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편
개요
주제-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이다. 다윗이 그 아들의 추적을 피해 충성스러운 부하 몇 명만을 거느리고 밤중에 기드론 시내를 건너 피신한 슬픈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다윗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그분도 역시 피신하셨다. 그분도 자신을 쫓는 무리들을 피해 소수의 연약한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 여러 주경가들이 이 시를 “아침의 찬양”이라고 이름붙였다.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 안에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입술로 그분을 향해 노래를 부르자!
구성-이 시는 각각 2절씩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시편의 개요를 잘못 잡으면 시편을 온전히 감상할 수 없다. 이 시의 네 부분은 한 가지 장면에 대한 연속적인 묘사가 아니라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여러 장면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우리가 설교를 할 때 몇 가지 관련 주제들을 다루게 되는데, 시 3편도 이와 마찬가지다. 시편에는 통일성이 있다. 그렇다고 한 가지 주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주제가 서로 연결되어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2절원수들로 인해 하나님께 탄식함.
3-4절주님에 대한 신뢰를 선언함.
5-6절잠을 잘 수 있을 만큼 안전함.
7-8절다가오는 전쟁에 대비해서 힘을 모음.
강해
1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2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1절.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가련하고 마음이 찢어지듯 상처받은 아버지는 그의 대적이 많음을 탄식한다. 사무엘하 15:12을 보면 다윗의 군대는 날로 그 수가 감소하는데 “반역하는 일이 커 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고 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황망한 가운데 놀라 도망가는 아버지, 방랑자는 이렇게 외치며 탄식했다. 아! 날이 갈수록 내 고난이 더하니 내 비극의 끝을 볼 수 없노라! 내가 이미 비천한 자처럼 낮아졌거늘······아! 내 원수가 이렇게 많다니! 내 사랑하는 압살롬, 그가 내게 반역을 하다니······. 내 마음은 상할 대로 상하고 찢어졌거늘, 아! 아히도벨마저! 내 충성스러운 모사까지도 내게 등을 돌리다니. 보라! 나를 따르던 내 장군들과 군인들도 나를 떠났구나.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인생의 고난이란 함께 몰려오는 법, 슬픔은 대가족처럼 우리를 덮치는 것이 아닌가!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여호와여,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습니다. 그들의 군대는 내 군대보다 강합니다! 그 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도 수많은 대적으로 둘러싸였던 것을 기억하자. 우리의 수없이 많은 죄악들, 악마의 군대들, 육체적 고통, 영적 슬픔, 사망과 지옥의 세력들의 연합, 이들이 인자를 대적하며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오! 주님께서 진노 중에 그들을 밟으시고 대적의 무리를 파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주님은 우리를 괴롭히려던 그 무리들을 포로로 잡아 가셨으며, 우리를 대적하려던 자들을 낮추셨다. 용이 예수의 영혼을 향해 침을 쐈을 때 용은 그 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2절.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다윗은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서 원수들이 그를 공격하는 가장 무서운 무기, 그를 가장 절망케 하는 무기에 대해 털어놓았다:“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이전의 친구들, 그러나 이제는 멀어져 간 친구들은 슬픈 듯이 이렇게 말했고, 그를 대적하는 원수들은 기뻐 날뛰며 이 말이 그대로 이루어져서 그가 온전히 멸망해 버리기를 바랐다. 그의 하나님께서 그를 버렸다는 말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말이었다. 다윗이 이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양심은 그에게 무엇을 생각나게 했을까? 그는 밧세바와 동침하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던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원수들은 그가 밧세바와 범죄한 것을 들추어 내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네 손에 흐르는 피를 보라. 하나님께서 너를 버리고 떠나셨다!” 시므이는 다윗의 면전에서 그를 저주했으니, 이는 뒤에서 자신을 보호해 주는 사람을 믿고 담대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떠나갔다. 다윗은 자신을 비방하는 말들을 듣고서 믿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하늘에서 시작된 모든 시험들, 지옥에서 올라오는 모든 유혹들,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십자가를 한데 묶는다 해도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라는 말만큼 끔찍한 시험은 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얻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처럼 고통스러운 것은 없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와 같은 고통을 견디셨음을 기억하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빛이 없는 암흑 가운데 걸어가는 것과 같다. 저주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저주이다. 마치 쓴 쑥과 쓸개즙을 섞어 놓은 것처럼 쓴 고통이다. 아버지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다. 우리를 위해 이처럼 고통스러운 시험을 겪으신 주님을 사랑하자. 이 시에 나타난 슬픔을 보면서 주님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교훈을 얻자. 이 시에서는 다른 시편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윗보다는 다윗의 주님에 더 적합한 내용이 담겨 있다.
“셀라.”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한 뜻은 밝혀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음악의 휴지부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음을 더 크고 높게 하라. 더 높은 소리를 내라. 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더 고상한 내용이니, 현악기의 소리를 다시 조정하라”는 뜻이라고 말한다. 현악기는 줄이 쉽게 느슨해진다. 그래서 줄이 느슨하게 되면 다시 팽팽하게 해야 한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악기의 줄은 어떠한가? 우리는 마음의 줄을 다시 조이고 높은 소리로 노래해야 하지 않겠는가? “셀라”라는 구절을 대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하겠다.
