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6편

시편 2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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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주제-다윗의 시. 이스라엘의 감미롭게 노래하는 자는 질책과 비난을 견디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점에서 그는 다윗의 아들이신 메시아의 모형이며, 우리가 비난을 당할 때에 그 짐을 은혜의 보좌 앞으로 들고 나아가도록 하는 본이 되어 주었다.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을 암살했을 때에(삼하 4:5-8), 다윗이 이 일에 연루가 되었다고 혐의를 받게 되자, 그가 이 암살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항의하며 이 시를 지었다는 기발한 추측이 있다. 이 시를 살펴보면 그러한 상황에서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 나아가 어떤 단정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성-이 시는 한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특별한 구성은 없다. 데이비드 딕슨은 "시편 기자는 최고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선한 양심으로 증언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이 시를 요약하며 그 구성을 나타내 보였다.

 

1-3절신자로서 의롭게 살려는 시편 기자의 노력.

4-5절악한 계교와 죄스러운 일과 악인의 본으로부터 오염되지 않도록 자신을 지킴.

6-8절여호와의 회중에게 주어지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 거룩하고 의롭게 살려는 그의 목적.

9-11절악인의 죄를 피하려고 한 자신이, 악인에게 내리는 심판을 받지 않기를 기도함.

12절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하셨다는 확신과 위로로 기도를 마침.


강해


1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3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1절.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시편 기자는 정직을 삶의 원리로 삼고, 정직하게 행동하며 살았다. 다윗은 왕위를 차지하거나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반역적인 행동이나 불의한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사울과 그의 가족을 가장 고귀하고 존귀한 자들로 대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 일인가! 영혼에 평안을 누릴 수만 있다면, 우리를 향해 폭풍처럼 가혹하게 몰아치는 비방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의 품안에 있는 작은 새가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한다면, 밖에서 수천 마리의 올빼미들이 시끄럽게 나를 향해 소리를 질러도 아무 상관이 없다.


"요동치 아니하고." (KJV에는 "그러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마치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내가 미끄러운 길을 걷는다고 해도, 믿음은 내 발로 실족하지 않게 할 것이다. 애매한 원칙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은 조만간에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정직한 길은 때로 거칠기는 하지만 언제나 안전하다. 우리가 구부러진 길을 걸어간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바른 길과 단순한 믿음은 순례자로 기쁘고 안전하게 여행하게 해 준다.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믿음이란 정직을 지지하는 뿌리와 같고, 이것을 유지하는 수액과도 같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의로움 가운데 행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 그에게 왕위를 주신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불의한 방법을 취할 필요가 없었고, 불의를 행하지도 않았다. 그는 동굴에 있을 때에도 그의 원수를 살해하지 않았다. 원수를 지키는 자들이 잠들었고 원수도 들에서 잠을 자고 있었을 때에도 그를 쳐죽이지 않았다. 믿음을 가진 자는 여호와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또 여호와의 방법으로 행한다. 믿음은 불의하고 교활한 방법으로 행하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이지도 않는다. 야곱을 위한 여호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리브가는 크게 잘못된 방법을 사용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 불신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손에 칼을 들고서 그의 아들을 죽이려 했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를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필요를 채우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왜 내가 도둑질할 필요가 있겠는가? 여호와께서 나를 보살펴 주시는데 왜 내가 복수를 해야 하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죄를 대항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시편 기자는 특정한 일로 모함을 받았다. 그래서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공정한 판단을 내려 주실 것을 엄숙하게 요청한다. 그 자신은 정직하고 결백했으나 사람들의 부정과 악으로 마음이 상하고 염려가 된 그는, 그를 거짓으로 욕하는 사람들을 피하여 영원히 진실된 분의 보좌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이 일에 결코 아무런 잘못이 없었기에, 하늘에 계신 왕에게 나아가 이 일을 판단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이런 기도는 누구든지 어떤 경우에든 성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의 모든 행위와 대화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외에, 결코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도 없는 것이다. 죄인들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다:"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시 143:2). 


2절. 이 구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세 가지의 시험으로 자신을 시험하실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세 가지의 시험은 접촉을 통한 시험, 냄새를 통한 시험, 그리고 불의 시험이다. 시편 기자는 그를 모함하는 일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므로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께 어떤 종류의 시험으로도 자신을 조사하고 판단해 주실 것을 기도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나를 철저하게 살피소서. 사소한 것까지도 나를 조사하소서. 나를 심문하시고, 그 증거를 여러 번 살펴보소서.

"시험하사." 나를 고난을 통해서도 시험해 보소서. 내 원수들이 나를 비방하는 것처럼 내가 악한 계교를 품고 그대로 행했는지 살펴보소서.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용광로에서 광석을 시험하듯이 나를 시험하소서. 내 존재의 가장 은밀한 곳을 이렇게 시험해 보소서. 오 하나님이여, 내가 살인과 반역과 속임수를 사랑하는지 살펴보소서.

다윗은 이처럼 매우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간구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지극히 두려워하는 다윗이 이와 같은 간구를 한다면,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무죄를 온전히 확신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다윗이 이처럼 간구하는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할 것이라는 사실을 교훈으로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일에 진실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살아야 할 필요를 느껴야 한다. 우리의 원수들은 우리에게 독한 악의를 품고서 대하지만, 용감한 자들은 이것을 두려움 가운데 견딜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흔들리지 않고 견딜 자가 어디 있겠는가? 시편 기자는 "누가 능히 그 추위를 감당하리요"(시 147:17)라고 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할 것이다:"누가 능히 그분의 공의의 열기를 감당하리요?" 


3절.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나와 함께하셨음을 기억하고, 또한 이 인자하심 때문에 나는 소망을 품는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면, 우리가 가장 험하고 어두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신실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의 인자는 과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우리에게 계속 베푸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환상이 아니라 실제적인 일이다.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하늘의 언어와도 같은 "인자"를 묵상하라. 여기에는 하늘의 아름다움과 향기가 배어 있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말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기억하고, 이것을 동기로 삼아 행동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율법의 굴레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감미로운 은혜 아래 있으며, 이것은 율법보다 더욱 온유한 것이지만 훨씬 힘이 있다. 사람들은 목전에서 율법을 범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 허물을 덮어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 동안 베푸셨던 그 모든 자비를 잊지 않았다면, 우리도 또한 주의하여 그분을 향해 순종의 길을 걷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의 진실성을 확신하는 가운데 죄로부터 보존될 수 있었다. 그는 이 진실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진리 가운데 행하려고 노력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사는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교리적으로나 실제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는 자는, 그 진리를 체험하는 가운데 누릴 수 있는 즐거움도 상실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 입으로 말만 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진리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미래에는 잘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러나 이런 결심은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다. 오직 중생한 사람만이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였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4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5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악을 사랑하는 자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다. 그는 벨리알의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에 그가 사귀는 친구들을 보고서 판단한다. 우리가 악한 자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켰다면, 우리가 악한 사람이라고 비난을 받을 때에 이 비난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 들에 나간 적이 없는 사람은 옥수수를 훔쳤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바다에 가지도 않았던 사람이 배 밑창에 구멍을 뚫어 침몰시켰을 리가 없다.


