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편

시편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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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주제-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이다. “깃딧”이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갓 족속을 지칭하며, 그들이 불렀던 곡조나 고안해 낸 악기를 말한다고 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궤가 머물렀던 깃 족속 오벳에돔의 노래라고 하는 자들도 있으며, 갓 족속 골리앗의 죽음에 대한 노래를 지칭한다고 하는 자들도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단어의 히브리 어원을 추적하면서, 포도를 밟고 포도주틀에서 일하는 자들을 위한 즐거운 노래를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깃딧”이란 제목이 붙은 시편은 이 시 외에도 두 편이 더 있다(81, 84편). 이 두 편의 시가 모두 즐거운 시라는 점에서 이 머리말이 붙은 시는 모두 기쁨의 시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를 “천문학자의 노래”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있다. 황혼이 지고 저녁이 되었을 때 밖에 나가서 별이 총총히 빛나는 밤하늘 아래서 이 노래를 불러보자. 바로 이런 상황에서 시인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이런 시상이 떠올랐을 것이다. 찰머스(Chalmers)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밤하늘을 바라보노라면 우리의 영혼은 경건한 묵상에 잠기게 된다. 저기 있는 달, 그리고 여기 저기 수없이 많은 별들은 다 무엇일까? 그것들은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우리로 높은 곳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인간의 욕정과 염려를 떨쳐 버리고 저 높은 곳을 향해 날아가는 듯하다. 우리 마음은 환상에 젖어 들며, 저 멀고 아직 탐험해 보지 않은 세상을 찾아가게 된다. 이 시는 자연을 단순하게 바라보며,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은 지혜와 위엄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노래한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 9절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높이는 감미로운 찬양의 노래이다. 

2-8절창조에 나타난 여호와의 위대하심과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다가오심에 놀라는 내용들이 나온다.


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이 시가 일반적인 모든 사람에 대한 노래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영광을 주신 것을 노래하는 것인지, 아니면 오직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노래인지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두 가지 주장은 서로 상충되는 것은 아니며,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의 목적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창조에서뿐만 아니라,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에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시고, 이 시에 나타난 바처럼 영광과 통치를 넓혀 나가셨다. 이것은 그분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 시의 가장 중요한 중심 주제가 된다. 우리 주님도(마 21:16),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도(고전 15:27; 히 2:6, 7) 이 시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했다.


강해


1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1절. "여호와 우리 주여." 하나님의 영광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시편 기자는 탄성을 올린다. 오, 여호와 우리 주여!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떤 마음으로도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절반도 측량할 수 없고, 어떤 혀로도 다 표현할 수 없다. 


"주의 이름이 온 땅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는 그분의 영광이 가득 차 있고, 그분의 놀라운 능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 그분의 선하심과 지혜는 어느 곳에나 나타나 있다. 하늘에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천 수만의 별들, 위로는 사람으로부터 아래로는 땅에 기는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유지하시는 것들이다. 이 광활한 우주도 그분의 영원하신 팔을 의지하고 있다. 

그분은 우주 어느 곳에나 계시고, 그분의 이름은 어느 곳에나 아름답게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일하신다. 하나님의 임재가 미치지 않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우리는 도처에서 그분의 능력으로 일어나는 기적들을 맛볼 수 있다. 깊은 계곡, 양 옆으로는 절벽이 깎아지른 듯이 높이 솟아 있는 곳, 저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이 작은 손바닥처럼 보이는 곳, 그 깊은 계곡을 지나 보라. 당신이 이 깊은 계곡을 지나는 첫번째 인물일 수도 있다. 새들은 깜짝 놀라서 푸드득거리며 날아가고, 사람의 발자국 아래서 이끼는 몸을 떨며 사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 계셔서 수천 가지 경이로운 일을 일으키신다. 그분은 깎아지른 듯한 바위도 붙드시고, 꽃들에게는 향긋한 향기를 담아 주시며, 외로이 서 있는 소나무는 그분의 입김으로 생기를 얻는다. 

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가 보라. 거기에는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태고적 고요가 있다. 밑바닥에는 모래밭이 적막 가운데 펼쳐져 있고, 하나님의 영광은 거기에도 있어서 조용한 바다 궁전 속에서도 여호와의 아름다운 이름을 선포하고 있다. 

아침 햇살의 날개를 잡아 타고 바다 저편 끝까지 가 보라. 하나님은 거기도 계신다.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라. 하나님께 드리는 영원한 찬양을 듣게 될 것이다. 지옥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 보라.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무섭게 보복하시는 것을 볼 것이다. 어느 곳에나 하나님은 계시고 역사하신다.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여호와는 땅에서만 경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땅 위에서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빛을 발하신다. 그분의 영광은 별이 빛나는 하늘의 영광보다 더하다. 수천 수만의 별들을 지나서 하늘 저편에 그분은 영원한 보좌를 세우셨고, 거기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찬란한 빛 가운데 거하신다.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욥 9:8, 9). 이런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자. 느헤미야는 이런 하나님께 적합한 찬양을 돌린다:"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다시 본문을 살펴보자. 이 시는 하나님께 바쳐진 시이다. 여호와 그분만이 자신의 영광을 온전히 아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이 만드신 것을 보고 황홀감에 젖어든다. 그러나 하나님 그분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아신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우리" 주여라고 부른다는 것은 얼마나 감미로운 일인지! 그분을 "우리 주"라고 부르면서,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그분의 이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떤 말로도 그 아름다움을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탄성을 토할 뿐이다. 여호와의 이름은 아름답다. 그분은 과연 어떤 분일까? 하늘도 그분의 영광을 다 담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다.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나 위대하여 피조물이 그 영광을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알프스 산을 오르내리면서 우리는 이 장엄한 피조물보다도 이것들을 지으신 여호와가 무한히 크고 위대하심을 느꼈다. 그 감동을 받아 몇 줄 적어 보았다. 

이 모든 장관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그분과 비교할 수는 없네

그분을 보기에는 창이 너무 어둡고

우리의 눈이 너무 침침한 까닭이라네.


구름 위로 머리를 드러내고

수많은 별들과 대화를 나누는 알프스도

그분의 무한한 신성과 비교하면

한줌 먼지에 불과한 것이라네.


눈으로 왕관을 쓴 정상도 

영원하신 그분을 드러내지 못하네

그분의 이름만이 

고귀하고 높은 것이라네.


측량할 수 없는 깊음도

여호와의 지혜와 지식을 드러내지 못하네

피조물의 모습으로는 

영원하신 그분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네.


여호와는 그분의 이름을 세상에 새기시고

그분의 도장을 피조물의 이마에 찍으셨다네

그러나 토기장이는 그가 만든 그릇보다 아름답다네

여호와, 그분도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보다 

더욱 아름다우신 분이라네.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여호와를 담지 못한다네

영원하신 분이 쉬기에는 너무 협소하기 때문이라네

눈사태나 천둥 소리도 

그분을 온전히 찬양하기에는 소리가 부족하다네.

그러할진대 내 어찌 그분을 온전히 찬양할 수 있으리요

내 어찌 그분의 이름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요

조용히 그분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겸손히 그분을 경배할 뿐이라네.


2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2절.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만 여호와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래에 있는 땅도 그분의 위엄을 선포한다. 하늘에서는 별들이 장엄하게 자기 궤도를 달리며 여호와의 능력을 증언한다. 그러나 땅에서는 그분의 능력이 작은 것들에 나타나 있다. 젖먹이의 입에서 나오는 작은 소리를 들어 보라. 여호와의 능력을 증언하지 않는가! 우리는 어린아이를 보면서 우리가 잊어버린 하나님을 다시 알게 되지 않는가! 세상에서 학식 있는 바보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는 그들보다 더 큰 소리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혀를 붙들어 매고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 않지만, 젖먹이는 하늘의 하나님의 영광을 증언하지 않는가! 

