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6편

시편 3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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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주제-이 시에는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이는 여호와의 종으로 불리는 것을 영예롭게 여기는 자에게 이 시편이 특히 어울린다는 점을 시사하는 듯하다. 이것은 ‘행복한 봉사의 노래’이다. 예수님의 가벼운 멍에를 지는 자는 누구나 이 노래에 참여할 수 있다. 악인이 의인과 대조되어 있으며, 경건한 자들의 위대하신 주님은 진심으로 높임을 받는다. 따라서 이 시편은 그토록 좋으신 주님께 순종할 것을 은연중에 주장하며, 그분에 대한 반역을 명백히 정죄하고 있다. “영장으로 한 노래.” 성전 예배를 인도하는 자가 공적 예배에서 이 노래를 사용할 책임을 맡았다. 한 사람이 여호와의 전에서 찬송 직무를 특별히 관장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4절 다윗이 반역적인 자들을 묘사하는 내용이며, 

5-9절 그는 여호와의 여러 가지 성품들을 찬양한다. 

10, 11절 그는 여호와께 호소하며, 

12절 불법을 자행하는 모든 자들의 파멸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다. 


강해


1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2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3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4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1절. "악인의 죄얼." 악인의 거만하고 방탕스러운 죄. 율법과 공의의 제재를 어김.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경건한 사람들의 귀에는 사람들의 죄악된 음성이 들린다. 그것은 내적 죄악이 외부로 표출된 것이다. 지속적으로 뻔뻔스럽게 죄악을 도모하는 자들이 모든 이들을 판단하는 위대하신 재판관을 공경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불의한 사람들의 공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추잡한 행위들을 볼 때 우리의 마음은 그들에게 전혀 신앙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추잡함은 불신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다. 사악함은 무신론적 뿌리에서 나오는 열매이다. 공정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밝힐 만한 이유를 댈 수 있지만, 경건한 심령의 소유자들에게는 그것이 이미 직관적으로 분명한 사실로서 감지된다. 만일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다면, 그리고 내가 그분을 경외한다면, 어떻게 감히 그분의 임재 앞에서 그분의 율법을 깨트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는 사람은 군주의 궁정 안에서 반역을 도모할 지독한 반역자임에 분명하다. 악한 자들이 아무리 이론적 입장을 맹세한다 해도, 그들은 단지 무신론자로 분류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실제 행동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영원토록 지옥의 공포를 느낄 것이다. 


2절. "왜냐하면." (KJV 직역-역자 주.) 이는 앞 절에서 제시된 전제를 입증하고자 함을 시사한다. 여기서 다윗은,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개념이나 그분에 대한 공경심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보며 그것으로 인해 슬퍼한다. 그 반대인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그는 자신을 훌륭한 사람이요 큰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는 자신의 양심을 침묵시키며, 그리하여 자신을 가리켜 탁월한 인물의 전형이라고 여기는 기만적인 판단을 내린다. 이는 그가 도덕성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구속력을 갖는 규칙에 자신은 속박되지 않으려는 마음을 돈독히 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자칭 자유 사상가요, 강한 정신의 소유자요, 위선을 싫어하는 자요, 또한 철학자이다. 그의 평가에 따르자면, 하나님의 종들은 비열한 정신의 소유자요 마음이 좁은 자들이다. 이것은 모든 감언이설들 중 가장 터무니없고 위험한 말이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새도 자신을 위해 덫을 놓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궤변적인 변호사도 자신을 속이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양심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행실을 올바로 간파하지 못하도록 가리우는 것(히브리어상의 의미가 바로 이러하다)은 지옥으로 향한 자신의 길을 반반하게 다듬는 것이다. 스스로 의기양양해 하는 자들이 그러하듯이, 영원한 파멸로 치닫기란 너무도 쉬운 일이어서 굳이 활강 장비를 갖출 필요도 없다.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자기 기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그의 실상이 탄로나고 미움을 받는다. 부패한 냄새는 조만간 너무도 심해져서 숨겨질 수 없다. 문둥병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때가 있다. 오래된 집은 마침내 더 이상 지탱될 수 없으며, 그것이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거기 거하는 자의 귀에 들린다. 따라서 사람의 자기 만족에는 한계가 있다. 그는 결국 멸시받는 존재로 드러나며, 자신이 그토록 근사하게 연출했던 광대놀음을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다. 만일 이생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망의 손길이 그 죄인의 숨겨진 성격에 빛을 비추어 그를 수치와 경멸 가운데 노출시킬 것이다. 

스스로 의기양양해 하는 과정을 통해 죄인들의 무신론적 입장이 분명하게 입증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보고 계시다고 생각한다면-그런 행동을 하기가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할지라도-너무도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하면 마치 빛이 그 무엇을 밝히 드러내듯이 우리의 죄악이 감지될 것이다. 하지만 사악한 자들은 어둠 속에 처해 있다. 이는 자신의 내부와 주위에 그토록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계신 분을, 그들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3절.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이 한 쌍의 지옥의 개들은 대체로 함께 쫓아다니며, 어느 한 편이 하지 못하는 일을 다른 한 편이 실행할 것이다. 만일 죄악이 억압을 가해도 이기지 못하면, 궤휼이 속임수로 해결할 것이다. 마음이 너무도 부패하여 스스로를 과시하지 못할 때, 혀가 그 역할을 맡는다. 목구멍의 열린 무덤은 내적 본성의 추잡성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며, 죄악을 범할 경우에 그들은 핑계를 둘러대거나 자신의 사악함을 자랑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악인들은 악이나 교활한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악인의 말이 거짓되고 기만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근거는 확고하다. 그들은 질적으로 거짓될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거짓 그 자체이다.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그는 선한 길로부터 온전히 이탈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힘을 다해 옳은 길로 나아가지만, 불신자들은 한때 선하다고 여겼던 것마저 이내 내던져버린다. 만일 사람들이 지고하신 재판관을 공경한다면 어떻게 배교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 한때 자신의 영혼을 자랑하기 위해 위선적으로나마 하나님을 공경했던 일마저 포기한다는 것은, 그들이 점점 더 하나님을 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4절.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그의 쉼터가 음모를 꾸미는 곳이 된다. 그의 침상은 독초를 재배하는 온상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행사를 묵상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생각과 창의적 역량을 죄악에로 돌릴 때, 그들의 사악함은 하나의 증거로서 입증된다. 그는 마귀를, 함께 누워 범죄 방법을 계획할 자신의 절친한 동료로 삼는다. 하나님은 그에게서 멀리 떠나 계신다.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자신이 계획한 악행을 단호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실행에 옮긴다. 그는 최악의 길로 치닫기를 좋아한다. 이는 그가 추잡함을 사랑하기로 스스로 다짐하고 또한 자신의 의식 속에 담겨 있는 그러한 추잡스러운 일을 드러내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악을 경멸하고 혐오하기는커녕, 그는 심지어 그것을 즐기며 장려한다. 그는 그릇된 것을 결코 미워하지 않으며, 그것을 묵상하고 옹호하며 또한 실행에 옮긴다.

