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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drevpanon
낫, 가지 치는 낫||#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드레파손(Homer 이래)은 드레포(%1017: 뜯다, 뜯어내다)에서 유래했으며, '낫' sickle, '가지 치는 낫' pruning-hook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드레파손은 70인역본에서 12회 나오며, 히브리어 마즈메락(4211: 전지용 칼; 미 4:3; 욜 4:10; 사 2:4; 사 18:5), 막갈(4038: 낫, 욜 4:13; 렘 50:16), 헬메쉬(2770: 낫, 자르는 낫)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드레파손은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오며, 마가복음(1회)과 요한계시록에만 사용되었다.||(a) 드레파손은 추수 때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막4:29). 비유 전체에 대한 견해에 따라 추수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추수 때를 끝으로 본다. 이 경우에 그리스도의 일꾼은 낫을 대는데 대한 책임이 없을 것이다. 종말론적 의미를 배척하지는 않으면서 이 비유를 언제, 어디서를 막론하고 나라의 성장에 적용하는 것이 더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A. E. Sanner).||(b) 드레파손은 세상의 종말과 관련하여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계 14:14; 계 14:15; 계 14:16; 계 14:17; 계 14:18).|(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달려갈 길
drovmo"
노정 course, 경주 코스 race.||명사 드로모스는 드라메인(%896:뛰다, 달리다)에서 유래했으며, `노정, 경주 코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딤후 4:7에서 경주 코스(race)를 뜻한다. 이는 사도로서의, 바울의 인생 경력과 사역을 의미한다. 바울의 인생은 싸움에도 비유되었다. 행 13:25에서는 세례(침례) 요한의 인생 여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행 20:24에서는 바울의 인생 여정에 대해, 즉 그의 유일한 목표인 자기의 사역을 완성시키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드루실라
Drouvsilla
드루실라(인)||드루실라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이며, 처음에는 에마사왕 아지주스와 결혼했으나 후에 유대 총독 벨릭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가장 방탕한 여인이었다.|신약성경에서 행 24:24 이하에서 유대 총독 벨릭스의 아내로 나타난다: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능히
duvnamai
할 수 있다 be abl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뒤나마이(Homer. 이래)는 뒤나(%901) 어간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능력'(ability), '역량'(capability)이라는 기본적 의미를 지니며, 따라서 이 단어는||(a) 일반적 의미에서 '할 수 있다'.|(b) 어떤 사람으로 할 수 있게 하는 태도와 관련하여 '할 수 있다', 때로 '하고자 하다, 원하다'|(c) (사물에 대해) '~에 상당하다, ~으로 생각하다, 의미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뒤나마이의 용법에 대해서는 $1411(1411, 뒤나미스)를 보라(표시가 있는 구절은 뒤나마이에 속하는 구절임).
강한 것
duvnami"
힘, 세력, 능력, 역량.||#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뒤나미스(Homer. 이래)는 뒤나마이($1410)에서 유래했으며,||(a) ① '능력, 힘, 세력'|② '가능성, 할 수 있음'|③ 신체적, 지적, 영적 '힘, 능력'을 의미한다.||(b) 호머 이래로 자주 발견되는 뒤나미스는 '성취할만한 능력, 체력'을 의미하며, '군대, 전투력', 그리고 '정치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깊이 사고하는 헬라 철학자들과 의학자들은 그 개념을 체력과 정신력에 의존하는 생존하고 활동하고자 하는 힘 혹은 능력이라는 그 말의 본래 의미로 사용하였다.|뒤나미스는 자연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그 말은 더위와 추위의 기세, 식물들과 자연 요소들을 치유하는 능력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헬라 시대에 그 말은 형이상학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포시도니우스(Posidonius)는 기본적인 원소에서 생명체의 원리를 보았다.|스토아 학자들은 사방에 퍼져있는 창조적인 힘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였다(Alexander of Aphrodisiensis).|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자로 찬양하였으며 인간들이 거룩한 힘과 합해짐으로써 구원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Corp. Herm., Poimandres, I, 26).|사람들은 특히 마술을 통해서 초자연적인 능력들을 공유하고자 하였다(I amblichus, De Mysteriis 2, 1). 병든 사람들은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 신의 능력의 실연으로 말미암아 치료 받고자 하였다(P. Oxy).||#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뒤나미스는 70인역본에서 약 600회 나오며, 주로 하일(138회)과 차바(113회)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일반적으로 '군사력'을 의미한다.|뒤나미스는 또한 통치자의 힘, 천국 그리고 하나님의 힘에 대해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뒤나미스는 신약성경에서 11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그리스도의 사실.|신약성경의 모든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의 힘에 관한 개념도 그리스도의 사실에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 사실은 분명히 언제나 하나님의 힘과 관련되는 구약성경의 메시야관과 관련되어 있다(참조: 사 9:5; 사 11:2; 시 110:2; 마 5:5). 