도움이 된다. 롬 15:4에서는 3절에서 인용된 바 있었던 시 69:9의 기능, 즉 기독교인들에게 주는 `교훈의 기능'을 표현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의 교훈을 위해 쓰여진 것이다.||(d) 디다스칼리아의 사용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복음서나 다른 서신(6회)에 비하여 목회서신에 많이 사용되었다. 딤전 1:10; 딤후 4:3; 딛 1:9; 딛 2:l에서 이 단어는 휘기아이누사(건전한, 바른)라는 단어의 수식을 받고 있으며 확정된 '정통적 교설'이라는 의미로, 교회는 이 교설을 받아들여 이설(異說)에 대항하여 그것을 지키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였다. 이 바른 교훈은 하나님의 구원 행동과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구원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을 의미한다.|이와 같이 확정된 교리적 전통은 딤전 6:3에서는 헤 카트 유세베이안 디다스칼리아(경건에 관한 교훈), 딤전 4:6에서는 칼레 디다스칼리아(선한 교훈), 그리고 딤전 4:l6에서는 단지 디다스칼리아(가르침)로 불리워진다(참조: 딤후 3:10). 딤전 4:l에서 이 단어는 '행위'를 나다낸다(참조: 딛 2:7; 딤전 5:l7). 딤후 3:16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즉,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유일한 책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며, 끝으로, 딛 2:l0에서 노예들은, 저들의 행위로써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해야 한다는 권고를 받고 있다(참조:딤전 6:1).|목회서신에서 디다스칼리아가 자주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70인역본의 번역자들이 지켜왔던 금기로부터 자유를 보여준다. 그들은 기독교의 교설을 디다스칼리아, 디다케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끊임없이 새롭게 선포되어야 할 복음과,배우고 순수하게 보존되고 이단(heresies)에 대항하여 방어되어야 할 교리 사이에 아무런 긴장도 없었다.|(참조: K. H. Rengstorf ; K. Wegenast).
교사
didavskalo"
교사 teacher||#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명사 디다스칼로스(Homer 이래)는 디다스코($1321: 가르치다)로부터 유래한 작위명사(nomen agentis)로서, '교사, 가정교사'라는 의미로 헬라어 문헌에서 널리 사용되었다(예: Homer,Hymnus ad Mercurium 554이하; Aesch., pv llO 이하; plato, Prt. 326 c; Epictetus, Enciridion l7).|이 단어는 초등학교 교사로부터 시작해서 가정교사, 철학자, 그리고 공연을 위해 시가를 연습시켜야 하는 합창단 지휘자를 칭할 때 사용되었다. 시인은 그의 활동이 합창하는 시(詩)든 비극이든 자신에 대해 디다스칼로스라고 불렀다.|이 단어는 처음부터 합리적이고 전문적인 요소가 강하였다. 여기에 기술의 가르침과 소질 계발도 특별히 포함된다. 이 단어는 지식이나 기술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일에 정식으로 종사하는 모든 사람을 두루 지칭한다. 보기로 필로는 이 단어를 율법을 전해준 모세와 나병에 관해 가르치는 제사장 뿐만 아니라(Gig.54)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도(Rer.Div. Her. 1O2 등등) '교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두 경우에 그는 지식을 전달해 주는 사람을 교사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윤리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사람을 교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b) 디다스칼로스의 특성이 그 용법에 끼친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교사의 활동이 특정한 분야에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디다스칼로스라는 단어는 자주 그가 가르치고 있는 내용에 따라 더욱 엄밀하게 정의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왜 소크라테스가 이 단어를 거부하고, 에픽테투스가 이 단어를 받아들이고, 70인 역본이 대부분의 경우에 이 단어를 기피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플라톤의 변증(Apologia, 33ab)에서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진술들이 구속력 있는 체계로 만들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디다스칼로스로 불리우기를 거부하는 것 같다. 그는 지적인 것을 경멸하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을 이것을 초월하여 도덕적 행동에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는 또한 이런 일을 모든 사람을 위해 행하려고 하였으며 따라서 학파 형성을 거부하였다.