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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닭 울때
ajlektorofwniva
닭울기||#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알레크토로포니아(Strobo 7, 35; Aesop.등)는 알레크톨($220: 수탉)과 포네($5456; 목소리)에서 유래했으며, 닭울기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알레크토로포니아는 신약성경에서 막 13:35에 한번 나온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닭 울 때"는 밤 삼경에 해당한다. 경(更)은 유대인들이 로마의 방식에 따라 밤을 나눈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알레크토르
ajlevktwr
수탉||명사 알레크토르는 '수탉'을 뜻하며, 신약성경에서 12회 나온다: 마 26:34; 마 26:74; 마 26:75; 막 14:30; 막 14:68; 막 14:72; 눅 22:34; 눅 22:60; 눅 22:61; 요 13:38; 요 18:27.|(참조: J. H. Thayer).
알렉산드리아
!Alexandreuv"
알렉산드리아인 Alexandrian.||알렉산드류스는 '알렉산드리아인', 즉 알렉산드리아의 원주민이나 거주자를 의미한다.||알렉산드리아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사도행전에만 사용되었다.||(a) 행 6:9에서 알렉산드리아인이 스데반과 더불어 변론했다: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쌔".||(b) 행 18:24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난"이란 표현은 문자적으로 '태생상 알렉산드리아인'을 의미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Alexandrivno"
알렉산드리아의||알렉산드리노스는 '알렉산드리아의' Alexandrian을 의미한다.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애굽을 정복한 후, B.C. 331년에 나일강 델타 지역에 건설한 고대 도시이다. 지중해와 마레오티오스 호수 사이에 이 도시가 위치하고 있으므로, 동방 문화와 서방 헬라 문화를 서로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알렉산더가 죽은 후에 그의 장군 가운데 한 사람인 프톨레미가 애굽 지방을 차지하여 애굽의 통치자가 되었으며, 알렉산드리아를 자기 왕조의 수도로 정하였다. 프톨레미 왕조가 통치하는 동안 애굽은 헬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학문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알렉산드리아에 세계적인 도서관과 박물관이 세워졌기 때문이다.|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은 B.C. 280년경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팔레룸의 데메드리우스의 조언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이 박물관과 함께 학자들의 연구는 헬라와 로마 세계의 문화를 촉진시켰고, 그 문화 유산은 그리하여 유럽과 세계의 문학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알렉산드리아는 헬라인, 애굽인, 로마인, 유대인 등 여러 민족들이 섞여 살고 있었다. 여러 민족이 모여 살았지만 이 도시의 공용어는 헬라어였다. 유대인들은 주로 왕궁의 동부 지역에 거주하였으며, 애굽과 로마 정부로부터 여러가지 특권을 인정 받았고, 정치적 자치권도 가졌다. 그들은 상업 능력이 뛰어나 이 도시의 무역 거래에 큰 기여를 했다.|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일단의 유대인 학자들은 B.C. 3세기경에 70인역본을 출간했다. 70인역본의 출간은 종교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 중의 하나였다. 70인역본은 신약의 사도 시대에도 그 권위를 인정 받았으며, 신약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주로 70인역본을 참조하였다.|전승에 의하면 사도 마가가 알렉산드리아와 애굽에 맨처음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한다.||신약성경에서 알렉산드리노스, 곧 알렉산드리아라는 말은 사도행전에 2회 나온다.|행 27:6; 행 28:11에 의하면 바울을 루기아의 무라성에서 멜리데섬까지, 그리고 멜리데섬에서 로마까지 실어다 주었던 배가 모두 알렉산드리아 선박이었다.|(참조: H. A. Hanke).
알렉산더
!Alevxandro"
알렉산더 Alexander(인)||알렉산드로스는 알렉스(보호하다, 방어하다, 피하다)와 아네르($435: 남자)에서 유래했으며, '인간의 보호'라는 의미를 가진다.|알렉산드로는 신약성경에 6회 나오며 세 사람의 이름으로 나타난다.||#1.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간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막 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2. 대제사장의 친척 중의 한 사람||행 19:33,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발명하려 하나".||#3 .구리 세공인으로, 사도 바울의 적대자.||(a) 딤전 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b) 딤후 4:14,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가루
a[leuron
가루||#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알류론(Hdt. 이래)는 알류오(%74: 갈다, 갈아서 가루를 만들다)에서 유래했으며, 빵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는 '밀가루'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알류론은 70인역본에서 12회 나오며, 히브리어 케마흐(밀가루)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알류론은 여인들(혹은 종들)이 곡식을 맷돌로 갈아 만들었으며(사 47:2), 사르밧 과부의 주식이었으며(왕상 17:12), 다윗이 먹는 음식물 중의 일부이며(대상 12:40),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 앞에 가루로 만든 음식물을 제물로 드렸다(삿 6:19). 소제에 수반하는 가루는 케마흐의 일종이었을 것이다(삼하 17:28).||#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알류론은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밀가루'를 가리킨다.|마 13:33에서 가루는 천국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병행구, 눅 13:21). 이 비유는 세상에서 조용하고 자애로운 복음의 영향력을 진술하고 있다. 믿는 자의 구원은 물론이며, 노예 제도의 철폐, 개선된 여권 신장, 어린 아이에 대한 올바른 인식, 수많은 야만적 관습의 철폐 등, 많은 개선은 복음이 그 영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가졌던 나라들에서 보다 높은 수준으로 향상되었던 것이다. 이 복음은 모든 땅, 모든 나라에 스며들어 선한 역사를 이룬다(참조: R.C.H. Lenski).|(참조: Walter Bauer; L.J. Coppes).