다윗이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돌렸듯이
오, 주여! 우리도 마음의 줄을 조이고
하나님께 노래하게 하소서!
우리는 “셀라”를 대할 때마다 ‘더 잘 살펴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셀라” 앞에 나오는 말과 뒤에 나오는 말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성경에서 우리에게 잠깐 멈추어 묵상하라고 하거나,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즐겁게 노래하라고 할 때는 거기에 아름다운 교훈이 숨겨 있기 때문이다. “셀라.”
3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4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3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새롭게 고백한다. 히브리어로 “방패”는 단순한 방패가 아니다. 이것은 “원형의 방호물”을 말한다. 그래서 이 원형의 방호물은 사람을 온전히 둘러싸서 위와 아래, 전후, 좌우로부터 완벽하게 보호해 준다. 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온전한 방패가 아니신가! 그분은 사탄의 불화살도 막아 주시고, 외부에서 오는 시련의 폭풍에서도 감싸 주시고, 내면의 마음에 회오리 바람이 일 때에도 “평강!”을 말씀하시지 않는가?
“나의 영광이시요.” 다윗은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을 받으며 그 자신의 왕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이제 승리하고 돌아와야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시고 영광을 베풀어 주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았다. 아! 현재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신 것은 그분의 은총이 아닌가! 또한 우리가 현재 당하는 고난에도 영광이 있다. 이는 분별하는 눈으로 바라보아야 보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도 고난 가운데서 즐거워하자!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여호와여, 당신은 나를 높이 들어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내 비록 슬픔 가운데 고개 숙이지만, 곧 기쁨과 감사로 내 머리를 들리이다.
3절에는 하나님의 삼중의 자비가 나타나 있다. 그분은 무방비 상태에 있는 사람을 방어해 주시고, 멸시받는 자에게 영광을, 위로받지 못한 자에게 기쁨을 주신다!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여수룬의 하나님과 같은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4절.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왜 다윗은 “나의 목소리로”라고 했을까? 하나님은 물론 조용히 드리는 기도도 들으신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들은 은밀히 기도하는 중에도 소리 내지 않고 기도하는 것보다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어쩌면 다윗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내 잔혹한 원수들이 나를 둘러싸고 떠들어 대며 소리를 높여 외치지. 나도 내 목소리를 높여야지. 내 외침은 그들보다 높이 오를거야. 그들은 나를 비방하며 시끄럽게 떠들어 대지만, 나의 외침은 하늘 위까지 솟을거야. 그래서 이 모든 난리 소리보다 더 크고 강하게 하늘 보좌에 닿도록 해야지. 하늘 보좌에 앉으신 그분은 나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 분이지 않는가.” 기도의 응답은 영혼의 음식과도 같다. 이는 감미로운 것이다. 우리가 험난한 세상에 산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우리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자.
“셀라.” 다시 한번 “셀라”가 나타난다. 아! 피곤한 성도들이 있는가? 잠깐 쉬고서, 마음의 줄을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자.
5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5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다윗은 믿음이 있었기에 누워 잘 수 있었다. 그가 불안했다면 밤새 잠을 자지 못하고 원수들이 오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지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오만한 자의 주제넘는 잠도 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이런 잠에서 구원하소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잠을 잔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감겨 주신다. 그러나 다윗은 또한 잠에서 깨어났다. 어떤 사람은 자고 깨어나지 못하는 사망의 잠을 자기도 한다. 그러나 다윗은 수많은 원수들에게 노출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품안에 머리를 묻고 섭리자의 날개 아래서 기쁘게 잠을 잤고, 다시 안전하게 깨어났다.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단잠을 자고 깨어난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셨음을 알았다. 누군가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한 글을 들어 보라:“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평강은 남자다운 사람들의 용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평강은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로 외적인 상황과 무관하게 우리를 지키는 것이며, 주님께서는 이로 인해 영광을 얻으신다.”
6절.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또 하루의 전투를 치르기 위해 말에 안장을 조이면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다:“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그는 원수들의 수나 그들의 지혜를 과소 평가하지 않았다. 원수들은 “천만인”이나 되었다. 그들은 또한 지혜가 있었다. 사냥꾼들이 사냥감을 “둘러치며” 추적하듯이, 원수들이 그를 잔혹하고 교묘하게 추적했다. 그러나 그는 떨지 않았다. 원수들을 바라보며 그는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이다. 피할 길이 없을지도 모른다. 사냥꾼들이 사슴을 둘러싸고 포위하듯 그를 포위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포위망을 뚫으리라. 그가 원수들 중에 갇혀 있을지라도, 그들이 해치지 못할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다윗은 기도 없이 전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무릎을 꿇고, 여호와 하나님께 큰 소리로 외치며 기도하는 것이다(7절).
7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7절. 그는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실 것에 대한 믿음이 확실했다. 그저 하나님께서 일어나시기만 한다면, 그는 원수들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는 원수들을 맹수에 비교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턱을 부수셨다고 선언했다. 이제 원수들은 다윗을 해할 힘이 없다. “주께서······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뺨을 치셨다. 이제 그들이 입을 놀려 무슨 비방을 한다 할지라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빨 빠진 턱주가리로 누구를 해할 수 있겠는가? 오, 성도들이여, 기뻐하라! 우리가 싸우는 대적은 머리가 부서진 용이요, 턱에서 이빨이 빠져 버린 원수들이 아닌가!