이 힘은 주로 왕적인 능력이지만 예언적인 힘도 포함되어 있다(참조: 미 3:8; 행 7:22[모세]; 눅 1:17[세례(침례)요한]).|신약성경에서는 예언적인 면이 매우 두드러진다(참조: 눅 24:19).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힘을 부여받은 선지자 이상의 존재이다; 그의 전 존재는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결정된 유일 무이한 것이다. 이것은 동정녀 잉태 기사에서 성령과 지존자의 능력의 병행에서 표현된다. 형식을 묘사하려는 어떤 시도도 행해지지 않았다. 성육신은 정상적인 발생 과정을 초월하는 잉태와 더불어 시작된다. 그리스도 탄생 때 독특하고 특별한 능력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붙여진다(눅 1:35). 이런 사실에 의거해 볼 때,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에서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자이다(눅 4:14, 눅 4:36). 하나님의 본질이 힘이므로, 힘의 부여는 성령의 선물과 결부되며,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에게 그의 권세(엑수시아)를 전달해 준다. - 이 권세는 그가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자를 고칠 때 행사할 수 있는 능력(뒤나미스)을 지니는 권세이다(눅 5:17; 눅 6:19; 눅 8:46). 이런 이유로, 그의 제자들이 증거한 바는 하나님께서 성령과 권능으로 예수님께 기름 부으셨다는 것이다(행 10:38). 그가 행한 일들도 뒤나메이스(복수)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막 6:2; 눅 19:37; 또한 행 2:22). 이 일들은 그 당시 세계에서 행한 비슷한 능력의 행동들과 다음의 세 가지 면에서 다르다:|① 이 일들은 마술과 관련이 없다.|② 이 일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말씀으로 행해지는데,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가 역사 속으로 들어와서 적대 세력의 지배를 전복시킨다.|③ 이 일들은 이 일을 행하시는 분에 대한 믿음과 이 일들이 행해지는 사람들의 믿음을 전제하며, 따라서 인격적인 관계가 요구된다(마 13:58; 참조: 막 9:14이하). 믿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음에는 능력이 있다(막 9:23). 왜냐하면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한 일들은 놀라움과 찬양을 불러 일으키며(마 13:54; 눅 19:37), 헤롯에게서는 양심의 불안을 불러 일으킨 것 같다.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마 14:2).|요한복음은 뒤나메이스를 사용하지 않고, 엑수시아나 세메이온과 함께 동사 뒤나스다이를 사용함으로써, 강조점을 행동에서 능력으로 전이시킨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충만한 메시야적인 능력에서 행해진 세메이아는 독특한 행동들이다. 예수님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즉 그가 아버지와 교제함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을 지니기 때문에 그것들을 할 수 있다.|요한복음에는 뒤나미스라는 말이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예수님의 메시야 활동은 아들의 보내심에,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뜻의 통일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 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요 5:19, 요 5:30, 뒤나타이). 그리고 그의 기적들은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드러내는 징표이다(요 3:2; 요 9:16; 요 10;21, 항상 뒤나타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반대로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실재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어둠의 세계 속에 감금되어 있기 때문이다(요 3:3; 요 8:43; 요 14:17, 우 뒤나타이). 그들은 오직 선택(요 6:44)과 거듭남(요 3:5)을 통해서 해방될 수 있다.|요한에게서 볼 수 있는 특별한 특징은|① 뒤나스다이에 유일무이한 그리스도 사건이 있다는 점.|② 이 사건 속에 있는 권능은 새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점이다. 이 권능은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서 특별하게 나타난다.||그리스도 자신의 부활은 마 22:29에 나오는 그의 말씀을 뒷바침해 준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 2:24에서 베드로는 이 부활의 권능을 매우 인상깊게 부정적인 표현으로 나타낸다: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죽음의 권세는 깨뜨려졌다. 하나님의 권능이 예수님께서 권능의 행동을 하도록 그에게 능력을 부여해 준 것처럼 또한 예수님께서 새 생명을 가지도록 능력을 부여해 준다.||바울은 고전 6:14("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과 고후 13:4("성구삽입")에서 이 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된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전파한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며 그에게 권능 그 자체가 부여된 것도 아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그가 소유하게 된 것은 성육신의 외적인 약함과 대조되는 완전한 능력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만약 그리스도가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불리운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인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 안에서 승리적으로 작용하며 그것을 목적지에까지 이끌어가기 때문이다.