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 구절이 뜻하는 바를 증언한다. 교만한 바리새인들이 침묵하고 주 예수를 경멸할 때에 어린이들은 성전에서 "호산나!"라고 외치지 않았던가? 그때에 우리의 구세주께서도 바로 시편의 이 구절을 인용하며 어린아이들의 외침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셨던가? 


교회사를 돌이켜 보라. 어느 세대에나 어린이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놀라운 경우들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사에 나타난 사건을 말하는 것이 더 흥미로울 것이다. 

폭스(Foxe)는 순교자들의 책(Book of Martyrs)에서 로렌스(Law- rence)가 콜체스터에서 화형을 당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불 가까이 나아갔다. 교황 체제를 신봉하는 자들이 그를 고문하여 그는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에 몇몇 어린아이들이 불 가까이 와서 외쳤다:"여호와여, 당신의 종을 강건케 하시고, 당신의 약속을 지키소서."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 로렌스는 어떤 사람보다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며 평안하게 마지막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천주교 사제는 스코틀랜드의 순교자인 위샤트(Wishart)에게 마귀가 그의 안에 있다고 했다. 이때에 어린아이가 곁에 서 있다가 외쳤다: "마귀는 저 분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말은 하지 못해요." 

더 최근에 있었던 일을 한 가지 말하겠다. 휘트필드(Whitfield)는 무어필드에서 그의 첫번째 설교를 할 때 겪었던 박해를 편지로 자세히 전하면서, 후기에 이렇게 기록했다:"내가 설교를 하는 동안 내가 서 있던 강대상 주위에 몇몇 어린아이들이 둘러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은 계란이나 다른 오물들을 내게 던졌는데, 그들이 맞곤 했지요. 하지만 그들은 결코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던진 것에 내가 맞을 때면, 그들은 울면서 눈을 들고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마치 그들이 내 대신 맞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살피시고, 당신을 위해 살아 있는 위대한 순교자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온전한 찬양을 받으신 것이지요!" 

천사들의 노래를 좋아하시는 그분은, 원수들의 목전에서 어린아이들의 찬양을 받기를 기뻐하신다. 하늘의 영광과 어린이와 젖먹이의 입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그러나 이들 모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은 더욱 아름답게 된다.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3절.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 딕(Dick) 박사가 저술한 태양계의 구조(The Solar System) 말미에서 본문의 의미를 파헤치는 아름다운 글을 발견할 수 있다:"태양계의 구조를 조감하는 자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는 경향이 있다. 교만이란 하잘것 없는 사람들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교만은 이 세상의 모든 다툼과 전쟁과 노예 제도와 이 세상을 황폐하게 하는 야심찬 사업의 원인이 되었다. 사람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특성은 없다. 사람이 살고 있는 환경을 고려할진대, 우주의 어떤 지적 존재보다도 사람은 교만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이란 여러 가지 위험과 재난에 노출되어 있다. 태풍과 폭풍, 지진과 화산의 황폐함, 맹렬한 회오리 바람, 바다에서 이는 노도와 같은 파도, 전쟁, 기근, 질병에 사람들은 노출되어 있고, 마침내는 무덤에 묻히고 그의 몸은 구더기의 집이 되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서 아무리 고상하고 위엄이 있는 자들이라도 가장 천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고 부패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땅의 티끌이나 보잘것없는 벌레와도 같은 인간, 지식이 제한되어 있고 잘못한 것이 그렇게 많은 인간은, 교만하게 걷고 그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다." 

어떤 말을 해도 사람의 교만한 마음을 꺾어 겸손하게 할 수 없을 때는 천문학과 관련된 자료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다. 천문학을 연구해 보면 사람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무한한 피조물 가운데서 사람은 마치 보잘것없는 원자와도 같이 작은 존재처럼 보인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아버지처럼 보살펴 주시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무한한 피조물의 세계에 견주어 볼 때에 인간이란 지구 전체에 비해서 한줌 모래와도 같은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자체도 지구의 만 배보다 더 큰 질량을 가진 태양계에 견주어 볼 때에 하찮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천체 망원경을 통해 발견한 수억 개의 태양과 또 다른 세상들에 비교해 볼 때, 이 지구는 얼마나 작은 세상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면 한 나라, 한 지방, 또는 한 마을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이런 작은 영역을 다스린다고 마치 우주의 주인이나 되는 양 교만할 수 있겠는가? 이것들을 하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늘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눈에 띄지도 않는 한 점 지구를 내려다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세네카와 함께 이렇게 외쳐야 할 것이다:"인간의 위대한 계획과 그 큰 소망이 오직 이 작은 점과 같은 곳에 국한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을 위해서 나라들이 그처럼 소란과 전쟁을 일으키며 사람을 대량으로 학살한다는 말인가? 아! 속임을 당한 자의 어리석음이여! 한 점, 원자와도 같은 곳에서 위대한 왕국을 꿈꾸고, 칼과 군대를 일으켜 땅을 차지하려 하다니!" 찰머스 박사는 천문학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이렇게 진실되게 말했다:"광활하게 펼쳐진 울창한 숲에서 나뭇잎이 하나 떨어진다 해도, 숲의 영광에는 어떤 변화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이 모두 소멸된다 해도 이 광활한 우주의 영광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처럼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5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이 구절들은 타락하기 전의 사람의 모습에 대한 기록일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 의미를 찾았으며,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존귀와 위엄의 순으로 따지자면, 사람은 천사보다 조금 낮은 존재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도 이루어졌다. 그분은 죽음의 고난을 당할 때에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되셨던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사람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었다. 피조물들은 모두 그 앞에 나와서 이름을 받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다스리는 사람에게 순복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영광 중의 예수는 이제 모든 살아 있는 존재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주가 되신다.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신 그분을 제외하고, 예수께서는 만물의 주가 되신다. 그분의 택하심을 받은 자는 첫 아담보다 더 넓은 영역을 다스리도록 높임을 받을 것이며, 이것은 그분이 다시 오시는 때에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늘의 달과 별들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사람만을 높이신 것에 놀라움을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5절.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천사는 죽음을 당하는 존재가 아니기에 사람이 천사보다 조금 못하다. 그러나 천사보다 못한 기간은 잠시 동안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육체로 존재하는 기간은 짧기 때문이다. 이 기간이 끝나면, 성도들은 더 이상 천사들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다. 


5-8절.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것은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이다. 다스린다는 것은 존귀한 일이며, 가장 높은 자리에서 다스리는 자가 관을 쓴다. 다스림을 받는 피조물의 명단이 모두 나타나 있다. 사람이 죄로 잃어버린 다스리는 권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회복된다. 우리는 이 땅의 피조물이 우리의 덫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것들을 다스릴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것들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자. 우리는 이 세상을 우리 발 아래 두어야 한다. 세상의 염려와 쾌락이 우리의 영혼을 흔들게 해서는 안 된다. 


9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9절. 시편 기자는 마치 탁월한 작곡가처럼 그가 처음에 놀라며 경배를 드렸던 곡조로 다시 돌아온다. 그가 서두에서 소개한 명제를, 이제 증명이 끝난 결론으로서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셨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아! 그 아름다운 이름에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소서! 