이 짧은 구절 속에 무자비한 사람의 초상이 너무도 잘 묘사되어 있다. 그의 의기양양한 양심, 방탕한 말, 의도적 악행, 의도적이고도 지속적인 죄악 선호 성향, 그리고 그의 무신론적 마음 등, 이 모든 것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여호와여, 그러한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


5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6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7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8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9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5절.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푸른 창공처럼, 주의 인자하심은 온 땅을 덮고 있고, 자연의 삼라만상에게 미소를 던지며, 땅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늘 역할을 하며, 인간의 가장 거만한 반역을 억누르고, 또한 치명적인 죄악의 안개 너머에 위치해 있다. 드높은 곳에는 항상 청명한 하늘이 자리잡고 있듯이, 주의 인자하심은 이 가련한 세상의 소음과 연기 위에서 평온한 미소를 던지고 있다. 어둠과 구름은 단지 지상의 낮은 대기에 속한 것일 뿐이며, 드높은 하늘은 항상 화창하고 무수한 별들로 인해 환하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광활한 공간 속에서 비길 데 없는 인내로 자리잡고 있으며, 사람의 반역에 의해 변경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늘을 측정할 수 없듯이, 여호와의 인자하심의 한계도 헤아릴 수 없다. 특히 그분 자신의 종들에게는, 주 예수의 구원을 통해, 최고 높은 하늘보다 더 높은, 우주보다 더 넓은 은총을 내리셨다. 무신론자가 이 사실을 알 수만 있다면, 여호와의 종이 되기를 그 얼마나 열망하겠는가!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의 진리와 성실하심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도 높다. 그분은 자신의 말씀을 무위로 끝나게 하거나, 잊거나, 더듬거리거나, 혹은 잃어버린 바 되게 하지 않으신다. 곤경들은 마치 구름과 같지만,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다. 우리는 구름 아래에 있지만,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라는 영역 안에 있기도 하다. 우리가 구름 위로 올라서면 굳이 그러한 확신을 가질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분은 위협이나 약속이나 예언이나 혹은 언약 등과 관련하여 자신이 하신 모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거짓말하는 사람과 같지 아니하시며, 인자처럼 뉘우치는 분도 아니시기 때문이다. 


6절.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의는 견고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또한 높고도 장엄하다. 바람과 태풍이 알프스를 뒤흔들지 못하듯이, 하나님의 의는 환경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는다. 그분은 항상 의로우시다. 온 땅의 재판관에게 누가 뇌물을 쓸 수 있겠으며, 그분을 위협하여 심판을 왜곡되게 하시도록 강요할 수 있는 자가 그 누구인가?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의를 방치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강직하신 입법자의 공의를 옹호하기 위해 희생 제물로서 죽음을 당하신 사실에 비하면, 산의 장관이 주는 감명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름대로 하늘을 꿈꾸는 모든 불신자들의 길 바로 너머에, 하나님의 의라는 안데스산이 솟아 있으며, 중생하지 못한 죄인은 그 누구도 거기 오를 수 없다. 큰 산들 사이에서 일어난 눈사태가 산꼭대기로부터 쏜살같이 굴러내릴 때까지 새끼 곤충이 채 나오지 않은 날개를 퍼덕이듯이,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대적들이 처할 상황도 바로 그러할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는 그날에 대비하여 당신의 의의 산들에다 무시무시한 탄약들을 쌓아 두사 그것들로써 대적들을 물리치시는 것이다.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사사건건 이유를 묻는 거만한 자들로서는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다. 여호와께서 이러저러한 일을 행하시는 데 대해 우리가 이유를 여쭈어서는 안 된다. 그분에게는 분명 이유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우매한 생각으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은 바다처럼 넓고도 깊으며, 도무지 거스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느 때에는 그것이 유리바다처럼 물결 하나 없이 잔잔한 듯이 보이지만, 또 어떤 때에는 폭풍우와 회오리바람에 의해 까불린다. 그것은 항상 신비로 가득하며 최대의 영광 가운데 싸여 있다. 바다의 근원을 누가 찾아낼 것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만이 영원하신 분의 섭리를 파악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질 수 있다. 

파악할 수 없는 바다!

그 깊은 곳에 위치한, 미지의 신비한 동굴,

측량할 수 없을 만치 깊은 비밀스러운 장소,

가시적 범위를 넘어선 그곳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서,

그 놀라운 광경을 말해 줄 자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깊은 물이 하늘을 비추듯이,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그분의 모든 통치 과정 속에 반영되며, 그 깊은 바다 너머로 언약의 무지개가 위로의 아치를 드리운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자신이 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이성을 지니고 있는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무수한 피조물들은 모두 여호와의 손에 의해 양육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짐승들, 무수한 새들, 무진장한 물고기들, 그 수효가 거의 무한하다고 할 수 있는 곤충들, 이들 모두는 부단히 작용하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지하여 자신의 생명을 존속시켜 나간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신가! 그러하신 하나님의 자취를 전혀 보지 못하고 또한 그분에 대한 경외심도 느끼지 못하는 자는 그 얼마나 천박스러운 피조물인가!


7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여기서 우리는 지성소로 들어간다. 그분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 공의 등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믿음을 통해 베일을 걷고서 여호와의 보다 밝은 임재 속으로 들어간 자들만이 알 수 있는 그분의 각별하신 자비가 있다. 이들은 여호와의 탁월하신 자비를 본다. "탁월한"(KJV 직역. 한글 개역 성경은 "보배로우신지요"로 옮겼다-역자 주)이라고 번역된 말은 "소중한"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그 어떤 보석이나 진주도 여호와의 사랑에는 비길 수가 없다. 이것은 천사들이 입을 정도로 고귀한 것이다. 여호와의 친절하신 자비에 비하면, 왕의 보물도 무가치한 자갈 더미에 불과하다. 다윗은 여호와의 자비를 측정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그는 다만 감탄만 발한 후에 우리의 마음과 상상력과 또한 경험으로 그 나머지를 채우게 하려 했다. 그는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라고만 언급한다. 이는 그가 나머지 절반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최선의 과정을 택한 데 대한 최선의 이유.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상징적 표현이다. 암탉이 자기 병아리를 지키듯이 혹은 독수리가 그 새끼를 감싸듯이, 여호와는 자신의 백성을 덮으신다. 또한 우리는 사랑스러운 존재로서 복된 피난처 아래로 달려가서 안도감을 느낀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서 몸을 숨기는 것은 너무도 감미로운 일이다. 비록 대적이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이는 우리가 여호와의 날개 아래에서 편안히 거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아담의 후예들이 천상의 거주지의 탁월성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다. 우리도 그와 같은 죄악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이 마땅하다.


