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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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sal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할라스(Homer 이래)는 할스($251)로도 표기하며, '소금' salt을 의미한다, 이 명사는 시적으로는 '바다'를 나타낸다. 속담으로는 한 부셀의 소금을 함께 먹었다. 즉 '오랜 친구다' be old friends라는 뜻을 지니며, '우리들 사이에 소금이 있다' 혹은 '내가 소금을 사랑하는 것 같이 당신을 사랑하다'라는 속담도 있다.|소금이 양념이자 방부제로서 지니는 가정과 의약상의 가치는 오늘날 만큼이나 고대 세계에서도 보편적인 것이었다. 플리니는 '인체에 태양과 소금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라는 그 당시 통용되었던 말을 인용하고 있다(Nat. Hist. 31, 98, 102).|희생 제물에 소금을 치는 관습이 희생 제물을 신의 식사로 보는 원시 사상에서 유래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소금을 신성과 결합시키는 것(Plato)은 부패 및 타락이 악마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사상과 균형을 이룬다. 영구동맹은 소금친 빵을 먹음으로써, 혹은 소금만을 먹음으로써 체결되었다(Aristot.). 카토(Cato), 버질(Virgil)과 플리니(Pliny)는 모두 토지의 생산성을 증진시키는 소금의 능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2. 70인역본의 용법||할라스는 70인역본에서 32회 나오며, 주로 멜라흐를 번역하며, 멜라흐와 말라흐도 몇 회 번역하고 있다.||(a) 할라스는 창 14:3에서 싯딤(싯딤 골짜기)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싯딤 골짜기는 후에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고 난 후 염해 아래로 침몰했다.|팔레스타인에서 소금을 제공해주는 주요 근원지는 소위 소금산(예벨 우스둠[Jebel Usdum])인데, 이 언덕은 사해의 남서쪽 모퉁이를 따라 약 7마일쯤 뻗쳐 있었다. 그리고 같은 지역에 있는 소금 구덩이들에서 물이 증발하고(습 2:19; 마카베오일서 11:35) 해안을 따라 있는 늪의 개펄에서 수분이 증발하여(겔 47:11) 소금이 만들어졌다.||(b) 소금은 팔레스타인(스 7:22; 집회서 39:26)과 그 외의 고대 세계에서 채소를 일상적인 음식물로 삼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생활 필수품이었다. 따라서 소금은 상업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었고, 이런 사실은 소금에 과세를 부과하였다는 언급(마카베오일서 10:29)과, 토라를 '세상 사람이 없이 지낼 수 없는' 소금에 비유하는 언급(Sopherim 15:8)이 많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소금은 생선과 고기의 보존을 위해(바룩일서 6:28), 치통에(shabbath 6:5), 양념으로(욥 6:6) 사용되었다. 가축의 사료에 소량의 소금을 치는 것도 맛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사 30:24).||(c) 겔 16:4에서 소금으로 갓 태어난 아기를 닦았다. 이 습관을 동양에서 악영들을 쫓아내기 위해 행해졌다. 혹은 생명으로 보존하기 위해, 정화를 위해, 또는 아기가 태어난 후 부정한 상태에서 떠났음을 나타내기 위해 행했던 것 같다. 이 관습은 지금도 아람인들 사이에 행해지고 있다. 부정과 귀신의 역사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d) 삿 9:45에 의하면 적의 도시를 점령한 후 그곳에 소금을 뿌리었다. 아비멜렉이 세겜성을 정복한 후 그 성에 소금을 뿌린 것은 그 땅이 쓸모없는 땅이기 때문이 아니다. 다량의 소금을 뿌리는 것은 그 성읍이 불모와 메마른 땅이 되라는 저주의 징표이다(F.C.Fensham, Ba 25).|염(사)해, 주변의 폐허 지역은 자연적 경계선을 형성하였으며(민 34:3), 수많은 양의 소금은 초목을 멸종시키고(신 29:23) 아무도 살 수 없는 '황폐한 지역으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렘 17:6).||(e) 렘 17:6에서 불신자는 소금 땅에 거할 것이다. 육적인 것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 앞에서 말한 그러한 소금 땅에 거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황폐하고 메마른 것이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과 같으리라"고 하셨다. 이러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건강하고 풍요하다.||(f) 왕하 2:19 - 왕하 2:22에 엘리사가 맨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 여리고에서 깨끗치 못한 물을 고치었다. 