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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 회중, 교회.||#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에클레시아는 에크($1537: …로부터)와 칼레오($2564: 부르다 call)에서 유래되었으며, 따라서 이 단어는 '불러낸 자들(의 전체)'라는 의미를 가진다.|이 단어는 유리피데스(Euripides)와 헤로도투스(Herodotus)(주전 5세기)부터 사용되었으며, 고대의 용법에서는 폴리스($4172: 도시 city)의 유자격 시민 전체의 대중 집회를 나타낸다. 이 집회는 5세기 경에 가장 큰 중요성을 갖고 정규적으로 모였으며(아테네에서는 일년에 약 30-40회, 그밖의 곳에서는 아테네보다 자주 모이진 않았다) 또한 임시 엑클레시아로서 긴급한 경우에 모였다.|이 공회의 활동 영역은 법률 개혁, 제안, 관리의 임명에 대한 결정, 그리고 적어도 공회의 전성기에 있어서는 대 내외 정책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결정(계약, 조약, 전쟁과 평화, 재정)을 포함했다. 특별한 경우에는 여기에다 재판의 임무가 추가되었는데 이것이 발전되어 결과적으로 재판정이 되었다.|에클레시아는 그 도시의 신들에게 기도와 제사를 드림으로 개회 되었다. 이 모임은 그 당시의 법률에 의해 구속을 받았다. 모든 시민들은 연설할 권리와 토의해야할 문제들을 제안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한 전문적인 의견이 있을 때에만 그 안건이 다루어 질 수 있었다(Aristot. Ath. Pol. 45). 결정은 일정한 수의 찬성을 얻어야만 유효하였다. 참가의 권한과 이 집회를 소집하는 방법 그리고 투표의 방법 - 아테네에서는 손으로, 또는 박수 갈채로, 또는 무기명으로 판자나 돌에 쓰는 투표로 - 은 매우 엄격히 규제되었다. 이 집회의 통제는 프리라네이스(Prytaneis)의 의장에게 속해 있는 것이었고 주전 4세기 경부터는 9인회에 위임되었다.|따라서 구약성서의 번역과 신약 시대의 수세기 전에 엑클레시아는 분명히 하나의 정치적 현상으로 규정되어 나타났고 특정한 규칙에 따라 그리고 특정한 범주 내에서 반복되었다. 엑클레시아는 전체 시민들의 집회로, 기능에 있어서 민주주의 구조에 뿌리를 내린 것이었으며, 여기에서 기본적인 정치적 결정과 사법적 결정이 내려졌다.||#2. 70인역본의 용법.||엑클레시아는 70인역본에서 약 100회 나오며, 그 중 22회는 외경에 나오는데 그 3회는 히브리어 상당어가 없이 나온다. 엑클레시아는 거의 항상 히브리어 카할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하지만 카할이 항상 엑클레시아로 번역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엑클레시아는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 23개절, 예레미아 5개절, 에스겔 15개절에 나오지 않은다. 그 대신 쉬나고게(회중,회당;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 21개절, 에스겔, 예레미아 등에서 나옴), 쉬스타세이스(모임,연합;창49:6), 오클로스(군중, 다수;렘31:8; 겔16:40; 17:17; 23:24 등), 플레도스(큰수, 회중, 무리;출12:6; 대하31:18)가 역어로 사용되었다.|70인역본에서 엑클레시아는 '집회 assembly'를 뜻하며, 따라서 '모임, 회집'이란 의미(참조: 신9:10; 18:16의 총회)와 '모인 자들, 회중'이라는 의미(왕상8:65의 큰 회중)를 가진다. 실제적 의미는 '모인 자들' 곧 '집회를 구성한 자들'이다. 삼상 19:20의 "선지자 무리"라는 표현이 이를 지지한다.|신명기에서 엑클레시아/ 카할은 무엇보다도 시내산 언약을 맺기 위해 모인 회중을 의미하고 있다(신 9:10). 엑클레시아/ 카할은 여호와의 이름파 연결됨으로써 제한적인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엑클레시아 퀴리우: = 케할 예호와: 신23:2 이하; 참조, 대상28:8; 느13:1; 미2:5). 신명기(9:10; 10:4; 18;16)에서 케할 예호와의 결합이 정당화된 이유를 볼 수 있다. 야웨와 그의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처음 확립한 엑클레시아/ 카할은 시내산에 있는 회중이며, 야웨와 이스라엘이 함께 하는 날이 욤 학카할 곧 집회의 날(총회의 날)이다. 야웨는 그들을 모두 하나로 부르시는 분이시다.|여기서 엑클레시아/ 카할은 여호와께서 소집한 백성, 곧 여호와께서 주신 규례들에 구속을 받는 백성을 나타내며, 그들의 여호와 언약에 참여는 순종에 의해서만 이루어 지는 것이다. 따라서 엑클레시아/ 카할은 또한 특별하고 엄숙한 집회의 종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솔로몬 성전 봉헌 때에 예배하는 공동체는 에엑클레시아/ 카할이며(왕상 8:14 이하; 대하 6:3), 에스라가 율법책을 남자, 여자. 아이들에게 "율법을 낭독하고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경배"했던 초막절에 집회(혹은 모인 회중)(느 8:2, 17), 히스기야의 명령에 따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인 백성(대하 30:2, 4, 13, 17), 국가적 위기에서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소집한 이스라엘 회중은 엑클레시아/ 카할이다(대하 20:5, 14).|엑클레시아/ 카할이 30회나 사용되어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역대기에서 종교적인 결정(법궤를 옮기는 것, 대상 13:2, 4)이나 또는 제의적 행사를 포함하는 행사(대상 29:10)을 위해 왕이 소집하는 지도자들의 집회나 그런 집회에 모인 무리들을 모두 나타내는 대표적인 의미로 사용었다. 이(성전에 모인) 무리가 시편에서는 카할로 지칭된다(예를 들어 시 22:23; 89:7 "거룩한 자의 회중"; 149:1 "신도의 회중").|그리고 엑클레시아/ 카할은 전쟁을 위한 사람들의 소집(참조:삼상 17:47)이며, 다른 종류의 소집은 중대한 사건에 대처하기 위한 국가적 비상 집회로의 부름이다(렘 26:17; 44:15; 삿 21:6, 8).|우리는 포괄적으로 엑클레시아/ 카할을 전쟁을 위한 동원이나 시급한 사법적 모임과 같은 남자들만의 모임이든, 에스라에서와 같이 온 백성의 모임이든 특별한 경우나 행사에 소집된 집회나 회중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모인 집회일 때 엑클레시아/ 카할은 그것에 참예할 자격이 있는 자들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신 23:2이하).|한편 카할이 다른 단어로 번역된 경우에 주로 종교적인 의미없이 전쟁터에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모든 남자들의 무리에 대해(쉬스타세이스/ 창 49:6; 쉬나고게/ 민 22:4), 그리고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대해 사용되었다(오클로스/ 렘 31:8; 플레도스/ 출 12:6; 대하 31:18). 에스겔서에서는 대부분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의 무리나 병력에 대해 사용되었다(오클로스/ 겔 17:17, 애굽; 쉬나고게/ 27:27, 두로;32:22, 앗수르).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의 대부분의 구절에서는 많은 군중에 대해 양적으로만 사용된다.|특히 쉬나고게는 창세기 28:3; 35:11에서는 백성 people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레 4:13; 민 15:15; 16:3, 33; 20:6; 신 33:4 등에서는 여호와께 속한 한 백성으로서의 성전과 율법에 중심을 둔 신앙 공동체의 집회(혹은 모인 회중 전체)를 나타낸다. 이 의미에서 카할/ 쉬나고게는 에다 쉬나고게의 의미를 가진다.|에다는 어떤 사람이 태어나고 소속하며, 만일 그가 남자라면 정확하게 규정되고 한정된 분량의 특정한 권리와 의무를 가질 수 있는 영구한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를 소집하는 힘은 법률로 규제될 수 있는 엄정한 출생에 의한 공동체의 힘이다. 에다는 성전과 율법을 중심하고 것에 의해 결정되는 전체 유대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가장 세속적인 자들이라도 율법과 성소와 어떤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L. Coenen, DNTT).||그러나 카할/ 엑클레시아는 언약을 맺음으로써 생겨난 회중, 시내산 공동체 사회에 대한 의례적인 표현이다. 이 카할/ 엑클레시아는 부름을 듣고 이를 따르는 자들만을 포함한다. 따라서 카할/엑클레시아는 야웨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특징 지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한 문제가 제시되는 곳에만 사용된다, 확실히 카할/ 엑클레시아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위대성이 암시되는 곳에서 특별히 사용되며, 아마 헬라인 독자에게 단지 당시 유대 사회의 정치적, 생래적 주장을 암시할 수 있는 곳에서는 사용을 회피하였다. 아마 이것은 공동체 사회의 생활을 규정하고 있는 율법에 관한 구절들에서 카할이 쉬나고게로 번역되는 이유일 것이다(L.V.Rost, Op. cit., , 127).||카할이 신약성경의 엑클레시아로 발전한 것에 관해서, 우리는 이 말이 시내산에서 언약의 체결에 참예한 자들과 또한 에스라의 지도 아래 율법에 새로히 서약한 자들에 대해 사용된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엑클레시아/ 카할은 언약과,그리고 그것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자들을 가리키는 전문용어이다. 적어도 에스라 시대에(참조: 이미 렘 44:15에서) 여인들과 아이들이 엑클레시아/ 카할에 속했다는 사실 역시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것은 카할이 70인 역본에서 엑클레시아로 버역된 이유의 하나이다(K.L.Schmidt, TDNT). 사실은 카할이라는 용어 자체 여인들과 아이들도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으로 허락된 기독교 공동체을 뜻할 수 있는 적합한 용어인 반면에 쉬나고게는 그 요성이 남자들만의 참여와 관련되기 때문에 적합치 않은 용어이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엑클레시아는 신약성경에서 11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엑클레시아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뚜렷한 것은 이 단어가 마 16:18과 마 18:17을 제외하고는 복음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를 23회 사용한 사실은 적어도 누가가 예수님의 지상 활동 시기에 속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단어의 표현 중 대부분은 단연 바울 서신에 나오며(총 114회 중 46회: 에베소서의 9회와 골로새서의 4회를 포함) 무엇보다도 고린도전서에 22회 나온다. 이 개념을 특별히 구체화한 사람은 바로 바울이었고 이 개념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특히 우주적 의미로 더욱 발전되었다. 이 단어는 베드로전후서와 디모데후서, 디도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야고보서와 히브리서에는 단절된 예문들만이 나오며 또한 요한삼서에서만 사용된다.||(b) 원시 공동체.|모든 복음서에 엑클레시아가 나오지 않는 것(마 16:18; 마 18:17은 예외)은 그들이 기록할 때에 이 개념이 당시의 통용하는 용법이 아니었다는 주장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문학 형태가 바울 서신과 동시대 또는 보다 후기의 문학 형태에 속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초대 기독교의 모든 제자들이 엑클레시아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부활하심 후에 나타난 교제 모임을 나타내는 데에만 사용하였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참조: O. Cullmann, The Early Church). 