||히브리서에서 이 능력은 파괴될 수 없는 생명의 능력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권능은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의 도달 범위를 넘어 선다. 이 능력으로 아들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이 세상을 다스린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요한계시록에서 이 능력은 영광과 동일시된다: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계 1:16).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2).|그리스도의 백성들은 그가 그의 일을 완성하고 다른 모든 세력들을 굴복시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확립하실(*빌 3:21) 능력을 가지고 오시기를 기다린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막 9:1). 이 오심은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있는 천사들을 동반하신 것이다: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살후 1:7).||(b) 하나님의 능력, 악마적인 세력들, 그리고 구원의 능력.|①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따라서 이것은 부여된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눔으로써, 이 능력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그의 능력은 구약성경에서처럼, 종말론적 사건의 역사적인 능력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그리스도 사건에서 나타난다(마 22:29; 참조: 히 11:19).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신 통치에 의해 뒤나토스가 된다(참조: 눅 1:49).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참조: 마 19:26). 믿음으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만물은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20).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마 6:13; 계 4:11 등에서처럼, 구약성경의 송영을 받아들인다. 계 11:17-18과 계 12:10의 송영은, 그리스도 사건에서 하나님 능력이 이미 나타났듯이, 하나님의 능력이 적대적 세력들을 멸망시키고 세상을 완전하게 하시리하는 고백을 암시하고 있다.|② 그리스도 사건은 또한 악마적인 세력을 이해하는데 새로운 빛을 비춰준다. 신약성경은 이 세력들을 인정한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 이 세력들은 우주적 세력인 동시에 천사적인 세력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그 힘을 잃어버렸으며 그의 재림 때 공개적으로 그 힘을 박탈당할 것이다. 이 두 사건들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신자들의 새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유래한 것이며 그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엡 1:20-21; 롬 8:38, 롬 8:39), 이 세력들은 제거된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싸우며(계 13: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결국 복종하게 될 것이다: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4). 적그리스도는 능력을 가지고 나타나서 거짓을 퍼뜨릴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만이 다시 그를 최종적으로 멸망시킬 것이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살후 2:9).|③ 그리스도의 사역 또한 구원의 능력에 관한 질문에 새로운 답을 준다. 제자들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 묻자, 그리스도는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참조: 마 19:26).|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인간의 무능력을 날카롭게 강조한다. 우리의 약함 때문에, 율법조차도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롬 8:3).|히브리서는 제사에서 똑같은 무능력을 발견하고 있다(*히 10:1, 히 10:11).|요 3:3에서 언급되듯이, 만약 거듭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줄 알지 못함이로다"(요 8:43).|만약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올 수가 없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하나님만이 구원할 능력을 지니시며, 그는 예수님 안에 그의 권능을 나타내신다(롬 1:16; 고전 1:18). 이 능력은 신비적인 입교식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구원을 지시해 주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도의 능력이다. 이것은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부터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우리를 옮김으로써, 구원을 부여해 준다. 이것은 그리스도 사건의 구원 행동, 즉 역사 안에서 행한 하나님의 능한 행동에 근거하고 있다.|우리는 벧후 1:3-4에서만, 즉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고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들을 주신다고 할 때만 역동적인 개념보다는 실질적인 개념을 엿볼 수 있다.||(c) 제자들의 능력.|전파는 하나님의 뒤나미스로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계속하며,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부여 받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실 때(눅 9:1), 능력으로 그들을 무장 시켰다. 이 능력은 악마의 힘을 이긴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9). 제자들은 믿음으로만 이 능력을 가질 수 있다(참조: 막 9:14이하). 