8절.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 자들은 그분의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며, 거기 마련된 축복에 참예할 것이다. 여호와의 거처는 어떤 장소에 국한되지 않으며, 만일 우리가 신자들이라면 우리가 거하는 곳이면 그 어디에나 그분이 계신다. 그러한 곳들은 마치 여호와의 거대한 집에 딸린 방들과 같다. 또한 우리는 섭리와 은총 안에서 영혼의 위안이 되는 축복을 발견하며, 이것은 믿음으로 여호와께 가까이하는 삶을 사는 결과로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도들의 집회를 가리켜 특별히 하나님의 집이라고 여긴다면, 사실 신자들은 신령한 예배를 통해 가장 부요한 영적 음식을 얻게 될 것이다. 복음의 호화 진미를 먹고 마실 수 있는 영혼은 참으로 복되다. 이보다 더 영혼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것은 없다.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그들이 에덴의 과실들을 먹듯이, 또한 그들은 낙원의 강에 흐르는 물을 마실 것이다. 하나님의 영속적인 사랑은 우리에게 끊임없고 충만한 위안을 제공한다. 우리는 믿음을 통한 은총으로 말미암아 이 위안의 잔을 마시며, 그 기쁨이란 풍성하기 이를 데 없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이 강을 제공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마시게 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응축된 사랑을 보게 된다. 가장 온전한 의미에서 이 말씀이 성취되는 것은 하늘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들은 여기서도 어렴풋하게나마 그 성취를 미리 누릴 수 있다. 신실한 자에게 주어지는 행복은 하나님이 친히 느끼시는 행복이다. 성결케 된 영혼들은 여호와의 기쁨과 동일한 기쁨을 느낀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 


9절.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이 구절은 간단한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요한복음 1장처럼 매우 심오한 내용이다. 독자적 원천으로부터 샘물이 솟아나듯이, 피조된 모든 생명은 여호와로부터 말미암으며, 그분에 의해 존속되고, 또한 그분을 통해서만 온전케 되어질 수 있다. 생명은 피조물 안에 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오직 창조주께만 있다. 영적 생명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요 6:63). 그리고 우리는 죽은 상태이고,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다(골 3:3).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빛은 생명의 영광이다. 어둠 속에 있는 생명은 비참하며, 생명이라기보다는 죽음이다. 오직 여호와만이 자연적이고 지적이며 영적인 생명을 주실 수 있다. 생명을 밝고 빛나게 하실 수 있는 이는 그분뿐이다. 영적인 일들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다른 모든 주제들에 대해 조명을 가해 준다. 태양을 보기 위해 촛불을 밝힐 필요는 없다. 우리는 태양 자체의 광채를 통해 그것을 보며, 다른 모든 것들도 바로 그 광채를 통해 본다. 우리가 자아의 빛을 통해서는 예수님을 결코 보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빛을 통해서는 자아를 볼 수 있다.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지성이 성령의 조명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종 그것은 신령한 광채를 소멸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 성령은, 순전히 오직 그분 자신의 조명에 의해 우리 마음의 사악함이라는 어둡고 후미진 곳을 밝힌다. 학습과 인간의 재치에 의존하는 자들은 헛되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비치는 한 줄기 광선이 피조물들의 지혜를 대낮처럼 밝힌 것보다 더 낫다. 여호와여, 내게 태양을 주소서. 그리고 미신이라는 촛불과 타락한 철학이라는 인광을 기뻐하는 자들처럼 되지 않게 하소서.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빛과 생명을 얻게 하며, 따라서 그 빛은 어두워지지 않고 그 생명은 죽지 않는다.


10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11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10절.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우리는 단지 과거의 은총을 지속시켜 주실 것을 간구한다. 여호와여, 주님의 신실하신 사랑과 자애로우심을 그리고 불변하심과 전능하심을 깨달은 모든 이들에게 항상 주님의 이러한 은총이 미치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님을 알라고 줄곧 가르쳐 오신 것처럼, 계속 그들을 지도하사 그들을 온전케 하소서.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사 주시기로 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간구하는 신자의 심령 상태를 잘 보여 준다. 하나님의 약속에 입각하여 드리는 간구는 참으로 적절한 것이다.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주께서 의인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보호자와 보복자가 되소서. 하나님의 사람이 느끼는 최악의 두려움은 천국에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근거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이 평안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비록 은총이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이 언약을 통해 보장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기도의 문제로 여겨야 한다. 본절이 가르치는 내용이 바로 이 점이다. 우리는 이 귀한 축복을 얻기 위해 여호와께 간구를 드려야 한다.


11절.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포괄적인 기도가 여기서 자기 자신을 위한 개인적이며 특별한 기도로 바뀌고 있다. 교만은 마귀의 죄악이다. 선한 사람들은 교만한 자들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뱀의 씨는 경건한 자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하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만하게 경멸하는 자들은 성도들을 걷어차거나 발 아래에 짓밟는 악행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악의에 대항하여 시편 기자는 기도의 목소리를 드높인다.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는 한, 그 어떤 발도 우리를 짓밟지 못하며 그 어떤 손도 우리를 치지 못할 것이다.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나를 탈주자처럼 쫓김을 당하도록 방치하지 마시며, 뿌리 뽑힌 나무처럼 내던져지지 않게 하소서. 손과 발 모두를 이용한 폭력이-그 방법이 정당하건 추잡하건 간에-시편 기자를 곤경으로 몰아붙였지만, 그는 자신의 위대하신 후원자께 호소하며, 자기 대적들의 패배를 기대하며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


12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12절.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믿음의 눈은 그들이 평지에 뿔뿔이 흩어지는 광경을 본다. 거기서! 곧, 바로 우리 눈앞에서, 죄와 사망과 지옥이 엎드러져 있다. 패배당한 대적들을 보라! 섭리와 은총으로 말미암아 대적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부터 내어쫓김을 당했다. 예수님은  하나님 백성의 모든 대적들을 그 백성의 목전에서 이미 넘어뜨리셨으며, 정해진 때가 이르면 모든 죄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불신자들과 모든 악의 세력들에게 임하는 파멸은 최종적이고, 총체적이며, 또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어둠의 세력이 제아무리 기승을 부릴지라도, 하나님이 의인을 보호하고 악인을 영원한 지옥의 파멸에로 떨어뜨리실 때가 조만간 도래할 것이다.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들은 영원히 그분을 찬양하며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기뻐할 것이다.


주해


머리말. "영장으로"라는 말은 여러 가지 추측을 낳게 한다. 칠십인역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에이스 토 텔로스"(ei" to telo", '끝까지'라는 뜻)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의미는 너무도 애매모호한 나머지 그럴 듯한 추측들마저 모두 거부하게 만들 정도이다······그 용어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듯하다:영감받은 기자들은, 그러한 용어가 나오는 시편들을 영장에게 맡겼다. 영장이란, 수금들이나 현악기 혹은 관악기 등 그 어떤 악기들로 구성된 악단이든간에, 어떤 특정한 악단을 관장했던 사람을 가리킨다. -존 젭(John Jebb, A.M., A Literal Translation of the Book of Psalms, 1846).


머리말. "여호와의 종." 다윗은 이러한 머리말을 이곳과 시 18편에서만 사용한다. 두 경우 모두에 있어, 그는 의인에 대한 그리고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들을 각각 묘사한다. 또한 서두에서 그가 여호와의 종들과 같은 위치에 자신을 둔 것은 매우 적절하다. -C. H. S.


시 36편 전체. 첫째 부분:악인의 특성(1절). (1) 그는 악을 선이라 칭한다(2절). (2) 그는 악을 계속 자행한다. (3) 그는 위선자이다(3절). (4) 그는 완악하다. (5) 그는 악을 연구한다(4절). 둘째 부분:하나님의 인내와 자비(5, 6절). (1) 모두에게, 심지어 모든 피조물들에게 미침. (2) 특히 그분의 백성에게 미침. 신실한 자들은 이를 ① 믿으며, ② 만족을 느낀다(7, 8절). 셋째 부분:그는 그 효력이 빛을 발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1) 하나님의 백성에게(10절). (2) 그 자신에게(11절). (3) 이로 인한 그의 환호(12절). -윌리엄 니콜슨(William Nicholson, 1662).