|- 반대로 에픽테투스는 디다스칼로스로 일컬어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학계의 교사로서 자기의 추종자들이 완전해지도록 돕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완성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선생이라고 실제로 자처하였다(Dissertationes 1. 9. 12).||#2. 70인역본의 용법.||7O인역본에서 디다스칼로스는 단지 2회 나온다. 에 6:1에서 이 단어의 의미는 '읽는 자'(reader)이고, 넓은 의미에서 아마도 내시들의 교육을 맡은 시신(slave)을 의미할 것이다.|그렇지만 마카베오이서 l:10에서 이 단어는 이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다. 여기에서 마카베오 공동체는 대제사장 가문들 중의 한 가문에 속하고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의 수령인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에게 글을 쓰고 있는데, 그를 프톨레미 필로메터 왕(King Ptolemy Philometor)의 디다스칼로스라고 불렀다. 그 칭호는 그 왕이 수여한 것이 아니고 아리스토불루스가 그 왕에게 모세오경 주석을 헌정한 일에서 그것을 해석하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이 부여한 것이다. 아리스토불루스는 그 왕에게 율법을 해석하였기 때문에 왕의 디다스칼로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여기에서 디다스칼로스가 율법 교사를 의미하는 용법은 이제까지 우리가 논의해 왔던 이 단어의 여러가지 의미와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용법은 일반 헬라어 용법이나 필로의 용법(디다스칼로스를 지식을 전달해 주는 사람 또는 가정교사로 의미하는 것)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및 히브리어 동사 라마드에 기초하고 있다. 이 라마드는 '배우다, 가르치다'를 뜻하며, 그 목적으로 '실천하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70인역본에 이 단어가 드물게 사용된 이유는, 히브리어 성서의 번역자가 헬라적 칭호인 디다스칼로스는 율법 교사를 가리키는 용어로서는 적당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만이 아닌 것같다. 디다스칼로스에 상당하는 히브리어 모레(1475)도 역시 드물게 사용된데다가 그나마 단 한번 잠 5:13에서 분사 디다스코(가르치는)로 번역되었다. 그밖의 다른 구절에서 이 히브리어 단어는 플라논테스(유혹자, 사 30:20에서 2회), 플라사스(조각가, 합 2:l8), 브로마다(음식, 욜 2:23) 따위의 다른 단어로 번역되었다. 구약성경에 이질적인 것은 '교사' (teacher)라는 단어가 아니라 그 개념이다. 그 까닭은 구약성경이 지식의 전달보다는 율법에의 복종을 더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리스도가 지상에 계실 때 유대교에서 랍(rab) 또는 랍비(rabbi)는 토라를 해설하며 율법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을 과업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제자들(탈미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제자들은 스승의 성경 해석과 판단을 공부하며 스승을 존경하고 그에게 복종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제자들은 보통 자기 선생을 랍비(나의 선생님)라고 불렀으며 접미어가 붙은 이 어형이 바로 주후 1세기에 오직 공식적으로 임명된 율법 교사를 가리키는 용어로서만 사용되었다(참조: K. H. Rengstorf; K. Wegenast).||#3. 신약성경의 용법.||1. 디다스칼로스의 용법.|(a) 명사 디다스칼로스는 신약성경에서 58회 나온다. 그 중 48회는 복음서에서 나온다(요 8:4을 계산하지 않는 경우).|① 복음서에서 이 단어는 예수님에 대해 41회 사용되었는데, 그 중 29회에서 예수님을 직접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되엇다.|② 그리고 7회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되었다. 눅 3:12에서 백성들이 요단 강변에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는 세례(침례) 요한을 "선생"이라고 부른다.|요 3:10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부르신다. 눅 2:46에서는 "선생들 중에 앉으사"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는 소년 예수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끝으로 마 10:24 이하와 눅 6:40에는 마데테스(제자)와 디다스칼로스의 관계에 관한 기본적인 선언이 언급되어 있다.|③ 복음서의 용례와 그밖의 모든 용례에서 그 용법은 서로 일치한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초기 기독 공동체에서 주도적인 집단인 디다스칼로이에 관한 언급들이다(행 13:1; 고전 12:28 이하; 엡 4:11; 참조: 약 3:1).|딤전 2:7; 딤후 1:11에서 기자는 자신을 디다스칼로스 에드논 혹은 단순히 디다스칼로스라고 부른다.|다른 세 구절들에서 이 단어는 본문으로부터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롬 2:20; 딤후 4:3; 히 5:12).