8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8절.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이 구절에는 칼빈의 교리가 농축되어 나타난다. 성경을 살펴보고 정직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원수들과 늘 다툰다. 원수들은 “구원은 인간의 자유 의지에 속한 것이야. 사람의 선행에 의한 것은 아니라 해도, 최소한 의지는 있어야 구원을 받는 거야”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구원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여기에는 일점 일획도 변함이 없다. 하나님, 바로 그분이 당신의 백성을 부르신다. 그분은 은혜로 부르시고,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그들을 보호하신다. 이것은 사람에게서 생긴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성도들이여, 이것을 체험으로 알기를 원한다. 우리의 교만한 혈과 육으로는 결코 배우지 못한다.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이 마지막 구절에는 구원의 특수성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구원은 애굽이나 두로나 니느웨에 내리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복은 당신의 택하신 백성, 피를 주고 사신 백성, 영원히 사랑하시는 백성에게 내리는 것이다.
“셀라.” 이제 마음의 머리를 들고 찬양하라. 잠시 멈추어서, 이 가르침을 묵상해 보라:“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하나님의 분별하시는 사랑, 영원하고 무한하고 변치 않는 사랑, 이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항상 경배하자. 내 영혼아, 바쁜 걸음을 멈추고 쉬어라.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해 보라. 주 예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않았는가? 믿음의 눈으로 이것을 바라보았는가? 여러 가지 받은 축복이 많겠으나, 이것이 진정 가장 큰 축복이 아닌가? 이 축복을 받았으면 일어나 노래하라.
내 영혼아! 찬양과 경배를 돌리라!
“왜 날 사랑하시나요?”라고 물으라
주님의 은혜가 지극한 것은
내가 구세주의 가족이 되었음이네
할렐루야! 주님께 영원한 감사를 돌리라!
주해
머리말. 시편의 머리말에 대해서는 유명한 학자들이 상반된 주장을 제시하기 때문에 확신 있게 견해를 발표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시편의 머리말을 누가, 언제 시편 본문에 첨가시켰는지 알지 못하며, 또 머리말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하여, 가볍게 여기고 제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거스틴(Augustine), 데오도레트(Theodoret) 등 초기의 많은 학자들은 이 머리말들을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본문의 일부로 보았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시편을 낭송할 때 머리말을 포함시키고 있으며, 랍비들도 머리말에 대한 해석을 계속 붙이고 있다.
누가 머리말을 만들어 냈으며 현재 있는 자리에 첨가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고대로부터 머리말이 본문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머리말들은 구약의 헬라어 역본인 70인역에도 나타나는데, 이 역본에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는 머리말들이 포함된 경우도 있다. 제롬 역본은 70인역을 따라서 머리말이 붙여졌다. 필자는 시편의 머리말이 주제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머리말이 분명히 잘못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머리말과 시편의 내용이 맞지 않는 경우는 발견하지 못했다. 에스라가 정경을 편집할 때 이 머리말들을 많이 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는 시편이 작성되던 시대와 거의 동시대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존 메이슨 굿(John Mason Good, M.D., F.R.S., 1854).
머리말.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여기에서 처음으로 "시"란 말이 나타난다. "시"를 히브리어로 "미즈모르"(rwmzm)라고 하는데, 이는 가지치기를 뜻하며 쓸데없는 단어들을 제해 버리고 짧은 문장으로 만들어진 노래를 말한다. -헨리 에인즈워스.
이 설명에 대해 고대의 한 필자는 이렇게 말했다:"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교훈을 받아야 한다. 심한 고통 중에 빠졌을 때에 우리는 아름다운 수사학적 단어를 동원하여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모든 단어들을 제해 버리고 기도해야 한다."
시 3편 전체. 성도들이여, 많은 사람들의 책망을 받으며 어려움을 겪는 등 갑작스런 변화를 겪게 될 때에 낙담하지 말라. 다윗처럼 자신의 죄를 고백한 후,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무고하게 공격하며, 루터파, 이교도, 청교도라고 부르며 괴롭힌다고 하나님께 고해야 한다. 악한 우상 숭배자들이 일어나 성도를 무너뜨리려 하며, "하나님이 너를 버리셨다. 하나님은 너의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에도 상관하지 말라. 그들로 압살롬의 부와 아히도벨의 지혜를 신뢰하게 버려 두라. 오직 다윗과 함께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라고 고백하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지키는 자시며, 우리를 둘러 모든 면에서 보호하는 "방패"가 되심을 믿으라. 그분만이 우리를 지키시고 영광과 존귀를 베풀어 주신다. 그분은 교만한 위선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하고 온유한 자를 높이신다. 그분이 원수들의 뺨을 치시고, 모든 이를 꺾으신다. 그분은 압살롬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긴 머리털로 나무에 매달리게 하시고, 아히도벨로 절망 가운데서 목매어 자살하게 하신다. 원수들의 군대는 파멸하고 성도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여호와는 그분의 백성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복을 주셔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천성을 향한 여행을 계속하게 하신다. -토머스 타임(Thomas Tymme, Silver Watch Bell, 1634).