주해


머리말. "깃딧." 이것은 포도 수확을 마치고 즐거워하며 축제를 벌일 때에 사용했던 악기 이름일 것이다. 포도 수확이 마치면 유대인의 일 년이 끝난다. 이 시는 주께서 모든 원수를 정복하고 이 땅의 왕이 되시는 마지막 날의 영광을 보여준다. 포도 수확은 하나님의 원수를 모두 멸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사 63:1-6; 계 14:18-20). 고대의 유대 해석가들은 이 시를 이렇게 이해했고, 메시아께서 원수를 정복하는 신비로운 포도 수확에 적용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흥미로운 시를 "오는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세워질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예언적 기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참조. 히 2:5). 우리는 아직 모든 것이 그분의 발 아래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국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래서 모든 원수들, 사탄, 죽음도 모두 정복되고 멸망을 당하며,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 노릇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르게 될 것이다(롬 8:17-23). 이 시에서 우리는 그 승리를 바라보며 찬양을 드리는 가운데 힘에 힘을 더 얻고, 마침내 우리의 영광스러운 머리가 되시는 그분과 함께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게 된다. -윌슨(W. Wilson, D.D.).


시 8편 전체. 이 시가 누구에 대한 시인지 알아보자. 히브리서 기자는 이 시를 인용하며 오는 세상을 증명했다(히 2장). 이 시를 읽는 자들은 시편 기자가 에덴 동산에 있는 옛 아담, 천사보다 조금 낮게 지음을 받은 자-천사들은 단순히 영인데 반해서 우리의 영은 혈과 육으로 싸여 있다는 점에서-에 대해 글을 썼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이 시가 주로 옛 아담에 대한 시이며,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그저 암시만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편지를 읽는 자들에게 이 시는 그들이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분,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시라고 말한다. 

이제 이 시가 누구에 대한 시인지 분명해졌다. 로마서 5:14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했다. 시 8편에는 아담의 세상, 즉 오는 세상의 모형이 나타난다. 첫째 아담에게도 그의 세상이 있었다. 그러므로 둘째 아담도 그에게 속한 세상이 있다. 그의 세상에는 소와 양, 그리고 공중의 새도 있다. 또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듯,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한다. 

이 시에서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라는 구절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22에서 인용했다. 바울은 죄를 범하기 전의 아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했다. 그러므로 이 시에 나타난 세상은 현재의 세상이 아니라 메시아를 위한 세상을 말한다. 

첫째, 이 시에 나오는 사람은 타락 이전의 아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2절에서 시편 기자는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라고 했다.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는 어린이도 젖먹이도 없었다. 또한 그는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라고 덧붙였다. 마귀는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는 원수였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여 그를 다스리겠다고 하셨다. 아!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떠한가? 마귀는 아담을 이기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여기 나오는 대로 원수와 보수자를 잠잠케 할 사람은 아담이 될 수 없다. 

또한 그는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라고 했다. 아담은 동산을 가졌을 뿐, 하나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전파하지는 않았다. 그는 동산에 있은 지 오래지 않아 타락했고 아들을 낳았다. 또한 그가 하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발견한 것도 아니다. 

또한 4절에서는 "사람이 무엇이관대······인자가 무엇이관대"라고 했다. 아담은 사람이었지만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은 아니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논리를 펼쳤는가? 이 시에 나오는 사람은 만물을 그 발 아래 둔 자를 말한다(엡 1:21, 22). 그는 하나님 외에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시다. 모든 정사와 권세를 다스리는 분이시니, 천사들도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 사람은 아담이 될 수 없다. 아담은 모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지 않았다. 아담이 이 모든 세상을 다스릴 수 없다. 천사들과 이 모든 것들이 순종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것들은 모두 그분의 발 아래 있고, 그분은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위에 계신 분이시다. 

둘째, 이 사람은 타락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히 2:8)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이 시 8편에 나오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말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타락한 인간은 시 8편에서 말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한다. 왜 그런가? 모든 만물이 타락한 인간에게 복종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만물을 정복한 사람이나 인류는 없었다. 때로는 피조물이 사람에게 해를 입히기도 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라고 한 것은 일반적인 사람의 특성을 말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군왕들을 보라. 그들은 온 세상을 정복한 것이 아니었다. 죄인 중에서 어떤 사람도 만물을 정복한 자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와 다르다. 히브리서 기자는 죄인들과 그리스도를 강하게 대조하며 말한다:"오직 우리가······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히 2:9). 그러므로 만물을 다스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분을 말한다. 그러므로 시 8편에서 나오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도 시 8편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해석하셨다. 어린아이들이 그리스도를 보고서 "호산나," 즉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을 때에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세주가 되심을 외친 것이다. 이때에 바리새인들은 분노했지만, 우리의 구세주는 바로 이 시를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을 물리치셨던 것이다:"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16). 그러므로 이 시가 그리스도에 대한 시라는 것을 그리스도 자신과 사도가 증거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한 시 8편을 인용하셨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도 어쩌면 여기에서 힌트를 얻고서 같은 논리를 펼쳐 나갔고, 이런 논리로 유대인들을 수긍시켰다. -토머스 굿윈. 


1절.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온 세상에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분의 성육신, 출생, 겸손한 삶, 가르침, 기적, 고난, 죽음, 부활, 승천을 전 세계가 기념하고 축하한다. 그분의 종교, 성령의 은사와 은혜, 그분의 백성인 크리스천들, 그분의 복음, 이것들을 세상 곳곳에서 증거하고 있다. 어떤 이름도 이처럼 널리 퍼진 이름이 없고, 어떤 사람의 권력이나 영향력도 모든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분을 따르지 못한다. 아멘. -아담 클라크. 


1절.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하늘에 두신 것이 아니라, "하늘 위"에 두셨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보다 위대하고, 하늘보다 위에 있다.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모두 그분에게 복종한다. 바울은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엡 4:10)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분의 영광은 하늘 위에 있고, 그분은 성령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땅에 선포하신다. 사도 바울은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주셨으니"(엡 4:10, 11)라고 덧붙였다. 이 시에서도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라고 했다. -아이작 윌리엄스(Isaac Williams).


2절.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무한한 자비를 어린이들이 수백 년 후에 찬양할 것에 대해 예언한 것이다. 어린이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을 때 예수께서는 이 시를 인용하시며 그들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셨다(마 21:15, 16). 바실(Basil)과 또 다른 고대와 현대의 해석가들도 이와 같이 해석했다. 그러나 칼빈은 이 구절이 하나님께서 젖먹이들을 놀랍게 공급하시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피를 우유로 변화시키시고, 젖먹이들에게는 이것을 빨아들이는 기관을 주셔서 그들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보존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는 자들에게 그분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연약하고 속수무책인 존재를 놀라운 섭리 중에 보호하신다는 것을 수긍시키기에 충분하다. -존 메이어(1653).


2절. "어린아이와 젖먹이." 누가 어린아이와 젖먹이인가? (1) 일반적인 사람들을 말한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린이와 젖먹이로서 약한 존재로 시작하지만, 마침내 자라서는 힘을 얻고 원수와 보수자와 견주고 그들을 이기게 된다. (2) 다윗을 말한다. 그는 혈색이 좋은 소년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셔서 골리앗을 이기도록 하셨다. (3)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고, 죄가 없으시나 모든 연약한 것을 받아들이시고, 어린아이의 연약한 시절도 지내시고, 죽으신 후에는 하늘에서 다스리기 위해 이전의 존재로 회복되시고, 마침내 모든 원수를 그분의 발 아래 두셨다(시 110: 1; 고전 15:27). 하나님의 아들께서 여인의 몸을 통해 나셨을 때, 우리 사람들은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도 높임을 받은 것이다. (4) 사도들을 말한다. 그들은 세상의 위대한 자들과 비교해 볼 때, 외양으로는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처럼 보잘것이 없었다. 그들은 가난하고 멸시를 받았으나,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주된 도구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값없이 주시는 것을 찬양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이처럼 그들은 미천한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또한 제자들에게 악한 영을 이길 권능을 주시고 밖으로 내보낼 때에도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눅 10:21). 그분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연약한 자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셨다. (5) 그리스도를 향해 "호산나"를 외쳤던 어린아이들도 포함된다. 그리스도께서 이 시를 인용하시며 그들을 변호하셨기 때문이다······(6) 사도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연합하여 싸우는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첫째, 하나님은 연약하고 멸시받는 그들을 도구로 삼아 이 세상의 나라를 정복하기를 기뻐하셨다. 둘째, 그들은 가장 겸손한 자들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마 18:3)이라고 하셨다. 그분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너희들은 내 나라에서도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위대한 자가 되고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자 하는구나. 그러나 내 나라는 젖먹이들의 나라이며, 겸손한 자, 자신들이 보기에도 작은 자, 다른 사람들이 멸시해도 작은 그대로 만족해 하는 자, 세상에서 위대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 자들의 나라이다." 어린아이들은 세상에서 높은 자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를 들어 상징적으로 가르치시며, 그들이 기대하는 세상 나라에 대한 소망을 끊어 버리고자 하셨다. -토머스 맨턴(1620-1677). 


