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7편

시편 3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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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주제-“다윗의 시.” 이 시편의 기자를 알려 주는 말은 이것뿐이다. 이 시편이 노래였는지 아니면 묵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이것은 다윗의 노년에 저작되었으며(25절), 다양한 체험의 기록인 까닭에 더 소중하다.

수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온,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곤경이라는 큰 수수께끼가 여기서는 미래의 조명하에 다루어지고 있으며, 안달하거나 불평하는 태도를 금지하는 내용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시편을 통해,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의 너무도 잦은 불평을 매우 다정하게 가라앉히시며, 택함받은 무리를 다루시는 그분의 현재적 처사와 관련하여 그들의 마음을 평온케 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에워싼 이리들을 잠잠케 하신다. 여기에는 여덟 개의 위대한 권면들이 수록되어 있고, 두 차례에 걸친 자서전적 언급을 통해 예시하며, 주목할 만한 대조법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구성-이 시편을 몇몇 부분들로 구분하기란 너무도 힘들다. 이 시편은 잠언서의 한 장을 연상케 하며, 각 절들은 대부분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알파벳 답관체이다:순서상으로는 어느 정도 뒤바뀐 상태이지만, 각 절의 첫 글자가 히브리어 알파벳순을 따른다. 이는 시적 운치를 살린 것일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기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독자는 강해에로 눈을 돌리기 전에 먼저 주해 없이 이 시편을 통독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강해


1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2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1절.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이 시편은 첫번째 권고로 서두를 연다. 신자들은 역경에 처한 상태에서, 신앙이나 정직함이라고는 찾아볼 길 없는 자들이 풍성한 형통을 누리는 것을 볼 때, 자신이 너무 가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라는 명령이다. 불평한다는 것은 근심한다는 것이며, 가슴앓이를 하고 핏대를 올리며 초조해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은, 율법 파괴자들이 말 위에 높이 앉고 순종하는 백성들이 수렁 속에서 걸어다니는 것을 볼 때, 시기의 불을 지피기 쉽다. 여호와의 모든 행위가 의로우심을 확신하는 경건한 만족감을 지니고 가장 역설적인 섭리들을 직시하는 것은, 오직 은총을 깨달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가장 좋은 고기가 개들에게 돌아가는 반면에 사랑받는 자녀들은 그것을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해야 한다는 것을, 육신적 판단으로서는 참아내기 힘들다.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동일한 권고가 다른 형태로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가난하고 멸시받으며 또한 깊은 시련에 직면할 때, 아담에 속한 우리의 옛 자아는 자연히 부자와 대인을 시기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보다 더 의로운 삶을 살았다고 의식할 때, 마귀는 가증스러운 이유들을 가득 준비하고서 우리 곁으로 찾아온다. 곤경의 폭풍우는 심지어 인간성이라는 크림마저 굳어버리게 할 수 있다. 악인들은 시기의 대상이 아니라 혐오의 대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하지만 가득 채워진 그들의 식탁과 화려한 소지품들에 우리의 궁핍한 눈길이 이끌리기란 너무나 쉽다. 리본과 화환으로 치장된 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살진 황소를 누가 시기하겠는가? 본절의 권고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왜냐하면 사악한 부자들은 단지 잡아먹기 위해 피둥피둥 살찌운 짐승들과 같기 때문이다.


2절.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사망의 낫은 예리하다. 초원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지만, 신속하게 낫이 들이닥친다. 사악한 자들에게 임할 파멸은 신속하고 갑작스러우며, 분명하고 압도적이며, 또한 돌이킬 수 없다. 풀은 그것을 베는 자를 거부하거나 피할 수 없다.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채소의 싱싱한 자태는 태양 열에 의해 단번에 말라버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악인의 모든 영광도 죽음의 시각에 사라져버릴 것이다. 사망이 사악한 자를 풀처럼 베어 죽일 것이며, 진노가 그를 건초처럼 말려버린다. 그는 죽고, 그의 이름은 썩어 없어진다. 끝없이 자랑하던 자에게 닥치는 종국이 그 얼마나 철저한가! 불과 한 시간 동안밖에 살지 못하는 곤충이나 태어나는 날에 죽고 마는 하루살이로 인해 안달할 가치가 있겠는가? 신자들 속에는 영원토록 살아서 거하는, 부패하지 않는 산 씨앗이 있다. 어찌 그들이,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은, 육신과 그 영광을 시기해야 하겠는가?


3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3절. "여호와를 의뢰하여." 여기에 두번째 권고가 나오며, 이는 해당 상황에 걸맞는 것이다. 믿음은 불평을 치유한다. 사팔뜨기 눈으로는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며, 그래서 시기심에 사로잡힌다. 믿음은 보다 분명한 시각으로써 사물의 실제적인 면을 보게 하며, 그래서 평안을 얻게 한다.


"선을 행하라." 참된 믿음은 적극적인 순종을 수반한다. 선을 행하는 것은 불평을 없애 주는 근사한 처방이다. 불만의 녹을 제거해 주는 거룩한 활동 속에는 기쁨이 있다. 


"땅에 거하여." 이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른다. 그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불평의 광야에서 방황하지 않고, 만족과 안식을 주는 약속의 땅에 거할 것이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히 4:3). 우리의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마음속에 천국이 있는 자의 경우에는, 그의 가정에도 천국이 임할 것이다.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혹은 (목자의) 돌봄을 받을지어다. 성실하고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필수품들이 보장된다. 선한 목자는 모든 신자들에게 목양적인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사실 그들은 진리를 먹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의 영속적 잔치가 될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나 현세적으로 결핍 상태에 처하지 않을 것이다. 혹자는 이를, "진리를 음식으로 삼으라"는 권면으로 이해한다. 분명 이것은 훌륭한 격려이며, 게걸스러운 시기심을 영원히 몰아내 준다.


4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4절. 이 세번째 권고는 한단계 더 진전을 보인다. 처음에는 불평하지 말라고 권면하며, 그러고 나서 적극적인 믿음을 명령하였다. 이제 거룩한 소원을 품고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권고가 나온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여호와를 네 영혼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삼으라. 악인들은 육신적인 것들을 기뻐한다. 설사 그들이 그렇듯 허망한 우상들로 자신을 가득 채운다 하더라도, 그들을 시기하지 말라. 당신의 보다 나은 기쁨을 바라보고, 당신에게 주어진 보다 숭고한 몫으로 스스로를 가득 채우라. 어떤 의미에서는 악인을 본받으라. 그들은 자신의 몫을 기뻐한다. 그런즉 당신의 몫을 기뻐하도록 유의하라. 그리하면 그들을 시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불쌍하게 여길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몫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불평할 여지가 전혀 없으며, 가장 고상하고 황홀한 것들을 누릴 수 있는 동기를 얻게 된다. 우리는 여호와의 모든 성호, 태도, 말씀, 혹은 행위 등을 기뻐해야 하며, 마치 심오한 미각으로 진미를 맛보는 식도락가처럼 우리의 영혼은 그것들을 묵상하면서 즐거워해야 한다.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즐거운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또 다른 즐거움으로 보상받게 된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것만을 바라며 간구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자유 행동을 허락해도 무방하다. 그들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된 상태이며, 이제 그들은 자신이 갖고자 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 본문의 "소원"이란 변덕스러운 소원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깊은 바람을 가리킨다. 자연적인 본성이 바라는 것들 중에는, 은총의 측면에서는 우리가 결코 간구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많다. 기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러한 깊은 바람들은 약속에 근거한 것들이다.


5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6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5절.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인생의 모든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당신의 현재적 불평거리뿐만 아니라 모든 염려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여 당신이 나아갈 길의 모든 진로를 그분께 의탁하라. 걱정을 던져 버리고, 당신의 뜻을 포기하며, 스스로의 판단을 복종시키며, 모든 것을 만유의 하나님께 맡기라. 시기심을 몰아내는 데 있어 이것은 그 얼마나 훌륭한 약인가! 이 네번째 권고는 그 얼마나 차원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해주는가! 매일 거기에 순종하며 사는 자는 그 얼마나 복 있는 사람인가!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만일 우리가 확신 가운데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기면 우리의 앞 길에는 기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평안한 마음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오 여호와여, 저의 길이 아니라, 주의 길로 이끄소서,

그것이 아무리 캄캄하게 보인다고 해도.

주의 오른손으로 친히 나를 인도하시며,

저를 위해 길을 골라주소서.


그 길이 반반하든 거칠든간에,

그것은 최선의 길일 것입니다.

꾸불꾸불하거나 똑바른 것이 문제가 되지 않으며,

결국 그것은 주의 안식에로 인도합니다.


저는 감히 나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지 않으오니,

설사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겠나이다.

오 나의 하나님, 주께서 저를 위해 선택해 주소서.

그리하면 제가 곧바로 나아갈 것입니다.


주께서 나의 잔을 취하사, 

거기다 기쁨이나 슬픔으로 채우소서.

주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으신 대로,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골라 주소서.


농부는 씨를 뿌리고 써레질을 하며, 그러고 나서 추수를 하나님께 맡긴다. 그가 달리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구름으로 하늘을 덮을 수 없으며, 비를 명하거나 햇빛을 비추게 하거나 혹은 이슬을 내리게 할 수도 없다. 그로서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좋다. 마찬가지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며, 그 결과를 그분의 손에 맡기고 복된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 가장 참된 지혜이다.


6절.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개인적 평판에 관한 한, 우리는 잠잠히 침묵을 지키고 온 땅의 재판관이 우리의 입장을 옹호해주시도록 그분께 맡기는 것이 좋다. 이 경우에 우리가 안달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미치는 결과는 더 나빠진다. 잠잠히 앉아 있는 것이 우리의 힘이다. 여호와께서 비방하는 자들을 제거해 주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바라면, 그분은 우리를 영예롭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비방을 침착하게 참아낼 때, 그 더러운 비방은 우리를 더럽히지 않고 마치 화강암에서 눈덩이가 떨어지듯이 우리에게서 떨어져 내린다. 심지어 선한 이름이 잠시 먹칠을 당하는 최악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마치 여명이 밝아오듯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며, 그리하여 애매하게 비방당했던 사람이 마침내 만인의 찬사를 받게 될 것이다.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질책의 그림자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절정의 영예를 누릴 것이다. 슬픔의 어둠과 그에 대한 악평은 멀리 달아날 것이다.


7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7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이 다섯번째는 매우 신령한 권고이며,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은총이 요구된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며 또한 섭리를 통해 어려운 일들이 해결될 때를 거룩한 인내로써 기다리는 것, 이것은 은혜받은 모든 심령들이 목표로 삼아야 할 사항이다. "아론이 잠잠하니"(레 10:3).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시 39:9). 많은 경우들에 있어, 침묵은 지혜로운 판단뿐만 아니라 거룩한 마음을 반영한다. 


"참아 기다리라." 그에게 시간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도 시간에 전혀 구애받지 말라. 하나님은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으신 분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는 결코 이르지도 늦지도 않게 임한다. 어떤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전체 줄거리가 확연히 드러나기까지 기다린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큰 드라마를 미리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되며, 마지막 장면까지 기다렸다가 최종적으로 어떤 결말에 이르는지를 보아야 한다.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만일 우리가 타락한 음모자들의 현재적 성공으로 인해 근심에 사로잡히면, 자신에게 이로운 것은 전혀 없고 해가 될 뿐이다. 미숙한 판단을 내리려는 충동에 휩쓸리지 말라. 그들은 하나님을 모욕하며 당신을 지치게 한다. 악인이 형통할 수도 있으므로, 당신은 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고, 여호와의 의와 선하심에 관해 의혹을 제기하지 말라. 악인의 계략이 성공하고 당신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들 어떤가? 악인의 성공과 당신의 실패라는 부조리한 듯이 보이는 상황 이면에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숨어 있다.


8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9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10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8절.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특히, 섭리의 진행 과정에 대해 분노하지 말며 이내 모든 위안을 상실하게 될 자들의 일시적인 낙을 시기하지 말라. 분을 내는 일이 지나치면 미치광이처럼 된다. 분노란 항상 우리와 동행하려 하므로, 그것을 단호하게 물리쳐야 한다.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불평은 이유를 막론하고 또한 어떤 상황하에서도 그런 결과를 낳을 뿐이다. 불평은 큰 죄를 유발하기 쉽다. 불평 불만에 사로잡힌 사람들 중에는 나름대로 마음속에 품은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마침내 범죄하고 마는 자들이 많다. 다른 사람들을 트집 잡지 않도록 조심하고, 올바른 길로 걸을 수 있도록 스스로 연구하라.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죄를 두려워하듯이, 내면적인 불평도 무서워하라.


9절.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그들의 죽음은 징벌의 심판이 될 것이다. 즉, 더 나은 상태로 부드럽게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공의의 도끼가 형집행을 기다리는 곳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 인내하는 믿음으로 저 세상에서 얻을 몫을 기대하는 자를 가리킨다. 


"땅을 차지하리로다." 이생에서도 그들은 최상의 만족을 누릴 것이며, 장차 도래할 시대에는 영광과 승리를 얻을 것이다. 번연(Bunyan, John)의 비유에 의하면, 열정을 통해 그에게 처음 제공된 좋은 것들은 이내 사라지며, 인내를 통해 그에게 마지막으로 제공된 좋은 것들은 영원토록 존속된다.


10절.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악인들이 높은 위치에 올랐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그들을 휩쓸어버리시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들의 부귀가 녹아 없어지고, 그들의 힘이 쇠약해지며, 그들의 행복은 불행으로 돌변한다. 그들은 더 이상 산 사람들 가운데 있지 않다. 인생의 무상함은, 악인의 형통이 일시적으로 반짝이는 것은 진짜 금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시련에 처한 신자여, 어찌하여 당신은 잠시 후면 먼지 아래에 누울 자를 시기하는가?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의 집은 텅빌 것이고, 그의 사무실 의자도 비어 있을 것이며, 그의 재산은 주인을 잃을 것이다. 그는 완전히 종적을 감추게 될 것이며, 자기 자신의 방탕함으로 인해 멸절되거나 자기 자신의 방종으로 말미암아 궁핍한 임종을 맞을 것이다. 스쳐 지나가는 구름처럼 사라지며 꿈처럼 망각되는 상황에서, 자랑하며 윽박지르던 그의 모습이 어디 있으며, 가련한 자들로 하여금 죄인을 행복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의 화려한 외모가 어디에 있는가?


11절.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다른 누구보다도 그들이 삶을 누릴 것이다. 비록 그들이 고난을 당하지만, 그들의 위안은 그 고난을 능가할 것이다.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언약의 특권들과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진정 겸손한 자들은 은총을 상속받는 다른 이들과 더불어 자신의 몫을 취할 것이며, 그에게는 신성한 생득권으로 말미암아 모든 좋은 것들이 주어질 것이다.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그들은 화평을 사랑하고 화평을 누릴 것이다. 설사 그들에게 황금이 풍부하지 않다 하더라도, 풍성한 화평으로 인해 훨씬 더 나은 복락을 누릴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싸움을 즐기고 그리하여 때가 되면 비참한 상태에 처하지만, 화평은 화평으로 인도한다. 사람이 화평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에게는 더 큰 화평이 임할 것이다. 말세를 지나 평온한 시대가 이르러 우주적 평화가 온 땅에 임할 때, 이와 같은 말씀 속에 담긴 예언적 의미가 분명하고 온전하게 드러날 것이다. 


12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13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14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15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


여기서는 철통같이 무장한 거만한 압제자의 모습이 언급된다.