이 단어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 시기 또는 예수님 주위에 모인 제자들을 묘사하는 데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큄멜(W. G. Kummel)은 문헌상에서 볼 수 있는 이 단어가 역사적인 사실과도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애 기간 동안에 이러한 엑클레시아를 세우지 않으셨으며, 주의 만찬 의식 제정을 통해서 엑클레시아를 세우신 것도 아니다("Kirchenbegriff", Symblae Biblicae Upsalienses, I 1943, 23이하, 36).|그러나 교회의 의식이 원시 기독교 공동체 사회 초기에 싹트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근원은 제자들 중 일부가 부활 사건의 증인들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곧 그들은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소식을 전할 사명을 위임받은 증인들이 되었던 것이다. 원시 공동체에 있어서 교회라는 개념은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종말론적 상황에 대한 의식으로 특징 지워진다(참조: 고전 15:3이하). 그것은 이미 종말의 징조를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원시 기독교의 엑글레시아는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을 전달하는 자, 그 자체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주권은 곧 임박한 재림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고 이미 그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주권이 실감되고 있었다(참조: Cullmann, Op. cit., 특히 126이하).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이 세대에 속한 일부분에 불과하며 따라서 바실레이아(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Cullmann, Op. cit., 22).||(c) 마태와 누가|① 마 18:17의 문맥에서 엑클레시아는 한 장소에서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구성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곧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메시야 예수님께 대한 충성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참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한다(마 18:16; 참조, 신 19:15; 민 35:30). 마태복음 기자는 이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질서의 요지를 추적하는 데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엑클레시아가 이곳에서 에다(회당 synagogue)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구절은 도덕률 폐기론적 경향을 지닌 회중에 대한 논쟁적 특성을 나타냈을지도 모른다.|마 16:18의 해석은 더 어렵다. 일례를 들어 이곳에서 엑클레시아의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의 정확한 상당어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이 문맥에서 미래형인 오이코도메소(내가 세울 것이다)가 예수님의 생애를 언급하는 것인지 또는 예수님의 죽음 후의 시기를 언급하는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베드로에게 부여된 역할은 우리가 초대 교회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에서 단호하게 판단될 수는 없다. 갈 2:9에는 기둥들로 간주된 다른 사람들도 나온다. 행 11:1이하의 반대도 참조하라.|이것과는 별도로 예수님께서 지상생애 동안 교회의 터전을 예견하셨는가 하는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을 메시야로 생각하셨는가 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무리 카할 곧 엑클레시아가 메시야적 공동체로서 메시야에게 속한 것일지라도 이 미래 시제는 예수님의 죽음 후의 시기를 말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의 교회의 터전이라는 견해는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존재한 교회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의미로 해석 하기는 분명히 불가능하다.|"음부의 권세(사망의 권세들, 헬라어: 음부의 문들)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이 공동체가 죽음을 정복한 승리자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그 근거를 둔다.||② 누가에 있어서 교회 시대는 부활과 재림 사이에 있는 구원사의 특별한 부분이다. 이것은 누가가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직접 관련이 있다. 곧 엑클레시아가 누가복음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반면에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행 5:11이후부터 16회를 사용한다(2장에는 나오지 않는다).||(d) 사도행전|처음 몇 구절(행 2:49; 행 5:11; 행 7:38; 행 8:1, 행 8:3; 행 9:31)은 매우 의미있는 구절이다. 행 8:1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엑클레시아에 대해 듣는다. 행 7:38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인도한 이스라엘 백성을 엑클레시아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신 9:10을 언급하고 있을 지라도 문자적 인용이 아니다(마소라, 카할, 70인역본 엑클레시아). 행 9:31에서 이 단어는 예루살렘 공동체 뿐만 아니라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공동체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엑클레시아는 처음 단일 회중이었는데 이제 여러 회중을 뜻하므로, "회중"보다 "교회"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 기억할 것은 본문 증거는 행 9:31에서 단수뿐만 아니라 복수도 지지하며, 따라서 헤 엑클레시아 = 아이 엑클레시아이이다는 것이다. 행 15:41에서는 복수가 더 좋은 것으로 인증되며, 단지 B Dpc에서만 단수이다. 행 16:5에서는 분명히 복수가 사용되었다. 다른 경우에 단수가 지배적이며, 행 11:22; 행 12:1, 행 12:5; 행 15:4, 행 15:22에 예루살렘에 있는 공동체, 행 13:1; 행 11:26; 행 14:27; 행 15:3의 시리아 안디옥에 있는 공동체, 행 18:22의 가이사랴에 있는 공동체, 행 20:17-18; 행 20:28의 에베소에 있는 공동체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행 14:23에 엑클레시아의 표현은 각 교회(church wise)를 뜻하며 아마도 복수일 것이다(루터: 회중들 congregations, AV, in every church).|특별히 의미심장한(시사적인) 말은 행 20:28이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넷슬(Nestle은 시 73:2에 있는 병행구를 회상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엑클레시아보다 쉬나고게를 가진다: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70인역 쉬나고게)(시 74:2)|신약의 교회나 공동체에 대한 개념의 특징은 분명히 사도행전에서 온 이 구절들에 나타난다. 강조점은 서로 다른 지역들에 있는 회중은 서열이나 상호관계의 문제없이 단순히 교회로 부른 것이다. 지역 관계는 결정적 요점이 아니다. 이것은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에 있는 엑클레시아에 대한 앞의 언급에서 보여졌다. 강조해야 하는 것은 단수와 복수가 무차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엑클레시아가 엑클레시아이로 나누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엑클레시아의 총화가 엑클레시아를 만든다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엑클레시아는 언급된 여러 지역에 존재하며, 이것이 서로 나란히 있는 엑클레시아에 대한 언급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회중과 회중들"이든 "교회와 교회들"이든 우리는 항상 이해하고 번역해야 한다. 둘 중에 전자는 더 바람직 하지만 우리는 후자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이는 회중이 오늘날 전체로서의 공동체와 지역 회중을 구별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중요한 요점은 같은 단어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기독교 회중과 안디옥에 있는 이방인 회중에 대해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장식용 형용어구(통칭)를 결코 발견하지 못한다. 오직 한정사는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부른다면 속격(하나님의)이다. 이 속격은 구약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 때라도 그것을 이해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엑클레시아의 충분한 의미는 이해될 수 없다. 하나님의 회중이나 교회는 항상 사회의 다른 형식(관행)과 대조하여, 그리고 심지어 반대하여 서 있다. 이것은 행 2:47에 있는 첫 언급에서 분명한 것이며, 그것은 라오스($2992: 백성)나 코스모스($2889: 세상, 세계)보다 먼저(중요)하게 언급된다(D).|세 구절에서 서로 매우 밀접한 관계로(행 19:32, 행 19:29, 행 19:40). 엑클레시아는 백성의 모임, 즉 세속적 집회에 대해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엑클레시아는 완전한 의미의 세속적 용어이다. 만일 우리가 동일한 단어가 동일한 저자에서는 일관하게 번역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으로 필요하고 합당한 원칙을 따른다면 이것은 "교회"에 대한 사용을 포함한다. 다른 한편 그것은 역시 영어의 "회중"을 허용하지 않으며, 심지어 독일어 Gemeinde(참조: 대회, 집회)는 "정치적인"과 같은 어떤 선행하는 형용사가 없으면 보통 교회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 기반 위에서 우리는 우리가 동일한 용어를 사용 할지라도 세속적 집회와 교회의 집회를 구별할 수 있다. 이 단어는 역시 단수와 복수의 분명한 연대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복수는 모임이라는 의미의 집회를 의미한다. 결정적 요점은 어떤이나 어떤 것이 모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이는 자나 모이는 것이다. "하나님의"나 "주의"의 분명한 부가나 무언의 부가는 모이는 자나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자를 말해준다. 엑클레시아로 말해질 때(행 20:28)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것을 모으시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엑클레시아에는 하나님의 것인 모든 사람들이 속해 있는 것이다. 