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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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전의 시편강해

시편 3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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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주제-이 시에는 “다윗의 기념케 하는 시”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다윗은 마치 하나님께 잊혀진 존재인 듯한 느낌을 받았으며, 따라서 자신의 슬픔을 낱낱이 열거하고 그 상황하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강렬하게 부르짖었다. 시 70편에도 동일한 머리말이 나오는데, 거기서 시편 기자는 같은 방식으로 여호와 앞에 자신의 불평을 토로하고 있다. 다윗의 생애 중 이 시편이 쓰여진 시점이 언제인지를 추측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질병과 잔혹한 상황을 인내하였던 사실을 기념하는 내용일 수도 있고, 자신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고, 병들거나 비방당하는 성도들에게 활용되도록 기록한 것일 수도 있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절 기도로 시작하며, 

2-8절 긴 불평으로 이어진다. 

9절 잠시 멈추고서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난 후에,

10-14절 두번째로 서글픈 이야기를 전개한다. 

15절 그러고 나서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재차 피력하며, 

16-20절 비통한 심경을 세번째 토로한다. 

21, 22절그러고는 서두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시금 간구하는 내용으로 마감한다.


강해


1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1절.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저는 책망을 받아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잘못을 범한 자녀이고 주는 자상하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 심한 진노를 발하지는 마소서. 비록 제가 비통스러운 죄악을 범했지만 부드럽게 대해 주소서. 제가 다른 사람들의 분노는 견딜 수 있지만 주의 진노는 견딜 수 없나이다. 주의 사랑이 제 마음에 너무도 감미롭듯이, 주의 진노는 제 양심을 가장 심하게 도려내는 것입니다.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만일 주께서 원하신다면 저를 징계하소서. 그것은 아버지의 특권이며, 그것을 인내하는 것은 자녀의 도리입니다. 오 하지만, 그 회초리를 검으로 바꾸지 마시며, 죽을 정도로 때리지는 마소서. 사실, 저의 죄악이 주의 노를 격발시키기에 충분하지만, 주의 자비와 오래 참으심을 통해 주의 진노라고 하는 이글거리는 석탄불을 꺼 주소서. 저를 원수나 반역자처럼 다루지 마소서. 주의 언약과 주의 아버지 되심을 그리고 저의 연약함을 기억하시고, 주의 종을 관대하게 대해 주소서.


2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3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펑안함이 없나이다

4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5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6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7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8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2절.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이는 육체적 고통과 영적 고통을 아울러 의미하지만, 우리는 특히 후자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장 쓰라리며 가장 매섭게 찌르는 것이 영적 고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성령의 작용을 통해 범죄한 영혼에게 죄의식을 불어넣으며, 깊은 상처를 남기고 오래도록 쓰라리게 만든다. 그것은 태평스러운 마음으로 가볍게 제거할 수 있는, 혹은 자기의라는 거만한 마음으로 쉽게 뽑아낼 수 있는 화살이 아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화살이, 타격을 가할 뿐만 아니라 깊숙이 꽂히게 하는 방법을 잘 알고 계신다. 그분은, 마치 머리 속에까지 뚫고 들어간 화살처럼, 가장 내밀한 영혼 속에 죄의식을 새겨 넣으실 수 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사랑하는 이들을 향해 활을 쏘신다는 것은 의아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분은 그들을 향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죄악에 대해 활을 쏘시며, 이생에서 죄악을 죽이는 화살의 고통을 느끼는 자들은 내생에서는 뜨거운 벼락을 맞지 않아도 될 것이다.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여호와께서는 시편 기자에 대한 징벌을 마감하기 위해 임하셨으며, 손으로 그를 압박하사 전혀 쉬지도 못하고 탈진한 상태에 빠지게 하셨다. 본절의 두 가지 표현을 통해 우리는, 죄의식이란 찌르고 억누르는 것이며, 예리하고 쓰라리며, 또한 쿡쿡 쑤시고 짓뭉개는 것임을 배우게 된다. "주의 두려우심"(고후 5:11)을 체험적으로 아는 자들은 그러한 표현이 정확하다는 사실에 대한 최선의 증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절.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정신적 억압이 신체 구조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모든 질병을 야기하고 악화시키기에 충분하며, 그 자체가 가장 고통스러운 질병에 해당한다. 영혼의 질병은 몸 전체에 악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몸을 쇠약하게 하며, 거꾸로 육체적 쇠약함은 마음을 억누른다. 하나님의 진노가 한 방울만 떨어져도 우리의 피 전부가 고통으로 들끓는다.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그 질병은 더욱 깊이 침투하여, 신체 중 보다 단단한 부분인 뼈까지 감염되기에 이른다. 서글프게도 건강과 안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예수께서 구원을 베푸시기까지는 각성된 양심을 지닌 자들로서는 의식적으로 이 두 가지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진노는 골수까지 말려버리는 불이다. 그것은 뱃속의 내밀한 부분까지도 찾아낸다. 뼈의 고통을 느끼는 자는 안식을 찾아 이리저리 발버둥치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그는 고뇌로 인해 쇠진되며, 죄의식으로 말미암아 그의 양심은 지옥의 고뇌와 같은 무서운 혼란에 시달린다. 


4절.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깊은 바다 물결처럼, 사람을 완전히 가라앉히고 마는 시커먼 수렁처럼 내 죄악이, 나의 소망과 힘 위로, 그리고 내 생명 자체 위로, 무시무시하게 덮친다. 각성하지 못한 죄인들은 자신의 죄악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양심이 고개를 들 때 그들은 그 죄악의 깊이를 발견한다.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죄는 견딜 수 없는 짐이 되며, 또한 죄악에 대한 기억은 참지 못할 정도로 우리를 억누르기 마련이다. 본절은, 자신의 범죄로 인해 파멸을 느끼되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을 발견하지 못한 자에게서 나오는 진솔한 절규이다.


5절.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이를 육체에 적용해 보라. 그리하면 질병으로 인한 서글픈 상태를 마음속에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이를 영혼의 측면에서 읽어 보라. 그리하면 그 상처가 생명에 관계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양심은, 종기가 부풀어올라 곪아터지기까지, 그리고 안으로 썩어 문드러지기까지 거듭해서 매질을 가한다. 어떤 사람의 타락상과 천박성이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그리고 성령의 작용에 의해 온전히 드러날 때, 그는 스스로에 대해 그 얼마나 혐오스러운 존재로 비칠 것인가! 본절에서 육체적 질병에 대한, 그것도 최악의 상태로 악화된 질병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표현을 교훈적이고도 상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더 낫다. 왜냐하면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는 말은 육체적 질병보다는 윤리적 병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겨울 정도로 코를 찌르는 냄새가 어떤 것인지를 안다. 가장 더러운 질병도 죄만큼 추잡스러울 수는 없다. 그 어떤 궤양이나 암도 혹은 그 어떤 곪아터진 상처도 말할 수 없이 더럽고 부패한 죄악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스스로의 자각을 통해 이를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기록하며, 자신이 본 것을 증거한다. 심지어 지금도 너무도 엄청난 죄악이 우리 본성 내부에서 깊이 곪아가고 있음을 생각하면 진저리가 난다.


6절. "내가 아프고." 내 속에서 드러난 죄악으로 말미암아 심한 진통을 느끼면서, 나는 고뇌 가운데 탈진하고 고통으로 몸부림친다. 


"심히 구부러졌으며." 나는 매우 낮아졌고 심하게 쇠약해졌으며, 놀랄 정도로 의기소침해졌다. 죄의식 및 이와 관련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만큼 사람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도 없다.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애곡하는 자의 슬픈 심령은 쉴  틈이 없다. 심지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을 보러 나갈 때에도, 그는 마치 무덤으로 향하는 애곡하는 자처럼 나아가며, 그의 말과 태도는 마치 시신을 따라가면서 애곡하는 자들의 그것과 같다. 만일 우리가 동양의 애곡하는 자를 머리 속에 떠올리면, 본절을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삼베옷과 재를 뒤집어쓰고 잔뜩 허리를 굽힌 채 더러운 먼지더미 속에 앉아,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느라고 얼굴을 찡그리고 몸을 뒤튼다. 각성한 죄인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며, 겉모양뿐만 아니라 행동도 그러하다.


7절.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뜨겁고 메마르며 또한 타는 듯한 증상에 대한 언급이다. 이는 아마도 심각한 궤양을 동반할 것이다. 이를 영적 측면에서 이해하자면, 우리 마음의 사악함이 확연히 드러날 때 우리의 내면은 마치 불타는 듯하다. 강조적인 어투에 주목하라. 악은 "혐오스러우며"(KJV 직역-역자 주), "허리"에 있으며, 또한 그것은 깊고 치명적인 곳에 자리잡고 있다. 사람은 그것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죄를 확실히 자각한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시편 기자는 앞에서도 이렇게 말했다(3절). 따라서 성령께서는 이처럼 겸비케 하는 진리를 우리로 하여금 거듭 기억하게 하사 우리 스스로가 추구하는 영광의 근거를 멸하시며, 또한 우리 안에는, 즉 우리의 육신에게는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다.


