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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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전의 시편강해

시편 1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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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주제-이 시에는 “다윗의 기도”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만일 다윗이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항상 간구하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비행기 조종사가 폭풍이 몰아치면 비행장으로 착륙을 서두르듯, 그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서둘러 기도에 전념했다. 다윗은 자주 기도했기 때문에 시편에 나오는 그의 기도가 언제 드려진 것인지 다 알 수는 없다. 그가 불 같은 시험을 당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의 내용에 나타난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을 보면 그가 이러한 불 같은 시험 중에서도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은 것이 확실해진다. 이 기도는 땅에서 박해를 받을 때에 ‘하늘의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이다. 영적인 눈을 가진 자는 이 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구성-시편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석가로서 명성이 있는 데이비드 딕슨의 제안에 따라 네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4절다윗이 대적들과 논쟁하는 가운데 공의를 바람.

5-6절시련 가운데서도 의롭게 행할 수 있도록 여호와의 은혜를 간구함.

7-12절원수들에게서 보호해 주실 것을 간구함.

13-14절원수들이 실망하게 될 것을 간구함.

15절모든 일이 마침내 선하게 결말이 날 것을 확신하는 말로써 끝을 맺음.


강해


1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2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

3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4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1절.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못된 짓을 하는 자가 말은 시끄러운 법이다. 그러므로 압제를 당하는 자는 그가 하는 소리가 묻혀 버릴 것을 염려하여 1절에서만도 세 번이나 그의 소리를 들어 주실 것을 간구한다. 마음이 상한 자는 위대한 심판주께서 귀를 여시고 그의 목소리를 들어 주실 것을 간절히 바란다. 그분이 들으시면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실 것을 확신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리를 들으실 수 없거나 들으려 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진정 비참한 상태에 빠질 것이다. 어떤 신학자들은 우리가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우리가 집시들처럼 산골짜기나 빈민촌에 지내기를 고집한다면 집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자신의 뜻만 고집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속죄소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하는 것을 듣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다.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우리는 올바른 길을 걸으면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결코 정직한 자를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잘못이 있을 경우에는 어떠한가? 그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근거하여 간구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큰 특권이다. 하나님은 정직한 소리를 항상 들으신다. 내게 잘못한 것이 있어서 나를 고소한다면, 그때에도 나는 더욱 큰 소리로 그분의 아들의 정직함을 들으실 것을 기도할 수 있다:"오, 하나님이여, 정직한 자의 소리를 들으소서. 메시아의 소리를 들으소서." 제롬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으며, 호슬리 주교도 이 번역을 극찬했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옳든, 옳지 않든 이 기도는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적합한 기도이다. 우리에게 잘못이 있을 때에도 우리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이렇게 간구하자.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이 구절은 간구하는 자가 얼마나 열심히, 간절하게 간구하는가를 보여준다. 이 기도는 그저 입으로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강청하는 기도이다. 누가 이 부르짖음을 저지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마음으로, 애통하며 부르짖는 기도는 바위를 녹이며, 정녕코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인다. 우리는 울면서 태어났고, 자라면서 울었다. 이 울음 소리는 사람의 소리 중 가장 자연스러운 소리이다. 우리의 기도가 어린아이의 울음과 같다면 지적인 기도는 아니지만 더 자연스럽고, 유창하지는 않지만 더 진실된 기도일 것이고, 우리 하나님께는 더 호소력 있는 기도가 될 것이다. 어린아이의 울음에는 부모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 있다.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같은 기도를 반복하는 것은 헛되지 않다. 기도의 반복은 미신이 아니며, 단순히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못을 고정시키고 깊이 박기 위해서 망치로 같은 곳을 계속해서 내려치는 것과 같으며, 거지가 어떤 집의 대문을 계속 두드려서 적선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과도 같다. 

"거짓 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 진실함이 없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 거짓 된 입술은 사람에게도 가증스러운데, 하물며 하나님께는 어떠하겠는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지극히 작은 위선이라도 그대로 남겨 둔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일 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것이다. 위선으로 경건을 가장하는 것은 그 악함이 두 배에 달한다. 하나님을 속이고 아첨하려는 자는 이런 짓을 자신처럼 어리석은 자들에게나 시험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바라보시고 아시는 그분을 속인다는 것은 그물로 달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덫으로 해를 잡으려는 것과도 같다. 하나님을 속이려는 자는 이미 자신을 엄청나게 속인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신실하게 한다는 것 자체는 마치 길거리에 있는 거지가 진실되게 구걸하는 것과 같이 그 자체에 별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을 귀하게 여기시고, 정직하고 열심을 내어 기도하는 자에게 귀를 기울이신다. 


2절.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시편 기자는 기도를 통해서 담대해졌다. 그리고 이 땅의 심판주께서 그의 문제에 대해 판단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그는 비열하고 악의에 찬 중상모략을 당했다. 가장 높은 곳에 계신 분의 재판정에 이 문제를 가지고 와서, 아무런 죄도 없는 결백한 사람처럼 심문을 피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실 것을 간청하는 것이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비밀을 지킬 것을 바라지 않고 온 세상에 공포해 줄 것을 바란다. 그는 재판에 대한 판결을 내리고 그 판결이 시행되기를 바란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도 이처럼 담대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태도로 자신을 변론하면서 자신의 죄를 숨기고 의로운 체해서는 안 된다. 죄를 미워하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은 끔찍한 오만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의가 되신다면, 이제 심판이 시작되고 지옥이 우리의 발 아래서 그 입을 벌린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심판의 날에도 난 담대하리

누가 나를 정죄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피로 사함받았으니

죄의 저주와 수치가 떠나갔도다.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 성도들의 심판주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세상의 재판정에서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심판을 받을 수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애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편애하심으로 율법을 행하지 않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공정한 심판을 바라며, 우리 구세주의 피와 의로움을 힘입고 죄 사함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공평한 공의의 추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저울질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심판을 피할 수 있도록 속이는 저울로 우리를 저울질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기준으로 평가하실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윗의 경우, 그는 이 특정한 사건에서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이 이 사건을 바라보실 것을 소망했다.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판단하신다면 그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3절.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다윗은 베드로가 했던 말과 같은 말을 했다:"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 재판장 되신 여호와께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그분께서 우리를 변호해 주실 것을 바란다면, 우리는 분명히 이 재판에서 이길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요일 3:21).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다윗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주여, 주는 언제든지 나의 집에 들어오셨나이다. 아무도 내 곁에 있지 않고 홀로 있을 때에도 주는 나를 보셨나이다. 주께서 불시에 나를 찾아오시고 나의 꾸밈이 없는 행동도 보셨나이다. 주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힐난하는 죄에 대하여 정말 내가 범죄했는지 아닌지를 다 아시나이다."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어느 곳에나 계시는 그분을 생각하면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은 복 있는 자들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밤중에 찾아오시기를 바란다. 이 방문은 감미로운 것이다. 이 감미로움을 체험한 자들은 주께서 다시 오셔서 가르쳐 주시고 함께 교제를 나눌 것을 더욱 바라는 것이다. 여호와여, 우리가 위선자였더라면, 주님과의 교제를 이렇게 사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다윗의 원수들이 그를 비난하는 것처럼 그가 위선적이고 악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가장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가혹한 시련을 주시고 도가니에 던져 넣으신다. 용광로 속의 금속에서 나오는 찌꺼기는 끔찍한 것처럼, 시련을 당하는 성도들은 참회하며 눈물을 쏟아 낼 것이다. 금속을 평가하는 자가 순도를 측정하고, 마침내 아무런 찌꺼기도 없이 순도 100%의 금이라고 평가를 내린다면, 이는 진정 영광스러운 일일 것이다. 성도들도 이처럼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아무런 흠도 없이 영광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우리를 대속하신 구세주께서 그분의 아름다움과 온전함으로 우리를 둘러 주시면, 모든 것을 다 보시는 전지하신 하나님도 아무런 흠을 찾지 못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야곱에게서 죄를, 이스라엘에게서 악한 것을 발견치 못하신다.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아! 우리의 입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입으로 범죄치 않으려면 결심하고 또 결심해야 한다. 혀의 질병은 그 수가 허다하여, 육체의 모든 질병을 합해 놓은 것처럼 많다. 또한 혀의 질병은 만성적인 질병으로 그 뿌리가 깊다. 우리가 손과 발을 묶을 수는 있으나, 누가 혀를 재갈 물릴 수 있겠는가? 쇠사슬로 미친 사람을 묶는다고 하지만, 어떤 사슬로 혀를 제어할 수 있겠는가? 이 혀는 영특하게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 단순한 결심으로 이것을 제어할 수 없다. 혀를 길들이는 것은 사자를 길들이고, 뱀을 길들이는 것과 같지 않다. 어느 누구도 혀를 길들일 자는 없다. 다른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은 사람은 더욱 자신을 제어하는 데 마음을 두어야 한다.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 시편 기자는 이처럼 거룩한 결심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을 변호하는 데 너무 지나쳤다면, 이것은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그의 입술을 감미롭고 단순한 진리에 맞추어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비난을 받았다. 사람들이 품는 악의는 가장 순수한 것도 더럽힐 수 있는 것이다. 그림자가 없는 햇빛은 없고, 새가 쪼아먹지 않는 익은 열매는 없다. 


4절.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우리의 일기장에는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이라고 그들의 이야기를 남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죽은 행실을 떠나고자 하는 소망을 갖는다.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그는 말씀 속에 있는 바른 길을 따랐으며, 악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를 지키고 악에서 보존하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곧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을 본받으며 살고 있을 것이다. 강포한 자의 길은 때때로 우리를 유혹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심하게 해를 끼친다거나, 우리 안에 분노하는 마음이 자리를 잡게 되면, 우리는 강포한 자처럼 되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본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은 그를 대적하는 원수들에 대해서도 하늘에서 불을 내리기를 기도하지 않으시고, 다만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온유하게 기도하셨을 뿐이다. 모든 죄의 길은 사탄의 길이다. 자신의 마음을 저 살인자에게 주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이들은 잠시나마 악한 욕망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다. 

선반 위에 먼지가 수북히 쌓인 채로 버려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라. 이 말씀만이 사람을 유혹하고 함정에 빠뜨리는 죄의 미로에서 당신을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인생의 위험한 길을 걷지 않도록 젊은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가장 좋은 선물이다. 성령의 말씀인가, 아니면 악한 영의 유혹인가, 우리는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다윗은 그의 신실성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신은 불경건한 자들이 걷는 파멸의 길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의 위대하신 왕의 원수들에게서 손을 깨끗이 씻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하나님께 우리 사정을 아뢰고 기도할 수 있겠는가? 


