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9편
개요
주제-이 시에는 “다윗의 시, 영장 여두둔으로 한 노래”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다윗의 시”.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은 이 시편을 낳기에 충분했다. 즉, 이 시편은 그토록 많은 시험에 부딪히고, 그토록 강한 열정을 지니며, 또한 그토록 굳건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에게 매우 적절한 노래인 것이다. ‘찬양’ 혹은 ‘축하’라는 뜻인, “여두둔”이라는 이름은 신령한 찬송의 인도자에게 썩 잘 어울린다. 그는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아 여호와 하나님의 전에서 노래하고”(대상 25:6) 섬기라는 다윗 왕의 지시에 따라 임명된 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 자녀들도 그의 뒤를 이어 느헤미야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신성한 직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시온에서 봉사할 직분을 받고 그 이름이 올려진다는 것은 결코 적은 영예가 아니며, 은총 가운데 이러한 직분을 오래도록 세습받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섬기는 자가 자기 가문에서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했다. 다윗은 다소 슬픈 색조의 이 송시를 여두둔의 손에 맡겼다. 이는 그것을 연주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그였기 때문이거나, 혹은 다윗이 찬양이라는 신성한 영예를 모든 찬양대원들에게 맡기려 하였는데 마침 여두둔이 찬양할 순서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 2절 시편 기자는, 질병과 슬픔 가운데서 엎드려, 불신의 생각에 압박당하고 있다. 그는 행여 악한 말이 입에서 표출될까봐 그 생각을 억누르기로 결심한다.
3-6절 그러나 침묵은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야기시키고, 마침내 기도로 표출된다. 이 기도는 죽음을 바라는 탄식과 불평에 가까우며, 혹은 기껏해야 인간의 삶에 관한 매우 비관적인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7-13절 분위기가 보다 순종적이며, 하나님의 손길을 더욱 분명히 인정하는 어투로 전개된다. 구름은 확연히 지나갔고, 슬퍼하는 심령은 평안을 회복한다.
강해
1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2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1절. "내가 말하기를." 그는 줄곧 결심했으며 결정한 바를 확고히 되새겼다. 그는 죄를 범할까봐 두려웠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따라서 그는 죄를 피하기 위해 최선의 방법을 모색했으며, 침묵하기로 결심했다. 어떤 사람이 지혜롭고 근사한 결심을 기억함으로써 올바른 길을 가는 자신을 격려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죄를 피하기 위해서는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으며, 요새를 지키는 파수꾼처럼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고 자제할 필요가 있다. 자제되지 않는 방식은 대체로 악하다. 부주의하다는 말은 타락했다는 말과 유사하다. 질병이나 다른 곤경에 처한 시기에, 우리는 그러한 시련들과 각별히 연관된 죄악들을 조심해야 하며, 특히 불평과 푸념을 늘어놓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혀로 범하는 죄는 심각하다. 악한 말들은 불꽃처럼 확산되어 큰 해를 끼친다. 만일 신자들이 낙심의 시기에 하나님을 욕한다면, 불신자들이 그 말을 듣고서 자신의 죄악된 생활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삼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의 자녀가 그를 욕한다면, 그의 대적들이 그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 혀는 항상 감시를 요한다. 왜냐하면 혀는 길들지 않은 말처럼 다루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여호와의 회초리가 가해져 반역적인 말을 하려는 충동이 들 때에는 한층 더 단단히 붙들어야 한다.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이러한 때에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악인들은 우리의 가장 거룩한 말마저도 악용하려 들기 때문에, 우리의 진주를 그러한 돼지들 앞에 던지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만일 시편 기자의 말이 '내가 악인의 형통함에 관해 생각하는 동안에는 침묵했다'는 의미라면, 우리는 그의 마음속에 불평과 의구심이 깃들어 있음을 보게 되며, 그의 재갈 물린 입 또한 그다지 추천할 바가 못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를 비난한다면 아울러 칭찬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들이 의혹에 사로잡혀 방황할 때, 그들은 그런 폐단을 거듭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싸움을 과감히 행하기 때문이다. 가장 굳건한 신자들도 불신에 사로잡힐 때가 있으며, 그럴 경우에 그들이 자신의 의혹과 의심을 도처에 퍼뜨리고 다닌다면 그것은 사탄을 돕는 일이다. 만일 내가 열병에 걸린다면, 그것을 이웃 사람들에게 퍼트려야 할 이유는 전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내 영혼의 배가 질병에 걸린다면, 나는 내 마음을 격리시키고, 건강증명서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라는 보트를 해안으로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원문상으로 "자갈"은, 단순히 혀를 제어하는 굴레라기보다는 혀를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재갈에 더 가깝다. 다윗은 조금은 어리석은 반응까지 보였다. 만일 그가 자신의 말을 자제하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은 온전히 추천할 만하다. 하지만 그가 "선한 말도" 발하지 않겠다며 철저히 침묵할 정도로 자신을 정죄했다면, 그 영혼 속에 적어도 부루퉁한 심경이 들어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는 한 가지 결함을 피하려 하면서 다른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말을 하는 것은 작위의 죄이지만, 아예 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명백한 부작위의 죄를 수반한다. 스킬라(카리브디스와 마주하는 이탈리아 해안의 위험한 바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스킬라는 머리 여섯, 발 열둘 달린 여자 괴물로서 큰 바위에 산다-역자 주)를 피하기 위해 카리브디스(시실리 앞바다의 큰 소용돌이-역자 주) 가운데로 내닫는 셈이다.
2절. "내가 잠잠하여." 그는 마치 혀가 없는 사람처럼 철저히 침묵했다. 그는 벙어리처럼 잠잠했다.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그의 입술은 악한 말뿐만 아니라 선한 말도 발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이든 하기 시작하면 분명 실수하고 말 것이라는 점을 두려워하여 완전히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해도 하나님의 성호를 찬미해야 하는 의무를 게을리하는 잘못을 수반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은 쉽고도 안전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죄를 피할 수 있는 길이었을 것이다. 우리 주님은 악인들 앞에서 침묵하셨지만 항상 그렇게 하시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는 선한 증거를 베푸셨고 또한 자신의 나라를 확언하셨기 때문이다. 건실한 행동이 극단으로 치달아 결함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내적 슬픔이 표출구가 없음으로 인해 끓어 넘쳤다. 울분이 넘쳐 마음을 들쑤셨다. 마음의 고뇌는 말을 통해 자연스럽게 표출된다. 따라서 침묵은 고뇌를 악화시키며 그것을 치유하는 데 장애로 작용한다. 그런 경우에 침묵을 결심하자면 강력한 동기가 필요하며, 설사 강력한 동기의 지원을 받는다 해도 슬픔이 영혼을 휩싸면 그 결심도 허물어지기 쉽다. 고뇌의 물결이 넘치고 출구를 찾기 위해 거품을 일으키면, 가장 튼튼한 제방도 쉽게 무너져 내린다. 불만을 표출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할 수도 있지만, 은총을 통한 구원이 임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3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4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
6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3절.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내면의 생각들이 빚는 마찰로 말미암아 극심한 정신적 열기가 생겨났다. 그의 마음의 문은 닫혔고, 슬픔의 불이 내면을 태웠으며, 그의 영혼의 방은 열기로 인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련당하는 자에게 있어서 침묵은 끔찍스러운 일이며,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 그는 미쳐버린다. 슬퍼하는 자여, 그대의 슬픔을 고하되, 하나님께 가장 먼저 그리고 낱낱이 고하라. 혹은, 지혜롭고 경건한 친구가 멀리 떠나기 전에 그에게 털어놓으라.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날마다 마주하는 자신의 곤경과 악인의 평안함을 생각할 때, 그는 섭리의 신비를 풀 길이 없었으며, 따라서 심한 고뇌에 빠졌다. 묵상하는 동안 그의 마음은 녹아내렸다. 이는 그 묵상의 주제가 너무도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잠잠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화산같이 격렬한 그의 영혼은 내면의 불바다로 인해 요동했으며, 정신적 지진으로 인해 이리저리 뒤흔들렸다. 폭발이 임박했고, 불타는 용암이 거센 물결처럼 분출될 것이었다.
"나의 혀로 말하기를." 원문은 매우 간결하다("내가 말했다"). 재갈물린 혀는 그 모든 굴레를 터뜨려버렸다. 재갈이 내던져졌다. 비참한 심경이 표출되었다. 우리가 찬사의 말을 제지할 수는 있지만, 고뇌란 시끌벅적하기 마련이다. 결심을 하든지 않든지, 주의하든지 않든지, 혹은 죄가 있든지 없든지간에, 격렬한 급류가 스스로 수로를 열었고 모든 장애물을 휩쓸어 가버렸다.
4절. "여호와여." 그의 영혼의 표출구가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였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오! 만일 나의 부푼 심령이 누군가에게 말해야 한다면, 여호와여, 주께 호소하게 하소서. 비록 내 말 속에 너무도 열기가 가득하다 해도, 주께서는 저를 참아 주실 것이며, 그 열기가 주의 순수함을 얼룩지게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만일 내가 동료들에게 말하면, 그들은 나를 거세게 책망하거나 나의 성마른 모습을 오히려 배우려 들 수 있습니다.
