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5편
개요
주제-다윗이 지은 이 시에는 이 시가 기록된 상황을 알려 주는 머리말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시는 시 24편과 매우 유사한 점이 있는데, 이 두 편의 시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던 것과 관련하여 지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누가 언약궤를 옮겨야 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다윗은 처음 시도에서 이 일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 일을 하도록 했다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두번째 시도에서 다윗은 더 조심스럽게 행하고 있다. 언약궤를 옮기는 데 여호와께서 명한 레위족으로 책임을 지게 할 뿐만 아니라(대상 15:2), 여호와께서 복을 주신 오벧에돔과 여호와의 집에서 섬기는 그의 많은 아들들로 이 일을 행하도록 했다(대상 26:8-12).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있는 그분의 독생하신 아들과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거하실 분에 대한 모형을 본다. 그분은 일차적으로 온전하신 예수시며, 또한 그 안에서 은혜로 그분의 형상을 닮아 가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절 질문.
2-5절 질문에 대한 대답.
이 시에 “질문과 응답”이라는 제목을 붙여 생각할 수 있다.
강해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1절:질문
1절. "여호와여." "거룩하고 높으신 자여, 당신과 함께 교제할 자가 누구입니까? 하늘도 당신의 눈에 순결치 못하고, 당신은 천사들이라도 잘못된 것을 책망하시나이다. 그러할진대 죽을 인생이 어찌 소멸하는 불과 같으신 당신과 함께 거하리이까?"
여호와는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분이다. 그분의 집이나 그분을 섬기는 일이나 그분을 섬기는 자들은 이러한 여호와의 모습에 합당해야 한다. 그래서 겸손한 자들은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천사들도 얼굴을 가리고서 여호와께 경배를 드린다면, 어떻게 사람이 그분을 경배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런 생각이 없이 사는 자들은 지극히 높으신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분께 예배를 드릴 때에도 그들의 마음이 예배를 드리기에 합당한지는 묻지도 않는다. 그러나 진실로 겸손한 자들은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생각에 움츠리고, 우리 주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의로우신 분이기에 하늘의 성전에서 우리를 변호하신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누가 여호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지붕 아래 거닐며 그분과 교제를 나눌 것인가?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누가 시온의 시민이 되며, 하늘의 예루살렘에 거하겠습니까? 이 질문은 진정 사람들이 심각한 마음으로 해야 할 질문이다. 모든 사람이 이 특권을 가진 것이 아니다. 신학 교수라 해도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나누지 못한 이방인들이 있는 것이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과 함께 거할 자는 아무도 없다. 2절 이하에 나오는 요구들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 질문을 여호와께 한 것은, 전지하신 하나님만이 불안한 양심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하실 것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여호와를 섬기기 위한 자격이 무엇인가를 장막에 계신 여호와께 물어야 할 것이다.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의 흠 없으신 주 예수만이, 그리고 그분의 형상을 입은 자만이 지존자의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흥미 위주로 누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인가를 알고 싶어한다. 이런 사람들은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아 더 지혜롭게 살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하나님의 전이며, 모든 산 위에 가장 높이 빼어난 산이다. 이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에 적합한 자들인지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의로운 결혼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은 교제의 잔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다. 의로운 삶을 살지 않는 자들은 땅에 있는 온전치 못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되기에도 적합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위에 있는 온전한 교회에 들어갈 것을 어떻게 소망하겠는가!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4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5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2-5절:질문에 대한 대답
2절. 여호와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1절의 질문에 대답하시며, 그분의 거룩한 산에 거할 자들의 성품이 어떠한가를 가르치신다. 오직 주 예수만이 온전히 거룩하신 분이시며, 성령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자들도 상대적으로 거룩하게 하신다. 믿음과 성령의 은혜는 이곳에 언급되지 않았다. 여기서는 외적 특성만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열매가 있는 것을 보면, 뿌리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자가 행하는 것, 그가 하는 일,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이 어떠한지 살펴보라.
"정직하게 행하며." 이 사람은 외줄을 타는 자처럼, 깨어지기 쉬운 귀중품을 그릇에 담아 머리에 이고 가는 자처럼 곧게 걸어간다. 진실한 성도들은 아첨하는 자처럼 움츠러 들지 않고, 뱀처럼 꿈틀거리지도 않으며, 땅을 파는 자처럼 허리를 굽히지도 않고, 교활한 자처럼 한편으로 치우치지도 않는다. 그들은 은혜의 강한 허리뼈를 곧게 세우고 바르게 살아간다. 행한다는 것은 말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정직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자만이 올바른 자이다.
"공의를 일삼으며." 그는 선행으로 믿음을 나타내 보이기에, 그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집은 부지런히 일하는 일벌들의 벌통이지, 게으름뱅이 같은 수펄들의 안식처가 아니다. 율법의 요구만 행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 복음의 원리이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여호와를 섬겨야 하며, 그분의 거룩한 뜻을 우리 힘을 다해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에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시 13편에서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다. 시 13편과 14편에서 대조적인 내용을 관찰해 보라. 성도들은 진실을 사랑하고 그의 입술로 진실을 말하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내면이 진실되기를 바란다. 그들이 마음으로라도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셔서 들으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매한 말이나 거짓말을, 그리고 아첨이나 속이는 것이나 핑계를 경멸한다. 진실은 장미처럼 가시가 담겨 있지만, 선한 사람들은 이 진리를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세상 사람들이 진리를 추방할 때에도 우리의 마음은 진리의 전당이 되고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가 진실을 가까이해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진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양심의 소리에 민감하여 항상 진실을 따르도록 해야 한다. 양심의 소리에 민감하게 살아가지 못하면, 이것을 다시 회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신실함과 거룩함의 본을 보이셨다. 아! 그분을 날마다 닮아갈 수만 있다면!
3절.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긍정적인 표현에 이어서 이제는 해서는 안 되는 부정적인 말이 나타난다. 우리 이웃에 대해 너무 엄격하게 대하다 보면 마음으로부터 참소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혀를 통해서 밖으로 나타난다. 어떤 사람들은 이빨보다도 혀로 더 사람을 문다. 혀는 철로 된 칼이 아니지만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자르며, 그 상처는 치료하기가 쉽지 않다. 이 혀는 우리의 얼굴을 향해 깊은 상처를 주지는 않지만, 우리가 얼굴을 돌리고 등을 보였을 때에 깊은 상처를 준다. 매는 남을 등쳐먹는 사람을 상징하는 새이다. 이 새는 정결한 새가 아니다. 매와 같은 탐욕가와 사기꾼은 세상 어느 곳에나 있다. 모든 중상과 비방은 마귀가 싸움의 불을 붙이기 위해 사용하는 풀무와도 같다. 그러나 사람의 등뒤에서 불을 붙이는 것은 가장 악한 것이다.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혀에 재갈을 물리는 자는 손으로 친구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한다면, 그의 명성을 지키는 데 마음을 쓰고, 그의 재산에 해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며, 나쁜 본을 그에게 보이면서 그의 성품을 오염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도둑질한 물건을 집어서 숨기는 자는 강도가 아니라면 바보이다. 강도질이나 훼방하는 것이나 모두 도둑질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을 즐겨 듣는 자가 없다면 이것을 퍼뜨리는 자들도 없을 것이다. 트랩 씨는 "말을 퍼뜨리는 자는 혀에 마귀를 달고 다니고, 말을 듣기를 좋아하는 자는 귀에 마귀를 달고 다닌다"고 했다. 남의 말을 퍼뜨리는 자를 용납하는 것은 죄이다. 우리는 술에 취해 떠들어 대는 주정뱅이를 싫어한다. 그들은 예의 없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도 말쟁이들이 사람을 훼방하며 퍼뜨리는 말만큼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업장에 도둑이 들면 "경찰을 불러!"라고 외친다. 그러나 사람을 훼방하는 험담을 들을 때에도 이처럼 분노를 느껴야 하지 않을까? "미친 개! 미친 개!" 이렇게 부르짖으면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그러나 말쟁이가 훼방하는 것처럼 위험하게 물어 대는 똥개도 드물다. 불이 나면 우리는 "불이야! 불이야!"라고 외치면서 사람들에게 위험이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 그러나 말쟁이의 혀는 지옥불이 붙어 있다. 사람을 훼방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태도를 고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갈먹이지 않은 혀를 위한 지옥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은 다른 사람을 훼방하지 않으시고,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우리는 그분을 닮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과 영원히 함께하지 못할 것이다.