4절.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참된 시민들은 반역자들과 함께 모의하지 않는다. 다윗은 허망한 사람들과 함께 앉을 자리가 없었다. 다윗이 잔치를 베풀 때면 그들을 초청하지도 않았고, 그의 일에 조언을 하는 모사도 없었으며, 함께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말하고 교역을 할 수밖에 없지만, 결단코 그 헛된 세상에서 안식이나 위안을 찾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악한 사람들뿐 아니라 허망한 사람들도 피해야 한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의 삶만을 위해서 사는 자들은 헛된 자들이고, 그들은 겨와 같고 공허한 거품과도 같아서 성도들과 교제를 나눌 가치가 없는 자들이다. 더욱이, 이 허망한 것은 거짓 된 것과 함께 나타나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들과 사귀다 보면 우리도 점점 타락한 길을 걷게 되고, 헛된 것을 용납하다가 마침내 악인을 존경하고 본을 받게 될 것이다.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위선적인 경건은 이중의 악이기 때문에 무언가 위장을 하고 숨기는 자와는 어떤 관계도 맺지 아니하겠다. 만약 그들과 함께 길을 걸어야 한다면, 그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겠다. 우리는 위선자들의 모임에서 결코 교제를 나누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들과 교제를 나누다 보면 마침내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지고 말 것이므로 그들과의 교제를 당장 그만 두자! 지옥에 떨어지기를 바라는 자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손에 잡고서 기도하는 염주알을 목에 걸고 다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마귀를 모시고 다닌다. 시편 기자는 "아니하리이다"라고 미래형으로 기록했다. 그는 지금까지 멀리했던 이런 사람들과 앞으로도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마지막 큰 구원의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더욱 주의하며 그들과 구별된 길을 걸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고자 하는 자들은 이 세상의 형상으로 그 모습을 일그러뜨려서는 안 된다. 시편 기자의 결심을 보면서 우리는 진리를 따른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간사한 자들을 분별해 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교회 안에도 허망한 자들과 간사한 자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는 이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5절.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이 말에는 시편 기자의 결연한 심정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결심은 지나친 것이 아니다. 악을 심하게 미워하지 않는 자들은 선도 진실되게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웃을 인간으로서 사랑하되,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이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들은 위대하신 왕께 반역하는 자들이며, 왕께 충성스러운 자들은 결코 반역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우리도 역시 미워해야 한다. "행악자의 집회"는 포악한 자들이 무죄한 자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비밀스럽게 연합하여 모인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는 이런 사탄의 집회를 미워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의로운 사람들의 집회뿐만 아니라 악을 행하는 자들의 집회도 있고, 하나님의 교회뿐만 아니라 사탄의 교회도 있으며, 여인의 후손뿐만 아니라 뱀의 후손도 있다. 이 세상에는 새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옛 바벨론도 있다. 또한 어린양께서 다시 오실 때에 면류관을 쓰게 될 어린양의 정숙한 신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진노 가운데 심판을 받을 매춘부도 있는 것이다.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성도들은 악을 행하는 자들과 같은 식탁에 앉지 않는다. 그들은 돼지들이 먹는 옥수수 껍질을 먹으러 왕의 진미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 소경과 불구자와 저는 자들과 함께 자비의 식탁에 앉는 것이 악한 자들과 함께 행악의 잔칫자리에 앉는 것보다 더 낫다. 사실 그렇다. 바로의 보좌에 앉는 것보다 욥과 함께 낮은 자리에 앉는 것이 더 좋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우리가 누구와 동행하고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귀는 자들과 함께, 오는 세상에서 그들이 앉는 자리에 우리도 앉게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6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7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8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6절.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그는 자신에게 닥치는 비난이 아무런 근거도 없고, 무죄하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자 한다. 또한 다른 잘못된 것이 있다면, 앞으로는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손을 씻는 행위는 문제가 된 그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어떤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 때 "이제 그 일에서 손을 씻었다"고 말한다. 다윗은 그가 전적으로 모든 일에 무죄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를 비난하는 특정한 일에 대해 자신은 무죄함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씻어서 온전히 죄 사함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를 온전히 씻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들은 먼저 자신을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 성전에는 금으로 만들어진 제단뿐만 아니라 놋대야도 역시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도 드릴 수 없다. 우리의 손이 죄로 더럽혀져 있다면, 그 손으로 어찌 감사의 예물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천천의, 그리고 만만의 기름진 제물보다도 우리가 공의와 순결을 사랑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거룩한 자들은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을 즐거워하며, 그분의 제단에서 감미로운 위로를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가장 신성한 일, 즉 그들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이런 일은 결코 행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한다. 우리는 우리 죄를 위해 속죄 제물을 보내신 하나님, 그리고 그분이 보내신 속죄 제물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속죄 제물을 보고서 죄를 지어도 좋다는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된다. 이 속죄 제물을 보고서 우리는 더욱 거룩한 삶을 살고자 결심해야 하는 것이다.


7절.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다윗은 사람들이 드리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영적 제물을 드리겠다고 말한다. 그는 영적 분별력이 있어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황소의 신음 소리가 아니라 예배하는 자들이 바치는 감사의 노래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말한다.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로 찬양을 돌리는 일은 사함받은 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사람들이 무슨 말로 우리를 비방하든 우리는 여호와께 드리는 찬양을 중단하지 말자. 개들이 짖는다고 해도 우리는 달처럼 빛을 발하자.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혀가 결박되어선 안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베푸시는 기이한 일들을 맛보았다면, 벙어리의 혀로도 노래를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시는 일들은 진정 기이하고 놀랍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대상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들인가!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셨는가! 그리고 무가치했던 존재들이 받을 영광은 얼마나 큰 것인가! 사람들은 놀랄 만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진정 좋아한다. 이처럼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성도들은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에 대해 말하기를 기뻐한다.


8절.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을 사랑하오니." 시편 기자는 죄의 소굴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가 오랫동안 사랑해 왔던 하나님의 집, 그 집을 지금도 사랑한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참한 자녀들이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거룩한 성전 건축물은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가 곧 하나님의 집이다.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행하는 예배와 봉사, 그리고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좋아한다. 아! 우리의 모든 날들이 주일이었다면!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은혜를 베푸시고 영광을 보이시며, 그분의 백성들은 만물의 주권자 되신 그분께 찬송을 돌린다. 우리는 설교자에게가 아니라 만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모인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들에게 이 일은 가장 즐거운 일이다.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모임들은 어떤가? 이러한 모임은 순결하고 거룩하신 분에게 죄를 범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된다. 설교자가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지 않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이런 설교자는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을 생각하기보다는 사람의 위엄을 경배하는 것과도 같다.