"나의 종말과······." 이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라는, 고뇌에 찬 엘리야의 탄식과 같은 뜻으로 한 말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비참한 삶의 종국이 어떠할 것인지를 조급한 심정으로 알기를 원했다. 그 종말을 알게 되면, 그는 죽음을 통해 불행한 삶이 마감될 날을 헤아리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었다. 마치 달리는 위안을 받을 길이 없는 것처럼, 불신의 마음은 스스로를 기꺼이 무덤 속에 숨기고자 하며 또한 스스로를 망각 속에 잠재우려 한다. 다윗은 기도 중에 경솔한 말을 처음 한 사람도 마지막으로 한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만일 시편 기자가 인생이 짧다는 사실에 대해 좀더 많이 알았더라면, 그는 그 짧은 인생의 일시적 폐단을 더욱 잘 견딜 수 있었을 것이며, 우리 역시 무릎을 꿇고서 그와 동일한 간구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곤경에 끝이 없다면 그것은 지옥 중의 지옥일 것이다. 인생의 슬픔에 종말이 있다는 사실은 무덤 너머의 소망을 지닌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준다. 하나님은 예견된 종말을 고대하게 하는 신성한 철학을 가르치는 가장 훌륭한 스승이시다. 여호와의 망원경을 통해 죽음을 보는 자는 올바른 시각을 갖게 되며, 이를 통해 그들은 생의 종국을 예견함으로써 인생의 불행을 잊을 수 있다.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다윗은 자신의 날들이 조만간 끝나고 그날들과 더불어 자신의 시련도 끝날 것임을 기꺼이 확신하고자 했다. 삶이란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 우리에게 할당된 것이지 우연의 문제가 아님을 그는 새롭게 깨달았다. 상인이 옷을 잴 때 인치와 엘(고대의 척도이며, 영국에서는 45인치에 해당함-역자 주)과 야드를 따져 가며 정확히 재듯이, 각 사람에게 삶이 할당될 때에도 역시 주도면밀하게 그리고 정확히 할당된다.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혹은, "내 인생이 언제 끝나는지를 알게 하소서." 인간의 가련한 성향은, 여호와의 정하신 때를 참고 기다리기보다는 그분께 항변하며, 또한 차라리 자신의 존재가 끊어지기를 바란다. 성도 역시 그처럼 조급하게 토라질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와 같은 입장에 처한다면, 우리 역시 결코 더 나은 자세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만드는 중인 배를 보면 그것에 물이 스며들지나 않을까 염려되지만, 넓은 바다를 항해할 때 그토록 심한 폭풍우 속에서도 선재들이 굳건히 견디는 것을 보면 참으로 놀랍다. 다윗의 경우는 우리로 하여금 모방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5절.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깊이 생각하는 중에, 시편 기자는 인생이 길다고 슬퍼할 여지란 거의 없음을 발견하며, 오히려 인생의 짧음을 탄식한다. 우리는 그 얼마나 변하기 쉬운 피조물인가! 조금 전에는 자신의 존재를 제거해 달라고 부르짖었다가, 이제는 그것을 연장해 주시기를 간청한다. 손 넓이란 자연스러운 척도 가운데 가장 짧은 것들 중에 속하며, 네 손가락을 펼친 넓이를 가리킨다. 인생이란 그렇듯 짧은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으며, 그 기간을 지혜로써 정하셨다. 인생이 짧다는 사실이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도 예리한 고통을 가져다 줄 것이며, 또 다른 이들에게는 가장 엄숙하고 진지한 마음을 간직하게 할 것이다. 그토록 짧은 생을 살아야 하는 이들이 과연 어떻게 해야 잘 살까? 우리의 세상 순례길이 그토록 짧은가? 그렇다면 매 걸음에 주의하여 가장 적은 시간에 가장 많은 은총을 누리도록 하자.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너무도 짧아서 실체로 여기지도 못할 정도라는 의미이다. 영원을 생각해 보라. 그리하면 천사도 갓 태어난 아기일 뿐이며, 세상은 이제 막 생긴 거품과 같고, 태양은 방금 불에서 튀어나온 불티와 같으며, 또한 인간은 무에 불과하다. 영원자 앞에서는, 연약한 인간의 나이란 단지 시계 초침이 한 번 째깍 하는 것만도 못하다.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인간 주위에는 확실하거나 진실된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은 가장 확실한 진리이다. 인간이란 기껏해야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인간이란 단지 형체도 없는 한 줄기 바람과 같은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고정되어 있되, 안정적으로 고정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고정되어 있다. 그가 불변하지 못하다는 사실만 불변하다. 그의 허망함이 그에 관한 유일한 진실이다. 그의 최선의 모습 또한 허망하다. 인생과 관련된 모든 것이 뜬구름과 같다는 점은, 분명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다. 자신의 보화가 달 아래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것은 서글픈 소식이다. 스스로에게서 영광을 찾고자 하는 자들이 비극을 맞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지지 않는 꽃으로 만발한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보화를 간직하는 자들은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며, 그들이 신뢰하는 것은 전혀 헛되지 않다.
6절.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인생이란 단지 지나치는 행렬에 불과하다. 오직 이 사실만이 분명하며, 다른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다. 우리의 그림자가 우리를 비웃는다. 우리는 그림자와 함께 걸으며, 마치 그 기만적인 형상에게 실체가 있는 것인 양 그것을 위해 사는 적이 너무도 많다. 실체를 위해 바쳐야 합당한 열성을 그와 같은 환영을 위해 허비한다. 세상적인 사람은 신기루를 좇는 여행자와 같아서, 현혹되고 기만당하여 조만간 낙심과 절망에 사로잡힌다.
"헛된 일에 분요하며." 사람들은 안달하고 성을 내며 근심하지만 이 모두는 헛된 일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림자를 좇는 그림자들이며 죽음이 그들을 쫓고 있다. 황금과 명성과 지위 등을 추구하느라고 힘들게 노력하고 지친 자는, 설령 자신의 바람을 이루었다 해도 결국에는 자신의 노고가 무용지물로 전락함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그가 실체의 세계에서 깨어날 때, 마치 수전노가 감추어 둔 보화처럼 그 모든 것은 자취를 감추고 말기 때문이다. 이 본문을 주의깊게 읽어 보라. 그러고 나서 시장 바닥의 고함소리과 각종 거래소들의 와글거리는 소리 그리고 도회지 거리들의 시끄러운 소음 등에 귀를 기울여 보라. 그리고 이 모든 '소음'(원어상의 의미이다)이 비실체적이며 뜬구름처럼 헛된 것들임을 기억하라. 깨트려진 평안, 안절부절 못하는 두려움, 과로한 머리, 낙심된 마음, 그리고 광기 등, 이들은 갖가지 요인들에 의해 불안케 되어가는 과정에서 거치는 단계들이다. 그 요인들이란 주로 부유해지려는 데서, 달리 말해 자신의 자아에 두터운 진흙을 덮으려는 데서 비롯된다. 인간이란 진흙으로 지은 바 된 자신의 몸을 조만간 떠나야 할 존재이다.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종종 그는 자신의 모험에 따른 결과를 얻지 못해 아쉬워한다. 왜냐하면 손에 든 떡도 목에 넘어가야 제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밀을 단으로 묶지만, 강도가 침입하여 그것을 앗아가버린다. 혹은 밀을 창고에 저장해 둔다 해도, 침입자가 밀어닥쳐 그것으로 잔치를 베푼다. 이처럼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을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가 자녀를 위해 재물을 알뜰살뜰 모아 둔다 해도, 정해진 때가 이르면 그 재물이 낱낱이 흩어지고 만다. 우리는 자신의 유산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녀도 죽을 것이며 조상 때부터 내려온 저택도 낯선 자들이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재산은 다른 이들의 손에 넘어가고, 그 상속물을 아무리 단단히 묶어 둔다 해도 세월이 지나면 부식되고 만다. 사람들은 집을 짓기 위해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서야 잠자리에 들지만, 낯선 자들이 그곳에 침입하여 그 방을 차지하며, 처음 지은 자를 잊어버리고 그것을 자기 집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해 아래서 당하는 재난들 중 하나이며, 이에 대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7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8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9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10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11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뿐이니이다(셀라)
12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13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7절.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이 환영들 중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토록 마음 내키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 그토록 시련이 많은 현실 속에서 내가 왜 서성거리겠는가? 슬픔이 가득한 곳에서 공허한 유산을 얻으려고 서성거리는 것은 너무도 헛된 일이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다른 모든 것들을 혐오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이킨다. 그는 세상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서, 그토록 헛된 것들이 모조리 지나가버릴 것임을 깨달음으로써 새로운 회복을 경험한다. 그는 자신을 이 땅에 속박시켰던 모든 끈들을 과감히 잘라버린다.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여호와는 스스로 존재하시며 진실하시다. 따라서 사람들이 충분히 신뢰할 만한 분이시다. 모든 피조물이 죽을 때에도 그분은 살아 계실 것이며, 모든 이차적 원인들이 사라질 때에도 그분의 충만하심은 존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대를 그분께로 모으며 그분을 신뢰하자. 모든 지혜로운 건축자들은 모래로부터 반석에로 돌이킨다. 왜냐하면 설령 오늘은 평온하다 할지라도 오래지 않아 폭풍이 일어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써 튼튼히 시멘트 칠을 한 집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소망은 오직 한 가지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자신의 인생이라는 배를 정박지까지 안전하게 몰고 갔다. 잠시 동안의 표류 후에 모든 것이 평온해졌다.
8절.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며." 시편 기자가 더 이상 슬픔의 하프를 연주하지 않고 죄로부터의 자유를 간청하는 모습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죄와 비교할 때 슬픔이 무엇인가? 다만 죄의 독을 잔에서 사라지게 하라. 우리는 죄의 독을 없앤 잔이 쓸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쓴 것이 약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라 불리는 복되신 분 이외에는 그 누구도 사람을 그의 죄악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한다. 이는 그분이 자기 백성을 그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일단 그분이 사람을 죄의 원인으로부터 구원하실 때, 죄의 결과들 역시 분명히 사라지기 마련이다. 시편 기자가 이렇듯 철저한 구원을 소원하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몇몇 죄악들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작은 유익이 될 것이며, 전적이고도 완전한 구원이 요청된다.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여기서는 악인이 우매한 자로 표현된다. 그런 자들은 늘상 성도들의 결함을 들추어 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며, 그러한 결함을 조롱거리로 삼는다. 어떤 사람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배교를 꾀함으로써 스스로를 추잡스러운 경멸의 표적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비난받아 마땅한 잘못을 범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죄와 수치는 함께 동반되며, 다윗은 이 둘로부터 보존되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9절.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내가 잠잠하며 입을 열지 않겠나이다"라고 번역하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루퉁한 모습이 모조리 제거되고 감미로운 순종이 깃들인 보다 숭고한 침묵을 엿볼 수 있다. 자연적인 본성으로는 입에 재갈을 물릴 수 없었지만, 은총은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그 일을 가능케 했다. 두 가지 서로 다른 것들이 외관상으로는 너무나 흡사해 보일 수도 있다. 같은 침묵이라도 어떤 경우에는 죄악 되고 또 다른 경우에는 신성한 것일 수 있다.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라는 말은, 모든 불평 불만을 침묵시킬 만한 이유가 된다. 그분이 뜻하는 바대로 행하시는 것은 그분의 권리이다. 항상 그분은 가장 지혜롭고 자비로운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그분의 처사를 힐책할 수 있겠는가? 그분이 진정 여호와시라면, 그분이 선하게 여기는 대로 하시게끔 해드리라.
10절.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모든 불평을 멈추기 위해 침묵한다고 해서 기도의 음성이 막히지는 않았다. 결코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 아마 여호와께서는 시편 기자의 간구를 받아들이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체로 그분은, 우리가 고난으로 인해 체념 상태에 빠질 때, 그 고난을 제거해 주시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징계의 회초리에 맞는 일을 달게 여기면,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불태우신다. 우리가 잠잠할 때는 그 회초리도 곧 잠잠해진다. 시련을 제거해 주십사 하고 기도하는 것은 복종 상태와 조화를 이룬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지만, 구원을 바라는 간구를 마음으로부터 드렸다. 사실 그가 자신의 시련 문제로 기도하지 않았던 것은 반역적인 마음에 빠져 있는 동안이었다. 그는 순종하는 마음을 회복한 때에만 은총을 간구했다.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쇠약하고 낙심에 빠질 때 훌륭한 간구를 드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 아버지의 채찍으로 인해 생긴 상처를 그분께 보여드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아마도 그분은 부성애적 긍휼을 통해 징계의 손을 거두어 들이고 우리를 품에 안아 위로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징벌을 통해 목표로 삼으시는 것은, 우리를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불태우는 것이다.