4절.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우리가 고지서의 요금을 주의해서 납부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 마땅히 존중할 자를 존중하라. 우리는 모든 선한 사람을 존경할 의무가 있으며, 어쩌다가 중요한 자리에 오른 악한 자들에게 선한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존경을 표시해서는 안 된다. 악인이 높은 지위에 오르면, 우리는 그 지위는 인정하되 그 악인에 대한 평가는 양심을 따라 내려야 한다.
이와 반대로 진실된 성도가 가난과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동정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그를 존경해야 한다. 귀한 진주는 조잡하게 포장되어 있어도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하고,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모조 진주라면 값을 많이 쳐줄 수가 없다. 죄인이 금사슬로 단장하고 비단옷을 입고 나온다 해도, 그를 누더기를 걸친 성도와 비교할 수 없다. 이는 은촛대에 있는 희미한 불빛을 구름에 가린 태양과 비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옛 속담에 "어리석은 여자가 좋은 옷을 입으면, 그것으로 더 어리석어진다"고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박한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오르면, 그것으로 더 천박해지는 법이다.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신약에서 성도들은 결코 서원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평상시에 하는 말도 서원을 하는 것처럼 진실되어야 한다고 했다. 구약 시대에는 서원을 할 때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 서원으로 자신이 손해를 보게 되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전히 서원한 것을 지키며 존경받을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사업가는 다른 사람과 계약을 맺고서 심각하게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미래를 멀리 바라보는 자는 비록 손해가 된다 해도 이 약속을 이행한다. 그가 명예를 지킨다면 물질적 손해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명예를 잃어버리면 신뢰를 잃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5절.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고리대금업은 하나님도 싫어하시고, 사람도 좋아하지 않는다. 채권자가 이 돈으로 얻은 이익을 채무자와 함께 나누는 것이 옳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자에게 돈을 빌려 주고 나중에는 그를 먹어 치우는 것은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일이다. 가난한 상인, 불쌍한 과부, 이런 사람들을 가혹하게 대하고 높은 이자를 요구하여 재물을 모은 자는 그들의 금과 은이 녹슬고 없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바울이 손가락을 문 독사를 털어서 불에 던져 버린 것처럼, 여호와의 산에 오르고자 하는 자는 이 죄를 털어 버려야 한다.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뇌물을 주는 자나 받는 자가 모두 죄인이다. 옛날에는 법정에서 뇌물이 많이 오고 갔다. 현대에는 이런 일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이 죄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역겨운 일이다. 이것을 기억하라. 예수께서는 무죄한 자의 뇌물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아무리 강한 태풍이 불어닥쳐도 이런 사람은 요동치 않는다. 바다에서 그가 내린 닻을 끌고 갈 수 없으며, 땅에서도 그가 내린 뿌리를 뽑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통치하시는 것처럼, 진실된 성도는 그의 면류관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시온에 거할 뿐만 아니라, 시온과 같이 확고하게 서 있을 것이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전에 거한다. 그는 여호와의 전에서 특권과 축복을 누린다. 죽음이나 심판도 그가 누리는 특권과 축복을 빼앗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전에서 그를 쫓아내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하자. 이 시는 금을 시험하는 불과 같고, 은을 연단하는 용광로와도 같다. 이 시에 나오는 시험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
주해
1절.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그리스도의 교회는 땅에 있는 "장막"이다. 교회도, 교회의 성도들도 이 세상에서는 일정한 곳에 영구히 거주하지 않는다:"이것이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미 2:10).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 13:14). 여호와의 장막은 이동할 수 있는 성전이었기에 때로는 광야에 있었으며, 때로는 실로로, 때로는 블레셋 지경으로, 때로는 기럇여아림으로 여기저기 옮겨 다녔으며, 마침내 하나님의 산으로 옮겨지기까지 여호와의 장막이 자리를 잡을 고정된 장소가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도 이곳 저곳에서 핍박을 받고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순례자처럼 방랑하며, 마침내 "주의 성산"에 이를 때까지는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할 수 없을 것이다. "유할"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는 "구르"(rwg)인데, 이는 이방인이나 나그네로서 거주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하늘 나라의 시민들은 땅에서는 순례자임을 말해 준다.
교회가 "장막"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것이 성벽으로 둘러싸이거나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는 요새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의 힘은 이런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온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는 모든 환난에서 돕는 도움이 되시고, 폭풍이 불 때에 숨을 피난처가 되시며, 폭염에서 피할 그늘이 되시기 때문이다(사 25:4).
이 땅에 있는 교회는 진정 "장막"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장막이며, 그분은 여기에 거하신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여호와께서는 사람들 중에 거하시고자 이 장막을 지으라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장막을 지으라고 하시면서, 백성들 중에 거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 바울은 그분이 사람들 중에 거하시는 것을 이렇게 해석했다:"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16). 또한 하나님은 시온에 거하시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닌다고 하셨는데, 이는 그분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고 일곱 교회 사이에서 거니실 것을 말한 것이다(시 46:5; 사 12:6). -존 보이스(John Boys, D.D., 1571-1625).
1절.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다윗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지식이 풍부하고, 비밀스러운 일을 이해하며, 하늘의 일들을 배우고, 그의 모든 선생들과 모사들보다 지혜가 뛰어났다. 이런 다윗도 양과 염소를 구분하기를 바라고, 선과 악을, 성도와 위선자를, 참된 예배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을, 거룩한 여호와의 전에 진실로 거하는 자와 여기에 그저 침입한 것에 불과한 악인를 구분하여 속지 않으려 했다. 그렇다면 다윗과 같이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고, 이런 지혜나 지식도 없는 우리는 우리가 약하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판단에도 확신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숨겨진 깊은 비밀에 대한 지식을 알려면 다윗과 함께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라고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다윗이 이렇게 물었을 때, 그는 "주의 성산"에만 참된 안식이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인데, 이는 교회를 말한다. 하나님의 집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거룩한 산과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들은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혼란에 빠지고,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리처드 턴불(Richard Turnbull, 1606).
1절.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이방인의 뜰에서 예배하는 자들은 개들과 술수를 부리는 마술사들이 없는 곳에서 영원한 거처를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의 영혼은 여호와의 식탁에서 함께 먹으며, 그들의 의복이 향기롭게 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토머스 보스턴(Thomas Boston).
1절. "주의 장막에 유할 자."
이 사람은 누구인가?
당신이 안다면 말해 보라.
누가 영원한 거처를 얻을 것인가?
빌라도는 "이 사람을 보라!"고 말할 것이고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외칠 것이다.