9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10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9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거두지 마소서." 여호와여, 내가 과일처럼 익어서 수확할 때가 되었다면, 나를 죄인들과 같은 바구니에 담지 마소서. 시편 기자는 죄인들과 이 세상에서 함께 지내는 것도 싫어했다. 하물며 그들과 영원토록 함께 지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이것은 정말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위대한 농부께서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하시고, 이들을 위해 다른 장소를 예비하셨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된다. 앞에 나오는 구절에서 보았듯이 시편 기자는 악한 사람들과 함께 거하지 아니했다. 그가 영원토록 그들로부터 분리되기를 바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악한 자들이 궁극적으로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하면 우리도 본문에 나오는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악인과 구별해 내시고 악인을 반드시 심판하신다. 이것을 보는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우리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내 영혼은 살인자의 소리를 듣는 것조차도 싫어한다. 잔인한 살인자들은 자신들의 동료를 살해하는 것도 흥겨운 운동 정도로 생각한다. 이는 진정 두려운 일이다. 여호와여, 우리가 이들과 함께 옥에 갇히지 않게 하소서. 이들에게 아무런 변화도 없는 채 이들과 함께 있는 곳이라면, 낙원도 지옥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10절.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그들의 양손에는 악특함이 가득하다. 그들은 악을 행하고자 계획하고 그것을 또한 수행한다. "오른손"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데 익숙한 손이다. 그런데 그들이 익숙하게 사용하는 이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다. 도둑질을 하고도 감옥에 가지 않는 도둑들처럼, 이들은 공의를 행해야 할 자리에 있으나 이것을 등한히 여기는 개와 같은 자들에게 뇌물을 준다. 뇌물을 주는 자들은 이것을 받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악한 자들이다. 비둘기가 썩은 고기를 싫어하고, 양이 쓰레기를 싫어하듯이, 성도들은 어떤 형태로 주어지는 뇌물이든 이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해야 한다. 뇌물을 좋아하는 더러운 손을 가진 자들은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마귀나 사망은 결코 뇌물로 꼬임을 받지 않으며, 뇌물을 주는 손은 파멸을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11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11절.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부정한 재물 얻기를 거부하는 사람, 경건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이 여기에 나타난다. 그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되기를 거부하는 자이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 풍조를 따른다고 해도, 그는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기를 거부하는 자이다. 살아 있는 고기처럼, 그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의로운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이 길에서 사람들은 그를 속이고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이 의로운 길을 걷기로 결심하는 그는 자신의 의를 자랑한다거나, 자신의 힘을 믿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구속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한다. 우리가 완전하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 힘으로 온전한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속하시는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보아야 하며, 자비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는 성도라고 부름을 받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진정 죄인인 것을 고백하며 굽혀 경배를 드려야 한다.


12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12절.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이 노래는 단조로 시작했으나 이제 장조로 바뀌었다. 성도들은 찬양을 돌리는 가운데 행복과 기쁨을 회복한다. 내 발이 서 있는 평탄한 곳은 어디인가? 이것은 하나님과 맺은 확실한 언약이며, 영원한 약속이고, 만군의 여호와의 변치 않는 맹세이다. 이 견고한 기초에서 떨어져나갈 위험은 없다. 또한 이 기초가 우리 아래에서 무너져내릴 염려도 없다.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우심을 입고 그분과 연합되었다면, 우리는 다른 생각이나 염려를 할 필요가 없이 오직 우리 하나님께 찬양을 돌릴 생각만 할 뿐이다. 함께 모이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자. 우리가 함께 모였을 때에는 감사의 고백을 드리기를 게을리 하지 말자. 각 성도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증인이며,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욕하는 자들이 교회 밖에서 어슬렁거린다고 해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교회 안에서 여호와를 송축해야 한다.


주해


시 26편 전체. 이 시는 그 안에 담긴 생각과 단어들이 앞의 시와 쌍을 이룬다. 앞의 시는 하나님의 성실과 정직을 간구함으로 끝을 맺었다(시 25:21, 22). 이 시는 첫 부분에서 시편 기자가 온전하게 행했다고 말함으로 시를 시작한다(1절). 이 시를 앞의 시의 속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이 시는 시편 기자의 허영심과 자만심이 드러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는 죄를 참회하는 내용,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에 대한 간구,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믿음이 함께 나타난다. 따라서 이 시는 인간의 공로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인정하고 오직 그분께만 찬양을 돌리는 시인 것이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1절.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선한 목적, 선한 양심, 선한 행실로 간구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즐거이 들으신다. -인그램 코빈.


1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의롭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로움을 다 보시고 아신다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다. 신실하게 사는 자들에게 사람들의 칭찬이란 지극히 사소한 것에 불과하며, 그들은 사람들의 칭찬에 별로 마음을 쓰지 않는다.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는다거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사도 바울도 사람의 칭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칭찬하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 10:18).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칭찬하지 않으시면 이것들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조셉 캐릴.


1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사람들은 나를 협잡꾼이라고 하고, 때로는 광신자라고 하기도 한다. 그들은 내가 다른 사람들을 또한 미친 사람들로 만든다고 비난한다. 그들이 나를 향해 어떤 욕과 저주를 퍼부어도 상관하지 않겠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보신다. 나를 신원하시는 하나님께 이 모든 일을 맡긴다. 그분은 은혜로우신 주님이시다. 나는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체험했고, 또 계속해서 내게 은혜 베푸실 것을 확신한다. 심판은 그분께 속한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신원해 주실 것이다.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field, 1714-1770).


1절. "완전함." "톰"(!t) 또는 "테밈"(!ymt)은 무엇이든 상처받지 않은 것, 어떤 점이나 흠도 없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가 제사로 드리는 흠이 없는 제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레 1:3; 3:9). -조지 필립스.


1절. "나의 완전함." "나의"라는 소유대명사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시편 기자는 그의 원수들이 어떤 계교를 펼쳐도 일관되게 살아왔다고 공표한다. -윌슨.


1절.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완전함"의 기초가 된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이웃에 대한 의무를 무시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취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자는 모든 것을 '위로부터' 주실 것을 바란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을 어김으로써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얻을 축복을 잃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헹스텐버그.


1절. "요동치 아니하고." (KJV에는 "나는 미끄러지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이 말은 하나님의 보호와 그분의 붙드시는 손으로부터 얻는 안전이 온전하다는 것을 잘 표현해 주는 말로서 참으로 놀랄 만하다. 시편 기자는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미끄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발을 잘못하여 헛딛지도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바르통 부시에.


2절. "살피시고 시험하사······단련하소서." 시편 기자는 세 가지 단어를 사용했다. 이 세 가지 단어들을 함께 사용한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것을 시험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포함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시편 기자가 자신을 철저히 조사해 보실 것을 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하나님의 조사를 피하지 않았다. -알버트 반스(Albert Barnes).


2절. "살피시고 시험하사······단련하소서." 금은 불을 통해서 찌꺼기와 분리되듯이,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마음은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가장 잘 나타난다. 번성한 중에는 모든 사람이 경건하게 보인다. 그러나 고난이 닥치면 이 고난은 좋은 것이든 악한 것이든 마음속에 있는 것을 모두 구분해 낸다. -로버트 코드레이.