2절.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타락하게 된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사탄에 대한 심판을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했던 첫번째 약속과 복음은 여자의 씨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불쌍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토머스 굿윈.


2절.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사랑으로 행하는 일은 어려움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이것은 돌을 들어올리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마른 땅에 노출되어 있는 큰 돌을 생각해 보라. 그것을 움직이려 힘을 다 쏟아도 그 돌은 움직일 기미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홍수가 들판을 덮고, 큰 돌이 물 속에 잠겼다고 하자. 이때에 돌을 움직이려고 힘을 써 보라. 아! 이때는 돌이 움직이고, 박혀 있던 땅에서 굴러 나오며, 팔로 들어올릴 수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의 은혜가 사랑의 홍수처럼 내려 우리의 의무와 어려움을 덮어 버린다면, 어린아이들도 성인이 하는 일을 해 내고, 어른들은 거인이 하는 일을 할 수 있다. 마음에 사랑을 품을 때,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권능을 세우신다. -토머스 거스리(Thomas Guthrie, D.D.).


2절.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순교자 앨리스 드라이버(Alice Driver)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주교의 감독을 침묵하게 했다.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자가 이 미약한 여인을 꺾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당신이 벌레처럼 무가치한 존재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일하시고, 당신 안에 있는 욕정을 없애 주시며, 당신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다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 당신이 그분을 의지하기만 하면, 여호와께서는 당신을 위해 더 큰 일을 행하실 것이다. 그분은 당신을 독수리의 날개에 태우고 날아가게 하실 것이며, 그분을 위해 고난도 감수할 수 있게 하실 것이고, 믿음으로 살며 기쁨으로 당신의 달려갈 길을 마치게 하실 것이다. 아! 그분은 당신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실 것이고, 이 겸손은 당신에게 영광이 될 것이다.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개미를 만드신 하나님의 솜씨를 보고, 사람들은 가장 큰 동물인 코끼리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더 놀라지 않는가? 그처럼 많은 부분들이 함께 모여 이처럼 작은 몸을 이루다니! 이처럼 작은 피조물이 겨울에 먹을 양식을 여름에 저장하다니! 벌을 보면서 하나님의 솜씨를 보지 못하는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커다란 몸을 가진 동물의 엄청난 힘을 보고서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름답지 못한 부분을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입히신 것을 보았다면, 하나님을 찬양하라. 당신에게 연약한 점이 있다면, 이것도 받아들이라.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은 하나님을 배척했으나 당신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당신에게 앞으로 영광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당신이 복음을 믿어 구원을 받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면, 우리 주님께서도 칭찬하시리라. 너희 마음이 가난한 자들아, 두려워 말라. 여호와께서 세상에서 교만한 자들, 너희를 멸시하던 자들로 너희 발 아래 꿇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많은 것을 행하셨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시리라.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너희의 분깃을 주시리라. -다니엘 로저스(Daniel Rogers, 1642).


3절. "내가 보오니." 묵상하는 자는 겸손하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 그 영광과 조화, 별들의 움직임과 그 영향에 대해 묵상했을 때, 그의 교만한 마음은 떨어지고 자신을 겸비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토머스 왓슨.


3절. "주의 하늘과······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다윗은 하늘을 쳐다보고서 이렇게 외쳤다:"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왜 달과 별은 언급하면서 해는 빠뜨렸을까? 이것들은 해에서 나오는 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것은 해가 지고 밤이 되어 더 작은 빛들이 하늘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지은 시이기 때문이다. 낮이 되면 하늘의 찬란한 영광을 가장 잘 볼 수 있듯이, 또한 밤이 되면 여러 가지 다양한 별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밤은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밤이 되어도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시편 기자와 함께 좋은 생각을 하며 지내야 하지 않겠는가? 밤을 아편을 복용하는 시간이나 더러운 생각을 하는 시간으로 삼지 말고 이것들을 지워 버리는 시간으로 삼으라. 그렇지 아니하면 이것들이 내 영혼을 사로잡게 될 것이다. -토머스 풀러(1608-1661).


3절. "주의 하늘." 육적인 마음은 어떤 것에서도, 심지어 영적인 것, 그분의 말씀과 율례에서도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영적인 마음은 어떤 것에서도, 심지어 자연적인 것에서도,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서도 하나님을 본다. 하늘과 땅과 피조물은 모두 하나님의 솜씨이며,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분의 피조물을 혹 잘못 남용하는 것은 아닌지, 그분께서 베푸신 호의로 그분께 욕을 돌리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면서 경외심으로 주 앞에 선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또한 주의 것이오니 내가 주야로 당신을 잊지 않겠나이다." -로버트 레이턴.


3절. "별들." 별들의 수가 무수히 많고, 무한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나를 사로잡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마음에 혼란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들이 죽음 이후의 삶을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별들이 저 멀리 천상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땅에 속한 것들은 지극히 미미하고 사소한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저 넓은 우주 공간에 깔려 있는 별들과 비교해 보면,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존재가 지극히 미미하게 느껴지고, 사람의 운명이나 그가 즐기는 것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모든 것들을 사소한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하늘의 모든 별자리들은 사람들의 경주를 살펴보았고,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마지막 시간까지 인류의 모든 역사를 지켜보았으며 또 지켜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면 나는 조용한 환희에 젖어든다. 만물이 잠든 듯한 조용한 밤, 깨끗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빛나는 별들, 이것들이 마치 우주의 합창대처럼 제 궤도를 도는 동안 이 땅의 존재들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한 가지는 땅에 속한 것으로서 밤의 적막 가운데서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것들이며, 또 다른 한 가지는 별들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 그 영광과 위엄을 묵상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묵상한다면, 별이 빛나는 하늘은 우리에게 도덕적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 1850). 


3절.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우리가 달 저편으로 여행하고, 우리 머리 위에 빛나는 별 중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새 하늘과 새로운 별들과 새로운 태양들과 더 장엄하게 치장된 새 별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이른다 해도 우리의 위대하신 조물주의 영역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중에서 일부에 속한, 지극히 작은 것을 보았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서 놀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지극히 작은 부분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부분을 보고서도 우리는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알고 경탄하게 된다. 