과연
ajlhvqeia
진리||#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알레데이아(Homer 이래)는 어원적으로 '가리워져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보여지거나, 지적되거나 표현된 정도(범위)의 상태나 사태, 그것도 이러한 보임과 지적과 표현에서 나타내지거나 그 자체 사실 그대로 나타낸 정도의 상태나 사태를 지적하며, 물론 그것은 숨겨지거나 위조되거나 왜곡되거나 생략되거나 은폐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알레데이아는 사건의 진상(full or real stale of affairs)을 의미한다. 이것은||(a) 사법에서 여러가지 진술에 대항하여 지지될 수 있는 사건의 진상,|(b) 역사에서 신화와 완전히 구별되는 실재적 사건,|(c) 철학에서 절대적 의미의 참된 것 등을 의미한다(R. Bultmann).|그러므로 알레데이아는 일반적으로 거짓이나 거짓말에 반대되는 '진실'을 의미한다.||#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a) 에메트와 의미와 그 역어 알레데이아.|알레데이아에 상당하는 히브리어는 에메트이다. 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126회 나오는데, 85회 알레데이아로 번역되었다.|에메트는 아멘, 곧 확고한, 확실한, 신실한 것으로 생각되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진실한 것을 의미한다. 인격에 대해 사용될 때 그것은 때때로 주로 그의 말, 행동, 사상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을 표현한다. 이쉬 에메트는 그의 행위가 진리의 규범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성실한 사람이다. 하나님께 적용될 때, 특별히 그의 신실성에 대해 사용된다. 이 단어는 '확고하다'를 뜻하는 어근 'mn에서 파생된 것으로 학자들은 이해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구약성경 학자들은 히브리 저술가들이 말하는 '진리'란 의미상 '불변성'(stability), '확고함'(firmness) 혹은 '확실성'(reliability)이란 개념을 시사해주는 '신실성'(faithfulness)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예프센(Jepsen) 기록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에메트는 신뢰할만한 것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영어로 이 개념을 전달하는 데에는 'Reliability'(확실성)가 가장 포괄적인 단어일 것이다. 에메트는 다른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예프센은 이것을 인간의 진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적용시키는 것으로 말을 맺는다. 진리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는 ... 그의 말씀과 사역 안에서 우리가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TDOT Ⅰ313).||이런 견해를 근거로 하여 구약성경에서 진리는 단순히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주장이 종종 있어 왔다. 만일 이 견해를 받아 들인다면, 이것은 진리에 대한 히브리적 개념과 헬라적 개념 사이의 근본적으로 분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요인이 될 것이다. 볼트만(R. Bultmann)은 쉽사리 알레데이아의 헬라어 용법이 셈어적 용법과 대조된다고 말한다(TDNT Ⅰ238). 이 이론에 따르면, 고전 헬라어에서 알레데이아는 단순한 현상과 대조되는 '진리'(truth)를 의미하는데 반해, 히브리어에서 이에 병행되는 단어는 '불변성'(stability) 혹은 '신실성'(faithfulness)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대조가 어느 점에서는 타당성을 지니는 반면, 이 주장들이 조심스럽게 한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잘못될 수도 있고, 지나치게 단순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그 사용된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에메트가 에메트로 간주되고, 에메트에 의해 지적되는 독특한 사실들을 항상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 이 단어는 법률적 영역을 넘어가는 불확정한 일반적인 타당성이나 정당성을 지적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진실이나 사실(reality)로 인정하기를 항상 요구하는 사실(facts), 신과 인간의 질서에 일치하여, 존중을 받는 정상 상태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유사하게 미쉬파트(4941: 공의, 심판)의(6666: 의), 샬롬(7965: 완전, 평화)과 같은 관련 용어에 반영되어 있다. 그 의미와 일치하여 그것은 전혀 일반적으로 진리나 진실(truth)로, 심지어 정상적 개념으로서 '진실성'(veracity)으로 번역할 수 있다.|요약하면 알레데이아는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에메트의 의미를 따라, '신실(성), 성실(성), 충실, 진리나 진실, 확실한, 정직한, 진실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b)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법률적 용법.||에메트는 기본적으로 가장 확실히 법률 용어에서 '사실상의 과정이나 인과의 진실을 묘사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 22:20에 "그 일이 참되어(에메트/ 알레데이아)..."라는 표현에서 앞의 경우와 같이 "그 일이 비방거리에 근거하지 않고 확실한 사실들, 곧 진실에 근거한다면"이란 의미를 읽는다.||삿 9:16(삿 9:19)의 "너희의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라는 말에서 에메트/ 알레데이아는 의와 관련되며, 그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삿 9:15에서는 "참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메트가 사물에 적용되는 경우에 법률 용어의 비유적 용법을 보게 된다.||창 24:48에 "바른 길"이 데레크 에메트(알레데이아), 즉 제시되는 많은 길들 중에 확실히 성공하는 길이다.||렘 23:28의 "내 말을 받는 자(선지자)는 성실함으로(에메트/ 알레데이아) 내 말을 말할 것이라"는 말에서, 에메트는 그 자체 꿈으로가 아니라 실제적 역사(operation, 29절)를 나타내는 사실(a fact)을 가리킨다. 단 8:26에서(이상이 확실하니) 에메트/ 알레데이아는 그 계시가 실제로 일어날 명백한 것임을 확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사 59:14, 15에서 진실이 부족하다는 불평은 13절 상반절에 "배반하는 것"에 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이스라엘의 불신실성에 대한 언급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해 보면, 불평의 참된 원인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 하기를 가르친다"고 불평하였다(렘 9:5). 틀림없이 이런 일 때문에 결국 어느 누구도 자기 형제를 신뢰할 수 없는 것 같다(4절). 그러나 여기에서 주요 문제는 거짓말 그 자체이다.||스가랴도 이와 같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을 베풀고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특별히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개념에 있는 평결(judical finding)과 재판의 기준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시편의 세 구절들에서 진리는, 많은 학자들이 오로지 헬라 문헌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거의 그런 의미에서, 은폐(concealment)와 대조하여 나온다. 시 43:3에서 기자는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계실 것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간사한 자"(1절)의 유혹적인 말에 직면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그는 진리와 빛을 필요로 한다. 진리란 그를 어둠에서부터 벗어나게 하여 사건들이 있었던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마찬가지로 시 45:4에서 왕은 진리의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왕의 확실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의심스럽고, 부정하고, 공정치 못하거나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다 드러낼 그의 마음 자세이다. 왕의 고통 당하는 자들의 고통의 원인을 공공연하게 드러냄으로써 그들을 옹호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시 51:6의 "중심에 진실함을"이라는 유명한 언급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앤더슨(A. A. Anderson)은 여기에서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Psalms, Ⅰ, 396). 그러나 이 개념은 시편 기자가 충실함을 간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기만으로부터의 해방을 간구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인 것 같다. 이 시편의 주제는 고백이며,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보신 그대로 사건들의 상태의 진실됨을 시인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만일 우리가 "중심"(inward parts)을 계시의 필요와 관련되어 있는 "덮여 있는 것"을 의미하고(E. A. Leslie, The Psalms, 1949, 400), 이 시편의 주제를 여호와께서 공정하시다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S. Mowinckel, The Psalms in Isreal's Worship, 1967,Ⅰ, 214), 훨씬 더 적합할 것이다.