이것은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 자신의 임재의 능력이다(눅 24:48; 눅 24:49; 행 1:8). 능력으로 설교하고 병을 고치게 하는 특별한 능력의 부여가 오순절에 일어났다(행 4:7이하, 행 4:33; 행 6:8, 행 6:10).|바울의 사역은 표적과 기사의 능력에 의해, 즉 성령의 능력에 의해 효력을 발한다: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9).|뒤나메이스는 사도직의 표시이다(갈 3:5; 살전 1:5). 그러나 이 능력은 그리스도의 임재 방식뿐만 아니라 신자의 존재 방식으로서의 성령의 능력이다. 사도들은 십자가의 증인들이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약하나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파하며, 따라서 청중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거하게 된다(참조: 고전 2;1이하). 뒤나미스는 메시지의 형식이 아닌 메시지의 내용과 관련된다. 전파의 목표는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울이 사역자가 된 것도 똑같은 능력에 의해서이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엡 3:7). 고전 5:3-4에서처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은 또한 사법적인 것일 수도 있다: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여기에서는 만일 신자들이 사단에게 넘겨지지 않는다면, 사단은 신자들을 제어할 힘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과 심지어 사단에게 넘겨질 경우에도 그 목적은 여전히 구원에 있다는 사실이 주목되어야 한다. 사도 자신의 삶과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은 끊임없이 능력을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빌 4:13; 딤전 1;12; 딤후 4:17). 이 강화하는 것은 원조의 형태를 취하며, 따라서 마나(mana)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종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의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d) 공동체의 능력.|하나님의 구원 능력에 의거하는 공동체가 바울의 목표이다(참조: 고전 2:1이하). 신자들은 "주 안에" 있을 때 강할 것이다(참조: 엡 6:10). 사단의 세력에서 구출되었지만, 여전히 위험에 싸여있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들을 보호하고 보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보호 받는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 1:5). 이 사도의 기도는 그들이 하나님의 큰 능력을 누리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혹은 그들이 모든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11).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이 능력은 그들의 부름과 영광스런 기업에 대한 소망을 만들어 낸다. 기독교인들이 참고 인내하려면 이 능력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보전할 뿐만 아니라 변화시키는 힘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에게는 소망이 넘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속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됨으로 그들은 포괄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성장한다(참조: 엡 3:14이하).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가진다(참조: 요일 4:7). 모든 선한 결의와 믿음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 공동체의 구성원들도 뒤나미스를 행하는 영적인 은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10). 더구나 공동체에서 역사하는 능력은 궁극적으로 부활의 능력이다: "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 13:3-4). 하나님은 주님을 일으키셨으며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비천한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근거한다(빌 3:21). 어느 누구도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손에서 잡아챌 수 없다(요 10:28-29).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부활의 능력 - 그의 백성을 위해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창출해내는 능하신 행동 - 을 알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진정한 뒤나미스의 원천이다.||(e) 능력과 약함.|하나님의 능력은 인간 존재의 약하고 부패하기 쉬운 영역에서 역사한다. 따라서 이것은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알려진다. 십자가의 도는 외적인 약함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참조: 고후 13:4). 그러나 하나님의 약함이 인간의 강함보다 더 강하다(고전 1:25). 바울은 이런 사실을 그의 사도 직무의 모든 약함 속에서 인식하게 되었다(고후 12:9-10; 참조: 빌 4:13). 이 초월적인 능력은 비겁의 영이 아닌 능력과 사랑과 자제(딤후 1:7)의 영을 주시는 하나님께 속한다(고후 4:7).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데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이 약함은 그리스도의 임재의 보증(증거) - 바울은 이 증거에서 자아로부터 해방과 하나님에 대한 의지를 발견하다. - 이다. 약함 속에서 강해진다는 법칙에 따라 하나님의 부활 능력은 복음의 사역자에게 있어서나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에게 있어서나 더욱 더 풍성하게 역사한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능력안에 있어")'는 사도와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믿음의 실재를 표현해 준다(고후 6:7).|(참조: W. Grundmann).
