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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따라가다
ajkolouqevw
따르다, 뒤따르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콜루데오(Homer 이래)는 켈류도스(%475, 길)에서 유래했으며,||(a) 문자적 의미로 '함께 가다, 동반하다, 뒤따라 가다, 따라가다'이며,||(b) 비유적 의미로는 '(추세나 의견)을 따르다, 동의하다, 순응하다'를 의미한다.||(c) 스토아 철학자들은 아콜루데오를 종교적, 철학적 의미로 사용했다. 이 단어는 현자가 세상 법칙에 따른다는 것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자연 혹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철학적 삶의 기본 방향이다. 여기에서 따른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통합에 의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의 이면에는 이성적인 인간과 하나님과의 본유적 관계에 대한 헬라적 견해가 있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아콜루데오는 70인역본에서 14회 나오며, 주로 할라크의 역어로 5회, 히브리어 상당어 없이 6회 사용되었다.||(a) 아콜루데오에 상당하는 히브리어는 민 22:20에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함께 가라"는 것 외에는 할라크 아하레(직역: 뒤따라 가다, 4회)로 나타난다.- 삼상 25:42에 아비가일이 다윗의 사자를 따라가는 것, 왕상 19:20에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고 싶어한 것, 호 2:7에 이스라엘 백성이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가는 것, 사 45:14에 만방이 주를 따르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b) 구약성경에서 할라크 아하레라는 표현은 특별히 호세아, 예레미야, 신명기 기록에서 이교로의 변절에 전문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그 독특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다른 신(神)들을 따라가는 것은 백성의 기본 죄이며, 모든 재난(심판)의 원인이다(삿 2:12; 신 4:3; 신 6:14; 왕상 21:26; 렘 11:10). 호세아에서 이 표현은 간음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정부를 따르고 남편을 잊어버렸다(호 1:2; 호 2:7; 호 2:13).|여호와를 따르는 것은 신명기에 나타나지만(신 1:36 등) 별다른 강조가 없다(왕상 18:21은 예외). 그 이유는 그것이 우상숭배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렘 2:2의 광야에서 여호와를 좇는 것(출 13:21-22)에 대한 언급에서 결혼에 대한 개념이 고려되고 있다. '하나님의 길로 걷는다'는 표현이 애호되고 있다(신 5:30 등).||#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아콜루데오는 신약성경에서 90회 중 복음서에 80여회, 사도행전에 3회, 바울서신에 1회, 요한계시록에 6회 나타난다.||(a) 신약성경에서 따른다는 개념은 하나님께 결코 적용되지 않는다. 이 개념은 팔레스타인 용법에 의해 암시되지 않았으며 초기 기독교도 이 표현을 형성하는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전혀 새롭고 독특한 개념이 생도 관계를 뿌리로 하여 그 속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을 따른다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관념에 익숙한 헬레니즘 영역으로 그리스도교가 들어갔을 때조차도 아콜루데오라는 동사와 따른다는 개념 전체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실로 역사적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 말들은 더 이상 어떤 다른 종교적 용법으로 전환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그리스도의 제자직에 엄격히 제한되어 사용된 아콜루데오의 특별한 용법은 통계상으로 분명하게 증명된다. 요한계시록에서 단 한번 사용된 경우를 제외하면 아콜루데인은 전적으로 사복음서에서만 발견된다. 이 용어는 어느 정도는 외적으로 따르는 것을 함축하는데, 예컨대 막 3:7과 병행구절, 마 8:10과 병행구절에서 무리가 예수님을 좇는 것과 마 8:19에서 좁은 의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좇는다고 할 때이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제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는다(막 10:28; 막 1:18; 눅 5:11). 