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6편

홈 > 성경 > 스펄전의 시편강해
스펄전의 시편강해

시편 16편

기독정보닷컴 0 53

개요


​​​주제-이 시에는 “다윗의 믹담”이라고 머리말이 붙어 있다. 사람들은 이 시를 “순금의 시”라고 부르는데, 그 내용이 순금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 에인즈워스는 이 시를 “다윗의 보석”이라고 불렀다. 호커 박사는 이 시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어떤 사람은 이 시를 귀한 시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순금의 시 또는 귀한 보석과 같은 시라고 한다. 성령께서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을 통해서 이 시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시라는 것을 말했는데, 그분에 대해 기록된 것들은 순금처럼, 또한 보석처럼 귀한 것이다.” 아직까지 “믹담”이란 용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 용어는 시 56, 57, 58, 59, 60편에도 나타난다. 이 시들은 기도로 시작함으로써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넘치고, 궁극적으로는 안전과 즐거움을 누릴 것에 대해 확신하는 노래로 끝을 맺는다. 알렉산더 박사의 해설은 특히 귀한 것인데, 그는 “믹담”이란 말은 ‘비밀’ 또는 ‘신비’를 뜻하며, 이것은 이 시에 교리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고 했다. 만일 그의 해석이 옳다면, ‘비밀’이라는 말을 ‘귀한 시’라고 부르는 것과 합하여 ‘귀한 비밀에 대한 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순금처럼 귀한 이 시의 신비를 해석하는 데 인간적인 해석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령께서는 베드로를 통해서 “다윗이 저를 가리켜”(행 2:25)라고 말하면서 이 시가 그리스도에 대한 시라는 것을 밝혔다. 베드로는 그의 설교를 통해서 이렇게 전했다:“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행 2:29-31). 바울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 시를 인용하면서, 다윗이 “죄 사함”을 전하게 하는 “이 사람”에 대해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행 13:35-38). 주경가들은 대부분 이 시를 다윗에게, 성도에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를 “그리스도에 대한 시”로 이해할 것이다. 9, 10절에서,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고 주 예수만을 보았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만을 보기 때문이다. 


구성-이 시는 전체적으로 농축되어 있어서 인위적으로 내용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1절주께서 드리는 믿음의 기도.

2-5절여호와만을 믿을 것을 선언함.

6-7절 현재에 대한 믿음으로 만족함.

8-11절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즐거워함.


강해


1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1절. "하나님이여."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엘"(la)이 나타난다. 이 이름은 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계셨을 때처럼 지극히 연약한 상태에 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의 백성을 도우시는 전능하신 분을 부르실 때에 사용했던 이름이다. 신실하신 대제사장의 눈물과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복 주려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고난을 당했을 때에 확신을 가지고 "엘" 하나님, 전능하신 분께 나아가 기도하자. 하나님의 이름과 성품을 공부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곤란한 중에 있을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보호하소서." 이 구절은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호슬리는 "나를 지키소서"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표현은 호위병들이 왕을 보호하며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나, 목자들이 그들의 양 떼를 보호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사람이 되신 예수께서는 우리와 모든 면에서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며, 악의 권능으로부터 보호를 받으셔야만 했다. 주 예수께서는 순결하신 분이었으나, 자신의 순결한 속성만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본을 보이시기 위해서 하나님 여호와를 바라보며 보호해 주실 것을 간구했다. 욥은 하나님을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욥 7:20)라고 불렀으며,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중보자와 대변자가 되시는 주님을 감찰하시고 보호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주님을 보호하실 것을 약속하셨다:"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사 49:7, 8). 이 약속은 우리 주님께 문자 그대로 이루어져서 여호와께서는 주권적으로 주님을 구원하시고, 항상 힘을 주셔서 승리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은 주님께서는, 또한 그분 안에서 보호받은 우리를 회복시키실 수 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보호해 주실 것을 간구했을 때,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그분 안에 있는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을 중보하는 기도를 드리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는 이 기도를 확대한 것과도 같다:"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주님께서 이 시에서 "나를 보호하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은, 그분뿐만 아니라 그분에게 속하여 그분과 하나가 되고 교회의 지체가 된 자들을 보호해 주실 것을 간구하신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께서 그분에게 속한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에 대해 즐거워하면서도, 이 기도는 또한 자신을 위한 기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분은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셨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보호를 필요로 하셨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힘을 주실 것을 기도하셨다. 그분은 종종 산에 오르셔서 이 소망을 표출하셨으며, 이렇게 기도하기도 하셨다:"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요 12:27).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께 보호해 주실 것을 간구하셨다면, 그분을 따르되 자주 넘어지는 우리들은 얼마나 더욱 간구해야 하겠는가!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이 말은 "내가 주 안에서 피할 곳을 얻었나이다"라는 뜻이다. 병아리들이 어미 닭의 날개 아래 피하듯, 내가 여호와께 피하나이다. 당신은 나를 보호하시는 자시니, 나는 당신의 능력 아래 피난처를 얻었나이다. 이렇게 간구하는 것은 힘있는 기도이다. 우리 주님은 원수들이 대적할 때에 그렇게 기도하며 힘을 얻으셨다. "네 믿음대로 될지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늘의 원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얻기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면, 우리가 간구하는 것을 들어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믿음은 결코 빈 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다. 기도와 함께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움직인다. 우리 구세주께서 기도하셨듯이 우리도 기도하자. 그분이 넉넉히 이기셨듯이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넉넉히 이길 것이다. 인생의 폭풍을 만났을 때에 그분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내가 주를 의지하나이다"라고 여호와께 부르짖자. 


2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4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5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2절.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KJV에는 이 구절이 "오, 내 영혼이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니이다"라고 번역되었다. 2, 3절은 KJV와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이 다르다:"오, 내 영혼이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니이다. 나의 선함은 주를 위한 것이 아니며, 땅에 있는 성도들과 존귀한 자들을 위한 것이니, 그들은 내 즐거움이니이다"<KJV 직역>. 아래에 나오는 2, 3절에 대한 강해와 주해와 설명들는 KJV 역본을 따른 것이다-역자 주.)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늘 아버지를 섬기기로 결심하시고, 우리들을 위해서 여호와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분을 섬기기로 맹세하셨다. 우리들도 마음 깊은 곳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하신 그분의 통치를 받기로 결심하고 "주는 나의 주시니이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을 그분께 드리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 이것을 입술로만 고백한다면 별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고난 가운데서 이렇게 고백한다면, 이는 영적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는 은혜로운 증거이다. 사람 앞에서 이것을 고백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호와 앞에서 이것을 고백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다. 

여호와는 나와 언약을 맺으신 분이다. "주는 나의 주시니이다"라는 고백은 이러한 믿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구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가 순례자로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는 매일 "주는 나의 주시니이다"라고 고백하며 이 노래를 불러야겠다.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KJV에는 이 구절이 "나의 선함은 주를 위한 것이 아니며"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우리 주 예수께서 하신 일은 하나님의 필요 때문에 하신 일이 아니다. 인류가 모두 죄로 파멸을 당하고, 예수께서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지 않으셨다 할지라도 여호와께서는 이것과는 상관 없이 무한히 영광스러우셨을 것이다. 비록 독생자께서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하신 일과 죽음의 고통을 당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더욱 빛이 났지만, 그 하나님은 아들의 순종과 죽음을 필요로 하셨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역사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구세주께서는 그분이 하신 일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겸손히 말씀하신다. 우리도 그분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욥 35:7).


3절.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KJV에는 이 구절이 "땅에 있는 성도들과 존귀한 자들을 위한 것이니"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예수께서는 아직도 땅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신다. 그들이 성도가 된 것은 주님의 선하심 때문이다. 선한 일에 열심을 품고, 거룩한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구세주의 피로 씻음을 받고 그분의 의로우심으로 옷을 입었으며, 그분 안에 있는 선한 것을 선물로 받는다. 이들은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역으로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그분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속성이나 행복에 무엇을 더한 것은 아니다. 그분은 원래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아들과는 달리 우리는 무익한 종과 같다. 우리가 무엇을 한다 한들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유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전능하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다른 자녀들을 돕는 것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 왓츠(Watts) 박사는 이렇게 노래했다. 


난 마음과 혀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난 가난하고 가련한 존재입니다

내 찬송으로 당신이 더 존귀해지는 것이 아니며

당신이 더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당신의 성도들이 바라는 바는

우리의 선행으로 열매를 맺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열매는 나와 함께하는 동료들이며

나의 가장 귀한 친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련한 성도들을 용납하신다.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예물을 하나님은 받으신다. 이 세상을 떠나간 성도들을 위해 우리가 기도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땅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하셨듯이 우리도 그들에게 사랑을 보여야 한다. 그들은 "존귀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결점이 있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달리 보시고 사람들 중에서 존귀한 자들로 간주하신다. 이 세상의 위대한 통치자보다도 그분의 가장 비천한 성도들이 더 존귀한 자들이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진정한 귀족이다.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KJV에는 이 구절이 "그들은 내 즐거움이니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성령께로서 받은 은혜는 세상에서 받는 훈장이나 귀족의 칭호와 비교할 수도 없다. 주님은 성도들을 아시고 "그들은 내 즐거움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이 세상 만물보다도 그분의 택하신 자들을 더 기뻐하셨다. 그분이 성도들을 평가하신 것은 성도들이 자신을 평가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들은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분은 그들이 무슨 특별한 존재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시고, 그들에게 마음을 두신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고, 이 사랑으로 모든 고통을 참으셨다. 우리를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구속하는 즐거움이 그분으로 이 모든 질고를 참으시게 했던 것이다. 


