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해설 15 페이지 > 기독정보닷컴

홈 > 성경 > 원어해설
원어해설
모퉁이 돌
ajkrogwniai'o"
맨 모퉁이에 놓여있는, 모퉁이 돌, 혹은 머리돌.||#1. 고전 헬라어 및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아크로고니아이오스(순수한 성경 용어)는 아크론($206: 가장 높은, 맨 끝)과 고니아($1137: 모퉁이)의 합성어이며 '맨 끝 모퉁이에 놓여있는, 모퉁이돌, 머릿돌')을 의미한다.|이 단어는 70인역본에서 사 28:16에 한번 나오며, '모퉁이'를 뜻하는 핀나를 번역하였고, '모퉁이돌'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2. 신약성경의 용법||아크로고니아이오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엡 2:20과 벧전 2:6에만 나타나난다. 이 두 구절에서는 사 28:16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구절에 대한 이와 같은 메시야적 시각은 이미 롬 9:33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그것이 초대 기독교에서 널리 주장되어왔다. 엡 2:20에서 '터'(기초)와 모퉁이 돌을 병치시킨 것은 사도가 이사야서의 구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예언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교회 공동체가 세워진 터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며 모퉁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터 위에서 공동체는 주 안의 거룩한 성전으로 성장하며, 기독교인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지어져 간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교회의 터라고 말하는 고전 3:11의 진술은 이런 식으로 극히 미묘한 의미의 차이를 내포한다.|벧전 2:6에서 아크로고니아이오스는 벧전 2:4과 벧전 2:7의 켑할레 고니아스와 동일하다. 이것은 그 돌이 모퉁이 돌임을 확증시켜준다. 하나님이 선택한 귀중한 산 돌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산 돌'로 세움을 입기 위하여 영적 집, 곧 교회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이 말의 본래적 의미이며 그 성경적 의미를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참조: J.H.Thayer; Walter Bauer; W.Mundle).
노략물
ajkroqivnion
노략물.||#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크로디니온(Hdt. 이래)은 아크론($206: 가장 높음, 맨 끝)과 디스(%205: 더미)에서 유래했으며, '더미의 꼭대기', 즉 전리품의 가장 좋은 것을 의미한다.|70인역본에는 나오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크로디니온은 신약성경에서 히 7:4에 한번 나오며 '노략물'로 번역되었다: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a[kron
가장 높음, 맨 끝.||#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크론(Homer 이래)은 아케(%206: 끝)에서 유래했으며, '가장 높음, 극단, 최극단점'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아크론 및 아크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70회 나오며, 7개의 히브리어를 번역하며, 산의 '꼭대기'(출 34:2; 사 28:4), 침상의 '머리(꼭대기)'(창 47:31), 하늘의 '끝'(신 30:4; 신 4:32), 땅의 '끝'(렘 12:12)에 대하여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크론은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눅 16:24에서 "손가락 [끝]"에 대해 사용되었다: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b) 히 11:21에서 "지팡이 [머리]"에 대해 사용되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c) 마 24:31에서 "하늘 [끝]"에 대해 사용되었다: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d) 막 13:27에서 "땅[끝]"에 대해 사용되었다: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아굴라
!Akuvla"
아굴라Aquila(인)||아퀼라스는 '수리'를 의미하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아굴라'라고 음역한다.|아굴라는 아시아 지방인 본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며, 결혼한 직후에 로마로 이주하여 살았으나 A.D. 49년에 클라우디스 황제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로마에게 떠나라는 칙령을 선포하자 아굴라는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고린도에 와서 살았다. 그들의 직업은 장막을 만드는 일이었다.||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왔을 때 아굴라 부부를 만나 그들의 집에 유숙하며, 그들과 같이 장막 만드는 일을 했다. 아마 아굴라 부부나 바울이 서로 관심을 가진 것은 직업이 동일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같은 직업의 교인을 만난 것은 자신의 개척 전도를 위해서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바울은 아굴라의 집에서 큰 부담없이 일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행 18:2 이하). 고전 16:19에 의하면 아굴라의 집이 교회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아굴라 부부는 바울이 그곳을 떠날 때 바울을 따라 에베소에 머물렀다(행 18:18-행 18:19).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갈 때 아굴라 부부는 선교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에베소를 떠나지 않았다. 아굴라 부부는 이곳에서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유대인 아볼로(Apollos)를 만나게 되었는데, 예수님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듣고 그를 그들의 집으로 초청하여(행 18:24-행 18:26), '그리스도 안에'라는 사상의 의미와 성령의 은혜에 관해 가르쳐서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다.||클라우디우스가 죽고 그가 선포한 칙령이 효력을 잃자 아굴라 부부는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그의 집이 그리스도인들의 집회 장소, 곧 가정 교회가 되었다(롬 16:3). 바울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의 안부를 물을 때 아굴라 부부의 소식을 맨 처음 물었다. 아굴라 부부는 사도 바울을 위하여 어떠한 위협이라도 감당하려 하였기 때문에 바울과 이방인의 모든 교회가 그들에게 감사를 보낸다(롬 16:4).||아굴라 부부에 대한 바울의 마지막 언급은 딤후 4:19에 나타난다. 이 때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에 돌아와 디모데와 함께 사역하였다.|(참조: PEB; ISBE 등).