5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

6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5절. 시련을 당할 때 올바로 행동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시기하는 자들이 많이 있어서 촛불을 불어 끄려고 할 때, 그 촛불을 계속 켜 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악한 시대에는 특히 기도에 힘써야 하며, 지혜로운 자들은 항상 기도하며 지낸다. 플라톤은 어느 날 그의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사람들이 너를 악하게 비방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만큼 그렇게 의롭게 살라." 이것은 좋은 충고이지만, 그는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는가는 알려 주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에서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다윗의 삶에서 우리는 그가 보여주는 본을 발견한다. 우리가 악에서 보존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윗처럼 우리를 보존하시는 자에게 부르짖어야 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KJV에는 "나의 걸음을 주의 길에 굳게 지키소서"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말을 조심스럽게 타는 자들은 언덕을 내려갈 때에는 말의 고삐를 붙든다. 우리는 때로 빨리 달리기도 하고 때로는 느리게 걷기도 한다. 길도 항상 같은 상태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는 길을 지키신다면 우리의 걸음이 어떠하든지, 길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우리를 넘어지게 하지 못한다. 넘어지거나 또는 무릎이 깨어지도록 다친 자들은 열심을 두 배로 내어서 이 기도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모두 아담이 범죄하여 실족한 이후 무릎이 약해졌다. 그러므로 매일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한다. 온전하게 지음을 받은 아버지가 넘어지고 실족했다면, 불완전한 아들이 어찌 허풍을 떨며 자랑할 수 있겠는가? 


"주의 길을." 사탄의 길을 버리면서 그는 하나님의 길에 머무르도록 지켜 주실 것을 기도했다. 우리가 선한 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악한 길에서 떠날 수가 없다. 바구니에 알곡이 가득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곧 쭉정이로 가득하게 된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하신 길을 걷는 동안, 여호와께서 은혜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를 간구한다.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 (KJV에는 "내가 실족지 않으리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길을 걸으면서도 실족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길은 좋지만, 우리의 발은 악하기 때문에 실족할 수도 있다. 왕의 대로를 걸으면서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걷다가 넘어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은 싯딤의 골짜기처럼, 사람으로 넘어지게 하는 역청이 많은 법이다. 사람은 유혹을 받아서 넘어질 뿐만 아니라 주의 명령을 지키다가도 실족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교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다. 


6절.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항상 내 기도를 들으시는고로 주의 제단에 담대한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가장 많이 배운다. 곤란한 시절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한 자들은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자신의 문제를 주께 아뢴다. 우리는 지나간 수년 동안 시원한 물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했던 베들레헴의 샘을 끝없이 사모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깨어진 샘을 찾아 베들레헴의 샘을 버리지 않는다.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하나님이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사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주의 귀를 내게 향하게 하소서. 나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마시고 다 들어 주소서. 시편 기자는 그가 맨 처음에 드렸던 기도를 다시 드린다.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 간구하는 것을 마침내 응답하시기까지 구하는 본을 보여준다. 


7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8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9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10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11이제 우리의 걸어가는 것을 저희가 에워싸며 주목하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12저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7절.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우리 주님을 이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은 우리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그분은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성도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그분이 영원히 하실 일이다. 그분은 가장 선한 방법으로, 가장 영광스럽게, 그분의 오른손으로 그분을 신뢰하는 자를 구원하신다. 그러나 결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보호를 받는 믿음은 귀하고 값진 것이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하루살이 같은 인생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 이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실 분이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성도들을 모든 위험에서 격리시키고 구원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어떻게 할 줄 몰라 쩔쩔매는 경우가 결코 없다. 그분의 손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충분하다. 하나님은 다른 구원의 도구를 사용하시기도 하지만, 구원의 도구가 없이도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실 수 있다.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주의 인자하심은 기이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분이 인자를 성실하게 베푸시기에 기이하고, 변치 않기에 기이하며,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베푸시는 것이 기이하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이한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셨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이 은혜는 때때로 숨겨진 채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듯할 때도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나타내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마음이 지쳤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면 이는 더없는 청량제와도 같다. 성도들이여, 이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인가! 이 기도를 잘 살펴보라. 오,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보이소서. 나의 지성에도 인자를 보이사 내 무지함을 없게 하소서. 내 마음에도 인자를 보이사 내 안에 감사하는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나의 믿음에도 인자를 보이사 나의 확신을 새롭게 하소서. 내 체험에도 보여주사 나의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이 단어는 시편 4:3에 나오는 "택하다"라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 이 단어는 "당신의 특별한 자비를 내가 당하는 이 극심한 고난의 시기에 내게 부어 주소서"라는 뜻을 담고 있다. 


8절.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몸의 어떤 부분보다도 눈은 귀하고 섬세하다. 우리는 이 눈을 몸의 어떤 부분보다도 민감하게 보호한다. 그리고 이 눈에서도 특히 눈동자를 특별하게 보호한다. 눈동자를 히브리어로는 "눈의 딸"이라고 부른다. 지혜가 충만하신 조물주께서는 눈을 잘 보호할 수 있는 장소에 두셨다. 예루살렘이 산으로 둘러싸여 보호를 받듯이, 눈동자는 튀어나온 뼈들 중앙에 놓여 있다. 더군다나 이 눈동자를 지으신 위대하신 조물주는 눈을 여러 겹의 피막으로 둘러싸시고, 곁에는 눈썹의 산울타리를 치시고, 눈꺼풀의 커튼을 치시고, 속눈썹의 담을 치셨다. 여기에 더해서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눈을 귀하게 여기게 하시고 위험을 재빨리 감지하게 하셔서, 몸의 어떤 부분보다도 이 눈을 잘 보호하게 하신 것이다. 여호와여, 나를 이렇게 보호하소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고, 그분의 신비스런 몸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부모와 새가 그 자녀와 새끼를 품에 안아 위험에서 구원하고 가슴의 온기로 따뜻하게 품어 주는 것처럼, 여호와여 나를 그렇게 보호해 주소서. 나는 여호와의 자녀이며, 주께서는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가지셨나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간절히 간구하는 기도와 들으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은 함께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9절.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 다윗은 하나님이 그를 "악인"에게서 구원해 주시기를 바랐다. 우리의 원수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그들은 "극한 원수"였으며, 다윗의 생명을 취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할 자들이었다. 성도들을 대적하는 원수들은 진정 극한 원수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믿음을 없애려고 대적하지만, 이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을 노리는 것이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는 우리의 극한 원수이다. 그리고 사망에 이르게 하지 않는 죄는 세상에 없다. 이 원수들은 다윗을 "압제"하고, 외적이 물밀듯이 몰려와 나라를 짓밟고 맹수가 온 땅을 휘젓고 돌아다니듯 그의 영혼을 황폐하게 했다. 그는 원수들의 압제를 받는 것을 마치 외적이 성을 공격하고 포위하여 에워싸는 것으로 표현했다. 우리가 맹렬하고 극한 원수들에게 포위를 당하고 모든 길이 막히면, 우리는 위를 향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우리는 속히 위를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매일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우리 주위에는 위험과 죄가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다. 오, 하나님이여, 우리를 이 모든 대적에게서 구원해 주소서!


10절.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사치와 탐식은 마음을 허황된 기름으로 살지게 하고, 자비로운 마음이나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도록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다. 옛 금언에 의하면 배가 가득 차면 머리가 비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가득 찬 배는 역시 가슴을 비게 한다. 기름진 땅에서는 잡초가 가장 무성히 자라는 법이다. 부와 방종은 죄의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도 같다. 교만과 풍요로운 음식은 소돔의 두 가지 죄였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겔 16:49). 배부른 매는 자기 주인을 잊게 되고, 달이 가득하여 보름달이 되는 때는 태양에서 가장 멀어진 시기이다. 부유한 자들이 연합하여도 생명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에글론의 예에서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에 그 땅에 있던 왕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했다. 그때에 에글론도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데 동참했으나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 주신 것이 여호수아 10장에 기록되었다-역자 주.) 부를 자랑하는 자들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자신을 경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경배할 마음이 없는 법이다. 마음이 이기적인 쾌락으로 가득한 자는 그 입으로 교만하고 오만한 말을 뱉게 된다. 번영과 허영은 종종 함께 동거하는 친구다. 배부른 황소가 주인을 뿔로 받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화 있을진저! 도살할 도끼가 그에게서 멀지 않도다! 


11절. "이제 우리의 걸어가는 것을 저희가 에워싸며." 악인의 분노는 성도 한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여러 성도들을 향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에워싼다. 하만은 한 사람 모르드개에게 분노했을 때, 모든 유대인을 제물로 삼으려 했다. 어두움의 세력은 그들의 주인을 위해서 모든 성도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그분은 우리를 에워싼 자들을 물리치시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깨끗하게 치워 주신다. 악의 세력은 지속적으로 증오를 보인다. 그들은 우리가 걷는 발걸음을 하나 하나 주시해 보며 우리를 덮칠 기회만을 노리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원수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데, 그들의 공격을 당하지 않으려면 얼마나 조심해야 하겠는가! 


"주목하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KJV에는 "그들은 눈을 땅을 향하여 주목하나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트랩은 이 비유를 황소가 상대를 공격하기 직전에 취하는 모습을 들어서 설명했다. 황소는 머리를 땅으로 향하고, 눈은 땅을 주목하고, 온 힘을 다해서 상대를 향해 돌진한다. 이것은 악인이 의인의 발걸음을 주시하고 넘어뜨리려 하는 악의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들은 땅을 주목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짓밟는 땅을 잘 알고 있는 듯이, 그리고 성도들의 과거에 있었던 잘못된 행적에 대한 조사를 마친 듯이, 또는 그들이 걸려 넘어지도록 거치는 돌을 앞에 두어 잡으려는 듯이 땅을 주목하는 것이다. 


12절. "저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사탄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를 공격하는 것보다, 사자는 더 탐욕스럽지도 않고 교활하지도 않다. 사탄과 그의 졸개들은 성도들의 피에 목말라 하고, 그 식욕을 채우고자 모든 힘과 재주를 부린다. 우리는 양처럼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목자는 지혜롭고 강하시다. 그분은 사자가 부리는 간계를 다 아시고 또 그를 이길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의 우리 안에 안전히 거해야 한다. 우리를 노리는 원수들을 주의하자.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낄 때에도 주위를 살펴보며 원수들이 덮치지나 않는지 주의하자. 