12절.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그가 선한 사람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뱀의 씨와 여자의 씨간에는 적대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공정한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음모와 계략을 꾸미는가? 이는 뱀의 본성이 매우 간교하기 때문이다. '사탄'의 배에 탄 자들에게는 순조로운 항해가 어울리지 않는다.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악인은 자신이 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지를 몸동작을 통해 드러낸다. 그들은 물어 뜯을 수 없을 경우에 이를 갈 것이다. 그들은 물지 못할 경우에 최소한 짖을 것이다. 평강의 왕이요 '의로우신 분'에 대해 타락한 세상이 드러내었던 행동이 바로 그러하다. 하지만 그분은 그들에게 아무런 보복도 가하지 않으셨고, 단지 잠잠한 어린 양처럼 인내하며 모욕을 받아들이셨다.


13절.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경건한 사람은 자신을 괴롭힐 필요가 없으며, 합당한 보응이 가해지도록 여호와께 맡기면 그만이다. 그분은 선한 사람을 대적하는 자들의 악의를 철저히 비웃으실 것이다. 교만하게 경멸하는 자가 이를 갈고 입에 거품을 물지라도 그대로 내버려 두라. 주께서 그를 내려다보시며, 그의 광란하는 작태를 경멸하실 것이다. 


"그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악인은 자신의 파멸이 너무도 가까웠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다. 공의의 발이 마치 길가의 진흙을 뭉개듯 그를 짓밟기 위해 이미 들려져 있을 때에도, 그는 다른 사람들을 쓰러뜨리는 것을 자랑한다. 죄인들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면서도, 그분의 자녀들을 치려고 음모를 꾸민다! 그 가련한 영혼들은 여호와의 창날을 향해 스스로 내달린다. 


14절. "악인이 칼을 빼고." 그는 칼집에서 무기를 빼어들고서 잠시 그것을 사용할 기회를 엿본다.


"활을 당기어." 무기 하나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그는 또 다른 무기를 사용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그가 지닌 활은 너무도 세어서, 그것을 당기기 위해 발로 밟아야 할 정도이다. 그 정도라면, 그가 힘이 없거나 준비를 하지 못해 무엇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악인은 이들을 희롱감으로 삼으며, 그 저주받은 악의를 이들에게 표출시킨다. 그 겁쟁이는 자신의 적수가 될 만한 자들은 공격하지 않으며, 온유한 심령과 궁핍한 형편에 놓여 있어 방어 능력이 없는 자들만을 찾아 나선다. 겸비하게 낮아지신 우리 주님을 죽이려고 각종 무기들로 무장하고서 들이닥쳤던 잔인한 대적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의인을 쓰러뜨리고 죽이지 않는 한 악인의 마음에는 만족감이 없을 것이다. 신실하고 정직한 자들은 불의를 기뻐하는 교활한 음모자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경건한 자들의 대적들이 이중으로 무장한 모습을 보라. 그리하면 우리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진실한지를 깨닫게 된다:"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15절. "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들의 운명은, 모르드개를 매달기 위해 자기 손으로 세운 교수대에 자신이 달렸던 하만처럼 될 것이다. 이런 경우는 허다하다.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은 자신의 칼에 엎드러졌다. 또한 사울은 활 쏘는 법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고 자신도 활을 귀한 무기로 여겼지만, 그 활이 길보아에서 그를 구해 주지는 못했다.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 그들의 악한 고안물들은 쓸모 없어질 것이다. 악의가 자신의 의표를 찌른다. 악의를 지닌 자는 다른 사람에게 먹이려고 몰래 독을 넣어 둔 잔을 자신이 마시며, 이웃을 태우려고 지른 불에 자신이 타 죽는다. 악인들은 자신이 성도들에게 손상을 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열심히 자기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그들의 형통에 대해 불평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어지는 아홉 개의 절들은 경건한 자의 특성과 복됨을 묘사하되, 악인들과 그들의 운명에 대한 몇 가지 암담한 언급을 통해 대조적인 방법으로 조명하고 있다.


16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17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18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19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20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 되어 없어지리로다

21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22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

23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24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16절.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이것은 멋진 격언이다. 선한 사람 한 명의 적은 소유를 많은 악인들의 부요함과 비교함으로써 표현의 강도를 한층 더해 준다. 살진 수소 요리로 가득한 불경스러운 난봉꾼들의 식탁보다 채소로 차린 경건한 사람의 식탁에 더 많은 행복이 있다. 원문상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음이 암시되어 있다. 이는 마치 방탕스러운 부자들의 혼란과 소동을 암시하고 또한 그것을 경건한 자의 겸손 및 조용함과 대조시키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우리는 헤롯과 함께 잔치를 즐기기보다는 차라리 세례 요한과 함께 굶주리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또한 바알 제사장들과 더불어 소란을 피우기보다는 오바댜 선지와 함께 동굴 속에 있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사람의 행복이란 황금을 얼마나 많이 쌓아 두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자족하는 자는 적은 것 속에서 많은 것을 발견하지만, 악한 마음을 지닌 자에게는 온 세상이라도 부족할 뿐이다.


17절.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악행을 일삼는 그의 힘은 철저히 쇠진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대항하여 들어올렸던 그의 팔이 뼈까지 부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종종 하나님은 무자비한 자들을 무능한 자들로 만드실 것이다. 이 빠진 적의와 팔 없는 악의보다 더 경멸스러운 광경도 없을 것이다.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그들의 취지와 과정은 안전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들을 잘 보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양날의 검이 악인을 내려치고 의인은 보호한다.


18절.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그분은 예지력을 통해 교만한 자들을 비웃으시지만, 올바른 자들의 경우에는 보다 밝은 미래를 보시며, 그들을 구원의 상속자들로 여기신다. 우리 하나님이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시며 장래의 일들 중 그분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늘 우리의 위로가 된다. 그 어떤 화살도 우연히 우리를 꿰뚫을 수가 없으며, 그 어떤 비수도 몰래 우리를 찌르지 못한다. 시간 속에서든 영원에서든, 그 어떤 해악도 예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에게 닥치지는 않는다. 미래란 단지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쌓아 두신 좋은 일들이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것일 뿐이다.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그들의 기업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상속에 의해 양도되는 것이므로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으며, 또한 든든히 보존되므로 그 누구도 그것을 멸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이란 신자에게 제공되는 몫의 독특한 특성에 해당한다. 이 땅에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소유도 충분히 안전하겠지만, 하늘에서 그들에게 주어질 것은 영원토록 그들의 소유가 된다.


19절.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역경들이 닥치겠지만, 구원도 임할 것이다. 의인들은 곤경으로부터 면제될 것을 결코 기대하지 않거니와, 그들이 자신의 몫을 받도록 부르심받을 때에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을 새롭게 던져 자신의 신실성과 사랑을 다시 한번 입증할 것이다. 하나님은 상황이 좋을 때만 친구가 되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진실한 친구요 어려울 때의 친구이시다.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그들의 음식 통과 기름 항아리가 재난의 날에도 존속될 것이며, 설령 까마귀들이 그들에게 떡과 고기를 날라 주지 않는다 해도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다른 방법을 통해 공급될 것이다. 우리 주님은 광야에서 금식하시면서 이를 체험하셨으며, 시험하는 자를 믿음으로 내쫓으셨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 역시, 어떤 경우에도 안달하여 죄악을 범하는 폐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유업이라면, 우리는 밀 가격이 얼마인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곰팡이나 얼룩이 생기거나 말라버리는 일 등은 모두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다. 불신은 메말라가는 이삭 하나도 구해내지 못하지만, 믿음은 설령 그것이 곡식을 보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더 좋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여호와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기쁨을 보존시켜 준다. 


20절. "악인은 멸망하고." 그들이 어떠한 환영의 빛에 의해 기만당할지라도, 그들의 장래는 어둡고 캄캄하며 본질적으로 밤과 같은 상태이다. 그들에 대한 심판은 이미 선고되었으며, 단지 그들에게는 집행만 남았을 뿐이다. 그들로 자신의 근사한 주황색 아마포를 뽐내게 하며, 매일 사치스럽게 지내게 하라. 다모클레스(시라쿠사의 왕 디오니시오스의 신하-역자 주)의 검이 그들의 머리 위에 놓여 있으며, 만일 그들에게 분별력이 조금만 더 있다면, 그들의 웃음이 비탄으로 변할 것이다.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같이." 희생 짐승의 기름이 제단 위에서 완전히 태워지듯이, 불신자들도 영예와 자부심을 누렸던 곳으로부터 완전히 추방될 것이다. 그들이 달리 소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만일 그루터기가 감히 불꽃에게 덤벼든다면, 그 결국이 어떠하겠는가?


"타서 연기 되어 없어지리로다." 마른 나무처럼, 나뭇잎 무더기처럼, 그리고 타고 있는 석탄처럼, 그들은 이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는 그들이 타서 "연기 되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영광이 화장실의 휴지 조각처럼 변할 것이다. 그들의 모든 자화자찬이 단 한번의 입김에 의해 사라질 것이다. 그들의 형적은 연기가 되어 없어진다. 그들은 자신을 살지게 했지만 그 기름기와 더불어 멸망하고 만다. 그들은 선한 이들을 태우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자신을 태우고 만다.


21절.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부분적으로는 그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그에게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낭비 생활로 인해, 남은 것은 빚뿐이다. 종종 악인들은 이생에서도 이처럼 가난뱅이 신세가 된다. 그들은 방탕스러운 사치 생활로 인해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드나들며 파산자로서 소송을 당하게 된다.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그는 은혜를 받았으므로, 자신도 은혜를 베푼다. 그는 관대하고 형통하다. 그는 꾸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이다. 선한 사람은 가능한 한 궁핍한 자의 간청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 줌으로써 궁핍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부유해져서 더 많은 선행을 베풀 수 있게 된다. 그가 주는 것은 게으름을 장려하기 위함이 아니며, 구제 대상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려함으로써 참된 자비를 베푼다. 본문은 우리에게, 꾸는 것보다 주는 것이 얼마나 더 나은지를 암시해 준다. 남에게 무엇을 빌면 나중에 갚아야 하므로, 생필품 정도만 구입하고서 허리띠를 졸라 매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만일 본절의 두 문장이 악인과 의인을 각각 묘사하고 있다면, 필자는 런던 시 안에 악인들의 수효가 엄청나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22절.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결국 하나님의 축복이 진정한 부귀이다. 택함받은 모든 이들에게 언약을 통해 보장되는 것과 같은 참된 행복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 싸여 있다.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 그분의 눈살을 찌푸리시게 하면 죽음을 초래한다. 아니 그 이상으로, 그것은 지옥이다. 


23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인생 경로 전체는 은혜롭게 정해져 있으며, 그 인자하심 안에서 모든 것이 고정되고 지정되며 또한 존속된다. 우리는 두서없는 운명이나 변덕스러운 우연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걸음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존되어 있다.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이는 부모가 뒤뚱거리며 걷는 자기 아기의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과 같다. 천부께서는 성도와 관련된 모든 것을 흥미롭게 여기신다. 하나님은, 한 영혼이 하늘을 향해 매진하는 거룩한 노력을 귀하게 여기신다. 신자가 시련을 당하거나 즐거워할 때, 예수께서는 그와 교제하며 그를 긍휼히 여기사 동행하기를 기뻐하신다.


24절. "저는 넘어지나." 재난이나 불운이 그를 비천한 자리에 처하게 할 수도 있다. 마치 욥과 같이, 그는 모든 것을 빼앗길 수도 있다. 그는 요셉처럼 감옥에 갇힐 수도 있고, 요나처럼 깊은 곳에 던져질 수도 있다.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그가 온전히 엎드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무릎을 꿇되 그 얼굴이 땅에 닿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엎드러진다 해도 오래 지나지 않아서 그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 어떤 성도도 최종적으로 혹은 치명적으로 쓰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슬픔이 우리를 땅에 엎드러지게 하고 죽음이 우리를 무덤 속에 넣을 수는 있지만, 우리가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을 수는 없으며, 우리는 가장 낮은 처지로부터 가장 높은 상태로 오르게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하나님은 겸손하게 당신의 손으로 성도들을 친히 붙드신다. 그분은 단지 대리로 파견된 자에게 그들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친히 도와주신다. 심지어 우리가 타락의 길로 접어들 때에도, 여호와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 은총을 입은 자들이 영적 침체에 빠져들어갈 때에도, 그 은총은 계속되는 침체로부터 구원해 준다. 욥은 마침내 갑절의 부귀를 얻었으며, 요셉은 애굽을 다스리는 자가 되었고, 또한 요나는 안전하게 뭍으로 나왔다. 온갖 타락을 딛고 성도들이 일어설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강하거나 지혜롭거나 어떤 장점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도우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파멸로 몰아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25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26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25절.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이는 다윗이 목격한 바였다. 내가 목격한 바는 꼭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분명 선하게 살았던 자의 자녀가 거지로 전락하여 내게 구걸했을 때 내가 그들을 구제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의 입장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늘날과 같이 개인적 믿음이 중시되는 시대에 살았던 것이 아니라, 보다 외적 섭리하에서 그리고 보다 현세적인 경륜 가운데 살았던 인물이다. 그것은 예외를 허용치 않는 원칙이었다. 의인의 자녀가 떡을 구걸하는 경우는 실제로 거의 없었다. 그 자녀의 방탕함이나 게으름 혹은  기타 원인들로 말미암아 그런 일이 간혹 생기기는 했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은 너무도 드문 일이어서 생전에 그런 일을 결코 보지 못한 자들이 많다. 빈민촌에 들어가 보라. 그리하면 경건한 자들의 자녀가 얼마나 드문지 알게 될 것이다. 교도소에 들어가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가난한 목회자의 자녀가 부유해지는 경우는 종종 있다. 내가 연로한 것은 아니지만, 가난하고 경건한 자의 가족이 부유해지는 경우를 본 적이 있으며, 여호와께서 신실한 자의 아들을 성공으로 인도하사 그의 신실함에 대해 상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나는 목격해 왔다. 그래서 나는, 자기 자녀를 부유하게 살도록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그리스도를 위해 가난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가졌다. '침례 선교협회' (Baptist Missionary Society)의 인도 선교 과정에서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사례들이 많이 나타났다.


26절.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의인들은 부단히 관대한 마음에 사로잡힌다. 그들은 인색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관대함을 통해 형통하게 된다. 모든 좋은 것들을 아낌없이 주시는 분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답게, 그들은 선행을 기뻐한다.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태도를 고수하는 자들이 구원을 바란다는 것은, 이와 같은 성경 구절을 읽는 자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준다.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하나님은 다음 세대에게 이자까지 붙여 갚아 주신다. 의인의 자녀가 경건하지 않은 데에는, 부모의 무관심이나 다른 죄악된 원인이 개입되어 있음에 분명하다. 아버지의 친구는 가족의 친구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27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28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29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여기서 우리는 일곱번째 권고를 접한다. 이것은 소극적 형태와 적극적 형태로 언급되며, 전체 시편의 정수에 해당한다.


27절.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우리는 악행자들을 시기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정신 상태와 본보기를 멀리해야 한다. 롯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소돔을 떠났듯이, 우리는 죄에서 떠나야 한다. 죄에 대해서는 휴전이나 협상이 있어서는 안 되며, 주저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돌이켜야 하고, 정반대 뱡향으로 과감하게 나아가야 한다. 선행을 거부하는 자는 조만간 악에 빠질 것이다.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영속적이고 평온한 유업을 얻으라. 악인의 이득과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지만, 은총으로 말미암는 상급은 영원하다.


28절.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은 영예를 얻기에 합당한 자에게 영예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며, 정직한 자가 자기 동료들의 비방을 당한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시다. 그릇된 것을 바로잡고 불의한 자의 책략을 멸하는 일을 하나님은 분명 기뻐하신다. 인간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위대한 주권자께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를 분명코 공의롭게 대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와 같은 심판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성도가 버림받는 일은 옳지 못한 것이며, 따라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공정하시듯이 자신의 사랑의 대상들에게 신실하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언약 약속들에 의해 그 안전이 확고해지며, 확실한 성취를 통해 그러한 안전이 실현된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존되며, 그분이 살아 계시므로, 그들도 살 것이다. 왕은 자신의 보석들을 잃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잃지 않으실 것이다. 금항아리 속에 든 만나가-그것을 다른 곳에 넣어 두었다면 녹아 없어졌을 것이다-속죄소 아래에 위치한 언약궤 속에 보존되었듯이, 신실한 자들은 그들의 위안이 되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의해 언약 안에서 보존될 것이다.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마치 개 한 마리도 남지 않게 되었던 여로보암과 아합의 집처럼. 죄악되게 얻은 영예와 부는 거의 삼대를 넘기지 못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기 전에 저주가 자라서 그 악인의 집에 덮친다. 악인들의 유산 가운데 가장 확실한 몫은 그들의 가족에게 임하는 징벌이다. 