11절.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하나님은 회초리를 가볍게 사용하지 않으신다. 그분이 그것을 사용하시는 것은 죄 때문이며, 우리를 죄로부터 건져내기 위함이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가 그 매질을 느끼기를 바라신다.
"그 영화를 좀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좀이 피륙을 부식시켜 그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며 낡고 무가치하게 만들듯이, 하나님의 징책은 우리로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약함과 허망함을 발견하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무가치하고 쓸모없을 정도로 낡아빠진 옷처럼 여기게 만든다. 좀이나 책망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움이 손상될 수 있을 때, 그 아름다움이란 가련할 따름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진노하실 때, 우리의 모든 소원과 기쁨은 좀먹어 부식된 폐물로 변하고 만다.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뿐이니이다." 트랩의 재치 있는 표현처럼, 인생이란 "허무를 그린 기이한 그림"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입김만큼이나 비실체적이며,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
"셀라." 길에 놓인 아마사의 죽은 시신이 요압 군대를 멈추어 서게 한 것처럼(삼하 20:12), 이 시편의 내용 전개상 우리가 여기서 잠시 멈추는 것은 자연스럽다.
12절.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주의 회초리 소리로 인하여 제 간구가 들리지 않게 하지 마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내 죄악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으니, 이제 비탄조의 제 기도를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간구가 더욱 열렬해진다. 부르짖음은 단순한 기도보다 더 열렬하고 격정적이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다.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이것은 매우 끈질긴 간구이다. 누가 눈물을 억제할 수 있겠는가? 눈물이란 억누를 수 없는 연약함의 표현이다. 여자들이나 아이들 혹은 거지들은 눈물을 마지막 호소 수단으로 삼아서 그것을 통해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영혼의 폭풍우로 인해 몰려오는 이 눈물의 소나기'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눈물은 일만 마디 말보다 더 감동적이다. 눈물은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 역할을 하며, 그리스도의 눈물과 피에 의지하여 우는 자는 필히 은총을 얻을 것이다. 우리 눈에서 슬픔의 눈물이 흘러내릴 때, 하나님이 조만간 개입하사 우리의 비통함을 기쁨으로 바꾸실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 상관도 하지 않는 것처럼 오래도록 잠잠하실 수도 있지만, 구원의 시각은, 마치 이슬 방울이 많아질 때 아침이 임하는 것처럼 올 것이다.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주께"를 "주와 마찬가지로"라고 번역해도 된다. "여호와여, 주님과 마찬가지로 저는 인자들 가운데 객이 되고 형제들에게서 소외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고, 그것을 존속시키신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마치 외부 침입자처럼 대한다. 주인을 그렇게 대하는 자들은 그 주인의 종들 역시 그렇게 대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는 곧, 객이 관대한 주인에게서 대접을 받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환대를 받는다는 의미와 같다. 이스라엘은 객을 친절하게 대하라는 당부를 들었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가련한 객과 같은 존재인 우리에게 크신 긍휼을 베푸신다.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그들은 이 땅에는 안식이 없음을 알았다. 그들은 방랑자 차림으로 인생 행로를 지났으며, 세상을 살아가기를 마치 여행자가 여인숙을 이용하듯이 했다. 나 역시 그러하다. 우리 선조의 무덤들을 눈으로 보고서도 어찌 우리가 이 땅에서 안식을 꿈꿀 수 있겠는가? 만일 그들이 불사의 존재였다면, 이 묘지터는 그 자손들의 거주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조들이 죽을 운명이었으므로, 그 자손들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모든 혈육들은, 예외 없이, 지나치는 방랑자들이며,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은총을 주지시키기 위해 정처없이 떠도는 우리 인생을 강조한다. 그렇듯 떠도는 존재를 하나님은 세심하게 보살피시는 것이다. 우리가 가련한 방랑자들에게 동정을 표하듯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그러하실 것이다.
13절. "주는 나를 용서하사." 주의 회초리를 거두시고, 주의 노하신 얼굴을 돌리소서. 제게 숨쉴 틈을 주시며, 저를 죽이지 마소서.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이 세상에 관한 한, 죽음은 존재의 끝을 의미한다. 그런 상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우리는 그 상태를 향해 급히 내닫고 있다. 그 짧은 어간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사랑의 광채로 빛나게 되기를 소원하는 바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병약하게 지낸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며, 줄곧 여호와의 징계하에 놓이는 것은 더 안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죄 가운데 죽은 자들에게 가해질 무한한 징벌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저의 고통을 멈추게 하사 휴식과 자양분을 취할 수 있게 하시며, 그리하여 쇠약해진 제 몸을 회복시켜 주소서. 그는 곧 죽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삶이 마감되기 전에 다시 한번 더 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잠깐만이라도 슬픔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것을 간청한다.
주해
머리말. "여두둔으로 한 노래." 여두둔은 므라리 가문에 속한 레위인으로서, 성전 음악의 대가들 중 한 명이었다. 성전 예배에서 여두둔과 그의 동료들이 주관했던 부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악기들'을 맡았다. 이 악기들에는 솔트리(고대와 중세에 사용된 현악기의 일종-역자 주)와 하프 그리고 심벌즈 등이 포함된다. 역대하 35:15에서는, 여두둔이 "왕의 선견자"로 불리운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지시를 다윗에게 알려 주는 역할을 하였음을 시사한다. 이 이름은 시 39편, 62편, 77편 등의 머리말에서 언급된다. 이를 두고, 혹자는 특정한 부류의 작시법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악기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보기도 하나, 근거가 희박하다. -윌리엄 린지 알렉산더(William Lindsay Alexander, Kitto's Cyclopaedia).
시 39편 전체. 시편 전체의 애가들 중 가장 아름다운 노래이다. -하인리히 에발트.
1절. "내가 말하기를." 그는 자기 스스로에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선하거나 지혜로운 사람인지의 여부를 입증해 주는 것이 바로 자신과의 대화이다. 그것은 이성을 지닌 피조물의 가장 탁월하고 독특한 역량들 중 하나이며, 음성으로 발하는 말보다 훨씬 의미심장한 것이다. 왜냐하면, 새들도 목소리를 흉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나 다른 짐승이 이처럼 독백하거나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법은 없다.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야만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자신과의 대화는 그 자체가 탁월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활용하여 유익을 얻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아를 잃거나 실성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광증 혹은 정신착란이다. 자기 스스로에게 말할 때에는 자신의 마음을 잘 정돈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자신과 대화하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더 올바른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을 자기 마음속에 모시고 그분과 동행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감미로운 일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대개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잡담하느라고 자신의 시간을 헛되이 허비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헛된 생각을 자기 마음속에 무더기로 쌓게 된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들 중 하나이다. -로버트 레이턴.
1절. 지혜롭게 그리고 신중하게 혀를 다스리라는 이 교훈만큼 실천에 옮기기 힘든 것도 없다. 다윗은 각별히 이 점에 유의할 것을 약속했다:"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소크라테스는 팜보(Pambo)라는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그는 다윗의 시편을 배우려는 바람으로 자기 친구를 찾아가 이 구절을 읊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만일 자네가 이 한 구절을 잘 깨닫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 후에 그는 무려 19년 동안이나 이 구절만을 열심히 연구했다. -사무엘 페이지.
1절.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인간의 입은 비록 자그마한 것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담을 수 있다. 왜냐하면 율법이나 복음에서 금하는 죄들이란 한결같이 마음속의 생각이나 삶의 행실로는 물론이고 혀로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혀를 제어하기란 세상을 다스리는 일만큼 어렵지 않은가? -에드워드 레이너(Edward Reyner).
1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무례하기 짝이 없는 수다들을 듣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분통 터지는 일이며, 그것을 분간하여 멀리하는 것이 유익하다. 사람들이 허황된 말을 그토록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그들이 그런 말을 더 많이 하면 할수록, 그들은 자신의 기력을 더 많이 허비하고, 다른 사람들을 그만큼 더 견디기 힘들게 만들며, 또한 자신에게 임할 징벌에 대해 더 부주의해지는 셈이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쓸데없는 모든 말들에 대해 변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어리석은 말을 하면서도 느긋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나는 침묵하거나 아니면 덕을 세울 수 있는 말을 하기를 원한다. 식탁에서나 모임 때에 내가 다른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는 없지만, 나 자신의 귀를 닫을 수는 있으며, 하나님과의 신령한 영혼의 대화를 통해 무익한 이야기를 멀리할 수 있다. 비록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고 해도, 그들이 내 묵상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듯이 나 역시 그들의 허탄한 이야기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윌리엄 스트러더.
2절. "내가 잠잠하여." 얼마 동안 자신이 결심한 바대로 실행에 옮겼다는 뜻이다. 그는 오랫동안 너무도 철저히 침묵한 나머지, 어떤 면에서 마치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벙어리인 듯했다.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충분히 해도 좋으며 또한 합법적인 말을 하는 것조차 금하였다는 것이다. 자신을 변호하는 주장을 하거나, 자신의 불만을 하나님께 토로하거나, 혹은 그분의 손으로 공의가 집행되기를 바라는 등의 말도 아예 하지 않았다. 즉, 점차 악한 말을 발하게 되지 않도록, 오직 선한 말만을 하려고 하는 중에라도 갑작스럽게 그의 입에서 터무니없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또는 그의 대적들이 그의 말을 모조리 곡해하지 않도록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아서 잭슨.
2절. "내가 잠잠하여." 우리는 시편 기자가 어떤 종류의 침묵 혹은 잠잠함으로 일관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 침묵은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고통당하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어울릴 것이며, 이 교훈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시사한다. 이를 고찰함에 있어,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하기로 하자. (1) 소극적으로는 실수를 막기 위함이다. 그리고 (2) 적극적으로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먼저, 소극적 측면에서는 다음과 같다. ① 이 침묵은, 기도와 탄원으로 하나님께 고할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 처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가 그처럼 말도 못할 정도였던 것은 아니며, 기도하고 부르짖을 수는 있었다(8, 10, 11절). ② 그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거나 슬퍼할 수 없을 정도로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③ 그것은 어리석고 무감각한 침묵이 아니었다. 그는 어찌할 수 없는 상태 혹은 곤경에 처하여 자포자기하는 상태에 처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역경을 헤쳐나가기 위해 결심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 그분의 손길을 감지하고 비탄을 토로하였다. ④ 그는 자신에게 임한 징벌 가운데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답하지도 않을 정도로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⑤ 더욱이 그는, 아모스 6:10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침묵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재난에 직면하여, 예전에 기렸던 여호와의 이름을 이제는 더 이상 일컫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둘째로, 적극적인 측면에서는 다음과 같다. ①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불평하거나 그것에 대항하지 않기 위해 혹은 그분에 대해 완악한 생각을 품지 않기 위해 침묵했다. 그는 하나님께 불평했지만 감히 그분을 대적하지는 않았다. ② 그는 말다툼하지 않았으며 감히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또한 그는 온갖 시련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길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③ 그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기 위해, 혹은 마치 자신이 의로운 길을 가며 부당한 시련을 받고 있기라도 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지 않기 위해 침묵했다. ④ 그는 징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침묵했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시 85:8). 그분의 음성에만 전적으로 귀를 기울일 때에는 다른 말은 전혀 귀에 들리지 않는다. ⑤ 끝으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섭리에 묵묵히 순종하며 그 섭리에 만족한다는 의미에서 침묵했다. 그것은 좋은 일일 뿐만 아니라 최선의 일이다. -토머스 버로즈(Thomas Burroughs, B.D.)의 장례식 설교(A Soveraign Remedy for all kinds of Grief, 1657).