8절. "내가 피곤하고." 원문은 '마비되다' 혹은 '얼다'는 뜻이다. 산만해진 마음과 병든 몸으로 인해 그처럼 이상한 부조화 및 모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번갈아가며 열에 의해 바싹 메마르고 냉기로 인해 오그라든 상태와 같은 것이다. 불타는 아궁이로부터 두터운 얼음 속으로 내던져진다는, 가톨릭의 우화에 나오는 연옥에서처럼, 고통에 처한 마음은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치달으며, 두 상황 모두에서 동일한 고통을 당한다. 두려움의 열기와 공포의 냉기, 그리고 불타는 갈망과 무서운 무감각, 이와 같은 일련의 재난으로 말미암아 죄의식에 사로잡힌 죄인은 죽음의 문으로 인도된다.


"심히 상하였으매." 제분기 속에서 부서지고, 절구 속에서 가루가 되듯이, 병든 자의 몸은 마치 모든 관절이 이탈되고 흐물흐물한 상태로 변한 듯하며, 풀죽은 영혼 역시 그처럼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다. 마치 저거노트(Juggernaut:크리슈나 신상을 가리킨다. 이 신상을 실은 수레에 치어 죽으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믿어졌음-역자 주)의 수레 아래에 깔리는 희생자의 모습,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수레바퀴 아래에 자신의 양심이 깔린 자의 모습과 유사하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슬픔에 사로잡힌 사람은 깊고 쉰 목소리를 낸다. 때때로 그것은 알아들을 수 없고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는 입으로 토할 수 없는 신음을 마음속으로 느끼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은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의 말이 아니다. 우리의 기도가 영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짐승처럼 울부짖는 것일 때, 그래도 그것은 자비로우신 아버지께 여전히 호소력을 발휘한다. 그분은 마음속의 중얼거림을 들으시며 죄로 인한 영혼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 그리고 정해진 때가 이르면, 곤경에 처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다.

각성된 영혼에 대한 이와 같은 묘사를 체험의 조명하에 더욱 가까이 연구하면 할수록, 그 정확성은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날 것이다. 그것은 비록 회화적이긴 하지만 단지 외적인 질병에 대한 묘사로서 그칠 수만은 없다. 그것은 오직 영혼의 신비하고 무시무시한 고뇌라는 측면에서만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깊이와 비애를 담고 있다.


9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9절.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그가 입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지각하고 있다. 우리 마음의 바람을 헤아리시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자. 그분께는 아무것도 감추어질 수 없다. 우리가 그분께 아뢸 수 없는 것도, 그분은 완벽하게 이해하신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과장하지 않았음을 의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기 말에 대한 확언을 위해 하늘에 호소한다. 훌륭한 의사이신 그분은 우리 질병의 증세를 파악하시며 그 증세를 통해 드러나는 감추인 죄악을 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손 안에서 안심할 수 있다.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그분은 우리 눈에서 나오는 눈물의 의미와,

우리 입에서 나오는 탄식의 의미를 다 아신다.

슬픔과 고뇌가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들을 찾아내신다. 상한 심령을 지닌 죄인보다 고독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그의 동반자가 되어 주신다.


10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11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12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13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14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


10절. "내 심장이 뛰고." 화에 관한 또다른 이야기가 여기서 시작된다. 그는 친구들의 냉대로 너무도 끔찍스러운 고통을 당했던 까닭에, 그의 심장이 줄곧 고동쳤다. 그의 심장은 예민하고도 빠르게 뛰었다. 그는 쫓기는 노루와 같은 처지였고, 괴롭고 불안한 마음으로 가득했으며, 또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금방이라도 달아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의 영혼은 슬픔 가운데 동정해 줄 자를 찾았지만, 아무도 찾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 서글픈 심장의 고동소리는 끊임없이 울렸다. 


"내 기력이 쇠하여." 질병과 마음의 혼란으로 인해 그는 쇠약해졌고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 것 같았다. 죄에 대한 자각과 곤경에 처한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우리를 사망의 문으로 이끌기에 충분하다. 부드러운 위안의 말을 해줄 사람과 사랑이 많으신 의사께로 상한 심령을 인도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감미로운 눈빛이 그의 눈에서 떠났고, 그의 영혼에 위안이 사라졌다. 그의 눈의 광채였던 자들이 그를 버렸다. 마지막 등불인 소망마저 이제 막 꺼지려 하는 참이었다. 이 가련한 죄인이 처한 곤경은 그 얼마나 비참한가! 우리 중에도 그러한 곤경에 처한 적이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만일 무한하신 자비가 개입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곤경 가운데서 우리는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한편, 우리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건대, 우리는 자신의 힘이 쇠진하였음을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힘을 얻고자 강하신 분을 의뢰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빛이 모조리 꺼지고 우리에게 있어 여호와의 빛이 만유 가운데 만유가 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11절.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그들이 아무리 애정을 지닌 체한다 해도, 마치 침몰하는 배가 흔히 그 속에 든 보트와 함께 가라앉는 것처럼, 그에게 닥친 재난으로 인해 그들도 시련을 겪는 상황에 처하지 않기 위해, 그들은 그와 동행하기를 거부한다. 제일 먼저 구출하러 와야 할 사람들이 맨 먼저 우리를 떠날 때, 참으로 견디기 힘들다. 영혼의 깊은 곤경에 처한 시기에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마저 그 사람의 처지에 들어갈 수 없다. 그들이 걱정을 해줄 수는 있지만, 상처 입은 양심의 쓰라린 부위를 싸매어 주지는 못한다. 오,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권능 앞에 노출되어야 하는 영혼의 고독함이여!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우리 주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멀리 서서 그분의 십자가를 지켜보고만 있었듯이, 죄로 인해 상처받은 영혼에게 있어서는 온 인류가 멀리서 지켜보는 구경꾼들에 불과하며, 모든 무리들 중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때로는 예수님을 찾는 자들이 자기 친척들의 훼방을 받으며, 친척들이 무관심하게 방관만 하는 경우는 더욱 흔하다. 따라서 친척들이 그 회개자를 예수께로 인도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12절.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우리는 내적 슬픔뿐만 아니라 외적 시련까지 당한다. 다윗의 대적들은 그를 올무에 빠트리려고 야비한 노력을 기울였다. 공정한 수단으로 그를 넘어뜨리지 못하면 추잡한 방법을 동원했다. 이처럼 올무를 놓는 일은 추잡한 짓이며, 마귀 자신의 하수인들만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드림으로써 구원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험하는 자들의 모든 간교한 계략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에 의해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마치 급수 펌프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듯이, 그들에게서 거짓말과 비방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쉴 새 없이 혀를 놀리며, 그들의 마음은 줄곧 거짓말을 고안했다.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이러한 도모는 결코 중단되지 않으며 밤낮으로 진행되었다. 그들은 행동할 수 없을 때 말했고, 말할 수 없을 때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며 또한 음모를 꾸몄다. 악의에 찬 행동은 부단히 계속된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악인들은 아무리 악을 자행해도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성도에게 해악을 끼치기 위해 온 땅과 바다를 두루 다닌다. 그들은 성도를 완전히 파멸시킬 수만 있다면 어떤 노고도 마다하지 않으며, 어떤 대가를 치러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우리의 영광스러운 머리 되신 분께서 대적들의 집요한 악의를 다 알고 계시며, 또한 현재 그 악의의 한계를 정해 두시듯이 적절한 때가 이르면 그것을 모조리 제거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위로를 얻는다.


13절. "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고." 이는 적절하고도 용감한 처신이다. 악의에 찬 비방에 대한 거룩한 무관심은 진정한 용기이며 현명한 방책이다. 우리가 듣거나 볼 수 없는 듯이 처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어쩌면 시편 기자는, 잔혹한 자들의 조롱에 답할 힘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잔인한 비난 속에 많은 진실이 내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까닭에, 귀머거리처럼 처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벙어리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다윗은 용감하게 침묵했으며, 여기에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이 분명히 예표되어 있다.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의 놀라우신 침묵은 그 어떤 말보다도 더 감동적이었다. 자기 변호를 단념하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인 동시에 너무나 현명한 일인 경우가 종종 있다. 


14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 그는 자신의 침묵 사실을 반복 언급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주목하고 찬탄하며 또한 그것을 모방할 수 있게 한다. 우리에게는 대변자가 계시며, 따라서 자신의 송사를 변호할 필요가 없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대적들을 징책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보복은 그분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하는 가운데 기다릴 수 있으며,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우리의 힘임을 발견할 수 있다.


15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낙하시리이다


15절. 다윗은 공의롭게 판단하시는 그분께 자신을 의탁하였으며, 그래서 인내하는 가운데 자신의 영혼을 자제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개입을 바라는 소망과 기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은, 역경에 처한 영혼에게 있어 가장 복된 두 가지 의지처가 된다. 피조물로부터 만물의 주권자이신 여호와께로, 즉 우리 언약의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우리는 그분을 고대하는 가운데 가장 풍요로운 위안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값진 진주와도 같은 명성이 진흙 속에 내팽개쳐질 수도 있지만, 정해진 때가 이르러 여호와께서 보화들을 정리하실 때, 경건한 성품은 구름 걷힌 후의 태양처럼 영예롭게 빛날 것이다. 그런즉 비방당하는 자여, 그대의 영혼으로 하여금 근심 가운데 이리저리 요동케 하지 말라.


