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1편
개요
주제-이 시에는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영장(악사장-역자 주)에게 바친다고 하는 머리말은, 운율이 혼합되고 악절마다 슬픔과 화에 관한 내용이 교대로 나오는 이 노래가 공중을 위한 찬양으로 사용되기 위해 그리고 찬양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지어진 것임을 입증한다. 따라서 만일 여호와의 백성을 공적으로 교화시키기 위해 지어진 것임을 시사하고자 하신 성령의 특별한 배려가 없었더라면, 이러한 머리말이 붙은 시편들은 성전 예배용으로는 너무도 음울한 것으로서 한편으로 방치되었을 수 있다. 한편, 시편들 중 주 예수님을 특별히 암시하는 언급은 없겠는가? 예수님은 이러한 머리말이 붙은 시 22편에서 자신을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또한 시편 31:5에서 우리는 운명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분명히 들을 수 있다. 예수님은 어디서나 으뜸이 되시며, 그분의 성도들이 부르는 모든 성가들에 있어 악사장이 되신다. 예레미야가 이 시편을 작시했다는 추측은 “다윗의 시”라는 머리말에 의해 말끔히 제거된다.
절박한 고통 가운데 처한 시편 기자가 큰 확신과 거룩한 끈기로써 자신의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한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의 마음은 큰 힘을 얻어 그분의 위대하신 선을 드높인다. 혹자는 생각하기를, 이 시편을 짓게 된 고통스러운 배경이 그일라인들의 배반 사건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추측이 매우 타당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매우 음울한 분위기와 시편 기자의 불법에 대한 암시 등은 이 시편이 보다 후대에 지어진 것임을 시사하며, 그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고 신하들이 그에게서 달아나며 또한 거짓 입술들이 그를 대적하여 수많은 악소문을 퍼뜨렸던 시기를 저작 배경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수 있다. 여기에 시점에 대한 명확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으며, 우리가 이 내용을 다윗의 경우에 적용하는 일에 골몰한 나머지 우리 자신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을 잊을 수도 있다.
구성-이 시편의 내용을 뚜렷이 구분하기는 힘들다. 전반적으로 문체상의 기복이 심하여, 울음의 골짜기로 떨어졌다가 확신의 언덕으로 다시 올라가는 형식이 반복된다. 그러나 우리는 편의상 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
1-6절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고백하면서 도우심을 간청함.
7, 8절 받은 바 자비에 대한 감사를 표현함.
9-13절 간절히 구원을 청함.
14-18절 감사와 신뢰로 축복을 기대함.
19-22절 자신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묘사함.
23, 24절 자신의 경험이 다른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마감함.
강해
1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2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
3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4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5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6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1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아무리 사나운 폭풍우가 몰아친다고 할지라도 나는 다른 어떤 곳도 피난처로 삼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피난처는 단 한 곳뿐이며, 그것은 최상의 피난처이다. 그는 폭풍우 때에 자신의 위대한 믿음의 닻을 내린다. 다른 사항들은 의심스럽다고 할지라도, 그가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사실은 자신이 여호와를 의지한다는 점이다. 그가 이 사실로써 시작하고 있는 것은, 시련의 압박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나중에 그 사실을 잊어버리는 일을 막기 위함이다. 이와 같은 믿음의 공언은 자신의 곤경을 극복하고 제거하기 위한 버팀대 역할을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위로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탄원의 근거로서 그것을 강조한다. 자신의 미덕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오지 않으며,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신실하심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으로 제시된다.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어찌 여호와께서 오직 그분만을 의지하는 사람을 궁극적으로 수치를 당하게 하실 수 있겠는가? 진리와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믿음이 결국 보상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그분께 불명예를 가져다 줄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해도 아무런 위안이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신앙도 필요없을 것이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주님은 신실한 영혼을 버리시거나 주의 약속들을 깨트리실 정도로 불의한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신비로운 섭리를 통해 의를 옹호하시며 내게 구원의 기쁨을 안겨다 주실 것입니다. 심지어 믿음은 공의의 칼에 의해 보호받기를 바라기까지 한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한, 믿음이 헛되고 광신적인 것으로 판명나도록 방치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아들을 통해 아멘으로 받아들여지는 아버지의 약속들을 내다보면서,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계시되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면서 이 구절을 읽는다면, 여기 선언된 믿음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2절. "내게 귀를 기울여." 나의 낮은 상태로 나를 낮추어 주소서. 내게 주의깊게 귀를 기울이사 나의 모든 말을 들으소서. 조화를 이룬 초월적 영광들로 가득한 하늘이 하나님의 주의를 온통 사로잡을 수도 있지만, 그분은 가련한 백성의 가장 나약한 신음 소리에 관심을 기울이신다. 우리는 굳이 특정한 시간과 때를 정할 필요는 없지만, 복종하는 마음으로 신속하고도 확실한 자비를 간구할 수 있다. 종종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되 적절한 시점에 맞추어 신속하게 베푸심으로써 그 가치를 한층 더 높이신다. 만일 그 자비가 뒤늦게 임한다면 너무 지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그룹을 타시며 사랑하는 자들의 유익을 도모할 때 바람 날개를 타고 날으신다.
"견고한 바위와······되소서." 나의 엔게디, 나의 아둘람이 되소서. 그리고 불변의, 부동의, 난공불락의, 그리고 장엄한 나의 피난처가 되소서.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 거기서 나는 안전하게 거할 수 있으며, 일시적 피난을 위해 주께로 달아날 뿐만 아니라 주께 거하여 영원한 구원을 누릴 수 있다. 선한 사람의 기도는 너무나 간략하면서도 그 얼마나 무게가 있는가! 그는 수식적인 미사여구를 전혀 사용하지 않으며, 너무도 진지한 나머지 단순해질 수밖에 없었다. 공중 기도를 맡은 모든 사람들은 이를 본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3절. "주는 나의 반석과 (나의) 산성이시니." 여기서 시련을 당하는 영혼이 다시금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확신을 다짐한다. 믿음을 반복하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역경의 시기에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공언하는 것은,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중요한 방법이다. 능동적인 봉사가 좋은 것이긴 하지만, 수동적인 믿음의 확신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결코 적은 일로 평가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우리 마음을 결코 풀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하게 여호와께 고정시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여기 사용된 두 개의 인칭대명사는 마치 단단히 박힌 못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꼭 붙들고 있는 듯하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고정시킬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반석과 산성이라는 상징적 표현은 거대한 지브롤터(난공불락의 요새를 나타냄-역자 주) 요새에 의해 예시될 수 있다. 대적들은 종종 이 요새를 포위 공격했지만, 결코 우리에게서 빼앗지 못했다. 고대의 요새들은, 오늘날의 전투 방식으로 보자면 난공불락이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멀지만, 옛날에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다. 그때에는 산악 요새에서 약한 무리들도 안전함을 느꼈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반석이시므로 다윗이 그분께 자신의 반석이 되어 달라고 간구드렸다는 특이한 사실에 주목하라(2절). 또한 이를 통해, 우리가 믿음으로 파악한 것을 경험으로 누리기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라. 믿음은 기도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시편 기자는 마치 논리학자처럼 조목조목 이유를 들어가며 자신의 주장을 피력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내가 주를 신실하게 의지하므로, 오 나의 하나님, 나의 인도자가 되소서. 인도하는 것과 지도하는 것은 서로 매우 닮은 두 가지 사항들이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의미상의 차이점이 간파될 것이며, 특히 후자는 '나를 보살펴 주소서'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의 표현은 절박한 결핍 상태를 시사한다. 우리에게 이중의 지침이 요구되는 이유는, 우리가 어리석고 갈 길은 험하기 때문이다. 군사인 나를 인도하시고, 여행객인 나를 지도하소서! 아기로서의 나를 인도하시고, 성인으로서의 나를 지도하소서!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실 때 나를 인도하시고, 설령 주께서 함께하지 않으실지라도 나를 지도하소서. 주의 손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말씀으로 나를 지도하소서. 여기서 사용된 논거는 무상의 은혜의 저장소로부터 가져온 것이다: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지도하소서. 우리는 자기 자신 속에 있다고 상상하는 어떤 장점에다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서 눈부시게 빛나는 그 영광스러운 선하심과 은혜로우심에다 호소한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영예가 손상당하는 것에 대해 참으실 수 없다. 그런데 만일 그분을 의뢰하는 자들이 멸망당해야 한다면 분명 그분의 영예가 손상당하는 셈이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모세는 "주의 크신 이름에 대해 어떻게 하시려나이까"라고 호소하였다.
4절.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내소서." 다윗의 대적들은 강력할 뿐만 아니라 교활하기도 했다. 그를 힘으로 이길 수 없을 경우에, 간교한 술수로 그를 사로잡을 것이다. 우리의 영적 대적들도 그와 같은 부류에 속해 있다. 그들은 뱀에게서 난 종족들이며, 간사한 책략으로써 우리를 덫에 빠트리고자 한다. 본절의 기도는 신자가 새처럼 사로잡힐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사실, 우리는 너무도 어리석어서 종종 이런 상황에 직면한다. 새사냥꾼의 솜씨는 너무도 능숙하기 때문에, 단순한 새들로서는 이내 그 그물에 걸려들고 만다. 본문에서 기자는, 설령 그물에 사로잡힌 상태라 해도 구원될 수 있기를 간구한다. 이것은 적절한 간구이며, 실현될 수 있는 사항이다. 영원한 사랑은 사자의 턱 사이에서와 지옥 깊숙한 곳으로부터 성도를 구해낼 수 있다. 영혼을 시험의 그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는 예리한 분별력이 요구되며, 사악한 술책의 덫으로부터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인도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여호와는 어떤 긴급 상황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대처하신다. 따라서 가장 교묘하게 설치된 사냥꾼의 그물도 그분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결코 사로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물 치는 일에 있어 그토록 영리한 자들에게 화가 있다:다른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들은 자신이 멸망당할 것이다. 비밀스럽게 덫을 놓는 악당들은 공개적으로 징벌받을 것이다.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KJV 직역. 이는 주께서 나의 힘이시기 때문입니다-역자 주.) 이 몇 마디 말 속에서 그 얼마나 형언할 수 없는 귀한 의미가 발견되는가! 천상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너무도 즐겁게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한 고난도 흔쾌히 견딜 수 있다. 하나님의 권능은 대적들의 모든 수고를 산산이 흩어버리며, 그들의 술책을 무산시키며 그들의 교활한 속임수를 좌절시킬 것이다. 그렇듯 비길 데 없는 권능을 약속받은 사람은 행복하다. 비열하고 간교한 그물에 얽혀 들었을 때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지만, 여호와의 권능은 항상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 권능을 간청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것이 바로 가까이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일 믿음을 통해 이스라엘의 강하신 하나님의 권능만을 의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그 거룩한 의뢰를 간청의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5절.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다윗의 이 생생한 표현은 우리 주님이 임종 때 하신 말씀이며, 성도들이 이 세상을 떠나면서 흔히 사용해 온 것이다. 이것이 귀하고 구별되며 지혜롭고 또한 엄숙한 말씀임을 확신하라. 우리는 지금 그리고 무시무시한 마지막 시간에 이 말씀을 사용할 수 있다. 삶과 죽음에 있어 의인의 염려 대상은 자신의 몸이나 재산이 아니라 자신의 영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라. 영혼이 바로 그의 보석이며 그의 비밀스러운 보물이다. 이것이 안전하다면, 모든 것에 이상이 없다. 그가 자신의 진주를 어떻게 다루는지 보라!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손에다 맡긴다:그것은 그분으로부터 말미암았고 그분께 속한 것이다. 그분은 예전에 그것을 지켜 주셨고, 지금도 그것을 보존하실 수 있으며, 그분이 그것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다. 여호와의 손 안에서는 모든 것이 안전하다. 우리가 여호와께 의탁하는 모든 것은 지금 그리고 우리가 서둘러 향하고 있는 그날에도 안전할 것이다. 의인은 주저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손에다 자신을 맡긴다. 그는 그곳에 들어가기에 족하다. 하늘의 보살핌 속에서 자는 것은 평화로운 삶이요 영광스러운 죽음이다. 항상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하신 보살핌에다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되 지속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하면, 설사 삶이 위태롭고 역경이 바다의 모래처럼 많이 닥칠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평안하게 거할 것이며 조용한 쉼터에서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구속은 확신을 위한 견고한 기반이 된다. 다윗은 우리와는 달리 갈보리를 알지 못했지만, 일시적 구속이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렇다면 영원한 구속은 우리에게 더욱 큰 위로를 제공하지 않겠는가? 과거의 구원은 현재적 도움을 위한 강력한 근거가 된다. 여호와께서 이제까지 해 오신 일을 또다시 행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불변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진실하신 하나님이시며, 자신의 약속들을 신실하게 지키시며, 또한 성도들에게 은혜로우시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6절.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진정 힘있는 분의 팔을 의지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스스로 허탄한 확신을 갖기 마련이다.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신을 섬기기 마련이며, 만일 그가 유일하고 참되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려 한다면, 그는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셈이며, 거짓된 것에 대해 미신적 경의를 표하고, 또한 천박한 망상을 간절한 소망으로 기다린다. 이런 자들은 다윗의 친구가 아니었다. 다윗은 그들을 줄곧 혐오했다:'미워하고'라는 동사는 과거 시제뿐만 아니라 현재 시제도 포함한다.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그들을 미워했다. 그는 우상 숭배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참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그들의 어리석음과 사악함에 대해 반발했다. 그는 미신적으로 의식을 준수하는 그들의 모습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우상들을 가리켜 공허하고 헛되며 실체가 없는 허탄한 것이라고 했다. 가톨릭 교도들과 트랙터 운동(가톨릭의 부흥을 제창했던 운동-역자 주)의 지지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묵인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은 부족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만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 인격, 재치, 혹은 다른 그 무엇을 숭배하는 자들을 피해야 한다. 후자는 선망의 대상이기는커녕, 전적으로 헛된 것을 의존하는 가련한 존재로 간주되어야 한다.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이는 매우 유행에 뒤진 듯이 보일 수도 있지만, 시편 기자는 과감하게 단순해지고자 했다. 나쁜 본보기들로 인해 우리가 진리를 위한 단호한 결단을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진리에 대한 변절이 만연한 가운데서 오히려 우리는 더욱 담대해야 한다. 이처럼 여호와를 줄기차게 신뢰하는 것은 항상 요구되는 위대한 탄원인 셈이다: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하나님의 팔에 매달리며, 모든 것을 그분의 신실하심에 과감하게 맡겨야 한다.