|그리고 잠언에서 진리와 거짓말(혹은 속임수) 사이의 대조를 배경으로하여 에메트/ 알레데이아가 사용된다. 지혜가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잠 8:7)라고 말할 때, 그 요지는 지혜가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을 기만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혜는 교육과 지식을 통해서 그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것이다. 잠 22:21에서는 진리가 참된 대답이 행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즉 그곳에 거짓이나 허위가 없도록 하기 위해 드러내어 진다.||(c)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종교적 용법.|① 법률적 영역에서 중요한 다른 표현과 같이, 진리의 개념은 특별히 구약성경의 종교적 용어에 그 자리를 잡고 있다. 에메트의 종교적 용법은 항상 비유적으로 이해하지 아니하지만, 종교적 이해(통찰)에서 생겨날 수도 있다. 어쨌든 많은 경우에 그것은 법률적 용법에 의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종교적 사실을 오로지 의미한다. 때때로 사법적으로 의인으로 묘사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를 명백한 진리의 사실에 근거하며, 진리가 하나님 자신의 행위와 말씀 안에 있는 토대인 것 같이 진리를 행한다. 하나님의 진실함은 인간의 진실함을 요구한다(시 51:6). 여호와의 성산에 거하기에 합당한 자는 그 마음에 에메트("진실")를 말하는 자이며(시 15:2),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의 질서라는 의미에서 진리에 전념하는 마음을 가진 자이다. 이 마음은 사회 생활에서 실제적으로 표현된다(참조: 겔 18:8).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한다(참조: 18:9). 하나님은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라고 명하신다(왕상 2:4).|호세아가 호 4:1에서 이 땅에 진실(에메트)이 없다고 불평할 때, 진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즉 생의 모든 영역에서 진실함은 하나님의 뜻을 틀림없이 아는데서 성장하고, 이러한 앎은 그것에 관한한 진실함의 실현이라는 것이다.|지혜 문학에서 문맥은 셰켈(허위, 거짓)이나 아울라(불의)와 대조시키므로, 진실의 개념을 강조하는 한편(말 2:6; 잠 11:18; 렘 9:4; 참조: 잠 12:19), 악과 대조는 더욱 명확히 종교적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느 9:33):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에메트: 신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② 에메트는 자주 신실성이란 의미로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시 31:5에서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으로 부른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으로서 일반적으로 의인과 사람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실만 하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서 항상 신실하게(에메트) 대하신다.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함의 규범을 지키신다(시 146:6).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진리를 확립하고 그 자체 진리인 법, 곧 진정한 율법(토로트 에메트)을 수여하셨다(느 9:13).(참조: Quell).|에메트는 보통 "내가 주의 에메트를 찬양하리이다"(시 71:22)와 같은 특징적인 구절들에서 '신실성'이란 의미로 나온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히 지속된다(시 117:2). 앤더슨(A. A. Anderson)은 시 119:43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이란 어구조차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관한 기록이란 의미로 해석했다(The Book of Psalms). 시 30:9에서 하나님의 에메트에 대한 증거의 개념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오는데, 스올(Sheol)이 하나님의 신실성을 선언하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신자에게 하나님의 신실성을 새롭게 증거해 줄 계속적인 경험이 중단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들에게는 그들이 호소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이다(시 30:9; 참조: 사 38:18).||③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이란 의미로 사용될 때 자주 헤세드(변함없는 사랑)와 병행되어 나오다. 이런 경우에 에메트가 '신실성'을 의미하는 문맥과 '진리와 진실'을 의미하는 문맥을 구별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에게 헤세드와 에메트를 보여주기를 브두엘과 라반에게 요청하는 대목에서(창 24:49), 이 두 단어의 의미를 '충성'(loyalty)과 '성실'(fidelity)로 볼 수 있겠지만 개역 표준 성서(RSV)에 따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다라는 의미의 "deal loyally and truly"(충성스럽고 진실하게 대하다)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장(창 24장)의 앞 부분에 나오는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맨처음 만나는 대목에서 엘리에셀을 "헤세드와 에메트를 끊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약속에 충실하고 신실했다는 것이다(창 24:27). 창 32:10에서 야곱은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그가 하나님의 모든 신실하심(에메트)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창 32:10).|그 특징은 시편에서 찬양과 기도가 모두 하나님의 신실성을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메트의 용법 중 반수 이상이 이런 의미를 지닌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모든 길은 ...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라고 외칠 때,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가 언약에 대한 충성으로 특징 지워지기 때문에 아주 신뢰할 만하다고 증거하는 것이다(M. Dahood). 에메트가 시 57:3, 10; 61:7; 69:13; 108:4; 115:1에서 헤세드와 결합되어 나올 때, "신실성"(faithfulness)이 에메트의 의미로 나온다. 흠정역 성서에 나타나 있듯이, 이런 의미에서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난다"(시 85:10)라고 번역된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그의 신실성에 대한 하나의 표현으로 명시된다. 그리고 알레데이아는 '충실, 성실'을 뜻하는 에무나(시 88:11-49), '신실한, 신뢰하는'을 뜻하는 에문(시 12:1; 시 31:24), '확실한, 진실한'을 뜻하는 야칩(3330; 단 2:8), '정직한'을 뜻하는 야샬(3474; 욥 23:7), '완전, 성실'을 뜻하는 톰(8537, 잠 28:6), '진실'을 뜻하는 케쇼트(7187; 단 2:47), '진실로'를 뜻하는 옴나(욥 9:2; 19:4), 우림(신 33:8)의 역어로 사용되었다.||④ 우리가 에메트가 사용된 여러가지 측면들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매우 많은 문맥들에서 진리가 단순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아니라 행위로 자기의 진리를 드러내시며, 이 진리는 사실상 그의 백성의 체험 속에서 입증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진리에 대한 존중을 추상적인 이론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이웃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구두상의 상업적 거래에 대한 일상적인 증언으로 나타낸다.|시 119:142에서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단순한 실존적인 진리 이상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신자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줄 등이요 빛이다(105절). 여기에서 그는 사실상 그와 관련될 때의 사건의 진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내발 ... 내길").||⑤ 이러한 진리는 신뢰할 만하며 또한 확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찰이 오로지 신학적 기초 위에서만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신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에메트, 헤세드, 에무나)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에메트의 이런 특별한 용법이 이 단어의 모든 용례들의 배후에 있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인들은 다른 사람들도 인정했던 논리적 진리, 곧 참된 말은 그것이 실제와 일치하기 때문에 믿을만하다는 점, 그리고 진리의 하나님에게 있어서나 진실한 사람에게 있어서 언행이 일치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참조: 수 24:14; 시 145:18). 