||(b) 신약성경에서 디다스칼로스의 용법을 통해 드러나는 첫째 요점은 예수님이 디다스칼레로 지칭될 때 이 용어가 퀴리오스($2962)와는 달리 어떤 위엄의 속성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디다스칼로스가 요한에게(눅 3;12), 혹은 성전에 앉아 있는 디다스칼로이에게(눅 2:46), 혹은 심지어 거짓 교사들의 무리에게(딤후 4:3) 적용된 것은 디다스칼로스가 예수님에 대해 사용되었을 때조차도 분명한 한 사실만을 나타낸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누가가 이 단어를 사용하여 한편으로 요한을 지칭하고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을 지칭할 때 누가가 다른 의미에서 사용한다고 결코 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임은 복음서에서 디다스칼로스가 사용된 구절들로부터 아주 쉽게 알 수 있으며, 이 단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된 구절들로부터 가장 잘 알 수 있다.|예수님 자신(마 10:24 이하와 병행구)이 마데테스(제자)와 디다스칼로스(선생)를 대조하신다. 전자는 그의 목적과 한계 양자 모두를 후자와의 비교를 통하여 배워야 한다. 이것으로 예수님께서 랍비의 생도와 그 스승과의 관계를 묘사하며, 자기와 자기의 추종자 사이에 실재하는 관계에 적용한다. 요 3:10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부르셨을 때 문맥은 특별한 철학적 능력을 염두에 두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준다. 사람들이 율법과 선지자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뜻에 대한 탁월한 해석자로서 그를 존경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그를 예우하시는 것이다.|눅 3:12에서 세리들이 세례(침례) 요한의 회개의 외침에 마음이 움직여 세례(침례)를 받고자 할 때 요한에게 이렇게 묻는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그 호칭과 질문 양자 모두 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요한의 지식에 근거하여 요한이 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가장 모호한 언급은 눅 2:46의 다디스칼로이이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그러나 여기서 디다스칼로이도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볼 때 율법에 대해 제기되는 질문들에 답하는 일을 하는 서기관들이라고 추론할 수도 있다.|이와 같이 디다스칼로스가 예수님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된 복음서의 네 다섯 구절에서는 용법의 일관성을 가진다. 이 단어는 그 의미의 내용이 림메드(가르치는)에서 파생한 70인역본과 신약성경의 디다스케인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환언하면 디다스칼로스는 '토라로부터 하나님의 길을 지시하는 자'이다. 이것은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첫째, 우리는 예수님이 디다스칼로스로 묘사될 때 동일한 용법이 어디까지 적용하는지 고찰해야 하고, 그러므로 예수님과 관련하여 이 용어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다른 본문들이 복음서에서와 같은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지를 고찰해야 한다.||2. 디다스칼로스로서의 예수님.|(a) 예수님이 디다스칼레라는 호칭으로 불리웠다는 것은 그가 유대인의 디다스칼로이의 모습과 외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복음서에 나타난 디다스코($1321)의 용법에서 이미 우리는 예수님이 기본적으로 그의 가르침의 형태와 내용 두 면에서 서기관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다. 단순히 때때로 가르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디다스칼로스가 되는 것은 디다스칼로스 주변에 모이는 제자들이 있다는 특징을 요구한다.|예수님과 요한의 경우에(요 1:35 이하)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말에 감동을 받아서 스스로를 생도와 제자들의 위치에 두었다는 사실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 디다스칼로스로서의 결정적인 조건이 외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들에게 디다스칼로스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으며, 그들을 디다스칼레라고 불렀으며, 그들을 백성들의 교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디다스칼레라는 호칭이 실제로 이러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요 1:38에서 입증된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이 구절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랍비로 부르는데, 이 형태의 호칭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디다스칼레로 번역하였다(참조: 랍부니, 요 20:16).