행 5:11과 행 15:22에는 홀레(%893: 온 whole)가 분명히 부가되어 있다; 이것은 모임이나 집회라는 의미에 상응한다. 그것은 특별히 새로운 어떤 것을 가하지 아니한다. 그것이 단순히 강조하는 것은 엑틀레시아 투 데우에 내포된 것을 강조한다. 세속적 엑클레시아와 대조해서 이것은 양적인 용어가 아니고 질적인 용어이다. 국가적인 집회는 존재하고 있고 존재한다고 하고 더욱 크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의 집회는 크기는 고려(기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신의 소유를 모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참으로 먼저 교회는 부르고 모이게 하신 자를 믿고, 그 다음, 그 부름에 응답하여 함께 모이는 자들에 의존해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e) 바울서신(Ⅰ)|이 단어에 대한 바울의 용법은 사도행전에서와 유사하다; 참조: 바울 역시 단수형과 복수형을 자유롭게 사용하며(롬 16:23; 롬 16:4, 롬 16:16; 갈 1:13, 갈 1:22), 홀레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롬 16:23), 장소(롬 16:1)나 구역(고전 16:19)을 언급한다. 때때로 관사의 생략은 엑클레시아가 거의 고유명사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참조: 고전 14:19; 고후 8:23). 작은 가정 교회도 엑클레시아로 불리울 수 있다(롬 16:5). 각 지역 교회는 전체 교회를 나타낸다(고후 1:1, '고린도에 있는 교회'). 따라서 지역 교회에서 적용되는 것(고전 6:4; 고전 11:18; 고전 14:34)은 모든 곳에서 적용된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단수형이든(고전 1:2), 복수형에서든(고전 1:16) 투 데우가 중요한 수식어이다(이것은 바울이 때때로 그런 것처럼 교회와 교회들을 구분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도하시기 때문에 엔 크리스토(갈 1:22)나 투 크리스투(롬 16:16)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표현을 번역할 때 '그리스도의'라는 말은 지나치게 색채가 없는 번역이다. 우리는 또한 고전 14:33에서 "성도들의 교회들"이라는 말을 발견한다. 고전 1:2에서 엑클레시아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사람들"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이 표현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실제로 바울은 교회에 대하여 초기의 제자들과 동일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구약성경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엑클레시아 투 데우(하나님의 교회)이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을 성취하셨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모으라는 사명을 부여하셨다는 점에서 새로운 요소를 지닌다. 교회가 세워지고 권위를 지니게 된 것은 제자들과 바울에 의한 카리스마적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에 의해서이다. 따라서 바울은 최초의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지도자들의 특권을 인정한다. 우리는 바울이 예루살렘을 위해 헌금을 모금한 것(이것은 단순한 자선이나 전략적인 문제가 아님)과, 갈 2:9에서 야고보 등을 "기둥들"로 기술한 것에서 이러한 점을 찾아 볼 수 있다(비록 그들의 인간적인 오류 및 권위를 지닌 자들을 지나치게 높이려고 하는 일부의 잘못된 욕구에 비추어 볼 때, 여기에 아이러니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바울은 교회에 대하여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자 하는 욕구는 없었으며, 오히려 초기의 혁신적인 견해들에 반대하여 본래의 견해를 지키려고 하였다.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만 기초를 두느냐, 그리스도만을 주님으로 고백하느냐, 사람들과 장소들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거부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교회가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바울은 교회에 대한 어떤 기술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회중들로 이해함으로(사도행전의 견해와 유사함) 이 문제에 대한 핵심에 이른다.||(f) 바울서신(Ⅱ):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이 두 서신에서 교회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교리가 전개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다(골 1:18, 골 1:24; 엡 1:22; 엡 5;23). 교회와 그리스도 간에는 협조와 종속의 관계가 있다(엡 5:24-25, 엡 5:29). 교회는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엡 5:27). 하나님의 지혜는 교회를 통해 알려진다(엡 3:10).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에 대해 말한다(엡 3:4-5).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의 신비는 남편과 아내 간의 결합 모델이 된다. 남편과 아내의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에 의해 예증되어 있다(엡 5:25이하). 이러한 의미는 당시의 세계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즉 구속자는 하늘에서 강림하실 때 적대적인 세력들을 이기시고(엡 4:8이하), 분열의 벽을 허시며(엡 2:4이하), 새 사람을 창조하시고(엡 2:15), 교회를 그의 배우자로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시며(엡 5:22이하), 교회를 그의 몸으로 세우신다(엡 2:19 이하). 이러한 개념들이 영지주의적 사변의 세계와 관련되어 있고, 따라서 롬 12:4이하와 같은 구절들에서는 거의 이끌어 낼 수도 없고, 일관된 묘사로 융합되긴 하지만 그 중요성은 이론적이거나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① 이 개념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엄격한 관계를 표현한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론적 교회론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② 이 개념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간의 갈등과 거짓된 가르침에 의해 야기된 어려운 상황에서 고양된 그리스도론을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이다.|장소와 사람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교회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유대인들의 사상과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 간의 교회보다는 그리스도와 지혜와의 결혼을 가정하는 영지주의의 과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 체계가 사용되어야 하겠지만, 이러한 관심사들은 전적으로 바울적인 것이다. 진정,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와 같은 서신들에는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 나오는 이러한 개념들이 나타난다(공식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실제적으로 그러하다). 고린도전후서에 따르면 교회는 상호 연관되어 있는 몸이며(고전 12장), 바울의 목적은 교회를 그 남편에게 순수한 신부로 드리는 것이다(고후 11:2). 언어는 영지주의적일는지 모르나 요점은 교회가 단순한 인간 사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규정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론은 그리스도론이며 그 역(逆)도 사실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적 차이는 초월된다(골 3:11; 참조: 갈 3:28). 그러나 이것이 곧 그리스도 신비주의는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름에 오직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은 지금 새 언약을 세우신 옛 언약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 집회는 구약성경의 회중이 완성된 것이다. 거룩이 공동체에 돌려진다면, 그 거룩은 하나의 특성으로 부여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의롭게 해주시고 성화시켜 주는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부여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에게 한 약속의 말씀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취된 약속의 말씀이다.||(g) 야고보서와 히브리서|엑클레시아의 장로들을 언급하는 약 5:14은 이 단어를 분명히 유대 회당식으로 조직된 지방에 있는 회중을 나타내는 순수한 전문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반면에 히 2:12은 시 22:22(히브리어 카할)을 인용하는 것으로 제의적인 축제 모임을 의미한다. 히 12:23은 다르다. 이 곳에서 이 단어는 유대 전통에서 취한 일련의 종말론적 술어들(시온산,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 안에서 나오며 엑클레시아 프로토토콘 아포게그람메논 엔 우라노이스(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로 한정된다. 여기서 문맥상 이 "총회"에 들어감은 "온전케 된 의인"과 교제, 또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가능케 된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의 교제 관계에 들어감으로 이해된다. 이곳의 문제는 한 집단(아마 조직이라는 말로 한정될 수도 있음)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종말론적 사건(파네귀리스로도 나타내어지는 예배의 봉사; 참조: O. Michel)의 특성 묘사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히브리서는 또한 구약성경의 전문 용어(비록 엑클레시아가 이러한 모임을 나타내는 확정된 표현은 아니나)를 사용하며 새 언약을 받은 "하나님의 방랑하는 백성"에 대해 묵시적인 존칭을 사용한다(E. Kasemann).||(h) 반면에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와 같이 엑클레시아가 특정한 장소에 존재하여 특정한 장소에서 만나는 장성한 회중 집회를 의미한다. 행 22:16까지 엑클레시아에 관한 모든 언급은 2장과 3장의 편지 또는 그 편지들보다 앞인 1장의 일곱 촛대의 환상에 나타난다(계 1:4, 계 1:11, 계 1:20, 항상 아시아의 일곱 엑클레시아에 대한 언급). 이 편지들은 각각 일정한 장소에 있는 엑클레시아의 사자들에게 보내진다(테스 엔…엑클레시아스, 계 2:1, 계 2:8, 계 2:12, 계 2:18; 계 3:1, 계 3:7, 계 3:14).|이 모든 구절들에서 몇몇 중요한 사본들이 여격으로 쓰이는 토(%875)를 지명에 붙여 문법적으로 사자에 연결시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사자를 수호 천사와 전령으로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회중의 본질적인 특성들의 구체화로, 따라서 역사적 실제와는 별개로 이해해야 함을 암시한다(참조: E. Lohmeyer). 따라서 여기에는 회중에 대한 개념이 묵시적으로 과장된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 회중의 의미는 역사적 회중들임을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이 역사적 회중들은 유혹과 직면하고 있었으며, 이 편지들에 의하면 그들은 결코 믿음과 순종과 거룩함으로 특징 지워진 자들이 아니며 그들이 시험을 지속적으로 받거나 통과하게 되는 것에 대한 결정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참조: 마 16:18).|각 편지에서 일치된 결론을 맺는 진술은 모든 다른 엑클레시아이를 묶는 특정한 지역 교회에 대한 언급으로 말하여진 것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끝에 교회들에 대한 언급에도 적용된다(계 22:16). 여기서 유일한 차이는 계 22:16에서는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반면에 요한계시록 앞 부분에서는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요한삼서의 세 구절들(요삼 1:6; 요삼 1:9, 요삼 1:10)은 모두 하나의 특정한 지역의 기독교인 회중을 가리킨다.|(참조: K. L. Schmidt; L. Coe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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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A