4절.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에게는 사랑을 베푸시나,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반역하는 무리에게서는 사랑을 거두어 가신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악한 마음과 행동, 특히 우상 숭배를 미워하신다. 본문은 우리 주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는 것을 보일 뿐만 아니라, 죄인들이 이것을 탐욕스럽게 추구하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참되신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반면, 죄인들은 다른 신들을 쫓아가며 예물을 드린다. 우리는 달팽이처럼 기어가는 반면에, 그들은 미친 사람처럼 쫓아간다. 그들의 열심을 보고서 우리의 게으름을 책망해야겠다.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그러나 그들이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그들은 더욱 나쁜 결과를 불러온다. 그들이 열심을 다해 죄악을 더하면서 "괴로움"도 더하기 때문이다. 매튜 헨리 피틸리는 이렇게 말했다:"자신이 섬기는 신들을 더해 가는 자들은 슬픔도 더해 간다. 하나의 신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둘은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겠지만, 그러나 수백을 가져도 충분치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거짓 된 신들을 섬기기 위해 잔혹함과 어려움을 견디어 내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선교사들은 이 점에 대해 놀라운 보고를 하기도 한다. 우리들의 체험 중에도 선교사들의 체험만큼이나 생생한 것들이 있다. 우리의 마음을 우상에게 주면 언젠가는 그 일로 비통한 일을 당하게 된다. 우리들이 겪는 슬픔은 그 뿌리가 자기 사랑에 있으며, 이 우상을 던져 버린 후에야 슬픔이 사라지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던 금송아지를 깨뜨리고 이것을 가루로 만든 다음, 물에 타서 백성들로 마시게 했다. 이처럼 우리도 마음에 품고 있는 우상이 있다면, 이것을 버리지 않는 한 마침내 이것은 우리에게 쓰라린 고통이 될 것이다.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우리 주님은 이기적인 분이 아니셨다. 그분은 한 분 여호와만을 섬기셨다. 그분은 여호와를 섬기지 않는 자들을 떠나가셨으며, 장막 밖에서 그들의 비난과 치욕을 당하셨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죄와 아무 상관이 없으시고, 죄와는 어떤 교제도 나누지 않으신다. 그분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마귀의 하는 일을 쳐부수기 위한 것이지, 마귀를 보호하고 마귀와 동역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부정한 영들이 자신의 신성을 증언하는 것까지도 허락지 않으셨다. 그분은 어두움과는 어떤 교제도 나누실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교적으로 어떤 거짓 된 것과도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천주교에서 행하는 어떤 의식도 우리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옛 속담에 "아무리 긴 수저를 사용한다 해도, 마귀의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단순히 우상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우리 입술에 독이 묻으면, 얼마 가지 않아서 이것은 안으로 침투할 것이다. 우리 마음에서 물리쳐야 할 것은 입에서도 멀리해야 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싶다면, 교회는 모든 불경건한 것들을 끊어 버리고, 하나님을 진실되게 섬기지 못하게 하는 모든 육적인 것들을 제하고 순결함을 유지해야 한다. 


5절.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이 구절에는 예수께서 여호와를 깊이 신뢰하며 기뻐하시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소득에 만족해 하신다. 다른 신들을 좇을 생각은 전혀 없으시다. 그분이 받은 잔은 가득 차고, 그분의 마음도 기쁨으로 충만했다. 십자가 위에서 깊은 슬픔을 당하셨을 때에도, 두 손을 아버지께 향하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사탄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면서 그에게 경배하라고 유혹했지만, 주님은 그에게 엎드려 경배할 생각이 조금도 없으셨다. 

우리도 여호와로 우리의 자랑을 삼아야겠다. 그분은 우리 영혼에 만족함을 주신다. 그분은 우리의 산업과 잔의 소득이 되셔서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신다. 그분은 또한 오는 세상에서 우리의 산업이 되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로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하늘의 기업을 받을 것이다. 우리 앞에는 상이 펼쳐지고 하늘의 빵과 새 포도주가 놓일 것이다. 이것에 만족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슬픔의 잔을 치워야겠다. 우리에게는 샘물처럼 끊이지 않는 사랑의 잔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소작인들은 지주에게서 땅을 빌릴 때에 그 땅을 지키고 경작하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이와 다르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분깃을 지키신다. 우리 주 예수께서도 이 사실에 기뻐하셨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편이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주님을 대적할 때에도 하나님은 주님의 권리를 지키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의 택하신 자들을 보호하시고, 그의 분깃으로 상 주실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모두 기뻐하자. 이 땅의 심판주께서 우리 의로운 자들을 지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6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6절.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예수께서는 순종의 길이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것을 아셨다. 그분은 슬픔을 당하여 이렇게 외치셨다:"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7).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그분은 어느 누구보다도 커다란 슬픔을 당하셨건만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가장 큰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셨다. 어느 누구도 그분처럼 신실하게 섬기지 못했고, 이처럼 큰 상급을 바라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분은 앞으로 누릴 즐거움을 아셨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이 세상에서도 기쁨으로 사셨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피로 사신 "구역"에 만족하시고, 그분의 사랑하시는 자들과 함께 있는 것 외에 다른 기업을 구하지 않으셨다. 

모든 성도들은 이 구절에서 교훈을 받아야 한다. 여기에는 만족과 감사와 즐거움이 나타나 있다. 이렇게 만족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한다면, 이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보다 더 가난하셔서 머리 둘 곳도 없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이 점을 말하면서도 결코 불평하지 않으셨다. 까마귀와 비둘기가 같을 수 없듯이, 만족하지 못하는 영혼이 우리 주님과 같을 수가 없다. 순교자들은 감옥에서도 기뻐했다. 그리넘 씨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했다:"만족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죄 사함을 결코 체험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불만족이 에덴 동산에서 우리 조상들을 넘어지게 한 첫번째 죄라고 생각한다. 감사와 만족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이 악한 영이 권세를 누리는 곳마다 낙원은 없다. 그 악취가 동산에 있는 모든 꽃들을 오염시킬 것이다. 


7절.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우리 주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께 찬송을 돌리셨다. 우리도 주님을 따른다면 "여호와를 송축할지라"고 찬송을 돌릴 것을 결심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을 "기묘자" 또는 "모사"라고 부르는데, 이는 예수께서 자신을 지칭하여 쓰신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부르신 이름이다. 이것을 확인하고 싶으면 다음 성경 구절들을 읽어 보라:요한복음 7:16; 8:28; 12:49, 50; 이사야 11:2, 3. 예수께서는 항상 아버지께 나아가 그분의 지시를 받았으며, 그분의 지시를 받은 후에는 이처럼 훈계하신 아버지를 송축했다. 우리도 겸손하신 그분을 본받아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KJV에는 "심장"이 "신장"으로 번역되었다. 히브리 원어로도 "신장"인데, 히브리 사람들은 신장이 감정과 사랑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한글 개역 성경에 "심장"이라고 번역한 것은 한국인들은 심장이 감정과 사랑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역자 주.) 속사람은 "신장"에서 애정과 감정을 느낀다. 영혼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 영적 지혜가 심장에 축적되고, 조용한 시간이 되면 이 지혜가 나타난다. 우리 구주께서는 많은 밤을 홀로 산에서 지내셨다. 하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면서 그분은 지나간 일을 돌아보고, 앞으로 할 일을 예측하고, 그분의 위치를 늘 생각했을 것이다. 위대한 장수들은 전쟁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리기 오래 전부터 마음속으로 전투를 그려 본다. 이처럼 우리 주께서도 십자가에서 최후의 전투를 하시기 전에 무릎을 꿇고서 전투를 벌이셨다. 우리도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 후에,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지혜로운 자들은 밤에 눈을 감고서 어리석은 자들이 낮에 눈을 뜨고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본다. 하나님으로부터 배우고 씨앗을 받은 자는, 그 씨앗이 영혼의 동산에서 자라 지혜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그가 걸어야 할 길, 우회전 혹은 좌회전을 하도록 알려 주는 이 지혜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밤이란 죄인들이 죄를 짓는 시간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조용한 시간에 하늘에서 들리는 조용한 음성을 듣고, 그들 안에 있는 속사람의 소리를 듣는다. 


8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9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10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11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한때 우리 구세주의 영혼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다. 그래서 우리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는 구절을 보게 된다. 예수께서 죽음을 앞에 두고 간구하실 때에 천사가 나타나 그분께 힘을 주며 도왔다. 천사는 그분이 영광스럽게 부활하심으로 성도들도 부활할 것에 대한 보증이 되실 것이며, 그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에 대해 말해 주었을 것이다. 그때에 우리 주님의 영혼에는 소망의 빛이 비치고, 이 구절에 기록된 대로 그분이 여호와를 계속 바라보며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았기에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분은 그분의 삶을 통한 위대한 계획이 잘못될 수 없다는 것을 아셨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쉬지 않으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자비인가!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이 단순한 믿음을 보이셨다. 이것은 우리가 따를 본이다. 각 성도들은 여호와께서 항상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를 우리의 대장과 호위자로 삼는 것은 각 성도들이 누릴 특권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며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행 2:25).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고난받으시는 아들을 도와주실 것을 믿음의 눈으로 미리 보셨다. 그래서 그분의 백성들을 구속하는 일을 수행하는 데 조금도 요동함이 없으셨다. 그분의 우측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원수들을 칠 수 있다는 것을 보셨고, 그 능력만을 의지하셨다. 


9절.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예수께서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육체가 쉬는 것과 영혼이 음부에 가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은 죽음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렇지 않다면 썩는 것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9, 10절).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셨기에 무덤을 앞에 두고서도 노래를 부르셨다. 영혼이 음부에 내려가는 것이 잠깐이라는 것을 아셨고, 육체가 잠시 동안 무덤에 내려가도 썩지 않을 것을 아셨다.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하며 "내 마음이 기쁘고"라고 노래하며, 구원의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셨다. 아! 시련과 죽음을 앞에 두고서 이처럼 거룩한 믿음의 본을 보여주시다니!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며 기쁨으로 충만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것은 오직 믿음이 있을 때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믿음은 살아 있는 자에게는 기쁨을, 죽은 자에게는 안식을 누리게 한다:"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10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우리 주 예수께서는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소망을 잃지 않으셨다. 그분은 신실하신 아버지께서 아들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셨다. 아버지의 신실하심은 부활절 아침에 증명되었다. 그분은 부활을 믿었고,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3일 만에 영광스럽게 일어나셨다. 그분의 육체가 무덤에 내려갔을지라도 결코 썩지 아니하였다. 영혼과 육체가 모두 "주의 거룩한 자"이신 그분은 죽음의 고통에서 해방되신 것이다. 거룩하신 그분이 이런 것들에 매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 그들은 모두 죽어 썩음을 당할 것이 분명하지만, 결국 부활과 영생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백성들이 모두 부활할 것에 대한 보증이 되었다. 그러므로 죽음을 당한 성도들은 침실로 가듯 무덤으로 가며, 침대에 몸을 누이듯 흙속에 육체를 누이며 쉴 수 있다. 


예수께서 나를 사셨으니 옷을 벗는 것이 두렵지 않다네

이 흙으로 된 육신의 옷을 기쁨으로 벗겠네

주 안에서 죽는 것은 언약의 축복을 누리는 길이라네

예수께서 죽음을 통해 영광으로 인도하시네.


죽음의 블레셋 군사들이 그의 영혼을 덮칠 때에 사울처럼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자들은 말할 수 없이 불행한 자들이다. 그러나 주님을 우편에 모시고 사는 자들은 복된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두려움 없이 영원한 기쁨을 바라보는 것이다. 