1절.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압살롬의 도당은 눈덩이처럼 커져서 반역을 일으켰다. 다윗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신세를 졌던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를 배반했고, 그를 공격하는 데 동조하며, 바보 같은 젊은이 압살롬을 우두머리로 삼았다. 다수의 결정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일인가! 충성스럽고 신실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다윗은 역대의 어느 왕보다도 신하들의 마음을 얻었던 자이지만, 그러나 돌연히 그들을 대부분 잃고 말았다! 사람들이 왕을 지나치게 신뢰해서도 안 되지만(시 146:3), 왕들 역시 사람을 전적으로 의지해서도 안 된다. 다윗의 자손이신 그리스도에게도 원수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를 붙잡았으며, 군중들이 "십자가에 못박으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다. 그를 치던 자가 어찌 그리 많았는지! 이 세상에서 선하게 사는 사람들도 대중이 그에게 등을 돌릴 때에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선인을 대적하는 세력은 날마다 자라는 법이다. -매튜 헨리.
2절.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될 때, 끊어진 동맥에서 피가 쏟아져 나가듯 기쁨이 사라지는 것이다. -윌리엄 거놀.
2절. 하나님의 자녀는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 가장 놀라게 된다.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를 괴롭히는 일은 없다. 다윗은 하나님께 나아와 그의 원수들이 그에게 했던 말을 토해 놓았다. 이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랍사게의 편지를 들고서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과 같은 행동이다. 오 주여! 그들은 "너는 하나님께로서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 말이 사실이라면 난 아무런 희망도 없나이다. 그들은 내 영혼에게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로서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내 영혼에 "나는 네 구원이라"(시 35:3)고 말씀하소서. 그리하면 내 영혼이 만족함을 얻고, 그들도 잠잠해지리이다. -매튜 헨리.
2절. "셀라"(2, 4, 8절). "셀라"(hls)라는 단어에 대해 여러 가지 연구 자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아직도 온전히 알지 못한다. 히브리어 성경의 아람어 번역본인 탈굼에는 "르알민"(@yml[l)이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이는 '영원토록'이란 뜻이다. 라틴어 번역본인 불가타 역본에는 이것이 삭제되어 있다.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에는 "디아프시알마"(Diavyalma)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음정의 변화를 의미하는 듯하다. 이 단어는 시편에서 73번 나타나고 하박국에 3번 나타난다(합 3:3, 9, 13). 이것은 시가 문학에서만 나타나는데, 이는 시를 암송하거나 노래하는 데 관계된 음악적인 용어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음악 연주와 관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시 정지'를 뜻하기도 한다. 게제니우스(Gesenius)는 이 단어가 '침묵'이나 '일시 정지'를 뜻하며, 시편을 노래하는 동안 노래하는 자가 침묵하거나 잠깐 동안 정지하도록 지시하는 것이며 그 동안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은 간주곡을 연주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했다. 현재로서는 이렇게 보는 외에 다른 의미는 발견하지 못했으며, 이 의미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이 단어가 나오는 곳의 문맥을 살펴보면 노래하는 중에 일시 정지하는 것이 적합함이 일반적인 사실로 드러난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적합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시의 내용과 음악적 연주가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가 나타나는 곳에서 본문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는 이 단어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에발트(Ewald)는 다른 주장을 펼쳤는데, 이 단어가 나타나는 곳에서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했다. 이 단어는 '위로', '높이', '크게'라는 뜻의 "살"(ls), '올라가다'라는 뜻의 "살랄"(lls)과 동의어라고 주장했다. -알버트 반스(Albert Barnes, 1868).
2절. "셀라"(2, 4, 8절). 이 단어는 시편에서 73번 나타나는데, 일반적으로 문장이나 단락의 끝에 나타난다. 그러나 절의 중간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시 55:19; 57:3).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단어가 음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가 많다. 현재로서는 다음의 두 가지 의견이 주류를 이룬다. 어떤 학자들(헤르더, 데 베테, 에발트, 델리취)은 이 단어가 '올리다'라는 뜻의 "살랄"(lls)에서 파생한 것으로 음악이나 목소리를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며, 다른 학자들(게제니우스, 로젠뮐러, 헹스텐버그, 톨룩)은 '잠잠하다'라는 뜻의 "셀라흐"(jls)에서 파생한 것으로 노래하는 중에 '일시 정지'를 의미한다고 본다. 아마 "셀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이 간주곡이나 심포니를 연주하는 동안, 노래하는 자들이 침묵하거나 일시 정지하는 것을 지시하는 단어일 것이다. 시편 9:16에는 "힉가욘 셀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게제니우스는 "악기, 정지"라고 해석하면서,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이 심포니를 연주하는 동안,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일시 정지하도록 지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톨룩(Tholuck)과 헹스텐버그(Hengstenberg)는 두 단어를 '묵상, 정지'라고 해석하면서 음악이 일시 정지하는 동안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묵상하도록 한 것이라고 했다. -벤자민 데이비스(Benjamin Davis, Ph.D., LL.D., article "Psalms" in Kitto's Cyclopaedia of Biblical Literature).