7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8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7절.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그는 기뻐하며, 믿음으로 고대하는 장래의 자비에 대해 그는 즐거워한다. 가장 절박한 탄원을 드릴 때에라도, 우리는 여호와를 찬미할 시간적 여유를 찾아야 한다:찬양은 결코 기도에 방해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기도를 생동감 있고 활기차게 해준다. 슬픈 음조의 삼현금이 분위기를 압도하는 때에 심벌즈의 고음을 간간이 듣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기뻐하며', '즐거워한다'라는 두 낱말은 교훈적으로 반복된 것이며, 우리는 거룩한 승리의 감격을 줄일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은 포도주는 우리가 과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접으로 마실 수도 있는 것이다.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주께서 나의 곤란을 보셨고 측정하셨으며, 그것에 관여하셨고 그 한도를 설정하셨으며, 또한 온갖 방법을 통해 그것을 자상하게 숙고할 문제로 여기셨다. 숙고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기울인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숙고하시는가?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다른 사람들이 성도들을 받아들이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길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포용하신다. 그분은 자신의 친구들을 기꺼이 알고자 하신다. 그분은 그들의 남루한 외모를 보고서 그들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기시지 않는다. 그분은, 그들의 얼굴이 질병으로 인해 야윌 때나 혹은 그들의 마음이 낙심으로 인해 침통할 때, 그들을 잘못 판단하여 내던져버리지 않으신다. 더욱이, 주 예수께서는 독특한 번민에 빠져 있는 우리를 깊은 공감을 통해 아신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경험적인 이해의 결핍으로 인해 우리와 더불어 슬픔을 나눌 수 없을 때, 예수께서는 우리와 함께 가장 깊은 바닥으로까지 내려가사 우리의 고뇌를 이해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가장 깊은 슬픔까지 공감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모든 병고들을 잘 아시는 의사이시다. 그분께는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가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할 때에도, 그분은 우리의 처지를 아신다. 그분은 우리를 아셨고 또한 아실 것이다:그분을 더 많이 안다는 것이 그 얼마나 큰 은혜인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소중한 철학적 금언이지만, "네가 하나님께 알려진 바 되었다"는 말은 더할 나위 없는 위안이 된다. 본절의 '환난'이라는 말은 복수형이다. "의인에게는 고통이 많다."
8절.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어떤 사람의 수중에 가두었다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지배를 받도록 넘겨버렸다는 뜻이다. 이제 신자는 사망이나 마귀의 수중에 있지 않으며, 사람의 지배는 더 더욱 받지 않는다. 대적이 일시적으로 우리를 억압하여 이득을 취할 수 있지만, 우리는 마치 문이 활짝 열린 감옥에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감금당한 채로 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며, 항상 피할 길을 내어 주신다.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라:시민적 자유는 소중하며, 종교적 자유는 고귀하다. 그리고 영적 자유는 값을 매길 수조차 없다. 어떤 곤경이 닥치더라도 이러한 자유들만 남아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성도들 중에는 가장 큰 곤경에 처했을 때 자신의 영혼이 가장 심원해지는 것을 경험한 이들이 많다. 그들의 몸이 보너(Bonner)의 지하 석탄 저장고나 다른 협소한 지하 감옥에 눕혀져 있을 때 그들의 영혼은 넓고 안락한 방 가운데 있었다. 그 어떤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동일한 은혜가 임했다. 뿐만 아니라, 은혜는 그 절박한 상황을 도리어 기회로 삼아 그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9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10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11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12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사망한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파기와 같으니이다
13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9절.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제,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서글픈 처지를 구체적이고도 소상하게 묘사한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으며, 자신의 상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또한 자기 내면의 황량함을 표현한다. 이 첫 문장은 뒤따르는 모든 내용을 간략하게 포괄하는 것으로서, 그의 비탄어린 고백에 대한 제목 역할을 한다. 비참한 상태는 자비를 불러일으킨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긍휼히 여기소서"라는 표현은 기도이다. "내 고통을 인하여"라는 논거는 분명하고 개인적인 만큼 널리 알려진 것이다.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흐릿하고 내리깔린 눈은 분명 건강에 이상이 있음을 알린다. 눈물을 통해 염분이 빠져나가면 기력이 쇠해지며, 눈물을 펑펑 흘릴 경우에는 눈물샘을 고갈시키기 쉽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자기 질병의 증상을 고하도록 하신 것은, 그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결핍 상태를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혼과 몸이." 혼과 몸은 너무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한쪽에 이상이 생기면 다른 쪽이 반드시 그것을 느끼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다윗에 의해 묘사된 바와 같은 이중의 쇠약감에 대해 문외한이 아니다. 우리는 신체적 고통으로 인해 쇠약해지며, 정신적 고뇌로 인해 혼란을 겪는다. 그와 같은 두 가지 바다가 서로 만날 때에는, 키 조종석에 앉은 도선사가 흉흉한 파도에 숙련된 사람이어서 폭풍우를 통해 자신의 우수한 기술을 입증해 보일 정도이면 좋을 것이다.
10절.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한탄하는 것이 그의 일과가 되었다. 그는 매일 낙심의 감옥에서 지냈다. 마치 양초가 타서 없어지듯이, 그의 존재의 생기와 실체가 소진되고 있었다. 그에게 닥친 역경들이 그의 삶의 날들을 단축시키고 있었고, 그를 위해 때 이른 무덤을 파고 있었다. 슬픔이란 우리의 생명이라고 하는 모든 재산을 허비케 하는 서글픈 장터이지만, 거기서 이루어지는 거래는 허영의 시장(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시장 이름-역자 주)에서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훨씬 유익할 수 있다. 잔칫집보다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낫다. 검은 색 옷이 보기에 좋다. 눈물 속의 염분은 유익한 약으로 작용한다. 우리의 해들을 범죄 가운데서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한숨 속에서 보내는 것이 더 낫다. 여기 언급된 두 문장은 동일한 개념을 전해 준다. 하지만 성경에 쓸모없이 포함된 말은 하나도 없으며, 반복 표현은 열렬함과 끈기를 나타내기에 적절하다.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다윗은 자신의 슬픔의 밑바닥을 살피고서, 죄악이 거기 잠복해 있음을 간파한다. 우리의 죄악에 대해 근심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시편 기자의 마음을 좀먹고 그의 기력을 쇠하게 만는 것은 바로 그의 추잡한 범죄가 아니었던가?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죄악된 음식은 비록 입에는 달콤하지만 속에서 독으로 판명된다. 만일 우리가 기력의 일부를 방탕하게 죄악을 위해 사용한다면, 죄악이 우리의 기력 중 남은 부분도 점차적으로 취하고 만다. 우리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신체적, 정신적, 도덕적, 그리고 영적 활력을 모조리 상실하게 된다.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그의 신체 구조 중 내밀한 부분들까지 쇠약해져서, 가장 단단한 부분인 뼈마저 허약해짐을 느꼈다. 이러한 상태에 이른 사람은 비참해진다.
11절.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대적들은 어떤 형태로든 나를 궁지에 빠뜨리기를 즐겨한다:나의 서글픈 처지가 그들에게는 음악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악의적으로 해석하여 하늘의 심판이 내게 임한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치욕을 참도록 요청받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치욕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지만, 그 고통을 당해본 사람은 그것으로 인한 상처가 얼마나 심한지를 알고 있다. 사람들 중 가장 뛰어난 자들이 가장 가혹한 적들과 마주치기 쉬우며, 가장 잔인한 조롱을 당할 수도 있다.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가장 가까운 자들이 가장 날카롭게 찌를 수 있다. 공감해야 할 사람들에게서 모욕을 당할 때 우리는 가장 심한 모욕을 느낀다. 아마도 다윗의 친구들은 그의 쇠락하는 운명에 동참하기를 두려워했던 것 같으며, 따라서 그의 대적들로부터 호의까지는 아니더라도 동정이라도 얻기 위해 그에게서 등을 돌렸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심의 지배를 받는다:가장 신성한 결속들마저 이기심의 영향으로 인해 깨어지고 말며, 극도로 비열한 행위들이 태연하게 자행된다.
"내 친구가 놀라고." 예전에 친밀한 관계를 맺은 자일수록, 더욱 거리가 멀어졌다. 우리 주님은 베드로의 부인을 당하셨고, 유다에 의해 배신당하셨으며, 가장 곤궁한 때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으셨다. 부상당한 사슴과 같았던 그분께 모든 무리가 등을 돌렸다. 신자가 경멸당하고 중상적인 비난의 희생물이 될 때, 인간의 친절함이라는 우유는 응고된다.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그토록 철저하게 경멸당하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으로 보이기가 두려워서, 한때 그와 교분을 맺기 위해 애를 썼던 사람들이 마치 역병에 감염된 자를 피하듯 급히 그에게서 떠났다. 한때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었던 탁월한 성도를 일반적 조롱거리이자 인류의 보편적 혐오 대상으로 전락시킬 수 있는 중상은 참으로 잔인하고 사악한 것이다! 결백한 사람이 어느 정도의 극한적인 불명예 상태로까지 전락할 수 있는지!
12절.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사망한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다윗이 젊은 시절에 보여 주었던 그 모든 용맹스러움이 이제 기억에서 사라졌다:그는 조국을 건진 구원자였지만 이제 그의 업적은 망각 속에 매장되었다. 사람들은 가장 깊은 은혜들을 곧잘 쉽게 잊는다. 인기란 결국 덧없는 것이다:오늘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도 내일이면 모든 사람에게 잊혀질 수 있다. 중상을 당해 질식할 정도에 이르기보다는 차라리 죽은 것이 더 낫다. 죽은 자에 대해서 우리는 좋은 점만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시편 기자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나쁜 점만을 들추어내고자 했다. 이 땅에서 사랑의 대가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대개 사람들은 가장 뛰어난 일꾼들에게도 노임을 섭섭하게 지불하며, 그 일꾼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때에는 가차없이 쫓아내기 때문이다.
"파기와 같으니이다." 파기는 쓸모없고 낡았으며 무가치하고 버린 바 되고, 또한 기억에서 잊혀진 것을 가리킨다. 왕이 그런 물건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명성을 전혀 내세우지 않고 종의 형체를 취하신 겸비하신 왕 중 왕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13절.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비방을 일삼는 독사 같은 한 사람이 모든 위안을 소멸시킨다면, 그 패거리 전체의 독은 어느 정도의 해악을 끼치겠는가?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은 유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다윗의 경우에는 그를 비난하는 음성이 그의 고요한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요란했다. 그들은 더러운 입술을 너무도 담대하게 놀려 피해자 앞에서 거짓 비방을 퍼부어대기까지 했다. 시므이는 단지 어느 한 부류에 속한 한 명에 불과했으며, "피를 흘린 자여······가거라"는 그의 외침은(삼하 16:7) 수많은 벨리알의 자손들이 흔히 하는 말일 뿐이다. 바알세불의 모든 비열한 패거리들로부터 비방의 고함소리를 듣는 사람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받은 자일 수 있다.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그는 무서운 생각, 위협, 기억, 그리고 예감 등에 사로잡혀 있었다. 끊임없는 공격에 시달리지 않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땅의 탁월한 자를 향해 일제히 맹공격을 가하는 그들의 불경건한 행위에 대한 언급이다. 종종 악인들이 성도들보다 더 인정을 받으며 또한 거룩한 사업을 도모하는 의인들보다 사악한 일을 착수하는 악인들이 대개 더욱 세심한 배려와 신중함을 보인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의인을 대적하는 자들의 잔혹성에 주목해 보라! 그들은 의인의 피를 보아야 만족한다. 그들은 그 피를 위해 음모와 계교를 동원한다. 악의가 가득한 핍박자들의 처분에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사자에게 던져지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사자는 포만감을 느낄 경우에 먹이를 아껴 두지만 악의란 늑대처럼 가차없고 잔인하기 때문이다. 모든 악마 같은 습성들 중 가장 잔인한 것이 바로 시기이다. 수많은 독화살들이 모두 시편 기자를 겨누고 있을 때, 그의 쓰라린 상태가 어느 정도였을까! 하지만 이 모든 상황 가운데서 그의 믿음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그의 하나님도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우리를 위한 격려가 바로 여기에 있다.
