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다
ajkouvw
듣다, 경청하다, 주의하다, 들어서 깨닫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쿠오(Oracula sibyllina 이래로)는 '듣다'라는 의미를 가졌으며, 본래 '들음'이란 의미로 소리에 대한 지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들음'은 청각 작용 뿐 아니라 들려온 내용을 정신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로 인하여 다양한 언어학적 용법이 나타난다.||#2. 70인역본의 용법||아쿠오는 70인역본에서 매우 많이 사용되었으며, 대부분 히브리어 샤마를 번역한다. 따라서 아쿠오는 히브리어 동사의 미묘한 의미의 차이를 공유한다. 여기서도 역시 본래의 의미는 청각 작용이다(예를 들면, 나팔소리를 들음, 삼하 15:10). 한편 사람이 진술, 보고, 소식 등을 받자 마자(창 14:14) 즉시 이해는 수반된다. 이해는 수용, 경청(창 1:23; 창 23:11), 인식(창 11:7; 창 42:3), 들린 것에 대한 주의력("…을 듣고" 창 3:17; 창 23:16; 출 24:7)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샤마는 '복종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샤마는 70인역본에서 자주 강조형 복합어들로 번역되었다(이를테면, 창 42:21 이하; 삿 2:17).|아쿠오는 이런 과정을 걸으면서 '듣다, 경청하다, 주의(유의)하다, 이해하다'와 '복종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고대와 중세 영어에서 '듣다'와 '복종하다'는 두 의미를 동일한 단어로 표현한 것이 나타난다. 전자의 의미는 후자의 의미를 포함하며, 어떤 문장에서는 그것을 대용하기도 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아쿠오는 신약성경에서 약 430회 나오며, 본질적으로 헬라어 문헌과 70인역본의 용법을 따른다.||(a) 아쿠오는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어떻게" 듣는가라는 신학적 질문을 할 때 나타난다.|이 메시지의 내용은 옛 언약 하에서 약속된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약성경의 메시지를 능가하는 구원의 충만함과 새로운 계기가 주어진다. 예수님 안에서 명시된 이 계시는 단지 들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된다(요일1:1).|본질상 이것은 듣는 것과 보는 것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그 이전 세대들에서 경건한 자들이 갈망했던 구원을 목격했던 자들의 눈과 귀를 향해 축복을 선포했다(마 13:16이하; 눅10:23이하). 예수님은 투옥된 세례(침례)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마 11:4; 병행구, 눅 7:22). 이와 같은 그의 말씀과 나란히 예수님의 능력있는 행위가 나타난다.|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감추인 영광을 보았으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다.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 병행구, 막 9:7; 눅 9:35). 예수님의 탄생 기사에 나타나는 목자들의 찬미의 노래 뿐만 아니라 산헤드린 앞에서의 사도들의 고백도 그들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눅 2:20; 행 4:20).||(b)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애, 부활, 오순절 사건도 보고 들은 것에 의해 인식한다.|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중대한 환상은(고전 15:9) 행 22:14, 행 22:15에 부연 설명되어 있다. 바울은 자기가 보고 들었던 것에 대해 증인이 되어야만 했다. 기독교 공동체에 미친 엄청난 효과를 미친 오순절 사건도, 본래 보고 들은 것을 통해 인식되어졌다(행 2:33).|고후 12:1 이하에 언급된 바울의 계시와 환상들도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사도는 황홀경 속에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4).|듣는 행위는 또한 요한계시록의 환상들 속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계 1:10; 계 5:11, 계 5:13 등).|한편 우리의 구원의 신비는 통찰할 수가 없다. 즉,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 2:9).||(c)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중대한 계시적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복음은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되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받아 들이는 데는 믿음이 요구된다. 그러나 롬 10:14이하(비교: 시 19:14; 신 32:21; 사 65:1 이하)에 의하면 믿음은 듣는 것을 전제로 하며, 이 들음은 전파하는데 달려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d) 눅 10:16의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라"라는 문구를 음미해 볼 때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의 말을 구분하지 않는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충분한 자격을 부여받았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것을 들은 자들에 의해 확실하게 전달되었다(히 2:3). 그 메시지를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진리의 말씀(엡1:13; 엡 4:20 이하) 또는 하나님의 말씀(행 13:7, 행 13:44 등)을 듣는 것이다. 