2절. "시험하사."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시험"하는 일을 한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등불을 두셨다. 이 등불이 말씀으로 깨달음을 받고 불이 붙게 되면, 여기에서 나오는 빛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운다. 신실하고 경건한 사람은 이 빛이 부드럽게, 그러나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수행해야 할 모든 의무를 지적해 주고, 모든 죄를 책망해 줄 것을 바란다. 다윗은 인구 조사를 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삼하 24:10)했다. 이 기록을 보면 다윗의 경우 이것이 얼마나 속히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요한일서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요일 3:20). 아! 만일 당신 스스로 자신의 이런 저런 죄에 대해 책망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책망할 것이 훨씬 더 많으시다는 것을 알라. 그리고 온전하게 살도록 노력하라. 당신은 마음속에 부드럽고 민감한 양심을 갖고 싶지 않은가?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말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가? 양심이 평안한 말을 전하든 책망하는 소리를 전하든 그 말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에게 안전하다. 반면에, 당신이 양심의 빛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라면, 그 찌르는 아픔을 없애 버리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당신 안에 살아 있는 듯한 그것을 느끼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신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아야 한다. 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탐욕과 육체의 쾌락에 자신을 탐닉하고, 그들의 양심과 자신들 사이에 연막을 치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쾌락에 빠져들어 아무런 감각도 없는 동물처럼 살아가려 하고,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빛이 시들어 가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저주받을 이단에 말려들어 성경과 하나님, 천국과 지옥도 부인하며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믿으려고 한다. 이런 교리들은 죄의식을 느끼는 양심들이 피하는 도피처에 불과하다. 우리는 육체의 정욕과 양심을 구분하고, 미혹에 빠진 상상과 양심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잘못된 양심과 참된 양심을 구분해야 한다. 이렇게 한 후에, 우리는 말씀을 순종하는 양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 -앤소니 버제스.


2절.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KJV에는 히브리어를 직역하여 "내 신장과 내 마음"이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신장"은 동물의 욕정이 자리잡는 곳이며, "마음"에는 애정뿐만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양심도 포함되어 있다. 다윗은 이처럼 어떤 것도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불로 금을 제련하듯이 그분의 연단을 받아 자신을 속이는 모든 찌꺼기 같은 것들을 없애고 깨끗하게 되기를 바란다. -스튜어트 퍼론.


3절.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에게 미치는 실제적인 효과가 이 구절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주된 내용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우리는 그분의 성품을 닮아 가야 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젖과 꿀이 되는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옛 사람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을 지지한다. 이 말씀은 우리로 죄에 머물지 않고 열심을 내어 거룩한 삶을 살게 한다. 은혜의 약속들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당연히 수행해야 할 의무를 다하게 한다. 이처럼 우리가 여호와의 선하심을 체험하게 되면, 그 은혜는 우리로 그분의 통치에 순복하도록 한다. -티모시 크루소.


3, 4절.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당신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당신의 친구로 택하도록 주의하고 최선을 다하라. 신약의 복음서에 귀신 들린 사람이 나온다. 그는 무덤 가운데 거하며 시체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었다. 죄에 빠져 죽은 자들, 열린 무덤과 같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교제를 나눈다면, 당신은 성령을 따라 살 수 없다. 하나님은 악인과 악수를 나누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도 악인과 교제해서는 안 된다. 다윗도 이런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지 않았다:"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진리에는 두 가지가 있다. (1) 진실된 교리.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이 말씀에는 거짓이나 오류가 없다. (2) 애정과 내면의 진리. 이 진리는 사람이 소유할 수도 있지만, "주의 진리"라고 했듯이 하나님의 진리이다. 이 진리는 하나님께로서 나오며, 하나님은 이 진리를 기뻐하신다. 다윗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내가 악을 좋아하고, 악한 무리들과 함께했다면 온전한 가운데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허망한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면 당신의 계명을 결코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말한 것을 주의해서 살펴보라:"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앉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1) 앉았다는 것은 선택을 의미한다. 사람은 그가 앉든지 서든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 (2) 앉는다는 것은 쾌락을 즐기는 자세이다. 사람들은 편안함과 즐거움을 위해 앉는다. 그러므로 영광을 얻으신 주님은 하늘에 앉으셨다(엡 2:6). (3) 앉는다는 것은 그곳에 머무르거나 거하는 자세이다. 선다는 것은 떠나가는 자세이고, 앉는다는 것은 머무르는 자세이다.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있도록 택함을 받은 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마 8:11). 다윗은 위의 어떤 의미에서도 허망한 사람들과 함께 앉으려 하지 않았다. 때에 따라 이런 무리들을 사용했을 수는 있지만, 누가 그런 사람인지 미리 알았다면 그는 결코 그런 무리들을 택하려 하지 않았다. 다윗은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그들을 택할 수도 없었다. 그는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5절)라고 했다. 앉는다는 것은 쾌락을 즐기는 태도이므로 그는 허망한 사람들과 함께 앉지 않았다. 그는 때로 그들 가운데 있었지만, 그 결과 그는 슬픔을 당했을 뿐이며 결코 위로를 얻지 못했다.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들은 다윗에게 눈에는 가시가 되었고, 옆구리에는 찌르는 찔레가 되었다. "메섹에 유하며 게달의 장막 중에 거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시 120:5). 그가 악한 자들 가운데 거해야만 했을 때, 이것은 그에게 기쁨이 아니라 슬픔을 자아냈다. -조지 스윈녹. 


4절.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이 세상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장사를 하며 사고 팔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이 세상 밖으로 나가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발적으로 악한 사람들과 동행하는 것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고전 5:10, 11). 그들과 너무 친밀하게 지내지 말라. 그리스도의 순결한 비둘기가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새들 가운데에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순결한 처녀가 창녀들 사이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악한 자들의 무리는 사람을 더럽게 하고 부정하게 한다. 그들 가운데 가는 것은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 중에 가는 것과도 같다. "열방과 섞여서 그 행위를 배우며 그 우상들을 섬기므로"(시 106:35, 36). 빛이 나는 갑옷을 녹슨 갑옷과 함께 두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빛이 나는 갑옷이 녹슨 갑옷을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녹슨 갑옷이 빛이 나는 갑옷을 더럽게 만든다. 바로는 요셉에게 맹세하는 것을 가르쳤지만, 요셉은 바로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토머스 왓슨. 


4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갈대아 역본에는 이렇게 번역되었다:"악을 행하려고 자신을 숨기는 자들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리이다." 악이란 무엇인가 속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진리나 의는 숨기는 것이 없으며, 기꺼이 조사를 받는다. "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광명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 첩경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 사람을 죽이는 자는 새벽에 일어나서 가난한 자나 빈궁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적같이 되며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변장하며 밤에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문을 닫고 있은즉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그들은 다 아침을 흑암같이 여기니 흑암의 두려움을 앎이니라"(욥 24:13-17).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20, 21). 정직한 사람이 비뚤어지고 속이는 사람들보다 자신의 행동에 훨씬 더 적은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의로운 자는 악인의 죄와 악인의 길에 있는 비극을 모두 피한다. -윌리엄 플러머.