14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15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16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17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18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
14절.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고통스러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믿음은 굳건히 존속되었으며 그 대상으로부터 이탈되지 않았다. 이는 참으로 복된 구원을 제시하는 구절이다. 우리의 방패인 믿음이 안전한 한, 치열한 싸움이 전개될 수 있지만 그 궁극적 결과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일 믿음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들판 높은 곳에서 사울과 요나단이 살해당한 것과 같은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그는 큰 소리로 여호와께 충성을 다짐했다. 그는 순조로울 때만 믿는 신자가 아니었다. 싸늘한 서리가 내린 것과 같은 조악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부여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치 모든 궂은 날씨를 대비하기에 적절한 의복처럼 그 믿음으로 자신을 감쌌다. 다윗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키케로(Cicero)의 달변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다른 어떤 말보다도 더욱 감미롭다. 신속한 구원을 베푸시는 그분 자신의 약속에 대해 영광을 돌리기 위한 논거로서 이렇듯 집착력 있는 믿음이 여기 언급되고 있음에 주목하라.
15절.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우리의 운명을 주권적으로 중재하시는 분은 우리의 생명에 관한 모든 문제들을 주관하고 계신다. 우리는 운명의 바다에 표류하는 부랑아가 아니라 우리가 사모하는 하늘을 지향하는 무한한 지혜의 키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다. 섭리는 고뇌하는 머리를 받쳐 주는 부드러운 베개이며 근심을 누그러뜨리는 진정제이자 절망을 묻어버리는 무덤이다.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의 뜻이라면 핍박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도 적절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의 바라는 바대로 허락될 수 없을 때에는, 격려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대적의 모든 격분을 멸시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또다른 형태의 구원을 얻을 것이다.
16절.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하늘의 햇빛을 내 영혼에 비추소서. 그리하면 이 땅에 아무리 폭풍우가 몰아닥쳐도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오 여호와여, 주의 은총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그리고 주께서 제 삶의 방식을 기뻐하신다는 의식을 갖도록 허락해 주소서. 그리하면 모든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리며 비방해도 나는 개의치 않겠습니다. 만일 종이 주인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에 대해 실망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종이 아니다. 그들은 그에게 품삯을 지불하지 않으며, 그들의 견해가 그에게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의인으로서는 자비 외에는 달리 호소할 것을 알지 못한다. 그 누가 법적 소송을 재촉하든지간에, 다윗은 결코 그런 것을 생각지도 않는다.
17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제 기도를 창피스럽게 만들지 마소서. 하나님을 향한 나의 확신을 비웃는 조롱으로써 가증스러운 자들의 입술을 채우지 못하게 하소서.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그들로 하여금 나의 잘못이 고정되고 그들 자신의 교만이 큰 혼란에 사로잡히는 것을 보고 놀라게 하소서. 평강의 왕의 온유하신 통치하에서 우리는 보다 유순한 심령으로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불경건한 죄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몫이란 수치와 죽음의 침묵이라는 예언적 의미에서 이와 같은 말씀을 사용할 수 있다. 그들이 경멸 대상인 신자들에게 임하기를 바랐던 바가 보응적인 공의의 판결에 의해 그들 자신에게 임할 것이며, 그 판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가 해악을 좋아했으므로, 그에게 그것이 임하게 하자."
18절.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중상자들의 죄는 부분적으로 그 언어상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그들은 "무례히" 의인을 친다(KJV는 '지독한 말을 한다'는 식으로 번역되었다-역자 주). 그 '지독한 말'은 의인의 감정을 깊이 후벼 파고 그의 명성을 모질게 훼손시키려는 말을 가리킨다. 그러한 죄는 그들의 말하는 방식에 의해 더욱 가중된다. 그들은 교만하고 완악하게 말한다. 그들은 마치 자신이 사회의 핵심이며 의인은 단지 천박한 찌꺼기에 불과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자신에 대한 교만한 생각은 대체로 다른 이들에 대한 과소평가를 수반한다. 우리는 자신을 높일수록 이웃에게는 멸시하는 태도를 나타내기 쉽다. 무가치한 인물들이 선한 이들에게 늘상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붓는 것은 그 얼마나 사악한 모습인가! 그들은 자신에게 전적으로 결여된 도덕적 가치를 인식할 능력이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판단하는 자리에 오르며, 찌꺼기 같은 자들과 비교하여 그들을 판단한다. 거룩한 의분이 이 세상에서 그렇듯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무례함과 혐오스러운 거만함을 제거할 그 무엇을 바라도록 우리를 재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짓 입술로 벙어리되게 하소서." 올바르고 기독교적인 기도이다. 악인 이외에 누가 거짓말쟁이에게 필요 이상의 자유를 허용하려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개에로 인도하심으로써, 그들로 철저한 수치를 당하게 하심으로써, 혹은 그들로 자신의 말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 위치에 처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침묵하게 하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19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20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21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22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19절.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시편 기자는 묵상 가운데서 여호와의 은혜를, 저장 상태에 있는 것과 활용된 것이라고 하는 두 부분으로 나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공급하실 것들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쌓아 두셨다. 언약의 보고 속에서, 구속의 영역 가운데서, 약속의 상자들 속에서, 그리고 섭리의 창고 속에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택하신 자들에게 생길 수 있는 모든 결핍 상태를 보충하기 위해 풍성한 은혜를 제공해 오셨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의 쌓아 두신 은혜를 상기해야 한다. 이러한 은혜는 아직 택함받은 이들에게 할당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들에게 제공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깊이 묵상한다면, 다윗의 심령을 뜨겁게 했던 것과 같은 헌신적인 마음으로 감사를 표하게 될 것이다.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천상의 자비가 모두 저장소에 감춰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담대히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공언하는 자들을 위해 수많은 방식으로 이미 계시되었다. 그들의 동료 앞에서 여호와의 이러한 은혜는 실체를 드러냈으며, 신실한 세대는 질책을 감내할 수 있다. 신자들을 향한 여호와의 은총에 대한 증거는 너무도 많다. 역사상 놀라운 사례들이 즐비하며, 우리 자신의 삶이 경이로운 은혜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좋으신 주님을 섬긴다. 믿음은 현재에도 커다란 보답을 받지만, 장래의 온전한 유업을 기대한다. 누가 주님의 종들과 더불어 자신의 몫을 차지할 것을 바라지 않겠는가? 주님의 무한한 사랑은 모든 거룩한 심령들을 경이로움으로 가득 채우신다.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그토록 엄청난 슬픔과 관련하여 이렇듯 기쁨으로 가득한 표현이 언급된다는 것은 특이하지 않은가? 참으로 믿음의 삶이란 이적이다. 다윗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로 인도되었을 때 그는 곧장 찬양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얼마나 크신가를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측량할 수 없는 선하심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그분은 선 그 자체이다. 거룩한 놀라움은 감탄사로써 표현되며, 여기서는 형용사들이 전혀 쓸모가 없다. 설명의 말이 아무런 소용도 없을 때에는 탄복의 외침이 어울린다. 우리가 측량할 수는 없지만 경탄할 수는 있다. 또한 비록 우리가 정확히 측정하지는 못해도, 열성적으로 찬미할 수는 있다.
20절.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교만(한글 개역 성경의 '꾀'가 KJV에서는 '교만'으로 번역되었다-역자 주)은 날카로운 무기이다. 교만한 사람의 오만불손은 영혼을 파고드는 쇠붙이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들은 가장 내밀한 곳인 지성소에서 안전하게 거한다. 그곳으로는 어떤 사람도 감히 침입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이 은밀한 거소에서는 성도의 마음이 평안히 쉬며, 교만의 발자국이 훼방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거하는 자들은 거만한 자의 비웃음에 무감각해진다. 예수님의 상처에서 떨어진 발삼 진통제는 경멸의 예리한 무기로 말미암은 우리의 모든 상흔들을 치유한다.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심령으로 무장할 때, 그 마음은 교만의 모든 화살들을 맞아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구설이란 먹이를 잡는 짐승들보다 더 무서운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구설로 말미암아 다툼이 일어날 때, 그것은 마치 늑대떼가 무더기로 들이닥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신자는 이러한 위험 속에서도 안전하다. 왜냐하면 왕 중 왕의 장막이 그에게 조용한 피난처와 고요한 안전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희생 제사를 드리는 비밀스러운 장막과 주권적인 왕의 장막이 가장 심한 곤경 가운데 처한 여호와의 백성에게 이중의 안전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즉각적인 행위에 주목하라:"숨기사", "감추사." 곤경에 처한 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친히 인격적으로 함께해 주신다.
21절.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때 우리는 그분을 찬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이는 마하나임에서 있었던 일을 가리키는가? 그때 여호와께서는 그로 하여금 압살롬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하게 하셨다. 아니면 그가 의미심장한 승리를 거두었던 곳인 암몬의 랍바를 가리키는가? 혹은 가장 가능성이 많은 견해로서, 그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가장 많이 경험했던 곳인 견고한 성 예루살렘을 가리키는가? 감사란 결코 고갈되지 않는 주제이다. 감사의 에벤에셀('도움의 돌'이란 뜻-역자 주)들은 서로 가까이 쌓아 올려져 하늘에까지 이르는 길을 낸다. 도시들에서든 촌락들에서든간에 우리의 복되신 주님은 자신을 계시해 오셨으며, 그 신성한 지점들을 결코 잊지 않으실 것이다. 고적한 헤르몬산이나 엠마오 마을이나 밧모섬의 바위나 혹은 호렙 광야 등, 이 모두는 하나님이 사랑의 옷을 입고서 우리에게 나타나심으로써 유명해지고 알려진 곳들이다.
22절. 자신의 결함을 고백하는 것은 항상 필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상기할 때, 우리는 자신의 잘못과 범죄들을 상기해야 한다.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대체로 우리는 급할 때에 말을 실수한다. 성급한 말을 하는 것은 단지 한 순간이지만, 그 말이 양심 속에 수년 간 머무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이는 무가치한 말이다. 그러나 불신은 가장 굳건한 신자의 마음 한 구석에도 자리잡고 있으며, 만일 섭리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다면, 여호와를 대적하는 여러 가지 악한 것들이 그 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난 신자는 한 명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으며,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은 그렇게 말했다. 그처럼 캄캄한 의혹들이 영원히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기를 기원한다.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우리가 믿지 않아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실하시며 또한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더럽히는 의심을 품고서 살아갈 때에도 그분이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자비인가! 우리가 자신의 기도를 가로막고 있는 방해거리들과 자신의 변변치 못한 기도 방식을 고려할 때, 그 기도가 하늘에 상달된다는 것은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23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24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23절.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매우 감동적인 권고로서, 하나님을 향한 기자의 깊은 사랑을 뚜렷이 보여 준다. 이 표현 속에는 더 많은 아름다움이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징계를 가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의 불은 많은 물로도 끌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무엇을 주는 사람을 칭찬하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무엇을 앗아가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것은 은혜로 말미암는 일이다. 모든 성도들은, 만일 그들이 주님을 더 잘 사랑하라는 진지한 권면의 인도를 따른다면, 한 분의 신성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게 된다. 만일 성도들이 여호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사랑하겠는가? 사랑은 구원받은 모든 식구들이 보편적으로 안고 있는 빚이다:그 빚을 지불할 책임을 면제받기 원할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이어서 사랑해야 하는 이유들이 제시된다. 왜냐하면 신앙적인 사랑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성실한 자들은 자신의 때를 기다려야 하지만, 결국에는 보상이 주어진다. 반면에 그 대적들의 모든 잔인한 적의도 그들을 멸하지 못한다.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이 또한 감사의 원인이다:교만한 행위는 너무도 혐오스러우므로, 교만의 폐단을 올바로 간파하기만 해도 그는 모든 거룩한 심령들로부터 사랑을 받기에 적합하다.
24절. "강하고." 활기를 유지하며, 비겁한 생각들로 인해 안색이 창백해지지 않도록 하라. 두려움은 약하게 만들고, 용기는 강하게 만든다. 승리는 용감한 자의 깃발을 기다린다.
"담대하라." 높은 데서부터 말미암은 능력이 활력의 근원을 통해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제공될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떠나기는커녕, 우리의 역경 가운데로 가까이 다가오실 것이며, 그분 자신의 권능을 우리 속에 넣어 주실 것이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너희 모든 사람들아, 고개를 들고 마음의 기쁨을 노래하라.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단지 '바라기만' 하는 소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주해
1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그러므로 의혹을 멀리하자. 의심은 죽음이며, 신뢰만이 생명이다. 우리가 분명히 여호와를 신뢰하며, 결코 우리의 신뢰 자체를 신뢰하지 말자.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다윗이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되기를 기도했다면, 우리 역시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노력하자.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수치당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C. H. S.
1절.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여러분의 믿음을 후원하기 위해, 그 믿음의 안전한 기반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해두자.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뿐만 아니라 그분의 '의'일 수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의 면류관을 기대한다(딤후 4:7, 8). 왜냐하면 그가 주로부터 기대한 것은 의로운 판결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의에 담대히 호소한다(시 35:24).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바로는 하나님의 선하심, 은혜 및 자비로 말미암아 그가 약속한 바를 실행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신실성과 의일 것이다.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
1, 2, 3절.
그림자들은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바위들도 거짓되다
놋쇠를 신뢰할 수 없고, 대리석 벽도 신뢰하지 못한다
가난한 자의 오두막도 왕의 궁전만큼은 안전하다
위대하신 하나님!
여기 아래에 안전이란 전혀 없습니다.
나의 대적처럼 보이는 주께서 사실은
나의 요새가 되시며
원수들의 타격을 파하시는 주께서
우리를 지켜 주셔야 합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며,
주로 말미암아 내가 쓰러지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나이다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모든 고역들을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얻었고
양심과 주의 손길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주의 공의가 바로 주님 자신임을 압니다.