여리고의 물이 깨끗하지 못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누구든지 이 도시를 재건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으리라고 선언된 그 저주의 부수적인 결과였다(수 6:26; 왕상 16:24).|엘리사는 그들에게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져오게 한 다음 물 근원으로 가서 거기에 소금을 뿌리며, 여호와께서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다시는 죽음이나 산물을 내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물이 깨끗한 물로 고쳐졌다.|엘리사가 맨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 그가 행한 이 치유 이적은 부패와 사망을 막아내는 소금의 상징적 면을 이용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죄는 마땅히 마음 속에 있는 그 수원에서 정화되어야 하는 것이지 반 마일쯤 내려간 시내에서, 곧 행위에서 정화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수원의 샘에 소금을 넣으라 그러면 거기서 흘러나오는 물은 맑고 향기로울 것이다(A.Maclaren).||(g) 스 4:14에 "궁전의 소금을 먹는다"는 것은 사실상 왕의 급료를 받는다는 것이다. 궁전의 소금을 먹는다는 것은 사실상 왕의 급료 지불 명부에 올라있다는 말이다(참조: 라틴어 살라리움[salarium]에서 나온 급료 salary, 항상 필요한 살 sal, 곧 소금을 구입하도록 로마 군인들에게 지급된 급여). 그러나 이 말을 생각할 때 맨 처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충성에 관한 것이다. 신복들은 왕께 충성할 신성한 의무에 묶여있는 것이다. 그리고 빵과 소금을 함께 먹는 것은 우호동맹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Russell, Aleppo 1, 232).|한편 역적에 대한 페르시아 말은 네메크 카람(소금에 충실하지 않은 자)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고 있다. 특별히 성직자들은 하나님의 급료 명부에 올라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충성할 신성한 의무가 있음을 알고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h) 마찬가지로 레 2:13의 "언약의 소금"도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가 엄숙한 것이어서 결코 파기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모든 희생 제물에 소금을 치는 관습이 나왔다(출 30:35; 겔 43:24). 윌슨(H.C.Wilson, ExpT 35, 1923-4, 136f.)은 희생 제물이 보존되지 않고 다 소모되었기 때문에 곡식을 보관하는데 소금이 반드시 필요한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레 2:13). 이 상징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영원성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신성한 향(출 30:35)과 미쉬나에 의하면 심지어 희생제사 불의 땔감에 조차도(Menahoth 20b) 마찬가지로 소금이 뿌려졌다.|레 21:8,17에서 이처럼 소금 뿌려진 희생 제물은 심지어 하나님의 음식으로 불리어졌다. 이것은 신의 욕구에 대한 이교적 사상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말에는 절대 필수적이라는 개념이 암시되어 있다. 소금이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희생 제물(즉 희생 제물로 나타내어진 언약)도 하나님 - 인간 관계에서 필수적인 것이다(요 6:51).||(i) 랍비 유대교에서는 제의적 의미가 약화되었다: "이것은 소금으로 체결된 주님과의 영원한 언약이다. 성경(= 하나님)은, 오직 그 자체만으로 유익한 것 일뿐 아니라 다른 것들을(예컨대 언약) 유익하게 지켜주는 어떤 것(소금)에 의해 아론과 언약을 맺은 것이다"(Mid. Siph. Num. 118 on 18:19). '토라는 소금과 같으며 …세상은, 소금없이 견딜 수(혹은 지속할 수) 없다'(Sophi 15:18). '소금은 하나님과 결합되어 있으며, 부패와 타락은 악마(demons)와 결합되어 있다'(Plato). 서기관의 제자들에게 준 랍비적 가르침 가운데에는 겸손하고 겸허한 정신을 지니며 부지런하고 (직역하면) 소금에 절인 것 같이 되라는 권면도 포함되어 있다(Derek 'Eres. Zuta). 여기에서 소금은 지혜롭고 총명하고 현명함을 의미하는 것 같다(W.Nauck, StTh 6, 1952, 165-78). 똑같은 구절이 미쉬나에도 나온다. 즉 만일 아들이 근면하고 지적인 면에서 영리하다면, 아들의 율법 학습이 아버지의 율법 학습을 앞지르게 된다(Kiddushin 29b). 여담이지만, 재치있는 언변은 소금에 비유된다(Kethuboth 66b).||#3. 신약성경의 용법||할라스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마 5:13에서 "세상"에 해당하는 게($1093)는 문자적으로 '땅'이다.