13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14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13절. "여호와여 일어나." 원수들이 격렬하게 공격하면, 시편 기자는 더욱 열심히 기도한다. 그는 온전히 전능하신 분만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이제 인내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고, 곧 그분의 행하시는 것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자가 뛰어올라 우리를 공격한다 해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면 이보다 더 좋은 방어는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를 대적하시면, 그 싸움은 곧 끝나고 만다.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원수보다 먼저 행하시고, 그의 지혜를 허사로 돌리시고, 그를 이기소서. 그가 계획한 것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고, 그로 실망을 당하게 하소서. 그를 넘어뜨리소서. 땅에 엎드러지게 하소서. 그 무릎을 꺾으소서. 피정복자가 정복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듯, 저로 땅에 엎드리게 하소서. 사탄이 영광스러운 우리 주님의 발 아래 부복하는 것은 얼마나 통쾌한 모습일까! 오, 주여! 그날이 빨리 임하게 하소서.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KJV에는 "내 영혼을 주의 칼인 악인에게서 구원하소서"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그는 세상에서 아무리 악하고 포악한 자라도, 결국에는 왕 중 왕이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칼이 혼자서 무엇을 하겠는가? 손이 칼을 움직이듯이, 칼을 마음대로 주관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어떤 악인도 우리를 괴롭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해석가들은 이 번역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구절은 칼빈이 해석하는 것처럼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다윗은 여호와의 칼을 사람들의 도움과 대조적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자들은 평안하고 안전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를 괴롭힐 자가 없다. 누가 여호와의 칼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14절. 이 구절의 원문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다. 학자들은 이 구절 안에 있는 거의 모든 단어에 대해 여러 가지 다른 견해를 발표한다. 그러므로 이런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여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역본을 따라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이 책은 KJV를 따랐다. KJV에는 "주의 손인 사람들,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들, 당신의 숨긴 재물로 배를 채워 주시는 그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그들은 자녀가 많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주의 손인 사람들." 경건치 못한 자들을 아버지의 손에 잡힌 칼로 표현했으나, 이제는 아버지의 손에 비유한다. 사람이 그 손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의 포학을 거두실 수 있다는 확신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백성을 해하지 않으실 것이다.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탕자처럼 그들은 "금생에서" 자신의 분깃을 가졌으며, 아버지께서 분깃을 나눠 주실 시기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천로 역정에 나오는 "욕망"(Passion)처럼 그들은 가장 좋은 것을 먼저 취하고, 그들의 짧은 인생을 흥청거리며 소모하고 만다. 루터는 그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신의 분깃을 받게 될까봐 염려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생기는 재물들을 자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을 동시에 우리의 분깃으로 취할 수 없다. 지혜로운 자는 오랫동안,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자신의 분깃으로 선택한다. 


"세상 사람." 그들은 "세상 사람"이며 땅의 구더기와도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오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며, 이 죽을 자들이 사는 좁은 세상에서 단순히 존재하는 자들에 불과하다. 그들이 밟는 무덤 저편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망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는 자들이다.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KJV에는 "당신의 숨긴 재물로 배를 채워 주시는 그들"이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그들은 감각적인 탐심을 따라서 원하는 것을 갖게 된다. 하나님은 이 돼지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알곡이 아니라 껍질로 채우게 하신다. 자비로운 사람은 그가 키우는 개들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뼈다귀를 던져 주는 법이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원수들에게도 먹을 것을 주신다. 땅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금과 은을 악인에게 풍성히 주시면, 그들은 육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으로 땅을 구르며 기뻐하는 것이다. 어느 개라도 그에게 절정의 시기는 있다. 악인들도 그들의 생애에서 절정에 이르는 때가 있다. 그들이 흥왕할 때는 마치 여름 한철과도 같다. 그러나 아! 이런 날들은 그 밤이 얼마나 속히 이르는 것인지! 


"자녀로 만족하고." (KJV에는 "그들은 자녀가 많고"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그들은 자녀들에게 소망을 품고 있다. 그들의 허리에서 나오는 자손이 민족을 이루고 그들의 이름으로 역사의 한 면을 장식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런 소망도 허락하신다. 그래서 그들이 마음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갖게 된다. 사람들은 이런 성공적인 자들을 부러워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성공적으로만 보일 뿐이다!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 그들은 비대해진 관리인과도 같다. 그들의 유언도 역시 비대하고 살찐 것이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뿐이다. 그러나 은혜가 부족하면 모든 것을 버리게 된다. 그들은 이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좋은 것들을 분깃으로 누렸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이라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잊었다. 이 세상에서 조금 지혜로웠지만, 오직 현재만을 생각하고 영원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했기에 지극히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들은 껍데기를 위해 싸우다 속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묘사에서 주위에 있는 성공적인 사업가들, 유명한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처음 보기에는 이런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며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나 오는 세상의 영광과 비교해 보면, 이런 것은 하찮은 기쁨이고, 두더지가 땅을 파는 기쁨과도 같은 것이다. 자기 사랑! 이런 모든 것들은 가장 비속한 이기심에서 시작되고 이기심으로 끝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아! 주님 안에서 시작하고 주님 안에서 끝나는 자들은 얼마나 부유한 자들인지!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면, 우리는 오염당하고 상처를 받게 된다. 오, 하나님! 우리를 이런 모든 위험에서 구원하소서. 


15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15절.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나는 이런 세상 사람들의 행복을 부러워하거나 탐하지 않습니다. 나는 오직 더 좋은 것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 형상을 따라 변화되어 그분의 의로움에 참여하는 것, 이것이 나의 소망이다. 이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잠시 누리는 즐거움을 기꺼이 포기한다. 


"깰 때에." 내가 진정으로 만족할 날이 올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이것을 받을 수 없다. 나는 먼저 잠을 자야 한다. 그러나 나팔 소리와 함께 나는 일어날 것이다.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나는 영원한 기쁨으로 일어날 것이다. 나는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의 형상으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잠깐씩 보면서 지내지만, 저 하늘에서는 하늘 잔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을 영원한 천국에서 성도들이 누릴 영원하고 충만한 기쁨과 비교해 보라. 이는 반딧불을 태양에 비교하는 것이고, 한 통의 물을 대양에 비교하는 것이다. 


주해


머리말. "다윗의 기도." 다른 시편에도 기도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왜 이 시에 특별히 이런 제목이 붙었겠는가? 다른 시에는 기도와 다른 요소들이 함께 섞여 있지만, 이 시는 전체적인 내용이 기도이다.  -비드(The Venerable Bede, 672-735).


1절. "들으소서······주의하소서······귀를 기울이소서." 세 번이나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서 시편 기자가 감정에 복받쳐 열정을 다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건치 못한 자의 힘과 폭력보다는 사실 그들의 교활함 때문에 영적인 사람들이 더 고통을 당한다. 악한 자의 힘과 폭력은 공개된 것이기에 우리가 이것을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 


1절. "거짓 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 '거짓 된 입술'은 무엇인가? 마음과 입술이 서로 모순되면 이는 거짓 된 입술이다. 목소리를 높여서 아우성을 치면서도 그 마음으로는 냉소를 짓는 것, 하나님께는 "내 아버지여, 나의 길을 인도하소서"라고 하면서도 우리의 힘을 다해서 악을 말하고 행하는 것(렘 3:4, 5), 우리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하는 것은 거짓 된 입술이다. 나이든 이삭은 야곱이 입은 옷 냄새를 맡고서 야곱을 에서로 생각했다. 그가 천사의 옷을 입었으나 시커먼 마음을 가졌던 것을 구분할 수 없었단 말인가?······마음속에 품은 죄를, 형식적인 예물을 드리고 거짓 된 마음으로 큰 소리를 지르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면해 주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빈 껍데기만 있는 요란스러운 소리나 돌이 부딪치는 소리, 동전이 짤랑거리는 소리,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리, 내면의 변화도 없고 헌신할 의지도 없으면서 목소리만 크게 내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신다. -스티븐 차녹. 


1절. "거짓 되지 않은 입술." 독수리는 하늘을 향해 높이 오르지만 이는 하늘에 오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잡기 위해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눈을 들고 많은 헌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는 것은 더 안일하고 안전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그들이 품은 악한 계획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그들처럼 좋은 사람도 없다. 그러나 그들을 시험해 보면 그들보다 악한 사람은 없다. 그들의 목소리는 야곱의 소리지만, 손은 에서의 손을 가졌다. 스스로 자신을 성도라고 고백하지만, 행하는 것을 보면 작은 사탄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길게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기도하는 시간은 없다. 그들은 약제사의 작은 약단지와도 같다. 겉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으면서 그 안에는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거룩함의 모조품을 만들어서 그들의 악행을 숨기고, 마귀의 궤계를 만들어 내는 산파와도 같다. -피터 베일스(Peter Bales, 스펜서의 Things Old and New에서). 


1절. "거짓 되지 않은 입술." 의로운 주장뿐만 아니라 의로운 기도도 하나님으로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동기가 된다. 칼빈은 선한 양심을 따라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모든 것을 그분의 판단에 맡기지 않는 것은 영광을 그분께 돌리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한 양심을 따라 기도함으로 이런 죄를 범하지 않게 된다. -스튜어트 퍼론(J. J. Stewart Perowne). 


1절.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당신의 기도가 아름다운 말로 치장이 되어 있지 않아도, 경건한 제스처를 쓰지 않아도 좋다. 마음이 정직하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은 헛된 것들에 불과한 것이다. 기도는 머리나 손이나 눈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 마음의 운동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기도를 "나의 심정을 통하는 것"(삼상 1:15)이며, "마음을 토하는 것"(시 62:8)이라고 했다. 진정, 기도란 우리의 심정을 주님 앞에 토해 놓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로 가까이 나아갈 때는 마음과 심정으로 나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용납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당신도 자신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겠는가? 또한 당신도 자신의 기도를 지켜보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지켜보실 것을 바란다는 말인가? 우리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도 닿지 않는다. -토머스 구지(1605-1681). 

2절.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다윗은 그가 사울을 대하는 마음이 의롭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시기를 바란다. 사울과 그의 신하들은 나를 배반자, 반역자라고 부르지만, 여호와여 그들의 말로 나를 판단하지 마소서.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소서. 그들의 판단이 여호와의 판단과 다른 것을 알게 하소서. 여호와께서는 나를 시험하시고, 내 안에서 어떤 잘못도 찾지 못하셨나이다. -예레미야 버로즈. 


3절.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밤이 되면 우리 영혼은 세상의 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의 일에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 된다. 그때에 하나님은 다윗을 방문하시고 그를 시험하시고 조사하시며, 전에 했던 모든 행사를 그의 마음에 생각나게 하셔서 돌아보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 모든 시험에서 흠을 찾지 못하셨다. 그의 영혼에 좋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거나, 나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조사해 보니 사람들이 그를 비방하는 그런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다윗이 사울에게 악한 의도를 품고 있다는 비난과 의심은 근거가 없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기도하면서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 -조셉 캐릴. 


3절.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이 말은 "당신은 나를 녹이시고, 내게서 어떤 찌꺼기도 발견하지 못하셨으니"라는 뜻이다. 이 표현은 금속을 녹여 찌꺼기를 깨끗하게 제거하고 순수하게 만드는 데서 가져온 비유이다. -게데스(Geddes).