1절. 이 시편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묘사를 접하며, 특히 노골적으로 하나님과의 연대를 깨트리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죄를 보게 된다. 서두가 매우 인상적이다.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어떻게 "악인의 죄얼"이 머리말에서 자신을 가리켜 '여호와의 종'이라 지칭한 자의 마음속에서 말할 수 있는가? 이 구절은 대체로 이렇게 이해된다:즉, 시편 기자로서는 악인의 외적 행위만 보아도 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생각을 자연히 갖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또다른 의미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것은, '사악함이 악인에 대해 이르기를, 내 마음속에······'라는 문자적 독법에 기초한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악인의 외적 가장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자신의 불법을 숨기려는 그들의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실제 자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과 또한 그들이 은밀하게 그분의 권위를 무시한다는 사실을, 시편 기자는 확신하였다. 그가 어떻게 이러한 확신에 도달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들의 행위와 마음의 명령을 비교하는 방법을 통해서였다. 그는 사실 그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볼 수는 있었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부패성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너무도 완강하여, 만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자신 속에 심겨져 있지 않다면, 그 역시 그들처럼 악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존 제이미슨(John Jamieson).


1절. 악인임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심이 불완전하거나 부족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러한 경외심이 그에게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데이비드 딕슨.


1절 하반절.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마치 법정에서의 재판 진행 과정 속에서 이 사실을 지적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그는 어떤 죄악이라도 범할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인간의 사악함을 묘사함에 있어서는 '전적 타락'이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지나치지 않다. 죄인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경건함이 자리잡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만일 경건함이 없다면, 올바른 감정 또한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음에 분명하다. 그것이 바로 타락의 본질이다. -윌리엄 플러머.


1절.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감히 종교의 형식으로 그리고 과시하는 태도로 하나님을 우롱하겠는가?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감히 그분의 면전에서 실제적이고도 노골적인 악행을 일삼음으로써 그분의 감정을 상하게 하겠는가? 만일 그들이 여호와를 그리고 그분의 진노를 두려워한다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목격하고서도 감히 죄를 짓겠는가? 만일 그들이 여호와와 그분의 선하심을 두려워한다면, 고귀한 은총들을 그토록 많이 목격하고서도 감히 죄악을 범하겠는가? 만일 그들이 여호와와 그분의 진리를 두려워한다면, 죄를 짓고도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감히 다른 사람이나 자신을 안심시킬 수 있겠는가? 그들 자신의 약속과 자백과 주장과 맹세를 감히 가볍게 여기겠는가? 혹은 그것들로써 자신을 속박하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얽어매려고 계획하겠는가? 과연 그들이 여호와와 그분의 신실하심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리고 언약과 약속을 영원토록 지키시는 여호와를 두려워하겠는가? 이 모든 사실들과 이 이외에도 악인에 의해 자행되는 여러 죄악들이(이 모든 죄악들이 악인에게서 발견되며, 경건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것들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 좋다),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조셉 캐릴.


1절. 악인은 하나님의 신탁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의 마음속에는 반역에 대한 관심뿐이다. -자카리 머지(Zachary Mudge).


2절.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이러한 자긍은 특히 죄의 문제와 연관이 있다. 이 점은 이어지는 구절을 통해 드러난다. 그는 죄의 특성 및 결과와 관련하여 그리고 죄의 사악함 및 악화됨과 관련하여 자신을 속이며, "자기 죄악이 드러나 미워함을 받기까지" 계속 죄를 범한다. 즉, 그 죄악이 온전히 드러나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다른 이들 모두에게 그것이 심각하고 잔인한 상황을 야기할 때까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 심판에 대해서는 이 시편의 마지막 절에 언급되어 있다:"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그러한 사람에게 임한 심판의 진리를 예시하기 위해, 그는 이와 같은 지속적인 자기 기만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분명 그 증거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죄의 굴레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 한, 결코 자긍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에 대해 그렇듯 좋게 생각하는 이유는,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전부를 차지하고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자신에 관한 모든 두려움을 내던져버린다. -존 제이미슨.


2절.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1) 혹자는 '또다른 세상'과 같은 것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생각에서 자긍한다. (2) 혹자는, '죽음'이란 미지의 영역이며 사후에도 구원을 얻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자긍한다. (3) 혹자는, '윤리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저주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긍한다. (4) 혹자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환경의 '혜택'을 자긍의 기회로 삼는다. 그들은 복음이 강력하게 전파되는 곳에서 신앙적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으며 거기서 많은 이들이 회심하였다고 자긍한다. 또한 그들은 바로 이 때문에 구원을 더 쉽게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5) 혹자는 자신의 '의향'으로 인해 자긍한다. 즉, 조금만 더 자유롭게 살다가 나중에 개심할 것이라는 의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6) 그런가 하면, 자신의 구원을 위해 많은 일을 행하였고 또한 행하고 있으므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소망하면서 자긍하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필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며, 심지어 중생하지 못한 현상태에서 행할 수 있는 일마저 하지 않고 있다. 또한 그들은 회심으로 향한 길 위에 서 있지도 않다. (7) 혹자는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자신을' 구원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점차적으로 죄를 슬퍼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것이라고 하는 야릇한 상상을 전개한다. 그들의 노력은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고자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 속한 일을 스스로 행하려 하는 것이다. (8) 어떤 죄인들은 '이미' 회심하였노라고 스스로 자긍한다. 그들은 거짓된 소망 가운데 앉아서 쉬며,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함받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며 자신이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고 또한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글을 요약함.


2절. "자기 눈에." (KJV 직역-역자 주.)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의 눈에는 거룩한 경외심이 담겨 있지 않으며, 따라서 그는 사악한 감탄만 늘어놓는다. 하나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는 자신을 굉장한 존재로 여긴다.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망각하는 자는 무엇인가에게 아첨을 떨기 마련이다. 그의 눈은 무엇인가를 보아야 하며,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찬미하지 않는다면 자아를 자랑하게 될 것이다. -C. H. S.


2절.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KJV는 "자기 죄악이 드러나 미워함을 받을 때까지"로 번역했다-역자 주.) 하나님께 범죄하고 그분의 거룩하신 명령을 어기는 것이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일이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깨달을 때까지. -조나단 에드워즈.


2절. "미워함을." 자신에게, 다른 이들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혐오스러움. -길버트 게네브라드(Gilbert Genebrard, 1537-1597).


3절. "그쳤도다." 그가 한때 지녔던 적은 광채마저 잃어버렸고, 그가 한때 위선적으로 드러내었던 선행들마저 내던져버렸다. 그는 더 나은 일을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존 트랩.


3절 하반절. 하나님에 대한 변절은 사실상 자신이 행한 모든 선한 일들을 깡그리 망치는 것이다. 그것은 회개의 은총과는 정반대인, 사악한 후회이다. 전자가 죽은 행실들로부터의 회개인 반면에, 후자는 더 나은 행실로부터 돌이키는 것이다:"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그것은 죄악으로부터 돌이키는 듯하다가 이내 더욱 악화되는 모습이다. -티모시 크루소(Timothy Cruso).