|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은 이 구절에 대하여 소금이 생선이나 고기를 보존해주는 방부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으로서 세상의 부패를 막는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1093) 짜게 하리요"(할리스데 세타이<할리조[$233]>: 소금치다, 소금으로 맛내다). 이것은 부패를 지연시키는 것보다 더 유익한 개념이다. 이것은 경작할 땅을 기름지게 하는 비료(거름)로서의 소금의 자극적인 속성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요 10:10).|누가(눅 14:34)와 마가(막 9:50)가 이와 똑같은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들도 아르튀오(맛을 내다)를 사용할 때 음식이나 토양에서 그 속성을 발휘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세상을 부패하는 데에서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상을 구원하고(요 3:17) 생명을 풍성하게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거룩한 삶을 위해 요구되는 자극적인 힘을(경작할 수 있는 땅에 비견되는) 인류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너희의 특권이다'라는 것이 그 의미이다.|"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염화 나트륨(NaCl)이라는 화학 합성물로 고정된 것이, 짜게하는 소금의 속성을 자칫하면 잃게 할 수 있다고 언급되는 것은 소금 자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에서 상용하는 깨끗하지 못한 소금 중의 하나를 예로들어 물리적인 분해나 바람에 날려온 석고 가루와 혼합되어 소금의 그 맛을 잃을 수도 있고 또 잃기도 한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Pliny, 3, 31, 34). 이것은 "소금이 만일(에안) 그 맛을 잃으면"이란 구절이(사실상) '∼할 때는 언제나'(whenever)로 번역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은 사실에 상반되는 조건이 아니라 실제적인 가능성이기 때문이다.|한편 "그 맛을 잃으(면)"에 해당하는 모란데는 모라이노($3471)의 가정법 과거 수동이다. 모라이노는 '어리석다, 어리석게 행동하다, 어리석음을 보이다'를 뜻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지혜로운 주의 제자들이 어리석게 되거나 행동하게 된다면 무엇으로 세상에 그 자극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더 이상("후에는") 아무 쓸모가 없어 모욕으로 무시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 이스라엘에서는 맛을 잃은 소금을 집의 평평한 지붕 위에 있는 흙에 뿌려, 흙을 딱딱하게 만들어, 새는 곳을 방지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평평한 지붕은 어른들의 만남의 장소요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이용되기 때문에, 지금도 아무 쓸모 없는 소금이 발 아래에 밟힌다고 언급되기도 한다.|"세상의 소금"이란 이 구절을 이렇게 이해할 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구절과 잘 어울린다. 비록 우리가 소금이 음식에 첨가되었는지를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맛으로 느낄 수는 있다. 소금은 혀로 감지되고 빛은 눈으로 감지되며, 어떤 경우든 사용자를 기쁘게 한다. 산 위에 있는 도시는 밤이라 할지라도 빛 때문에 감추일 수 없다. 음식에 소금이 쳐졌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그 음식을 먹은 사람은 다 알게 된다. "너희는 맛을 잃은 소금을 가지고 무엇을 짜게 할 수 있는가 혹은 감추인 등불로 무엇을 밝힐 수 있는가? 너희의 자극적인 능력을 분명히 드러내어서 세상을 구원하고 생명을 충성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너희의 그러한 선행의 근원을 식별할 수 있게 하라". 보른호이저(K. Bornhauser)는 마 5:13과 마 5:14의 첫 부분에서 강조적인 의미로 나온 휘메이스(너희들)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항하여 말씀하신 내용의 한 단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소금과 빛인 사람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유대의 지혜로운 자들(서기관)에 반대하여, 자기 제자들을 참된 교사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이라고 부른다.|맛잃은 소금과 감추인 등불은 모두 똑같이 무용한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인 제자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적극적이고 빛을 밝히는 일을 하지 못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참조: 빛과 지혜를 이와 유사하게 결합시킨, 엡 5:8이하). 그래서 무시와 멸시를 당한다.