진리를 말과 행동의 일치로 보는 개념이 신약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3. 알레데이아의 신약성경의 용법.||신약성경에서 알레데이아는 109회 사용 중, 바울 서신과 요한의 기록에서만 9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a) 알레데이아는 "확실성과 힘을 지니는"(has certainty and force)"에 대해 사용되었다(에메트의 의미로).|① 타당한 규범. 알레데이아는 엡 4:21; 엡 4:22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이 진리는 지적 진리에 대한 단순히 이론적인 감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복음에서 나타날 때는 진리에의 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와 만남으로써, 결국 삶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이 변화를 통해서 신자들은 과거의 속임수에서 벗어나게 된다.|갈 2:5에서도 알레데이아는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함이라". 여기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문제가 된 것은 완전히 "복음의 진리"라고 선언하였다. 바울의 판단에 따르면, 복음을 더럽히도록 유혹하는 것은 곧 진리(타당한 규범)를 더럽히도록 유혹하는 것이요, 그 반대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유혹에 굴복한다는 것은 그 자신의 성실의 의미에서나 구원사에서의 현재 있는 그대로의 실제 상황이라는 의미에서도 진리 곧 타당한 규범을 부인하는 것이다.|갈 2:14에서 알레데이아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진다: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게바는 복음의 타당한 규범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고후 13:8의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는 바울의 언명에서 진리는 복음의 진리인 동시에, 더 나아가서 이 언명은 아마도 진리의 개방에 의해(그 결과야 어쨌든간에) 진리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주의와 복음을 오직 보급시킬 수 있다는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다. 진리는 타당한 규범이다. 하나님의 요구는 롬 2:8과 롬 2:19에서 알레데이아이다.||② 올바름, 정직. 알레데이아는 에메트와 같이 '올바름, 정직'이라는 보다 약한 의미를 가진다. '진리를 좇는 것(행하는 것)'이란 표현에서 나타난다(요 3:21; 요일 1:6). 유사하게 요이 1:4; 요삼 1:1 이하에서 "진리에 행하는 것"은 정직하게 행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같은 맥락을 따라 알레데이아는 아디키아($93: 불의)의 반대이다(고전 13:6; 롬 1:18). 이 단어는 또한 디카이오쉬네($1343: 의)와 결합하며(엡 4:24; 엡 5:9; 엡 6:14), 아마도 때때로 그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약 3:14; 약 5:19).||(b) 알레데이아는 '진술의 사실'(truth of statement)에 대해 사용되었다. 행 26:25에서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참된 ... 말"(레마타 알레데이아스)은 환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엪 알레데이아스라는 문구는 일반적으로 '사실과 일치하여'나 '사실대로'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막 12:32; 눅 4:25; 눅 22:59에 나온다. 따라서 엪 알레데이아스를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건의 사실을 정확하게, 혹은 바르게 진술하는 것을 의미한다.|특히 눅 4:25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서 중요하다. 예레미아스는 주장하기를 이 문구는 예수님이 자기의 말씀을 강화하고 자기 권세를 나타내고 자기 메시지의 확실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신 것이라고 한다(J. Jeremias, New Testament Theology).||(c) 알레데이아는 드러난 '사건의 실상이나 진상'에 대하여 사용되었다.|롬 1:18("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서 확신하는 것은 이 경우에서 알레데이아를 하나님의 요구하는 것으로나 의(디카이오쉬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롬 1:19의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는 말을 보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사실(revealed reality)"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롬 1:25("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단순히 프슈도스($5579: 거짓, 허위), 즉 우상에 반대되는, 참된 또는 실질적인 하나님을 의미하지 않으면 위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Bultman).|좀 더 설명하면, 바울은 알레데이아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자기 의지의 계시나 혹은 심지어 율법을 통해서든 어느 순간에는 창조를 통해서든 자기 존재의 계시를 나타낸다. 이런 용법은 로마서의 처음 두 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사악함으로 인하여 "진리를 막고"(롬 1:18),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다(롬 1:25). 그러므로 진리에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진노가 있을 것이다(롬 2:8). 반대로 율법 그 자체는 지식과 진리의 구체화이다(롬 2:19)("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 여기서 문제가 되는 진리는 근본적으로 복음의 진리가 아니다. 바울은, 요한의 경우와 같이 사람들이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는 지식을 받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바울은 모든 이방 세계가 고의적으로 복음-진리를 거부하였다고 말하지 않고 이 세계가 창세로부터 하나님과 그의 주권적인 주장들에 대해서 고려될 수 있는 것, 즉 분명히 보여진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롬 1:20)을 고의적으로 은폐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사실'이다.|유사하게 알레데이아는 다음과 같은 전치사와 함께 '실제적으로(real)'를 의미한다. 골 1:6(엔 알레데이아)에서 실제적인 경험을, 행 10:27과 행 10:34(엪 알레데이아)에서 실제적인 행위를 표현한다. 한편 롬 2:2에서 카타 알레데이안을 '사실과 일치하여, 사실대로'를 의미하며, 롬 2:11에 프로소포렘프시아(편파적임, 불공정)와 반대되는 것이다.|요일 3:18에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는 대조는 헬라에서는 흔한 표현이다. "행함과 진실함으로"는 '실제적 행위로'를 뜻한다.|또한 고전 헬라어의 표현 '진실을 말하다'는 70인역본에서 뿐만 아니라(대하 18:15; 잠 8:7), 신약성경에도 나온다. 막 5:33에서 알레데이아는 "사실"을 의미한다. 무리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만진 혈루증 앓는 여인은 "모든 사실"을 고하였다. 즉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사실을 말했다. 롬 9:1에서 참말을 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반대이며,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고후 12:6에서 참말을 하는 것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요 8:40; 요 8:45 이하; 요 16:7에서도 역시 '진리를 말하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서 알레데이아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듣거나 본 사실들, 곧 하나님의 계시로 해석할 수 있다.||(e) 알레데이아는 '믿거나 의지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사용되었다.|① 신뢰성이나 신뢰할만함, 롬 3:3 이하; 롬 15:8.|② 성실, 진실, 진심. 알레데이아는 '거짓말, 은폐, 속임수'와 반대되는 '진실' truth이라는 의미를 지니거나 '성실' sincerity의 의미로 나온다. 마 22:15 이하(막 12:14)에서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올가미에 걸리게 하려고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질문을 시작한다: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알레데스) 참으로써(엔 알레데이아)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여기에서 요점은 예수님이 그 말을 함으로써 얻어질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진리를 감추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그는 자기 견해를 피력하는데 정직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고후 7:14("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고후 11:10("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에도 나타난다. 따라서 그것은 고전 5:8에서 에일릭리니아(명확, 순수, 성실)와 연결되어 있으며, 빌 1:18에서 프롭하시스(편파적임, 불공정)와 반대된다. 때때로 헨디아디스의 형태로 친족어와 관계되어 있다: "믿음과 진리"(딤후 2:7). 요이 1:1과 요삼 1:1에서 이 용법이 사용되었다: "참으로 사랑하는 자",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f) 알레데이아는 복음, '참된 가르침 또는 믿음'에 대해 사용되었다.