그러나 이것은 아콜루데인의 모든 다른 관계들을 끊는다는 의미에서의 자기 헌신을 의미함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2),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눅 9:61).|제자는 랍비의 생도가 행하는 바와 같이 행하되, 외적으로는 랍비의 생도와 똑같으나 내적으로는 예수님께 결속되어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제자직의 의미를 여전히 가지면서 한편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내용과 표시를 획득한다.|이 용어의 신약성경의 용법의 배타성은 원시 기독교에게는 유일한 하나의 제자직만 있으며, 따라서 유일한 하나의 좇음, 즉 예수님과의 관계만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막 2:14과 병행구절에서 아콜루데이 모이, "나를 좇으라"는 요구는 곧 메시야의 요구이다.||(b) 아콜루데인(따르는 것)은 메시야를 좇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 제자직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선물이다. 아콜루데인은 예수님 안에 제공된 구원에 참예함을 의미한다. 눅 9:61 이하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만이 아콜루데인을 성취할 수 있다. 막 10:17; 막 10:21 및 병행구에서 아콜루데이 모이는 "영생"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요 8:12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동일한 사상이 계 14:4에서도 나타난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c) 하지만 아콜루데인은 또한 예수님의 운명에 함께 하는 것을 암시한다. 마 8:19 이하에서 아콜루데소 소이("좇으리이다")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이다. 막 8:34과 병행구절에서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하신다. 요 12:25-26에서도 동일한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이 구절들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는 바는, 어떤 의미에서 아콜루데인은 예수님의 본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의 구원을 누림으로 야기되는 메시야와 함께 하는 삶과 고난에 전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d) 이 용어의 은유적 용법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다음의 고찰에 의해 드러난다.|한편으로 전승은 확실히 본래부터 마 10:38; 눅 14:27과 같은 말씀들을 보유하고 있으며(마 10:38,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눅 14:27,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다른 한편으로 전승은 예수님과 함께 다닌다는 의미에서 아콜루데인을 행사하지 않는 제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매우 본래부터 나타낸다.|더욱 더 두드러진 것은 전승의 세번째 명백한 특징이다. 즉 이 단어와 예수님의 역사(history)의 구체적인 활동이 너무나 강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다른 명사도 이 제자직의 개념에 일치하여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신약성경에는 단지 능동적인 표현만이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이 용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행위이지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아콜루데인이라는 용어가 복음서에서만 사용되고, 또 사복음서 모두에서 그 용법상 일치점이 있으며, 복음서들이 이 용어가 의미하는 관계를 역사상의 예수님에게 국한시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신약성경의 서신들에서는 다른 표현들이 높임 받으신 퀴리오스($2962: 주, 주님) 및 그의 프뉴마($4151: 영)와의 관련을 강조하는 데에 사용된다.|이 용어가 예외적으로 복음서 외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계 14:4은 분명 마 10:38을 특정한 부류의 신자들에게 적용한 것이다. 여기서 그 개념에 주어진 분명한 새로운 내용은 마찬가지로 사도 시대에 '따른다'는 묘사가 예수님의 제자들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비록 사도행전은 바나바와 마가, 혹은 바울과 그의 집단(circle)의 경우처럼 스승과 제자(master-pupil) 관계에 친숙해 있었지만 어쨌든 다른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식의 표현을 피한다.|(참조: G. Kittel; C. Blendinger; Walter Bauer; J. H. Thayer).