4절. "간사한 자." 위선자는 밖에는 천사를 많이 두고, 안에는 마귀를 많이 둔 자이다. 그는 말은 풍성하게 하지만 행동은 없다. 그는 큰 소리로 떠들어 대면서도 정작 선행은 없는 자이다. 그는 흰눈으로 뒤덮였으나 실제로는 냄새나는 구덩이다. 그는 알을 낳은 것처럼 꼬꼬댁거리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낳은 것이 없는 거짓말쟁이 암탉이다. -토머스 애덤즈.


4절. "간사한 자." 이른봄 햇볕이 따스하게 대지 위에 내리쬘 때, 그래서 대지가 활짝 미소를 머금었을 때, 당신은 작은 바구니를 들고서 강가로 향기로운 제비꽃을 찾으러 나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색깔과 모양의 제비꽃을 보고서 달려간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 그 꽃에는 미풍에 흩날려야 할 향기가 없다. 그 꽃은 얼레지꽃에 불과한 것이다. 이 꽃은 위선자의 상징과도 같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로저스, Shepherd King.


4, 5절.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썩은 사과가 좋은 사과와 함께 있으면, 썩은 사과는 옆에 있는 좋은 사과까지도 썩게 만든다. 이처럼 불경건한 자들의 악한 태도와 나쁜 조건은 함께 다니는 사람을 오염시키는 것이다. -로버트 코드레이. 


4, 5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이미 작고한 어느 유명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악한 친구를 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며, 그렇게 한다는 것은 기적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과 함께 골방에서 은밀한 교제를 나누고 영적으로 뜨겁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찬바람과 타락한 공기를 들이마시면 이런 열기가 곧 식어 버리고, 새롭게 된 영혼이 곧 시들고 만다. 성도가 하나님과 은밀하게 사랑을 나누고 하늘의 기쁨을 누린 다음이라도,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람을 만나 교제를 나눈다면 하나님과 함께 나누었던 그 기쁨이 곧 사라지게 되고 만다. 그 안에서 역사하시던 하나님의 영이 곧 활동을 멈추게 되고 마는 것이다. 어느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하나님의 사람들은 악하고 타락한 사람들보다는 세상에서 별 흠이 없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더 많은 것을 상실한다." 이 말은 진정 사실이 아니겠는가? -루이스 스터클리(Lewis Stuckley).


4, 5, 9절. 저 세상에서 죄인들과 함께 지내고 싶지 않다면 이 세상에서 그런 사람들과 자주 만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경찰이 부랑자들과 함께 다니는 사람을 발견한다면, 이 사람을 부랑자들을 훈육하는 교육 기관으로 보내지 않겠는가? 어느 선한 여인이 임종시에 그녀의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되자 이렇게 기도했다:"여호와여, 나를 악한 자들이 있는 지옥으로 보내지 마소서. 내 평생 동안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을 당신이 아시나이다." 다윗도 이와 같은 논리로 악한 자들의 종말에 대해 진지하게 말했다:"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여호와여, 나는 악한 자들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들과 잠시 동안이라도 함께 지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런데 내가 그들과 영원히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이 땅에서 썩지 아니하였나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태우기 위해 저런 장작들을 모으시면서, 내 영혼도 그들과 함께 모으시겠나이까? 여호와여, 내가 그들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으며, 악행하는 무리들을 내가 혐오했던 것을 당신이 아시나이다. 당신을 미워하는 저들을 내가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그렇습니다. 내가 그들을 미워하되 온전히 미워하나이다. 당신의 친구를 당신의 원수들과 함께 처리하시겠나이까? 당신의 택하신 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 나의 큰 위로가 되었다는 것을 위대하신 하나님께 고합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의 자녀들과 함께 거하는 것을 내가 즐겨하였나이다. 그렇다면, 저 세상에서도 그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겠나이까? 당신의 영원한 진노를 쏟아붓기 위해서 내 영혼을 죄인들과 함께 거두지 마소서. 이단이었던 마르키온(Marcion)은 폴리캅(Polycarp)을 보고서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지 궁금해 하며 이렇게 물었다:"폴리캅, 나를 모르겠는가?" 그러자 폴리캅이 이렇게 대답했다:"당신을 알지. 당신은 마귀의 장자가 아닌가?" 이렇게 말하고서 그를 멸시해 버렸다. -조지 스윈녹.


5절.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여기에는 하나님의 원수를 자신의 원수로 삼고 미워하는 것이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무관심과 전적으로 대조를 이룬다. 이처럼 하나님의 원수를 미워하는 모습은 옛 하나님의 종들의 뚜렷한 특징이었다. 비느하스가 어떻게 했는가? 그는 바알브올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진을 더럽히는 자들을 증오하여 죽이고 말았다(민 25:1-8).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로다"(시 106:31). 사무엘은 아각을 죽였고, 엘리야는 바알의 제사장들을 죽였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칭찬한 점이 무엇인지 살펴보라:"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 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을 아노라"(계 2:2, 3). -닐.


5절.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의 원수로 여기며 그들을 미워한다. 그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악행을 미워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정의를 내렸던 것처럼 이것이 온전한 미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원수들을 이렇게 미워하신다:"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모두 하나님의 지으신 자들이며,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 많이 일그러지긴 했지만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불의와 불경건함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불쾌함을 유발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성도들이 악한 자들을 이기고 승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바로를 이기고, 길르앗 사람들이 암몬 사람들을 이겼던 것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 멸망당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들이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그리고 드보라와 바락과 함께 이렇게 소망한다:"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삿 5:31).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박수를 보내고, 그분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을 축하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마베리.


5절.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경건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 사이에는 진정한 우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라. 그러므로 친구를 선택할 때는 더욱 신중히 하라. 어느 철학자의 말에 의하면 우정이란 두 육체가 한 영혼을 가진 것을 말한다고 했다. 그러나 땅과 공기처럼, 물과 불처럼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한 영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진정한 사랑이란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지은 조물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는 없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우정을 키워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기초가 없는 건물은 오랫동안 견디지 못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도 덕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위선에 불과한 것들이다. -조지 스윈녹.


5절.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진실되게 예배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곳에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곳에 나아가 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소망해야 한다. 그러나 이 시대가 악한 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말하면서 사이비 종교를 믿는 회중이 있다면, 그들이 우리와 교제를 나누기를 원한다고 해도 다윗과 함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에베소 교회가 크게 칭찬을 받은 이유가 나타나 있다. 이 교회는 자칭 사도라고 하면서도 행동은 사도답게 하지 않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의 거짓 된 것을 드러내고, 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지 않았다. 또한 아모스 선지자는 벧엘로도 가지 말고, 길갈로도 가지 말라고 했다. 그곳에는 우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존 필폿(John Philpot, 순교자, 스미스필드에서 화형에 처해짐, 1555).