아퀴로오
ajkurovw
폐지하다, 무효로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퀴로오(Dinarchus, Diod.등)는 부정 접두사 아(%107)와 퀴로스(%207: 힘, 권세)에서 유래했으며, '무효로 하다, 힘(세력)을 빼앗다'를 의미하는 전문 법률 용어이다(Dinarch.; Ditt. Syll.; Jos. Ant.; 등).||#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아퀴로오는 70인역본에서 7회, 외경(주로 마카베오서)에 나오며 '무효로 하다'의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아퀴로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온다.||(a) 막 7:13(막 15:6)에서 법적 의미를 지닌다: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유대인들이 계명에 있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 위에 제의적 의무를 둘 때 그것은 곧 의심스러운 종교적 가치에 대한 인간의 결정을 선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런 효력도 없게 만든다.||(b) 갈 3:17에서 바울은 무효로 할 수 없는(갈 3:5) 유효한 뜻(Valid will)을 유추하여,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한 약속에 있는 하나님이 뜻이 어떻게 깨뜨려 질 수 없는지를 보여준다(갈 3:16; 갈 3:18; 참조: 갈 3:6절 이하). 디아데게(언약)는 무조건적인 법적 힘에 속하기 때문에 그 효력은 그 이후에 온 율법에 의해 변경될 수 없다. 본래의 확고한 질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은혜로운 약속이다.|(참조: Walter Bauer; Behm).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ajkwluvtw"
방해 없이, 자유로이.||#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아콜뤼토스(Pla. 이래)는 부정 접두사 아(%107)와 콜뤼오($2967)에서 유래했으며, '방해 없이, 자유로이'를 의미한다(Plato, Epict., Hdian).||#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아콜뤼토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28:31에만 나온다: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바울은 방해를 받지 않고 아주 자유롭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a[kwn
억지로 하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아콘(Homer이래)은 부정 접두사 아(%107)와 헤콘($1635: 자발적인)에서 유래했으며, '본의 아닌, 억지로 하는'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아콘은 70인역본에서 2회 나온다.|욥 14:17에서 이 단어는 의식하지 '못한 본의' 아닌 죄악에 대해, 마카베오사서 11:12에서는 법에 충성을 강요하는 것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아콘은 신약성경에서 고전 9:17에 한번 '억지로 하는'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옥합
ajlavbastron
석고 상자.||#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알라바스톤은 기원이 외래어이며, 석고 상자를 의미한다. 이 상자에 향류를 담는다(Pliny, Nat. H.).||#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알라바스톤은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옥합"이라 번역되었다: 마 26:7; 막 14:3; 눅 7:37.|(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자랑
ajlazoneiva
허풍 떰, 자랑함.||#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알라조네이아(Aristoph., Pla.이래)는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일반적으로 '허풍떰, 자랑, 사기'를 의미한다.|Theophrastus는 알라조네이아를 '실제로 거기에 없는 어떤 선이나 좋은 것(%208)에 대한 기대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라고 정의했다(char., 23, 1).|종교적인 언외의 의미는 휘브리스(%209: 방종, 무엄, 오만)와 연결되어 제시되며, 그것은 항상 신들의 징벌을 받는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알라조네이아는 70인역본에서도 때때로 이러한 사상을 지닌다. 지혜서 5:8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는 어떤 것이며, 마카베오사서 8:19에서 이 단어는 케노독시아($2754: 자만심, 허영)와 병행을 이룬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알라조네이아는 신약성경에서 2회만 나온다.||(a) 약 4:16에서 야고보는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용된 복수형 알라조네이아이스는 여러가지 자랑들, 아마도 물질적인 이득을 가져다 준 자신의 현명함, 운수, 힘 또는 기술에 대한 자만심의 수많은 예들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J. B. Mayor). 이 구절의 문맥은 하나님에 대해 상관하지 않고 물질적 이익을 얻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행위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야고보는 두 마디의 말로써 이러한 행위를 배격한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5; 약 4:17). 자기의 자랑하는 것들이 마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것 같이 행동하지만 그것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뜻의 통제 아래 있는 것이다.||(b) 이 추상 명사가 사용된 또 하나의 다른 유일한 예는 요일 2:16의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알라조네이아)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는 구절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 자신이 주권적으로 자기의 생의 형태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을 이루려고 노력하지만 세상도 지나간다는 것에서 보여진 것과 같이(17절), 실제로 결정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여기에서 "이생의 자랑"이 육신의 정욕 및 안목의 정욕과 대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생의 자랑은 이득과 지위에 대한 욕망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이와 같은 세 가지의 개념을 사용한 것은 세상으로부터 유래한, 즉 타락한 인간성으로부터 유래한 악의 종류를 분류하는데 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세상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자기중심적, 탐욕적 구조를 폭로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탐욕적 구조는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요일 2:15).|(참조: Walter Bauer; G. Delling; C. Brown).