힘을 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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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게 하다, 강화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뒤나모오(Polem Soph.)는 '강하게 하다, 강화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뒤나모오는 70인역본에서 5회 나오며, 히브리어 아자즈(5810: 강하다), 가바르(1396: 강하다, 전능하다, 위대하다, 정복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경고하다'나 '강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시 52:9; 시 68:29; 단 9:27 등).||#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뒤나모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골 1:11에서 '강하게 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b) 히 11:34에서도 '강하게 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권세 있는 자
dunavsth"
통치자, 주권자, 정신.||#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뒤나스테스(trag., Hdt. 이래)는 뒤나마이($1410: 할 수 있다, 힘을 지니다)에서 유래,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며,||(a) '통치자, 주권자' ① 신에 대해(Soph., Antig.),|② 사람에 대해(Apollon., Diod.),||(b) '정신' courtier, '최고 공직자' high officer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뒤나스테스는 70인역본에서 약 70회 나오며, '신적 통치자, 주권자'(집회서 46:5; 마카베오이서 12:15; 15:3 이하; 마카베오삼서 2:37), '인간 통치자나 주권자'(유딧 9:5), '정신'(창 50:4)에 대하여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뒤나스테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a) 눅 1:52에서 인간에 대하여, '통치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b) 딤전 6:15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주권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c) 행 8:27에서 간다게의 내시에 대해 '정신'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강하다
dunatevw
할 수 있다, 강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뒤나테오는 뒤나토스($1415: 할 수 있는)에서 유래했으며, '강하다, 유력하다, 힘이 있다, 할 수 있다'를 의미한다.|일반 헬라어 문헌과 70인역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뒤나테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뒤나테오는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① 롬 14: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②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b) 뒤나테오는 고후 13:3에서 주 안에서 '강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가능한
dunatov"
할 수 있는 abl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뒤나토스(Pinder. 이래)는 뒤나마이($1410)에서 유래되었으며,||(a) 형용사로 '능력있는, 강한, 할 수 있는'|(b) 명사로 '능력이나 힘을 가진 자, 능력있는 자'|(c) 중성으로 '가능하거나 실행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뒤나토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8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깁보르(강한, 용감한, 용사)의 역어로 사용되었다.|뒤나토스는 70인역본에서 '용사'(삼상 9:1), '전능자'(시 45:3; 습 3:17 등)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a) 목적어 없이|① '재산과 세력에 있어 막강한', 고전 1:26.|"유력한 자" 우두머리들, 행 25:4.|"능하신 이" 뛰어나게 강한 자, 전능하신 하나님, 눅 1:49.|② '영혼이 강한': 용기와 인내로 환난과 시련을 견디기 위해, 고후 12;10.|그리스도인의 덕에 있어 강한, 고후 13:9.|확신과 믿음에서 확고한, 롬 15:1.||(b) 구문에서|① 부정사와 함께(어떤 일을 행)할 수 있다', 눅 14:31; 행 11:17; 롬 4:21; 롬 11:23; 고후 9:8; 딤후 1:12; 딛 1:9; 히 11:19; 약 3:2.|② '어떤 것에 강한, (즉) 탁월한': "말과 일에 능하신", 눅 24:19.|"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행 7:22. "성경에 능한", 성경 지식에 뛰어난, 행 18:24.|③ '어떤 일에 대해 강력한, 힘이 있는', 고후 10:4.|④ 중성[수동적 의미로] '가능한', 마 24:24; 마 26:39; 막 13:22; 마 14:35; 롬 12:18; 갈 4:15.|"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마 19:26; 막 10:27; 눅 18;27. "그 능력", 그의 능력이 행할 수 있는 것, 롬 9:22.|(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지다
duvnw