|#1. 일반 헬라어의 용법||(a) 헬라어 알파벳의 첫문자로, '처음, 첫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헬라어 마지막 문자는 오메가($5598)이다.||(b) 숫자로 사용할 때, %107 = 1; %108= 1000 이다.||(c) 알파(A)는 한 분리할 수 없는 음절로, 단어 앞에 붙었을 때,|① 결성어로서 A가 접두 되어 있는 단어에 부정적 의미를 가하거나 그 단어에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② 계합사(copulative)로서 불변사 하마($260:..와 함께)와 유사하며, 아델포스($80: 형제)와 같이 공동체와 교제를 지적한다.|③ 강의어(intensive)로서 말의 힘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2. 신약성경의 용법||계시록의 독특한 표현인 알파($1)와 오메가($5598)는 계 1:8과 계 21:6에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 계 22:13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에 대해 사용되었다(참조: 계 1:11TR). 이 표현은 "처음과 나중" 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어 그 의미를 확정한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시작하시고 끝맺으신다.|이 표현은 아마도 헬레니즘적인 사고로부터 이어 받고 팔레스틴 유대교를 경유하여 취하였으나 그 본질적 내용은 구약성서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것은 "오실 이"라는 어구와 연결되어 새로운 속성을 부여받는다.|"처음과 나중"은 사 41:4[7O인 역본]; 44:6[MT]; 48:12[MT]에 나오며, 또한 만대 병행구(Mandaean parallel)도 나온다. 랍비 유대교와 헬레니즘에서 숫자의 상징으로 나온다. 랍비 유대교는 '완전(성)'을 나타내는데 알파벳의 처음과 맨 마지막 글자를 사용하거나 혹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이 숫자를 사용한다. 처음 글자만 단독으로 쓰일 때에는 '최상의 것'을 나타낸다.|진리(에메트)는 하나님의 봉인이며, 이는 그것이 처음 글자(알렢)와 중간 글자(멤), 그리고 마지막 글자(타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처음과 나중"과의 연결과 사 44:6의 언급(헬라어 본문이 아닌 히브리어 본문의 사 44:6)을 고려해 볼 때, 요한 계시록은 아마도 그 표현을 팔레스틴 유대교에서 이어받은 것 같다.|( 참조: Walter Baure; J.H.Thayer; G. Kittel).
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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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 Aaron(인)||#1. 구약성경.||(a) 아아론은 히브리어 아하론의 음역이며, '총명한'을 의미한다. 한글개역은 '아론'이라 번역하였다.||(b) 아론의 가계. 아론은 레위의 자손으로, 아므람과 요게벳의 아들(출6:16,18,20;6:16-20; 민26:59),모세의 형(출7:17), 미리암의 남동생(출15:20),엘리세바의 남편(출6:23),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의 아버지이다(출6:23).||(c) 아론의 지위. 모세의 조력자(출4:13-31)요 모세의 대언자(출7:1,2).|하나님의 영감을 받고(출12:1) 모세와 더불어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로 위임받았다(출6:13,26,27).||(d) 아론의 특권. 모세와 함께 바로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출5:1-4), 이적을 행하고(출7:9,10,19,20; 출8:5-7; 출8:16-19). 훌과 더불어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림으로 아말렉에 대한 승리를 쟁취했다(출17:10-12), 시내산에 올라가 여호와를 경배하고(출19:24),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으며(출24:9,10), 모세의 부재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출24:14), 회막 안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아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는 직무를 행했다(레16:17 ). 아론은 백성을 축복하고(레9:22; 민6:23), 미리암을 위해 중보하였다(민12:10-12).||(e) 아론의 죄. 우상 숭배를 묵인 내지 관여하고(출32:1-4; 신9:20,21). 백성의 방자함을 허락하였다(출32:21-25).|아론은 미리암과 더불어 모세를 비방하고(민12:1,2,8), 므리바에서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말을 거역하였다(민20:8,10,11,12,25;20:1-13).(f) 아론의 성격. 아론은 성도로 불리워졌으며(시106:16), 능변가였으며(출4:14), 순종적이었다(레10:3,7;10:1-7).|그는 위기 때에 믿음이 약하였으며(출32:1,2,23,24;32:1-24), 질투심이 있고(민12:1,2), 죄의식을 가지었다(민12:11).||(g) 아론의 제사장직. 아론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제사장이 되어(출28:1), 평생 그 직무를 수행했으며, 세습되었다(출28:40-43; 출29:9; 대상23:13).||(h) 아론의 죽음. 아론은 123세에 호르산에서 죽었으며(민33:39),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계승하여 그의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다(신10:6).||#2. 신약성경||아아론은 신약성경에서5회, 누가의 기록과 히브리서에만 나온다.||(a) 눅1:5에서 아론의 딸들 중의 엘리사벳은 제사장 혈통의 엘리사벳을 나타낸다.||(b) 행7:40에서 시내산 아래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c) 히5:1-9에서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시다. 이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의 대제사장직과 비교하여 지적되었다.|① 아론은 이 직책을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해 가진다(히5:4).|②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은 연약에 싸여 있으므로 무식하고 잘못한 자를 용납할 수 있다(히5:2).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죽게 될(히7:23 이하), 불충분한(히7:27) 아론의 제사장직 보다 훨씬 더 높다. 그것은 참으로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특성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것이다(히7:11; 참조: 시110:4)||(d) 히9:4에서 지성소 안의 언약궤 안에 아론의 싹난 지팡이(민17:1-11)가 그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언약궤 안에 있는 율법판 옆에 놓여 있다. 그것의 위치가 궤의 옆이라기보다는 안이라는 것은 민17:10(리페니)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단지 아론의 지팡이가 언약궤 앞의 가장 거룩한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다.|이것은 최소한 그것이 유대 전통에 의해 어떻게 이해되었는가 하는 것이다(T. Yoma, 3, 7; Str.-B., Ⅲ, 739). 궤의 내용물들 즉 언약의 판들과 토라의 두루마리에 대한 정확한 기술과 그 안에 있는 이러한 물건들의 목록에는(bBB, 14 a/b) 그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에 대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랍비들의 견해에 따르면 확실히 그것들은 궤 안에 없었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것들이 궤 안에 있었는가 아닌가 하는 논의는 중세의 랍비들에 의한 것이다.|(참조: K. G. Kuhn).
아바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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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자, 아폴뤼온||#1.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아밧돈은 히브리어 아밧돈(멸망, 심연)에서 유래했으며, 구약성경에서 '멸망의 장소'(the place of destruction)로 나타난다(욥 26:6; 잠 15:ll).||#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밧돈은 신약성경에서 계 9:11에만 나타난다. 아밧돈은 지하세계의 사자, 마지막 날에 인간을 괴롭히는 전갈 괴물들의 왕, 지상의 파괴자에게 주어진 고유명사이며, 헬라어로는 '파괴자'를 뜻하는 아폴뤼온($623)으로 번역되었다.|이것은 구약성서에서 따온 것으로서(예, 욥 28:22), 멸망의 장소를 의인화한 것이다(욥 26:6 등). 헬라어 아폴뤼온($623)은 아폴레이아($684)에 대한 7O인 역본의 용법과 재앙과 멸망의 신(神)으로 아폴뤼온을 생각하는 개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Aeschylus Agamemnon l082).|(참조: J. H. Thayer; J.Jeremias).||*$623 아폴뤼온|파괴자|⇒ [멸망1] 항목을 보라|||*$3644 올로드류테스|파괴자|⇒ [멸망2] 항목을 보라
폐를 끼치지 않기
ajbarhv"
짐되지 않는||#1. 일반 헬라어의 용법||형용사 아바레스는 %107(부정접두사)와 바로스($922)에서 유래했으며,|(a) '무게가 없는, 가벼운',|(b) 비유적으로, '짐이되지 않은'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아바레스는 신약성경에서 고후 11:9에 한번 나오며, '짐되지 않는'를 의미한다: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참조: 고후 12:16; 살전 2:9).|(참조: J. H. Thayer; Walter Bauer).