|① 고후 13:8: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여기서 알레데이아는 (a)①의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다른 복음(에테론 유앙겔리온)(참조: 고후 11:4)과 대립되는 참된 교리를 의미한다.||② 이런 이유로 고후 4:2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반적으로 그의 활약으로분명히 나타낸 알레데이아로 부르기도 한다("진리의 나타냄"). 이 경우에 알레데이아는 앞에 나온 말 로고스 투 데우("하나님의 말씀")의 개념을 포함시킨다(참조: 고후 2:14; 골 4:3 이하; 딛 1:3).||③ 갈 5:7에서 바울은 마치 "복음을 순종치" 아니했다고 말한 것처럼(참조: 롬 10:16). "진리를 순종치" 않는 것에 대해 말한다.||④ 벧전 1:22에 의하면 기독교의 믿음은 "진리를 순종함"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참조: 벧전 1:21 이하).||⑤ 또한 복음의 설교(전도)는 진리의 말씀이다(고후 6:7; 골 1:5; 엡 1:13 등).||⑥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진리를 아는데 이르는 것"이며(딤전 2:4; 딤후 3:7; 딤전 4:3; 히 10:26; 요이 1:1).||⑦ 살후 2:10-살후 2:12에서는 알레데이아는 "거짓"($5579)과 "불의"($93)라고 불리는 적그리스도의 계시에 대립되는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⑧ 딤전 3:15에서 에클레시아(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 묘사된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⑨ 벧후 1:12에서 알레데이아는 단순히 기독교 신앙이다.||⑩ 알레데이아가 '참된 가르침'이라는 것은 특히 그릇된 교훈과 반대된다.|딤전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후 2: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딤후 3: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알레데이아는 순종할 의향에 의해 결정되는 피스티스의 개념처럼 "권위있는 교훈"이다.|딤후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딛 1: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g) 알레데이아는 또한 "진짜임", "하나님의 실체", "계시"를 의미한다.|① 계 8:44에서 신적 능력으로서의 알레데이아와 반신적인(anti-divine) 것으로서의 프슈도스(거짓)가 대조되어 있다. 알레데이아와 프슈도스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진정한 가능성들로 이해된다. 이것은 말씀과 말씀의 경청에 대한 생각에 의해 결정되는 계시에 의해 보존되므로, 우리는 또 다시 진정한 존재의 가능성을 지닌다. 알레데이아는 하나님의 실체,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짐으로, 즉 죄로 말미암아 구성된 인간 존재와는 반대되고 가까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실체이며, 계시는 하나님과 조화되지 않는 존재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기적 사건이다. 계시에서 그의 고유한 존재의 참된 가능성이 그에게 드러나며, 그 때, 그와 만나는 계시의 말씀에 직면하여 그는 항복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성이나 비교(esoteric)의 지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각오와 연습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믿음 속에서 일어난다.||② 요 8:44에서 하나님의 실체와 반신적 실체 간의 대조가 나타난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그러나 이것은 간접적으로 알레데이아가 생명을 주며, 알레데이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은 것은 죽음으로 인도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 말씀은 또한 알레데이아가 있을 때에 알레데이아는 그 자체가 구체적인 행위를 이루는 결정적인 힘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뒤따르는 말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은 "거짓말" 또는 "허위"라는 첫 번째의 잠정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그 문맥은 명백히 첫째, 신성한 실체와 악마적인 실체가 모두 말로 표현되었다는 것과, 둘째, 이들 실체들이 존재의 활동 방식인으로서의 현실이라는 것, 또는 역으로 하나님의 또는 악마적인 실체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의 모든 활동 방식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요일 1:8과 요일 2:4에서 하나님의 계시된 실체로 인한 존재의 결정이 지적되어 있다: "진리가 그 속에 있지"(않다). 이것은 또한 그러한 결정이 구체적인 행위로 그 자체를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③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에는 특유의 다의성(ambiguity)이 생겨난다. 예수님께서 알레데이아를 말씀하실 때에 이것은 첫 번째로 "진리를 말하다"라는 표면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또한 "말씀으로 계시하다"를 의미한다(요 8:40; 요 8:45; 요 8:46, 반대의 개념인 프슈도스[$5579] 대신에 더 일반적인 하마르티아[$266]가 사용된 곳, 특히 요 8:47, 알레데이아 대신 하나님의 말씀[타 레마타 투 데우]이 쓰여진 곳).||④ 이 단어가 세례(침례) 요한에 대해 말해질 때 같은 이중의 의미가 나타난다: 그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요 5:33). 그것은 요 18:37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여기서 빌라도의 질문이 그 말씀을 강조하고 계속되는 말씀에서 알레데이아가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실체라는 것과 그것의 이해는 자유로운 존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실체로 말미암은 존재의 결정에 기초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⑤ 계시로서 알레데이아는 기노스케인(아는 것, 요 8:32; 요이 1:1, 요일 2:21)의 대상이다. 첫번째로 표현되는 것은 이해될 수 있는 말씀(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과 같은 계시의 결정적인 능력의 특성이다.|알레데이아는 본질적으로 질문한 사실의 표면적인 진실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것을 일반적이고 표면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엘류데리아($1657: 자유)가 인간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참조: 요 8:34), 의미하는 바는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계시에 대한 지식이다.|요 17:17; 요 17:19의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즉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께 위탁된 선언),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계시의 말씀은 말 또는 사상의 집합체도 아니고, 구체적인 마주침으로 성취되는 말씀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예수님 개인과 그의 역사에서 성취하신 사건들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요 17:17-요 17:19). 그는 단순히 그의 말씀에 의한 전달로서가 아니라 알레데이아를 위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함으로 알레데이아를 가져오므로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러므로 계시는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수단인 동시에 목적(조에: 생명)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신성이 나타날 때에 진정으로 받아들여진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나타나신다는 것은 요 1:14; 요 1:17에 나오는데, 거기서 "독생자의 영광"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으로, 즉 하나님의 실체는 그것 안에 나타난다고 묘사되었다.||⑥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에 대한 요구(요 4:23 이하)를 같은 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요한에게는 알레데이아 뿐만 아니라 프뉴마도 인간과 완전히 구별되는 신성의 본질과 출현의 영역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참된 예배는 영성과 의인화된(anthropomor- phic) 개념이 제거된 하나님의 개념에 기초한 순수한 지식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본질 즉 프뉴마에 의해 결정될 때에 일어난다. 알레데이아가 더해진다면 이것은 그러한 예배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계시(요 4:25)에 의해 결정될 때에, 따라서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신 계시자(요 1:18; 요 14:6)에 의해 결정될 때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⑦ 세상을 떠나시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는 요 14:17; 요 15:26; 요 16:13에서 "진리의 영"이라고 해석되며, 이것이 요한복음이 이 공동체에 주어진 "성령"의 전통적인 개념을 이해하도록 의도한 방식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참조: 특히 막 13:11; 행 1:8). 