3, 4절. 


그는 잠을 아끼고 시계소리를 들으며

한밤중에 침상에 누워, 시간을 헤아리고

해악을 더 많이 고안하고서, 일찍이 일어난다.

그러고는 선한 이들의 이름들로 만든 

가장 흉악한 음식을 먹는다.

이 문에서 저 문으로 그가 황급히 쫓아다니며,

때로는 하품하고 있는 어리석은 자들 가운데 

서 있기도 한다.

그가 나타나면 이웃들간에 화평이 달아나며,

마치 도덕적 역병과도 같이,

그가 숨을 내쉬면, 

건강하게 외치며 환하게 웃던 무리의

기쁨과 행복이 쇠락해 간다.

어리석은 자들만이 그와 함께하며,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스스로 파멸에 이른다.

현명한 자는 그와 그의 집을 피하며,

그를 치명적인 도덕적 역병에 걸린 사람으로 여긴다.

-로버트 폴럭(Robert Pollock, 1799-1827).


4절.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마음으로라도 죄를 짓지 않으려고 침상에서 깊은 생각에 잠기듯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음모를 꾸미며 기꺼이 죄악을 범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한다. -데이비드 딕슨.


4절. "침상에서." 아이구안(Michael Ayguan)은 침상과 관련된 성경 구절들을 매우 충실하게 고찰한 결과 여섯 가지 사악한 침상들에 대해 언급한다:허영의 침상, 허욕의 침상, 야망의 침상, 탐욕의 침상, 무기력의 침상, 그리고 잔혹스러움의 침상 등. 그는 이것들 모두를 성경의 본보기를 통해 설명한다. -닐.


4절.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죄를 지으려고 기다리는 것은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는 것이며, 죄를 짓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그것은 범죄를 위해 스스로 준비 태세를 갖추는 지극히 악한 죄이다. 다윗은 악인을 묘사하면서,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라고 말한다. 불선한 길이란 악한 길을 가리킨다:그는 죄 가운데 빠질 뿐만 아니라(선한 사람도 이런 상태에 처할 수 있다) 악한 길을 선택하며, 스스로 그 길을 고집하여 거기서 떠나거나 벗어나지 않으려고 결심한다. 우리는 죄가 경건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사탄이 경건한 사람을 범죄로 유혹하려고 기다리며 적절한 시기를 살피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건한 사람은 죄를 범하려고 기다리거나 살피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죄나 허물에 사로잡히는 것도 나쁜 일이지만(갈 6:1 참조),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며 범죄를 도모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는 것은 가장 나쁘다. -조셉 캐릴.


4절.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교만한 죄인들은, 적어도 자신이 선택한 길에 있어서는 올바로 가고 있다는 가장 심한 속임수를 지니고 있다. 사탄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여 그들의 목적과 수단 모두를 그릇되게 만든다:그들은 정작 지옥을 향해 매진하면서도 하늘로 달려가고 있다고 착각한다. 사탄은 친절하게도 그들에게 지옥행 말들을 제공한다. 때로는 그가 그들을 술에 취하게 하여 그 말 위에 태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듯 추악한 상태로 어느 단계에 이르면, 이제 그는 그들에게 색욕을 부추겨 말을 타게 한다. 그러고 나서, 탐욕으로 그들을 새로이 무장시킨다. 만일 그들이 그 느릿느릿하고 야윈 말에 싫증이 나면, 사탄은 그들에게 거만한 야망을 심어 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끝없는 논쟁에 휘말리게 한다. 사탄의 계교를 간파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관이나 특정한 기질을 보고 그것을 판단할 수도 없다. 지옥으로 실어가기 위해 사탄이 안장을 얹고 준비한 말에 대해서는 누구나 마음이 이끌릴 수 있다. 길은 하나이며, 길잡이도 한 명이다. 정거장에 이를 때마다 그가 나타나며, 그는 난봉꾼들을 태운다. 그들이 타는 말들은 비록 색깔이 달라도 종류는 하나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그 악한 길로 치닫는 말에서 내리는 자는 복이 있으며, 거기서 내려 하늘로 향하는 길로 돌이키는 자는 더욱 복이 있다. -윌리엄 스트러더.


5절.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불경건한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 그리고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하던 다윗은 이러한 탄성을 발한다. 사람들이 그토록 뻔뻔스럽게 죄를 짓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어느 누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감탄하지 않겠는가! -세바스천 문스터(Sebastian Munster, 1489-1552).


5-7절. 이 시편은 점점 더 사악해져 가는 이 시대의 상황과 상태를 우리에게 잘 보여 준다. 이 시편의 앞 부분에서는 사악함을 드러낸다(3절). 이 땅에 그와 같은 사악함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5절을 보자:"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모든 선함과 인자함과 평강을 당신께로 모으고 계신다. 비록 이 세상에는 잔인함과 재난과 사악함이 있지만, 공중에는 자비와 진리와 신실함이 있다. 그러한 지혜, 선함, 진리, 의 등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 속해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따를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좋은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예전에는 사람을 통해 누렸던 선함과 자비와 진리 그리고 신실함을 이제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일이다. 사악함이 점점 더 늘어날수록 의도 점점 더 늘어간다:"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세상이 의를 갈기갈기 찢을 때, 하나님의 의는 거대한 산과 같다.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온 세상이 혼란의 바다로 화할 때, 여호와의 판단은 거대한 심연이 된다. 그 심연에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들도 편안하게 안식을 누릴 수 있다:"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비록 이 시대는 사람 속에 사악함이 증가하며 확산되어 가는 때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너무도 감미로운 사랑과 감탄을 발견하는 때이기도 하다. 그리고 죄를 범하는 자들이 "오 비참한 인생이여!" 하고 탄식할 때, 하나님 안에서 축복을 누리는 자들은 "오 행복한 인생이여!" 하고 외친다. 과연 이 시대는 어떠한가? 천상의 삶을 누리는 자들은,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라고 외친다. 여호와께서는 만물을 벌거벗은 것처럼 들추어내시며, 오직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만 안전해질 수 있다. -윌리엄 세지윅(William Sedgwick <1609-1668>, "The Excellency of the love of God," Some flashes of Lightnings of the Son of Man, 1648).


5-9절.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펼쳐 있고

주의 신실하심이 구름에까지 닿습니다

주의 공의가 산처럼 견고하고

주의 판단은 거대한 심연처럼 깊나이다

주의 고귀하신 자비로 만물을 돌보시며

인자들이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나이다

주의 풍성하신 은총을 그들이 양식으로 삼고

주의 기쁨의 시내에서 그들이 마음껏 마시나이다

이는 생명의 우물이 주께 있고

주의 영화로운 빛 속에서 

우리가 광명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 데이비스.


6절.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하나님의 산들"은 문자적인 번역이며, KJV는 "거대한 산들"이라고 옮겼다. "하나님의 산들"은, 사람들이 세운 것이 아니며 사람들이 옮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6절.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사람들의 죄는 거대한 심연과 같으며, 사탄의 길은 심연이라고 지칭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판단과 길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깊고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윌리엄 그린힐.