아바
!Abba'
아바, 아버지||아람어에서 아버지를 뜻하는 '압바(abba)'라는 말은 신약성경에는 세 곳에만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사용하셨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바울이 주기도문을 생각하고 말한 두 구절에 나타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4; 롬 8:15)."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아람어 원문에는 '압바'로 나타난다(눅 1:2).||아람에서 압바(abba)는 원래 그에 동등한 여성 명사 임마(imma)처럼 유아 언어에서 파생되었다. 어린애가 젖을 떼게 되면 그 아이는 압바(아빠)와 임마(엄마)라고 말하는 것을 배운다.|이러한 의미가 확장하여 아버지의 호칭형인 압바란 단어가 더 이상 아이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성인이 된 아들 딸들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단어의 유아적 성격(아빠)은 사라지고, 압바는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표현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러한 따뜻하고 친숙한 느낌을 얻게 되었다.|예수님은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름으로서 완전히 새롭게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식을 가르치고 있다.||압바라는 어린애답고 친근한 용어를 기도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며, 유대인들에게는 생소한 것이다. 고대 유대주의가 낳은 신앙에 관한 모든 문헌 중 어디서도 압바가 하나님을 부르는 방식으로 사용된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예레미아스(J.Jeremias)는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호칭형으로 압바를 사용했는지를 조사한 결과…모든 유대 문서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말로서 압바를 사용한 예는 단 한군데도 없었다'고 하였다.||신앙심 깊은 유대인들은 일상 가정생활에서 사용되는 친숙한 언어로 하나님을 부르기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큰 격차가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전 5:1).|하나님은 무한히 자애로운 아버지의 사랑을 가지신 분이시지만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열국을 다스리시며, 파도를 명령하시며, 창조와 재 창조를 하시며, 온 세상의 왕으로서 심판과 자비를 내리시며, 무한히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꺼려한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압바로 부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어린애답고 친근한 용어, 압바를 기도에서 사용하신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독특한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향한 예수님의 신뢰와 순종의 태도 뿐아니라(막 14:36) 비할데 없는 권위를 표현한다(마 11:25).||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 그들에게 자기를 따라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르는 권세를 주시고, 그렇게 함으로 그들을 아들인 자기의 지위에 동참하게 하셨다.||그리고 초대교회는 기도에서 압바를 사용하는 것을 이어받았다, 이것은 바울이 주기도문을 생각하고 있었던 두 구절에 나타나 있다(롬 8:14; 롬 8:15; 갈 4:6). 바울은 사랑하는 아버지 압바를 부르는 것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아들로 삼으시는 증거와 성령을 받은 증거를 찾아보고 있다(롬 8:14이하; 갈 4:4-갈 4:7).||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압바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은 또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나타내는 것이다: "내가…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후 6:18; 삼하 7:14의 자유로운 인용).[참조, 0. Hofius].
아벨
#Abel
아벨(인명)||#1. 구약성경||(a) 아벨은 히브리어 하벨(1893)의 음역이며, '숨, 허무'를 의미한다. 하와가 그를 낳을 때 그의 이름에 대한 설명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그 이름 헤벨 곧 '숨, 허무, 무쌍'을 영상케 되고 인생의 허무를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b) 아벨은 아담의 둘째 아들이며, 형은 가인이다. 그는 최초의 목자이다(창4:2).||(c) 아벨이 드린 제물는 여호와께 열납하셨다(창4:4).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가인의 미움을 받아 피살되었다(창4:5-8). 하나님은 가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주셨다(창4:25).|구약성경에서는 창세기 외에 다른 곳에는 아벨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2. 신약성경||(a) 아벨은 최초의 순교자로 기억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 (마23:35; 눅11:51).||(b) 아벨은 하나님께 참된 제사를 드림으로 의인이라는 증거를 얻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11:4)|요한은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고 교훈한다(요일3:12).||(c) 아벨은 그리스도 죽음의 모형이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
아비야
!Abiav
아바야(인명)||#1. 구약성경||아비아는 히브리어 아비이야(29)의 음역이며, '여호와는 아버지이시다'를 의미한다. 이 아비야는 구약성경에서 아비야로 불리워지는는 9명 중 한 사람이다.|아비아는 아론 자손이며, 다윗 때의 제사장이다: 레위 사람 느다넬의 아들 서기관 스마야가 왕과 방백과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과 및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족장 앞에서 그 이름을 기록하여 엘르아살의 자손 중에서 한 집을 취하고 이다말의 자손 중에서 한 집을 취하였으니... 일곱째는 학고스와 여덟째는 아비야요(대상24:6,10).||#2. 신약성경||(a) 아비아는 마태복음의 족보에서 예수님의 조상으로 나온다: (마 1:7).||(b) 족보에 세례(침례)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는 아비야 반열에 속하는 제사장이었다: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눅1:5).
아비아달
!Abiavqar
아비아달(인명)||#1. 구약성경||(a) 아비아달은 히브리어 에브야탈의 음역이며, '아버지께서 풍성히 주신다'를 의미한다.||(b) 아비아달은 아히멜렉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와 함께 제사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사울의 학살을 피하여 다윗에게로 갔으며(삼상22:20-23).|이 때 에봇을 가지고 내려와 대제사장이 되었다(삼상23:6,9; 삼상30:7).||(c) 압살름의 반란 때에 다윗의 피신처로 옮기려던 법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다(삼하15:24,27-29).||(d)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다윗의 모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고, 아히도벨의 모략을 다윗에게 알리었다(삼하15:34-36; 삼하17:15,16).||(e) 다윗 때에 사독과 함께 제사장의 일을 보았다(삼하19:11; 대상15:11; 대상24:6).||(f) 아비아달은 모반하려는 아도니야를 도왔으며(왕상1:7,25).|다윗의 통치가 끝날 무렵에 아도니아의 왕위 옹립과 관련을 물어 솔로몬에 의해 그의 제사장 직분 등을 박탈당했다(왕상2:26,27). 사독이 그의 직분을 대신했다(왕상2:35).||* 아비아달에게 그의 부친과 같은 아들이 있었는지,그렇지 않으면 기록의 착오가 있었는지 분명치 않다(삼하 8:17; 대상 24:6).||#2. 신약성경||아비아달은 신약성경에서 막 2:26에 한번 그리스도께서 그에 관하여 언급하신다: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다윗이 진설병을 구하던 때가 제사장 아비아달 때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아비아달의 아버지가 살았던 당시의 사람들을 포함한 아비아달 자신의 제사장으로서 일한 시기만을 언급한 것이다. 아비아달 제사장이 그 아버지보다 다윗과 오랜 교제로 더 잘 알려져 유명하였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러한 식의 표현이 더욱 편리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가 있겠다.
아빌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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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빌레네 abilene||아빌레네는 신약성경에서 눅 3:1에 한번 나온다: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는 세례(침례) 요한이 그의 사역을 시작했을 당시의 루사니아(Lysanias)의 영지이다. 그 지역의 이름은 그 수도 아빌라(abila)에서 유래했다. Itinerarium Antonini에 따르면 다마스커스(Damascus)에서 바알벡(Baalbek)이라는 로마 제국의 도시까지 가는 도중, 약 30Km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그곳은 Suk Wadi Barada(Adana)의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그 근처에, 성벽을 세우고 성전을 건축한 "영주 루사니아의 자주성"이라고 그리스말로 된 비문과 "아빌레네인들의 경비로" 길을 보수한 것을 라틴어로 기록한 또 하나의 비문과 함께 중요한 고대의 유적들이 있다. 고대의 명칭에 대한 기억은 아마도 아벨의 무덤이 신전의 폐허가 있는 인근의 고지대에 있다고 하는 이슬람의 전설에 남아있다. 요세푸스는 이것을 "뤼산니아스의 아빌라(the Abila of Lysanias)"라고 부름으로 이것을 같은 이름의 다른 도시들과 구별한다; 그리고 Ptolemy의 시대(약 A.D. 170)처럼 늦은 시기에 루사니아의 이름이 그것에 결합된다.|아빌레네의 영토는 Ituraean 왕국의 지역인데 루사니아 왕이 Mark Antony에 의해 약 35 B.C.에 피살되었을 때 해체되었다. 아빌레네가 별개의 영지가 된 정황은 전체적으로 분명치 않으며 루사니아 영주에 대해서도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다(Josephus Ant. xix. 5. 1; xx. 7. 1). A.D. 37에 그 영지는 다른 지역과 함께 아그립바 1세에게 양도되었으며, 그의 죽음 이후 A.D. 44년에 그것은 53년까지 로마 행정 장관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53년 클라우디우스는 인근의 영토와 함께 그 영지를 아그립바 12세에게 주었다. 1세기 말이 가까울 무렵 아그립바가 사망했을 때 그의 왕국은 시리아의 주로 편입되었다.(C. H. Thomson).