11절.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신 분이기에 생명의 길을 먼저 보셨다. 그분은 자신의 육체로 이 길을 먼저 여시고, 구속받은 백성들의 선구자처럼 이 길을 먼저 걸으셨다. 예수께서는 생명의 길을 여신다는 생각으로 기뻐하셨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영광에 들어가시고, 하나님과 늘 함께 거하게 되셨다. 그분과 함께 거하는 곳에는 기쁨이 충만하다. 이 영광을 바라보았기에 그분은 슬픔의 과정을 인내하며 승리하실 수 있었다. 택하신 백성들을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에 그분은 기뻐하며, 피의 바다를 헤쳐나가셨다. 오, 하나님이여! 세상의 기쁨이 모두 사라져 버릴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주의 우편에 거하고자 하나이다.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당신의 사랑을 맛보고자 하나이다. 

트랩 씨는 이 아름다운 구절에 대해 감미로운 글을 썼다. 우리는 이 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얻게 될 하늘의 기업을 맛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여기에 많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질로 말하면, 거기에는 하늘의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 양으로 말하자면, 아무리 마셔도 다하지 않고 질리지 않는 무한한 양이다. 누구보다 강하신 하나님의 우편에서 누리는 즐거움이기에, 어느 누구도 이것을 빼앗을 수 없다. 이 즐거움은 중간 휴식이 없는 즐거움이며, 영원한 즐거움이다. 하늘의 즐거움은 측량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도 높은 즐거움이며, 끝이 없는 즐거움이다." 


주해


머리말. 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의 믹담"이라고 되어 있다. "믹담"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다. 히브리어를 번역하지 않고 "믹담"이라고 그대로 표기한 것을 보아도 그 의미가 애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가 '숨기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했으며, 그 의미는 '비밀' 또는 '신비'일 것이라고 했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이 머리말이 시편 기자나 그의 시대에 있었던 어떤 인물들도 이 시에 포함되어 있는 교리적, 영적 의미를 다 헤아리지 못할 만큼 그 의미가 심오하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단어가 '자르다', '새기다', '쓰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에서 유래했으며, 그래서 이 머리말은 단순히 다윗의 글을 의미한다고 했다. 갈대아 역본이나 70인역에서도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 그래서 갈대아 역본에는 "다윗의 조각"으로, 70인역에는 "다윗에게 바치는 기둥 위의 비문"이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믹담"이 '금'을 의미하는 명사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며, 그래서 이 시를 "순금의 시," 즉 금으로 새길 만큼 탁월한 시라고 이해했다. KJV의 번역가들은 이 견해를 따랐다. 그래서 여백에 "다윗이 기록한 순금의 시"라고 기록해 두었다. 아랍 사람들이 지은 시 중에서 탁월한 시를 순금의 시라고 불렀는데, 이런 시는 금으로 새겼다. 시 16편은 금으로 새겨져서 성전에서 잘 보이는 부분에 걸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윗의 믹담"이란 머리말에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 정확한 의미를 추측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제임스 프레임(James Frame, 1858).


머리말. 어떤 사람들은 "믹담"이란 머리말을 붙인 이유가 이 시에 순금처럼 보배로운 교훈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만큼, 이 시는 그 의미가 심오하다. "믹탐"(mtkm)은 "케템"(mtk)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며, "케템"은 '오빌의 금'을 표현하는 데 쓰인 단어이기 때문이다(시 45:9). 그러나 이 머리말이 붙은 또 다른 다섯 편의 시가 있는데(시 56, 57, 58, 59, 60편), 이들의 주제는 일정하지 않으나 모두 승리에 대한 찬양으로 끝을 맺는다. 70인역에서는 "스텔로그라피아"(Sthlografiva)라는 머리말을 붙였는데 이 해석이 옳은 듯하다(이 단어는 '기둥'을 뜻하는 "스텔레"<sthlh>와 '글'을 뜻하는 "그라페"<grafh>의 합성어이다-역자 주). 이 머리말은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부르거나 기둥에 새길 노래'라는 뜻을 전하려는 듯하다.  이와 또 다른 해석도 있다. "믹담"은 "마스길"처럼 음악 용어인데, 그 진정한 의미를 지금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시의 주제는 분명하다. 이 시의 주제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의로운 자의 만족'이다. -앤드류 보나.


시 16편 전체. 이 시의 10절은 우리 주님에 대한 글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시의 구절들을 모두 겟세마네에 계신 예수께 적용한다는 것은 지나치고 부정확한 적용이다. 어떻게 9절의 내용이 핏방울과 같은 땀을 흘리며 고통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은 6절도 마찬가지다. 5절의 "잔"도 예수께서 고통하며 기도하시던 잔과는 대조적인 것이며, 고통의 잔을 묘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제임스 프레임 씨는 이 시에 대해 "겟세마네의 예수"(Christ in Geth- semane)라는 제목으로 매우 귀중한 글을 썼다고 생각했다. 그는 많은 고대 사람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의 주장을 펼쳤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고대의 탁월한 해석가들, 예를 들어 유세비우스(Eusebius), 제롬(Jerome), 어거스틴(Augustine) 등은 이 시가 메시아의 고난, 죽음과 무덤에 대한 승리, 그리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을 노래하는 글이라고 했다." 이어서 그는 관주에 다음과 같이 그들의 글을 인용했다. 제롬-"이 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며, 그분은 이 시에서 말씀하신다······이것은 우리 왕의 소리이며,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사람의 목소리로 말씀하시지만 그분의 신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이 시는 그분의 고난에 대한 글이다." 어거스틴-"우리의 왕이 육신의 몸을 입고서 이 시에서 말씀하신다. 그분은 고난의 시기에 말씀하셨으나, 승리를 확신하셨다." -C. H. S.


시 16편 전체. 이 시는 앞의 시와는 '사상과 언어'로 연관되어 있고, 뒤의 시와는 주요 단어들로 연결되어 있다. 시리아 역본과 아랍 역본에는 "교회를 선택하심,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시"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Christopher Wordsworth, D.D., 1868). 


1절.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곤란에서 구원하실 것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다. 마지막까지, 그리고 최후의 시간에도 그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울타리가 되어 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기도하는 것이다. 현재에도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한 것처럼, 마지막 시간에도 그분의 보호가 있어야 안전히 거할 수 있다는 것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는 또한 어려운 때나 부유한 때나 하나님의 보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자신의 약함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늘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시작할 때도, 그리고 성장하면서도 늘 조심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지막까지 인내한다. 다윗은 이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심으로 어떤 환경에서든지 그의 영혼과 몸이 보존되기를 바랐다. -리처드 그리넘(Richard Greenham, 1531-1591). 


1절.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시편 기자는 그가 왜 하나님께 기도하는지 그 이유를 기록하면서, 오직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그분을 진정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선포한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롬 10:14).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구세주가 되심을 확신하고 있다. 그렇다면, 믿음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을 부를 수 없으며, 이렇게 하나님을 부른다고 해도 이는 기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앵무새처럼 지껄이는 말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은 정말 합당히 취해야 할 방법은 무시하고,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어떤 사람들은 친구를 의지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돈을 주고서 십자가를 피한다. 어떤 사람들은 권세로 자신의 울타리를 삼거나  쾌락을 즐기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적 힘을 과시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재물을 의지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그 구원을 친구들이나 권세나 쾌락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들은 이것을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고난의 소나기를 맞을 때에 전능하신 분의 보호 아래 피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피할 다른 것을 찾든지 마음을 정해야 한다. 왜 그런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 91:1). 누구든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그렇지 않다면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선행을 의지하고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구한다. 이것은 우리도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가면 또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친다. -리처드 그리넘. 


2절.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KJV에는 이 구절이 "오, 내 영혼이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니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이 고백을 처음 들었을 때 여러분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여러분이 무슨 말을 했을지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만약 "주는 나의 주시니이다"라고 말한다면,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으니 나를 떠나시오"라고 속으로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해 본 적은 없습니까? "좀 생각해 볼게요. 하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되어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다 잊어버렸어요. 아마 내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였겠지요. 세상에서 무엇인가 실망스런 일을 겪었겠지요. 또는 무엇인가 강렬한 인상을 받고서 조급하게 하나님께 '주는 나의 주시니이다'라고 했겠지요. 어찌 되었든 간에 이전에 했던 말을 지금도 계속할 수는 없답니다." 여러분은 혹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주는 나의 주시니이다"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진지한 마음도 없이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가볍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나는 이런 고백을 할 때에는 정말 엄숙한 마음과 즐거운 마음으로 하며, 겸손하게 나 자신을 주께 드린답니다. 나는 최근에 구원을 받고서 감사한 마음으로 나 자신을 그분께 드리며 그분의 발 아래 엎드려 이렇게 외쳤답니다. "오,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당신의 종입니다. 당신이 내 결박을 푸시고 자유케 하셨으니,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나는 앞으로도 이런 고백을 늘 새롭게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전에 체험했던 하나님의 평안과 즐거움을 회복하기를 소망합니다. -사무엘 래빙턴(Samuel Lavington)의 설교, 1810. 


2절. "주는 나의 주시오니." 그는 주를 여호와로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를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면서 이렇게 고백했던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에게 적합한 일이다. -로버트 롤록(Robert Rollock, 1600). 


2, 3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KJV에는 이 구절이 "나의 선함은 주를 위한 것이 아니며 땅에 있는 성도들과 존귀한 자들을 위한 것이니"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이 구절은 메시아께서 사람을 위해 하신 일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일은 당신의 신성에 무엇을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일은 아직도 땅에 살고 있는 성도들과 존귀한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존귀한 자들은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입니다." 이들은 메시아의 선하심뿐만 아니라 그분의 구원의 즐거움도 맛본다. 이들은 어쩌면 천사들을 지칭한 것일 수도 있다. 그들도 메시아의 성육신,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심이 있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살펴보기를 원한다. 죄인을 회개시키는 십자가의 승리는 천사들을 거느리신 하나님께 즐거움을 준다. -아담 클라크. 


2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KJV에는 이 구절이 "나의 선함은 주를 위한 것이 아니며"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오, 하나님, 주께서 내게 베푸신 선에 대해 내가 무엇으로 주께 드리리이까? 무엇으로 주께 갚으리이까? 아! 내가 주님께 아무것도 드릴 수 없는 까닭은, 주님은 가장 선하시고 온전하신 분이기에 나의 부족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행을 한다 한들 주님께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이며, 내 악함으로도 주님을 해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가장 부유한 분이시며, 나는 가장 가난한 자라는 것을 고백하나이다. 주께서는 내게서 아무런 도움도 필요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면서 그들을 유익하게 하는 일을 다하겠나이다. 또한 그들이 가진 것에서 내게 유익한 것으로 도움을 받겠나이다. 내가 받은 것은 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라고 빌려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도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백성들과 연합을 이루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서로 나누면서 성도간의 교제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분을 예배한다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의 교회에 참여해야 한다. 교회에서 성도들의 교제는 꼭 필요한 일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나타내 보여주시는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기뻐하고, 또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은혜를 서로 나누어야 한다. -리처드 그리넘. 