2절. "내가 잠잠하여." 그리스도께서 어떤 그리스도인에게 무슨 수확을 거두었느냐고 하셨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주님의 책망을 받고서도 동요되지 않는 것이 수확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책망을 당할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침묵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말씀하신다. 또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말씀하시면,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위해 변호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 다윗은 이르기를, "내가 잠잠한 까닭은 당신이 그 일을 행하신 까닭이니이다"라고 했던 셈이다. -크리스토퍼 서턴(Christopher Sutton, B.D., 1629).
2-9절. 어떤 환자가 알약을 먹으라는 지시를 받고서 그것을 단번에 삼키는 대신 자기 입 속에서 굴리고 이로 부수어 그 쓴맛을 모조리 맛본다면, 그는 매우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비방자와 대적의 모욕이나 비난은 더욱 쓰디쓴 것이며, 그것들을 씹지 않고 삼키는 기술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그것들은 여러 모로 유익하다. 그것들은 그에게 자신의 죄를 상기시키며, 그의 온유함과 인내를 시험하고, 무엇을 경계할 필요가 있는지를 그에게 보여 주며, 그리고 마침내 그들을 주님 보시기에 영예로운 존재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사실 그가 인내한 것도 바로 그분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것들은 물론이고 중상이라는 알약과 관련하여 생각하건대, 그것을 입에 넣고서 계속 굴리거나 혹은 육신과 세상의 견해에 따라 그것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그 쓴 맛이 입 안 가득히 더해질 뿐이며, 마음속에 원한만 쌓일 뿐이다. 참된 방법은 그것을 '삼켜서 침묵하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슬픔을 안으로 삼키고서, "주께서 그렇게 하셨으므로 저는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쓰디쓴 중상에 대한 최선의 방비책은, 성경에서 제시하는 감미로운 약속과 위안들이다. 마태복음 5:11, 12 말씀이 특히 그러하다:"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오, 나의 하나님! 비방의 알약을 삼키며, 나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또한 앙심을 품고 나를 이용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란 그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하지만 여호와여, 주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되어지기를 원하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의 은총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저로서는 전혀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 스크리버.
3절.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천연 자석이 보존상의 소홀이나 어떤 사고에 의해 자력을 잃을 경우에, 그것을 일정 시간 동안 강철로 감싸 두면 다시 자력을 회복한다. 그리스도인의 영혼이 어떤 잘못으로 인해 천상의 열기와 생기를 잃을 경우에, 그것들을 회복하는 방법은 그 영혼으로 하여금 참으로 따뜻하고 생기를 북돋우는 묵상 가운데 푹 젖어들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편 기자 다윗의 성결한 영혼이 묵상 가운데 뜨겁게 불타오르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묵상이 그를 뜨겁게 하되, 실로 그 심령을 뜨겁게 달구었다. 시편 내용을 살펴보면, 흔히 서두에서는 낙심하고 의기소침한 상태에 처한 그의 심령이 언급되지만, 이러한 묵상이 고조될 때 그의 영혼은 점차 뜨거워지고 마침내 천상의 열기라고 하는 절정의 높이로까지 날아오르게 된다. 진지하게 묵상하는 자들은 이처럼 행복하고 천상적인 열기를 종종 체험한다. 만일 모든 성도들의 심령을 영광스럽게 소생시켜 주는 것들을 한군데로 모은다면, 그것들은 심령을 따뜻하게 해줄 묵상의 효력을 발휘케 하는 참으로 진귀한 진주 다발이 될 것이다. -나다나엘 래뉴(Nathanael Ranew).
3절. "묵상할 때에." 기도는 그 얼마나 복된 특권(혹은 의무)인가! 묵상은 기도를 도와준다. 게르손(Gerson)은 그것을 가리켜 기도의 보모라고 부른다. 묵상은 등잔의 기름과 같다. 기도라는 등잔은 묵상의 뒷받침이 없는 한 이내 꺼져버릴 것이다. 묵상과 기도는 두 마리 거북과 같아서, 한 마리를 따로 분리시키면 다른 한 마리는 죽고 만다. 재치 있는 낚시꾼은 물고기가 가장 잘 무는 때를 기다렸다가 낚싯대를 던진다. 은총의 물고기를 잡기 위해 기도의 낚싯대를 던질 수 있는 최적기는, 우리의 심령이 묵상을 통해 따뜻해질 때이다. 이삭이 들판에서 묵상한 후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기도하기에 가장 좋은 상태였다. 권총을 발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는 그 총에 화약이 가득할 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선한 생각들로 가득할 때가 기도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이다. 그럴 때 그는 모든 한숨과 신음을 하늘을 향해 발한다. 묵상은 이중의 유익을 지니고 있다. 먼저 그것은 선한 생각들을 마음속에 주입하며, 그러고 나서 그 생각들을 기도로 표출시킨다. 묵상은 먼저 기도할 사항을 제시하며 그러고 나서 기도할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다윗은 "묵상할 때에······"라고 말한 다음에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알게 하사"라고 기도한다. 그는 주의 손으로 행하신 일을 묵상하며, 그의 손을 주께로 뻗었다. 머리를 통한 묵상이 기도의 손을 뻗게 만들었다. 그리스도는 겟세마네 동산에 계실 때 기도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은 묵상이라는 산 위에 있을 때 기도하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기도는 묵상의 자녀다. 묵상이 선두에서 이끌고, 기도는 뒤에서 밀어 준다. -토머스 왓슨.
3절. "묵상할." 묵상과 기도는 마치 광석과 그 속에 든 금덩어리와 같아서, 묵상이 녹으면 이내 거룩한 소원이 되어 흘러내린다. 짙게 드리워진 구름은 이내 빗물이 되어 떨어지며, 마른 나뭇가지에 불이 붙으면 그것은 이내 타 없어진다. 묵상은 기도하게 하는 힘이다. 악인들 가운데 처한 영혼은 묵상을 통해 기도를 발하게 된다. -윌리엄 거놀.
3절. "뜨거워서." 내 생각이 나의 열정에 불을 지폈다. -매튜 풀(Matthew Poole).
3절. "뜨거워서." 당신의 마음이 뜨거워질 때까지 묵상하라. 어떤 사람이 추위에 떨고 있다면, 그는 자신의 일을 하기에 적절해질 때까지 충분히 몸을 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이여, 당신의 심령이 싸늘하다면, 뜨거운 여름날과 같지 않고 싸늘하게 얼어붙으려 한다면, 당신의 감정이 따뜻해지기까지 묵상의 불 곁에 서 있으라. 그리하면 당신은 영적인 일을 하기에 적절한 상태가 될 것이다. 다윗은 심령이 내적으로 뜨겁게 녹을 때까지 묵상했다. 여기서 우리는 베르나르의 다음과 같은 탁월한 언급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호와여, 주의 뜻이 아니라면 제가 결코 주를 떠나지 않겠나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말을 자신의 결단으로 삼아야 하며, 자신의 심령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전에는 결코 그분에 관한 묵상을 그만두지 말아야 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아 5:4). -토머스 왓슨.
3절. 그의 동료는 악했지만 그의 생각은 선했다. '자기 앞에 악인이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뜨거웠고, 그가 묵상할 때에 마음속에 뜨거운 불길이 일어났다.' 그의 생각은 거룩한 열심으로써 자신의 감정에다 불을 지폈으며, 이 거룩한 불은 주위의 저주받은, 냉혹함이라는 찬서리를 뜨겁게 만들었다. 주의깊은 치안 판사들이나 관리들이 밤중에 피의자의 집으로 들이닥칠 때, 가장 우선적으로 묻는 말은 "여기 같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의 어두운 심령 속에 들이닥치실 때에도 그분은 다음과 같이 물으신다:"여기에 무슨 생각을 담고 있느냐? 네가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 "네가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고 있지 않느냐?"(눅 24:38; 약 2:4). -신실한 티트(Teat).
3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오래 존속되어 온 침묵이 여호와 앞에서 처음 터트려지는 상황은 참으로 행복해 보이는 광경이다. -존 모리슨.
4절.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알게 하사." 과연 다윗이 자신의 종말을 몰랐을까? 아니다. 그는 알고 있었지만, 알기를 바란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 해도 그것을 알려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는 막연하고도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바를 영적으로, 그리고 풍성하게 알 수 있으며, 우리의 적은 지식이 더 증가하고 많아질 수 있다······우리는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인생의 막바지가 그리 멀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완악한 심령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도 좀처럼 교훈을 얻지 못한다. -로버트 레이턴.
4절.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알게 하사." 다윗은 자신의 죽음보다는 자신의 "종말"을 알고자 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소원을 완성시켜 주는 종말이다. 마치 생명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종말이 그러하였듯이. 또한 다윗은 헛된 과학의 측면에서 자신의 종말을 알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내에 대한 상급을 얻으리라는 경험에 입각한 바람에서 그것을 알고자 했다. 비록 우리에게 가해지는 징벌이 예리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짧을 것이며 그 속에는 단맛이 들어 있다. 우리는 평안히 누울 것이며, 숙면 가운데 안식을 취할 것이다(욥 3:13, 17, 18, 19). 비록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날들이 짧고 악하다 할지라도, 인내하며 하나님께 의탁한다면 충분히 길고 선한 날들을 누리게 될 것이다. -에드먼드 레이필드.
4절.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알게 하사." 당신은 기뻐서 죽을 수도 있고 슬퍼서 죽을 수도 있음을, 그리고 당신의 생명이란 너무도 가느다란 줄에 매달려 있는 형국이어서 공중의 작은 각다귀에 의해서도 질식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느 로마 교황이 그러했듯이. 우유 속에 든 가는 머리카락 한 올이 당신의 숨통을 막을 수도 있다. 로마의 어느 참사관의 경우가 그러했듯이. 건포도 한 알로도 당신의 숨을 끊을 수 있다. 아나크레온(Anacreon)의 경우가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맞게 된 조악한 날을 스스로 멀리하지 말라. "너는······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 12:1). 항상 동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되, 해가 지는 방향인 서쪽을 향해서도 때때로 눈을 돌리라. 항상 뱃머리에만 앉지 말고, 때때로 고물로 가기도 하라. 망대 위에 서서 구원의 시각을 기다리며, 무시무시한 왕이 그 큰 권세로 당신을 치러 오기 전에 군대를 예비하라. 죽기 전에 가족들에게 지시를 내리라. 즉, 당신의 몸과 영혼 및 그것들 모두를 위해 사용된 도구들을 정리하라. 죽음이 당신 집 문턱에 들어설 때, 당신의 눈으로 하여금 쾌락을 좇게 하지 말며, 당신의 귀로 하여금 소문을 듣고서 가려워지게 하지 말며, 또한 당신의 마음으로 하여금 들판을 배회하게 하지 말라. 당신의 몸은 청동이 아니며, 당신의 기력은 바위의 기력이 아니고, 당신의 생명은 유산으로 물려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당신의 호흡은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굴뚝의 수증기나 연기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왔다가 이내 떠나갈 뿐 마지막 구속의 날까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객에 지나지 않는다. -존 킹.