|예수님은 또한 마 26:25, 막 9:5, 막 11:21, 요 4:31, 요 9:2, 요 11:8에서 그의 제자들에 의해, 요 3:2에서 니고데모에 의해, 요 1:49에서 요한의 제자들에 의해, 요 6:25에서 열광적인 군중에 의해, 마 26:49, 막 14:45에서 체포 당하실 때 유다에 의해 랍비로 불리운다. 하지만 디다스칼레가 교사를 가리켜 모호하지 않게 사용되는 반면에 랍비는 어떤 지위가 높거나 고귀한 인물에게 적용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 용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된다.||복음서는 매번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가 랍비의 생도들과 교사들(masters)의 관계에 일치하며 군중들이 예수님을 교사들에게 상응하는 존경으로 대했음을 분명히 한다. 제자들을 마데타이(히, 탈미딤)로 묘사하고 아콜루데오($190: 따르다)를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애착(attachment)에 대해 사용한 것은 후기 유대교의 어법을 따른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그를 섬기는 방식은 당시의 관습과 일치한다. 생도는 랍비의 신발을 가져오고(T. Neg. 8, 2), 필요할 때 그를 도우며(bJeb., 42b), 그 앞에서 길을 준비하고(bket., 63a), 그의 나귀를 몬다(T. Chag., 2.1). 더 후기의 언급에서는(bkeb., 96a; R. Joshua b. Levi, c. 250A.D.) 신발을 벗기는 것 외에도 종이 주인에게 행하는 모든 일들을 생도가 그의 주인인 교사에게 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이 가운데 발을 씻기는 것도 포함되는지는 특별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제자들이 서로에게 행해야 할 일들 가운데 포함된다고 하셨으며, 위대한 랍비들이 유사한 경우를 당했을 때와 같이(예: 12:30에 대한 S. Dt., 38) 그들로부터 동일한 종류의 반대에 부딪혔을 때(요 13:8) 친히 본을 보여 주었다(요 13:1 이하).|예수님의 제자들은 배를 젓는 일을 하였으며(막 4:35 이하 및 병행구), 또 무리를 먹일 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막 5:37 이하 및 병행구; 막 8:6과 병행구). 그들은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당나귀를 얻어왔으며(막 11:1 이하) 유월절을 위해 준비하였는데(마 26:17 이하), 이 일에는 종종 노예들에게 맡겨진 어린양을 잡는 일도 포함되었다(참조: Pes., 8, 2). 이 모든 것은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위치가 진실로 당시의 디다스칼로스, 생도들 가운데서 랍비의 위치와 같았음을 보여준다.||예수님을 이와 같이 대접한 것은 비단 제자들 뿐만이 아니라 군중들도 이런 식으로 그를 영예롭게 하였다.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에 백성들은 교사를 심지어 부모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 둔다. 교사는 자기 아버지보다 앞에 설 뿐만 아니라(BM, 2, 11), 만약 교사가 아버지라면 아들 앞에 선다(bQid., 33b). 아키바(Akiba)가 유명한 사람이 되어 학교에서 왔을 때 장인과 아내가 그의 발에 존경의 입맞춤을 하였다고 한다(bket, 63a). 또 이스마엘(R. Ishmael)의 어머니는(d. c. 135) 그의 아들이 회합을 마치고 와서 그녀가 사용한 물을 마시고자 했을 때 아들의 발을 씻기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는 제 5 계명에 근거하여 이것을 금했으나, 그의 어머니는 이것을 금하는 것은 사실상의 위반으로, 이 행위에서 자기 아들을 통하여 그녀 자신이 영화롭게 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jPea, 15c, 41 이하).|베드로의 장모가 고침 받은 후 예수님께 행한 봉사(마 8:15)와, 물질로 예수님을 섬기고 따른 여자들(눅 8:3; 참조: 마 27:55와 병행구)이나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 마르다(눅 10:40)가 예수님께 행한 봉사는 위와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이것은 식탁에서 섬기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으나, 그것이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사실이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영예롭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언급되며 위대한 랍비들의 경우에서 유사한 예를 발견할 수 있다.|이러한 노선에 따라 디다스칼로스이신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예수님 당시의 관습에 일치하며,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에게 적용된 디다스칼로스는 후기 유대교의 랍비와 명백히 연관된다.