29절.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위에 있는 가나안(가나안은 본절의 "땅"의 모형이다)을 상속받는 자들로서, 그들은 모든 언약 축복들을 얻게 될 것이다.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소유권의 종류는 다르다 할지라도, 신자들이 하늘에서 얻는 축복에 필적할 만한 것은 전혀 없다. 낙원이 영원토록 그들에게 유업으로 주어질 것이며, 그들은 영원히 그것을 누리며 살아갈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누가 성도라는 신분을 사모하지 않겠는가? 누가 불신자의 허망한 보물들을 보고 불평에 사로잡히겠는가?


30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31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32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33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시리로다


30절.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전체적으로 의인의 운명과 악인의 운명간의 차이를 묘사하고 있는 시편을 읽으면서, 독자는 자신이 어느 편에 속하였는지를 시험해 보는 것이 마땅하다. 어떤 사람의 혀는 곧 그의 성품을 반영하는 지표이다. 입은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낸다. 선한 사람들은 대체로 교화시키는 말이나 건전한 말을 하며 종교적인 대화를 나눈다. 이러한 말은 그들에게 임한 성령의 조명에 따른 것이다. 의란 지혜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따라서 모든 선한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지혜로운 자들이며, 그들의 말도 당연히 지혜롭다.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그는 공의를 옹호하고, 어떤 일이나 사람들에 대해 정직한 판단을 내리며, 또한 이전의 의인들이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심판이 악인에게 임할 것임을 예언한다. 그의 말은 어리석거나 저속하지 않으며, 지루하거나 불경스럽지도 않다. 우리의 대화는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영향력을 미친다.


31절.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가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를 잡을 때, 최선의 결과를 야기시킨다. 자신의 마음이 좋은 상태로 잘 유지될 때 그의 말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 거룩함을 사랑하고 성결케 된 동기와 바람을 지니며, 또한 자신의 내밀한 심령으로 여호와께 순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모든 행로를 그 위대한 목표로 효과적으로 향하게 하고, 그 행로의 매 단계들마다 구체적으로 보호하는, 그리고 우리의 걸음들로 하여금 심각하게 그릇된 길로 접어들지 않게 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러한 때에 평탄한 길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자요, 또한 본문에서와 같이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는 자뿐이다. 모략은 곁길로 빠지거나 실패하게 만들며, 또한 꼬이거나 변경되어 장기적으로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실한 자는 줄곧 평탄한 길로 나아가 마침내 목표 지점에 이른다.


32절.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만일 이 땅에 법이 없다면, 우리는 조만간 의인들이 대량 학살당하는 광경을 목도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대적들은 그분을 죽일 기회를 엿보았다. 그들은 그분의 피에 굶주려 있었다.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이 미움을 받아 죽음을 당하신 곳에서 호의를 바라서는 안 된다. 


33절.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종종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을 구원하기 위해 임하시며, 설령 현세적으로나 육체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그러한 기쁨과 평안을 그들의 영혼에게 임하게 하사 그들로 하여금 괴롭히는 세력을 물리치고 일어나게 하신다. 우리는 욥처럼 잠시 동안 대적의 손아귀에 놓여 있을 수 있지만, 거기 내버려둠을 당할 수는 없다.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시리로다." 시간이 지나면 성급했던 판결이 뒤집힐 것이다. 혹은 시간 속에서 당했던 정죄가 영원 속에서 깨끗이 제거될 것이다. 정해진 때가 이르면 의인들이 올바른 판결을 받을 것이다. 일시적 불공평은 지혜로운 목적에 따라 섭리의 과정 속에서 용인된다. 그러나 쓴 맛을 가리켜 항상 단 맛이라고 지칭하지는 않을 것이며, 영원토록 빛이 어둠이라는 비방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정해진 때가 이르면 올바른 것이 드러날 것이다. 허구적이며 가식적인 것들이 허울을 벗을 것이고, 진실하고 참된 것이 드러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신실하게 행한다면, 우리는 열등한 세상 법정을 떠나 위대한 날에 행해질 엄숙한 심판에 호소할 수 있다.


34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35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36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37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38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39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40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34절. "여호와를 바라고." 여기에 여덟번째 권고가 나온다. 이러한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틈을 두실 때 기다리라. 종으로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상속자로서의 소망 가운데, 그리고 신자로서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리라. "기다리고"(KJV 직역. 한글 개역 성경에는 "바라고"로 번역되었다-역자 주)라는 것은 말하기는 쉬우나 실행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믿음은 그것을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 


"그 도를 지키라." 계속 좁은 길로 가라. 부를 얻으려고 서두르거나 사악한 행동에 쉽게 빠져들지 말라. "계속, 계속, 계속"을 당신의 표어로 삼으라. 시들해지거나 반전을 꿈꾸지 말라.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당신은 이 세상 것들 중 참으로 좋은 것들을 모두 차지할 것이며, 하늘에 속한 무궁무진한 축복들도 차지할 것이다. 당신은 탁월한 존재로서 들리움을 받을 것이다.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도 교훈적인 광경인가! 불평하는 자에게 이는 그 얼마나 심한 책망인가! 그런가 하면, 감사하는 자에게는 그 얼마나 귀한 자극제인가! 내 영혼아, 여호와의 대적들에게 임할 무시무시한 종국을 예견하고서, 잠잠하라. 


35절. 다윗이 두번째로 자신의 체험을 회고하고 있다. 이번에는 시적 이미지를 통해 자신이 목격한 바를 전한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이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두려운 존재였으며 큰 권세로 지배하고 거드름 피우며 다녔다. 그는 권세에 있어 케사르와 같았고, 부귀에 있어서는 크로이소(리디아의 왕으로서, 큰 부자로 유명하다-역자 주)와 같았다.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그는 푸른 나무처럼 집집마다 들판마다 무성하며, 점점 더 높이 위엄스러운 자태를 드러내었다. 그는 월계수처럼 늘 푸르를 듯 보였으며, 자생지의 토양에 심겨 한번도 옮기워지지 않은 나무처럼 자랐다. 여기서 어떤 특정한 나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넓다랗게 가지를 뻗은 너도밤나무나 참나무의 모습을 떠올리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이 땅에 속한 것이며, 그 뿌리가 진흙 속에 박혀 있다. 그 영예인 잎사귀들은 시들어간다. 비록 그 그림자가 그 아래에 있는 파리한 식물들의 성장을 방해하긴 하지만, 그것 자체도 조만간 벌목꾼의 도끼에 찍히고 말 존재에 불과하다. 숲의 왕이라고 자부하는 귀한 나무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 불신자의 위용을 보라. 잠시 기다리고 난 후에 그 놀라운 변화를 보라. 목재는 옮겨지고, 그 뿌리는 땅에서 뽑히고 만다.


36절. "사람이 지날 때에." 나무와 사람 둘 다 사라진다. 사람의 아들도 숲의 자녀(수목들을 가리킨다-역자 주)처럼 분명히 사라져 간다. 죽음은 그 얼마나 깨끗이 쓸어가고 마는가! 


"저가 없어졌으니." 놀랍게도 위대한 자가 사라졌고, 그의 재산들은 팔리우며, 그의 사업은 파산당하고, 그의 집은 소외당하며, 또한 그의 이름은 잊혀지되, 이 모든 일들이 불과 한두 달 만에 일어난다!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우리가 호기심에 사로잡혀 불신자들의 행방을 조사해 보지만, 그들은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았다. 마치 불길한 징조를 예감케 하는 새들처럼,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경건한 자들 중 가장 겸비한 어떤 이들이 불후의 명성을 떨치며 그들의 이름이 교회내에서 불멸의 향기를 날리기도 하지만, 이단자들이나 신성모독자들 중 가장 유능한 인물들이라도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이름이 잊혀지고 마는 경우가 많다. 어저께 만인의 입에 회자되던 사람들이 내일에는 잊혀진다. 이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미덕뿐이기 때문이다. 


37절.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악인의 파멸을 놀라운 심정으로 목도한 후에, 진정 경건한 자에게 주목하고, 그 대조적인 축복에 주목하라. 선한 사람들은 발자취를 남기며, 연구할 가치가 있다. 정직한 사람은 놀라운 은총을 지닌 자이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평안한 자는 끝없는 평안을 지니고 있다. 끝없는 평안이 결국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한다. 그의 길은 울퉁불퉁할 수 있지만, 결국에는 집으로 인도한다. 신자들의 경우에, 아침에는 비가 오고, 정오에는 천둥이 치며, 또한 오후에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질 수 있지만, 해가 지기 전에 쾌청해질 것임에 분명하다. 우리의 임종 무렵까지 전쟁이 지속될 수도 있지만, 마침내 우리는 그것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을 것이다. 


38절.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공동으로 반역에 참여한 자들에게는 공동의 파멸이 기다리고 있다.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그들의 때가 단축될 것이며, 그들의 행복이 종료될 것이며, 그들의 소망이 영원히 시들 것이고, 또한 그들이 처형될 시점이 촉박할 것이다. 그들의 현재적 삶이 죄악으로 인해 단축된다. 그들은 자기 수명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바람직한 장래가 없지만, 의인의 경우에는 자신의 장래를 참된 유업으로 여긴다.


39절.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이는 확고한 교리이다. 거저 주시는 은혜의 복음의 정수인 것이다. 구원이란 모든 종류의 구원들을 포함한다. 이는 우리를 최종적으로 영광에 이르게 하는 구원뿐만 아니라, 거기 이르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갖가지 자그마한 구원 사례들까지 모두 가리킨다. 이 모든 구원들은 오직 여호와로부터 말미암는다. 따라서 그분으로부터 구원의 은총을 받은 자들은 그분께 영광을 돌림이 마땅하다.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환난은 악인들을 파멸시킨다. 반면에 의인들의 경우에는 환난을 통해 그들을 도우시는 분께 인도된다. 그분은 그들 돕기를 기뻐하신다.


40절.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장래에는 여호와께서 그분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위해 일어서실 것이다. 우리의 위대하신 동맹자께서 격렬한 전투의 상황에서 그분의 힘을 발휘하실 것이다. 


"악인에게서 건져." 다니엘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셨듯이, 그분은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들을 그 대적들로부터 보호하실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불평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다.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믿음은 택함받은 자의 안전을 확실하게 보증할 것이다. 그것은 양들을 염소들로부터 구별시켜 줄 표시이다. 그들을 구별해 줄 것은 그들의 장점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다. 믿음의 길로 매진하려 하지 않는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자라면 누구나 현재의 이 세상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변칙 사례들에 대해 더 이상 불평하지 않을 것이며, 신비한 방법으로 공의가 실현되고 또한 성취되기 어려워 보이는 일이 은총 안에서 분명히 이루어진다는 점을 편안한 마음으로 확신할 것이다. 따라서 이 시편은 서두에 언급된 추하고 불안한 상태에 대해 조종을 울리는 내용으로 마감된다. 조악한 상황에서 벗어나 은혜를 체험한 사실을 직접 노래할 수 있는 자들은 행복하다.


주해


시 37편 전체-의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보호와 안전을 보장받는다. 시 37편은 이 사실을 탁월하고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며, 직접적 증거를 통해서, 그리고 의인의 안전과 관련하여 흔히 제기되는 난점들에 대한 답변을 통해 그렇게 한다. 또한 그들이 보존될 것이라는 사실은 3, 17, 23, 25, 32절 등에서 확언되고 있다. 여기서 답변된 난점들은 여러 가지이다.

난점 1:악인들이 형통한다.

해결책(2절):의인이 그 사실로 인해 슬퍼해서는 결코 안 된다. 이는,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이기 때문이다.

난점 2:의인들이 재난을 당한다.

해결책(6절):그들의 역경의 밤은 형통의 빛으로 변할 것이다. 또한 밤이 되면 곧 낮이 돌아올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시련에 직면할 때 조만간 위로와 구원이 임할 것임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다. 

난점 3:의인들을 해치기 위해 심각한 음모가 꾸며지고, 그 음모는 격렬한 적의를 통해 실행에 옮겨지며, 그리하여 그들이 거의 파멸 단계로까지 내몰린다.

해결책(12-15절):여호와는 악인들의 모든 음모를 보시며, 그들의 앙심과 어리석은 적의를 비웃으신다. 그들은 의인을 멸하기 위해 분주하고 단 하루라도 더 그들을 해치고자 하지만, 여호와께서 "그날의 이름을" 보신다. 그날은 멸망의 날이요, 큰 심판과 영원한 고통의 날이다. 또한 그날에 그들의 활은 부러질 것이며, 그들은 자신이 뽑아 든 검으로 자기 심장을 찌를 것이다.

난점 4:의인의 재산이 적다.

해결책(16, 17절):"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난점 5:힘겨운 날들이 그들에게 닥친다.

해결책(19절):"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난점 6:악인은 점점 더 살지고 의인을 짓누르며 괴롭힌다.

해결책(20절):악인들이 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린 양의 기름"에 불과하며, 그들의 형통함은 이내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들은 연기처럼 경건한 자들을 괴롭히지만, 그들 자신이 연기처럼 소멸될 것이다.

난점 7:의인이 넘어진다.

해결책(24절):비록 그가 넘어지긴 하지만, 최종적으로 혹은 완전히 쓰러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의인들이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섭리를 통해 붙들어 주신다.

난점 8:어떤 악인들은 역경에 처하기는커녕 죽는 날까지 형통하다.

해결책(28절):설사 그러할지라도, "악인의 자손은 끊어질 것이다." 

난점 9:어떤 악인들은 강성하며 그 자손들 역시 번영을 누린다.

해결책(35, 36절):가지를 넓게 드리운 월계수들도 이내 "없어지며", 그들과 그들의 집이 완전히 끊어질 때도 있다.

난점 10:정직한 자들이 오래도록 많은 시련을 당한다.

해결책(37절). 그러나 그의 "결국은 평안"이다.

난점 11:경건한 자들이 문제에 휘말릴 때 아무도 그들을 변호해 주지 않는다.

해결책(39, 40절):"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다." 그분이 그들의 힘이 되시며, 그들을 도와 구원해 주실 것이다.

한편 우리가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다음 사항들을 명심해야 한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불만과 불평을 터뜨려서는 안 된다(1절). (2) "여호와를 의뢰하며 선을 행해야" 한다(3절). (3) "여호와를 기뻐해야" 하며, 세상 것들을 통해 만족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4절). (4) 자신의 "길을 여호와께 맡겨야" 한다. (5) 인내심과 겸손한 심령을 지녀야 한다(7-11절). (6) 정직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14절). (7)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25, 26절). (8) "공의를 이르며",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어야" 한다(30, 31절). (9)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켜야" 하며, 악한 수단들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니콜라스 바이필드(Nicholas Byfield).


시 37편 전체. 이 시편을 가리켜 역경에 처한 의인을 위한 강심제라 지칭해도 무방할 것이다. 즉, 불만의 역병에 대한 주권적 처방 혹은 조급함이라는 독에 대한 탁월한 해독제인 것이다. -나다나엘 하디의 어느 장례식 설교, 1649.