나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또한 자비이심을 압니다
주께로 가지 않는다면, 내가 어디로 가겠나이까?
-프란시스 퀄스(Francis Quarles).
2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불평을 들으소서. 주의 귀를 내 입술에 대고, 나의 연약함 가운데서 말할 수 있는 모든 말을 들으소서. 대체로 우리는 병든 자나 죽어가는 자의 입술 가까이에 귀를 대고 그들의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본문이 암시하는 듯한 사항이 바로 이것이다. -아담 클라크.
2절. "속히 건지시고." '속히' 건짐받고자 하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그에게 닥친 위험이 얼마나 큰지를 엿볼 수 있다. 그는, 만일 하나님이 서둘러 그를 돕지 않으시면 자신의 생명이 종말을 고하고 말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존 칼빈.
2, 3절. "주는 나의 반석과······." 여호와께서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또한 사실상 그분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결국 시편 기자는, "나의 견고한 바위가 되소서. 왜냐하면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셈이다. -데이비드 딕슨(David Dickson).
3절. "주의 이름을 인하여." 목회자의 신망이나 천사들의 영광과 같이 단지 어느 피조물의 영예가 결부된 것이라면, 인간의 구원은 사실상 불확실할 것이다. 하지만 매 단계마다 하나님의 영예가 결부되어 있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인하여' 간구한다. 만일 하나님이 시작만 하고 계속하지 않으신다면, 혹은 그분이 어떤 사역을 수행하되 그것을 완수하지 않으신다면, 전능자께 비난이 돌아가도 마땅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따라 인간 구원의 사명을 떠맡으셨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이름은 그 일이 영광 중에 마감될 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된다. -윌리엄 플러머(William S. Plumer).
3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주의 권능, 주의 선하심, 주의 진리 등에 관한 명성 때문에.
"나를 인도하시고." 목자가 길잃은 양을, 인솔자가 군대를, 혹은 어떤 사람이 길 모르는 사람을 각각 인도하듯이-창 24:27; 느 9:12, 13; 시 23:3; 73:24 참조-나의 계획과 기질과 생각을 다스리소서. -마틴 가이어(Martin Geier, 1614-1681).
4절.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 히브리어상으로는 '바로 그 그물'이라는 뜻으로 특정한 그물을 가리키고 있다. -존 트랩(John Trapp).
4절.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 이 표현을 통해, 그는 자신의 대적들이 공개적으로 대항했을 뿐만 아니라 교활한 술수로 그를 포위하려 했음을 암시한다. 예컨대, 사울은 다윗을 사위로 맞아들인다는 조건으로 결혼 지참금 대신 블레셋인 백 명의 포피를 잘라 오도록 지시했다. 이는 선의를 가장했으나 다윗을 파멸시키기 위한 술수였다. 또한 자기 궁전에서 틈만 나면 다윗을 죽이고자 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했으며, 향후로 유사한 계교에 직면하게 되더라도 구원받게 해달라고 간구드렸다. -존 메이어(John Mayer).
4절.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산성'이 KJV에는 '힘'으로 번역되었다-역자 주.) 전능하신 능력은 계교를 통해 쳐둔 그물을 잘라버린다. 가련하고 미약한 우리가 그물 안에 갇힐 때, 하나님은 거기 갇히지 않으신다. 옛날 우화에서는 쥐가 사자를 풀어 주지만, 여기서는 사자가 쥐를 놓아 주는 격이다. -C. H. S.
5절.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는 폴리캅, 베르나르, 후스, 제롬, 루터, 멜란히톤, 그리고 기타 여러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주를 '위한' 순교자로서 혹은 주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로서 죽는 자들뿐만 아니라,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는 자로서 여호와와 '함께'하는 가운데 죽는 자들도 복되다." -스튜어트 퍼론(J. J. Stewart Perowne).
5절.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불가타역에 암시되어 있듯이, 이는 우리 선조들이 가장 신뢰했던 말씀이다. 그들은 모든 위험과 곤경 그리고 죽음의 위협에 직면하여 이 말씀을 활용했다. 또한 이 말씀은 숨을 거두기 직전의 병자에 의해 사용되었고, 그 병자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경우에는 사제가 대신 그렇게 말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 형식'에서 나머지 기도 내용은 영어로 기록되어도 이 말씀은 종종 라틴어로 삽입되었다. 왜냐하면 그 '말씀' 자체 속에 주권적인 그 무엇이 들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을 남용함으로써 올바른 사용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도록 하자. 힘차고 짧은 기도문으로서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경건한 자 혹은 시험받는 자가 확신을 갖고 이 말씀을 사용하면 그 무엇보다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아담 클라크.
5절.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영을 부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그들이 안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하늘로 가는 노정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대적들과 위험들로부터 보호받는 것이다. 성도들이 죽을 때, 분명 어둠의 세력들은 가능한 한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을 막으려 할 것이다. 그들은 하늘에서 쫓겨난 상태이므로, 이 세상에서 누군가가 그리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격분한다. 그러므로 성도가 자신의 영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한다는 의미 중 하나는, 파멸을 시도하고자 하는 모든 세력들로부터 그 맡긴 것을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전능한 권능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만일 이 권능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된다면, 그 누구도 그분의 손에서 그들을 잡아챌 수 없다. 구속주께서 타락한 천사들과 권세들을 무기력하게 만드셨으며, 승리의 승천을 통해 영광에 이르심으로써 그 사실을 입증하셨다. 또한 그분과 신자들의 모든 대적들을 사슬로 묶으심으로써, 신자들은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해 승리할 것이다. 천사들은 질서상 그들을 섬기러 보내심을 받으며 그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래서 그들이 주님의 존전으로 인도될 때까지 천사들은 맡겨진 자들을 신실하게 보살필 것이다. 사도는 이르기를,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고 했다.
(2) 그들이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는 것은, 그들이 그분과 함께 거하도록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과 함께하는 곳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 거기서는 모든 죄악이 배제되고 모든 선함이 존재하며, 그들의 소원이 충족되고 영원토록 부를 찬양거리가 발견된다.
(3) 그들이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는 것은, 자신의 육체도 마침내 살아나서 그 영혼과 재결합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마침내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된 축복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위안 가운데서, 즉 영원토록 행복을 누릴 산 소망을 지니고서 이렇게 행할 수 있는 근거들은 많다. 여기서는 두 가지만 언급하기로 하자:
(1)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되, 구속이라는 가장 깊은 사랑의 기초 위에서 그렇게 하신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나를 위해 주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심으로써, 지옥과 다가올 진노로부터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여호와여, 나는 주의 피조물일 뿐만 아니라 주의 구속하심을 받은 피조물이요 값으로 사신 바 된 자입니다.
나를 내적으로 부패케 하는 힘으로부터, 그것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마음으로부터 나를 구속하소서. 나를 이끄사 영원토록 주의 것으로 만드시기를 바라나이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것이오니 변함없이 나를 구원하소서.
(2) 그분의 신실하심.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진리의 하나님'이신 그분께 내가 나의 영을 부탁하나이다. 주님은 이전에 세상을 떠난 주의 모든 백성에게 베푸신 약속들을 지금까지 신실하게 이행해 오셨으며, 끝날까지 계속 그러하실 것을 나는 의심치 않습니다. -다니엘 윌콕스(Daniel Wilcox).
5절. "주의 손에." 그 손이 나를 물리치신다면, 사실상 나는 버림받아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 손이 나를 지키고 뒷받침할 때, 나는 안전하고 높아지며, 강하고 또한 선한 것으로 가득해진다.
오 영원하신 아버지여, 주님의 공적과 말씀을 인하여 나를 받으소서. 이는, 나 스스로에게는 아무런 자격도 없지만, 그분이 자신의 순종과 죽음을 통해 이제 나로 하여금 상을 얻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내 영과 혼과 몸과 능력과 그리고 나의 소원들을 주의 손에 맡기나이다. 나는 주의 손에 모든 것을 바칩니다. 주께서 모든 것을 용서하고 회복시키실 수 있도록, 나는 이제까지의 모든 것을 주의 손에 부탁합니다. 나의 상처들을 부탁하오니 치유해 주시고, 나의 눈먼 상태를 부탁하오니 밝혀 주소서. 나의 냉담함을 부탁하오니 뜨겁게 해주시며, 나의 사악하고 그릇된 길을 부탁하오니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소서. 그리고 나의 모든 죄악들을 부탁하오니 내 영혼으로부터 그 모두를 뽑아내어 주소서. 오 나의 하나님, 주의 신성한 손에 나의 존재를 부탁하며 또한 바칩니다. 나보다 주께서 훨씬 더 잘 아시는 나의 존재는 연약하고 비참하며, 상처를 입고 부서지기 쉬우며, 눈과 귀가 멀고 벙어리 상태이며, 궁핍하고 모든 선한 것이 결여되어 있으며, 또한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는 나의 죄악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의 존재는 내가 알거나 표현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비참한 상태입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를 받으사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의도하셨던 존재가 되게 해주소서. 내 모든 일들, 나의 관심사들, 나의 기질, 나의 성공, 나의 위안, 나의 노동, 그리고 내게 임하리라고 주께서 알고 계시는 모든 것을 주의 신성한 손에 부탁하고 바치며 의탁합니다. 모든 것을 주의 영예와 영광에 집중시키소서.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모든 일들 가운데서 주의 신성한 손길을 자각하게 하소서. 달리 추구할 것은 전혀 없으며, 오직 이 사실을 곰곰이 돌아볼 때에만 비로소 모든 면에서 안식과 위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천지를 지으사 아직도 보존하고 계시며 또한 나를 주의 것으로 삼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손길이여, 나를 주로부터 멀어지지 않게 하소서. 주의 손 안에서 나는 어린양을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손길 안에 그분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분과 더불어, 이 사랑스러운 손길 안에서 나는 평안히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죽음을 맞으면서 주의 손길 안에 있는 소망을 내게 남겨 주셨으며, 그 무한하신 자비 안에서 나를 그 손길 가운데 두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손은 나의 유일하고도 특별한 피난처입니다. 이 손길에 의해 내가 살며 나의 존재를 유지하오니, 나로 하여금 줄곧 그 손길을 통해 살아가며 또한 그 안에서 죽게 하소서. 그 손길 안에서 나는 우리 주님의 사랑 안에 살게 되며, 오직 그 손길로부터 모든 선한 것을 바라며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손길로 말미암아 마침내 주님과 더불어 면류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토메 드 제수(Fra Thome de Jesu).
5절.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비록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당하셔야 했지만, 그 생애의 마지막에 암울한 운명의 그림자가 그분 앞을 가로막지는 못했으며, 아버지의 얼굴 빛이 그분께 비쳐졌다. 그분은 자신의 생명이 죽을 운명이라는 암울한 물결 속으로 흘러들어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계시지 않았다. 그분은 그것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셨다. 그분이 계속 사실 것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인간 영혼의 차원에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분은 자신의 영이 지니는 특성인 무한하신 인격 속에서 살아 계실 것이며, 그 아버지의 특별하신 보호와 신실하심에 의해 보살핌을 받으실 것이다. 따라서 그분은 낙심 가운데 파멸당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것이 아니라, 승리를 의식하며 부활을 위해 아버지께 바치신 것이다. 이는 그분이 증거하신 바 핵심적인 사실이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확신이요, 자신의 생명을 살아 계신 아버지의 손에 맡기는 것이었다. 그분은 큰 소리로 그 사실을 세상에 선포하셨다. 세상은 죽음에 관한, 사망의 두려움에 관한, 그리고 불사와 부활에 대한 절망에 관한 이교적 개념 속으로 영원토록 가라앉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의 인격에 관한 그리고 그분과의 개인적 연합에 관한 개념을 영원토록 애매모호하고도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사자와 같이 담대한 심정으로, 운명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성경 시편의 말씀과 연관된 표현을 통해 다시 한번 생명을 증거하셨으며, 영원한 생명의 영께서 구약의 예언적 기대 속에서 이미 활동하고 계셨음을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영원토록 살아 계시는 그분은 죽음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영원히 사시는 분께 맡기셨다. 그분의 죽음은 그 거룩한 생애의 면류관이자 최종적이고도 가장 숭고한 사건이었다. -랑게(J. P. Lange, D.D., The Life of the Lord Jesus Christ, 1864).
5절.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다윗은 죽음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영을 하나님께 부탁했지만, 그리스도와 그분 이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영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은 죽음으로써 그리고 죽음 이후에 영원히 살 수 있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22편과 연관된다. 다음의 두 시편 모두 다 십자가상의 그리스도께서 인용하신 것이다. 그분은 22편으로부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고뇌에 찬 쓰라린 말씀을 얻으셨다. 그리고 31편으로부터는 운명 직전에 마지막으로 언급하신 사랑과 신뢰의 말씀을 취하셨다. 시편은 그리스도의 찬송가이자 기도서였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6절. "미워하고." 거룩한 자들은 강렬한 열정을 소유하고 있으며, 악행자들에 대해 조심스럽고도 너그럽게 대하는 관용주의자들과는 달리 부드럽게 말하지 않는다. 악을 미워하지 않는 자는 선을 사랑하지 않는다. 선한 증오자도 있는 법이다. -C. H. S.