|요세푸스는 디다스칼로스를 초보 교사에 대해 사용하지만, 또한 율법을 연구하는, 즉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을 연구하도록 이끌고 그것으로부터 행동의 규칙을 취하는 자들에게도 이 용어를 사용한다. Vit., 274에서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의 사자들은 그들이 단순히 그의 동료 시민들이지만 그의 디다스칼로이라고 자랑한다.||(b) 예수님에게 적용된 호칭 디다스칼로스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예수님께서 어떤 의미에서도 디다스칼로스, 랍비로서의 새로운 비범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백성들의 귀와 눈을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과 그 구속력있는 능력을 향해 열게 했을 때 취하신 방법은 평범한 방법이었다.|예수님은 또한 인정을 받으셨다. 심지어 서기관 무리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참되시며($227)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지적해 내셨다는 인정을 받았다(마 22:16과 병행구; 참조: 막 12:32; 요 3:2). 만약 교사로서의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어떤 반대가 있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가르침의 집단으로부터 규정된 교수 과정 내지는 인정된 권위를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요 7:15; 마 13:35과 병행구).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는 그의 죽음을 초래한 갈등을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힐렐과 샴마이 같은 학파를 세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평범한 토론 방식을 통하여 서기관들과 함께 그의 차이점에 대해 토의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노선에 따라 그의 견해를 확립하려 시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어떤 걸림돌을 제공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럭저럭 견디어 인정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을 취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위임하신 대의(cause)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예수님은 힐렐과 샴마이의 견해와 맞지 않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인간의 대의(cause)로 삼았다.|예수님은 논의할 수도 없었고 논의하려 하지도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시고 그에 대해 듣고 그를 만난 모든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감동을 준 절대성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분리될 수 없었다. 이 주장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것은 디다스칼로스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전통적인 형식과 선포를 넘어서서 새로이 직접적으로 다루는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의 노선을 다시 취한 그 점에서 일어난다. 그렇지만 그는 선지자 이상이신 분이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시의 보수적인 종교와 인간 중심적인 도덕률에 반대하여, 선지자들의 아마르 예호와(여호와의 말씀), 네움 예호와(여호와의 말씀)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내가 오직 너희에게 말한다"(에고 데 레고 휘민)고 하시며, 이것은 일개 대변자로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하나이신 그의 뜻의 책임있는 담지자로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음을 청중들에게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노모스($3441: 율법)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처음으로 친히 성취하시는 자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밝히시고 또 그것을 초월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제공하기까지 하신다(마 5:17; 마 5:20). 왜냐하면 그는 아들(The Son)이시기 때문이며, 요한의 말대로 그의 가르침은 그람마테이스와 기타의 가르침과 다르기 때문이다. 형태와 내용상 유사한 것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까지 있었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다.||(c) 따라서 디다스칼로스가 예수님에 대해 사용될 때, 그의 인격으로 인해 다른 곳에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로운 가치를 부여 받게 된다. 