4절.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알게 하사." 사무엘상 10:2에 주목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 그리고 백성이 사울을 지지했을 때, 사무엘은 그 기름부음을 확증하기 위해 사울에게 어떤 징후를 경험하게 했는가? 사무엘은 사울을 라헬의 묘실로 가게 했다. 그 이유인즉, 사울은 단지 자신이 발탁을 받아 영예롭게 된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들은 자신의 취임식과 대관식 때, 석공을 불러 몇 가지 대리석들을 보이게 하고는 그들의 묘석으로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게 했다. 이와 유사하게, 아리마대 요셉은 정원에 자신의 묘터를 갖고 있었고 그곳이 적절한지를 점검했다. -크리스토퍼 러브.
4절.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1636년에, 월솔(Walsoll)과 이레치(Iretsy) 사이에 위치한 체셔(Cheshire)에서는 두터운 참나무 틀 속에 벽돌을 채워 만든 집이 한 채 세워졌다. 그 술집의 창문 너머에는 아직도 판독 가능한 다음과 같은 라틴어 비문이 참나무에 새겨져 있다:"만일 그대의 생명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면 그대는 울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자신의 생명이 단 하루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지 못한 채 웃을 수도 있다." 이 잠잠한 경고판에 적힌 진실된 설교를 눈으로 보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킬 정도로 만취한 채 반역을 일삼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슬픈 일인가! 우리 주위에서도 이런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어느 월간지에 인용된 내용.
5절. "나의 날." 인간의 생애가 "날"로 지칭되고 있다. 이는, 얼마나 오래도록 살게 되어 있는지를 문의하는 우리의 호기심을 억제하고자 하는 뜻에서, 그것이 달이나 해의 단위로서가 아니라 날, 시간, 분, 순간 등의 단위로서 우리에게 제시된 까닭이다. 그래서 인생의 짧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삶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한다. 또한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것을 활용하며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매일 준비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한다. -에드먼드 레이필드.
5절.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손 넓이는 가장 짧은 길이 단위들 중 하나이다. 우리는 자신의 생애를 재기 위해 기다란 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각자가 손이라는 자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가장 길고 온전한 측정 기구이다. 그것이 뼘만큼 되지는 않는다. 뼘이라는 단위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나, 여기서는 손 넓이로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 길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이들은 손가락 넓이 정도의 삶에 국한되며, 산모의 자궁으로부터 곧바로 무덤으로 향하는 자들도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유아기에 삶을 마감하는 자들도 너무나 많다. -로버트 레이턴.
5절.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우리의 생애라고 하는 줄은 조잡한 실과 근사한 실로 섞인 채 짜여져 있다. (1) 우리의 생애 그 자체는 너무도 허약하므로, "손 넓이만큼" 될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둘째로, 영원과 비교하자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손 넓이만큼," 이것이 전부인가? 시편 기자는 이르기를, 이 단위로도 자신의 일생을 모두 잴 수 있다고 말한다. 손 넓이는 가장 짧은 길이 단위들 중 하나이다. 길이 단위로서는 엘(옛날의 척도, 영국에서는 45인치-역자 주), 규빗, 뼘, 그리고 손 넓이 등이 있으며, 손 넓이에도 더 긴 것과 짧은 것의 두 종류가 있다. 보다 긴 손 넓이는, 손을 펼쳤을 때 엄지 끝과 새끼 손가락 사이의 길이 전체를 가리킨다. 이는 뼘이라고도 불리우며 12인치(약 30cm-역자 주) 정도에 해당한다. 짧은 손 넓이는-이것이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손 넓이이다-네 손가락을 붙였을 때의 그 넓이를 가리키며, 이는 원문상의 의미나 시편 기자의 의도와 일치하고, 탁월한 주해가들도 만장일치로 동의하는 바이다. -에드먼드 레이필드.
5절.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1) 다윗은, "나의 일생이 므두셀라의 그것과 비교할 때 너무도 짧다"라는 식으로 말했을 수도 있다. 므두셀라는 969년을 살았다고 한다. 다윗의 일생은, 그의 통치 기간을 모두 합쳐도, 70년 남짓에 불과했다. 따라서 900년 넘게 살았던 므두셀라에 비해 그의 일생은 수십 년에 지나지 않았다. (2) 다윗은, "나의 일생이 세상의 역사에 비하면 너무도 짧다"고 말했을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은 이 대우주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1)고 말했다. 하지만 소우주인 인간의 일생은 더 빨리 지나간다. (3) 다윗은, "이 세상에서의 나의 일생은 다른 세상의 영속성에 비하면 나을 것이 거의 없다"고 말했을 수도 있다. (4) 끝으로 다윗은, "이 세상과 더불어 시작하여 다가올 세상에서까지 존재할 천사들 앞에서 나의 일생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편 기자가 여기서 하나님과 비교하는 내용에 비한다면, 이 모든 비교 대상들은 너무나 짧을 뿐이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다. -나다나엘 하디.
5절. "없는 것 같사오니." 만일 인간이 그토록 거대한 세상과 비교할 때 그토록 자그마한 피조물이라면, 그리고 여호와께 비하면 세상 그 자체도 너무나 작은 것에 불과하여 그것을 그분의 손가락 끝에 올려도 느낌이 없을 정도라면, 여호와 앞에 선 인간을 가리켜 '없는 것 같다'고 해도 당연할 것이다. 중심을 살피시는 분의 눈으로 보시자면, 인간의 일생이라는 배에 실리는 것은 진실과 실체라기보다는 허망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 일만 명의 일생이 하나님께는 한 해도 되지 않으며, 우리의 천 년도 그분 보시기에는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이다(시 90:4). 천 년과 영원을 비교하자면, 빗방울들과 바다에 혹은 조약돌 하나와 무수한 모래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에드먼드 레이필드.
5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바이스너(Victorinus Bythner)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가장 좋은 상태에 놓인 사람이라도 세상에서 가장 헛된 존재일 뿐이며 허무 그 자체에 불과하다. -프란시스 피에레퐁(Francis Pierrepont)의 장례식에서 행한 윌리엄 레이놀드(William Reynold)의 설교, 1657.
5절. "서 있는 모든 아담은 다 아벨이다." 히브리어 원문을 참조하라.
5절. "셀라." 이것은 짧은 한마디지만, 설명하기가 매우 힘들다. 세속적인 역자들은 이를 불필요한 말로 여겨 제외시킨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요한계시록 22:19에 나오는 저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고대의 주해가들은 이 말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쏟지 않았으며, 우리 역본들도 이를 해석하지 않은 채 그대로 옮겼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는 말씀과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는 충분한 경고가 주어진 셈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기록을 명하사 우리에게 제시하신 내용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성령께 그 해석을 문의할 용기를 갖게 된다. 내가 보기에 이 용어는 마치 고대의 유품과 같은 것이다.
"셀라"는 성경에서 일흔 네 번 언급되며, 그 중 일흔 한 번은 시편에서 그리고 세 번은 하박국의 시가적인 내용에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네 곳을 제외하고는, 어느 시편 전체나 한 구절의 끝에 위치한다. 예외적인 네 곳에서는, 마치 태양이 행성들의 중심에 위치하듯이, 그것이 전후 구절을 연결해 주며, 또한 전후 구절들 모두의 의미를 한층 강화해 준다. 고대에는 그것이 삼중의 용도로 쓰였다. 첫번째는 음악과 관련된 것이며, 두번째는 어떤 중요한 사항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여호와의 성전에 모인 사람들이나 회중과 관련된 것이다. 이 세 가지 중 두번째와 세번째 용도는,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진 유대인들과는 달리)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적용될 수 있지만, 첫번째 용도는 우리가 적절히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1) 음악과 관련된 용도. 왕의 찬양대(대상 25:1-6; 시 62편; 대상 16:41)는 "셀라"를 통해 다섯 가지 사항을 배웠다.
① 그들은 "셀라"에 이르면 잠시 멈추거나 지체했으며, 이어질 내용을 잠시 묵상했다.
② 그들은, 이처럼 중지하거나 짬을 둔다는 것은 다윗 왕이 백성들에게 예언하며 요란한 심벌즈 소리에 맞추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가운데 즉각적으로 영감을 받아 몇 가지 새로운 교훈을 깨닫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따라서 심각한 토론을 벌이는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외치는 소리(이를테면 듣거라! 보라! 따위)를 듣고서 침묵을 하고 귀를 기울이듯이, 다윗의 심령은 하나님의 영의 음성에 압도당했고, 음악이 중단되었으며, 그래서 그는 마치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라고 말하듯이 자세를 가다듬었다.
③ 그것은 곡조나 박자 혹은 느낌 등과 관련된 음악상의 변화를 가리키거나, 아니면 리듬상의 이탈이나 한 종류의 음악이 중단된 것을 가리켰다-비록 성 제롬은 이런 해석에 의심을 표했지만. 칠십인역은 히브리어 본문의 "셀라"를 대개 "곡의 변화"라고 번역했다.
④ 그들은 "셀라"가 덧붙여진 구절을 반복해서 노래해야 했다. 끝으로, 그것은 더욱 큰 음성과 요란한 심벌즈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지시였다. "셀라"는 더 요란한 곡조와 쩌렁쩌렁한 음성을 요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유대교식 화음과 감미로운 가락이 그 영광스러운 성전의 파괴와 더불어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 갔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가락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것에 대한 우리의 주해가 애매모호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2) "셀라"는 다섯 가지 측면에서, 성경 본문 자체와 혹은 그 본문이 다루는 중요한 사항과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① 혹자는 이를 단지 어떤 말을 강조하기 위한 장식음으로 여기거나, 조화를 완성시키기 위해 그리고 어떤 구절을 절름발이 같은 상태로 두지 않기 위해 사용하는, 별 의미 없는 말로 여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그 근거가 희박하며 사실과 거리가 멀다.