-존 바클리(John Barclay, 보나가 인용한 글).
1절. "주의 성산." 하늘을 산에, 지옥을 구덩이에 비교한 것이 적절하다. 누가 이 거룩한 산에 오를 것인가? 이 산이 내려와 그에게 임하는 자만이 이 산에 오를 수 있다. 그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감미로운 교제를 나누고, 비록 이곳에서 먹고 마시고 잠을 자지만 하늘에 대해, 그리고 영생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자들이다. -존 트랩.
1, 2절. 어느 시대에나 위선자들이 있어서 자신을 위장하며 모조품 인생을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이 질문을 하게 되었다. 바울은 "이스라엘에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 9:6)라고 했다. 교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다 교회에 속한 것이 아니다. 다윗도 이것을 깨달았다. 갖가지 잡다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장막에 섞여 들어왔다. 염소가 양 떼 사이에 들어오듯, 가라지가 곡식 가운데서 자라듯, 내면의 유대인이 아닌 외형적 유대인이,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때로는 자신을 속이기도 하며, 신앙은 없으면서도 참된 경건을 가장하면서 여호와께로 나아온다. (그러나 그분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고 시험하시며, 모든 비밀을 다 아시고, 자신의 백성이 누구인지 다 알고 계신다.) 그들은 여호와께 나아와서 이렇게 말한다:"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는 주의 말씀을 믿는다고 말하며, 예배 장소에도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위선자들이 가득하나이다. 여호와여, 겸손하게 간구하옵나니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의 자녀들과 당신의 나라에 속한 자녀를 구분하는 증표를 오늘 선포하소서."
여기서 우리는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교회와 외형으로 교제를 나누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얻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 구원을 얻는가? 내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옳은 일을 행하며, 우리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 교회의 외형적인 것에 너무 의존적인 천주교 주교들은 어리석다. 그들은 로마 주교들의 계승을 믿고,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많다는 것을 자랑하며, 구약 시대에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렘 7:4)라고 외치던 유대인들처럼 로마 권력과 화려한 허식을 자랑하며, 그들의 교회가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주장한다. 복음을 외적 규범을 지키는 것으로 전락시킨 육적인 사람도 역시 속임을 당한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이름뿐인 크리스천들은 실제로는 무신론자들이다:"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딛 1:16).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에 오고가는 사람들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주의 성산"에서 안식을 얻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이것을 확증하셨다:"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입으로만 크리스천이라고 하고서 행위로는 그렇지 못한 자들, 종교의 가면을 쓰고 있는 자들은 이것을 기억하라. 너희 하나님을 잊은 자들아, 이것을 생각하라. 높은 곳에 계신 그분은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을 바라보신다. 그분은 정직하게 살고, 공의를 행하며, 진실된 것을 말하는 자들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그분의 성산에서 쉬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 -존 보이스.
2절. 열매가 없으면 나무의 질을 측정할 수 없다. 시계의 톱니가 안에서 돌아가면, 시간을 알리는 바늘은 밖에서 돌아간다. 사람이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섰다면, 그의 삶도 변화할 것이다. 샘이 닫혀 있을 경우,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이 아니면 무엇으로 그 샘을 평가하겠는가? -윌리엄 세커.
2절. "정직하게 행하며." 우리는 마음이 정직해야 한다. 정직이 없으면 우리가 받았다고 생각하는 은혜는 모조품이다. 부정직한 자가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영광을 가장한 죄악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위선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다. 정직을 기초로 은혜와 덕도 생기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것이 없으면 이 모든 것들은 무가치한 것이다. 은혜가 마음의 정직함과 합쳐지지 않으면, 이것들은 덕의 가면을 쓴 죄악이다. 정직하지 못하면서 공평을 가장하는 것은 두 가지 죄를 범한 것이다. 이것은 부정한 것이고, 또한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지 다우네임(George Downame, D.D., 1604).
2절. "정직하게 행하며." 여기에서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 왜 다윗은 교회의 지체와 하늘의 기업을 받은 자를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묘사하는가? 하늘 나라는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약속된 것이고, 이것을 고백함으로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이 아닌가? 둘째, 믿음의 열매는 수없이 많은데, 그는 왜 이웃에게 행할 의무를 선택했는가?
첫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이 구절이나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선행을 하라고 명하거나 이것을 칭찬하는 말이 나올 때는 믿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고 했다. 예수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히 11:6). 믿음은 선행의 보금자리와도 같다. 우리는 올바른 것을 행하고 진실된 것을 말하지만, 이것이 참된 믿음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면 모두 헛되이 사라져갈 것이다. 아리스티데스(Aristides)는 공정하게 통치했고, 친구나 원수라는 이유로 편견되게 권력을 행하지 않았다. 폼포니우스(Pomponius)는 진실된 사람이었기에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속지도 않았다. 로마의 쿠르티우스(Curtius), 아테네의 코르두스(Cordus)는 이웃과 나라를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구세주이신 주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갖지 못했기에, 그들이 하나님의 성산에서 안식한다고 말할 수 없다.
또 다른 대답으로, 믿음이란 내면의 문제이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기만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각 사람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그들의 열매로 그 믿음을 알아보신다.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벌이 따르지만, 구원과 심판에 대한 선고는 믿음의 증거가 되는 행위에 따라 선고되어야 한다. 베르나르의 말에 의하면, 우리의 선행이 우리를 성산에 오르게 하는 근거는 아니지만, 우리는 선행의 길을 따라서 성산에 올라가야 한다.
둘째 질문은 왜 하나님과 관계된 의무는 나타나지 않고, 우리 형제와 관계된 의무만 나타나느냐는 것이었다. 그 까닭은 이 글을 읽는 자들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공개적으로 믿음을 선포하고, 기도도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는 자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저속한 무신론주의자들, 거룩하지 못한 자들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도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제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이 참된 성도인지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것만 듣고서 판단해서도 안 되며, 그들이 성찬식에 참석하는지의 여부만 가지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지키는지의 여부로도 판단할 수 없다. 그들이 의를 행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는지의 여부로 판단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경건은 우리 형제에게 행하는 자비로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 -존 보이스.
2절. "공의를 일삼으며." 사람은 먼저 의롭게 되어야 공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요일 3:7).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이지, 열매가 나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먼저 나무가 좋아야 열매도 좋다(마 7:18). 의로운 사람이 의로운 행동을 하지만, 불의한 사람이 하는 어떤 행동도 그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믿음으로만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서 의롭게 된다:"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 5:1)······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자가 아니라면, 그는 의를 행하는 자가 될 수 없다. 그 결과 그는 천국에 거할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의를 받지 않으면, 하늘 백성의 성품을 결코 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하나가 되지 않고서 의를 행한다는 것은, 부러지고 잎이 시든 가지에서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토머스 보스턴.
2절. "공의를 일삼으며." 야곱의 사다리에는 계단이 있었는데, 그 위에서 그냥 가만히 있는 자들은 없었다. 어떤 자들은 올라가고 있었고, 다른 자들은 내려오고 있었다. 사다리의 끝까지 올라가 보라.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바실은 다윗 왕이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라고 질문한 것에 대해 이 내용을 언급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의를 행하는 자가 주의 장막에 유한다. -토머스 플레이피어.