아비훗
!Abiouvd
아비웃 Abioud.||아비우드는 '나의 아버지는 존엄하시다'를 의미한다. 마 1:13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나오며, 스룹바벨의 아들이며, 예수님의 조상 가운데 한 사람이다: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브라함
!Abraavm
아브라함 Abraham.||#1. 구약성경.||(a)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의미.|아브람은 북부 셈어형의 이름이며, '아버지는 높임 받으신다'를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를 의미한다. 전자는 창 11:26-17:4에 나타나며, 후자는 대상 1:27; 느 9:7을 제외한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 대상 1:27과 느 9:7에는 아브람과 아브라함이 함께 나타난다. 아브람이란 이름은 창 17:5에서 계약의 갱신과 함께 하나님에 의해 "열국의(많은 무리의) 아버지"로 설명되는 아브라함으로 개명되었다.||(b) 아브람의 생애.|① 아브라함은 셈의 후손이며(창 11:10, 26; 11:10-26; 대상 1:24-27), 우상 숭배하던 데라의 아들로(창 11:26, 27; 수 24:2). 우르에서 태어났다(창 11:28, 31). 아브라함은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와 형제 나홀, 하란과 함께 살았으며, 사래와 결혼했다(창 11:29). 하란이 죽자 그의 아버지와 친척들과 함께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주했다(창 11:31). 이 하란에서 아버지 데라는 죽었다(창 11:32).||② 아브라함은 75세 때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함께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지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갔다(창 12:4-6).|아브라함은 세겜에서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을 받고 그 곳에서 단을 쌓는다(창 12:7). 그 다음 이동하면서 벧에서 단을 쌓고(창 12:8) 차츰 남쪽으로 옮겨 갔다(창 12:9).||③ 아브라함은 심한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내려갔다(창 21:10), 그 곳에서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고(창 12:11-13), 바로는 사래를 궁으로 데려갔으며(창 12:14, 15), 아브라함은 사래로 인해 후대를 받았다(창 12:16). 그래서 아내 사래를 바로에게 빼앗길 뻔 했지만 하나님의 간섭으로 피할 수 있었다. 바로가 이 일 때문에 재앙을 받고 사래를 돌려 보낸 것이다(창 12:17-20).||④ 아브라함은 거부가 되어 벧엘로 돌아왔고(창 13:1-4), 그의 목자와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자(창 13:5-7), 롯에게 비옥한 요단의 들을 양보하였다(창 13:8-12).|아브라함은 욥이 떠난 후, 두번째로 약속의 확증을 받는다(창 13:14-17). 그는 장막을 옮겨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거하며, 단을 쌓았다(창 13:18; 참조: 창 35:27).||⑤ 아브라함은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을 쳐부수고 소돔에서 포로가 된 롯을 구하고, 빼앗겼던 인민과 부녀와 재물을 다 찾아왔다(창 14:12, 14-16). 소돔왕의 영접을 받고(창 14:17),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고 십일조를 바쳤다(창 14:18-20; 참조: 히 7:1). 그리고 그는 소돔왕의 청을 사양한다(창 14:21-24). 여기서 소돔왕은 소돔이 지금 아브라함에게 신세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었지만 아브라함은 장차 아브라함이 거부가 되었을 때 그들이 말하기를 '이번 전쟁을 계기로 아브라함이 부자가 되었다'고 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만을 받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므로 소돔으로부터 실오라기 하나 받지 않은 것이다.||⑥ 아브라함은 그 후에 세번째로 약속을 보증받는다(창 15:1-5). 그는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로다함을 받았다(창 15:6).||⑦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약속이 더디자 하갈을 첩으로 취한다(창 16:1-3). 그는 신앙적인 방법에서 그 당시의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인간적인 방법을 취한다. 그것은 당시에 아들이 없는 부부가 첩을 얻어서 그녀를 통하여 자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사래의 여종인 애굽 여인 하갈을 취하여 그녀에게서 이스마엘을 낳는다(창 16:4, 15, 16).||⑧ 그러나 아브라함은 네번째로 약속의 보증을 받는다. 여기서 하나님은 세가지 방법으로 그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확신시키셨다. 첫째로 아브람과 사래에게 새로운 이름을 줌으로써 새로운 백성으로서의 의식을 공고히 하셨으며(창 17:3-5), 그 다음에, 지금까지의 언약을 재차 자세히 설명하심으로 어떤 의문도 남기지 않도록 배려하셨다(창 17:6-8).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로 알리시는데 있어서 그 당시 인간이 알 수 있을 만큼 보이시고, 그의 신앙 성장에 따라 그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부분도 크게 넓어지게 하신다. 하나님은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며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와 있었던 것이다(창 17:6-8).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명하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언약을 받고 할례를 언약의 표징으로 받는다.||⑨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을 것(창 17:15-18)과, 그 아들 이삭과 언약을 맺을 것을 약속하셨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다섯 번째로 받는 약속이다(창 17:19, 21, 22).||⑩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자를 영접하고 그 사자로부터 아들에 대한 약속을 다시 받는데, 이것이 아브라함이 받는 여섯 번째 약속이다(창 18:10, 13-15, 17-19).|그 사자로부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한 통보를 받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다(창 18:20 이하). 아브라함으로 인해 롯이 구원을 받았다(창 19:29).||⑪ 아브라함은 헤브론에서 그랄로 가서 살았으며(창 20:1),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다(창 20:2 이하). 그래서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였으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간섭으로 인해 사라를 돌려받았다(창 20:14).||⑫ 아브라함은 100세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라에게서 아들 이삭을 낳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행했다(창 21:1-4; 21:1-8).||⑬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었다(창 21:9, 10, 14).|이후로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고, 브엘세바를 자기의 거주지로 확보한다(창 21:1-34).||⑭ 아브라함은 자신의 사랑하는 유일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모리아 땅에 가서 제단을 쌓아 아들을 올려 놓고 칼로 찌르려는 순간에 수양을 발견, 대신 번제로 드렸다(창 22:1-10). 이 결과로 후손에 대한 복을 일곱 번째로 약속 받는다(창 22:16-18). 거기서 아브라함은 브엘세바로 와서 거하였다(창 22:19).|아브라함은 그 후에 아내 사라가 죽자 헤브론 지역에 막벨라 굴이 있는 밭을 사서 사라를 위해 매장지로 삼았다(창 23:1-20).||⑮ 아브라함은 이삭이 40세가 되자 자기 종 엘리에셀을 메소보다미아에 있는 나홀 성으로 보내어 브두엘의 딸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선택, 데리고 와서 결혼시켰다(창 24:65-67).|아브라함은 그두라를 후처로 삼고 자녀를 얻었다(창 25:1-4). 그는 장수하다가 175세에 죽어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다.||(c) 아브라함의 특징.|주의 벗(대하 20:7; 사 41:8), 믿음의 사람(창 15:6), 기도의 사람(창 12:8; 창 13:4; 창 20:7, 17), 선지자(창 20:7), 순종의 사람(창 22:1-3; 22:1-18), 비이기적임(창 13:8, 9; 창 21:25-27), 용감함(창 14:13-16). 독립심이 강함(창 14:21-23; 창 23:11-13, 16), 경건함(창 18:19; 창 22:12; 22:3-13; 창 26:5; 느 9:7, 8), 부유함(창 13:2; 창 24:35), 하나님의 방백(창 23:56).||#2. 유대교.||(a) 초기 유대교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강조되고(마카베오일서 2:52; Philo Abr. 268-276; Her. 90-95) 그의 성실함이 하가다의 형식으로 정성들여 기록되었다. 집회서 44:19-21에서 그것은 보다 더 정밀하게 율법에 대한 성실함으로 묘사된다. 희년서(Jubilees)에서 아브라함은 단호한 우상 숭배 반대자이고 히브리의 언어와 전통을 재건한 자이다(Jub. 11-12; 20-22). 그는 유혹을 견디어 내고(19:8) 기도와 손을 얹음으로 바로의 문둥병을 고쳤다(1Qap Gen 20:16-29). 그는 시련에서 구조되었다(Gen. Rab. 44:13; Bib. Ant. 6:15-18).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는 축복의 결과는 광범위하다: 홍해에서의 이스라엘의 구원은 아브라함의 믿음, 또는 이삭을 희생제물로 기꺼이 바침에서 기인한다(Mek. Exod. 14:15에). 아브라함의 혈통은 영원한 왕국에 있는 처소를 보장한다(Justin Dial. 140). 이삭의 결박을 기초로하여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을 위한 중재자로 나타난다(y. Ta'an. 2:65d). 아브라함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고백하는 모든 자들은 비록 그들의 죄가 많을지라도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 참예한다고 한다(SB1 마 3:9에 대해). 다른 한편 공동체 규정(1QS 2:9)은 저주 아래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조상들" fathers의 공적의 효력에 반대하여 논쟁한다.||(b) 헬라파 유대인의 '아브라함의 묵시록'(Apoc. Abr)(A.D. 1세기?)은 아브라함을 일신론자이며 미래에 대한 계시의 수령자로 묘사한다; 같은 시대의 '아브라함의 언약'(T. Abr.)은 그의 죽음의 공표와 그의 하늘 나라로 올라감에 대해 묘사한다.||#3. 신약성경||아브라함은 신약성경에서 73회 나타난다. 신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아브라함의 혈통의 어떤 필연적 효력에 대하여는 인정하지 않는다.||(a)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조상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후예라는 사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선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자신의 백성과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계보는 아브라함으로 시작하고(마 1:2), 그로부터 다윗까지 14대를 나아간다(마 1:17).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기도 하다(마 1:1; 참조: 마 1:21). 누가는 아브라함을 단지 예수님의 계보의 한 일원으로 언급하고 그 계보는 아담에게까지 이른다(눅 3:34).