2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KJV에는 이 구절이 "나의 선함은 주를 위한 것이 아니며"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아!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선하신지! 그분은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선하게 대할 것을 요구하신다. 우리의 양심은 아무 볏단도 주지 않고 벽돌을 구우라고 했던 바로의 감독들처럼 우리 위에 군림하여 우리로 선행을 하도록 강요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을 넓혀 주지는 않으며, 선행을 하지 않는다고 마음에 상처를 준다. 마치 100데나리온을 빌려주고서 그 빚을 갚지 못하자 멱살을 잡고 목을 졸라 대면서 "내 빚을 갚으라"고 외치면서도, 그 빚을 갚을 힘은 주지 않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대할 권리가 있으시다. 그분은 우리를 도울 아무런 의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 순종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에게는 선행을 할 능력이 있었으나, 우리의 잘못으로 그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에게서 이 선행을 요구하는 것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있는 약점은 우리에게서 기인한 것이며, 우리는 스스로 가련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자비로운 손을 내미시며 당신과 함께 일하고자 하실 때에 감사하라. 일이 잘못 된다고 해도 그분이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다. 일이 잘 되어도 그분이 무슨 이득을 얻는 것도 아니다(욥 22:2; 35:6-8). 이익을 보는 자는 바로 당신이다. 이 일로 얻게 되는 아름다운 것은 모두 당신의 것이다. -조셉 사이먼즈(Joseph Symonds, 1639). 


2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KJV에는 이 구절이 "나의 선함은 주를 위한 것이 아니며"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일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없어도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으시나, 우리는 주님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윌리엄 세커. 


2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KJV에는 이 구절이 "나의 선함은 주를 위한 것이 아니며"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우리가 그분을 더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온전하신 분이시며 죄가 없으시다. 그분은 온전히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사람들의 의로 그분이 덕을 보는 것은 아니다. 오, 여호와여, 나의 선함은 주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는 내 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행 17:24, 25).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분이 아니시다. -리처드 스톡(1641). 


2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KJV에는 이 구절이 "나의 선함은 주를 위한 것이 아니며"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머리가 되시듯,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가 되신다(고전 11:3). 또한 사람이 그리스도께 순종하듯,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순종하신다. 그분이 하나님보다 신성이 열등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그분은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오, 내 영혼이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니이다. 나의 선함은 주를 위한 것이 아니며, 땅에 있는 성도들과 존귀한 자들을 위한 것이니"(2, 3절, KJV 직역). 이 말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땅에 있는 성도들을 가리키며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린다. "나는 당신의 영광에 아무것도 더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했던 그 모든 생각, 그리고 받았던 고난은 모두 땅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스티븐 차녹.


2, 3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KJV에는 이 구절이 "나의 선함은 주를 위한 것이 아니며 땅에 있는 성도들과 존귀한 자들을 위한 것이니"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하나님의 선하심을 받았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그분의 따스한 가슴에서 나온 우리 영혼이 무자비하고 완악한 마음을 가졌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아버지를 닮지 않은 키케로(Cicero)의 아들처럼, 아버지를 닮지 않은 자녀란 이상한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하늘 아버지의 성품을 닮는다. 하늘은 땅에 햇빛을 비추고 비를 내려서 열매를 맺게 한다. 그러나 땅은 태양이 더 빛을 발하도록 무엇인가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그의 선함이 하나님께 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미친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가련한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할 자비를 사람을 통해 받도록 조치를 취하셨다. 진실한 방문객은 친구가 그를 환대하지 않았다 해도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친구의 하인들에게 무엇인가 선물을 주는 것이다. -윌리엄 거놀. 


3절.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KJV에는 이 구절이 "땅에 있는 성도들과 존귀한 자들을 위한 것이니 그들은 내 즐거움이니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형제들이여, 성도가 된다는 것은 가장 존귀한 자가 된다는 것임을 알라. 그리스도도 성도들을 "존귀한 자들"로 보셨다. 그들이 성도답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사 43:4). 이런 성도들이 외양으로 특출한 것이 없다고 해서 사람들이 보잘것없는 존재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상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성도를 인정하면서도 한편 "그는 거룩한 사람이지만, 나약한 존재에 불과해"라고 말하며 멸시한다. 성도들에게 부족하고 연약한 점이 있다고 해서 당신이 그를 깔보고 다른 세상 사람들이 더 존귀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보혈을 흘려 사시고, 구속하지 않으셨는가? -토머스 굿윈. 


3절.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KJV에는 이 구절이 "땅에 있는 성도들과 존귀한 자들을 위한 것이니"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사랑을 나타내듯이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나타낸다.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을 섬기고 실제적으로 유익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후안 데 발데스(Juan de Valdes, 1550). 


3절. "땅에 있는 성도." 교황제를 신봉하는 자들은 오직 하늘에 있는 성도들만 용납할 뿐, 땅에 있는 자들은 용납하지 못한다. 이것은 그들이 어두움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성경이나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여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성경, 특히 서신서를 조금만 알았더라도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입고 성령으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이 각 서신서마다 언급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그들을 "존귀한 자"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들은 부자나 학식이 많은 자나 권세 있는 자가 존귀한 자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함을 받은 성도들이 존귀한 자라고 가르친다. -리처드 그리넘.


3절.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KJV에는 이 구절이 "땅에 있는 성도들과 존귀한 자들을 위한 것이니"이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고대 드라베스의 왕 인고(Ingo)는 잔치를 베풀어서 그의 신하들을 아랫자리에 앉게 하고 어느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불러서 왕과 함께 앉아서 먹고 마시게 했다. 이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다. 그는 크리스천들에 대해 말하면서 이들은 결코 가난한 자들이 아니며, 크리스천의 신앙을 갖지 않은 다른 누구보다도 왕과 함께 먹고 마실 자격이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모두 지옥으로 떨어진다 해도 이 성도들은 천국에서 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며, 그의 위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하늘의 별들이 더러운 웅덩이에 비치기도 하지만, 그 별들은 여전히 하늘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크리스천들이 때로는 가난하고 비참하며 멸시받는 위치에 있는 경우가 있지만, 그들은 하늘에 속한 자들이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찰스 브래드버리(Cabinet of Jewels, 1785). 


3절.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KJV에는 이 구절이 "땅에 있는 성도들과 존귀한 자들을 위한 것이니 그들은 내 즐거움이니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우리는 경건한 자들을 당연히 사랑해야 할 만큼 사랑하지 못하고, 또한 사랑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들을 먼저 사랑하라 하셨다. 그 명령을 따라 우리 자신보다도 그들을 더 사랑한다면 이는 옳은 일이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 역사한다면, 우리는 성도들을 사랑하게 된다. 

내가 병든 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양들이 나와 함께하지 않아도 문제삼지 않고 한쪽 구석에 가만히 있겠다. 그러나 양 떼를 버리고 개나 염소 떼에게 들어가지는 않겠다. 내 안에는 아직도 좋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내가 경건한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는 내가 나의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어떤 경우에도 나를 사랑하듯이, 또한 이 모든 일에도 그들을 사랑한다. 사람이란 사회적인 존재이며, 다른 사람들과 무리를 지어 살아간다. 우리가 경건한 자들과 한때 어울리지 못한다면 이는 연약함의 문제이지 악의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앞에 둔 그리스도를 떠나갔지만, 그들은 가룟 유다처럼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의 원수들과 한 패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데마가 일시적으로 이 세상을 사랑했지만 회개했다고 했다(나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바울을 떠나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나은 사람도 역시 바울을 떠났었다.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면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바울과 함께 살든지, 아니면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먼저 염소의 무리를 좋아해서는 안 된다. 다음에, 양의 무리를 이 세상에서 존귀한 자로 알고 우리의 즐거움을 그들에게 두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성도를 성도로 사랑하는 것이 믿음의 증거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성을 다스려야 한다. -리처드 캐플(1586-1656).


4절. "피의 전제." 이방인들은 종종 동물이나 사람을 제물로 드렸다. 이들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제물로 드린 후에, 그들은 제물의 피를 마셨다. -매튜 풀. 


4절. "피의 전제." 이 표현이 문자 그대로 "피"를 말하고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마시는 술에 피를 섞은 것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그들이 드리는 제사에 공포감을 더하기 위해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조지 노이스(George R. Noyes, 1846). 


4절.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혀에서 구르는 죄는 부드럽고 길들이기가 쉬우며, 목은 짧고 미끄러워서 우리가 느끼지도 못하는 동안 입에서 배로 넘어간다. 우리가 마음으로 품는 죄악은 곧 우리를 부정하게 오염시킨다. -토머스 풀러. 


5절.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만일 여호와가 당신의 소득이라면, 그분의 전능하심, 광대하심, 그리고 그분께 속한 것들이 모두 당신의 소득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전능하고 광대하다고는 말하지 말라. 존재의 변화를 체험하는 것과 특혜를 받는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어느 친구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소중한 보물을 주었다고 하자. 당신의 성품이 변하지 않았어도 이것은 당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주신 것은 모두 당신의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성품이 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당신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당신보다 훨씬 더 일을 잘한다고 해도, 이것들은 여전히 당신의 것이다······여호와는 우리의 "소득"이시다. 이것은 우리가 하늘과 땅을 모두 소유한 것보다 더욱 귀한 것이다. 이 땅을 드넓은 하늘과 비교해 보면 마치 한 점과 같고, 또 하늘을 광대하신 하나님과 비교해 보면 역시 한 점과도 같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득은 얼마나 큰 것인지! 어느 누구도 이 소득을 빼앗아 갈 자가 없고, 우리를 쫓아낼 자도 없다. 우리의 소득은 하늘과 땅을 채우고, 높은 하늘보다 높고 땅보다 깊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왕국을 자랑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왕국과 영광을 합한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우리의 소득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가 제공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셨다. -데이비드 클락슨. 


5절.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 이 말은 일용할 양식의 공급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레위족의 기업을 말하는 것이기도 한다.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그들이 그 형제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은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니라"(신 18:1, 2). -포셋과 스미스(A. R. Fausset and B. M. Smith, Critical and Explanatory Pocket Bible, 1867). 