우리는 감히 이 단어가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인상지운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새로운 모세는 율법을 국가적 한계로부터 해방시키고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예수님의 권위와 위엄 양자 모두를 나타내준다. 이리하여 우리는 공관복음에서 최후의 만찬을 위해 필요한 방을 구할 때 디다스칼로스가 누구인지 지적해주는 자세한 지칭 없이 호 디다스칼로스 레게이라는 문구로 충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마 26:18과 병행구). 또 예수님의 죽음 이후 디다스칼로스라는 명칭을 제자들이 전유하지 못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도들과 같이 성경 연구를 직업으로 한 그러한 유대교 집단의 새 지도자가 랍비/ 디다스칼로스로 불리우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이상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이 용어는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도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나중에 폴리캅이 종교적인 의미로 디다스칼로스를 사용했다면(Mart. Pol., 12, 2; 16, 2; 19:1), 그의 시대의 교사들과 첫 시대의 교사들 사이에 분명한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후자에게는 마 23:8의 완전한 규칙이 적용된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그것은 단순히 예수님과 나란히 혹은 예수님 아래 어떤 종교적 권위도 인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말씀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 만이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께로부터 알려지게 되었을 때 "모세의 제자"라는 것 조차도 잘못이다(요 9:28). 예수님은 완전한 디다스칼로스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모세가 그 안에서 자신이 성취되었다고 보는 그 분이시다(요 5:45 이하). 따라서 구원을 찾는 인간에게 유일한 가능성은 디다스칼로스이신 예수님에게 귀기울이는 것이요 그의 마데테스가 되는 것이다.||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선포에서 이 칭호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말씀(어록)의 집합체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독교 메시지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과 조화를 이룬다. 단지 기독교의 지성화의 발전과 더불어 비로소 다시금 디다스칼로스인 예수님이 언급된다. 그러나 이제 이 용어는 처음의 제자들에게 지녔던 랍비라는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고 철학적인 학파의 창설자라는 의미에서 사용된다. 비록 여전히 절대성에 대한 주장의 개념은 포함되어 있을지라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후기 사도 교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예컨대 Barn. 2, 6에서 예수님은 카이노스 노모스를 가져오셨다고 하며, 2Cl. 3.1에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의 중보자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디다스칼로스라는 용어는 Ign. Eph. 15, 1에서만 발견된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께 적용되는 것이라면 그는 변증가들에서만이 디다스칼로스의 자리를 부여받는다(참조: Just. Apol., I, 4, 7; 12, 9; 13, 3 등).|||3.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디다스칼로이||우리가 사도행전(행 13:1)과 서신들에서(고전 12:28 이하; 엡 4:11; 참조: 약 3:1) 그리스도인 디다스칼로이를 읽을 때 이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 초기 그리스도교 및 후기 유대교 용법을 벗어나거나 헬라 세계로부터 조명을 구할 필요가 없다.||(a) 약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이 구절에서 만일 이 서신이 초기의 것이거나 랍비 유대교의 범주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 상황은 가장 분명하다. 그 경우 이 단어는 분명히 율법의 올바른 이행을 가능케하는 율법 해석자를 나타낼 것이다. 문제는 그 가정(assumptions)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서신에서 헬라 용법을 제안할 만한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야고보서의 소피아는 이론적인 것이라기보다 실질적인 것이며, 따라서 분명 헬라적 성격을 가진다기보다 랍비적이기 때문이다.|히 5:12에는 이미 "교사"가 된지 오래이지만 아직도 믿음의 초보를 배울 필요가 있는 기독교인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딤후 4:3에서 이 단어는 이단자들에게 풍자적으로 적용된 듯하다.