16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저희가 내게 대하여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망자존대할까 하였나이다

17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18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19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무리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무수하오며

20또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


16절.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저희가 내게 대하여 기뻐하며." 선한 사람이었던 그는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는 악의적인 조롱으로 예리하게 찌르는 말을 두려워하였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나 상태로 말미암아 악인에게 승리감을 맛보게 할까봐 두려웠다. 그는 진지한 바람 가운데 이러한 두려움을 기도의 동기로서뿐만 아니라 기도의 논거로서 제시했다.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망자존대할까 하였나이다." 성도의 지극히 작은 결함도 주목의 대상이 됨이 분명하다. 그 결함이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대적은 비방하기 시작하며, 발만 헛디뎌도 지옥의 개들이 일제히 짖어댄다. 그 얼마나 조심해야 하겠으며, 은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끈질긴 기도를 드려야 하겠는가! 우리는, 눈먼 삼손처럼 대적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죄악이라는 믿을 수 없는 들릴라를 주의하자. 그녀로 인해 우리의 두 눈이 뽑힐 수도 있다.


17절.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마치 절뚝거리는 사람처럼, 혹은 비틀거리면서 넘어지려는 사람처럼. 이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너무도 잘 표현한 것이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얼마나 작은 것이 그리스도인을 절뚝거리게 만들며,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 그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는가! 이 구절은 고통과 슬픔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연약함을 시사한다. 시련에 처한 그는 절망 가운데 자포자기하기 직전이었다. 그의 심령은 너무도 의기소침한 나머지 지푸라기 하나에도 걸려 넘어질 지경이었다. 우리 중에는, 슬픔을 점화시키는 마른 부싯깃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뼈저리게 아는 자들이 있다. 그것인즉, 절뚝거리기 쉽고, 비탄에 빠지기 쉬우며, 또한 모든 상황에서 그 어떤 이유에서나 한숨쉬고 부르짖기 쉬운 상태인 것이다.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그는 슬픔을 발견하기 위해 굳이 창문 밖을 내다볼 필요가 없었다. 그는 내부에서 슬픔을 느꼈으며, 점점 더 심하게 자신을 괴롭혀 오는 역병인 죄의 실체 아래에서 신음했다. 죄악에 대한 깊은 자각은 줄곧 양심을 괴롭힌다. 그것은 평안이라고는 자그마한 조각도 용납하지 않으며, 대립 상태가 소멸되기까지 혈투를 벌인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고귀한 피를 적용하시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각성한 죄인은 치유되거나 싸매거나 혹은 기름으로 부드럽게 할 수도 없는 생채기들로 뒤덮여 있다. 


18절. "내 죄악을 고하고." 그는 대적들의 비방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지만, 자기 양심의 고발만큼은 인정한다. 공개적 자백은 영혼에게 이롭다. 슬픔이 진심으로 회개하는 가운데 죄를 시인하게 만들 때, 그것은 복된 슬픔이요, 하나님께 뜨겁게 감사드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나의 자백은 소금물처럼 짠 눈물로서 표현될 것입니다." 단순히 슬픔을 토로하기보다는 그 근저에 놓인 죄악을 고발하는 것이 좋다. 죄를 애석하게 여긴다고 해서 죄사함을 받는 것은 아니다. 화목하게 하는 구주이신 예수께 의지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곤경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19절.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의인이 아무리 연약해지며 죽어간다 해도, 그를 대적하는 악인들은 의기양양해 할 것이 분명하다. 세상이나 육신 혹은 마귀는 결코 무기력해지거나 둔감해지지 않는다. 이 악의 삼위일체는 우리를 쓰러뜨리기 위해 사그라들지 않는 활력을 발휘한다. 만일 마귀가 병약해지고, 우리의 탐욕이 연약해지면, 혹은 헛된 야심이 쇠약해지면, 우리는 기도를 게을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토록 활력과 생기가 넘치는 대적들과 싸움에 있어, 우리는 하나님께 강력히 호소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무리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무수하오며." 여기에 또 다른 곤경이 있다. 우리는 힘으로 대적들을 당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수효 또한 우리보다 백배 이상이나 많다. 악한 주장은 그릇되지만, 그것은 대중적이다. 어둠의 왕국은 점점 더 왕성해진다. 예수님을 따랐던 친구들이 그분을 버렸던 사실은,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와 그분의 주장을 대적하는 자들이 계속 모여들었던 사실은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니었던가! 


20절. "또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나를 대적하나이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대적들이 악으로 선을 갚는 존재이기를 바랄 것이다. 왜 우리가 그토록 무자비한 자들에게서 사랑을 받으려 하겠는가? 우리가 대적들을 가리켜 악으로 선을 갚는 마귀 같은 존재라고 정당하게 선언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좋은 고소거리이다.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만일 사람들이 이런 연고로 우리를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쁘게 감수할 수 있다. 그들의 분노는, 악이 선에게 무의식적으로 나타내는 경의의 표현이다. 본절은 시편 기자의 앞선 자백과 부조화스러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깊은 죄의식을 느낄 수 있지만, 우리 동료 인간들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는 결백한 사람일 수도 있다. 진리를 시인하는 것과 저버림을 당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주님은 정당하게 나를 치실 수 있지만, 나는 내 동료에게 "왜 나를 치느냐?"라고 말할 수 있다. 


21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22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21절.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지금이야말로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하는 때입니다. 질병과 비방과 죄악 등, 이 모든 것이 성도에게 닥칠 때, 그는 하늘의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며 또한 그것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는 한, 하나님이 그와 함께 영원히 계시는 한, 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친근하고도 소중한 주의 사랑의 빛을 거두지 마소서. 주님 당신을 제게 계시하소서. 제 편에 서소서. 비록 곁에는 친구가 없지만, 주님이야말로 너무도 은혜롭고 부족함 없으신 친구가 되심을 체험하게 하소서. 


22절. "속히 나를 도우소서." 지체는 파멸을 초래할 것이었다. 이 가련한 탄원자는 너무도 심한 궁지에 처하여 숨을 거두기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는 까닭에, 급속한 도움을 받아야만 상황이 전환될 것이었다. 어떻게 슬픔이 끈질긴 기도를 재촉하는지를 보라! 곤경으로 말미암는 유익한 결과가 여기 있다. 곤경은 우리의 간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게 한다. 


"주 나의 구원이시여." 주는 나의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나의 구원이시기도 하다. 여호와께서 함께 동행해 주시는 자에게는 이미 구원이 임한 것이나 다름없다. 믿음의 눈은 믿음으로 드리는 간구의 복된 결과를 이미 내다본다. 본절에서는 은총을 예견하며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여호와께 버림당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의 은총이 가장 적절한 때에 우리를 구원할 것이며, 하늘에서 우리는 너무 지나친 시련이나 너무 심한 고통을 단 한번도 당한 적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죄의식이 구원의 기쁨 속으로 녹아들 것이다. 슬픔이 감사로 바뀌고, 감사는 형언할 수 없는, 그리고 영광으로 가득한 기쁨을 야기할 것이다.


주해


머리말. 히브리어 원문상의 머리말 중에서 첫 단어에 해당하는 "미즈모르"는 마흔 네 개의 시편들에 붙여져 있으며, 이들 중 서른 두 개는 다윗의 저작이다. 독자가 유의해야 할 사항은, 이 단어가 히브리어 원문상으로 시편 전체의 머리말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후자는 '찬양의 시'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문맥 속에서나 개개의 시편들의 머리말에서 사용된 '시편'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미즈모르"라는 독특한 단어이다. 이것은 각 시편들의 시적 특성을 정확히 규정하는 용어이다. 그 적절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로스(Lowth) 주교의 근사하고 정확한 정의의 도움을 빌어야 하겠다:"'미즈모르'라는 단어는, 특이한 방식으로 짧은 문장들로 빈번하게 끊어지고 또한 규칙적인 막간들에 의해 조절되는 구성법을 가리킨다." 그는 덧붙이기를, "자마르"란 '자르다' 혹은 '제거하다'는 뜻으로서 불필요한 가지들을 나무에서 제거한다는 의미로 적용된다고 한다. 또한 그 단어의 이차적 의미를 가리켜 '음성이나 악기로 노래함'이라고 언급한 후에,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미즈모르"에 대해서는 그 어근의 주된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 즉, 짧은 문장들로 끊어서 모든 군더더기 단어들을 제거한다는 의미로서, 히브리어 시의 독특한 특성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존 젭.


머리말. 다윗이 이 시편에 붙인 머리말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다윗의 기념케 하는 시." 다윗은 임종을 맞는 침상에서 이르기를, 이 시편은 죄를 기억나게 하고, 밧세바와의 불륜을 하나님께 자백하며, 또한 자기 생애의 죄악들을 기억하게 하는, 기억의 시편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하실 때마다, 우리는 그 곤경 가운데서 하나님께 죄를 자백해야 하며 자신의 죄를 기억해 내야 한다. -크리스토퍼 러브.