듣다
ajkouvw
듣다, 경청하다, 주의하다, 들어서 깨닫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쿠오(Oracula sibyllina 이래로)는 '듣다'라는 의미를 가졌으며, 본래 '들음'이란 의미로 소리에 대한 지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들음'은 청각 작용 뿐 아니라 들려온 내용을 정신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로 인하여 다양한 언어학적 용법이 나타난다.||#2. 70인역본의 용법||아쿠오는 70인역본에서 매우 많이 사용되었으며, 대부분 히브리어 샤마를 번역한다. 따라서 아쿠오는 히브리어 동사의 미묘한 의미의 차이를 공유한다. 여기서도 역시 본래의 의미는 청각 작용이다(예를 들면, 나팔소리를 들음, 삼하 15:10). 한편 사람이 진술, 보고, 소식 등을 받자 마자(창 14:14) 즉시 이해는 수반된다. 이해는 수용, 경청(창 1:23; 창 23:11), 인식(창 11:7; 창 42:3), 들린 것에 대한 주의력("…을 듣고" 창 3:17; 창 23:16; 출 24:7)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샤마는 '복종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샤마는 70인역본에서 자주 강조형 복합어들로 번역되었다(이를테면, 창 42:21 이하; 삿 2:17).|아쿠오는 이런 과정을 걸으면서 '듣다, 경청하다, 주의(유의)하다, 이해하다'와 '복종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고대와 중세 영어에서 '듣다'와 '복종하다'는 두 의미를 동일한 단어로 표현한 것이 나타난다. 전자의 의미는 후자의 의미를 포함하며, 어떤 문장에서는 그것을 대용하기도 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아쿠오는 신약성경에서 약 430회 나오며, 본질적으로 헬라어 문헌과 70인역본의 용법을 따른다.||(a) 아쿠오는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어떻게" 듣는가라는 신학적 질문을 할 때 나타난다.|이 메시지의 내용은 옛 언약 하에서 약속된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약성경의 메시지를 능가하는 구원의 충만함과 새로운 계기가 주어진다. 예수님 안에서 명시된 이 계시는 단지 들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된다(요일1:1).|본질상 이것은 듣는 것과 보는 것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그 이전 세대들에서 경건한 자들이 갈망했던 구원을 목격했던 자들의 눈과 귀를 향해 축복을 선포했다(마 13:16이하; 눅10:23이하). 예수님은 투옥된 세례(침례)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마 11:4; 병행구, 눅 7:22). 이와 같은 그의 말씀과 나란히 예수님의 능력있는 행위가 나타난다.|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감추인 영광을 보았으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다.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 병행구, 막 9:7; 눅 9:35). 예수님의 탄생 기사에 나타나는 목자들의 찬미의 노래 뿐만 아니라 산헤드린 앞에서의 사도들의 고백도 그들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눅 2:20; 행 4:20).||(b)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애, 부활, 오순절 사건도 보고 들은 것에 의해 인식한다.|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중대한 환상은(고전 15:9) 행 22:14, 행 22:15에 부연 설명되어 있다. 바울은 자기가 보고 들었던 것에 대해 증인이 되어야만 했다. 기독교 공동체에 미친 엄청난 효과를 미친 오순절 사건도, 본래 보고 들은 것을 통해 인식되어졌다(행 2:33).|고후 12:1 이하에 언급된 바울의 계시와 환상들도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사도는 황홀경 속에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4).|듣는 행위는 또한 요한계시록의 환상들 속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계 1:10; 계 5:11, 계 5:13 등).|한편 우리의 구원의 신비는 통찰할 수가 없다. 즉,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 2:9).||(c)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중대한 계시적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복음은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되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받아 들이는 데는 믿음이 요구된다. 그러나 롬 10:14이하(비교: 시 19:14; 신 32:21; 사 65:1 이하)에 의하면 믿음은 듣는 것을 전제로 하며, 이 들음은 전파하는데 달려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d) 눅 10:16의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라"라는 문구를 음미해 볼 때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의 말을 구분하지 않는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충분한 자격을 부여받았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것을 들은 자들에 의해 확실하게 전달되었다(히 2:3). 그 메시지를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진리의 말씀(엡1:13; 엡 4:20 이하) 또는 하나님의 말씀(행 13:7, 행 13:44 등)을 듣는 것이다. 이렇게 들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될 때 응당 그 결과로서 세례(침례)를 받게 된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행 18:8).