5, 6절.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이런 사람은 복이 있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는 민족은 복이 있다. 한 민족, 한 가정, 한 개인에게 임할 수 있는 자비 중에 하나님이 그들 중에 거하신다는 것보다 큰 자비는 없다. 우리가 이 자비를 제대로 평가한다면 이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귀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것을 주신 분의 뜻을 헤아린다면, 이것이 그분이 베푸실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보면 그분이 우리에게 선하신 뜻을 품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사람은 그가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도 많은 유산을 물려줄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자기 자신을 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에게 많은 것을 주신다. 태양으로 악인과 선인에게 모두 비추게 하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모두 내리신다. 그러나 넘치는 사랑이 없다면 자신을 사람의 친구나 아버지나 남편으로 주신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를 거부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시는 가장 큰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오용한다는 것은 가장 악한 행동이다. 암몬 왕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다윗은 암몬 왕에게 호의와 친절을 베풀었는데 그가 이 호의를 저버리자 다윗은 진노했다. 사람이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을 배척하면, 하나님도 진노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중에서 하나님 자신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다윗이 하나님을 어찌 생각하는지 물어 보라. 그는 하나님을 잘 알았고, 하나님의 전에서 거했고, 하나님을 결코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분을 떠나 그가 무엇을 찾았는지 물어 보라. 다윗은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글로 기록해 두었다:"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다윗이 무엇을 받았기에 이토록 자랑스러워하는가? 다른 사람들도 다윗 왕처럼 왕국을 갖지 않았던가? 그러나 다윗의 기업은 왕국이 아니다. 그의 왕관은 지극히 보잘것없는 것에 불과하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제임스 제인웨이. 


5, 6절. 하나님의 자비뿐만 아니라 이 자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보라. 구세주가 나타나지 않은 자비에는 향기가 없다. -랠프 베닝(Ralph Venning, 1620-1673). 


6절.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쓴 약초도 기가 막히게 맛있는 고기와 함께 먹는다면 잘 넘어간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때리는 매는 꿀과도 같다. 이것은 돌을 변하여 빵이 되게 하고,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며, 고난의 골짜기로 소망의 문이 되게 하며,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들도 마치 없는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사막으로 우리 주님의 동산처럼 만들고, 우리가 십자가 위에 있을 때에도 그리스도와 함께 동산에 있는 것처럼 만든다. 그러할진대 누가 고통 때문에 자신의 의무를 포기하겠는가? 자신의 구원을 얻기 위해 옳지 않은 방법을 버리고, 이처럼 아름다운 상이 따르는 진리의 길을 걷지 않겠는가? -티모시 크루소.


6절. "줄." 이 구절은 제비 뽑아 땅을 배정하는 것과 이것을 줄로 측량하는 것을 언급하는 말일 것이다. 다윗은 그가 통치하는 영토와 그가 소유한 재물이 운명적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주권자 하나님의 예정에 만족했다. -C. H. S. 


7절.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성령은 훈계의 영이시다. 그분은 내가 무엇을 행하고 어떻게 걸어야 할 것인가를 힘있게 교훈하시고 효과적으로 가르치신다. 그분은 내가 걸어야 할 길을 한 걸음씩 인도하시고, 강한 손으로 내 마음에 교훈하셔서 나로 죄를 짓지 않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게 하시며 이 백성의 길로 행치 말 것을 내게 경성시켜 가라사대"(사 8:11). 성령은 훈계의 신이며 능력의 신이시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사 11:2). 성령께서 훈계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능력으로 우리 속사람을 강건케 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도 이렇게 도우셨다. 예를 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 가운데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했을 때에 성령께서 그분을 도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예수께서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토머스 굿윈. 


7절. "내 심장." (KJV에는 "심장"이 "신장"이라고 번역되었다. 히브리 원어의 뜻도 신장이다-역자 주.) 우리가 마음으로 깊은 생각을 할 때, 특히 슬픔과 기쁨과 두려움이 있을 때에는 신장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장은 우리 몸 안에 있고, 기름 가운데 숨겨져 있어서 성경에서는 우리의 영혼과 애정이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중심이 되는 것으로 기록했다. -존 파크허스트. 


7절.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KJV에는 "심장"이 "신장"이라고 번역되었다. 히브리 원어의 뜻도 신장이다-역자 주.) 이 구절은 하나님은 항상 그와 함께 계시고, 밤이 되면 꿈 속에서도 깨어 있을 때에도 교훈하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교훈이 그에게 확신을 주고 그를 인도하여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머지(Z. Mudge, 1744). 


7절.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KJV에는 "심장"이 "신장"이라고 번역되었다. 히브리 원어의 뜻도 신장이다-역자 주.) "베개는 가장 훌륭한 상담자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면, 이 말은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조용하고 적막감이 흐를 때, 우리의 욕정에 흔들리지 않고 세상의 갈등에도 시달리지 않는 밤에,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고 앞으로 걸어야 할 길에 대해서도 교훈을 받을 수 있다. 다윗은 특별히 밤에 기쁨을 얻고 유익함을 얻은 듯하다. 때로는 침대에 누워서 하나님에 대하여 묵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가 여호와의 선하심을 묵상하고 그분이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생각할 때면, 밤중에라도 일어나서 기도했을 것이다. 베개가 우리에게 좋은 상담자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다윗처럼 밤마다 우리에게 진정한 교훈을 주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인정해야겠다. -바르통 부시에.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다윗은 기분이 내킬 때뿐만 아니라 "항상" 여호와를 앞에 모셨다. 그는 여호와를 바라보았다. 히브리 원어로는 "나는 여호와를 중단 없이 내 앞에 모셨다"라는 뜻이다. 여호와를 모신 것이 수시로 변하는 감정이나 욕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항상 모셨다는 뜻이다. 어떤 장소에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와 함께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무엇을 즐기든지 그는 중단 없이 그의 앞에 여호와를 모셨다. 이것이 그를 세웠고, 또한 이것이 각 성도들을 거룩하게 세울 것이다. -토머스 브룩스.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히브리말로는 여호와를 '중단 없이' 모셨다는 말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 구절을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행 2:25)라고 했다. 나는 믿음의 눈으로 온전히 그분만을 바라보았으며, 다른 것을 보지 않았다. 한 곳만을 쳐다보는 독수리가 태양을 바라보듯, 나는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수시로 변하는 감정이나 욕정과 관계 없이 "내가 여호와를 중단 없이 내 앞에 모셨다." 이것은 성령께서 가르치신 대로 밤마다 그의 심장이 그를 교훈한 것을 따른 것이다. -존 트랩.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해시계는 그것이 금상자 안에 들어 있든, 은상자 안에 들어 있든, 또는 나무상자 안에 있든 간에 항상 북극성을 바라보며 그 성질이 변하지 않는다. 이처럼 신실한 성도는 부자이든 가난하든,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있든 낮은 지위에 있든, 그의 믿음과 소망을 그리스도에게 두고 마음을 그분께 고정시키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그분을 따르는 중에 불과 물을 통과하든, 전쟁을 경험하든 평화를 경험하든, 친구를 만나든 원수를 만나든, 배고픔과 추위, 수천 가지 위험, 사람들의 질투, 악의와 미움, 헐뜯는 말, 경멸, 마귀의 시험,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잔혹한 죽음을 당한다 해도 결코 그리스도에게서 눈을 돌리지 말고, 믿음과 소망과 그분에 대한 신뢰를 잃어서는 안 된다. -로버트 코드레이.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하나님을 자주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은 그분을 소망하게 된다.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사 26:8). 이후에 어떤 구절이 따르는지 주의해 보라:"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은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사 26:9). 사랑은 영혼으로 묵상하게 하고, 묵상은 기도로 발전한다. 묵상은 순도 높은 기도이다. 묵상은 기도의 광석과도 같아서 곧 녹아 거룩한 소망을 품게 한다. 짙은 구름은 곧 비를 내리듯이, 묵상하는 영혼은 깊이 기도하게 된다. -윌리엄 거놀.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믿음의 눈으로 항상 하나님을 보는 자는 어떤 고난을 만나도 요동치 아니한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거룩하게 사는 자는 선행을 하는 중에도 요동치 아니한다. 그분이 내 우편에 계신다는 생각을 하면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된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에 대해 짧게 기록하는 중에도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사실을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기록했다(창 5:22, 24).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않았다. 성경은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세상에서 취하여 부르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고 했다. -조셉 캐릴. 


8절.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우리 자신의 힘만 의지한다면 우리는 결코 설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의 능력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어느 때고 승리할 수 있다. 우리가 심각하게 공격을 받을 때면 그분은 항상 우리 우편에 서서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로 넘어지지 않게 하신다. 진실하게 시작하신 그분은 기쁨으로 이 일을 계속하실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아무리 연약하다 할지라도 이곳에 심겨진 진실된 은혜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완악한 마음이 부드럽게 되지 않거나, 이 마음에 은혜가 깊이 뿌리내리지 않는 데서 타락이 시작되는 것이다. -존 볼. 


8절.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사람들이 누군가를 보호하고 지키려면 그들의 우편에서 지키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이 구절은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어린아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린아이는 위험한 일이 닥치면 아버지의 팔이나 손 아래로 자신을 숨긴다. 하나님의 사람도 이와 같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을 둘러싸며, 현재 당하는 위험이나 이제 앞으로 닥칠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한다. -리처드 그리넘.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기둥은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있다. 그러나 당신이 앉는 자리를 바꾸고 또 걸어다니기 때문에 기둥이 때로는 당신의 우편에 있기도 하고 좌편에 있기도 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때로는 당신에게 호의를 베풀고 축복하시며, 때로는 진노하고 징계하시는 것은, 당신이 선을 행하다가도 악을 행하며, 순종과 겸손을 보이다가도 교만과 오만으로 돌아서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변치 않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다. 그분은 변함이 없으시고 영원토록 동일한 분이시다. 당신이 그분께 순종하여 덕스럽고 경건한 삶을 산다면, 그분은 강한 바위처럼 당신을 보호하시고, 당신은 그 위에 안전한 산성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당신께 강한 기둥이 되시고, 당신이 그분을 의지하면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영원히 당신의 우편에 서서 당신의 몸과 영혼을 지키시고 당신으로 넘어지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덕과 이별의 악수를 나누고 하나님의 길을 버린다면,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며 타락한 길을 걷는다면, 당신이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고 모든 죄와 불의로 당신을 스스로 더럽힌다면, 여호와께서는 진노 중에 당신께 나타나실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분의 정의로운 심판에서 당신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로버트 코드레이. 


9절. "내 마음이 기쁘고."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복음을 듣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며, 노래하며 성찬식에 참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의 기쁨이 없이 이 일을 한다면, 곧 중단되지 않겠는가? 그들은 곧 지루함을 느끼고서 다른 교리를 찾아 떠나지 않겠는가?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이전에 즐기던 기쁨을 버리고 이 모든 일에 새로운 기쁨을 갖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곧 타락하기 마련이다. -리처드 그리넘. 