머리말. 이 시편은 "기념케 하는 시"이다. 이는 우리에게, 좋은 일들이란 기억 속에 생생히 보관될 필요가 있음을, 그리고 종종 가만히 앉아서 회고하는 가운데 지나간 일들을 묵상하며 되돌아 봄으로써 좋은 일들이 망각 속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치는 듯하다. 다윗이 자기 자신의 기억 속에 상기시킨 사항들 가운데 첫번째이자 으뜸되는 것은 (1) '자신이 과거에 경험했던 시련들 및 구원들'이다. 하지만, 이 시편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항은 (2)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기억하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조명하신 인간 본성을, 이 시편보다 더 온전히 묘사하고 있는 시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내가 확신하건대, 여기 묘사된 내용은 신체상의 그 어떤 질병과도 부합되지 않는다. 그것은 문둥병과 매우 흡사하지만, 고대나 현대의 작가들에 의해 묘사된 그 어떤 문둥병과도 부합될 수 없는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사실인즉, 여기 묘사된 질병은 영적 문둥병이요 내적 질병이다. 다윗은 이 점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영적 문둥병을 상기하도록 만들고자 한다. 이 시편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세번째 사항은 (3) '수많은 우리 대적들'이다. 다윗은 이르기를, 그의 대적들이 그를 위해 올무를 놓았고,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해악을 끼치는 말을 했고, 또한 온종일 속임수를 꾸몄다고 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어떻게 하여 다윗의 대적들이 그렇게나 많았을까? 어떻게 그가 그토록 많은 대적들을 만들었을까? 그는 경솔하고 성급하거나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의 생애를 보면 그런 것 같지 않다. 그의 대적들이 생긴 것은 오히려 그가 거룩한 삶을 견지했던 까닭이었다. 그의 대적들이 그를 공격한 것은 그가 사악해서가 아니었다. 이 시편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가 선한 것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를 대적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곳을 평화롭게 만드는 것이지만, 첫번째 목표는 분쟁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더욱이, 이 시편은 우리에게 (4) '우리의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상기시킨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은 무엇이나 축복이며, 우리를 육신의 팔에 기대지 못하게 하는 것과, 특히 홀로 서려는 우리의 노력을 제지하는 것은 무엇이나 우리에게는 은총이다. -C. H. S.


시 38편 전체. 이 시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러하다:첫 부분에서 시편 기자는, 불평하는 가운데 점점 더 깊은 비탄 가운데로 빠져들며, 9절에서는 전능하신 은총의 팔에 갑작스럽게 붙들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위로와 위안이 절정에 달한다. -벤야민 바이스.


1절.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그분의 노로 나를 책망하시지 말라고 간청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요구가 아닌가? 이는 마치 그분이 노하지 않은 상태라면 나를 책망하셔도 된다는 식으로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 그분의 분노로 나를 징계하시지 말라고 기도하는 것은 무분별한 간청이 아닌가? 이는 마치 그분이 분노하지 않은 상태라면 나를 징계하셔도 된다는 식으로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가장 괴팍한 성격을 지닌 자들이라도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에 대해서는 잠잠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위대하며 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분이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들에게 잠잠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여기는가? 하지만 오 나의 영혼이여, 그분의 진노로 책망하시는 것과 그분이 노하실 때 책망하는 것이 동일한 것인가? 그분은 노하실 때 책망하실 수 있지만, 그분의 진노 가운데서 스스로의 감정을 억제하며 자제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분의 노로 책망하는 것은 그분의 진노에 매인 고삐를 푸신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진노에 매인 고삐를 푸신다는 것은 그 진노가 그분의 자비의 한계를 넘어섰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즉, 내가 그분의 진노의 공격을 당할 뿐 그분의 자비로 말미암은 구원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란 그 얼마나 비참한 상태인가! 그분의 인자하심이 내게 임한 그분의 진노를 제거하지 못할 상황은 그 얼마나 비참한 상태인가!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주의 자비로 인해 주의 책망을 멈추게 하소서. 주의 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의 회초리를 거두게 하소서. -리처드 베이커.


1절.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분노"와 "징계치"로 번역된 두 단어 모두 무게 있고 심각한 의미를 지닌 것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까지, 혹은 영혼과 육체를 영원한 흑암의 사슬에 속박시키는 것까지도 나타내는 표현이다. 성경에서 "징계치"에 해당하는 "야사르"는, 밧줄이나 사슬로 묶는 것을, 혹은 처형당할 사람을 족쇄나 수갑으로 채우거나 양손을 붙들어 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것은 예속과 속박 상태하에 두다가 마침내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르호보암이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왕상 12:11)고 말했을 때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분노"에 해당하는 "하마트"는 "심한 분노"(KJV 직역-역자 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한 분노로 말미암은 결과까지 시사한다. 이사야 선지자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의도된 의미가 바로 그러하다:"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으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매 그 사방으로 불붙듯하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사 42:25). 이는 하나님의 심한 분노라는 무시무시한 상태에 관한 언급으로서, 마치 불타는 아궁이 속에 빠진 듯하여 그 고통을 느낄 수조차 없을 정도의 상황에 처해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는, 습관적 범죄에 빠져 있음으로 인해 무엇이 우리를 시험에 빠트리는지도 모르는 상태를, 그리고 타서 재로 변한 까닭에 수분이나 거룩한 눈물이 모조리 메말라버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 어떤 선한 것도 자랄 가능성이 없는 상태를 암시한다. 한편, "하마트"라는 단어는 이보다 더 심각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독 그 자체와 파멸 그 자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구절에서 이 단어가 두 번 사용되기도 한다:"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시 58:4). 따라서 이 "심한 분노"란 영혼의 독을 암시하며, 지금 당장의 완고함뿐만 아니라 그러한 완고함의 연속을 암시한다. 또한 그것은 이생에서 개전의 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생에서도 영원히 돌이켜질 수 없는 상태를 시사하며, 이 땅에서 도무지 회개하지 않고서 죽을 뿐만 아니라 향후도 영원히 회개할 가능성이 없는 완악성을 암시한다. 따라서 다윗은 말한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의 '노로 책망신다면', 그것은 '심한 분노로 징계하심'이 될 것이다. 무슨 이유로 그분을 제지하겠는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삼상 2:25)라고 엘리는 말했다. 또한 다윗은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라고 간구했다(시 35:1). 그를 위해 조언하고 변호해 주실 분은 오직 여호와뿐이시며, 여호와께서는 재판관이자 분노하는 분이시다. -존 던.


2절.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먼저, 우리는 어떤 측면에서 그가 "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그 화살들은 다른 이들이 쏜 것이며, 그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을 향해 화살을 쏘지는 않는다. 둘째, 그 화살들은 빠르게 날아온다. 그가 그 화살의 속도를 임의로 정하지는 못한다. 셋째, 그 화살들을 눈으로 포착하기란 매우 힘들다. 날아오는 화살들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재빠른 눈과 각별한 주의 및 부지런함이 요구된다. 따라서 그것은 다른 사람의 손에 잡힌 화살이지 그 자신의 손에 놓인 것이 아니며, 날아갈 때는 신속하고, 또한 눈앞에까지 날아오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두번째로, 그 화살들의 수효가 많다. 한두 개의 화살을 피한다고 해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세번째로, 그것들은 그를 "찌른다." 그것들은 다윗에게로 향했다가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신속하게"(KJV 직역-역자 주) 찌른다. 화살들에 맞아 부상을 입어도 당장 치료할 수는 없다. 그는 그것들을 뽑아낼 수가 없다. 아울러 그것들은 신속하게 '그를' 찌르되 그의 전존재를 찌른다. 그의 몸과 영혼을, 그의 생각과 행동을, 그리고 그의 죄악과 선한 일들까지도 찌른다. 그는 자신의 모든 부분에 화살이 꽂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이는 화살을 쏘신 "손이" 그를 심하게 눌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꽂힌 화살과 그를 그토록 심하게 누른 손은 바로 하나님의 화살이요 하나님의 손이다. 따라서, 그 화살들은 귀한 효력을 지니고 있음에 분명하며 결코 헛되이 작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나름대로 위안을 함께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분의 것이며, 또한 그분의 화살이나 그분의 누르시는 손은 상처를 입히는 것만큼이나 신속하게 치유하시는 위로의 은총을 반드시 수반하기 때문이다. -존 던.


2절.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하나님은 우리의 끈덕진 간구를 항상 기쁘게 여기신다. 그리고 웃음을 거두고 찡그리실 때, 그리고 그분의 진노가 지속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러한 끈질긴 간구이다. 그분의 진노의 화살들이 그토록 신속하게 날아와서 나를 찌르는 상황에서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일 그분이 나를 과녁으로 삼고자 하셨다면, 그분은 다시금 화살들을 신속하게 뽑아 드실 것이다. 하지만 내게 꽂힌 화살들을 그대로 두시는 것을 볼 때, 나로서는 그분이 나를 자신의 화살통으로 삼고자 하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또한 그분이 그 화살들을 뽑으러 오시기 전에, 나는 나름대로 긴 안목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화살들은 신속하게 날아가며, 예리한 화살촉이 달려 있다. 그것들은 마치 석궁으로 쏜 것처럼 힘있게 날아간다. 나는 그 활을 시련의 활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분이 주시는 시련과 곤경이야말로 너무도 신속하게 닥치며 또한 너무도 깊숙이 파고들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결코 요동하지 않으리라"고 말할 때, 그분의 진노라고 하는 이 화살들이 내게 들이닥쳐 내 살을 신속하게 꿰뚫는다. 그래서 그것들을 쏘신 분 외에는 그 누구도 그것들을 뽑아내지 못한다. 그런즉, 오 하나님이시여, 주께서 진노의 팔을 펼치사 이 화살들을 제게 쏘셨듯이, 자비의 팔을 펼치사 그것들을 뽑으사 저로 하여금 주께 애가 대신 찬송을 부를 수 있도록 해주소서. 그리하여 징벌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용서를 통해서도 주의 권능을 보여 주소서. -리처드 베이커.