7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의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이 표현은 성전의 모습에서 착안된 듯하다. 그들은 성전이라는 은신처 아래에, 그룹들의 날개 아래에 피할 수 있었다. 풍부한 희생 제물, 넘치는 기름, 포도주, 향기, 그리고 금촛대의 불빛 등이 모두 암시되어 있다. -사무엘 버더(Samuel Burder).


7절.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이는 안전한 곳으로 달아난다는 의미이다. 마치 위험에 처한 병아리들이 어미닭의 날개 아래로 달아나는 것처럼.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룻 2:12). 매의 공격을 받아 삼키움을 당할 위기에 처한 무기력한 새는 그 어미의 그림자 아래로 날아간다. 죄인에게 믿음이 처음 역사할 때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다. 그는 자신이 진노와 심판의 추적을 받고 있음을 자각한다. 그는, 만일 그것들이 들이닥친다면 자신은 꼼짝도 못하고 파멸당하고 말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한 영혼의 상태는 그 얼마나 서글픈가!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께서 멸망으로 나아가는 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 날개를 펼치시는 것을 본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 아래로 나아오라고 초청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복음을 통해 듣는다. 그에게 있어 그 음성은 너무도 감미롭다. 그는 듣고 순종하며, 피난처  되신 그리스도께로 달려간다. 그리하여 그는 안전해진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데이비드 클락슨.


7절. "주의 날개." 시편에 흔히 나오는 상징적 표현으로서, 내 의견으로는 언약궤를 덮은 속죄소 위로 드리워진 그룹들의 날개에서 직접 착안되었다고 본다. 한편, 보다 간접적으로는 새들의 모습에서 착안되었을 것이다. 새들은 날개를 펼쳐서 자기 새끼를 태양 광선으로부터 보호한다. -프란시스 헤어(Francis Hare, 1740).


7절.


쓸쓸한 감방에서, 감시를 받으며 누워 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두르고, 

그분의 진리가 증언하오.

비록 벽은 두텁고 아무도 문을 열어 주지 않지만,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의 위로이자 안식이 되신다오.

-제로니누스 시거슨(Jeroninus Segerson)이 안트워프에 있는 감옥에서 자기 아내(그녀 역시 투옥된 상태였음) 리스켄(Lysken)에게 쓴 편지(1551년) 중에서.


8절.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먼저, 제공될 음식의 탁월함에 주목하라:"주의 집의 살찐 것", 그리고 "주의 복락의 강수." 가장 살진 것은 가장 근사하고 좋은 음식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이 성도들은 율법 하의 희생 제사를 위해 살진 것을 드릴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가장 좋은 것을 기대하신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다윗이 잔치를 베풀었을 때 그토록 즐거워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서는 살진 것이 모든 영적 진미들 중 정수이자 으뜸인 것으로 언급된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시 63:5).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당신의 집에 귀한 것들로 채우시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갈증을 제거하기 위해 특별한 배려까지 하신다.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그분이 그들로 마시게 하시며, 그들은 그분을 위해 축배를 든다. 아버지께서 그토록 진귀하고 값비싼 음식을 차려 주셨는데, 그 자녀가 그와 같은 진미를 버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음식 부스러기를 구걸하러 다녀서야 되겠는가? 그러한 모습은 아버지의 의도를 욕되게 하고 자기 자신의 분별력에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로, 이러한 음식의 탁월성뿐만 아니라 그 풍족성에도 주목하라. "복락의 강수"라는 표현 속에는 영적으로 기름지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 또한 이에 못지않게, 그것을 누리는 자는 '만족을 얻되' '풍성한' 만족을 얻을 것이다. 강이 넘쳐나고 항상 흘러내린다. 그것은 여기저기 필요한 물을 공급하지만 결코 마르지 않는다. 수원에서 물이 공급되는 까닭에, 그 강물이 항상 가득하다고 해서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한 원천을 지닌 자들은 물이 고갈되는 것을 불평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는 단지 강과 기름진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도 언급되고 있다:"저희가······풍족할 것이라." "풍족할 것이라"는 원문상으로 '취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영혼이라는 그릇은 그 강으로부터 공급받은 물로 가장자리까지 채워질 것이다. 그 강물은 하나님의 도성을 즐겁게 만든다. 그렇다면, 기름진 콩팥과 가장 좋은 밀가루로 요리한 음식을 하나님의 집에서 실컷 먹고도 남을 정도로 풍부하게 얻을 수 있는 자들이 세상의 좋은 음식을 동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세상의 음식 부스러기를 찾으러 다닐 정도로 굶주리게 하시지 않는다. -조지 스윈녹.


8절.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내가 한번은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그의 가족은 새로운 거주지로 이사를 갔다. 그곳의 내부 시설은 예전의 집보다 훨씬 넓었으며, 설비 자재도 한층 더 다양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이제 겨우 말을 배우는 단계에 있는 막내 아들은 이 방 저 방을 뛰어다니며 신기하다는 듯이 곳곳을 훑어보면서, 어린아이다운 감탄을 연신 발하였다. "아빠, 이게 우리 것이야? 이것도야?" 그 아이는 "아빠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 사람이 자기 아들에게서 "아빠 것"이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해서 화를 내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눈빛을 보건대, 그 어린 아들이 그의 모든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확신한 사실이 그를 만족스럽게 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 분명하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가족에 속한 자녀들도, 상대적으로 열악한 현재 상태를 벗어나 장차 무한한 세계로 들어갈 때,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라고 말하면서 그와 같은 놀라움과 기쁨 그리고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하늘의 영광들이 자기 눈앞에 열릴 때, 그들은 "오 하나님, 이는 당신 것들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마치 낯선 사람처럼 멀찌감치 서 있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앞으로 달려나가 그 복된 집 안에 차려져 있는 각종 음식을 맛보면서,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아버지, 이 모두가 우리 것입니다!"라고 탄성을 발한다. 사랑스러운 자녀는 아버지의 모든 부귀를 기뻐하며, 아버지는 그 사랑스러운 자녀를 더 기뻐하신다. -윌리엄 아놋(William Arnot).


8절. "주의 집의 살찐 것." 만일 성전에 대한 암시가 여기 들어 있다면, 허필드(Hupfield)의 생각처럼, "살찐 것"은 '살진 희생 제물'을 가리킬 것이고, 남자들은 각 가정의 제사장들로 여겨질 것이다(렘 31:14 참조). -스튜어트 퍼론.


8절. "주의 집의 살찐 것." 기름은, 고대의 다른 모든 민족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짐승의 고기 중 가장 맛좋은 부위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으뜸되고, 가장 좋으며, 또한 근본적인 그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긴스버그(D. Ginsburg, LL. D., Kitto's Cyclopaedia).


8절. "주의 집의." 강조적 표현으로서, 주께서 주의 가정과 거기 거하는 신실한 가족을 위해 친히 준비하셨음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만을 위해 마련된 좋은 것들을 암시한다. -존 피스케이터(John Piscator)와 몰레루스.


8절. "복락." '기쁨.' 동일한 단어가 창세기에서는 "에덴"이라 번역되었다. 복수형으로 쓰인 곳은 여기뿐이다. -댈먼 햅스톤.