② 그것은 어떤 말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특정 구절이나 그 구절이 다루는 중요한 사항 혹은 어느 시편 전체 등이 끝났음을 가리킨다. 이 경우에 그것은 항상 해당 시편이나 구절의 말미에 언급되지만, 시편 55:19, 57:3; 하박국 3:3, 9 등의 네 곳에서는 예외이다. 우리가 어느 책이나 노래 혹은 시의 끝 부분에 "끝"이라고 적듯이, 유대인들은 찬송가나 저작의 끝 부분에 "셀라", "살로메" 혹은 "아멘" 등의 맺음말을 적어 넣었다. 또한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아벤 에스라(Aben-Ezra)의 견해에 따라, "셀라"를 "아멘"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며, 비문이나 기도문의 말미에서 그것을 두세 차례 골고루 사용한다. "아멘, 셀라, 아멘, 셀라"와 같은 식으로. 특정한 시편들이 "셀라"로 끝나며(시 3:8), 5부로 구분되는 시편들 중 5부를 제외하고는 각 부들이 "아멘"('그렇게 되어지기를 기원한다'는 뜻)으로 마감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1부의 끝 부분인 시편 41:13과 2부의 끝 부분인 시편 72:19, 3부의 끝 부분인 시편 89:52, 그리고 4부의 결론 부분인 시편 106:48 등에서 "아멘"이 사용되고 있다.
③ "셀라"는 어떤 진리나 의미를 강조하여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그것은 참으로 놀랍다!" 혹은 "그것은 참으로 탁월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때로는 분노에 사로잡혀 "끔찍스럽다", "참을 수 없다" 혹은 "무시무시하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산에서부터 오시도다(셀라)"(합 3:3)라는 말씀에서, "셀라"는 하나님이 크신 위엄과 탁월하심 그리고 광대한 주권을 지니고 오심을 시사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시 3:2)에서의 "셀라"는, 마치 "오, 끔찍스러운 신성모독이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은총에서 끊어짐이 마땅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그분을 의지하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는 전능자이시지만 그분의 은총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그 은총이 제약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미도 이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④ "셀라"는 해당 시편이나 구절 속에서 계시된 진리의 영원성을 확언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그 진리는 당시의 교회에게 처음으로 제시되기 시작한 단계였거나 혹은 예전보다 그 당시에 더 온전히 제시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진리를 접하게 된 사람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속될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시 편 3:8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이는 "하나님이 항상 구원을 베풀어오셨으며 또한 영원토록 당신의 백성을 축복하시리라는 것은 논쟁의 여지 없이 진실된 사실이다"라는 말과 같다. 여호와의 은총이 영원토록 존속되리라는 이 교훈은 영원한 것이다(시 136편).
⑤ "셀라"는 그것이 딸린 주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묵상할 것을 지시한다. 즉, 그 주제들 속에는 깊이 고찰하고 묵상하며 또한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항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관련된 다음 구절을 예로 들어 보자:"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시 24:10). 그런가 하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시 46:7)는 은총의 신비를 시사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인간의 의무(시 4:4, 32:5)나 인간의 연약성(시 9:20, 32:4)과 관련된 내용도 있다. 다이아몬드가 다른 보석들보다 더 값지며 태양이 다른 행성들보다 더 큰 광채를 발하듯이, 이와 같은 구절들은 성경의 다른 부분들보다 더 밝은 빛을 비추어 준다. 비록 처음에 얼핏 보기에는 항상 그런 것 같지 않고 또한 (만일 이렇게 비교하는 것이 적절하다면) "셀라"가 붙어 있지 않은 다른 성경 본문들이 더 탁월한 경우도 있지만, 만일 그것이 딸린 문장이 사용된 경우와 범위 및 그 특성 등을 깊이 고려해 본다면, 우리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내용이라도 참으로 소중한 지침과 유익을 얻기 위해 깊이 묵상할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보다 흔쾌히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시편 9:16을 예로 들어 보자:"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힉가욘, 셀라)." 이 구절의 끝에 딸린 "힉가욘, 셀라"는 '묵상, 셀라'라는 뜻으로서, 영원히 묵상하고 숙고할 가치가 있는 사항이 여기에 있다는 말이다. 의인은, 악인이 자신의 꾀로 인해 멸망당하며 자신의 그물에 스스로가 걸려든다는 점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비록 악인들이 인내 가운데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엄중한 심판을 가하시리라는 점은, 모든 신앙인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길 만한 가치가 있는 사실이다.
(3) 결론적으로, "셀라"가 회중에게 어떤 지침을 제공하였는지를 여섯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① 그것은 언급된 사항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라는 표시이다(시 3:2-8). 이 경우에, 회중은 "셀라"가 나오는 부분에 이르기만 하면 하늘로부터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음성을 듣는 듯이 생각해야 했다.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지어다"(시 49:1, 2). 다시 말하자면 이는, 그들이 노래하는 음성을 드높이고 자신의 마음과 열정을 더욱 고무시킴으로써 그 음성과 마음으로 하여금 함께 조화를 이루어 여호와의 귀를 즐겁게 해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② 그것은 확언의 표시였다. 이를 통해, 회중은 제시받은 진리에 동의한다는 뜻을 분명히 표명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정할 때, "옳다, 당신 말이 맞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그들의 입으로 말하는 "셀라"는, 진실되고 확실하며 좋다는 뜻을 나타낸다. 시편 3:4을 예로 들어 보자:"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여호와께서 우리 마음의 비밀을 알고 계시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이시며 또한 모든 사람들 각자에게 그 육신으로 선악간에 행한 바대로 갚으시고 우리에게 가장 공의로운 판결을 내리시리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시편 52:3을 보자:"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말하자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악한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은,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돕기는커녕 해치고 그 백성에게 돌리기에 합당한 명성을 지지하기는커녕 훼손시키려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시인하는 분명한 사실이요 우리 자신의 경험과 슬픔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③ 그것은, 언급되거나 약속된 바가 성취되기를 바라는 가운데, 마음과 영혼을 모아 하나님께 발하는 간절한 탄성이다. 하박국 3:13을 예로 들어 보자:"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셀라)." 이는 마치 그가, "여호와여, 주께 간구하오니 주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항상 임하소서"라고 말한 것과 같다. 또한 시편 55:17-19을 보자:"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셀라)." 이는 곧, "오 여호와여,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나의 겸비한 청원에 귀를 기울이시고, 저를 대적하여 높아진 자들을 대항하여 높이 일어나소서"라는 말이다.
④ 그것은 특이한 결과를 야기시키는 하나님의 사역이나 인간의 사악함과 관련된 감탄을 나타낸다. 시편 57:3을 보자:"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셀라)." 이는 곧, "오, 때때로 하늘로부터 천사를 보내시며 항상 은총과 진리를 베푸사, 당황해 하는 당신의 가련한 종들을 강한 자들에게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 얼마나 놀랍고도 고귀한가!" 하는 감탄이다. 또한 시편 54:3에는, "외인이 일어나 나를 치며 강포한 자가 내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셀라)"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의미인즉 이러하다:"오, 성도의 생명을 추적하며 생명의 하나님을 기억조차 하지 않고 뒤로 밀쳐버리려 하는 행동은 그 얼마나 잔혹하며 불경스러운 것인가!"
⑤ 그것은, 하나님의 측량할 길 없는 위엄과 너무도 연약하고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직시함으로 말미암는 겸비함과 놀라움을 표현한 말이다. 시편 66:7을 예로 들어 보자:"저가 그 능으로 영원히 치리하시며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시나니 거역하는 자는 자고하지 말지어다(셀라)." 여기서 우리는, 온 세상의 왕 앞에서 취하는 겸비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시편 68:7, 8을 살펴보자:"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에(셀라)", 주의 위엄을 생각하건대 내 마음이 떨리고 안절부절못하나이다. 왜냐하면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편 39:11 내용은 이러하다:"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뿐이니이다(셀라)." 이는 곧, 하나님의 크신 위엄 앞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거만한 사람도 땅에 엎드러져 겸비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⑥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찬미나 송영을 나타내며,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말과 비슷하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할지어다(셀라)"(시 66:4).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셀라)"(시 44:8). "홀로 기사를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시 72:18, 19). -에드먼드 레이필드.
6절.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우리 살아 있는 사람은 단지 형상 혹은 허망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소포클레스(Sophocles).
6절 상반절. 버크(Edmund Burke)는, 브리스톨(영국 남서부의 항구-역자 주)에서의 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경쟁자가 죽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참으로 그림자와 같은 존재들이며 우리가 추구하는 것도 그림자뿐이다." -윌리엄 플러머.
6절. 육욕적인 모든 사람들은 그림자같이 다닌다. 헛된 것을 과시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 얼마나 허망한가! 또한 그들은 "헛된 일에 분요"하며, 그들을 분요케 하는 것은 허망함뿐이다. 그는 부를 얻기 위해 일생토록 수고하지만, 죽음에 이르면 그 부귀가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도 끼치지 못할 것이다. 목초지에서 열심히 풀을 뜯고 있는 황소는 도살의 날을 위해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 -윌리엄 세커.
6절. "재물을 쌓으나." 재물을 더 많이 쌓는 일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병폐이며, 노년인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손이 뻣뻣하여 다른 일을 하기가 힘들어질 때에는, 손을 비비는 일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로버트 레이턴.
6절. "재물을 쌓으나." "쌓으나"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긁어 모으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곡식을 광으로 가져가기 전에 그것을 함께 모으는 농부의 모습을 암시한다. 이것은 인간 삶의 불안함과 인생이 추구하는 것들의 허망함을 암시하는 탁월한 비유인 셈이다. 즉, 어떤 사람이 곡식을 긁어 모으듯이 재물을 쌓는다 해도, 그 재물은 조만간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사무엘 버더.
6절.
내일, 내일, 또 내일이,
마지막 시점에 이르기까지,
이 보잘것없는 삶 가운데로 날마다 기어든다.
그리고 지나간 모든 날들은 어리석은 자들을
먼지 자욱한 죽음에 이르는 길로 안내해 왔다.
덧없는 촛불을 꺼라!
인생이란 단지 그림자와 같고,
무대 위에서 점잔 빼거나 안달하되
이내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가련한 배우와 같다.
또한 인생이란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얼간이가 들려 주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6절. 우리가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나올 때와 죽음으로 향할 때 우리 눈에서 흘리는 눈물은, 인간의 허망함을 증거하는 신실한 증거인 셈이다. 우리가 "내일 봐요" 혹은 "잘 자요"라고 하는 말 속에는 까닭 모를 슬픔이나 신음이 담겨 있다. -에드먼드 레이필드.
7절.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우리의 영혼이 처음에는 땅에 애착을 갖고서,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끌어안으며,
지면 가까이로 날을 뿐,
천상의 날개로 날아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하늘 아래에는 내려앉을 곳이 전혀 없고,
자신의 천상적인 성품과 일치하는 것도 전혀 없다.
쉴 수도 없고 자신의 생각을 진정시킬 수도 없으며,
이 세상에서는 만족스러운 꿀벌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마치 갈대숲 사이로 내려오는 꿀벌이,
화사하고 신선하게 반짝이며 감미로운 듯이 보이는
꽃들 위로 이리저리 내려앉아 보지만,
도무지 즐거움을 얻지 못한 채 날아 올라가 버리듯이.
우리의 영혼이 이 땅에서
참된 위안을 발견하지 못할 때,
그리고 노아의 비둘기처럼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할 때,
애초에 떠나왔던 본향으로 돌아가며,
처음으로 날개를 달아 주셨던 분께로 날아간다.