이처럼 무(無)에서 무한한 별들을 만드신 분, 별들의 행로를 지정하고, 능한 손으로 이 모든 별들을 붙드시는 그분은 얼마나 위대한 분일까? 이 지구에는 장관들이 펼쳐지지만, 헤아릴 수 없는 광대한 우주와 비교해 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흙덩이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광대한 우주에서 이 지구가 없어진다 해도, 해변에서 한줌 모래가 없어진 것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세상의 일부에 불과한 나라들과 지역들은 어떻겠는가? 이것들은 공중에서 춤추는 원자에 불과하고, 태양빛에 반사되는 먼지와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은 무한히 많은데, 여기서 나 한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존재란 말인가? 나는 정말 지극히 무가치한 존재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보좌를 두신 곳, 별이 빛나는 하늘은 진정 아름답다! 그 별들은 얼마나 경탄스러운 것인지! 나는 그 현란함에 어지럽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답고 귀하게 치장되었어도, 이 하늘은 지성이 없는 존재이다. 하늘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난 비록 진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손으로 빚어진 바 되었고, 지성과 감성을 부여받았다. 나는 이 빛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묵상할 수 있다. 아니, 그보다도 이 모든 것을 지으신 존귀하신 분과 어느 선까지는 교제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믿음으로 창조주의 영광을 조금은 바라보고 있다. 아! 그분이 하신 일을 날마다 더 알아 갈 수 있다면! 마침내 내가 영광스럽게 변화를 받아 별이 빛나는 저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까지, 그분께서 하신 일들을 날마다 배워 갈 수만 있다면! -크리스토퍼 크리스천 스텀(Christopher Christian Sturm, Reflections, 1750-1786). 


3절.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이것은 가장 정교하고 정확하게 만든 것을 말한다. 수를 놓는 모습에서 가져온 비유이다. -존 트랩.


3절.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자연을 바라보며 경외심을 품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자연에는 이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권위가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도 이것을 강조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 그분은 한 가지 꽃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면서 여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갖도록 논리를 전개하셨다. 그분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건을 결합하셨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감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교훈을 찾도록 하셨다. 시편 기자는 이 지구를 뛰어넘어서 지구 위에서, 그리고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며 상상의 날개를 편다. 그는 상상의 날개를 타고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서 거기서 묵상한다. 그는 우주 공간에서 어둡고 적막한 고독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영광과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것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모든 것들이 무한한 것임을 알게 되고, 이 세상은 지극히 작은 것임을 느끼게 되었다. 이처럼 장엄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관심하지 않은 것을 보고 놀라게 되었다.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자연을 지으신 분의 아름다움에 눈을 돌리며 이렇게 외쳤다:"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방문하시나이까" 시편 기자가 영감을 받아 현대의 천문학에서 밝혀진 그 경이로운 모습을 이해했는지는 우리의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발달된 과학 문명에 대해 문외한에게도 하늘은 장엄한 모습을 연출해 낸다. 둥근 지구를 둘러싼 거대한 천장과 같은 하늘, 공중에 매달려 엄숙하게 운행하는 수많은 별들. 시편 기자는 밤에 이것들을 바라보면서 묵상에 잠겼다. 해가 힘있게 솟아 찬란한 빛을 발하고, 그리고 해가 지고 밤이 되었을 때, 달과 별들이 나타나고 더 작은 별들이 빛을 발할 때, 시편 기자는 이 모든 모습을 보고서 경외심을 품게 되었다. -토머스 찰머스(1817).


3절. "주의 하늘." 


이 장엄한 모습, 이것은 진정 무엇일까?

이것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

밤이면,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

하나님의 손으로 쓰여진 참된 성경! 

사람의 손으로 오염되지 않은 것.

-에드워드 영(Edward Young).


3절. "별들." 내가 별들을 바라보노라면, 별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별들은 그 고요한 곳에서 나를 불쌍히 바라보고 있다. 그것들은 작은 사람들의 불쌍한 운명을 슬퍼하는 듯, 하늘의 눈물을 반짝이는 눈과도 같다.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3, 4절.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자연을 보면서 무심코 지나치지 말고, 거기서 영적 교훈을 배우라. 다윗은 하늘을 바라보고서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 자연 세계에서 당신을 위해 영적 교훈을 추수하고, 당신이 보는 모든 것에서 당신을 지으신 조물주를 찬양하라. 이것은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하던 일이었으니 이 일을 하는 동안, 타락 이전의 모습을 향해 회복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을 보고서 당신의 지적 호기심만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이 당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영적 성장을 도모하라. 어떤 피조물에서도 조물주의 능력과 지혜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 외에도 우리가 생각할 만한 교훈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양에게서는 인내의 교훈을, 그리고 비둘기에게서는 순결을 배울 수 있고, 개미와 벌은 우리의 게으름을 책망하고, 바보 같은 소와 둔한 당나귀는 우리의 무지를 책망한다. -스티븐 차녹.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권고하시나이까." (히브리어로 "파카드"<dqp>는 '시중을 들다', '권고하다', '방문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역본 중에서 KJV에는 '방문하다'로, RSV에는 '권고하다'로 번역되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권고하다'로 번역되었다-역자 주.) 독자들은 시편 기자가 시를 어떻게 구성했는가를 주의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지극히 선하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늘을 만드신 조물주, 그분의 영광은 위대하여 우리로 경탄하며 경배하게 한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내려오셔서 사람을 돌보시는 것은 그분이 은혜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대조적으로 표현한 것은 그가 사람을 말하면서 "에노쉬"(vwna)라는 단어를 쓴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힘이 있는 사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깨어지기 쉽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대부분의 해석가들은 4절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파카드"(dqp)라는 단어를 '권고하다'라는 뜻 대신에 '방문하다'로 해석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본문의 문맥과 잘 어울리며, 나도 이렇게 해석하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가끔 '기억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시편에서는 같은 내용을 다른 단어로 반복하여 표현하는 기법이 자주 쓰이므로 이 단어를 '기억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도 적합하다. 다윗은 이렇게 말한 듯하다:"하나님께서 사람을 생각하시고, 또 계속해서 기억하신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존 칼빈(1509-1564).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오 하나님! 어찌하여 보잘것없는 사람을 이처럼 광활한 세상을 다스리는 주로 삼으셨나이까? 사람은 이 세상의 작은 모래처럼 미약한 존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하늘과 태양과 달과 별들, 이것들과 견주어 보아도 사람이 도대체 무슨 존재란 말입니까? 여호와께서 이 모든 것들을 오직 사람을 위해, 피조물 중에서도 지극히 작은 사람을 위해 만드셨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당신이 만든 피조물 중에서도 오직 사람만이 당신이 하신 것을 볼 수 있으며, 오직 사람만이 그가 보는 것으로 인해 당신을 경배할 수 있나이다. 그래서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 바로 당신을 경배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물의 가치는 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이아몬드 하나는 채석장의 수많은 돌들보다 귀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당신의 피조물을 모두 합해도 한 사람 안에 있는 경이로움을 따르지 못합니다. 당신은 다른 피조물을 그저 단순히 말씀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만드실 때는 회의를 거쳐서 만드셨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단번에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사람을 만드실 때에 형체를 먼저 만드시고, 이어서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드시되, 다른 어떤 것도 닮지 않고 그들 자체의 모양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바로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나이다. 다른 피조물들은 노동과 봉사에 적합하도록 만드셨으나, 사람은 다스리도록 만드셨습니다. 당신은 사람의 이름도 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피조물들은 사람에게서 이름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다른 피조물보다도 사람을 얻기 위해 더 많은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당신께 바쳐진 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셉 홀(Joseph Hall, D.D., 1574-1656).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KJV에는 "권고하시나이까"가 "방문하시나이까"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욥은 이렇게 말했다:"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욥 7:17, 18). 마음에 교만이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돌보신다는 위대한 진리를 보지 못하나, 마음이 겸손한 사람은 놀라움으로 가득 찬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겸손한 자들은 이렇게 말한다:"오! 여호와께서 버러지 같은 나를 돌보시겠는가? 여호와께서 나처럼 추악한 죄인과도 가까이하실까? 여호와께서 내게 팔을 벌리시고, 그분의 마음을 내게 주실까? 나처럼 구역질나는 피조물에게도 그분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 에스겔 16:1-5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우시는 모습이 나온다. 사람은 태어난 날에 들판에 버려진 갓난 아기와 같다. 그의 몸에는 피와 더러운 것이 묻어 있었으나, 아무도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불쌍한 존재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우리 곁을 지나실 때에 우리가 피 가운데 더럽혀진 것을 보시고 우리에게 "너는 살라"고 말씀해 주셨다. 여호와께서 두 번이나 "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꼭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사랑스러운 때"(겔 16:8)가 되었다. 이것은 진정 사랑이었다. 하나님은 더럽고 비참한 아기를 돌보시고, 그분의 옷깃으로 싸시고, 벌거벗은 것을 가려 주시고, 맹세하여 언약을 맺으시고, 그분의 것으로 만드셨다. 그래서 이 비참한 존재와 약혼하시고, 남편이 되어 주셨다. 이 사랑은 측량할 수 없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이다. 