||(e) 구약에서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연결을 신약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옛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던 말씀을 초월한다(마 5:21). 그의 가르침을 보면 그에게 주어진 권위가 표현되었다. 산상수훈을 결론짓는 비유에서 주님은 자기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로 비유한다(마 7:24이하). 눅 11:28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말을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 축복을 선포한다. 요 10:16, 요 10:27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에 대해 언급한다.|막 12:28이하에서 예수님은 경건한 유대인들에 의해 날마다 암송된 셰마("Hear") 또는 이스라엘 신조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 6:4-신 6:9; 신 11:13-신 11:21; 민 15:37-신 15:41로 이루어져 있다. 그 구절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의 전(全)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의무를 날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인용했던 것이다. 즉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인용문은 주로 70인역본을 따르고 있다.||(f) 말씀을 듣는 것은 항상 믿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는데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막4:16; 눅 8:13). 만일 뿌려진 말씀의 씨가 열매를 맺으려면 듣고 깨달아야만 한다(마 13:23; 마 15:10).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며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 거스리는 태도는 결국 강퍅한 마음을 낳게 된다. 그 까닭에 사 6:9이하에서 선포된 강퍅해짐을 나타내는 문장에 대한 언급이 신약에서 특히 유대 민족과 관련해서 여러 차례 나타난다(마 13:13이하, 병행구, 막 4:12; 눅 8:10; 요 12:40; 행 28:27; 롬 11:8).|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솔직이 그런 식으로 듣는 것은 실제로 듣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는다(요 5:37; 요 8:43). 이것은 스데반이 재판 받으면서 재판관들을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묘사했을 때 의미했던 것이며, 그 다음의 그들의 행동이 스데반의 그 책망을 입증한다(행 7:51, 행 7:57).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며 듣지 못함을 막지 못했다(막 8:17이하).|마찬가지로 히브리서에서도 성도들이 시 95:8과 관련하여 완고해짐을 긴급하게 경고하고 있다(히 3:7-히 3:11, 히 4:3-히 4:11). 이러한 완고해짐과 대조되는 현상이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주신 자들과(사 50:5)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지키는 자들(눅 8:15)의 수용성으로 나타난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은 오직 이런 식으로 듣는 것 뿐이다(마 13:11; 병행구, 막 4:11, 눅 8:10).|그러나 그러한 들음과 깨달음이 하나님의 은사이지만 결코 인간의 행위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갖가지의 주의하라는 경고에서 이러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15; 마 13:9; 병행구, 막 4:9; 눅 8:8). 또한 "듣고 깨달으라"(마 15:10). 또한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막 4:24). 또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계 2:11, 계 2:17, 계 2:29; 계 3:6, 계 3:13, 계 3:22).||(g) 요 5:25, 요 5:28에서 아쿠오는 종말의 때에 듣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즉 무덤 속에 있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것이니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무덤에서 불러 내신 나사로의 부활은(요 11:43) 이와 같은 종말 사건에 대한 예기이다.||(h) 아쿠오는 하나님의 들으심에 대해 사용되었다. 요 11:41, 요 11:42에서 하나님의 들으심에 관해 언급한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계 9:20은 우상이 듣지 못한다는 구약성경의 표현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들으신다(요 9:31).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할 때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요일 5:14). 스데반의 증언에서는(출 3:7을 인용한 행 7:34) 애굽에서 들려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탄식하는 소리에 대해 언급한다.|(참조: Walter Bauer; G.Kittel; W.Mundle).
방탕
ajkrasiva
제멋대로하기, 부절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크라시아( Aristot. 이래)는 부정 접두사 아(%107)와 아크라테스($193)에서 유래했으며, '능력의 부족'(want of power), '자제의 부족'(want of self-control), '부절제'(incontinence)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크라시아는 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고전 7:5에서 성과 관련하여 "절제 못함"이 미치는 영향을 말한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b) 마 23:25에서는 더욱 일반적인 자제나 절제의 부족을 가리킨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절제하지 못한