2절. "주의 살." 화살은 (1) 빠르고, (2) 은밀하며, (3) 예리하고, (4) 치명적인 무기이다. 그것은 피를 흘리게 하며 피를 마시고서 취하는 것으로도 묘사된다(신 32:42). 이 모든 특성들에 있어 곤경과 화살은 유사성을 보인다. ① 곤경은 종종 매우 신속하게 닥친다. 화살처럼 빠르게, 그리고 생각처럼 신속하게 닥치는 것이다. ② 곤경은 갑자기, 예기치 않게 닥친다.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화살이 날아오듯이, 곤경 역시 그러하다. 비록 욥은,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자신에게 임했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닥치기 전에 이미 그것을 예감했다. 하지만 대체로 곤경은 예기치 않은 손님처럼 들이닥친다.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때에 그것이 임한다. ③ 그것이 닥칠 때에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다. 화살 나는 소리를 듣기도 전에, 혹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이미 그것은 목표물에 날아와 박힌다. 화살은 조용히 은밀하게 그리고 눈에 띄지도 않게 날아가서, 사람에게 부상을 입힌다. 끝으로 모든 곤경은 예리하며, 그 특성상 치명적인 손상을 가한다. 곤경을 통해 유익을 얻는 것은, 그 자체의 속성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서이다. -조셉 캐릴.


2절. 여기 나오는 회개의 표현들은(1-4절)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한 사람의 입을 빌어 말씀하신 하나님의 성령의 말씀이다. 만일 우리가 다윗처럼 회개한다면, 우리는 그의 고백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여기 묘사된 고통들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것으로 언급된다. 죄에 대해 울부짖는 것은, 단지 그 죄가 범죄자에게 미치는 악영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무례를 범하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의 우선적인 생각은 여호와의 "노"와 "분노"이다. 그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화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화살이라는 점이다.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그의 육신이 도무지 건강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다. "사망에 이르게 하는 세상적인 슬픔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심령을 회개하게 하는 슬픔", 그것이 바로 진정한 뉘우침이다. -A Commentary on the Seven Penitential Psalms(A. P. F., 1847).


2절.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애굽이나 앗수르의 손이 아니다. 만일 그를 누르는 것이 그들의 손이라면, 그는 맞서 싸울 것이며, 무력과 책략을 통해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누르는 것은 "주의 손"이다. 사람의 타격이란, 그 팔의 힘과 기분 상태에 따라 약해질 수 있다. 이는 기드온이 자기 아들더러 미디안 왕들을 칼로 쳐죽이라고 말했을 때, 그들이 기드온에게 대답했던 바와 같다:"네가 일어나 우리를 치라 대저 사람이 어떠하면 그 힘도 그러하니라"(삿 8:21).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히 10:31). 이는 호머가 주피터의 손을 가리켜 '아무리 찬사를 돌려도 지나치지 않는 손'이라고 지칭했던 것과 유사하다. 혹자는 이를  '근접할 수 없는 손' 혹은 '힘으로 저항할 수 없는 손'으로 읽는다. 하늘의 모든 신들도 주피터의 손으로 치는 한번의 타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분의 손은 죄악에 대해서만 타격을 가하신다. 죄가 강렬한 상황에서는 그분의 타격도 심하다. -토머스 애덤즈.


3절. "주의 진노······나의 죄······." 저는 마치 두 개의 해머 아래에 놓인 모루와 같은 처지입니다. 그 둘 중 하나는 주의 진노이고 다른 하나는 저의 죄입니다. 이 둘 모두가 끊임없이 나를 내려칩니다. 주의 진노의 해머는 내 육신을 쳐서 성한 곳이 없게 하고, 내 죄의 해머는 내 뼈를 쳐서 펑안함이 없게 합니다. 주의 진노나 저의 죄 둘 다가 제 육신을 치기도 하고 뼈를 치기도 하지만, 주의 진노는 더욱 민감하게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제 살을 치며, 저의 죄악은 보다 완고하다는 점에서 제 뼈를 칩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죄는 모든 곤경을 야기시키는 두 가지 원인들이다. 하지만 사실 일차적 원인은 죄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마치 삼손이 자기 머리 위로 무너뜨린 집처럼, 오직 죄로 말미암아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끌어당길 때에만 우리에게 임한다. -리처드 베이커.


3절. "내 살······내 뼈······." 나는 내 살이 성하지 않다는 점을 통해 하나님이 내게 노하심을 안다. 왜냐하면 만일 그분이 노하시지 않는다면 내 살이 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노하신 손이 끊임없이 내 살을 치신다면, 어찌 그것이 성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내 뼈가 평안하지 않다는 점을 통해 내 마음속에 죄가 있음을 안다. 왜냐하면 만일 죄가 없다면 내 뼈가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죄가 죄책감이라는 벌레와 함께 끊임없이 뼈를 갉아대고 있다면, 어찌 그것이 평안할 수 있겠는가? 혹자는 우리 몸의 뼈란 우리에게 죄가 있는지의 여부에는 전혀 좌우되지 않으며, 죄가 있다고 해서 상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죄의 집요한 특성과 해롭기 짝이 없는 그 독성을 보라. 그것은 내 살을 뚫고 들어와서 뼈까지 불편하게 만든다. 나는, 내 살에 여러 가지 결함이 있음과 그 때문에 그것이 성하지 못함도 당연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뼈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살의 감각이라는 불꽃에 연료를 공급하는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그것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 뼈는 살을 지탱시켜 주며, 적어도 이 역할을 통해 내 살의 결함에 대해 부속물 역할을 한다. 뼈는, 마치 기계의 부속품처럼, 살 자체가 당하는 징벌을 함께 당할 수밖에 없다. -리처드 베이커.


3절.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이생에서의 그리스도인은 마치 수은과 같다. 수은은 그 자체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쉴 틈이 없다. 우리는 결코 평안하지 않으며, 라켓 위에 놓인 공이나 파도 위의 배와 같은 처지이다. 죄가 있는 한, 우리는 마치 수은과 같이 쉴 틈이 없다. 하나님의 자녀는 줄곧 움직이며 평안하지 못하다······우리는 이 땅에서 늘상 서두르며 지속적인 불안정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의 삶은 때로는 물이 빠졌다가 또 때로는 물이 차는 조류와 같다. 이 땅에는 안식이 없다. 그 이유인즉, 우리가 중심에서 이탈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중심점에 이르기까지는 항상 움직인다. 그리스도께서 영혼의 중심이 되신다. 나침반의 바늘은 북극을 가리킬 때까지 계속 흔들린다. -토머스 왓슨.


3절. 거지들이 어떻게 구조와 도움을 얻는지를 배우라. 당신의 상처를 들추어내 보이며, 당신의 결핍된 부분을 알리고, 당신의 모든 곤경을 드러내며, 또한 자신의 처한 상황을 미화하지 말라. 거지들은, 자신이 더 비참하게 보일수록 더욱 많은 동정을 사고 더 많은 도움을 얻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바다 같은 자비에 비하면 가장 너그러운 사람의 자비도 단지 물 한 방울에 불과하다. 또한 사람들 가운데는 누가복음 10:30-32의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 및 레위인과 같은 이들이 많다. 그들은 벌거벗은 채 부상당하여 반죽음을 당한 사람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치며 그에게 동정심을 갖거나 구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신의 곤경을 깨닫고 부르짖으며 도움을 호소하는 자들을 항상 긍휼히 여기신다. 욥(욥 6, 7장)과 다윗(시 38:3)과 히스기야(사 38:10), 그리고 다른 성도들이, 어떻게 여호와 앞에 불평을 토로하였는지 읽어보라. 아울러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어떤 은총을 부어 주셨는지를 살펴보라. 그리하면 그와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좋은 본보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한 격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우치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공허함과 부족함을, 그리고 우리를 도울 다른 이들의 무능력함을 깨달을 때 진정 겸손하게 그분의 은총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윌리엄 구지.


4절.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다윗은 왜 자신의 기도가 격렬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에게 닥친 곤경이 왜 그토록 심각한지에 대한, 그리고 왜 하나님의 진노가 끊이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힌다. 그 이유인즉, 그 모든 해로운 특성들과 격렬함과 난폭함 그리고 완고함 등이 자신의 죄악 속에 함께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격심한 탐욕 가운데 격렬하게 죄를 범했고 피흘리기까지 난폭하게 죄를 범했으며, 오래도록 무감각한 평안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죄를 범했던 것이다. 이 모두는 본문에서 두 종류로 간추려진다:첫째, '죄악이 그의 머리에 넘칠 지경이다.' 둘째, '그것은 무거운 짐 같아서 감당할 수가 없다.' 그의 죄는 너무도 크고 무거워서 또한 지탱할 수 없을 정도이다. 성 어거스틴은 죄에 대한 이 두 가지 묘사를, '무지'와 '어려움'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먼저, 다윗은 무지했으며, 자신을 삼키려고 심연으로부터 밀려오는 죄악의 조류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죄의 물결이 그의 머리 위를 덮쳤다. 그는 그 물결이 자신에게 덮치기 전까지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했으며, 자신이 특정한 죄악을 범했을 때에도 결국 자신의 머리 위로 그 죄악이 넘쳐 주위를 온통 에워싸기 전까지는 그것을 분간하지 못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성 어거스틴은 '무지'라고 표현했다. 즉, 그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 주의하지도 않고 그것을 고려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어거스틴은 '어려움'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회복이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 아래에 잠긴 자는 공기가 없어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며, 어디 닿을 데도 전혀 없고, 발을 딛고 설 땅도 없으며, 또한 붙들 나뭇가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회복이란 너무도 힘든 일이다. 한편 모세는, 이스라엘이 구원받고 애굽 군대가 수장당한 후에, 이 두 가지 곤경을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출 15:5)라고 노래했다. 그들의 죄악에 대한 징벌이 그들의 머리 위로 넘쳤으며, 물이 그들을 누르고 압박하여 그들은 심연의 바닥에 누워 있을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애굽인들과 다윗 그리고 우리는 너무도 많은 죄를 지은 까닭에 그 죄악의 물을 헤엄쳐 건널 수 없으며, 일단 가라앉으면 다시는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 -존 던.