바로 그분 자신이 요 14:16에서 보혜사라는 용어를 선택하신다. 프뉴마 테스 알레데이아("진리의 영")가 단순히 하나님의 성령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 알레데이아 만큼이나 하기오스에 의해서도 표시되기 때문이다(참조: 요 17:17-요 17:19). 그러나 그 단어가 프뉴마에 대해 말할 때에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는 우리에게 요한에게 하나님의 진리는 항상 계시 안에서 작용하므로, "진리의 영"으로서 역사하시는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의 역할은 공동체에서 계속 역사하는 계시로 묘사되고, 요일 5:6에서 증거하시는 프뉴마는 바로 알레데이아와 같다. 같은 의미로 요일 4:6에서 "미혹의 영"과 대조되는 "진리의 영"에대한 언급이 있으며, 어떤 것이 하나님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불경한 세력에 속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은 실제적인 행위, 즉 공동체 안에서 선포된 말씀을 듣는가 또는 안듣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는, 그것이 선포된 한은, 옳은 교리이며 프슈도스(거짓, 거짓말)는 잘못된 것이다(요일 2:21). 한편 요삼 1:3의 알레데이아가 계시에 의하여 결정되는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일 1:6의 "진리를 행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반대되는 삶의 방식(-->242)을 나타낸다. 참으로 요삼 1:12에서 어떤 사람이 "뭇 사람에게" 가졌다는 증거는 "진리에게도"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계시는 공동체를 결정하는 힘이기 때문이다.|요삼 1:8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공동체가 훈계,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니라"로 그것의 구체적인 기독교적인 행위에 동기를 부여한다. 이 결정이 개개의 신자들을 결속시킨다. 그 때문에 요한이서의 저자는 편지의 표현을 사용하여 그의 지도자들에 대해서 말한다: "1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이 1:1-요이 1:3).|(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 A. C. Thiselton).
참된 것을 하다
ajlhqeuvw
진리를 말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동사 알레듀오(Aeschyl., Xen., Pla. 등)는 일반적으로 단순히 "진실을 말하다"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플라토(Plato)는 정의를 권고하는 자는 '진실을 말하는' 자이며, 이것은 이러한 사람이 진실하게 말한 그의 이전 언급과 병행한다고 논하고, 반면에 불의를 권고하는 자는 거짓되게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Pseudoito, Republic 589c).||(b) 그러나 알레듀오는 때때로 '진실임이 판명되다(입증되다)', 또는 수동태로 '성취되다' be fulfilled(Xen., lnstitutio Cyri 4, 6-10)를 의미한다(A. C. Thiselton).||#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알레듀오는 70인역본에서 5회 나오며, 창 42:16에서 에메트(진실함, 성실함, 진리 등)의 역어로 '진실하다'를, 창 20:16에서 야카흐(3198: 결정하다, 판결하다)의 역어로 '해결되다'를, 잠 21:3에서 미쉬파트(4941: 판단, 판결, 재판, 공의)의 역어로 '공평'을, 사 44:26에서 샬람(7999)의 역어로 '성취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알레듀오는 신약성경에서 바울서신에만 2회 나온다.||(a) 갈 4: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여기에서 알레듀오는 '진리를 전하다', 즉 '복음을 전하다'를 의미한다. 이와 일치해서 이 말은 "진리" truth(영역)가 바울의 적대자들의 속임과 대조적으로, 실재로 있는 그대로의 복음의 실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가장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b)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참된 것을 말하여"는 "진실이나 진리를 말하여"를 의미한다. 문자적으로 여기에서 알레듀오가 진실한 말 외에 삶의 성실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에 나오는 구절은 거짓된 설득에 부응하여 한가지 새로운 것에서 다른 새로운 것에로 옮겨가는 그런 류의 변덕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진실한(성실한) 삶은 그 말과 일치하는 것이며, 여기서 아마도 '사랑 안에서 참된 믿음으로 사는 것'을 뜻할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n; A. C. Thiselton).
참된(참되다)
ajlhqhv"
진실한, 진짜의, 신실한.||#1. 고전 및 70인역본.||형용사 알레데스(Homer 이래)는 부정 접두어 아(%107)와 레도(%215: 남의 눈을 피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문자적으로 '숨기지 않는'을 의미하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변치않는, 일정한, 충실한' constant, '확실한, 타당한, 정당한, 유효한' walid(Jos. Ant., 8, 337과 343 등; Sib., v. 449; Fr 1, 10; 사 43:9).||(b) ① '신뢰할 수 있는' trustworthy 또는 '믿을 수 있는' reliable(1 Cl., 45, 2), 느 7:2; 잠 22:21.|② '성실한' sincere 또는 '정직한' honest(Aeschyl., Thu.; Did., 15, 1; Pol. 1. 1; Jos. Ant., 13, 191).||(c) '실제의, 실재하는' real(Jos. Bell., 1, 254), '실제로 있는 것'을 나타낸다.||(d) '참된', true(Jos. Ant., 4, 219; Herm. m; papyrus; 단 10:1). '참된 교리'(알레데스 도그마)에 대해 사용되었다(Leg. All. 3, 229).||(e) '진짜의' genuine 또는 '진정한' proper, 신의 실체에 대하여 사용되었다(Thu; Philo Leg 등).||#2. 신약성경.||형용사 알레데스는 신약성경에서 2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벧전 5:12에서 알레데스는 '정당한, 타당한, 효과적인'을 의미한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b) 빌 4:8에서 알레데스는 '올바른' upright을 의미한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c) 롬 3:4에서 알레데스는 '신뢰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d) 알레데스는 '성실한, 정직한'을 의미한다.|① 막 12:14,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병행구, 마 22:16). 여기서 알레데스는 '거짓말, 은폐, 속임수'와 반대되는 '정직, 성실'을 나타낸다. 그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한 질문의 요점은 예수님이 그 말을 함으로써 얻어질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진리를 감추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그는 자기 견해를 피력하는데 정직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② 요 3: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③ 고후 6: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e) 알레데스는 '실제의, 실재하는, 진짜의'를 의미한다.|① 행 12: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 쌔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② 요 10: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③ 요 4: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④ 요 19:35,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⑤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⑥ 요일 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f) 알레데스는 '참된'을 의미한다.|① 요 5: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② 딛 1:13,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③ 벧후 2: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참 속담은 경험에 비추어 본 바대로 진리를 의미한다.||(g) 알레데스는 '진짜의, 진정한'을 의미한다.|①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② 요 3: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여기서 알레데스는 보다 분명한 의미로 나타나는데, 즉 믿는 자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음을 확인함으로 하나님이 계시를 주신다는 것을 확증한다.|③ 요 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이 구절에서 요점은 단순히 성실하신 분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분은 실재하시며, 그 분 자신이 진짜이시고, 알레데이아에 의해 결정되고, 그러므로 그 분은 계시자이시다는 것이다.|④ 요 8: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n; A. C. Thiselton).