3절.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 하나님은 슬픈 일이나 기쁜 일 등 모든 일에서 육체가 영혼에 동참하게 하신다. 길을 밝히는 등불도 그 안에 불이 있어야 길을 밝힐 수 있는 것과 같다.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1639).
3절. 하나님은 머리를 어떻게 드시는가? 바로의 술관원처럼 어느 지위에 오르도록 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다. 수치를 당하던 자가 영광을 얻고, 병들었던 자가 건강을 회복하고, 슬픔을 당했던 자가 기쁨을 얻고, 넘어졌던 자가 일어서고, 일시적으로 패배를 당했던 자가 승리를 얻는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를 드는 자이시다. -C. H. S.
4절.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기도의 선두주자가 달리면, 조금 지나 후미에서는 구원이 뒤따른다. -토머스 왓슨.
4절. 하나님은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 들으신다는 것과 응답하신다는 말은 같은 말이다. -C. H. S.
5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다윗이 이처럼 단잠을 잤던 때가 언제인가? 머리말을 보면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자신의 웅장한 왕궁의 침소에 몸을 눕혔던 때가 아니다. 그가 아들 압살롬의 추적을 피하여 도망가던 때이며, 어쩌면 하늘을 지붕 삼아 들판에서 누워 있을 때를 말할 것이다. 그를 배반한 군대가 뒤에서 추적하던 때에 이렇게 모든 위험을 잊고 잠을 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정 부드러운 베개를 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상황을 초월하는 이런 하나님의 평강은 그의 피조물로 하여금 무덤에서도 가장 부드러운 침대에서 자듯 잠들게 한다. 어떤 성도들은 욥처럼 현재 당하는 고난을 참지 못하여서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진정한 평강을 얻고서 흙으로 만들어진 침대에 누워 흙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하기도 했다. 시미언은 탄생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고서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제는 종을 평강 가운데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하인이 배에 모든 짐을 싣고서 주인이 돛을 올리고 집으로 향하기만을 바라는 것과 같이, 본향을 향하고자 했던 것이다. 본향을 향해 간다는 것을 아는 성도들은 자신의 모든 짐을 싣고 천국으로 향하기를 소망한다. 무엇을 바라고 나그네로 지내는 이 세상에 잠시 더 머물기를 소원하겠는가? 하나님의 평강을 확신하지 못한 자는 이런 소망을 가질 수 없다. 성도의 영혼이 하나님의 평강과 사랑을 느끼면 어떤 어려움이나 시험이나 곤란도 이겨 나가게 된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어려운 사명을 주시기 전에 이런 평강과 사랑을 부어 주셔서 마음을 기쁘고 담대하게 하여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신다. -윌리엄 거놀.
5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거놀은 런던교 위에 집이 있던 시대에 글을 썼는데 이렇게 말했다:"런던교 위에 사는 사람들도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깊은 잠을 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결이 결코 그들을 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사망과 고통의 물결 위에서도 조용히 안식하며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5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페르시아의 왕 아하수에로는 그리스를 공격하고서 그곳에 있는 모든 신전들을 헐어 버렸다. 그러나 디아나 신전은 너무 아름다워 보존시켰다.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시겠는가? 하나님은 결코 그분의 성전이 파괴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악한 시대에도 안연히 거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수비대를 강화하라.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인의 요새와도 같다. 다윗의 원수들은 그를 둘러쌌으나 그는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라고 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자는 대포를 쏜다 할지라도 대포의 포신 앞에서 잠을 잘 수 있다.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갑옷과 같아서 이것을 입은 자는 어떤 화살이나 탄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원수들이 은혜의 갑옷을 향해 활을 쏠 수는 있으나 뚫지는 못한다. 은혜는 우리의 영혼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한다. 그분 안에 있으면 벌집 안에 있는 벌처럼, 방주 안에 있는 비둘기처럼 안전하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토머스 왓슨.
5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여호와의 붙드시는 능력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을 생각하라. 우리의 혈관에 피가 흐르고, 폐로 숨을 쉰다는 것, 우리의 육신이 살아 있고, 정신적 기능이 지속된다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붙드시는 능력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C. H. S.
6절.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시편 기자는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고백한다. 세상에서 천만인이 그를 치려고 둘러쌀지라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런 모습에서 '불구하고의 태도'를 배우자. 인간의 생각에 천만인이 그를 치려고 달려드는 것처럼 절망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파멸이 바로 그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원수가 그를 해하려 하는 듯하다. 한 사람이 천만인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사람들은 종종 이런 환경에 처한다. 그들은 이런 환경에 처할 때면 "이 모든 일들이 나를 대적하고 있습니다"라고 탄식한다. 그들은 놀라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을 헤아려 볼 수도 없다. 피할 길이 도무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암흑에 싸인 듯하다. 이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내가 두려워 아니하리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진정 큰 믿음이다.