4절.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아무리 힘이 센 사람이라도 감당하지 못할 짐이 있다. 비록 삼손은 가사의 성문들을 가볍게 옮겼지만, 거대한 집이 무너지자 그 아래에 함께 깔려 죽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태어난 이래로 지금까지 허다한 죄를 범해왔으며, 마치 삼손이 가사의 성문들을 짊어졌듯이 오랫동안 그 죄의 짐을 졌다. 하지만 죄라는 집 전체가 내 위로 무너지면, 그 큰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깔려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만일 하나님이 그분의 모든 진노에도 불구하고 나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신다면, 그리고 그분의 모든 분노에도 불구하고 징계의 손을 거두시지 않으신다면, 나 역시 그 짐에 깔려 뭉개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리처드 베이커.


4절. 하나님의 거룩한 자들의 타락 상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매우 아름다운 얼굴에 혹은 가장 깨끗한 복장에 때 묻은 얼굴은 너무도 부조화스럽게 보인다. 죄의 추잡성에 관해 온전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또한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겸손해지며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고 또한 우리 자신을 더욱 철저히 살피는 법을 배운다. 그리하여 그와 같은, 혹은 더 심한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게 된다(갈 6:1). -헤르만 비치우스(Hermann Witsius, D.D., 1636-1708).


4, 5절. 본문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심각한 죄성을 보기 시작한다. 어떤 죄책감은 우리의 긍지나 자존심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도 있다. 우리는 그러한 죄책감 속에서 매우 진지하게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을 더 잘 알게 되고 또한 자신의 사악함에 대해 혐오감을 느낄 때에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비열함과 배은망덕함이 자신을 압박할 때에는, 그리고 자신을 혐오스럽게 여기기 시작하고 5절과 같은 탄식을 토로할 때에는 상황이 다르다. 한때 우리의 상처는 자기 연민의 대상이었고 그 상처에 대해 친구들에게 동정심과 치료책을 호소할 수 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우리 내면 속에서 감지되는 비열함과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썩었다." 우리는 이제 그것들을 감춘다. 이는, 만일 그것들이 노출되면, "우리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이 그것을 멀리할 것이기" 때문이다(11절).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제외하고 모든 이들에게는 침묵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낙하시리이다"(15절).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복되신 예수님은, 그 앞에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하는 문둥병자를 외면하지 않으시며, 손을 내밀어 그를 잡고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마 8:2, 3)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주 이외에 다른 누구를 의지할 수 있겠는가? -메리 덩컨.


5절.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이 표현은 매우 상징적인 듯이 보이며, 육신보다는 마음의 질병 상태를 시사하는 것 같다. -윌리엄 월포드.


5절.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오 여호와여, 저는 너무도 어리석은 나머지 도움을 구하지도 않고 제 상처를 그렇듯 오래도록 방치하였음을 알겠나이다. 마치 장사한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의 시신이 부패하였듯이, 이제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납니다. 주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이 모습을 보고 절망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저는 주께서 제 상처를 치료하시는 힘과 제 어리석음을 바로잡을 지혜를 갖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무덤 속의 나사로를 향해 주께서 나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무덤은 더 이상 그를 붙들지 못했습니다. 제 상처가 아무리 썩어 문드러졌다 하더라도, 주의 은총이 임하면 그것이 더 이상 방해 요인으로 작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비록 제 임의대로 처신하다 치료를 지체시키고 말았지만, 주의 치유 권능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주께 자비와 권능이 모두 있음을 알므로, 결코 절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리처드 베이커.


5절.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여기서 상처란 문자적으로 육체의 상처를 가리킬 수 있다(6절의 표현도 이러한 의미를 시사하는 듯하다). 이 경우에 그는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회초리에 맞아 부르트거나 부은 종창(원문상의 의미가 이러함)이라고 보거나, 혹은 2절에서 언급된 "살"로 말미암은 상처로 보는 셈이다.  또는, 상징적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닥치게 하신 다른 어떤 곤경들을 쓰라리고 짓무른 상처에 비교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이 표현은, 상처가 오래 지속되는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으며, 그로 인해 자각되는 예리한 고통과 슬픔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혹자는 이를 죄로 인해 야기되는 수치심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아서 잭슨.


5, 6절. 영적 죄책감은 구원의 확신에 있어 불가피한 것이다. 먼저 자신의 병을 자각하고 나서야, 비로소 치료책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님이 권능을 지니신 자신의 아들을 계시하고자 하실 때마다, 또한 복음으로 '기쁜 소리'가 되게 하고자 하실 때마다, 그분은 사람의 양심으로 하여금 죄의 짐을 자각하고 그 아래에서 신음하게 만드신다. 그리고 내가 확신하건대, 어떤 사람이 죄의 짐 아래에서 고투를 벌일 때 그는 불평으로 가득할 것이다. 성경에는 죄의 짐 아래에서 불평했던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사례들이 허다하게 기록되어 있다. 혹자는,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라고 부르짖는다. 또 다른 사람은,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왔사오니"(시 88:3)라고 외친다. 그런가 하면, "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광명에 행치 않게 하셨으며"(애 3:2)라고 신음하는 자도 있다. 사람이 그런 상황하에서 부르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 무거운 짐을 불평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질 수가 없다. 화살이 자신의 양심을 찌름을 느낄 때 그는 그 고통으로 인해 신음하기 마련이다. 벌레가 자신의 신체 주요 부분을 갉을 때, 그는 그 벌레의 해독스러운 이빨에 대해 불평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화를 내신다고 느낄 때, 그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대적이라고 비통한 심정으로 불평하기 마련이다. 그런즉 영적 불평은 영적 삶에 대한 표시이다. 하나님도 그것을 그렇게 여기신다.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정녕히 들었노니"(렘 31:18). 이는 탄식하고 신음할 어떤 일이 에브라임에게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의 죄악은 증오의 악의를 품고서 그를 압박해 왔으며, 그의 영혼을 괴롭혔다. 그는 그것을 달콤한 음식을 먹듯이 혀로 굴릴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꿰뚫어 보시는 눈으로 그것을 드러내셨고 손으로 징계를 가하셨다. -존 필폿(John. C. Philpot, 1842).


6절. "내가 아프고." 원문상으로는 "내가 고통으로 몸을 비틀고"가 더 적절한 의미이다. 즉, '적절한 상황이나 과정에서 이탈되어', 고통 중에 처한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몸을 비튼다'는 뜻이다. KJV 난외주의 '뒤틀린', '찡그린'이란 번역은 히브리어 원문을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리처드 맨트.


6절.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이제 나는 나 자신에게 짐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지치고 탈진하며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금처럼 절실하게 깨달은 적이 없다. 내가 다른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차라리 사람이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현재 처한 상태만 벗어난다면 얼마나 기쁠까! 이는 내 죄악이 사함받기란, 그리고 다가오는 진노로부터 구원받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줄곧 내 머리 속을 맴돌기 때문이다. -존 번연, Grace Abounding.


6절. 죄의식의 굴레하에, 지옥의 위험 가운데, 탐욕의 힘 아래에, 하나님에 대한 적의를 품은 상태에,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낯선 분으로 여겨지는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자신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질까? 이러한 상태를 자각한다면 흥청망청 떠들고 노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그가 자신을 보고서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겠는가! 그는 초장에서 먹고 노니는 짐승들의 행복을 부러워한다. 어떤 사람이 두꺼비를 보고서 울었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 하나님이 그를 혐오스러운 두꺼비로 만드시지 않고 탁월한 피조물인 인간으로 만드신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동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본문과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도 두꺼비를 보고서 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자신의 처지를 두꺼비보다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아무런 죄의식도 없고 하나님의 진노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고 탐욕의 지배를 받지도 않는 두꺼비와 자신이 뒤바뀌었으면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의 처지는 그렇듯 비참하다. -자일즈 퍼민(Giles Firmin, 1617-1697).


7절.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여기서 "허리"라는 말은, 게제니우스(Gesenius)에 의하면, 콩팥 근처의 허리 부위로서 비계가 붙은 곳을 가리킨다. "열기가 가득하고"로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 "칼라"(hlq)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열매나 곡식을 굽거나 볶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사용된 형태는, 그을리거나 태우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구절 전체는 '콩팥을 태운다'는 뜻과 유사할 것이다. 5절 내용으로 미루어 보건대, 불에 탈 경우를 고려한다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사항이긴 하지만, 여기 사용된 단어가 발진이나 궤양을 시사하지는 않는다. -알버트 반스.