자긍하는
ajlazwvn
허풍선이, 사기꾼.||#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명사 알라존(Cratinus, Aristoph.이래)는 자기 자신을 실제 이상으로 평가하여, '자기가 가진 것보다 더 많고 더 좋은 것들을, 심지어 전혀 소유하지 않은 것도 가진 것으로 여기고 자기가 수행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하는 자'(O. Ribbeck; Aristot, Eth. Nic.,Ⅳ).||(b) 따라서 알라존은 '떠돌이 협잡군', '떠돌이 허풍쟁이'로 관객의 사랑을 받는 희극의 등장 인물이었다(Cratinus, Eupolis, Aristophanes, Alkaios, Menander). 떠도는 사변론자에게도 역시 경멸하는 의미의 별명으로 '알라존'이라는 별명이 붙혀졌다.||(c) 알라존은 헤로도투스 이래로 형용사로 나타나는데, 트리키아 지방의 민속적 이름인 알라존(Alazon)에서 유래하였거나(Bonfante, Frisk) 아니면 '유랑하다'라는 뜻의 단어 알라조마이(%210)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다(Boisacq, Hofmann). 후대에 이 단어의 의미는 대개 '허풍선이' braggart, '자랑꾼' show-off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d) 매우 자주 웅변가(연설가), 현인이나 철인, 시인, 마술사, 의사, 요리사나 관원을 알라존으로 불렀다(참조: The Miles gloriosus of Plautus).||#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알라존은 70인역본에서 3회 나오며, 욥 28:8에서 샤하츠(교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합 2:5에서 야히르(건방진, 오만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알라존은 하나님을 신용하지 않는 건방진 자이다.|잠 21:24에서 히브리어는 그 뜻이 불분명한데, 알라존으로 번역했다. 여기서 알라존은 아우다데스($829: 자기 만족의)와 관계되어 있다(참조: G. Delling; C. Brown).||#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알라존은 신약성경에서 2회, 롬 1:30; 딤후 3:20의 목록에 나온다.|이 두 구절에서 모두 휘페레파노스($5244: 교만한, 거만한, 자랑하는)가 함께 사용되고 있다. 알라존은 엄청난 주장을 함으로 다른 이에게 자기의 인상을 심으려고 하는 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허풍선이, 사기꾼, 협잡배, 사칭자 등에 대하여 사용된다. 여기에서 이 단어는, 이 단어가 의미할 수 있는 가장 넓은 범위까지를 염두에 두고 사용된 것 같다. 즉, 우리는 이 단어에서 '광적인 자만과 어리석은 말'과 같은 이교적 정신, 그리고 사 10:7-사 10:11에 반영된 그런 종류의 것, 아니 사람들이 남에게 자신의 인상을 남기고자 하거나 그리고 많은 경우에 자기 자신을 기만할 때 사용되는 모든 파렴치한 주장과 과시적 행동을 읽을 수 있다(C.E.B.Cranfield, Romans, ICC).|(참조: Walter Bauer; J.H.Thayer; E.Guting; C.Brown).
울리다
ajlalavzw
함성을 지르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알라라조(Pind. 이래)는 알랄레(%211)나 알랄라(%212)에서 유래했으며, '함성을 지르다'를 의미한다. 여기서||(a) 전쟁의 공격에서 군사들이 부르짖는 '전쟁의 소리',|(b) 기쁨과 환호의 소리,|(c) 슬픔이나 애도의 소리에 대하여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알랄라조는 70인역본에서 21회 사용되었으며, 주로 루아(소리치다, 외치다, 12회)와 얄랄(울부짖다, 4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시 46(47):2; 65(66):2에서 즐거운 소리에 대하여, 렘 4:8; 렘 32:20(렘 25:34)에서 애도나 통곡에 대해, 수 6:20; 삿 15:14에서 전쟁의 소리에 대해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알라라조는 신약성경에서 2회 사용되었다.||(a) 막 5:38에서는 애도의 소리나 통곡에 대하여 사용된다.||(b) 고전 13:1에는 "울리는 꽹과리"에 대해 사용된다. 여기서 격렬한 감정을 일으키는 예배에 기뻐 날뛰는 소리는 이러한 예배에서 사용된 심벌즈(개역: 꽹과리)와 연결된다.|(참조: Walter Bauer; E. Peterson).