||(b) 막 9:50의 말씀은 마 5:13과 눅 14:34에 약간 다른 형태로 나온다. 마가는 헬라어에서 일반적으로 사물의 속성을 나타내는 아날로스($358: 짠 맛 없는)을, 마태와 누가는 일반적으로 인간적인 특성을 지닌 모라노마이(바보가 되다, 어리석게 되다)를 사용했다. 하지만 거의 동일한 것을 표현한다고 이해한다.|모라이노마이는 '맛없음'을 '바보'와 '소금'을 '지혜'와 연결시키는 이 말씀의 랍비적인 배경을 지지해 준다. 이리하여 나우크(W.Nauck)는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는 말씀을, 서기관들이 제자들에게 현명한 사람이 되라고 한 랍비적 가르침과 똑같은 의미로 이해한다. 막 9:50에 나온 종말론적 지혜는 장차 도래할 마지막 사건을 염두에 두고서 행하는 제자들의 종교적인 태도, 신앙과 행위 안에서 영위되는 제자들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마 10:16; 엡 5:15이하).|이런 종말론적 사건들이 막 9:49과 막 9:50절 사이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StTh 6, 1952, 165-78). 기독교인의 지혜로서의 소금은 초대 교회에서 하나의 은유로 채택되었다(Ephrem Syrus, Gelasian Sacramentary).|막 9:50의 마지막 문구인 "서로 화목하라"는 앞에서 말한 내용에 이어서 서기관들에게 계속 행해진 랍비의 가르침, 곧 '그들은 모욕을 감수하여 모든 사람에게서 총애를 받아야 한다'는 말과 공통점이 있다. 막 9:50의 마지막 문장은 의미상으로 두 개의 헬라어 명령문이 결과를 나타내는 카이(kai)로 연결되어 조건적으로 나열된 하나의 실례이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 그러면 너희는 서로 화목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만일 여기에서 제자가 희생 제물로 여겨진다면(롬 12:1),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는 말씀은 적절한 것이다. 소금이 없이는 희생 제물이 제아무리 큰 것이라 하더라도 무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는 말씀 뒤에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이 오는 것은 어울린다. 이는 제자들이 방금 누가 제일 큰가에 관하여 논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막 9:34). 그러나 희생 제물 중에서 살고기나 완전히 태운 번제나 곡식이나 향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지에 관한 다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소금을 치고 제물로 바쳐진 것이라면 어느 것이든지 모두 받아들여진다. 어떤 부류의 것으로 드렸든간에 소금은 소금이었다. 더구나 소금은 공동의 식사를 한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었다. 여기에서 친구들 사이에 투쟁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 언약은 신성한 것이었다. 따라서 유다의 배신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말하자면 소금이 엎어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W.R.Hutton, ExpT 58, 1946-1947, 168).||(c) 눅 14:34; 눅 14:35에서도 소금은 마 5:13와 막 9:50과 같은 의미를 지니지만 특별히 소금은 자기 희생, 자기 부정의 정신을 함축한다. 눅 14:25 - 눅 14:33까지의 내용이 이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내용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지혜와 자기 희생 및 자기 부정의 정신으로 계속 전심전력해야할 필요에 대한 강화이다.||(d) 골 4:6에서 바울은, 기독교인의 말은 언제나 은혜롭고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아야 한다고 선언한다. 소금은 강화에 맛을 주어 그것을 입에 권한다(참조: 욥 6:6). 그리고 아르튀오($741: 맛을 내다)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아마도 이것이 여기에 사용된 은유의 기본 사상인 것 같다. 소금은 또한 부패를 막아 온전한 것이 되게 한다. 엡 4:29에 동일한 사상이 담겨 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은혜를 끼치게 하라"(J.B.Light food). 나우크(W.Nauck)는 골 4:6을 비유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소금이 지혜를 뜻한다고 본다: '너희 말은 언제나 은혜 가운데서 행해져야하며, 그 말은 지혜로와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너희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StTh 6, 1952, 165-78). 몇몇 교회 교부들은 소금을 이처럼 지혜의 의미로 받아들인다(Origen, Hom. in Gen 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