7절. "열기." 우리는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죄의 사악함에 대해서는 과장할래야 할 수가 없다. 죄악이란 저주받게 할 정도로 심히 부패한 것이다. 그것은 역병의 상흔으로, 문둥병으로 영혼을 뒤덮는다(사 1:5, 6). -윌리엄 플러머.


8절. "내가 피곤하고." 문자적으로는 '내가 마비되었고'이다. 죽은 시신처럼 싸늘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 절에 언급된 타는 듯한 열기와 아울러 극심한 고통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 -스튜어트 퍼론.


8절.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죄가 있는 곳에는, 마음의 불안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불안한 마음은 항상, 쇠약한 몸과 마음의 낙담, 그리고 괴로운 부르짖음 등과 같은 비참한 결과를 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부르짖으려면 힘이 있어야 할텐데 어떻게 쇠약한 상태에서 부르짖을 수 있을까? 따라서 이 부르짖음은 큰 음성이라기보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짐승 같은 행동을 취할 때에는 사람의 음성보다는 짐승의 소리를 내려는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는가? 아니면 그것은, 비록 몸이 연약하지만 마음으로 발할 수 있는 영혼의 부르짖음일 수도 있다. 혹은, 마치 양초가 다 타들어갈 때 가장 큰 불꽃을 내듯이, 가장 쇠약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토하는 부르짖음일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떠하든지간에, 이 점은 분명하다:마음이라는 불행한 땅은 저주받은 죄의 씨를 받아들여 사람의 몸과 영혼 속에 그렇듯 비참한 열매들을 맺게 한다. 그와 같은 씨를 그토록 많이 받아들인 내가 어떻게 그 열매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는가? 오 추잡한 죄악이여, 나는 너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너를 피할 수도 있으며, 내가 너를 극심하게 미워하는 만큼 너를 쉽게 물리칠 수도 있다. 그런즉 내 몸의 쇠약함이나 마음의 낙담 혹은 괴로운 부르짖음 등에 대해 불평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내 모든 지체 속에 깃든 행복한 평안을 온전히 누려야 한다. 오 하나님, 그 평안은 주께서 우리의 첫 조상에게 복된 유산으로 주신 것입니다. -리처드 베이커.


8절. "마음이 불안하여." 다윗은 마음속에 고통이 모여드는 것을 느꼈으며, 그래서 부르짖었다. 그리스도인이 올바른 행로에서 이탈할 때, 하나님이 주된 목표로 삼으시는 표적이 바로 마음이다. 그분이 다른 외적 부분들을 쳐서 깊은 상처를 입히실 수도 있지만, 이는 단지 마음속에 구멍을 내시기 위함일 뿐이다. 마음이란 그에게 근본적인 상처를 입히는 죄악이 자리잡는 곳이다. 양심에 의해 지펴진 불은 눈과 혀와 손을 상하게 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의 눈으로 보게 하고 절망적인 말을 하게 하며 또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불꽃의 열기는 주로 내면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영혼이라는 화로 속에 들어 있다. 우리가 그의 눈과 말과 행동을 통해 볼 수 있는 것들은, 단지 그 용광로의 보다 아래쪽 구멍들에서 나오는 부분적인 불꽃과 광채들일 뿐이다. -니콜라스 로키어(Nicholas Lockyer).


8절. "신음하나이다." 쓰라린 영혼의 고통 가운데 있는 진실한 회개자가 오래도록 죄악 속에서 지내왔던 자신의 생활을 마음 밑바닥으로부터의 신음과 한숨 없이 청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음과 한숨과 흐느낌은 행복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은총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숨결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서,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말할 수 없는 탄식을 발하시며, 우리 마음속에 회개와 사랑을 통해 이러한 신음이 일어나게 하신다. 이 회개와 사랑의 거센 물결은 회개하는 자의 마음을 터트리고 나올 수밖에 없으며, 눈과 입으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지고, 입에서는 한숨과 신음이 나온다. 이것들은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불길로 인해 표출되며, 그리하여 이 애가는 말과 문장으로 표현된다. -장 밥티스트 엘리아스 아브리용(Jean Baptiste Elias Avrillon, 1652-1729).


9절.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소원은 고통을 동반하며, 그 소원이 피조물을 향한 것일 때에는 특히 그러하다. 이는 우리의 소원이 좌절되거나 우리가 바라는 일들이 지체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까이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우리의 소원은 종종 침묵한다. 혹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소원은 침묵하는 법이 없으며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다. 그리고 그분은 그 음성을 들으신다. 다윗은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노출된 영혼은 감미로울 것임에 분명하다. 사람이 품는 갖가지 소원들은 그 성취에 대한 확신을 좀처럼 그에게 보장해 주지 못한다. 사람이 이러저러한 소원을 품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한 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는 영혼은 자신의 소원 성취를 보장받은 셈이며, 현재적으로 그분을 기뻐함은 물론이고 장차 온전히 그분을 기뻐하게 될 것이다.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시 145:19). -조셉 사이먼즈(Joseph Symonds).


9절.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은밀한 죄로 인한 은밀한 눈물은 거룩한 심령의 아름다운 탄식이며, 상한 심령을 치유하는 진통제이다. 하나님은 한숨 섞여 제대로 들리지 않는 말을 잘 이해하시며, 그것을 상한 심령의 흐름이자 호흡으로 해석하신다. 우리의 모든 어리석음은 그분 앞에서 그것을 감추려 하듯이, 우리의 모든 비애는 그것을 드러내려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제단 위에 드린 건장한 뿔과 발굽을 지닌 황소보다 우리 영혼의 찬양이 그분을 더욱 기쁘시게 할 것이다. 거룩한 비탄은 육욕적인 슬픔을 몰아내고 영적 기쁨을 자아낸다. 그것은 성도의 마음을 뒤흔들어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은총을 간구하게 한다. 거짓된 심령은 그런 간구를 진정으로 드리지 못한다. 이러한 내적 슬픔은 공개적인 수치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러한 영혼을 영적 대적들에 의해 짓밟히도록 결코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다. 그런 영혼들은 이미 스스로 겸비해진 상태이다. 성도들의 겸비함 속에는 은밀한 소망을 향해 열려 있는 문이  있다. 이는 그 겸비함에 대한 고귀한 약속들 때문이며, 또한 특히 강건케 하시는 은총에 의해 장래의 죄악이 방지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참된 회개의 원천이듯이, 성도의 겸비함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게 하는 매력이라 하겠다. -사무엘 리(Samuel Lee).


10절. "내 심장이 뛰고." 다윗이 본문에서 사용한 동사는 '여기저기로 옮기거나 배회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어떻게 할지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낙심 상태로 인해 야기되는 초조함이나 동요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마음의 동요를 느끼면, 그들은 사방으로 좌충우돌하며 도무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다. -존 칼빈.


11절.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처지가 너무도 비참한 까닭에, 나는 전적으로 버림받은 사람처럼 홀로 남겨졌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은 화약 터지는 소리가 처음 나자마자 뒤로 튀어 날아가버리는 파편과 같은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멀리 떨어지고자 하는 것은 나라기보다는 나의 상처이다. 만일 내 상처가 없다면, 나는 쉽게 그들의 동정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상처를 보고는 견딜 수 없으며, 그들의 눈길은 너무 부드러워 그것을 차마 보지 못하지만, 그것을 치유할 정도로 자상하지도 못하다. 그들이 내 상처를 기꺼이 보고자 한다 해도 가까이 와서 그것을 치유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그들은 나보다는 나의 상처를 더 두려워하는 듯하다. 하지만 "나의 친척들이 멀리" 선 것은 나의 상처 못지않게 나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멀리 선 것은 서로간에 맺었던 우정의 법칙을 어긴 것이며, 나의 친척들이 멀리 선 것은 자연적인 정의 법칙조차 어긴 것이다. 내가 도움이나 지원을 얻기는커녕 이성의 법칙과 우정의 법칙 그리고 자연의 법칙 등마저 모조리 깨트림을 당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닌가? -리처드 베이커.


11절.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제가 거짓된 친구들에게 버림을 당했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승리자가 됩니다. 주께서 대적의 편을 드시는 것처럼 보이는 때에도 주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한번 사랑하신 자를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주께서 멀리 계신 듯이 보일 때에도 사실은 가까이 계십니다. 나는 거짓된 친구들의 배신 때문에 그리고 내 친척들의 비겁 때문에 이러한 슬픔을 느낍니다. 내게 있어 그들은 달콤한 향기를 발산하는 장미라기보다는 찌르는 가시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애정의 증거는 행동에 의해 보여집니다. 친척과 친구들의 이름이 내 귀에 들리지만, 그들의 행위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말씀이 곧 행위이신 주께로 피합니다. 저는 주의 도우심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앤드류 리벳(Andrew Rivet).