말할 수 없는
ajlavlhto"
말할 수 없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알랄레토스(Phidod.; Anth. Pal. 5. 4 등)는 부정 접두사 아(%107)와 랄레오($2980: 말하다, 이야기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말로 표현되지 않는, 말할 수 없는'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알랄레토스는 신약성경에서 롬 8:26에만 나온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벙어리
a[lalo"
말 못하는, 벙어리의||#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알랄로스(Aechyl. 이래)는 부정접두사 아(%107)와 랄로스(%213: 말많은)에서 유래했으며, '말못하는, 벙어리의'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알랄로스(Aeschyl.이래)는 70인역본에서 2회 나오며, 시 31:18과 시 38:13에서 '벙어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알랄로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는데 막 7:37에서 "벙어리", 막 9:17; 막 9:25에서 "벙어리의"라고 번역되었다. "벙어리의", 더 정확히 '말못하는' 영은 그 영(귀신)의 특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소금
a{la"
소금 sal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할라스(Homer 이래)는 할스($251)로도 표기하며, '소금' salt을 의미한다, 이 명사는 시적으로는 '바다'를 나타낸다. 속담으로는 한 부셀의 소금을 함께 먹었다. 즉 '오랜 친구다' be old friends라는 뜻을 지니며, '우리들 사이에 소금이 있다' 혹은 '내가 소금을 사랑하는 것 같이 당신을 사랑하다'라는 속담도 있다.|소금이 양념이자 방부제로서 지니는 가정과 의약상의 가치는 오늘날 만큼이나 고대 세계에서도 보편적인 것이었다. 플리니는 '인체에 태양과 소금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라는 그 당시 통용되었던 말을 인용하고 있다(Nat. Hist. 31, 98, 102).|희생 제물에 소금을 치는 관습이 희생 제물을 신의 식사로 보는 원시 사상에서 유래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소금을 신성과 결합시키는 것(Plato)은 부패 및 타락이 악마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사상과 균형을 이룬다. 영구동맹은 소금친 빵을 먹음으로써, 혹은 소금만을 먹음으로써 체결되었다(Aristot.). 카토(Cato), 버질(Virgil)과 플리니(Pliny)는 모두 토지의 생산성을 증진시키는 소금의 능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2. 70인역본의 용법||할라스는 70인역본에서 32회 나오며, 주로 멜라흐를 번역하며, 멜라흐와 말라흐도 몇 회 번역하고 있다.||(a) 할라스는 창 14:3에서 싯딤(싯딤 골짜기)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싯딤 골짜기는 후에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고 난 후 염해 아래로 침몰했다.|팔레스타인에서 소금을 제공해주는 주요 근원지는 소위 소금산(예벨 우스둠[Jebel Usdum])인데, 이 언덕은 사해의 남서쪽 모퉁이를 따라 약 7마일쯤 뻗쳐 있었다. 그리고 같은 지역에 있는 소금 구덩이들에서 물이 증발하고(습 2:19; 마카베오일서 11:35) 해안을 따라 있는 늪의 개펄에서 수분이 증발하여(겔 47:11) 소금이 만들어졌다.||(b) 소금은 팔레스타인(스 7:22; 집회서 39:26)과 그 외의 고대 세계에서 채소를 일상적인 음식물로 삼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생활 필수품이었다. 따라서 소금은 상업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었고, 이런 사실은 소금에 과세를 부과하였다는 언급(마카베오일서 10:29)과, 토라를 '세상 사람이 없이 지낼 수 없는' 소금에 비유하는 언급(Sopherim 15:8)이 많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소금은 생선과 고기의 보존을 위해(바룩일서 6:28), 치통에(shabbath 6:5), 양념으로(욥 6:6) 사용되었다. 가축의 사료에 소량의 소금을 치는 것도 맛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사 30:24).||(c) 겔 16:4에서 소금으로 갓 태어난 아기를 닦았다. 이 습관을 동양에서 악영들을 쫓아내기 위해 행해졌다. 혹은 생명으로 보존하기 위해, 정화를 위해, 또는 아기가 태어난 후 부정한 상태에서 떠났음을 나타내기 위해 행했던 것 같다. 이 관습은 지금도 아람인들 사이에 행해지고 있다. 부정과 귀신의 역사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d) 삿 9:45에 의하면 적의 도시를 점령한 후 그곳에 소금을 뿌리었다. 아비멜렉이 세겜성을 정복한 후 그 성에 소금을 뿌린 것은 그 땅이 쓸모없는 땅이기 때문이 아니다. 다량의 소금을 뿌리는 것은 그 성읍이 불모와 메마른 땅이 되라는 저주의 징표이다(F.C.Fensham, Ba 25).|염(사)해, 주변의 폐허 지역은 자연적 경계선을 형성하였으며(민 34:3), 수많은 양의 소금은 초목을 멸종시키고(신 29:23) 아무도 살 수 없는 '황폐한 지역으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렘 17:6).