루터가 보름스를 향해 가던 길은 바로 이처럼 위험한 여행길이었다. 그 성 안에는 루터의 친구 스팔라틴(Spalatin)이 있었다. 그 친구는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루터를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크게 놀랐다. 루터가 성에 가까이 올 때에 스팔라틴이 보낸 사신이 그에게 와서 경고했다. "보름스에 들어오지 마세요!" 루터는 가장 친한 친구가 이런 경고를 했는데도 놀라지 않고, 그 사신을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가서 주인에게 말하라. 이 성 안에 마귀가 지붕 위의 타일처럼 가득 찼다고 해도 나는 이 성에 들어갈 것이다." 사신은 보름스로 돌아가서 루터의 말을 전했다. 루터는 죽기 수일 전에 "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면 이 세상에서 합리적인 사람들,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보이는 것으로 행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들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무척 두려워할 것이다. 우리는 연약하다는 핑계를 대는 데 익숙해 있지는 않는가? 육체의 연약함을 딛고 일어서기보다는 이것으로 핑계를 대며 피난처를 삼지는 않는가? 이제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깨어 있자. 상황이 좋을 때만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순풍이 불 때만 항해를 한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며,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다. 아! 이제 시편 기자의 본을 따라서 어떤 일이 일어날 때에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을 갖자. 그리고 그와 함께 이렇게 말하자:"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필립 베넷 파워(Philip Bennett Power, 'I Wills' of the Psalms, 1862).
6절.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누가 우리의 원수가 되었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군대의 많음, 권세, 뱀의 미묘한 유혹, 용의 잔혹함,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주겠다는 특권, 더러운 영의 악한 계교······어떤 원수가 우리를 대적한다 해도 우리 안에 계신 분이 우리를 대적하는 자보다 강하시다. 어떤 것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는 없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넉넉히 이기는 것이다.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 1612).
7절.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하나님께서 진노를 쏟으시든지 은혜를 베푸시든지 나타나셔서 당신의 능력을 보이실 것을 간구하며 부르는 말이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시는 듯한 여호와를 부르며 이제 일어나실 것을 간구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의인법을 사용한 것이다. 사람들은 다윗에게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하지만, 다윗은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한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근거로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를 간구한다. 이런 확신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고, 악인의 이를 뽑아 버리신 것은 원수들을 예외 없이 난폭하게 다루고 수치를 당하게 하신 것을 말한다. -알렉산더.
7절.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이 표현은 원수를 야수에 비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뺨은 이빨이 있는 뼈를 말하고, 이 뼈를 부수는 것은 맹수의 무장 해제를 의미한다. -알버트 반스.
7절. "뺨을 치시며." 하나님께서 악인을 분노 가운데 심판하실 때는, 뺨을 치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 하나에 전능하신 분의 능력을 느끼도록 후려치신다.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이 심판 중에 나타나며, 자비를 보이지 않으신다. 아! 오만하고 고집스런 죄인이 이것을 안다면! 전능하신 자와 다투려는 생각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라는 것을 생각하기만 한다면! -스티븐 차녹.
8절.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이와 같은 구절이 요나서에도 나온다:"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욘 2:9). 선원들은 그들의 배에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라고 새길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이 말을 그들의 성문에 새길 것이다. 그리고 요나처럼 고집스런 마음을 품었으나 하나님의 강청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손바닥에 이렇게 새길 것이다:"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 신약과 구약은 모두 이 말씀을 가르친다. 하늘과 땅이 그대로 운행되는 것은 구원이 여호와께로서 말미암기 때문이다. 공중의 새도 이것을 노래하고, 들의 짐승들도 다른 것을 노래하지 않는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 나라와 성읍을 지키는 요새와 성벽들, 집의 대문이 굳건한 것도 구원이 여호와께로서 말미암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구원은 우리의 머리에 쓰는 철판 헬멧보다 안전하고, 어떤 좋은 음식보다도 우리 몸을 보양하는 양약이 되며,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구원은 우리를 보존하고 붙드시며,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우리의 창고와 기름, 우리 안에 있는 양, 그리고 자궁에 있는 아기와 들의 곡식과 우리가 둘러앉는 식탁에 복을 주신다. 하늘의 별이 이러한 복을 내리는 것이 아니며, 자연 현상으로 이런 것들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만물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언한다. 우리가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많은 책을 쓴다 해도 책의 결론으로서, 노래의 끝으로서 우리는 요나의 말로 끝을 맺게 될 것이다:"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길을 떠나면서 제단을 쌓고 돌을 세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후손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교회에서 이 진리를 날마다 가르쳐야 하리라. 길을 걸으면서도 이것을 노래하고, 우리의 문설주에 이것을 기록하고, 벽에는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우리의 마음판에 날카로운 칼로 새기기를 바란다. 그래서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는 것을 영원히 잊지 말아야겠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늘 생각해야 하겠다. 사랑은 무엇보다 식기 쉽고, 기억은 어떤 것보다도 깨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존 킹(John King's Commentary on Jonah, 1594).