5절.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성도들이 악한 자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눔으로 인해서 악한 자들의 마음을 더욱 굳게 만든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성도들이 그들과 교제를 끊고 물러선다면 그들이 오히려 부끄러워할 터인데, 이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 기쁘고 즐겁게 지내는 동안, 우리는 그들의 상태가 탄식할 만한 상태는 아니고, 그들이 처한 위험도 크지 않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무너지는 담으로부터 몸을 피하듯이 여호와의 원수로 남아 있는 그들로부터 피한다면, 이것은 그들에게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그들은 놀랄 것이고, 그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안전하지 못하고 자기 기만에 빠져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루이스 스터클리.


6절.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복음서에는 두 가지 분명한 놋대야가 있다. 첫번째 것은 그리스도의 뜨거운 대야이고, 그리스도의 피가 담긴 대야이다. 두번째 것은 우리의 차거운 대야이고, 이것은 회개의 대야이다. 첫번째 대야는 베데스다의 연못과 같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이 대야에 뛰어들면 치료를 받는다. 그리스도의 피는 사람으로 중생하게 하는 참된 대야이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이것은 아기를 가슴에 안고 자신의 젖을 먹이는 엄마의 자비와 사랑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참으로 귀한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피로 우리를 씻기고 또한 먹이신다. 아이가 태어나면 곧 엄마에게서 젖이 나오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게 되면 우리로 영원한 구원을 얻도록 먹이기 위해 그리스도의 젖이 준비되어 있다. 만만의 강수와 같은 기름도 우리를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 주신다. 그리스도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낫다:"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계 1:5, 6). 

그러나 두번째 대야, 즉 회개의 대야는 첫번째 대야의 효력을 발휘하게 한다. 막달라 마리아의 회개가 바로 이 대야를 상징한다. 이 회개를 통해서 첫번째 씻음받은 효험이 나고 힘을 얻게 된다. 이 회개에는 세 가지 행동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상한 마음으로 참회한다. 둘째, 하나님께 나아가 고백하며 우리의 상처를 보인다. 셋째, 사람에게 잘못한 것을 갚으며 우리의 손을 씻는다······우리는 손을 씻을 때에 철저하게 씻어야 한다. 머리끝에서 발바닥까지 우리 몸은 상처로 가득하다. 다윗이 손을 씻은 것에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의 손이 더러운 채로 남아 있다면, 젖은 눈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아직 씻지 않은 더러운 손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이방인들도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참회하며 회개한다고 해도 해를 끼친 사람을 만족케 하지 않는다면 충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진리이다. 우리는 사람에게 진 빚을 모두 갚아야 한다. 잘못된 것을 고치지 않는 자들은 죄를 즐기는 자들이다:"행악하기를 기뻐하며 악인의 패역을 즐거워하나니"(잠 2:14). 사람에게 잘못한 것을 갚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손을 모두 씻은 것이 아니다. 그저 그들의 손가락을 물에 담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착취, 강탈, 뇌물, 이런 것들은 손으로 짓는 죄이다. 성도들은 손에서 독사를 털어 버리듯이 이 죄를 털어 버려야 한다. 당신이 여호와의 단을 눈물과 울음으로 덮는다고 해도, 이런 잘못된 행동을 계속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바치는 예물을 열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아이작 바그레이브(Isaac Bargrave, 영국 의회에서 행한 설교 중에서, 1623).


6절.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다윗은 죄를 피하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훌륭한 왕이 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죄를 멀리했기에,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위대함을 너무 신뢰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입는 의복이 길면 길수록 땅에 끌리고 더러움을 더 타게 되는 법이다. 막강한 권력은 저주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한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은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다. 그들 안에는 진리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 죄인들은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도인 도마도 그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그의 손을 씻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렇다면 감히 여호와 앞에서 순결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오, 여호와여, 어떤 육체도 당신이 보기에 순결한 자는 없나이다. 다윗처럼 우리도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다면, 이것이 성도들의 복이다. 우리는 세리처럼 우리 자신의 가슴을 두드려야 하며, 바리새인처럼 우리 눈으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살펴서는 안 된다. 어찌하여 우리가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자신을 높게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어찌하여 양복을 만드는 사람들처럼 다른 사람의 몸만 측정하고, 자신의 몸은 살피려 하지 않는가? 다윗은 자신의 죄를 생각하며 이렇게 기도했다:"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3).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며 묵상해야 한다. 여기에 능력이 있다. 그리하면 지혜를 얻고 자신의 죄성을 깨닫게 된다. 말씀의 묵상을 통해서, 우리가 전에는 과학을 의지했으나 이제는 양심을 의지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을 깨닫게 되고 우리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다윗처럼 "오, 여호와여"라고 부르며, 하나님과 대면하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자. 첫째,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 상한 마음으로 참회했다. 둘째, 그는 믿음의 날개를 타고 하나님의 자비의 보좌로 날아갔다. 그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회개했던 것이다. 사람의 죄는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여호와여 내가." 그는 겸손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자비를 바라보았다. 이 두 가지 덕목의 결과로 세번째 덕목인 회개가 솟아났다. 그는 슬픔의 대야에서 죄의 더러움을 씻었던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손을 씻고." -아이작 바그레이브.


6절.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다윗은 이 말을 하면서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언급한다. 그는 자신이 제사를 드리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것을 구분하려 한다. 다른 사람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자신들이 무슨 특권층에 속한 자들처럼 생각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온전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윗이나 이 위선자들이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다윗은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열심히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가식이 없는 진실된 헌신으로 하나님을 경배한다. 손을 씻는다는 것은 유럽에서 손을 씻는 엄숙한 의식을 언급하는 것이 분명하다. 위선자들은 마음은 씻지 않고 그저 물로 깨끗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다윗은 이 사람들을 책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손을 씻는 종교 의식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가를 알게 하고, 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셨다. 이처럼 내면을 정결케 하지 않고 그저 외적인 종교 의식으로만 손을 씻는다면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손을 씻으면서 더욱 더러움을 더하는 위선자들을 책망하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니카욘"(@wyqn)은 '깨끗한 것'을 말하고, 은유적으로 '무죄함'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위선자들이 손을 씻지만 도덕적 순결함은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윗은 그들이 열심히 땀흘려 고통스럽게 종교 의식을 수행하지만, 실제로 얻는 것은 없으며 헛된 일을 반복할 뿐이라는 것을 말하며 조롱한다. -존 칼빈.


6절.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다윗은 제사장이 하는 일을 들어 비유적으로 말하면서 그가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러 나온 것을 표현하고 있다. 제사장은 먼저 그의 손을 씻고, 이어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 이처럼 그도 지속적으로 '순결'과 '헌신'을 함께 묶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헨리 해먼드.


6절. "무죄." 우리가 자신을 씻을 수 있는 가장 순결한 물은 "무죄"이다. "무죄"는 손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 4:8).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물들기까지 온전하게 씻음을 받고 철저하게 회개하자. 우리의 많은 죄를 따라서 회개도 철저히 하자. 첫째, 무죄함을 하나님께 드리고, 이어서 예물을 드리라. 하나님께 나아올 때에 그저 습관을 따라 나와서는 안 된다. 그분은,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며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여 사함을 받지 않은 채, 겉으로 경건한 체하는 것을 싫어하신다. -아이작 바그레이브.