||(e) 렘 17:6에서 불신자는 소금 땅에 거할 것이다. 육적인 것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 앞에서 말한 그러한 소금 땅에 거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황폐하고 메마른 것이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과 같으리라"고 하셨다. 이러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건강하고 풍요하다.||(f) 왕하 2:19 - 왕하 2:22에 엘리사가 맨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 여리고에서 깨끗치 못한 물을 고치었다. 여리고의 물이 깨끗하지 못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누구든지 이 도시를 재건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으리라고 선언된 그 저주의 부수적인 결과였다(수 6:26; 왕상 16:24).|엘리사는 그들에게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져오게 한 다음 물 근원으로 가서 거기에 소금을 뿌리며, 여호와께서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다시는 죽음이나 산물을 내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물이 깨끗한 물로 고쳐졌다.|엘리사가 맨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 그가 행한 이 치유 이적은 부패와 사망을 막아내는 소금의 상징적 면을 이용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죄는 마땅히 마음 속에 있는 그 수원에서 정화되어야 하는 것이지 반 마일쯤 내려간 시내에서, 곧 행위에서 정화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수원의 샘에 소금을 넣으라 그러면 거기서 흘러나오는 물은 맑고 향기로울 것이다(A.Maclaren).||(g) 스 4:14에 "궁전의 소금을 먹는다"는 것은 사실상 왕의 급료를 받는다는 것이다. 궁전의 소금을 먹는다는 것은 사실상 왕의 급료 지불 명부에 올라있다는 말이다(참조: 라틴어 살라리움[salarium]에서 나온 급료 salary, 항상 필요한 살 sal, 곧 소금을 구입하도록 로마 군인들에게 지급된 급여). 그러나 이 말을 생각할 때 맨 처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충성에 관한 것이다. 신복들은 왕께 충성할 신성한 의무에 묶여있는 것이다. 그리고 빵과 소금을 함께 먹는 것은 우호동맹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Russell, Aleppo 1, 232).|한편 역적에 대한 페르시아 말은 네메크 카람(소금에 충실하지 않은 자)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고 있다. 특별히 성직자들은 하나님의 급료 명부에 올라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충성할 신성한 의무가 있음을 알고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h) 마찬가지로 레 2:13의 "언약의 소금"도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가 엄숙한 것이어서 결코 파기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모든 희생 제물에 소금을 치는 관습이 나왔다(출 30:35; 겔 43:24). 윌슨(H.C.Wilson, ExpT 35, 1923-4, 136f.)은 희생 제물이 보존되지 않고 다 소모되었기 때문에 곡식을 보관하는데 소금이 반드시 필요한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레 2:13). 이 상징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영원성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신성한 향(출 30:35)과 미쉬나에 의하면 심지어 희생제사 불의 땔감에 조차도(Menahoth 20b) 마찬가지로 소금이 뿌려졌다.|레 21:8,17에서 이처럼 소금 뿌려진 희생 제물은 심지어 하나님의 음식으로 불리어졌다. 이것은 신의 욕구에 대한 이교적 사상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말에는 절대 필수적이라는 개념이 암시되어 있다. 소금이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희생 제물(즉 희생 제물로 나타내어진 언약)도 하나님 - 인간 관계에서 필수적인 것이다(요 6:51).||(i) 랍비 유대교에서는 제의적 의미가 약화되었다: "이것은 소금으로 체결된 주님과의 영원한 언약이다. 성경(= 하나님)은, 오직 그 자체만으로 유익한 것 일뿐 아니라 다른 것들을(예컨대 언약) 유익하게 지켜주는 어떤 것(소금)에 의해 아론과 언약을 맺은 것이다"(Mid. Siph. Num. 118 on 18:19). '토라는 소금과 같으며 …세상은, 소금없이 견딜 수(혹은 지속할 수) 없다'(Sophi 15:18). '소금은 하나님과 결합되어 있으며, 부패와 타락은 악마(demons)와 결합되어 있다'(Plato). 서기관의 제자들에게 준 랍비적 가르침 가운데에는 겸손하고 겸허한 정신을 지니며 부지런하고 (직역하면) 소금에 절인 것 같이 되라는 권면도 포함되어 있다(Derek 'Eres. Zuta). 여기에서 소금은 지혜롭고 총명하고 현명함을 의미하는 것 같다(W.Nauck, StTh 6, 1952, 165-78). 