9절.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그는 기쁨을 속으로 감추고 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감각적인 기쁨도 밖으로 표현한다. 귀로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우리의 눈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맛있고 희귀한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기쁨을 표현한다. 우리 영혼의 구조는 이보다 더욱 복잡하다. 하나님은 이 복잡한 영혼을 모든 면에 만족케 하신다. 하나님의 빛을 받아 우리 영혼은 새롭게 되고, 그분의 선하심과 사랑으로 우리의 의지도 새 힘을 얻는다. -티모시 로저스. 


9절.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마음이 소망하는 대로 모든 곤경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나는 기쁨으로 충만하다. "하나님은 이처럼 위대한 영광을 받을 자격도 없고 감사하지도 않는 나를 용서하신다. 내 생애에서 지금 이처럼 어두운 구덩이에 있는 때보다 더욱 기쁜 날은 없었다"(이 말은 어느 순교자의 말이다). 악인들은 외모로 자랑한다(고후 5:12). 그들의 즐거움은 천박한 것이고, 기쁨은 하찮은 것이어서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맛만 다시게 할 뿐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마음과 육신, 그의 영과 혼과 몸이(살전 5:23) 모두 즐거워했다. -존 트랩. 


9절.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침실에서 입는 옷을 전당잡았으면 밤이 되기 전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자비로운 법을 주셨다:"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출 22:26, 27). 소망이란 성도들이 무덤에서 잠을 자기 위해 몸을 누일 때에 그 몸을 덮는 의복과 같은 것이다. 다윗은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라고 했다. 아! 성도들이여! 인생의 해가 지기 전에 소망의 옷을 회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슬픔으로 잠들게 되리라. 인생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는 무덤에 슬픔으로 내려간다. -윌리엄 거놀. 


9절.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말씀에 근거한 이 소망은 영혼에 안식을 준다. 이것은 영혼의 닻과 같이 견고하게 붙들어 준다. 이 닻은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말씀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약속은 우리의 믿음을 지켜 주고, 이 믿음은 우리를 붙들어 준다. 다윗처럼 말씀에 소망을 두었던 자들은 이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시 119:81). 각 성도는 영적인 일이든 이 세상의 일이든 영원한 일이든 간에 그의 모든 일과 관심사를 전부 말씀에 의지한다. 여호와께서 말씀을 통해 내게 알려 주신 일들이 어느 때인가 일어날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살겠다. -티모시 크루소. 


10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이 구절의 제목을 '죽은 성도의 보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성도들을 내버려 두지 않고, 무덤에서 썩지 않게 보존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조지 휴즈(George Hughes, 1642). 


10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많은 개혁가들이 우리 주님의 영혼이 실제로 음부로 내려갔다고 말한다.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보증이 되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이라고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죽음과 지옥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이 생각에 대해 청교도들이 반론을 잘 펼쳤다고 생각한다. 코르벳(Corbet)에 의하면 청교도들은 교회가 세속화되는 것을 탄식했는데, 그는 청교도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은 말한다네

그리스도는 결코 지옥에 내려가신 것이 아니라

단지 무덤까지만 가셨다고.

-C. H. S.(리처드 코르벳의 시에서 인용, 1632).


10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영으로서 음부에 내려가셨다. 우리의 죄로 영원히 겪어야 할 지옥의 고통과 슬픔을 겪으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보증이 되셨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진노의 바다로 자신을 던지신 것이며, 우리가 지옥에서 영원히 겪었어야 할 극한 고통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형인 다윗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지옥으로 가실 것을 명확하게 말씀하신 것이다(시 86:13; 116:3; 69:1-3). 또한 이사야도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사 53:10)이라고 했다. 다윗이 그리스도에 대해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 것이다(참조. 시 16편; 행 2장). 이처럼 그리스도는 살아 계셨을 때 지옥으로 가셨으며, 죽은 후에 가신 것은 아니다. 그의 영혼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할 때(마 26:38), 그리고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부르짖을 때 지옥으로 내려가신 것이다. -니콜라스 바이필드(Nicholas Byfield, Exposition of the Creed, 1676). 


10절. "음부에." 구약에서는 "스올"이며 신약에서는 "하데스"라고 하는 음부는 죽음 후에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이 거하는 보이지 않는 세상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영혼도 이곳으로 가셨으며, 거기 거하시지 않고 제3일에 육체로 다시 돌아오셨다. "음부"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창 42:38; 사 38:18). -존 길. 


10절. "주의 거룩한 자." 하나님은 거룩한 영혼을 죽음의 상태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며, 성도들의 육체를 무덤에 썩게 버려 두지 않으신다. 이것을 의심하는 자가 확신을 갖기 원한다면, 이 구절에서 "주의 거룩한 자"에 강조를 두고 읽기를 바란다. "주의 거룩한 자"에게는 죽음 후에도 이런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죽음과 무덤을 이기는 자들은 거룩한 자라는 것을 이 구절은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 거룩함이 사람이 죽어 무덤에 묻힌 후에 사망에 내버려 둠을 당하지 않고 무덤에서 썩지 않게 한다. -조지 휴즈. 


10절.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약속은 그분을 썩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썩음은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며, 그분을 이길 능력도 없다. -조셉 캐릴. 


10절.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당신은 나를 죽음의 희생물로 삼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이 나를 다스려 내 몸을 분해시키고 먼지로 돌아가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해케트(Hackett).


11절.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이 구절에서 네 가지를 관찰할 수 있다. (1) 인도자-주, (2) 여행자-나, (3) 길-생명의 길, (4) 최종 결론-생명. 이어서 나오는 구절은 모두 이 생명에 대한 묘사일 뿐이다. 

이 구절은 묵상하기에 적합한 구절이다. 위에 있는 네 가지 요소는 모두 단수로 되어 있다. 인도자도 하나이고, 여행자도 하나이며, 길도 한 길이고, 생명도 하나밖에 없다. 이제 한 가지씩 살펴보자. 

(1) 인도자-여호와. 인도자가 여호와라는 것은 1절에 나타나 있다. 그분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세상의 모든 무릎이 그분의 이름 앞에 꿇어 경배할 것이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시다. 오, 하나님! 영광을 받으소서! 그분은 거룩하시고, 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온 세계를 주장하시니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실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고자 하신다. 다윗은 그분이 얼마나 열심히 우리를 인도하실 것인가를 말한다. 그분은 우리보다 앞서가시며, 손수 우리의 길을 인도하신다. 그분을 따르기만 하면 잘못된 길을 걸을 수가 없다. 그분을 따르지 않는 자는 낙오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분을 따를 의지가 있고 그것을 소망하며 따르지만, 가는 길이 멀어 지치고 넘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주의깊게 살피지 않아서 잠깐 곁길로 간다면, 그래도 낙오될 것인가? 두려워 말라. 그분은 내 우편에 계셔서 나로 넘어지지 않게 하신다(8절). 이것은 진정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자주 지치고 넘어지는데, 우리를 하루만 인도하셔도 그분이 지치시지 않겠는가? 그분이 우리를 용납하시고 끝까지 인도하실까? 그렇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렇지 않다면, 이 구절은 거짓말이 될 것이다. 이 모든 내용이 8절에 포함되어 있다. 그분은 오직 한 분이시기에, 그분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우리와 함께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아삽은 이렇게 고백했다:"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 73:25). 이처럼 선하신 인도자를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그분은 첫째, 거룩하시고, 둘째, 능하시며, 셋째, 기꺼이 도우려 하시고, 넷째, 부지런하시며, 다섯째, 변함이 없으시다. 오, 내 영혼아! 그분을 따르라. 그리하면 그분이 너를 끝까지 따르도록 도우시고 거룩하게 하시리라.

(2) 여행자-나. 인도자를 원하는 여행자는 '길을 잃은 자'이다. 그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살펴보면 확실해진다:"내게 보이시리니." 나는 누구인가? 나는 우리 조상들처럼 인생의 나그네이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를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했다. 우리는 조국을 떠나 여행하는 자와 같다. 우리가 여행하면서 만나는 자들에게 우리는 이방인이다. 인생길에서 우리가 소유한 것은 진정 우리의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우리의 친구들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지 오래 되어서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아직도 나그네의 신분으로 여행을 하는 중이다. 우리는 본향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방랑자와도 같다. 우리가 스스로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올바로 가고 있는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게"라고 하면서, 다윗은 단수를 사용했다. 인도자가 한 분이었던 것처럼, 여행자도 한 사람이다. 우연처럼 보이는 표현이지만, 여기에는 여행자의 신뢰가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인도해 주실 것을 기도할 수 있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만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지를 확신할 수 있다. "내게 보이시리니"라는 표현에서 길을 잃은 자도 '나' 한 사람이며, 주께서 인도하는 '길'을 걸을 자도 '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주를 따르는 것도 나 혼자서 하는 일이며, 구원받는 것도 나 개인의 문제이다. 내가 걸어야 하는 길도 '한 길'이다. 이 길은 고속도로가 아니며, 하나님의 호의를 따라 인내하며 걸어가는 길이다. 이 길은 여러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아니다. 많은 군대가 가는 길도 아니다. 한 사람이 걸을 수 있는 작은 오솔길과도 같다. 이 길은 외로운 길이며, 혼자 걷는 길이다. 우리의 인도자 되시는 주님도 혼자 걸으셨다. 그러나 혼자 있다는 것은 감미로운 일이다. 하나님은 혼자 있는 사람에게 친근히 대하신다. 그리스도도 군대와 함께 떠들썩하게 오지 않고 혼자 오셨고, 그분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군중들을 피하셨다. 그분은 이런 군중들에게 비유로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분을 찾고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명백한 말로 가르치셨다. 지금도 그분은 주님을 홀로 찾는 영혼들에게 이와 같이 하신다. 그러므로 다윗은 "내게 보이시리니"라고 단수로 표현했다. 주님께서 나를 가르치시고 이 길을 보이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겸손하고 온유한 자를 하나님은 가르치신다.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 25:9). 당신이 겸손할 수 있다면 당신의 인도자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도 이런 사람을 축복하셨다:"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5). 주님은 이런 자들을 부르시고 가르치실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겸손해야 한다. 천국의 모습은 교회 건물과도 같아 지붕이 높다. 그러나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고 낮다. 거기에 들어가 하나님을 뵙고자 한다면 먼저 허리를 굽혀야 한다. 인생의 여정에서 분기점을 만날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아 겸손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라. 이것으로 당신이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알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또한 당신에게 길을 보이실 것이다. "주께서······내게 보이시리니"라고 했다. 