8절. 교부들 중 한 명이, "천국이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내가 거기서 당신을 만나면 내가 말해주겠다"고 말했다. 랍비들은 이르기를, 장차 도래할 세상은 모든 것이 좋은 곳이라고 했다. 내가 읽은 어떤 책에 나오는 사람은,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라면 유황 바다라도 기꺼이 헤엄쳐 건널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오직 그곳에만 완전한 행복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 세상의 영광에 비한다면, 페르시아의 비단, 이집트의 향료, 오빌의 금, 혹은 인도의 보물 등이 무엇이겠는가?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다. 하루는 그가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라는 시편 36:8을 묵상하면서 천상의 기쁨에 사로잡힌 채 이 구절에 관해 무엇인가를 적으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누구시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제롬이다. 내가 살아 있을 때 너는 성경 속의 의혹스러운 부분들에 대해 나와 더불어 많은 토론을 나누었다. 이제 나는 귀한 경험을 통해 하늘의 기쁨에 관한 너의 모든 의심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먼저 네게 물어 볼 것이 있다. 너는 온 땅과 바다의 모든 물을 자그마한 항아리에 담을 수 있느냐? 너는 바닷물을 손바닥으로 측정하거나 하늘이 몇 뼘이나 되는지 잴 수 있는가? 혹은 산을 저울에 달아 측정하거나 언덕을 천칭으로 잴 수 있느냐?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네 이해력으로 하늘의 기쁨 중 가장 적은 것이라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분명히 말하건대, 하늘의 기쁨 중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인간으로서는 인식하거나 표현할 수 없다." -토머스 브룩스.


9절.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이것은 구약성경내에서 가장 탁월한 말씀이다. 어떤 주석도 그 온전한 의미를 해석해 내지는 못했다. 사실,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의 가장 심오한 교훈들의 핵심이요 또한 그것들을 미리 보여 준 것이다. -스튜어트 퍼론.


9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우리의 영원한 행복의 대상 및 그 재료는 "광명"이다. 그것은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서 비친 광채처럼 현란하고 혼란스러운 빛이 아닐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볼 수 없었다. 또한 그것은 우리 주님의 변용 당시와 같은 놀라운 빛도 아닐 것이다. 그때 제자들은 땅에 엎드러졌고, 그들의 연약한 눈으로는 육신의 장막을 비추고 들어오는 영광의 광채를 흐릿하게라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천국에서 보게 될 행복의 빛은 '강건케 하고 위로하는 광채'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이해력을 강하게 하며 굳건히 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마치 젊은 독수리들처럼, 의의 태양이신 그분의 광채와 영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이르기를,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하셨다(출 33:20). 다니엘이 그 영광스러우신 모습을 보았을 때 그의 몸에 힘이 빠졌다(단 10:8). 다니엘이 자신의 외부에 있는 이상을 보았을 때, 그의 정신이 혼미해지고 몸에 힘이 빠졌다. 하지만 천국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알 것이며,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시사 우리를 강하게 하실 것이다. 그때에는 우리가 그분의 얼굴을 뵈옴으로써 살게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위로의' 빛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밤새도록 아침을 기다려온 지친 야경꾼에게 비추는 아침 햇빛과 같다. -윌리엄 콜빌(William Colvill).


9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희미한 일종의 여명이다.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감옥에 갇힌 동안에는 지극히 적은 부분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위에 있는 우리 아버지의 집은 광명으로 가득하다:"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 13:43). 만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샛별이 떠오르면, 온전한 낮의 광명을 즐거이 기대하며 살아가라. 왜냐하면 우리가 발판 위에 서 있는 한, 조금만 올라가면 신비스러운 나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천국에 이른 후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생토록 추구하여 얻을 수 있는 것과 족히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것들을 알게 될 것이다. -티모시 크루소.


9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자연의 빛은 불똥과 같고, 복음의 빛은 등불과 같고, 은총의 빛은 별과 같지만, 영광의 빛은 태양 그 자체이다. 높이 올라갈수록 우리의 빛은 더 커진다. 하나님은 아무 사람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딤전 6:16). 죽어야 할 운명과 죄악 가운데 처해 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그 빛에 가까이 가지 못한다. 그러나 무력하게 하고 부패한 그 두 가지가 제거될 때, 우리는 그 빛에로 나아갈 수 있다. 현재 우리는 머리 위에서 빛나는 해와 별들을 즐거워한다. 그렇다면 이것들이 우리 발 아래에 놓일 때 우리에게 임할 광명과 기쁨은 어떠하겠는가? 분명 그 빛은 현재 멀리 우리 위에서 비치는 해나 별들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서 비칠 것이다. 하지만, 그 빛을 논하고 또한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희미한 자연 상태와 죽어야 할 운명이라고 하는 비천한 그림자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영원한 대낮을 맞은 자들이다. 나는 그것을 여러분의 묵상에 맡기기로 한다:그 영광스러운 광명은, 우리가 종종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며, 사모하고 싶어하는 것이며, 사랑하고자 하는 것이고, 바라고 싶어하는 것이며, 찾기를 바라는 것이고, 또한 영원토록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토머스 애덤즈.


9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세상에서는 나름대로의 광명을 크게 자랑하며, 자연적 측면에서 볼 때 그럴 만한 근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지혜로써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그것은 그분의 말씀의 매개를 통해서이다. 나는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라고 본다. '광명'이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의미한다. 그것을 얻게 하는 진정한 매개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계시이다. 이 모두를 종합하면 이러하다: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나님에 대한 구원의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위대한 매개이다. 태양이나 별들과 물질 영역간의 관계는, 계시와 정신 영역간의 관계와 같다(창 1: 13, 17 등 참조).

여러분이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또한 전혀 논쟁거리로 삼을 수도 없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것들을 하나님의 빛에 비추어 보는 일을 잊지 말라. 많은 사람들은 위인들이나 선인들이 마련한 빛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해 한다. 하지만, 천사들마저도 참된 빛이 아니며 그들 모두는 단지 부분적으로 볼 뿐이다. 만일 그들의 말이 진리라면, 아니 만일 우리가 단지 그들의 입장에만 비추어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믿음은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지혜 안에 서 있게 될 것이다(고전 2:5).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하지 않은 지식이나 믿음은 시험받는 날에 지탱되지 못할 것이다. -앤드류 풀러(Andrew Fuller).


9절. 이처럼 하나님과의 친교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은 모든 것 속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 눈을 위해 아름다움이 되실 것이며, 귀를 위해서는 음악이, 미각을 위해서는 꿀이, 그리고 우리의 욕망을 위해서는 온전한 만족이 되시되, 그 모두가 그분으로부터 직접 비롯될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만유 가운데 만유가 되신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28).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분은 이차적 동인들을 통해 역사하신다. 여기서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해 포도주를 주시며, 또 다른 목적을 위해 기름을 주신다. 하지만 거기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끼어드는 수단들이 모두 제거된다:"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태양 빛이나 촛불 안에서가 아니다. 거기서는 그것들이 전혀 필요 없다(계 22:5). 오직 "주의 광명 중에," 즉 하나님 자신의 빛 안에서이다. 그렇다. 모든 영광의 삶이, 그것과 수반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유일하고도 원래적인 원천이신 그분으로부터 흘러 나온다. 그렇게 하여 얻은 행복은 그 얼마나 감미롭겠는가! -에드먼드 핀치벡(Edmund Pinchbeck, B.D., "The Fountain of Life:" a Funeral Sermon, 1652).