똑같은 구절이 미쉬나에도 나온다. 즉 만일 아들이 근면하고 지적인 면에서 영리하다면, 아들의 율법 학습이 아버지의 율법 학습을 앞지르게 된다(Kiddushin 29b). 여담이지만, 재치있는 언변은 소금에 비유된다(Kethuboth 66b).||#3. 신약성경의 용법||할라스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마 5:13에서 "세상"에 해당하는 게($1093)는 문자적으로 '땅'이다.|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은 이 구절에 대하여 소금이 생선이나 고기를 보존해주는 방부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으로서 세상의 부패를 막는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1093) 짜게 하리요"(할리스데 세타이<할리조[$233]>: 소금치다, 소금으로 맛내다). 이것은 부패를 지연시키는 것보다 더 유익한 개념이다. 이것은 경작할 땅을 기름지게 하는 비료(거름)로서의 소금의 자극적인 속성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요 10:10).|누가(눅 14:34)와 마가(막 9:50)가 이와 똑같은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들도 아르튀오(맛을 내다)를 사용할 때 음식이나 토양에서 그 속성을 발휘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세상을 부패하는 데에서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상을 구원하고(요 3:17) 생명을 풍성하게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거룩한 삶을 위해 요구되는 자극적인 힘을(경작할 수 있는 땅에 비견되는) 인류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너희의 특권이다'라는 것이 그 의미이다.|"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염화 나트륨(NaCl)이라는 화학 합성물로 고정된 것이, 짜게하는 소금의 속성을 자칫하면 잃게 할 수 있다고 언급되는 것은 소금 자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에서 상용하는 깨끗하지 못한 소금 중의 하나를 예로들어 물리적인 분해나 바람에 날려온 석고 가루와 혼합되어 소금의 그 맛을 잃을 수도 있고 또 잃기도 한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Pliny, 3, 31, 34). 이것은 "소금이 만일(에안) 그 맛을 잃으면"이란 구절이(사실상) '∼할 때는 언제나'(whenever)로 번역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은 사실에 상반되는 조건이 아니라 실제적인 가능성이기 때문이다.|한편 "그 맛을 잃으(면)"에 해당하는 모란데는 모라이노($3471)의 가정법 과거 수동이다. 모라이노는 '어리석다, 어리석게 행동하다, 어리석음을 보이다'를 뜻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지혜로운 주의 제자들이 어리석게 되거나 행동하게 된다면 무엇으로 세상에 그 자극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더 이상("후에는") 아무 쓸모가 없어 모욕으로 무시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 이스라엘에서는 맛을 잃은 소금을 집의 평평한 지붕 위에 있는 흙에 뿌려, 흙을 딱딱하게 만들어, 새는 곳을 방지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평평한 지붕은 어른들의 만남의 장소요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이용되기 때문에, 지금도 아무 쓸모 없는 소금이 발 아래에 밟힌다고 언급되기도 한다.|"세상의 소금"이란 이 구절을 이렇게 이해할 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구절과 잘 어울린다. 비록 우리가 소금이 음식에 첨가되었는지를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맛으로 느낄 수는 있다. 소금은 혀로 감지되고 빛은 눈으로 감지되며, 어떤 경우든 사용자를 기쁘게 한다. 산 위에 있는 도시는 밤이라 할지라도 빛 때문에 감추일 수 없다. 음식에 소금이 쳐졌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그 음식을 먹은 사람은 다 알게 된다. "너희는 맛을 잃은 소금을 가지고 무엇을 짜게 할 수 있는가 혹은 감추인 등불로 무엇을 밝힐 수 있는가? 너희의 자극적인 능력을 분명히 드러내어서 세상을 구원하고 생명을 충성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너희의 그러한 선행의 근원을 식별할 수 있게 하라". 보른호이저(K. Bornhauser)는 마 5:13과 마 5:14의 첫 부분에서 강조적인 의미로 나온 휘메이스(너희들)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항하여 말씀하신 내용의 한 단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소금과 빛인 사람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유대의 지혜로운 자들(서기관)에 반대하여, 자기 제자들을 참된 교사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이라고 부른다.