시 37편 전체. 이 시편은 잠언의 금언적이고 간결한 구성을 상기시켜 준다. 여기에는 기도가 내포되어 있지 않으며 다윗 자신의 곤경이나 핍박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암시도 없다. 오히려 이 시편은 경험과 연륜을 쌓은 자의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매우 실천적 지혜와 경건에 대한 언급이다. 이는 마치 교회의 장로나 어느 가족의 가장이, 귀를 기울이며 둘러앉은 가족에게 진지하고 애정어린 권고를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바르통 부시에(Barton Bouchier).


시 37편 전체. 이 시편은 알파벳 답관체 시편들 중 하나이다. 이 시편을 가리켜, 터툴리안은 "섭리의 거울"이라 지칭하며, 이시도레(Isidore)와 루터는 "불평에 대한 처방", 그리고 "선행이라는 의복"이라고 각각 지칭한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1절. "불평하지 말며." 흥분하지 말며, 분노나 슬픔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불태우지 말라. -조반니 디오다티.


1절. "투기하지 말지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감옥에 갇혔을 때 낙농장에서 일하는 여자를 부러워했다. 하지만 만일 그녀가 훗날 무려 44년 동안이나 영예로운 통치자로 군림할 것을 알았더라면, 그 여자를 부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소망 가운데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면, 설사 궁지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온갖 형통을 누리며 흥청망청 떠들고 노는 악인을 시기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존 트랩.


1절. 매년 수천 피트에 달하는 땅을 상속받는 자가, 왕의 예복을 입고 무대에 서되 단 한 피트의 땅도 상속받지 못하는 연극 배우를 시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겉모습과 복장만 왕이나 귀족처럼 갖추었을 뿐 실제로는 거지에 불과한 사람을 누가 부러워하겠는가? 따라서 악인들은, 비록 화려한 정장을 차려 입고 맛있는 진미를 먹으며 아무런 부족함도 느끼지 않고 또한 바라는 것 이상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잠깐 동안의 소유주들에 불과하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바로 상속자이다. 그들의 형통함이 자신에게 무슨 유익을 주는가? 그것은 단지 그들의 파멸을 재촉할 뿐이며 그들에게 상급을 마련해 주지는 않는다. 목초지에서 먹고 노는 소보다는 일하는 소가 더 오래 산다. 전자가 목초지에서 실컷 즐긴다 해도, 그것은 도살을 재촉하는 일일 뿐이다. 하나님이 악인들을 기름진 초원이나 영예와 권세의 자리에 두시는 것은 단지 그들의 파멸을 재촉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악행자들을 인하여 불평하거나 악인의 형통에 대해 시기해서는 안 된다. 이는 악인의 촛불이 영원한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조만간 끊길 것이며, 채소처럼 시들어버릴 것이다. -루도빅 드 카르본(Ludovic de Carbone), 존 스펜서에 의해 인용됨.


2절.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낫으로, 그리고 단 일격에. -토머스 윌콕스(Thomas Wilcocks).


2절. "쇠잔할 것임이로다." 이는 듣는 이로 하여금 정신이 얼얼하게 만들 무서운 말이다. 견딜 수 없는 이 선고로 말미암아, 죄인들은 모든 좋은 것들을 빼앗기며 무서운 재앙에 처해진다. 언젠가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 때, 그 나무는 이파리들뿐만 아니라 그 몸통과 뿌리까지 즉시 시들어버렸다. 마지막 날의 무서운 저주가 발할 효과도 이에 못지않을 것이다. 그 저주가 임하는 자마다 말라 비틀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을 온전히 상실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좋은 것을 행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혹은 기대하지도 못할 것이다. -토머스 타임(Thomas Tymme).


2절. "푸른 채소." 그 어떤 나무도 인간의 짧은 일생이라는 나지막한 관목보다 더 숙성한 인내의 열매를 맺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설령 악인의 형통을 시기하는 뿌리혹병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여  우리가 그 폐해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지경에 처한다고 해도, 우리는 본문에서 그 치료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시 73:18). "그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욥 21:13).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에드먼드 레이필드(Edmund Layfield)의 설교(The Mappe of Man's Mortality and Vanity, 1630)


2절. 때로는 악인들이 싹트기가 바쁘게 시들어버리는 채소처럼 일어서자마자 쓰러지기도 하며, 악한 계략을 꾸미기 시작함과 아울러 곧장 멸망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설령 그들이 충분히 자라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단지 추수 때까지만 자랄 뿐이다. 적당한 시기가 이르면 그들은 끊어지고 만다. -로버트 모섬.


3절. "의뢰하여"와 "행하라"는 두 가지 권고들에 주목하라. 이것이 올바른 순서이며, 이 둘은 함께 동반되어야 하며, 후자는 전자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 모두에게 약속이 주어져 있다. -C. H. S.


3절. "땅에 거하여." 그는 정착하되 평온하게 정착할 것이며, 보존되되 편안하게 보존될 것이다.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그의 성실로"가 KJV에는 "진실로"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혹자는 이 구절을, "믿음으로 식물을 삼을지어다"라고 읽는다.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것은 선한 삶이며 약속을 먹고 사는 삶이다. 엘리야가 기근 때에 필요한 것을 공급받았듯이 그에게도 필요한 양식이 "진실로" 공급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사 당신을 의뢰하는 모든 이들을 먹이신다(시 23:1). -매튜 헨리.


3절. "땅에 거하여." 가나안 땅은 세상적 지복의 총체이자 천상적 지복의 모형으로 간주되었다. 여호와의 땅에서 각종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는 것, 그리고 거기서 그분의 보호하에 거하며 그분의 규례들을 가까이하고 또한 그분의 백성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 등은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이 바랄 수 있는 것 전부였다. -토머스 스코트(Thomas Scott, 1747-1821).


3절. "식물을 삼을지어다." 선한 목자의 지도와 보호하에 안전하게 풀을 뜯는 가축 떼의 광경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헨리 에인즈워스.


3절. "식물을 삼을지어다." 풍성히 먹을 것이다. -토머스 세커(Thomas Secker, 1768).


3절. 안전하게 먹을 것이다. -존 파크허스트(John Parkhurst).


4절.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각각 구분되어 있음에 주목하라. "기뻐하라", 그리하면 그분이 "주실 것이다." -C. H. S.


4절.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말씀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은총과 사랑이 담겨 있는가! 그분을 의뢰하라는 권고가 앞에서 언급되었으며, 이제 본문이 첨가되고 있다. 우리의 평안과 안식이 미리 작정되어 있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토록 풍성한 은총을 소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적절한 행동인가? 또한, '그분은 우리를 기뻐하신다.'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잠 8:31)는 그 뜻이 다소 불명확한 말씀도 있다. 과연 우리는 달리 누구를 기뻐하겠는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그 어떤 이름을 거론하겠는가? 우리에게 있어 누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는가? 더욱이 그분의 친구들이요 그분의 아들들이요 또한 그분의 가족인 우리가 아니면 누가 그분을 기뻐하겠는가? 그분을 기뻐하는 자들에게 어떤 생명과 활력이 주입되는지 생각해 보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진정 그러하다면, 우리는 주어진 행로로 얼마나 즐거이 매진하겠는가! 그리고 현상태에서 주어진 다른 모든 임무들을 얼마나 즐거이 수행하겠는가! 우리는 그분을 섬겨야 한다. 감히 그분의 멍에를 내던질 생각을 하는가? 내가 예배드려야 할 분을 기뻐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그분은 나의 예배를 즐거이 받으시며, 그것은 나 자신에게도 쉬운 일이다. 또한, 그 누구도 이 일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다. 우리의 기쁨이 되는 다른 대상들은 매일 사라져간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기뻐하고자 한다면, 그 어떤 사람이나 마귀들도 그 기쁨을 훼방하지 못한다. 여러분은 예전에 혐오했던 사람이나 물건을 다시 기뻐한 적이 한번도 없는가? 여러분에게 잘못을 범했던 사람이 친절을 베풂으로써 여러분의 마음을 끌 수도 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잘못하신 적이 한번도 없는 복되신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어려운 이유가 도대체 어디 있겠는가! 여러분을 향하신 그분의 배려는 선의로 가득하다. 

또한 여러분은 이 땅에 살면서 여러 가지 고난과 역경에 처할 수 있음을 생각하라. 그럴 때 그분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러분이 그것들을 피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이는 누구나 그런 일을 당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분을 기뻐하면, 여러분은 쉽게 견딜 수 있다. 이 모든 사실 이외에도, 여러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라. 어떤 수를 써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이생에서 즐겁게 교제를 나누었던 분께로 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얼마나 기쁘고 흡족한가! 반면에 여러분이 스스로 달갑지 않고 낯설다고 생각했던 분 앞에 선다는 것은 그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존 하우(John Howe, Treatise of Delight in God).


4절. 앞에서 우리는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확대하여 설명했다. 그것은 첫눈에 얼핏 감지되는 문자적 의미를 넘어선 설명이다. 또한 그것은 '기뻐하는' 행동이 단지 직접적으로 하나님과만 연관된 것인 양 이해하지 않게 하기 위한 설명이며, 그 행동이 '하나님과 더불어 나누는 거룩하고 종교적인 교제 전체'를 포괄한다는 점을 시사하기 위한 설명이다. 이와 같은 교제 전체는 기쁜 것이며, 온통 기쁨으로 뒤섞여 있다. 또한 이 같은 맥락에서, 신앙의 영향을 받는 한 우리의 다른 모든 교제 역시 본문과 연관된다.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볼 때, 의심의 여지 없이 나는 이것을 그러한 범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매우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원문 자체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적절히 제시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를"이라고 번역된 말은 '여호와와 함께', '여호와 곁에', '여호와 앞에', 혹은 '여호와의 임재 가운데' 등의 의미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옮겨 볼 수 있다:"와서 하나님 곁에 앉으라. 하나님께로 물러나라. 그분의 임재 가운데 그리고 그분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가운데 얻게 되는 기쁨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라. 그리고 그분 앞에서 그분의 주시를 받고 있음을 기억하며 행동하라." 어떤 사람이 친구를 자기 집에 기숙시켜 줄 경우에, 그 친구는 그를 기뻐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 친구는 거기 기숙할 뿐만 아니라 그와 더불어 개인적 친교를 나누고 모든 여흥을 자유롭게 즐기며, 여러 가지 편의 시설과 기타 필요한 것들을 거저 사용하고, 모범적인 그 가정의 질서와 규칙을 보고서 만족을 느낀다. -존 하우.


4절.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로다." 루터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이 바라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왕의 특별한 배려와 호의를 받는 자가 그 왕에게 무엇을 부탁하지 못하겠는가? -존 트랩.


4절. "네 마음의 소원을." 이 영적 자손의 모든 소원들은 그의 특성에 부합된다. 말하자면 본질적이며 본질에 합당한 것이다. 자연인의 모든 소원들은 심지어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를 향한, 혹은 의를 향한 소원이라 하더라도 자신과 더불어 소멸될 것이다(이는 그것들이 진리가 아니며 진리로부터 말미암은 것도 아니며 또한 진리에 이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와 같은 영적 소원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영과 더불어 영원토록 안식과 만족을 누리며 살아갈 것이다. -존 페닝턴(John Pennington, 1656).


4절. 하나님의 소원과 의인의 소원은 일치한다. 하나님과 의인은 그 소원에 있어 한마음이다. -존 번연.


5절.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우리가 자신의 짐을 스스로 지고서 근심과 실패감에 사로잡혀 괴로울 때, 그리고 자신보다 더 형통함을 누리는 불신자를 시기할 때, 최선의 처방은 먼저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을 활용하여 자신의 임무를 실행하고 나서 성공에 대한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마치 농부가 자기 땅을 써레질하고 나서 그렇게 하듯이. 그리고 그 짐을 하나님께 내려 놓고서 그것을 다시금 들추어내지 말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며 그분이 허락하시는 대로 좋은 수확을 거둘 것이라고 확신하라. -데이비드 딕슨.


5절.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불가타역은 "너의 길을 여호와께 드러내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성 암브로스는 우리의 죄악들을 하나님께 드러낸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사실상 우리의 죄악을 숨기기가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그것을 드러내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시며 또한 그대에게 들추어 내실 것을 숨기지 말라. 마귀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것은 매우 사악한 짓이다. 당신의 죄악이라는 사탄의 비밀을 하나님께 드러냄으로써 그와의 결속을 깨트리라. -나다나엘 하디.


5절. "너의 길을······맡기라." KJV 난외주와 히브리어 원문상으로는, "너의 길을······굴리라"고 되어 있다. 이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자신보다 강한 자의 어깨에 굴려 얹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윌리엄 드 버그(A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Dublin:1860>).


5절. "맡기라", "의지하면"이라는 비슷한 뜻이 반복됨에 주목하라.-C. H. S.


5절. "저가 이루시고." 견습생이 자신의 익힌 기술을 처음 선보이는 마당에 힘든 작품을 주문받는다면, 구경하는 자들은 그토록 미숙한 손으로 실패하지나 않을까 하여 당연히 불안해 합니다. 하지만 그가 노련하고 숙련된 장인이라면, 아무도 불안해 하지 않으며, 모두들 그의 정교한 손으로 만족스러운 작품을 다시 만들어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그리고 세상의 중심에 자리한 교회를 다스리시는 위대한 사업을 수행함에 있어 우리 하나님이 문외한이실까요? 과연 하나님이, 가장 끔찍스러운 사건들을 성도들의 복락과 기쁨으로 변화시키심에 있어, 당신의 무한하신 지혜, 권능, 그리고 선하심 등에 관한 증거를 지금까지 한번도 베푸신 적이 없습니까? 우리 대적들에 의해 우리가 위험 가운데 내던져져서 거기 빠져 들어간다고 느낄 때마다 사실 우리는 놀라며 당황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없는 놀라우신 여호와의 권능에 관한 과거의 기록들이 너무도 많으며, 또한 그분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참된 유익을 위해, 인간의 모든 일들을 분명히 주관하실 것이므로, 그분이 시작하신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불경스럽고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악함에 대한 증거일 것입니다. -로버트 베일리(Robert Baylie), 영국 하원 앞에서 행한 설교, 1643.


5, 7절. 


너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 강하신 팔을 의뢰하라.

그분이 하늘의 궤도를 구부리사,

모든 별들을 올바로 인도하시며,

바람과 구름과 번개를,

당신의 확실한 손길로 이끄신다.

또한 그분은 어둠을 밝히시고,

너의 걸어갈 길을 보이실 것이다.


비록 지옥의 세력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을 머뭇거리시게 하려 할지라도,

그분의 지혜로우신 계획 중,

조금도 변경시키지 못한다.

그분의 영원하신 생각에서 나온,

모든 계획과 결심들은,

그 어떤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절히 성취되고 만다.


그런즉 더 이상 의기소침하거나 쇠약해지지 말라,

슬픔에 사로잡힌 영혼이여.

고뇌의 깊은 물결이, 

소용돌이쳐 너를 휘몰아친다고 해도,

네 아버지의 손이 너를 붙드실 것이다.

소망과 인내로 기다리라.

그리하면 조만간 네게 기쁨이 몰려올 것이며,

영원한 광채가 비칠 것이다.


불신의 모든 불평들을 떨쳐버리고,

그것들에게 작별을 고하라.

일들이 올바로 진행되지 않는 듯하다고 해서,

조바심하는 네 영혼으로 더 이상 슬퍼하지 말라.

하나님이 당신의 홀을 지혜롭게 휘두르시며,

왕의 보좌에 앉으사,

그 어떤 세력도 인생을 범하지 못하게 하시고,

모든 일들을 제어하신다.


다함이 없는 믿음으로,

전지하신 네 왕을 의뢰하라.

그리하면 너는 찬탄을 금치 못하며,

그분이 밝히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네 모든 슬픔을 야기시킨 원인이 

마침내 드러날 것이며,

지금은 거부되는 광명이

나중에는 밝히 비칠 것이다.


그런즉 그분의 찡그리신 얼굴도 의뢰할 수 있는 이여,

네 눈을 하늘로 향하라.

거기로부터 네 상급이 주어질 것이며,

화관과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다.