3절.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감찰하셨으나." 주께서는 시련을 통해 시험하신다. 이 시련은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는 밤에 오고, 또 사람을 태우는 불 같은 시험이다. -어거스틴.


3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산에 있다면, 롯의 아내처럼 뒤에 있는 소돔을 바라보지 말라. 당신이 방주 안에 있다면, 노아의 까마귀처럼 방주 밖으로 나가지 말라. 당신의 몸을 깨끗이 씻었거든, 돼지처럼 다시 흙으로 더럽게 하지 말라. 당신이 깨끗하게 되었거든, 개처럼 다시 더러운 곳으로 뛰어들지 말라. 당신이 가나안 땅을 향하고 있다면, 애굽에 있던 고기 삶는 냄비를 추억하지 말라. 당신이 미디안의 군대를 향해 전진한다면, 하롯의 물을 마시지 말라(삿 7:1-8). 당신이 지붕 위에 있다면, 아래로 내려가지 말라. 손으로 쟁기를 잡았거든, 뒤를 돌아보지 말라. 당신의 뒤에 남아 있는 악을 생각하지도 말라. -토머스 플레이피어. 


4절.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우리가 유혹을 받을 때에 준비된 말씀이 있다면 이는 크게 안심이 되는 일이다. 이 말씀을 "성령의 검"(엡 6:17)이라고 한다. 영적 전투에서 말씀처럼 유익한 무기는 없다. 위험한 시기에 밖을 다니는 자들은 검이 없이 다니지 않는다. 우리는 위험에 처했을 때 성령의 검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더 잘 준비되어 있다면, 영적 전투와 시험을 당해서 더 큰 유익이 있을 것이다. 마귀가 그리스도를 공격하러 왔을 때, 그분은 성경 말씀으로 준비되어 있었고, 이 말씀으로 유혹하는 자를 물리치셨다. 우리의 마음에 말씀이 있고, 이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사탄은 우리 안에 들어올 틈을 찾지 못하게 된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요일 2:14). 그들의 강함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4). 우리가 말씀을 알되,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 마음에 새겨진 바 되었으면 정말 큰 도움이 된다. 이 말씀이 우리와 함께한다면, 우리는 사탄의 공격을 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사람이 죄에 빠져든다면, 이는 그가 말씀을 잊어버렸거나 말씀에 대한 사랑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토머스 맨턴.


4절.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행하는 그 악한 행실에서 내가 어떻게 벗어났는지 알고 싶으십니까? 나는 하나님의 좋은 말씀 때문에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 말씀과 상담하고, 이 말씀 때문에 악한 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말씀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을 파멸로 이끄는 사탄의 조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유혹하는 자를 물리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와 사탄을 대적하는 데 그리스도보다 더 좋은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어떻게 무장을 해야 하는지 본을 보이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행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으로 사탄을 멀리서부터 물리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신성을 숨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사탄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시고, 그를 말씀으로 물리치시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앞으로 성도들이 똑같은 원수를 대해서 사용할 검의 효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귀는 리워야단(사 27:1)이 조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리워야단을 검으로 죽이려고 위협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무대로 삼고서 영혼을 삼키는 마귀들은 마침내 말씀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 검으로 무장한 성도들을 만나기까지, 마귀는 적수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윌리엄 거놀.


3, 4, 5절.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를 받은 자들은 죄를 미워한다. 사람이 그가 미워하는 것을 행하려고 결심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사람은 외적인 장애물을 두는 것보다도, 마음으로 싫어한다면 그것을 더욱 멀리하려고 한다. 이 착한 사람은 그의 마음으로 모든 죄를 짓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특히 그가 쉽게 범하는 죄를 짓지 않기로 마음을 작정한 것이다.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는 거짓말을 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3절). 거짓을 말하는 죄가 나에게 접근하려 하면, 나는 숨어서 기다리다가 그 죄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서겠다. 선한 사람은 어떤 목적을 가질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목적들을 수행할 수 있도록 무장한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다:"나의 걸음을 주의 길에 굳게 지키소서. 내가 실족지 않으리이다"(5절, KJV 직역). 그는 자신의 의무를 다 감당하는 데 열심을 품었고, 또 악을 범할 환경은 피했다:"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4절). 악인은 유혹의 길에서 벗어나지도 않고, 유혹을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로 들어서지도 않는다. -스티븐 차녹. 


5절.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 (KJV에는 "나의 걸음을 주의 길에 굳게 지키소서. 내가 실족지 않으리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여호와여, 사울이 내게 진노한다 하여도,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로 당신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시고, 내 마음이 당신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소서. 내 발걸음이 당신에게서 멀리 미끄러지지 않게 하소서. 그들이 나를 잡으려 하나이다. 내가 조금만 실족하여도 이것을 기회로 나를 공격하나이다. 나는 약하고 가련한 존재이오니, 여호와여 나를 도우사 나로 실족지 않게 하소서. -예레미야 버로즈. 


5절.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 (KJV에는 "나의 걸음을 주의 길에 굳게 지키소서. 내가 실족지 않으리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공중으로 돌을 던지면 한없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며, 또한 힘이 다하면 공중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처럼 우리의 타락한 속성도 아래로만 내려가는 것이며, 마귀와 세상과 육체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다스리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덕을 세우고 유혹과 시험을 받을 때에 실족하지 않고 서 있을 수 있겠는가? -로버트 코드레이. 


5절.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 (KJV에는 "나의 걸음을 주의 길에 굳게 지키소서 내가 실족지 않으리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여호와여, 내가 주께 손을 내밀도록 나를 굳게 붙드소서. 당신은 인생의 경주를 끝내는 자에게 면류관을 주시나니, 나로 이 경주를 마치고 면류관을 쓰게 하소서. 다음의 기도는 베자(Beza)가 드렸던 기도이나, 이제 우리의 기도로 삼아야 하겠다: "여호와여, 내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온전케 하소서. 그리하여 항구에 다 이른 시기에 나로 파선하지 않게 하소서." -토머스 왓슨. 


5절.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 (KJV에는 "나의 걸음을 주의 길에 굳게 지키소서 내가 실족지 않으리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사탄이 우리의 영혼을 둘러싸고 불화살을 쏘아 대며 맹렬하게 공격할 때, 우리의 타락한 성품을 보고서 갖가지 전략으로 우리를 유혹할 때, 바람과 파도가 함께 우리를 몰아칠 때, 그때 우리는 다윗처럼 기도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그가 공격을 받았을 때에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세 번"이나 기도하며 그가 두려워하던 것이 떠나가기를 기도했다(고후 12장). 그리스도께서도 우리가 매일 기도하도록 가르치셨다:"우리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시험은 다음과 같은 때에 가장 위험스러운 것이다: (1) 가장 어울릴 때-사탄이 우리의 기질을 따라서 시험할 때, (2) 지속적일 때, (3) 가장 위대한 기회와 권력을 우리 앞에 두고서 유혹할 때. -조셉 사이먼즈. 


6절.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시편 기자가 부르짖은 이유는 하나님이 응답하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와 반대로 말하여 "내가 부르짖었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나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주께서 들으실 것이기 때문에 부르짖었다고 했다. 항상 부르짖음이 먼저 있고 들으심이 나중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부르짖기 전에 이미 우리를 들으시고 우리를 도와주신다. -플레이피어. 


6절. "내가 불렀사오니." 재난을 당할 때 기도는 가장 좋은 치료약이다. 이것은 어떤 질병도 고치는 만병 통치약과 같다. 이 약은 어느 때는 병을 치료하지만 대부분 효과가 없는 돌팔이 의사가 처방한 만병 통치약이 아니라, 확실한 임상 실험을 거친 것이고 가장 지혜롭고 학식이 있으며 정직하고 기술이 좋은 의사가 처방을 내린 약이다.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 1575-1653). 


6절. "내가 불렀사오니." 내가 여호와를 불렀사오니, 여호와여 이제 나를 들으소서.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에 기도의 바퀴가 돌아가고 있었다면 큰 위로가 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은혜의 보좌에 더욱 담대히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업가는 오래 전부터 고객으로 있는 자들에게 기꺼이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매튜 헨리. 


8절.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했다:"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7절). 내가 깊은 곤경에 처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어느 곳을 향해야 할지 알지 못하오나 오직 나의 눈은 당신만을 향하옵니다. 내가 깊은 곤경에 처했사오니, 당신의 기이한 인자를 내게 베풀어 주소서.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소서. 오, 여호와여! 나는 사울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개와 같이 되었고, 그들의 눈에 악한 존재가 되었나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찬송을 받으옵소서. 나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사오며, 주께서는 나를 눈동자처럼 귀하게 생각하는 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성도들은 그분께는 언제나 소중하고 귀하다. 그러나 특히 박해받는 성도들, 그들은 하나님의 눈동자와도 같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께 귀한 존재이지만, 특히 핍박을 받을 때는 눈동자와도 같다는 것이다. 눈동자는 약하고 어떤 위험도 방어할 능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이 눈동자를 더욱 귀하게, 세심하게 보살핀다. 성도들은 약하고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더욱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다. -예레미야 버로즈. 


8절. "눈동자." 하나님께서 눈을 만드실 때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만드셨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눈이 약하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그분은 눈꺼풀을 문처럼 달아 주셔서 눈을 보호하게 하셨다. 그래서 눈을 사용해야 할 때면 그것을 열고, 또 잠을 잘 때면 그것을 닫지 않는가? 눈을 바람으로부터 해를 받지 않도록 보호하시고자 속눈썹을 심어 주신 것이 마치 공기 여과기를 달아 주신 것과 같다. 또한 눈 위에는 챙을 달아 주시듯 눈썹을 붙여 주셔서 머리로부터 흐르는 땀이 눈에 어떤 해도 끼치지 못하게 하셨다. -소크라테스(Socrates).


9절. "나를 압제하는 악인." 시편 기자는 그를 압제하는 원수를 악인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기도하는 듯하다:"그들은 나의 원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이기도 하나이다. 그들은 잔인하게 행하여 나의 대적이 되었고, 또한 악한 자들이라 당신의 원수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옳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시고 나를 구원하소서." -존 하우. 


10절.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기름이 그들을 둘러쌌다. 그들의 눈도 기름으로 싸여 밖을 보지 못하고, 그들의 마음도 기름으로 싸여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이 구절은 그들이 지극히 부유하고 권력을 가졌으며, 그래서 교만과 허영심으로 부풀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탈굼은 이 구절을 이렇게 풀어서 썼다:"그들의 부가 축적되고, 기름이 그들을 둘렀다" -존 길. 