|맛잃은 소금과 감추인 등불은 모두 똑같이 무용한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인 제자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적극적이고 빛을 밝히는 일을 하지 못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참조: 빛과 지혜를 이와 유사하게 결합시킨, 엡 5:8이하). 그래서 무시와 멸시를 당한다.||(b) 막 9:50의 말씀은 마 5:13과 눅 14:34에 약간 다른 형태로 나온다. 마가는 헬라어에서 일반적으로 사물의 속성을 나타내는 아날로스($358: 짠 맛 없는)을, 마태와 누가는 일반적으로 인간적인 특성을 지닌 모라노마이(바보가 되다, 어리석게 되다)를 사용했다. 하지만 거의 동일한 것을 표현한다고 이해한다.|모라이노마이는 '맛없음'을 '바보'와 '소금'을 '지혜'와 연결시키는 이 말씀의 랍비적인 배경을 지지해 준다. 이리하여 나우크(W.Nauck)는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는 말씀을, 서기관들이 제자들에게 현명한 사람이 되라고 한 랍비적 가르침과 똑같은 의미로 이해한다. 막 9:50에 나온 종말론적 지혜는 장차 도래할 마지막 사건을 염두에 두고서 행하는 제자들의 종교적인 태도, 신앙과 행위 안에서 영위되는 제자들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마 10:16; 엡 5:15이하).|이런 종말론적 사건들이 막 9:49과 막 9:50절 사이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StTh 6, 1952, 165-78). 기독교인의 지혜로서의 소금은 초대 교회에서 하나의 은유로 채택되었다(Ephrem Syrus, Gelasian Sacramentary).|막 9:50의 마지막 문구인 "서로 화목하라"는 앞에서 말한 내용에 이어서 서기관들에게 계속 행해진 랍비의 가르침, 곧 '그들은 모욕을 감수하여 모든 사람에게서 총애를 받아야 한다'는 말과 공통점이 있다. 막 9:50의 마지막 문장은 의미상으로 두 개의 헬라어 명령문이 결과를 나타내는 카이(kai)로 연결되어 조건적으로 나열된 하나의 실례이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 그러면 너희는 서로 화목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만일 여기에서 제자가 희생 제물로 여겨진다면(롬 12:1),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는 말씀은 적절한 것이다. 소금이 없이는 희생 제물이 제아무리 큰 것이라 하더라도 무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는 말씀 뒤에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이 오는 것은 어울린다. 이는 제자들이 방금 누가 제일 큰가에 관하여 논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막 9:34). 그러나 희생 제물 중에서 살고기나 완전히 태운 번제나 곡식이나 향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지에 관한 다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소금을 치고 제물로 바쳐진 것이라면 어느 것이든지 모두 받아들여진다. 어떤 부류의 것으로 드렸든간에 소금은 소금이었다. 더구나 소금은 공동의 식사를 한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었다. 여기에서 친구들 사이에 투쟁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 언약은 신성한 것이었다. 따라서 유다의 배신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말하자면 소금이 엎어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W.R.Hutton, ExpT 58, 1946-1947, 168).||(c) 눅 14:34; 눅 14:35에서도 소금은 마 5:13와 막 9:50과 같은 의미를 지니지만 특별히 소금은 자기 희생, 자기 부정의 정신을 함축한다. 눅 14:25 - 눅 14:33까지의 내용이 이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내용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지혜와 자기 희생 및 자기 부정의 정신으로 계속 전심전력해야할 필요에 대한 강화이다.||(d) 골 4:6에서 바울은, 기독교인의 말은 언제나 은혜롭고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아야 한다고 선언한다. 소금은 강화에 맛을 주어 그것을 입에 권한다(참조: 욥 6:6). 그리고 아르튀오($741: 맛을 내다)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아마도 이것이 여기에 사용된 은유의 기본 사상인 것 같다. 소금은 또한 부패를 막아 온전한 것이 되게 한다. 엡 4:29에 동일한 사상이 담겨 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은혜를 끼치게 하라"(J.B.Light food). 나우크(W.Nauck)는 골 4:6을 비유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소금이 지혜를 뜻한다고 본다: '너희 말은 언제나 은혜 가운데서 행해져야하며, 그 말은 지혜로와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너희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StTh 6, 1952, 165-78). 몇몇 교회 교부들은 소금을 이처럼 지혜의 의미로 받아들인다(Origen, Hom. in Gen 5:12).