2절. "공의를 일삼으며." 다윗은 공의를 행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공의에 관해 말한다거나 생각한다거나 듣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행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빚진 자들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그분은 원수에게도 이렇게 행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편견을 갖고 사람들을 대하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인 듯하다. 당신이 제사장이나 종교 지도자이거나, 또는 기도를 많이 한다거나, 기적을 행한다거나, 잘 가르친다거나, 명예로운 직책을 가졌다거나,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의의 행동을 제외하고) 등의 이유 때문에 성산에 올라가 거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에게 의의 행동이 부족하다면, 당신의 모든 선행도, 중보의 기도도, 어떠한 행동도 헛된 것이 되며 당신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확실하다. 흠 없이 행하는 자, 의를 행하는 자가 여호와의 장막에 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건물이나 수도원을 확장하고, 제단이나 그릇, 의복 등을 치장하면서도 의의 행동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나는 배가 고팠고, 목이 말랐고, 헐벗었고, 옥에 갇혔고, 나그네가 되었었노라." 그분은 사람들이 칭찬했던 그 모든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또한 당신이 평신도이거나, 가난하거나, 아프거나, 천한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당신은 의의 행동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 보실 단 한 가지 행동은 의의 행동이다. 다른 모든 행동이나 일은 거룩하게 보일지라도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마르틴 루터.
2절.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해부학자들은 사람의 혀가 심장에 두 줄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관찰했다. 이처럼 우리가 말하는 진리는 두 가지가 일치해야 한다. 첫째, 우리의 마음과 일치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일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말해야 하며, 우리의 혀는 마음을 신실하게 해석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말하지 않았기에 이는 거짓말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말한다 해도, 말하는 자가 이와 달리 생각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둘째, 사실과 일치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있는데, 이것을 그대로 말로 인정했으나 우리의 생각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믿었다고 해도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해했다고 해도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로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참조. 살후 2:11). -토머스 보스턴.
2절.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오, 내 영혼아, 이 권고의 말씀을 들으라. 여기에 담긴 진리를 공부하라. 항상 정직과 진실함으로 살아 너 자신을 보존하라.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라. 나는 거짓말하는 악에 대해 항상 책망받는 것을 감사한다. 여호와여, 나를 도우사 이처럼 치사하고 파괴적인 악을 싫어하는 마음을 내게 더하소서. 이 욕정과 타락을 없애기 위해 오늘의 말씀에서 교훈받은 대로 힘을 다해 내 마음을 지키며 살겠나이다. 타락한 마음으로부터 거짓을 말하는 죄가 흘러나오고,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마 15:19)이라고 했다. 마음에서 악한 말이 나오는 것이다. 특히 거짓말을 많이 하게 하는 죄악이 있다. 교만, 질투, 탐욕, 악의 등. 나는 열심을 다해서 이것들을 물리치도록 하겠다. 이 모든 더러운 것에서 나 자신을 씻어야겠다. 마음을 절제하지 못하면, 결코 혀를 절제할 수 없다. 여호와여, 나를 도우사 이 샘을 정결케 하소서. 그리하면 이곳에서 흐르는 샘이 순결하리이다. 시계 속에 있는 태엽과 다른 부품들이 올바로 움직인다면, 밖에서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 바늘은 시간을 바로 맞출 것이다. 이 원리가 여기서도 적용된다. 혀는 마음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거짓말을 이제 더 이상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게하시에게 탐심이 없었던들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바른 길로 걷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잠 10:9). 불명예스럽고 저속한 짓, 빛을 감당할 수 없는 것, 이런 짓은 결코 하지 않겠다. 하나님의 눈이 나를 살피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분의 임재 앞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살아가겠다. 여호와여, 당신을 항상 내 앞에 모시기를 원하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내 마음의 생각을 아시나이다. 나는 말하기 전에 생각하여, 조급하거나 말을 많이 하지 않겠다.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잠 29:20).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나의 모든 위선과 거짓이 드러나고, 모든 비밀이 공개될 때에 엄한 심판이 있을 것을 자주 생각하겠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겠다(시 119:29;잠 30:8).
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앞으로 행하는 일에도 나를 도우시고, 나로 거짓말을 하지 말게 하소서. 친절과 자비의 법이 내 혀를 주관하게 하소서. 나로 주의하여 내 혀로 죄를 범하지 말게 하소서. 지난 날에 지은 이러한 죄를 생각하며 슬퍼하고 탄식하나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당신의 자비를 얻고자 나아왔나이다. 오늘 내게 주신 교훈으로 나를 축복하소서. 어떤 죄악도 나를 이기지 못하게 하소서. 당신의 종을 오만한 죄에서 보존하시고, 은밀한 죄에서 나를 깨끗게 하소서. 내 생각과 소망과 혀를 당신께 드리나이다. 당신을 경외함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내 마음에서 늘 진실을 말하게 하소서. -벤자민 베넷(Benjamin Bennet, Christian Oratory, 1728).
2, 5절. 독수리는 부리를 갈면서 젊음을 새롭게 하고, 뱀은 껍질을 벗으면서 몸의 유연성을 지키듯,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예하고자 하는 자는 그분의 성산에 거하며 속히, 지속적으로, 진실되게 회개하면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새 사람은 의와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는 것이다. -로버트 코드레이.
3절.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이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이 죄를 자주 범하는 것을 탄식한다. 이것은 진정 슬픈 일이다. 비난과 질책은 어느 곳에나, 어느 모임에나 만연하고 있다! 만일 경건치 못한 자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과 원수들이 이런 잘못을 범했다면 우리는 이것을 견디기가 더 쉬웠을 것이다. 잠언에서 말하는 바 악인에게서 악한 것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 지옥과도 같다면, 그의 혀에 지옥의 불이 붙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의 선한 것을 비난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 이 질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질병은 애굽 사람들 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중에도 있다. 신학 교수가 혀를 비수처럼 갈아 다른 교수를 비난하고, 선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질책하며, 사역자가 다른 사람을 비방한다. 누가 "나는 이 죄에서 깨끗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제발 자신을 돌아보아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고, 이 죄로 당신의 양심을 오염시키고 상처를 주지 말라. 형제를 불쌍히 여기라. 악인들의 비난을 받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자들을 붙들어 주고 강건케 하며, 고난받는 자들에게 고난을 더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불쌍히 여기라. 욥의 말을 들으라:"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욥 19:21). 미친 듯하고 비참한 이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사람들을 도와 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 사람들이 이 악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하라.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고 울며, 그분이 치유하시기까지 간구하라. -매튜 풀(1624-1679).
3절.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욕이나 비난하는 것을 가벼이 취급하고 넘어갈 수 없다. 우리는 이 죄를 너무도 쉽게 범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말했듯이, 선한 이름은 모든 사람들에게 귀한 것이고, 여러 재물보다 더 좋아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 속담에 "혀로 입힌 상처는 창으로 입힌 상처보다 더 아프다"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혀를 재갈먹여 이웃의 선한 이름에 상처를 주지 말아야겠다. 우리는 모두 공의롭게 행하여 우리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야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공의롭고 신실하게 함께 살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상처를 준다는 것은 인간 사회의 법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 일은 우리들 가운데 너무 많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말을 듣고, 또 들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 왜 그런가? 우리는 들은 것을 그대로 전하고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이웃을 위해 선한 행동을 해야 하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다. 이웃에게 해가 되는 말은 더 이상 퍼뜨리지 말고 그대로 소멸되게 해야 하는데도, 우리는 이것을 들추어 내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함으로써 이것을 사방으로 확산시켜서 모든 사람이 듣고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훼방하는 말은 만들지도 말 것이며, 이런 말을 듣게 되면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대로 적법하고 정직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이웃의 명예를 지켜 주도록 하라. -피에르 바로(Peter Baro, D.D., 1560).