너의 하나님이 승리의 종려나무를

네 오른손에 심으실 것이다.

또한 너는 영광스러운 어조로

감미로운 찬송을 부를 것이다.

-폴 거하드(Paul Gerhard<1606-1676>, 

프란시스 엘리자베스 콕스<Francis Elizabeth Cox, 

Hymns from the German, 1864>가 번역함).


6절.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설령 당신이 악한 계략을 꾸미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해도, 근심하지 말라. 왜냐하면 비록 중상과 비방으로 인해 당신의 명성이 당분간 가리워진다 하더라도, 태양이 안개와 구름에 가리워도 결국에는 그것들을 흩어버리듯이 당신의 성실함은 마침내 드러날 것이며, 그것이 정오의 태양같이 환하게 비췰 것이다. -사이먼 패트릭(Symon Patrick).


7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원문상의 두 단어는, 그리스도께 편안히 의지하는 특권과 의무를 각각 표현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양심의 외침만 요란한 상태에서 침묵하는 순종의 상태를, 그리고 영혼의 불안이 진정된 상태를 시사한다. 또 다른 하나는 휴식을 취하고 정신을 가다듬는 지친 순례자의 모습을 암시한다. 그는 자신의 여정을 마치고, 안전하고 넓직하며 풍요로운 거주지에서 정착하는 것이다. -제임스 허비(James Hervey).


7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어떤 사람이 힘에 겨운 짐을 지고서 가파르고 울퉁불퉁한 길을 올라가고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갑자기 그 짐이 다른 사람의 어깨로 옮겨진다. 그는 그 사람이 그 짐을 충분히 질 수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 사람의 도움에 확실히 의지할 수 있다. 둘이서 함께 길을 걸을 때, 짐을 맡긴 사람은 온전한 휴식과 평온한 의뢰 그리고 기쁜 자유 등과 같은 감정 이외에 어떤 것을 느끼겠는가? 우리의 염려를 여호와께 맡길 때의 축복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연약함 가운데서 더 강한 힘을 의지하며, 혼란과 의심 가운데서 더 나은 지혜에 의지하며, 또한 모든 시련이나 힘든 일을 당할 때 우리는 그분의 온전하신 긍휼을 확신하며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안식하고"(KJV 직역. 한글 개역 성경은 "잠잠하고"로 번역했다-역자 주)에 해당하는 원어의 문자적 의미는 여호와께 "잠잠하라"이다. 그분께 눈을 고정시키고 불신적인 모든 생각들을 잠잠하게 하라. 불평스러운 마음으로 문제들만 바라보고 그 속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않을 때, 땅의 안개가 하늘의 영원한 별들을 시야에서 가리울 때, 마음속에 그런 생각들이 일어나 자신을 괴롭힌다. 그리하여 야곱처럼,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창 42:36)라고 침울하게 말할 수 있다. 혹은 엘리야처럼,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왕상 19:4)라고 의기소침하게 말할 수 있다. 또는 요나처럼,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욘 4:9)라고 볼멘 소리로 말할 수도 있다. 그와 같이 어둡고 불신적인 모든 생각들과 관련하여, 마음은 침묵을 지켜야 하며 잠잠하고서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불평에 대해서는 잠잠하나, 기도에 대해 잠잠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처럼 거룩하고 잠잠한 묵상을 통해, 자신의 심령을 하나님과의 친교에로 돌이키기 때문이다. "여호와 앞에 잠잠한다"는 것은, 그 영혼이 직관적으로 그분을 쳐다보며 그리로 움직인다는 말이며, 자신의 모든 슬픔과 두려움을 그분께 맡기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강건함과 인내와 소망을 느낀다는 말이다. 또한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선택하셨음을 기꺼이 믿는다는 말이며, 우리와 관련된 모든 일을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는 것보다 그분의 손에 맡기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확신한다는 말이다.

몇 가지 실천적 언급들:(1) 인내하는 마음으로 여호와 앞에 "잠잠하는" 것은 그분이 보내신 시련들에만 적용되며,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야기시키는 곤경들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의무로서 져야 하는 짐과 스스로 다른 길로 방황함으로써 지게 되는 짐간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전자를 여호와께 맡길 수 있지만, 후자와 관련하여서는 그것을 징벌로서 오래도록 감당해야 한다. (2) 여기 부여된 의무는 우리의 온 생애를 통해 이행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큰 시련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참고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매일 조바심하는 사소하고 평범한 일들 가운데서도 그것이 많이 필요하다는 점은 제대로 알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후자 역시 전자에 못지않게 기독교적 원칙에 따르는지의 여부를 분별케 하는 시금석이다. (3)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잠잠한다는 것은 인간의 영적 상태라고 하는 범주에 속한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그것을 이해하며 또한 바랄 수 있기 전에 특별한 분별력이 요구되며, 우리의 영혼 속에서 새로운 감각이 먼저 열려야 한다. -제임스 번즈(James D. Burns, M.A.).


7절 상반절. "계속 잠잠하라"(이렇게 번역될 수도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힘든 권고에 해당한다. 행동을 멈추라는 이 명령과 비교한다면 가장 힘든 행동을 명하는 권고는 아무것도 아니다. -제롬(Jerome).


7절 상반절. "잠잠하고"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돔"(mwd)이며, '벙어리'라는 뜻을 가진 영어 'dumb'이 여기서 파생된 듯하다. 여기서 명령된 침묵은 불평이나 투덜거림과 반대된다. -제임스 앤더슨(Calvin's Commentary).


7절. "잠잠하고"와 "참아"라는 유사한 명령들이 다시 반복적으로 언급됨에 주목하라.


7절. "악한 꾀를 이루는."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5절)과 어떻게 대조되는지 살펴보라.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불신자들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듯해 보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위로를 얻는 것은 우리의 목적 또한 달성되되 하나님 그분에 의해 최선의 방식으로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C. H. S.


8절. "분을 그치고." 더 심한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분을 그치라. 더 좋은 방법은, 분이란 선한 사람의 성품에 걸맞지 않으므로 아예 그것을 피하는 것이다.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악인들의 형통으로 인해 불평함으로써, 혹은 그들처럼 형통해지리라는 기대감에 사로잡혀 그들을 모방함으로써, 죄악을 범할 수 있다. -존 길.


9절. "땅을 차지하리로다." 심지어 무덤에 이르기까지 항상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갈 것이라는 의미이다. -존 칼빈.


10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이는 악인이 뿌리째 뽑히웠기 때문이다. -아서 잭슨(Arthur Jackson).


10절. "그곳을······없으리로다." 그가 집으로 삼았던 땅, 그리고 더할 나위 없는 직함이 이제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다. 그가 이 땅에서 지녔던 것들 중 그의 소유로 남은 것은 전혀 없다. 그는 의연금에 의지하여 연명하는 사람처럼 비참하고 궁핍하다. -윌리엄 플러머.


10절. 화려한 공작은 자신의 아름다운 꼬리 깃털로 만든 멋진 부채꼴을 볼 때 기뻐하고 으시대면서 그 깃털의 여기저기를 일일이 살펴본다. 하지만 시커멓고 더러운 자신의 발을 볼 때, 큰 실망감에 사로잡혀 점차 자신을 감추며 슬픈 기색을 띤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은, 부와 영예로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영광스러워하며 또한 심각한 자기 기만에 빠진다. 그들은 자신의 부귀를 자랑하며 스스로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들은 음모를 꾸미며, 장차 오래도록 실행에 옮길 일들을 미리 정한다. 그들은 이르기를, 올해에는 이 일을 맡고 내년에는 저 일을 처리하리라고 한다. 또한 그들은 말하기를, 후에는 우리가 저 고을을 다스리며 그 다음에는 저 성읍에다 왕궁을 짓고 그 인근에다 멋진 정원과 포도원을 만들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가지 큰 사업들을 미리 계획한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자신의 발을 단 한번이라도 본다면, 만일 그들이 자신의 일생이 짧고 무상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거만한 깃털을 잽싸게 내려뜨릴 것이며, 자만심을 버릴 것이며, 또한 자신의 목적과 마음 그리고 삶의 방식 등을 바꿀 것이다. -토머스 타임.


11절.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고." 그런가 하면, 온유한 자들은, 오직 그들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현세의 땅을 소유한다. 그들은 천국을 향해 나아가면서, 선하신 하나님께로부터 할당받은 몫을 겸손히 기뻐하고 만족해 한다. 그들은 더 나은 것을 얻고자 요란을 피우고 불평하며 안달하는 등과 같은 마음을 전혀 갖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자신보다 더 큰 영예와 더 많은 부를 소유했다고 해서 조바심내지도 않으며, 하나님에 의해 할당된 몫에 만족한다. 또한 그들은 온유하고 자족하는 평온한 심정으로 자신의 몫을 소유한다. 그처럼 평온한 상태에서 갖는 소망은 하나님과 자신 모두를 기쁘게 한다. -아이작 월턴(Izaak Walton, The Complete Angler, 1593-1683).


11절. "온유한 자." 우리가 사랑하는 다른 여러 사람들에 비해 우리가 '당신'이라 부르는 사람은 어떤 의미를 시사하는가? 후자는 배우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온유함은 다른 여러 덕목들에 비해 어떤 의미를 시사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일종의 제유법을 엿볼 수 있다. 이는 한 가지 특정한 것으로써 전체적인 것을 지칭하는 수사법으로, 여기서는 한 가지 덕목으로써 나머지 모든 덕목들을 아울러 시사한다. 혹은 이것은 원인에 대한 결과를 언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온유함이란 거룩함을 구성하는 가장 으뜸되고도 중요한 부분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추측하건대, 성령께서 본문의 약속을 통해 교회의 상황을 언급하면서 교회를 위로하고자 하신 듯하다. 사방으로 어려움에 직면한 상황에서, 교회는 다른 어느 덕목보다 온유함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 덕목에 대한 상급을 언급하시며, 심지어 '땅을 차지하는 것'과 같은, 기대 이상의 그 무엇을 우리에게 약속함으로써 그 덕목을 고무시키고자 하신다. 사실, 온유함에 대한 상급으로서 그것보다 더 적합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침골을 손상당한 사람이, 세네카가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지칭한 바와 같은 위대한 인내의 사람이, 억압과 부당한 처우로 말미암아 자신의 재물을 상실당할 뿐만 아니라 면도날처럼 예리한 험담에 의해 자신의 명성까지 손상당한 사람이, 그리고 그 모든 충격들을 구경꾼처럼 참고 인내해 온 사람이 자신의 온유함으로 인해 스스로 포기했던 축복의 약속을 통해 일으킴을 받고 또한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보다 더 공평하고 적절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악행을 저지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그들은 폭력에 의해 빼앗겼던 자신의 소유까지도 당연히 상속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앤소니 패린던(Anthony Farindon, B.D., 1596-1658).


11절. 땅을 차지할 자는, 세상 것을 얻기 위해 난리법석을 떠는 자가 아니라, 위 아래로 그리고 이 구석에서 저 구석으로 밀리며 그 어디서도 평온하게 지내 본 적이 거의 없는 온유한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땅을 빼앗긴 듯이 보이는 자들, 바로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며 누릴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실 때에는, 그들 이외에 그 누구도 그것을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땅을 차지하며." 땅은 여호와의 것이다. 온유한 자들은 여호와의 자녀이며, 그래서 그분의 땅을 차지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땅을 당신의 소유로 삼아 즐기실 때, 그들도 그분을 따라 그것을 소유하고 즐길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권리이며, 그 권리에 따라, 상속을 통해, 그것이 그들에게 물려질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권리이며, 여호와로 인해 그것이 그들의 권리로 물려질 것이다. 그들이 아직 그것을 차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아직 그것을 차지하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그것을 차지하실 때, 그것은 당연히 그들에게 물려질 것이다. 그들은 결코 이 저주받은 땅을 차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의 수중에 들어갈 때, 그리고 여호와의 축복을 입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그것이 그들의 소유가 될 것이며 축복의 자녀에게 상속될 것이다. -존 페닝턴.


11절.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여호와의 영광이 땅을 덮을 때,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평강의 왕의 나라들로 바뀔 때, 그리고 악인들이 근절될 때 우리가 풍부한 화평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윌슨.


12, 13절. 악인들의 계략에 대한 여호와의 경멸적인 비웃음으로 말미암아, "이를 가는" 악인들의 추잡스러운 행위가 어떻게 스스로에게 되돌아가는지 주목하라. 그들의 음모 역시 모조리 뒤집힐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의도적으로 감추려 해도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C. H. S.


13절.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시편 기자는 슬픔에 처한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매우 냉담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단지 비웃고 계시는 분으로 언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귀하게 여기신다면, 우리 대적들의 포악함을 제지하기 위해 그분이 나서서 힘차게 그들을 대항하시지 않겠는가? 시편 2:4에서도 언급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곧장 무장하고 나서서 불신자들을 패주시키지 않으시고 잠시 묵인하며 또한 그분의 손을 거두시는 것은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시는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악인들을 비웃기만 하고 그들에게 보복을 가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요구하며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시편 기자는 그 이유를 덧붙인다. 즉, 그분이 그들에게 박두한 파멸의 날을 보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존 칼빈.


13절. "그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이 땅에서 위세를 떨치며, 조만간 무력해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거만하게 행동하는, 벌레 같은 가련한 자들을 그분은 비웃으신다. -Berleb. Bible(헹스텐버그에 의해 인용됨).


13절. "그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그의 음침한 날, 그의 죽음의 날, 그것은 또한 그의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존 트랩.


14, 15절. 혀는 "칼"이요 "활"이다. 악인들은 신랄한 독설이라고 하는 화살을 겸손하고 정직한 자들에게, 이를테면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 쏘아댄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한 무기는 이것들뿐만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악의가 어떻게 자신의 머리로 되돌아갔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것을 마음에 두고서 귀감으로 삼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조지 혼.


14, 15절. 악인들이 여호와의 백성에게 해악을 끼치기 위해 가장 가까이 근접할 때, 사실상 그들 자신에게 재난이 가장 가까이 이른 셈이다. -데이비드 딕슨.


16절.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악인들은 종종 불의한 수단을 통해 부를 축적하며, 그렇게 하여 얻은 재물에 대해 노심초사하고, 그리하여 진노의 날에 임할 진노를 스스로 쌓아간다. 반면에 의인은 적은 양이지만 정직하게 재물을 얻음으로 양심의 평안을 누리며, 하늘의 소망을 갖고 살아간다. (2) 의인은 자신의 소유를 잘 사용하여 적은 양에 비해 더 큰 유익을 얻는다. 반면에 악인들은 자신의 갖가지 수단들을 남용하여 여러 가지 측면에서 화를 당한다. (3) 의인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생활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여기며 또한 그 가운데서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를 확신한다. 그래서 그 적은 소유가 그들에게는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이며, 그들은 은혜로운 위안을 누리며, 자신의 소유를 만족스럽게 여긴다. 반면에 악인들은 자신의 재물을 통해 이러한 기쁨이나 만족을 전혀 누리지 못한다. (4) 대체로 하나님은 의인들에게 복을 베푸사, 그들로 하여금 미덕을 통해 자신의 적은 소유를 악인들의 풍부한 재물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누리게 하신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보잘것없는 임금을 통해 풍부한 재산을 지닌 악인들보다 더 강건해진다. (5) 의인은 자신의 소유를 오랫동안 누리지만, 악인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이 점이 분명히 지적된다. -아서 잭슨.