10절.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은 세상의 부귀를 얻고서 허영에 빠졌고, 아무런 지각도 없고 이성이나 두려움도 사라졌다. 성경은 기름으로 비대해진 마음을 이런 뜻으로 사용했다. 사람의 기름에는 감각이 없어서 사람으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지극히 비대해진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반니 디오다티. 


10절.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사람이 비대해졌다는 것은 종종 그가 매우 교만해졌다는 것을 표현하는 데 쓰이는 말이다. 거드름을 피우는 자들에 대해서 "그가 자기 몸의 기름에서 말을 한다"라고 표현한다. 아! 입을 싸고 있는 기름! 그는 얼마나 교만하게 말하는지! "조심해! 네 입에서 기름을 짜 버릴거야." -조셉 로버츠(Joseph Roberts, Oriental Illustration, 1844). 


11절 하반절. "이제 우리의 걸어가는 것을 저희가 에워싸며 주목하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KJV에는 "이제 우리의 걸어가는 것을 저희가 에워싸며 그들은 눈을 땅을 향하여 주목하나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누군가 자신의 비리를 추적하여 왕이나 권세자들에게 고하려는 자들이 있다면, 그는 이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그들은 항상 내 주위에서 맴돌고 있어.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살펴본단 말이야. 내가 걷는 발걸음을 항상 주시하고 있지." 이 말은 그들이 내가 땅에 남긴 족적을 찾으려 한다는 말이다. 이런 목적으로, 다윗의 원수들은 눈을 땅을 향해 주목했다. -조셉 로버츠. 


11절. "우리의 걸어가는 것을 저희가 에워싸며." 이 사람들은 사냥감을 몰이하듯 제물로 삼을 자를 포위하여 도망가지 못하게 한다. -C. H. S.


11절. "주목하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KJV에는 "그들은 눈을 땅을 향하여 주목하나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이 구절은 사냥꾼이 그가 추적하는 동물의 족적을 찾아내어 사냥감을 추적하는 데서 가져온 표현일 것이다. -Religious Tract Society's Commentary. 


11절. "주목하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KJV에는 "그들은 눈을 땅을 향하여 주목하나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이 표현은 사냥꾼의 행동을 묘사하는 표현일 것이다. 사냥개가 토끼를 놓치고 냄새를 맡아서 더 이상 추적하지 못할 때, 사냥꾼은 산토끼의 족적을 찾기 위해 땅을 자세히 살펴본다. -조셉 캐릴. 


12절. "저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실낙원(Para- dise Lost)에는 사탄이 우리의 첫 조상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서 그들을 파멸시키려고 주위를 배회하는 모습을 시적인 표현으로 잘 묘사했다.


······그들 주위에서

사자는 눈에 불을 켜고 어슬렁거리네

삼림의 경계지에서 두 마리 사슴이 노니는 모습

이것을 우연히 본 호랑이처럼

몸을 땅에 바싹 대고서 곧장 앞으로 다가가다

때때로 다시 일어서며

마침내 웅크린 자세로 그들을 주시하네

마치 땅을 박차고 튀어나와 

두 마리 사슴을 모두 할퀴고

두 발에 하나씩 움켜쥐려는 듯이.        

-존 밀턴.


12절.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우리는 멀리 있는 나무 아래서 코뿔소가 있는 것을 보고서 이것을 가장 잘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상의하고 있었다. 그때에 영양들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그 뒤에는 힘있는 사자가 추격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자에게 다가가자 그 사자는 땅에 엎드렸다. 사자가 땅에 납작하게 엎드려서 누구도 그 사자를 정확하게 쏠 수 없었다. 사자는 한 순간도 우리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우리가 사자 가까이까지 다가가도 접시가 땅에 엎어져 있는 것처럼, 그렇게 땅에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사자의 머리는 조금 위로 올라와 있어서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서도 우리 주위를 모두 살펴볼 수 있었다. 우리는 원을 좁혀 들면서 포위망을 압축했고, 사자가 일어나기만 하면 총을 쏘려고 했다······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나무를 찾았다. 이제 사자는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충분히 조준해서 사격을 할 수 있었다. 내가 탄환을 장전하고 한 발을 쏘려 하자, 사자는 곧 일어나 도망가 버렸다. -윌리엄 찰스 볼드윈(William Charles Baldwin, African Hunting, 1863). 


13절.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KJV에는 "내 영혼을 주의 칼인 악인에게서 구원하소서"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마귀와 그의 도구들은 하나님의 도구들이다. 그러므로 "악인"은 "주의 칼"이며, 주의 "도끼"(사 10:15)이다. 이제 오직 하나님 그분만이 칼과 도끼를 다루신다. 마귀가 무슨 수를 써도 하나님은 그를 대적하고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그들이 군대를 동원하여 성도를 공격하고 핍박한다고 해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를 대적하실 것이다. 마귀가 교묘하게 공격한다고 해도, 주님은 역시 이것도 막으실 수 있다. 마귀와 그의 참모진들은 하나님께는 어리석은 것들일 뿐이다. 그들의 지혜는 어리석을 뿐이다. -윌리엄 거놀. 


13, 14절. "주의 칼······주의 손." 사람이 칼이나 손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주께서는 이것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칼과 손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종을 멸하려 하시나이까? -존 하우. 


14절.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이 구절은 특별히 원문에 대한 번역이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주해는 KJV 번역을 따른 것이다. KJV에는 이 구절이 "주의 손인 사람들,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들, 당신의 숨긴 재물로 배를 채워 주시는 그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그들은 자녀가 많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14절.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하나님은 악인까지도 사용하셔서 성도들의 행복을 증진하고 마지막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는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존 하우. 


14절.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 그들은 모든 소망과 두려워하는 것들을 이 세상에 국한시키고 있다. 이 세상 밖의 어떤 것도 염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제어하지 않으신다면, 어떤 것도 그들의 폭력을 제어하지 못한다. 저 세상을 믿지 않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악이나 비극도 기꺼이 행할 수 있는 배우들이다. -존 하우. 


14절. "주의 손으로." (KJV에는 "주의 손인 사람들"이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죄악을 사용하신다고 해서 너희들을 용납하시겠느냐? 하나님께서 악에서 선을 취하신다고 해도 악은 악이 아니더냐? 자신을 속이지 말라. 야곱이 라반에게 7년과 또 다른 7년을 섬기듯이, 네가 너를 지으신 조물주를 오랫동안 섬긴다 해도 너는 아무런 보수나 감사도 받지 못할 것이다. 네가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으면 좋으련만, 이 일로 슬픔을 거둘 것이다. 너는 아무런 이득도 없고, 비참하고 가엾은 봉사만 했을 뿐이다. 바벨론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쇠망치로서 여러 나라를 두들기는 데 사용되었지만, 그도 나중에는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채찍으로 삼아 그분의 백성을 징계하는 데 사용하셨지만, 앗수르도 채찍을 맞았다. 이런 채찍이나 도끼나 칼이나 쇠망치나 다른 도구들은 그들이 할 일을 마친 후에는 불에 던져져서 타고 재만 남길 뿐이다. 사탄도 하나님의 쓰임을 받아 욥에게 고통을 주었고,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하였으며, 바울에게 고통을 주었고, 가룟 유다를 꼬드겨 주님을 배반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성도들의 인내를 증명해 보이시고, 믿음을 확립하셨으며, 성도들의 힘을 시험하시고, 공의를 칭찬하셨다. 그러나 사탄은 마지막 대환란의 날에 심판을 받고 쇠사슬에 묶여 어두움에 던져질 것이다. 가룟 유다의 배신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영광을 얻으시고 인류의 구원의 길을 여셨으나, 그는 배신의 삯으로 목매달아 죽게 되었으며, 이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그가 영원히 지옥에 매달려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받을 삯이 있었으나, 그는 이 삯을 상실하고 말았다. 제사장이 그에게 주었던 삯을 그는 잃었고, 사도직도 잃었다. 그러나 영원한 비극을 얻었고,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못에서 지내게 되었으며, 그곳은 구더기와 죽음이 끊임없이 그를 갉아먹는 곳이다. -존 킹. 


14절. "주의 손." 우리를 징계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는 하나님의 손은 때로는 직접, 때로는 매개물을 통해서 오기도 한다. 직접적으로 나타날 때는 하나님께서 다른 매개물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책망하고 고통을 주신다. 사탄이 하나님께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욥 1:11)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다른 매개물을 사용하지 말고 직접 다루어 보시라는 도전인 듯하다. 하나님께서 직접 고통을 주실 때는, 사람은 그의 몸이나 재산이 해를 당하고, 또 어떤 이유인지도 알지 못한 채 여러 방법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치시므로 그는 어떻게, 누구를 통해서, 어느 통로로 이 악한 것이 그에게 임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악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했다:"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사 45:7). 창조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엇인가 만드는 것을 말한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환난을 사람에게 주실 때는, 사람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게 된다. 

때로는 다른 피조물의 손에서 환난이 오기도 하는데, 다른 피조물의 손을 하나님의 손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손이 피조물의 손과 사탄의 손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내 영혼을 주의 칼인 악인에게서······주의 손인 사람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13, 14절, KJV 직역)라고 했다. 여기서 "주의 손"은 도구를 말한다. 악인을 주의 손이라고 했던 것처럼, 사탄도 사람을 벌 주기 위한 하나님의 손이다. 여기서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라고 번역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주의 손인 사람들에게서 구원하소서"라고 해석하는 것이 원어에 더 충실하다. 악한 왕인 느부갓네살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다:"보라 내가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오리니"(렘 43:10). -조셉 캐릴. 


14절.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 세상에서 많은 악인들이 부유하게 산다는 것은 의로운 사람들에게 무엇을 교훈하는가? 이것은 세상의 부가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별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원수들에게는 풍성하게 주어지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별로 주시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더 좋아하시기 때문은 아니다. 그분이 부를 분배하는 모습에서 성도들이 세상의 재물이란 차원이 낮은 것으로서 별로 가치가 없다는 것을 배우고, 이와 같은 가치관을 갖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원수든 친구든, 모든 피조물에게 공통적으로 호의를 베푸시는 것이다. -다니엘 윌콕스(Daniel Wilcox). 