(3) 길-생명의 길. 이제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실 것인가?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여러 가지 길을 걷지만, 이 길은 모두 파멸로 인도하는 길이다. 하나님도 말씀 안에서 여러 가지 길로 인도하시며, 이 길들은 모두 구원에 이르게 해 준다. 우리가 걷는 길은 그분이 인도하는 길과 정반대의 길이다. 우리의 길을 버리고 그분의 길을 걷자. 우리의 길은 피비린내가 나고 굽었으며 지옥으로 향하지만, 그분의 길은 오염되지 않았고 바른 길이며 천국으로 인도해 준다. 우리는 길을 잃지는 않았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길을 속히 버리고 그분의 길을 따르자. 말씀 안에 그분의 길들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 길을 보여주실 것이다. 이 길은 '계명의 길'(시 119:35)이고, '평강의 길'(잠 3:17)이며, '정직한 길'(잠 4:11)이고, '의의 길'(시 23:3)이며, '공의의 길'(잠 17:23)이고, 그리고 이와 같은 길이 많이 있다. 이 길들은 모두 하나님의 길이다. 그러나 이 길들은 너무 멀리 떨어진 듯하다. 이 모든 길들이 하나로 만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 길들은 너무 많으나 바울은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고 했다. 

우리는 먼저 '계명의 길'을 통과해야 한다. 이 길을 걷기 전에는 우리는 어둠 속에서 어떤 길이 좋은 길이고 어떤 길이 나쁜 길인지 분별할 수 없다. 그러나 계명 속에서 우리는 빛을 발견한다.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잠 6:23). 계명을 따르면, 이 계명이 길로 인도하리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여호와는 바람이 이 빛을 꺼뜨리지 않도록 등 안에 두셨다. 등 안에 불을 두듯이, 계명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이 율법을 마음에 두게 한다.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율법을 마음속에 두면, 어떤 바람도 이 불을 꺼뜨리지 못한다. 이것이 진정 "내 발의 등"(시 119:105)이다. 이 등불은 당신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어떤 속도로 걸어야 할 것인가를 알려 준다. 이 빛을 가졌다면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 보라:"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렘 6:16). 이 등불은 당신이 안식을 누릴 곳으로 인도한다. 그곳은 어디인가? 이 길을 좇아가라. 구약에 나타난 "옛 길"을 거치면 신약의 복음으로 인도함을 받을 것이고, 여기에 안식이 있다. 바울도 이것을 확증했다. 율법은 복음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과도 같기 때문이다. 복음에는 생명의 길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모든 길은 진리이다(시 119:151). 요한은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 4절)라고 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의 말씀이시다. 이 진리는 생명의 길이며,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의로우신 예수께서는 우리 앞서 아버지께 가시고, 우리로 그분의 발걸음을 좇아 오라 하신다. 그분은 아버지 곁에 앉으셔서 우리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이처럼 율법은 빛이요, 복음은 길이요, 그리스도는 생명의 길이다. -윌리엄 오스틴(1637). 


11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고, 이제는 그분이 겪었던 고통의 열매를 거두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기쁨이다. 그분은 이제 슬픔을 겪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린다. 이제 하나님은 주님을 종으로 대하지 아니하시고, 주님을 향해 미소지으신다. 미소 띤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주님은 영원한 기쁨을 누리신다. 이 기쁨과 비교하면, 이 세상에서 누리는 가장 큰 기쁨도 오히려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분의 영혼은 순수한 기쁨을 누리고, 그 기쁨은 수를 헤아릴 수도 없으며,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기쁨이며, 중단 없이 영원까지 지속되는 기쁨이다. -스티븐 차녹. 


11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아브라함의 품 안에서 지내는 복된 영혼은 영원하고 고통이 없으며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몸을 받을 것이다. 이런 영광스런 몸과 영혼이 만난다면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영혼은 사랑하는 육체를 보고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영광스러운 몸을 입은 너는 복되도다. 너의 죽을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린 너는 복되도다(롬 6:13). 기뻐하라. 이제 수고와 슬픔의 시간이 지나고 안식의 시간이 돌아왔도다. 너는 흙 속에 묻혔더니 결국 영광스러운 몸으로 일어났도다. 약한 것을 뿌려 강한 것을 거두고, 육신의 몸을 심어 영적 몸으로 일어났구나. 썩을 것을 심어 썩지 않을 것으로 일어났구나(고전 15:42). 아! 내 사랑하는 나의 동역자여,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함께 걸었지(시 55:14). 내가 마음으로 기도하면 너는 내 마음을 표현하며 무릎을 꿇고 손을 하늘로 향했지. 우리는 주의 일을 함께하는 동역자였지. 우리는 함께 고난을 당했으니, 이제는 함께 다스릴 것이야. 난 다시 네게 들어가 우리가 함께 주님의 기쁨에 참여해야지. 그곳에 가면 그분의 우편에서 영원토록 기쁨을 누리자.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1)라고 말하는 그분의 칭찬을 듣고서 즐거워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하여 하늘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경우에 합당하게 하는 말이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잠 25:11)와 같다면, 하나님의 전에서 가져온 숯불로 입술을 지지지 않은 이방인들의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다면, 하물며 성화되고 영광스럽게 변화된 성도들의 찬양과 천사들의 노래를 영광스러운 왕국에서 듣는데 이 어찌 기쁨이 충만하지 않겠는가?······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프란시스(St. Francis)가 어느 천사가 타는 하프 소리를 듣고서 너무나 감동하여 마치 딴 세상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던 말을 흥분해서 전했다. 아! 그렇다면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도들이 함께 노래하는 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계 4:8).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 죽을 인생들이 노래하며 트럼펫, 하프,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 여러 가지 악기들로 연주하는 것이 그토록 아름답게 들린다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늘의 노래를 하늘의 귀로 듣는다면 얼마나 큰 기쁨을 누리겠는가!

충만한 기쁨이 귀로 듣는 것 외의 다른 감각으로는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성경에서는 여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는 나는 할 말이 전혀 없다. 우리의 육체가 영광스럽게 변화되면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피부로 느끼는 감각들도 이에 합당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썩어질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죽을 것은 죽지 아니할 것을 입으며, 연약한 육신은 강한 몸으로 일어나고, 썩어질 육신은 영적 몸으로 영광스럽게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이 육신으로 선을 행하고, 다시는 악으로 인한 고통을 당하지 않으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에 던져졌으나 아무런 상함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 몸이 불에 던져진다 해도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돌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도 돌아보신다. 그리하여 우리 눈으로 보게 하시고, 입으로는 맛을 보며, 귀로는 음악을 듣고, 코로는 향기를 맡게 하실 것이다. -존 보이스. 


11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이 땅의 성도들은 본향을 떠나 여행하는 순례자와 같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여행을 마치고 목적지에 도달한 자들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위험 가운데 살아가는 이방인들이며, 죽음의 땅에서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우리는 천국에서 생명의 주와 함께 지내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는 슬픔의 바다 가운데서 한 방울의 기쁨을 누리며, 긴 고통의 세월에 한 순간 평안을 누릴 뿐이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한 순간의 고통도 없이 영원한 평강을 누리고, 참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아무런 비극도 없이 경사스러운 일을 누리고, 어떤 슬픔도 없이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도 고난의 짐을 벗어 버리자. 그리고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항상 고백하며 묵상하고, 이것이 이루어질 날을 기다리며 슬픔의 잔을 견디어 나가자.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라는 표현을 잘 살펴보라. 기쁨이 '충만했었다'거나 '충만할 것이다'라는 말이 아니라 '충만하다'라고 했다. 이렇게 현재형으로 기록한 것은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 기쁨은 충만한 기쁨이며 절정에 이른 기쁨이다. 사람이 가장 바라는 것은 '기쁨'이다. 그리고 '충만한 기쁨'보다 더 많은 기쁨을 바랄 수는 없다. 이 충만한 기쁨을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면 어느 곳에서 누릴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영원히 마르지 않고 끊이지 않는 샘처럼, 기쁨의 근원이 되신다. 이 기쁨의 샘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데 지금부터 영원토록 끊임없이 누리려 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진정한 기쁨에 대한 이 모든 것들이 한 구절에 농축되어 표현되어 있다:"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에드워드 윌란(Edward Willan, The Consummation of Felicity, 1645). 


11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영광과 행복과 기쁨을 두 배로 누릴 수 있다. 그분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아버지와 교제를 나누시고, 또한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신다. 이 교제로 얻는 기쁨을 이 구절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주의 앞에서 누리는 기쁨과 주의 우편에서 얻는 즐거움은 영원하고 충만한 기쁨이며, 더하거나 덜할 필요도 없이 그것으로 온전한 기쁨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만물의 후사가 되시고 다른 피조물로부터 기쁨이나 즐거움을 추가로 누릴 필요가 없으시다. -토머스 굿윈. 


11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하늘에서는 궁핍함이 없다. 부족한 것이 없다면 따로 원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없는 것이 있다면 오직 악이 없을 뿐이다. 악이란 선한 것이 결여된 것이며, 악이 없다는 것은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 안에는 선한 것이 부족하지 않다. 악이 없고 오직 선하기만 하신 하나님 앞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이 땅에서는 어떤 사람들은 배고프지 않는데도 고기를 먹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배가 고파도 고기를 먹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목마르지 않는데도 지극히 많이 마시고, 또 어떤 사람들은 목이 말라도 마실 것이 없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너무 많이 가졌다거나 너무 부족한 경우가 없다. 하늘에서는 하늘의 만나를 많이 거두어도 남는 것이 없고, 적게 거두어도 부족하지 않다.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자는 배고픔이나 갈증을 느끼지 않는다. -에드워드 윌란. 


11절. "충만." 성도들은 그곳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다. 이는 그 영혼이 선을 무한히 체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을 싫어하지 않고, 상실하지도 않으며, 부족함을 느끼지도 않고 영원히 선을 누릴 것이다. 각 영혼은 그가 충만한 기쁨을 누리기까지 주님 앞에서 원하는 대로 선을 누리고, 받을 수 있는 만큼 받을 것이다. 모두가 자신에게 적합하도록 충만히 채움을 받을 것이다. 각 영혼이 품었던 소원들이 영광의 주님 앞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분이 함께하신다는 영광에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을 것이고, 지루함을 느낀다거나 무엇인가 변화를 갖고자 하는 마음을 결코 품지 않을 것이다. -에드워드 윌란. 


11절. "기쁨이 충만하고." 사람이 바다에 가게 되면, 샘에서 물을 마셨던 자라도 샘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대양으로 나오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면, 샘을 뒤에 남겨 두었다는 불평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에는 슬픔을 자아내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곳에는 오직 기쁨만이 있다. 주님께서는 천국에 대해 말씀하시며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 23)라고 하셨다. 이 땅에서는 기쁨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지만, 천국에서는 우리가 기쁨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이곳에서 누리는 기쁨은 천국에서 온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기쁨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기쁨이고,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기쁨이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토머스 왓슨. 