3절.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참소치"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라갈"(lgr)인데 이는 '첩보 활동을 하다'라는 뜻이다. 은유적으로는 '뒤에서 험담하다' 또는 '중상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험담하는 자, 수군거리는 자들은 스파이처럼 자신의 악의를 감추고 여기저기 다니며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나 단점을 찾아낸다. 그러므로 "참소"는 사람의 뒤에서 악한 마음으로 그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것을 말한다······이런 행동은 사악한 짓이다. 하늘 나라의 시민들은 이런 행동을 혐오해야 한다. 이것은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금하는 죄이다. 레위기 19:16에서는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라고 했다. 마약 판매자가 이집 저집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마약을 판매하려 하듯이, 참소하는 자들은 여러 가지 소문을 들고서 이집 저집으로 다니며 그 사람이 없을 때에 그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것이다. 시편에서도 형제를 비방하는 죄를 책망하며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다:"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시 50:20). 이 죄는 예루살렘으로 파멸에 이르게 한 죄 중의 하나이다:"네 가운데 피를 흘리려고 이간을 붙이는 자도 있었으며"(겔 22:9). 로마서 1:29, 30에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셨기에 이방인들이 범하는 죄의 목록이 나타나 있다. 여기에 수군수군하는 자와 비방하는 자가 포함되었다. -조지 다우네임.
3절.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참소하는 자, 이웃의 등 뒤에서 나쁜 말을 하는 자를 말한다. 그가 말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는 거짓말을 한 죄를 범한 것이고, 그가 말한 것이 진실이라면 그가 다른 사람에게 치욕을 주었기에 자비로운 마음이 없는 것이다. 솔로몬은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 10:12)고 했다. 사랑과 자비가 있는 자는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의 죄를 가리우고 숨겨 준다. 자비가 없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전 13; 요일 3:14, 15). -크리스토퍼 카트라이트(Christopher Cartwright, 1602-1658).
3절. "참소치 아니하고." 이 범죄는 무한히 악한 행동을 생산해 낸다. 이것은 평화를 좀먹고, 우정의 기초를 무너뜨리고, 가정의 파탄을 불러오고, 자비로운 마음을 찢어 버린다. 이것으로 악한 자가 무죄한 자를 거짓으로 증언하고, 심판하고, 마침내 처형하게 한다. -테일러 주교.
3절. "참소." 전갈은 그 꼬리에 닿는 자만을 쏘고 상하게 한다. 악어는 그가 볼 수 있고 미칠 수 있는 자를 죽인다. 독사는 무는 자에게만 상처를 입힌다. 독초는 그것에 가까이 와서 만지고 냄새를 맡고 맛보는 자를 죽인다. 그러나 참소하는 자의 혀에 있는 독은 이보다 더 치명적이다. 이 혀는 가까이 있는 자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자에게도, 집에 있는 자뿐만 아니라 밖에 있는 자에게도, 국내에 있는 자뿐만 아니라 외국에 있는 자에게도 상처를 입히고 죽인다. 이 혀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가리지 않는다. -리처드 턴불.
3절. "참소."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레겔"(lgr)에서 파생되었는데, 이는 '발'이라는 뜻이다. 참소하는 자는 발로 이집 저집을 다니면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며 돌아다닌다(딤전 5:13). 이 어원에서 '스파이'라는 뜻의 말이 파생되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사람은 이집 저집 숨어 들어가서 그 가정의 비밀을 들추어 내고, 그것을 폭로하고, 어떤 사실을 종종 거짓 된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가장 악한 사람들에 속하고, 성도들의 사회나 그리스도의 교회에 매우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다(롬 1:30). -존 길.
3절.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하나님의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너무 쉽게 들어서는 안 되고, 더군다나 형제에 대한 나쁜 소문을 그대로 믿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자비를 행한다면 이런 소문들을 멈추게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믿기 전에 먼저 조사를 해야 한다. 사울 왕은 다윗을 훼방하는 자들이 그가 사울 왕에 대해 모반을 꾀한다고 하는 말을 너무 쉽게 믿어 버렸다. 다윗도 이 점에서는 약했다. 그가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고 있을 때에 시바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비방하며 므비보셋이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삼하 16:3)고 했다고 참소했다. 다윗은 이 말을 그대로 믿어 버렸다. 이러한 사람들의 예는 우리가 본을 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거짓 증거를 믿지 말자. -리처드 턴불.
3절.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이웃을 멸시하지 말고,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이웃에게 있는 결점이 당신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 그가 한 행동을 용서할 수 없다면, 그가 좋은 의도로 했다고 생각하라. 그의 행동이 악하다면, 그가 무지해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라. 아무래도 용서할 수 없다면, 그가 시험에 빠진 것으로 생각하고, 당신에게 이런 시험이 있었다면 당신은 더 나쁘게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라. 이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라. 그가 죄인이라고 멸시하지 말라. 그가 오늘은 악해도 내일은 회개할 것이다.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3-5절. 도덕적 정직을 외치는 자는 종교 생활에서 중요한 면, 즉 하나님을 향한 의무와 사람을 향한 의무에 대해 외치고 있다. 종교가 없는 도덕성은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필요한 대로 도덕을 바꾸게 된다. 종교가 도덕을 주관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도덕성을 다스릴 종교가 없는 자는 맹견이나 다를 바가 없다. 맹견은 쓰다듬어 주면 고분고분 잘 따른다. 그러나 그를 다치게라도 하면, 당신의 얼굴을 향해 달려들어 당신의 목을 물고늘어질 것이다. -존 셀던(John Selden, 1584-1654).
4절.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악한 이스라엘 왕 여호람은 선한 유다 왕 여호사밧과 함께 선지자 엘리사에게 와서 여호와께 구하여 물을 얻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선지자는 악한 왕에게 경멸을 표하고, 경건하고 덕이 있는 왕에게는 존경을 표하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 왕 여호사밧의 낯을 봄이 아니면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왕하 3:14). 이처럼 그는 악인에게 아첨하지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 모르드개는 야망이 있고 교만한 아각 사람 하만을 경멸하며, 결코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존경하는 표시로 무릎을 꿇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하만은 그를 지극히 미워하며 죽이고자 했다. 악한 자를 당연히 책망해야 하는데도 그들의 악함에 미소를 짓고, 악행하는 그들을 지지하고, 그에게 아첨하며, 그를 칭찬해서는 안 된다. 이런 사람들에게 선지자는 저주를 퍼부었다:"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사 5:20). -리처드 턴불.
4절.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악인을 멸시하고 의인을 존중하는 것은 반대되는 일이다. 그러나 악인을 멸시하는 것은 경건한 자가 할 일이 아닌 듯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아야 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멸시할 수 있는가? 경건한 자들은 다른 사람보다도 먼저 자신을 살피고 자신을 책망해야 하며,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시편에서 말하는 바는 사람을 멸시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의 잘못을 멸시하라는 말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죄는 미워해야 한다. 하나님도 이러하시고, 또한 우리들도 하나님을 닮기 원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시고 죄를 미워하신다. 그분은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을 유지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나 사탄이나 자신의 뜻대로 하려는 의지를 미워하신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므로, 죄를 범하는 자들을 책망하신다. 경건한 자들은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멸시하지 않으며, 죄인 속에 있는 죄를 미워한다. 그리고 죄인들을 책망하고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다. 선한 사람은 악인에게 아첨하지 않고, 그들의 대화나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포해야 한다. -피에르 바로.