기름을 바르다
ajleivfw
기름 바르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알레이포(Homer 이래)는 리포스(%214: 기름진)와 같은 어근에서 유래했으며, '기름을 바르다, 기름을 붓다'를 의미한다.|이 단어는 미케네(Mycenaean) 헬라어와 같은 초기 헬라어에 나오며 부드러운 지방질($3464, 연고) 또는 기름($1637)이 사람이나 사물 위에 바르거나 부어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고대인들은 다양한 종류의 관유($1637)가 몸 속으로 깊이 스며들어 힘과 건강과 미와 기쁨까지도 전달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기 시대에 있어서 이와 같은 기름부음에 대한 개념은 화장과 약용으로의 통상적 용법에 더하여 상징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일찍부터 연고와 기름의 정결하고 힘을 주는 성질은 정화, 육체의 위생과 미용의 목적을 위하여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상처의 치료와 질병들을 치유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실제적인 치료의 특성은 기름부음과 관련된 마술적 개념들과 분리될 수 없다. 모든 병은 신들이나 귀신들의 능력과 관계된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기름부음은 이러한 마술적 관념들과 관련하여 관리나 애굽의 예속된 왕 또는 바벨론의 제사장의 임명시에 기름을 부은데서 더욱 발전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행동은 의무와 영예 또한 기름부음을 받는 자를 위한 보호까지 나타낸다. 거룩한 나무, 우상들 또한 무기들까지 기름을 발랐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들은 특별한 능력을 부여 받았던 것이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알레이포는 70인역본에서 20회 나온다.||(a) 알레이포는 수크(기름을 바르다, 기름 붓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육체를 보호하기 위한 기름 바름과 아름다움을 위하여 기름을 발랐다(룻 3:3; 대하 28:15; 단 10:3; 삿 16:8; 미 6:15). 상 중에는 기름을 바르는 것을 행치 않았다(삼하 14:2; 참조: 12:20).||(b) 알레이포는 투아흐(회칠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투아흐는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진리(겔 13:10-15)나 정치가들의 악(겔 22:28)을 완전히 감추어 버리기 위해 투아흐, 곧 회칠을 한 것이다.||(c) 알레이포는 마샤흐(기름을 붓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창 31:13에서 기둥에 기름을 부음, 출 40:15; 민 3:3에서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음에 대하여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알레이포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온다.|알레이포는 보다 더 중요한 단어 크리오와 비교할 때 오로지 사람들에게만 행하여지는 기름부음에 대한 육체적 행위만을 언급한다. 기름은 바르거나 붓거나 하는 것이다. 사용되는 기름은 감람유나 또는 더 비싼 몰약, 향료 등이다.|신약성경에서 이 행위의 신학적 의미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개념으로 구별될 수 있다.||(a) 마 6:17에서 기름 바르는 것은 몸의 보호와 관련되며, 유대인의 관습에 따르면 기쁨과 축제의 무드를 표현한다. 유대교에서 기름 바름은 금식과 같이 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금식 기도를 은밀히 하여 다른 사람을 위한, 심지어 금식하는 자를 위한 기쁨과 축제의 때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위해 금식하는 자들에게 기름 바름을 그만두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기름을 바름은 금식 기간에도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b) 마 26:7; 눅 7:38; 요 11:2; 요 12:3에서 기름 붓는 것은 유대교에서와 같이 손님에게 대한 존경의 표시이다. 눅 7:38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이러한 존경을 나타내는데 실패한 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이 타락한 자들 중의 하나로 간주하는 이 겸손한 여인의 손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바리새인을 폭로하신다. 이곳에서 기름부음은 믿음의 표현이고 이 기름부음을 행치 않는 것은 불신의 표현이 된다.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음으로 말미암아 여인은 더욱 깊은 의미에서 그에게 경의를 표했는데(막 26:7), 이는 장래를 위해 그의 몸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막 26:12). 이 기름부음은 십자가에 죽으심에 대한 예시적 기름 부음이다. 요 12:3의 경우도 비슷하다.||(c) 병자들에게 기름 바름은 의약과 귀신 축출을 위한 것이다. 기름 바름이 병든 자들에게 행해지는 곳에서(막 6:13; 약 5:14) 우리는 고대 세계에 있어서 다른 곳에서도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랐던 것을 생각한다. 신약에서 강조되지는 않았으나 기름 바름은 의술적인 특성들도 말하고 있다. 막 6:13에서 제자들은 동터오는 나라의 사자로서의 역할에서 전도하고 귀신들을 쫓을 뿐만 아니라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었다.|약 5:14에서 장로들은 기름을 발라 치료하고 용서에 대하여 기도하고 약속하는 그들의 사역을 계속해야 한다. 따라서 병 고침과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됨에 대한 가시적 표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기름 바름을 마술과 유사한 것으로 오해함은 특히 기도의 수반을 중요시하는 약 5:13이하에서 단호하게 제거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Schlier; D. Mul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