오! 하나님의 선하심이 얼마나 부요한지!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서 당신은 어떤 느낌을 갖게 되었는가? 이것으로 당신은 놀라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지 않는가? 당신은 밑도 끝도 없는 은혜의 바다에 빠진 느낌이 들지 않는가? 당신은 당신이 느끼는 감정으로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도 백부장의 말을 듣고서 그의 믿음을 판단하셨다:"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마 8:8-10).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친히 오셔서 도우심을 보고서도 영혼에 아무런 감동이 없다면, 당신의 영혼을 향해 이렇게 말하라:"오, 내 영혼아! 네가 무슨 병이 들었느냐? 하나님의 선하심에 아무런 감동도 없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니, 네가 죽은 것이냐? 하나님의 선하심이 놀랍게도 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을 보지 못하다니, 네가 소경이 되었느냐? 보라, 영광의 왕께서 하늘 보좌에서 내려오사 너를 찾아오시나니! 그분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하는가? '자매여, 문을 열어다오.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지 않느냐. 영광의 왕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지 않겠느냐?' 보라, 내 영혼아, 네가 문을 열기를 거부하니, 그분께서 아직도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아! 그분의 선하심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아,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도우려고 오시다니. 나를 기다리시고, 나를 만나고 싶어하시다니!" 당신의 영혼을 향해 이렇게 말하라.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돕고자 당신에게 내려오시는 그 은혜에 놀라라. -제임스 제인웨이(James Janeway, 1674). 


4절. "사람." 히브리어로 약하고 비참한 사람을 가리킨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으로서의 원래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 비참해지고, 그리고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돌보시고, 이처럼 큰 은혜를 그에게 베푸신다. 

"인자"(人子). 히브리어로 '아담의 아들'을 말하는데,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했다. 죄스러운 아버지에 죄스러운 아들이 생긴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성향과 태도를 닮았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크시다는 것을 증언한다.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하나님께서 인자를 방문하시는 것은 성경에 자주 나와 있는 것처럼 분노 중이 아니라, 은혜와 자비 중에 하신다. 다음 성경 구절들을 참고하라:창 21:1; 출 4:31; 시 65:9; 106:4; 144:3.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이 질문에 성경은 여러 가지로 답한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사람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라. 그는 사람은 "풀"이라고 답했다:"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사 40:6). 다윗에게 "사람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라. 그는 사람은 "거짓"이라고 할 것이다:"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 되니"(시 62:9). 그는 거짓말쟁이나 속이는 자라고 하지 않고 "거짓"이라고 했다.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사람이 어떤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 사람을 겸손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아첨하고 서로 서로 아첨하여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명백하게 말씀하신다······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은혜로 대하시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사람은 피조물이요, 하나님은 조물주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하나님께서 저를 돌아보시나이까? 사람은 한줌 진흙덩이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사람이 죄인이며 부정한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는 더욱 놀라게 된다. 부정한 피조물이 무엇이관대,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나이까? 여호와께서 부정한 것에 가치를 주시고, 불순한 것을 인정하신다는 말인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반역적인 사람, 하나님의 원수, 그 사람이 무엇이관대 하나님께서 저를 높이시나이까!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그의 원수들을 좋아하시고,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을 높이신다는 말인가? 왕께서 배반자를 높이시고, 왕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말인가? 사람의 죄성은 하나님의 성품에 원수가 되고, 하나님을 하늘에서 끌어내리려 한다. 이런 때에도 하나님은 사람을 천국으로 올리고자 하신다. 죄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작은 존재로 만들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을 크게 하려 하신다. -조셉 캐릴.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아! 사람은 왜 이처럼 모순된 존재인가! 장엄하면서도 왜소하고, 아름다우면서도 타락했고, 고귀하면서도 천한 것이 사람인 것을! -파스칼(Pascal, 1623-1662). 


4절.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KJV에는 "권고하시나이까"가 "방문하시나이까"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방문한다는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방문한다는 것은 징계하고 벌을 주기 위한 것이다. 성경에서 심판은 하나님의 방문과 함께 이루어진다:"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7). (히브리어 원문에 '보응하다'라는 동사로서 "포케드"<dqp>가 쓰였다. 이는 '방문하다'라는 뜻이다-역자 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해 방문하신다는 뜻이다······재앙은 하나님의 방문과 함께 이루어짐을 유의하라.

둘째, 방문한다는 것은 자비를 보이고, 힘을 주며, 구원하고, 축복하기 위한 것이다:"나오미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룻 1:6).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창 21:1).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주신 최대의 자비와 구원은 이렇게 표현되었다:"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눅 1:68).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방문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실 때에 그분은 우리를 방문하신다. 그리고 이런 자비는 두 가지 면에서 하나님의 방문이라고 불리운다.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실 때에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비란 그분이 친히 사람의 영혼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베푸시고 괴로움을 더하실 때에는 우리와 우리가 사는 장소에서 멀리 떠나신다. 이처럼 그분은 우리에게 선을 행하실 때에 가까이 오신다. (2) 자비를 하나님의 방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자비를 값없이, 자유로이 주시기 때문이다. 방문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일이다. 방문하기 위해서는 사랑 외에는 다른 아무 의무도 필요없다. 그가 내 친구이고,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방문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구속하는 값없는 은혜의 행동을 방문이라고 부른다. 친구가 친구를 자유롭게 방문하듯,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자유로 이것을 행하셨다. 사람들 편에서는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오히려 방문 오신 그분께 불친절했고, 그분을 무시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 가운데 사람을 구속하러 오셨다. 

셋째, 방문한다는 것은 돌아보고 조사하며 지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양 떼를 향한 목사의 직위는 바로 이런 일을 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슥 10:3; 행 15:36). 또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은 그들을 방문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약 1:27). 그리스도는 자신이 옥에 갇혔을 때에 그를 방문한 자를 축복할 것이라고 선포하셨다(마 25:34). 이것은 그저 단순히 와서 "안녕하세요?"라고 묻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다른 성도들이 옥에 갇혀 도움이 필요할 때에 도와주고 돌아보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는 다른 구절에서도 많이 나타난다(욥 7:17, 18).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방문하시나이까?" -조셉 캐릴.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사랑하시나이까?

인자가 무엇이관대

천상의 하늘이 그에게 경배하나이까?


사람은 한줌 진흙에 불과한 것

그러나 하나님의 숨결로 살아난 존재

주께서 이 숨결을 거두시면

다시 죽음을 통해 흙으로 돌아간다네.


그는 가장 미미한 것보다도 못한 존재

그러나 당신의 자비로 가장 고귀해진 존재입니다.