6절.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 천주교인들은 성인들을 더욱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해 그들의 이적들을 상상으로 꾸며내었다. 천주교인들에 의하면, 동정녀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았던 집은 수백 년 후에 먼저 갈릴리로부터 달마디아(갈릴리에서 2000마일 위쪽에 위치함)로 옮겨졌고, 그곳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로 옮겨졌으며, 이탈리아에서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되다가, 마침내 한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이적적인 치유들이 그 집으로 말미암아 발생하였으며, 그 집이 운반되어 올 때 나무들이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특성을 지닌 이야기들을 그들은 엄청나게 많이 갖고 있으며, 특히 "황금의 전설"이라 불리는 성인들의 전설 가운데 그러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책은 조잡한 자료들로 가득하므로, 루도비쿠스 바이브스(Ludovicus Vives)라는 학식 있고 솔직한 한 천주교인은 크게 격분하여 "저 책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외쳤다. 또한 그는, 그것을 쓴 사람이 "쇠붙이 같은 입과 납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책에 "황금"이라는 찬사가 붙은 데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천주교 주교인 멜키오르 카누스(Melchior Canus) 역시 그 책에 대해 동일한 비난을 가했으며(바이브스가 불평을 늘어놓았듯이) 불평하여 이르기를,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생애를 기록한 어떤 사람들보다는 철학자들의 생애를 적은 라에르티우스(Laertius)와 시저들의 생애를 기록한 수에토니우스(Suetonius)가 차라리 더 신실한 기록을 남겼다고 했다. 그들은 성인들의 유품들에 대해 경의를 표할 때 너무도 허탄하고 미신적이다. 그 유품들이란 성인들의 시신이나 시신의 일부, 그들의 뼈나 살이나 머리털, 혹은 그들의 의복 등일 수도 있다.
에라스무스(Erasmus)는 이렇게 말했다:"여러분은 이제 어디서나, 마리아의 젖(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체만큼이나 존중된다), 경이로운 기름, 십자가 조각들 등을 볼 수 있다. 특히 십자가 조각들을 모두 한데 모은다면, 너무도 많은 양이어서 큰 배에 싣기도 어려울 것이다. 어디에는 프란시스의 두건이 소장되어 있고, 또 어떤 곳에는 동정녀 마리아의 내의가 보관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안나의 빗, 요셉의 양말, 또는 캔터베리 도마의 신발 등을 보관한 곳도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장소에는 그리스도의 포피가 보관되어 있는데, 이것은 불확실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 전체보다 더욱 숭배를 받고 있다. 이러한 유품들을 숭배하는 자들은 그것들을 전시하여 일반인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려 하지 않으며, 종교의 모든 의미를 그것들 가운데서 찾고자 한다"(마 23:5에 관한 에라스무스의 언급). -크리스토퍼 카트라이트(Christopher Cartwright).
6절. 이교도들은 어떤 위험이나 곤경에 직면할 경우에 습관적으로 점이나 복술을 진지하게 의뢰하며, 그래서 거짓 신들에게 의지하여 그들로부터 조언과 지시를 받고자 한다. 그들은 그렇게 하여 제시받은 처방을 매우 미신적으로 따르지만, 이를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다윗은 이를 혐오하여 줄곧 하나님께 가까이하고자 하며, 그분으로 말미암는 도움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헨리 해먼드(Henny Hammond, D.D.).
7절.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곤경 가운데서 믿음은 기뻐할 사항을 제시하며, 그 자체에게 즐거움을 약속한다. 여기서와 같이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과거의 경험이 기억될 때는 더 그러하다:"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우리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와 직면할 때, 자신의 즐거움에 대한 근거를 유익 그 자체보다는 그 유익을 낳게 하는 근원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유익을 가능케 해준 그 근원으로부터 동일한 유익을 얻으리라고 소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이라고 말한다. -데이비드 딕슨.
7절.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사람에 대한 탄원으로 말하자면
더 이상은 결코 간구하지 않을 것이며
예전에 간구한 적도 없다
하나님에 대한 탄원으로 말하자면
예전에 간청한 바를 얻었고
따라서 다시금 간청할 것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그 얼마나 선하신 분인가! 우리가 간구할 때 그분은
지난 날의 은사들을 본보기 삼아
새로운 은사들을 주고자 하신다.
-프란시스 퀄스.
7절.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어느 날, 전쟁과 질병 그리고 다른 곤경 등과 같은 재난들로 말미암아 부요한 상태로부터 궁핍한 처지로 전락했던 한 사람이, 큰 낙심 가운데 고트홀트(Gotthold)를 찾아왔다. 그는 예전에 서로 알고 지냈던 사람들 중 한 명을 만나 겪은 일을 놓고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 사람은 그와 소원한 관계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인사하기 위해 몸을 낮추지 않았고 아예 말을 걸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눈을 딴 데로 돌리고서 마치 낯선 사람처럼 지나쳐 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한숨지으며 탄식을 늘어놓았다:"오 선생님,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아십니까? 나는 마치 비수가 심장을 꿰뚫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고트홀트는 대답했다:"그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원래 세상 사람들이란 높은 것을 선망하는 반면에 비천하고 낮은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치지요.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분은 높은 곳에 거하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십니다(시 113:5, 6). 또한 그분에 대해 시편 기자는 증거하기를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자신의 부유한 복장을 잃어버리고 누더기 상태로 그분께 간다 해도, 비록 슬픔 때문에 우리의 외모가 야위고 노쇠해진다 해도(시 6:7, 루터역, 불가타역), 비록 질병과 슬픔이 마치 좀과 같이 우리의 아름다운 용모를 훼손시켰다 해도(시 39:11), 비록 우리 얼굴이 수치심으로 인해 붉어지고 눈물과 먼지로 뒤범벅된다 하더라도(시 69:7) 그분은 여전히 우리를 인정하시며 우리를 받아들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로 위로를 삼으세요. 설령 사람들이 배척한다 해도 주 하나님께서 당신을 잊지 않으신다면, 결국 그 무엇이 당신에게 해를 가할 수 있겠습니까?" -크리스천 스크리버(Christian Scriver).
8절. 그분이 여시면 아무도 닫을 사람이 없다. 그 어떤 사람이나 마귀도 닫을 수 없도록 문을 넓게 열어 주신 여호와께 감사드리자. 우리는 사람의 수중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발은 넓은 자유의 방 안에 있지 않고 속박 가운데 행할 것이다. 우리의 대적들은 만일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우리를 다루기를 마치 손 안에 든 작은 새를 가지고 노는 사냥꾼처럼 했을 것이다. -C. H. S.
9절.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이 표현은, 근심의 영향으로 인해 실제로 눈에 장애가 온다는 점을 시사하는 듯하다. 교육받지 못한 자들 가운데서 아직 널리 퍼져 있는 오래된 견해에 따르면, 극단적인 근심하에서 그리고 부단히 눈물을 흘릴 경우에 시력이 약화되거나 아예 상실될 수 있다고 한다. 이 견해를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녹내장이라는 병명으로 안과 의사들에게 잘 알려진 매우 심각한 유형의 안질이 있다. 이 질병은 정서적 압박감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선천적으로 녹내장에 걸리기 쉬운 체질을 가진 사람이 갑작스런 근심에 빠짐으로써 그 질병이 급진전되어 치유할 수 없을 정도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 안타까운 경우들을 나는 여러 차례 본 적이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할 것같다. 눈의 기능을 건강하게 발휘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탄력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이 탄력성은 눈 속에 든 액체의 양과 눈을 감싸고 있는 섬유질 부분간의 정확한 균형을 통해 생기는 것이다. 만일 이 균형이 깨져서 액체의 양이 과도하게 증가하여 안구가 너무 단단해지면, 안구 내부에 갑자기 통증과 염증이 생길 수 있으며,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질 수도 있다. 이처럼 독특한 신체 상태를 조절하여 적절한 탄력 상태를 유지해 주는 특별 신경 조직도 있다. 대체로 우리 눈이 긴 생애에 걸쳐 이러한 탄력 상태를 줄곧 유지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하지만, 만일 이 신경 기능이 손상된다면-극도로 근심함으로 말미암아 혹은 억압적 요인으로 인해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안구가 갑자기 단단해질 수 있다. 비교적 최근까지만 해도, 급성 녹내장이나 갑작스런 안구 경화는 격렬한 통증과 염증을 수반하여 완전한 실명을 야기시켰다. 하지만 요즘은 수술을 통해 처치할 수 있게 되었다. 본문의 설명은, 바로 이와 같은 실명을 유발하는 근심의 악영향에 대한 것인 듯하다:"내가 근심으로 눈과······쇠하였나이다"(이 내용은, 근심이 눈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하여 우리가 런던 왕실 안과 병원에 요청하여 입수한 정보에 입각한 것이다. 조지 크리트체트 씨는 이 내용 이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귀중한 정보들도 제공해 주었다. 이 신사의 정중함 및 그 우수한 기관의 원장이 보여 준 정중한 태도는 여기서 특별히 언급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9, 10절.
만일 당신이 기도 방법을 몰라서 배우고자 한다면,
단지 믿음을 더하여, 동냥하는 사람처럼
이렇게 말하라.
'주여, 나는 큰 곤경 가운데서 궁핍하고 눈이 멀었고,
배고프고 다리를 절며 춥고,
또한 위로를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버림받아 고통과 결핍 가운데서
자신을 도울 수 없는 자를 구원해 주소서.
가련한 자를 굽어 살피시며,
예수님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지만 이런 말은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나는 예전에 결코 간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하지 않을 것입니다.'
-프란시스 퀄스.
10절. "나의 해는." 이탈리아역에는 "나의 고통은"이라고 되어 있다. 죽음과 모든 참경들은 죄로 인해 세상에 들어오며, 성경은 종종 그 죄의 원인과 결과를 뒤바꾸어 언급하기도 한다. -조반니 디오다티.
10절. 성도들이 시련에 처하여 매우 겸손해져 있을 때에는, 자그마한 죄악에 대해서도 양심이 요란한 소리를 낸다. 반면에 형통할 때에는, 양심이 우리 마음에 특면장과 큰 자유를 허락하는 교황과 같은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면류관이 영광스럽듯이 십자가도 꼭 필요한 것이다. -사무엘 러더퍼드(Samuel Rutherford).
11절.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만일 어떤 사람이 인내와 겸손을 추구하면, 그는 위선자 취급을 받는다. 만일 그가 이 세상 쾌락에 빠지면, 그는 게걸스러운 자로 간주된다. 만일 그가 공의를 추구하면, 그는 성급한 자 취급을 받는다. 만일 그가 공의를 추구하지 않으면, 그는 어리석은 자이다. 만일 그가 신중하려고 하면, 그는 인색한 자가 된다. 만일 그가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면, 그는 방탕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만일 그가 기도에 몰두하면, 그는 허영심이 강한 자가 된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에 커다란 손실을 안겨다 준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선한 일에서 손을 떼기 때문이다.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라는 시편 기자의 탄식도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크리소스톰(Chrysostom, 존 메이슨 닐에 의해 인용됨).
11절.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언젠가 나는 세상 사람의 관계가 어떠한지에 대해 한 노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내 생각에 이는 여기서 고찰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 좋은 실례가 된다. 그는 어느 공중 집회에 참석하고 있던 차에, 한 여자가 모인 무리들로부터 물러나서 구석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그 여자에게로 가보았더니, 그녀는 바로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온 그의 친구였다. 그가 인사하자, 그녀는 한숨을 지으며 이르기를 "지난번에 우리가 만난 이후로 내게 어려운 날들이 많이 닥쳤어"라고 했다. 세상 사람이 어떻게 행하겠는가? 그는 곧장 슬픔에 사로잡힌 친구를 떠나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스도나 그분의 종들에 대한 세상의 동정심이란 기껏해야 그 정도이다. -해밀턴 버쇼일(Hamilton Verschoyle).
12절.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사망한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가장 위대한 존재로 추앙받던 왕들조차 죽음에 처하여 어떻게 망각되는지를 보여 주는 주목할 만한 사례가 루이 14세의 임종을 통해 발견된다. "혐오스러운 진흙 덩어리와 같이 눕혀져 있었던 루이의 시신은 '어떤 가난한 사람들과 아르당트(Ardente) 교회의 사제들에게' 보내어졌다. 그들은 루이를 서둘러 '두 개의 납관 속에다 넣고서, 거기다 독한 포도주를 넉넉히 부었다.' 새로 즉위한 루이스가 신하를 대동하고서 그 여름 오후 내내 슈아지(Choisy)를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왕의 눈에서는 줄곧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다르토아 경에 의해 잘못 발음된 말 한마디에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더 이상 울지 않았다."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The French Revolution).
12절.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드리워진 휘장 뒤에서 죽어가고 있는, 그래서 그에 대한 소망을 버린 친구들에 의해 외면당하는 사람처럼, 눈과 마음에서 사라지고 무덤과 망각 속에 묻혀버린 죽은 사람처럼, 혹은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라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처럼(눅 8:49). -앤소니 터크니(Anthony Tuckney, D.D., 1599-1670).
12절. "파기와 같으니이다." 그릇이 아무리 유익하고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깨어져 버림을 당하면 더이상 쓸모가 없다. 마찬가지로,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을 끼치다가 나중에 버림받은 사람의 처지도 그러하다. -로버트 코드레이(Robert Cawdray).
12-15절.
무덤에 묻힌 자처럼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된 그릇처럼
많은 사람들의 비방을 받으며
사방에 두려움거리가 되고
나의 생명이 올가미에 걸렸나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나의 소망은 당신께 고정되었고
내가 이르기를
주께서 나의 하나님이시며
내 날들이 주의 손에 있다고 하나이다
격노한 대적들을 대항하여 주께서 도우시며
내 영혼을 핍박하는 자들이 물러서나이다.