6절.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어느 날 아침, 고트홀트(Gotthold)는 대야에 물을 붓다가 성경에 나오는 이 구절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이 구절을 생각하고서 시편 기자가 흠이 없는 삶,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나의 하나님이여, 이제부터는 내가 씻을 물을 부으면서 내 손을 악한 행동에서, 내 입을 악한 말에서, 그리고 내 마음을 악한 욕망에서 씻는 것이 나의 의무라는 것을 기억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내가 당신을 향해 거룩한 손을 들고, 흠이 없는 입술과 마음으로 당신을 경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보기에 내 마음이 더럽고 가증하다면, 내가 외적으로 순결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내가 더러운 손으로 벌어들인 음식, 또는 폭력이나 부정한 방법으로 강탈한 것, 아무런 감사도 없이 먹는 음식이 내게 자양분을 공급할 수 있습니까? 오, 나의 하나님이여!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게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나는 무엇보다도 흠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마음을 다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무의식 중에 나 자신을 더럽히게 되면 이 더러움을 씻어 내고, 당신의 눈에서 이 불의함을 제하겠나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 -크리스천 스크리버(Christian Scriver, Gotthold's Emblems, 1629-1693).


6절.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장막절 다음날에 사람들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여리고 성을 정복했던 일을 기억하며 단을 일곱 번 돌았다······이 장막절 전 기간을 "호산놋"(Hosannoth)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호산나"라고 외치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토머스 굿윈(Moses and Aaron, 1587-1643).


6절.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이 구절은 레위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면서 단 주위를 다니는 풍습을 언급한 것이거나, 아니면 열심이 있는 유대인들이 성전뜰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자 제단의 이곳 저곳으로 다니며 자세히 관찰하는 것을 언급한 것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한 번에 많은 제물을 드려서 제사장들이 단 주위에 여러 번 두루 다니게 한 것을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 -매튜 풀.


8절.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어느 존경스러운 사역자가 이렇게 말했다:"나의 회중 가운데에는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한 분 계십니다. 그분은 이제 귀가 멀어서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들을 수가 없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예배 때마다 늘 일찍 와서 꾸준히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난 그녀가 왜 이렇게 열심히 참석을 하는지 궁금하여 그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목사님 말씀을 들을 수는 없지만 난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곳에 나온답니다. 난 이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는 동안 우리 하나님께서는 성경 본문에서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가르쳐 주신답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답니다. 이곳에 오면 나는 가장 좋은 회중들과 함께 있게 되고, 또 하나님의 임재가 더욱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그분의 성도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요. 나는 혼자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나의 의무이자 또한 특권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삶은 사람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서도 예배에 늦게 오는 자들, 또는 전혀 예배에 참석조차 하지 않는 자들에게 진정 엄숙한 경고와 책망이 되었다! -아빈.


9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거두지 마소서." 이제 사람들은 오는 세상에서 그들의 영혼이 죄인들과 함께 있게 되지 않을 것을 위해서 마음을 써야 할 때이다. 이 교리에 대해 논하면서 다음의 내용들을 고려해 볼 것이다. (1) 이것에 함축된 몇 가지를 고려한다. (2) 죄인이 누구인가를 보이고, 우리 영혼이 오는 세상에서 죄인들과 함께 거하게 되는 데 대해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보인다. (3) 오는 세상에서 우리 영혼이 죄인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본다. (4)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거두지 마소서"라는 간구에 무엇이 함축되어 있는지 살펴본다. (5) 왜 우리가 이처럼 마음을 써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한다. (6) 삶에 적용을 한다. 

시편 기자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거두는 시간은 죽음의 시간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도 거두는 시간이 있다. 거두는 시간이 되면 집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밖으로 나가서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양들을 거둔다. 이렇게 하여 누구나 자신의 것을 거두는 것이다. 죽음이란 하나님께서 그분께 속한 것을 거두시고, 또한 마귀도 자기에게 속한 것을 거두는 시간이다. 이 시간이 되기까지 사람들은 모두 함께 지내지만, 죽음의 시간이 이르면 서로 나뉘게 된다. 성도들은 성도들의 회중이 있는 집으로, 그리고 죄인들은 죄인들의 회중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거두지 마소서"라는 기도는 의미 있고 중요한 기도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누구에게 속했든지, 하나님의 백성이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그리고 마귀의 백성이면 마귀의 백성들과 함께 거두게 될 것이다. 

오는 세상에서 죄인들과 함께 거둠을 당한다는 것은 진정 두려운 일이다. 저 세상에서 죄인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는 것은 머리가 삐쭉 설 만큼 두려운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죄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에 넘치는 기쁨이요, 그들의 눈이 즐거워하는 일이다. 그들이 성도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진정 괴로운 일이며, 특히 주일날 여호와 앞에서 붙들려 있어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는 세상에서 죄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진정 모든 면에서 두렵고 괴로운 일이다. (1)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성도들은 이것을 두려워한다. 오는 세상에서 죄인들과 함께 묶여 있다는 것 자체가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지옥이다. 다윗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병든 자, 박해받는 자들의 사회에 대해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으나, 죄인들의 무리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가졌다. 그는 성도들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성도들과 함께 있다면 만족해 했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여,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도했다. (2) 악한 자들도 이것을 두려워한다. 발람도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민 23:10)라고 했다.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다른 악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하지만, 그들의 양심은 죽음 후에도 다른 악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들은 죄인들과 함께 살다가, 의인들과 함께 죽기를 바란다. 이것은 가련하고, 비이성적이고, 자신을 스스로 판단하고 저주하는 생각이다. -토머스 보스턴(Thomas Boston).


9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거두지 마소서." 불속에 던질 타르처럼 나를 그들과 함께 묶지 마소서.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 이와 대조적인 내용이 다음의 시에 나타난다:"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그분의 양 떼 가운데로 거두신다는 말이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9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거두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추수하며 거두실 때가 있다. 이때는 심판의 때이다. 낫으로 곡식을 자르고 단으로 묶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대적하고 지속적으로 죄를 짓던 그분의 원수들을 함께 묶어서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거두시는 날에는 어느 누구도 그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데이비드 딕슨.


9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거두지 마소서." 어떤 사람들은 성도들이나 죄인들이나 모두 이 일로 염려한다고 반박을 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악한 발람도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민 23:10)라고 했다. 그러나 의인과 악인이 이 문제에 어떻게 다른지 몇 가지 차이점을 생각해 보자. (1) 성도들이 죄인과 함께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이것이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된다는 사실이 성도들이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러나 죄인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만일 다른 모든 문제에 문제가 없다면 그리스도와 분리된다고 해도 죄인들은 평안하고 안식을 누릴 것이다. (2) 성도들이 죄인들과 함께 거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들의 더러움 때문이다. 그러나 죄인들은 그들이 받을 심판을 두려워한다. 자신을 보존하지 못하게 될 경우 성도들이나 죄인들이나 모두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논외로 치면, 성도들이 죄인들과 함께 거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들의 불경건함과 더러움 때문이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계 22:11)라는 말은 성도들로 오는 세상에서 죄인들과 함께 거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3)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살도록 한다. 그러나 죄인들은 모두 경건치 못하게 살아간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이 소망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소망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소망이며, 다른 죄인들과 달리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는 소망이다. (4) 마지막으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죄인들로부터 점점 분리되는 것을 진정으로 바란다. 그러나 죄인들은 이 세상에서 죄인들로부터 분리될 것을 바라지 않는다. 발람은 의인처럼 죽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에서 의인처럼 살아서 죄인들로부터 분리되고자 하는 의사가 전혀 없었다. -제임스 스코트(1773). 