-존 데이비스.
7절.
내 영혼은 인생이라는 매듭이
자유롭고 느슨하게 풀어지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꼼짝 못하도록 뒤엉킨 물건처럼,
이제 죽을 운명에 단단히 묶여 있다.
나는 단지 그 상태에서 신음할 수밖에 없고,
내 생각과 기쁨은 송두리째 사라졌으며,
다만 지난날을 그리워할 뿐이다.
-조지 허버트.
7절.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우리의 소망이 결코 흔들림 없으신 분께, 그리고 전혀 변함이 없으신 분께 있다는 것은, 또한 그 소망이 우리를 그분께 단단히 묶어 준다는 것은 참으로 감미로운 사실이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 영혼의 온전한 만족이 되신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란 사랑이신 그분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퓨지(E. B. Pusey, D.D., 1853).
8절.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그들의 형통함과 나의 곤경으로 말미암아, 주를 섬기며 의뢰하는 나를 조롱하거나 질책하기 위한 빌미가 그들에게 제공되지 않게 하소서. -매튜 풀.
8절.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한 영혼을 파멸시키려 하는 악인들의 쓰디쓴 비방과 질책으로 인한 고뇌는, 저주받아 잃은 바 된 영혼이 겪을 엄청난 고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한 조각 고기를 위해 그대의 장자권을 팔아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곡식을 위해 황금길과 갖가지 보화들로 장식된 문들로 가득한 성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으며,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진정 우리는 열성을 다하여,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오리겐, 닐이 인용함.
9절.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여기서 다윗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억지로 참은 것이 아니라 영혼의 만족을 느끼는 가운데 인내했다. 그는 자신의 곤경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보았고, 그 사랑은 그의 영혼을 위로했다. -조셉 사이먼즈.
9절.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이처럼 훈련시키신다. 이는 그 자녀들을 다루시는 특성을 잘 보여 준다. 하나님의 성도들에 대한 교육은 그분이 늘 염두에 두고 계시는 목표에 해당한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훈련이며, 영원을 위한 교육이며······사랑의 수련이다. 그 모든 단계는 애정을 통해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진노나 보복 따위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학교에서의 수련은 고되고 엄격할 수 있다. 하지만 가정에서의 훈육은 사랑 위주이다. 우리는 이를 확신한다. 사랑을 통해 얻는 위안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사랑은 우리를 그릇되게 하지 않는다. 필요없는 시련이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이 점을 명심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호된 징벌을 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좀처럼 그분께 완악한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다. 나는, 쓰라린 괴로움 가운데 처한 성도가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로서 리처드 카메론(Richard Cameron)의 부친의 경우보다 더 나은 것은 없으리라고 본다. 그 연로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투옥된 상태였다. 냉혹한 박해자들이 순교한 그 아들의 피범벅이 된 머리를 그에게 들고 와서는 조롱 섞인 목소리로 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난도질당한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이렇게 말했다:"알고 말고. 이건 내 아들의, 사랑하는 내 아들의 머리가 아닌가! 여호와의 뜻은 항상 선하며, 나나 내 아들을 결코 그릇되게 하실 수가 없다.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평생토록 우리와 함께해 오셨다." -호라티우스 보나(Horatius Bonar, The Night of Weeping, 1847).
9절.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당시에 이 거룩한 사람의 몸과 영혼은 멍들고 터진 상태였다. 그는 병들고 서글펐다. 하지만 그는 그 징벌이 누구의 손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기억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저는 주를 사랑하므로, 그것을 기꺼이 감수합니다. 내가 주께 잘못을 범하였으므로, 인내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주는 제게 질병뿐만 아니라 무서운 화염을 보내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주의 징책을 감사하며 받아들입니다." 그는 불만스러운 말로 하나님께 따지려들지 않고 그분의 징벌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윌리엄 거놀.
9절.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동료에게 매를 맞으면 참기가 어렵지만, 왕에 의해 징벌을 당하는 경우에는 그것을 잘 감수할 수 있다. 만일 왕 중 왕께서 우리를 치신다면, 우리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고서 잠잠해야 한다. 다윗의 입에서 안달하는 말이 나오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때문이었다. 그는 곤경의 시기에 침묵할 줄 아는 신중한 사람이었다(암 5:13). -니콜라스 에스트윅(Nicholas Estwick, B.D., 1644).
9절. 퍼킨스(Perkins)는 자신의 책(Salve for a Sick Man)에서, 신실한 여러 성도들의 "마지막 말들"을 소개한다. 그 중 칼빈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러하다:"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내가 비둘기처럼 신음합니다-여호와여, 주께서 저를 갈아 가루로 만드시지만 저는 흡족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손으로 되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9절. 한때 나는 섭리에 대해 의아해 했고 그 섭리를 부당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으며, 그래서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내게서 빼앗아가지 않을 곳에 가서 숨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나의 침침한 눈으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의 기묘한 전개에 관한 한, 나 자신을 가리켜 흑백을 구분할 줄 모르는 소경이라고 선언한다. 설령 (그럴 리는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천국이 있는 곳에 지옥을 세우며 천사들 곁에 마귀들을 불러 올리신다 할지라도, 나는 더 이상 논박하지 않고 그분의 방식에 묵묵히 순종할 마음을 갖고 있다. 내가 알기로, 그분의 판단은 그 무한하신 지혜를 통해 이루어지며, 그분의 길은 우리의 이해력을 넘어서 있다. 나는 알 수가 없지만 알기를 바랄 뿐이며, 나의 생각과 의지와 갈망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두기를 원한다. 어쨌든, 나는 그리스도의 편에 서기만을 바란다. -사무엘 러더퍼드.
9절.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나면서부터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인 자그마한 소녀가 있었다. 그 아이는 이러한 장애자들을 위해 설립된 공공기관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린 시절에 일반적으로 맛보는 즐거움들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던 그 가련한 아이들을 살펴보고자 하는 뜻에서, 어느 날 한 방문객이 찾아왔다. 석판과 분필을 통해 몇 가지 질문과 대답이 신속하게 오고 갔다. 마침내 그 신사는, "너희들은 왜 귀머거리와 벙어리로 태어났니?" 하고 물었다. 한 순간 그 어린 소녀의 감수성 짙은 얼굴에 화난 표정이 일었지만, 그것은 재빨리 사라졌다. 그 아이는 자신의 석판을 들고서,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좋기 때문이죠"라고 썼다. -로저스(Mrs. Rogers, The Shepherd King).
10절.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징책과 나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징책이란 주께서 보내신 곤경으로 인한 것이며, 나의 징책이란 나의 정욕으로 인한 것이다. 주의 징책이라 함은 주께서 그것을 보내셨기 때문이며, 나의 징책이라 함은 내가 그것을 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의 징책이라 함은 그것이 주의 공의로 말미암기 때문이며, 나의 징책이라 함은 그것이 나의 불의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제가 범한 것을 없애시며, 주께서 행하신 것을 제거하소서. 하지만 그 징책이 누구로부터 말미암았든지간에, 여호와께서 그것을 제거하실 것이다. -토머스 애덤즈.
10절. "옮기소서." 그는 먼저 자신의 죄를 제거해 주십사 하고 기도한 후에, 이제 자신의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드린다. 사실 고통 자체보다는 죄가 그를 더욱 괴롭혔다. 그는 평안을 얻기 위해, 상처를 입히실 뿐만 아니라 "치유하기도 하시는 여호와"께 의지한다(호 6:1). -존 트랩.
11절. "그 영화를 좀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좀먹은 물건은 조금 누르거나 살짝 손만 대어도 바스러진다. 마찬가지로, 전능자의 손가락만 닿아도 사람은 쉽게 허물어져 흑암 속으로 내던져진다. -Paxton's Illustrations of Scripture.
11절. "그 영화를 좀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나는 좀먹어 못쓰게 된 물건들을 많이 보았다. 칼자루 뒷부분이 좀먹어서 절반 정도 허물어진 경우도 있고, 좀이 소파 일부를 망가뜨린 경우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하룻밤 만에 옷이 좀먹는 경우도 드문 일이 아니다. 이사야 51:6의 "옷같이 해어지며"는 좀먹은 옷을 염두에 둔 표현일 것이다. 시편 6: 7의 "쇠하여"와 31:9의 "쇠하였나이다" 그리고 39:11의 "소멸하게 하시니" 등도 좀먹은 상태를 의미한다. -존 개즈비.
11절. "좀먹음같이." 동양의 좀벌레는 제법 크고 화려하게 보이지만 그 수명이 짧다. 몇 차례 소나기가 지나가면 이 벌레들이 기승을 부리지만, 건조한 날씨 등 좀벌레의 생존에 불리한 상태가 지속되면, 그것들은 이내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방탕스럽게 배회하는 자의 몸에 걸쳐진 화려한 색상의 옷이 좀먹어 낡아버리듯이 쉽게 소멸되고 만다. -존 키토(John Kitto).
11절. 인간의 몸은 영혼의 "의복"과 같다. 이 의복 속에 죄악의 "좀"이 기생한다. 그것은 점차로 몸의 아름다운 외양과 힘을 상하게 하며, 마침내는 그 조직을 망가뜨린다. 서서히 소리 없이 인체를 파괴시켜 가는 결핵이나 만성적인 다른 질병의 진전 과정을 지켜 본 사람이라면, 이 비유 이외의 다른 사례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각 사람은 허사뿐이니이다"는 말씀에 즉시 공감할 것이다. -조지 혼.
11절. "각 사람은 허사뿐이니이다." 위대한 것이 무엇인가? 과연 우리는 사람이 그 영원성과는 무관하게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혹은, 사람의 행동들이 어떤 원리나 동기들과는 무관하게 위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람의 영원성이나 원리 혹은 동기들을 배제한다면, 귀족의 호화로운 외관도 공작의 깃털보다 낫지 않으며, 알렉산더의 용맹성도 호랑이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에피쿠로스가 추구했던 감각적 쾌락도 숲을 배회하는 짐승들의 그것보다 낫지 않을 것이다. -에벤에셀 포터(Ebenezer Porter, D.D., Lectures on Homiletics, 1834).
12절.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다윗의 이러한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기도를 구성하는 세 가지 특성들을 발견한다.
첫번째는 '겸손'이다. 그는 겸손하게 자신의 죄와 연약성 그리고 자신의 무가치함을 자백한다. 우리는 곤경에 처하여 냉정하고 완고한 심령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면 나약하게 불평과 푸념을 늘어놓지 않는 듯이 보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손을 경멸하는' 다른 죄악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거만한 마음을 낮추고 제어되지 않은 정욕을 없애야 한다.
이러한 기도의 두번째 특성은 '열렬함'과 '끈질김'이다. 이는 일련의 점층법적 표현들을 통해 잘 드러나 있다. 먼저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라고 호소한다. 그러고 나서 이 호소로는 부족하여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고 외친다. 그래도 부족하여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하며 강렬하게 부르짖는다. 이 마지막 단계와 관련하여 다윗은 "내 곡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시 6:8).