16절. 그리스도에 대해 낯선 자들은 외적 은총들을 활용하지만, 그것을 누린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들은 그것들에 정통한 듯하지만 사실상 종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들은 외적인 사용과 관련해서는 소유자이지만, 내적 누림과 관련해서는 노예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것들을 처분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그것들을 섬긴다. 그들은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속박되어 있다. 그들이 사용한다 해도 진정으로 위안을 얻지는 못한다. 그들은 위안을 얻는다고 상상하지만, 그들의 위안은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 위안은 땅을 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샘에서 솟아나온다.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의 몫으로 소유한 자들만이 진정하고 확고한 위안을 누릴 수 있다. 이들은 현세적으로 누리는 모든 것들을 영원한 사랑의 표시로,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보증으로 여길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의 대가로 영원한 사랑과 영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로의 원천이 여기에 있으며, 이 위안의 샘은 생명보다 더 나은 것이다. 모든 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감미로운 사랑을 맛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심으로써 내가 이 축복들을 누릴 수 있다"고 우리가 말할 때, 모든 일반 은총들의 가치가 그 얼마나 더 귀하게 여겨지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지고하신 사랑의 표현으로서 의를 실행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이런 축복을 마련해 주셨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진실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음식과 옷가지뿐인 사람이 터키 제국이나 인도의 금을 소유한 자보다 더 많은 것을 지닌 자이다. 의인은 자신의 적은 소유를 통해, 엄청난 소유를 지닌 악인의 경우보다 위안의 근거를 더 많이 확보하고 있다. -데이비드 클락슨.


16절. 설령 당신의 재산이 적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랑을 통해 향기를 발하게 될 것이다. 잔 속에 떨어뜨려진 설탕 덩어리는 액체를 달콤하게 만들기 때문에 결코 작은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몰루카 군도의 어느 언덕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물이 그곳에서 자라는 계피와 정향의 맛을 담고 있듯이, 당신이 받은 은총 또한 그러하다. 비록 그 자체는 물과 같은 것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의 선의와 특별한 은총의 맛이 그 속에 담겨 있어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다." 매우 값비싼 다이아몬드가 박힌 자그마한 반지가 다이아몬드를 넣지 않은 크고 많은 반지들보다 훨씬 더 가치 있듯이, 당신의 재산도 그러하다. 설령 그것이 한 페니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명보다 더 귀한 사랑의 보석과 특별한 약속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그럴 때 그것은 단순히 보조금으로 받아 일반 섭리를 통해 누리는 수천 수백 만 페니보다 더 귀한 가치가 있다. -조지 스윈녹.


16절. 악인이 재물로써 자신의 마음을 채울 수 없는 것은 공기로 자신의 몸을 부풀릴 수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악인의 모습은 마치 배와 같다. 즉, 배에다 은과 금을 가득 실어 침몰할 지경에 이르렀다 해도, 열 배나 더 많은 짐을 실을 공간은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탐욕스러운 자는 자신을 가라앉힐 정도로 많은 것을 충분히 소유한 상태이지만, 결코 만족할 줄을 모른다. 그러기에 시편 기자가 얻은 결론은 너무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많은 것이다:"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시편 기자는 이 구절에서 악인의 수효를 밝히지 않는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다수의 악인들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생각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모든 악인들이 함께 모은 엄청나게 많은 보화들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더 낫다. 역사상 기독교국으로서 가장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던 스페인의 왕은, 자신의 광활한 통치 영역내에서 해가 지는 법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지만, '온 세상도 부족하다'는 말을 자신의 표어로 삼았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통해 우리에게,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다"(잠 15:6)라고 말씀하신다. 설령 의인의 집에 근사한 침대 하나 없고 앉을 의자도 하나 없는 때가 많다 해도, 그 말씀은 진실이다. 차라리 일생토록 문전걸식할 정도로 궁핍했더라면 변명할 일이 더 적어지고 따라서 영원한 세상에서 덜 비참한 상태에 처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가장 부유한 악인들이 분명히 깨닫게 될 때가 반드시 도래할 것이다. 이생의 축복이란 향수 묻은 장갑과 같다. 장갑에 향수 냄새가 잘 밸 때 그 향기는 장갑의 재료로 사용된 가죽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 마찬가지로, 세상적 축복 그 자체는 별 것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귀한 사랑을 통해 거기에 향수 냄새가 배면 그것은 진정한 축복으로 화하며 축복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가치가 있게 된다. 마리아와 같은 선택을 한 모든 이들에게는 그러한 향수가 밴다. 그들이 어떤 보리떡을 먹더라도, 그것은 결코 하찮은 음식이 아니다. 그들이 어떤 옷을 입어도, 그것은 결코 천하지 않다. 현세적인 다른 모든 축복들과 더불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로 나아간다(롬 8:32). -존 글래스콕(John Glascock)의 설교(Mary's Choice, 1659).


16, 17절. 축복받은 적은 것이 저주받은 많은 것보다 더 낫다. 적은 축복이 온 세상을 즐기는 것보다 더 낫다. 일 파운드의 축복이  일천 파운드의 저주보다 더 낫다. 시커멓게 굳은 축복의 빵 한 조각이 저주의 잔치보다 더 낫다. 축복의 이삭들이 저주의 수확물 전체보다 더 낫다. 은총의 축복 한 방울이 저주의 바다보다 더 낫다. 나사로가 주워 먹은 축복의 빵부스러기가 부자의 저주스러운 진미보다 더 나았다. 야곱의 축복받은 적은 소유가 자신에게 저주로 작용했던 에서의 많은 재산보다 더 나았다. 축복이 담긴 음식 찌꺼기를 먹는 것이 저주가 담긴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는 것보다 더 낫다. 축복이 담긴 누추한 식탁이 유혹을 동반하는 풍성한 식탁보다 더 낫다. 축복이 담긴 남루한 옷이 저주받은 자색 옷보다 더 낫다. 축복받은 상태로 구덩이, 동굴, 우리, 헛간, 외진 구석 등에서 지내는 것이 저주받은 상태로 궁궐에서 지내는 것보다 더 낫다. 축복받은 모직 모자가 저주받은 금관보다 더 낫다. 자신의 왕관을 보면서 눈물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던 어느 황제는 많은 것을 깨달은 사람이었다:"만일 네가 이 왕관 아래에 얼마나 많은 근심이 있는지를 안다면, 너는 결코 이것을 취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즉 적은 것이 자신에게 축복이 될 줄을 안다면, 그리스도인이 적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삭이 땅을 갈고 씨를 뿌리자, 하나님은 그를 백 배나 축복하셨다. 그런가 하면 가인이 땅을 갈고 씨를 뿌렸지만, 그 땅은 저주받아 소산을 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소유가 적다고 해서 불평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적은 것을 축복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잠잠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하면 그 적은 것이 자신에게 축복이 될 것이다. -토머스 브룩스.


17절.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악인의 팔"이란, 그의 힘, 용기, 능력, 재치, 부, 그리고 그의 풍요로움 등, 그가 이 세상에서 의존하고 지탱함을 받는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이제 이러한 팔이 부러질 것이며,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의인을 붙드실 것이다. 즉, 하나님이 당신께 속한 의인들에게 축복의 샘이 계속 넘치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비록 그들 주위에서 악인의 샘이 메마를지라도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토머스 브룩스.


18절.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그들의 날을 예비하사 그들을 위해 안전하게 보존하신다. "아시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dy)의 의미가 이 사실을 시사한다. -존 프라이(John Fry).


18절.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따라서 그날은 사람의 악의에 의해 단축되어질 수 없다. -윌슨.


20절. "어린 양의 기름같이." 결국에는 도살당할 어린 양의 기름같은 영광. -탈굼역.


20절. "어린 양의 기름." 희생 제물의 기름이 제단 위에서 불살라져서(이는 죄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보응을 시사하는 모형이었다) 연기로 소멸되듯이, 악인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희생 제물이 되어 그분의 진노의 불로 인해 멸망당할 것이다. -토머스 스코트.


20절. "타서 연기 되어 없어지리로다." "교만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이며, 부귀를 뽐내는 우리의 자랑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무엇인가?" 지옥에 있는 자들은, 그리고 죄를 범했던 자들은 본문처럼 말할 것이다. 불신자의 소망은 마치 바람에 날려가버리는 마른 엉겅퀴의 갓털이나, 파도에 부서지는 연약한 물거품, 바람 부는 대로 여기저기 날리는 연기, 혹은 여행자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하룻동안의 기억 등과 같다. -Wouter of Stoelwyk, 1541.


21절. "갚지 아니하나." 궁핍한 상황에 처한 까닭에, 꾼 것을 갚을 힘이 없다(신 28:12과 비교). 그런 상황에 처한 유대인은 채주의 종이 되었다(왕하 4:1과 비교). -다니엘 크레스웰.


22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자손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임대료를 잘 지불하는 소작인의 자녀는 지주의 농장을 떠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존 글래스콕.


23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이 도선사께서 키를 잡으시면, 그 배는 암초에 부딪히거나 모래 위에 얹히거나, 혹은 물이 새어들어 침몰하는 일 등이 결코 없을 것이다. 그분은 사람들을 안전하게 항구로 인도할 것이다. 다음과 같이 말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지만, 그 말 속에 신령한 지혜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친구로 선택한다면, 그는 수많은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광야를 안전하게 지날 수 있을 것이며, 이 세상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자신의 인도자로 삼은 자만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윗의 말과 어느 정도 유사하지 않은가(시 37:23)? 그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영광에 이를 기대를 결코 갖지 않았다. 만일 가련한 이교도가 그같이 말하며 하나님을 신뢰해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그분의 신실하심에 대해 찬탄을 금치 못했다면(세네카 역시 선한 자들의 시련과 악인들의 형통함이라는 문제로 인해 고심한 결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한 바 있다), 기도 응답을 통해, 약속의 성취를 통해, 또한 긴급하게 요구되는 것들을 공급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그토록 많이 체험한 그리스도인은 과연 무슨 말을 해야 하겠는가? -제임스 제인웨이.


23절.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4절에서 우리는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권고를 받았거니와, 여기서는 그분이 우리를 기뻐하신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분이 우리의 길을 기뻐하시는 것으로 언급되거니와, 34절에서는 그분의 "도를 지키라"는 명령이 나온다. 이러한 대구적 언급들은 매우 교훈적이다. -C. H. S.


23, 24절. "선한 사람." (KJV 직역. 한글 개역 성경은 단순히 "사람"이라고 번역했다-역자 주.)의 선한 길을 "기뻐하시는" 전능자에 의해 그 "길"이 모두 "정해졌다"는 말은 이해하기 힘들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은, 선한 사람도 넘어질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곁에 서서 넘어지는 그의 모습을 보고만 계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넘어지고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로 남을 수 있다는 원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한두 가지 내용을 첨가해 보기로 하자. 또한 그러한 부가적 언급을 통해, 그들의 길이 정해져 있든지 아니면 단지 허용만 되어 있든지간에,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로 말미암아 거할 성에 이르게 하는 이 "바른 길"을 모든 상황 가운데서 꿋꿋이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시 107:7). 

선하고 형통한 삶을 살았던 히스기야의 생애의 막바지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자를 보내어······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대하 32:31). 또한, 말세와 관련하여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그들 중 지혜로운 자 몇 사람이 쇠패하여 무리로 연단되며 정결케 되며 희게 되어"(단 11:35). 이 두 구절에서 우리는, 의인들의 넘어짐에 관한, 하나님의 붙드심에 관한, 그리고 그들의 재기를 훼방하려는 세상 사람들의 거들먹거림에 관한 몇 가지 귀중한 사실들을 엿볼 수 있다. 의인들은 마치 불아궁이와 같은 외부적 곤경 가운데 처할 것이며,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도 그들에게 필요한 그 시련을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때가 정해져 있으며, 마지막도 보인다. 본문에서 시사하는 것도 바로 그런 내용이다. 선한 사람도 넘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이라는 귀한 확신을 수반한다. -메리 덩컨(Under the Shadow, 1867).


24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따라서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이 남몰래 품을 수 있는 의구심에 답해 주시며 위로를 베푸신다. 그 의구심인즉, 의인이 억압받고 그의 취지가 악인에 의해 먼지더미 속에 짓밟히는 사례에 대한 것이다. 그 점에 대해 성령께서는 이렇게 답하신다:"사랑하는 자여, 그를 넘어지도록 가만히 두라. 그가 계속 누운 상태로 내던짐을 당하지는 않는다. 그는 다시 일어나야 한다. 온 세상이 그 사실을 의심한다고 할지라도. 이는 하나님이 그의 손을 붙드시며 그를 다시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


24절. "저는 넘어지나." 말하자면, 무기력한 사람처럼.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즉, 전적으로 엎드러지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끊어짐을 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고후 4:9).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저를 완전히 엎드러지지 않도록 붙드시는 그분의 힘과 권능. 만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완전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토머스 윌콕스.


24절.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비록 그가 더러운 죄악들 속에 빠질 수 있고 또 실제로 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에게  주신 사죄와 칭의를 무효화시킬 정도의 죄악에 사로잡히지는 않는다.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편 기자는 죄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은 선한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넘어질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까지인가? 죄사함과 칭의마저 빼앗길 정도인가? 그렇지 않다. 그 정도라면 아주 넘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손 아래로 엎드러짐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그가 아주 엎드러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손으로 그를 붙드시기 때문이다. 혹은, 몬타누스(Montanus)가 번역하였듯이,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붙드시며 그로 하여금 그와 같은 상태에 빠져들지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상태에 빠져든다면, 죄가 그를 주관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다음 구절들을 살펴보라:"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롬 6:1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시는 이 일련의 일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렇게 연결된 사슬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 2:1, 2). -윌리엄 그린힐.


25절.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경험상 의인이 곤경에 처하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곤경 중에서 방치되거나 내버림을 당하는 의인을 결코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 있어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있어, 구걸은 완전히 유기당한 표시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그들 중에 가난한 사람들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셨지만, 그들 중에 거지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율법을 분명히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자는, "의인이 버림을 당하여 구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셈이다. 혹자는 이르기를, 다윗 자신이 아비멜렉과 나발에게 떡을 구걸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여 일시적으로 음식을 구하는 경우를 거지의 구걸 행위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다윗이 거지였다고 혹은 떡을 구걸하였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가 갑작스러운 곤경에 처하여 아비멜렉이나 나발에게 음식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처럼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자라도 한 조각 떡을 부탁할 수 있다. 선한 사람이 그와 같은 결핍 상황에 빠트려질 수 있지만, 그 상황 가운데 방치되는 일은-설령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극히 드물다. -조셉 캐릴.


25절.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혹자는, 의인들 중에도 가난한 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들어 본문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문이 언급하는 대상은 자선을 베푸는 의인들이다. 이 사실은 이어지는 구절을 통해 드러난다:"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이런 사람이나 그의 자손이 걸식해야 할 정도로 궁핍해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다섯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셨을 때, 모두가 배부르게 먹고도 일곱 광주리에 가득 음식을 거두었다. 한편, 성 오스틴(Austine)은 이와 관련하여 언급하기를, 소비되는 양식이 늘어가듯이 빈민들에게 베푸는 의연금도 늘어난다고 했다. -미카엘 저민(Michael Jermin).


25절. "보지 못하였도다." 나는 이를 항상 문자적으로 진실한 말이라고 믿는다. 나 자신도 이제 백발 노인이 되었다. 나는 여러 나라들을 여행했고, 갖가지 삶의 상황들 가운데서 살아가는 여러 신앙인들을 만나서 대화할 기회를 많이 가져 보았다. 내 기억으로는, 본문과 반대되는 경우를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나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예를 입혀 주시며, 그들과 그들의 후손을 보살피신다. -아담 클라크.


25절. "걸식함." 이는 가끔씩 궁핍함에 처해 도움을 구하는 경우(사무엘상 21:3에 의하면 다윗 자신이 아비멜렉에게 떡을 구했으며, 사무엘상 25:8에 의하면 그와 그의 병사들이 나발에게 음식을 공급해 달라고 부탁했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문전걸식하며 살아가는 경우를 가리키며, 악인에 대한 저주로 선언되고 있다:"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시 109:10). 따라서 의인이나 그의 자손이 이 정도로 서글프고 비참한 상태로까지 전락하지는 않는다. 그런 일은 너무도 드물기 때문에, 다윗은 자기 생애에 그러한 경우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서 잭슨.