4절.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경건한 자들이 우리에게 해를 끼친다 해도, 우리는 그들을 존중해야 하며 멸시해서는 안 된다.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잉태했을 때, 요셉은 아직 그 사연을 알지 못하고 큰 상처를 받았지만 그녀를 멸시하지 않았다. 칼빈이 루터를 대했던 태도는 칭찬할 만하다. 그들은 성찬식에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임재하느냐에 대해 의견이 전혀 달랐다. 루터는 다혈질이었기에 그와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을 맹렬히 공격하는 글을 썼다. 칼빈 측에서는 루터의 글에 답하는 글을 준비했다. 칼빈은 이것을 알고서 그들도 루터가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상대를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책임자인 불링거(Bullinger)에게 글을 쓰면서, 루터의 좋은 점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예의와 존경을 표할 것을 당부했다. 그는 루터가 자신을 마귀라고 불렀을 때에도 루터를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종으로 간주하고 존경할 것이라고 했다. -크리스토퍼 카트라이트.
4절.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내가 설교자와 천사를 함께 만난다면, 먼저 설교자에게, 다음에는 천사에게 인사하겠다. -찰스 브래드버리(Charles Bradbury, Cabinet of Jewels, 1785).
4절.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그의 말은 증서, 그의 맹세는 신의 계시,
그의 사랑은 신실하고, 그의 생각은 흠이 없네
그의 눈물은 마음이 보낸 순수한 사자,
그의 마음은 하늘이 땅에서 높은 것같이
거짓에서 멀리 있다네.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5절.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청교도 목사들은 대부분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취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들은 1센트를 빌려주고 1년에 1페니를 이자로 받는 것을 고집하는 자들이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극단적인 것으로 나는 동의하지 않으며, 여기에 그들의 주장을 인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과도하게 높은 이자를 요구하는 것은 혐오스러운 일이다. 상업 국가에서 일반적인 이윤을 취하는 것을 사랑의 법에 어긋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유대인들은 농사를 짓는 농부가 가난할 때, 그들에게 저리로 돈을 빌려주는 것도 고리대금업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상업에 종사하는 이방인들에게는 이자를 받고서 돈을 빌려줄 수 있었다. 상업 사회에서 돈이란 생산을 하는 것이며, 빌려준 자는 그 소득의 일부를 취할 권리가 있다. 상업에 종사하지 않는 가난한 자에게, 그가 빈궁한 시기에 돈을 빌려주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C. H. S.
5절.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고리대금이란 돈이나 곡식, 물품 등과 같은 것을 빌려주고서 일반적인 원칙보다 더 많은 이익을 거두어 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돈이나 물품으로 적법한 이익 이상을 착취하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고리대금은 '무는 것'을 말한다("변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네쉐크"<^vn>인데 이는 문자적으로는 '물러서 떨어져 나온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의 동사형은 "나솨크"<^vn>인데, 이는 '물다'라는 뜻이다-역자 주). 하나님의 율법은 돈이나 물품을 빌려주고서 과도하게 이윤을 취하는 것이나, 빌려준 자가 이익을 보았는지 손해를 보았는지, 가난해서 빌려주었는지 아니면 더 이익을 얻기 위해 빌려주었는지, 그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이자를 취하는 것을 금한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출 22:25).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식을 취하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식을 위하여 돈을 꾸이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식물을 꾸이지 말라"(레 25:35-37). 이 율법은 가난하게 된 이스라엘 형제들이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에게서 이식을 취하지 말라고 명한다.
그러나 이방인에게는 이식을 취하는 것을 허용하는 듯하다:"타국인에게 네가 꾸이면 이식을 취하여도 가하거니와"(신 23:20). 일반적으로 타국인이란 이방인을 말하며, 유대인과 개종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방인이란 가나안 사람들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 히브리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지 않으신 이방인들, 유대인들과 싸우지 않는 이방인들에게서는 이식을 취할 수 없다.
히브리 사람들은 가난하여 돈을 빌려준 경우,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식을 받지 말라고 분명히 가르쳤다(출 22:25; 느 5:5, 7). 또한 희년이 되면 어느 가정이나 자신의 기업을 회복할 수 있었다. 상업과 별 관계가 없는 백성에게 돈을 빌려준다는 것은 가난한 경우를 말하며, 그 외에 다른 경우가 별로 없었다. 타국인에게는 이식을 받고 돈을 빌려줄 수 있지만, 그들을 압제해서는 안 된다.
이런 율법은 유대인들에게만 독특한 경우로 생각된다. 이 율법은 우리보다 더 못한 자에게는 자비를 보이고, 장사를 위해서든 가난해서든 간에 우리가 돈을 빌려준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할 것을 가르친다. 이 점에 대해 한 주경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땅을 빌려서 일하며 농사일에 모험을 하는 자에게서 이식을 받듯이, 돈을 빌려서 일하며 상업에서 모험을 하는 자에게서 이식을 받는 것이 적법하게 보인다." -알렉산더 크루덴(Alexander Cruden, 1701-1770).
5절.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출 22:25). 이스라엘 사람들은 상업에는 거의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돈을 빌려준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궁핍한 경우에 빌려주는 것을 말한다. 채주는 이처럼 궁핍한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이식을 받지 말아야 했다. 이 율법은 낮은 이윤까지 모두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이익을 취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라는 구절은 "그를 잔혹하게 지배하지 말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변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네쉐크"(^vn)가 '물다'라는 뜻의 "나솨크"(^vn)에서 파생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느헤미야 5:2-5에서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행사하는 권리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땅과 포도원과 집을 전당잡혔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까지도 종으로 팔아서 채권자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했다. 이런 위기에 느헤미야는 가난한 자를 위해 일어서서 모든 백성들을 모으고, 부자들이 이 모든 것을 변제해 줄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로 다시는 빚 때문에 가난한 형제들을 압제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게 했다. 그들의 행동 모두가 모세의 율법에 배치되는 것이었다기보다는, 이러한 상황에서 평등한 삶이 극도로 깨어졌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형제들을 압제하여 잔인하고 야만적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에 하나님은 심히 진노하셨고, 하나님의 종이 그들을 꾸짖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여기에서 히브리 사람들은 일반적인 법칙을 도출해 냈다:"갚을 능력이 없는 가난한 자에게서 착취하는 자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너희는 착취하는 채주가 되지 말지니라." 모세의 율법 중 어느 곳에서도 단순히 이자를 취하는 것, 특히 이웃한 나라들로부터(신 23:19, 20) 이자를 취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금지하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돈을 빌려주는 채주 중에서 인색한 자는 과도하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근면한 사람이라도 가난하여 이런 곤경에 처하고, 재정상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 처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고 관용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네가 내 백성, 나의 가난한 백성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들의 가난한 기회를 타서 이익을 취하지 말라. 그들을 도와줌으로 손해볼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을 친절하고 후하게 대하라." -조지 부시(George Bush, Notes on the Book of Exodus, 1856).
5절.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다윗은 모든 종류의 고리대금업을 예외 없이 금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리대금이라는 명칭은 어디서나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악한 것을 숨기기 위해 그럴듯한 이름을 교묘하게 만들어 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고리대금업보다 더 비싼 이율로 사람들을 착취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신다. 그분은 이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신다. 이들 중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흥정을 하는 자들도 있는데 이것은 고리대금업보다 더 심한 것이다. 어떤 흥정이든 간에, 한 쪽이 손해를 보고 다른 쪽은 이익을 보는 그런 흥정은 잘못된 것이다.