세번째 특성은 '믿음'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또한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이 사실을 믿어야 하듯이, 이를 믿는 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그가 즉각적으로 응답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믿는 자는 서두르지 말아야 하며, 인내하는 가운데 여호와를 기다려야 하고, 다른 누구에게도 의지해서는 안 된다. -로버트 레이턴의 글에서 요약함.
12절.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우리는 자신에게 결핍된 은총을 갈망하며, 겸손한 가운데, 애통한 심정으로 눈물의 간구를 드릴 수 있다. -토머스 코벳.
12절.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자신이 아무리 안정된 상태에 처해 있을지라도, 이 땅에서의 성도들이 느끼는 기분은 바로 이러하다. 즉, 객과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객이요 거류자들이지만, 그 점을 가장 잘 분별하고 가장 거리낌 없이 시인하는 자는 성도들이다. 악인들은 자신 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이 땅에서 확고한 거처를 도무지 확보할 수 없다. 그들은 영원토록 거할 수 있기를 내심 바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뜻과는 정반대로 객들이며, 그들의 세상 거처는 불확실하다. 그들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여기 사용된 두 가지 주목할 만한 단어들은 "객"과 "거류자"이다. "객"이란 외국에서 거주하는 자를 가리킨다. 즉, 비록 어느 나라에 정착하여 살고는 있지만 토박이가 아니며 시민권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인이 영국에서 사는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그런가 하면, "거류자"란 정착할 뜻이 없는 상태에서 어느 나라를 지나가고 있을 뿐인 여행자를 가리킨다. 그는 결국 자기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천국이라는 다른 곳의 시민권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는 객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본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그들은 거류자요 순례자다. -토머스 맨턴.
12절. "객." (1) 객이란 자신의 본국과 자기 아버지의 집을 떠나온 사람이다. 우리 역시 그러하다. 우리의 본국은 하늘나라이며, 그곳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2) 외국에 사는 객은 자신이 어디서 출생하고 교육을 받았는지에 따라서는 인정이나 평가를 받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의 성도들은 마치 위장한 왕자와 같은 처지이다. (3) 객은 불편을 겪기 쉽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는 경건한 자들 역시 그러하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르기를, 신앙이란 외국에서 들여온 낯선 식물과 같아서 세상의 토양에는 잘 적응하지 못하며 번성하지도 못한다고 했다. (4) 객은 인내하며, 부당한 대우를 받고서도 곧바로 항변하지 않으며, 또한 나그네의 품삯과 숙식을 제공받는 것으로 만족한다. 현재 우리는 외국에 와 있으며, 따라서 어려움을 각오해야 한다. (5) 객은 본토박이들에게 혐오감과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조심한다. (6) 객은 최소한의 호의에도 감사한다. 우리 역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들로 만족해야 한다. 외국에서는 적은 것도 많아 보인다. (7) 여행 중인 객은 가능한 한 빨리 체류지를 떠나려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천국을 향해 여행 중인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나기를 바란다. (8) 객은 자신이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을 사지 않는다. 그는 나무나 집 혹은 가정에서 쓰는 각종 잡동사니들을 구입하지 않으며, 보석이나 진주 등과 같이 휴대할 수 있는 귀중품들을 산다. 우리는 언약이나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 등과 같이 항상 우리와 함께할 보석들을 구입하는 데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9) 객의 마음은 자신의 본국에 가 있다. 성도들도 그러하다. (10) 객은 길을 잃지 않도록 거듭 물어 보고 확인하며 나아간다. 그리스도인도 그러하다. (11) 객은 상인처럼 귀한 것들을 가득 싣고서 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는가? 우리의 여정을 마치고 천국 본향으로 돌아갈 때 준비를 잘 갖춘 상태가 되도록 하자. -토머스 맨턴의 글에서 요약함.
13절.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타락한 상태의 인간이란 느부갓네살과 같은 모습이다. 그는 짐승의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감각적 본능을 만족시키는 일만 추구한다. 하지만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면 다시 이성을 되찾게 되고, 그리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더 고상한 목적을 바랄 수 있게 된다. 다윗은 과연 현세의 삶을 연장시켜 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세상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다른 세상을 위해 스스로를 더욱 잘 준비시키기 위해서였다. 과연 그는 이 세상에 더 오래 머물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그의 거룩한 심령 속에 이러한 기쁨의 불을 지핀 것은 이 세상의 육욕적 쾌락이 아니라, 산 자의 땅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한 준비를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윗은, 10절과 11절에서 언급되어 있는 바와 같이 자신을 철저히 낮아지게 했던 죄악에서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선한 사람은 자신의 심령이 보다 거룩한 상태로 화하기 전까지는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리고 복음의 평안과 양심의 평온 그리고 내적인 기쁨 등에 대해, 사악한 불신은 이들에 대해 마치 독과 같은 역할을 한다. -윌리엄 거놀.
13절. "나를 용서하사." 시편 기자가 우주의 주권자께 호소하면서 느꼈던 감정인 이른바 생명에 대한 애착은, 그것을 토로하고 확언하는 상황이나 기분에 따라 그 성격이 다르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죄악되게'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결백하게' 보인다. 그런가 하면 그것이 '칭찬받을 정도로 훌륭하게' 보이는 경우도 있다.
(1) 생명은 비난받아 마땅한 '죄악된' 애착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명백하고 심한 경우는, 그 애착이 "불의의 삯"(벧후 2:15)과 "죄악의 낙"(히 11:25)을 얻고자 하는 데 그 기초를 두고 있을 때이다.
(2) 생명은 우리의 공감을 일깨우는 '결백한' 애착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종종 생명은, 건강과 안락함과 조화 그리고 기쁨으로 가득한 싱그럽고도 울창한 숲과 같은 풍경을 우리에게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함께 협력하여 곤경을 완화시키며 자신에게 부여된 특권을 드높이고자 해마다 노력하는 부부들을 본다. 우리는,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잔치를 열어서 그 정을 돈독하게 하는 부모와 자녀들을 본다. 관대한 주인들과 신실한 종들도 있다. 어떤 이웃들은 서로간에 화목하게 지낸다. 어떤 기독교 공동체들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우리가 여기저기서 만나고 교제하는 사람들 중에는, 공동의 번영을 추구하는 아름답고 고결한 성품을 지닌 자들도 많다. 만일 이 같은 삶을 살아가던 어떤 사람이 쇠약해지기 시작하여 죽음의 길목에 들어서려 할 즈음에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라고 외친다면, 우리는 그에게 아무런 비난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3) 인간의 생명에 대해 지닐 수 있는 마지막 견해는, 그것이 '칭찬받을 만한' 애착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애착은 우리에게 권장되는 바이기도 하다. 우리 앞에 놓인 본문은, '회개자'의 기도, '성도'의 기도, 그리고 '박애주의자'의 기도 등으로서 설명되어질 수 있다.
① 본문은 '참회자'로서 생명을 간구하는 이에게 추천할 만한 내용이다. 성령께서 확신의 화살로써 먼저 그를 상하게 하셨을 때에, 그는 아마도 자신이 그토록 강하게 느낀 감정의 근원과 특성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의심하였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회심하지 않고서도 엄숙한 감명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은총으로 말미암아 거듭 승리하는 가운데 자신이 부르심과 택하심을 분명히 받았다는 점을 확신하기까지는, 자신의 도덕적 상태가 어떠한지도 모르는 채 살고자 하는 진지한 소원을 피력하는 자들의 입장은 존중되어야 한다. 심지어 그들의 확고한 입장이 흔들릴 수도 있다. 그리고 "주는 나를 용서하사······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라는 말이, 얼굴을 붉힌 채 떨면서 다시 한번 회복을 간구하는 배교자의 입술에서 나올 수도 있다.
② 그 다음에, 본문은 '성도'로서 생명을 간구하는 자에게 추천할 만한 내용이다······불경스러운 자들과 육욕적인 사람들과 형식주의적인 자들 그리고 세상적인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 행동하고 간구하며 또한 시련을 당하는 일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만 부여된 직무이다. 죄악된 삶에 대항해야 하는 사명으로 인해 "충만한 기쁨"(시 16:11)을 뒤로 미루고서 자신의 생명에 대해 강렬한 애착을 갖는 자는, 곧 그토록 고결하고 헌신적인 성도는 천사들조차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경건한 목표를 향해 매진한다.
③ 끝으로, 본문은 '박애주의자'로서 생명을 간구하는 자에게 추천할 만한 내용이다. 여기서 '박애주의자'란 선행에 몰두하는 관대한 '후원자'를 가리키며, 맹목적으로 사랑을 베푸는 '부모'의 심정을 지닌 자를 가리킨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의를 전파하는 자"(벧후 2:5)나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딤전 4:6)도 이 부류에 포함될 것이다. -조셉 휴즈(Joseph Hughes, M.A.), 존 오웬(John Owen, M.A.)의 장례식에서 행한 설교(Attachment to Life, 1822).
13절. 택하심을 받은 신실한 자들 자신이 심판의 날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그리고 그날의 도래를 불안해 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하지만 그들도 그날을 두려워하며 불안해 할 수 있다. 먼저, 처음 회심한 때나 회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죄사함에 대한 확신을 온전히 갖지 못한 상태에서 그럴 수 있다. 둘째로, 다윗 등과 같이 영적으로 버림받은 느낌을 받을 때, 즉 여호와께서 자신을 내버려두시는 듯할 때,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다. 끝으로,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강건한 삶을 살다가 잘못하여 큰 죄를 범했을 때, 그는 죽음과 심판을 두려워할 수 있으며, 욥이나 다윗처럼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일 수 있다. -존 발로(John Barlow)의 설교, 1618.
힌트
1-3절. “내가 잠잠하여.” (1) 침묵할 때가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비난을 받거나 질책을 당할 때 침묵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는 선을 이루기 위해 침묵했다. 다른 이들은 그의 침묵을 가리켜 부루퉁함, 교만, 멍청함, 혹은 의식적 죄악 등의 표현이라 지칭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선을 이루기 위해 침묵했다. 닦은 거울에다 입김을 불고 난 후에 그것이 증발하면 예전보다 더 맑아진다. 반면에 그 입김을 닦아내면 닦은 자국이 남을 것이다.
“내 속에서 뜨거워서.” (2) 침묵하는 가운데 묵상할 때가 있다. 겉으로 침묵할수록 속으로는 더 큰 동요가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뜨거워진다. 연민과 동정의 불, 사랑의 불, 그리고 거룩한 열정의 불이 그의 내면에서 타올랐다.
“나의 혀로 말하기를.” (3) 말할 때가 있다. 말할 때란 자기 마음속에 진리가 분명하고 강렬하게 자리잡을 때이며, 진리에 대한 느낌이 마음속에서 불타고 있을 때이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이 감정이 분출된다(렘 20:8, 9). 말이란 항상 자신의 마음을 신실하게 대변하는 것이어야 한다. -조지 로저스(George Rog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