사람은 한줌 흙보다 못한 것

그는 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였건만

죄가 그로 멸망하는 짐승과 같이 만들었다네

그러나 당신은 이 짐승을 사랑하십니다.


그는 가장 미미한 것보다도 못한 존재

그러나 당신의 자비로 가장 고귀해진 존재입니다.


사람은 짐승보다 못한 것

처음에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으나

죄로 마귀의 자식이 되어 버렸다네

이보다 더 저주받은 존재가 있으랴?


그러나 당신의 위대한 자비는

이 저주받은 피조물을 감싸고 있었나이다.


당신은 스스로 천한 몸을 입으셨나이다

당신의 고귀한 의복을 벗어 두시고

천한 육체를 입으심은 당신의 은혜 때문입니다

당신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려 스스로 죽으셨나이다.


그는 가장 미미한 것보다도 못한 존재

그러나 당신의 자비를 받으면, 

그는 축제를 벌이나이다.


보라! 이제 사람은 

축복받은 천사와 동일하고, 그보다 더 존귀해졌다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 까닭이라네.


이처럼 사람은 당신의 모든 자비를 받았나이다

비록 그는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었건만.

-토머스 워슈번(Thomas Washbourne, D.D., 1654).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가난과 부요, 비참함과 당당함

인간은 이처럼 복잡하고, 또 경이로운 존재!

조물주가 심어 놓은 양 극단!


이질적 기질의 놀라운 혼합

서로 다른 세상의 정교한 만남!

무(無)와 신성(神性) 사이!

영원한 존재, 그러나 더럽혀지고 지워진 것

더럽혀지고 지워졌으나, 그래도 남아 있는 신성!

신적 위대함의 희미한 축소판!

영광의 후계자! 흙으로 만들어진 연약한 아이!

연약하나 영원한 존재! 벌레 같으나 무한한 존재!

버러지! 신성! 


나는 나를 바라보며 떤다네

그리고 내 안에서 나는 잃어버린 바 되었다네.

-에드워드 영(1681-1775).


5절.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사람이 천사보다 조금 못하다는 것은 사람의 특성이나 속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위상에 관한 것일 것이다. 천사들이 다른 피조물보다 높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것을 말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이 원래 사람보다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졌다면,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정도의 차이를 말할 것이다. 천사들은 영원하고, 지적이며, 거룩하고, 능력이 있고, 영광스럽게 창조되었으며, 이러한 특성이 그들의 조물주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특성은 사람들에게도 역시 주어지지 않았는가? 사람도 영원하고 지적이고 거룩하고 능력이 있고 영광스럽게 창조되지 않았는가? 만일 천사들이 사람보다 더 낫다면, 그들이 가진 특성을 사람들이 갖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다. 천사나 사람이나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으며,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을 가졌다. 이러한 속성이 사람보다 천사에게 더 강하게 각인되었는지는 우리로서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두 존재들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기에 같은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원래 천사와 사람이 서로 어떤 위치에 있었든지 간에 사람이 타락한 이후로는 사람이 천사보다 훨씬 열등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사람은 타락한 결과 그 모든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고, 창조의 서열에서도 낮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지위가 낮아져도 사람에게 주어졌던 그 능력은 아직도 남아 있다. 이러한 능력은 천사의 능력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므로 이 능력을 깨끗이 하고 또 확대한다면 천사들과 동등하게 될 것이다······아! 우리가 다시 말하거니와 천사와 사람 사이에 너무 큰 간격을 두고 인간을 창조의 서열에서 지나치게 낮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을 뿐이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이 귀한 속성들이 그의 자녀들에게 온전히 전수되었을 것인데, 그만 범죄함으로 인해 이 영광스러운 속성들을 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천사들이 사람처럼 중요한 존재는 아니라고 말한다. 타락한 사람을 위해서는 구세주가 나셨으나, 타락한 천사들을 위해서 구세주가 나셨다는 기록은 없다. 이것은 신비스런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비밀이다. 이것은 측량할 수 없는 내용이기에, 여기에 근거하여 어떤 교리를 세우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간섭하시나 천사들을 위해서는 간섭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면, 조물주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점에 있어서는 사람이 천사보다 낮은 위치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이는 지나친 것일까? 또한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 1:14)라고 했다. 천사들의 수종을 받으면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바람의 날개를 갖고 있는 천사들, 불꽃처럼 빛나는 천사들의 섬김을 받으며, 그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성도들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닌가? 또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모든 천사들이 기뻐하지 않는가? 천사들도 사람에게서 배운다는 것을 덧붙이고자 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 3:10). 또한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환상에서도 교회는 영원하신 보좌 앞으로 나아가고 천사들은 더 멀리 떨어져 그 주위에 둘러 있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건대 사람을 천사보다 열등한 존재로 볼 것이 아니다. 비록 현재는 창조의 아름다움을 잃고,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많이 상실했지만,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영광스럽게 나타내 보일 것이다······.

구세주는 자기를 낮추셨다. 그분이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되신 것은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면이다. 우리는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피조물이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어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했다 해도, 우리는 이것을 결코 '겸손'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피조물이 하나님의 창조 서열에서 어떤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중보자는 지극히 낮아지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극한 고난을 당하셨다. 또한 그분은 중보자가 받는 상으로써 지극히 높임을 받으셨다. 그분은 세상의 모든 정사들과 권세들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셨다. 만일 다른 피조물이 이런 높은 위치를 차지할 것을 전제로 하여 낮아지고 고난당할 것을 자초했다면, 이것을 겸손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높임을 받을 것을 알고서 낮아지는 행동을 취했다면, 이는 겸손이 될 수 없다. 귀족이 왕이 되기 위해 먼저 종이 되었다면, 이런 행동을 겸손한 행동이라고 할 수 없다. 이미 왕이 되어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자가 겸손히 종이 되었다면, 이는 겸손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능하신 하나님 외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의 구세주가 되기 위해 낮아졌다면 이를 겸손한 행동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그분이 하나님의 온전함을 버리실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버리실 수 있었다. 하나님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성경은 우리 주님께서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되셨다고 했는데, 이것이 진정으로 겸손한 행동이며,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그분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면 모든 피조물들이 그분께 경배를 드렸을 것이지만, 그분은 종의 형태로 자신을 숨기시고 피조물의 경배를 받지 않으셨다. 

그분이 하나님의 신성을 버리신 것은 아니다. 신성은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이것은 단 한순간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외적으로 나타나는 위엄과 위대함은 버리셨다. 그리고 신성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베일 속에 감추시고, 낮고 천한 모습으로 내려오셔서 사람들이 그분을 보았을 때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사 53:2)이 없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될 것을 허락하시고 행하신 일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그분은 자신을 비우시고, 아무런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다. 하나님, 바로 그분이 그 찬란한 빛과 아름다움을 하늘에 두시고,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그분은 천사나 천사장의 모습으로 오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천사보다 못한 피조물의 모습으로 오셔서 "사람의 모양"(빌 2:8)으로, 낮아지고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헨리 멜빌(Henry Melvill, B.D., 1854). 


5, 6절.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사람을 다른 피조물보다 높여 주셨다. 3-4절은 시편 기자가 무엇을 보고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하게 되었는지 알려 준다:"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이 모든 것들을 사람을 섬기는 도구로 만드셨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그를 위해 해와 달과 별들을 우주 공간에 심어 두셨단 말인가? 사람이 무엇이란 말인가? 어디서든 거창한 가구들을 많이 들여 놓고 고급스럽게 치장한 저택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이런 집에 들어와서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라고 묻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서, 여기에 사는 사람이 누구냐고 감탄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높여 주신 또 다른 면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시고 높여 주셨다. 6절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타난다:"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이처럼 사람은 모든 피조물보다 더 높임을 받았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그가 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인가? 왜 그가 바다의 고기나 들의 짐승이나 공중의 새를 다스린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사람으로 천사 다음의 위치를 차지하게 하시며 사람을 높여 주셨다:"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을 훌륭하게 만드시고, 사람을 위해 여러 가지 아름다운 피조물을 만드셨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타락 이후,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듯이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게 되었다(히 2:6). 사람이 그리스도로 인해 구속을 받는다면, 이것도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높여 주시는 것이다. -조셉 캐릴. 