모든 종류의 고리대금업이 이처럼 불법적인 것이냐고 질문할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불법적인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이런 일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은 더욱 담대해져서 어떤 종류든지 가리지 않고 이 일에 종사할 것이다. 반면에 이런 일이라도 합법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인정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 규제를 느슨하게 적용하여 고리대금업을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무엇보다도 독자들에게 이것을 말하고 싶다. 속임수로 다른 사람에게서 이득을 취하고, 그들에게 슬프고 비통한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은 합법적인 것이 아니다······하나님께서 레위기에서 고리대금업을 금지하시며 그 이유를 기록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식을 취하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식을 위하여 돈을 꾸이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식물을 꾸이지 말라"(레 25:35-37). 이 율법이 기록된 목적은 동정과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가난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압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율법을 특히 유대인들을 위해 제정하셨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나 있는 공의의 원칙은 모든 나라, 모든 세대에도 적용되는 것이며, 우리는 궁핍하고 곤고한 환경에 처한 가난한 자를 착취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되 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이는 불법적인 고리대금업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변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네쉐크"(^vn)인데, 이 말은 '물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파생한 것이다. 이것은 돈을 빌린 자를 강탈하고 빼앗을 때에 고리대금업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에스겔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전적으로 금지한 듯하다(겔 18:17; 22:12). 그러나 그도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부정하고 교묘한 방법을 보는 눈이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평등의 법칙을 우리의 마음에 새긴다면, 고리대금업에 대해 길게 논쟁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존 칼빈.
5절.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금지한다(출 22:25; 레 25:37; 신 23:19; 잠 28:8; 겔 18:8). 이러한 구절들을 살펴보면, 가난한 자들이 돈을 빌려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람들이 돈을 빌린 것은 투기나 장사를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이들은 어려움에 처해서 돈을 빌린 것이다. 이런 경우에 돈을 빌려주는 것은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형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그들을 도와주지 않고 이 기회를 타서 이익을 얻고 그로 더 큰 어려움에 처하게 하는 것은 큰 죄악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세의 율법은 신약 시대에도 의미가 있다. 투기를 위해 돈을 빌리는 자본가들에게 이 율법은 아무 관계가 없다. "변리"라는 뜻의 "네쉐크"(^vn)는 이런 고리대금업이 이웃을 더욱 가난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구절을 시대에 맞지 않게 적용한다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그는 그의 돈으로 이익을 남기지 않으며." -헹스텐버그.
5절.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라틴어로 "테레도"라고 불리는 벌레가 있는데, 이 벌레는 나무 속에서 산다. 만져 보면 부드럽지만, 단단한 목재를 먹는 이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고리대금업자는 처음에는 부드럽고 다루기가 편하다. 그러나 당신이 조심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이빨은 더욱 단단해지고 마침내 당신의 살과 뼈를 모두 먹어 치울 것이다. 그는 사랑을 외치지만,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다.
담쟁이덩굴이 상수리나무를 사랑하는 것처럼 타고 올라가 칭칭 감고서 상수리나무의 수액을 빨아먹으며 자라고, 마침내 상수리나무를 뒤덮어 버려 나무로 자라지 못하게 한다. 이처럼 고리대금업자도 가난한 자를 타고 올라가 채무자를 팔로 껴안고, 이렇게 해서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의 모든 것을 빨아먹는다. 그리하여 채무자는 결코 부유해질 수 없게 된다. 고리대금업자가 즐기는 쾌감은 고양이가 멍청한 쥐를 가지고 노는 것과 비슷하다. 고양이는 쥐와 놀지만, 이 고양이의 놀이가 쥐에게는 곧 죽음인 것이다. 고리대금업자는 가난한 채무자를 즐거워하지만, 그의 즐거움은 채무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과 같다. 여우는 교묘하게 미끌어지고, 넘어져 구르고, 사냥감에 다다르기까지 여러 가지 행동으로 지체하다가 마침내는 사냥감에 가까이 다가가서 사냥감을 덮쳐 먹어 치운다. 고리대금업자도 여러 가지 좋은 말을 많이 하고, 공정한 약속을 내세우고, 매우 친절한 척 가장하지만 마침내 당신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게 되면, 당신을 부숴뜨리고 만다.
고리대금업자는 가난한 자를 희생물로 삼아 그의 형제의 궁핍함으로 부자가 되고, 헐벗은 자의 옷으로 치장하며, 이웃의 가난을 모아 부자가 된다. 그는 가난한 자의 빵으로 먹고, 큰 동물이 작은 동물을 삼키듯 가난한 형제를 삼킨다. 암브로스는 이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것은 없다고 했다. 크리소스톰은 이보다 더 비참하고 불평등한 것은 없다고 했다. -리처드 턴불.
5절.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부자는 가난한 자로 자신의 배를 채운다.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삼키듯, 고리대금업자는 가난한 자들을 삼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신 15:4)고 말씀하신 분이 이스라엘에 고리대금업자가 없으리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에 고리대금업자가 있다면, 역시 가난한 자도 있을 것이다. 변호사들이 소송을 거는 자들을 만들 듯이, 고리대금업자는 거지를 만들기 때문이다······죄를 짓고서 살아야 하는 직업은 비참한 직업이다. 자신이 모은 재물을 보고서 마음속으로 '이 모든 것을 정당하게 벌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평안한 자이다. 그가 죽음을 당할 때, 그리고 그의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줄 때에는 "내 재산을 너희들에게 물려주겠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리대금업자들은 "내 재산을 너희들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너희들에게 물려주겠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고리대금업자는 결코 평안하게 죽지 못한다. 그가 행한 모든 범죄에 보상을 치르지 않고 죽는다면, 그는 죄 가운데서 죽기 때문이다. -헨리 스미스.
5절.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초대 교회는 다른 사람들을 물어뜯는 고리대금업자를 무척 혐오했다. 그들은 고리대금업자를 책망하면서, 서기관들로 증서를 쓰고 증인을 세워서 어떤 이득도 취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그의 유서는 아무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의 집은 마귀의 집이라고 불렀다. 어느 누구도 그와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금했고, 그의 집에서 불씨를 가져오지도 못하게 했다. 그들이 죽은 후에는 크리스천의 묘지에 묻히지도 못했다. 이 죄는 도둑질한 죄와 같이 여겨졌다.
에스겔은 이 죄를 음행과 폭행의 동류로 삼았다(겔 18:11-13). 이 죄는 압제의 딸과 같고, 우상 숭배의 자매와 같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산에 거하지 못한다. 이 세속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도둑이나 음행하는 자들보다 더 정직하다고 생각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모두 같은 존재로 생각하신다. -존 윔스(John Weemse, 1636).
5절.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뇌물을 받고서 무죄한 자를 해하는 자는 지옥으로 가는 길을 걷는 자이다. 이런 자들은 탐욕스럽게 뇌물을 취하며 공의를 굽게 한다. 만일 재판관이 내게 지옥으로 가는 길을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첫째, 탐욕을 품으라. 탐욕의 독으로 마음을 물들게 하라. 둘째, 한 걸음 더 나아가 뇌물을 취하라. 셋째, 심판을 굽게 하라. 아! 이것들은 어머니와 딸, 그리고 손녀와 같다. 탐욕은 어머니이다. 그녀는 뇌물을 낳고, 뇌물을 취하면 심판을 굽게 한다. 이 모든 더러운 것을 씻어 버리는 네번째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재판관을 교수대로 끌고가는 것이다. -휴 래티머.