-조지 샌디스(George Sandys).
13절.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어린 시절로부터 내가 처음으로 영혼의 중요성을 자각했을 때, 나는 종교적이고 경건한 사람들-이들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깊은 관심을 기울일 뿐이었다-이 어디서나 세상의, 특히 가장 사악하고 파렴치한 사람들의 의혹거리와 욕설거리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 놀랐다. 동일한 믿음을 고백하고, 동일한 하나님의 계명들을 자신의 법칙으로 삼으며, 주기도문에 나오는 것과 동일한 간구를 자신의 바람으로 여기고, 또한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그들의 입으로 한 말을 따라 진지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이를 불경건하고 세상적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파렴치한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 진지하면서도 자신이 적대시하는 자들에 의해 공언되고 약속되는 바를 이행하려고 애쓰는 자들은 가장 참기 힘든 부류에 속한다. 만일 종교가 나쁜 것이고 우리의 믿음이 진실되지 않다면, 이 사람들이 그것을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그것이 진실되고 좋은 것이라면, 그들이 스스로는 실천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그것을 진지하게 실천하며 살고자 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지만 우리는 죄악과 육욕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이 비합리적으로 변한 마당에 적절한 이유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나는, 세상의 진행 과정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가 일치한다는 점을 고찰한 이래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간 타락에 대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그리고 참된 성화의 기반이 초자연적이라는 점에 대한 주목할 만한 증거로 여기게 되었다:즉, 거룩한 씨와 뱀의 씨 상호간의 보편적 적의, 대표적 실례가 되는 가인과 아벨의 경우, 그리고 육신을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는 일 등이 그러하다. 또한 나는 이를,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기독교 신앙을 공고히 하기 위한 위대하고도 생생한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3절. "비방." 얼음처럼 순정하고 눈처럼 순수하라. 그리고 비방을 피하지 말라.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3절.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그들은 그의 명성을 훼손시킬 때, 진지하고 사려깊은 듯한 모습으로 자신의 사악함을 감추지만 자기들끼리는 그를 더이상 이 땅에 남겨 두어서는 안 되는 인물로 여기고서 파멸시키고자 했다. 그의 마음이 그토록 많고 그토록 예리한 유혹으로 인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존 칼빈.
14절.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문자적 번역은, "그리고 내가 주께 의지하였나이다"이지만, 히브리어 접속 불변화사인 "바우"(w)가 여기서는 '하지만'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의 역접 불변화사를 대신하여 사용되고 있다. 다윗은, 자신이 언급해온 시험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자신의 믿음을 굳건히 함으로 말미암아 낙심한 적이 없다고 밝히며, 오히려 주장하기를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견고한 소망을 줄곧 간직했노라고 한다. 또한 이는, 그가 너무도 관대하고 용감한 나머지 육신의 병약함으로 인해 허물어지지는 않는다는 식으로 자랑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도 아니다. 이 두 측면들이 서로 반대되는 듯이 보여도, 종종 한 인격 속에서 결합된다. 그래서 때로는 그가 근심으로 인해 수척해지고 모든 힘을 상실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부단히 호소할 것이라는 강력한 소망에 의해 지탱된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무리 깊은 슬픔과 무서운 시련에 압도당할지라도 비밀스러운 믿음의 불빛이 자기 마음속에 비취지 못할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다.
또한 그는 시험의 무거운 짐 아래에서 아무리 신음할지라도 하나님께 호소하러 일어서지도 못할 지경에 처하지는 않았다. 그는 수많은 장애들을 이겨냄으로써 본문에 나오는 바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믿음의 특성을 정의한다. 즉, 그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하나님이 결코 그를 버리거나 낙심시키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의 표현 방식에 주목하자:"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이 말씀 속에서 그는, 자신으로서는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시라는 진리에 온전히 설복당한 상태여서 그 반대되는 상황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 마음이 이러한 확신에 사로잡히기 전까지, 우리는 항상 불확실한 상태에서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이러한 선언이 내적이며 비밀스러울-입으로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 선언에 대한 증인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우리가 자신의 믿음이 온 세상에 의해 조롱당하는 것을 볼 때 오직 하나님께만 말씀을 고한다는 것보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우리 양심의 증언만으로 만족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몰아치는 물결이 아무리 격렬하고 또 아무리 심각한 공격이 닥쳐와 우리를 뒤흔든다 할지라도 우리가 부단히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 있으며 또한 그분께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라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견고한 원칙을 굳게 부여잡을 때, 그것은 분명 진정한 믿음에 대한 증거라 하겠다. -존 칼빈.
14절.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일만 개의 금광을 소유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 하나님의 종은 그 점을 이해하고 있으며, 아무런 부족함도 느끼지 않는다. 이 사실은 그에게 완전한 행복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는 그 안에서 기뻐하며 그것으로써 자신을 위로한다. 고레스 왕의 신임을 받았던 어느 대신의 경우도 그러했다:그는 자기 딸을 어느 큰 권력자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재산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당신 딸의 위치에 걸맞는 혼인 지참금을 어디서 구할 작정입니까? 당신의 재산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했다. 이때 그는, "고레스가 내 친구인데 내가 무엇을 염려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대답했다. 하물며 여호와께서 우리 친구가 되시는 한 우리는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다. 그분의 탁월하고 영광스러우신 속성들은 우리의 모든 결핍들을 만족시킬 수 있으며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존 스토턴(John Stoughton, Righteous Man's Plea to True Happinesse, 1640).
15절.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사람들이 동인도 제도를 향한 길고도 지루한 항해에 싫증이 나서 보다 단축된 북서쪽 항로를 개척하고자 했을 때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간단한 방법만을 선호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얻게 된다고 하여 자기 몸을 무시하거나 건강을 훼손시키거나 혹은 죽음을 재촉하는 어떤 일을 할 수는 없다. 성급하게 부요해지려는 자는 정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때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따라서 그것을 그분의 거룩하신 섭리에 맡겨야 한다. 우리에게는 할 일이 매우 많으며, 따라서 일하는 날과 노동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안식일과 휴식마저 침범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사도의 마음 상태와 같이(빌 1:21), 멈추든지 가든지 혹은 쉬든지 일하든지간에 늘 침착해야 한다. -에드워드 레이놀즈(Edward Reynolds, <J. Spencer>의 Things Old and New에서 인용함).
15절. "내 시대." (KJV에는 "나의 때들"이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내 생각으로는, 시편 기자가 이유 없이 복수형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복수형을 사용한 것은, 인생을 괴롭히는 다양한 재난들을 시사하기 위함이다. -존 칼빈.
15절. "주의 손에." 시계가 똑딱거리며 벽에 걸려 있다.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는 한숨을 쉬는 듯하며 마치 의식을 지닌 존재인 듯한 인상을 준다. 가련한 시계! 한번은 한 친구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영국에서 가장 훌륭하고 탁월한 정신 병원들 중 한 곳의 의사이자 원장이었다. 그 병원에 입원 중인 어느 환자는 총명한 지성을 지녔으되 정신의 어느 한 부위에 이상이 생긴 가련한 사람으로서, 대개 시계를 조립했다가는 해체하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내가 그곳을 방문하기 직전부터, 그는 그 시계를 하나 하나 병실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그것을 흔들어대는 새로운 증상을 보였다. 그를 보다 안전한 병실로 옮긴 후에, 나는 친구인 병원장과 함께 그를 찾아갔다. 친구가 물었다:"당신처럼 조용한 분이, 자신이 그토록 아끼는 시계들을 부숴버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가련한 환자는 매우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똑딱똑딱하는 소리를 견딜 수 없어 바닥에 집어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시계가 그것을 만든 자에게, 그 시계를 쥐고서 시간을 맞추는 자의 손에 그 자체를 내어맡길 때, 그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일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숭고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시계로부터 그것을 쥔 손으로 생각을 돌린다. "내 시대"로부터 "주의 손"으로. 시계와 시간은 나름대로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헛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두 가지 사항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 인간은 어떤 계획의 완성이라는 일 전체와 그 계획의 완성을 향해 내딛는 첫걸음이라는 가장 짧은 순간의 일 모두를 볼 수 있다. 이보다 더 분명한 사실은 없으며, 사람들이 이보다 더 생각하기 싫어하는 것도 없다. 우리는,
"어떤 초월적 삶을 고대하며,
이렇게 살도록 하나님에 의해 운명지어졌다."
-로버트 브라우닝(Browning, Robert<1849>).
이러한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실제적인 길은 우리의 모든 삶의 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분의 손이 우리의 모든 시대를 쥐고 계신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어떤 삶들은 다른 삶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우리는 이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보라, 어떤 삶들은 삶의 과정을 성취시키며 그 등급에 따라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 반면에, 이를 완전히 놓치고 마는 삶들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힘을 놓고 보더라도, 그것을 제어하는 사랑이 있음에 분명하다. 달이 바다의 조류를 조절한다고 한다. 그런데 하물며 영혼을 제어할 능력이 없겠는가? 분명, 보다 세상적인 삶에 있어서는 항상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늘에서는 항상 그러하다:달이 분명 조류를 좌우하듯이 하나님은 영혼을 좌우하신다. 때로는 사람이 외부적 능력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 채 자신의 영역에 대해 스스로 법칙을 세우도록 임명받은 존재인 듯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에도, 마치 별의 행로가 천체의 법칙에 따라 정해져 있듯이 그리고 위성의 운동이 해당 행성의 인력에 좌우되듯이, 그의 시대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 나는 불건전한 말이나 인생관에 눈을 돌리고 싶지 않으며, 여러분이 음울하고 불건전한 세상관이나 불완전한 신학을 제시한다면 나는 여러분과 상대하고 싶지 않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주님의 손.'
"내가 사람으로서 가능한 범위내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묘사하자면
모든 것이 사랑이되 또한 모든 것이 율법이다.
나는 신성 속에서 그것을 찾고 발견하며,
당신을 받아들이는 분은
내 얼굴과 같은 얼굴을 지닌 사람 같으신 분이다.
당신은 영원히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것이며,
내 손과 같은 손이
당신에게 새 생명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서신 것을 보라!'"
-로버트 브라우닝.
또한 그분은 "우리가 행할 길을 회복시키신다." 예수님의 손은 우리 시대를 주관하시는 손이다. 그분은 우리의 삶의 시계를 조정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시며 우리 안에 계신다. 내 시대가 그분의 손에 있다. 내 주님의 삶이 헛되지 않듯이 내 생명도 헛될 수 없다. -팩스턴 후드(E. Paxton Hood, Dark Sayings on a Harp, 1865).
15절. 다윗이 동굴에서 사울을 마음대로 처치할 수 있었을 때, 그의 신하들이 이르기를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이니이다"(삼상 24:4)라고 했다. 하지만 다윗은, 범죄하지 않고서 구원받을 날이 아직 이르지 않았으며 그래서 자신은 그날을 기다리겠노라고 말했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바로 그날이 하나님의 때이며 최선의 시기였다. -매튜 헨리.
16절.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근심의 구름이 여호와의 은총을 가리울 때, 믿음을 가진 자는 그 은총이 다시 빛날 것임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그 구름을 거두어달라고 기도한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데이비드 딕슨.
18절.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벙어리 되게 하소서." 초기 핍박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불량하고 글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말하며 무시하였다. 그래서 터툴리안은 이르기를,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을 그릴 때 나귀의 머리에 책을 손에 든 모습으로 그리곤 했다고 하였다. 이는 비록 그들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체하지만 사실은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쥬얼(Jewel) 주교는, 누가복음 11:15에 관한 설교에서, 터툴리안의 이러한 언급을 인용하여 자신의 시대에 적용하고 있다. 복음을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 대항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우리의 대적들이 바로 그러하지 않은가? 이런 길을 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단지 제화공들, 재단사들, 직공들, 그리고 결코 대학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자들뿐이다. 이는 주교 자신이 한 말이다. 화이트(White) 주교는 공개 법정에서 이르기를, 청교도는 멍청이들의 집단이라고 했다. -찰스 브래드버리(Charles Bradbury).
18절.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벙어리 되게 하소서." 교회(Vaudois Church:발도파란, 1170년 프랑스 피에르 발도의 인도하에 일어난 기독교 교파로서 16세기에는 종교 개혁에 참여했다-역자 주)의 유서 깊은 기념비(1100년)에 "황금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새겨진 내용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자가 있다면
만일 저주나 욕설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음행이나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다른 사람의 것을 취하지 않으며
원수에게 복수를 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발도이며, 그는 징벌할 자격이 있다."
-앙트완 모나스티어(Antoine Monastier,
A History of Vaudois Church, 1859).
19절.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어찌 그리 큰지요." 신중한 사람이라면 만인에 대해 관용을 베풀 계획을 세우되, 자신의 자녀들이나 가족을 속이면서까지 혹은 자기 재산을 다른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줌으로써 자기 집을 궁핍하게 만들면서까지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의 가족에 속하지 않은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에 있어 자신에게 속한 자녀들을 위해, 말하자면 상속권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남겨 두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계신다. -존 칼빈.
19절.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어찌 그리 큰지요." "쌓아 두신"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자. 그분의 자비와 은혜는, 마치 아버지가 일정 액수를 따로 비축해 두고서 그 돈주머니에 "이것은 누구 누구의 몫이다"라고 기록하는 것처럼, 그 자녀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권리를, 그리고 그분 안에 있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행복의 보화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점에 대해서는 진정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에게 이 모든 것을 얻도록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다. 그를 자녀로 만든 것이 또한 그를 상속자로 만든다. 믿음이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상속권에 대해 회의를 품지 않으려면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유익과 그분을 통해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특권들을 놓고 왈가왈부하지 않으려면, 믿음을 바라보라. -윌리엄 거놀(William Gurnall).