8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성도들은 영광을 얻을 때에도 복을 받은 것이지만, 아직 고난 중에 있을 때에도 복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영광을 얻기 전에 이미 복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에게 역설적인 말로 들릴 것이다. 사람들의 저주와 욕을 받으면서도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 육신에 속한 눈으로 고난당하는 성도를 바라본다면, 파도에 휩쓸리려는 배를 바라본다면(마 8:24), 이런 자들이 복을 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울은 그가 당한 고난을 열거했다. 그는 40에서 하나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았고,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도 맞았다. 또한 세 번이나 파선을 당했다(고후 11:24-26).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던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고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음도 당했다(히 11:36, 37). 뭐라고? 이들이 고난을 당하는 이 순간에도 복을 받은 것이라고? 육신에 속한 자들은 이런 것이 복받는 삶이라면 하나님이 이런 복에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바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이 무어라 말하든지,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께서는 의인은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슬퍼하며 탄식하고, 순교를 당해도 복을 받은 것이다. 시험받는 욥도 복을 받은 욥이었다. 성도들은 저주를 받을 때에 복을 받은 것이다. 시므이는 다윗을 저주했다(삼하 16:5). 그러나 그가 다윗을 저주했을 때에도, 다윗은 복을 받은 다윗이었다. 성도들이 박해를 받을 때에도 복을 받은 것이다. 그들이 미래에 복을 받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현재도 복을 받은 것이다.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 119:1).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시 3:8). -토머스 왓슨.
다음은 루터의 교리적 해설을 축약한 것이다. 흥미있는 해석의 예로서 이곳에 제시한다. -C. H. S.
시 3편 전체.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시편이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기던 때에 기록한 것이 아니며, 이 시도 '역사적 시'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해진다. 어거스틴은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또한 시의 마지막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축복은 모든 교회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이 시를 세 가지 방법-머리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시,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에 대한 시, 상징적으로 각 그리스도인에 대한 시-으로 해석했다. 어떤 해석을 해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본인은 이 시를 그리스도에 대한 시로 해석한다. 5절은 그 내용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며, 어거스틴도 이와 같은 생각이었다.
첫째, "누워"와 "자고"는 자연적인 수면이 아니라 자연적인 죽음을 말한다. 자연적인 수면을 말했다면 왜 자연적인 다른 행동들, 즉 걷고 먹고 마시고 일하는 것, 또는 다른 육체적 행동들은 말하지 않았겠는가?
둘째, 머리말에 나타난 것처럼 압살롬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이라면 육체적 수면을 취한 것을 이처럼 자랑한다는 것이 어리석게 보인다. 이런 절박한 상황이었다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내가 누워 자고"라는 표현은 조용히 누워서 자는 모습을 나타내 주며, 아들에게 쫓기면서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상심한 자의 잠자는 모습이 아니다.
셋째, 이 구절은 잠에 빠진 자를 그대로 버려 두지 않고 그를 붙드셔서 다시 일으키신 분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일상적인 잠에서 깨어난 것을 가지고서 하나님께 특별한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붙드셨다는 것은 그가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가 일상적인 잠에 빠졌더라면 다른 군사들이 그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붙드셨다는 것은 그가 일상적인 잠에 빠진 것이 아니라 이보다 더 중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마지막으로, "깨었으니"라는 히브리어 동사의 의미는 '내가 스스로 일어나도록 하였으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수면에서 깨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일상적인 수면을 취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깨워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다. 또한 스스로 깨어났다 하더라도 이것은 크게 선전해야 할 만한 굉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 이것을 말한 것은, 이 행동이 일상적인 수면에서 깨어나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2절.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그들은 내가 모든 피조물로부터 버림받고 박해를 받을 뿐만 아니라, 어느 곳이나 계셔서 만물을 보존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도 우주 가운데서 유일하게 버림받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욥도 이런 고난을 맛보았다:"어찌하여 하나님은 나로 과녁을 삼으시나이까?"(욥 7:20). 이 세상이 모두 연합하고, 지옥의 권세가 모두 힘을 합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사람의 대적이 되셨다는 것과 같을 수는 없다. 예레미야도 이런 일이 없기를 기도했다:"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렘 17:17). 시편 기자도 이렇게 말했다:"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시 6:1). 이와 같은 기도는 시편 전체에 걸쳐서 나타난다. 이런 시련을 겪는다는 것은 지옥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시 6:5)라고 고백했다. 당신이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3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다윗은 세 가지를 대조하고 있다:고난 중에 도우시는 분, 배반 중에 승리의 영광을 얻게 하시는 분, 하나님을 모욕하고 훼방하는 중에 머리를 드시는 분. 그러므로 여기 나타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리고 그 자신도 대적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외롭게 혼자 있는 것으로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여기에 나타난 말들은 사람이 자기의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이며 굳건한 믿음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폭풍과 지옥의 어두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이 붙드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핍박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저주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이 구세주가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노새나 말처럼 눈에 보이고 느끼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따라 이해한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기 때문이다:"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4절.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분이]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부르짖으니"와 "응답하시는도다"라는 동사가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히에로니무스(Hieronymus)는 "부르짖으리니"와 "응답하실 것이다"라고 미래형으로 번역했다. 이것은 완료형으로 번역한 것보다 더 좋은 번역이다. 왜냐하면 이 말들은 3절에서 소망하던 대로 고난을 지나 미래에 승리를 얻은 후에, 그를 붙드시고 보존하시고 머리를 들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감사드릴 내용이기 때문이다. 또한 승리를 얻고 기뻐하는 자들은 그들이 당한 고난과 했던 일들을 말하고, 그들의 구원자요 도우시는 분께 찬양을 드린다:"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시 66:16).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할지어다"(시 81:1).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 이 시에서도 그는 감사와 기쁨에 넘쳐서 자신이 죽었던 일과 잠을 자다 일어났던 일, 원수들이 뺨을 맞은 일, 악인의 이가 부러진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4절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3절까지는 하나님을 2인칭으로 불렀는데 4절에서는 갑자기 하나님을 3인칭으로 불렀다. 그래서 "내가 당신께 부르짖으니"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고 했으며, "당신이 당신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라고 하지 않고 "[그분이]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혜들을 모든 사람이 알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이 하는 행위이다.