ajkravth"
무력한, 훈련되어 있지 않은.||#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아크라테스(Aeschyl., Thu. 이래)는 부정 접두사 아(%107)와 크라토스($2904)에서 유래했으며, '무능한' 곧 '내적인 힘이 없고, 훈련을 받지 않은 자'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아크라테스는 신약성경에서 딤후 3:3에 한번 나오며, 여기서는 훈련되어 있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섞인 것이 없는
a[krato"
섞이지 않은, 순수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아크라토스(Homer 이래)는 부정 접두사 아(%107)와 케란뉘미($2767)에서 유래했으며, '섞이지 않은, 순수한' pure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아크라토스는 70인역본에서 3회 나온다. 시75:8과 렘 25:15에서 진노의 잔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아크라토스는 신약성경에서 계 14:10에서만 나오며,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여기서 '섞인 것이 없는', 곧 아크라토스는 하나님의 진노의 '완전한 힘'(full strength, NIV. NASB)을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엄한
ajkrivbeia
정확함 exactness.||#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크리베이아(Thu. 이래)는 아크리베스(%200: 정확한, 엄밀한)에서 유래했으며, '정확함'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아크리베이아는 70인역본에서 5회 나오며, 단 7:16에서 야치브(확실한, 진실한)를 번역하여 '진상'을 나타낸다. 지혜서 12:21에서 주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심판하실 때 '신중함'(주의 깊은 관찰을 포함하여)에 대해, 집회서 16:25에서 '정확한 지식'에 대해, 집회서 42:4에서 "저울 눈을 엄밀히 따지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크리베이아는 신약성경에서 행 22:3에만 나온다: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JB는 "율법의 정확한 준수를 가르침 받았고", NASB는 "율법에 따라 엄격히(strictly, 정확히) 교육을 받고"라고 번역했다. 이 번역은 본절의 해석이 되기도 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가장 엄한
ajkrivbevstato"
엄격한||형용사 아크리베스타토스는 아크리베스(%200)의 최상급이며, '가장 정확한, 가장 엄밀(격)한'을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행 26:5에만 나온다: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더 자세히
ajkribevsteron
더 정확히||#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아크리베스테론은 아크리보스($199)의 비교급에서 유래한 부사이며, '더 정확히, 더 엄밀히'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아크리베스테론은 신약성경에서는 사도행전에만 4회 나온다. 행 18:26; 행 23:15; 행 23:20; 행 24:22에서 모두 '더 정확히'를 의미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자세히 묻다
ajkribovw
정확히 알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크리보오(Eur. 이래)는||(a) '정확하게 알다',|(b) '부지런히 조사(연구)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아크리보오는 70인역본 아굴라역에서 사 30:8; 사 49:16에 나타난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아크리보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온다.|마 2:7에서 헤롯은 박사들에게 정확히, 혹은 자세히 묻고 그들로부터 정확히 알아본 것이다. 뒤따르는 속격 전치사 파라는 박사들에게 묻는 것보다는 그들로부터 알아내는 것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마 2:16에서 이 단어는 "자세히 알아보고"라고 번역되어 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아크리베스
ajkribhv"
정확한, 엄격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아크리베스(Heraclitus 이래)는 '정확한, 엄밀한, 엄격한'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아크리베스는 70인역본에서 8회 나오며, 단 2:45; 단 6:12에서 야치브(확실한, 진실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아크리베스는 에 4:5에서는 '진상', 집회서 18:29; 19:25 등에서 '아주 훌륭하거나 완벽한'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아크리베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26:5에 한번, 최상급으로 사용되어 '가장 엄격한'을 의미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자세히
ajkribw'"