||(b) 마 3:9(병행구 눅 3:8),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알려지는 것을 특별한 영예의 칭호로 여겼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공적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자기 백성의 조상으로 불렀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육체적 혈통이 메시야의 나라의 모든 축복을 그들에게 보장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세례(침례) 요한은 이러한 사상이나 신념을 버릴 것을 요구하고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이 되는 가능성을 설명하였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전혀 무가치한 것이다.|오직 심령을 하나님의 임할 나라에 두는 자라야 회개의 참 열매(회심)를 맺고 최후의 심판을 예기하는 세례(침례)로 말미암아 그 나라의 한 자리를 소망할 권리를 소유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부터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잃은 양을 찾는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이유이다. 예수님은 이 사회에서 백안시받던 삭개오의 집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구원을 이르게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c) 막 12:26(병행구, 마 22:32; 눅 20:37),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현시하신 것에서 율법이 죽은 자의 부활을 지적하는 것을 보셨다. 만약 살아계신 하나님께서(참조, 출 3:14) 그를 언급하신다면 그는 살아있음에 틀림없다.|족장들처럼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예수님께서도 받아들이시고 하나님 계신 곳에는 반드시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자는 죽을 수는 있으나 삶이 끝날 수는 없다.||(d) 눅 16:22에서 아브라함은 살아있어서 나사로를 위한 지복의 장소의 구성 요소가 된다.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말은 겉옷을 가볍게 끌어올림으로 생기는 허리 띠 위의 공간(헤크)을 의미한다. 이런 식의 묘사는 랍비 문헌들에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이 말은 아마도 어머니가 가슴 위의 옷 주름 안에 아이를 품는 사랑의 돌봄과 같은 특별한 돌봄이나 또는 영예의 자리인 아브라함 옆자리의 식탁에 대한 언급인 것 같다. 사람이 식탁에 기대어 누울 때, 그의 머리는 대개 옆 사람의 가슴 면에 닿게 된다(요 13:23, SB Ⅱ). 그는 역시 부자의 영혼에 의해 불리워질 수 있고 그에게도 역시 여전히 "아버지 아브라함"이다(눅 16:23 이하; 눅 16:27; 눅 16:30). 그러나 부자에게 축복은 세상에서의 물질적인 소유물로 인해 고갈되었다(눅 16:25). 축복의 영속하는 효력은 율법과 예언에 대한 순종에 의해 보장되는데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아주 당연하게 대변자로서 나타난다(눅 16:29; 눅 16:31).||(e) 마 8:11(병행구, 눅 13:28),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이 구절에서 아브라함의 복은 전 세계적 중요성을 지닌다. 예수님께서 "나라의 본 자손들"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이라고 위협하시는 이 구절에서 아브라함은 첫번째 개종자이며 또한 가장 위대한 개종자였다는 확신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나라에서 그의 육적이며 민족적인 상속자들로만 에워싸일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거기에는 아브라함의 유형과 같은 사람들 즉 개종자들도 있을 것이다. 천국 연회가 열릴 때 그의 식탁 친교에서 이삭과 야곱과 아브라함과 더불어 이방인들도 역시 참여할 것이다.||(f) 누가복음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아브라함의 혈통은 구원자 예수님에 대한 특별한 의무를 나타낸다. "아브라함의 딸"은 마귀의 노예가 될 수 없으며(눅 13:16; 요 8:33-40) 세리라 할지라도 여전히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구원의 후보자이다(눅 19:9).||(g) 사도행전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세 명의 족장 중 가장 중요한 대표자이다(행 3:13; 행 7:32).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가족이며(행 13:26), 아브라함에 대한 언약과 축복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성취된다(행 3:25).|스데반의 설교(행 7:2-행 7:8; 행 7:16 이하)는 아브라함에게 한 이스라엘이 노예가 될 것이라는 예고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역사의 중대한 시점까지 상기시켰는데(행 7:6 이하; 참조, 창 15:13 이하) 시작 부분에 아브라함의 할례가 있고(행 7:8) 결론 부분에 할례 받지 못한 이스라엘의 마음이 나온다(행 7:51).||(h) 요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과 관련된 두 가지 토의를 본다.|첫째 부분(요 8:30-40)은 육체적 자손들("아브라함의 씨", 요 8:33; 요 8:37; 참조: 요 8:39)과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간의 차이를 강조한다. 유대인들의 믿음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였음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브라함의 행위들을 실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요 8:39 이하). 아브라함은 단지 하나님의 자유롭게 하시는 말씀(Word) 만을 의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성육신하여 그들 앞에 섰다는 것에 대해 침묵하고 싶어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 그들의 자유를 보장할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에 사실상 예수님만이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잡는 것만이 그들에게 참된 자유를 줄 수 있었던 것이다.|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들이 아브라함이 행했던 대로 행함으로 그 가장의 진정한 자녀임을 입증한다. 그들이 누리는 자유는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로 해석된다(요 8:33; 요 8:39 이하).|두번째 부분(48-59절)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실 때, 그보다 오히려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하셨을 때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발언으로 시작한다. 유대 사상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실 때는(요 8:51)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 만이 영생을 보장할 수 있으며, 예수님은 이미 아브라함과 선지자들과 같은 죽을 인간이라는 것이다(요 8:52). 그렇지만 예수님은 인간 이상의 존재라는 의미에서 아브라함보다 더 크신 분이셨다. 유대 사상에도 메시야와 모세는 아브라함보다 더 큰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영생을 부여할 권세를 주셨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자기의(하나님의 말씀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했다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그보다 먼저 계셨고 그보다 높으신 메시야에 대한 환상을 본 증인으로 간주된다(요 8:56). 언약을 맺을 때에(창 15:12-21),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미래의 주요 운명을 보았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견해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충분히 있다(SB Ⅱ, ad loc.). 이어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나이다 I am)"라고 말씀하신다(요 8:58).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고 또한 영원히 계실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참으로 영원하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살다가 죽었던 것이다(참조: H. Seebass).||(i) 바울은 "아브라함의 씨"라는 말로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이점과 그 자신의 혈통 모두를 표현한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롬 9:7). 고후 11:22; 롬 11:1에서 바울은 자기도 "아브라함의 씨"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종말론적 아들의 자격을 가진 "아브라함의 씨"가 되는 방정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스마엘과 대조되는 이삭의 예가 명백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후자는 오직 약속의 자녀(롬 9:7-롬 9:9), 즉 믿는 자들에게만 적용된다. 바울에게 있어서 창조적인 약속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첫번 째로 중요하다.||(j)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창 15:6을 근거로 하여 믿는 자의 모델인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역시 믿음으로 인한 칭의로 말미암아, 오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유대의 전통과 대조적으로 바울은 아브라함을 율법으로부터 떼어놓고, 그가 받은 할례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취급하고, 약속과 믿음이 시간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앞선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그가 할례를 행하기 전 그리고 율법 시대 이전(참조, 롬 4:13)에도 아브라함은 은혜로 주어지는 약속을 통한 믿음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롬 4:13-롬 4:15), 할례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보증과 그에게 "많은 민족의 아버지" 즉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로서의 명예를 주는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롬 4:10-롬 4:12; 롬 4:17).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그의 자손이다(롬 4:16 이하).|따라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할례에서 "언약의 표시"(창 17:10 이하에서처럼)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할례 이전에 보여준 믿음에 기초한 "의롭다하심의 인치심"을 본다(롬 4:11 이하).|아브라함의 아버지 됨도 역시 재 정의된다: 유대인의 육신의 조상(롬 4:1)은 그의 믿음을 본받음으로 이루어지는 마음의 할례라는 의미의 "할례받은 자들의 아버지"이다.|땅을 상속하리라(롬 4:13)는 약속 역시 영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아브라함의 믿음은 근본적인 특성과 종말론적 중요성을 지닌다. 