5절. "뇌물을 받고." 재판정의 법관들은 자주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친다. 그들은 사건을 맡고 재판을 하면서 자신의 양심에 악하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이것은 법관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 무죄한 자는 그물 속에 걸려드는 고기와도 같다. 그러므로 모든 법관들에게 이 구절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라고 권한다. -조지 다우네임.
5절. "이런 일을 행하는 자." "이런 일"이란 어떤 일을 말하는가? 그것은 그가 무엇을 믿느냐, 예배 순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에 대해 많은 것을 듣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설교를 하고 기도를 하며 이러한 것들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가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경건한 사람인가를 묻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그가 신학교 전임교수라거나, 확실한 유신론자라거나, 언변이 좋은 자라거나, 근면한 교사나 많은 재능을 가진 형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로 시험하는 날이 되면 신실하지 못한 행동들은 모두 지푸라기처럼 불에 타겠지만, 이 사람은 정직하고 신실하여 시련이 와도 이것을 이기고 굳건히 설 수 있는 자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옷을 입고서 그분을 섬기지 않는다면 이는 은혜로우신 주님을 놀리는 것이다. 그분을 입으로는 시인하면서 우리의 행동으로 부인한다면, 이는 가룟 유다처럼 그분을 입맞춤으로 배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절하면서 조롱했던 군병들처럼 우리는 그분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배하면서도 그분의 머리를 때리며, 빌라도처럼 그분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서 십자가에 못박으며 그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새기지는 않는가? 다시 말해서, 그분을 경배하는 우리가 그분을 슬프게 하고 상처를 입히지 않는가?
입으로는 크리스천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이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아무도 구원할 수 없으며, 오직 심판만 무겁게 할 뿐이다. 형식에 치우친 예배는 뼈만 앙상한 해골이며 종교적 사기일 뿐이다······우리에게 선행이 없다면, 악한 일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하지 않은 것에 핑계가 될 수 없다. 바쁜 벌들의 세계에서, 아무런 침도 없는 수펄은 악한 일을 행할 도구가 없지만, 또한 할 일이 없을 때에는 벌통에서 당연히 쫓겨나는 것이다. -아담 리틀턴(Adam Littleton, D.D., 1627-1694)의 글을 요약한 것.
5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시편 기자는 이런 일을 '읽는 자'나 '듣는 자'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한다고 했다. 이러한 명령을 읽거나 듣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헛되고 악한 자들이 무수히 교회로 들어와 교회는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을 읽지 못했거나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은 매우 적거나, 아니면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행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는 또한 이러한 것을 '말하는 자'라고 하지 않고 "행하는 자"라고 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직, 정의, 진실 등에 대해 유창하게 말을 할 수는 있지만, 그들 안에서는 정직한 행위나 의로움이나 속이지 않은 진실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훼방하는 것은 죄이고, 상처를 주는 것은 악이며, 거짓 소문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비로운 행동이 아니며, 성도들은 악인에게 아첨해서는 안 되고, 약속을 어기고 거짓 서원을 해서는 안 되고, 고리대금업을 하는 것은 압제하는 것이고,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는 것은 극히 잔인한 처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이웃을 참소하고, 여러 가지 헛된 소문을 믿으며, 악인에게 아첨하여 이득을 취하려 하고, 거짓으로 맹세하고, 고리대금업으로 사람을 압박하며, 뇌물을 받고서 무죄한 자를 억압하기도 한다. 이처럼 공의에 대한 말은 하면서도 공의를 행하지는 않는다.
다윗은 또한 '설교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경건치 못한 자들이 여호와의 성산에서 거하고 여호와의 전에서 자리만 주어진다면 설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도 발람처럼 "발락이 그 집에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발람은 발락이 주는 불의한 재물을 받았다. 그는 탐심을 이기지 못하고, 여호와의 무죄한 백성인 이스라엘의 파멸을 위해 일했다. -리처드 턴불.
5절.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거룩한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천사들의 기쁨이다. 그녀는 눈을 들어 구세주라고 알고 있는 영광스러운 심판관을 바라본다. 그녀는 천둥이 치는 중에도 감히 서 있으며, 죄의식이 마음 한 구석으로 스며올 때면, 그분이 변호해 주실 것을 확신한다. 온 세상이 그녀가 공의롭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거짓 증인이 나타나도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녀의 양심이 증언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죄의식이 없기에 자유를 누리고 용감하다. 그녀의 앞이마는 맑은 하늘처럼 깨끗하고 부드럽다. 그녀는 은혜의 보좌를 향해 무릎을 꿇었고, 그녀의 발은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고, 그녀의 손은 의로운 천을 짠다. 선한 사람들은 그녀를 축복하고, 천사들은 그녀를 보호하며,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께서 그녀에게 입을 맞춘다. 그리고 온 세상이 불에 탈 때, 그녀는 기쁨의 산으로 옮겨져, 축복의 보좌에 영원토록 앉게 된다. -토머스 애덤즈.
힌트
1절. 땅과 하늘에서 교회의 일원이 되는 자격. 자신을 살펴보게 하는 주제.
1절. (1) 교회와 장막의 비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고, 희생 제물을 바치고, 은혜의 집기들을 보존함. 겉은 초라하나 속은 영광스러움. (2) 교회와 장막의 두 가지 위치에 대한 비교. 광야에서 이동하여, 성산에서 정착함. (3) 교회와 장막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 제사장들의 비교 등.
1절. 위대한 질문. 왜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는가? 단순한 호기심, 절망, 경건한 두려움, 진실된 마음, 다른 사람의 실족으로 혼란해진 영혼, 거룩한 믿음. 각각의 경우에 대해 답해 보라.
1절. 시온의 시민에 대한 묘사. -토머스 보스턴의 설교.
1절. 진실된 성도들을 분별하고자 하는 마음. 어디까지가 적법하고 유익한가?
1절. 하나님만이 진실된 성도를 분별하실 수 있다.
2절. 정직하게 행하는 자. (1) 그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는 마음이 정직해야 한다. 마음이 굽은 사람은 정직하게 걸어갈 수 없다. (2) 그는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충동, 야망, 이익, 두려움, 아첨을 따라 걸어서는 안 된다. 그는 어떤 방면으로도 굽어 있으면 안 되며, 똑바로 서 있어야 한다. (3) 그는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 덫과 같은 것이 그를 잡으려고 할 것이다. (4) 어디로 걸어가야 하는가? 그는 의무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 길은 그가 정직하게 걸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5)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는가? 위, 바로 위를 보면 정직하게 걸을 수 있다.
2절.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 주제-마음의 진실과 마음의 거짓.
2절 상반절. 시온의 시민들은 정직하게 걷는 자들.
2절 중반절. 시온의 시민들은 의를 행하는 자들.
2절 하반절. 시온의 시민들은 진리를 말하는 자들. -토머스 보스턴의 네 편의 설교.
3절. 악의 비난. 이것은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참소하는 자, 고난받는 이웃, 훼방하는 자.
3절. 훼방치 않는 자. 다른 사람에 대한 나쁜 소식을 너무 쉽게 믿어 버리는 죄. 일반적이고, 잔인하며, 어리석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악한 것이다.
4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실제로 존중하는 의무. 칭찬, 순종, 도움, 본받음 등.
4절. 사람들의 실제 성품을 보지 않고 다른 것으로 그를 판단하는 죄.
4절 하반절. 주 예수는 우리의 변함이 없는 보증. 그분의 맹세, 그분이 받은 상처.
5절. 경건한 자의 증거와 특권.
5절 하반절. 경건한 자의 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