5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그리스도는 이 구절로 그분의 죽음과 장사를 말하고 있다······이 구절이 단순한 휴식과 수면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처럼 중요하게 표현할 이유가 없다. 또한 문맥으로 살펴보아도 이 구절의 앞과 뒤는 원수와의 격렬한 투쟁과 영광스러운 승리를 대조하고 있다. 이러한 대조적인 묘사를 통해서 우리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키우게 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전하는 것이다. 격렬한 투쟁과 영광스러운 승리를 나타내는 예로서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말하고 있다······또한 "내가 누워 자고"라고 부드러운 말을 사용하여 우리에게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감소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내가 죽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라고 하지 않았다. 죽음과 무덤은 그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제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잠을 자는 것이며, 무덤은 무덤이 아니라 침실이며 쉬는 장소이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감소시키며 단잠으로 표현한 결과, 예언의 의미가 모호해지기까지 했다. 또한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확실한 것으로 표현하여 죽음을 아름답게 묘사하기까지 했다. 단잠에 빠진 자가 깨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그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자고 깨어났다고 했다. 수면이 몸의 힘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것처럼, 죽음도 더 좋은 삶을 살아가는 데 유용한 것이다. 다윗도 이 점에 대해 말했다:"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이다"(시 4:8).
그러므로 죽음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죽음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생명과 부활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 8:51). 그가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가 이것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인가? 정말 육체적으로 죽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니다! 부활을 소망하고 부활만을 바라보기에 죽음을 보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7절.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히에로니무스는 "이"는 의로운 자를 해하는 사람들의 욕이나 비방이나 다른 압제를 상징한다고 했다. 잠언에도 이런 말씀이 있다:"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잠 30:14). 그리스도도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당하실 때, 사람들은 그를 비방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으며, 그분은 이런 사람들의 비방하는 말에 삼키운 바 되신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
8절.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이 구절은 지금까지의 내용을 가장 아름답게 요약하며 결론을 내리는 구절이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주님만이 구원을 베푸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악한 존재들이 힘을 합하여 공격한다 해도, 오직 주님만이 구원을 베푸신다. 구원과 축복이 모두 그분의 손에 있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를 두려워할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나를 저주하고 멸하려 해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수욕과 파멸을 당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이 자신들을 축복하고 구원하려 해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아무도 복을 받거나 구원을 얻지 못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 anzus)는 이렇게 말했다:"하나님께서 주시려 하는 것은 사람의 질투로 빼앗을 수 없으며, 하나님이 주시려 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노동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도 이와 같은 말을 했다:"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이를 거꾸로 말해 보라:"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대적하면, 누가 그들을 위하리요?" 왜 그런가?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그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 속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도움은 헛된 것이다." -마르틴 루터.
힌트
1절. 하나님께 슬픔을 토해 내는 성도. (1)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 (2) 슬픔을 토하는 태도. (3) 주님께 고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결과. 어떠한 때에 이처럼 슬픔이 겹쳐서 일어나는가? 성도들에게 슬픈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행하는 것이 지혜로운가?
2절. 성도들에 대한 거짓과 하나님에 대한 명예 훼손.
3절. 고난받는 성도에게 주시는 세 가지 축복-보호, 영광, 기쁨. 우리가 심한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믿음으로 이 축복들을 모두 누릴 수 있는가?
4절. (1) 고난 중에 기도하라. (2)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들으신다. (3) 그분의 은혜로운 응답을 기록으로 남기라. (4)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며 미래를 위해 힘을 얻으라.
5절. (1) 단잠에 대한 묘사. (2) 즐겁게 깨어남에 대한 묘사. (3) 어떻게 이 두 가지를 모두 즐길 수 있는가를 설명-“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절. 원수에게 둘러싸였으나 승리할 수 있는 믿음.
7절. (1) 주께서 과거에 원수를 어떻게 대하셨는가?-“주께서······셨나이다.” (2) 항상 주께 문제를 고하라-“여호와여······나의 하나님이여.” (3) 주께서 행동하시도록 간구하라-“일어나소서.” (4) 주께서 과거에 도우사 승리하게 하신 것을 근거로 이제도 도와주실 것을 간청하라.
7절 하반절. 우리의 대적들은 정복당한 원수들, 이빨 빠진 사자들에 불과하다.
8절 상반절.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은 하나님께로서 온다(본문 강해를 참조하라).
8절 하반절.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을 받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복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 그들이 받은 위로, 당하는 시련, 행하는 일, 함께 사는 가족은 모두 하나님의 축복이다. 이러한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주어지고, 믿음으로 누리며, 맹세로 보증된 것이다.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s Portions, 1802-1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