정확하게, 부지런히||#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아크리보스(Aeschyl., Hdt. 이래)는 '정확하게, 부지런히'를 뜻하며 '세심한 주의를 하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2. 70인역본의 용법.||부사 아크리보스는 70인역본에서 5회 나오며, 신 19:18에서 야타브(히필형에서 부지런히, 충분히, 철저히), 단 7:19에서 예체브(확실하게 하다, 확신을 얻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아크리보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아크리보스는||(a) 눅 1:3; 살전 5:2에서는 '정확하게'라는 의미를 나타낸다.|(b) 마 2:8; 엡 5:15에서는 "세심한 주의를 하여"라는 의미를 나타낸다.|(c) 행 18:25에서는 "부지런히"라는 의미를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메뚜기
ajkriv"
메뚜기 grasshopper, locus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크리스(Homer 이래)는 메뚜기 grasshopper, locust를 의미한다.||동양 지역에서 유별나게 떼지어 다니며 들판과 나무를 갉아 먹어 황폐화시키는 곤충류, 셀 수 없는 메뚜기 떼는 매년 봄바람에 의해 아라비아에서 팔레스틴으로 이동되며, 바다에 빠져 죽을 때까지 보다 더 북쪽 지방으로 이주하여 그 지방을 황폐화시킨다. 동양인들은 메뚜기를 날 것으로 혹은 튀겨서 소금으로 맛을 낸 것으로 먹는데 익숙해 있으며,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것들을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아크리스는 70인역본에서 약 30회 이상 나오며, 히브리어 아르베(697: 일종의 '메뚜기'; 출 10:14; 12-14, 19; 신 28:38; 삿 6:5; 7:12; 대하 6:28; 시 78:46; 105:34; 109:9; 잠 30:27 등), 하가브(2284: 메뚜기, 황충; 레 11:22; 민 13:33; 전 12:5), 옐레크(3218: 메뚜기의 일종; 나 3:15; 렘 51:14; 렘 51:17)의 역어로 사용되어 그런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크리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마가복음과 요한계시록에 사용되었다.||(a) 마 3:4에서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를 먹었다: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막 1:6).||(b) 계 9:3; 계 9:7에서 어마어마하고 지독한 종류의 메뚜기를 묘사한다: "3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7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심문소
ajkroathvrion
청중석, 듣는 장소.||명사 아크로아테리온은 아크로아오마이(%201: 듣다, 듣는 자가 되다)에서 유래했으며, '듣기 위해 마련한 회중의 장소, 곧 공회당(auditorium)에 해당하는 것이다. 로마법에서 이 라틴어와 같이 '소송을 듣고 판정하기 위해 마련된 장소'를 의미한다(참조: Mey. ad loc.).|신약성경에서 아크로아테리온은 행 25:23에서 한번 나온다: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의를 베풀고 와서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신문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듣는 자
ajkroathv"
듣는 사람 hearer.||#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크로아테스(Thucydides 이래로)는 아크로아오마이(듣다)에서 유래했으며, '듣는 자'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아크로아테스는 70인역본에서 2회 나온다. 사 3:3에서 라하쉬(속삭임, 마법을 검)의 역어로 마법을 걸어 속삭(말하고 듣는 것)이는 자를 나타내며, 집회서 3:29에서 남의 말을 '듣는 자'를 가리킨다.||#3. 신약성경의 용법||아크로아테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온다. 롬 2:13에서 율법을 '듣는 자'를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약 1:22이하에서 도(말씀)를 '듣는 자'에 대해 사용되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참조: Walter Bauer; J.H.Thayer).
무할례
ajkrobustiva
포피, 무할례.||#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크로뷔스티아(Hippocr., Aristot. 등)는 아크로스(%202: 어떤 지점을 향하여 달림)와 뷔오(%203: 메우다)로 형성되었으나 사실상은 의학 용어 아크로포스디아(%204: 포피, 남성 기관)에 기초를 두는 것 같다. '포피'(foreskin)를 뜻하여, '포피'라는 의미에서 '무할례'(uncircumcision)라는 뜻이 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아크로뷔스티아는 70인역본에서 14회 나오며, 히브리어 알라의 역어로 나오며, '양피, 할례받지 않은, 양피를 베지 아니한'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크로뷔스티아는 신약성경에서 21회 중 1회(행 11:3)를 제외하고 모두 바울 서신에 나온다.|이 단어는 성경 헬라어와 교회에 관한 희랍 문헌에서만 발견되는데, 문자 그대로의 의미와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a) 아크로뷔스티아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사용되었다(행 11:3; 고전 7:18이하).||(b) 아크로뷔스티아는 비유적으로 존재의 상태 '무할례'를 의미한다(롬 2:25이하; 갈 5:6; 갈 6:15). 무할례자, 곧 이방인으로 믿는 것, 롬 4:10; 롬 4:11; 이교의 죄와 관련하여 "육체의 [무할례]로 죽음을 나타낸다. 골 2:13(참조: 창 17:11).||(c) 아크로뷔스티아는 이교도, 이방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롬 3:30; 롬 4:9; 골 3:11. '무할례자의 복음'은 곧 이방 세계의 복음을 뜻한다, 갈 2:7.|(Walter Bauer; K. L. Schmid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