19절.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어찌 그리 큰지요." 시편 기자의 표현을 상고할 때, 나는 그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묘사하고자 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그 아버지는 자녀들을 징계하고 회초리를 대기도 하지만, 그들이 성장하여 재산을 신중하게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될 때 그들에게 제공할 것을 비축하기 위해 수고와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다. 내 아버지시여, 이 세상에서는 그 크신 은혜를 마치 당신의 자녀들에게 속한 것이 아닌 것처럼 감추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의 자녀들이기에 하늘의 보화들이 다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고 오직 우리에게만 주어질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나는 주어진 운명을 인내로써 감내하겠나이다. 하지만 가끔씩은, 하늘의 청명한 공기를 내게 불어넣으사 슬픔에 빠진 제 마음을 새로이 회복시켜 주소서. 그리하면 온전히 결실을 맺기까지 내가 더욱 차분하게 기다리겠나이다. -크리스천 스크리버.
19절.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묵상의 의무'라는 머리에 면류관을 씌우기 위해, 한 가지 사항을 더하자. 묵상으로 하여금 '감탄에로 옮겨지게' 하자:하늘에 속한 것들의 아름다움과 초월성과 관련하여, 우리는 감동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거기 골몰하여 황홀경에 빠질 정도의 단계로까지 이동해야 한다. 묵상이 감탄으로 이어지게 하며, 가장 높은 정도에까지 올라서라. 최고의 반응, 곧 하늘에 있는 성도들과 천사들의 반응 수준에까지 최대한 근접하라. 그들의 반응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차원 높은 황홀경과 감탄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묵상의 탁월한 대가들이며, 다윗 역시 묵상 가운데 종종 감탄을 발하는 탁월한 예술가였다. 우리는 이 점을 시편 8:1, 9과 시편 31:19("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에서, 그리고 시편 104:24("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다른 부분에서 다윗의 묵상과 감탄은, 마치 그의 수금이 연주되듯 너무도 희귀한 선율과 가장 높은 음조로 탁월하게 표현된다. 그것은 마치 신기한 광택을 내는 귀중한 금과 같다. 혹은 가장 값비싼 옥석을 가장 정교하게 갈고 닦은 것과 같다. 복된 바울도 역시 그러했다. 그는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소유한 자로서 수준 높은 감탄을 발했으며, 그 속에서 그의 영혼은 매우 따뜻하게 고무되었다. 이는 마치 튼튼하고 긴 날개를 가진 새가 높이 치솟아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 -나다나엘 래뉴(Nathanael Ranew).
19절. "인생 앞에서." 즉 '공개적으로.' 아마도 시편 기자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경건한 자에게 주어지는 일시적 축복들을 언급하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만민이 목격하는 심판 날에 의인에게 주어질 상급을 본문이 지칭하고 있다고 본다. 이 견해가 본절 앞 부분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더욱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룬다. -다니엘 크레스웰(Daniel Creswell, D.D., F.R.S., 1776-1844).
19절.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떤 친구가 되어 주실 것인지를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다만 그분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가서 온전히 그분의 것이 되도록 하라.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미워하며 그분 안에서 아무런 사랑도 발견하지 못하다가 나중에는 전혀 다른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을 것이다. 누가 감히 그분을 가리켜 매정한 주님이라고 말하는가? 그분을 아는 자라면 누가 그분을 불친절한 친구라고 말하겠는가? 그 딱한 존재들이 하나님에 대해 그토록 가혹하고 심술궂은 이미지를 갖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어찌 그리 큰지요"라는 성경 말씀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편 기자가 과장된 표현을 쓰고 있는가? 그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입증할 수 있는 범위 이상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에게 물어보라. 그리하면 그는 여러분에게, 자신은 여호와를 찬송한다고 말할 것이다(21절). 이것들은 그가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입각하여 말할 수 있는 사항들이었다. 그에게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는 놀라운 은혜를 보여 주셨다. 따라서 그는 그분을 사랑하고 또 그분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보다 차원높게 표현함으로써 온 세상으로 하여금 그분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갖도록 고무시킬 수 있게 되기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열정적으로 요청한다. -제임스 제인웨이(James Janeway).
19절.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시편 기자의 표현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상반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쌓여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하반절에서는 '베풀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은혜는 약속 가운데 쌓여 있다가 그 약속을 이행하는 중에 베풀어진다. 그리고 쌓여 있는 은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을 위해 베풀어진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듯이,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하여금 그 약속을 성취하게끔 한다. -나다나엘 하디(Nathanael Hardy).
20절.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사랑하는 우리 하나님은 이를 비밀스럽게 행하신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 안에서, 즉,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너무도 철저하게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비난이나 경멸도 또 어떤 구설의 다툼도 그에게 해를 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볼 수 없게 하시며, 또한 불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신다. -아른트(Arndt, 윌슨<William Wilson, D.D.>에 의해 인용됨).
22절.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간구자의 마음속에 그토록 큰 불신이 자리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윌리엄 세커.
22절.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믿음으로 드려진 기도에 대해 말하자면, 그 응답이 지체될 수는 있지만 간과될 수는 없다. 우리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다윗이 사울의 칼과 요나단의 화살에 대해 이르기를 반드시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듯이.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덧붙인다:"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존 플라벨.
22절.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한때는 밤이었으나 이제 우리에게 비취는 아침의 기쁨을 누리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해 줄곧 감탄하는 자들이 되자. 우리 속에 성급함과 불신밖에 없음을 보셨을 때, 우리가 마치 고래의 뱃속에 있는 요나와 같은 처지에 있었을 때, 그분은 은혜로 우리를 지키셨고, 간절한 심정으로 우리를 위해 애를 쓰셨으며, 그 권능으로 우리를 안전한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분의 구원을 재촉하기 위해 혹은 그분의 자비를 얻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하였는가? 만일 그분이 우리 속에 그분을 환영하는 그 무엇이 있음을 보시기 전까지는 우리를 결코 구원하지 않으셨다면, 아직도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였을 것이다. 우리는 일출이나 날이 밝아오는 것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듯이, 자신의 회복을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우리는 움직이지 못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마른 뼈들과 같았다(겔 37:1-11). 또한 이렇게 말했다:'우리의 모든 지체들이 끊어졌고 우리의 소망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 안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우리가 살아난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우리의 불법과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자비를 베풀기를 기뻐하시며, 잠시 우리를 질책하시나 영원한 은혜라는 소망을 주신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어떤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마땅한가? 우리 자신으로서는 아무런 할 말도 없을 때 그분은 우리를 위해 간구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사자굴에서 건져 내셨고, 포효하는 사자의 입에서 구해 내셨다. 사라 라이트(Sarah Wright)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은혜를 받은 때에 관한 생각은 내게서 영원히 사라졌다. 내게 하늘의 소망이 있다는 생각은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내게는 소망이 없다는 말을 숱하게 반복했고, 실제로 그러한 상황을 확인했다. 너무도 절망적이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신경쓸 겨를조차 없었다. 종종 나는 죽음과 지옥의 가장자리에 처하였고 심지어는 그 문에까지 이르렀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문을 닫으셨다. 나는 다니엘처럼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그분이 그 사자들의 입을 막고 나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신비롭다. 나 같은 사람을 보살피시며 놀라운 평안을 주시고, 또한 불과 유황 속에서도 계속 역사하시는, 그분의 탁월하신 위엄은 그 얼마나 위대한가!" -티모시 로저스.
22절.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주께서 저를 완전히 버리셨으므로 나는 더이상 주의 돌보심과 관심을 받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언젠가 하나님의 손에 멸망당할 것이며, 주께 외면당하여 멸망할 것이다(삼상 27:1). 그는 도피하며 낙심 가운데 빠졌을 때 이런 식으로 말했다. 사울이 그의 뒤를 바짝 추격하여 사로잡기 직전이었고, 그 상황은 시련을 더욱 가중시켰다. '경겁한 중에'라는 말은, 그의 마음이 혼란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으며 의지할 데 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혔음을 시사한다. 생각도 않고 성급하게 말할 때에는 흔히 말을 실수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유를 되찾으면 성급하게 한 말을, 특히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털어놓았던 말을 회개해야 한다. -매튜 헨리.
22절.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때로는 갑작스럽게 격정이 일어나고, 그것은 심술궂고 성난 말로 표출되어 소동과 혼란을 야기시킨다. 조만간 그 기억이 되살아나면, 우리는 "내 혀를 제어하여 제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말았어야 하는건데"라고 말하며 후회한다. 또한 우리는 자신보다 낫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성급하게 비난했다가 나중에 그 사실을 회고할 때 너무 성급하게 불쑥 말을 내뱉었던 어리석음을 부끄럽게 여기며, 형제를 비난할 때 먼저 자신을 판단했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리처드 알레인(Richard Alleine).
22절.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그가 했던 말과 같이, 나의 처지를 절망적인 것이라고 결론지음으로써 내가 그토록 적은 믿음으로 기도했을 때, 그것은 말하자면 기도를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성급한 마음을 용서하사 내게 자비를 베푸셨다. 내게 그 자비를 기대할 만한 믿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결핍 상태에 처한 모든 성도들의 소망을 일으켜 세우고자 했다:"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윌리엄 거놀.
22절. 그는 자신의 심각한 낙심 상태를 고백하고, 시험을 당하여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쇠약한지를 토로하였다. 그는 자신의 수치스러운 사실을 시인함으로써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1) 경건한 자의 믿음도 느슨하게 될 수 있으며, 가장 강한 믿음도 때로는 결함을 드러낼 수 있다.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2) 나무가 바람에 시달려도 좋은 땅에 견고하게 뿌리박고 있듯이, 비록 믿음이 흔들린다 해도 그 뿌리는 견고하다. 비록 믿음이 꺾이는 듯이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멸되지 않는다. 그리고 심지어 믿음이 가장 연약한 상태에 있을 때에라도, 마치 레슬링하는 사람처럼 어떤 행동으로든 그 자체를 표현한다. 여기서는 다윗의 연약한 믿음이 하나님을 향해 표출되고 있으며, 그것은 그의 간절한 기도와 결합되었다:"내가······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3) 기도하는 믿음은 그것이 아무리 연약할지라도 하나님께 외면당하지 않을 것이다:"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4) 한 영혼 속에는 억압하는 근심과 격려하는 소망이 동시에 공존할 수 있으며, 근심의 어둠과 믿음의 빛, 절망적인 의심과 하나님의 진리나 선하심에 대한 강렬한 확신, 소심함과 투지, 싸움에서 패배한 듯한 상태와 모든 적대 세력에게 대항하는 믿음의 추진력, 그리고 어리석은 성급함과 믿음의 차분함 등이 각각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이라는 표현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데이비드 딕슨.
22절.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기도를 겸손히 들어 주신 데 대해 놀라움을 표한다. 변변치 못한 사람이 우리의 바람대로 들어 줄 때에도 우리는 그 친절함에 놀라워한다. 그렇다면 천지를 다스리는 가장 위대하신 주권자의 겸손과 자비에 대해서는 훨씬 더 놀라워해야 하지 않겠는가! -스티븐 차녹(Stephen Charnock).
23절.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기서 거룩한 시편 기자는 따뜻한 사랑의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우리에게 독려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별력 있는 마음이 이행할 수 있는 비길 데 없을 정도의 가장 숭고한 열정이며, 그 심령에게 있어 가장 환한 영광이요 가장 완벽한 행복이다. 또한 우리가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막 12:30)하는 것은 그 특성상 그리고 전반적인 신적 계시에 비추어 볼 때 분명해지듯이, 창조주께 빚진 우리의 모든 의무 이행의 총계이자 신앙 생활을 북돋우는 요체가 된다. -윌리엄 던롭(William Dunlop, A.M., 1692-1720).
23절.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본문의 의미가 분명하게 밝혀지기 위해서는 몇 가지 단어들이 보충되어야 한다. 예컨대, "성도들"은 '자비를 느끼는 너희'로 이해되며 또한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 "성실한"이라는 단어는 때로는 '사람'에 대해 때로는 '사물'에 대해 사용된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진실한 사람, 진실, 신실한 사람, 그리고 신실함을 보존하시는 분으로 언급된다.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께서는 엄중하게 보응하신다. '여호와'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분이다. "엄중히"에 대해, 혹자는 '누적하여', '충분하게', 혹은 '철저하게'로 옮긴다. 그러나 나는 번역을 수정하기보다는 차라리 있는 그대로를 취하고자 한다. 물론 동료 학자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예리한 펜으로 상대방을 할퀴거나 강단을 싸움터로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논쟁 시간을 원문 규명에 할애하여 성경의 순수한 내용을 후대에 넘겨 주라는 것이다. -휴 피터즈(Hugh Peters, Sermon preached before both Houses of Parliament, the Lord Mayor and Aldermen of the City of London, and the Assembly of Divines, at the last Thanksgiving Day, April 2. For the recovering of the West, and disbanding 5000 of the King's Horse, etc., 1645).