진실
ajlhqinov"
진짜의, 실제의, 정당한, 신뢰할 수 있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알레디노스(Heraclitus, X., Pla. 등)는 알레데스($227)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알레디노스는 '성실한, 진실한, 참된',|(b) '올바른, 의로운, 정직한',|(c) '신뢰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을 의미한다.|(d) 알레디노스는 그 독특한 의미로, '실제의' real, '진짜의' genuine란 의미를 지닌다. 크세노폰(Xenophon)은 이름을 붙일만한 군대라는 의미의 실제 군대(스트라튜마티 일레디노이[strateutnati aleithnoi])를 거느리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Anabasis 1, 9, 17). 플라톤은 진정한 철학에 대한 참된 열정(알레디네스 휠로소휘아스 알레디노스 에로스)을 갖는 것에 대해 말한다(Republic 499c). 필로가 하나님을 가짜가 아닌 진짜 화폐나, 단순 부품이 아닌 어떤 품목과 같이 "실제적인 분"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볼 때 그 의미는 신학적으로 흥미있는 것이다(Congr. 159).||#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알레디노스는 70인역본에서 약 50회 나오며, 아멘(진실로), 에메트(진실함, 신실함), 야사르(올바름, 정직한), 요셰르(올바름, 정직함)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알레디노스는 말이나 말씀이 '참되거나 진실한 것'(삼하 7:28; 왕상 10:6; 단 10:1), 하나님의 '진실'(출 34:6), '진짜의, 실제의, 진실한' 하나님(대하 15:3; 사 65:16; 마카베오삼서 6:18)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알레디노스는 신약성경에서 2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알레디노스는 공관복음에서 눅 16:11에만 한번 사용되었다.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여기에서 이 말의 의미는 분명히 "진짜의" genuine. 혹은 "실제의" real이다.||(b) 알레디노스는 바울 서신에서 살전 1:9에만 한번 나온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여기에서 알레디노스는 그 독특한 의미로 '실재하는, 실제의, 진실의'를 의미하며, 우상의 허황함과 대조되는 참 하나님을 나타낸다.||(c) 알레디노스는 히브리서에서 3회 나온다.|① 실체를 모형과 대조시키는데 사용되었다.|·히 8:2에서 하늘에 있는 장막을 세상의 것과 대조되는 "참 장막"이라고 한다: "성소와 참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히 9:24에서 "참 것"(참 장막)은 참 것의 그림자인 성소와 대조시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② 알레디노스는 히 10:22에서 '성실한, 진실한'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참 마음"은 정직하고 거짓됨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는 악한 양심을 떨쳐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신앙의 완전한 보증을 받아, 분열된 자아의 부담이나 속임수 없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간다.||(d) 요한복음에서 알레디노스는|① 그 독특한 의미인 '진짜의, 실제의'를 의미한다. 요 4:23(호이 알레디노이 프로스퀴네타이)에서 '진짜의' genuine라는 의미로 본다면 그것은 그러한 참된 예배자는 계시에 의해 결정되는 사실에 관하여 있다.|그러므로 이 참된 예배자는 열망에 근거하여 예배하거나 성실과 내적인 것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근거하여, 즉 계시를 근거로하여 이해하는 실재에 근거하여 예배하는 것이다.|예수님께서 "참된 빛"(요 1:9)과 "참 포도나무"(요 15:1)로 묘사한 표현에서 알레디노스는 첫째로 '참된'(true) 또는 '진짜의'(genuine)이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여기에서 '진짜의'(genuine)가 의미하는 바는 인간과 이 세상의 실체와 대조되는 '신의, 신성의'(divine)를 의미하며, 또한 이것은 알레데이아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계시를 시행하는'을 의미한다.|요 1:9; 요일 2:8의 "참 빛"은 요 8:12의 "생명의 빛"과 같으며, "참 포도나무"는 실질적으로 요 6:35; 요 6:48의 "생명의 떡"과 같은데, 우리는 이 구절을 요 6:32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 "하늘에서 내린 참 떡". 만일 요 7:28; 요 17:3에서 일반적인 의미에 더하여 하나님이 알레디노스로 불리운다면 이 단어는 그가 계시를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내포한다.||② 그리고 예수님의 크리시스(판단)가 알레디네("참되니", 요 8:16)로 불리울 때, 이 단어는 단지 '참된' true 또는 '믿을 수 있는' trustworthy을 뜻할 뿐 아니라 '타당한' proper과 '명확한' definitive을 의미한다. 그것은 계시가 그 속에서 성취되는 계시의 결과에 대한 판단이다.||③ 요 4:37에서 알레디노스는 '참된' true, '옳은, 정확한' correct을 의미한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요 19:35에서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줄 알고 너희로믿게 하려함이니라". 이것은 요 8:16에서 이 단어를 해석하는 방법이다: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나와 함께 계심이라". "판단이 참되니".||(e) 요한계시록에서 알레디노스는|① 계 21:5에서 계시의 로고스(말씀)가 '피스토이카이 알레디노이'로 불리울 때, 중어법(hendiadys)이 사용되었다: '믿을 수 있고 확실하다'(개역: "신실하고 참되다").|계 22:6에서 마찬가지다: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② 계 19:9,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다." 여기서도 아마 위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해석 할 수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실제적인 말씀이다'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③ 하나님의 오도이(그의 규칙)와 크리세이스(심판)가 알레디나이("참되고")와 디카이아이("의로우시다")로 불리워지며, 이런 구절에서 알레디노스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정당한 요구나 정의, 의(righteousness)라는 의미의 에메트에 의해 통제된다.|·계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계 16:7,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계 19: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참조: 시 19:9; 토빗 3:2, 5; 단 3:27에서 알레디노스는 크리세이스 또는 크리마타의 특성으로 나타난다.||④ 하나님은 "거룩하고 진실한 분"(계 3:7),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n; A. C. Thiselton).