14절.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에게 이 세상에서 분깃을 주시는데, 이것은 이런 것들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며, 이 세상에 속한 것에는 좋은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다. 진정 이런 재물이 좋은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것을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육체적 힘이란 별로 탁월할 것이 없다. 사람보다는 소가 힘이 더 세다. 몸을 아무리 민첩하게 놀린다고 해도 별로 놀라울 것도 없다. 사실 어떤 사람보다도 개가 더 빠르다. 화사한 옷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공작의 깃털이 더 아름답다. 금이나 은에도 별 가치가 없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이것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이런 것들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결코 악한 사람들에게 이것들을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성도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아도 고통이란 별로 나쁜 것이 아닌 듯하다. 악인이 이 세상을 그토록 즐기는 것을 보아도 이 세상이란 별로 좋은 것이 아닌 듯하다. 루터는 창세기 해설에서도 이와 같은 말을 했다:"터키 제국이 위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 조각 빵에 불과한 것이다. 이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이것을 개들에게 던져 버리지 않으셨는가!" 루터는 터키 제국을 이 정도로 보았다. 사실 터키 제국이 이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재물들을 터키 사람들이나 악인들, 그리고 그분의 원수들에게 주시는 것을 보아도 이런 재물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재물들을 세상에서 누구에게나 던져 주실 수 있다. 그분은 이것들을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재물을 얻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든 말든 하나님은 이것들을 사람들에게 주신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가장 귀한 자비를 나누어 주실 때에는 이것을 받은 자들에게서 영광을 취하려 하신다. 그분은 사람들이 이것을 받도록 준비시키지 않고는 결코 주시는 법이 없다. 그래서 이것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누군가 나무 아래서 돌배를 거두고 있다고 하자. 돼지들이 나무 아래에 있다고 해도 그는 별로 관계치 않을 것이다. 돼지들이 돌배를 먹는다고 해도 그저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다. 고작 돌배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돼지가 먹고 싶다면 먹으라고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가 다른 귀하고 맛있는 과일을 수확하고 있다면 어떨까? 만일 돼지가 그 자리에 있다면, 그는 돼지들을 몰아낼 것이다. 세상에 속한 재물들, 이 돌배와 같은 것들은 세상의 돼지들이 와서 꿀꿀거리며 먹는다고 해도 여호와께서는 별로 관계치 않으신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를 나누어 주실 때에는 엄격하게 선별하여 구분하신다. 아! 이것은 진정 귀한 열매이다. 대장간에서 일하는 대장장이는 쇠찌꺼기나 부스러기가 여기 저기 흩어진다 해도 별로 상관치 않는다. 그러나 금을 다루는 대장장이는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도 잘 보존하고 먼지라도 버리지 않는다. 보석을 다루는 보석공은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도 버리지 않는다. 나무를 깎는 목수는 나무 조각이 여기 저기 흩어져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석을 다루는 사람은 그럴 수가 없다. 이 세상의 재물이란 이와 같이 나무 조각이나 쇠똥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악한 자들에게 주시는 것을 별로 관계치 않으신다. -예레미야 버로즈. 


14절.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 나는 그레고리(Gregory)가 승진을 하게 되었을 때에 그가 했던 말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이 구절보다 그의 마음을 그렇게 찌르고 영혼을 흔들며 그를 위압하는 성경 말씀을 아직 읽어 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이 구절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고 고백했다:"넌 이 땅에서 상을 다 받았어. 너는 평생 동안 네 즐거움을 누렸느니라." 아! 이 말씀은 그의 귀를 지속적으로 울리는 두려운 말씀이었다. 제롬은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이제 너는 삶을 마쳤다. 일어나라. 심판을 받으라." 이 말씀은 밤낮으로 그의 귀를 울리고 있었다. 오! 이 설교를 듣고서 여러분이 침대에 누웠을 때에도 이 말씀이 여러분의 귀를 울릴 수만 있다면!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 -예레미야 버로즈. 


14절.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 하나님께서는 이 땅과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을 누구에게나 구분하지 않고 나누어 주시되, 하나님의 자녀뿐만 아니라 그저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신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번성은 같은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염려로 가득하다(그들은 웃음을 터뜨리는 중에도 가슴은 무겁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영이 즐겁고 기쁘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는 세상에서 더 큰 승진을 할 것을 보증으로 받아 놓은 것이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받은 모든 분깃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어라. 그리고 더 이상 다른 것을 구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시는 것과도 같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가진 것으로 기뻐하며 사람들을 축복하지만, 이들은 많이 가졌으므로 슬퍼하며,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저주하는 것이다. -마일즈 스미스(Miles Smith). 


14절.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 선한 사람들이 가장 좋은 것을 취하고, 악한 사람들이 가장 나쁜 것을 갖게 되는 것은 두 종류의 사람이 그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때에 일어나는 일이다(사 3:10, 11). 다이비즈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만을 가졌으나, 죽은 후에는 좋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이비즈는 누가복음 16:19-31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를 지칭한다-역자 주.) 나사로는 나쁜 것만 가졌으나, 죽은 후에는 나쁜 것을 갖지 않았다. 선한 사람은 그가 죽을 때에 모든 고난으로부터 떠나고, 악한 사람은 죽을 때에 그가 누렸던 모든 좋은 것을 놓고 떠난다.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 16:25). 아! 이 세상에서만 좋은 것을 분깃으로 받는 자는 정말 슬픈 자이다. -랠프 베닝(Helps to Piety, 1620-1673). 


14절. "금생." 피조물 중에 특별히 괴물스러운 것이 있다. 이 피조물은 이성이 있고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존재이며, 이 세상에서의 삶이 그림자와 같고 꿈과 같으며 이야기와 같고 연기와 같으며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고 물방울처럼 사라져 가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오는 세상은 결코 끝이 없는 영원한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는 모든 마음을 이 세상에만 두고 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은 오늘 있다가 내일은 없어지는 것인데도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나 오는 세상에서의 삶은 영원한 것인데도 여기에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다. 이것이 괴물이 아니라면, 무엇이 괴물스러운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토머스 타임. 


14절.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KJV에는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들, 당신의 숨긴 재물로 배를 채워 주시는 그들"이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악인이 이 세상에서 소유한 모든 것들은 그들이 바라는 전부이다. 그들의 재물과 이 세상에서의 명성을 보고서 불평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그들의 분깃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이미 받았다.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이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악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라. 그들은 이 세상에서만 의기 양양하게 자랑할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원하는 전부이다. 시편 기자는 그들의 상태를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들, 당신의 숨긴 재물로 배를 채워 주시는 그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성도들이여! 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으나 천국을 기업으로 받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이다. 그분은 모든 만물의 후사이며,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무한히 주실 분이시다. 우리가 받을 것은 무한하여 하늘의 모든 별을 다 합해도 거기 이르지 못할 것이다. 가난하게 살고 있다고 불평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의 평안을 위한 것이다. 그분이 주시지 않거나 빼앗아 가시는 것은 우리로 연단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 이 세상에서 잠시 쾌락을 누리는 것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복을 누리는 것이다. 악인이 번성하여 재물과 평안을 누리고, 당신이 가난하여 궁핍할 때 이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이 세상보다 더 많은 것을 당신에게 주시고 계신다는 것을. -에스겔 홉킨스. 


14절.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KJV에는 "주의 손인 사람들,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들, 당신의 숨긴 재물로 배를 채워 주시는 그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그들은 자녀가 많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악인이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분깃"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이 창조된 이래 모든 세대가 이것을 체험했으며, 당신이 세상을 둘러보아도 이것을 알 것이다. 또한 성경도 이것을 명시하고 있다. 첫번째 살인자 가인은 그 이름에 많은 뜻이 담겨 있다(창 4:1-8). "가인"이란 '얻는 것'을 말한다. ("카인"<@yq>이란 "카나"<hnq>란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며, 이 동사는 '재물이나 지혜를 얻다'라는 뜻이다-역자 주.) 

성경을 처음부터 살펴보라.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서 핍박을 받았다. 에서는 야곱보다 이 세상에서 훨씬 출세했었다. 리벳(Rivet)은 창세기 32장에서 이것을 관찰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생활을 하였으며, 바로는 보좌에 앉아 있었다. 사울은 통치자였고 다윗은 동굴이나 광야에서 지내고 있었다. 욥은 거름더미 위에, 예레미야는 구덩이 속에 있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그 친구들은 용광로에,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보좌에 있었다. 신약을 보라. 벨릭스는 재판석에, 바울은 감옥에 있었다. 다이비즈는 궁전 같은 집에, 나사로는 그의 문 앞에 있었다(눅 16:19). 다이비즈는 자주색 옷을 입었고, 나사로는 누더기를 입고 온 몸이 헐어 있었다. 다이비즈는 축제를 벌이고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었으나, 나사로는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만 먹었을 뿐이다. 다이비즈는 여러 친구들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나사로는 아무도 없었고 다만 개들이 와서 그의 헌 데를 핥았을 뿐이다. 오스틴과 터툴리안은 마르키온(Marcion)과는 반대로 이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비유로만 생각했다. 욥은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다고 했다(욥 12:6). 그는 이 강도들이 어떻게 형통한지 자세히 묘사했다(욥 21:7-14). 그들은 세력이 강하고(7절), 자손이 번성하고(8, 11절), 가정도 평안하고(9절), 재산이 증식하고(10절), 즐거움을 누리고(12절), 죽을 때까지 형통하게 지낸다(13절). 다윗도 이 점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말했다(시 37:35; 73:7). 

그들은 공기를 마시고 땅을 걷는 등, 사람들이 모두 누리는 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들은 "숨긴 재물"로 배를 채운다. 그들은 이것을 자신을 위해서 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를 위해서도 쓴다. 그들은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들이다. 그들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들"이다. -존 프로스트(John Frost, 1657). 


14절.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 집주인은 그의 하인들에게는 임금을 올려 주면서도 그의 아들에게 주는 용돈은 어린 시절에는 부족하게 준다. 이렇게 해서 아들은 아버지를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도 이와 같이 행하신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쓰는 도구와 같은 자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보상하시고 임금을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경건한 자녀들에게는 더 좋은 상을 예비하셨지만, 이 세상에서는 그들에게 조금만 주신다. 이렇게 해서 자녀들은 믿음으로 약속을 따라 사는 법을 배우고, 하늘의 분깃을 얻기 위해서 하늘 아버지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보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훈련을 받는 것이다(고후 4: 18)······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향한 소망을 썩은 기초 위에 쌓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셨더라면 이 세상에서 이와 같은 분깃을 주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논리로 말한다면 가룟 유다는 돈궤를 관리하고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지옥에서 구르고 있는 다이비즈는 매일 맛있는 것을 먹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존 프로스트. 


14절.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KJV에는 "당신의 숨긴 재물로 배를 채워 주시는 그들"이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성령께서 "배"라는 단어를 쓰신 목적은 이 세상의 타락과 죄악 중에서 많은 부분이 저속한 욕망을 탐닉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려 하신 듯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오용하여 만족하지 못한 영혼을 욕정의 사슬로 얽어매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저속한 감각을 추구하며 사는 것은 우상 숭배이며,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존 모리슨. 