5-8절. 어거스틴은 이 시의 머리말에서 포도주틀에 대해 영해(靈解)를 많이 했다. 또한 "사람이 무엇이관대······인자가 무엇이관대"라는 구절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해석을 했다. "사람"은 "에노쉬"(vwna)라고 하는데 이는 '비극'이란 단어에서 파생되었으며, "인자"는 "벤아담"(mdanb)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담의 아들'을 뜻한다. "에노쉬"는 죄를 지어 타락한 사람을 말하고, "벤아담"은 은혜로 중생한 사람을 말한다. 이 사람은 옛 타락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며, 옛 사람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육적인 사람은 비참하다. 어거스틴은 몸에 대한 기록에서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면서 그분은 자신의 영광을 만물 위에 두셨고, 천사들이나 하늘보다도 높이 두셨다고 했다. 온 세상이 그것을 증언한다(엡 1:21). 그분은 가장 높은 자리에서 "우양"으로 내려오셨다. 소와 양은 설교자들과 거룩함을 받은 사람들을 말한다. 소는 설교자에 비유되고, 양은 신실한 자에 비유된다:"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전 9:9). "들짐승"은 방탕하게 살아가며 넓은 길을 걷는 대중을 말한다. "공중의 새"는 교만하여 고개를 높이 든 자를 말한다. "바다의 어족"은 물고기가 바다 밑으로 헤엄치듯이 세상의 부귀에 대한 욕심으로 땅의 더 낮은 쪽으로 뛰어드는 자를 말한다:"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 여기에는 세상에 대해 세 가지가 나타나 있는 듯하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육신의 정욕"은 욕정이고, "안목의 정욕"은 탐욕이며, 여기에 "이생의 자랑"이 첨가되었다(요일 2:16). 마귀가 그리스도를 넘어뜨리고자 세 번이나 유혹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므로 소와 양과 기타 다른 모든 피조물들 위에 세움을 받으셨다. "양"과 "소"뿐만 아니라 이 모든 피조물이 교회 안에 있다. 노아의 방주에는 모든 종류의 짐승들, 정하고 부정한 짐승이 모두 들어갔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가르치신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그물에는 좋은 고기도, 나쁜 고기도, 모든 종류의 고기가 다 잡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록한 어거스틴의 글은 분별력이 있는 독자가 읽는다면 좋게 사용될 수도 있다. -존 메이어.


6절.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헤르모디우스(Hermodius)는 귀족 출신인데 그의 용감한 통솔자인 이피크라테스(Iphicrates)를 단지 구두 수선공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호되게 질책했다. 이피크라테스는 "난 이제 시작일 뿐이오. 그러나 당신은 이제 끝이오"라고 말했다. 헤르모디우스 가문에서는 그에게 공작이라는 직함을 주며 그를 존귀하게 해 주었으나 헤르모디우스는 자신의 힘으로 가문에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칼이 칼집에 맞지 않는 것처럼, 자신은 쓸모없는 존재라고 했다. 그러나 이피크라테스는 자신이 용감하게 공적을 세워서 자신의 집안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영적 문제도 이와 마찬가지다.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가장 훌륭한 신사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더 잘 받아들여서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하다고 했다. 하나님의 성에 사는 시민들은 미천한 가문 출신이 아니라 참으로 고귀한 가문 출신이다. 그들은 자신의 육신의 족보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서 얻게 된 새로운 족보를 자랑하는 것이다. 그들은 다시 태어나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는 그들의 형님이 되셨다. 성령님은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시고, 천사들은 그들을 수종드는 자들이며,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그들의 하인이 되었고, 이 세상은 모두 그가 임시로 거하는 여관이며, 하늘은 그들의 가정이 되었다. -존 스펜서, Things Old and New.


6절.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기도하면서 헛된 생각을 물리치고 싶다면······세상과 거리를 유지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주권, 즉 세상에서 나오는 이익과 쾌락을 다스리는 주권을 행사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것들이 당신에게 덫이 될 것이다. 가정의 아버지나 청지기가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자녀들이나 하인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면, 저들은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하고 게으름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나 청지기가 이것을 잊고, 아버지는 자식을 너무 귀여워하고 청지기는 하인들과 너무 허물 없이 지내게 되면, 아버지와 청지기는 권위를 잃게 되고, 자녀들은 버릇이 없어지고 하인들은 제멋대로 놀아나고 말을 듣지 않게 된다. 그들에게 "가라"고 해도 미동도 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임무를 주어도 "당신이나 하시오"라고 하며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성도들의 하인들과도 같다. 성도들은 이 세상의 피조물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그 발 아래" 두셨듯이 피조물들과 거룩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그들을 품안에 안고서 귀여워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면 성도들은 이 세상의 주인으로서 행세하며,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성도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경배할 것이고,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이다. 세상의 피조물이 이 교제의 시간을 감히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윌리엄 거놀.


7, 8절. 물질 세계를 다스리는 그분은 또한 지적, 영적 세계를 다스리시는 주님이시다. 충성스럽고 겸손하며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영혼들은 그의 목장에 있는 양이다. 소처럼 강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생명의 말씀을 파헤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먹이기 위해서 밭을 간다. 들판의 사나운 짐승들도 그분의 뜻에 순종한다. 공중의 새처럼 높은 곳을 날아다니는 천사들의 영도 그분의 명을 따라 움직인다. 혼돈과 흑암의 깊은 구렁에서 사는 악한 자들, 그 거창한 레비아단도 모두 왕이신 메시아의 발 아래 있다. -조지 혼.


8절.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생선이나 새 고기는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이 피조물을 우리가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그분께 순복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힌트

1절. “여호와 우리 주여.” 여호와를 우리 하나님으로 삼는 개인적 관계. 이러한 관계를 맺는 특권. 

1절.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도 아름다운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속성. 창조와 섭리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1절. “온 땅에.”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그 아름다움.

1절.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이해할 수 없고 무한한 하나님의 영광.

1절. “하늘 위에.” 하나님의 영광은 천사들의 지성이나 하늘의 영광보다 더 높다. 

2절. 젖먹이의 경건, 그 가능성, 힘, 영향력, 하나님께서 잠잠케 하시는 일. 복음의 능력은 설교자가 하는 말의 유창함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는 일은 작은 일이라도 큰 결과를 가져온다. 영적 젖먹이가 할 수 있는 위대한 일. 연약한 성도들의 간증으로 악을 잠잠케 하는 능력. 은혜로 원수를 잠잠케 함.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미미한 사람의 존재. 하나님께서 사람을 생각하심. 하나님의 방문. 이 세 가지는 하나씩 설교를 할 수도 있고, 한 설교에 이 세 가지 주제를 모두 다룰 수도 있다. 

5절. 사람과 천사들의 관계. 예수께서 가르치신 입장. 

5절. “영화와 존귀의 관.” 주 예수 안에서 발견하는 우리의 영광.

5-8절. 주 예수의 우주적 통치.

6절. 피조물의 세계에 대한 사람의 권리와 의무.

6절 하반절. “그 발 아래.” 세상에 속한 것들의 적합한 위치.

9절.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여러 상황 가운데서 알게 된 여호와의 아름다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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