갈다
ajlhvqw
갈다 grind.||#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알레도(Hippocr., Theophr., Diod.등)는 알류오(갈다, 갈아서 가루를 만들다)에서 유래했으며, '갈다, 갈아서 가루로 만들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알레도는 70인역본에서 4회 나오며, 히브리어 타한(2912, 갈다, 가루를 만들다)의 역어로(민 11:8; 욥 16:21; 전 12:3), 타하나(2913, 맷돌)의 역어로(전 12:4)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알레도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마 24:41; 눅 17:35에서 매를 '가는 것'을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진실로
ajlhqw'"
진실로, 참으로, 확실히.||#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알레도스(Aeschyl., Hdt. 이래)는 형용사 알레도스($227)의 부사형이며,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다. 이 단어는,||(a) '참으로, 실로, 실제로',|(b) '확실히',|(c) '아주 진실하게, 매우 확실하게',|(d) '솔직하게, 정직하게, 똑바르게' 등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부사 알레도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3회 나오며, 주로 '참으로, 진실로, 진리' 등을 의미하는 '아멘' 어군의 역어로 사용되어 그런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알레도스는 20회 나오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주로 '진실로, 참으로, 참'이라는 의미로 번역했다(마 14:33; 마 26:73; 마 27:54; 막 14:70; 막 15:39; 눅 9:27; 눅 12:44; 눅 21:3; 요 1:47; 요 4:42; 요 6:14; 요 6:55; 요 7:26; 요 7:40; 요 8:31; 요 17:8; 행 12:11; 살전 2:13; 요일 2:5).|(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어부
aJlieuv"
어부 a fisherman||#1. 일반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할리유스(Homer 이래)는 할스(%298: 바다)에서 유래했으며, 어부를 의미한다.||#2. 70인 역본의 용법||명사 할리유스는 70인 역본에서 4회(욥 40:31[26]; 사 19:8; 렘 16:16; 겔 47:10) 나온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할리유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어부'로 번역되었다.||(a) 마 4:18; 마 4:19(병행구, 막 1:16; 막 1:17)에서 예수님은 고기를 잡는 어부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 것을 약속하였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b) 눅 5:2에서 할리유스는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을 묘사한다: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참조: J. H. Thayer).
물고기 잡다
aJlieuvw
고기를 잡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할리유오(Plut. 이래로)는 할리유스($231: 어부)에서 유래했으며, '고기를 잡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할리유오는 70인역본에서 렘 16:16에만 한번 나온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작은 산과 암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할리유오는 신약성경에서 요 21:3에 한번 나온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참조: J. H. Thayer).||||마태복음
소금 치다
aJlivzw
소금치다 salt, 소금으로 맛을 내다 season with sal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할리조(Aristot. 이래)는 할스/ 할로스(소금)에서 유래했으며, '소금치다, 소금으로 맛내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군대, 파편 등을 '모으다, 소집하다'라는 의미도 지닌다.||#2. 70인역본의 용법||할리조는 70인역본에서 4회 나오며, 말라흐(소금을 쳐서 맛내다나 간을 맞추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레 2:13, 겔 16:4).||#3. 신약성경의 용법||할리조는 신약성경에서 2회, 마태와 마가복음에 각각 1회 나온다.||(a) 마 5:13에서 할리조는 '소금으로 맛을 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것은 부패를 지연시키는 것보다 더 유익한 개념이다.|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세상을 부패하는 데에서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상을 구원하고(요 3:17) 생명을 풍성하게 제공하기 위함이었다(요 10:10). 누가(눅 14:34)와 마가(막 9:50)가 이와 똑같은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들도 아르튀오(맛을 내다)를 사용할 때 음식이나 토양에서 그 속성을 발휘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b) 막 9:49에서 할리조는 '소금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이 구절은 이해하기 어렵다. "불로 소금침을 받으라"란 구절은 기독교인 제자들도 구약성경에 나오는 희생 제물처럼 소금으로 맛들여져야 한다고 언급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면 적당할 것이다. 이런 일은 시련을 통해서 일어날 것이며(벧전 1:7; 벧전 4:12; 참조: 고전 3:13)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것은 일소될 것이다(F.Hauck, TDNTⅠ228f.; W.Nauck, StTh6, 1952, 165-78).|이 문장 전체에 나타난 자기 희생의 은유는 희생제사의 원리가 가혹하게 적용되는 고난과 시험의 상황에 적절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된 예수님의 말씀은 네로(Nero) 통치하의 로마에서 교회가 경험한 바를 말해주는 고난에 대한 의욕적인 선언이다(W.L.Lane, The Gospel acceording to Mark, NLC, 1974, 394).|그러나 여러 가지 반론 및 논의가 있어 왔다. 버키트(C.Burkitt)는 이 구절 어디에도 희생 제물에 관한 내용은 없다고 보았다. 손을 자르는 것 등은 희생이 아니라 예방책이다. 히브리 문헌에서 살아있는 유일한 구절은 겔 16:4이다(갓 태어난 어린아이). 이 문맥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과 "소자"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보면(막 9:42이하), 예수님도 이런 관습을 염두에 두고 계셨던 것 같다. 할리스데세타이(소금 침을 받으리라)는 유대 어린아이의 첫 번째 목욕에 관한 언급인 것 같다(JTS 17, 1915, 16-18).|바아르다(T.J.Baarda, NTS 5, 1958-1959, 318-21)는 헬라어 할리조(halizo)와 아람어 탑벨(tabbel)이 서로 같은 뜻을 지닌다고 여기고, 진술된 단어를 잘못 들었기 때문에 아람어 어근 tbl과 tbl에서 파생된 어형들이 서로 혼동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본래의 밋트에벨(mittebel: 세례받은)이 밋타발(mittabal)이나 메탑발(metabbal: 맛을 낸, 소금을 친)로 잘못 사용되어 번역자가 이 아람어를 밥티스데세타이(baptisthesetai: 세례를 받으리라)라고 번역해야 할 것을 할리스데세타이(halisthesetai: 소금 침을 받으리라)로 옮긴 것 같다. 이상하게 이와 일치하는 내용이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 마 3:11과 눅 3:16은 유일하게도 신약성경에서 불 세례(침례)를 언급한 구절들이다. 이 두 구절에는 퓌르 아스베스톤(pyr asbeston: 끌 수 없는 불)이란 말이 나오는데, 그 외에는 막 9:43에만 이 말이 나오고 막 9:48에서는 동사형을 취하여 토 퓌르 우 스벤뉘타이(to pyr ou sbennytai: 그 불은 꺼지지 않는다, 사 66:24)로 나온다. 랍비 문헌들에서 불은 정화를 나타내는 은유로 사용되었고(Sanhedrin 39a; Siphre Num.158 on 31:23), 소금도 마찬가지이다(Berakoth 5a)|(참조: Walter Bauer; J.H.Thayer; N.Hill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