25절. 시편 기자의 이러한 관찰은 대체로 쉽게 입증될 것이다. 엘리 가족의 경우는 예외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 경우마저 엘리가 의인으로서 결함을 보인 결과였다. 만일 어떤 약속을 이행함에 있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수단을 무시하면 그 약속이 폐기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창 18:19 참조). 혹자는 본절에 추가 해설이 딸린 것으로 생각하여, 끝행을 이렇게 번역한다:"그 자손이 (비록 버림을 당했더라도)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데이비드 데이비드슨(David Davidson, The Pocket Commentary, 1836).


25절. 이 내용은 모든 경우에 있어 절대적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일반적인 관찰 사항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진정으로 경건한 자들의 자녀가 스스로 큰 과오나 실책을 범하지 않는 한 그렇듯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윌리엄 월포드.


25절. 여기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고 있다(시 119편의 대부분의 내용이 그러하듯이).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 그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대개 왕들은 거지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존 트랩.


25, 26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사후에 그 자녀들이 어떻게 될지를 염려하고 불안해 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어린아이였을 때 어떻게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호와의 팔이 짧아지는가? 그분이 우리를 우리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으셨는가? 우리 부모가 우리 곁을 떠날 때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지 않는가? 이러한 은총을 체험한 우리가 결코 그분께 버림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가?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 아니신가(히 13:8)? 다윗은 확신 있게 말한다:"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수많은 불신자들은 자기 자녀들을 너무도 염려하는 나머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않고 노심초사하면서 자식에게 남겨 줄 재산을 모으려 한다. 그러한 아버지에 대해, "디베우스(Diveus)여! 당신은 부유하지만 실상은 가난하고 불쌍하다!"는 말이 적절하게 적용된다. 이는 마치 자기 병아리에게 지나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쓰는  암탉이 스스로는 굶는 것과 같다. 고리대금업, 계략, 억압, 강탈 등을 통해 부유해질 수만 있다면, 그들은 그런 악한 방법들을 기꺼이 동원한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참으로 터무니없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가 비참해질까봐 두려워하지만, 사실상 그들이 나아가는 길은 그 자녀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이는 그들이 자녀들에게 남기는 것은 그들의 재산이 아니라 죄악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듯이 그 죄악도 확실하게 물려받는다:"하나님이 그의 죄악을 쌓아 두셨다가 그 자손에게 갚으신다 하거니와"(욥 21:19). 

그 반면에, 선한 사람은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다. 세상적 생각으로는 그 자손이 가난해지리라고 판단되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 자손을 부유하게 하실 것이다. 이 권고는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질 은총에 대한 약속이며, 그 약속은 순종하는 사람 자신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손에게까지 확대되며, 심지어 천 대까지 확대된다(출 20:6). 그런즉, 자녀와 함께 그리스도를 신뢰하라. 당신의 친구들이 실망을 안겨 주고, 폭리는 그칠 줄 모르며, 억압에 대해 지옥행 선고가 내려질 때에도, 그리고 당신 자신이 썩어 먼지로 변하고, 세상이 불에 타서 재로 화할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토머스 애덤즈.


26절.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의인은 자기 자신에게 자비롭다. 왜냐하면 자비란, 자선과 마찬가지로 집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녀가 있다고 해서 근사한 음식을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다른 이들에게도 자비롭다. 이는 그가 자신의 역량이 허락하는 한 다른 사람들에게 꾸어 주고 선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의 자손은 이로 인해 더 나은 생활을 누린다. 그가 자비를 더 많이 베풀고 더 많이 꾸어 줄수록 그의 자녀에게는 더 낫다. 왜냐하면 부모가 부를 자녀에게 맡기기보다는 자신의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기를 더 우선적인 일로 여기고 또한 비록 자신이 죽더라도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명심할 때, 그 자녀에게 최선의 축복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 아들을 멋쟁이로 만들기 위해 여위고 수척해졌던) 부유하지만 타락한 부모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전 5:14)고 하는 솔로몬의 잠언이 자신에게 실현된 것을 본다면, 내가 확신하건대 이 세상을 회고하는 그의 영혼은 마치 지옥에 있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런즉 현재 살아서 다른 이들에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자들은, 만일 자신의 재물을 부정한 수단으로 얻고 더욱 부정한 방법으로 그것을 보존하였다면, 그들이 세상을 하직할 때 자신의 자녀에게 그런 경우가 닥칠 수 있다는 점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매튜 그리피스(Matthew Griffith).


28절. "여호와께서······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성도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는데 어떻게 해서 버림을 받지 않는 것일까? 본절의 대조법에 주목하라. 그리하면 그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그들은 자손을 통해 보존된다:부모라는 존재가 자녀를 통해 계속 이어지며 증가된다. 그것은 매듭과 같은 것이다. 아버지의 생명이 마지막에 이를 때, 그것은 그의 자녀를 통해 매듭으로 연결되어 계속 이어진다. 내가 확신하거니와, 장수나 자손의 행복에 대한 약속 등과 같은 현세적 축복들은 율법 언약 시대에 한층 더 가시적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그분의 백성의 자녀들을 돌보고 계시며, 복음 시대에 속한 방식을 따라 여러 가지 약속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한 가족을 쉽게 근절시키는 방법이 죄를 범하는 것이듯이, 그것을 든든히 세우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설사 항상 그런 식으로 판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대부분은 그런 식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부류의 하나님의 섭리들에 대해 심판할 자격을 갖춘 자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섭리를 단편적으로 보며, 그 단편적인 것들을 함께 맞추는 역량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판 날에는, 하나님의 처사 전체가 우리 앞에 드러나며, 우리는 어떻게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 후손이 주의 앞에 굳게 설 것인지를"(시 102:28) 분명히 이해할 것이다. -토머스 맨턴.


29절.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동일한 약속이 동일한 용어로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은 분명 강조를 위함이다(9, 11, 22, 29, 34절). 새 하늘과 새 땅이 여기서 암시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사 66:17; 벧후 3:13). -윌슨.


29절.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마태복음 5:5과 비교하라. 장차 의인들만이 땅을 독점할 것이라는 이 성경 진리를 깊이 생각해 보라. 천년 왕국에 대한 개념이 이를 보다 충분하게 설명해줄 것이다. -바르트(T. C. Barth).


31절.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몰이당하기를 싫어하는 양떼는 이 길 저 길로 달아나기 시작한다. 내키지 않는 마음을 지닌 사람 역시 그러하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저런 생각이 든다. 그 생각들을 한군데로 모으는 것은 나름대로의 역량을 요구한다. 하지만 자발적인 마음, 곧 모든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준비하는 마음, 그것은 위로만 향해 날아오르며, 여호와 안에서 기뻐한다. -리처드 스틸(Richard Steele).


31절 상반절. 그의 머리 속에는 성경이 들어 있고, 그의 가슴에도 성경이 들어 있다. 그의 내면에는 귀한 보화가 들어 있고, 그곳에서부터 좋은 것들이 나온다. -존 트랩.


32, 33절. 유대인들은 의로우신 그분을 날마다 시시각각으로 "엿보았다." 그들은 그분을 "살해할 기회를 찾았으며" 실제로 살해했다. 하지만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사 그 무죄하심을 옹호해 주셨다. -조지 혼.


34절. "여호와를 바라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비록 멀리 돌아서 가는 듯이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길로 걷는다. 그들은 빨리 가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등한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서두르는 것보다 더 빠른 길임을 알고 있다. 또한 그들은 그 거룩하고 의로운 길을 걸음으로써 손해나 곤경을 당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길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도를 지킬" 것이다. 자발적인 마음으로 복음을 소중히 여기며 장려하려 하지 않는 자, 죄보다 가난이나 곤경을 더 두려워하는 자, 자기 영혼보다는 세상 것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자, 재산을 얻거나 증식하거나 혹은 보존하기 위해 간접적인 혹은 의혹스러운 경로를 택하는 자, 지나친 세상 염려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는 자 등, 이러한 사람은 자기 재산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자임에 분명하다. 또한 하나님께 자기 재산을 맡기지 않는 자는,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떤 모습을 가장하든간에,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과 자신의 구원을 의뢰하지 않는다. 하늘과 구원에 대한 그의 소망은 단지 가정에 그칠 뿐이다. -데이비드 클락슨.


34절. "여호와를 바라고." 그분을 속박하려 하지 말며, 그분이 원하시기 전까지는 그분을 깨우지 말라. -존 트랩.


34절. "바라고······지키라." 우리는 바라는(혹은, 기다리는) 중에 흔들리지 않도록 주의하자. 설령 하나님의 길에 사자가 버티고 서 있다 할지라도, 그 길에서 이탈하지 말라. 안전 위주로 사느라고 의무를 회피하지 말라. 옛적 길, 곧 선한 길인 하나님의 대로를 지키라(렘 6:16). 그 길은 거룩함으로 포장되어 있다.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사 35:8). 구부러진 길을 피하고, 왼편으로 돌이키지 말며, 왼편에 애착을 갖지도 말라. 죄가 우리의 소망을 훼방하며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다. 죄악된 길에서 하늘을 기대하기보다는 차라리 지옥에서 그것을 기대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토머스 왓슨.


35절.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 칠십인역에서는 "베에즈라흐 라아난"(@n[r jrgak)을, '레바논의 백향목처럼'이라는 뜻인 "베에즈라흐 레바논"(@nbl jrzak)인 것처럼 번역한다. 하지만 델리취에 의하면, "에즈라흐 라아난"은 귀한 재목으로 쓰이는 나무를 가리킨다. 그 나무는 수 세기를 거쳐 자라서 거대한 몸통을 이루며 둥근 지붕 형태의 그늘을 드리운다.


35절.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 (KJV는 "푸른 월계수"라고 번역했다-역자 주.) KJV 난외주와 한글 개역 성경상의 번역은 원문에 충실한 것임에 분명하다. 대개 영어 성경 독자들은, 이 구절에서 지칭하는 나무를 월계수 또는 우리 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벚나무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식물은 전혀 다른 종류에 속한 것이다. 포르투갈 월계수는, 그 자란 모양과 늘푸른 잎으로 인해 장식용 관목으로 높이 평가되며, 장미 종류의 (핵과성) 아과에 속한 것이다. 반면에 남부 유럽에서 무성하게 자생하는 월계수는 전형적인 월계수과 식물에 해당한다. 몇 가지 정황들로 미루어 보건대, 히브리어 "에즈라흐"가 진짜 월계수를 지칭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이 대중적으로 읽히는 시편에서 예시적인 설명의 일환으로 언급될 정도로 팔레스틴에 풍부하였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것이 팔레스틴에서는 주로 지중해 동부 연안 접경 지대에서만 자생했다는 사실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시편 기자에 의해 언급된 나무가 월계수를 가리킨다는 추측을 거부하게 만드는 주된 반박 사항은 본문 자체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위에 인용된 구절을 언급한 후에, 그는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라고 덧붙인다. 이러한 개념은, 느리게 성장하되 숙성하면 무려 30피트 높이까지 자라는 어떤 상록수에 대한 설명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본문의 표현은 특별히 좋은 토양에서 급속히 자라는 나무에 어울린다. 그렇게 해서 심기우고 평온한 가운데 햇볕을 받으며 급속히 자란 나무는 보는 이들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폭풍이 그것을 부러뜨릴 때, 강한 바람이 그 가지를 맹렬히 뒤흔들 때, 그것은 지탱해 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뿌리째 뽑히고 그 몸통 역시 쓸모 없게 되어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다. 악인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를 찾아도 발견할 수 없다. -존 던스, Biblical Natural Science.


35절. 우리는 던스 박사가 고찰한 내용에서 아무런 설득력도 발견하지 못한다. 만일 아래에 수록된 윌슨의 설명에 대한 이견들이 없다면, 더 더욱 본문의 나무를 월계수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오랫동안 푸르름을 유지하는 내구성 있는 나무였으며, 형통을 누리는 악인의 모습이 그와 같을 것이다. 악인은 자신의 행복이 영원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섭리의 진행 과정을 주의깊게 살피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가 그 악인의 영광을 단축시키며, 그리하여 그가 완전히 파멸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거룩한 두려움 가운데 깨닫게 된다. -C. H. S.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여기서 "본토에 선······무성함"이라는 말은, 자생지 토양에서 자라고 한번도 옮겨 심기우지 않음으로써 강건하고 무성해진 나무를 가리킨다. 세상적인 것들에 확고히 뿌리박은 세상의 불신자에 대한 탁월한 상징이다. 세상은 그의 자생지 토양이며, 그는 형통함 가운데 거만하고 방종스러운 모습으로 자라며 그 반대되는 상황을 두려워하거나 자각하지 못한다. -윌리엄 윌슨.


35절.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 이 나무는 잎이 무성하되 열매는 하나도 맺지 못한다. -매튜 헨리.


35절.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악인의 세력이 "푸른 월계수"(KJV 직역-역자 주)와 같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사과나무 등과 같은 다른 모든 유용한 나무들이 시들고 벌거벗는 겨울에도, 월계수는 여름과 마찬가지로 계속 푸르름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악인의 경우가 그러하다:핍박과 곤경 그리고 재난의 폭풍우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시들어 죽는 듯할 때, 악인들은 번성하며 세상 눈에 푸르러 보인다. 그들은 세상의 부귀에 탐닉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멸망을 위한 것일 뿐이다. 그들의 몸은 기름이 번지르르하지만, 그것은 도살의 날을 위한 것일 뿐이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윤택한 생활을 허락하셨고 그들로 사악함 가운데 형통을 누리도록 묵인하셨다. 하지만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분이 그들을 멸하시기 위함이었다. -고어(J. Gore)의 설교, 1633.


35, 36절.


오늘 그는 소망의 부드러운 잎사귀들을 내고,

내일에는 꽃을 피우며,

불그스레한 영예의 결실을 맺는다.

그러나 사흘째에 서리 곧 파멸의 서리가 내려,

한껏 위대해졌노라고 스스로 확신하는 그 순간,

그의 뿌리를 얼게 하고,

그리하여 그는 나처럼 넘어지고 만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Henry Ⅷ.


36, 37절. 매는 높이 날고 귀하게 여김을 받으며, 횃대에 앉아 격려의 종소리를 들으며 그 주인의 주먹 위에 얹혀 다닌다. 그러나 일단 죽어 횃대에서 떨어지면, 그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두엄더미에 던져진다. 반면에, 암탉은 먼지 가운데서 땅을 파며,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지만, 죽어서는 주인의 식탁에 별미 요리로 올려진다. 이렇듯이 악인들은 이생에서 흔히 높은 지위에 앉아 형통함을 누리며, 의인들은 먼지 더미 가운데서 기는 생활을 한다. 하지만 일단 죽고 나면, 전자는 지옥의 두엄더미 가운데 던져지지만, 후자는 천국에 올라간다. 전자는 마귀들과 더불어 고통을 받는 반면, 후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다. -토머스 웨스트필드(Thomas Westfield, D.D., 1644).


37절. "살피고······볼지어다." 헤로도투스(Herodotus)는, 죽은 친구의 시신을 유약을 칠한 무덤에 안치하여 지나가는 행인들의 눈에 분명히 띄도록 하는 에티오피아인들간의 관습을 언급한다. 그러한 관습이 아무리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해도, 그것은 여호와 안에서 죽은 자들의 경건한 특성이 예술 작품 따위의 거울을 통해 산 자에게 소개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시사한다. 사실, 사후에 얻는 칭찬은 신앙적 삶에 대한 찬사이다. 선행이라는 보석들은 금고 속에 넣고 잠궈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되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이름을 세상 끝날까지 기억되게 하려 하셨다면, 종들의 갖가지 경건하고 관대한 행위들을 망각 속에 묻어 두려 하실 리가 없다. 성경을 고찰해 보라. 그리하면 여러분은 경건한 사람이 영예의 비명을 남기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교부들의 경우를 보라. 그리하면 여러분은 의인들에게 합당한 찬사를 돌림으로써 그들의 죽음을 기리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는 점을 엿보게 될 것이다. -나다나엘 하디.