11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이 세상에서 우리의 기쁨은 슬픔과 섞여 있다. 이는 마치 장미에 가시가 있는 것과도 같다. 야곱은 아들들이 애굽에서 곡식을 자루에 가득 담아 돌아왔을 때에 기뻐했다. 그러나 그 자루에 은잔이 들어 있는 것을 알고서 슬퍼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메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던 때에 기뻐했다. 그러나 웃사에게 내린 심판으로 인해서 슬퍼했다. 이것은 우리의 기쁨을 조절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약한 사람들은 술을 마실 때에 취할 것을 염려하여 술에 물을 타서 약하게 마시듯이,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에서 기쁨을 슬픔과 혼합하여 우리로 오만함에 빠지지 않게 하신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의 기쁨은 두려움과 합해져야 한다:"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 여인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마 28:8) 우리 주님의 무덤에서 떠나갔다. 우리는 거듭날 때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이 우리 안에 생겼지만, 거듭나기 전에 하나님께 대해 가졌던 두려움이 우리 가운데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다에 몰아치던 태풍이 그친다고 해도 그 여파가 남아서 물결이 이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예민한 엄마가 어린아이를 위험에서 구한 후에 기쁨을 누리지만, 그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는 것과도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위험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풍성하신 자비로 구원을 받아 그분의 자비하심 안에서 즐거워하지만, 사탄의 덫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이전의 죄의식과 위험이 우리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기쁨 가운데서도 슬픔과 공포에 떨게 한다. 

우리의 기쁨이 두려움과 함께 오듯이 또한 슬픔도 함께 온다. 신실한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보고서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에 대해 기뻐한다. 그리스도는 죄성이 있고 악한 행실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성도들은 이것을 생각하며 기뻐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죄를 생각하면서 이 죄가 영광의 주에게 상처를 입히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을 실감하면, 과부가 자신의 추잡한 행실로 사랑하는 남편의 심장을 터뜨려 죽게 한 후 통곡하는 것처럼 통곡한다. 

신실한 성도들은 그들이 시작했던 작은 것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이 인도하신 것들을 생각하며 즐거워한다. 그러나 원래 훼손되지 않은 의로움을 생각하고서는 마치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새로 지은 성전을 보면서 울었듯이 슬피 통곡하는 것이다.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 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며"(스 3:12). 그러나 하늘에서는 우리의 기쁨이 충만할 것이며, 아무런 슬픔도 없을 것이다:"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 그때가 되면 슬픔이 없고 두려움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볼 것이고, 그분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넘치는 기쁨을 얻을 것이다. 변화산에 있었던 베드로는 그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고서 산 아래에 있는 기쁨이나 어려움은 모두 잊어버리고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 17:4)라고 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우리의 영혼을 만족게 하는 그 모든 광경을 보고서 이 땅의 기쁨이나 어려움을 모두 잊어버리게 되지 않겠는가? 조물주의 영광이 피조물의 영광보다 높고, 하늘 나라는 변화산보다 높은 곳에 있다. -윌리엄 콜빌(William Colvill, Refreshing Streams, 1655). 


11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 그 특성은 "기쁨"이고, 그 양은 "충만"하며, 품위로 말하면 "주의 우편"에서 누리는 것이고, 시간적으로는 "영원한" 즐거움이다. 수백만에 수백만을 곱한 시간이라도 성도들이 하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기쁨의 시간에 비교하면 일 분도 되지 못한다. 하늘 나라에는 당신의 즐거움을 빼앗을 어떤 죄도 없고 사람도 없으며 마귀도 없다.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6:22). 하늘 나라에서 성도들의 기쁨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이 즐거움은 항상 충만하도록 흐른다. 하늘의 기쁨은 결코 시들거나 죽지 않으며, 감소되거나 방해받지도 않는다. 하늘 나라에서 누리는 성도들의 기쁨은 지속적인 기쁨이며, 영원한 기쁨이다. -토머스 브룩스. 


11절.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하늘 나라의 해변에 도착한 영혼은 모든 폭풍을 거친 것과도 같다. 영광스러운 영혼은 '기쁨의 강물'에서 영원토록 몸을 적실 것이다.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하늘 나라의 특성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오스틴은 이렇게 말했다:"주여, 이 세상에서 당신의 얼굴을 단 하루라도 뵙기 위한 것이라면 어떤 고통도 감수하겠나이다. 그러나, 아! 하늘 나라에서 하루만 지내고 곧 쫓겨난다면, 이것은 나를 더욱 슬프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은 우리를 더욱 영광스럽게 한다. 우리는 영원히 주 안에서 지내게 된다. -토머스 왓슨. 


11절. "기쁨이 충만하고······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이 구절은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위로의 근원이 된다. 이곳에서 잠시 동안 겪는 슬픔으로 하늘 나라에서는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고, 잠시 동안의 배고픔으로 영원한 잔치를 누리며, 잠시 동안의 아픔과 박해로 영원한 건강과 구원을 받고, 잠시 동안 옥에 갇혔으나 영원한 자유를 누리고, 잠시 동안 수치를 당하나 영원한 영광을 누린다. 이 세상에서 그들을 압제하던 악인들은 사라지고 그들을 위로하는 천사들과 성도들이 함께할 것이며,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유혹하던 사탄이 떠나고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이다. 요셉의 감옥은 궁궐로 변하고, 세 아이들을 던졌던 풀무불은 순금으로 치장한 새 예루살렘으로 변화될 것이다. -존 크래그(John Cragge, Cabinet of Spiritual Jewells, 1657). 


11절. "영원한 즐거움." 아하수에로의 잔치는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지만, 하늘의 잔치는 끝이 없다.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윌리엄 콜빌. 


힌트


시 16편 전체. 다윗의 믹담. 캐논 데일(Canon Dale) 씨는 “순금의 시”라는 제목으로 작은 책을 펴냈다. 이 책은 간단한 시리즈 설교로서 적합하나, “강해”라고 이름을 붙이기는 어렵다. 이 책의 장 제목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제목이 눈에 띄므로 이 제목을 따라 설교하면 충실하게 내용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1절. 순금을 찾음. 위험을 느끼는 성도가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함.


2, 3절. 순금을 소유함. 성도들이 다른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며 거룩함을 유지하는 반면,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의만을 바라봄.


4, 5절. 순금을 시험함. 성도들이 자신의 소득을 알고서 여호와 안에서 영원한 기업을 기대함. 


6절. 순금의 가치를 평가함. 성도들이 그가 거하는 곳과 그가 받은 기업의 아름다움에 대해 자축함.


7, 8절. 순금을 차지함. 성도들이 밤마다 여호와의 훈계에서 교훈을 받으며, 그분의 약속을 낮에 실현함. 


9, 10절. 순금을 모음.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과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해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고 기뻐함. 


11절. 순금을 온전케 함. 성도들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서 충만한 기쁨을 영원히 누림. 


여러 가지 제안들이 많이 있겠지만,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설교 힌트를 제시한다. 


1절. 기도와 간구. 보호하는 자와 의지하는 자. 성도들이 당하는 위험과 그들이 신뢰하는 자. 


2절. “주는 나의 주시오니.” 영혼의 동맹, 확신, 선언. 


2, 3절. 선한 행동의 영향력과 그 범위. 하나님이나 세상을 떠나간 성도들과 죄인들에게는 유익이 없으며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유익함. 격려의 필요성 등. 


2, 3절. 진실된 믿음의 증거. (1) 하나님과의 동맹. (2) 자기 의를 버림. (3) 성도들에게 선행을 베품. (4) 성도들의 존귀함을 감사함. (5) 그들이 속한 사회를 기뻐함. 


3절. 땅의 존귀한 자들. ‘고귀한’, ‘훌륭한’, ‘위엄이 있는’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들의 중생, 성품, 의복, 천성 등이 존귀할 수 있다. 


3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왜 크리스천들이 나의 기쁨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그들을 더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교제를 어떻게 하면 더 즐겁게 할 수 있는가? 


3절. 가련한 성도들을 위한 설교 모음. (1) 성도들. (2) 땅에 있는 성도들. (3) 이들은 존귀한 자들이다. (4) 그들을 즐거워해야 한다. (5) 우리의 선한 행동을 그들에게도 보여야 한다. -매튜 헨리. 


4절. 우상 숭배로 겪는 슬픔을 이방인과 우리 자신에게서 찾아본다. 


4절 하반절. 삶과 입술에서 죄인들과 온전히 분리되어야 하는 의무. 


5절. 하나님 안에서 발견한 미래의 기업과 현재 받을 잔(강해를 참조하라).


5절 하반절. 나의 “분깃”은 무엇인가? 무슨 위험이 있는가? 누가 이것을 지키는가?

6절. (1) 아름다운 곳-베들레헴, 갈보리, 감람산, 시온, 천국 등. (2) 아름다운 목적-나를 위해 줄로 재어 주신 목적. (3) 아름다운 찬양-섬김, 제사, 노래 등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림. 


6절 하반절. (1) 유산. (2) 아름다운 유산. (3) 내가 소유한 것. (4) 성령의 증거. 


6절. 아름다운 기업. 우리의 기업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1) 이 기업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 (2) 아버지의 손에서 받은 것. (3) 은혜의 언약을 따라 주어진 것. (4)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것. (5) 기도의 응답으로 받은 것이며 정직한 노력을 따라 위로부터 받은 축복. 


7절. 위로부터, 그리고 안으로부터. 나를 교훈하는 두 가지 학교. 


8절. 여호와를 항상 당신 앞에 모시도록 하라. (1) 당신의 보호자로서. (2) 당신의 지도자로서. (3) 당신의 본으로서. (4) 당신을 관찰하는 자로서. -윌리엄 제이. 


8, 9절. 하나님의 임재 의식이 가장 귀한 도움이 된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도움은 무엇인가? (1) 외부의 일에 대한 확신:“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2) 내면의 기쁨:“내 마음이 기쁘고.” (3) 노래하는 혀:“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4) 죽어 가는 육체의 소망:“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9절 하반절. (1) 성도의 안식. (2) 소망 가운데 죽음. (3) 소망하는 구원. 


9, 10절. 예수께서는 죽음 앞에서도 그분의 영혼과 육체의 안전을 바라보며 기뻐하셨다. 우리도 같은 위로를 받아야 한다. 


10절. 예수께서 죽으심. 그의 영혼과 육체가 갔던 곳. 어렵지만 흥미있는 주제이다. 


10, 11절. 그분이 사셨으므로 우리도 역시 살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이 생명은 하나님의 백성이 부활 후에 천국에서 누릴 축복을 말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 (1) 생명의 근원은 그분의 임재에서 흘러나온다. (2) 이 생명은 충만한 기쁨을 준다. (3) 이 생명은 영원한 즐거움을 준다. -윌리엄 제이. 


11절. 하늘 나라의 감미로운 모습(강해를 참조하라).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