이렇게 들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될 때 응당 그 결과로서 세례(침례)를 받게 된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행 18:8).||(e) 구약에서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연결을 신약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옛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던 말씀을 초월한다(마 5:21). 그의 가르침을 보면 그에게 주어진 권위가 표현되었다. 산상수훈을 결론짓는 비유에서 주님은 자기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로 비유한다(마 7:24이하). 눅 11:28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말을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 축복을 선포한다. 요 10:16, 요 10:27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에 대해 언급한다.|막 12:28이하에서 예수님은 경건한 유대인들에 의해 날마다 암송된 셰마("Hear") 또는 이스라엘 신조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 6:4-신 6:9; 신 11:13-신 11:21; 민 15:37-신 15:41로 이루어져 있다. 그 구절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의 전(全)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의무를 날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인용했던 것이다. 즉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인용문은 주로 70인역본을 따르고 있다.||(f) 말씀을 듣는 것은 항상 믿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는데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막4:16; 눅 8:13). 만일 뿌려진 말씀의 씨가 열매를 맺으려면 듣고 깨달아야만 한다(마 13:23; 마 15:10).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며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 거스리는 태도는 결국 강퍅한 마음을 낳게 된다. 그 까닭에 사 6:9이하에서 선포된 강퍅해짐을 나타내는 문장에 대한 언급이 신약에서 특히 유대 민족과 관련해서 여러 차례 나타난다(마 13:13이하, 병행구, 막 4:12; 눅 8:10; 요 12:40; 행 28:27; 롬 11:8).|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솔직이 그런 식으로 듣는 것은 실제로 듣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는다(요 5:37; 요 8:43). 이것은 스데반이 재판 받으면서 재판관들을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묘사했을 때 의미했던 것이며, 그 다음의 그들의 행동이 스데반의 그 책망을 입증한다(행 7:51, 행 7:57).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며 듣지 못함을 막지 못했다(막 8:17이하).|마찬가지로 히브리서에서도 성도들이 시 95:8과 관련하여 완고해짐을 긴급하게 경고하고 있다(히 3:7-히 3:11, 히 4:3-히 4:11). 이러한 완고해짐과 대조되는 현상이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주신 자들과(사 50:5)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지키는 자들(눅 8:15)의 수용성으로 나타난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은 오직 이런 식으로 듣는 것 뿐이다(마 13:11; 병행구, 막 4:11, 눅 8:10).|그러나 그러한 들음과 깨달음이 하나님의 은사이지만 결코 인간의 행위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갖가지의 주의하라는 경고에서 이러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15; 마 13:9; 병행구, 막 4:9; 눅 8:8). 또한 "듣고 깨달으라"(마 15:10). 또한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막 4:24). 또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계 2:11, 계 2:17, 계 2:29; 계 3:6, 계 3:13, 계 3:22).||(g) 요 5:25, 요 5:28에서 아쿠오는 종말의 때에 듣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즉 무덤 속에 있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것이니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무덤에서 불러 내신 나사로의 부활은(요 11:43) 이와 같은 종말 사건에 대한 예기이다.||(h) 아쿠오는 하나님의 들으심에 대해 사용되었다. 요 11:41, 요 11:42에서 하나님의 들으심에 관해 언급한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계 9:20은 우상이 듣지 못한다는 구약성경의 표현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들으신다(요 9:31).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할 때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요일 5:14). 스데반의 증언에서는(출 3:7을 인용한 행 7:34) 애굽에서 들려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탄식하는 소리에 대해 언급한다.|(참조: Walter Bauer; G.Kittel; W.Mund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