모든 인간의 소망과 반대로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에 대한 약속을 붙잡았고, 그러므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존재하도록 부르시는 자의 창조적인 말씀을 영광되게 하였다(롬 4:17-롬 4:21).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살리신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여(롬 4:24 이하) 용서를 통하여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뜻을 가능하게 한다(롬 4:5).||(k)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에게서 비롯되는 축복(갈 3:6-갈 3:9)을 율법을 행하는데 실패한 자들 위에 있는 저주(갈 3:10-갈 3:13)와 대조시킨다. 민족들을 위한 아브라함의 복은 이방인을 의롭게 하시는 원시 복음으로 이해된다(갈 3:8 이하).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의 후사이다(갈 3:29). 아브라함의 복은 종말론적으로 나무에 달리신 자(갈 3:13 이하)에 의해 성취되는 구원으로 시행되며, 바울도 특별히 약속의 영원한 유효성(창 17:7)은 오직 영원히 통치하시는 메시야에 의해 보장되기(삼하 7:12-삼하 7:14; 참조, 롬 1:3 이하) 때문에 특히 그리스도에 대해(갈 3:16) "아브라함의 씨"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갈 4:22에서 아브라함은 각각 위에 있는 시나이와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하갈과 사라의 남편으로 언급된다.|롬 8:32은 창 22:16을 생각나게 한다: 하나님의 자기 아들 내어주심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것과 관련지어 진다(참조: O. Bocher).||(l) ① 히브리서에서 아브라함은 히 11:1에 정의된 바와 같은 종말론적 경향의 믿음의 이상을 구현한다. 그는 그의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으로 거주하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성을 기다렸으며(히 11:8-히 11:10), 이삭을 희생 제물로 드렸다(히 11:17-히 11:19). 이미 맹세로 확증한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로 굳게 붙잡았다(히 6:13-히 6:15).||②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후사는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불리워지는(히 2:16) 믿는 자들(히 6:17)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이 행한 것과 같이 믿음에 의해 사는 모든 사람, 즉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일 것이다.||③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모든 것의 십분 일을 주는 미덕에 의해, 그렇게 함으로써 멜기세덱의 하나님과 그의 제사장의 권위를 인정함으로, 시 110:4의 영원한 대제사장직의 증인이 되었으며, 그 대제사장직은 그 종말론적 실현을 그리스도의 제사장의 직무에서 찾는다(히 7:1-히 7:10)(참조: O. Bocher).|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자신보다 위대한 자로 인식하였다. 마찬가지로 레위족의 제사장직은 단지 일시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으로 선포된 분이야말로 더 위대한 분임에 틀림없다.||(m) 약 2:20-약 2:24에는 바울의 사상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반대하여,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그의 행위에 근거한다. 기자가 창 15:6(약 2:23)의 의미를 완전히 깨닫고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의 제사에 의해 완성되고, 그래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을 때,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의 결과이다는 것을 확인한다(약 2:22 이하).||(n) 베드로전서 3장의 가족의 규범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른 사실(창 18:12)은 모범적인 아내의 증거로 평가된다(벧전 3:6).|(참조: H. Seebass; O. Bocher).
무저갱
a[busso"
심연, 무저갱||#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아뷧소스는 본래 형용사이며, 뷔도스($1037)와 같은 말인 호뷧소스에서 유래했으며, '밑바닥 없는' bottomless, '깊이를 잴 수 없는' unfathomable을 의미하는 형용사이다. 이 형용사가 명사 게(땅)와 함께 사용될 경우에는 '밑바닥 없는 장소', 따라서 곧 '무저갱 abyss'을 의미한다.|후기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태초의 깊음, 태초의 대양(大洋), 사자(死者)의 영역, 지하 세계'를 의미하였다.||#2. 70인역본의 용법||아뷧소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5회 나타나며, 대체로 히브리어 테홈('태초의 대양',창 1:2; 바다의 '큰물이나 깊은 물',사 63:13; 욘 2:5; 강의 '깊은 물', 시 42:7; 겔 31:4; 지하수의 '깊은 물', 창 7:11; '사자의 영역' 시71:20)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랍비 유대주의는 이 테홈을 '태초의 홍수'라고 주장하였다.|하지만 이 단어는 불결함(uncleanness)을 야기시키는 시체들이 발견되는 대지의 내부를 역시 뜻한다. 무저갱(abyss)은 또한 타락한 영들의 감옥을 의미하게 되었다(이디오피아 에녹서10:4이하; 18:11이하; 희년서 5:6이하).||#3. 신약성경의 용법||아뷧소스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신약성경에서 아뷧소스는 '영들의 감옥'이다(계 9:1; 계 20:1; 계 20:3). 이곳은 사탄이 아닌 한 임금에 의하여 다스려진다(계 9:11). 그것이 열려졌을 때 그 구덩이에서 연기가 올라와 주위를 어둡게 한다. 종말 이전 대환란에 놓이기 까지 그 곳에는 적그리스도(계 11:7; 계 17:8), 지하 세계의 왕(계 9:11), 귀신들(눅 8:31), 전갈 괴물들(계 19:3이하)이 수용되어 있다. 사탄은 천년의 통치기간 동안 그곳에 결박되어 갇혀있게 된다(계 20:1; 계 20:3). 하나님이 이 적대적인 영들을 제어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영들의 감옥'이라는 이 개념에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b) 로마서 10:7 이하에서 '사자(dead)의 거처나 영역'를 묘사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무저갱으로 내려가는 것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대조된다. 살아있는 사람이 무저갱으로 내려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로 오시게 하기 위해 무저갱으로 내려가지도 하늘로 올라갈 수도 없다.|(참조: H.Bietenhard, DNTT; Joachim Jeremias, TDNT).
아가보
!Agabo"
아가보 Agabos.||아가보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선지자이며, 사도행전에 2회 나온다.||(a) 행 11:27 이하에서, 아가보는 안디옥에 이르러 '천하가 크게 흉년들리라'고 예언하는데, 여기에 누가는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라고 덧붙인다. 아가보는 안디옥을 A.D. 43-44년 겨울에 방문하였으며, 그 목적은 안디옥 교인들로 하여금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유대에 있는 형제들에게 헌금을 보낼 것을 강권하기 위함이었다.|여기서 주목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다.|① 여기서 예언의 은사는 예언의 형태를 취한다. 이 선지자의 주요한 역할은 예고하는 일이라기 보다는 도덕적·영적 진리를 계시하는 것, 즉 밖으로 드러내어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해석은 때로 사건들을 예언하는 형태를 취한다.|② '천하'(실제로는 로마 제국임)라는 문구는 수사적 과장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정확히 해석하면 전반적이고 일시에 일어나는 흉년을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라우디오 치하의 여러 지역에서 극심한 주기적 흉년이 있었으며(예: Suetonius Claudius 18; Tacitus Ann. xii. 43), A.D. 44-48년, 행정 장관 쿠스피우스 파두스와 티베리우스 알렉산더 치하(Ant. xx. 2.6; 5.2)의 유대 땅에서 매우 심한 기근이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이 기근은 A.D. 46년 경에 아마도 극에 달했던 것 같다).||(b) 행 21:10이하에서 우리는 아가보가 가이사랴에서 생생한 상징적 행동으로 바울에게 경고하는 것을 보는데(구약성경 선지자들의 행동을 따른 것임; 참조: 렘 13:1 이하; 겔 3장 이하),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감옥에 갇혀 고난을 당할 것임을 경고하는 것이다. 후기 전승에 의하면 아가보는 예수님의 70인 제자의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참조: W. S. Lasor).
선한 일을 행하다
ajgaqoergevw
선을 행하다 do good||#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가도에르게오는 아가도스($18: 선한)와 에르곤($2041: 일)이나 에르가조마이(일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선을 행하다, 선행(자선)을 행하다'(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 대하여),즉 어떤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는 매우 드물게 나오는 단어로서, 70인역본과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아가도에르게오는 신약성경에서 딤전 6:18에만 한번 나온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여기서 부자에 대한 충고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표출인 선행을 요구하고 있다.|행 14:17에서는 단축형 아가두르게오(%352)가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의 친절한(자비로운) 행동을 지적한다.|(참조: J.H.Thayer; W.Grundmann; E.Betreuther).
선대하다
ajgaqopoievw
선을 행하다 do good.||#1. 일반 헬라어의 용법||동사 아가도포이에오는 아가도스($18: 선한)와 포이에오($4160: 행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선을 행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아가도포이에오는 70인역본에서 6회 나오며, 야타브 히필형(좋게 하다, 잘하다, 기쁘게 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민 10:32; 삿 17:13).||#3. 신약성경의 용법||아가도포이에오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아가도포이에오는 '선을 행하다'를 의미한다.|① 막 3:4에서 유익한 일을 행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기독론적, 윤리적 타당성을 나타낸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병행구, 눅 6:9).|② 행 14:17에서 자신의 친절(자선)을 베푸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③ 눅 6:33, 눅 6:35에서 은혜를 베푸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b) 아가도포이에오는 '잘(행)하다, 올바르게 행하다, 옳은 일을 하다'를 의미한다. 벧전 2:15, 벧전 2:20; 벧전 3:6, 벧전 3:17; 요삼 1:11에서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묘사하였다.|(참조: J.H.Thayer; W.Grundmann; E.Beyreu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