14절.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KJV에는 "당신의 숨긴 재물로 배를 채워 주시는 그들"이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악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재물을 많이 가질 수 있다. 그들은 땅과 땅에 충만한 것들, 그리고 땅에 속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배를 숨겨 두신 재물로 채우신다. 주로 귀중품은 드러내 놓지 않고 숨겨 둔다. 보석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지만 그래도 귀중한 것이다. 하늘의 보화를 가볍게 생각하고, 그 보화를 맛보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배를 땅의 숨겨진 보물로 채우신다. 마음에 하늘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은 그들의 손에 땅을 소유하고자 한다(욥 9:24). 그들은 세상의 종이 된 자들을 주관한다. 사탄이 포로로 잡아온 자들을 마음대로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살 만한 가치도 없는 자들이 권력을 잡고 마음대로 정권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서 마음이 상하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조셉 캐릴. 


14절.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KJV에는 "당신의 숨긴 재물로 배를 채워 주시는 그들"이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배"란 육적인 욕망을 나타내는 데 쓰인다(롬 16:18; 빌 3:19). "숨긴 재물"이란 하나님께서 땅 속 깊은 곳에 숨기려고 하시는 것이거나, 비밀스런 곳에 넣어 두고 잠근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존 하우. 


14절.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KJV에는 "당신의 숨긴 재물로 배를 채워 주시는 그들"이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여호와는 그 숨겨 두신 창고에서

그들의 배를 채워 주시네

그들의 아들들도 게걸스레 먹고

남긴 것은 아들과 아들의 아들들에게 남겨 준다네.

-리처드 맨트. 


14절.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KJV에는 "그들은 자녀가 많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여백에는 "그들의 자녀는 배가 부르다"라고 되어 있다. 여백에 기록된 표현이 히브리어 원문을 더 잘 표현하는 듯하다. 히브리어 원문을 문자 그대로 옮기면 "그들의 자녀는 만족한다"라는 말이다. (히브리어 원문은 "이스베우 바님"<mynb w[bcy>으로 되어 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자녀로 만족하고"라고 되어 있다. "만족하다"라는 히브리 동사 "이스베우"<w[bcy>는 '3인칭 복수 미완료형'이다. 한글 개역 성경은 이 동사의 주어를 "자녀들"로 보지 않고 "그들"로 보았다. 히브리 문법상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역자 주.)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은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킬 만큼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도 만족시키고, 자녀들의 욕망도 만족시킬 만큼 원하는 것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알버트 반스. 


14, 15절.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14절, KJV에는 "그들은 자녀가 많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여호와여, 주께서는 이들에게 이미 많은 것을 주어 그들의 욕망을 채우게 하셨나이다. 이제 그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란 말씀입니까? 그들은 턱없이 재물을 많이 쌓아 마음껏 즐기고 자신의 욕망을 채웠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을 당하게 되면 재산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그들의 수많은 자녀들에게 유전하나이다. 그들이 악한 마음을 품지 않고, 자신들의 탐욕스런 마음만을 채운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나에게 악의를 품지 말고, 그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만 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15절). 원수들에 대한 묘사를 마친 후, 시편 기자는 "나는"이라는 말로 시작하여 자신의 이야기로 이 시를 끝낸다. 잠시 동안 있었던 마음의 동요를 그치고, 그는 자신의 더 행복한 상태를 생각하고 평정을 되찾는다. 그가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악하나 그는 의롭다:"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그들의 행복은 세상에 속한 것이고,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복은 하늘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로서 오는 것이며, 주의 얼굴과 주의 형상에서 오는 것이다. 그들의 행복은 현세적이고 일시적이며 이 세상에서 사는 삶에 국한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복은 미래에 누릴 것이며, 죽은 후 다시 부활하여 누릴 영원한 것이다. 그들의 행복은 온전하지 못하고 결함이 있어서 욕정만을 채우고 배를 채우는 것이지만, 그의 행복은 온전하고 완전하여 사람을 온전히 만족하게 한다.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존 하우. 


15절.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내가 낯선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면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않고 얼굴에 별 표정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를 만나면 내 얼굴에 활기가 넘치고 기쁨이 나타나게 된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영향을 받고 그분에게서 감명을 받으며,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고, 영광스러운 그분의 능력으로 자신을 변화시킨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룬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 또한 이생의 잠에서 깨어난 자는 영광스러운 그분의 모습을 보고서, 그분의 형상으로 온전히 변화한다. -존 하우. 


15절.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이 구절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1) 그가 온전한 행복을 누리는 때-"깰 때." (2) 행복의 대상-"주의 얼굴," 행복을 누리는 방법-"주의 얼굴을 보리니." (3) 행복한 상태-"나는 의로운 중에." 내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고, 의로운 통치를 받아들일 때. (4) 행복의 정도-"만족하리이다." 나는 충만한 행복을 누리고, 아무 부족함도 없을 것이다. 내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고, 이 행복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며, 한점 그늘도 없고 행복이 사라질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을 것이다. -윌리엄 콜빌. 


15절.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그는 위험한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 사울 왕의 얼굴을 보려면 위험이 없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고 나를 찾고 있다. 왕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여호와의 얼굴은 뵈올 수 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나는 의로운 길을 계속할 것이다. 나는 깰 것이다.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은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영원한 잠을 자지 않을 것이며, 내가 죽음에서 구원을 받고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할 것이다. 내가 깰 때에 주의 영광이 나타나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견딘 그 모든 고난에 대해 내게 상을 베푸시고 만족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내 영혼은 만족함을 고백할 것이다. -예레미야 버로즈. 


15절. "만족하리이다." 천국의 기쁨이 얼마나 충만할 것인가는 이 땅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위로나 기쁨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성경은 성령의 위로를 "충만한 기쁨"(요 15:11),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 1:8), "넘치는 위로"(고후 1:5)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성도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이런 기쁨이나 즐거움을 천국에서 누릴 기쁨과 비교하면, 대양에 비해 한 방울의 물방울과 같고, 포도원의 모든 포도에 비해 포도 한 송이와 같고, 벌통의 모든 꿀에 비해 벌의 다리에 붙어 있는 꿀과도 같으며, 밝은 정오의 빛에 비해 새벽 여명의 빛과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우리가 이 땅의 가나안에서 맛보게 하시는 물과 포도주와 꿀은 이 땅에서 누리는 그 모든 쾌락과 비교해 보아도 훨씬 우리를 만족하게 하고 소망할 만한 것이다. 이 기쁨을 맛본 사람은 사마리아 여인처럼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라고 고백한다. 이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로 채워 주는 기쁨보다,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은 더 순수하고 충만하며 우리 마음에 평안을 준다. 이 땅에서 누리는 기쁨도 이러하다면, 하늘의 끝없는 영광에 몸을 적시는 천국에서는 우리 기쁨이 어떠하겠는가? -윌리엄 스퍼스토(William Spurstowe, 1656). 


15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당신은 어떤 건물의 내부 장식을 마무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명을 따라서 장엄하게 지은 시스틴 성당의 내부 장식을 했다. 그는 모든 힘을 다해서 빛나는 물감과 빼어난 기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열심히, 밤낮으로 땀을 흘리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림에 아름다움과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했고, 마침내 내부 장식에 필요한 모든 그림을 마쳤다. 이것을 모두 마치기 전날에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면, 당신은 무엇을 보았을까? 여기 저기 널려 있는 기둥, 널빤지, 밧줄, 석회, 회반죽, 작업복, 먼지 등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나오고, 작업대를 모두 치웠을 때, 바닥에 여기 저기 치워야 할 것이 남아 있겠지만, 이때 위를 쳐다본다면 어떻겠는가? 당신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과 천사들의 궁정을 보는 듯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림을 그리는 자들이다. 지금은 작업대를 설치해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모든 작업대를 치우시고 우리가 그린 벽화들을 드러내실 때가 온다. 우리는 이 그림을 무엇으로 그리는가? 때로는 기쁨으로, 때로는 슬픔으로, 기도로, 우리의 사업으로, 성공과 실패로,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던 것으로, 믿음을 깨어지게 하던 것으로, 우리가 기뻐하던 것으로, 우리가 애통하며 곡하던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던 모든 것으로 우리는 벽화를 그린다. 당신도, 나도 벽화를 그리는 중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원하시는 뜻을 따라 우리를 빚어 가신다. 하나님은 우리로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신다. 그리고 당신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당신을 온전하게 변화시키실 것이다. 우리의 모든 일을 마치게 되었을 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우리는 "만족"할 것이다. 

아! 세상이 창조된 이래 "만족"이란 단어는 방랑을 계속했다. 육신을 입은 사람들이 언제 "나는 만족한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가? 이 단어의 뜻은 무엇인가? 충분히 채워지고, 충만히 채워지고, 부족함이 없이 모든 부분이 채워진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마치고, 계획한 날이 되면 우리는 그분 앞에 설 것이다. 우리는 하늘의 밝은 영광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뵙고, 그리고 우리를 돌아보면서 "나는 만족한다"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그분과 같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멘. 우리가 만족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 Royal Truths, 1862). 


15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그는 여기서 부활을 말하고 있다. 성경은 죽음을 '잠'으로, 부활을 '깨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시편 기자는 이 세상의 쾌락에서 행복을 추구하던 자들, 동물처럼 육신의 쾌락만을 좇던 자들의 행복에 대해 말했다. 이것은 14절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들, 당신의 숨긴 재물로 배를 채워 주시는 그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그들은 자녀가 많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KJV 직역). 이제 시편 기자는 자신에 대해 말한다:"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영혼의 만족은 하나님을 뵈옵는 데에 있다. 우리가 죽음에서 깨어나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때에 온전히 영혼의 만족을 누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그분은 우리보다 먼저 일어나시고, 또한 우리의 몸도 일으키실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곳에서 그들의 배를 채우고, 동물적인 쾌락을 즐거워했다. 그러나 내가 마지막 날에 깰 때에 나는 하나님의 형상과 그분의 아들의 형상을 보고서 만족할 것이다.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토머스 굿윈. 


15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다윗이 겪는 고난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무죄했으나 악의를 품은 자들이 그를 모함했고, 그의 생명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위험에 빠졌고, 원수들은 사울의 궁정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으나 그는 광야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복합적인 고난을 당한 가운데서도 다윗은 희망을 잃지 않았고, 버림받은 자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원수들의 생활과 비교해 보면 썰물처럼 모든 것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그들의 행복과 자신의 행복을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이 시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노래로 마치면서 그가 훨씬 행복한 자라고 결론을 내린다:"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그들은 왕의 얼굴을 보고 지낸다. 왕이 베푸는 호의는 삼림과 채소에 생명을 주는 비구름과도 같다. 그러나 다윗은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을 말했다. 또한 그분의 인자는 생명보다 낫다. 그들은 숨긴 재물로 배를 채웠고, 많은 부를 손에 잡았다. 그러나 다윗은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고, 원수들의 곡식과 포도주가 풍성한 때보다도 더 즐거웠다.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처럼 손에 그들의 분깃을 가졌지만, 다윗의 분깃은 저 세상에 있다:"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악인이 우리를 대적하고 해하려 하지만, 우리의 행복을 가져갈 수는 없다. 성도들의 영원한 행복은 오는 세상에 있다. -윌리엄 스퍼스토. 