||(b) 고전 12:28에서 디다스칼로이는 공동체 내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은 자들의 목록에서 아포스톨로이(사도들)와 프로페타이(선지자들)를 뒤이어 세번째의 카리스마적 직책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직책을 맡은 사람들의 과업은 기독교 신앙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주고 구약성경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일이다(참조: K. Wegenast).|엡 4:11의 유사한 목록에서는 아포스톨로이, 프로페타이와 유앙겔리스타이 뒤에 나오며, 포이메네스(문자적으로 '목자들')와 함께 분류된다.|행 13:1에서 그들("교사들")은 프로페타이("선지자들")와 함께 언급된다.|이 사람들은 모두 유대교 출신이며, 따라서 율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선지자는 신적으로 영감을 받은 메시지의 성경적 선포자로 더욱 영적인 자들을 가리킨다(참조: 고전 14:29 이하; 행 11:28). 디다스칼로이는 그들의 보다 더 분명한 해석으로 회중을 가르치고 교화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서신들의 디다스케인에서 역시 그러하듯이 동일한 유대교 및 초기 기독교 용법이 적용된다.|엡 4:11에서 공통 관사가 디다스칼로이와 포이메네스를 동일한 것으로 분명히 가리킨다면 이것은 격의 성격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포이멘은 공동체의 생활에 책임을 지는 자들이며, 따라서 가장 넓은 의미에서 디다스케인은 그의 직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우리는 고전 12:28 이하와 엡 4:11의 목록에는 계급의 서열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디다스칼로스의 활동은 아포스톨로스와 프로페테스의 활동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망과 양식을 세우기 위한 토대를 놓을 때에 필요하다. 최초의 공동체의 디다스칼로스는 이와 같이 후기 유대교의 하캄(현명한) 혹은 소포스(지혜로운, 현명한)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의 일은 공동체 영역 내에 놓여 있다. 따라서 엡 4:11에서 아포스톨로이와 최초의 세대 전체가 교회의 삶으로부터 사라지기 시작할 때에 포이메네스와 디다스칼로이가 선교의 책임을 새로이 맡은 유앙겔리스타이 뒤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기본적으로 상황은 최초의 복음서에서와 아주 흡사하다. 여기서 예수님은 믿음을 일깨우는 유앙겔리스테스로 처음으로 나타나고(마 4:12 이하, 마 4:23 이하) 그 다음으로 비로소 디다스칼로스로 나타난다(마 5:1 이하). 그것은 초대 교회, 그리고 특히 바울의 통찰력의 표시이다. 교화의 문제에서 그들은 이 점에서 예수님의 본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일단 고전 12장과 엡 4장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딤전 2:7과 딤후 1:11은 분명히 이해된다. 케뤽스("전파하는 자")가 유앙겔리스테스(복음 전도자)를 대신하고, 디다스칼로스로 아포스톨로스의 이중 역할을 묘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선교에 대한 높은 감각을 보며, 또한 똑같이 바울의 전형적인 사역에 대한 강한 인식을 본다.|한 면에서 다스림에 대한 랍비적 주장이나 다른 면에서 지식에 대한 헬라의 주장에 대해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기자가 딤후 2:7에서 자신을 "이방인의 스승"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그의 사역의 범위를 보여주기 위함이다.||(c) 초기 교회의 용법은 사람들과 관련된 초기 기독교의 용법과 뚜렷이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Did의 본문 구절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디다스칼로스가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이집트 교회에서의 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에게 디다스칼로스는 고전 12:28 이하의 교사와 매우 다르다. 교회는 지금 알렉산드리아의 지혜의 침범을 받고 있으며, 이 때문에 필로에서와 같이 이 지혜를 표현하고 가르치는 자로 디다스칼로스를 사용할 것을 채택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최초의 기독교 교사의 활동의 연속이 아니라 헬라 제도를 기독교화된 형태로 교회 속에 도입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선상에서 초기 변증가들과 교사들의 임무는 기독교를 조리있게 소개하고 변호하는 것이었다. 이 교사들 중에서 행한 기독교의 지성화와 신앙은 예수님과 바울 및 초기 교사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을 위해 전력을 하여 반대한 바로 그것을 재소개한 것이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불행한 일이다.|(참조: K. H. R. Rengstore; K. Wegena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