9-12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거두지 마소서"(9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한 죄인과 함께 거두지 마실 것을 간구했다(10절). 이런 사람들은 뇌물을 받고 죄를 지을 수 있는 자들이며, 다윗은 이런 악한 무리들을 반대했다:"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11절). 무엇이 그로 유혹을 받지 않고 타락하지 않게 했는가? 그의 "완전함"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며, 이것이 죄인들로부터 그를 지켰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뇌물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12절)라고 고백했다. 어떤 사람들은 "내 발이 의로움에 섰사오니"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윌리엄 거놀.


10절.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터키에 있는 유력한 사람이 모슬렘 종교를 이용하여 뇌물을 받고 종교직을 임명한다면, 그들은 이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터키 사람들은 이것을 결코 그대로 넘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종교직은 거기에 임명된 사람이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하게 이행해야 하고, 이것을 이용하여 결코 재물이나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 영국에 한 성직자가 있었는데, 광산에서 일하는 어떤 사제가 사과 서른 개를 접시에 담아 가지고 와서 그의 하인에게 주며 주인에게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사과 하나를 덤으로 그 하인에게 주었기에 모두 서른 한 개의 사과를 가져온 셈이다. 이 하인이 주인에게 와서 접시에 담긴 사과를 내놓으며 "선생님, 이런 사람이 접시에 과일을 담아서 선생님께 드리라고 하면서, 이러 이러한 성직을 맡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는 "체, 체" 하면서 "이것은 사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그 사람이 가져온 사과는 하나도 필요 없어. 나도 과수원이 있는데 이런 사과는 수없이 많은걸"이라고 했다. 하인이 사제에게 돌아와 그 주인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러자 사제가 그에게 다시 말했다. "제발 사과를 하나 깎아서 선생님께 드려 보세요. 다른 사과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이고, 바라시던 것보다도 훨씬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하인은 사과를 하나 깎았다. 그러자 그 안에서 금화 열 개가 나왔다. "야, 이거 정말 좋은 사과인걸." 멀리서 이 소리를 들은 사제는 이 성직자가 말하는 것을 듣고서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사과들은 모두 같은 사과입니다. 내가 보증합니다. 모두 한 나무에서 자란 것이랍니다. 그래서 맛도 모두 같지요." "그래, 이 사람 참 좋은 친구로구만.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당신도 이 나무에 접목을 해 보라. 그러면 다른 어떤 자리보다도 좋은 자리를 얻게 될 것이다. -휴 래티머(Hugh Latimer).

 

10절. "뇌물." 율법의 심오한 뜻을 헤아리고, 공의를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눈에 뇌물 찌꺼기를 보게 되면 마침내 눈을 감고 묵인을 하게 될 것이다. 돈이 있어야 공의도 설 수 있는 세상이 된다면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이 악한 것에서부터 우리의 영혼을 지켜야겠다. 아! 진리에 금이 붙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진리가 들리지 않는 세상이 된다면 이는 슬픈 일이다. -토머스 애덤즈.


10절.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교리를 명백하고 분명하게 하려면 얼마나 필요한가?

일년에 200파운드입니다.

이전에는 옳다고 인정을 받았으나 

다시 틀린 것으로 하려면?

다시 200파운드가 더 필요합니다. 

-사무엘 버틀러(Samuel Butler, Hudibras, 1600-1680).


12절.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정직한 사람의 "발"은 "평탄한 데" 섰다고 했다. 그의 걸음은 마치 험하고 거친 길을 걷거나, 다리를 저는 자의 걸음처럼 뒤뚱거리지 않는다. 다리를 저는 사람의 발은 그 길이가 같지 않기 때문에 평평한 곳에서도 바로 설 수 없다. 한 다리는 길고 다른 다리는 짧기 때문이다. 신실한 사람의 다리는 그 길이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지키려고 마음을 쓴다. 위선자들은 오소리처럼 한 쪽 다리는 길고, 다른 쪽 다리는 짧다. 또는 다리를 저는 말처럼 그들은 바로 설 수 없다. 한쪽 다리는 아래로 내려딛고 서기를 싫어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윌리엄 거놀.


12절. "평탄한 데." 다리를 평탄한 데에 굳건히 딛고 서 있는 사람들은 넘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처럼 여호와를 예배하는 경건한 자들은 원수들이 그들을 이기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윌리엄 월포드.




힌트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가는 길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3) 이것들을 얻는 유일한 방법. 


1절 하반절.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 


2절. 하나님의 시험. 그 다양성, 엄격함, 철저함, 정확함, 분명함. 언제 이것을 바라야 하며, 또 언제 이것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3절. 눈을 위한 기쁨과 발을 위한 안전. 선한 사람의 감미로운 묵상과 거룩한 행실. 경건함의 여러 가지 요소들-동기, 행동, 이것을 즐기며 행함, 사랑, 진리, 값없는 은혜와 선행. 


3절.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다윗을 본받아 하나님의 인자를 우리 목전에 두는 것이 좋다. 이것은 네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1) 우리가 묵상할 대상으로서. (2) 우리가 격려를 받는 근원으로서. (3) 우리의 찬양을 자극하는 것으로서. (4) 우리가 모방할 본으로서. -윌리엄 제이.


4절. "허망한 사람."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런 사람들을 왜 피해야 하는가? 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간사한 사람." 이런 사람을 여러 면으로 묘사해 보라.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라. 그들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교활하게 행하는지 살펴보라. 그들을 피할 필요성, 그리고 그들의 두려운 종말. 


5절. 나쁜 동료들. 악한 결과의 사례, 경계, 이들을 피해야 하는 동기들.


6절.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개인적인 경건을 유지할 필요성. 


7절. (1) 성도를 부르심. (2) 저자를 선택함, 그리고 그분이 하시는 일의 수준-"주의 기이한 모든 일". (3) 선포하는 방법-"감사의 소리", "이르리이다" 등.


8절. 하나님의 집. 왜 이것을 사랑해야 하는가? 그 안에 있는 것에서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보일 수 있는가?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보상을 받게 될 것인가? 


9절. "Spurgeon's Sermons," No. 524., "The Saints' Horror at the Sinners' Hell."


11절. 구속과 자비를 필요로 하는 가장 좋은 사람들.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행동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밀한 삶. 


12절. 안전히 섬, 존경받는 위치, 감사의 찬양.


12절 하반절. 회중의 찬양, 그리고 개인이 이 일에 참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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