37절. "완전한 사람." 다이비네스(Divines)는 '절대적인' 완전과 '상대적인' 완전을 잘 구분하고 있다. 절대적인 완전이란, 결핍됨이 전혀 없는 상태로서, 진정 선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단편적이지 않으신 그분만이 완전하시다. 만물을 지으시되 자신은 지은 바 되지 아니하신 하나님만이 스스로 그분 안에서 온전히 충만한 완전을 누리신다. 상대적 완전이란, 몇몇 결핍 상태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충만한 상태이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함께 살아가는 악인들에 비해 '완전하다.' 이런 측면에서, 노아를 가리켜 "당세에 완전한 자"(창 6:9)라고 했다. 고대 세계의 사악한 실태와 비교하건대 노아는 완전하다는 말을 들을 만했다. 사실 모든 정직한 사람은, 공개적으로 악하거나 공개적으로만 선한 체하는 자들과 비교할 때 혹은 사악함으로 얼룩져 있거나 외양만 거룩한 듯이 보이는 자들과 비교할 때, '완전하다.' 따라서 한 성도는 다른 성도에 비해 더 완전할 수 있으며, 강한 그리스도인은 약한 그리스도인에 비해 은총과 경건함에 있어 앞선다.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고전 2:6)라는 바울의 언급은 바로 그러한 성도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즉, 다른 이들보다 더 풍성한 은총을 지닌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브나야는 "삼십인보다 존귀하나 그러나 첫 삼인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삼하 23:23). 그 어떤 성도도 복되신 삼위일체라는 "첫 삼인"의 완전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당대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삼십 인의 완전한 자들' 가운데 드는 이들은 많다.

아울러 우리는 '외래적' 완전함과 '본질적' 완전함을 구분해야 한다. 외래적 완전함은,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의로 말미암은 죄의 전가에 의해 모든 신자들이 참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죄의 전가로 인해 신자들의 불완전함이 덮힘을 받는다. 이런 측면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고 말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르기를, 그들이 그분(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졌다고 했다(골 2:10). 사실, 우리의 허물이 그리스도로 인해 사함받을 때 하나님의 명령들은 다 이루어지는 셈이며, 그리스도인의 복음적 완전함이란 우리 자신의 미덕의 온전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죄악을 사함받는 데 달려 있다.

본질적 완전함이란 원래부터 지니는 고유한 속성을 가리킨다. 그분은 구원을 수반하는 은총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완전하신 존재이다. 혹은 그분은 그러한 은총과 관련하여 아무런 결함도 없다는 점에서 완전하시다. 종종 이 둘의 관계는 어린아이와 성인간의 유사성에 의해 적절하게 설명된다. 즉, 전자도 사람에게 있어 본질적이고 중요한 부분들을 다 갖추고 있지만, 그것들을 온전히 활용하는 것은 후자인 것이다. -나다나엘 하디.


37절. "결국." 모든 지혜로운 사람들은 마지막을 최선의 결과로 마감하고자 한다. 2, 3마일에 불과한 평탄한 길을 말을 타고 간 후에, 백 마일에 달하는 험하고 까다로운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길이라고 하는 과정보다 목표 지점인 결과가 더 나쁠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반면에 시작은 힘들어도 그 과정이 좀더 쉽고 또한 그 여정의 끝이 행복하다면, 공정한 보상이 이루어진 셈이다.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그는 시작 단계에서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며, 그 여정은 시련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의 결국은 평안이다. -토머스 애덤즈.


37절.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평안히 끝난다는(혹은 죽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유티미우스(Euthymius)에게 있어, 평안한 마지막이란 의혹과 반대되는 평안한 마음 상태로 끝남을 의미한다. 키프리안(Cyprian)에게 있어서는, 최종적인 파멸과 반대되는 의미에서의 평안한 안정을 뜻한다. 오리겐은, 절망과 반대되는 평안한 양심이라는 의미로 설명한다. 이레니우스에게 있어서 그것은, 노고와 반대되는 의미에서의 평안한 죽음을 뜻한다. 평안한 마지막이란 모든 지각에 뛰어난, 곧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평강으로 끝남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이웃들과 화평한 상태로 끝남으로써 그 어떤 항의나 절규도 우리에게 미치지 않음을 뜻한다. 끝으로 평안한 마지막이란, 우리 자신과 화평한 상태로 끝남으로써 불안이나 동요 가운데 고통받지 않음을 의미한다. -리처드 파레(Richard Parre).


37절.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1) 경건한 자의 특성. (2) 경건한 자의 특권. 그의 특성은 완전함이고, 그의 특권은 평안이다. 이는 성도의 특성과 면류관을 보여  준다. 그는 정직과 성실로 특징지워지며 평안의 면류관을 쓴다. 또한 여기에는 그리스도인의 수단과 목표 및 그의 활동과 휴식이 제시되어 있다. 그의 수단은 거룩함이며, 그의 목표는 행복이다. 그는 정직한 가운데 완전을 향해 나아가며, 그 여정의 막바지에 이르러 평안한 쉼을 얻는다. -존 휘틀록(John Whitlock)의 장례식 설교(The Upright Man and his Happy End, 1658).


37절. 시간내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죽는 과정을 제대로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임종의 침상 곁에 서서 세상을 하직한 영혼을 아브라함의 품으로 데려가면서 현세를 떠나는 성도들의 즐거운 모습(이는 성경의 진리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을 무수하게 많이 기록한 천사의 글을 읽어 보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죽는 과정을 제대로 알 길이 없다. 죽어가는 어떤 성도는 이르기를, "나는 죽는 것이 그토록 기쁜 일이라고는, 그리고 현재 내가 누리는 것과 같은 천상 세계를 볼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믿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멜란히톤(Melancthon)은 죽기 직전에,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눅 22:16)는 주님의 말씀을 되풀이하며 잠들었다. 그는 들떠 있는 듯이 보였고, 곁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당신이 바랐던 이상의 그 무엇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서, "천국에 이르지 않은 한 바랐던 이상이란 전혀 없노라"고 대답했다. -가디너 스프링(Gardiner Spring).


37절. 잘 죽는 것이야말로 분명 잘 사는 것이다. 우리는 나사로처럼 죽거나 부자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크로이소스(Croesus)와 함께 살고 소크라테스와 함께 죽겠노라고 말했던, 플루타크 영웅전에 나오는 어떤 사람처럼 그래서는 안 된다. 발람의 바람은 어리석고 무익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만일 여러분이 잘 죽고자 한다면, 올바로 살아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평안하게 죽고자 한다면,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행복하게 죽으려 한다면,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존 키친.


38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이 세상의 악인들은 장애나 훼방을 받지 않고서 영예와 성공이라는 황금 계단을 쉽게 올라가며, 심지어 찬사와 환호를 받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가장 높은 위치에 올랐을 때 그들은 너무도 미끄러운 상태에 처해 있음을 자각한다. 세상적 복락의 꼭대기에 이른 때야말로 가장 심각한 추락이 확실하게 임박한 때이다. 그들은 이 땅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며, 풍요와 쾌락의 푸른 초원을 신나게 질주한다. 그러나 그 질주의 막바지에 이를 때, 그들은 달리는 말과 함께 넘어져서 파멸의 구덩이로 곤두박질친다. 그들은 이 세상이라는 바다를 고요하고 평온한 가운데 순조롭게 항해하지만, 전혀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어둡고 황폐한 심연으로 갑작스럽게 가라앉아 다시는 회복되지 못한다. -로버트 볼턴(Robert Bolton).


40절.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그분은 진정 그렇게 하실 것이다. 오, 하나님의 귀하신 배려! 성도들의 안전! 그리고 약속들의 확실성! -존 트랩.


루터는 자신의 시편 주석을 마감하면서 이렇게 언급한다:오, 그토록 부요하고 강력하며 또한 위안이 되는 하나님의 선언들을 믿지 않는 우리는, 그리고 불신자들의 사악한 말을 들을 때마다 반박할 근거를 찾지 못한 채 너무도 쉽게 거기에 말려드는 우리는, 그 얼마나 박약한 믿음과 그릇된 믿음 그리고 추한 불신 상태에 사로잡혀 있는가! 오 하나님, 올바른 믿음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소서. 아멘.


힌트


1절. 평온함을 누리는 기술. -존스(W. Jones).


1, 2절. 잦은 시험, 그리고 그 해결책. 사망과 지옥 가운데 처한 죄인들의 광경.


2절. 악인들은 어떻게 그리고 언제 파멸에 이르는가?


3절. (1) 거룩한 삶에 대한 묘사. (2) 행복한 삶에 대한 묘사.


3절. 신자의 모습. (1) 그의 의뢰 대상. (2) 그의 삶의 양식. (3) 그의 거주지. (4) 그에게 공급될 것들의 확실성.


3절 하반절. 이 부분을 네 가지 방식으로 읽어 보라. (1) “확실히 식물을 삼은”-공급의 확실성. (2) “진실로 식물을 삼은”-영혼과 육체를 위한 공급의 충분성. (3) “진리를 식물로 삼은”-영적 공급. (4) “진리를 식물로 삼으라”-그러한 공급을 선택할 의무.


4절. 신자의 기쁨과 바람을 설명하고, 그것들간의 관계를 보이라.


5, 6절. 보다 차원 높은 삶. (1) 진심어린 단념을 기초로 삼음. (2) 믿음에 의해 유지됨. (3) 여호와께서 지속적으로 전개시키심. (4) 영예의 절정 상태로 완성됨.


6절. 비방받는 성도들을 위한 감미로운 위로. 현재 그들의 성품이 어디에 감추어져 있는가? 누가 그것을 드러낼 것인가? 점차적이지만 확실하게 드러냄. 그리고 영광스러운 그 결과.


7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무엇을? 어디서? 언제? 왜? 어떻게? 

7절. 평안, 인내, 그리고 침착.


7절. 하나님 안에서의 평온. -윌버포스(Wilberforce) 주교.


7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KJV는 “여호와를 신뢰하고”로 번역했다-역자 주.) (1) 여호와의 ‘뜻’을 신뢰하라. 이는 그분의 모든 뜻은 여러분의 가장 귀한 유익을 위함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라. 그리고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아버지께서······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다”(요 17:23)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주 묵상하라. (3)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라. (4) 예수님 안에서 계시되신 여호와를 신뢰하고, ‘언약 안에서’ 계시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라. -제임스 스미스.


8절. 불평하는 자를 위한 설교. (1) 현재의 분노를 ‘그치라.’ 그것은 미친 짓이요 죄악이다. 그것은 기도 문을 닫히게 만들며, 적의로 자라갈 것이다. 그것은 더 악화될 수 있다. (2) 불평, 조급함, 시기 등과 같은 온갖 종류의 감정들을 ‘피하라.’ 이는 그것들이 죄악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9절. 겸손한 자들이 진정 땅의 주인들인 이유가 무엇인가?


10절. (1) 죄인이 죽고 난 후에 무엇을 남겼는지 살펴보라. 그의 소유, 기쁨, 영예, 목표, 소망 등이 어디로 갔는가? (2) 그가 어디로 갔는지 생각해 보라. (3) 여러분도 그러한 운명에 처해지기를 바라는가?


11절. 온유한 자의 기쁨, 혹은 ‘평온한 마음으로 거두는 수확.’ 


14절. 정직한 대화. (1) 정직한 대화에서 배제되는 것들:수평적인 혹은 세상적인, 왜곡되거나 간교한, 그리고 치우치거나 사악한 것들. (2) 거기에 포함되는 것들:동기, 목표, 말, 그리고 행동. (3) 그것을 통해 얻는 유익들:그것은 대들보처럼 세워지며, 기둥처럼 지탱시켜 주며, 탑처럼 올라가며, 기념비처럼 돋보이며, 또한 파로스 섬의 등대(이집트 북부의 알렉산드리아만 안에 있는 등대로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역자 주)처럼 빛을 발한다. 


15절. 자멸적인 악의 특성.


16절. 적은 것을 많게 만드는 법.


16, 17절. (1) 대조적인 소유자들. (2) 소유들에 대한 비교. (3) 주어진 선택권. (4) 그것에 대한 분별력.


17절 하반절. (1) 은총을 받은 사람들. (2)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붙드심.” (3) 그들에게 임하는 축복:시련에 앞서, 시련 중에, 시련 후에, ‘붙드신 바 됨.’ (4) 그들의 존엄하신 후원자.


18절. 하나님의 지식을 생각함으로써 얻게 되는 위안들. 의인의 영원한 소유.


18절. (1) 대상:“완전한 자.” (2) 기간:그들의 “날.” 하나님이 이것을 알고 계신다. ① 그분은 ‘자상하고’ ‘은혜롭게’ 그것을 알고 계신다. ② 그분은 그 날수를 아신다. ③ 그분은 그 특성을 알고 계신다. (3) 몫:“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윌리엄 제이.


18절 하반절. 저희 기업이 무엇인가? 저희는 얼마나 오래도록 그것을 소유하는가?


19절. 어려운 때를 위한 좋은 말들.


21절. 금전 거래를 통해 인품을 시험해 볼 수 있다.

22절. 행복의 비결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불행의 본질은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것이다.


23, 24절. (1) 하나님의 예정. (2) 하나님의 기쁨. (3) 하나님의 지원.


24절. 일시적인 시련들. (1) 예기됨. (2) 그 한계가 있음. (3) 그 결과가 나타남. (4) 그 아래에서 얻는 비밀스러운 위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일어날 수 없는 일은 무엇일까? 어떤 일이 일어날까?


25절. 연로한 관찰자의 비망록.


26절. 의인의 자비로운 성격, 관대한 행동, 그리고 풍성한 상급.


26절. 의인의 가족에게 임하는 축복.


27절. 소극적 유익과 적극적 유익.


28절. (1)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신다. (2) 그분은 의인들에게 신실하시다. (3) 따라서 의인들의 확실한 보존은 이중으로 보장된다. (4) 결국 악인의 운명은 분명해진다.


29절. 의인의 유업에 대한 모형으로서의 가나안.


30절. 우리의 말은 경건함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다.


31절. (1) 가장 좋은 것이, (2) 최선의 장소에서, (3)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


32, 33절. 우리의 대적들. 그들의 상습적인 악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변호하심.

34절. (1) 이중의 권고. ① “여호와를 바라고” ② “그 도를 지키라.” 기다림과 실행, 기다림과 걸음, 혹은 은혜를 받는 일과 실천을 통해 그것을 나타내는 일. (2) 이중의 약속:①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하나님은 모든 존귀와 영예의 근원이심. ②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악인들은 끊어질 것이다. -윌리엄 제이.


34절. 인내하는 믿음, 거룩함을 유지함, 그리고 높임을 받으리라는 약속.


34절 하반절. 죄인의 운명을 목도함으로 인해 경건한 자가 느끼는 감정.


34절 하반절. 악인들은 종종 다음과 같이 끊어짐을 당한다:(1) 심지어 살아가는 중에, 그들의 처소와 부와 기대 등으로부터 끊어짐을 당한다. (2) 죽음을 맞아, 그들은 모든 소유로부터 또한 위로가 되는 모든 것들로부터 끊어진다. (3) 마지막 날에, 그들은 “생명의 부활”(요 5:29)로부터 끊어짐을 당할 것이다. -윌리엄 제이.


35, 36, 37절. 세 가지 기억할 만한 장면들. (1) 위풍당당한 장관. (2) 놀랍게 사라져버림. (3) 즐거운 결말.


39, 40절. (1) 은혜의 교리에 관한 요약. (2) 은혜받은 자의 체험에 관한 요약. (3) 은혜로운 약속들에 관한 요약. (4) 은혜받은 상태에 대한 가장 위대한 증거:“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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