15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은 아직 하나님의 형상을 입지 못했다. 의인의 육체는 아직도 잠을 자고 있으며, 부활의 아침에 그들은 만족하게 될 것이다. 로마의 군인들은 전쟁을 하고 승리를 거둔 후에는 로마로 돌아가 먼저 자신의 집으로 각각 돌아간다. 다음날 아침이 되면 그들은 로마시 밖으로 다시 나가서 공개적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며 행진을 벌인다. 이제 죽은 성도들은 그들의 육체를 남겨 두고 개인적으로 천국에 들어갔다. 그러나 마지막 날, 그들의 육체가 다시 일어나게 되면, 천국으로 승리의 입성을 다시 벌일 것이다. 이 장엄한 행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에 많은 면류관을 쓰시고, 빛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행진을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의 뒤에는 성도들이 손뼉을 치고, 금으로 만든 하프를 타며 노래를 부르고 따를 것이다. 모두가 승리의 행진을 벌이는 것이다. 그들이 천국문에 도달하면, 문들이 활짝 열리고 영광의 왕께서 들어오게 하실 것이다. 천사들의 무리는, 로마 시민들이 승리의 입성을 하는 군인들을 환영하는 것처럼, 창문과 지붕 위에서 이들을 맞이하고 하늘의 장미와 백합을 그들에게 뿌리며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도다!"라고 외칠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날,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이 예수의 승리를 바라보며, 그분의 백성이 그분과 함께 승리를 누리는 날, 나는 만족할 것이다. -스펄전의 설교. 


15절.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목마른 자는 생수의 바다로 오게 하라. 그리하면 만족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만족하게 하실 수 있다면, 우리도 역시 만족하게 하실 것이다. 사람들의 영혼은 유한하나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선하셔서 사람들을 만족하게 하시며, 또한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께 대해 식상해질 수가 없다. 그분의 얼굴에서는 늘 새로운 기쁨이 솟아난다. 그분을 처음 만나는 순간처럼, 수백 년이 지나도 영화롭게 된 영혼들은 역시 그분을 사모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는 충만함이 있어서 사람을 만족하게 하고, 또한 감미로움이 있어서 사람의 영혼은 그분을 끊임없이 사모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결코 물리거나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이다. 가장 선한 것은 우리의 영혼에 참된 기쁨을 부어 준다. 그 안에는 황홀한 기쁨이 있고 즐거움의 정수가 흐른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무한히 상냥하게 대하여 이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또 우리 영혼을 영광으로 가득 차게 한다.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만 바라보아도 기쁨이 충만하다면(벧전 1:8),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하며 그분을 직접 뵈올 때 그 즐거움은 얼마나 크겠는가!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이처럼 많은 기쁨을 누렸다면, 그들이 면류관을 쓰는 때에는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누릴 것인가!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불태웠던 불꽃이 장미의 침대와도 같은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기대는 것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얼마나 황홀한 기쁨을 줄 것인가!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신 분이다. 그분보다 더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분은 우리의 건강, 부귀, 명예와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다. 다른 모든 것들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그분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과 같은 자가 누가 있겠는가? 누가 새의 깃털 하나를 금으로 만들어진 산과 견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다른 모든 것보다도 밝기가, 태양이 촛불보다 밝은 것보다 훨씬 더하다. 

하나님은 영원히 선하신 분이다. 태초 이전부터 계신 그분은 결코 쇠하지 않으시며, 늙지 않으신다(단 7:9). 그분이 주시는 기쁨은 영원하며, 그분이 주시는 면류관은 녹슬지 않는다(벧전 5:4). 영화롭게 된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늘 위로를 받고, 그분의 사랑으로 잔치를 벌이며, 그분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을 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우편에 있는 기쁨의 샘에 대해 읽어 보았다. 이것은 어느 땐가는 마르지 않을까? 아니다! 그 밑에는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시 36:9). 이처럼 하나님은 가장 선하신 분이다. 하나님을 영원히 즐기는 것은 사람의 영혼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복된 일이다.  -토머스 왓슨. 


15절. "깰 때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늘 앞으로 전진한다. 천국에 도달할 때까지 그의 여행은 끝나지 않는다. 그는 늘 소망을 새롭게 하며 앞으로 앞으로 전진한다. 그는 작은 은혜에도 감사하지만, 많은 은혜를 받아도 만족하지 않는다. 다윗은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집에서 많은 기쁨을 누렸다. 하나님의 영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마음의 위로를 다윗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나 다윗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오직 천국만이 그에게 온전한 기쁨을 줄 수 있었다. 골(Gaul) 사람들은 이탈리아에서 온 포도주를 처음 맛보고, 그 감미롭고 달콤한 맛에 흠뻑 취했다. 그래서 이 포도주를 수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포도를 경작하는 땅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처럼 신실한 영혼은 천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가끔씩 내리는 은혜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처럼 풍요롭고 기름진 복을 내리는 거룩한 땅을 정복하고자 한다. 그는 천국의 포도주를 마시고자 하는 것이다. -윌리엄 거놀. 


15절. "깰 때에." 우리의 영혼이 죽었다가 어두움을 떨치고 일어나 하나님의 빛 앞에 나타나는 것을 밤에 잠을 자다가 깨는 것과 비교하는 것은 적합하다. 무엇보다도 죽음에서 일어나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밤의 베일을 거두어 버리는 것이다. 부활의 아침이 되면 이 일은 더욱 완전하게 일어난다. 그날이 되면 사망은 생명에 삼킨 바 되고, 사망의 그림자는 모두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비교하는 것은 이 시의 내용과도 적합하다. 악인과 의인, 두 종류의 사람을 비교하는 데 이보다 더 확실하게 그 차이를 나타내는 것은 없다.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이고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그분의 형상으로 만족하는 것은 오는 세상에서 누릴 축복이다. 의인이 깰 때에, 즉 그가 이 세상에서 죽고 다시 살아날 때에 그 분깃을 받는다. -존 하우. 


15절.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영혼이 죽음의 잠을 잘 때가 있다. 이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들의 영혼을 비추면 성도들은 회개하고 그 영이 다시 생기를 되찾는다. 또한 육신이 죽음의 잠을 자기도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활의 날에 그분의 모든 백성들을 깨우시고, 그들의 육체를 그분의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영원히 만족하게 하실 것이다. 각 성도들은 이와 같이 첫번째와 두번째의 구원으로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실 것을 기대해도 좋다.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데이비드 딕슨. 


15절.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성도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태어난 자요, 여호와의 영광스러운 형체를 가지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천사들처럼 영원하고 썩지 아니할 존재로 다시 일어난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1)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상태로 일어나게 되어 크게 기뻐한다. (2) 그들은 예수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은 부활과 영생을 얻는다. (3) 그들은 아무 육체도 보지 아니한 아버지, 여호와의 얼굴을 보고서 크게 기뻐한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신 것과 성도들이 부활하여 하나님을 보는 것은 이 점에서 다르다. 시내산에서의 광경이 영광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다윗은 승리한 성도들이 부활할 때에 누릴 영적인 영광에 대해서 그들이 여호와를 뵈옵고, 그분의 임재 앞에서 영원토록 기뻐할 것이라고 했다. -벤야민 바이스(Benjamin Weiss, 1858). 


15절.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천국에서 누릴 영생과 구원은 복음서에서만 계시된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구약의 성도들에게도 계시가 되었고, 그들은 이것을 확실히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영광 가운데 영원토록 함께 거할 것을 믿었다.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시 17:15).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시 73:24).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듯이 그들은 더 나은 도시를 바라보았으며, 가나안 땅은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히 11:16). 그들은 악인을 위해 영원한 형벌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도들이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도 알았다. 그들은 구약 시대에 이것을 믿고 있었다.  -사무엘 매더(Samuel Mather, Types, 1705). 




힌트


1절. 우리의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그리고 우리의 기도.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의 특성을 시편 기자의 언어에서 찾아보라. 간절함, 인내, 진실됨 등. 


2절.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1) 언제 주께서 판단하실 것인가? (2) 누가 이 판단을 지금 맞이할 수 있는가? (3)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는가? 

3절.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시험과 관계된 것들. 금속, 용광로, 정제하는 자 등. 


3절.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1) 영광스러운 방문객. (2) 은혜를 받은 개인들. (3) 특별한 시간. (4) 과거를 새롭게 회상함. (5) 실제적 결과. 


3절 하반절. 입술의 범죄와 그것을 피하는 법. 


4절. 고속도로와 곁길. 세상과 죄. 강포한 자의 길.


5절. "잡으소서." (1) 누가? 하나님. (2) 무엇을? 나의 길을. (3) 언제? 현재형. (4) 어디서? 내가 가는 길에서. (5) 왜? 내가 실족하지 않도록. (이 설교 힌트는 KJV 역본을 참고하여 설교하는 것을 가정한 것이다. "나의 걸음을 주의 길에 굳게 지키소서. 내가 실족지 않으리이다"-역자 주.) 


6절. 작지만 위대한 두 단어-'부르다', '응답하다.' 두 인격체-왜소한 인간과 위대하신 하나님. 두 가지 놀라운 사실-우리가 계속 부르짖지 아니한다는 것, 하나님께서 이처럼 무가치한 기도도 들으신다는 것. 


7절. 강해 참조. 주의 인자 보기를 사모함. 


7절. 주님은 성도들의 구세주. 


8절. 민감함과 돌보심에 대한 두 가지 상징. 눈과 몸은 '유기적인 한 몸'을 나타내고, 새와 어린 새끼는 '사랑하는 관계'를 나타낸다. 


14절.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무엇을 가졌는가?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14절. "주의 손인 사람들." 하나님의 섭리와 악인의 사용. 


15절. 이 구절은 누구의 언어인가? (1) 마음으로 결심한 자, 자신을 위해 결심한 자, 다른 사람들의 결심으로 인해 자신의 행동을 바꾸지 않는 자의 언어이다. (2) 다시 삶의 용기를 얻은 자, 밝은 미래를 바라보는 자의 언어이다. (3) 유대인의 언어이다. 


15절.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그분의 호의와 사랑을 누림. (2)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눔. -윌리엄 제이. 


15절. "Spurgeon's Sermons," No. 25., "The Hope of Future Bliss."


15절. 성도들의 소망-하나님을 뵈옵고 그분과 같아지는 것. -포셋(J. Fawc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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