23절.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그 다음 물음은, '하나님이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어떻게 갚으시는가?'에 관한 것이다. 비록 여호와의 처리 방식들이 다양하며, 그분의 길이 구름 속에 가리워져 있고, 그분의 심판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고, 또한 교만한 자에 대한 궁극적인 보응은 마지막 날에 주어질 것이지만, 시편 기자는 이생에서도 교만한 자에게 '보응의 날'이 임한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 보응의 방식은 다음과 같다:(1) '보복'을 통해.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잘렸던 아도니 베섹에게 있어서 그 보복은 엄지손가락을 자르는 일이었을 것이다(삿 1:7).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눅 23:21) 하며 크게 고함쳤던 가련한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던 까닭에-만일 요세푸스의 기록이 믿을 만한 것이라면-십자가를 만들 나무가 모자랄 정도였고, 그나마 만들어진 십자가들을 세울 장소도 부족했다고 한다. 교만한 자는 흔히 자신을 위해 덫을 만들고 구덩이를 판다. 이는 성경 전반에 걸쳐 충분하게 증거되고 있는 사실이다. (2) 수치스러운 '실망'을 통해. 그들은 자신이 뿌린 것을 거의 거두지 못하며 자신이 잡은 것을 먹지도 못한다. 이 점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당시의 유대인들의 모습 속에서 매우 분명히 드러난다. '가룟 유다'는 그분을 배신한 대가로 돈을 받았지만 그것을 써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빌라도'는 가이사를 즐겁게 하기 위해 온갖 조언과 만류를 뿌리치고 그분을 죽이도록 허용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자신과 가이사 둘 다를 파멸시켰다. 유대교 제사장들은 자신의 지배권과 영예를 옹호하기 위해(그들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그들에게서 이를 탈취했다고 생각했다) 그분을 죽이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이는 결국 그들과 그들의 영광을 매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로마인들에 의해 성읍을 탈취당할까봐 두려워)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불쌍한 사람들은 그분의 죽음과 더불어 로마인들에게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가이사 자신은, 자기 곁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에 의해 자신의 통치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오늘날에도 이 세상의 모든 정부들은 그분의 주관 아래에 놓여 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중, 얼마 안 있어 자랑할 왕관과 홀을 빼앗기는 실제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티투스와 베스파시아누스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 보면 이를 소상히 알 수 있다. 시편 기자는 교만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 방법들을 우리에게 매우 적절하게 제시해 준다.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시 7:14, 15). -휴 피터즈.
24절. "강하고." 기독교적 용기는 다음과 같이 묘사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 난국에 도전하고 어려움을 감당함에 있어 성화된 마음이 보여 주는 불굴의 용감성이다. 그 특성을 한마디로 말하면, 불굴의 용감성이다. 이러한 적개심-혹자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은 사람들과 어떤 짐승들에게서 공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사자에 대해 이르기를, 짐승들 중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나지 아니한다고 한다(잠 30:30). 그리고 담대함과 관련하여 전마가 언급되기도 한다(욥 39:19).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기를 즐겨하시는 '용기'는, 이처럼 짐승들 가운데서 나타나는 대담성도 포함한다. 여호와는 이렇게 약속하신다:"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같이 하였으니"(겔 3:9). "굳은"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상으로 여름이든 겨울이든, 햇빛이든 소나기든, 더위든 추위든, 혹은 서리든 눈이든 그 어떤 날씨도 두려워하지 않는 바위와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그것은 당황하지 않고 움츠러들지 않으며, 그 겉모습이 변하지도 않고 항상 동일한 모습이다. '용기'가 바로 그런 것이다. 둘째, 본문의 주어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이라고 하는 성에서 용기가 명령을 내리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기도 한다. 용기는 가슴 속에 있으며, 그것은 용감한 군사의 정신이다. 혹자는 영어 단어 courage(용기)가 '코르디스 악티오'(마음의 작용)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또한 용감한 사람은 사자의 마음 같은 마음을 지닌 자로 묘사된다(삼하 17:10). "굳센"(암 2:16에서처럼)이라고 옮겨진 원어는 대부분 '용기 있는' 자(영어로는 a man of heart로 표현됨-역자 주)라고 번역될 수 있다.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용기는 꿰뚫어보는 눈이나 섬찟한 눈매 또는 큰 목소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에 있는 기개와 활기에 달려 있다. 때로는 겁쟁이가 우렁찬 목소리를 내거나 엄한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 반면에, 진정 불굴의 기개는 가슴 속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외적 행동으로는 그런 류의 기개가 전혀 혹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셋째, 이 주어의 자격에 대해 주목해 보자. 그것은 성화된 마음이어야 한다. 여기서 나는 도덕적 덕목으로서의 불굴의 기개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교도들도 그러한 기개를 나타낼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 중에 그처럼 탁월한 기개를 지닌 존재로 추천된 자들도 많다. 하지만 지금 나는 신학적 덕목으로서의 용기를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특별한 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여되는 은혜스러운 자격 요건이다. 그 용기의 세 가지 특징이 있는데, 이들은 그것을 인내라는 도덕적 덕목과 구별시켜 준다. (1) 그것을 생겨나게 하는 '근원.' (2) 그것을 지시하는 '원칙.' (3)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 그것을 생겨나게 하는 근원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모든 성도들은 훌륭한 용기를 지닌다. 사도 바울은 이르기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자신으로 하여금 그토록 담대하고 용감한 모험을 감행하도록 강권한다고 했다(고후 5:14). 그것을 지시하는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지침을 거룩한 기록으로 남겨 두기를 기뻐하셨다.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너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고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더욱 원하노라 네가 만일 여호와께서 모세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든 율례와 규례를 삼가 행하면 형통하리니 강하고 담대하여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지어다"(대상 22:12, 13). 이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되 그 용기가 주님의 뜻과 그 규례에 입각한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는 '하나님'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앞세우는 성화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신다. 그들 자신의 행동과 생각은 그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만족하며 또한 만족할 수 있다. -시미언 애쉬(Simeon Ash, Sermon preached before the Commanders of the Millitary Forces of the renowned Citie of London, 1642).
24절. "강하고." 이 표현 속에는 우리 의식을 짓누르는 몇 가지 힘든 일들이 암시되어 있지 않은가? 눈을 뽑고 손과 발을 자르는 것과 같은 힘든 일이 암시되어 있지 않은가? 용감한 기개를 지니고 있지 않은 소심한 사람이 이런 일을 시도하겠는가? 육신의 정욕을 멸하는 것은 자신의 지체를 잘라버리는 것과 같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에 의해 표현된 바와 같이, 자신의 수족을 절단하고 자기 눈을 뽑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의 가슴 속에는 싸워서 없애버려야 할 갖가지 요새들이 있다. 평평하게 깎여야 할 언덕과 산들이 있다. 흙으로 채워져야 할 참호와 골짜기들이 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앞에는 올라가야 할 언덕과 넘어야 할 험한 바위들이 훨씬 더 많다. 용기 없이는 우리 손에 쥐어진 일을 결코 감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또한 재건되어야 할 예루살렘 성벽이 있으며, 수리를 요하는 성전도 있다. 만일 느헤미야가 담대한 용기를 지닌 인물이 아니었다면, 그는 자신이 감당했던 그 힘든 교회 일을 조금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이 현시대에, 즉 시작된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오늘날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겠으며, 여러분의 생각에 맡기기로 한다. 다만 느헤미야 4:17, 18을 읽어 볼 것을 여러분에게 권하는 바이다:"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그들은 일하면서도 전투를 준비했다. -시미언 애쉬.
24절. "담대하라." 그분을 위해 과감한 모험을 시도하라. 그리하면 그분의 섭리가 작용하여 여러분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능력있는 지휘관은 총부리에 대항하여 싸우는 용감한 병사들을 그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하는가! 탈골 소식을 들으면 접골의를 보내고, 출혈로 인해 죽음에 이르려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외과의사를 보내어 그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위험한 순간을 넘기게 한다. 부상병의 기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 막사 안에 있다면, 그 지휘관은 조금도 아끼지 않는다. 아무리 귀하고 값비싼 것이라도 아끼지 않는다. 만일 금을 먹여서라도 회복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다. 바로 이 때문에, 그분은 버가모 교인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면서 이렇게 격려하셨다:"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버가모 교인들은 마귀가 날뛰는 동굴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위해 투쟁하였고, 다른 사람들이 낙담과 실의에 빠졌을 때에도 그들은 그분을 위해 굳게 서 있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인정해 주신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배려와 손길로 말미암아 영예와 위안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용기야말로 진정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미언 애쉬.
힌트
1절. 혼란을 제거하고 구원을 베풀어 달라는 믿음의 탄원.
1절 상반절. 믿음의 공언. (1) 믿음 이전에 자기 점검이 선행되어야 함. (2) 믿음을 고백하는 방식. (3) 그러한 고백을 하는 자들에게 의무적으로 부여되는 행위.
1절 하반절. 신자의 구원과 관련하여 넓고도 세심하게 수반되는 하나님의 의.
2절 상반절.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크신 겸손.
2절 중반절. 우리는 하나님의 신속하신 개입을 간구할 수 있다.
2, 3절. 우리는 이미 지니고 있는 것도 간구할 수 있다.
3절. 반석처럼 견고한, 우리 영혼의 요새이신 하나님에 대한 은유.
3절 하반절. (1) 축복의 필요성:“나를 인도하시고.” (2) 축복의 획득 가능성. (3) 그것을 얻기 위한 논거:“주의 이름을 위하여.”
4절. 그물에 걸린 자를 구출함. (1) 사냥꾼들. (2) 그물을 침. (3) 새를 사로잡음. (4) 사로잡힌 새의 부르짖음. (5) 구출.
4절 하반절. 연약한 자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띠를 두름.
5절. (1) 죽음이란 스스로의 힘으로는 견디기 힘든 일이다. (2)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 몸을 떠나 영원히 존재하는 자신의 영혼을 주로 생각한다. (3)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영접한 자들은 죽음과 마주하여 큰 위안을 받으며,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리라는 소망 가운데 자신의 영혼을 그분의 손에 맡긴다. -다니엘 윌콕스.
5절. 신자의 만가. 하나님 안에서 취하는 안식의 기초가 되는 구속. (1) 우리가 할 일:“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2) 하나님이 하신 일:“나를 구속하였나이다.”
6절. 편협성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혐오. 혹은 미움을 나타내되 선한 사람.
7절. (1) 기쁨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스러운 속성. (2)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체험. (3)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은총.
7절 중반절. 그 방식, 영향, 시기, 특성, 결과, 그리고 그 보답.
7절 하반절. 곤경에 처한 주의 백성을 가까이하시는 그분의 친근하심.
8절. 기쁨을 주는 주제인, 그리스도인의 자유.
9절. 신음하는 자의 애가.
9절 하반절. 지나친 근심이 몸과 이해력 그리고 영적 성품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들. 그것의 죄악성 및 치유.
9, 10절. 건강을 누리는 자들을 경고하는 병든 자의 신음소리.
10절.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쇠약하게 하는 죄악의 영향력.
11절. 선한 사람이 악평을 받는 경우.
12절. 가장 친한 친구들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태도.
14절. 시련의 때에 특히 영광의 빛을 발하는 믿음. 폭풍 속에서 내리는 비상용 닻.
15절. 섭리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는 신자.
15절 상반절. (1) 성도가 세상에서 겪는 체험의 특성. “내 시대”, 즉 내가 통과해야 하는 변화들. (2) 이러한 다양성이 제공하는 유익. ① 이 변화는 그리스도인의 성품의 다양한 측면들을 보여 준다. ②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강화시킨다. ③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찬미하게 한다. (3) 모든 때를 위한 위로. ① 삶의 변화들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다. ② 하나님이 변화에 직면한 당신의 백성을 지원해 주실 것이다. ③ 결국 그 변화들은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유익을 얻게 할 것이다. (4) 우리가 지녀야 하는 품성. 핍박 때에 담대히 하나님께 자신을 맡겨야 한다. 궁핍과 고난의 때에 인내하며 자족해야 한다. 일할 때에는 열성과 소망을 품어야 한다. -From Stems and Twigs, or Sermon Framework.
16절.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자각. (1) 그 가치. (2) 그것을 잃게 되는 경우. (3) 그것을 회복하는 방법. (4) 그것을 보존하는 방법. 천국의 종이 얻게 될 최상의 보상.
16절 하반절. 모든 상황 가운데서 드리는 성도들의 기도. 그 목표:“나를 구원하소서.” 그 근거:“주의 인자하심으로.” 회개자, 병자, 의심하는 자, 시련을 당하는 자, 선구적 신자, 그리고 죽어가는 성도 등에게 적합한 간구이다.
17절. 영원히 수치를 당하며 잠잠케 될 악인의 운명.
19절. “Spurgeon’ Sermons,” No. 773., “David’s Holy Wonder at the Lord’s Great Goodness.”
20절. 신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자각함으로써 교만한 냉소로부터 보호받으며, 자신이 섬기는 왕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쓰라린 비방으로부터 보호된다.
21절. “기이한 인자.” 인자를 베푸시는 방법, 시기, 정도, 그리고 기간 등이 참으로 기이하다.
21절. 주목하고, 기록해 두며, 묵상하고, 거듭 회고하고, 감사의 주제 및 확신의 근거로 삼아야 할, 기억할 만한 사건들.
22절. 불신의 고백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감탄. 성급한 말로 말미암는 해악.
23절.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권고. (1) 권고 사항:“여호와를 사랑하라.” (2) 권고 대상:“너희 모든 성도들아.” (3) 권고자. (4) 권고의 근거:“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24절. 거룩한 용기. 그 탁월성과 어려움, 그리고 그것이 제공하는 격려와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