내려가다 go dow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뒤노(Bl-D; Homer)는||(a) '물 속에 넣다(담그다)' submerge.|(b) '뛰어 들다' plunge, '내려 가다' go down, '들어가다',|(c) 비유적으로 '무장하다' arm oneself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뒤노는 70인역본에서 26회 나오며, 히브리어 보(935: 들어가다, 가다, 오다)의 역어로 해가 '지는 것'(창 28:11; 레 22:7; 신 23:12; 삿 19:4; 전 1:5)을, 아사프(622: 모으다, 옮기다)의 역어로 빛을 '거두는 것'(욜 2:10; 욜 4:15)을, 찰랄(6749: 가라 앉다, 물에 잠기다)의 역어로 물에 '잠기는 것'(출 15:10)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뒤노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눅 4:40(병행구 막 1:32)에 사용되었다: "해 질 적에 각색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히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여기서 이 동사는 해가 '지거나 빠지는 것'을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duvo
둘 two||기본 수사 뒤오(Aristot. 이래)는 '둘' two을 의미한다.||(a) 뒤오는 신약성경에 약 135회 나온다. 그러나 실제적인 중요성은 거의 없다. 둘은 복수를 나타내는 가장 적은 단위의 표현이며 대개 양자 선택이나 대조를 나타낸다(마 6:24; 마 21:28; 마 24:40-41). 사자들은 보통 짝을 지어 행동하며 여행한 것으로 표현된다(막 6:7; 마 11:2; 마 21:1). "둘 혹은 셋"은 종종 매우 적음을 나타내는 어림 계산이다.||(b) 요 8:17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라는 말씀을 본다. 곧 예수님과 하나님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를 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민 35:30; 신 17:6; 신 19:15에서 유래한 증거에 대한 유대 법률에 대해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다. 거짓 증인들도 짝을 지어 위증을 한다(왕상 21:10; 마 26:60). 두 세명의 증인들의 필요에 대한 몇몇 언급이 신약성경에 나온다(마 18:16; 고후 13:1; 딤전 5:19; 히 10:28). 이 표현들이 복음서의 기사의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는 것이 당연한 듯하다(마 17:1 병행구 막 1:2; 눅 9:28/ 마 26:37 병행구 막 14:33; 눅 24:13; 요 1:35 이하).||(c)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단순한 수 '둘'에 대해 유일하게 의미깊게 사용된 용법은 계 11:4-11에 나오는 듯하다. 역시 이곳의 주제도 증거이다. 이곳의 비유적 표현은 슥 4:2-3의 비유적 표현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이곳의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의 권능과 같은 권능을 갖고 있다(계 11:16). 이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으나 각각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를 나타내는 것이다.||(d) 계 1:16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다. 이 개념의 요소들은 계 2:12과 계 2:16에서 버가모에 보내는 편지에 반복된다. 역시 이 말씀도 구약성경을(사 11:4; 사 49:2) 연상하게 하나 로마 권세에 의한 재판 집행에 직면하고 있는 버가모 기독교인들에게도 필요한 말씀이다. 롬파이아는 전형적인 이방인의 칼이었다. 이 좌우의 날선 검은 로마의 무기와 "칼의 권세"(이우스 글라디이)를 휘두르는 로마 총독을 묘사하는 것이나, 이곳에서 이 말은 궁극적인 집행권과 재판관의 권세를 갖고 계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칼은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다(계 19:13; 계 19:15; 히 4:12; 엡 6:17).|(참조: C. J. Hemer).
뒤스
dus<
부정 접두어||뒤스-는 불확실한 파생어의 접두사이며, 영어의 unrest(불안)이나 misjudge(잘못된 판다)이란 단어들에서 un-이나 mis-와 같은 것으로, 단어의 좋은 의미를 무효로 하거나 나쁜 의미를 강화시켜 준다.
지기 어려운
dusbavstakto"
감당하기 어려운.||#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뒤스바스탁토스(Plut., Philo)는 뒤스($1418)와 바스타조($941)에서 유래했으며,||(a) '감당하기가 어려운' hard.|(b) '강압적인' oppressive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뒤스바스탁토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마 23:4; 병행구 눅 11:46에서 '감당하거나 지기 어려운'을 묘사한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지기 어려운 짐"은 감당하기 어려운 훈계들, 넌더리 나는 훈계들을 가리킨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이질
dusenteriva
이질 dysentery||#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뒤센테리아(Hippocr., Hdt., Pla., Aristot., Polyb. 등)는 뒤스($1418)와 엔테론(%260: 내장)에서 유래했으며, '이질' dysentery (라틴어 tormina intestinorum, 창자 질병)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뒤센테리아는 신약성경에서 행 28:8에 한번 나오며, '이질'을 의미한다: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하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해석하기 어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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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하기 어려운||#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뒤세르메뉴토스(Diod., Philo. 등)는 뒤스($1418)와 헤르메뉴오($2059: 해석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해석하기 어려운, 설명하기 어려운'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뒤세르메뉴토스는 신약성경에서 히 5:11에 한번 나오며 '해석하기 어려운'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