13절. "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그가 말하고 싶지도 않은데 왜 들어야 하겠는가? 그가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예전에 알았는데 왜 말해야 하겠는가? 논쟁을 벌이면 그들을 자극할 뿐이며 예전에 이미 죄악을 범한 그들을 더 심한 죄악 가운데로 몰아넣을 뿐이라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는 그들을 더욱 난폭하게 만들기보다는 침묵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다윗이 이 경우에 귀머거리와 벙어리로 지내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을 안 것은 분명 그의 위대한 지혜를 반영한다. 하지만 그 점을 알고서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는 것은 훨씬 더 위대한 일이었다. 만일 우리가 최선의 길이라고 아는 것을 항상 실행에 옮길 수 있다면, 또한 만일 우리의 이성이 명하는 바를 우리의 의지가 실행에 옮길 준비를 갖추고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리하면, 우리는 현재 앞에 놓여 있는 수많은 바위들을 밀쳐버릴 수 있을 것이며, 현재 범하는 여러 가지 잘못들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적인 의미에서는,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된다는 것이 사실 큰 장애요 결함이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또 인위적으로 그렇게 행동할 때에는, 그것이 큰 능력이며 나아가 온전한 면모이다. -리처드 베이커.


13절. "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고." 여기서 영감받은 기자는 두 가지 이유에서 자신을 귀머거리와 벙어리에 비교한다. 먼저, 그는 대적들의 거짓되고 사악한 판단에 의해 너무도 시달리고 있었던 까닭에 심지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입을 열 수조차 없었음을 암시한다. 둘째로, 그는 하나님의 긍휼을 보다 수월하게 얻고자 하는 다짐의 일환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내할 것을 단언하고 있다. 훌륭한 분별력과 더불어 그와 같이 온유하고 차분한 태도는 곤경에 처한 결백한 자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보장해 준다. 아울러 그것은 참된 경건의 표시이기도 하다. -존 칼빈.


14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 진정 자신을 아는 자만이, 침묵 가운데 견디는 시련과 은밀한 슬픔 그리고 감추인 기쁨 등을 이해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슬픔을 앎으로써, 자기 자신의 성품의 드러나지 않은 깊이를 자각함으로써 간절하되 이제껏 만족되지 못한 갈망에 사로잡힌 영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과 자신을 둘러싼 자들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다. 그들의 내면 세계를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신성한 동정심과 부드러운 배려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설령 은밀한 슬픔이 내 마음을 부단히 갉고 있으며 또한 찬양하는 나의 음성을 흔들리게 만든다 할지라도, 내 형제의 눈이 아래로 처지거나 그 마음이 무거워진 것을 이와 동일한 이유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에게 기쁨이 결여되었다고 해서 그를 정죄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지만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예하지 못하느니라"(잠 14:10)는 말씀을 기억하라. 영혼의 잠잠한 숨결은 우리의 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은밀하게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은 우리의 눈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은총 가운데서는 각 심령 주위로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슬픔을 기억함으로써, 마치 애곡하는 자들 사이를 지나가듯이 자신의 음성을 부드럽게 하고, 자신의 겉모습을 온유하게 하며 또한 자신의 걸음을 조용히 옮기라. -제시 쿰스(Jessie Coombs, Thoughts for the Inner Life, 1867).


15절. 깊은 구덩이로 내려가고자 하는 사람은, 그 속으로 곤두박질하거나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로 훌쩍 뛰어내리지 않으며, 지탱목이나 다른 확실한 곳에 밧줄을 고정시키고 서서히 아래로 내려간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더듬어 내려갈 때에도 그리스도께 자신을 붙들어매야 한다. 또한 너무 아래로까지 내려가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자신의 비참한 상태로 말미암은 공포와 어둠에 압도될 지경에 처할 때, 마귀에게 끌려 내려가지 않도록 지옥의 문 앞에서 너무 오래 지체하지 말아야 하며 새로워진 믿음의 행동을 통해 자신을 감아 올리고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해야" 한다(히 6:18). -토머스 콜(Thomas Cole, Morning Exercises, 1627-1697). 


17절.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시련과 곤경 속에서 쇠약해졌다는 뜻이다. 마치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후에 다리를 절었듯이(창 32:31). 헬라어 역본에는 "내가 매를 맞게 되었고"로 번역되어 있다. 즉, 나의 죄를 인하여 교정과 징벌의 아픔을 겪었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갈대아역은 "내가 재난을 당하게 되었고"로 옮긴다. -헨리 에인즈워스.


18절. 플리니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가족들은 자기 몸에 해당 가문을 나타내는 독특한 표시를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라 부를 수 있는 개인적인 죄악들을 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자신의 죄악들을 올바로 자백하고자 한다면, 원죄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죄를 가장 비통하게 여겨야 한다. 다윗은 이렇게 결심한다:"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다윗은 "내 죄악을 고하고"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라고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백의 날에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삼상 7:6)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물을 길어와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참회의 표시로 붓는다. 우리는 죄를 자백함에 있어, 마음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욥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려야" 한다(욥 16:20). 또한 다윗처럼, 우리의 눈물이 "시냇물같이 흘러야" 한다(시 119:136). 그렇다.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자신의 "머리는 물이 되고 그 눈은 눈물 근원이 되기를" 소원해야 한다(렘 9:1). 하지만, 설령 우리가 눈물을 쏟아내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한 방울이라도 흘려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최소한, 우리가 눈물을 뿌릴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죄를 인하여 한숨이나마 토해 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경건한 슬픔으로 인한 상한 심령만이 참된 자백에 이를 수 있다. -나다나엘 하디.


20절.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 사탄의 본거지에 타격을 가하는 것은 담대한 시도이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순응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화평하게 지낼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방식대로 행하는 한 그들은 우리와 불화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경건한 삶을 통해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면, 그들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낀다. 또한 그들의 죄를 질책하고 사탄의 계교를 드러내어 공격하는 일은 참으로 담대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잠자는 개는 조용하다. 그러나 그 개를 흔들어 깨우면, 개는 갑자기 돌이켜 짖으며 물려고 한다.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그들은 당연히 화를 낸다. 더욱이 그들을 질책할 경우에는, 그들은 더없이 수치스럽게 여긴다. 사탄과 그 하수인들에게 돌려져야 할 모든 증오가 하나님께로 돌려진다. 이는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을 통해 그들을 질책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책하는 가운데 자신의 죄에 대해 분노를 불태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질책하는 자들에 대해 노를 발한다. -윌리엄 스트러더.


22절. "주 나의 구원이시여." 탄원자의 믿음은 이제 승리의 믿음이 되었다. -프란츠 델리취.




힌트


머리말. 기억하는 법. 거룩한 기억. 신성한 회고의 유용성.


1절. 하나님의 진노의 책망. (1) 거듭해서 들을 만하다. (2) 두려워할 이유가 있다. (3) 진지하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 -벤자민 데이비스(Benjamin Davies).


1절. 죄가 이 세상에 야기시키는 악한 결과들. -블런트(J. J. Blunt).


1절. “주의 노”는 가장 쓰라린 것이다. 왜 그것을 면하고자 간구하는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면할 수 있을까?


2절. 하나님은 자신의 수많은 자녀들을 예리하게 징계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들을 사랑하시며, 적절한 때가 이르면 그들에게 필요한 은총을 베푸신다. -토머스 윌콕스.


3절 하반절. 죄는 ‘불안’을 야기한다. 그것을 치유하시는 분만이 평안을 주실 수 있다. 


4절 상반절. 죄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눈으로 보기에는 기쁘나, 마음을 낙심시키고, 뼈를 불안하게 하며, 죄인의 머리 위로 넘친다.


4절. 각성한 죄인의 자백.


4절 상반절. 죄. (1) 무겁다:“짐.” (2) 매우 무겁다:“무거운 짐.” (3) 너무도 무겁다:“감당할 수 없나이다.” (4) 거기 눌려 꼼짝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그 짐을 예수께서 대신 지신다.


5절. “우매.” 죄의 우둔함. 사람이 죄악 가운데 행하는 모든 일들은 자신의 우둔함을 드러낸다. (1) 죄와 더불어 희롱함. (2) 죄를 범함. (3) 계속 죄악 가운데 지냄. (4) 그것을 감춤. (5) 죄를 변명함. -벤자민 데이비스.


6절. 죄에 대한 자각. 그 슬픔, 그 깊이, 그리고 그 지속성.

6절.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1) 합당한 이유도 없는 애곡. (2) 합당한 슬픔. (3) 효과적으로 경감되는 슬픔.


9절. 하나님의 자녀의 여러 가지 소원들. 하나님은 표현되지 않은 그들의 마음까지 파악하신다는 사실. 그분이 그들에게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는 확실성.


9절. 낙심한 영혼에게 위안의 근원이 되는, 그분의 전지하심.


13절. 지혜, 위엄, 그리고 침묵의 힘과 그 어려움.


15절. 소망의 결실인 기도. 소망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통해 강화된다.


17절. 넘어질 지경에 처한 자. 그의 출신, 그의 연약함, 그를 지탱시켜 주는 것들, 그의 치유, 그의 일생, 그리고 안전한 죽음.


18절. 탁월한 참회의 자백.


18절. 은총의 쌍둥이 자녀:자백과 참회. 이 둘간의 상호 계시 및 상호 반응.


18절 하반절. 그처럼 슬픈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그러한 슬픔을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애통해 하는 자에게 유익을 가져다 준다.


19절. 악의 세력의 무서운 힘과 부지런함.


22절. 시련을 당하는 믿음, 떨리는 믿음, 부르짖는 믿음, 붙잡는 믿음, 그리고 승리하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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