9절. 신자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케 됨으로써 보고 느낄 것에 비하면, 피조계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은,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자녀들에게 축복으로 주어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단지 바다나 우물로부터 얻은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딕슨.


10절.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하나님이 자신의 종들에게 일단 자비를 베푸시기 시작하면, 그분은 이내 아까워하지 않으시며 계속해서······혹은 증가시키신다. 라헬이 첫 아들을 얻었을 때, 그녀는 그의 이름을 요셉이라 지었다. 그 이름은 '더함' 혹은 '증가하다'는 뜻이다. 그녀는,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리라"고 말했다(창 30:24):'이제 하나님이 자비를 보이기 시작하셨으니, 그분은 내게 이 아들을 주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아들도 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한 가지 은총을 내리실 때, 당신은 그것을 가리켜 요셉('증가하다', '더함'이라는 뜻)이라 칭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또 다른 은총을 당신에게 베푸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은총들을 하나 하나 연이어 받았다. 모세 역시 수많은 은총들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대화했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으며,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과 동행했다. 또한 영광스럽고도 선하신 하나님이 자기 앞에서 지나가시는 광경도 보았다. 은총들이 내릴 때, 하나님은 그 은총의 문을 이내 닫아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히브리어 원문상으로는, '빼내다' 혹은 '뽑아내다'는 뜻이다. 이는 포도주 통에서 착안한 은유이다. 일단 포도주 통에 포도주를 따르는 구멍을 내면, 한 잔만 따르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잔을 연거푸 따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당신의 은총이라고 하는 포도주를 담은 통에 구멍을 내실 때에도, 그분은 우리의 잔에다 한번만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두 번이고 일곱 번이고 거듭하여 채우실 것이다. 또는 이 말은, 젖먹이를 안은 어머니의 모습에서 착안된 은유일 수도 있다. 그녀의 유방에는 젖이 가득하며, 단 한번만이 아니라 종종 자신의 아기에게 젖을 빨린다. 그 아기는 밤이든 낮이든 여러 차례에 걸쳐 엄마의 젖을 빨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은총을 보이기 시작하실 때, 그분은 당신에게 은총이라는 위안의 젖을 거듭하여 먹이실 것이다. 혹은 이 말이, 늘어나는 줄에서 착안된 것일 수도 있다. 즉, 하나님은 은총을 베푸심에 있어, 그 은총의 줄을 늘이실 것이며, 당신에게 연이어 은총을 베푸실 것이다. -윌리엄 그린힐.


10절. 경건한 사람의 참된 표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께 순종하기 위한 정직한 노력이 결합된 모습에서 발견된다. 왜냐하면, 경건한 사람이란 "주를 아는 자"요 또한 마음이 정직한 자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딕슨.


11절. "발"······"손." 발과 손이 모두 언급된 것은, 전투를 수행할 때 이 둘 모두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시몽 드 뮈(Simon de Muis).


12절.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이는 마치 시편 기자가 자기 손가락으로 특정한 장소를 가리키면서 말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와 동일한 표현 양식이 시편 14:5에도 나온다. 본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도 있다:"그때(의인이 주의 집의 풍족한 것들로 만족을 누리며 그 안에서 정직하게 주를 경배한 데 대한 상급을 받을 때) 악행을 일삼은 모든 자들이 넘어질 것이다. 그들이 쓰러뜨림을 당하여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어떤 사람이 폭력을 당하여 단단한 땅에 엎드러진 경우를 연상시킨다. -다니엘 크레스웰.


힌트


1절.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작용을 하는가?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인한 결과는 무엇인가? 그토록 조악한 결과를 봄으로써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범죄의 이면에 위치한 무신론.


2절. 자긍의 기교, 동기, 그로 인한 결과,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는 결론. 


2절. 자긍 사례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


2절. 범죄와 관련된 마음의 기만성에 대해. -제이미슨의 “Sermons on the Heart”에 나오는 두 설교들.


3절. 악한 말들. 그 여러 종류들 가운데 두 가지.


3절 중반절. 참된 지혜와 실천적인 선행간의 관계.


4절. 악을 행하기에 부지런하다는 것은 심각한 타락의 표시이다. -윌리엄 플러머.


4절. 사악한 목적을 위해 궁리하는 것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분명한 특징이다. -마샬(N. Marshall).


4절. 자신의 침상에서, 행위를 통해, 그리고 마음으로 범죄하는 자. 뿐만 아니라, 죽음과 파멸의 순간에도 죄를 범하는 자.


4절 중반절. 선하지 않은 길들.


4절 하반절. 중립 상태에 대한 정죄.


5, 6절. 하나님의 은총, 신실하심, 그리고 섭리 등에 관한 네 가지 직유들. 여기서 기자는 더할 나위 없는 시적 이미지를 사용한다.


6절. 신비로운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찰스 시미언.


6절 중반절. 하나님의 판단. (1) 그것을 헤아릴 수 없는 경우가 많다.우리는 그 이유나 원천을 찾아낼 수 없다. (2) 그것은 안전한 항해와 같다. 깊은 곳을 지나면서 배가 암초에 부딪히는 법이 없다. (3) 거기에는 귀중한 보물이 숨겨져 있다. (4) 그것은 많은 선을 이룬다. 무지한 자는 그 깊으신 판단을 황량하며 염분으로 가득한 불모의 광야와 같은 것으로 여기지만, 사실 그것은 이 세상에 주어지는 가장 위대한 축복들 중 하나이다. (5)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열어 주는 대로와 같다. 오늘날 바다가 세상의 탁월한 교통로 역할을 하듯이.


6절 하반절.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보잘것없는 짐승들에게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7, 8절. 감탄! 확신! 기대! 실현!


7절. 믿음의 목표, 근거, 특성, 그리고 그 체험.


8절 상반절. 여호와의 집에 마련된 것. 그것이 무엇인가? 그 탁월함과 풍부함. 또한 그것은 누구를 위해 마련되었는가?


8절 중반절. 천상의 힛데겔. 그 원천, 그 범람, 그것을 마시는 자의 행복. 그리고 그것을 마시는 비결.


9절 상반절. 자연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 생명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으며, 또한 그분에 의해 존속되고 회복되며 정결케 되고 또한 온전케 된다. 그 생명이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있으며, 그분은 그것을 거저, 신선하게, 풍부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공급해 주신다. 그 생명은 그분께 바쳐져야 한다.


9절 중반절. 광명. 광명을 본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광명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주의 광명을 매개로 삼아 다른 빛을 보게 되는가? 여기 묘사되어 있는 체험과 여기서 암시된 의무에 주목하라.


10절. (1)의인의 특성:그는 하나님을 알며, 정직한 마음을 지녔다. (2) 그의 특권:주의 인자하심과 의. (3) 그의 기도:계속적인 은총을 간구함.


10절. 매일 은총을 간구해야 할 필요성.


12절. 악한 권세들, 악한 정사들, 그리고 악한 사람들 등이 파멸에 처하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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